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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카드뉴스]먹부림의 行進

먹부림의 行進#표지.먹부림의 行進(행진)#1.맛의 고장으로 정평이 난 전주. 비빔밥과 콩나물국밥은 이미 유명하죠.#2.하지만 그것 말고도 전주의 맛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풍성합니다.올해도 돌아온 전주국제영화제를 맞아, 영화의 거리를 중심으로 그간 가려져 있던 맛집들을 소개해볼까 해요.#3.[일본 가정요리 전문점 야모리 식당]와쇼쿠(和食)를 맛볼 수 있는, 전주의 몇 안 되는 곳.메뉴엔 돈부리, 라멘, 카레 종류 등이 있고, 특히 일본식 튀김 샐러드는 꼭 먹어봐야 할 별미.#4.[직접 키운 신선한 재료 식구]한국의 진정한 집밥을 맛보고 싶다면 이곳을 추천합니다.일가족이 직접 농사 지어 가꾼 재료나 로컬 푸드만을 사용. 대표 메뉴는 김치찌개. 고추장불고기, 닭볶음탕 등도 추천할 만.#5.[로맨틱한 맛과 멋 양식당]유럽에 여행 온 듯한 여유로운 분위기가 특징.이탈리아 요리를 기본으로 다른 요리를 접목시킨, 다양한 맛을 수 있어요. 음식이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지만, 기다림이 상쇄될 정도로 맛과 분위기는 인정.#6.[한국식 이탈리안 음식 시즌 테이블]이탈리안 음식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한 음식을 선보이는 레스토랑. 한국인이 먹었을 때 속이 편안하고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을 목표로 했다고.리코타 치즈 샐러드, 청양 치킨 크림 파스타, 꽃등심 스테이크가 특히 인기 메뉴.#7.[추억의 옛날 분식 금암면옥]계란 풀어 넣은 걸쭉하고 고소한 국물이 일품인 옛날 칼국수 전문점.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친근한 맛으로 손님을 사로잡습니다.옛날식 돈까스와 수제만두 등의 분식 메뉴도 함께 파니 참고하세요.#8.[60년 넘는 전통의 군만두 일품향]1950년 개업, 전북일보와 같은 나이를 자랑하는 전주의 터줏대감 격인 중화요리점.서비스 군만두는 잠시 잊으세요. 이곳의 군만두는 프리마 돈나랍니다.테이크아웃 해다가 야외상영장에서 팝콘 대신 먹어도 꿀맛 인정.#9.[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쿠키 하펠]아토피가 있는 딸에게 간식을 만들어 주다 매장까지 차렸다는 간식 전문점. 그런 만큼 정직한 재료를 승부수로 내걸었습니다.쿠키 종류만 20여 가지, 수제 초콜릿과 케이크도 유명합니다.#10.[프랑스식 수제 파이 두 쉐르]프랑스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쌍둥이 자매가 운영하는 정통 프랑스식 수제 파이 전문점. 자연주의 디저트를 고집합니다.크레이프와 딸기 타르트가 이 집의 최고 인기 메뉴. 수토요일에 플리마켓을 엽니다. 다른 요일에는 방문 전에 미리 연락해보시길.#11.[분위기가 필요할 땐 브라운 테이블]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전부 올라가고, 그러고도 그냥 돌아가기 아쉬울 때 한 잔.일본식 요리와 맥주, 사케, 와인 등을 파는 일본식 펍으로, 통삼겹살 간장 조림 등의 안주 메뉴들도 인기가 많습니다.#12.눈과 귀가 즐거운 영화제. 입과 코도 잊지 말고 즐겁게 해주세요! 전주의 맛이 함께합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25 23:02

부안출신 박태석 농협은행 부행장 "전북 다양한 지역발전 모델, 농협은행에 적용 상생발전"

전북 출신 박태석(59·부안 하서) 농협은행 부행장이 최근 부임 100일을 맞았다. 전북지역 농협본부장을 지내다 그는 올초 은행의 핵심분야인 농업·공공금융본부장으로 임용된 바 있다. 지난해 농협중앙회 경제상무로 임용된 김창수 상무에 이어, 2년 연속 농협의 집행간부에 전북출신이 발탁되면서 지역 농업인의 긍지를 높인 그로부터 부임 소감과 함께 향후 전북 농업의 발전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농협은행 부행장으로 부임하신지 100일이 지났는데 그간의 소회를 부탁합니다.“30년 가까이 농협인으로 살아오면서 농업·농촌 발전을 위한 마음 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쉴 틈 없이 전진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에 넘치게 중책을 맡은 이후 지역과 농협 내·외부에서 저에게 바라는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에 기쁘면서도 강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전북 농업인을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전국의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현재 맡고 계신 농협은행 부행장은 어떤 일을 하는 곳입니까.“저는 농업·공공금융본부의 본부장으로서 전국 지자체 및 교육금고 관리와 농업정책자금 지원, 대손보전기금 관리, 공무원 및 기관 추진 등 농협은행의 핵심역량이라 할 수 있는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별 영업 조직에 대한 현장 경영을 통해 일선 사무소와 경영진의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농협의 이념과 철학이 공유될 수 있도록 가교 역할도 수행하고 있습니다.”-전북에서 지역책임자로 활동하시면서 느낀 소감은 어떻습니까.“1년 6개월 동안 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지냈고, 이후 1년간은 농협중앙회의 전북본부장으로 범농협의 전북지역 책임자 역할을 맡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고향 전북의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나름 노력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고향 전북에서 일선 직원들은 물론 도민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최대 금고은행으로서의 위상 구축, 종합업적평가 상위권 달성 등 사업 성장, 지역민과 함께하는 사회공헌활동 등에 나름의 성취를 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올초 부행장 발령으로 지역을 방문하고 고향분들을 뵙는 기회가 줄어든 것이 아쉽긴 합니다.”-앞으로 농협은행이 지향해야 할 바는 무엇이고 이와 관련해서 전북은 어떤 식으로 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국내 유일의 민족자본은행인 농협은행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우리만의 강점을 살려 거듭나야 합니다. 특히, 농협은행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협동조합은행으로서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서민, 영세 자영업자, 중소기업 지원 등 지금까지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분야에서 더욱 큰 성과를 내야 합니다. 농업지원자금 분야를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에 접목시켜 중국, 베트남 등의 국가에 진출하는 신성장 동력 발굴의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국내 독보적인 농촌지역으로서 전북 지역이 갖고 있는 다양한 지역발전 모델들을 현지에 맞게 변형하여 적용한다면 농협은행과 전북이 윈- 윈 할 수 있다고 봅니다.”-해마다 지역 시군 금고 유치를 위해서 지방은행 등과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습니다.“사실 농협은행은 정부의 정책사업 파트너로서 지역사회를 가장 잘 아는 지역발전 선도은행이며, 특히 전국 260개 지자체·교육금고 중 181개 금고의 일반회계를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일등 금고은행입니다. 전북지역은 농협은행이 도금고, 교육금고를 비롯하여 16개 시군금고 중 14개를 담당하고 있고 올해는 이 중 6개 금고의 재계약을 앞두고 있습니다. 타 은행과는 차별화된 지역사회 공헌활동 등을 통해 금고관리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든든한 힘이 되는 버팀목 은행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재계약 대상금고의 100% 건전계약을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요한 것은 농협은 그 형태나 명칭에 불구하고 하나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최근 취임한 신임 농협중앙회장의 의지를 받들어 ‘농협의 주인은 농민이다’는 슬로건을 농협의 조직문화 속에 투영시키고자 합니다.”-전북은 농도 전북을 표방하고 있으나 막상 농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취약한 상태인데 향후 발전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우리 전북은 자타공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농도’입니다. 하지만 속내를 보면, 전북은 그 규모나 농업환경이 우수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벼농사 중심의 농업으로 인해 농업인의 고수익 창출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전북농업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향후 축산이나 원예 등 집약도가 높은 고부가가치 농업 분야로의 전환 노력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최근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북지역에도 젊은 농업인구가 늘어나고 있고, 특히 후계농업경영인 점유비율이 높아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전북농업의 발전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농민과 농업, 농촌이 즐거운 삼락(三樂)농정, 토탈관광 시스템 구축, 탄소산업 4대 분야 육성 등을 통한 생동하는 전라북도 실현을 위한 전북도의 노력에 발맞춰 저희 농협은행도 다양한 분야에서 전북 농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농생명산업 본격 추진을 위한 인프라 구축과 전북지역의 풍부한 관광 자원을 연계한 농촌경제 활성화에 대한 관심과 노력이 계속된다면 전북 농업, 더 나아가 전북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조만간 가능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도민들께서 주신 과분한 사랑과 관심을 소중하게 지키고 키워서 도민들에게 기쁨과 보람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특히, 전북농협이 지역의 대표금융기관으로서 지역과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지역 발전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모든 힘을 다할 생각입니다.”● [박태석 부행장은] 계획보다 실천 우선, '금고업무 달인' 정평NH농협은행 박태석(59) 부행장은 부안 하서면이 고향이며, 부안중, 부안농고, 농협대학교 협동조합과를 졸업했다. 1987년 농협중앙회 입사한 이래 주로 전북지역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업무와 지역을 거친 전북농협의 산 증인이다. 특히, 2007년 전북금융지원팀장으로 근무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전북도금고를 각고의 노력으로 농협에 유치하면서 명실상부한 ‘금고업무의 달인’으로 인정받고 있다.농협에 근무하면서 그가 한가지 실천한 것은 가정보다 직장을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전북본부 금융팀장때 아내가 아파 응급실에 실려갔으나 금고 유치를 위해 관계자를 만나러 병원에서 나와 만찬자리에 간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런 열정이 뒷받침돼 이후 그는 전북금융부본부장, 군산시지부장, PB마케팅부장, 리테일고객부장을 거쳐 지난 2013년 6월부터 농협은행과 농협중앙회의 전북본부장을 지냈다. 농협본부장 시절, 농업인단체연합회 행사때 축사를 한 것은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인데, 이는 중견간부로 재직할때 농민들이 천막농성하는 현장에서 넥타이를 매고 함께 잠을 자는 등 스킨십을 강화했기 때문이다.현재 전국적으로 농협직원은 약 10만명 남짓한데 이중 전북에는 6500명이 재직중이다. 전북 출신 임원은 박태석 농협은행 부행장과 김창수 중앙회 상무 등 단 2명뿐이다. 김종운 농협케미컬사장과 김문규 농협물류 전무는 농협을 떠나 자회사에 근무하고 있다.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남2녀중 장남이어서 부안농고로 갔는데 전교 1위를 유지했다고 한다. 농업직공무원을 염두에 두고 고3때 농업지도사에 합격, 부안농촌지도소에 근무했으나 이후 농협대에 진학했다.후배 직원들에게 “계획보다 실천이 우선”이라고 말하는 그는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일처리와 함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데 앞장서 온 덕장 스타일의 경영자라는 평을 듣고 있다.

  • 기획
  • 위병기
  • 2016.04.25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님아, 그 개를 버리지 마오.

#표지.님아, 그 개를 버리지 마오.#1.강아지, 정말 귀엽죠.#2.큰 녀석은 큰 녀석 나름대로,#3.작은 녀석은 작은 녀석 나름대로,#4.개는 귀엽고 매력적인 반려동물입니다.#5.이렇게 사랑스럽지만, 거리를 떠도는 신세인 개가 여전히 많습니다.#6.그래서 시행된 제도가 동물 등록제입니다. 생후 3개월 이상 된 반려견은 동물병원 등 대행기관에 가서 반드시 등록해야 합니다.#7.2013년 처음 시행됐고, 2014년부터는 등록하지 않을 때 경고 후 과태료(두 번째 적발 때 20만원, 세 번째 적발 때 40만원)가 부과됩니다. 전북지역에서는 올 3월까지 총 1만9097마리가 등록됐습니다.#8.RFID(무선전자개체식별장치) 방식의 마이크로칩을 동물의 몸에 이식하거나 표식을 다는 방식으로 등록하는데, 이를 통해 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주인을 찾아주기 쉽다고 합니다.#9.그럼 유기견도 많이 줄어들었겠네요?#10.유감스럽게도 정반대입니다. 2012년 2279마리였던 유기견은 지난해엔 2705마리를 기록해 오히려 늘어났습니다.#11.반면 동물 등록제 대상이 아닌 고양이는 길에서 많이 줄어들었죠. 지속적인 중성화 수술 후 방생 등의 효과로 분석됩니다.#12.왜 등록제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걸까요?#13.일단 등록을 강제할 방법이 없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등록을 하지 않더라도 적발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겁니다.#14.전북도 측은 전수조사는 실시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는데요.전북도에 따르면, 2014년 이후 반려견을 등록하지 않아 과태료를 물린 경우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모든 반려견 실태를 일일이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고요.#15.또 동물 유통 과정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바로 공장식 애견농장의 존재입니다.#16.동물보호단체는 공장식 애견농장이 존재하는 이상 동물 등록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행정 당국이 애견번식장과 판매업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17.귀찮아서, 잃어버릴 것 같지 않아서 등록을 차일피일 미루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18.유기견을 줄이려면 인식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임영기 케어 사무국장은 돈만 있으면 쉽게 반려동물을 구매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언론에 의한 반려동물 상품화도 문제다. 이로 인해 유기동물이 양산된다고 지적합니다.#19.종합해보면, 인센티브 책정 등을 통해 동물 등록을 유도하고, 유통 구조를 개선해 반려동물의 무분별한 공급을 막고, 견주 각자가 좀 더 책임감을 갖는 등 인식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지요.#20.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들의 친구. 더는 길거리로 쫓겨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21 23:02

[참여&소통] 다문화 인식개선 교육

강사님! 우즈베키스탄은 130개 민족이 섞여 살고 있다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다문화 인식개선교육 중에 한 학생이 던진 질문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결혼이주여성으로서 다문화 이해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베타마라씨(우즈베키스탄44세)는 전라북도의 여러 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의 나라에 대한 문화와 사회, 언어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학생은 우즈베키스탄에 어떻게 130개나 되는 민족이 섞여 사는지, 그곳의 교육과정은 한국처럼 12년인지, 기후는 어떤지 마냥 궁금하기만 하다. 베타마라씨를 비롯해서 결혼이주여성이 중심이 되어 다문화 이해교육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소속으로 다문화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국과 아시아가 문화적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세계시민의 하나로서 함께 살아나갈 수 있음을 교육활동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2015년 여성가족부의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결과에 의하면 다문화 인식이 4년 전보다 개선되었고 젊은 층일수록 수용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는 2015년과 2011년 두 차례 진행되었는데, 2015년의 다문화 수용성 조사는 통계청 승인을 받은 최초의 정기조사로 진행되었다. 이 조사는 전국 성인 4000명과 122개 중고등학교 3640명을 대상으로 문화 개방성, 국민 정체성 등 8개 구성 요소별로 설문결과를 종합해 다문화 수용성 지수를 산출했다.조사결과 성인의 다문화 수용성 지수는 53.95점, 청소년은 67.63점으로 조사됐다. 성인의 경우 지난 2011년 조사에서는 다문화 수용성 지수가 51.17점이었던 것보다 2.78점 상향된 결과를 보여 종전보다 다문화에 대한 생각이 다소 수용적인 방향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령대별로는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청소년은 67.63점, 20대 57.50점, 30대 56.75점, 40대 54.42점, 50대 51.47점, 60대 이상 48.77점으로 젊은 연령층 일수록 다문화에 수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다문화 교육과 행사, 이주민 관련 자원봉사활동과 동호회 활동 등에 대한 참여 경험이 있을 경우 성인과 청소년 모두 다문화 수용성 지수가 높게 나타났다. 다문화 이해교육과 다양한 활동참여가 다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높이는데 효과적인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다문화 교육을 한 번 받은 성인의 경우 수용성 지수가 56.29점, 두 번 받은 경우 55.13점에 그친데 반해, 세 번 이상 받은 경우 수용성 지수가 64.03점으로 크게 높아져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교육이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우리 국민의 다문화 교육 이수와 활동 참여가 매우 저조한 것으로 파악돼 이에 대한 개선책이 요구된다. 성인의 경우 다문화 교육 참여 비율은 5.5%, 자원봉사 참여는 4.2%, 동호회 참여는 2.7%에 머물렀다. 이에 반해 청소년의 경우 성인보다 참여율이 높았는데, 다문화 교육 참여가 25.7%로 성인에 비해 4~5배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 청소년의 다문화 활동 참여는 4.6%로 성인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의 다문화 수용성이 높은 것은 학교의 교육현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다문화 교육과 다문화 체험활동이 일정한 효과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전북, 다문화 인식 개선 교육으로 다문화 수용성 높아= 전라북도에는 14개 시군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설치돼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결혼이민자와 가족을 대상으로 다문화 이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교육청은 산하의 학교를 대상으로 찾아가는 다문화 인식개선교육과 다양한국 만들기 교육사업 등을 실시하고 있다.찾아가는 다문화 인식개선사업은 전라북도 내 중고등학교의 학생과 교사, 학부모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는데, 2015년 61개 학교에서 3478명이 이 교육을 받았다. 찾아가는 다문화 인식개선교육을 실시한 이후 학교 현장의 학생과 교사들에게 큰 호응이 있었다.교육청 관계자는 학교 현장으로부터 다문화 인식개선교육으로 인해 칭찬 전화까지 받았다면서 다문화 인식개선교육이 2016년에도 잘 진행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찾아가는 다문화 인식개선교육은 2014년부터 실시되고 있는데, 다문화 교육 강사로는 대학교수, 다문화 현장 전문가, 결혼이주여성 등으로 15명이 구성돼 활동하고 있다.전라북도교육청은 세이브 더 칠드런과 협약을 맺고 협력해 2015년 초등교원 414명 대상으로 다문화 인식개선교육을 실시했다. 전년도에 다문화 인식개선을 받은 초등학생은 1만4321명에 이르렀다. 올해도 다양한국 만들기라는 슬로건 아래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다문화 교육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먼저 다문화 교사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저학년과 고학년으로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기본교육과 심화교육을 통해 다문화 감수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문화 연수를 마친 교사들은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다문화 인식개선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게 된다. 다양한국 만들기 교육은 다양한 배경에서 자란 아동들의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편견 없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회조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2008년부터 다양한 다문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세이브 더 칠드런 안소라 다문화 사업팀장은 다문화 인식개선 교육을 실시한 이후 학생들의 의식이 다문화적 관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서히 아이들의 의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 교육을 통해 다른 나라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도록 비차별 교육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교사사회복지사, 연령 높을수록 다문화인식 낮아=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교육청, 그리고 세이브 더 칠드런 등 각 기관의 다문화 사회 인식개선교육과 다문화 활동 등은 다문화 수용성을 높여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해냈다.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에서는 이것을 증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상호 이해관계가 있는 친척과 친구, 직장 동료들의 경우 오히려 다문화 수용성 지수가 평균에 미달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사들과 사회복지사들의 경우 연령이 높을수록 다문화 인식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따라서 향후 다문화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올바른 이해와 긍정적인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맞춤형 교육과 대책이 필요하다.● [국민 다문화 수용성] 접촉 경험 등에 따라 차이맞춤형 교육홍보 필요여성가족부가 2015년에 실시한 국민 다문화 수용성 조사결과를 국민 다문화 수용성은 지난 4년 전 보다 나아진 것으로 나타났지만 연령대나 직종, 다문화 교육활동 경험, 접촉교류 여부 등에 따라 다문화 수용성이 차이를 보여, 다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 확산을 위해서는 대상별 눈높이와 상황에 맞춘 다문화 이해교육과 홍보가 중요한 것으로 나타났다.특이할 만한 것은 일반 국민들의 다문화 수용성이 높아진 반면, 외국인이주민을 친척(55.67점), 친구(58.1점), 직장 동료(60.38점)로 둔 경우 다문화 수용성 지수가 높았으나, 단순히 이웃(52.41점)해 사는 경우에는 지수 평균에 미달했다는 점이다.또한 초등학교 교사와 사회복지사들의 경우 연령이 낮을수록 다문화 수용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반대로 연령대가 높을수록 초등학교 교사와 사회복지사의 다문화 수용성이 낮게 나타났다.우리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이 지난 4년에 비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요 선진국에 비해서는 다문화 수용성이 낮게 나타났다.예를 들면 일자리가 귀할 때 자국민을 우선 고용해야 한다(한국 60.4, 스웨덴 14.5)와 외국인 노동자를 이웃으로 삼지 않겠다(한국 31.8, 스웨덴 3.5)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생각한다(한국 55.3, 스웨덴 82.0)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연령대와 직종, 교육과 접촉 경험 등에 따라 다문화 수용성에 차이를 보이고 있고, 주요 선진국에 비해 다문화 수용성이 떨어져 있어 향후 대상에 따라 맞춤형 다문화 인식개선교육과 다문화 활동 지원 등이 절실해 보인다.

  • 기획
  • 기고
  • 2016.04.21 23:02

[문화&공감] '국내 최고령' 전주 삼양다방

로변정담(爐邊情談) 그리고 다방. 전주의 다방에는 항상 이야기가 있었다. 달달한 차 한잔과 더불어 담배연기 자욱하게 둘러앉은 지인들과의 사소한 잡담들. 하지만 이들은 문화와 사회, 정치를 논하는 담론의 장소로까지 공간을 확장하며 이후 다양한 전시회, 음악공연, 집회장소로 다방을 이용했다. 전주 근현대 사람들의 사회적 사교를 책임지던 유일한 문화사랑방 다방(茶房),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현존하는 다방으로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삼양다방을 소개한다.△ 관공서 밀집지역에 문 열어= 우리나라의 커피 역사는 19세기 말까지 올라가지만,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공간은 거의 없다. 전라북도에도 다방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중앙동 2가에 요시다 다야라는 다방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이곳이 차 원료를 파는 집이었는지, 찻집이었는지 알 수 없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전주에 몰리면서 여관과 국밥집, 다방과 악극 등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불안한 사람들의 심리는 오히려 현실을 즐기는 쪽으로 흐르며, 전주의 근현대 일상생활문화가 만들어져 갔다고 한다.전주의 다방들은 1951년 지금의 영화거리 쪽 고향다방을 시작으로 왕궁, 우인, 카멜다방 등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삼양다방은 1952년 현재의 자리에 개업했다. 삼양다방이 있던 자리는 주변의 법원이나 시청, 도청 등의 관공서가 많아 영화의 거리 쪽 다방과는 분위기가 달랐다고 한다. 다방의 주 수입도 관공서에서 단체로 시키는 배달 차 주문으로, 결혼식이라도 있는 날에는 30잔, 40잔씩 차를 주문했다고 한다. 1950년60년대 전쟁과 근대화 등 급변하는 사회적 상황 속에서 사람들의 숨통을 돌리는 사교공간으로서의 다방의 역할은 197080년대에는 일반 대중들의 공간으로 커피향과 더불어 최신 서양문화를 접하는 데이트 공간으로 각광 받았다.△ 다방의 몰락= 그 이후의 다방의 몰락은 사실 다방 내부에 있었다기 보다는 외부 변화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관공서 이전과 커피자판기의 등장, TV나 미디어 확산으로 마담이나 레지와 같은 이쁜 연예인 같은 이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문화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다방이 가지고 있던 많은 기능들이 사라져갔다. 여기에 90년대 커피숍의 등장은 빠르게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를 주도하며 다방은 어르신들의 공간으로 점점 잊혀졌다.삼양다방은 2005년 지역 문화예술원로들의 모임인 계절회의 추억의 전시회로 다시 공간과 전주사람들의 문화를 알렸다. 그리고 2013년 새로운 건물주의 건물 매입으로 사라질뻔한 위기를 넘기고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65년째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구도심 활성화 지역네트워크 조성= 2014년부터 새롭게 리뉴얼된 삼양다방은 1950년대 피난온 영화인들과 전주영화인들의 아지트였던 다방을 기리고자 전주영화소품창고를 지하에 마련했고, 젊은 세대들과의 교감을 위해 핸드메이드 셀러들과 나도 마켓을 정기적으로 진행한다. 또 문지방(문화와 지역이 만나는 사랑방) 공방 입점으로 지역예술인들과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삼양다방 건물주와 삼양다방을 지키기 위해 모인 8명의 지역민들은 자발적으로 지금의 삼양다방을 지키며, 근현대 문화를 만들어가던 장소,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령 다방이 가지는 추억과 향수의 사회상을 담은 공간, 사람들의 만남과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하는 공간으로 가꾸고 있다. 또한 다방을 지켜왔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는 구술작업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2015년 삼양다방 단골회원제는 삼양다방을 중심으로 전주구도심의 10개 공간을 엮어 활성화를 도모하는 지역네트워크를 조성하기도 했다. 건물주는 임대비를 받지 않으며, 다방 수익은 구도심활성화를 위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변하듯, 삼양다방 리뉴얼도 3년을 맞았다. 장소의 고유성만이 다방의 가치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공간의 의미를 부여하는 장소성이 세대를 이어가며, 사람과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 가장 오래된 다방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찾고 싶은 그 무엇이 아닐까. 어느날 우연히 만난 1950년대 후반 클래식 음악감상 동호회 쌀롱 세리너를 이끌던 어르신이 주셨다는 음악은 오늘도 삼양다방의 공간을 채우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영화인 기리고전주영화소품창고지난 2014년 삼양다방 리뉴얼 때 조성됐다. 1950년대 피난 온 영화인들의 아지트였고, 전주영화인들의 사랑방이었던 것을 기리는 공간이다. 특히 1950년대 영화 거리에 있었던 우인다방은 현인이 주인인줄 알 정도로 많은 영화인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우인다방의 종업원은 영화에 출연해 후에 여배우로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영화소품창고는 전주영화촬영소에서 제작돼는 영화의 시나리오 및 대본, 소품, 핸드프린팅 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배우 의상 등은 직접 입어볼 수도 있다. 전주영화의 역사와 전주지역 다방의 역사도 한눈에 알 수 있고, 삼양다방의 옛 집기들도 함께 전시돼 있다.한켠에 마련된 소셜룸은 15명 정도의 모임이 가능한 공간이 있어 프로젝트 사용도 가능하며, 찻값만 내면 공간사용은 무료다. 영화 7번방의 선물 명량 은밀하게 위대하게 하모니 평양성등의 소품과 제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 맞춰 전주지역에서 촬영된 도리화가 사도 마담뺑덕 상의원 타짜 신의 손 등의 소품이 새로 전시된다. 소품은 전주 영상위원회에서 제공 및 관리하고 있다.● 예술로 通하다문지방지난 2015년 7월 삼양다방 지하에 조성된 공방이다. 문화와 지역이 만나는 사랑방이라는 뜻으로, 통신판매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셀러들과 의기투합해 만들어졌다. 직접 손으로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을 원칙으로 작업실과 판매장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지역작가들의 작품과 아트상품도 위탁판매 하고 있다. 매월 첫째주 토요일에 진행하는 나도 마켓에 참여하는 20여개 셀러들의 제품을 중심으로 꾸며져 있으며, 특히 동문거리 미술작가 지망생과 작가가 함께 그린 동문캔버스 작품도 함께 전시돼 있다. 현재는 메리엘(캔들), 은은한지(한지악세사리), 바농하나(패브릭)등의 작업실을 중심으로 핀프로젝트(석고방향제), 밴지(악세사리), 달로별(악세사리), 더브리에(프리저브드 플라워), 사이프러스(조명), W-shop(우드펜), 캔즈(수첩)등이 입점해 있다. 옛 문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직접 만들어보고자 하는 모두에게 공간이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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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9 23:02

19일 출범하는 전북문화관광재단 이병천 대표이사 "예술인에겐 든든한 등받이, 도민에겐 따뜻한 이웃 될 터"

전북문화관광재단(이하 문화재단)이 19일 출범한다. 재단 설립논의부터 출범까지, 오랜 논란과 진통을 겪어온 만큼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문화재단은 1부 1단 4팀 24명으로 출발한다. 초기에는 전북도에서 이관받은 지역문화예술 육성을 위한 예술인과 도민 지원사업이 중심이지만 앞으로 전북문화를 살찌우기 위한 기획사업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병천 문화재단 초대 대표이사에게 문화재단의 역할과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문화재단이 드디어 출범합니다. 소감이 어떤가요.4개월여 동안 재단 출범을 준비했습니다. 처음 세웠던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지, 문화예술로 도민들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섭니다. 그래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있습니다.- 각오라 하면 문화재단의 역할을 되새긴다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문화재단은 지역 예술인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지역예술인들이 의지할 수 있는 등받이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재단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입니다. 예술인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따뜻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 예술인 스스로 동력을 생산하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곁에서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이가 필요한데 재단이 그러한 역할을 할 작정입니다.- 예술인 지원 외에 어떤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까.이미 문화재단이 있는 자치단체들이 많습니다. 타 지역 재단 성과를 토대로 전북재단이 해야 할 일을 차질 없이 하고 싶습니다. 예술인 지원사업외에 도민들의 문화향유 확대를 위한 교육사업 등도 이어가게 됩니다. 더 많은 이들이 문화예술을 통해 생활을 가꿔갈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 사업을 확대하려면 예산확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지금은 도에서 지원하는 예산으로 기본 사업비를 충당하는 시스템입니다. 여기에 메세나사업을 활성화해 후원을 받는 방법을 적극 검토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후원이나 투자 필요성을 알리고 참여를 이끌어낼 계획입니다. 장르별 후원이나 결연, 펀드 조성 등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메세나운동을 위한 여건부터 조성해야 합니다.현재의 사업비로도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할 방침입니다. 선택과 집중이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이 지금은 소액 다건으로 나눠주기식이라면 지원건수를 줄이고 금액을 늘려 지원에 대한 의미를 더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의견수렴을 통해 개선방안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현재는 전북도의 이관업무가 대부분이고, 조직 구성도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요.조직 출범 초기에 나타나고 부딪치는 문제들을 겪고 있습니다. 현재 재단은 도에서 이관된 업무 중심입니다. 또한 공무원과 민간 전문가가 섞여있습니다. 도나 문화예술인들의 기대와 요구도 높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잘 풀어내고 절충해야 합니다.내부적으로는 인력과 조직진단이 선행돼야 합니다. 현재 살피는 중인데요, 연내에 인력과 조직 충원에 대해서는 방향을 잡을 것 같습니다. 지역 예술인을 만나 꾸준히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재단이 나아갈 방향도 점차 정리될 것입니다. 조직 내부 인력들도 계속 손발을 맞추며 다듬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화재단은 문화예술에 대한 전문성과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자율성과 전문성 확보 어떻게 할 계획인지요.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입니다. 지금은 초기여서 도의 지원이 불가피하지만 재단 출범 목적이 행정보다 전문성과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예산의 자율성 확보인데, 그 부분에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업비의 대부분이 도와 정부지원금이고, 여기에 메세나나 자체사업비 등이 더해질 것입니다. 예산부문에서도 독립할 수 있도록 신뢰를 얻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문화재단 비전은 무엇입니까. 문화로 싹트고, 관광으로 꽃피는 전라북도를 슬로건으로 정했습니다. 지역문화 역량을 강화하고, 문화공동체를 육성하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지역활성화가 재단 목표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술창작지원 네트워크 구축과 문화정책개발, 문화자원조사연구, 인재양성, 문화나눔 확산, 문화예술교육 다양화와 기회 확대, 문화적 지역재생, 커뮤니티 아트 확대, 예술관광 활성화와 문화관광산업 촉진사업들을 진행하게 됩니다. 기존 이관사업을 다듬고 새로운 사업을 발굴해 확대하는 형식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출범식은 어떻게 치르십니까.19일 오후 2시 전북예술회관에서 공식적인 출범행사를 엽니다. 전북관광브랜드공연 성, 춘향이 이날부터 공연을 시작합니다. 고은시인과 황교익 맛 컬럼니스트의 특강도 준비했습니다. 지역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상상, 미래 전북전시도 예술회관에서 열립니다. 전북의 문화원형을 정리한 책 〈문화원형 101〉도 출범에 맞춰 발간합니다. 도민과 예술인에게 자극을 주고 자료를 제공하고 힘이 되는 재단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이병천 대표이사는] 전북작가회의 이끈 '소설가가 인정하는 소설가'이병천 전북문화관광재단 초대 대표이사는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고, 이듬해 경향신문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등단했다.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소설가가 인정하는 소설가로 입지를 다졌다.소설집 〈사냥〉과 〈홀리데이〉, 중편집 〈모래내 모래톱〉,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 〈저기 저 까마귀떼〉 〈에덴동산을 떠나며〉 〈90000리〉 〈북쪽녀자〉, 어른을 위한 동화 〈세상이 앉은 의자〉 등을 잇따라 출간했다. 특히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는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주목받았으며, 〈모래내 모래톱〉과 〈에덴동산을 떠나며〉 등도 전주와 완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이 대표는 지역 언어와 문화를 문학 소재로 꾸준히 활용해왔다. 〈전주한옥마을〉과 〈당신에게 전주〉등 전주를 기반으로 한 인문지리서도 펴냈고, 지난 2002년 월드컵 개최 기념 음악극 〈혼불〉도 집필했다.이 대표는 지역 문단을 살찌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전주대와 우석대에서 소설 창작을 가르쳤으며, 전북작가회의도 이끌었다. 특히 지난 2007년에는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47개국 72명의 작가를 초청해 문학페스티벌을 열기도 했다.또한 30여년 동안 전주MBC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지역의 문화자원을 방송 콘텐츠로 제작해 수차례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주의 역사와 인물, 음식, 전설 등을 토대로 짧은 판소리, 전주음반작업을 했고, 그냥 버리기 아까운 전라도 사투리다큐와 녹두장군 한양 압송차라는 마당극을 만드는 등 전북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역문화를 가꿔왔다.완주 출신이며, 전주고와 전북대, 우석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사)혼불문학 이사장을 맡고 있다.

  • 기획
  • 은수정
  • 2016.04.18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전라북도, 춘추전국시대 개막?

전라북도, 춘추전국시대 개막?#표지.전라북도, 춘추전국시대 개막?#1.대 이변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이 참패를 거둔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원내 제1당으로 약진했고, 국민의당은 호남과 비례대표에서 선전해 제3당으로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새누리당 122석더불어민주당 123석국민의당 38석정의당 6석무소속 11석#2.전북지역도 이변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전체 10석 중 국민의당이 7석을 차지해 30년 만에 지역 맹주가 바뀌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2석으로 크게 밀려난 가운데, 새누리당은 20년 만에 깃발을 꽂았습니다.새누리당 1석더불어민주당 2석국민의당 7석#3.전라북도 지역 선거구, 각각의 결과를 한 번 볼까요?#4.[전주갑]국민의당 김광수 43.3%더불어민주당 김윤덕 42.4% (795표차)[김광수, 김성주김윤덕강동원 이어 전북도의원 출신 경쟁력 다시 한 번 입증]#5.[전주을]새누리당 정운천 37.5%더불어민주당 최형재 37.4% (111표차)[정운천, 20년 만의 전북 여당의원 탄생야당의원 열 몫 기대]#6.[전주병]국민의당 정동영 47.7%더불어민주당 김성주 47.0% (989표차)[정동영, 지역 확실히 챙기겠다 자세 낮추니 통했다]#7.[군산]국민의당 김관영 47.1%더불어민주당 김윤태 34.8% (1만5919표차)[김관영, 둥지 바꿔 재선 성공국민의당 내 확실한 입지 기대]#8.[익산갑]더불어민주당 이춘석 50.0%국민의당 이한수 35.6% (1만181표차)[이춘석, 스캔들 공세 떨치고 3선 문 활짝 열어젖혔다]#9.[익산을]국민의당 조배숙 46.1%더불어민주당 한병도 36.8% (6876표차)[조배숙, 4년 전 경선 탈락 비운 딛고 오뚝이처럼 일어서다]#10.[정읍고창]국민의당 유성엽 48.0%더불어민주당 하정열 23.9% (2만1939표차)[유성엽, 당적 옮겼어도 유권자들은 믿었다가볍게 3선 성공]#11.[남원임실순창]국민의당 이용호 39.1%무소속 강동원 24.9% (1만1583표차)[이용호, 지성이면 감천인가도전 12년 만에 여의도 직행 티켓]#12.[김제부안]국민의당 김종회 46.0%더불어민주당 김춘진 42.9% (2324표차)[김종회, 소지역주의 통했나3선 김춘진 꺾고 웃었다]#13.[완주진안무주장수]더불어민주당 안호영 48.6%국민의당 임정엽 45.1% (3259표차)[안호영, 소지역주의 열세 딛고 화합의 장 만들어냈다]#14.비례대표는 전체 47석 중에서 새누리당이 17석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각각 13석씩을 가져갔습니다. 정의당은 4석을 얻었네요.새누리당 33.50%, 17석더불어민주당 25.54%, 13석국민의당 26.74%, 13석정의당 7.23%, 4석#15.나머지 정당은 모두 원내 진입 기준 3%에 미달하는 표를 얻었네요.기독자유당 2.63%민주당 0.88%녹색당 0.76%민중연합당 0.61%기독당 0.54%노동당 0.38%#16.이번 총선 결과로 대선 유력 주자들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3대 정당 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가운데, 반기문 UN사무총장의 향방에도 관심이 쏠립니다.한편 전북 지역에서는 전략적 투표가 빛난 한 판이었습니다.#17.앞으로 펼쳐질 제20대 국회의 4년. 우리 삶은 더 나아질 수 있을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14 23:02

[참여&소통]농촌공동체 살리는 방법-①농민에게 먼저 '기본소득 월급' 주자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인류에게 노동의 종말을 경고했다. 정보화 사회가 창조한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미아가 될 것이다. 또 사물인터넷이 장악할 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는 이윤도, 소유도, 자본주의도 무의미해질 것라고 단언했다. 곧 협동조합 모델을 통한 협력적 공유경제만이 유의미해지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마침 나라 안팎으로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하다. 기본소득(basic income)이란 개별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지급되는 소득을 말한다.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상관없는 것이다. 한계비용이 자꾸 제로로 수렴하고 노동이 결국 종말을 맞이하려는 오늘날, 기본소득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와 우리의 숙제로 근접해있다. 유럽 등 선진 외국은 이미 실현단계에 접어들었다. 놀랍게도 자본주의의 맹주 미국은 이미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알라스카주에서 1982년부터 공유재인 석유를 재원으로 전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핀란드는 전 국민에게 월 80유로(약 100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을 검토하고 있고 스위스도 올해 기본소득을 국민투표에 부친다고 한다.△유럽 선진 농업국서 배우자= 국내에서는 녹색당이 이번 총선에서 모든 국민에게 조건없이 월 40만원 기본소득을 핵심공약으로 내걸었다. 특히 농민에게 먼저 기본소득을 주자고 주장했다. 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지키는 공무와 같은 성직을 맡고 있어서 그만큼 대접해야 한다는 논리다. 무엇보다 농민이 농촌을 떠나지 않고 생활하려면 기본소득 말고 다른 묘책이 없다는 절박한 현실인식이 깔려있다. 현행 4% 대의 농가 소득 대비 직불금은 일부 대농을 제외하고는 농가소득을 보전하기에는 아무런 실효성도 없다. 농가소득의 50%~90%까지 보전되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선진농업국을 배우고 따라하자는 제안이다.물론 농민 기본소득제는 국민적,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제도라도 충분한 발효와 숙성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농민부터 먼저 주자고 하면 농민이 아닌 일반 국민들은 좀 불편할 수 있다. 사는 게 역시 힘든 도시노동자, 도시빈민들은 왜 농민에게만 먼저 주느냐며 따지고 저항할지 모른다. 마치 내 일처럼 조세부담, 국가재정을 심각하게 걱정할 수도 있다.열쇠는 농정의 진실과 기본소득의 명분을 어떻게 국민 속으로 널리 전파해 공감을 얻는가에 달려있다. 아예 농민 기본소득이라는 말과 개념이 낯설고 어려우면 기본소득이라는 말을 안 쓰면 된다. 표현이나 용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본소득제라는 형식보다 실질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 기존의 농업직불금 외에, 농민연금, 농가배당, 농촌주민수당 등으로 얼마든지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농민에게 월급을 주는 방법= 아무래도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는 시범적으로 단계별로 시행하면서 전체적인 일정과 강도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가령 단기적으로는 18~50세의 청장년 10만 명에게 5년 이상 150만원씩 월급을 지급하는 청년 공익영농요원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때 광역 또는 기초지차체 차원에서 지역농업 단위로 범위를 한정해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다음 단계에서는 영세농 기초생활연금제,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를 고려해볼 수 있다. 영세농 기초생활연금제는 소득인정액 하위 30%의 영세농에게,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는 65세 이상 고령농에게 지급하는 방식이다. 각각 90만명에게 월 50만원 씩 지급한다면 연간 예산은 각각 5조 4000억원이 소요된다. 현행 기초연금제도가 일종의 노인연금제라면, 영세농 또는 고령농 기초생활연금제란 일종의 농민연금제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2014년말 기준 약 275만명의 모든 농민에게 월 50만원씩 무조건, 무기한 지급한다면 연간 예산은 16조 5000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2016년 농림부 예산은 14조 3681억원이다. 과연 그 돈은 우리 농민이 원하는대로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가. 차라리 기본소득 같은 직접지불방식으로 전환하는 게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구체적인 연구와 실증적인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우리 농민은 농업의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다원적 가치를 지키는 사회공익 행위자이다. 얼마든지 존중되고 대접받아야 한다.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단지 농가의 소득안정에 그치지 않는다.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지위도 덩달아 향상된다. 귀농인 등 신규 농업인력도 자연스레 유입된다. 지역공동체 삶의 질도 높아진다. 농촌과 지역이 살아나면 도시와 국가도 살아난다. 무엇보다 국가와 정부가 나를 보살펴주고 있다는 기분은 모든 국민들을 행복하게, 춤추게 만들 것이다.게으른 베짱이마저 당당한 국민으로서 기본소득을 받을 권리가 있다. 기본소득의 기본정신이다. 베짱이 조차 기본소득을 받으면 능동성과 이타성이 늘어나 부지런하고 창의적인 개미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하물며 개미 중의 개미 농민에게 먼저, 기본소득을 주자는 이유를 더 설명해야 하나. 우리 국민들은 오직 이 말만 이해하고 공감하면 되지 싶다.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지킨다.● 국내외 '농민 기본소득제' 시행 사례- 부채 '뚝' 저축 '쑥' 인도 실험 성공- 마을마다 年 1억씩 충남 금산 농정우리가 농정의 선례를 많이 참고하는 일본도 2012년부터 일종의 농민 기본소득을 지급하고 있다. 농가의 고령화와 영농 후계자 부족이 심각해지자 의욕 있는 젊은 층을 끌어들여 농업을 활성화하려는 청년취농급부금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농업을 새로 시작하는 사람(45세 미만)에게 연수기간 2년과 농업 개시 후 5년 등 최장 7년간 해 마다 150만엔(약 2200만원)씩 최대 1050만엔(약 1억5400만원)을 지급하는 방식이다.EU(유럽연합)의 모든 회원국도 청년농업인 직접지불금(Young Farmers Direct Payment)을 시행하고 있다. 취농 5년 이내이고 39세 이하인 신규 취농자에 대해 기본 직접지불액의 25% 상당을 최대 5년간 증액 지급한다.본격적으로 농촌마을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제를 처음 실험하고 평가한 나라는 인도다. UNICEF(유엔아동기금)에서 기금을 지원받아 2011년부터 18개월 동안 농촌지역 9개 마을의 주민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했다. 최저생활비보다 높게 책정한 월 24달러를 매달 월급처럼 지급했다. 효과는 놀라웠다. 부채가 감소하고 저축은 늘어났다. 노동의 효율, 생산성은 2배 이상 늘어났다. 심지어 지급된 기본소득을 모아 소규모 창업을 하는 사례도 나타났다.충남에서는 농민은 물론 농촌 주민으로 대상을 확장한 충남형 농촌주민 기본소득제 도입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금산군 등 20~30호 정도 되는 과소화 낙후마을 몇 곳을 선정해 기본소득 시범사업을 예정하고 있다. 이미 충남연구원에서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실행 모델을 도출했다. 1개 마을 마다 1년에 1억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전북도 전형적인 농도(農道)로서 지리적환경적산업적으로 충남의 상황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더욱이 3농 혁신을 슬로건으로 내건 충남의 농정과 서로 일맥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다. 사람 찾는 농촌, 제값 받는 농업, 보람 찾는 농민이라는 3락 농정 정신과 목적은 농민 기본소득제의 그 것과도 다르지 않다.전북의 행정, 전문가, 그리고 농민(주민)이 뜻과 지혜를 모은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농민 기본소득제를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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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4 23:02

[문화&공감] '문화공간' 변신 시도하는 춘포역

문화현장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이 참여해 만드는 2016 시민기자가 뛴다-문화&공감지면이 오늘부터 11월까지 매주 화요일 게재됩니다.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운영되는 문화&공감에서는 도내 곳곳에서 문화예술을 매개로 이뤄지는 다양한 공동체활동과 지역만의 특색있는 문화를 가꾸는 단체나 공간 등을 조명하게 됩니다. 올해는 고길섶 문화비평가와 김정준 전북도립국악원 공연팀장, 김진아 익산문화재단 문화정책팀장, 서진옥 창작문화공간 여인숙 큐레이터, 이대건 고창 책마을 해리 촌장, 이수영 문화포럼 이공 대표가 참여합니다.아빠 왜 나무를 심는 거야?응, 춘포역이 외롭지 않게 우리 예인이랑 감나무를 심어주는 거지.지은 지 100년이 넘는 춘포역에서 젊은 아빠와 어린 딸이 나무를 심고 있다. 생전 처음 보는 낡은 기차역이 어린 딸은 마냥 신기하다. 커다란 기차역만을 알고 있던 아이는 아빠가 들려주는 춘포역의 이야기가 재미있다.지난 2일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사업으로 온새미로 창의체험지원센터, 익산시 관광두레, 곳간이 공동으로 트래킹과 나무 심기, 문화 체험이 진행됐다.시간이 멈춰버린 춘포역. 아이와 함께 공유하고 싶어 참가했다는 30대 부모는 아이와 함께 감나무를 춘포역에 심었다. 부녀는 나무를 심으며 푸른 춘포역의 미래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에 역사 지어= 춘포(春浦)의 우리말식 본 이름은 봄개, 봄나루를 뜻한다. 봄이 드나드는 물가라는 뜻이다.춘포역은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다. 슬레이트를 얹은 박공지붕의 목조 구조로 소규모 철도역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로 역사적건축적철도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210호로 지정되어 있다.우리 농민들로부터 높은 소작료를 거둬 식량을 수탈해간 현장으로, 아픔이 있는 과거가 춘포역을 포함해 일본 농장가옥, 정미소 등 역사적 장소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마을이다. 또한 춘포역은 전주와 이리시(익산의 옛 지명), 군산시를 연결하는 철도중심지로 기차가 30분마다 있었으며, 당시 까마귀 떼라고 표현할 정도의 검은색 교복을 입은 많은 학생들이 통학을 위해 춘포역을 이용했다. 1970~80년대 익산지역에 섬유산업이 발전하면서는 근처 공장으로 출퇴근하는 젊은 여자들이 많아져 딸촌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예전 주변에는 빵집, 술집, 고깃집, 식당 등이 즐비한 번화가였다. 하지만 2011년 5월 13일 전라선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폐역이 되면서 점차 마을도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근대 역사문화 담긴 공간= 효용을 다한 것처럼 보였던 춘포역이 변하고 있다. 몇 년 전 코레일로부터 지자체가 무상 임대를 받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사업이 추진중이다. 온기가 사라진 기차역에 사람들이 다시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지역의 의식 있는 문화단체와 시민단체, 예술인들이 춘포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춘포역은 기차역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추억의 장소다. 주변 볼거리로는 호소가와 농장이 복원되어 있고, 만경강 둑길을 걸을 수 있으며, 춘포 교회의 오래된 종, 일제 강점기 우정국 건물 등을 볼 수 있다.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 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춘포역은 전국의 사진작가들에게 이미 잘 알려진 곳이다.△ 이야기 그림 영상으로 기록= 춘포역에서는 역사를 활용한 문화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익산문화재단의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과 2013년 모리에 서다단체가 달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지역 예술가들의 프로젝트 진행도 활발하다. 봄 느린 기차라는 지역 예술가와 시민들의 모임에서 춘포역을 특별 관심 지역으로 지역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를 이어주었던 역사(歷史)로 새로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장을 만들겠다는 취지로 지역의 다양한 단체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현재 이 곳은 계절별로 역사문화 답사 프로그램이 운영중이다.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맞게 가족과 함께 하는 문화 프로그램으로, 춘포역을 바로 알고 인근 지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나누는 행사들 위주다. 주로 가족 단위로 모집된 참가자들은 직접 춘포역과 주변을 걸으며 잊혀지는 옛 역사를 느끼며 문화를 통한 교육을 하고 있다.춘포역에는 기차는 서지 않지만 역장은 있다. 제일 먼저 역에서 맞아주는 반가운 얼굴은 명예 역장 최중호 씨다. 코레일(구 철도공사)에서 정년퇴임을 한 명예 역장은 사명감을 가지고 낯선 방문객을 맞아준다. 역장을 통해 춘포역과 호남선, 전라선의 재미난 이야기는 보너스다.춘포에 대한 관심은 지역의 예술가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지역의 문화기획자와 글쟁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춘포의 첫 느낌과 그동안의 삶, 현재에 이르기까지 춘포와 역사에 관련된 생활을 개인의 삶과 시선으로 녹취, 서술, 사진, 영상 등 기록화 작업을 했다. 최진성 작가는 춘포역과 마을 연혁 등을 입체형 인포그래픽과 소품으로 만들고,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했다. 곽정숙 작가는 춘포역을 소재로 한 스토리텔링과 글쓰기, 현장체험학습 등을 진행했다. 춘포역 이야기라는 작은 전시회도 열렸고, 춘포에 핀 국화 웹툰 공모전도 진행됐다.△ 문화로 덧입혀지는 봄나루= 춘포역은 지금 아트공간으로 대변신을 꿈꾸고 있다. 주변의 근대 건물과 연계해 하나의 살아있는 마을 박물관으로, 주민들과 방문객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지역 어린이들과 방문객에게 추억의 공간과 역사 교육공간으로 변신하고 있다.지역주민들의 관심을 이끌기 위해 지역 공동체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춘포문화학교를 통해 마을 공동체 회복 및 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중이다. 춘포역을 교통 기능이 아닌 문화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에 주민 스스로가 나선 것이다.춘포역을 무대로 주민, 지역문화단체, 지역예술가들은 저마다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다. 이 상상은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고, 외로운 간이역 춘포역에 무지개가 뜰 날도 머지않았다.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오르세역이었다. 오르세 역은 1986년 오르세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오르세미술관은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을 비롯한 인상파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간이역의 새로운 변신을 보여주는 최고의 모델중 하나다.오래된 전통을 지켜가며 발전시키는 것은 낡은 것을 허물고 새 것을 짓는 것보다는 어렵다. 문화로 되살아나는 춘포역. 백년을 걸어온 그 길에 앞으로의 백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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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12 23:02

취임 한달 고재찬 전북개발공사 사장 "도민들 공감하는 사업 발굴·안정적인 매출구조 확보"

제8대 전북개발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지 한달여가 된 고재찬 사장은 그동안 공사의 내·외부적인 주요 현안을 파악하고 경영 방향을 설정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특히 고 사장은 전북개발공사의 고유 업무 외에도 매년 전북도의 감사 때마다 지적 받는 부채문제 등 풀어야 하는 과제가 적지않아 취임 이후 공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등을 모색하는데 주력해왔다. 이에 고 사장으로 부터 임기동안 전북개발공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갈 지 등에 대해 들어본다.-업무 파악이 끝났을 텐데, 전북개발공사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요.“전북개발공사는 2010년 이후 6년 연속 100억원대 당기순이익 달성과 그간 4166세대의 임대주택 건립을 통해 무주택 서민의 주거 안정에 기여해 왔습니다. 그러나 건설경기 침체와 대규모 택지개발 수요 감소 등 전북개발공사를 둘러싼 경영환경이 결코 녹록치는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전북개발공사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도민을 위한 지방공기업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도민이 공감하는 사업 발굴과 안정적인 매출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대표적인 공익사업인 공공임대주택을 매년 일정량을 공급하고 분양하는 중장기적인 선순환구조를 만들어 안정적인 매출구조와 서민주거안정에 기여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생각입니다. 다음은 사업 다각화와 부채감축입니다. 공익목적사업인 임대주택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수익창출이 가능한 신규사업 발굴 등 사업 다각화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전국 최하위의 열악한 자본금과 임대주택 확대로 높아진 부채비율을 낮추는 것이 현재 공사의 가장 큰 현안입니다”-경영철학과 임기동안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공사의 비전인 ‘도민과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공기업’을 실현하고, 정부정책과 전라북도 도정방향을 연계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창출된 이익을 도민에게 환원함으로써, 전북개발공사를 전국 최고의 지방공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저의 경영철학입니다. 경영철학의 실현을 위해 임기동안 실천하고자 하는 4대 핵심 전략을 말씀드리면 첫째,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 입니다. 기존의 도시개발, 임대주택 등 지방공기업 고유목적 사업과 더불어 첨단산업단지 조성, 도시재생사업, 관광분야 등 신규사업 영역을 다각화 하고 지자체 및 유관기관과 협업을 통해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는 지역현안사업을 발굴해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도민과 소통하는 현장중심 경영을 실천하고 사회환원 사업도 확대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고객 관련부서를 집적화해 종합적인 고객만족체계를 구축하고 찾아가는 고객만족 경영을 실천하며 고객의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경영정보 공개도 추진하겠습니다. 셋째, 지방공기업으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신규 일자리 창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법적 테두리 내에서 지역업체 참여율과 지역내 생산자재 사용율을 최대화 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키고 이를 통해 경쟁력 있는 신규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해 내겠습니다. 넷째,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조직을 재정비하고 가족 친화적인 기업문화 조성에도 노력하겠습니다.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 하고 도정 핵심과제를 적극 이행할 수 있도록 성과중심 조직으로 재정비하여 사업추진에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가겠습니다. -올 해 공사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무엇인가요.“공사의 올 해 역점사업을 세 가지 분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 도시개발분야입니다. 현재 진행중인 혁신도시(313만1000㎡) 부대공사와 만성지구(85만㎡) 단지조성 공사를 안정적으로 마무리하고 신규예정 택지개발지구 사업과 관련해 지자체와 협의를 진행, 지속가능한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두 번째, 임대주택 분야입니다. 관리중인 임대주택(3721호)에 대한 입주민 중심의 고객만족을 실현하겠습니다. 더불어, 농어촌 임대주택 2개 지구 220호와 만성지구 10년 공공임대 832호 등 3개 지구 1052세대를 금년내에 착공해 무주택 서민의 주거안정에 기여토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 관광사업 분야입니다. 새만금관광단지 게이트웨이(105만4000㎡) 사업의 실시계획 승인과 부지 양도양수를 진행하고 모항해나루 가족호텔 매출 극대화를 도모해 관광사업 활성화에 기여하겠습니다”-7년 연속 100억대 흑자경영에 도전하는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 방안이 있습니까?.“2015년 결산결과 매출 1921억, 당기순이익 176억을 달성함으로서 2010년부터 6년간 평균 125억의 당기순이익을 실현하였습니다. 참고로 전국 15개 도시개발공사중 2010년부터 2015년까지 6년 연속 100억이상 당기순이익을 달성한 기관은 부산, 경기, 전북 등 세 개 기관에 불과합니다. 2016년 한 해도 진행중인 사업을 원활히 수행하고 만성지구와 혁신도시 등 미분양 용지 매각을 통해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을 향상시켜 7년 연속 100억이상 당기순이익을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부채문제는 어떻게 대처할 계획인지 말씀해주십시오.“행정자치부는 지방공기업 부채감축목표제를 수립해 추진하고 있으며, 2014년 320%를 정점으로 매년 30%씩 감축해 2017년까지 부채비율을 230%까지 감축하도록 지침이 시달된 바 있습니다. 2015년도 우리공사 부채비율은 275.5%로 행자부 부채감축 기준(290%)을 준수하고는 있습니다. 이는 자본금이 전국 도시개발공사에서 최하위 규모이고 공익목적 사업인 임대주택 건립 확대로 임대주택관련 부채(2431억)가 전체 부채(5247억)의 46%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루어 낸 성과입니다. 향후 지속적인 흑자경영으로 자본규모를 확대해 재원조달능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공임대주택 조기분양 전환과 신규 수익사업 창출 등 자구노력을 전개함과 동시에 자본금 추가 증자를 통해 2017년까지 부채감축 목표 230%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농어촌 임대아파트 건립현황과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요.“민선6기 전북 발전의 핵심과제중 삼락농정인 ‘사람찾는 농촌·활력 넘치는 농산어촌 조성’에 부응하고자 우리공사에서는 농어촌 임대주택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농어촌 임대주택 사업은 총 540여억원을 투자하여 장수, 임실, 무주, 진안군 등 도내 4개 지역에 2019년까지 400세대 규모의 임대주택을 건립하는 사업입니다. 장수와 임실은 이미 사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올 해 7월경 실시설계를 완료해 11월경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2단계로 추진되는 무주와 진안 농어촌 임대주택은 2017년에 설계 및 용지보상에 착수해 2018년에 착공할 계획입니다. 향후에도 공사의 자본과 부채비율 등 재무역량을 고려해 2026년까지 농어촌 임대주택을 포함, 공공임대주택을 8000세대(누적)까지 확대할 계획입니다”● [고재찬 사장은] 탁월한 업무 추진력…직원들 인정 '소통의 달인'고재찬 전북개발공사 사장은 전주공고 토목과를 졸업하고 전북대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동 대학원에서 도시계획 관련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지난 1975년 공직에 입문, 전북도청 지역개발과장과 건설교통국장 등을 역임했다.또한 ‘자기 발전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지론으로 매사 성실하게 자기 관리에 철저를 기할 뿐 아니라 부하직원들에게도 항상 노력하는 삶을 당부하고 있다.특히 전북개발공사 사장 취임 이전에 관련 업무를 오랫동안 해온 공직자여서 전북도와 도의회와의 관계가 원만하며 업무 추진력도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또한 모든 일에 합리적이고 화합을 중시하는 성격을 갖고 있어 사장 취임이후에도 권위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직원들의 사기 진작과 후생복리에 많은 배려를 하면서 ‘즐거운 직장 만들기’에 힘쓰는 등 직원들로부터 ‘소통의 달인’으로 회자되고 있다.더욱이 취임 한달여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공사 사업추진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기존 3본부 체제를 1본부로 슬림화해 결제단계를 축소, 사업 추진의 신속성을 강화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등 업무 능력과 대인 관계에서 돋보이는 행보를 보이면서 직원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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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현규
  • 2016.04.11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교육, 투쟁.

<교육, 투쟁.>#표지.교육, 투쟁.#1.다시 다가온 4월.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학교 현장에서 추모 분위기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습니다.#2.그런데 말입니다#3.교육부가 시도교육청과 또다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4.이번엔 계기 교육을 위해 전교조가 내놓은 자료, 기억과 진실을 향한 416 교과서가 문제가 됐습니다.#5.교육부는 교육자료로서 부적합하다면서, 이를 활용한 교육활동을 금지하도록 했습니다.해당 자료가 부정적 국가관을 조장하는 등 정치적으로 편향돼 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6.김승환 전북교육감은 교육 실시 여부에 대한 결정권은 학교에 있다고 반박했습니다.#7.김승환 전북교육감과 교육부가 갈등을 빚는 것은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닙니다.전북교육청에 따르면, 교육부가 김 교육감을 고발한 것만 해도 2010년 취임 이후 무려 8번.#8.2011년, 시국선언 참여 교사 징계 및 교원평가시행계획 준수 관련, 교육부(당시 교육과학기술부)가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결과는 김승환 교육감 승.#9.2012년, 학교폭력(학생 간 폭력) 가해사실 생활기록부 기재 문제.전북경기교육청 이중처벌이 될 수 있다며 거부.전북경기교육청 승.#10.하지만 2015년, 직권 남용 혐의로 다시 검찰 조사 진행 중.#11.2013년 7월, 전북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자 교육부, 대법원에 제소.2015년 5월 14일, 대법원 전북학생인권조례 유효 판결.#12.2014년부터 어린이집 누리과정(만3~5세 무상보육) 예산 갈등.교육부 시행령상 시도교육청 책임 - 전북교육청 대선공약사항, 국가 책임현재 진행 중.#13.2015년 11월, 교육부 중고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 반대 입장.#14.2016년 4월 현재 전북교육청과 광주강원세종교육청이 국정 교과서에 대응하는 보조교재 공동 개발 중.#15.2016년 1월, 전북학교자치조례가 공포되자 교육부, 이번에도 대법원에 제소.법정 공방은 현재 진행 중.#16.전교조를 둘러싼 교육부-전북교육청 간 갈등도 수 차례.최근에는 방학 중 일직성 근무 문제로 마찰.#17.2016년 1월, 전교조 법외노조 2심 판결.전북교육청 노조 실체 인정해야단협 파기 불가#18.지침을 따르라고만 하는 교육부, 원칙론을 고수하는 김승환 교육감.#19.서로 소통을 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일까요?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08 23:02

부안마실축제 이동석 총감독 "다큐멘터리의 생명이자 가치는 사실의 탐구 "

1980년대와 1990년대, TV앞에 우리를 불러놓고 한국역사와 한국문화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었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한국탐구〉 〈한국의 이미지〉 〈한민족탐험〉 〈잊혀진 전쟁〉 같은 프로그램이다.털어놓자면 연속기획물로 방영되었던 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들에 마음을 빼앗겨 역사책을 다시 읽고 우리 문화를 만나면서 옛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만큼 프로그램이 준 감동과 충격이 컸던 것인데, 사실을 추적해가는 탐구의 세계인 다큐멘터리의 힘을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돌아보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의 어둡고 처절한 역사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이나, 이미 사라지고 잃어버린 문화의 원형과 정신을 찾아 그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 놓는 일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거나 묻혀있던 영역이다. 상황이 그러했으니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은 그만큼 더 고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이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만들어낸 이동석 다큐멘터리 감독(68, N미디어 회장)을 만났다. 정신을 단단히 무장하지 않으면 도전조차 쉽지 않았을 이 고된 영역에 뛰어들어 꼬박 35년 동안 다큐멘터리 감독으로만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직접 연출한 작품만도 200여편. 기획하고 제작한 작품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수많은 작품들은 거개가 명징한 주제를 인간적 감성으로 담아낸 것들이다. 덕분에 그의 이름은 독립제작사, 특히 다큐 PD와 작가들 사이에선 전설이 됐다.인터뷰는 즐거웠다. 방송으로만 만났던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을 그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억으로부터 불러냈다. 귀한 시간의 궤적들이 살아나 다시 가슴을 뛰게 했다.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쏟았을 열정과 고된 노동의 시간을 짐작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다큐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논리적이지만 결코 단호하게 규정짓지 않는 철학을 지키며 다큐멘터리 PD로만 일관되게 살아온 삶의 노정에 답이 있었다.-아직 현역이시죠.이제 물러났죠. 현업에서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어요. 지금은 가끔씩 후배들 작업을 자문해주고 있는 정도죠.-40년 가까운 시간을 제작현장에서 보내셨는데 축적된 경험과 제작 노하우를 가두어놓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습니다.많은 제자와 후배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겠죠.-방송일은 어릴 적 꿈이었습니까.그렇진 않아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 영향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국어선생님 말씀을 듣고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기자가 아닌 PD가 되신 것은 군기 때문이었군요.(웃음)대학 4학년 때 TBC 방송실습과정을 거쳤는데, 실습생 중에 2명이 특채됐어요. 저는 드라마를 하고 싶었는데, 신임 PD를 선임하는 편성부장이 다큐파트로 불렀어요. 그때 막 다큐라는 형식이 들어왔거든요.-처음부터 다큐로 시작하신 셈인데, 마무리까지 다큐로 하셨으니 흔치 않은 과정입니다.그렇게 되었네요. 당시는 드라마나 엔터테인먼트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큐라는 길을 일관되게 걸어갈 수 있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일이예요.-살다보면 그런 계기나 인연이 참 소중한 것 같아요.맞습니다. 저도 제 인생에 가르침을 준 선배들이 있어요. 군대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인연이 된 분들인데 제가 세상을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잘 살아올 수 있었다면 그분들의 덕분이지요.-감독님이 권해주신 글 중에 조차장이야기가 감동이었습니다. 조차장은 제 직속 선배였어요. 나이로는 다섯 살 위였는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의식과 정신세계를 가진 분이었죠. 공은 후배들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안는 것은 물론이고 늘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분이었지요. 일화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에게 그는 전설이었어요. 그런 선배를 만났다는 것이 정말 행운이었죠.(이 감독은 인터넷 카페 하나를 소개했었다.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의 일화와 경험을 글로 올린 카페였다. 내가 만난 사람들편에 조차장 이야기가 있었다. 단숨에 여러 편 글을 읽었는데 드라마 한편을 보고난 느낌이었다. 드라마 PD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런 선배가 지켜주고 있었으니 일하는 보람이 컸을 것 같습니다.자존감이 강한 만큼 내공도 깊은 그 선배가 교양팀의 차장으로 있었으니 우리 팀은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자존심과 옮고 그름에 대한 판단, 비판에 강했어요. 어느 날 정신적 육체적 고단함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사표를 내고 집에 처박혀 잠자고 음악 들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입사동기생이 찾아왔더군요. 조차장이 차장이 싫어서 사표는 내는 거라면 이대로 끝내고, 회사가 싫어서 그런 거면 빨리 나와라. 회사는 우리가 노력해서 고치면 되는 거니까라는 말을 그대로 전하라고 했다면서. 이튿날 출근했어요.(웃음)(조차장은 어느 날 불쑥 이 감독에게 말했단다. 나는 말야, 이런 예감이 들어. 당신은 방송생활을 민족의 문제, 한민족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일로 시종할 것 같은 예감. 돌아보면 그의 작업 대부분이 민족이란 주제로 엮어져 있으니 그 선배의 예감은 기막히게 적중한 셈이다.)-감독님 첫 작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카메라의 눈인데, 10분짜리 가십 프로그램이었어요. 한주간의 이슈를 다루면서 고발도 하고 알리기도 하고. 피디저널리즘이랄 수 있는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화제를 좀 돌려보죠. 2001년인가요. 〈인간극장〉이 방송됐습니다. 반향이 컸지요. 휴먼다큐란 새로운 형식도 그렇고, 다루는 주제가 주는 따뜻함도 그렇고. 감독님 제작사 작품이죠.맞아요. 휴먼다큐멘터리로 새롭게 만들어낸 것인데, 그 전까지 제작된 휴먼 프로그램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제작을 했어요. 당시 유행했던 것이 입지전적인 인물을 다루는 것이어서 내용이 부실하거나 재미가 없으면 침소봉대하는 예가 많았어요. 그런 환경이니 프로그램에 어떤 틀이 생기게 되겠죠. 책의 소제목 같이 완전히 정제되고 가로세로 구획 정리 된 듯한, 그렇게 매끈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죠.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에 쉽게 식상해 합니다.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새로운 휴먼다큐를 만들어내고 싶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희로애락을 그대로 전달하는 형식이었죠. 시청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시청자들의 몫에 맡기고 전달에 충실하자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인간극장〉입니다.-사실 감독님이 운영하셨던 리스프로도 인간극장 때문에 알게 되었거든요.리스프로는 제가 만든 독립제작사예요. 프로덕션 2호지요. 〈인간극장〉은 2001년에 안성에 있는 방송대학 기숙사에 우리 회사 PD와 작가 20여명을 합숙시켜가며 얻어낸 결실입니다.-지금까지도 방송되고 있으니 15년 장수 프로그램이군요.우리는 2008년 회사 문을 닫으면서 그만두었어요. 당시에는 30명 정도가 7개 팀으로 나누어 제작을 했는데, PD 작가 자료조사원 조연출 등 한 팀이 아이템을 결정해 제작하는 형식이었죠. 그때는 전 과정을 점검하면서 소제목까지 함께 정했어요. 소재발굴부터 완성까지 철저한 검증을 그쳤죠.-〈인간극장〉은 리스프로 식구들이 함께 일궈낸 대표작이었군요.그런 셈이죠. 독립제작사는 스스로 방송을 해보겠다고 들어온 사람들이어서 열정과 의욕이 대단합니다. 군인으로 치자면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에서 훈련받은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모여드는 지망생들이거든요. 촬영부터 편집까지 과정은 물론이고, 방송 저널리즘도 다 넣어주어야 하죠. 남다른 결속력이 생기게 됩니다.-제도권 방송국에서는 그런 과정이 시스템으로 정착되어 있지만 독립제작사 같은 경우는 그렇지 못하니 어려움이 컸겠습니다.장단점이 있지만 독립제작사 출신 PD들은 전사가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경비 시간 장비까지 어느 것 하나도 충족한 여건에서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실력도 더 쌓아야하고 노력도 더해야 하죠.-한때 리스프로는 정말 잘나갔던 제작사였지 않습니까.일하는 식구가 120명이나 되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늘 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프로그램을 하나 맡으면 최소한의 인건비는 나오니 유지할 수는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늘 불안하거든요. 관례적으로는 6개월 단위로 방송국 프로그램이 편성되는데 6개월로 끝나버리면 인력도 빼게 되니 가슴이 아프죠. 공간도 그렇고요. 덕분에 이사도 수없이 다녔습니다.- 리스프로의 대표작이 많지요.인간극장 전에 〈현장르뽀 제 3지대〉가 있었어요. 기자들 뒤통수치는 프로그램으로 알려져 있었죠.(웃음) 〈어른들은 몰라요〉 〈무한지대 큐〉 〈퀴즈 대한민국〉 같은 프로그램을 들 수 있는데 거의 롱런 했어요.-처음 두 명으로 시작한 회사의 성장도 놀랍거니와 앞날이 창창하던 방송사를 나와 독립제작사를 열었던 용기가 궁금합니다.부장이 되고 보니 중간 역할의 어려움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안게 될 갈등과 스트레스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어요. 여섯시 내 고향을 시작한지 6개월 만에 사표내고 나왔죠. 방송을 안하겠다고 나온 터여서 2년 동안은 방송과는 다른 분야의 일을 맡아 했습니다. 그런데 식구들이 늘면서 젊은 친구들이 방송 쪽으로 마음을 두더라고요. 모른 척 할 수만도 없어서 방송 쪽 일을 시작했어요. 그러나 갑과 을의 관계로 일하기는 싫더군요. 온전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존중해주는 여건에서 일을 할 수 있었죠.-현장에서 뛸 때의 다큐와 지금 다큐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요즈음은 방송을 안보니 알 수 없어요. 프로야구 중계나 고전영화 정도 보는 것이 전부지요.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메커니즘이 많이 달라진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우선은 외형적으로도 화질이나 화면 스케일이 달라졌잖아요. 고급화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다큐를 만드는 사람들의 정신이나 자세가 그만큼 따라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장인정신으로 내 작품을 만들었거든요. 지금은 시스템화 되면서 직장이라는 인식이 더 큰 것 같더군요. 필생의 업이나 소명의식으로 하기 보다는 직장일로 하는. 들어보면 제도권 방송사가 아닌 독립제작사들은 3D 업종 비슷하게 인식되면서 특히 다큐멘터리 PD가 갈수록 줄어든다고 해요.-우리나라의 방송프로그램도 큰 폭으로 발전한 것이 사실인데, 현장에서 투쟁하다시피 제작해온 독립제작사의 공도 큰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방송 내부에서도 많이 발전했고요. 일단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니 거기 맞추는 노력이 필요했겠죠.-다큐의 흐름은 어떻습니까.세계적으로는 퇴조 현상이에요. 일단 따분하고 딱딱하잖아요.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대로 보는 시청자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문화 환경 변화와도 관계가 있지요. 다큐멘터리는 원인과 결과로 짜입니다. 중간에 놓치면 벽돌 한 장 빠진 것처럼 앞뒤의 맥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죠. 논리적인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집중해 보아야 하는데 가볍고 흥미 있는 프로그램들 속에서 시청자를 붙잡고 있기 쉽지 않아요.-예능이 대세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습니다.요즈음은 다큐멘터리도 예능 플러스 다큐 비슷한 형식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이제는 코미디니 예능이니 경계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게 되었거든요. 그렇다보니 다큐멘터리 작가도 줄어들고 있다고 해요. 활동하고 있는 다큐 작가들도 현실적으로 고민이 많고요. 어느 방송사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교양팀을 아예 없앴다고 하던데요. 사실이라면 안타까운 일이죠.-대학에서 인문학 순수예술이 구조조정 되는 상황과도 같군요.방송도 문화니까 변하는 것이 당연하죠. 그렇긴 하지만 기본적인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안 되는 일이예요.이 감독은 나직하고 정갈하게 대화를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만 30여년, 온갖 역사물과 문화기획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을 극적이고 역동적인 순간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정제된 논리와 분석이 바탕이 된 진실의 힘이 아주 생생하게 전해진다는 것이다. 종군위안부 역사를 밝혀내는 이야기가 그랬고, 한민족의 근본적 심성을 밝혀 미래를 예측하고자 했던 한민족탐험의 이야기가 그랬다.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카톡에 올라있는 그의 말풍선 글이 생각났다.안녕하세요. 잘 계시죠.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배려. 더 이상 다른 이유가 필요 없었다.● [이동석 감독은] 방송사PD광고기획자에서 독립제작사 설립, 다큐멘터리 지평 넓혀감동 주는 작품 고수이동석 감독은 김제가 고향이다. 세 살 때 전주로 이사와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 살았다.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전주를 떠났지만 여전히 전주 사람이다.그는 방송국 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다큐멘터리 제작에 입문했다. 방송국 PD가 된 것은 기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의 조언이 컸다. 고등학교 2학년 국어시간, 그가 존경했던 선생님은 신문방송학과를 권했다.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해 대학신문사에 들어갔으나 워낙 센 군기에 눌려 포기하고 대학 방송국으로 옮겼다. 후에 방송인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계진 김종호 씨 같은 좋은 선배를 그곳에서 만났다. 대학 4학년 때 TBC가 졸업반 대상으로 개설한 방송실습이 끝나고 특채로 임용 됐다.1975년 방송국을 그만두고 광고기획사를 냈으나 2년 만에 손을 들고 오리콤에 들어가 카피라이터 밑 광고기획자로 일했다.1981년에 다시 KBS에 입사했으나 교양제작국 부장으로 승진하던 해에 퇴사해 MBC프로덕션에서 2년 동안 역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1993년 독립제작사 리스프로를 설립했다.방송국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한국탐구〉시리즈나 〈한국의 이미지〉 〈김용운 교수의 한민족 탐험〉 〈이민 이후 한인들〉 〈잊혀진 전쟁〉 등 민족적 문제를 천착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두 명으로 출발한 리스프로는 독립제작사 중에서도 실력 있는 제작사로 성장해 2008년 타의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다큐멘터리 영역의 지평을 열고 넓혔다. 〈현장르포 제 3지대〉 〈인간극장〉 〈퀴즈대한민국〉 〈생방송 큐〉 〈스님 성철 큰 스님〉 등이 리스프로가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한국방송대상, 백상예술대상, 한국방송위원회 프로그램상 등을 수상했다.현장에서 뛰던 시절, 자료 수집을 위한 잘 드는 가위와 날선 칼이 늘 그의 곁에 있었다. 충분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는 구성을 하지 않으면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를 얻기 어렵다는 믿음은 그가 직접 연출하고 제작한 모든 프로그램에 적용됐다.감동이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믿는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다큐멘터리를 남기고 싶었다.그 역시 회사 문을 닫은 고통을 견디며 1년 반 동안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후배들과 제자들이 스승의 날에 보내온 수많은 카드꾸러미에 감동하며 힘을 얻었다.그의 한글 글씨는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한 후배가 현업을 떠난 그에게 글씨를 컴퓨터 서체로 만들어볼 것을 권했다. 그래서 시작한 한글 서체 폰트 개발을 위한 붓글씨 쓰기는 지금 즐거운 일상이 되었다. 최근엔 부안마실축제 총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08 23:02

[참여&소통 ① 노인들의 정치 참여] 고령화 추세 속 실버 표심 선거판 뒤흔든다

주민 참여형 지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전북일보가 올해도 기자들이 찾지 못한 지역 주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시민기자를 통해 전합니다. 지역내 각 분야에서 활동중인 전문가와 젊은층의 의견을 독자들에게 전할 2016년 전북일보 시민기자단은 매주 한 차례씩 노인복지와 농촌 및 마을, 다문화가정, 대학 현장의 다양한 이슈들을 다룹니다. 2016년 전북일보 시민기자단에는 △조상진 전주시노인취업지원센터장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전국귀농운동본부 귀농정책연구소 정책분과장) △이지훈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장 △윤재량 전 전북대 신문사 편집장(전북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등 4명이 참여해 독자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합니다.413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총선은 어느 때보다 나이든 세대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공천과정은 물론 후보자들 역시 고령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이른바 노인정치(gerontocracy, 혹은 senior politics)의 등장이라며 우려하는 시각이 없지 않다.이번 총선에서 각 당의 총선관리와 후보심사를 맡은 공천관리위원장은 모두 70대다.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71), 더불어민주당 홍창선 전 카이스트 총장(72), 국민의당 전윤철 전 감사원장(77)이 그러하다. 선대위원장 역시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76)에 이어 새누리당에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장관(73)이 영입됐다. 후보자 또한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60세 이상 후보의 면면을 보면 18대 총선에 152명이 출마한데 비해 19대 200명, 20대 212명으로 늘어났다.이 같은 고령화 추세는 세계적 물결이다. 지금 대선이 진행 중인 미국의 경우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과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각자의 당내 경선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의 나이는 각각 69세와 70세다. 한때 젊은 층에 돌풍을 일으켰던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는 74세다. 1980년 미국 대선에서 최고령으로 당선된 로럴드 레이건이 69세였으니, 기록이 깨질지 관심이다.이는 젊은 후보들이 선전했던 종전의 선거 추세와는 다르다. 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 당시 47세였고, 빌 클린턴은 1992년 한창 때인 46세에 백악관에 입성했다. 존 F 케네디는 1960년 대선 당시 43세였다.우리 정치권도 고령화 추세이기는 마찬가지다. 현 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 중 40대 이하는 1명도 없다. 19대 국회의원도 300명 가운데 50대 이하는 42명 뿐이다. 전북의 경우 자치단체장 나이를 보면 14개 시장군수 중 8명이 65세 이상이다. 문동신 군산시장이 78세로 최고령이며 이건식 김제시장 72세, 박우정 고창군수 71세다. 이어 김생기 정읍시장과 심민 임실군수, 황숙주 순창군수, 최용득 장수군수가 69세, 김종규 부안군수가 65세다. 이번 전북지역 총선에서는 65세 이상 5명의 후보가 표밭갈이에 나섰다. 유종근(전주갑) 72세, 민경선(완주진무장) 70세, 박종길(익산을) 69세, 김효성(김제부안) 67세, 전희재 후보(전주갑) 65세 순이다.정치권이 노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노인 유권자가 많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투표율이 단연 높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은 60세 이상 유권자가 984만명으로 전체 유권자 4206만명의 23.4%를 차지한다. 20대 15.95%, 30대 18.1%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60대가 최대 연령대가 된 최초의 선거다. 투표율도 젊은 층보다 훨씬 견실하다. 19대 총선에서 60세 이상 투표율은 68.6%였다. 이에 비해 25~29세 청년층의 투표율은 37.9%에 불과, 거의 절반 수준이었다. 선거 때마다 각 후보들이 노인회와 경로당을 찾아 큰 절을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더욱이 노인들은 거대한 이익단체를 만들어 힘을 결집하고 있다. 회원이 4000만명에 이르는 미국은퇴자협회(AARP) 사무총장의 지위는 미국 대통령 다음 가는 권력자로 꼽힌다. 이 협회는 50세가 넘으면 은퇴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데 상근 직원만 2000명이 넘는다. 노인연금 및 조세문제, 건강보험 등 정책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켜 왔다. 일본 최대의 노인단체는 전국노인클럽연합회다. 클럽수만 13만개에 전국적으로 885만명의 회원을 두고 있어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9년 경로당 회원을 주축으로 결성된 대한노인회가 300만명의 회원을 자랑하며, 총선이나 대선에서 노인복지정책 등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문제는 노인층이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층이 정치참여를 시니컬하게 보는데 비해 노인층은 목소리가 높아 법안이나 예산 등이 노인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노인이 혜택 받는 법안이 청년의 3.7배에 달했다.노인정치의 폐해는 너무 안정 위주의 편안한 길을 가기 때문에 활력이 떨어진다는데 모아진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에는 경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의 노인들은 의술의 발달과 좋은 먹거리로 예전의 노인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점을 든다. 유엔도 인류 평균수명이 늘어난 점을 고려해 지난해 생애주기를 새롭게 구분했다. 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 100세 이상 장수노인으로 분류했다. 말하자면 65세도 청년에 해당하는 셈이다.모든 분야에 고령화 추세가 보편화되면서 이제 나이 구분이 무색해졌다. 정치영역에서도 노추(老醜)의 행태만 보이지 않는다면 고령화는 자연스런 일이 아닐까 한다.● [20대 총선 정당별 노인공약은] 새누리 "일자리"더민주 "연금제"국민의당 "쉐어하우스"제20대 총선에서 각 정당들은 분야별세대별 맞춤형 공약을 내세워 표심을 파고들고 있다. 이 가운데 노인관련 공약은 가장 핵심을 차지한다. 이들은 노인관련 단체를 찾아 의견을 청취하고, 공약 순위도 앞자리에 올려놓는 등 실버세대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 역력하다. 각 정당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정당별 10대 정책 중 노인관련 공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새누리당은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인 우리의 노인증가율과 노인빈곤율의 심각성을 고려해 노인 일자리 확대에 중점을 두었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매년 10만개씩의 일자리를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또 노인 채용기업을 노인친화기업으로 지정하고 공공기관에서 노인생산품의 우선 구매를 권장하는 노인일자리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키로 했다. 모든 시군구에 노인 일자리 전담기관을 확대 설치하고, 치매노인과 장애인 등 취약계층 2만여 명에게 안심팔찌 및 전용단말기를 보급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더불어민주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노인 빈곤이 심화되고 있다고 보고 노인 빈곤 완화를 정책공약 1순위로 내세웠다. 소득하위 70% 노인에게 기초연금 30만원을 차등 없이 주겠다는 것이다. 현행 월 10~20만원 차등 지급하고 있는 기초연금을 2016년에 20만원 균등지급으로 개선하고 2018년까지 단계적으로 30만원까지 인상하겠다는 이행방법도 제시하고 있다.신생 정당인 국민의당은 어르신 빈곤시대 제로라는 제목아래 9가지 노인공약을 올려놓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 대상자를 2020년까지 2배로 확대하고 본인부담상한제를 도입키로 했다. 노인 일자리를 2020년까지 60만개로 늘리고 수당을 20만원에서 40만원, 기간을 9개월에서 12개월로 늘리기로 했다. 또 전국 3만6000개 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해 홀로노인들이 공동숙소로 사용하는 쉐어하우스로 탈바꿈시키기로 했다.올 1월 창당한 복지국가당은 노인빈곤 해소를 위해 65세이상 모든 노인에게 최대 60만원의 더불어연금 도입을 공약해 눈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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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7 23:02

[전북일보 카드뉴스]내 한옥마을이 이렇게 선정적일 리가 없어

<내 한옥마을이 이렇게 선정적일 리가 없어>#표지.내 한옥마을이 이렇게 선정적일 리가 없어#1.전주의 핵심 관광지, 전주 한옥마을.내일러의 성지이자 전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죠.#2.그런데 요즘 이곳 길을 걷기가 참 민망하고 불쾌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3.문제의 원인은 바로 벌떡주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술입니다.남성 성기를 본딴 모양으로 된 병이 길거리에 진열돼 있습니다.#5.사실 한옥마을이 막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정체성 논쟁은 끊이지 않았는데요.#6.무늬만 한옥 논쟁,시멘트 벽에 금속기와 지붕한옥인 듯 한옥 아닌 전주 한옥 민박 (2015. 2. 5.)전주에 짝퉁 한옥 못 짓는다 (2015. 12. 3.)#7.외국어 간판 논쟁,한옥마을 옥외광고물 규제 본격아크릴유리 간판 안 돼 (2011년 10월 3일자)#8.패스트푸드점 등 입점 제한 논쟁,한옥마을 맞긴 맞어? 상업화 치중에 전통이미지 퇴색 (2011년 9월 29일자)#9.최근에는 꼬치구이점 퇴출 여부를 놓고도 논쟁이 벌어졌었죠.전주 한옥마을 꼬치구이점 퇴출된다 (2015년 7월 2일자)한옥마을 꼬치구이점 신규 입점만 제한 (2015년 9월 24일자)#10.임대료 폭등으로 인해 원주민이 쫓겨나듯 떠나게 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전주 한옥마을 땅값 뜀박질에 웃고 울고 (2015년 6월 5일자)#11.그리고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 중앙초성심여중성심여고 등 구역 내 학교 학생의 권익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왔고요.한옥마을 관광 치중주민 생활환경 개선 필요 (2007년 11월 30일자)전주 한옥마을 주민들 "시끄럽고 불편" 호소 (2014년 7월 23일자)#12.한 해 1000만 명이 찾는, 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 한옥마을.어떻게 가꿔가야 오랫동안 사랑받는 곳이 될 수 있을까요?#13.모두의 고민이 필요합니다./기획 신재용, 구성 권혁일, 제작 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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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06 23:02

전북일보 지령 20000호…'정론직필 100년' 향해 뛰겠습니다

명실공히 전북 유일의 언론기관으로서 공기(公器)의 역할을 다할 것을 강호에 선언하는 바이다. 본지는 앞으로 민중의 대변자로서, 강력한 여론 창달기관으로서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데 매진할 것을 맹세한다.1950년 10월 15일, 타블로이드판 2개면으로 제1호를 낸 전북일보는 당시 한국전쟁의 전황(戰況)을 상세히 전하면서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약속으로 1면 창간사의 말미를 맺었다. 사실 전북 최초의 신문이자 전북일보의 뿌리는 19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녹록지 않았던 시대상황에서 통폐합을 거쳐 전북언론의 도도한 물줄기를 만들어낸 것은 이 때부터다.한국전쟁의 포연 속에서 지령 제1호를 발행한 전북일보가 4일자로 꼭 2만번째 신문을 냈다.질곡의 현대사와 부대끼며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한 전북일보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 1997년 IMF 외환위기 등 역사의 격랑 속에서 호남지역 대표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와 1989년 완주 모래재 버스사고, 1993년 서해훼리호 참사 현장에서 도민과 함께 눈물 흘렸고, 2003년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 논란 등 지역사회 갈등의 현장도 생생하게 담아냈다. 특히 지역의 오랜 숙제가 된 새만금사업을 비롯, 전북혁신도시호남선 및 전라선 KTX 건설 등 굵직한 현안에 대해서는 미래지향적인 의제 설정으로 지역발전의 방향을 제시해왔다.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맞아서는 장기 기획을 통해 갑오년 혁명의 역사를 들춰내 재정립했고, 호남평야의 젖줄이자 근대농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만경강동진강의 물줄기를 탐사해 하천개발의 역사와 문화주민 삶을 망라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했다.이와 함께 전북역전마라톤대회와 직장대항 테니스대회, 신춘문예, 전북보훈대상, 전북무궁화대상, NIE논술대회 등의 행사를 통해 지역문화 창달 및 사회공헌 활동에 앞장섰다.전북일보의 지령 2만호 발행은 전북지역 첫 사례이며, 전국적으로도 내로라하는 일간지 및 지방 대표 신문만이 최근 써낸 기록이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급속한 도시화산업화, 그리고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전북의 위상을 함께 고민하고 지역발전을 염원한 도민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이제 전북일보는 창간 66년, 쉼없는 정진으로 2만번째 신문을 낸 저력과 그 속에 녹아든 지역민의 힘을 토대로 정론직필(正論直筆) 100년을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울러 전북일보와 꾸준히 소통해 온 애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창간 이념을 되새겨 도민을 대변하는 정론지로서의 변함없는 역할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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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표
  • 2016.04.04 23:02

전북일보 지령 20000호,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글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여러분의 관심과 애정으로 우리 전북일보가 매우 뜻깊은 날을 맞았습니다. 바로 오늘 지령(紙齡) 2만호를 발행하게 된 것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신문을 발행하더라도 무려 55년이 걸리는 세월입니다. 또 1년 52주를 기준으로 주5일 신문을 발행해도 2만호에 도달하려면 무려 77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합니다. 전북일보에게는 66년이 걸렸습니다.전북일보는 1950년 10월 15일, 625전쟁의 포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이후 극심한 혼란기를 맞아 여러 언론이 난립하며 경쟁하다가 625 전쟁 상황에서 전북 유일의 언론기관인 전북일보로 발전적 통합을 이룬 것입니다.당시의 창간사에는 전북일보의 기치아래 도내 유일의 언론기관으로서 공기의 역할을 다할 것을 강호에 선언하는 바이다.본지는 앞으로 민중의 대변지로서 여론의 강력한 창달기관으로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고매한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높은 교도기관으로서 부하된 사명을 완수하는데 일로 매진하는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고 적고 있습니다.전란 속에 탄생한 전북일보는 국가발전과 주민통합이라는 사회적 공기로서의 역할에 더욱 막중한 책임을 느꼈습니다.물자가 부족해 현재 신문의 절반 크기인 타블로이드판으로 시작했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과 공비 토벌 등의 소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함으로써 도민들이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될 즈음에는 윤전기와 활판인쇄기 등의 시설을 새로 갖추고 종전의 타블로이드판을 현재의 배대판(倍大版)으로 바꾸면서 도민들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독자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한때 아픔도 있었습니다. 1973년 정부의 1도 1사 원칙에 따라 전북일보와 전북매일, 호남일보가 통합되면서 전북일보 대신에 전북신문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9명의 기자가 강제해직되기도 했습니다.다행히도 1983년 2월 서정상 박사가 사장에 취임한 뒤 그해 6월 1일에는 전북일보라는 제호를 되찾을 수 있었으며, 80년대 말에는 강제해직됐던 일부 기자들이 현업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이처럼 전북일보는 질곡과 부침의 역사 속에서도 정론을 신념으로, 봉사를 사명으로, 도민을 주인으로를 사시(社是)로 지난 66년 동안 도민의 눈과 귀가 되고 손과 발을 자처하면서 전북의 발전과 전북도민의 행복을 위해 충실히 노력해왔습니다.지령 1호부터 2만호까지 전북일보에 실린 기사 하나 하나에는 전북인의 삶과 애환이 가감없이 담겨 있으며, 이는 곧 전북의 현대사를 구성하는 사초가 되고 있습니다. 전북일보 임직원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함께 느낍니다.전북일보는 앞으로도 건강하고 책임있는 언론으로서 도민만을 바라보면서 지령 3만호, 5만호, 10만호 시대를 향해 힘차게 나가겠습니다. 지역의 자존심을 지키고 지역발전을 견인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6.04.04 23:02

전북일보 첫 직선 편집국장 김남곤 前 사장 "진실과 균형이 언론의 생명…다시 새 역사 써나가라"

지령 20000호 그대에게시우쇠를 시뻘겋게달구는 대장간의풀무 되거라그 풀무가 되어시우쇠가 펄펄펄끓을 때 까지바람이란 바람이 살고 있는지구의 끝바람까지몰고 오너라처마 낮은 집도 들르고솟을대문 집도 들러서울고 웃으며밥 나눠먹고사는 이야기 들어라무엇인가그대 때문이었다고비웃음 받는허수아비 같은초상 되어서는 안 된다무엇인가그대 때문이었다고손뼉 치며 환호하는눈부신 발광체가 되거라1988년이니 28년 전이다. 그해 전북일보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처음으로 노조가 주관한 직선제 편집국장이 임명됐다. 회사 경영진이 결정하면 하루아침에도 보직이 바뀌던 환경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의 등장은 그만큼 낯선 문화였다. 그러나 노사의 갈등 국면이 화합으로 모아진 지점에서 직선제 편집국장은 편집권 독립을 상징하는 전북일보의 새로운 시작이었다.전북일보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었던 첫 직선제 편집국장은 취임하던 그날,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 했다.나는 이제 저 하늘의 별을 따려고 한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과제다. 여러분은 내가 그 별을 딸 수 있도록 장대를 높이 높이 올려주어야 한다. 등루거제(登樓去梯), 다락에 오르도록 권하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안 된다.별과 장대. 언론의 엄중한 역할을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감성적 언어로 안겨준 사람. 김남곤 전 전북일보 사장(79)이야기다.전북일보 지령 2만호. 그 역사 위에는 언론탄압의 엄혹한 시절을 지켜낸 대쪽 같은 선배나 인생의 등불이 되어준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선배들이 있다. 존경의 대상인 그들 선배 언론인들의 궤적을 돌아보며 많은 후배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인터뷰는 어려웠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삼고초려 끝에 간신히 얻어낸 인터뷰는 그만큼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건 반전은 있는 법인 모양이다.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특유의 글씨체로 너울너울 쓰인 작은 메모지 몇 장을 건넸다. 지령 20000호 그대에게 제목의 시였다. 여러해 전 그랬던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전북일보가 지령 2만호를 맞았습니다. 사장님께도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지령 2만호가 주는 무게감이 크죠. 전북일보가 태동 했을 때를 생각해봤습니다. 1950년, 전란의 위기와 혼란 속에서 전북일보를 창간했던 뚜렷한 목표가 있었겠지요. 오늘까지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 또한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인데 위기를 맞을 때마다 지혜를 발휘하고 마음을 모아 극복해온 시간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상투적이긴 하지만 지령 2만호의 전북일보에 한 말씀 주시죠.2만호라는 지령에 대한 벅찬 감회에 그치지 말고 20001호를 주목하라고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는 더 역동적인 의지를 갖고 구성원들이 전북일보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 깊이 고민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열어가야 합니다. 2만호라는 역사에 담겨 있는 가치와 의미를 살리는 일이겠지요.-신문 창간의 뜻을 이어가라는 말씀이군요.1950년 전란 속에서 우리 선배들은 백지 한 장 위에 전북일보라는 제호를 올려놓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 뜻이 굴절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무구한 역사를 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구성원들이 의지를 갖고 그때그때 시대를 충실하게 살았던 덕분이지 않겠어요.-전북일보 지령의 의미를 되짚어보면 사장님 말씀처럼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책임으로 두려워지기도 합니다.그런 책임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자긍심도 가져야 해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전반에 걸쳐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날그날을 기록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어떤 역사가가 그렇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겠어요. 전북일보의 지령은 역사의 보고입니다.-말씀 들으면서 역사의 보고인 전북일보 지령만으로 자신감을 갖는 일이 괜찮은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자긍심이 있어야 책임감도 있는 것이거든요. 자긍심에서 그냥 끝나면 안 되죠. 그렇다면 직무유기예요.(웃음)-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왜 작가가 아닌 기자를 택하셨습니까.처음부터 기자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꼭 자기 뜻이나 계획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계기가 있었어요. 고모부가 전북일보 공무국에 근무했거든요. 고모 집에 놀러 가면 게라지라고 부르는 활자 인쇄지가 많았어요. 앞에는 기사가 인쇄되어 있지만 뒤는 백지여서 종이가 귀한 시절에 쓰임이 좋았죠. 덕분에 기사도 읽게 되었는데 재미있었어요. 고등학교 시절엔 제가 쓴 시나 콩트가 실리기도 했습니다.-당시에도 신문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직장 아니었을까요.1965년 12월 삼남일보에 입사했는데, 73년 통합이 되고서도 형편은 어려웠어요. 박봉이었으니까요. 그때는 점심을 먹으러 몇 명 동료들과 나가면 밀가루 빵 두 개 먹고 물 한잔 마시는 것이 전부였어요. 어쩌다 먹게 되는 콩나물국밥이나 설렁탕은 특식이었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가난으로 고통 받았던 시절이니 배고픔이 곧 삶이었죠.-기자생활은 어떻셨습니까.교정부에서 시작해 편집부 지방부를 거쳐 문화부에서 일했죠. 문화부에서는 도교육청을 출입했는데, 교육 기사를 많이 썼어요. 문화부는 출입처가 없는 부서여서 발로 찾아다니지 않으면 기사를 쓸 수 없었죠. 덕분에 고생스럽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일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습니다.-어떤 마음으로 기사를 쓰셨습니까.기사는 진실과 균형이 생명이라고 생각했어요. 올바른 방향이나 비평도 그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그런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담는 것이어야 하는가를 늘 고민했지요.-특종 경쟁이 그 시절에는 더 치열했을 것 같은데요. 속보성으로도 그렇고.물론이죠. 지금은 인터넷 시대가 되어 속보성에 대한 민감함이 좀 덜한 것 같더군요. 당시에도 전북지역에 몇 개 신문사가 있었는데, 아침에 상대방 신문에 어떤 기사가 났느냐가 최대 관심이었어요. 특종 낙종의 후유증이 컸죠.-기억에 남는 기사도 많을 것 같습니다.교육분야를 담당하고 있을때 고교 평준화가 시작되었어요. 일류니 삼류니 고등학교 등급이 확연했던 환경에서 평준화는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때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집중 취재했어요. 학교시리즈였는데, 큰 반향이 있었죠. 격려와 항의를 동시에 받았던 기사인데, 대부분의 학교가 자극을 받았죠.-문화 쪽에서는 가람 이병기 생가 이야기를 지금도 하시는 분들이 있던데요.기자 생활하면서 보람을 느꼈던 기사예요. 가람가가 무너지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아마 72년일 겁니다. 가람이란 거목의 생가가 썩어 무너지고 있던 상황이었거든요. 기사가 나가자 성금이 들어오고 관심이 커지면서 복원되었죠.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던 가족들의 삶이 조명되면서 도움도 줄 수 있었어요.-기자라는 직업은 곤궁한 삶이지만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치 있는 직업이지 않습니까.물론이지요. 그런 정신적 보상이 없으면 기자 정신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편집국장 시절 일인데, 당시 김용태 국회 예결위원장이 전라도 예산투쟁에 대해 뜨거운 꼴을 봐야 한다고 막말을 했어요. 처음에는 1단 가십처리로 처리하자 했는데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1면 톱으로 바꾸었죠. 전라도 하대발언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어요. 곤욕도 치렀지만 끝내 밀고 나갔죠. 언론은 권력과 대칭관계에 있기 때문에 분명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해요. 옳은 것을 견인해야 한다는 정신이 있어야 하죠.-편집국장의 판단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물론이죠. 편집국장(리더)이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에 따라 손바닥 위냐 아래냐가 결정되니까요. 어려운 상황에서 내 선택이 필요할 때면 누가 훈수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편집국장 몫이죠.-편집권 독립의 마지막 보루니까요.언젠가 축구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김병지 선수가 내 뒤에는 볼이 없다는 신념으로 뛴다고 하더군요. 기자들도 그런 골키퍼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불의에 맞서는. 그러려면 전북일보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요. 어떤 걸림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기자로서 소명의식이 중요할 것 같은데, 현실을 보면 정신만을 강조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어느 시대에서건 언론 환경은 늘 열악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직업을 택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혁신해야 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혁신의 요체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늘 새롭게 다져야해요. 2만호 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언론 환경, 특히 지역 언론의 상황은 어렵지요. 그래서 구성원이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런 힘이 없으면 2만호 역사를 우뚝 세울 수 없게 됩니다.-지령 2만호를 들여다보면 전북일보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전북일보가 쌓아온 역사겠지요.시대 시대마다 있었죠. 연륜이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때그때의 일들이 모아져서 우뚝 서있게 되는 거죠.-그럼에도 현실을 되돌아보면 지방지의 환경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자본과 물량면에서 거대한 중앙지들이 있고, 지역에서는 또 같은 상황에 놓인 지역신문사들이 있고.지방지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역할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해요. 경제적으로는 그런 어려움이 있죠. 그러나 지역신문으로서 지켜야 할 역할을 제대로 지켜간다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그런 점에서 보면 지역신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신뢰가 중요한데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거든요.그것이 전북일보가 풀어야할 과제예요. 독자와의 소통과 신뢰가 생명 아니겠어요. 전북일보라는 깃발을 꽂는다고 할 때 무엇을 위해 어디에 둘 것인가. 주민들의 아픈 곳, 고통스러운 곳과 열망하는 것이 어디이고 무엇인가를 찾아내야지요. 그 중심에 깃발을 꽂고 휘날리게 하는 것이 전북일보의 사명입니다. 단순한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북에는 많은 신문사가 난립하고 있죠. 그래서 전북일보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두 시간 인터뷰 동안 단호하지 않지만 부드러움으로 상대방을 더 깊이 감화시키는 특유한 화법은 힘이 되어 대화를 이끌어갔다.40여년 기자를 천직으로 삼아온 원로 선배는 인터뷰 내내 기자정신을 지키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조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존감 없이 자기정신을 표류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그가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하면서 직원들에게 준 취임사다.전북일보라는 깃발을 높이 세우고 마음껏 흔들어라. 내가 그 깃발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이 되겠다.전북일보 지령 2만호 앞에 새바람이 분다. 전북일보의 깃발이 더 힘차게 나부낄 차례다.● [김남곤 사장은] 지역문화 저널리즘 산증인시인 등단 수많은 창작활동김남곤 사장은 1965년 12월 삼남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살이었다. 1973년에는 전북지역의 3개 신문사가 통폐합하면서 새롭게 출범한 전북일보로 자리를 옮겨 1995년 정년퇴임때까지 편집국 기자와 부국장, 편집국장, 제작국장, 업무국장, 수석논설위원을 거쳤다. 퇴임 후에는 전북문인협회 회장과 전북예총 회장으로 8년동안 외유(?)하다 2000년 12월 전북일보 전무로 취임해 사장을 거쳐 2013년 은퇴했다.문화 교육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그는 전북문화의 음과 양을 조명하는 다양한 기획기사로 지역문화를 저널리즘의 중심에 들여놓았다. 그와 교유했던 예술인들은 오늘의 전북문화가 풍요로운 맥을 정립할 수 있었던데 에는 60년대와 70년대 문화부기자로 활동했던 그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던 1979년 〈시와의식〉으로 등단했다. 첫 시집 〈헛짚어 살다가〉를 펴낸 이후 〈푸새 한 마당〉 〈새벽길 떠날 때〉 〈녹두꽃 한 채반〉 〈사람은 사람이다〉 등의 시집과 산문집 〈비단도 찢고 바수면 걸레가 된다〉, 칼럼집 〈귀리만한 사람은 귀리〉 등을 냈다.은퇴 후에는 언론계 동료와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는 연초부터 쓰기 시작한 동시를 모아 동시집을 펴낼 계획이다. 지금도 전북일보 사옥 앞을 지날때면 안에서 일하고 있을 후배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랑스러워하고 마음의 격려를 보낸다는 그를 많은 후배들은 가장 존경하는 대선배로 꼽는다.

  • 기획
  • 김은정
  • 2016.04.04 23:02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 앞서 걷고 함께 뛴, 66년 늘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전북일보(全北日報)는 1950년 10월 15일 지령 1호를 발행하며 창간해 66년만에 지령 2만호를 발행했다. 전북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전북일보의 역사는 곧 지역언론사이기도 하다. 전북일보는 정부방침에 따라 재출범하기도 했고, 뉴미디어 발달과 함께 독자와 만나는 채널도 다양화했다. 일찍부터 편집 자율권을 확보하고 정도언론의 길을 걷기위해 노력했으며, 신문발행외에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이어왔다. 지령 2만호를 쌓는 동안 전북일보가 걸어온 길을 정리한다.△1950년 한국전쟁 중 창간오늘의 전북일보는 1950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박용상(1910-1980)씨가 전북시보(全北時報)를 인수해 전북일보(全北日報)로 이름을 바꾸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10월 15일자부터 전북일보라는 제호로 발행했는데, 지령 1호는 타블로이드판 2면이었다. 창간호는 민중의 대변자로 여론의 강력한 창달기관으로 또 한 국가 목적을 급속히 달성구현하는 기관으로 나아가서는 적과의 과감한 사상투쟁의 무기로서 적의 선전공세를 완봉하여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고매한 건국이념을 만민에게 함양하는 높은 교도기관으로서 부하된 사명을 완수하는데 일료 매진할 것을 맹서하는 바이다고 창간 목적을 밝히고 있다. 초대 사장은 이승룡씨, 편집국장은 박용상씨가 맡았다.전북일보는 1952년 고사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이듬해 윤전기와 활판인쇄기, 연판기, 사진조판시설, 문선 조판 및 출판시설 등을 새롭게 갖추고 현재 크기의 신문을 제작했다. 1956년부터는 4면, 1962년부터 6면, 1969년부터는 8면 발행체제로 확장해왔다. 1970년에는 최신 윤전기시설을 구축하는 등 전북일보는 전북지역 대표신문으로 기능했다.△ 1973년 1도1사 조치로 재출범전북일보는 자율정화라는 미명아래 이뤄진 박정희 정부의 1도1사 방침에 따라 1973년 6월 1일 전북매일(全北每日)과 호남일보(湖南日報)를 흡수통합해 전북신문(全北新聞)으로 재출범했다. 이때부터 전북일보는 정론을 신념으로 봉사를 사명으로 도민을 주인으로를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1988년 언론자율화 조치까지 16년 동안 전북지역 유일의 지역신문으로 기능했다.전북신문은 창간 10주년을 맞은 1983년 6월 1일자부터 제호를 전북일보(全北日報)로 회복했다. 제호 변경은 유신정부 강압에 의한 언론탄압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서정상(1928-2001)대표이사가 사장으로 취임하고, 전주시 금암동 현재의 자리에 당시 전북지역 최고층인 15층 사옥(우석빌딩)을 마련했다. 이후 각종 제작시설을 확충하고, 지면을 늘리는 등 사세를 거듭 확장했다.1988년 11월 신문발간 자유화조치로 전북지역에도 종합일간지가 등장하면서 경쟁시대가 다시 시작됐지만 여론을 선도하는 전북일보의 위상은 공고했다.△변화와 개혁 앞장서는 신문금암동 이전 후 전북일보는 1991년부터 전 지면 CTS(컴퓨터제작시스템)제작이라는 획기적인 변화와 1994년 시간당 최고 15만부를 인쇄하는 최신형 고속 윤전기를 들여놓는 등 제작 시스템을 현대화했다.1998년 서창훈 대표이사 취임후 정보화시대에 부응하는 경영체제와 미래사회에 대비하는 신문, 편집권 보장을 통한 자유언론 등을 목표로 변화를 적극 모색했다. 뉴스를 거리에 내보내는 전광판시설도 도내에서 전북일보가 처음 구축했다. 1998년 3월 27일 지령 1만5000호를 기념해 신문사 외벽에 전광판(파워비전)을 설치하고 뉴스를 표출했다. 제작 시스템의 완전 전산화와 인터넷 웹사이트 구축 등 정보화 전략도 같은 해 실현했다. 정보화 부문에서도 지역 대표지로서의 위상과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젊은 신문으로 변신해야 한다는 대명제아래 한자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전면 가로쓰기 편집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1999년 1월 4일자부터는 창간이래 고수해온 석간발행에서 조간체제로 전환했다.창간 49년인 1999년 6월 1일 전북일보는 전북지역 언론사에 또 하나의 새 장을 열었다. 전 과정 컴퓨터 제작시스템을 기반으로 인터넷신문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북일보는 인터넷신문 콘텐츠 강화와 언론 영역 확장을 위해 동영상뉴스 서비스도 시작했다. 2011년 12월 종합편성채널이 출범하면서부터는 동아일보가 설립한 채널A와 협업시스템을 구축하고 방송뉴스 제작에도 참여했다.정론보도를 위한 편집 자율권 확보도 일찍부터 이뤄졌다. 전북일보는 1988년 노동조합 설립후 편집국장을 기자들이 선출했다. 편집 자율권과 취재 윤리 준수 등 건강한 지역언론을 표방해온 전북일보는 2007년부터 10년 연속 정부가 지역신문 활성화를 위해 지원하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우선지원대상에 선정됐다.전북일보는 신문제작에 독자 참여를 늘리고 다양한 시각에서의 보도를 위해 2003년 독자권익위원회를 구성했다. 또한 2006년부터는 다양한 분야의 독자들이 신문제작에 직접 참여하는 시민기자제도를 운영했다.△지역사회 가꾸는 사회활동전북일보는 지역사회 발전을 선도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한국전쟁중에는 피난민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하는 전라도 인심 되살리기 운동을 벌였으며, 학교 가는 길 확보를 위한 통학의 다리놓기 캠페인도 이끌었다. 전북장학숙 필요성도 전북일보가 주창한 것이며, 새만금 사업의 단초가 된 개발 필요성 기사도 전북일보에서 처음 썼다.전북일보는 전북의 역사를 정리하는 출판사업도 꾸준히 이어왔다. 1973년부터 <전북연감>을 매년 발행하고 있으며, 월간지 <포토전북>(19731977)도 발행했다. 전북의 현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향토개발연구소(1980)도 운영했다. 전북출신 재경인사들의 단합과 지역에 대한 관심을 도모하기 위한 재경 전북인사 신년하례회는 1983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문화체육사업도 활발하게 벌였다. 1959년부터 미스전북 선발대회를 열었고, 전북역전마라톤대회(1989년)와 전북일보 사장기 테니스(1990)배드민턴(2001)족구대회(2006), 웰빙 태권댄스 페스티벌(2005) 등도 개최했다. 전북일보 신춘문예는 문학청년들의 등단 무대로 주목받고 있다. 2014년에는 전북 지도자들의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리더스 아카데미를 신설했고, 지난해부터는 골프아카데미도 열었다.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찾아 응원하기 위해 무궁화대상과 전북보훈대상도 운영하는 등 전북일보는 전북의 역사를 함께 써왔다.

  • 기획
  • 은수정
  • 2016.04.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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