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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만화뉴스] 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

1.2005년.하하하 우리 손을 잡고 넘어오세요!<토지공사><농촌진흥청><지적공사>#2.>>전북혁신도시<<#3.라는 것이 전북혁신도시의 미래입니다.오오[토공 등 공공기관 13개 전북 온다](2005년 6월 25일자)#표지.기금운용본부와 무지갯빛 전북#4.2009년.......(토공주공 합병, LH 출범)[토주공 통합법 통과전북혁신도시 '빨간불'](2009년 5월 1일자)#5.2011년.......(LH 경남 일괄이전)[LH 경남 일괄이전..전북엔 국민연금공단](2011년 5월 13일자)패키지가 더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6.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아, 걱정하지 마세요. 대신 연기금 400조 원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을 드리겠습니다.#7.그거 확실합니까?그럼요. 또 삼성도 새만금에 투자한다고 안 합니까, 하하.#8.2012년.......(새누리당, 기금운용본부 공사화 추진)[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전북유치 실낱희망 '가물'](2012년 10월 25일자)#9.그래서 전북 이전은 어떻게 되는 거죠?아, 예정대로 이전할 겁니다. 보세요, 현수막도 걸었잖아요.[기금운용본부 이전 놓고 또 공방](2012년 12월 12일자)#10.2013년.[기금본부 2016년까지 전북 이전](2013년 11월 28일)#11.이번엔 진짜겠죠?물론이죠!#12.2015년.......(공사화에 반대하던 최광 이사장 퇴임, 문형표 이사장 취임)[결국 물러난 최광전북 정치권 발끈](2015년 10월 28일자)#13.(facepalm)#14.2016년.그래서 기금본부 이전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전북이전은 이미 국민연금법 27조(사무소)의 규정에 따라 확정된 상태며, 올 연말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전주사옥이 완공되면 본사가 차질 없이 이전할 계획입니다.(실제로 한 말)[국민연금공단 문형표 이사장 "올 연말 기금본부 전북 사옥 완공차질없이 본사 이전"](2016년 6월 13일자)#15.법으로 확정된 건데 쉽게 바뀔 리 없죠.휴, 괜히 걱정했네요!#16.2016년 10월.......[기금본부 전주이전 재검토 주장 파문](2016년 10월 11일자)#17.잠깐#18.~계속~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그림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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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6.10.19 23:02

[문화&공감] 순창 '책놀이 네 자매'

군대에서 편지가 와도 읽기만 하고 답장을 못해서 한이 되어 이제라도 씁니다. 희출이 낳아 업고 있을 때 보고 싶어도 어른들 무서워 제대로 보지 못한 당신의 모습이 생각납니다.부부인데도 어른들이 보고 있어 신발도 나란히 못 벗어놓고 저녁에 잘 때쯤 이야기 하는 게 전부였죠. 조금만 더 살았으면 우리 부부 여행도 다니고 얼마나 좋았을까요. 좋은 옷 한번 못 입어보고 그렇게 가신 것이 내 생전에 한이 됩니다.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 그때는 오래오래 함께 살아요. 다음 생에서도 당신과 부부의 연을 맺고 싶습니다.순창 인계의 세룡마을에 사는 조분님 할머니의 사연이다.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 하는 애틋한 사랑의 편지다. 특별난 사연이 적힌 편지는 아니다. 그러나 조분님 할머니에게는 편지를 이렇게 쓸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 짠하게 한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남편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담아 남편에게 편지 한 장 써보는 게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글을 몰라 남편 생전에 그리하지 못하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오래 된 뒤에야 비로소 남편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어쩌면 평생 맺힌 한을 풀지 못할 뻔 했다. 살다보니 어쩌다, 아니 행운의 기회가 불쑥 찾아 온 것이다. 그 역할을 해준 이들이 바로 순창의 책놀이 네 자매다.△의기투합, 책놀이 2급 자격증 따내책놀이 네 자매는 굳이 나이순으로 호명해보자면, 왕언니 황호숙(52) 씨, 둘째 김원옥(45) 씨, 셋째 이영화(43) 씨, 그리고 막내 박인순(40) 씨, 이렇게 넷이다. 황호숙 씨는 농사꾼이자 초등 독서논술 교사다. 열린순창 기자 일을 잠시 하기도 했다. 김원옥 씨는 구연동화와 전래놀이 지도사이며 독거노인 돌보미 일을 한다. 이영화 씨는 마트를 운영하다 접고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으며 과거에 유치원 교사를 한 경력이 있다. 박인순 씨는 순창문화원에 근무하고 있다.이들은 지역아동센터 등지에서 각자 활동하다 의기투합해 3년 전 문화지원사업 활동을 위해 책놀이 2급강사 자격증을 따내는 열성을 보이며 책놀이 네 자매로 뭉쳤다. 그렇게 해서 순창지역 몇몇 마을의 할머니들과 만나며 책놀이 여행을 해오고 있는데, 조분님 할머니의 편지 쓰기도 그 과정에서 나온 결실이다.△온갖 재능과 끼로 열정소통책놀이 네 자매는 순창문화원의 이름으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전북문화관광재단에서 주관하는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지원사업을 3년째 수행해오고 있다. 그 핵심 프로그램이 책놀이와 그림책 읽기다. 이들은 한 마을의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1년 동안 매주 1회 총 30회 정도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교육은 단순히 참여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고 마는 텍스트 읽어주기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다.무엇보다도 이들은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놀이 교육활동에 대해 자긍심도 강하고 매우 열정적이며 프로그램 내용에 따라 역할 분담이 잘되어 있으면서도 넘칠 정도로 소통을 많이 하며 상호협동적이다.네 자매 중에서 주강사 역할을 하는 황호숙 씨는 할머니들 한 분 한 분 다 박물관이죠. 그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어 책놀이 여행을 함께 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이 할머니들의 끼를 살려내는 데 구연동화와 전래놀이에 능한 김원옥 씨나 게임, 미술, 노래, 율동에 능한 이영화 씨가 한몫들을 단단히 한다. 기획하며 실무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하는 박인순 씨도 교육 진행에 몸을 아끼지 않는다.△덜덜덜, 쿵쾅쿵쾅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관찰해보면, 그림책 읽기를 하더라도 마을의 생활세계와 연관시키고 전래 민담 따위들과 결부시켜 삶 속의 이야기로 재창조하면서 즉흥적인 상황극으로 나아가게 유도한다. 참여하는 할머니들의 숨겨진 재치와 재능이 발현되게끔 한바탕 신나는 문화 감수성(말, 글, 액션, 그림 따위들)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도록 한다. 한글 배우기나 시 쓰기, 이야기하기, 노래하기, 손 유희나 율동 따위들을 통합적으로 배치하는 것은 그저 재미지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 할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오랫동안 억눌린 삶의 감정들을 드러내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하길 바라서다.그 결과 무지렁이였던 할머니들은 자기 이야기를 써나가고 어느새 시인이 되어 무한한 감동을 준다.나는 이름을 쓸 줄 몰랐다 / 이름을 쓰려고 / 연필을 잡으면 / 손은 덜덜덜 / 가슴이 쿵쾅 쿵쾅 / 이름을 못 쓰니 창피했다 / 한글 공부를 하고 / 이제는 이름을 쓸 수 있다 / 박 순 자 / 내 이름 석 자만 봐도 / 기분이 좋다△할머니들, 자기 이야기를 써 나가다구림에서 책놀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박순자 할머니가 쓴 시다. 할머니는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자아를 발견하였고 자기 이름을 되찾았으며 잃어버린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주체로서 자기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회가 비록 짧은 시간일지언정, 평생을 통해서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해본다는 점에서, 할머니들에겐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이렇게 책놀이 네 자매는 순창의 마을들을 돌고 있다. 재작년에는 구림의 몇몇 마을에서, 작년에는 인계의 세룡마을에서, 그리고 올해에는 유등의 유촌마을에서 20명 가량의 할머니들을 밤마다 모아놓고 이렇게 충동질을 해왔다. 구림에서의 활동은 당시 군수에게도 감동을 크게 주어 할머니들의 작품을 군청에 전시할 정도였다.△한, 열공, 그리고 감동할머니들의 못배운 것에 대한 한이 늙어서나마 열공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딜 가나 다 같은 모양이다. 낮에 일하느라 고단한 몸이 되었어도 밤이 되면 공부하러 회관으로 모여든다. 유촌마을 할머니들은 더 열성적이다. 교육시간이 되어가는 해질 무렵부터 들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하나둘씩 마을회관으로 모여든다.그 무덥던 8월의 어느 날은 영화 〈수상한 그녀〉를 함께 보고 할머니들이 청춘사진관에 들어가게 된다면 언제 적으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었다. 강의숙 할머니는 5살로 돌아가 공부를 하고 싶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 기술도 배우고 공부를 많이 하고 싶다고 했다. 서야실 할머니는 공부가 원이 돼서 꿈에서도 공부를 한다. 7살로 돌아가고 싶다. 왜냐하면 그래야 학교를 가기 때문에라고 했다. 최봉순 할머니는 3살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받고 어린이집, 초등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했다.책놀이 네 자매의 작은 노력들에 반하여 할머니들은 어느새 마음 짠한 감동을 선사해준다. 이름 석 자 쓰기 위해 너무 오래 세월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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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8 23:02

신임 진홍 정무부지사 "중앙정부 경험 살려 전북도정 성과 창출 혼신"

지난 10일 취임한 진홍(58) 전북도 정무부지사는 “민선 6기가 뿌린 씨앗을 거둘 때“라며 “중앙정부에서 쌓았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전북도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재직시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총괄했던 진 부지사는 탄소산업을 예로 들며 “전북이 경쟁 우위에 있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진 부지사는 “전북에서 처음으로 공직을 맡게 돼 부담이 크다”면서도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고향에서 일하면 보람도 더 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진 부지사를 만나 도정의 현안과 과제, 정무부지사로서의 포부 등을 들어봤다.-전북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전주가 고향이라 자주 왔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지만 부담도 큽니다. 정무부지사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고, 고민이 많았었는 데 부친께서 권유하신 것도 있어서 내려왔습니다. 고향 발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북의 경제 여건이 어려워 일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지만, 그럴수록 잘하면 더 보람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앙부처에서만 30년 가까이 공직에 몸 담았습니다. 최우선했던 가치가 무엇입니까.다른 사람보다 스스로에게 더 엄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부하 직원 등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항상 스스로를 먼저 돌아봤습니다.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연스럽게 일도 잘 풀렸습니다. 취임사를 통해 말했듯이 조직 구성원간 신뢰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내겠습니다. 멀리 조감하는 능력에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눈을 길러 도정의 변화를 선도하겠습니다. 또, 항상 협업하며 함께 하는 직장문화를 만들겠습니다. 이젠 똑똑한 리더가 이끄는 시대에서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융합하고 협업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정무부지사의 방문은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일을 하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나 고민을 나누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열린 정무부지사가 될 것입니다.”-전북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산업 기반 자체가 열악합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산업자원부에서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했었는 데, 지금은 이런 정책들이 많이 완화됐습니다. 이 시점에선 전북이 경쟁 우위에 있는 분야를 집중 육성해야 합니다. 전북에는 농업 분야에서 관련 연구기관들이 다수 있고, 산업 쪽에서는 자동차가, 신산업 분야에서는 탄소산업에 대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농·산업 기반들을 육성해 지역발전을 꾀해야 합니다.”- 앞으로 도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시는지요. “실질적으로 국제교류·협력을 비롯해 언론·전북도의회 대응 등 대외 업무를 맡습니다. 특히 도의회와 언론은 도민들의 의사가 표출되는 곳입니다. 도민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 도민의 의사에 맞는 정책이 수립될 수 있도록 힘을 쏟겠습니다. 이를 위해 각 유관기관간 진정한 소통이 필요합니다. 또, 도정 현안별로 빠른 업무 파악을 통해 지지부진하거나 동력을 상실한 사업의 문제점을 진단할 것입니다.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현장의 문제점과 대안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또,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도정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 -도정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분야가 무엇입니까.“새만금입니다. 새만금개발은 국책사업으로 정부에서 맡아 추진해야 할 국가의 중요한 미래사업인 데, 내부 개발이나 기업 투자 유치가 지지부진합니다. 정부에서 새만금 사업을 핵심 정책으로 삼아 개발에 속도를 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선 정치력에 더해 의사결정자의 인식도 변해야 합니다.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내부적으로 새만금 투자 유치에 걸림돌이 되는 문제를 살펴보고, 투자 활성화를 위한 해법을 모색하겠습니다. 중장기적으로는 정부가 계획한 대로 개발이 될 것이라는 ‘신뢰’를 투자자에게 심겠습니다. 탄소나 자동차산업 등 전북의 핵심사업의 추진과정상 애로사항에 대해서도 점검할 것입니다.”-탄소법 제정을 계기로 전북 탄소산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됐습니다. “내년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탄소소재 융복합 기술개발 등 종합발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전북 핵심사업이 포함될 수 있도록 차질없이 대응하겠습니다. 또, 탄소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과제나 새로운 사업을 발굴해 정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에 관련 위원회나 태스크포스(TF)팀과의 협업이 중요한 과제로 보입니다.”-인구 감소로 인한 지방소멸 위기가 대두됩니다. 복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지방소멸은 국가적 문제인 만큼, 중앙정부와 지방의 공조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출산, 고령화에 대비할 수 있는 대책 뿐만 아니라 지역균형발전으로 지역의 경쟁력을 키워주는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지역에서도 차별화된 기업 유치, 생산성 향상, 저출산·고령화 대책 발굴 등을 위해 역량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홍 정무부지사는] 경제·산업분야 중앙 요직 거쳐전주 출신인 진홍 정무부지사는 전주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행정고시(25회)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그는 전북도 수습사무관, 총무처 사무관, 산업자원부 지역산업균형발전기획관,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지식경제부 정책기획관 등을 두루 거쳤다. 지식경제부 무역위원회 상임위원을 끝으로 공직을 떠난 그는 2011년 12월부터 4년간 한국생산성본부 회장을 지냈다.경제·산업 분야 중앙부처 요직을 두루 거친 진 부지사는 산업통상자원부 내 탄소산업 전담부서 설치를 비롯한 신성장 동력 산업 육성, 각종 국제대회 및 기업 투자 유치, 새만금 개발 촉진 등 민선 6기 도정 핵심 업무를 챙길 것으로 예상된다.진 부지사는 “신뢰를 바탕으로 실현 가능한 대안을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 최고의 생산성을 거둘 것”이라며 “반환점을 돈 민선 6기 전북도정의 성과 창출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진 부지사는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는 창의적 도정을 만들 것이다”면서 “중앙정부에서 쌓았던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전북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그러면서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마음가짐이 남다르다”며 “기존 사업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정 역점 사업을 점검하겠다”고 말했다.진 부지사는 대대로 고창에 세거한 여양 진(陳)씨로, 부친은 전북일보 사장을 지낸 진기풍 선생이다. 또 진의종 전 국무총리, 진념 전 경제부총리,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 진동섭 전 청와대 교육과학문화수석 비서관 등이 일가다.

  • 기획
  • 최명국
  • 2016.10.17 23:02

[사진으로 비교해 보는 우리 동네] 전북대학교 69년

#표지.[사진으로 비교해 보는 우리 동네] 전북대학교 69년.#1.전라북도의 지역거점 국립대, 전북대가 생일을 맞았습니다.#2.1947년 10월 15일 도립 이리농과대학이 설립 인가를 받으면서 출발한 전북대.1951년 10월 6일, 전주 명륜대학군산대학과 통합, 전북대학교라는 이름을 얻습니다.#3.개교 69주년을 맞은 전북대, 전북일보의 사진 데이터베이스에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4.1965년 2월 21일, 제14회 졸업식 모습입니다. 지금의 예술대학 미술관 앞이군요.#5.지금은 이런 모습입니다. 그다지 변하진 않았지요?#6.이듬해 2월 25일 열린 제15회 졸업식입니다. 지금의 기초교양교육원이네요.#7.지금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담쟁이 넝쿨이 건물을 뒤덮었네요.#8.같은 건물을 배경에 두고 1974년 1월 16일에는 이런 사진이 찍혔습니다.남성고 동문회에서 수험생들을 격려하는 모습입니다.#9.1979년으로 넘어갑니다. 그해 11월, 계엄령에 따른 휴교 조치가 풀릴 때의 당시 정문입니다.#10.지금은 정문 구조물의 모양도 조금 바뀌었고, 1979년엔 없던 건물도 들어서 있네요.#11.1985년, 당시 총학생회장 선거는 교내외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것은 85년 4월 16일 촬영된 사진입니다.#12.같은 자리를 찾아보려 했는데, 광장이던 곳에 이제는 나무가 많이 들어서 있어서 건물이 보이지는 않네요.#13.격동의 현대사. 민주화를 이뤄냈지만, 군부의 위세는 여전했고 학생운동 또한 끊이지 않았습니다.1989년 11월 26일 89 민중대회가 열린 전북대 구정문.#14.같은 자리에서 열린 1990년 2월 26일, 전북대 구정문에서 벌어진 3당 합당 반대 시위입니다.#15.26년 뒤의 같은 자리입니다.#16.21세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16년 전만 해도 원서를 직접 제출하는 방식이었네요.2002년 12월 14일, 삼성문화회관에 마련된 원서 접수창구입니다.#17.같은 자리인데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죠?#18.내년이면 개교 70주년을 맞는 전북대. 개교 7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을 조직해 미래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합니다.전라북도와 함께해 온 전북대, 그 새로운 미래를 기대해 봅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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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6.10.14 23:02

[참여&소통] 늘어나는 노인학대

전통적으로 경로효친을 중시했던 우리 사회에 노인학대가 급증하고 있다. 지난 2004년 노인복지법 개정으로 노인 학대를 전담하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설치되고, 공적 지원도 이뤄지고 있으나 매 맞는 노인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이다.△부시럭 소리만 나도 두근두근 불안해우선 전북지역에서 일어나는 노인 학대 사례를 보자.# 사례1 : 전주에 사는 김모 씨(65)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 임모 씨(88)에게 욕설을 하고 손찌검을 하는 등 못살게 굴었다. 보다 못한 이웃이 112에 신고를 했다. 출동한 경찰과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일단 분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어머니 임씨를 쉼터에 모셨다. 임씨는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슬하에 아들 하나만을 키워왔다. 경찰 등이 찾아 갔을 때 그래도 내 아들 뿐이라며 아들의 알코올 치료와 함께 장가를 보내고 싶다고 아들을 염려했다.# 사례2 : 남원에 사는 이모 씨(80)는 걸핏하면 부인 박모 씨(74)를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돈을 벌어다 줄 땐 말을 잘 듣더니, 70 넘어 부터 부부관계를 거부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부인 박씨는 젊었을 때부터 남편의 잦은 외도로 지쳐 있었다. 10년 이상 우울증 약을 복용해 왔다. 또 평소 잘 씻지도 않고 너무 자주 부부관계를 원해 싫었다.이들은 전북노인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상담 사례다. 학대 피해 노인들은 밖에서 부시럭 소리만 나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마음이 항상 불안하다고 하소연한다.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5 노인학대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해 전국의 노인 학대 신고건수는 1만1905건으로 2014년 1만569건에 비해 12.6%가 증가했다. 실제 학대사례는 3818건으로 2014년 3532건에 비해 8.1%가 늘었다. 전북의 경우는 760건의 신고건수 중 학대사례는 207건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2014년 노인실태조사(3년마다 실시)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 10명 당 1명이 학대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변했다. 경찰이 추산한 노인 학대 피해자는 64만명에 이른다.△가해자는 친족이 압도적으로 많아노인학대가 일어나는 곳은 가정이 85.8%로 압도적이다. 다음은 양로시설, 요양시설 등 생활시설이 5.4%, 병원이 2% 정도다. 최근 사회적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생활시설내 노인 학대의 경우 대부분 시설종사자에 의해 발생한다.가해자는 아들이 36.1%로 가장 많고, 배우자 15.4%, 딸 10.7%, 며느리 4.3% 순이다. 거의 대부분이 친족에 의한 학대인 셈. 피해자를 보면 여성노인이 71.4%로 남성노인 28.6%에 비해 훨씬 많다.학대 유형은 정서적 학대가 37.9%로 가장 비중이 높고 신체 학대(25.9%), 방임(14.9%)이 뒤를 이었다. 노인 학대의 절반 이상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치매 환자도 전체 학대 노인의 27%에 달했다.원인분석 결과 분노, 자신감 결여, 폭력적 성격, 사회적 고립 등 개인의 내적 문제(33.8%)로 노인 학대가 가장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혼재혼부부갈등스트레스 등 개인의 외적 문제(19.3%), 노인 부양 부담에 따른 학대(11.1%), 노인에게 의존하는 경제력(11.1%) 등도 노인 학대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됐다.최근 들어 노-노학대가 크게 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2014년 1526건에 비해 2015년 1762건으로 12.8%가 증가했다.이들 노인 학대를 다루는 노인보호전문기관은 중앙 1곳, 지방 29곳 등 모두 30곳이다. 전북은 2곳으로 전주(전북)가 2004년, 군산(전북서부)이 2014년에 설립됐다. 전북지역에서 노인학대로 인해 격리시켜야 할 노인들이 쉴 수 있는 쉼터는 전주 1곳이 유일하다. 그것도 5명을 수용하는 게 고작이다.△조기대응, 가해자피해자 동시 치료해야노인학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정부는 예방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오는 12월 30일 시행 예정인 개정 노인복지법은 노인학대 범죄자의 노인 관련 기관 취업을 제한하고 노인학대 상습범과 노인복지시설 종사자의 학대 행위를 가중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신고의무자 직군도 8개에서 14개로 늘리고 신고 불이행 과태료를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또 국회에서도 불효자 방지법(효도법)을 추진한 바 있다.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은 부모로부터 재산을 증여받은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재산을 환수하는 민법개정안과 존속폭행의 경우 부모가 고소하지 않거나 처벌을 원치 않아도 처벌할 수 있는 형법개정안이 핵심이다. 일본은 2006년부터 고령자 학대 방지법을 시행하고 있다.노인학대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첫째, 조기에 적극 대응이 중요하다. 암도 조기에 발견하면 완치할 수 있듯 노인학대도 조기에 대응해야지 은폐되면 상습화되고 고질화돼 고치기가 어렵다. 둘째, 피해자의 경우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리기 때문에 치료시설 확충이 필요하다. 셋째, 가해자에 대한 치유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경제적 형편과 정신질환 치료, 교육 등 근본적 치유책이 중요하다.학대노인 전화는 전국적으로 1577-1389이다. 여기서 8은 빨리, 9는 구해주세요라는 뜻이다.● 전북노인보호전문기관 정미순 관장 "공공시설 학대 갈수록 심각, 피해자 문제해결 의지 관건"노인학대는 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전북노인보호전문기관 정미순 관장(56)은 우리 지역은 노인학대가 발생했을 때 사법처리보다 인정에 이끌려 가해자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최근 들어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피해자 본인의 신고율이 높아져 다행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양로원과 요양원 등 공동생활시설에서 노인학대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은 문제라고 한다. 발생건수가 많지 않으나 보호자가 공공시설에 맡긴 것이기 때문에 파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학대 예방을 위해서는 피해 노인 스스로 문제 해결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어려움 중의 하나다.이들 노인들은 나만 죽으면 해결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인식개선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학교나 노인보호시설, 경로당 등의 커리큘럼에 노인유사체험을 비롯한 인권교육을 넣어야 하는데 협조가 어렵다고 토로한다.또 전북의 경우 전북노인전문보호기관이 도내 전 지역을 맡아 오다 2014년에 군산에 한 군데 더 생겼지만 타지역과 비교해 기관수를 늘리던지 아니면 증원을 바랐다. 피해노인의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개입하고 홍보를 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쉼터 역시 광역자치단체별로 1곳에 불과하고 최대 4개월 머물 수 있어 지원이 필요하다. 이들은 마음의 상처가 깊어 심리치료, 물리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것.그런 가운데서도 1박2일 가족캠프 후 손잡고 다시 찾아오는 가족을 보면 흐뭇하다고 한다. 은행을 다니다 사회복지를 공부한 정 관장은 2004년 삼동회에서 기관을 위탁받아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관장을 맡아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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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3 23:02

[문화&공감] 문화예술교육단체 '띄움'

군산 원도심 골목골목을 불쑥 파고든 초가을바람,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바람을 와락 품에 안은 군산 원도심. 죽은 듯 고요한 군산 원도심은 지난밤 거친 바람에도 흐트러짐이 없다. 초가을바람에 바짝 몸을 붙이고 걸어본다. 햇살에 반짝이는 내항 물빛에 취하고, 그 길 끝에 움직임 교육을 중심으로 타 예술장르와 융합된 형태의 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단체 띄움을 만나 진정한 쉼도 얻는다.△ 소소한 이야기로 예술꽃 피다초가을 하늘 빛 빼닮은 지붕아래 군산 원도심 골목에는 오가던 사람들의 반백 년 이야기가 담겨있다. 할머니의 추억, 어머니의 추억, 그리고 놀이의 추억까지. 번잡하고 거창하지 않은 소소한 우리의 삶 기억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렇듯 문화예술교육단체 띄움(대표 이주연, 군산시 월명1길3 클래시움 상가 302호 ARTPLAY)은 문화예술이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공감한다. 그리고 아직 우리에게 어럽게 느껴지는 문화 또는 예술을 친숙한 감성적 언어로 전달하고 있다.띄움은 2012년 설립되어 무용이라는 장르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육이 아닌 감수성의 회복이다. 이는 올해 프로그램에서 더 잘 드러난다. 2016년은 부처간협력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을 상상과 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전남북 22개의 지역아동센터를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전북문화관광재단이 함께하는 지역특성화 교육지원사업(골목시장의 다시찾은 봄)과 꿈다락 토요문화학교(위풍당당 놀이터)를 통해 시장 상인과 중고등학생, 그 가족과 함께 군산지역에서 신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공연예술, 무용교육, 기획과 프로그램 연구를 통하여 더 많고 풍성한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몸을 이용해 지역 이미지 가꾸기공간 운영과 기획 등 전반적인 방향을 잡는 것은 이주연 대표다. 오랫동안 공간 운영을 꿈꿨던 그는 군산 원도심 영화동 본가를 오가던 중, 월명동에 무용하기 좋은 넓은 건물이 비어 임대한다는 광고를 발견하고 덜컥 공간을 매입하여 공간운영까지 하고 있다. 근대역사속의 기념비적 건물은 아니지만 월명산이 보이는 널찍하게 트인 데다 천장이 높고 밖이 훤이 보이는 큰 창문으로 공연 워크숍 등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월명동이 근대역사의 다양성과 함께 호흡하는 골목길 동네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월명동 이곳에서 진행된 공연, 전시 이벤트에 참여한 관객 중에는 관심사가 비슷한 지역주민들이 많았지만, 이주연 대표는 지역 주민에게 월명동에 전문적인 교육의 장소로 또는 대중과 예술가 모두에게 쉼표가 될 공간으로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이 대표는 공간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장르 실험을 좋아하지만 꼭 그렇게만 가진 않으려고 해요. 올 2016년 지역의 이야기와 함께 내가 때어난 곳 군산, 그리고 내가 뛰어 놀았던 곳 영화동을 중심으로 청소년 들과 함께 몸을 이용하여 지역 이미지를 창작해볼까 생각도 합니다. 그리고 주민들이 편하게 와서 보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함께 구성하고 꾸려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평범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꿈이 만날 때이처럼 띄움은 무관심이 만연한 도시에서 정(情)을 공유하는 곳이며, 그곳에선 누구나 공동체가 주인이고, 곧 예술가이기도 하다. 목수가 만드는 작품의 결처럼, 여문 손끝에 머무는 사진가의 감성처럼, 그들의 손끝에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하다.5년째 이어지는 띄움의 방향이 꾸준히 유지되며 느슨하지만 단단한 관계를 운영진 내부에서 그리고 참여자들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거창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통과 상생을 찾는다는 것 답을 구하지 못할 일인지 모르지만 여기 띄움은 꾸준히 서식지를 만들고 누군가 잃어버린 상생을 찾도록 함께할 것이다.이주연 대표는 무언가를 배워야하며, 공부해야 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한다. 무언가와 함께 더불어야 또 다른 예술의 법도 배운다고 알고 있다. 사는 내내 소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일상생활이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루하루 길을 걸으면서 사물을 관찰하면서, 열정과 사뿐히 걷게 되면 내가 희망하고 서로서로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훗날 아이들의 기억 속에 띄움이라는 곳이 단순히 교육하는 곳이 아니라 문화로 소통과 공감이 확산이 돼 소소한 추억으로 떠올리길 바랍니다. 지역성에 기반한 지역 사회와의 교류 프로그램 때문에 이제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군산에 문화예술교육 혜택을 주민들이 이제 알아채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핵심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저변을 넓히고, 단순히 문화교육을 즐기는 것이 아닌 직접 참여하고, 창작하는 과정적 요소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고, 그 모습을 띄움에서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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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11 23:02

개교 70주년 준비하는 이남호 전북대 총장 "70년의 성장·100년의 성숙, 명품 브랜드 창출부터"

전북대는 오는 15일 개교 69주년 기념일을 맞는다. 내년이면 지역 거점대학으로서 70년의 역사를 기록한다. 전북대는 그동안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토대로 긴 호흡 속에 중단 없는 성장,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창조적인 명품 브랜드 창출과 가장 한국적인 캠퍼스 조성 등 ‘성장을 넘어 성숙’을 지향하는 대학의 비전도 구체화하고 있다. 개교 7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변화와 도약을 이끌고 있는 이남호 총장을 만나 대학의 현재, 그리고 미래 비전을 들어보았다. - 최근 QS와 타임스 고등교육 등 글로벌 대학평가기관의 세계 대학평가에서 연이어 좋은 성과를 내면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같은 성과가 있기까지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대학 평가의 가장 중요한 지표는 연구와 교육 여건입니다. 교수들의 수준 높은 연구와 학생들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대학평가에서 부산대에 이어 국립대 2위라는 성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대학은 학생 1인당 교육지원비로 지난해 1633만 원을 썼습니다. 이는 서울대를 제외한 국립대 중 가장 많은 것으로 학생 등록금의 4배에 달합니다. 정부 재정지원사업을 거의 다 유치했기에 가능한 투자였습니다. 정부 재정지원사업을 통해 교육과 연구에 투자하고, 이같은 투자를 통해 여러 평가 지표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다시 재정지원사업에 선정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취임과 함께 ‘모범생을 넘어 모험생을 키우는 대학’이라는 슬로건으로 새로운 인재 브랜드를 제시했습니다. 그동안의 성과를 소개해 주신다면.“모험생은 스스로 일을 찾아 주변 사람과 협력하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추진하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의미합니다. 우선 학생들이 이같은 대학의 비전에 대해 공감하고 스스로 역량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학생들이 속속 나오고 있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정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의 공감대가 확산된 만큼 학생들을 해외에 파견해서 외국어와 함께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오프 캠퍼스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 가장 한국적인 캠퍼스, 친환경 생태·경관 캠퍼스 조성 청사진을 밝혔는데,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요.“예산은 상당부분 확보했습니다. 대학의 하드웨어를 바꾸는 부분이어서 설계와 시공까지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업이 완료되면 대학에 큰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우선 대학 정문에서 옛 정문∼덕진공원 구간의 인도가 숲으로 바뀌고 인도를 학교 안으로 조성하는 공사가 추진됩니다. 이는 경계를 허물고 지역·시민과 하나가 되겠다는 의미로, 국내에서는 최초의 시도입니다. 또 캠퍼스와 건지산 사이에 4차선 도로가 지나가는데 이 곳에 생태통로를 만들 계획입니다. 아울러 한옥 정문 신축사업, 분수대 전통정원 조성사업, 그리고 박물관 앞 옛 연못 복원 계획도 있습니다. 대학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한옥 정문은 내년에 상량식을 갖고 2018년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명품 캠퍼스 조성 사업을 통해 대학에 큰 변화가 예상됩니다. 이 사업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인가요.“대학의 브랜드 창출입니다. 대학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브랜드가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대학에는 아직 없습니다. 각종 평가에서 우리 대학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게 평판도와 인지도입니다. 브랜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북대만이 할 수 있고, 그리고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자는 생각에서 가장 한국적인 캠퍼스, 생태·경관 캠퍼스 조성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대학은 생태자원이 잘 갖춰져 있고 지역 전통문화 자원도 풍부합니다. 이같은 자원을 활용해서 말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연상되는 전북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생각입니다.”- 내년 개교 70주년을 맞습니다. 기념 사업의 의미와 방향을 설명해 주시죠.“ ‘70년의 성장, 100년의 성숙’이라는 슬로건으로 개교 7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미 학칙 기구로 개교 70주년 기념사업추진단을 조직했습니다. 기념사업은 대학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대학과 지역사회의 역량을 결집해서 미래 100년을 향한 포부와 비전을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대학의 역사를 조명하고 또 이를 새로 세우는 과정입니다. 학문탐구와 인재양성 등 우리 대학이 가야 할 100년의 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전통도시와 캠퍼스의 조화 방향도 제시할 생각입니다. 도전과 모험, 봉사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국제 교류·협력사업도 추진합니다. 이밖에 각종 학술행사와 출판, 지역민과 함께하는 공연 등 다채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의 위기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대학의 입학 정원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에 대한 대책은.“무엇보다 외국의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유학생 관리를 위해 단과대학으로 가칭 ‘국제종합대학’ 신설 계획을 마련했습니다. 조만간 교육부에 신청해서 승인이 나면 2018년부터 운영할 계획입니다. 모든 유학생들을 국제종합대학으로 입학시켜 1년간 한국어 교육과 함께 전공탐색 기회를 갖도록 하고 2년 째부터 학과를 선택하도록 하는 시스템입니다. 유학생들이 대학과 학업에 제대로 적응하도록 돕자는 취지이며, 국내 대학 최초의 시도입니다.” - 대학과 지역사회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전북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굳이 외국 대학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대학은 지역의 중요한 상품입니다. 전북대의 연구·교육 인프라와 위상은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니며,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명품 대학이 있는 도시를 만드는 일, 도민의 관심과 성원이 있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학이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전북대, 캠퍼스가 달라진다이남호 전북대 총장은 취임 직후 전통문화 도시에 걸맞는 ‘가장 한국적인 캠퍼스’, 그리고 지역의 생태자원을 활용한 ‘생태·경관 캠퍼스’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밝혔다. 대학의 역사를 복원하고 나아가 전북대만의 명품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취지다.대학과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대규모 한옥 정문과 한옥 구조의 국제컨벤션센터 신축, 중앙광장 조성, 건지산 도시숲 생태통로 조성 사업 등이 청사진에 포함됐다. 이같은 청사진은 그동안의 꾸준한 준비과정을 거쳐 개교 70주년을 맞는 내년 가시적 성과를 낼 전망이다. 대학 측은 올해 국비를 포함한 관련 사업 예산을 상당 부분 확보했고, 부족한 금액은 기부를 통한 발전기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다. ◇가장 한국적인 캠퍼스 조성사업△국제컨벤션센터 신축 - 총사업비: 187.6억원 - 용도: 컨벤션홀, 세미나실, 전시실, 레스토랑, 카페 등 - 규모: 지하 3층 지상 2층(6,000㎡) - 구조: 지상-한옥, 지하-철근콘크리트△한옥 정문 겸 큰사람교육개발원 신축 - 총사업비: 60억원(국비 35억원) - 용도: 교수학습개발센터, 교육과정개발 평가관리센터, RC교육센터, 인성예절교육실 등 - 규모: 지상 3층(900㎡) - 구조: 한옥+철근콘크리트△법학전문대학원 신축 사업 - 총사업비: 177.4억원 - 규모: 지하 1층, 지상 8층(9,000㎡) - 구조: 한옥+철근콘크리트△개교 70주년 기념 중앙광장 조성 - 총사업비: 49.8억원(국비 10억원) - 규모: 12,000㎡ - 사업내용 : 누각, 분수, 상징조형물, 보도 조성 및 차도 개선◇아트 그린 캠퍼스 조성사업△녹색예술의 거리(신정문∼구정문) 조성 - 총사업비: 6.5억원 (국비·지방비) - 사업내용: 예술의 거리 및 커뮤니티 공간, 유학생 콘테이너 매장, 산책로, 환경조형물, 가로등 설치△무장애 나눔길 조성 - 사업내용: 구정문~덕진공원간 보도 및 녹지를 활용한 무장애길 조성 - 총사업비: 8.6억원 신청(녹색자금:6억, 전주시:2.6억)△건지산 도시숲 생태통로 조성 - 사업내용: 전주천∼덕진호수∼건지산을 연계하는 생태녹지축 조성 - 위치: 학군단~ 건지산 사이 도로 - 총사업비: 40억원△박물관 앞 연못 복원 - 사업비: 3.6억원(2017년 국비 확보) - 규모: 1,000㎡ - 사업내용: 연못조성, 조경석, 조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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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6.10.10 23:02

[글Pic] 서해 훼리호 침몰 23주기 … 우리는 안녕할까요?

지난 주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를 강타하고 지나간 태풍 차바는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남겼다. 10명이 사망실종됐고, 건물 수백채가 파손됐다. 자동차 2000여 대가 침수 등의 피해를 당했다. 올해 태풍은 공교롭게도 한반도를 피해갔다. 대신 태평양 먼 바다에서 발생한 태풍은 대만중국과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들 국가에 큰 피해를 주었다. 10월로 접어들면서 올해는 태풍이 없다고 안심하는 사이 태풍 차바가 한반도를 할퀴고 말았다.9월 경주에서 발생한 지진 충격도 그렇다. 한반도에서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했다는 역사기록이 있었지만, 일본 열도에서 발생하는 지진들처럼 강력한 지진에 대한 기록이 한반도에 없었던 탓일까. 경주 지진 전까지 한국인들은 지진 공포에서 다소 자유로웠다. 설마 속에서 살았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지 않은가.지난 9월12일 저녁 7시 44분과 8시32분 경주시 남남서쪽 9㎞ 지역에서 진도 규모 5.1과 5.8의 지진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경주 일대는 물론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진동이 느껴졌고, 경주 일대의 경우 민가와 문화재 등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갑작스런 지진에 국민들은 일순간 지진 공포에 떨어야 했다.경주 일대는 문화재 뿐만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가 집중된 탓에 이번 경주 지진보다 강도가 조금만 센 지진이 실제 일어난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상의 피해가 예상되는 만큼 국민적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정부가 고베지진, 동일본지진, 후쿠시마 쓰나미 사태, 쓰촨성 지진 등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지진 빈도와 규모, 피해 정도 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대비해 왔다면, 경주 지진 공포는 훨씬 덜했을 것이다.하인리히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하인리히는 미국의 한 보험회사 직원이었는데, 그의 업무는 사고 관련 통계 정리였다. 어느날 그는 산업재해 중상자 1명이 나오기 전에 똑같은 원인으로 경상을 입은 사람이 29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동일 원인으로 부상당할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 300명 있었다는 사실도 끈질긴 조사 끝에 알 수 있었다. 하인리히가 밝혀낸 중요한 사실은 큰 사고가 어느날 갑자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징후 끝에 대형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이다.태풍과 지진 등 천재지변이든, 교통사고나 선박침몰, 건설현장과 제조공장 산업재해 등 사람의 실수, 무사안일이 빚어낸 인재든 각종 대형 사고는 느닷없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풍과 지진에 미리 대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대비가 허술해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 태풍 차바 앞에서 무기력했던 부산과 울산 등이 그렇고, 천년고도에서 일어난 경주지진이 그렇다.천재지변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숱한 전조증상들을 무시하지 않고 대비한다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는 있다.과학기술, 토목기술 등이 급속히 발전하는데도 대형참사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인간의 치명적 안전불감증 탓이 크다. 매번 속절없이 낚이고 마는 물고기와 다를 게 뭔가. 과거의 참사를 너무 쉽사리 잊고 안전불감증에 빠져버리는 인간들. 그럼에도 거안사위(居安思危)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이 명구는 그저 백지를 물들인 먹물일 뿐인 것이 현실이다. 23년 전 오늘, 부안군 위도면 임수도 인근 해상에서 터진 서해훼리호 참사가 그렇고 2014년 4월16일 발생한 남해 진도앞바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그렇다.시대를 1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1912년 4월14일 밤 11시,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남서쪽 640㎞ 해상에서 초호화여객선 타이타닉호가 20만톤으로 추정되는 빙산에 우현을 가격당해 침몰했다. 1513명이 희생된 이 사고는 느닷없이 일어나지 않았다.출항을 서두르느라 무리한 설계 변경을 했고, 승객 전원이 아닌 절반만 탈 수 있는 구명보트를 탑재했을 뿐이었다. 빙산 출현 등 위험지역을 칠흑같은 야간에 운행하면서 과속했고, 결국 경계 시스템이 무너졌다. 게다가 타이타닉 침몰 지점에서 약10마일 거리를 항해하는 배가 있었지만, 무선 통신을 꺼 놓고 있었다. 만약 이 선박이 타이타닉의 구조신호를 정상적으로 받고 구조에 나섰다면 희생자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23년 전인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 10분께, 전북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출항한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인근에서 일명 삼각파도를 맞고 그대로 침몰했다. 110톤의 여객선 정원은 221명이었지만 실제 배에 탄 사람은 승객 355명, 선원 7명 등 362명이었다. 15리터짜리 멸치액젓 600통과 자갈 7.3톤, 낚시꾼들의 각종 낚시도구 등 화물도 대거 실려 있었다. 승객이 정원을 1.5배 이상 넘어 만원을 이루자 자연스럽게 승객들은 아래쪽 선실부터 콩나물시루처럼 꽉 자리를 잡아 앉았고, 화물은 배의 위쪽에 많이 실렸다.바람과 파도가 거셌지만 배는 뒤뚱거리며 출항했다. 월요일 출근을 앞둔 낚시꾼들의 압력이 출항을 부채질했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사후 밝혀진 사실이지만, 파장금을 떠난 서해훼리호가 임수도 부근에서 스크류에 걸린 그물 때문에 속도가 떨어졌을 때 삼각파도를 맞았다. 승객과 화물이 잔뜩, 그것도 불균형하게 실린 배는 복원력을 잃고 그대로 침몰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선실에 있던 승객 등 292명이 사망했다.서해훼리호 침몰 참사는 1970년 12월15일 남해안에서 침몰, 323명의 사망자를 낸 남영호 침몰사고 이후 최대 해상 참사였다. 남영호 침몰 후 23년 만에 닥친 서해훼리호 참사는 전형적인 인재였다. 남영호의 교훈은 온데 간데 없었다. 높은 파도가 예상된다는 기상청 에보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휴가 간 항해사를 대신해 갑판장이 키를 잡으면서도 승객을 정원 대비 1.5배 이상 더 태웠고, 엄청난 무게의 화물까지 실었다. 당국의 구조 헬기는 30분이나 늑장 출동했고, 결국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그 악몽은 21년 만에 그대로 재현됐다. 피해는 훨씬 더 커졌고, 안전불감증과 도덕적 해이는 점입가경이었다.지난 2014년 4월 15일 밤, 악천후를 뚫고 무리하게 인천연안여객선 터미널을 출항한 세월호가 16일 오전 8시 30분 무렵에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침몰, 안산 단원고 2학년 수학여행단을 비롯한 476명의 승객 중 172명만 생존했다. 세월호는 아직까지 인양되지 않았고, 9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다.세월호 참사는 그로부터 21년 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44년 전 남영호 사고와 다를 바 없었다. 참사의 교훈은 어디에도 없었고, 선장과 승무원이 제 목숨보다 먼저 챙겨야 할 승객과 배를 버리고 탈출하는 세계 최악으로 기록될 치욕까지 남겼다.세월호는 짙은 안개 때문에 다른 선박들이 출항을 포기하는 상황에서 출항을 강행했다.승객 등 476명과 함께 자동차 180대, 화물 1157톤을 실었는데, 무리한 과적이었다. 선사는 승객과 화물을 더 싣기 위해 상식을 벗어난 수리를 했고, 그 때문에 급격한 변침에서 복원력을 상실한 선박은 끝내 중심을 찾지 못한 채 침몰했다.세월호는 서해훼리호보다 구조 가능성이 나은 상황이었다. 20년 전에 비해 대한민국은 통신과 선박, 헬기 등 모든 면에서 우수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무기력했고, 인간은 훨씬 이기적이었다. 100년 전 캘리포니아호가 무선통신망을 끈 채 운행하는 바람에 타이타닉 피해가 컸던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해상관제센터는 세월호를 추적하지 못했고, 현장에 출동한 해경은 피난방송을 하지 않았고, 구조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조류가 국내 두 번째로 빠른 사고해역 맹골수도를 통과하다 사고가 났는데, 입사 4개월째인 3등항해사가 키를 잡았다. 배가 침몰하자 선장과 선원들은 앞다퉈 도주했고, 모든 관계기관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런 사이 295명의 목숨이 스러졌고 9명은 아직 행방을 알 수 없다. 서해훼리호 참사 때처럼 세월호 참사 때도 사회 전반에 만연된 안전불감증이 핫 이슈가 됐다. 거리 곳곳에서는 지금도 진실을 밝혀달라며 노란 깃발들이 울부짓고 있다. 노란색이 탈색하고, 풍파에 찢기고 있지만 국회의 세월호특별법 개정은 시원찮다.1993년 10월10일 오전 서해훼리호가 침몰할 즈음, 기자는 일요일을 이용해 대전과학엑스포 관람 중이었다. 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대전에 사는 친구의 도움으로 격포항에 갈 수 있었고, 이어 사고 해역으로 가는 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사고해역에는 커다란 원형 구명보트가 펼쳐져 있었고, 구조대원과 주변 어민들이 곳곳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었다.희생자들이 장례식장으로 가기 전에 임시 안치된 군산월명공원으로 갔다. 암울한 통곡의 장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찾은 유족들은 시신 수습이라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세월호보다 운이 좋았다면, 서해훼리호 희생자들은 11월 2일 마지막 실종자가 발견되면서 사고 23일만에 희생자 주검 모두를 인양했다는 사실이다.몇 년 후, 기자는 지금은 퇴직한 공무원 한 분을 만났는데 바로 1993년 서해훼리호 생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었다. 아랫쪽 선실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기울면서 물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대혼란이 벌어졌고,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헤엄쳤지요. 선실 유리창을 내가 깼는지, 이미 깨져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었어요. 다행히 수영을 할 줄 알았고, 배영으로 물위에 떠있는데 짠물을 많이 먹었어요.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힘이 빠졌는데 다행히 구조돼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참으로 끔찍했어요.반면 292명의 유족들은 통곡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당시 정부는 소액의 보상에 나섰고, 힘없고 가난한데다 가장까지 잃어 당장의 삶이 막막했던 유족들은 그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살아야 했다.23년이 지난 지금, 희생자 가족들은 어디에서인가 남은 행복을 찾았을 것이다. 어린 자식들은 성장해 가장 노릇을 하고, 사회의 주역으로 살아갈 것이다.하지만 세월호 참사 앞에서 그들은 또 다시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 정부의 끝없는 무사안일에, 이 사회의 도덕적 해이에 분노하며 울어야 했을 것이다./글=김재호/카드=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10.10 23:02

[철도기행: 개정역·대야역 편] 경계를 타고 '큰 들' 속으로

인간을 태운, 바퀴 달린 탈것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뒤섞인 구조물 위를 미끄러지듯 굴러가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는, 참말로 대체 며칠 만에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파란 하늘 밑으로 노란 평면이 꾸물대고 있었다. 대야. 이름 그대로 큰 들판 속으로 탈것은 굴러 들어갔다. 도시와 농촌의 경계를 타고 옛 군산선(군산화물선) 철길은 나운동 등 군산 시내 중심가를 지나 사정동으로 빠져나온다. 사정삼거리를 지나면 철길 남쪽으로는 널따란 논이 펼쳐지고, 전군도로로도 불리는 번영로가 철길 옆에 바짝 붙어 함께 달린다. 최근 결정된 전북대 병원 신축부지가 이 부근이고, 군산소방서가 여기에 있으며, 차도를 건너면 지난 2009년에 기아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 지었던 월명 경기장이 있다. 농촌 풍경과 도시 풍경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것은 바로 군산화물선 철길이다. 지금은 열차도 다니지 않고, 또 각종 풀과 넝쿨이 레일을 휘감고 있어 당장은 열차가 다닐 수도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철길은 철길. 아직은 엄연히 철도거리표에 올라 있는 노선이라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 군산시 입장에선 이런 철길들은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도심인 수송동 일대는 군산화물선에서 갈라지는 옥구선 철길 때문에 도로 확장 하나도 하기가 어려운 실정. 그래서 장항선 연결 개통 이후 꾸준히 도심 철도를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아무래도 군장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철거는 어려울 것이다. 철길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이야 이 몇 년의 유예기간이 반가울 터지만. 그런 자신의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붉게 녹슨 철길은 들판의 가장자리를 타고 동쪽을 향해 곧게 뻗었다. 간이역의 일생, 개정역 군산에는 개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이 두 곳 있는데, 하나는 개정동이고 또 하나는 개정면이다. 원래는 옥구군 개정면으로 한 덩어리였는데, 1973년에 옥구군의 개정면 개정리와 옥산면 사정리가 각각 개정동, 사정동이라는 이름으로 군산시에 편입되면서 이렇게 됐다. 1995년에 군산시와 옥구군이 합쳐지면서 옥구군 개정면이 군산시 개정면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한 기초자치단체 안에 같은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이 두 개가 된 것이다. 옛 군산선 개정역은 개정동에 있다. 역이라고는 해도 사실 줄곧 간이역으로 있었으니 번듯한 건물 하나 찾기가 어렵다. 있어야 찾지. 개정파출소 맞은편에서 오른쪽으로 샛길 따라 들어가서 어림잡아 20m쯤을 걸어가면, 노란 들판 앞에 서 있는, 개정역열차야! 달려다오라고 쓰인 팻말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달려달라는 말을 들을 열차는 지금 이곳엔 없다.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볼 수 있는 벽돌로 된 간이 대기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단지 옛날 플랫폼으로 쓰였던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을 뿐이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따르면 개정역은 1924년 역원배치간이역 등급으로 문을 열었다. 근처에 구마모토 농장이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는 나름대로 중책을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수요 감소로 인해 1972년에는 무배치간이역으로 격하됐고, 2008년 1월 1일부터는 장항선 연결로 옛 군산선에는 여객열차가 다니지 않게 되면서 사실상 버려진 역이 됐다. 한편 개정역 주변에는 군산의 주요 역사문화유산 중 하나인 이영춘 가옥이 있다. 군산간호대학교 안에 있는 일본식 건물인데, 원래는 대지주 구마모토 리헤이가 지은 별장이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축비와 맞먹는 비용을 들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해 개정 지역의 소작인들을 돌봤고 광복 이후에는 개정중앙병원(개정병원), 개정간호학교(군산간호대학교) 등을 세운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쌍천 이영춘 박사가 이곳에 기거했다. 이제는 서울로 통하는 군산선 최후 생존자 머리 위로 29번 국도와 장항선 새 고가철도가 지나가고 나면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는다. 사실 딱히 고개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쭉쭉 뻗은 평야지대에 이 정도의 기복이면 고개라고 불러줘도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대야는 문자 그대로 큰 들판이라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면의 북쪽으로는 얕은 구릉 지대가 있지만, 남쪽으로는 마치 김제의 그것과도 같은 광활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개정뜰을 스쳐 달리던 철길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장항선 새 철길과 만나 지경리 평야지대의 가장자리를 타고 흐르며 대야역에 닿는다. 대야역은 옛 군산역과 나이가 같다. 둘 다 1912년생, 개업일도 3월 6일로 같다. 그러니까 대야역 또한 군산선 개통과 동시에 문을 연 원년멤버인 셈이다. 물론 지금 있는 대야역 건물은 옛 건물 그대로는 아니고, 1991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전형적인 볼록할 철(凸)형 시골 기차역 형태를 갖고 있다. 70~80년대에 유행했던 역사 양식으로, 전북지역에서는 신리역이나 황등역에서 이런 모양을 볼 수 있다. 차이점이라면 신리역(1981년 준공)이나 황등역(1982년 준공)과 달리 대야역은 90년대에 유행한 적벽돌을 외장에 활용했다는 점 정도일까. 대야역의 본래 이름은 지경역이다. 개업 당시 등급은 개정역과 같은 역원배치간이역이었는데, 개업한 지 7달 만에 보통역으로 승격했다. 지금과 같은 대야역이라는 이름은 1953년에 붙여졌다. 대야역사(史)에 따르면, 대야역은 1940년대에 이른바 리즈시절을 보냈다. 여객 승하차 합이 1940년 한 해 36만 명이었고, 1942년에는 무려 64만여 명에 달한다. 참고로 2015년 군산역 여객 승하차 인원이 43만7266명이었다. 1940년대의 이 번영은 일본의 식민지배와 어떻게든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화물 운송량을 보면, 1943년 발송화물이 1만1075톤, 이듬해인 1944년은 2만74톤이었다. 같은 해 도착화물이 각각 1251톤, 1745톤에 불과했다. 나간 화물의 대부분이 군산항을 통해 수탈된 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야역의 여객수송량은 그러나 이후 꾸준히 줄어, 2000년대에 이르면 승하차 합계 3만 명을 겨우 채울 수준이 되고 만다. 2014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난 2014년 대야역의 여객 승하차 인원은 8362명. 개업 첫해인 1912년 승하차 인원이 3만4000여 명이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옛 군산선의 역 중 유일한 생존자다. 개정역, 임피역, 오산리역이 문을 닫고 군산역은 이사를 간 가운데, 대야역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역의 일부 기능이 축소됐다. 역사 서편에 남아 있는 넓은 공터가 그 증인이다. 2000년에 지어진 이 컨테이너 야드는 물론 대야역에서 화물을 취급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2008년 장항선 연결 개통 이후 화물 취급 기능을 새 군산역에 넘겨줬다. 지금은 장항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에 상행 4회, 하행 5회 정차한다.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과 비교하면 많이 한적해진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열차에 한 번 오르면 서울(용산역)까지 갈아타지 않고 갈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활기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울까지 바로 가니까 편하지. 몸이 편치가 않아서 갈아타는 게 힘드니까.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최모 씨 취재팀이 찾아간 10월 4일, 대야역 승객 대기실은 조용했다. 용산행 열차를 기다리던 두어 명과 취재팀뿐이었다. 평일인 데다, 철도 파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하루 평균 30여 명? 주말이 되면 좀 많죠. 학생들, 그러니까 호원대 학생들은 주말에 많이 이용하고. 김성규 부역장(55)의 설명이다. 호원대는 사실 임피역에 더 가깝지만, 임피역에는 열차가 서지 않으니 대야역까지 가야 한다. 약 7㎞ 정도 거리라서 걸어 다닐 만한 것은 아니지만, 호원대에서 출발해 대야사거리를 지나 군산 시내로 들어가는 38번 버스를 타면 된다. 특히 여름에는 대천으로 가는 승객이 많다고 한다. 대천 또한 장항선 철도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윈윈이다. 얼마 안 가 사라질 것들 역전 시리즈 간판들이 맞이하는 거리를 벗어나 대야검문소 사거리로 나선다. 이 길을 경계로 동북쪽은 산월리, 서남쪽은 지경리인데, 길을 건너 산월리로 들어서면 나오는 것이 매 16일 대야 5일장이 열리는 대야시장 거리다. 검문소 사거리 바로 동쪽에는 검문소 삼거리도 있다. 그 사이에는 철길이 지난다. 열차가 자취를 감춘 군산화물선 같은 것이 아니라, 하루 50여 차례 여객화물열차가 지나다니는 장항선 철길이다. 시장이 역 근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대야면을 관통하는 큰 도로의 가운데에 철길 건널목이 있다면 좀 불편한 것도 사실. 버스터미널도 이 근처에 있는데, 간혹 대야를 경유하는 군산~전주 간 시외버스도 건널목 차단기에 걸려 멈춰 서기도 한다. 거기에 장날이면. 그런데 건널목 관리원 신웅철 씨(62)의 답은 좀 쿨했다. 뭐 얼마 안 가서 없어지잖아요. 저쪽 복선전철 지어지니까. 옛 군산선 단선 철길을 쓰는 장항선 익산~대야 구간을 대신할 복선 철도 공사가 진행 중인데, 군장국가산업단지 인입철도가 이 새 장항선 복선 철길에서 분기할 예정이다. 2018년 완공 예정인데, 한두 해 정도는 미뤄질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그때가 되면 대야역도 새 철길 곁으로 옮겨갈 것이고, 대야건널목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대야역의 기능은 보존된다고 한다. 여기는 아직인데, 임피 넘어서 까지는 노반 공사가 많이 진척이 됐어요. 여기도 없어지겠죠. 포철에서 이거 다 조사해갔어요.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풍경 속에서, 대야역은 그렇게 백 년 넘게 지켜온 자리, 이제 얼마 뒤면 비워줘야 할 자리에 그렇게 그대로 앉아 있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6.10.07 23:02

[참여&소통] 대학축제 현주소

유난히도 더웠던 여름이 갔다. 가을은 축제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다. 대학 캠퍼스에도 어김없이 축제는 찾아온다. 푸른 봄 청춘이 가을과 어우러지는 대학축제. 그러나 그들의 청춘은, 항상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천편일률적인 대학 축제핵심은 주점대학축제는 보통 각 대학의 학생회 주관으로 진행된다. 매 해 새로 선출되는 학생회는 특색 있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다채로운 주제를 선정한다. 가령, 전북대학교(이하 전북대) 축제인 대동제는 지난해 참여를 주제로 진행됐고 3년 전인 2013년 대동제는 소통, 도전, 행동을 컨셉으로 개최됐다.그러나 형식적인 차이만 있을 뿐, 대학축제의 형태는 지극히 천편일률적인 형국이다. 주된 콘텐츠는 동아리에서 진행하는 부스전시나 무대 공연, 그리고 주점 외에는 전무하다. 무대공연마저도 춤이나 노래와 같은 장기자랑 수준이 대부분이기에 차별화된 무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축제 주점은 특히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2~3일간 진행되는 대학축제 기간 내내 학내 전역에 포진되는 주점들은 면학 분위기를 해하고 캠퍼스를 오염시키기 쉽다. 또 주점은 학과 학생회 및 동아리와 같이 전문성이 떨어지는 학생 조직들이 운영하다보니 판매하는 식품의 위생문제도 우려된다.이 같은 주점 중심의 대학축제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 이어지자 대전에 소재한 국립대인 한밭대학교의 경우 지난 2013년부터 두 해에 걸쳐 술 없는 축제를 열어 이목을 끌기도 했다.△섭외 비용도, 인물도 논란연예인 섭외문제 골머리연예인 섭외문제 역시 대학축제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올해 초 전북대에서는 전북대를 중도 자퇴한 전주 출신 가수 블랙넛을 대동제에 섭외할 계획이었으나, 해당 가수의 약자비하여성혐오 행실로 인한 논란으로 섭외가 취소됐다. 당시 학교 커뮤니티 상에서는 해당 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대립이 첨예하게 이뤄지며 갈등과 불신만 커졌다.사실 연예인 섭외와 관련된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전북대는 지난 2012년 연예인 공연에 9,300만원을 지출하며 전국 최고액을 차지하는 오명을 썼다. 지난해 또한 축제 예산의 절반이 넘는 4,000만원 수준을 연예인 섭외에 쓰며 축제의 연예인 판 논란을 이어갔다. 더불어 축제 예산의 대부분이 연예인 섭외에 투입되다보니 새로운 콘텐츠의 개발은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다.△잦아도 너무 잦은 대학축제학습권 방해도대학축제가 지나치게 잦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전북대 총학생회의 경우 1,2학기에 각각 대동제와 학술문화체육한마당을 개최해 한 해에 총 2회의 대학축제를 진행한다. 뿐만 아니라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는 각 단과대학에서도 순차적으로 개별 축제를 진행해 사실상 한 달 내내 축제 기간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지난 2014년에는 9월 17일부터 10월 8일까지 총 10개의 단과대학에서 연달아 축제를 벌였다. 심지어 일부 단과대학들은 축제와 별개로 체육대회까지 따로 개최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행사의 수는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단과대학 축제의 경우 강의실이나 도서관이 위치한 각 단과대학 건물 바로 앞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면학분위기 방해를 초래한다. 장대균 씨(전북대10학번)는 강의실에서 야간 영어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건물 바로 앞에서 축제가 벌어져 수업이 집중되지 않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잦은 축제 속에서 학습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많다. 실제로 지난달 27일에는 한 단과대학의 축제를 이유로 일부 수업이 휴강처리 되기도 했다. 해당 단과대학에 속한 장현서 씨(전북대16학번)는 대학을 다니는 주목적이 학업임에도 불구하고 축제 때문에 수업을 휴강한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며 학습권 침해에 대한 불만을 전했다.한편 전북대는 지난해의 경우 2학기 축제인 학술문화체육한마당을 개최하지 않고 6개 단과대학이 함께 육성제라는 공동축제를 열어 축제의 수를 파격적으로 줄이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다시 기존의 축제방식으로 돌아가며 또다시 수많은 단과대학 축제를 양산하게 됐다.△축제 목적에 대한 진지한 고민만이 활로대학축제의 잦은 시행착오는 축제의 주관인 학생회가 전문적인 집단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학생회는 1년이라는 짧은 임기로 매 해 새로이 선출되고, 축제 외에도 여러 사업을 진행해야 하기에 체계적이고 항시적인 축제 준비위를 구성하기 어렵다.그러나 지금의 축제문화를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학생들의 니즈에 있다. 특강과 같은 학술적인 행사를 시도해도 반응이 시원치 않아 결국 연예인 섭외나 주점 등 축제 흥행에 도움이 되는 콘텐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한편 최근에는 조직위원회를 갖춘 외부 축제단체가 캠퍼스 내에서 축제를 진행하는 형태도 관찰된다. 유니브엑스포가 그 예다. 유니브엑스포는 대학생들로 축제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매년 전국 각지에서 축제를 개최하는데, 유니브엑스포 전주의 경우 지난 2013년부터 줄곧 전북대에서 개최돼 또 다른 대학축제 역할을 하고 있다.유니브엑스포의 경우 비교적 항시적이고 체계적인 조직위를 가졌고 콘텐츠도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 취업창업에 대한 컨설팅 박람회라는 점에서 온전한 축제로 보기는 어렵다. 아울러 그 대학의 축제는 아니기에, 궁극적인 대안은 되지 못한다.결국 대학축제에 대한 목적과 의미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제고해 보는 수밖에 없다. 단발적인 흥행에 집착하고, 인원을 동원하기 위해 수업 휴강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강제적 참석을 종용하는 꼰대적 마인드로 대학축제를 정상궤도에 돌려놓을 수는 없다. 축제가 진정한 축제가 되기 위해, 이제는 변해야 할 때다.● [과거의 대학축제는] 지역 주민 함께 하던 행사, 웅변음악경연 등도 열려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대학축제.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전북대는 1980년대까지 개교기념일에 축제가 동반됐다. 1955년 개교 3주년 행사는 보름간이나 진행되기도 했다. 충청호남권에서 최초로 설립된 국립대였기에, 전북대의 개교기념일은 매우 경사스러운 날이었기 때문이다.당시 개교기념 축제는 대학 구성원뿐만 아니라 도민 모두가 참여하는 지역축제의 장이었다. 도내 축구대회가 열렸고, 국어부와 영어부로 나뉘어 웅변대회도 개최됐으며 1958년에는 삼남지방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음악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했다.군부정권으로 인해 행사가 축소됐던 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는 본격적인 축제의 장이 마련됐다. 당시 개교기념행사와 함께 진행됐던 총학생회 축제의 이름은 비사벌 축제. 서예전이나 시화전, 바둑대회가 개최되는 등 오늘날의 축제보다 더욱 대학축제 다운 축제의 현장이었다. 1978년의 경우 지역 내 가뭄이 심해 축제를 대폭 축소하고, 축제예산 일부를 한해용수기 구입비로 지역사회에 환원하는 등 지역선도대학으로서의 품격을 보이기도 했다.민주화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에의 비사벌 축제에서는 이세종 열사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당시 대학축제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의 장이었다.1991년 개교기념행사와 축제가 분리되며 오늘날의 대동제가 탄생해 비사벌 축제는 역사가 되었다. 민주화의 구호는 자기개발과 개혁 같은 용어로 대체됐다. 개인주의는 가속화됐으며 자발적으로 축제에 참여하는 구성원들도 줄어들어 축제는 점점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술과 유희로 가득한 오늘날 대학축제의 모습은 과연 부끄럽지 않은 것일까? 과거의 거울 속에, 그 대답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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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06 23:02

[문화&공감] 고창 심원면 담바우마을

△인류에게 첫 안식처 숲, 다시 문명의 대안으로계절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행복하다. 고향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던 미국 현대 사상가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이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행복한 이 계절의 변화가, 순간순간 저미듯 밀려오는 곳. 더없는 숲이다.숲은 인류에게 첫 안식처였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 인류는 비로소 홀로 설 수 있었다. 대신 벌거숭이로 자연과 마주해 온갖 시련을 헤쳐가야 했다. 땅을 일구는 모습으로부터 현재의 사무용 전자기기에 이르기까지, 눈코 뜰 새 없는 노동에 겨워 삶을 영위해야 했다. 그 고단한 삶에 지쳤을 때, 숲은 다시 우리에게 위안이 되었다. 위로의 숲이, 이제 이 문명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숲, 이른바 산촌자본주의(〈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동아시아)〉)이다. 인류가 그동안 믿어온 성장제일이라는 상식을 깨고 느림, 자급과 자족을 바탕에 둔 삶의 전환을 통해서다. 산촌자본주의의 시작은 숲을 통해 얻는 에너지의 자립으로부터이다. 최근에는 바다에서 자본주의 대안을 찾다를 부제로 한 〈어촌자본주의(동아시아)〉가 번역 출간되었다. 잊고 살았던 생명의 근원 숲과 화해하는 것처럼 욕망의 최종 목적지였던 바다와 속속들이 화해하며 생명의 순환 원칙을 바로잡고 그 안에서 이 문명의 대안과 마주하자는 것이다.△마을공방으로 다시 주목받는 숲과 바다, 갯벌과 너른 청정한 들녘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숲이고 바다다. 고창군 심원면 담바우가 그런 곳이다. 도솔산, 선운산의 뒤꼍 담바우는 첩첩첩 산이다. 그 첩첩첩을 한거풀씩 서편으로 구비지면, 머지않아 바다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고창의 청정 갯벌이다. 우리 문명의 대안으로 다시 호명하는 숲과 바다, 담바우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재생의 키워드이다.담바우마을(이장 유행오)은 최근 고창군 민생경제과(팀장 이남례)와 심원면(면장 김형순)과 함께 마을재생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행정자치부가 추진하는 마을공방사업이다.담바우마을은 총 40세대 8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그 가운데 원 거주민이 25세대 58명, 비율로는 65%이고 귀농인은 15세대 31명, 비율로는 35%에 이른다. 귀농귀촌일번지라는 고창군 다른 마을들도, 귀농인 비율이 15%인 것을 보면 담바우마을 귀농인 비중이 꽤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숲과 바다가 천혜의 배경이라면 그 안에 깃들어 문제를 풀어가는 사람의 편에서 이 현상은 주목할 점이다.숲의 복판에서 나무를 매개로 한 담바우마을 공방은 목공예품 생산과 판매를 키워드로 한다. 공방사업의 핵심은 마을 주민들이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목공예품을 지속적으로 기술이전 관리하고 판매로 연계하는 지역기업의 존재다. 마을에는 귀농인이 운영하며 연매출 1억원을 올리는 기업, 담바우목공예(대표 공성일)가 있다. 거기 더불어 귀농인들이 운영하는 크고작은 농원과 팬션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매출을 높이고 일자리를 만들어, 다시 마을활성화로담바우마을공방의 구조는, 기존 주민들과 귀농인들의 협업으로 짜여진다. 연계기업인(담바우목공예)이 기존주민과 귀농인에게 목공예품 제작 기술을 전수해 제작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외부 방문객을 대상으로 의자, 책상, 화분걸이, 선반, 침대와 서랍장 같은 목공예품 만드는 체험과 복분자 블루베리 같은 농산물 체험, 숙박, 농특산물 전시판매가 자리한다. 더불어 가까운 만돌갯벌체험장의 인프라를 활용해 바지락캐기, 어망체험을 진행하는 것이다.담바우마을공방은 가까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빚을까, 귀추가 주목된다. 예상한대로라면 마을공방을 차리고 2년 뒤부터는 공방운영과 제품 판매를 통해 2억여 원 가까운 매출이 생긴다. 매출과 더불어 더 중요한 결과, 일자리다. 목공예품 생산과 판매, 지역 특산품 판매와 관리에 약 26명(상시 6명 시간제 20명)의 일자리가 생겨난다. 이렇게 만들어낸 연간 3000만 원의 순수익으로 한편으로 취약계층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한편으로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기금으로 활용하려 한다.△돈보다 관계의 힘! 마을공방의 바탕이 되는 사람들담바우마을공방은 숲과 바다(갯벌), 농업 농촌의 다양한 색깔이 총체적으로 만나는 차분한 용광로이다. 그 용광로 한복판에 3년차 귀농인으로 공성일(54세) 대표 가족이 있다. 인천 송도에서 나고 자란 공 대표가 이곳 담바우에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3년이다.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구공장에서 일한 것이 기회가 되어 평생 가구장인의 길에 들어선 그가 서울에서 전주에서 이웃 중국의 청도에서, 인도네시아에서 거센 세계화의 파고를 악전고투로 넘나들다 문득, 몸과 마음에 심한 병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와 가족이 수소문 끝에 만난 치유의 공간이 바로 고창, 심원면 담바우(담암)마을이다.2013년부터 마을을 오가며 살집과 소일할 공방을 지어내고 마을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은 담바우 숲의 기운으로, 그 풍요로운 흙과 가까운 만돌의 바다, 갯벌에서 철마다 길어올린 건강한 먹을거리로 이내 회복되었다. 마을사람들의 부서진 장롱문짝이며 손때 묻어 버릴 수 없는 가구를 손봐주는 일부터, 소일거리로 시작한 목공예 일이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혼자서 연매출 1억 원을 올리는 작은 기업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고창에 자리 잡으면서 돈의 문제는 둘째가 되었어요. 더 중요한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관계다. 조부모와 지내는 아이들, 형편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에게 멋진 원목책상을 선물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지역 교육청과는 교육기부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공방과 마을, 사람들을 건강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문명의 대전환 속에서 우리가 찾은 대안은?세계는 바야흐로 문명의 대안찾기에 골몰하는 중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사토미(里海, 어촌, SATOUMI)라는 개념을 세계가 통용하는 어휘로 자리잡게 했다. 사토미는 우리의 정서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개념이다. 바다를 정복의 대상, 단순히 무언가를 획득하는 공간이 아니라, 생명을 나누는 어떤 힘으로 여겨왔던 우리 정서가 그렇다. 이러한 접근이 문명의 힘을 회복하자는 대안체계로 세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나아가 세계 언어로 확장하고 있다. 더불어 숲과 바다(연해)를 통해 한계가 드러난 자본주의 체계의 질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일본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담바우마을에서 숲과 바다, 그 안에 깃든 사람들(선주민과 이주민의 협업) 사이 조화로운 한권의 대안교과서가 태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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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0.04 23:02

출판인에서 정치인으로 소병훈 국회의원 "남북문제 해결에 앞장, 꺼진 대화 불씨 살려내고파"

다른 사람보다 일찍 사회현실에 눈을 떴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선언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엄혹한 시절, 그해 11월 21일 유신헌법이 통과됐다. 이튿날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에 나섰다. 친구들을 독려해 거리로 나갔던 그때, 그는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일주일 후 학교는 그를 제적시켰다. 그는 10월 유신을 반대한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다.남북분단의 암울한 역사와 반민주적인 사회현실은 그의 삶을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80년대 초반, 사회변혁의 의지는 출판운동으로 이어졌다. 반쪽짜리 역사관을 온전한 역사관으로 확장시키고 건강한 아동도서 문화를 이끌어내는 출판운동의 중심에서 보냈던 30여년 세월은 부침의 굴곡이 심했으나 우리나라 출판사를 새롭게 쓰는 물꼬를 열고 발전시켰다. 어찌하다보니 정치의 길에 서게 됐다. 확고한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기왕에 들어선 이 길에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성공시키고 싶었다.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62, 경기 광주시 갑)을 만났다. 30여년 출판인으로 살아온 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과 10대부터 저항적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온 그가 새롭게 펼쳐갈 정치 지형도가 궁금했다. 그는 출판사 산하 대표로 일찌감치 이름을 알렸다. 산하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출판사로도 그렇지만,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온 단행본 어린이책 산하어린이 시리즈로 신뢰를 쌓아오면서 명성을 얻은 출판사다. 1990년부터 국내 창작동화의 시대를 연 산하시리즈로 세상에 나온 책은 150여권. 창작동화와 지식정보의 지평을 넓힌 어린이책으로 평가받는 산하어린이는 살만한 세상을 꿈꾸어온 그가 지켜 이루어낸 결실이다.국회 그의 사무실에서 있었던 인터뷰 약속시간은 1시간 가깝게 늦어졌다. 그가 공동주최한 특별지방행정기관 지방이양 정책토론이 예상보다 길어졌기 때문인데, 덕분에 그가 자신이 주최하는 토론회가 아니어도 국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제의 토론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가능하면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국회의원이 되니 좋은 것을 꼽으라면 좋은 토론회에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다양한 주제를 수준 있는 전문가 발제와 토론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망외의 소득이죠.출판인이 아닌 정치인으로 그를 만나는 일은 기대보다도 더 흥미로웠다. 사회현실에 눈을 떴던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가 서 있었던 저항적 사회운동의 길은 더 활짝 열려 있는 듯 했다. 그만큼 정치인이 된 그의 의지는 단단해 보였다.-출판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 오시면서 일구어온 성과가 큽니다. 출판인에서 정치인으로 왜 길을 바꾸었는지 궁금했습니다.오래전부터 정치 쪽에 관여는 해왔지만 직업 정치인은 아니었으니 시작이 빨랐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나 의지로 선택한 길은 아닌데, 그렇다고 정치와 무관한 길을 걸어왔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이 늘 정치와 맞닿아 있었거든요.-학생운동을 열심히 하셨죠.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으니 꽤 긴 세월이죠. 제가 고 3때 유신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들을 독려해 헌법이 통과된 다음날 유신반대 데모에 나섰지요. 덕분에 제적을 당했습니다. 다행히 다음해에 구제를 받아 졸업장을 받긴 했지만 10월 유신 최초 데모 주동자이자 최초 제적생이 되었습니다.-고등학교 시절,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말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했던 때인데, 친구들이 모두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데모했던 친구들 중 3명이 퇴학당하고, 여러 명이 무기정학을 당했는데, 대부분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퇴학을 당했던 채수찬 전 의원 같은 경우는 그 다음해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했는데, 제가 꼬드겨 데모한 덕분이니 수석도 내 덕분이라고 말합니다.(웃음)-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의 날개를 달았겠습니다.친구들은 대부분 1학년 때부터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는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감시가 워낙 심하기도 했고요. 학내활동보다는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대해서 하는 활동을 했습니다.-요주의 인물이었군요. 그래도 줄곧 사회변혁 활동은 주도해 오셨을 텐데요.삶의 틀 자체가 그런 기반 위에 있었으니까요. 군대 다녀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지하철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고, 방산시장에 정식으로 취직을 해 짐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출판 일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셨습니까.출판일은 사회운동을 해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82년 즈음, 학생운동 출신들이 노동현장으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중 일부는 출판 쪽으로 갔지요. 그즈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 모여 〈금요회〉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사회과학서적의 문을 연 출판사였습니다. 당시 출판 쪽에서 일하던 16명이 뜻을 함께 했었는데, 그 중 정치 분야로 진출한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당시에는 출판보다 서점을 통한 사회운동이 더 활발했었는데 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하는 출판사와 서점이 짝을 이루는 형식이었습니다. 당시는 책을 내면 문공부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반쪽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이를테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있으나 사회주의 경제학은 없는 식이었습니다. 변증법이라는 이름을 내건 책 한권이 없었을 때였으니까요. 모든 학문이 반쪽으로 되어 있으니 우리가 반쪽을 채우자고 해서 운동권 인사들이 출판 쪽으로 많이 들어갔죠. 우리가 펴낸 책들은 대부분 판금되는 번역서들이었는데 그래서 책을 내고 도망 다니는 일의 반복이었습니다.-〈금요회〉의 역할이 컸겠습니다.16개 출판사가 모였으니 상징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번역서를 내는 일을 도모했는데 3년 정도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제가 초대 총무였는데, 85년에 저희 출판사(이삭)가 등록 취소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자유실천문인협회 기관지를 펴냈었거든요. 네 권 째까지는 판매금지가 되긴 했지만 잘 지나왔는데, 다섯 권 째 민족문학 5호는 제본소에서 5000부 전량을 압수당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가 그 중 한권을 빼와 그것을 마스터로 돌려 다시 5000부를 찍어 냈지요. 그 때문에 등록 취소가 되었고요. 계간지 취소는 있었지만 출판사 등록을 취소한 것은 이삭이 처음이었습니다.-출판 활동이 중단되었겠군요.그런데 마침 전주에 후배들이 등록한 출판사가 있었어요. 그것이 산하입니다. 86년부터 그 이름으로 출판활동을 했지요. 그러다가 88년에 산하를 서울로 가져온 겁니다.-어린이책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88년부터 기획은 했는데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9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계기가 있었나요.우리 아이들 덕분이었어요. 큰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하루는 방학숙제용 책을 가져왔더라고요. 들여다보니 선정된 책의 면면이 정말 엉망인 거예요. 학교에 항의했지요. 그런데 학교는 정작 모르는 일이더군요. 학부모들이 납품 업체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고 책을 공급받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학교에서는 교육청에서 허락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교육청에서도 모르는 일이었고요. 다른 학교도 다 마찬가지 상황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어 화가 나더라고요. 당시 언론에 보도가 되면서 이슈화되기도 했었습니다.-그것이 산하가 어린이책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군요.아빠가 출판 일을 하는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책 한두 권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기회가 닿았어요. 이오덕 권정생 윤기현 조월례 선생님, 이현주 목사님이 우리 아동문학을 살려야한다는 생각으로 출판사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산하와 인연이 닿은 것이죠. 우리 아동문학의 개척자이자 공로자이신 선생님들과의 인연이 산하어린이시리즈를 만들어낸겁니다. 그때만 해도 어린이책은 단행본은 없었고 거의 전집류였어요. 10만원 20만원씩 하는 책값만으로도 경제적 부담이 컸지요.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사서 볼 수 있도록 2000원짜리 단행본으로 만든 겁니다. 첫 번째 책이 〈참나무 선생님〉이었어요. 그 뒤 산하어린이 시리즈가 10권 정도 나왔을 때 언론이 관심을 갖게 되면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경제적으로도 성공하셨겠네요.실상은 그렇게 되지 못했어요. 그때는 어린이책에 인세란 개념이 없었어요. 삽화는 물론이고요. 매절(lump sum, 買切) 방식으로 발간하는 것이 관행이었죠. 저희도 어린이책을 돈벌이로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했을 텐데 글 원고는 물론이고 그림도 인세 제도를 시행하고 싶었어요. 내부적으로도 찬반 양론이 있었는데, 결국은 인세를 시행했지요. 그것이 출판사가 어려움을 겪게 되는 시작이었어요. 더구나 삽화를 회화를 전공한 작가들에게 부탁하면서 그 부담이 더 커졌고요.-그 부담을 고스란히 출판사가 안게 되었군요.그때부터 수입보다는 투자의 비중이 커지게 되니 인세가 밀리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시리즈를 계속 냈습니다. 98년, 시리즈를 시작한지 8년 만에 100권을 돌파했지요. 국내 필자의 창작동화로만 100권을 만들었으니 출판계의 화제가 될 만했습니다. 힘은 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물을 같이 하면서 베스트셀러로 이어졌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는데, IMF가 터지면서 서점에서 받은 어음이 부도나면서 출판사가 어려워졌어요.-지금은 출판사나 서점이나 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경인데요.출판업의 문제는 사실 유통에 있습니다. 온오프라인 서점을 비롯해 공급받는 대상에 따라 공급률이 달라지거든요. 과거에는 서점에 정가의 80% 가격으로 공급했었는데 지금은 50%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해도 출판사나 독자들은 그 혜택을 못 받고 있는 것이지요. 구조적 모순과 문제점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겠습니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면 정치 쪽의 일이 무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금요회〉 시절부터 출마 권유를 받았었습니다. 당시 전북 출신 운동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전북민주동우회〉를 만들었는데 제가 운영하던 이삭출판사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정치권 진출을 모임 내부에서도 고민했었는데, 제 경우는 출판 일을 버리고 정치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선거철만 되면 말이 나오긴 했는데, 그때는 마음을 접고 있는 상황이었죠.-출마는 하지 않았지만 정치 쪽 일은 지속적으로 해 오신 셈인데요.직업으로 정치를 삼지는 않았지만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쪽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요. 본격적인 계기라면 98년에 김근태 선배가 국민정치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하기 시작해 새천년민주당 창당 준비위원으로도 참여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국정자문위원을, 김근태 선배가 의장으로 있을 때는 의장 자문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국회의원 선거는 2008년에 처음 도전했었죠. 왜 광주였습니까.친하게 지냈던 문학진 의원 지역구가 하남 광주였습니다. 문 의원이 출마했을 때 선거를 도와주었는데, 아쉽게도 3표 차이로 낙선했어요. 그 뒤 선거구가 새롭게 획정돼 문 의원이 하남 쪽으로 가면서 권유를 했고, 정동영 선배가 대선 출마할 때는 제가 그 지역의 선대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이 되었습니다.-국회에 들어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현안이 많습니까.물론입니다. 제가 지금은 사드에 관한한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사드 문제에 앞장서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절박한 현안이 세월호입니다.일부에서는 세월호 피로감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이야기하는데 정말 잘못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결하고자 하는 세월호 문제는 참사의 진상을 밝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자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고를 없게 하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부가 먼저 나서서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이 우선이거든요.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내는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다른 세월호 사건을 만들어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더라도 이 사건은 박근혜정부가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나중에 벌어질 후유증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렇습니다. 세월호는 미뤄둘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새만금과 관련된 법안을 김관영 의원과 공동발의하셨던데 새만금을 어떻게 보십니까.저는 전라북도가 홀대 받는 가장 구체적이면서도 명확한 증거가 새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가까운 동안 투자된 예산이 아마 4조~5조 정도 될 겁니다. 사대강은 어떻습니까. 3년 만에 22조를 다 썼습니다. 환경문제 등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작용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만금에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인 부분이 먼저 작동하게 됩니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안을 찾고 투자해야 한다고 봅니다.-출판인으로서 일궈놓은 일이 많습니다. 정치인으로서는 어떤 일들을 해나가실 생각입니까.기회가 된다면 남북문제를 해결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들여다보니 6자 회담이 2008년에 열린 것이 마지막이었더군요. 지금은 대화 자체가 완전히 막혀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0년 햇빛정책의 결실이 아깝기만 합니다. 그 불씨를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소병훈 의원은] 고교 졸업 때 "남북통일 위해 태어났다" 다짐민주화운동 온힘소병훈 의원은 군산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전주북중)에 입학하면서 전주로 온 그는 초등학교를 군산에서 다닌 탓에 친구가 없었다. 자연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전국에서도 시설 좋기로 이름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 덕분에 그는 엄청난 양의 책을 독파할 수 있었다. 전주고에 들어가서도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반민주적인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됐다. 정의는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는 옳은 길을 가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언했다. 헌법이 통과되자 그는 친구들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데모를 이끌었다. 주동자가 되어 제적을 당했지만 다행히 이듬해에 졸업장을 받았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그는 나는 남북통일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고 썼다. 어떤 길을 가든 남북통일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성균관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학내에서 데모나 시위를 주도하는 대신 다른 대학 운동권과 교류하고 연대하는 일을 도모했다.대학 졸업 후엔 지하철 현장과 방산시장에서 짐 나르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결혼을 한 이후였지만 노동의 대가를 보상받는 정도만으로도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여겼다.80년대 초반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현장에 들어가거나 출판 분야로 눈을 돌릴 때 그는 출판을 택했다. 83년 출판사 이삭을 열었다. 출판 분야에서 일하던 운동권 출신 선후배들과 뜻을 모아 〈금요회〉를 만들고 사회과학서적을 출간하는 일에 앞장섰다. 엄혹한 시절이었으나 그만큼 민주화를 위한 저항운동의 의지도 강해졌다.85년 문공부는 그의 출판사 이삭의 등록을 취소했다. 86년 후배들이 등록해 갖고 있던 산하의 이름을 빌려 출판활동을 지속했다. 88년에는 산하를 서울로 가져와 본격적인 출판 사업을 시작했다. 일반 도서류를 출판하면서 꽤 많은 베스트셀러를 냈다. 89년부터는 어린이 책을 단행본으로 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출판사에 기록될만한 산하어린이시리즈 시작이었다.2008년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더불어민주당)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사회변화를 꿈꾸어온 그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연고가 없는 경기도 광주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아 재도전까지 결행했으나 당선고지가 보이는 바로 앞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다시 도전해 당선, 초선의원이 됐다. 문화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임위원회를 교육문화체육관광위에서 활동하기를 희망했으나 안전행정위원회에 배정돼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6.09.30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전북이 들썩들썩, 소리축제 한 마당

#표지.전북이 들썩들썩, 소리축제 한 마당#1.또 왔습니다, 디오니소스님. 분위기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2.(장자자가아가ᄌᆞ악ㅇ)#3.(푸쳐핸썹!)#4.전주 세계소리축제가 돌아옵니다. 올해가 15번째입니다.#5.9월 29일부터 10월 3일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라는 주제로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일대에서 펼쳐집니다.#6.지난해와는 달리 축제 공간이 소리전당으로 일원화됐는데요.그러면서 편백숲과 같은 소리전당 주변 명소도 함께 축제공간이 됐습니다.#7.15개국 팀이 참가하는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다양한 합동 공연, 월드뮤직 빅 파티, 해외 아티스트 공연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세계의 소리를 한데 모아냅니다.#8.또 판소리 다섯바탕, 소리 프론티어, 나도야 소리꾼 등도 흥을 돋우지요!#9.(지도)귀만 즐거울 수 있나요? 축제 공간 일대에선 입도 눈도 즐거울 예정입니다.#10.그런데 이 가을, 소리축제가 끝이 아니죠.#11.전주 야행,(9월 30일~10월 1일)#12.군산 시간여행 축제,(9월 30일~10월 2일)#13.김제 지평선 축제(9월 29일~10월 3일)등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14.축제가 가득한 전북의 흥에 축복을!기획 신재용, 취재 은수정김보현,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2016 전주세계소리축제 가이드북 보러가기 ◆

  • 기획
  • 전북일보
  • 2016.09.28 23:02

소충사선문화제 이끈 양영두 제전위원장 "전통 되살려 향토문화 보존·육성 기여 자부"

창립 30주년을 맞은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양영두(66) 위원장은 남다른 고향사랑과 전통문화 계승에 앞장서 온 인물이다.본래 정치인으로 출발한 그이지만 최근 나이가 들면서 소충사선문화제 전통이 끊어질세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자치단체나 공공기관이 추진하지 않고 주민이 발굴한 전설을 바탕 삼아 지난 30년간 성공적인 문화축제로 이끌어 왔기에 동정심도 생긴다.특히 초창기 20여년은 지자체 보조금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기부와 협찬으로 축제를 치러왔기에 그의 애착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소충사선문화제를 창립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요“임실군 신평면이 고향인 손주항 전 국회의원이 제 2대 도의원 시절 임실군민에게 사선문화제 창립을 선언했습니다.당시 지역 어르신들이 사선대는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신선들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는 말씀을 들었다며 축제 창립을 결심했습니다.하지만 당시에는 손의원은 추진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후로도 정치생활에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저에게 진행해 줄것을 당부했습니다.1986년에 당시 이형로 전 군수님이 문화제 본부장을 맡으셨고 저는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창립 목적은 나라사랑과 고향사랑을 최우선으로 하고 전통문화 창달과 지역발전, 인재양성에 앞장선다는 내용입니다.당시에는 주민과 기업들의 기부금 및 협찬으로 이듬해인 1987년에 제 1회 사선문화제를 개최했습니다.”-소충사선문화제가 지역발전에 공헌했다면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선 농촌지역 주민들에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했다는 것과 잊혀져 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린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이를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앞장섰고 향토문화의 보존과 육성에도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특히 당시에는 민간인 주도의 문화축제가 도내에서는 전무할 정도였으나 사선문화제로 인해 진안과 무주,순창 등지에서도 다양한 전통축제가 추진됐다는 것입니다.당시만 해도 유명가수와 탈렌트, 영화배우 등 연예인들은 TV와 라디오에서만 보고 들었기 때문에 소충사선문화제 방문객은 전국 각지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습니다.임실고추와 치즈는 물론 각종 특산품 홍보도 병행된 축제여서 지역 홍보와 경제활성화에도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특히 사선문화상은 전국의 유명인사를 대상으로 각 분야에 걸쳐 지방에서 시상하는 보기드문 사례로 생각합니다.”-문화제로서 자랑할 만한 치적이 있다면?“한국의 농악이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중의 으뜸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임실의 필봉농악입니다. 소충사선문화제는 지난 30년간 전국농악대회를 통해 필봉농악의 참맛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했습니다. 또 농악대회에는 문체부장관과 교육부장관상을 유치해 품격을 높이고 농악의 진수를 전파하는 것에 공헌했다고 자부합니다.사선녀 선발과 향토음식, 임실고추 및 임실치즈와 함께 추석특집 등은 TV 생방송을 통해 전국에 임실을 홍보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장기간에 걸쳐 축제 운영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아는데요.“1회 축제시는 3000만~4000만원 정도가 소요됐는데 당시 손주항 전 의원의 지원과 축제위원회 임원 및 지역민의 협조로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이후 축제부터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연간 2000만원 정도를 지원했고 기타 국내 유명기업들의 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 왔습니다.하지만 1999년부터는 소충제와 사선문화제가 통합되면서 자치단체의 보조금과 협찬금으로 행사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문제는 해가 갈수록 사업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최근에는 3억원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부득히 프로그램을 축소하는 실정입니다.”-그동안 축제를 진행해 오면서 고충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앞에서도 말했지만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서는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후원이 요구됩니다.수년전까지는 보조금 50%와 자부담 50%로 축제를 이어 왔는 데 최근에는 보조금 30%, 자부담이 70%로 추진되고 있어 협찬금 모금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더욱이 최근에는 기업들도 경영상의 문제점을 들며 기부를 회피하고 있기에 갈수록 지원금 확보에 난항을 겪는 실정입니다.때문에 문화축제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 운영상의 불안요소 해소에 앞장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본인의 경우는 애초 정치인이기에 창립과정에서 추진하고 발판을 마련하는 교두보 역할에 그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정치는 뒷전이 되고 문화제 전통살리기에 급급하고 있습니다.그동안 문화축제를 이어 오면서 본인의 의사와는 달리 갖가지 억측과 음해, 무고로 수많은 고통도 겪었습니다.하지만 이제는 나이도 있고 정치야망도 시든 상태여서 오로지 소충사선문화제가 지역의 대표축제로 거듭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소충사선문화제의 개선점과 발전방향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주민 주도로 지역축제를 30여년간에 걸쳐 추진한 사례는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임실에는 자랑할만한 문화축제가 치즈축제와 의견제, 소충사선문화제가 있습니다.치즈축제가 지역민의 소득향상을 위한 경제활성화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면 의견제는 사회 전반에 만연된 불신풍조를 퇴치하는 충성과 의리를 널리 알리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소충사선문화제는 구한말 의병들이 구국일념으로 희생한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워 주고 사선문화제는 전통문화 계승과 고향사랑을 심어주는 군민화합의 주춧돌 역할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이같은 축제들이 어느 한곳에 편중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도록 행정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요구됩니다.훌륭한 문화유산과 경제자원을 고루 갖춘 임실지역의 축제들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미래의 후손들은 우리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으로 확신합니다.”● [양영두 위원장은] 정치 오랜 꿈 접고 통일 사업에 주력임실군 관촌면 회봉리에서 태어난 양영두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은 전주 중앙초등과 서울 양정중·고를 거쳐 방통대와 연세대 정치학 석사를 이수했다.졸업 후 손주항 전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근무 중 1980년 국회 해산에 따라 강제 해직되면서 광주민주화사건으로 모진 고문도 당했다.옥에서 풀려난 뒤에는 지인의 도움으로 당시 나산실업 전무로 근무, 기업운영에 앞장섰고 민추협 운영위원과 신민당 임순남지역 위원장도 맡았다.고 김대중 대통령이 평민당으로 대선을 치를 때에는 전북도당 대변인을 맡았고 이후 4번에 걸쳐 국회위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임실군이 무진장 지역과 선거구가 통합된 뒤에는 현 정세균 의장과 당시에 맞섰으나 역부족, 이후에는 출마를 중단했다.현재 흥사단민족통일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그는 통일사업에 주력하고 전통축제인 소충사선문화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 기획
  • 박정우
  • 2016.09.26 23:02

[참여&소통] 저출산·고령화 사회

저출산고령화 사회가 본격화하고 있다. 유엔 인구기금(United Nations Population Fund)에 의하면 한국의 출산율(2010~2015년 평균)은 1.3명으로 세계 198개국 중 196위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 평균 출산율이 2.5명이고 아태지역은 2.2명, 유럽 2.0명인데 반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1970년대 이후 OECD 주요국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UN에서는 65세 이상 인구가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이면 고령 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 사회로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가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데 154년이 걸렸고, 독일 99년, 미국 90년, 일본이 35년이 소요되었는데, 한국은 고령화 율이 13.1%로 아직 고령화 사회 수준이지만, 기초 지자체별로는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곳이 2014년 기준으로 228개 중 78개(34.2%)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나라는 고령화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 진입까지 향후 26년 소요될 전망이다. 고령화 진행 속도(1970년~2013년)는 무려 4.0배나 증가하여 OECD 평균보다 2.5배나 빠르게 늙어가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유엔미래보고서는 지난 38년간 유럽 40여 개국의 출산휴가, 출산수당, 육아정책, 양육지원금 등 모든 출산 장려지원책이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에는 미미했다고 지적하였다. 또 유엔미래보고서는 저출산 극복에는 이민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지적을 하며 이미 한국도 순수이민 유입국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밝혔다.삼성경제연구소는 2010년 다문화사회 정착과 이민정책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인력감소와 생산가능인구 등을 연구하면서 인구 감소로 지속적인 외국인 유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인력 감소 문제를 해소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유지하려면 생산성 향상과 함께 외국인 노동력 유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노동인력 수급차질과 세수감소를 초래해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저하시킨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출산율 제고, 유휴인력 활용 등이 이루어지더라도 내국인만으로는 인력수급 불일치를 완전히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을 내놓았다.한국은 아직 이민과 이민자에 대한 공식적인 정의가 없는 상태다. 정부의 부처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들에 대해 각각 상이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법무부는 외국인으로 부르고,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족으로 칭하며, 고용노동부는 외국인근로자로 일컫고 행자부는 외국인 주민으로 정하는 등 각 부처의 추구하는 정책에 따라 동일한 이민자를 상이하게 정의하여 구분하고 있다.이민과 이민자에 대해 UN은 1년 이상의 의도적 체류를 동반한 국제적 이주를 이민 또는 국제인구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국내의 학계에서도 이민이란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평소의 거주지 옮기는 현상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민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90일 이상 한국에 체류하기 위해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고 등록된 거주지에서 일정기간 거주를 하는 자를 사실상 이민자로 규정할 수 있다.한국은 동일한 대상을 두고도 부처별로 용어가 상이하기도 하고 법률적으로 통합적인 이민사회를 규정할 수 있는 기본법을 두고 있지 않다.고용노동부는 외국인근로자고용등에 관한 법에 근거해 외국인근로자를 지원하고 관리하고 있고, 여성가족부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을 통해 결혼이민자들과 자녀의 정착과 성장을 돕고 있다. 또 법무부에서는 국적법과 출입국관리법에 근거하여 외국인의 국적취득과 출입국 및 체류관리 등의 정책을 담아 지원하고 관리하고 있다.난민법도 통해서도 난민 인정자 또는 인도적 체류의 허가자에 대한 정책의 법률적 근거를 명시하고 있다.그리고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을 두고 있는데, 이 법은 외국인지원에 관한 기초적 역할을 하고 있다.그런데 여러 법률이 부처별 이해관계와 산발적 지원 그리고 비체계적 관리를 유발시키고 있어서 통합적이고 거시적인 외국인 관리를 하지 못하는 한계성에 부딪히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의 가속화로 인해 이제는 외국인이민정책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관련한 이민법이 필요한 시점이다.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이민사회를 준비하고 정책적 규정을 담은 법률이 2016년 1월 6일 이자스민의원이 대표 발의하여 이민사회기본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에 이미 제출되었다. 이민사회기본법이 제안된 배경으로는 한국의 법률이 개별적으로 여러 근거법률에 의해 중앙행정기관별로 다문화가족 및 재한외국인의 보호와 지원에 관련된 정책과 외국인에 대한 이민정책을 시행함에 통합적인 관점에서 정책이 시행되지 못함을 지적되었다.이민사회기본법은 이민사회정책이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계기점이 될 수 있었다.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한 정책으로 미래를 불안정성을 대처할 수 있는 기점이 될 수 있었지만, 이 법은 19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지난 5월 29일 임기만료폐기 되었다.한국은 이민정책을 아직까지는 외국인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한 외국인이민정책을 총괄할 수 있는 부처가 없다.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그 기능을 부분적으로 담당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컨트롤 타워로써의 역할은 못하고 있다. 국무총리실의 조정기능도 한계가 있고, 정부의 각 부처들은 부처의 생존적 입장에서 외국인이민정책을 펼치고 있다. 외국인이민정책은 장기적인 관점 속에서 저출산고령화를 맞이하여 미래의 불안정성을 누그러뜨리고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도록 펼쳐져야 한다.그런데 이민사회는 여러 사회적 갈등을 불러올 수 있고, 사회적 부담을 확대시킬 수 있다. 또한 이민자 빈곤화와 외국인의 범죄도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911테러처럼 IS와 같은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 틈 탈수도 있다. 따라서 다문화 이민사회가 양산하게 될 부정적 요소들에 대한 대책과 대안도 함께 모색될 필요가 있다.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동준 팀장은 외국인과 타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사회는 융성하고 폐쇄적인 사회는 쇠락한다는 것은 세계의 역사에서 증명이 되었다며 이민사회는 각 세계가 가지고 있는 부담이지만, 빨리 대처하고 능동적으로 미래를 준비한다면 불안정성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유엔미래보고서 저출산 극복에는 이민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밝힌 것은 이제는 간과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한국도 이민사회를 하루라도 빨리 준비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민사회기본법 등을 제정하고 이민청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내 10개 시군 소멸 위기, 이주여성 등장에 인구증가- 道 이민정책, 거시적 통합시스템 필요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하는 지역 고용동향 브리핑에 실린 지역고용동향 심층분석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지방소멸에 관한 7가지를 분석하면서 한국의 77개 지자체가 소멸을 걱정해야 한다고 진단했다.한국고용정보원 이상호 부연구위원은 일본 창성회의 의장인 마스다 히로야의 지방소멸(김정환 옮김, 와이즈베리)이라는 책에서 향후 30년 이내에 대도시만 생존하는 극점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며, 고령화로 인해 인구 재생산의 잠재력이 극도로 저하된 상황에서 젊은 여성이 머무르지 않는다면 그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분석 자료에서는 밝힌 77개의 소멸 위험에 처한 지역 중 전라북도는 10개 지역이나 차지했다. 10개 기초지자체는 김제, 남원, 정읍, 부안, 무주, 순창, 고창, 장수, 진안, 임실 등으로 분류되었다. 소멸위험 지역의 일치된 특징은 젊은 여성이 해당 지역에서 빠져나가고 유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행정차지부의 2015년 1월 기준 통계에 의하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결혼이민자는 30만5446명으로 나타났다. 전라북도의 결혼이민자의 수는 9787명 이었고 이 중 여성 결혼이민자는 9452명으로 파악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들로서 20~30대가 70.7%를 차지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수도 1만166명에 이르는데, 결혼이민자의 등장으로 전라북도에 2만여명의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유엔미래보고서에서는 저출산고령화의 대안을 이민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중앙정부에만 이민정책을 맡기지 말고 능동적으로 지역의 여건에 맞는 이민자 유입 및 정착정책들을 생산해 내야 할 것이다.전라북도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사업 부문에서 전국의 상위를 차지할 정도로 정책이 잘 만들어져있고 사업이 짜임새 있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근로자를 담당하는 부서와 결혼이민자를 지원하는 부서가 다르고 유학생을 담당하는 부서도 다르다. 또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국제교류센터의 정체성과 방향성 등도 통합적 이민정책의 거시적 틀 속에서 고민해야 한다. 이제 전라북도는 외국인 관련 종합적이고 총괄적으로 담당할 수 있는 통합적 외국인주민정책부서의 설치에 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소멸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인이민정책을 총괄적으로 생산하고 지휘할 수 있는 역할에 있어서 민과 관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대안 모색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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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22 23:02

[문화&공감] 공간 '우리다'

일단 네 남자가 떠오른다. 절대 젊지만은 않다. 이제는 다들 가정이 있는 마흔 중년들이다. 폭풍같은 30대를 지나고 세상이 원하는 대로 맞춰 줄 40대일 것 같지만, 이들은 여전히 세상이 아직 다 하지 못한 일들을 하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 옆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그리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너무 당연히 공동체를 만드는 일 따위는 특별하지 않았으면 이라고, 너무도 당연하게 마을 축제가, 마을 회의가, 사람과 사람이 기대고 사는 동네와 마을의 일상으로 대한민국이 채워지기를, 그리고 그렇게 자기들도 따뜻한 마을 속에서 평범히 살고 싶어 한다. 그런 도시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산다. 이들이 움직이는 공간 우리다는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도시재생 화두로 모여요즘 도시의 화두는 재생이다. 그동안 도시가 무분별하게 개발해왔던 과거를 반성하고, 도시와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도처의 노력이 눈물겹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정책적으로, 아니면 누군가의 설계도면이 되어 사람을 위한 도시라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아직도 사람을 위한 도시를 만드는 길은 쉽지가 않다. 도시는 살아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문화를 만든다. 그 살아있는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매일매일의 일상을 채우는 사람들의 생활 속의 도시를 봐야하는 이유인 것이다.공간 우리다는 2015년 10월 현재 건물주인 권대환(42)소장(마을발전소맥 지역재생연구소 소장)이 건물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건축공학을 전공한 권소장은 전북대 도시환경연구센터, 전주시정발전연구소 등 전주 도시정책 쪽 일을 해오며 특히 공동체 활성화 일을 주도해왔고, 전국의 마을 만들기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킹을 꾸준히 해왔다. 공간 우리다는 전북지역의 마을 만들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민간 네트워킹 플랫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졌고, 꾸준히 함께 활동을 해오던 협동조합 마을발전소 맥(대표 고남수), 전북 주거복지센터(전 사무국장 김영찬), 사단법인 마을 향(대표 김하생)의 대표들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졌다.△ 전국 마을만들기 네트워크로 확장이 공간에는 마을과 사람, 도시와 공간에 대해 관심 있는 마을대표와 협의체 등 민간에서부터 시의원, 기관들까지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사업들을 구상한다. 공간 우리다는 건물 지하에 위치하고 있지만, 건물 2층에 있는 카프카 까페에서도 때때로 마을 만들기 전국 대화 모임 같은 모임들도 간간히 이루어지며, 전국의 마을 만들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건물 1층의 노송화랑 사장님의 아침인사에서 착안하여 오늘도 또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현수막도 골목 입구에 붙여놓았다. 작은 사람들의 이야기하나 놓치지 않고 공간과 사람을 연결하는 섬세함도 느낄 수 있다.△ 전주 구도심 거점 프로젝트 진행최근 이들은 정읍 담양 경남 보령 진안 익산 등 각자의 마을사업을 꾸준히 진행하면서도, 전주 구도심의 공간 다시 바라보기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역주민들과 직접 진행한 우리마을 미소당구왕 선발대회를 비롯 네트워킹 단체인 화요쌀롱과 함께 진행한 전주 북극곰 프로젝트, 그리고 남부시장 양키골목 주민들과 함께 한 게릴라 가드닝등이다.△ 사람이 주인인 공간 가꾸기공간 우리다라는 명칭은 나와 너,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야할 도시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 네트워킹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었으면하고, 또한 민간의 자립적 활동들이 확대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공간 우리다가 위치한 지역은 전라감영복원지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전주 구도심에서의 바람이 하나 더 있다면, 최근의 도시재생에서의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둥지 내몰림 현상(젠트리피케이션)을 주민 스스로 풀어보고자 하는 부분이다. 전라감영복원으로 벌써 들썩이고 있는 전주 구도심의 착한 건물주 모임으로 건물주와 임대자,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전주구도심의 정체성을 간직한 동네로 함께 만들어 가보고 싶어 한다.결국 깨어있는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는 권대환소장과 고남수대표는 마을마다 현장마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도시의 미래를 오늘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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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9.20 23:02

전북 출신 신임 서기식 LH 전북본부장 "주거복지 품질 개선·원스톱 서비스 제공, 도민 행복 추구"

LH 전북본부장에 전북 출신인 서기식(54정읍) 경기지역본부 판매보상처장이 최근 부임했다.지난 2007년 전북본부에서 부장으로 재직시 현재의 신사옥 설계공모심사업무를 맡았던 서기식 전북본부장은 10년만에 금의환향한 때문인지 감회가 남달랐다.우뚝 선 신사옥과 이전에 비해 위상과 사업규모가 3배 가까이 커진 전북본부의 수장을 맡게 된 그로부터 향후 청사진에 대해 들어봤다.-먼저, 고향으로 금의환향하신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전북본부를 떠난 지 10년 만에 고향지역 본부장으로 부임해 돌아오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전북은 항상 가슴속에 머무르던 곳으로 지역 발전과 도민의 주거 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임기동안 경영방침은 무엇인가요.LH의 경영방침은 변화혁신, 신뢰화합, 미래창조, 국민행복입니다. 이에 우리 전북본부도 대내외 환경변화에 대응하고 지속적인 업무혁신을 통해 경영성과를 제고하는 한편 직장 내 소통과 협업 활성화, 직원의 사기 진작을 통한 행복한 일터 조성, 상호 신뢰하고 화합하는 기업문화 만들기에 노력하겠습니다. 또한 미래에 대비하고 지속가능한 사업기반 마련을 위해 지자체 및 민간과 상생협력하고 다품종소규모 개발, 고객니즈에 부응하는 제품 개발 등 새로운 사업영역 개척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고객의 수요에 부응하는 맞춤형 서비스 등 주거복지 서비스의 근본적인 품질 개선과 함께 원스톱 종합서비스를 제공해 전북 도민의 행복을 추구하는 기업, 도민으로부터 사랑받는 LH 전북본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올 하반기 전북본부의 주요 사업계획은 무엇인가요.현재 연초에 수립된 계획에 따라 약 1800억원 규모의 사업비를 투자해 국가식품클러스터 산업단지, 전주만성 및 전주효천 도시개발사업, 익산평화 주거환경개선사업 및 익산인화 행복주택 등 다양한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반기에는 지난 8월에 완주삼봉지구 조성공사 시공업체를 선정해 본격적인 개발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며, 연말 국가식품클러스터 산업단지 1단계 및 전주만성지구가 준공 예정입니다.-완주삼봉지구 택지개발사업이 새롭게 추진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로드맵을 설명해주십시오.완주삼봉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은 2009년 보상완료 후 부동산 경기침체 및 수요부족 등 대내외 환경 변화로 인해 조성공사 착공이 지연되었던 사업입니다. 이에 사업정상화를 위해 애초 국민임대주택 건설사업을 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으로 전환하고 대행개발이라는 사업방식 다각화를 통해 지난 8월 시공업체를 선정하고 본격적인 조성공사 착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활한 사업추진과 조기 단지 활성화를 위해 조성부터 분양 및 준공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업무를 전담해 수행하는 업무완결형 조직인 완주삼봉 PM팀(Project Management)을 꾸려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전북도, 완주군 등 지자체 및 유관기관과의 협력에 힘입어 지난 7월에는 완주군과 보건소 등 10여개 공공기관부지에 대한 매매협약을 체결하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본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만큼 새로이 수립된 계획에 따라 토지분양 및 주택공급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사업일정 관리 및 단지 조성사업 추진에 만전을 기할 계획입니다.-군산신역세권지구 조성사업 진행사항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군산신역세권 택지개발사업은 완주삼봉지구와 마찬가지로 2009년 보상을 완료했으나 금융위기와 계속되는 부동산 경기침체 및 수요부족으로 착공이 지연된 사업입니다. 그러나 단계별 개발 및 대행개발 등 사업방식 다각화를 통해 2014년 1단계 구간(35망2000㎡)을 우선 착공해 현재 공정률 51%로 순조롭게 진행중이며, 올해에는 나머지 2단계 구간(73만9000㎡)에 대해서도 지난 4월 시공업체 선정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조성공사 착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토지공급 및 군산지역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한 주택건설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 군산지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전북혁신도시와 만성지구 개발사업 완료된 후 새로운 사업계획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습니까.우선 도내 지자체별 지역종합발전계획 수립 시 지역특색에 맞는 중장기 발전방향을 구상하고 지역맞춤형 신규사업 발굴을 위해 지자체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한 정부정책의 차질 없는 이행과 저소득층 주거안정을 위한 행복주택사업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며, 아울러 주거복지의 중요성이 날로 중요해짐에 따라 주거복지의 패러다임을 고객만족으로 확대 전환하고 지역밀착형 원스톱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주거복지 서비스 강화에도 주력할 계획입니다.-현 정부의 주요 부동산정책인 행복주택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행복주택이란 대학생신혼부부사회초년생 등 젊은 계층과 취약노인계층을 위해 직장과 학교가 가까운 곳이나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에 건설해 저렴한 임대료로 공급하는 공공주택입니다. 전북본부는 2015년 9월 익산시 인화동2가 일원에 구동익산역 폐역부지를 활용, 612세대의 행복주택을 건설하는 익산인화지구 조성공사를 착공해 2017년 하반기 입주 계획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자체 건설예정인 공동주택용지에 대해 행복주택 건설을 검토하고 도내 지자체와 협력해 행복주택 후보지를 발굴하는 등 보다 많은 도민들에게 행복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LH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거복지사업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LH는 무주택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매입임대, 전세임대 등 다양한 맞춤형 주거복지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매입임대는 도심내 최저소득층이 현 생활권에서 거주가 가능하도록 기존의 다가구 주택을 매입해 시세의 30% 수준으로 공급하는 유형으로 2005년부터 현재까지 2954호를 매입해 기초생활수급자한부모가정 등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240호를 매입해 서민들의 주거공간을 확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기존주택에 대해 전세계약을 체결한 후 무주택 서민에게 재임대 하는 전세임대 사업은 최대 5500만원까지 전세금을 지원하며 기초생활수급자소년소녀가장신혼부부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합니다. 전북본부는 현재 6036호를 관리하고 있으며 올해에도 1535호를 지원해드릴 계획입니다.● [서기식 본부장은] '화합' 강조 '청렴' 실천, 주요 부서 거친 업무통지난달말 부임한 서기식 본부장은 정읍에서 태어나 고창에서 초중학교를 다녔다.전라고, 전북대, 단국대(석사)를 졸업하고 지난 1989년 LH에 입사한 이래 27년간 근무하면서 전북지역본부와 본사 감사실, 인사관리처, 임대공급운영처 그리고 경기지역본부 등 주요 부서를 두루 거친 핵심 업무통으로 통한다.특히 차장으로 승진해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전북본부에서 근무했으며 2007년 부장 승진과 함께 전북본부에서 1년간 근무해 이번까지 3번째 전북본부과 인연을 맺으면서 지역사정에 누구보다 밝다.또한, 업무 처리를 완벽하게 한다는 평가와 함께 소통과 화합을 중시하며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통한 즐거운 직장 만들기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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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현규
  • 2016.09.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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