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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6개월 최규석 신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장 "내 집같이 편하고 믿음 가는 신협 만들기 앞장"

최규석 신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장이 부임한 지 반년이 지났다. 자조·자립·자치라는 협동조합의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신용협동조합운동은 현 신용협동조합(신협)의 뿌리가 됐다. 이러한 신협이 창립된 지도 올해로 54년, 반세기가 흘렀다. 신협중앙회는 ‘신협 운동의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한 정체성 회복을 주창하고 나섰다. 전주 출신의 최 본부장도 전북지역 신협의 중흥을 위해 밤낮없이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 최 본부장을 만나 신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의 역할과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신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에서만 본부장으로 임하는 두 번째 근무입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10년 만에 다시 고향인 전북으로 오게 돼 감회가 새롭습니다. 첫 전북지역본부장 부임 당시(2004~2005년) IMF 경제위기의 여파 속에서 전북 신협 정상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타지로 떠나게 됐습니다. 지난 6년간 전북 신협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신념을 가지게 됐고 실제로 상당한 성과를 냈습니다. 앞으로 전북 신협이 도내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겠습니다.”-첫 번째 전북지역본부장으로 근무한 이후 지난 10년 동안 도내 신협의 가장 큰 변화를 꼽으신다면.“먼저 자산 규모입니다. 전북 신협의 자산은 2004년 말 기준 1조 9000억원에서 올해 8월 말 기준 4조 1000억원으로 2배 이상 성장했습니다. 이는 도민이 신협을 사랑해 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역 내 대출 서비스도 2004년 기준 9000억원에서 올해 8월 기준 2조 6000억원으로 3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전북지역에서 신협운동은 어떻게 시작해 발전·전파됐는지요.“도내 신협운동은 1966년 1월 5일 이리(현 익산) 천주교회에서 10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강습회가 시발점이 됐습니다. 같은 해 1월 28일 가입금 20원과 출자금 1좌를 납입한 조합원 48명이 참석해 창립총회를 한 것이 전북지역의 첫 신협인 이리(현 익산) 성심신협의 탄생 배경입니다. 이후 장수와 전주 등 도내 전 지역으로 신협운동이 확산됐고, 1995년 12월에 이르러 전북지역에 최대 115개의 신협이 설립된 바 있습니다. 1997년 IMF 위기와 2008년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올해 8월 현재 73개 조합이 운영되고 있습니다.”-전북지역 지역·직장·단체신협 등 규모와 현황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우선 도내 신협은 시·군·구 주민을 대상으로 거래하는 지역신협 60개를 비롯해 직장신협 7개, 단체신협 6개 등 총 73개 조합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조합원 수는 각각 39만 8000명, 9000명, 1만 3000명 등 42만명 규모입니다.”-도내 신협의 상부상조나 상생의 협동조합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현대사회의 물질 만능주의, 개인주의 풍토 속에서 신협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신협이 성장하면서 신협의 상부상조 정신이나 협동조합의 정체성이 많이 훼손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현재 신협은 은행화와 협동정신을 중시하는 금융 협동조합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신협중앙회가 신협의 르네상스를 열겠다고 선언했고, 사람을 중시하는 협동 금융으로 가겠다고 방향을 정한 만큼 앞으로 훼손된 신협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력할 계획입니다.”-도민들을 위해 신협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신협은 협동 금융입니다. 신협은 조합원이 예치한 돈을 자금이 필요한 또 다른 조합원이 대출받아 이용하는 구조입니다. 지역 내에서 돈이 유통되는 형태로 신협은 그 만큼 지역 경제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전북 신협은 2010년 두손모아봉사단을 조직해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연탄 배달과 온수 매트 보급, KCC와 연계한 사랑의 3점 슛(3점 슛 1개당 쌀 10kg 후원) 등 앞으로도 도내 취약 계층에 대한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전개할 예정입니다.”-최근 금융위원회는 지역신협의 영업 구역(행정구→자치구)과 법인 대출 한도 확대(현행 80억원→300억원) 방안 등을 발표했습니다. 이와 관련 신협에는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궁금합니다.“지금까지는 한정된 신협의 영업 구역 때문에 서비스를 받고 싶은 신협이 있어도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향후 이러한 부분이 해소돼 고객 편의가 증대되고 신협이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또 법인 대출 한도 확대로 대출 한도가 적어 대출 서비스를 활용하는데 제약을 받았던 우수 업체에 대한 서비스 개선이 이뤄지고, 신협에서는 안정적인 수익원 확보로 이어져 수익 구조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전망입니다.”-임기 내에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으신지요.“도민들이 내 집같이 드나드는 편하고 믿음이 가는 전북 신협을 만드는데 힘쓸 생각입니다. 전 조합이 매년 당기순이익을 실현하는 지속가능한 수익 구조를 갖고,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는 일도 병행될 것입니다. 도내에 1998년 이후 신규 설립이 없었는데 임기 내 건실한 직장에 직장신협을 설립해 신협의 기반을 다질 계획입니다.”-끝으로 도민들께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전북 신협은 약 50년을 도민과 함께한 도민의 신협입니다. 앞으로도 도민들께서 신협을 많이 이용해 주시고, 신협을 통해 금융 애로 사항을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신협의 예금은 도민 여러분의 돈을 모여 저축된 만큼 좋은 곳에 사용하시고, 잘 갚아 주시면 더욱 발전하는 신협이 되리라 판단됩니다. 전북 신협은 돈 보다 도민을 더 사랑하는 신협이 되겠습니다.”● 최규석 본부장은 철학 중시 '정통 신협맨' 전북본부장 2번째 맡아지난 4월 1일 부임한 최규석 신협중앙회 전북지역본부장(57)은 전주 출신으로 전주덕진중과 전주영생고, 광주대학교를 졸업했다.1983년 9월 신협중앙회에 입사한 최 본부장은 호남지역본부 공제사업팀장, 중앙본부 계약지원팀장, 중앙본부 검사팀장 등을 거친 뒤 2004년 전북지역에서 첫 본부장으로 취임해 2년간 근무했다. 이후 서울지역본부 부부장과 부산지역본부 부부장, 대전충남지역본부 부부장 등 주요 지역에서 경험을 쌓은 뒤 올해 두 번째 전북지역본부장을 맡았다.최 본부장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영세 서민의 금융 문제를 해결하고 자립 기반을 지원하는 신협의 ‘이념’과 ‘철학’을 중시하는 정통 신협 맨이다.그는 “열정이 없는 협동조합은 유지되지 못한다”며 “신협은 계좌 수에 상관없이 늘 조합원이 주인이라는 생각과 조합원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 신용협동조합운동의 순수한 목적과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그가 신협의 정체성 회복과 더불어 가장 고민하는 것은 도내 손실 조합의 최소화와 상대적으로 취약한 신협의 젊은 층 고객 확장이다.최 본부장은 “지난해 17개까지 늘었던 손실 조합을 올해 한 자릿수까지 줄여 조합원에게 안정적인 배당이 이뤄지도록 할 계획”이라며 “신협이 자산 100조, 조합원 1000만명 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젊은 층을 끌어들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등 생태계 구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 기획
  • 문민주
  • 2014.10.06 23:02

[(34) (주)완주산내들희망캠프] 산악 프로그램 운영, 지역 공동체 활성화 앞장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주)완주산내들희망캠프(대표 이왕영). 언뜻 듣기엔 주식회사 형식의 이 단체가 수익을 좇는 기업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하지만 9명으로 구성된 이사진은 일상적인 기업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나 이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굳이 기업적 관점서 분류한다면 사회적 기업이란 명칭이 그래도 운영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완주산내들희망캠프는 아예 운영 목적에 지역사회를 위한 사회적 환원이라는 항목을 명기하고 있다.완주산내들희망캠프는 전문화된 산악캠프를 중심으로 아웃도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지역공동체를 활성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산악인 중심으로 이사진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단체는 산악 관련 프로그램에 관심을 주로 기울인다.주요한 수익사업은 등산이나 산악 프로그램을 개설해 받는 강사비수고비, 또 지역내 주요 행사장에서 운영하는 부스에서 발생한다. 물론 이사진들은 이들 사업에서 거둔 수익금을 제각기 호주머니에 넣지 않고, 단체 운영비에 쾌척한다. 이마저 지출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면 이사진들이 갹출하거나 후원그룹들이 내놓는 후원금을 활용한다.완주산내들희망캠프 이왕영 대표는 희망 나누기라는 슬로건과 함께 수익금의 70%를 지역사회와 소외계층에 사용하도록 결정했으나, 실제로는 수익금 전액을 모두 내놓고 있다고 밝혔다.완주산내들희망캠프는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고산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완주와일드푸드축제에서 대통구이부스를 운영, 이 사업에서 발생한 이익금을 희망캠프에서 추진하는 각종 대외 사업비로 사용할 예정이다.희망캠프는 이런 와중에 산악캠핑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관련 부지까지 완주군 운주면에 마련했다. 이 같은 굵직한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은 수익과는 무관하게 이사진들이 내놓는 투자금으로 해결된다.이사진들은 제각기 따로 생업이 있기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쪼개서 단체 활동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곳에 참여하는 자체가 자발성에서 비롯되고,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즐겁게 동참하기 때문에 어느 조직보다 결속력이 뛰어나다.수익금과 이사진의 기부금은 어려운 사회환경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주어진다. 이왕영 대표는 사회에 부적응하는 청소년이나 장애우들이 주요 관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지난 8월엔 장애우들이 함께 모여 교육공동체를 꾸려가는 전북푸른학교(완주군 고산면)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하나 되기 캠프를 무료로 운영했다. 1박2일로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완주산내들희망캠프가 해마다 운영하는 히말라야 오지탐사대 대원들이 동참, 장애우들과 함께 기초등산계곡체험숲체험 등을 즐기며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지향했다.산악인들로 구성된 희망캠프는 대둔산 지역을 중심으로 환경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사진들은 클린 마운틴이라는 명칭을 내걸고 자일을 이용, 일반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암벽에 버려진 쓰레기 수거작업을 수시로 벌이고 있다.완주산내들희망캠프의 봉사활동은 해외까지 이어진다. 희망캠프 관계자들은 2013년 1월 네팔 포카라베시의 오지마을에 자리한 시리 사라다 학교를 방문, 이 학교와 주변 마을을 지원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초중고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이 학교에는 히말라야 기슭에 사는 290여명의 산골 소년과 소녀들이 꿈을 키우는 터전이다.희망캠프는 지원협약을 맺은 이후 열악한 교사(校舍) 수리공사를 벌이는 한편 도서컴퓨터 등 교육 기자재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학생들과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희망캠프는 네팔 현지 여성을 간호사로 양성하는 교육비용을 부담하고, 의약품 지원 프로그램을 가동시키고 있다.특히 희망캠프는 해마다 운영하고 있는 히말라야 오지탐사대 일정에 이 학교 방문일정을 포함시켜, 우리나라 청소년과 네팔 학생들의 문화교류행사를 벌이고 있다. 양국 학생들은 스포츠와 놀이를 함께 즐기고, 교육을 주제로 공동 토론회를 벌이며 이해의 폭을 넓히고 있다.● 완주산내들희망캠프 '히말라야 오지탐사대'- '대자연 속으로, 매년 새롭게'도움계층 청소년 무료 참여완주산내들희망캠프가 지향하는 산악인을 중심으로 한 도전정신과 봉사정신이 응축된 프로그램은 해마다 운영하는 히말라야 오지탐사대이다.매년 새롭게 구성되는 히말라야 오지탐사대원들은 전문 산악인들로 구성된 완주산내들희망캠프의 이사진들의 도움을 받아 대자연 속으로 뛰어든다.2012년부터 시작된 오지탐사대의 활동무대는 히말라야 랑탕지역다울라기리마나슬루로 이어지고 있다. 오지탐사대는 중고생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들이 주요 참여대상이다. 참가자들의 거주지역도 전국적이다. 희망캠프는 수도권과 전북권을 비롯 다양한 지역에 걸친 학생들이 이 프로그램에 지원한다고 밝혔다.희망캠프는 오지탐사대에 도움계층 학생들을 무료로 참가시키고 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는 것이 도움계층 학생들을 탐사대에 참가시키는 이유이다. 이왕영 대표는 국민기초수급자나 다문화가정 등 도움계층 자녀들의 경우 오지탐사대 참가비 300만원을 받지 않는다며 이들 비용은 희망캠프에서 벌이는 각종 사업의 수익금과 외부인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된다고 설명했다.내년 1월에 히말라야로 향하는 오지탐사대는 성인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청소년들 위주로 짜여진 오지탐사대의 안전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이사진들의 회의 결과이다. 이에 따라 희망캠프는 이달중에 오지탐사대 참가자를 확정하고, 사전 훈련에 들어갈 예정이다.

  • 기획
  • 김경모
  • 2014.10.02 23:02

[16. 재가 장기요양보험 명암] 어르신 집에서 서비스 받아 '만족'…기관 난립 부작용도

안전행정부 주민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2013년 12월 31일 기준 전라북도의 65세 이상 인구는 31만2764명으로 전라북도 전체 인구의 16.7%를 차지한다. 전국에서 3번째로 노인인구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2003년)의 11.8%에 비해 4.9%가 증가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셈이다. 향후 2026년에는 초(超)고령사회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유례없는 빠른 고령화 속도로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점차 높아져 전세계의 65세 이상 비율 평균인 11.6%(2030년), 15.6%(2050년)를 각각 2배가량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산업화, 도시화, 저출산 고령화, 여성의 사회진출 등으로 가족의 형태가 변화했다. 가족이 부양해야 한다는 의식이 약화되고, 가족과 사회, 정부가 공동으로 부양해야 한다는 의식은 증가하고 있다. 건강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노인의 부양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일상적인 생활수행 능력이 떨어진 노인에 대한 부양은 어떠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으며, 문제점은 무엇인지 취재했다.△노인부양, 이것이 고민이로다.대학생 윤모씨(22남전주시 우아동)는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는 당연이 따로 살 것이며 이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어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본건 아니지만 아마 부모님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라고 말한다.김모씨(34남전주시 인후동)는 지난 4월 홀로계신 아버지의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혼자 생활하기 어렵게 되자 퇴직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의료시설이나 요양원 입소를 거부하고 집에서 지내시기를 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여생을 돌보지 않는 다면 나중에 더 큰 후회와 회한이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개월 후 아버지는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결혼해 자녀까지 둔 김씨는 생활이 걱정되었다고 고백했다.임모씨(43여전주시 중인동)는 16년째 친정어머니와 함께 산다. 임씨의 어머니는 78년 전에 치매가 발병하였고, 34년부터는 정도가 심해져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중증치매 단계다. 직장생활을 하는 임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어머니를 목욕시킨다. 매일 15알씩 약을 복용해야하는 어머니의 아침을 꼭 챙겨드린다. 오전 7시에 집을 나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학교에 내려주고 어머니를 주간보호센터에 맡기고 출근을 한다.임씨는 어머니를 돌보는 동안 형제들끼리 부양문제로 다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고 형제들에게 서운하고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노인부양 지원정책 명과 암노인부양은 개인적 혹은 가족적 차원의 사적 부양과 지역사회 및 국가가 개입하는 공적부양으로 나뉜다. 2007년 4월 제정된 노인장기요양법에 의거해 2008년 4월부터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었다. 고령화로 인해 사회적으로 비중이 커진 노인요양을 국가적 차원에서 감당함으로써 가족들의 부양부담을 줄이고 노인들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됐다.65세 이상 노인 또는 치매, 중풍, 파킨슨병 등 노인성 질병으로 6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혼자서 일상생활을 수행하기 어려운 분이 급여대상이다.장기요양급여에는 재가급여와 시설급여, 특별현금급여가 있다. 재가급여 비용의 15%, 시설급여비용 20%는 이용자가 부담해야 한다.재가장기요양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희 금암노인복지센터장은 방문요양의 장점으로 대상자가 자신이 살아온 익숙한 환경에서 욕구에 맞는 개별서비스 제공이 가능하고, 가족의 부양부담을 경감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그러나 방문요양 운영에 따른 어려움도 여전하다.김정희 센터장은서비스를 이용하는 대상자나 보호자가 요양보호사를 가사도우미로 인식해 가족이 먹을 김치담그기나 텃밭가꾸기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며 요양보호사의 업무범위를 명확히 합의 하는 일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요양보호사의 급여는 시급으로 책정되는데 대상자가 시설입소나 다른 요인으로 서비스가 중단될 경우 급여가 절반으로 준다고 덧붙였다.무엇보다 요양보호사의 안정적 소득보장을 위한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김정희 센터장은 현재 전라북도에 재가요양기관이 640여개, 전주시에만 160개가 난립한다. 이 때문에 기관 간 경쟁이 치열하여 15%의 본인부담금을 면제하거나 경감해주는 사례가 빈번하다며 7월부터 법이 강화되어 본인부담금을 면제, 경감해주는 사례가 발각되면 지정이 취소되거나 시설폐쇄된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지금은 장기요양보험 시행초기라 재원부족으로 장기요양 등급판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며 본인부담금까지 면제한다면 요양보호사의 급여가 낮아지고 60세이상 고령의 요양보호사를 채용하는 등 서비스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고 우려했다.금암노인복지관 서양열 관장은 노인부양문제에 대해 부모를 부양하는 사람에 대한 지원책을 강화해 사회적 효(孝)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며 장기요양보험의 보험료 징수, 조사, 판정, 평가 및 관리감독 기능을 분리개편해 제도적 활성화를 통한 서비스 품질을 개선하고, 요양보호사와 같은 장기요양 인력의 자질 향상과 이에 부합하는 처우 개선도 서비스 품질 제고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모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늘푸른집 나송 원장 "요양보호사 처우 여전히 열악, 현실적인 수가인상 이뤄져야"-늘푸른집은 어떤 곳입니까.전주중앙교회가 지역사회복지서비스 제공을 목적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여 운영합니다. 노인성질환을 가진 65세 이상 어르신에게 심신기능과 다양한 욕구에 맞춘 잔존기능 유지 및 자립기능 활성화를 위한 보건의료요양복지 등 통합서비스를 제공해 편안한 노후를 영위할 수 있도록 돕고 있죠. 특히 치매어르신을 위한 특별 공간 및 인지기능 유지 개선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실시합니다.-노인장기요양보험실시 후 요양원 운영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노인을 위한 가족의 부양부담이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으로부터 국가정책으로 전환됨으로써 소득에 관계없이 노인성질환을 가진 일반대상자도 복지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확대됐습니다. 국가보조금이 아닌 요양수가로 운영되므로 각 기관 별 임금형태와 운영체계가 차별화되었고, 대상자(보호자)의 서비스욕구가 높아져 서비스 양과 질적인 향상을 위해 개개인 맞춤형서비스, 사례관리 등을 위한 프로그램개발과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지요. 케어인력의 고령화로(20~30대에서 50대 후반) 직무 및 보수교육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장기요양보험제도하에서 요양원 운영의 어려움은 무엇입니까.제도시행초기 보건복지부는 인프라 구축을 위한 사회복지법인 및 개인장기요양기관 시장진입을 독려했으나 오히려 공급과다로 지나친 시장경쟁체제가 형성됐습니다. 대부분의 장기요양기관이 공실률로 인한 시설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낮은 수가로 인해 종사자들의 처우가 열악하여 구인이 어렵고 기피하거나 잦은 이직 등으로 요양보호사 확보에 전전긍긍하고 있지요. 또 요양보호사는 전문직종으로 국가자격증을 취득한 자이나 사회적일자리 창출을 위한 신종직업으로 적절한 검증 없이 대량 배출되어 전문직으로 갖춰야 할 덕목들을 기관에서 직무교육으로 대처하기엔 어려움이 많아요. 결과적으로 정책의 잘못된 그리고 성급한 시도가 최일선에 있는 현장이 모든 책임과 부담을 안고 가야하는 현실에 처하게 됐지요.-개선 방안은.현실적이고 적정한 수가인상이 이루어져야만 시설운영 어려움 해소와 요양보호사처우개선으로 인력수급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무엇보다도 반드시 법 개정이 필요한 부분은 입소 및 이용자(보호자)의 부양부담경감을 위한 본인부담상한제를 도입하여 장기요양서비스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해요. 현대사회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전 국민이 안고 가야할 숙제이며, 누구라도 노년에 일정부분 이용할 제도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성급한 결정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줄이고, 오히려 현장을 이해하고 살릴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야 합니다.

  • 기획
  • 기고
  • 2014.09.30 23:02

[(33) 김제 금송식품] 풍수지리·오행 상생법 따져 전통 간장·된장 담가

우리 음식의 맛은 간이 맞아야 한다. 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소금 및 간장과 된장이 필요하다. 옛날에는 이 간장과 된장을 보관하는 곳을 제일 청결한 곳에서 가장 중요한 신(조왕신)으로 섬겼다. 지금도 제사나 차례상을 준비할 때 조왕신상을 차릴만큼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독에서 간장을 떠다가 부엌 한 곳에 담아두고 필요할 때 마다 음식에 첨가하여 사용했다.우리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간장과 된장을 자연 순환법칙인 오행(五行) 상생방법의 원리에 따라 만드는 곳이 바로 김제 금송식품(대표 왕정기)이다.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 아래 수양산 오리알터에 자리 하고 있는 금송식품은 일단 장소가 기가 막히다. 뒤로는 병풍처럼 소나무가 둘러져 있고 앞에는 금평저수지가 명당수로 있으며, 주변에는 거북이 모양의 구성산이 자리 하고 있다.풍수지리학상 명당의 조건을 두루 갖춘 금송식품에서 생산 되는 간장, 된장맛은 자연의 향이 조화를 이루며 발효된 전통 장류로써 개성왕씨 14대 종가집에서 내려오는 비법으로 만들어 지고 있다.△제품 특징국내산 천일염 중 비온 뒤 맑은 날 결정되는 최고급 임자도 식용소금을 물에 녹여 불순물을 여러번에 걸쳐 제거한 후 장작불로 구운 전통 항아리에서 1년간 소금물로 발효 시킨다.이 소금물에 순 우리콩을 쑤어 황토방에서 발효시킨 메주와 달군 숯을 넣어 30일 정도 우려낸 후 메주와 간장을 분리하여(간장을 끓이지 않는다) 각각 최소 3년에서 5년간 자연발효 시킨다.발효시에는 간장도 생물이기 때문에 비온 후 맑은 날 뚜껑을 열어 햇빛을 쪼여주면 스스로 자전운동이 일어난다. 곁들여 한가로이 음악도 들려주고 간장과 대화도 한다.금송식품의 발효 생물은 5060년된 소나무 그늘에서 자장가 노래를 들으며 하루하루 자연과 친구가 돼 익어가며 주인을 기다린다.금송식품의 발효제품은 해발 100m 내외에서 생산되며, 앞에는 금평저수지가 자리 하고 있어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에 편백나무향, 대나무향, 소나무향, 참나무향들이 곁들여와 간장과 된장이 발효되기 때문에 맛과 향이 독특하다.또한 동양의 오행사상의 원리로 천연소금(금), 메주(목), 물(수), 옹기(토), 햇빛(화) 외에는 아무 첨가물도 넣지 않아 잊어버린 고향의 맛이 나고 있다.여기에는 50100년 이상된 씨간장이 큰 몫을 한다. 이 씨 간장을 새로 담근 햇 간장과 일정비율 혼합하게 되면 햇 간장이지만 오래된 묵은 간장맛을 내고, 깊은 맛을 단시간에 내게 된다.타 간장에 비해 탁하지 않으면서 맑고 많이 짜지 않으면서도 깊은 맛과 단맛을 낸다. 된장의 경우도 타 된장에 비해 수분이 적으면서 단백하고 고소한 풍미를 내 생 된장으로 먹거나 찌개로 먹기도 한다. 특히 된장차를 만들어 먹으면 갈증 해소와 변비 등에 효과가 있다.△제품 제조과정순 국내산 대두를 깨끗하게 세척하여 전통 가마솥에서 8시간 삶은 후 잘 삶아진 대두를 너무 곱지 않게 적당히 거칠게 분쇄한다.분쇄된 콩을 장방형의 나무틀에 넣어 메주를 만들어(이때 사람이 손으로 하여 철에 닿는 시간을 최소화 한다) 발효실로 옮겨와 장작나무불로 발효실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60일간 자연 건조 발효시킨다.이 메주에 다시 누룩곰팡이가 생겨 포자가 날리기 전까지 발효한 후 비로소 담기 시작한다. 먼저 항아리를 짚불로 쐬어 소독한 후 1년 동안 숙성시킨 소금물과 메주를 적당 비율로 섞은 후 달군 숯과 통고추, 대추, 솔방울(솔잎)을 넣어 30일 정도 숙성시킨다.30일이 지나면 익은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이 때 간장과 된장으로 분리한다. 역시 짚불로 소독한 항아리에 거른 된장을 넣고 적당히 으깨어 약간의 물과 함께 다독거린 후 봉하여 숙성시킨다.이후 3년5년간 숙성시키면 개성왕씨 14대 종가집에 내려오는 감칠맛 나는 금송식품의 간장과 된장이 탄생하게 된다.● 왕정기 대표 "가족 먹을 음식 만들듯 정성, 전통장류 학교 세우고 싶어"옛날의 간장은 현대사회의 조미료 역할을 했지요. 우리 조상들은 옛날에 장가가기 위해 맛선을 볼 때 여자집 장맛을 꼭 봤답니다. 그만큼 우리 식탁에서 차지하는 간장과 된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지요. 모든 음식의 기본은 간장과 된장맛 아니겠어요자연순환법칙인 오행 상생방법의 원리에 따라 간장과 된장을 담고 있는 금송식품의 왕정기 대표는 일단 간장과 된장을 담글때는 기본적으로 몸을 깨끗히 씻은 후 작업을 한다.풍수지리학 전문가이기도 한 왕 대표는 간장과 된장을 담그는 공장을 풍수지리학에 근거하여 장소를 물색했다. 현재의 공장 위치는 해발 100m 내외에 위치하고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는 산자락에 위치 하고 있다.특히 앞에는 금평저수지가 자리 하고 있어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에 편백나무, 대나무, 소나무, 참나무향들이 곁들여져 간장과 된장이 발효되기 때문에 맛과 향이 독특하다.저희 집은 개성왕씨 14대 종가집으로, 예전부터 내려오는 우리집만의 간장과 된장 맛이 있습니다. 최소 3년이상 전통항아리에서 뜨거운 햇볕, 차가운 설한풍을 이겨내며 발효 숙성된 간장과 된장이기 때문에 맛이 가히 일품이지요. 왕 대표는 지난 2008년부터 간장과 된장을 만들어 지금까지 천연의 자연 조건에서 숙성시키고 있다. 앞으로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갈 계획이다.현재 600여개의 항아리에서 금송식품의 간장과 된장이 6년여의 숙성기간을 거치며 익어 가고 있다.왕 대표는 잊혀져가는 우리 조상들의 얼과 정신을 이어가고 싶은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면서 꿈이 있다면 나중에 전통장류를 공부할 학교를 하나 세우고 싶은게 소망이다고 말했다.그는 우리 간장과 된장은 깨끗한 우리 콩과 맑은 물, 천일염 중 비온후 맑은 날 결정되는 최고급 임자도 식용소금, 전통항아리, 토양이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산속에서 익어가고 이어 정말 자랑하고 싶은 간장된장이다면서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간장과 된장을 만들고 있고, 우리 지형에 맞는 비율(콩, 소금, 물)을 찾으려 수 년을 노력했다. 앞으로 우리 간장과 된장을 이용한 타 식품과의 접목을 실현해 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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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대우
  • 2014.09.25 23:02

[(37)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하)] '살림과 모심' 정신으로 유적지 보존·기념물 건립 나서야

현재까지 파악확인된 경북지역 유적지 혹은 기념시설물은 모두 31곳(약8.8%)인데, 이들 유적지 정비 및 기념시설물 건립설치가 타 지역에 비해 그 실적이 매우 저조하다. 경북지역 기념사업 추진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파악되고 확인된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과 함께 해당 유적지의 성격에 맞게 기념시설물 건립설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유적지 정비는 지역주민에게 동학농민혁명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지역의 역사라는 친근감과 함께 긍정적인 인식의 기틀로 자리하는 매개체로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나아가 21세기 문화관광의 시대 해당 시군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전통을 확인하여 지역 정체성으로 정립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까지 경북지역의 역사문화적 전통의 핵심적인 위상은 양반문화라고 볼 수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신분제를 골간으로 하는 중세시대의 산물인 양반문화는 인류역사발전의 흐름에서 보면 역사발전의 역방향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민주정치 구현을 위한 대규모 민족민주항쟁으로 인류역사발전의 순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동안 경북지역이 지녀온 양반문화라는 위상을 한쪽 날개라고 한다면 다른 한쪽 날개는 근대민주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의 본고장의 면모를 살려 21세기 경북지역 발전의 양쪽 날개를 활짝 펼쳐야할 때라고 생각한다.이처럼 동학농민혁명 정신과 그와 관련 유적지를 경북지역 역사문화관광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지역발전의 핵심기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바탕으로 그동안 전국 각 지역에서 추진된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현황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과 폭넓은 검토를 통해 경북지역 유적지 성격에 부합하면서도 타 지역 기념사업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독창적인 기념시설물 건립설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성이 있다.나아가, 경북지역 기념사업 추진의 기본토대의 하나로 살림과 모심을 제안한다. 그동안 추진된 기념사업이 1980~200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 요구에 붙잡힌 나머지 불가피하게 반제 반봉건 항쟁으로서의 1894년 농민전쟁에 집중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살림과 모심을 기본토대로 가져가는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일 것으로 여긴다. 이는 21세기 초입 한국사회의 매우 중대한 해결과제인 사회적 양극화 해소와 물질중심주의가 불러온 각자위심을 딛고 참된 공동체로 나가야한다는 시대적 과제와도 부합된다. 살림과 모심이라는 기본토대는 동학창도, 탄압, 포교 등과 관련된 경북지역 유적지들을 아우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시군별 기념사업단체 창립 필요경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념사업단체는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한 곳뿐이다. 지난 1996년 창립되어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기항의사기념비와 생매장 당한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생매장 터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의 활동을 펼쳤던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현재 활동이 중단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단체의 숫자와 그 지역에서 추진된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및 각종 기념사업 추진 경과가 정비례한다는 것을 앞에서 확인했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기념사업을 활성화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경북지역 각 시군 주민들로 구성된 민간 기념사업단체 창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경상북도, 그리고 경북지역 각급 지방자치단체는 해당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는 기념사업단체 창립에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단체 창립 이후에도 이들 단체들이 스스로 자기 지역의 특수성에 맞는 기념사업을 발굴하여 추진해나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지난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하여 서울의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와 전주의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전국 각 지역단체 창립 및 그 활동 지원을 통해 백주년 기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냈던 사례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역사발전의 순방향에서 인식전환을경북지역이 지녀온 양반문화는 인류역사발전의 큰 틀에서 살펴보면 역사발전의 역방향이다. 그러나 근대민주정치를 구현하고자 온몸으로 떨쳐나섰던 동학농민혁명은 인류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그동안 경북지역이 양반문화라는 한쪽 날개만 폈다면 이제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에 자리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한쪽 날개를 마저 활짝 펼쳐야 한다. 두 날개를 활짝 펴는 바로 그곳에 21세기 경북지역의 창공이 있음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다.120주년을 맞은 지금 향후 기념사업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지난 1994년 전후부터 헌신적인 기념사업 추진을 통해 특별법을 이끌어냈던 기념사업 추진주체들의 헌신과 정성이 다시 한 번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21세기 기념사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지난 시기에 견지했던 동학농민혁명 역사인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1980~2000년대 한국사회는 보다 진전된 민주화를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도 위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지난 시기 기념사업이 반봉건 반외세의 틀에 메인 측면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아가 일제식민지시기, 동서냉전체제 구축기, 군사정권집권기 등을 거치면서 연구자체가 금기시되어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던 시대적 제한성도 역사인식의 외연확장을 가로막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음은 물론이다.21세기 기념사업 추진방향 모색은 이전시기 기념사업의 중심축이었던 반외세, 반봉건 항쟁으로서의 역사인식에 대한 면밀한 재검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특히 경북지역의 기념사업 추진방향을 모색하는데 있어서는 이전시기와는 사뭇 다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제1단계(1860~1893) 동학운동, 제2단계(1894. 1~4월) 제1차 동학농민전쟁, 제3단계(1894. 5~8) 근대민주정치구현, 제4단계(1894. 9~12) 제2차 동학농민전쟁, 제5단계(1895~1945.8) 항일독립투쟁 등으로 다소 위험하지만 획기적인 역사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또한, 동학에 대한 이해도 중세문명과 근대문명,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충돌하던 19세기 전반으로 그 폭을 넓혀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재검토를 통해 서구적 근대는 무엇이고, 동학에서 추구한 동양적 근대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의문 혹은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이런 과정에서 수운이 문명전환의 방안으로 제시했던 시천주사상(侍天主思想)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을 다시금 깊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이 만연한 세상을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세상으로 바꾸고자했던, 수운이 살았던 19세기와 또 다른 차원의 각자위심이 만연한 오늘이 어떤 점에서 같고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하면서 시천주의 시(侍)를 내유신령(內有神靈) 외유기화(外有氣化) 일세지인(一世之人) 각지불이자야(各知不移者也)라고 설명했던 수운의 생각도 곰곰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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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4 23:02

[⑮ 외국인 문화 적응 프로그램] "전통문화 체험하며 명절 때 더 커지는 외로움 달래죠"

우리에게 명절은 지났지만, 타지에 사는 외국인 상당수는 명절 직후엔 더 극심한 우울감을 호소한다. 한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 이들을 위한 문화 적응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다.이에 이주여성, 유학생, 이주노동자를 위한 명절 행사가 도내 곳곳에서 열린다. 가을을 맞아 외국인 주민을 위한 행사가 곳곳에서 계획되어 있는 것으로, 이번 달에는 외국인 유학생 페스티벌이 전북중국문화원 주최로 열릴 예정이다. 또 전라북도다문화가족지원센터협회 주최로 올해 7회째를 맞는 다문화어울림한마당이 개최될 예정이다.외국인의 문화 적응 프로그램이 절실한 가운데 이들의 실태를 취재해봤다. 외국인 주민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고 한국의 문화도 흥겹게 체험해 한국이 이들에게 제 2의 고향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여지길 바란다.△외로운 외국인의 명절나기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외국인은 156만9470명에 이른다. 이들 중 결혼이민자는 29만5842명에 달한다. 전북에도 이주노동자, 결혼이민자, 유학생, 재외동포 등 외국인 주민 2만5368명이 거주하고 있다. 외국인 주민에게 있어 한국에서의 추석은 각자의 체류신분에 따라 다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주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추석은 긴 휴일로써 심신의 피로를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렇지만 한국인 직장 동료들은 모두 가족들을 따라 떠나고 몇몇 외국인 동료들끼리 추석을 보내야 하는 쓸쓸함도 있다. 같은 국적의 이주노동자들끼리 모여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연속적인 휴일을 이들하고만 지내기에는 무료함이 따른다. 유학생들 역시도 각 학교마다 사정에 따라 추석 위로 행사를 갖기도 하고, 타지에 있는 같은 국적의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연속되는 휴일에 기숙사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않음으로 인해 인근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되는 경우도 있는 등 추석은 이들에게 약간의 힘든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혼이민자에게 있어서 추석은 외국인이주노동자와 유학생과는 무척 다르다. 결혼이민자들에게는 가족이 있다. 남편과 자녀와 함께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있어서 이주노동자와 유학생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결혼이주여성들 역시 한국에서의 명절은 고향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온다.한국인 남편을 만나 2010년 한국으로 시집 온 노은옥씨는 2명의 자녀와 함께 전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노은옥 씨는 남편을 따라 해마다 장수에 가서 추석을 보내고 있다며사실 한국 명절이 익숙해지기까지 결혼 이민자들은 말못할 어려움도 많이 겪는다고 말했다. △이주여성위한 프로그램 다양화 절실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 결혼이민자를 지원하는 기관에서는 이러한 결혼이주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수자원공사의 지원으로 이주여성과 함께 송편 빚기와 김장김치 담그기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고, 전주시 완산구 해바라기봉사단과 함께 명절음식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전을 부치는 행사를 가졌다. 한국에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주여성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 크게 느낀다. 이들은 첫 번째 해와 두 번째 해에 고향의 가족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눈물로 표출해 내고 있어 명절 때 다양한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위로의 선물이 되고 있다. 고창에 있는 시댁에 가면 부침개 부치고 청소도 해야 하죠.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밥 차리는 것이 일이에요. 설거지 할 것도 많고, 식구들 빨래거리도 많아서 할 일이 많아요.베트남에서 시집 온 부티씨는 한국에서 9년째 추석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추석에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일을 맡아서 해야 할지를 익숙하게 알고 있다. 부티씨는 베트남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후 여성의 권익에 대한 인식이 커진 후 베트남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주의가 많이 사라지고, 남성들이 여성의 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 말하면서 한국은 아직까지도 가부장적인 권위가 많이 있어서 여성들이 명절 때가 되면 여전히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가정폭력에 더 슬픈 한국 명절다문화가족들 중에 남편 친가 쪽의 여러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 있는 반면, 남편과 사별해 남겨진 자녀와 쓸쓸하게 추석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가정폭력으로 인해 별거하고 있거나 이주여성 보호쉼터에서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들도 있다. 이들에게 추석과 같은 명절은 그 어떤 날들보다 더욱 외롭고 힘겨운 날이다. 가정폭력으로 남편과 이혼한 쩐티(가명)씨는 8살 자녀를 혼자 양육하고 있다. 식당에 다니며 어렵게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자국출신의 이주여성들은 모두들 남편과 함께 명절을 지내러 가기 때문에 더욱 외로워진다. 부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 계획이었지만, 친구 남편가족들에게 눈치가 보여서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시아이주여성쉼터의 홍성란 원장은 주위에 외로움과 힘겨움 속에서 주저하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네주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 될 수 있다면서 명절이 지난 후 더욱 우울감을 느끼는 한 부모 다문화가정 등 어려움에 처한 이주여성과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좀 더 가져달라고 주문했다.● 김아름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네트워크사업 담당 "다양한 행사, 연중 분산 개최 필요" - 결혼이민자들 중에 어느 나라 출신이 제일 많이 있습니까?한국인과 혼인해 정착하고 있는 대부분의 결혼이민자들은 아시아권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전북에 정착하고 있는 결혼이민자 중에서 중국출신의 결혼이민자가 제일 많고, 그 다음 베트남, 필리핀, 일본, 캄보디아, 몽골, 태국 순입니다. -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의 추석과 같이 유사한 명절을 지키는 나라들도 제법 되죠?중국은 중추절, 일본은 오봉절, 베트남은 쭝뚜, 필리핀은 만성절, 캄보디아은 프춤번을 지킵니다. 한국과 다소 유사성은 있지만 꼭 같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중추절이라고 해서 단오와 설을 포함해서 중국의 3대 명절로 손꼽습니다. 중국은 1주일간의 휴일동안 가족을 만나기 위해 각기 고향으로 몰려드는 것이 한국과 유사합니다만, 중국에서는 제사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중국에서 시집을 온 이주여성들은 이 제사문화로 인해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상을 차리고 설거지 하는 것을 큰 부담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일본의 경우에는 1872년 명치 5년부터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면서 양력 8월 15일을 추석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캄보디아도 프춤번이라고 해서 지키는데요, 쌀을 함께 공유 한다는 의미로 풍성한 수확을 감사하는 의미와 함께 추석을 지키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쭝뚜라고 해서 음력 8월 15일 하루를 쉽니다. 베트남에서 추석은 그리 크게 지키지는 않습니다. 설 명절을 제일 크게 생각하죠. 쭝뚜때가 되면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과 음식을 나누면서 지내게 되는데요, 이 날은 어른보다는 어린이들에게 더 큰 날로 여겨집니다. 아이들의 춤과 노래를 선보이면 선물로 별이나 물고기와 나비 모양의 등이나 장난감을 주기도 합니다. 필리핀은 All Saint day라고 해서 조상의 묘지를 찾아 성묘하고 영혼을 기리는 날로 지키는데, 11월 1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 가을에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페스티벌이 있고 다문화어울림한마당이 열리던데요, 행사 내용은 어떻습니까?26일 화산체육관에서 열리는 외국인유학생페스터벌에서는 재기차기, 투호놀이, 딱지치기 등의 전통놀이를 체험하는 시간도 있고, 10개 대학이 장기자랑대회를 갖기도 합니다. 오는 25일 덕진공원에서 열리는 다문화가족들이 참여하는 다문화어울림 한마당에서는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들의 각종 음식들을 먹어볼 수 있는 음식부스가 운영되고요. 건강검진을 무료로 받아볼 수 있습니다. 또 국제전화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부스도 있고, 가족의 어려움을 상담할 수 있는 상담코너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14개 시군에서 참가할 계획인데, 아시아의 전통문화를 결혼이민자와 자녀들이 소개하고 공연할 수 있는 콘테스트도 열릴 계획입니다. - 이런 다문화 가정 이민자들과 외국인들을 위한 행사가 다양한데, 보완해야할 점이 있다면.행사에 참여하는 분들은 대부분 이러한 행사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행사를 통해 서로 어울리고 만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는데 그 의미가 큽니다. 그렇지만 봄철과 가을철에 많은 행사가 집중돼 있고, 곳곳에서 비슷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 조정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유사한 행사는 통합되어 진행될 필요가 있지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지는 행사들이 연중으로 분산되어 진행된다면 결혼이민자를 비롯한 여러 외국인주민들에도 더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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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23 23:02

김선옥 전북지방우정청장 "언제 어디서나 편리한 우정 서비스 제공 최선"

1940년 체신청이란 이름을 갖고 출범해 1세기 가까이 배달의 기수를 자청해왔던 우정청은 현재 사람과 기술이 같이 공존하는 미래의 혁신을 꾀하고 있다. 정보가 그 나라의 힘을 상징하는 시대로 금융과 보험, 우편물류를 넘어 대국민 화합의 기틀을 다지자는 것이다. 우정청 헌장은 모두 국민을 모태로 한 서비스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시급한 내부 과제는 인적청산과 내부봉합이며, 대외적으로는 감동과 친절의 봉사는 물론 대포통장과의 전쟁이 꼽힌다.이런 가운데 국가 주요 기술정책 부서를 두루 거친 김선옥 전북지방우정청장(55)에게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김 청장에게 도민들이 만족할 우편서비스 제공과 도민의 눈과 귀가 되어줄 정보 제공 계획 등 미래전략 수립과 경영혁신에 필요한 비전을 들어봤다.-전북 근무는 처음인데 전북에 맞는 경영계획 방침이 있다면.지난 3월24일 전북우정청장으로 부임해 전북도민들에게 최상의 우정서비스를 제공하고, 어떻게 하면 직원들이 행복한 전북우정을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면서 6개월을 보낸 것 같습니다. 최근 우정사업본부가 우정사업 연속 흑자경영과 국가고객만족도(KCSI) 15년 연속 1위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양하는데 전북우정청이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자부합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계승해 향후 전북우정을 한 단계 더 도약시키기 위한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국가의 기본 인프라인 우체국을 지역발전과 서민경제를 지원하는데 기여하고 도민 모두가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보편적 우정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북우정청이 하는 역할과 주요 업무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우체국 네트워크를 전북도민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개방함으로써 국민중심 서비스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며, 도내 중소수출기업 및 우체국쇼핑 지원 등 지역경제 활성화 촉진, 우량 기업택배 등에 물류창고 제공 등 중소기업과 동반 성장 추진, 중소통신사업자의 유통판로 지원과 가계 통신비 절감을 위한 알뜰폰 수탁판매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또 우정사업본부와 연계한 우편금융시스템을 고도화하고, 고객만족경영을 지속 추진하고 고객중심의 원스톱 민원처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부적으로 일선 우체국은 우편, 예금, 보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전북우정청은 전북지역의 각 우체국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관리 감독하는 기능과,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등 우체국을 총괄하고 있습니다.-전북우정청의 사업실적에 대한 평가와 향후 계획은.올 8월말 현재 우편매출액은 392억 원, 예금수신고는 4조298억 원, 초회보험료는 41억 원으로 우수한 실적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우정사업은 국내외 경제여건과 맞물려 많은 어려움과 고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에 따라 우편사업은 신수익원 발굴을 위한 사업다각화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예금사업은 수익성 개선을 위해 요구불예금 증대와 적정 수신규모를 유지하며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겠습니다. 보험사업은 보장성보험 집중 유치를 통한 손해율 감소 등 수익성 중심으로 관리지표를 강화하고 우체국FC의 전문성 및 생산성 향상을 통해 건전성을 강화해 나가겠습니다.-중소기업 상생과 지역 특산물 애용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있다면.우리는 지난 2008년 8월 이후 전국 최초로 전북도청, 전북중소기업청과 전략적 제휴(MOU)를 체결한 이래 국제특송 물류비 지원사업을 적극 추진해 도내 중소기업의 수출 촉진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농산물의 시장 개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어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농가소득 증대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전라북도와 농특산물에 대한 다양한 판로 확대, 수요창출 협력, 안전한 택배배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거시기장터 운영을 통한 우체국택배는 2012년 12만건에서, 2013년 53만건, 2014년 8월말 58만건으로 성장했습니다. 올해도 우체국쇼핑상품 18만건을 판매해 약 5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지난 추석명절에도 약 22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등 앞으로도 농가소득 증대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에 앞장서겠습니다.-갈수록 우편물이 급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은.전북지역 우체국의 75%이상이 도시가 아닌 시골에 있어 도내 방방곡곡 작은 섬까지 집배원들이 연간 1.7억통의 우편물을 배달하는 한편, 우체국예금과 보험사업을 통해 금융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빠른 정보기술(IT)의 발달과 더불어 우편물량이 매년 6~7% 가량 급감하면서 최근 우편수지 적자가 발생해 체질 변신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익성을 고려한 신규 우편수익원 발굴, 고중량 소포 등 고비용 상품 감소 추진 등 우편사업의 내실화 운영과 물류체계 개편, 우정사업 분야별로 인력의 효율적 운영 등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향후 사회공헌 계획과 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우리 주변에는 소년소녀 가장이나 홀로어르신 등 보이지 않는 어려운 이웃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소통과 나눔 실천을 위한 공정한 사회로 나가는데 있어 그 어느 때보다 더 책임을 느낍니다. 도내 산간오지에까지 퍼져있는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우정사회봉사단, 집배원365봉사단 등을 중심으로 소외계층에 대한 생계비 지원, 홀로어르신장애우에 대한 계기별 방문 봉사활동을 지속적으로 늘려 나가겠습니다. 또 1국 1과 1가정 자매결연으로 정기적 지원(30명, 매월 300만원), 소년소녀가장 생활비 지원(7명, 매월 25만원), 직원 자발적 재능기부로 지역친화형 우체국 이미지를 제고하는 등 꾸준한 봉사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갈 것입니다. 도민들도 우체국네트워크를 지역 발전과 도민의 편익을 위해 적극 활용하는 등 변함없이 우체국을 사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김선옥 청장은- 정보통신 분야 전문 '대포통장' 근절 앞장금융 정보를 이용한 범죄가 갈수록 고도지능화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내려진 사명이 있다면 바로 대포통장과의 전쟁을 꼽을 수 있죠.지난 3월 전북지방우정청장으로 부임한 김선옥 청장은 도전, 융합, 소통을 통한 1등 우정청 구현에 전북본부가 그 주축이 되는 동시에 고객으로부터 신뢰와 존경받는 공기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미래창조과학부에서 부임한 김 청장은 1985년 공직을 시작해 과학기술부 기획관리실 정보화법무담당관, 교육과학기술부 거대과학정책관, 미래창조과학부 기획조정실 국제협력관, 국립과천과학관 전시연구단장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분야의 공직 경험과 안목을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 청장은 수년 동안 근절되지 않고 계속 진화돼온 금융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대포통장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를 이용한 범죄 예방에 사활을 걸고 있다.최근 사회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스미싱파밍 등 신종 사기수법 및 대출사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으로 도내 217개 우체국과 2500여 직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피해 예방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실제 금감원 대포통장 피해구제 접수현황에 따르면 2012년 2만16건이던 피해 건수는 지난해 2만1464건으로 늘었으며, 올 상반기만 1만1082건이 접수됐다. 피해액도 2012년 1165억, 2013년 1382억, 올 상반기 872억으로 매년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김 청장은 신뢰를 기반으로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통해 새롭고 밝은 전북우정의 미래를 개척해 도민의 사랑에 꼭 보답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이강모
  • 2014.09.22 23:02

'고대기술복원 프로젝트' 나선 옹기장이 이현배 씨 "옛 사람들 '자작자족' 지혜, 우리 일상으로 들여놓고 파"

옹기를 만들기 시작한지 10년. 30대였던 그는 전통의 관점으로 현대를 해석하는 일에 몰두했다. 일상에 옹기를 들여놓는 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던 그는 옹기의 쓰임새를 확장한 다양한 식기를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으며 그 덕분에 한식 상차림의 반상기 세트와 온갖 아름다운 식기, 일상 소품들이 옹기로 태어났다. 서울의 이름난 호텔 양식부에 들어가 일주일동안 실습하면서 양식과정과 그릇의 품새를 익히고 난 뒤 옹기 양식세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작업은 고단해보였으나 에너지가 넘쳐나는 그의 일상을 만나는 일은 특별했었다.옹기장이 이현배씨(52, 진안군 백운면 평장리 솥내마을)의 10여 년 전 삶의 풍경이 그랬다. 그가 4-5년 전부터 나주 문화재연구소와 별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고대기술복원프로젝트.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 제작 기술을 재현하는 작업이었다. 1995년 그의 첫 전시회 팸플릿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옹기는 세상에 태어날 때 태항아리, 밥을 담는 오모가리, 똥을 담는 합수독아지, 죽어서는 옹관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나고 죽는, 그야말로 처음과 마지막을 담는 모든 것이다.그렇고 보니 옹기의 질서(?)를 철저하게 재현해내는 그의 작업이 어디까지 왔을지 궁금했다.사실 그가 만든 손내옹기는 전통옹기 대중화의 상징적 브랜드가 된지 오래다. 인사동 쌈지길의 전문 옹기가게를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했지만, 전통적인 조형이 아니고도 모던한 조형미에 현대적 쓰임새를 결합시킨 옹기로 특별한 소비자층을 매료시킨 덕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몸을 낮추어 옛 것으로부터 배우는 지혜와 깨달음을 옹기 만드는 일로 풀어 나간다.옛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의 가치가 열망이 되어버린 시대. 옹기장이로 살아가며 전통의 미덕을 현재에 되살리는 일을 삶의 목표로 삼은 그를 만났다. 짧지 않은 세월, 적지 않은 고난과 맞닥뜨려야했지만 그의 의지는 더 단단해지고 결연해진 듯 보였다. 새로운 과제를 설정해놓은 덕분이었다.제 나름대로 생각하는 손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일상에 자작자족(自作自足)의 가치를 복원해내는 일이예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는 소비를 통해 마치 자아완성이 될 것처럼 세팅되어 있잖아요. 이 질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작자족은 삶의 질을 높이는 통로가 될 수 있어요. 필요하다면 문화운동으로라도 확산해가고 싶습니다.그가 제안한 일은 낯설지만 새로운 일은 아니다. 되돌아보면 자작자족은 옛 사람들의 가치 있는 일상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크고 작은 항아리며 새로운 조형의 옹기도 그렇지만, 옹관이 흥미롭습니다. 크기만으로도 만만치 않은데 제작 과정에 어려움은 없습니까.규모화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제작의 속성을 알면 만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완성된 것을 옮길 때 복잡한 문제가 생기죠. 박물관 식구들이 와서 작업을 의뢰했을 때도 제작은 걱정 없다고 말했었어요. 실제로 무난히 만들었고요.-옹관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2008년에 국립 나주문화재연구소 의뢰로 시작하게 되었어요. 5년 동안 진행하는 작업이었는데 근간은 고대기술복원이었죠. 그러니까 옹관 제작 기술 복원인데, 재작년 1차 프로젝트를 끝내고 작년에 2차로 다시 5년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1차에서 얻은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군요.고대기술 복원인데, 실험고고학의 측면에서 진행하는 것이니 제작 과정의 다양한 실험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의 상징인 옹관의 재현을 통해 역사성과 가치를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시행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고고학자들의 요구에 맞게 작업하는 것이죠. 흙이나 형태, 색깔까지 주어진 과제대로 맞추어 만들고 불을 땝니다. 그래서 결과물을 얻습니다.-옹관 가마가 따로 있던데 여기서 제작을 하나요.프로젝트 작업은 나주에 가서 진행합니다. 제 가마터에 있는 옹관 가마는 옹기장이로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해보려고 만들었어요. 일을 하다 보니 고고학자가 궁금해 하는 과제와 제가 개인적으로 실험하고 싶은 내용이 달랐거든요. 가령 불을 땔 때의 효율성도 그렇고, 서로 파악하고자 하는 속성도 다르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실험을 다시 해보는 것이죠. 옹기의 조상이랄 수 있는 옹관은 모든 토기의 완성형이거든요.-옹관과 옹기 만드는 일은 별개의 작업 아닌가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축적과 생성이라는 말을 쓰는데 옹기를 보면 그 형식이 그대로 적용되죠. 옹관도 똑같습니다. 생성에 이르기까지 축적된 요소를 찾아 적용시키면 되거든요.-근원을 따진다면 옹기보다 옹관이 먼저겠군요.그렇죠. 사실 옹기는 사회적으로 개념 규정이 명확치 않습니다. 안타깝지요. 도자사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고 실생활에서도 너무도 당연한 것 익숙한 것으로 놓여 있다가 생활환경과 형태가 변하면서 소멸된 그런 존재죠.-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식생활의 기반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너무 빠르게 일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 같습니다. 주류가 아닌 서민들의 일상에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꼭 그렇진 않습니다. 궁중에서도 옹기는 중요한 그릇이었죠. 옹기가 아니면 장류라든지 중요한 먹거리를 어디 담아두었겠습니까. 생활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옹기는 너무 흔하고 익숙한 생활용품이었죠. 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는. 생활에서 당연하고 너무 익숙한 것이다 보니 소중한 줄 몰랐던 것이죠. 옹기는 우리 먹거리 문화에 있어서는 생존요소였습니다.-어쨌든 생활의 틀이 바뀌면서 옹기는 빠른 시간에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게다가 단절된 시간이 길어지니 아무리 현대 생활에 맞게 개발을 한다 해도 일상의 복귀가 어려운 것 아닌가 싶습니다.옹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적 품새로 자격이 있습니다. 조형의 아름다움으로도 그렇고요. 요즘 말하는 경제적 가치로 이야기하더라도 부가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다만 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다양한 쓰임새와 조형을 개발해내는데 그 바탕의 비중은 어디에 놓습니까.제가 하는 일은 옹기에 없던 것을 새롭게 부여하는 일이 아닙니다. 일을 시작했던 초기에 지인이 옹기를 예술로 풀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군요. 생활용품으로서 쓰이는 옹기만 만들어서는 생활하기에도 빠듯하다는 것을 잘알았지만 그렇다고 예술로 옹기를 풀어내는 것은 제가 하고자 했던 일의 본질이 아니었어요. 옹기가 지닌 아주 부분적인 특성을 적용해내는 작업에 마음을 주면 나중에는 얕잡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생존하기 위한 길이 아니다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더디더라도 본질을 찾아 가겠다고 마음먹었죠.-옹기의 본질과 가치를 담아낸 작업을 바탕에 두면서도 현대적 그릇을 고민해오셨는데 그 노력만큼 현대생활에 옹기의 쓰임이 가닿지 않는 아쉬움은 없습니까.옹기는 일제시대를 거쳐 오면서 잘못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옹기의 가치가 폄훼된 것도 그렇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자기란 말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것이거든요. 우리는 도기 자기를 따로 썼죠. 도기는 옹기, 자기는 사기였는데, 도기보다는 사기라는 말을 더 많이 썼잖아요. 일본은 도자산업으로 문명을 일으켰으니 도자사를 강조하지만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열등감이 있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옹기는 그들로서는 용도가 없는 그릇이니 자연히 도태시켰고, 미술사적으로도 도자기와 옹기를 별개로 삼았죠. 더구나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옹기는 양은그릇이나 플라스틱과 경쟁해야 했어요. 살아남으려니 천박해질 수밖에 없었죠. 값으로도 그렇고.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어요. 플라스틱 초기 형태를 보면 모두 옹기 조형입니다. 옹기가 축적해낸 크기와 조형을 그대로 카피 했죠.-그렇게 소멸되었던 옹기의 가치가 요즈음 새롭게 부상하고 있습니다. 역시 한민족의 전통적인 먹거리 근원인 발효의 가치와 맞물려서겠지요.그렇죠. 옹기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발효와의 조합입니다. 우리 먹거리의 힘은 발효에 있고요. 그러니 옹기는 한민족의 일상에서 꼭 복원되어야하는 물건이예요.-외국에서 전시 의뢰를 받지만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특별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옹기는 본질적 가치와 그 쓰임새로 더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외국의 나라들은 대부분 우리의 발효문화와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러니 그 본질이 아니라 옹기가 도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손내옹기가 유네스코 우수 수공예품으로도 인증 받았죠.달항아리와 전골 솥이 인증을 받았어요. 전골솥은 제가 조형을 만들어낸 것인데 나중에 한창기선생님 박물관 전시회 때보니 골동품 초기 토기에 조형이 똑같은 것이 있더라고요. 전율을 느낄 정도로 놀랐습니다. 제 몸속에 그런 유전자가 있었나봐요.(웃음)-근래 들어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옹기의 일상화는 어떻습니까.큰 변화는 아직 없지만 서서히 달라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털어놓자면 옹기를 사용해보신 분들의 주문이 이어지지만 제작시간의 한계로 항상 일이 밀려있습니다. 전통 옹기의 한계이기도 하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제가 파는 일에 아쉬워 조급해했다면 전통방식의 미덕을 지켜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소비자가 아쉬워해주었으니 그래도 이만큼 지켜올 수 있었을 거예요.-손내옹기는 우수성을 인정받지만 가격 면에서는 경쟁력이 없죠. 그 원인이 전통가마 방식의 한계에 있겠지만 다른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가격이 낮게 나오는 옹기들은 최신식 터널 가마로 대량 생산하는 물건들입니다. 흙으로 빚어 굽고 완성품을 얻는데 3일이면 나오죠. 그러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대로 구워내려면 순환구조상 두 달이 걸립니다. 가마에 불을 때려면 그 안의 공간을 구성할 요소들이 잘 채워져야 해요. 그래야 구조력을 가질 수 있거든요. 저도 내열 옹기는 현대식 가마를 씁니다. 내열용은 장작 가마로 해결되지 않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옹기를 불에 직접 닿게 할 때 진흙을 붙여서 사용했어요. 현대생활에서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니 아예 직화할 수 있는 내열성을 갖추어 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대식 가마를 사용하는 겁니다.-디자이너와의 협업은 어떻습니까.이전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2009년부터 문화재단 예올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현대적 식기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그동안에도 시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식 양식 겸용 식기를 만들어냈어요. 옹기는 흙에 철분이 많아 쇳소리가 납니다. 결도 나이프를 사용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도기와 자기가 나뉘는 시점의 초기 청자를 콘셉트로 제작했는데 반응이 괜찮은 것 같습니다.-요즈음은 주거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변해서 큰 항아리 종류는 쓰임이 적어졌겠죠.한동안 아예 쓰임이 없었는데 식생활에 대한 변화가 시작되면서 큰 독도 적지 않게 찾습니다. 사실 장독은 옹기의 기본이에요. 옛날 옹기장이들은 장독을 만들지 않으면 아예 옹기장이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옹기장이의 중심일은 장독이거든요. 가마나 기법이 모두 그 중심이고 나머지는 다 파생된 물건이죠.-옹기의 좋은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일상에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특히 편리함이 우선인 현대인들에게는 옹기는 여전히 낯선 영역인데요.그래도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속도가 우선인 시대지만 그래서 잃었던 삶의 가치들이 다시 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옹기는 그 가치를 제대로 담고 있는 물건입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우리 몸의 근원을 다시 찾게 해주거든요.-옹기 일을 10년만 하시겠다는 계획이 20년이 되고 다시 10년을 향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목표가 생긴 것인가요.(웃음)개인적으로 꼭 이루어가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자작자족.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쓰는 일을 확산시키자는 것인데요. 다시 말하자면 수공예의 대중화입니다. 저는 인생의 스승을 잘 만나 문화의식과 철학을 먼저 배우고 기능을 나중에 갖추었어요. 좀 더디게 일을 배우고 깨우쳤지만 오히려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소비사회를 살고 있지만 소비가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주진 않거든요. 옛 사람들의 자작자족 지혜를 우리 일상에 들여놓으면 제대로 된 삶의 질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수공예적 가치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삶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지거든요.그의 이야기는 때로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때로 지나치게 현실적이다. 그래서 남감할 때가 적지 않은데, 이상한 것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가 가진 이상과 현실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자작자족도 그 중의 하나인데, 그는 창조성 창의성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서야말로 생각하는 손을 갖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수공예의 가치를 일상에 되돌려 놓는 일은 더디지만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의 새로운 목표가 주목되는 이유다.● 이현배씨는 농촌 삶 관심호텔조리사 접고 '옹기장이' 변신이현배씨는 장수군 장계가 고향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린 시절은 생각 없이 보냈고, 고등학교 때부터야 생각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이 너무 깊었던지 늘 가슴이 답답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싫어 분노와 화로 많은 날들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출해 서울로 갔다. 우연히 인문학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서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칼럼을 읽고 모순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대학 입시에 낙방해 다시 서울로 가 재수를 했지만 계획대로 삶이 풀어지진 않았다. 농촌의 삶에 관심이 많아 농대에 관심을 가졌지만 먹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경희호텔경영전문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공부했다. 대학 1학년 때 휴학하고 고물상으로 1년을 살았다. 그때 다시 뿌리 깊은 나무와 브리태니커에서 나온 한국의 발견을 만나 문화에 눈을 떴다. 제주도로 가고 싶었으나 대학은 졸업해야 한다는 큰누나의 강권에 복학했다. 힐튼호텔 실습 시절, 예술적으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그의 감각을 눈여겨본 상사의 추천으로 큰 힘들이지 않고 힐튼에 취업했다. 그즈음 한국화를 전공한 아내를 만났다. 호텔에서 6년 근무하면서 신뢰를 쌓았지만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고민과 갈등이 깊어져 떠난 여행길, 전남 벌교에서 징광옹기를 만났다. 그곳에서 인생의 멘토인 한창기 한상훈 선생과 옹기스승인 박나섭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옹기일은 징광에서 3년, 문경에서 반년 배웠다. 징광에 터를 잡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물에 의미를 두고 살아온 그는 물이 있는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진안 백운면 솥내옹기터에 자리 잡은 것도 섬진강 발원지가 가깝기 때문이었다. 당시 대포가마가 그대로 남아 있던 옹기가마터의 불구멍을 틔운 젊은 옹기장이는 2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켜왔다.쉽게 가는 길보다 더디지만 옹기의 본질을 찾는 길을 지켜온 덕분에 손내옹기는 전통 방식과 현대적 조형, 본질적 쓰임새를 갖춘 물건으로 이름을 알렸다. 옹기 일을 하면서 마을이 해체된 현실에 마음을 두기 시작, 마을문화 복원과 지역 활성화를 고민했다. 백운면의 공공미술과 문화를 매개로 지역 활성화를 이어내는 시범사업을 진행했다. 옹기를 제대로 하려면 마을을 제대로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는 마을을 재구성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14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주목받는 기획전에 초대되었고, 전통공예기술 보존및 개발을 위한 전통문화(옹기) 전문인력양성 영산강유역 대형전용옹관 고대기술복원 숭례문복구용 기와가마 자문및 조성 옹기식기개발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쓴 책으로는 흙으로 빚는 자유가 있다. 농사꾼이 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면서 농촌과 농업이 지닌 숨은 가치를 주목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9.18 23:02

[(32) 남원 노고단식품] 어머니 손맛 맥이은 '도토리묵' 현대인 입맛 잡아

남원시 조산동에 위치한 노고단식품(대표이사 강상길)은 묵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다. 이 업체의 출발점은 가내수공업이다. 좀 더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어머니 조석순(68) 씨의 노상판매가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들인 강상길(46) 대표이사로부터 이 업체가 걸어온 길을 들어봤다.△어머니의 도토리 줍기1980년대 초반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바래봉 인근. 어머니 조석순 씨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바래봉 일대 산에서 도토리를 주웠다. 노고단까지 도토리 줍기에 나선 것이 현재 노고단식품이란 업체명의 계기가 됐다. 조 씨는 이 도토리를 맷돌에 갈아 묵을 만들었고 남원시내 터미널 인근 장터에 내다 팔았다. 길 위에서 판매하다가 남은 묵은 인근 식당에서 거래됐다. 전통방식으로 제조한 묵은 어느새 맛 있다는 입소문을 탔다. 그렇게 해서 남원시내 20여곳의 식당이 거래처로 확보됐다. 도토리 줍기에서 비롯된 가내수공업은 운봉 바래봉에서 남원시내까지 묵을 짊어지고 내려오던 어머니의 정성으로 한단계 도약을 이뤄낸 셈이다.△장사가 낫겠다 아들의 귀향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직장생활(기계분야 종사)을 하던 강상길 씨의 고민은 깊어졌다. 한달에 8회씩 철야근무까지 하며 받는 월급이 60만원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쥐꼬리만한 월급에 힘겨워하던 강 씨는 동료와 함께 고구마 장사를 병행했다. 고구마 굽는 기계를 직접 제작해 정류소에서 군고구마를 판매했다. 직장생활에서 얻는 월급 보다 수입이 더 괜찮았다. 하루에 10만원 이상의 수익이 발생할 정도였다. 뻔한 월급 보다 장사가 낫겠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강 씨는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게 좋겠다. 어머니의 가내수공업을 좀 더 발전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들의 귀향은 어머니의 가내수공업을 전문 업체로 바꿔가는 체계화 작업으로 이어졌다.△노고단식품 설립 강 씨는 1994년 4월 남원시 운봉읍에 노고단식품을 설립했다. 강 대표가 된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동생과 함께 한 노고단식품은 청정지역 운봉에서 폐수 처리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1999년에 현재의 위치인 남원시 조산동으로 공장을 확장 이전하게 된다. 강 대표는 2001년에 도토리 전분생산라인 자동화 설비를 갖추고, 2007년에는 중국 평순식품과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사업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갔다. 2013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에 적합한 가공생산라인위생설비를 구축했고, 2014년에는 HACCP 인증업체로 지정됐다. 노고단식품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기 위해 철저한 위생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현재 노고단식품의 거래처는 대형마트, 재래시장, 학교급식 등 전국적으로 250여곳에 이르고 연간 매출액은 22억원 규모다. 1일 묵 생산량은 1만5000㎏, 1일 전분 생산량은 3500㎏로 나타났다. 이 업체는 5년 내에 10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체 직원은 10여명으로, 이 가운데 7명은 다문화가정 여성들이다.△현대인들의 입맛잡기 주효노고단식품은 이른 새벽녘 가마솥에 도토리를 올려놓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어머니의 정성과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대인들의 입맛을 공략하는데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 고속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전분 축출방법을 통해 쓴맛을 줄이고 맛과 찰기를 높이려는 노력이 이에 해당된다. 상품 다각화도 현대인들의 입맛을 잡기위한 전략 중의 일부다. 이 업체가 현재 생산하는 품목은 도토리묵, 청포묵, 황포묵, 깻묵 등이다. 이 가운데 현재 도토리 전분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노고단식품은 앞으로 녹두, 메밀, 고구마 전분으로 전문분야를 확대할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이다.● 강상길 대표이사 "연 매출 5년 내 100억 목표, 수익배분 직원과 동등하게"강상길(46) 대표이사는 5년 내에 10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자신있다고 답했다.강 대표이사의 이 같은 목표와 자신감은 어떤 동기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는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더 많은 일자리창출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익 분배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수익이 더 발생하면 직원들과 동등하게 배분할 것이라며 직원들이 잘 살아야 마음이 뿌듯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일자리 창출과 수익의 동등한 배분이 회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그의 확고한 기업 마인드가 신념으로 굳어진 듯 했다.이런 강 대표이사도 포장 분야의 기술력 부족을 아쉬워 했다. 일부 자동화되지 않은 시스템으로 인해 가끔 포장 불량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강 대표이사는 이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완전 자동화시스템을 추진중이다.그는 1년 정도 후에 포장 시스템을 완전 자동화로 바꿔 불량률이 없도록 할 것이다. 노고단식품이 내실있게 성장하고, 그 성장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도록 회사를 알차게 이끌어 나가겠다고 다부진 각오를 피력했다.강 대표이사는 어머니에게 묵에 대해 질문하고 어머니로부터 기술을 전수받던 그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터미널 인근 장터에 쪼그리고 앉아 도토리 묵을 팔던 어머니의 그 정성이 노고단식품의 진짜 모습이다는 게 그의 자부심이면서도 회사를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기 때문이다.

  • 기획
  • 홍성오
  • 2014.09.18 23:02

[(36)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중)] 경북 '동학' 창도한 지역임에도 보수성 짙어 사업 미약

경북지역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한 단체는 상주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였다.상주기념사업회는 1993년 12월 18일 준비모임을 시작으로 발기인대회 등을 거쳐서 1994년 4월 2일 창립되었다. 창립 후 상주기념사업회는 6월 13일 궁궁을을(상주문화회관 대공연장)이라는 주제의 연극공연을 펼쳤고, 7월 7일 상주문화회관 전시실에서 녹두꽃 떨어진 그 후라는 주제로 그림 전시회도 열었다. 10월에는 22~23일 양일간 가자! 장주읍성으로, 자주 평화의 세상을 향하여라는 주제 아래 상주지역 동학농민군 합동 위령제 및 유적지 답사를 추진했으며, 상주 동학농민혁명 기념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재단법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2007년부터 연례사업으로 추진하던 동학농민혁명 전국 기념대회를 충남 공주, 서울, 충남 태안, 전남 장흥에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특수법인으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출범한 후인 2010년도에 그 다섯 번째 전국기념대회를 상주시에서 개최하였다. 한편, 예천에서는 1996년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창립되어 동학농민군지도자전기항의사기념비를 세웠고, 1999년에는 보수집강소 민보군에 의해 농민군이 생매장 당한 장소에 위령비를 세우기도 했다. △전봉준 중심의 전라도, 불온한 반란사건으로 축소왜곡그러나 경북지역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은 같은 시기에 서울, 경기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펼쳐진 기념사업에 비해 다소 미약했다. 타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에서 추진된 백주년 기념사업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요인은 한국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이 사건이 전봉준 중심의 전라도 사건 혹은 불온한 반란사건으로 왜곡축소되어온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이 창도된 고장, 동학의 모태였던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불출되지 않고 전라도에서 분출되어 충청도 등지에서 거세게 타올랐던 1894년의 상황과 다른 지역에 비해 경북지역에서 백주년 기념사업이 다소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일정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그 사회역사적 배경으로는, 19세기 당시 경북지역은 조선왕조체제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이룬 안동김씨 본향으로 두터운 보수양반층과 유림세력에 의해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강력하게 구축되어 있었다는 점과 20세기 한국현대사에서 권력의 핵심부를 차지한 이른바 TK지역이라는 경북지역이 갖고 있는 지역적 특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세기 때나 20세기 때나 경북지역은 집권층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견고했고, 이런 사정으로 인해 동학을 창도한 고장이면서도 그 힘의 분출이 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주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경북지역은 집권층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적 향토지배질서가 견고하여 타 지역에 비해 기념사업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사회역사적 배경으로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성과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으로 형성된 경북지역의 정치적 특수성을 잘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경북지역의 정치적 특수성을 섬세하게 파악하고 이를 면밀하게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지역주민의 거부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념사업 내용과 형식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따른 대안의 하나로 전라도, 전봉준 중심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인식을 새롭게 재정립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예컨대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인식이 반외세, 반봉건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조선 혹은 동양적 근대민주정치 추구라는 측면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그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경북지역 주민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역사인식의 틀을 모색해나가는 것과 함께 우선 당장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반란사건으로 치부되던 동학농민혁명이 2004년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을 통해 명실상부하게 복권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사업에 힘을 기울일 필요성도 있다. △반외세 다루는 기념사업 필요또 다른 대안으로 반외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기념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지난 시기 반외세, 반봉건 항쟁이라는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이나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현황을 살펴보면 정작 반외세와 연관된 기념사업 혹은 기념시설물 건립설치 등이 매우 미흡하거나 아예 없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경남 하동군 고성당산에 건립된 고성산동학혁명군위령탑 비문에 고성당산이 대일군전적지(對日軍戰迹地)라는 것이 명기되어 있으나 반외세 혹은 반일에 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런 현상은 그동안 추진된 기념사업에서 반외세 문제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본격적으로 반외세 문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다분히 구호적인 차원에서 접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군 병참소 등의 유적지가 있는 경북지역에서 반외세 문제를 핵심으로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역사공원 등의 건립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북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 반외세 역사공원 조성사업 기획추진을 통해 갑오년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저질렀던 반인도적인 범죄행위인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화형(火刑) 집행 장면 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역사공원을 조성한다면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새로운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구성원간의 계급적 문제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 혹은 민족적인 문제를 중심에 두고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면 상대적으로 완고한 경북지역의 보수적인 향토정서를 극복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등 도발적 행보로 동북아시아 정치정세가 급속도로 달구어지고 있는 21세기 초입 현재의 시대상황과도 부합한 시의적절한 기념사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기획
  • 김원용
  • 2014.09.17 23:02

[⑭ 여성협동조합] "자립의 꿈, 작지만 탄탄한 일터"…여성 일자리로 각광

정부는 핵심 국정 의제인 고용률 70% 달성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 추진 중이다. 그 중 여성고용률을 높이는 것이 핵심과제다. 동시에 국정비전 및 국정지표 140개 국정과제 중 하나인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사회 공동체 운영 등의 따뜻한 성장도모를 포함했다. 이에 여성협동조합 설립을 통한 시간제 일자리창출을 통한 여성 고용률 제고, 여성취업지원서비스 강화를 통한 여성 고용률 제고, 청장년 여성 고용률 제고, 사회서비스분야 여성 고용률 제고와 함께 전략개발 분야별 과제 중 하나로 채택될 만큼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협동조합은 사회 및 경제활동 증대, 일자리창출, 여성들의 일가족 양립을 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여성협동조합 국내외 사례를 살펴보면 여성협동조합은 경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적경제적 욕구를 충족하고, 여성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시간제 노동 및 자율시간 노동 등 대안적인 노동형태를 제공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 전북지역의 여성협동조합 실태와 비전에 대해 취재해봤다.△도내 여성 협동조합의 사례와 필요성 구수한 떡 냄새가 진동하는 한 건물 안. 일반 방앗간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도구를 사용해 무늬를 넣은 먹음직하고 건강한 떡을 5명의 조합원이 분주히 만들고 있다.아나콩떡은 처음엔예쁜 떡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알려보자는 차원에서 시작했다가 일이 커진 곳이다.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일부 참여자도 바뀌고 의견이 분분하다 보니 다소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고, 또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블로그를 통해 멀리서 주문해주는 단골도 생겼다고 한다.아나콩떡 여성협동조합 방지현(34) 이사장은 저희는 직원협동조합이라 조합원 5명이 모두 이사라며출자금도 똑같이 나눠 내고, 조합원이면서 임원이니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1년 전 퓨전 떡 만들기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떡에 관심을 갖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몇 사람이 교육 강사와 함께 의기투합해 올해 초 여성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됐다고 덧붙였다.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 여성협동조합 1호점 아나콩떡과 9월 창립총회를 준비 중인 2호점 커피전문점 따라쥬(Tarrazu) 설립을 위해 협동조합 인큐베이팅 교육을 자체적으로 실시한 김보금 센터장은 현재 우리나라 10대 기업의 여성임원 비율은 1.3%, 4급 이상 여성공무원은 중앙 7.4%, 지방 4.9%에 불과하다며최저임금 이하 노동자중 61.5%를 차지하는 등 여성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고 여성협동조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어여성협동조합은 경제적 측면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면서 협동조합이 처음 등장한 19세기 당시 협동조합은 여성에게 평등을 심어줬고, 경제적 자립기반을 줬다 고 평가했다.△도내 협동조합의 실태 현재 도내 협동조합은 2012년 12월 협동조합기본법 시행 이후 일반협동조합을 기준으로(2014년 7월 30일 기준) 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1421개 27.9%), 경기(780개, 15.3%)에 이어 전북(314개, 6.1%)은 네 번째로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여성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은 65개소(20.7%)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이처럼 여성이 경제활동을 하는 데 있어 협동조합이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 증가하고 있지만 수적 증가가 질적 성장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운영하려는 설립희망자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의 창업부터 쇠퇴기까지 성장 단계별 사업운영 컨설턴트 지원을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또 여성협동조합은 여성이 가진 사적 관계망을 사회적 관계망으로 활용하고,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직관에 의한 결정력, 권리보다 의무가 앞서는 삶, 공감코드 등이 협동조합에 강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협동조합을 설립하려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협동조합 인큐베이팅 제도를 도입, 여성협동조합 설립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여성협동조합 확대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전북지역개발협동조합 이현민 이사장은 다양한 분야에서의 소규모 협동조합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 창업을 준비하는 여성들에겐 매력적이며, 협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가족, 공동체, 지역사회에서 사람의 역할을 되찾아주는 것으로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 소외계층에게는 더 더욱 그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이어 다만 후발주자 여성들이 벤치마킹을 통해 협동조합을 설립하는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분야별, 유형별 협동조합 여성리더를 육성하여 이들이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성공모델을 제시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현민 더불어 함께 전북지역개발협동조합 이사장 "사회 양극화 해결, 대안 경제로 으뜸"-더불어 함께 전북지역개발협동조합은 뭘 하나요.전북지역개발협동조합(Jeonbuk Regional Development Cooperative)은 자주자립자조의 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개인과 단체의 협동조합 관련 활동과 협동조합 및 지역개발협동조합의 설립 및 운영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협동조합인 셈이죠.-여성협동조합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협동조합 활성화 실태조사 결과, 협동조합의 장기전망에 대해서는 앞으로 성장가능성이 매우 높다(49.4%), 성장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40.5%)로 조사되어 89.9%가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여성이 만들 수 있는 협동조합과 일자리로 △일가정 양립 차원에서 아동에 대한 돌봄과 교육, 요양과 간병 같은 공동 돌봄, 가사지원 △합리적 소비측면에서 주택과 주거환경, 폐기물처리 같은 공동관리, 생활재의 공동소유, 대체에너지 △취미나 경력을 직업으로 활용 차원에서 요리, 교육, 문화, 의류리폼수선, 디자인, 매매 등이 있어 종류는 무궁무진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이 시대 시장경제와 지역발전 전략에 화두가 되고 있는 협동조합은 정부지원 부족과 자금지원부족, 홍보부족 등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요. 그럼에도 설립목적인 안정적인 일자리창출과 지역사회 공공이익 창출을 위해 민관협력체계 구축을 통한 신규조합 컨설팅, 법인전환 및 인식전환 교육지원으로 활성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협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면.협동조합기본법이 실시된 2012년 12월 이후 지금까지 전국에 50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설립되었습니다. 전북은 300여 개로 서울, 경기, 부산, 광주 등과 함께 활발한 지역입니다. 특히 전북에는 협동조합 뿐 아니라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 만들기,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의 영역에서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활성화 지역입니다.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기초하여 민간차원의 연대와 협동, 행정과 기업의 지원과 협조로, 건강하고 우호적인 사회적 경제의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사회의 양극화 현상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경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협동조합입니다. 협동조합은 지역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전북에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지역의 인적, 물적 자원을 통하여 주민들 스스로 충족시켜 나가기 위하여 활동하는 경제조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경제와 지역사회영역에서 상당한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전북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유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렵게 번 돈이 지역 바깥으로 역외유출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최소화하고, 지역에 재투자하는 것이 바로 풀뿌리기업의 육성이며 대표적인 것이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경제입니다.

  • 기획
  • 기고
  • 2014.09.16 23:02

취임 2개월 맞은 이형규 전북도 정무부지사 "창의성·감성이 지배하는 미래사회, 전북이 선도해야"

이형규 전북도 정무부지사가 취임 2개월을 맞았다. 지난 7월 10일 취임한 이 부지사는 “전북은 변화의 흐름에 뒤처져 상대적 빈곤 속에 살았다”며 “21세기 꿈과 감성이 지배하는 사회, 새로운 전북의 비전을 만들어내 그 비전에 도민들이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이 부지사는 취임 후 대외협력과 함께 경제·새만금 분야까지 관장하면서 업무 영역을 넓히고 있다. 행정부지사와 정무부지사의 역할을 획일적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사안이 발생했을 때 누가 잘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일을 맡아야 한다는 게 이 부지사의 소신이다. 지난 11일 도청 집무실에서 이 부지사를 만나 그간의 소회와 지역의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취임하신 지 두 달이 지났습니다. 8년 만에 전북도에 복귀하셨는데 그동안 업무를 수행하시면서 느끼신 소감은. “예전 행정부지사로 재직할 때는 새만금과 부안 방폐장·동계올림픽 등 지역 현안이 이미 정해진 상태에서 무조건 일처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한 부지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의지에 따라 정무부지사를 맡았고, 송하진 지사님과도 민선 6기 도정의 방향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책임감이 더 크고, 지역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도 새기고 있습니다.” - 취임과 함께 시대의 변화를 들어 전북의 새로운 비전을 강조하셨는데요.“전북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사회, 지식정보화사회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상대적으로 낙후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남들이 간 길을 그대로 쫓아서는 안됩니다. 미래학자들은 지금이 지식정보화 사회라면 앞으로의 사회는 ‘드림 소사이어티’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로봇이나 기계가 아닌 사람의 감성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한 문화·콘텐츠·소프트웨어 산업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전북은 상대적인 강점이 있습니다. 제조업 분야를 따라가지 않고 이 분야를 선점해서 창의성과 감성이 살아움직이는 터전을 만들어준다면 전북이 다시 한 번 도약,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프트웨어와 문화콘텐츠 등 미래사회를 염두에 둔 일자리 창출과 기업환경 조성을 위해서도 노력할 계획입니다.”- 공무원들에게 전문성과 책임감을 주문했습니다. 이 시대 바람직한 공직자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신다면.“공직자들이 변화의 흐름을 신속하게 읽어내고 주도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전북에서는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즈니스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지금은 산업사회처럼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스마트하게 잘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모든 것을 한 사람이 끌고 가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각자 아이디어를 내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서 성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풍토가 필요합니다. 전북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발굴하고 도와 시·군, 부처간 팀워크를 통해 시너지효과를 내야 합니다.”- 전북도의 이번 조직개편안에서 정무부지사의 역할이 기존 대외협력에서 경제·새만금 분야까지 확대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실 계획이신지.“정무부지사의 역할이 단순히 사람을 만나고 행사에 참여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고, 부지사를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을 때 이 부분은 지사님께 충분히 밝혔습니다. 정무부지사의 역할은 지사의 정무적 판단에 도움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 정책을 다루는 국무조정실에서 오래 근무했고 새만금위원으로도 활동한 만큼 경제와 새만금 분야는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고 싶습니다.”- 전북권 공항이 다시 관심사입니다. 현재 논의되는 3곳의 공항 입지 중 새만금지구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히셨는데요.“공항 부지는 결국 정부에서 정할 것입니다. 전북도 차원에서 특정 후보지를 선정해 건의할 수는 있지만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와 코드를 맞추고 흐름을 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제5차 공항개발 중장기종합계획’에 전북권 공항이 반영되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공항 입지는 지역사회 갈등이 없어야 하고 관련 자치단체장이나 정치인들의 반대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새만금 마스터플랜에 반영돼 있고 지역사회 반대도 없는 새만금지구가 현실성 있는 적지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국무총리실 새만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셨는데, 성공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 현재 가장 필요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우선 땅을 매립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매립 사업은 민간사업자가 추진해야 하는데 비용 문제와 분양 여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선뜻 나서는 투자자가 없는 형편입니다. 민간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동서2축·남북2축 도로 등 인프라를 조속히 구축해야 합니다. 또 현재 민간 투자 유치에 어려움이 있는 만큼 LH와 같은 공기업이 부지를 매립하는 공영개발 방식 도입도 필요합니다. 새만금특별법 개정을 통해 인프라 조기 구축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계획입니다. 또 새만금개발청이 신설됐지만 당분간은 국무총리실에서 새만금 사업 기획·조정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봅니다. 새만금개발청은 사업 집행 기능을 맡고 있지만, 지금은 집행보다 사업을 어떻게 추진할 지 정하는 기획·조정 기능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총리실 산하에 새만금사업추진단을 둘 필요성이 있고, 그 이전이라도 한·중 경제협력단지 조성 업무를 전담하는 심의관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무엇보다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호남에서도 주도권을 광주·전남에 뺏기면서 도민들이 피해의식과 함께 자신감을 잃은 모습이 보입니다. 전국, 나아가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려면 개방적이고 자신감을 가져야 하는데 피해의식이 많고 또 너무 폐쇄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전북은 대기업이 거의 없어서 일자리 등에 어려움이 많지만 농생명과 문화·콘텐츠 분야 등에서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강점이 있습니다. 이제 시야를 넓혀 두둑한 배짱으로 큰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형규 정무부지사는 총리실 28년 근무 '정책통', 새만금 등 지역 현안 능통민선 6기 송하진 도정을 함께 이끌고 있는 이형규(61) 전북도 정무부지사는 28년간 국무총리실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행정관료 출신이다. 진안이 고향인 이 부지사는 전주 해성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대학교에서 행정학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통계학과) 3학년 재학 중 행정고시(16회)에 합격, 공직에 입문한 그는 1976년부터 2003년까지 국무조정실에서 기획총괄과장과 규제개혁심의관·기획수석조정관·사회문화조정관·심사평가조정관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이후 2003년 8월부터 3년 동안 전북도 행정부지사(강현욱 지사 재임)를 역임했다. 또 2006년 7월부터는 3년간 대한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각종 투자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 탁월한 경영능력을 선보였다. 2010년에는 전주대 행정대학원 특임교수로 임명돼 창업지원단장을 맡으면서 청년 창업을 지원,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정책통·경제통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전북의 숙원인 새만금 사업과 관련해서는 지난 2011년 5월부터 국무총리실 새만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현안을 꿰고 있다. 새만금위원직은 정무부지사로 임명되면서 곧바로 사퇴했다. 송하진 지사와는 중앙부처 재직 때부터 소통해왔고 전북도 행정부지사 시절, 당시 도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던 송 지사와 1년여 동안 도청에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다. 또 행정학 박사학위도 같은 정책학 분야에서 받았다. 평소 걷기를 좋아한다는 그는 주말이면 가급적 시간을 내 CEO들과 가까운 산에 오른다고 했다.

  • 기획
  • 김종표
  • 2014.09.15 23:02

[(31) 정읍 (주)호암엔지니어링] 저온창고용 맞춤형 패널 생산, 창업 1년만에 업계 두각

정읍시 태인면 태인농공단지에서 냉동냉장 우레탄패널을 생산하는 (주)호암엔지니어링(대표 박광렬46)이 창립 1년여만에 관련업계의 주목을 받고있다.(주)호암엔지니어링에서 생산되는 맞춤형 냉동패널은 시설현장에서 2차 가공이 필요없는 조립형으로 공급되어 호남권은 물론 충청권으로까지 시장을 넓혀가며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특히 최근 농업에 6차산업 열풍이 불면서 생산에서 체험 및 유통판매까지 원스톱으로 진행되는 구조는 대량생산농산물의 냉장 및 냉동 저장시설 구축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장 규모가 확대되는 토대가 되고 있다.(주)호암엔지니어링이 정읍 태인농공단지에 자리잡은 것은 2013년 9월로 냉동냉장 우레탄패널의 시장이 증가할 것을 예측한 박광렬 대표의 과감한 도전에 따른 것이다.저온창고용 패널 생산은 전국적으로 10여개 업체(광주 1개, 충남북 2개, 전북 2개, 수도권 5개)정도에 불과하다. 이에따라 농촌이 많은 호남지역에서는 수도권에 주문을 하면서 운반비 등의 문제는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박 대표는 농업생산품이 많은 호남권에서부터 농업인들의 인정을 받으면 관련업체는 물론 소규모농가에까지 빠른 시일내에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뛰어들었다고 밝혔다.여기에 지난 2009년부터 건설 및 기계설비업체를 운영하며 저온창고설비공사를 많이 했던 것도 관련 시장의 노하우를 갖게되는 요인이 되었다. (주)호암엔지니어링은 부지면적 4500㎡에 1000㎡ 공장규모로 고압우레탄 발포기와 최신 핫프레스, 절단기, 포밍라인(철판의 절단 및 절곡을 자동으로)등 자동화시스템을 구축했다.박 대표를 비롯해 산업기사 및 기능사 등 18명의 직원들이 노력한 결과 품질경영시스템 인증(KS Q ISO 9001)과 클린사업장으로 선정되었다.박 대표는 패널제조회사 중에서 자격증을 갖춘 인력을 보유한 업체가 별로 없는데 호암엔지니어링은 생산은 물론 현장 시공까지 하기 때문에 2~3명의 산업기사와 기능사를 항상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호암엔지니어링의 1일 생산량은 500~600㎡에 달하는데 전국 1위규모의 업체가 1일 1000㎡를 생산하는 것을 보면 단기간에 도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특히 최첨단 자동화 생산라인은 8m 크기를 생산할 수 있어 보통 업체들이 6~7m 생산하는 것에 비하면 전국에서 가장 큰 패널 생산라인을 자랑한다.이에 따라 창립 1년여만에 거래처가 증가하면서 생산량의 35%가 전남, 충남권에 5%, 전북도내 60%를 공급하고 있다.그동안 전북도내에서는 고창 아이보리 영농조합법인, 부안 구름 호수 정보화마을, 부안 유채영농조합법인 등 많은 곳에 저온창고시설을 납품했다.이렇듯 대규모 농장과 협동조합 등에 판매가 집중되었지만 최근에 소규모 농가들에서 곡식과 오디, 복분자 등 보관용으로 저온저장고(농기계등록) 공급이 증가하고 있다.박 대표는 소규모 저온저장고를 찾는 농가들이 늘어나고 있어 시각적 효과를 가미한 저장고 도어 디자인 설계에도 노력하고 있으며 집에서 오래 식품을 보관하면 마르기 때문에 건조방지 시스템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주)호암엔지니어링의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의 성장은 전북도내 중소설비업체들이 저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장을 조성하고 수도권에서 주문하던 물량을 줄이면서 지역경제의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 박광렬 대표 "고향에 감사하는 마음, 지역사회 봉사도 적극"소비자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기 때문에 냉동냉장 우레탄패널 시장규모는 확대될 수밖에 없습니다. 박광렬 대표는 소비자와 시장에서 요구하는 상황을 빨리 대처하면서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9월부터 2차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다고 밝혔다.그는 또 주문량이 증가하고 시장이 점차 넓어지고 있어 창립 1년여만에 매출 4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며 저온저장고 시설은 국가 보조사업으로 정부정책과 관련이 있는 만큼 소규모 농가들을 위해 장기적으로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안군 보안면 출신인 박 대표는 회사명칭을 고향인 호암마을에서 따왔다며 어린 시절 어려웠던 생활을 잊지 않고 있으며 더불어 자신이 성장한 고향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지역사회 봉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임장훈
  • 2014.09.11 23:02

'대통령의 글쓰기' 펴낸 강원국 前 청와대 연설비서관 "삶의 진정성 묻어나는 글 써야 사람의 마음 움직여"

그는 청와대에서 대통령 연설을 담당하는 연설비서관이었다. 연설비서관이란 직업은 특별하다. 통념으로 짐작해보자면 웬만큼 능력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넘나보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도 그는 8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정부에서 3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5년이다. 청와대에서 나온 지 6년. 그가 책을 냈다. 대통령의 글쓰기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게 배우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가 붙었다. 책 제목부터 부제까지 심상치 않은(?) 이 책은 짧은 시간에 화제가 되었다. 화제가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책과 저자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음을 뜻한다. 책은 6만권 판매를 앞두고 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기관과 단체들의 강연요청은 말 그대로 쇄도하고 있다. 사실 글쓰기에 관한 책은 넘쳐난다. 소통의 시대, 자기언어와 표현 방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는 덕분이다. 그러나 수많은 글쓰기 책 중에서 이 책만큼 짧은 시간,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예는 드물다. 글쓰기와 대통령의 묘한 융합(?) 덕분이었을까. 저자를 만났다. 강원국씨(52, 메디치미디어 주간)는 이 책을 두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과 8년 동안의 배움에 대한 감사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시절, 그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면서 경험한 것을 공유해라. 책으로도 쓰고 강연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일을 경험한 자네는 특혜와 특권을 누린 결과가 된다. 두 대통령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8년을 글쓰기로 추억해낸 그는 책을 내고 난 뒤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일상을 맞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변화지만 그는 기꺼이 이 시간들을 즐긴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쓰기의 비법이 따로 있을까.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글의 감동은 기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진정성에서 나오지요. 그래야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이 따로 가지 않는 그와의 인터뷰는 편안하고 즐거웠다. -강의가 많은 모양입니다. 강의를 통해 글쓰기 비법을 다 털어놓으시면 책은 잘 안 읽히겠는데요.(웃음)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은 것 같습니다. SNS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제가 회사다닐때만 해도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말없이 성과 내는 사람, 결과로 보여주는 사람이 인재로 인정받았죠. 그런데 지금은 설득하는 과정이 모든 일의 중심이 되다보니 말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습니다.-강연을 하다보면 그런 분위기를 실감하십니까. 제 이야기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 중 직장인이 많습니다. 사실 요즈음은 직장생활의 대부분이 글 쓰는 일, 이를테면 보고서니 기획안이니 문건을 작성하는 일이죠. 자연히 글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요즈음은 연령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글쓰기에 관심이 많더군요. 제 강연에도 일흔이 넘는 분들이나 주부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기본적으로 자기표현 욕구가 그만큼 강해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그런 분들에게 어떤 비법을 들려주시나요. 사실 글쓰기는 글쓰기 강연을 듣는다고 해서 느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그냥 글을 자주 쓰면 늡니다. 진짜 글을 잘 쓰고 싶으면 시간을 내어 글을 많이 써보는 것이 정답일거예요. 비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전합니다. -책을 읽어보니 강 주간께서도 글을 잘 쓰지 못했다고 하셨던데, 어떻게 글 쓰는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까. 대학에서는 외교학을 전공하셨던데요. 젊은 시절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대학 4학년 때 결혼 하면서 직장을 잡아야 하는 바람에 기자직을 놓쳤죠. 첫 직장이 대우그룹 홍보실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글쓰기는 남일 이었어요. 그런데 마침 제가 입사한 해가 회사 창립 20주년이었어요. 제가 사사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원고를 맡은 외부 필자에게 문제가 생겨 제가 원고까지 맡게 된 겁니다. 그때만 해도 기자직은 연령제한이 있어서 한번정도 기회가 남아 있었는데, 사사 만드느라고 그마저도 놓쳐버렸죠.-아예 글쓰기의 기본이 없었다면 그런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고군분투하면서 사사를 제작했어요. 그러고 나니 제가 대우그룹 안에서는 글 쓰는 전문가가 되어 있더라고요.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셨을 때 자연스럽게 스피치 라이터(speech-writer)가 되었죠. 그때부터 연설문 쓰는 일이 시작된 겁니다.-청와대와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진 것이겠군요. 그렇죠. 김대중 대통령 때 경제 분야 글을 쓰는 행정관이 필요했었나봐요. 마침 연설비서관실에서 전경련 회장 원고를 누가 썼는지 알아보다가 저를 찾게 된 것이죠. 그래서 예상치도 않았던 청와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국민의 정부에서 3년을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다시 참여정부의 연설비서관으로 일하게 되셨는데, 아주 이례적인 경우 아닌가요. 8년이니까, 아마 저 같은 경우는 없을 겁니다. 국민의 정부가 끝나고 참여정부에서도 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않았거든요. 노무현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2개월 동안 파견 나가 연설문 쓰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동안 쓴 연설문을 노대통령께서 단 한 번도 읽지 않으셨어요. 참담했죠. 그랬으니 더욱이나 다시 인연이 될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습니다.-그런데도 참여정부 5년을 연설비서관으로만 지내셨잖습니까.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청와대 조직도 바뀌게 되죠. 같은 정권이 연장되었다고 해도 들어올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이 있었습니다. 논공행상식이 아니라 적임자를 앉게 하는거죠. 공이 있다고 해서 자리로 보상해주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께서 글을 쓰는 사람은 그대로 일을 맡게 하라고 해서 제가 연설비서관실에 남아있게 되었어요.-인수위때 썼던 글을 한 번도 읽지 않으셨지만, 인정은 받으신 셈이군요.(웃음)글이 마음에도 안 들고 내 연설문도 아니다고 생각하신 것이죠. 그런데 취임식 날 오찬과 만찬 때 혹시 준비된 원고가 있느냐고 찾으신 거예요. 취임식 연설에 집중하느라 오찬과 만찬 연설을 미처 못챙기셨던 것이죠. 마침 제가 마련해놓은 연설문이 있어서 드렸죠.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 첫 순시 때 저를 찾으시더니 자네 덕분에 낭패를 면했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제가 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정말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감사나 사과를 할 때는 격을 따지거나 말을 가려서 하지 않으셨어요. 마음을 그대로 전달하셨죠. 미안하고 사과할일이 있으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대로를 전하셨습니다. 사실 그날도 대통령이 낭패를 볼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준비를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날 그 말씀 듣고 두 달 동안의 피로가 싹 가셨어요. 그때 이분을 모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죠.-두 대통령으로부터 말과 글을 배웠다고 하셨더군요. 물론입니다. 사실 제가 그 두 분의 글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8년 동안 두 대통령의 연설문 초안을 쓰고, 수정 첨삭까지 철저하게 배웠습니다. 그 소중한 배움을 월급까지 받으면서 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운이에요.-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죠. 개인적인 삶이 거의 없었다고 봐야죠. 계속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일상이었으니까요. 제가 오랫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 하나뿐인데, 그런 일상을 성실함으로 버텼거든요. 사실 그런 일상을 알고 나면 연설비서관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들은 대통령께 보고하면 그것으로 업무가 끝납니다. 대통령이 판단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연설문은 대통령이 직접 말로 해야 하는 것이거든요. 시원찮게 끝나면 그 시원찮은 것을 갖고 연설을 해야 하는 결과가 되죠. 그러니 대충 오케이 할 수 없는 겁니다. 지적받고 혼나면서 결론을 뽑아야 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지요.-8년 동안 그러한 일상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참여정부 5년 동안은 내내 혼나는 일이 일상이었어요. 사실 연설비서관은 특별한 실력이 필요 없습니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대통령의 생각과 말에 글을 맞추어야 하지요. 대단한 식견과 글 솜씨 재주가 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두 가지 능력을 다 갖춘 연설비서관은 좋은 연설문을 쓰지 못합니다. 대통령의 글이 아니라 자기 글을 쓰게 되거든요.(웃음)-그것은 좋은 리더를 만났을 때 나 해당되는 것 아닐까요. 그렀겠네요. 그렇지 않으면 리더의 생각과 글을 대신해주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좋은 리더들을 만난 덕분에 두 대통령의 분명한 생각을 옮기기만 하면 되었어요. 문체까지도. 그러니 이런 경우는 글 솜씨조차 필요 없는 겁니다. 성실하고 몸 건강하고 말귀만 알아들으면 되었죠. 제가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합니다.(웃음)-두 분의 글쓰기가 많이 달랐었다면서요. 두 분 모두 대통령의 연설(말)을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스타일은 물론 달랐어요. 김대중 대통령은 연설문 원고를 일일이 수정하고 다듬고, 고쳐서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녹음을 해서 돌려주셨죠. 노무현대통령은 글을 쓴 사람을 불러 직접 지적하는 방식이었어요. 그분의 원칙은 내 글을 쓸 사람과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야말로 실무자와 격의 없이 만나셨죠. 제가 처음에는 연설비서관도 아니고 행정관이었는데, 직접 내 글을 쓰는 사람과 이야기하겠다며 저를 부르셨어요. 행정관들이 초안을 작성하거든요.-연설문에 대한 주문 같은 것이었습니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는데, 자네가 내 연설문을 써야하니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려주겠다고 하셨어요. 두 시간 정도로 기억하는데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한다며 이야기를 하셨어요. 책에 소개된 서른 두 가지 내용입니다. 일종의 지침이었는데, 글쓰기의 기본이자 주옥같은 비법이었죠. 제 경우는 그 내용을 5년 동안 계속 학습해 온 셈입니다. 제가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참여정부에서는 연설비서관으로 연설문을 책임 짓는 역할이었으니 부담이 더 컸겠습니다. 두 분 모두 정말 좋은 글을 쓰는 분들이시잖아요. 그러니 연설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부담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특히 노 대통령께서는 직접 글을 쓴 사람을 만나 대화하면서 지적하고 수정하고, 또 좋은 생각이 나면 다시 더하고, 이런 과정을 연설 직전까지 하셨거든요.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모두 배움의 과정이었죠.-기억나는 일화도 적지 않겠는데요. 노대통령은 글쓰기를 즐기고 조금이라도 더 수준 높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다음날 연설 하는데 그 전날 밤에 다시 구술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번은 국회 연설이었는데, 전날 밤에 1시간 30분 정도를 구술하셨어요. 이것을 연설문으로 정리하려면 5시간은 족히 걸리죠. 마음 졸이며 작업하고 있는데, 새벽 3시쯤 어디까지 썼냐고 전화를 하셨어요. 3분의 2정도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제 그만 자고 나머지는 나한테 보내라고 하시더군요. 고생했다면서. 대통령도 못 주무시고 기다린 거죠. 두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하셔서 메일로 보냈다고 하시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마무리 인사까지 다 쓰셨더라고요. 글의 수준도 정말 놀라웠죠.-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크실 것 같습니다. 책을 쓰면서는 어땠습니까. 사실 책을 써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미리 써놓은 메모나 자료가 없었습니다. 작년 11월에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12월까지 두 달 동안 8년 동안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거예요. 모두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였어요. 두 대통령 모시던 시절로 돌아간 듯 한 느낌이었죠.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 비법이란 부제를 달았더군요. 어떤 글이 사람을 움직이게 할까요. 좋은 글쓰기는 철저하게 말하듯이 쓰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어렵다고들 하는데 잘 쓰려고 하니까 그런 겁니다. 잘 쓰려고 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말을 어떻게 하면 잘 꾸밀까하는 고민이 전제되어 있어요. 그러나 자기 생각을 글로 옮기는 글쓰기는 어떻게 쓰느냐보다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글짓기와는 다르죠. 문학은 창작을 하고, 글짓기를 합니다. 그러나 생활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듯이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글쓰기도 쉽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의 비법은 상대방과 교감할 수 있는 글쓰기에 있다. 그는 두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면서 그 비법을 전수받았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쉬운 말로, 가장 많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비법의 중심에는 배려와 공감이 있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 그의 글이 주목받는 이유도 거기 있다.● 전주출신 강원국씨는 '책 내는 일' 인생 목표편집인으로 '제 2의 삶'강원국씨는 전주가 고향이다. 교육공무원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유복하게 자란 그는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육청 장학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와 지내야했던 그는 전주교대부속과 중앙초등학교를 거쳐 풍남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년 동안 세군데 학교를 전전하면서 그는 일종의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다고 기억한다. 동중학교 다닐 때는 제법 공부를 잘했지만,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화나게 하는 일을 만들어 개인적으로는 생애에 가장 많이 맞는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였는지 별일 없이 합격하리라고 생각했던 전주고 입시에 실패하고, 신흥고도 턱걸이로 합격했다. 아버지는 처칠도 육사를 세 번이나 떨어졌다는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경험했던 시절은 전주고 앞을 지나 신흥고에 다녔던 3년 동안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 5월, 그는 3학년 반장이었다. 전주에서는 신흥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선두에 그가 있었다. 정치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몸이 앞서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유인물과 피켓을 준비하고 행동을 선도하는 그는 주동인물이었다. 학생들을 독려해 거리 진출을 시도했던 그는 결국 실행에는 이르지 못한 채 정학처분을 받았다. 학교에 복귀했지만 그 해 입시정책이 바뀌어 3학년을 한해 다시 다녔다. 1년을 재수하고 할머니의 뜻대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지만 군대 먼저 다녀온 후, 학과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대학 4학년 때 결혼하면서 취업이 급했던 그는 애초 기자가 되려고 했던 계획 대신 대우그룹의 홍보실에 취직했다. 1년쯤 다니다 언론사 시험을 보려고 했지만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인생은 결코 생각대로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쓰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사사 제작을 하면서 사내에서 글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해 전경련 회장의 연설문을 쓰는 스피치라이터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설비서실 행정관으로 들어가 참여정부 연설비서관까지 8년 동안 일했다. 청와대를 나와서는 효성 상무와 벤처기업, KG그룹 상무를 거쳐 출판사 메디치미디어의 주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인생 후반은 편집인으로 살고 싶었던 그는 꿈을 이루었으나 다른 책을 기획하면서 내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첫 결실이 대통령의 글쓰기다. 책은 기대 이상으로 화제를 모았다. 책을 내고 난 뒤 인생이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일상은 변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목표의식이 더 뚜렷해졌다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많은 사람들에게 책 내는 일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보길 권하고 있다. 책을 내고 그는 얻은 것이 많다. 지금까지의 삶속에서 남을 위해 뭔가를 했던 기억이 없다는 것도 큰 깨우침이다. 20년 가깝게 기업에서 일해 온 경험을 살린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9.04 23:02

[(35)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경상도 지역(상)] 경주시, '동학 발상지 용담정 성역화' 370억 투입 추진

△서부지역, 호남농민군 활동 영향동학이 창도된 고장, 동학의 모태였던 경상도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동학에 입도한 농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상도 각지에는 1894년 봄부터 여름사이에 동학 교단에 농민들이 대거 입도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 교단조직의 포교활동에 의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무엇보다 호남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이후 전라도 농민군이 보여준 승리와 폐정개혁활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충청도와 인접한 경상도 서부지역은 호남지역의 농민군 소식이 수시로 전해졌다. 이는 관이나 보수층에게 위기의식으로 작용하였으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변혁에 대한 열망을 부추기며 많은 농민들을 동학으로 몰려오게 하였다. 경상도 농민군의 활동은 크게 경상도 북서지역과 남서지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북서지역은 6~7월경 매일 1000여 명이 동학에 입도할 정도로 교세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각 면마다 접이 만들어지고 예천(醴泉) 등 교세가 강했던 지역은 만여 명 또는 수천 명으로 구성된 대소접이 형성되었다. 봉기 초기 경상도 농민군의 거점은 읍치(邑治) 지역 외곽에 있었으며, 읍치 지역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였다. 폐정개혁활동도 읍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집강소를 통해 추진한 전라도와 달리 농민군의 거점인 읍치 외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개혁활동이 경상도 전 지역 차원에서 동시에 추진되거나 공통 강령을 내건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부호를 대상으로 한 토재(討財) 활동을 비롯한 반신분 활동과 부세수취제도 모순이나 지방관이서배의 부당한 수탈에 반대하는 반관(反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도와 달리 지방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읍치 외곽의 농민군 거점을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추진된 폐정개혁활동은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농민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읍치 지역을 중심으로 이서배와 양반지주층에 의해 반농민군세력이 결집되고 보수집강소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농민군과 보수집강소를 중심으로 한 반농민군 사이에는 물리적 충돌이 빈발하였다. 8월 초순 예천에서는 토재(討財) 활동을 벌이던 농민군 11명이 보수집강소에 체포되어 매살(埋殺)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농민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읍치 지역을 봉쇄하면서 수성군과 대치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양측은 수차례 협상을 하였으나, 결국 결렬되고 8월 28~29일 양일에 걸쳐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끝까지 전투를 피해보려던 농민군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 전투는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경상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감영에서도 관군을 파견하였지만, 특히 북서부지역에서는 관군보다 오히려 지역 이서배양반지주층으로 구성된 보수집강소의 민보군, 정부에서 임명한 소모사(召募使)가 모집한 소모영군 등이 반농민군의 중심세력이었다. 경상도에서는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서울에 이르는 연로에 병참(兵站)을 설치하고 연로의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노역시키는 등 전라충청지역에 비해 일본군과 직접적인 마찰이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봉기 초기부터 각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경상도 농민군이 다른 지역에 비해 먼저 진압된 것도 일찍부터 일본 병참수비대가 진압에 가담한 데 기인하는 바가 컸다. △경북지역, 유적지 및 기념시설 현황 경북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와 기념시설은 크게 세 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맥락으로는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한 동학 창도와 탄압, 동학의 포교활동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그리고 개항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고조된 척왜정서가 임진왜란 300주기를 맞아 한층 비등해지던 때인 1892년을 전후하여 전개된 교조신원운동 관련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해월 최시형은 상주군 공성면 왕실로 들어와서 교조신원운동을 지도했다. 두 번째 맥락은 1894년 봄 전라도 지역에서 발발한 농민봉기 때로부터 미온적 태도에서 입장을 바꿔 9월 18일 동학교단에 총동원령을 내리고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 등의 연합세력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것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맥락은 조선을 침략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청일전쟁 도발에 따른 동향을 들 수 있다. 첫 번째 축과 관련된 유적지는 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와 탄압, 그리고 해월 최시형의 동학포교 활동과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1892~93년 교조신원운동 등과 관련된 유적들이다.수운 최제우의 동학창도, 탄압과 관련한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은 수운 생가이자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깨닫고 동학을 창도한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이다. 이곳 입구에 대신사 수운최제우상이 세워져 있고, 정비된 용담정에는 천도교 대신사 수운 최제우 유허비도 세워져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09년부터 이곳 용담정에 총예산 370억원을 투입하여 2017년까지 마무리할 계획으로 동학 발상지 성역화 사업을 수립, 추진 중이다. 이밖에도 대구시에는 수운 최제우가 체포되어 1864년 3월 10일 처형된 장소인 관덕정 터가 있고, 달성공원에는 대신사수운최제우상(최제우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음으로, 해월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던 중 발생한 1871년 이필제 영해봉기 관련 유적으로 병풍바위, 영해관아 등이 있으며, 최시형이 은거하면서 1892년 10월과 11월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과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3월 보은집회 등을 지도했던 상주시 공성면 효곡리 왕실마을이 있다. 두 번째 축인 1894년 동학농민군 활동 관련 유적지 및 기념시설물을 시군별로 살펴보면, 상주시에는 상주관아터, 남사정터, 상주 동학농민혁명기념비, 모동 중모장터, 모서 농민군지도자 김현영 집터,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가 살던 마을이자 농민군 본거지 가운데 하나인 임곡리 등이 있다. 예천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보군에 의해 보수집강소로 사용되었던 예천관아객사가 있고, 예천 동학농민군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금당실 마을과 농민군과 관군민보군 사이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송림이 있다. 또한 예천 금당실 일대 농민군 지도자였던 전기항의 묘소와 동학농민군지도자 전기항의사 추모비가 있으며, 금당실 함양박씨 유계소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보수집강소와 민보군이 체포한 예천 동학농민군 11명을 생매장했던 생매장 터가 있다. 이곳에 생매장된 농민군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공격으로 읍내가 모두 불에 타다시피 할 정도로 피해가 심했던 현재의 성주군에는 성주관아, 성주읍내가 있으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안동 유생들의 척왜봉기가 기도되었던 안동향교가 있다. 그리고 영덕군에는 1971년 3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교도들이 대거 참여한 이필제 영해봉기가 일어난 곳으로 영해관아가 그 유적지이다. 구미시에는 선산읍에 선산 관아와 선산읍성문 앞의 선봉장 한정교 선산입성비, 선산읍성 옆 소공원에 세워진 갑오전쟁선산창의비 등이 있다. 김천시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던 곳이자 이후 농민군 지도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던 장소였던 김천장터가 있으며, 문경시에는 1880년대 중반부터 동학접주 최맹순이 경상도 북부지역에 포교활동을 편 근거지이자 1894년부터 공개적으로 동학의 접 조직을 설치하고 농민군을 규합했던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 소야리(경북 문경시 산북면)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기념물이나 기념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세 번째 축은 일본군의 군수품 이동경로 등 일본군과 관련된 유적지이다. 경북 구미시 해평 일본군 병참소(쌍암고택), 문경시 산북면 이곡리 석문마을, 상주시 낙동면 일본군 병참소 등이 있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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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4.09.03 23:02

[⑬내 꿈의 모든 것, 공모전] 진정한 스펙 쌓기 첫단계…도전하다 보면 경험·실력 쑥쑥

취업을 앞둔 대학생들의 스펙쌓기 열풍이 거세다. 학벌학점토익어학연수자격증에 봉사인턴수상경력까지 더해져 8대 스펙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대다수의 기업들은 스펙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언제까지 마구잡이 스펙쌓기를 할 것인가. 취업하지 못 할까 두려워 하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스펙이 필요하다.공모전의 사전적 의미는 널리 공개하여 모집한 작품들 중 좋은 것을 가려 시상을 하는 것을 이르기도 한다.진정한 스펙쌓기의 첫 단계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공모전에서 경험과 실력을 기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엇보다 공모전 참여 과정만으로도 자신의 관심 분야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숨은 고수들을 만날 수도 있는 등 자신만의 스토리가 필요한 대학생과 예비 취업생들에게는 더 없이 좋을 기회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이 알아두면 좋을 공모전에 대해 취재해봤다.△나한테 맞는 공모전은 뭐지?똑똑해진 소비자들 덕분에 기업에서는 그들의 니즈를 따라잡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단 기업만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대학생들 또한 이런 현실에 맞춰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표현하고 현실화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최근엔 기업 뿐아니라 정부와 자치단체가 추진하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용도로 공모전을 여는 경우도 있다.실제 서울시는 바람직한 광고 문화를 선도하고자 간판정비사업을 제안, 새로 개점하는 가게들에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간판을 제작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에 따라 서울시는 2014 서울시 간판공모전을 열고 대학생들에게 간판에 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하고 있다.도시경관 수준 향상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고자 마련된 서울시 간판공모전은 총 3가지 부문으로 진행되는데, 그 중 창작간판 부문은 대학생을 포함한 일반인까지도 참여, 불법 입간판과 네온사인이 즐비하던 거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데 도전했다. 응시자들은 팀을 이뤄 각종 정보와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로드미션을 수행하고, 그룹 토의를 통해 창의성과 기획력 등을 뽐냈다.대학생 이은주(22전주)씨는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패하는 과정이 곧 자산이라는 것을 배웠다라며때로는 다양한 팀으로 구성한 공모전에서 조직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익혔다라고 말했다.이어공모전에 처음 참가했을 때의 두려움만 극복한다면 자신의 경험 중 가장 의미있는 일이 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편이라고 말했다.△공모전 정보 어디에?최근엔 공모전 정보만 골라 묶은 인터넷 카페와 앱이 생겨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인터넷 카페 아이러브 콘테스트 (http://www.ilovecontest.com)는 분야별 수상작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다. 또 스펙 up(http://cafe.naver.com /spe cup)은 대학생이 가장 신뢰하는 취업커뮤니티 1위로 유명하다. 특히 직장직무 평가방과 스펙 평가방, 직장인 이야기방이 따로 구성돼 직장 분위기를 알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알바몬(http://contest.albamon.com)역시 응모 분야별로 공모전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주최기관, 응모대상, 시상규모에 따라 공모전 정보가 나뉘어져 있어 개인에게 맞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다.특히 초보자를 위한 공모전 가이드를 제시해 유용하다. 주최기관과 수상자 인터뷰는 물론 각 공모전을 분석한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굳이 인터넷을 켜지 않더라도 앱 스토어에서 공모전이라는 단어만 검색하기만 해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앱을 손 쉽게 만날 수 있다.인터크루 관계자는 기업이 채용과 마케팅 등 다양한 활동에 오디션 방식을 채택하는 이유는 현재 시스템으로 선별하지 못하는 다양한 인재를 실력 중심으로 선별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꿈을 찾아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공모전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상민 청년 CEO '창업일기' - 자금 조달하는 방법경영하는데 있어서 총알이자 CEO의 기분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현금흐름이지 않을까 싶다.나 또한 7년차 초기 기업을 운영하면서 끊임없이 자금조달과의 힘빠지는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많았다.이러한 시설이 더 필요한데이러한 비품이 더 필요한데이렇게 투자하면 확실할 텐데등 끊임없는 상상을 했다. 그렇지만 현실과의 괴리는 컸다.정부조달이나 신용담보사채조달 등 내가 과거 몇년 간 사용했던 자금 조달 방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던 방법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직원들 몰래 구두가 닳도록 은행을 뛰어다녀 보기도 했고, 아는 지인들을 끊임없이 설득해 보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그러한 과정의 연속된 시간에 있는지도 모른다.분명 말하지만,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손쉬운 자금 조달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 회사는 어려운 경영환경 속을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헤치고 다니는 작은 회사 수준이다.행여, 책에 나오는 것처럼 지인들이 자금 조달을 해주거나, 주변에 재력가가 존재하여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거나, 갑자기 떡 하니 엔젤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허황된 상상은 일찌감치 버리자.1원 한장 빌리기 위해선 그만큼 자신있는 재무상황을 공개해야 하고, 1원 한장 빌리기 위해선 그만큼 신용있는 거래상황을 공개해야 한다.획기적은 방법은 없다. 그게 현실적인 답일 뿐이다. 다만 생각의 방법은 획기적인 것이 있다.예를 들어, 100만원의 투자금이 필요한데 현실은 80만원 밖에 없다고 하자.보통 사람이라면, 확신을 갖고 20만원을 융자해 투자할 것이다. 그러나 그 확신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경영은 점점 어려워 지더라.나는 40만원을 더 벌때까지는 투자 시기를 미루거나 80만원 중 60만원의 투자금만 긴축 편성해 투자한다.왜 120만원을 만들때까지, 혹은 60만원만 투자 했을까? 약 20%인 20만원의 여유자금을 항상 비치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경영을 하다 보면, 끊임없는 돌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나 또한 있는 자금을 빠듯하게 활용하다 보면, 갑작스레 더 들어가는 자금들이 생긴다. 하지만 정작 그럴때는 더 쪼들리기 마련이다. 현실의 20%는 항상 없다 생각하고 남겨 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난, 그 기간을 초기 10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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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9.02 23:02

부안 효원식품 최권엽 대표 "약초농사 접목, 천연 발효 효소의 메카 만들고 싶어"

효소는 동식물의 생체 세포에서 생산되는 고분자 유기 화합물을 일컫는다. 살아 있는 생물체의 화학 반응에 관여하니,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생명물질이다.효소는 발효식품에 가득하고, 술, 간장, 치즈 등 식품제조는 물론 소화제 등 의약품에도 사용된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효소는 건강보조식품으로 주목 받아왔다.국내에서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효소가 인기다. 인터넷 포털에서 효소를 검색하면 확인할 수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효소를 만들어 먹는다. 효소가 건강한 사람은 더욱 건강하게 하고, 병약한 사람은 원기를 회복해 준다는 입소문이 오래 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퍼진 탓이다.지난 8월20일 부안군 주산면 만석로(옛주소 돈계리)에서 20년 넘게 효소 제조업을 하고 있는 최권엽 대표를 만나 약초 농사와 발효 식품을 접목시켜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옛날 이 동네에 만석꾼이 살았는데, 50년 전 최 대표의 부친이 만석꾼 집을 매입해 이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집은 만석꾼의 고대광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커다란 한옥이 아니었다. 현대식 가옥으로 개량한 탓이다. 대신 거대한 옹기 항아리 숲이 고대광실의 고색창연함을 대신하고 있었다.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전통 옹기 항아리들이 앞마당과 옆마당 3곳에 가득 늘어서 있는데, 무려 450여개라고 한다. 항아리는 모두 50년 이상된 전통 옹기 항아리라고 한다. 요즘 생산되는 옹기항아리들이 유약 때문에 반들 반들한 것과는 달리 거무튀튀하기까지 하다. 커다란 항아리 입은 비닐로 씌워져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대부분 10년 전후 된 산야초 발효 효소액이 들어 있는데, 그 양이 무려 50톤에 이른다.-옹기 항아리들을 보니 규모가 대단합니다. 언제부터 효소 담그는 일을 했습니까.1990년부터 효소를 담그기 시작했으니까 24년 쯤 됐습니다.-20대 때인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요.아버님께서 한약방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산 몇 개를 넘어야 갈 수 있는 줄포면 선산에 아버지를 따라 벌초하고, 성묘하러 다녔는데 아버지가 풀 이름, 약초 이름을 알려주시고, 우리 몸 어디에 좋다는 설명도 해주셨지요. 그렇게 자라면서 웬만한 식물 이름을 알았죠. 옛날에 감기 걸리면 어머니가 생강을 잘게 썰어 설탕을 잰 뒤 다려 주셨는데, 신기하게도 감기가 싹 나았어요. 또 배가 아프면 어머니가 매실액을 주셨는데, 복통이 씻은 듯 사라졌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귀향해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었는데, 어느 날 어머니가 솔잎 효소를 담갔어요. 그런데 그만 술이 돼버렸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제가 제대로 된 솔잎 효소를 담그겠다고 나섰다가 지금에 이르렀습니다.-솔잎 효소 담그기가 어려운 모양이죠.3년간 실패를 거듭했어요. 항아리로 치면 약 30개 정도는 버렸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아까워요. 효소가 제대로 안됐다고 버린 것들이지만, 그야말로 천연 식초거든요. 하여튼 뭐가 잘못됐는지 술이 되거나 식초가 돼 버렸어요. 맛이 이상해서 먹을 수 없게 된 것이죠.-어떻게 성공했습니까.설탕의 양, 일정 시기 후 항아리에서 윈재료를 건져내는 시기가 매우 중요했어요. 저는 효소에 빠져든 1990년 이후 최적의 효소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했습니다. 수 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은 저만의 제조 노하우를 가질 수 있었어요. 아마 효소 제조를 저보다 많이 해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지금은 효소 재료로 사용할 약초의 양을 보기만 해도 설탕의 양을 정확히 가늠합니다. 또 항아리 속 재료를 만져보기만 해도 재료를 건져낼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어요. 사실 효소 담그기는 계량화된 데이터가 없어요. 시중의 효소 관련 책에는 원재료와 설탕을 1대1로 넣어 100일 있다가 건더기를 거른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잘못된 거예요. 효소는 햇빛과 바람에 의해서 발효되는 것인데 여름 뜨거울 때는 한 달 안에 건더기를 걸러야 돼요. 재료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삼투압 작용에 의해서 수분이 빠져 쭈그러지는데, 한달이 넘어가게 되면 오히려 원재료가 수분을 흡수하게 돼요. 재료가 팅팅 불어요. 원재료는 수분을 먹으면서 독성을 내뿜기 때문에 적기에 걸러내지 않으면 효소액이 몸에 더 안좋을 수 있어요. 모든 산야초는 자기를 보호하는 독성을 갖고 있거든요. 봄철에는 재료 건지는 시기가 조금 길어지지만 어린 순이니까 20일만에 걸러야 돼요. 쭈그러지면 그 때부터 재료가 가라앉기 시작하거든요. 그 때 건더기를 걸러 낸 효소액이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고 독성도 없고 몸에 좋아요. 원재료에 따라, 계절에 따라, 햇빛과 바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최초 2030일 정도는 매일 뒤집어 주면서 재료 상태를 살펴야 해요.-정성이 깃들어야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겠군요. 최 대표는 설탕을 어떻게 넣는가요.어떤 일이나 그렇지만, 효소 담그기는 정성입니다. 그래야 맛과 효능 좋은 효소를 만들 수 있어요. 처음에 설탕을 적게 넣고 자주 뒤집어주면서 상태를 점검합니다. 이 과정에서 설탕이 부족한 것 같으면 조금씩 더 넣죠. 이게 현명한 방법이예요. 처음부터 원재료와 설탕을 1대1로 섞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예요. 매일 뒤집고 살피면서 설탕을 조금씩 추가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입니다. 자칫해서 균이 죽어버리면, 그것은 효소액이 아니라 그저 설탕물일 뿐입니다.-원재료 채취는 어떻게 합니까.처음 몇 년간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채취하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논밭은 물론 산에도 농약을 많이 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어요. 이제는 밭에 재배해서 사용합니다. 이게 제일 안전해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약초밭 3000평에서 약초 농사를 짓습니다. 사실 약초재배는 쉽지 않아요. 일꾼을 모아 풀 뽑기를 하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숲처럼 우거지거든요. 풀 때문에 농사짓기가 너무 힘들어요. 씨앗 구해다 조금씩 재배하는 것들이 삼백초, 어성초, 민들레, 선학초, 독활, 옻, 두릅, 엄나무, 번행초, 엉겅퀴, 냉이 등 꽤 많습니다.-산야초 효소 만드는데 들어가는 약초는 몇 종류나 됩니까.한 철에 3040종류씩 들어갑니다. 초봄에 나오는 냉이와 미나리부터 담그기 시작하지요. 무조건 넣는 것이 아닙니다. 약초마다 갖고 있는 고유 성질을 고려해서 조절해야 해요. 산야초 담그려고 동의보감도 많이 읽었습니다.-기능성 효소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만.항암효소, 당뇨효소, 혈압효소 등 기능성 효소를 많이 담가봤어요. 체질이 맞는 사람들은 혈압당뇨가 떨어지죠. 기능성 효소로 효과를 못보는 사람들에게는 백야초 효소를 권해요. 백가지 산야초를 넣어 만든 백야초 효소를 먹고 효과 보는 사람이 많아요. 백야초가 기능성 효소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산야초 효소액은 암당뇨혈압위에 좋다고 확신합니다. 번행초가 위염, 위궤양에 좋다고 하는데, 백야초가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산야초 채취 시기는 어느 때가 적기인가요.모든 식물은 잎과 열매, 뿌리에 약성이 있어요. 하지만 효소 재료를 채취할 때는 시기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있어요. 잎은 여름, 열매는 가을, 뿌리는 식물의 기운이 다 내려간 겨울에 채취해야 좋죠. 식물의 약성은 꽃이 필 때가 가장 좋아요. 임신했을 때 좋은 영양분이 필요하듯이 식물도 꽃 피었을 때 약성이 좋은 것이죠. 그런데 독성이 있기 때문에 산야초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양을 조절해서 써야 합니다.-항아리를 보니 거무튀튀한 것도 많은데, 어떤 항아리를 씁니까.효소액은 용기 안에서 발효시켜 만듭니다. 용기 안에서 균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균이 죽으면 설탕물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발효통인 항아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숨쉬는 전통 옹기 항아리만을 사용합니다. 100년 전후된 것이죠. 저희집 항아리는 모두 196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예요.-항아리 입에 비닐을 씌웠던데, 광목이나 모기장 등을 씌워야 숨 쉴 수 있지 않습니까.물론 숨을 잘 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광목이나 모기장을 사용하면 초파리가 몰려들고, 결국 항아리 안에 고자리가 끼어서 먹을 수가 없게 돼요. 저는 그런 제품은 만들지 않습니다. 전통항아리 입에 비닐을 씌우면 발효 때문에 내부에 가스가 차는데요, 1960년 이후 만들어진 항아리는 가스 압력 때문에 비닐이 벗겨지고 맙니다. 하지만 옛날 항아리는 숨을 쉬기 때문에 비닐 덮개가 낮에 약간 부풀 뿐이예요. 요즘엔 그런 항아리가 없어요.-1년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효소가 설탕 덩어리라며 문제 제기를 했었죠?사실 그 방송이 나간 뒤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소비자가 중요하죠. 하지만 정직하게 효소를 만드는 사람들도 생각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해당 방송사 PD에게 편지를 썼어요. 20년 이상 효소를 연구하고 생산해 온 입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 편지를 받아본 후 제 효소 제품들을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와서 곧바로 보내줬고, 그 뒤로 방문하겠다는 연락도 왔는데,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습니다.-발효 효소를 20년 넘게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효소는 발효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도 되고, 설탕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식초나 술이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정직한 장인은 아주 질 좋은 효소를 만듭니다. 효소를 죽여서 판매하면 설탕물이지만, 충분하게 숙성시키고 전통항아리에서 완숙시킨 살아 있는 효소는 틀림없이 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효소는 정직한 사람들이 만들어 판매하도록 해야 합니다.-화제를 바꿔서 최 대표가 개발한 발효 소금에 대해 얘기해 보죠. 발효소금은 어떻게 아이디어를 얻었습니까.산야초는 그야말로 천연 약재입니다. 몸에 좋은 수많은 성분들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발효통에서 건져낸 건더기를 버리지 않고 밭 거름으로 사용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기도 했습니다. 인근에서 고추농사를 짓는 귀농 친구의 경우 효소 발효 건더기를 거름으로 쓰고 액비로 사용한 뒤 매년 탄저 없는 고추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소금을 항아리에 담아두고 쓰는 것을 알고, 산야초 건더기를 이용한 발효소금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약10년 전 일이지요.-어떻게 만듭니까.7년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 발효소금입니다. 천일염을 맑은 물에 씻은 다음 포대에 담아 2년간 쌓아두면 간수가 대부분 빠집니다. 잘 소독한 항아리 밑바닥에 구멍을 3군데 정도 뚫은 다음 효소 건더기를 광목 보자기에 담아 소금 항아리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소금을 붓는 방법으로 45층을 쌓습니다. 최초 소금 양이 70㎏ 정도 되는데, 2년이 지나면 45㎏ 정도로 줄어듭니다. 소금에 있는 간수, 비소 등 독소가 모두 빠지고, 광목에 넣은 효소 건더기는 바짝 마른 상태가 됩니다. 소금의 색과 맛이 변하고 성분 함량이 크게 변합니다. 최고의 소금이 탄생하는 거죠.-최고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성분 함량 검사 등 증빙 자료가 있습니까.우리나라 천일염은 나트륨 성분이 81.78에 달하는데, 제가 만든 발효소금은 그 절반도 안되는 39.90에 불과합니다. 전라북도 생물산업진흥원에 의뢰해 받은 성분검사 결과입니다. 마그네슘(15.4), 칼륨(44.7), 칼슘(42.2) 등 각종 미네랄 성분은 월등하게 높습니다. 성분이 품질을 말해줍니다.-효소를 이용한 발효식품이 또 있습니까.효소에 미쳐 살아오면서 발효소금을 개발하고, 이어 효소와 발효소금을 이용한 전통 고추장과 된장, 간장도 개발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찹쌀가루를 넣지 않고 엿기름으로 만든 식혜를 24시간 고아 만든 물엿, 메주가루, 고춧가루만을 넣어 만드는데, 전통 맛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오직 건강에 좋은 효소, 발효식품을 만드는 일에 전념해 왔습니다. 부안지역 많은 농가들이 효소를 생산하도록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건강을 지켜주는 효소의 메카 부안을 만들고 싶습니다. 효소 자체가 사람 건강에 좋고, 다양한 발효 기능성 식품을 생산하면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또 효소 슬러지를 거름으로 이용한 친환경 농사는 부안 먹거리 산업의 경쟁력도 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권엽 대표는 산야초 효소 만들며 유명세국회서 시음회도최권엽 대표(52)는 젊은 농사꾼이었다. 이리공고를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가 친구와 자취하며 직장에 다니기도 했지만, 도시 생활에 흥미를 잃고 고향집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다. 일찌감치 귀농한 셈이다.평범한 젊은 농사꾼인 그가 약초 농사를 짓고, 발효 효소액 만드는 일에 전념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가정 환경 영향이다. 한약방 가정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약초와 친숙해졌다. 아버지가 정부 권유로 지은 약초 농사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약초 농사를 지었던 밭은 최 대표의 소중한 생활 터전이 됐다.어머니가 매실, 솔잎 등을 이용해 발효액을 만든 것은 그가 발효식품의 매력에 눈뜨게 하는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다.산야초를 채취하러 다니다 멧돼지를 만나고 벌에 쏘여 고생하기 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각종 산야초 효소를 만들며 유명세도 탔다. 일반인들이 거의 매일 찾아와 효소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야단쳤다. 일을 못할 지경이었다. 지인인 고위 공무원 소개로 효소에 관심 있다는 차관과 장관이 찾아오기도 했다. 국회에 가서 효소 시음회를 하며 부안을 알리고, 전주와 광주를 오가며 효소 교육도 다녔다.하지만 요즘 그는 조금 의기소침하다. 1년 전 케이블방송에 방영된 설탕 효소 탓이다. 효소가 한꺼번에 설탕물로 매장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화가 나지만 방송만 나무랄 수 없다. 일부 양심불량 효소 사업가들 때문이다. 그들은 스텐리스 탱크에 재료를 씻지도 않고 넣은 뒤 설탕과 올리고당을 잔뜩 섞어 발효시킨다. 이런 환경에서는 균이 모두 죽는다. 설탕물이 될 뿐이다.최 대표는 정직하게 일하면 희망이 있다고 강조한다. 사필귀정이다. 그는 효소를 생산하면서 발효소금, 고추장, 된장 등 관련 기능성 제품을 꾸준히 개발해 내놓고 있다. 효소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건더기가 친환경 농사에 효자노릇을 하는 것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4.09.02 23:02

부임 두달 류평식 농산물품질관리원 전북지원장 "농산물 안전성 확보·고품질화, 생산단계부터 꼼꼼히"

류평식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전북지원장이 부임 두 달을 맞았다. 과거 정부가 수매 보관하던 양곡의 품질을 검사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던 농산물품질관리원은 농업 환경 변화로 그 역학과 기능도 대폭 확대됐다. 경기 이천 출신이지만 완주 이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류 지원장은 전북에 대한 애정이 깊다. 류 지원장을 만나 농산물품질관리원 전북지원의 업무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하는 일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농관원)은 농림축산식품부의 소속기관으로 벼·쌀 등 정부양곡 검사는 물론 농산물 안전성조사, 친환경농산물 인증관리, 원산지단속, 농산물우수관리(GAP) 및 우수식품인증 등 안전성과 품질을 관리하는 업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농업경영체등록제도를 도입해 농업정책 추진의 기초가 되는 농업경영체 DB를 구축하고, 농업인의 안정적 소득향상을 지원하는 직접지불제 관리, 면세유 사후관리 등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농식품 원산지표시를 위반하는 업소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데 위반 실태가 어떤지요.“전북관내에서 원산지표시를 위반해 단속되는 건수는 2012년 322건, 2013년 308건, 올해 7월까지 242건 등으로 점차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매년 300건 이상씩 적발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가공품 원료에 원산지가 다른 품목을 혼합하거나, 위반행위에 대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운반차량을 여러 번 바꾸는 등 위반 수법이 점점 지능화·조직화되고 있습니다.”-원산지표시 위반 근절을 위해 특별히 추진하고 있는 대책이 있다면.“원산지표시가 의심되는 품목은 농관원 시험연구소에 DNA 분석 등 과학적인 원산지 검정을 의뢰하고, 전북지원의 특사경(특별사법경찰관) 107명 중 수사 전문가들로 기동단속반 10명을 구성해 지능화·전문화된 위반사범을 전문적으로 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동단속반에서는 관세청, 농림축산검역본부 등과 연결된 ‘농축산물유통관리 전산시스템’을 통해 수입 농식품 실태를 시시각각 파악해 특별단속을 실시하고 있습니다.”-안전한 농산물의 생산과 공급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지요.“생산단계부터 유통·판매단계까지 사전 예방적 차원의 안전성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올들어 7월말 현재 생산단계 조사 1546건, 유통·판매단계 조사 961건 등 2507건에 대한 안전성조사를 실시해 부적합 농산물 37건에 대해 시장에 유통되지 못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친환경 농산물 관리는 어떻게 추진하고 계신지.“친환경농산물 인증은 생산방법과 사용자재 등에 따라 유기농산물(유기축산물)인증, 무농약농산물(무항생제축산물)인증, 저농약농산물인증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2016년부터 저농약농산물인증은 제도가 없어집니다. 전북관내의 친환경농산물 인증실적은 올해 7월말 현재를 기준으로 농산물(쌀·채소류 등)은 232개품목 2,070건 6,126농가, 축산물은 9종(한우·돼지 등) 542건 1086농가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농산물 인증기준을 지키지 않는 민간인증기관과 농가는 시장에서 퇴출시키고 있는데, 올해는 농작물 생육초기인 5월 한 달동안 인증농가를 불시에 방문해 인증기준을 위반한 농가 233건을 적발해 인증취소처분 등 행정조치를 한 바 있습니다.”-직불금 부당수령이나 면세유류의 부정유통 근절 대책은 어떻게 추진하고 계신지요.“올해 7월 현재 전북관내 농업경영체는 13만8000호가 등록돼 있는데 이 등록된 정보를 기초로 휴·폐경 농지 또는 동일농지에 중복신청 등 직불금 부정신청의 개연성이 있는 농가는 현장을 사전 점검해 지난해 2682ha 18억원의 직불금 부당수급을 방지했습니다. 면세유류는 농업경영체등록 정보와 농기계 보유현황을 대조해 부당수급된 경우 환수조치하고 있는데 지난해 815건 181만리터 19억원의 면세유 부정유통을 방지했습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부정수급을 바로잡아 실제 필요한 농업인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전국에서 처음으로 창업음식점 원산지표시 정보제공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성과는 어떤지요.“음식점 영업을 처음 하는 사람은 내용을 잘 몰라 원산지표시 규정을 위반하게 되고 처벌을 받게 되는 등 어려움이 많다고 판단돼 전북지원이 전국 최초로 ‘창업음식점 원산지표시정보 제공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자체, 음식업협회 등과 협조해 창업한 음식점을 우리 기관 직원이나 명예감시원들이 직접 찾아가 원산지표시판을 무료로 제작해 배부해주고, 원산지표시요령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전북지원이 추진중인 이 사업에 대해 농식품부에서는 정부 3.0·협업 등과 관련한 우수 사례로 선정해 1500만원의 예산을 지원했습니다. 올해 성과를 검토해 내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어린이집과 학교급식 식재료의 품질과 안전관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농관원 차원의 대책을 추진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올해 초·중·고교 190건, 학교급식지원센터 150건, 식재료납품업체 40건, 총 380건 정도를 현장에 직접 직원들이 출장을 나가 식재료 샘플을 채취한 뒤 안전성조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올해 7월말까지 안전성조사를 실시한 206건 모두 적합 판정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도민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농산물시장 개방과 이상기후에 따른 농산물 생산여건 악화 등 농업의 여건이 많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농관원에서는 전북이 특히 농도인 점을 잊지 않고 어려운 농업 여건을 극복해 나가는데 앞장서 농장부터 식탁까지 사전 예방적 농식품 안전관리에 힘쓰고, 친환경농산물 등 농식품 인증제에 대한 소비자 신뢰를 높여나가겠습니다. 농업인들께서는 내가 생산·출하하는 농산물의 안전성 확보와 고품질화에 앞장서 주시고, 소비자 여러분들은 친환경 및 우수식품 인증, 원산지 표시사항 등을 꼼꼼히 확인하고 국산을 애호하는 현명한 소비를 부탁드립니다.”● 류평식 전북지원장은 농관원 37년간 근무, 깐깐한 원칙주의자지난 7월2일 부임한 류평식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전북지원장(57)은 경기 이천 출신으로 이천농고와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원예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1977년 경기 이천 농촌지도소에서 공직을 시작한 류 지원장은 7개월 뒤 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지금까지 37년간 농관원에서 근무해왔다. 농관원 전남지원 순천·광양출장소장을 거쳐 농관원 본원에서만 21년 6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유통지도과·품질검사팀·기획조정과·운영지원과 등 농관원의 거의 모든 업무를 섭렵했다. 지원장 대상자로 결정되면서 충북지원 등 서울에서 가까운 곳을 희망할 수 있었지만 전북지원장을 자원했다. 완주 이서에 뿌리를 둔 전주 류씨였기 때문이다.“전북에 내려온 만큼 앞으로 조상의 시제(時祭)에 꼭 참석하고 싶다”는 류 지원장은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조상의 뿌리가 있는 전북에 깊은 애정을 느낀다”고 했다.그는 지원장 전용 관용차를 업무 이외에는 출퇴근에도 이용하지 않는 원칙주의자다. 국민 개개인이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나라가 바로선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류 지원장은 “20세기 초 세계 5대 경제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맞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것은 국민 의식 때문”이라며 “국민 개개인이 원칙을 지키며 바르게 살아야 우리나라도 3만불 시대에 진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그는 “국내 농업여건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농도 전북의 위상이 바로세워질 수 있도록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강인석
  • 2014.09.01 23:02

[(29) 군산 (주)에이치비 강구조] 철강 구조물 제작…군산에 전진기지 구축, 수출길 열어

공장을 지어주거나 설비를 공급하는 산업으로 설계시공에서부터 유지보수 등 제조와 서비스가 복합된 플랜트 산업.플랜트를 수주하면 생산 설비와 부품까지 조달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플랜트 산업은 국가의 기술력과 산업 수준까지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는 산업의 집합체이다.소규모 건설업으로 시작해 화학발전 분야 전문 플랜트 업체를 목표로 지난 2008년 법인을 설립한 이후 한 계단씩 오르며 7년 만에 해외 플랜트 시장 진입에 성공한 (주)에이치비 강구조(대표 서선교) 전문 플랜트 업체를 향해 성장해 가며 군산국가산업단지에 수출 전진기지를 마련한 에이치비 강구조 군산공장을 찾아 그들의 꿈과 가능성에 대해 들어봤다.△설계-제작-설치까지 통합공정 실현(주)에이치비 강구조는 지난해 7월 60억원을 투자해 군산 오식도동에 설립한 면적 3만5979㎡의 군산공장에 1만31㎡의 공장동과 2400㎡의 도장장 등이 설치되면서 에이치-빔 제단가공 월 최대 2000톤, 용접 및 2차 가공 월 최대 1400톤의 생산 규모를 갖추었다.2008년 법인 설립 당시, 서선교 대표와 성치수 군산공장장 등이 의기투합해 10년 내에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코스닥에 상장해 보자며 충남 공주 탄천면에 공장을 마련하고 사업을 시작한지 6년만이었다.이곳에서는 플랜트 건설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대형 철 구조물을 가공 제작해 건설현장으로 보내고 있다.3D 설계 프로그램으로 직접 구조물을 설계 제작해 도장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현장에서 설치까지 마무리하는 시스템이다. 프로그램 설계로 구조기술이 반영된 설계도면 제작과 그에 따른 제작과 마감까지 진행할 수 있는 통합공정 실행이 가능하다.이 때문에 여느 강구조물 업체들과는 달리 도장장 허가까지 취득해 운영하고 있으며, 도장 전 공정으로 미세한 철재 구슬을 고압으로 분사해 녹과 이물질 등을 털어내는 쇼트룸까지 갖추고 있다.원자재 관리는 우직하리만큼 철저하다. 국내 제강회사의 KS인증 제품이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때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산이나 비인증 제품으로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입찰경쟁에 나선 타 업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하지만, 제품의 질을 위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직원들의 높은 기술력으로 생산공정을 최적화하면서 제조원가 경쟁력을 높여가고 있다.이를 위해 숙련된 기술자가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삼고초려라도 해서 반드시 영입한다.뿐만 아니라 소규모 가공 등 단순과정마저도 외주를 주지 않고 자체 소화하면서 책임 시공을 보증하고 있다.이 같은 품질관리 노력으로 지난 2011년 ISO 9001 인증으로 품질경영시스템을 인정받았으며, 특히 군산공장은 지난 6월 국토교통부로부터 철강구조물 제작공장으로 건축분야 공장인증까지 받았다. 철강구조물 공장인증제도는 국토교통부가 공장규모, 기술인력, 제작시설 및 품질관리시스템 등을 심사해 제작능력에 따라 등급을 부여하고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교량분야 20여곳, 건축분야 30여곳 등 총 50여곳에 불과해 높은 가치를 지닌다.△신뢰 경영으로 해외시장 첫발에이치비 강구조의 출발도 여느 소규모 철구조물 가공업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창업 초기 작은 공사현장이라도 눈에 띄면 5000만원짜리 일반건축물이라도 수주하게 해달라고 통사정하던 일이 다반사였다.하지만 전문 플랜트 업체로 우뚝 서겠다는 목표로 수익금 100%를 재투자했다. 매년 초 전년대비 150~200%의 매출 증대 목표를 세웠으며, 창업 이래 줄곧 목표를 달성했다. 신뢰를 가장 중요시 한만큼, 회사의 성장 목표와 직원들과의 약속도 지켜 나가야 할 책무였기 때문이다.신뢰 경영은 거래처들에게 믿음을 주기 시작했으며, 창업 첫해인 2008년 7건 9억여원에 불과하던 주요 공사실적이 2010년 24건 60여억원, 2012년 42건을 기록하고 창업 6년만인 지난해 연매출 320억원의 어엿한 중견업체로 성장했다.매년 150~200%의 성장세를 유지해 왔지만, 때로는 덤핑입찰에 따른 피해 등을 감수하느라 대표를 비롯한 임원들은 수년간 현장기술자들의 절반 수준의 임금만 가져가는 고통을 감수해 왔다.하지만 안정보다는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투자를 계속 확대했으며, 2011년 완주에 1만8000㎡ 면적의 공장을 임대해 제2공장 생산가공라인을 완비하고, 탄천공장도 확장했다.지난해부터는 해외시장 공략을 준비하기 위해 임대했던 완주 제2공장을 정리하고, 군산 국가산업단지로 확장 이전했다.군산공장 면적의 3분의1 가량인 탄천공장에서는 일반건축물을 취급하고, 군산에서는 생산직 60명과 관리직 28명 등 80여명의 직원이 산업플랜트에 주력하고 있다.지난해 12월 필리핀에 사료공장이 건립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지로 날아가 수주전에 뛰어들어 저가공세에 나선 중국업체 등을 따돌리고 수주에 성공했다.해외 수주를 전문으로 하는 상사를 통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현지에서 직접 수주하는 이례적인 일이었다.수주액 4억여원으로 비록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첫 수출의 물꼬를 트고 지난 4월까지 군산공장에서 플랜트를 제작해 컨테이너에 싣고 선박을 이용해 마무리 하면서 해외 시장에 눈을 뜨는 소중한 경험이 체험했다.이를 계기로 필리핀 현지 수주활동을 계속 추진 중에 있으며, 현재 필리핀 클라크 지역에 들어서는 물류센터와 관련된 150억원 규모의 플랜트 수주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등 필리핀 현지법인 설치까지도 고민하는 상황이 됐다.● 성치수 군산공장장 "직원들이 주인의식 갖도록 자율적 근로체계 구축 힘써"현재 진행 중인 5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가 불과 수년전만 해도 연간 매출이었습니다성치수(46) 군산공장장은 회사의 성장세를 이 한마디로 표현했다. 그만큼 쉼없이 달려온 7년이었다. 그는 복잡한 생산구조와 공정라인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플랜트 산업의 매력을 설명했다.지난 20여년간 철골업을 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 온 성 공장장은 7년 전 서선교 대표를 만나면서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꿈을 다시 키울 수 있게 됐다.매출의 핵심인 수주는 서 대표가 전담하고 성 공장장이 공주와 군산을 오가며 회사를 관리하는 등 찰떡 궁합을 보이고 있다. 마진율이 줄어도 정품만을 고집하는 뚝심과 직원들과의 신뢰가 품질 향상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하며 매출목표는 물론 복지 등 직원들과의 약속도 7년째 지켜나가고 있다.성 공장장은 단순한 일반 공사에 비해 전문 플랜트 분야는 배관과 라인 등을 설계하고 완성해 가려면 높은 기술력이 요구됩니다. 이 때문에 화학이나 발전 분야 진출에 대비해 전문인력 영입을 추진 중입니다며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일해 나갈수 있는 기반 구축에 역점을 두고 주인의식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군산으로 공장을 이전한지도 만 1년이 훌쩍 넘었다며 군산국가산단은 인프라가 갖춰져 수출을 지향하는 회사와 안성맞춤이고, 산업단지관리공단 등 기업지원 기관이 지척에 있어 편리한 점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기업과의 상생협력을 위한 행정적 지원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했다2015년 180%의 매출 성장 목표를 잡았다는 그는 조만간 필리핀을 거점으로 해외진출이 본격화되고, 내년에 목표를 달성하고 이듬해까지 이를 유지한다면 창업 10년 후 이루겠다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4.08.28 23:02

(34)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북 보은 '북접 농민군 최후 전투지에 붉은 진달래 꽃 흐드러져'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일 년 전 동학교도들은 보은에 집결했다. 당시 민생은 파탄에 이르렀고 열강의 침탈은 날로 거세지고 있는 시기였다. 동학교도들은 보은취회에서 척왜척양을 외치며 왕실이 중심을 잡고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것을 요구했다. 수 만명이 집결하자 왕실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했고 동학교도들은 왕실을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좌초 직전까지 내몰린 왕실은 백성과 동학교도들의 요구를 끝내 외면했다. 보은취회가 열린지 일 년 5개월 만에 북접의 동학농민군은 다시 보은에 모여 우금치로 향했다. 하지만 우금치전투에서 대패를 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보은에 돌아온 북접 동학농민군은 최후를 맞이했다.△장내리 집회터보은군 장내리 집회터는 동학교단 본부가 있던 곳으로 1893년 3월 이곳에서 보은집회가 개최됐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제2차 기포에도 북접의 동학농민군들이 집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1892년 충청도와 전라도 감영에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단자를 울린 동학교단은 1893년 2월 서울로 올라가 광화문복합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다음 달에는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척왜척양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동학 지도부가 장내리를 취회지로 결정한 이유는 삼남 각지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고, 속리산을 포함한 소백산 줄기를 타고 경상도와 강원도로 피신하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1893년 3월 10일부터 4월 5일까지 계속된 장내리 집회에는 약 2만3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이 집결해 척왜양운동을 전개했다. 이곳에 모였던 교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하다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보내는 등 효유하자 자신들의 주장이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해산했다. 장내리는 동학농민혁명의 2차 기포에서도 많은 농민군들이 집결한 곳이다. 1894년 9월 18일 청산에서 기포령을 내린 최시형은 휘하 두령들에게 군중을 인솔하고 보은 장내리의 대도소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북실 전투지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는 붉은색 진달래가 많이 핍니다.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붉은 피를 흘렸기 때문 아닐까요. 보은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인(원소기호 P) 성분이 많은 곳에 진달래가 많이 핀다고 설명했다. 몇 년 전 북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한 결과 인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됐다. 동물의 뼈이 등에 주요 성분이 바로 인 이다. 실제 한 보고서에는 인 성분이 많은 토양에서 진달래가 잘 자란다고 기술한 바 있다. 북실 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다. 일본군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학살한 농민군의 수는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은 전투 중에 전주 도합 395명이 총에 맞아 죽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 외에 다른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최소 400여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비해 일본군이나 민보군의 피해는 2명의 부상자만 나왔을 뿐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지난 2007년 7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완공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건립 과정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충북지역 시민단체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유적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다. 실제 공원 입구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 1894년 8월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세워 순으로 표지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박달한 사무국장은 보은의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 보은취회부터 시작됐다. 이 표지석의 설명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은 왜세의 침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면서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적 자발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며 결코 피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봉기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김소촌 생가터우금치에서 대패한 북접농민군은 일본군의 추격은 물론 매서운 추위와 싸워야 했다. 1894년 11월 27일 태인을 떠나 임실, 무주, 황간, 용산, 청산을 거쳐 다시 보은으로 몸을 피했다. 동학교주 최시형과 북접의 지도부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병희, 배학수는 김소촌 가(金昭村 家)에 머물며 후일을 도모했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일본군의 습격으로 다시 몸을 피해야 했다. 김소촌 가의 소촌은 어떤 인물의 호나 명이 아니고 소촌찰방을 지낸 김세희의 집이다. 그는 당대에 부를 이뤄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가 동학교도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이유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구전으로 전해진 그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부를 이뤄낸 상황에서도 동학에 뜻을 같이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후손 김중구씨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일(일본군의 습격)이 있던 날 하얀 도포자락을 입고 마을을 떠났다고 말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지난 1999년 창립한 보은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회장 구왕회)는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참여자 후손에 대한 유족발굴에 전념해왔다. 또 지난 2007년 건립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보은관내 청소년 대상 역사체험 학습, 일반 관람객 대상 역사체험 학습, 역사해설, 나무공작 체험, 조선시대 민속체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 "차별없는 공동체 문화 꿈꿔요"동학은 일반 대중들의 보편적 정서였습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고요.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어느 시대든지 일반 대중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있었다고 말했다. 또 일반 대중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에는 항상 동학의 정신이 함께 했다고 했다.박 사무국장이 말하는 동학의 정신은 함께 하고, 함께 나누며, 함께 잘 사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는 동학 100돌 무렵인 20여년 전부터 보은에서 생활문화공동체 아사달을 만들고 계승사업회 일을 시작했다. 100년 전 동학혁명의 시발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깨닫고 그 정신을 잇는 일을 하고자 귀향했다. 1893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처럼 박 사무국장은 새로운 꿈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차별없이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깨달아 세상을 바라본다면 더 바랄 게 없다면서 공동체 문화가 가장 잘 이뤄진 보은을 만들어 120년 전 동학농민군이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8.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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