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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문화융성위 김동호 위원장 "통일 한국 대비, 100년 내다보는 문화정책 가꿔가야"

지난 해 3월 단편영화 한편이 전국에서 동시 개봉됐다. 주리.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심사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소통의 단절을 통해 영화란 무엇인가를 유쾌하게 담아낸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4분. 상영시간 분량으로만 보자면 단독 개봉은 어차피 불가능해보였다. 그러나 어찌됐든 이 영화는 옴니버스가 아닌 단독으로 전국 12개 상영관에서 개봉됐고 화제를 모았다. 단편영화의 가치를 보여주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던 이 영화가 주목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이름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대한민국 영화제의 상징이 된 그의 첫 연출작에 국내외 영화인들 뿐 아니라 영화 마니아들까지도 경의를 보냈다. 2010년 부산영화제 15회를 끝으로 집행위원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던 김동호 위원장의 새로운 시작은 의외의(?) 창조였지만 아름다웠다. 같은 해 여름, 그의 이름이 또다시 매스컴을 탔다.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으로다. 큰 도전이자 모험으로 보이는 이 일을 그는 정치가 아닌 문화의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 의도하지 않아도 경계와 비판,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위원회는 실제로 비판과 격려, 때로는 과분한 기대의 여론 속에서 항해하고 있다. 여전히 고군분투, 민(民)과 관(官)의 경계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의 길을 찾고 있는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78)은 답을 얻었을까. 지난해 위원회를 발족하자마자 전국 광역자치단체를 돌며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던 김 위원장은 3월부터 2차 현장 순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3~4회 지역을 찾아다니는 문화현장 탐방은 오는 4월까지 그의 중요한 일상이다. 지역을 돌아보니 문화융성의 길이 현장에 있음을 알겠어요. 지난해 광역단체 탐방 때와는 또 다른 과제를 안게 됩니다.현장탐방 일정이 비어있는 시간을 쪼개어 인터뷰로 내준 김 위원장은 기꺼이 맡은 일이니 즐겁게 일하면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강행군의 일정에도 지쳐 보이지 않는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금세 두 시간 남짓한 약속시간을 넘겨버렸다. 치열하고 촘촘한 그의 삶의 한편을 겨우 들여다본 시간, 대한민국 문화정책의 궤적이 거기 있었다. -현장 탐방이 강행군이어서 힘드실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일요일에도 일정이 잡혔던데요.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하면 괜찮습니다. 아직은 체력도 견딜만하구요. 지난 일요일에는 덕적도를 다녀왔어요. 정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현장에 가봐야 문화융성의 답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더군요.-어떻습니까. 작년에 진행했던 현장 탐방과 비교하면. 지난 1차는 광역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에 광역시나 도 단위 예술단체와 문화재단, 지역 문화예술인들을 만났습니다. 지역사회 기층의 여론과는 좀 다른 것이었죠. 올해는 문화소외 지역과 특히 마을 단위의 현장을 찾아 문화예술인과 지역 주민들을 만나는 일정입니다. 문화 현장의 실태와 환경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문화융성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이 지났습니다. 위원회로서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겠지만 외부에서는 그 역할과 성과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위원회 활동의 체감이 없다는 평가가 있더군요. 그런 평가와 조언은 모두 경청할 내용들입니다. 그래야 모범 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활동성과나 체감의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문화라는 것이 어떤 정책을 세우고 시행한다고 해서 곧바로 시책의 효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죠. 융성위 활동도 국민들이 제대로 체감할 수 있게 되는 시점은 문화융성위가 (대통령 직속위원회란 성격으로 볼 때) 끝나는 때쯤이 되지 않을까요. 시간도 그렇고 정부의 노력도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문화융성위원회 일과 동시에 학교(단국대 영상대학원장) 일을 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학교 일은 융성위 일을 하는 동안 차순위로 미뤄놓았습니다.(웃음) 지난해 6월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심사하고 있을 때 융성위 위원장 제안을 받았습니다. 문화융성위 출범은 매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제가 할일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었거든요. 고민은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아닌 문화계 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내가 할 수 있겠다 싶더군요. 또 한편으로는 내 나이에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원회가 발족한지 7개월이 지났는데 위원장님이 계획하신대로 활동 과정에 진전이 있습니까. 사실 위원회의 역할은 정책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 정책 자문입니다. 그 역할도 아직은 미진합니다. 앞으로 과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해 연말, 문화기본법이 통과되고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문화융성위에서는 장기문화발전계획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장기계획을 잘 세워놓아야만 향후 한국 문화가 융성될 수 있겠지요. 그 장기계획이 우선은 5년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100년을 내다보고 통일 한국에 대비한 문화정책의 기본 구상으로 마련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위원장 임기가 1년으로 되어 있더군요. 기본적 역할을 해내기에도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물론 연임의 규정이 있지만 당초부터 이런 임기 연한은 위원회 역할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지속성의 문제가 있긴 하겠지만 우선은 주어진 임기 안에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임기동안 문화콘텐츠와 인문정신 진흥 정책도 만들 계획인데 지금 추진하고 있으니 장기계획과 함께 기본 골격은 짜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과 함께 문화정책 전체를 아우르는 문화발전 장기계획 골격을 완성시켜놓으면 올해 과제는 어느 정도 완성되지 않을까 싶습니다.-올해 융성위에서 문화가 있는 날을 제정했는데 성과는 어떻습니까. 아직 초반이어서 확산의 성과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점차 국민 속에 정착되어나가면 국민들이 문화예술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문화융성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문화가 있는 날의 진정한 취지가 지역까지 확산되면 일상 속에 문화를 자리 잡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겁니다.-영화제도 그렇고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오셨고 또 성과도 있었습니다. 문화융성 역시 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침 오늘도 신세계백화점과 문화융성위원회가 MOU 체결을 했습니다. 앞으로 기업들의 참여를 더 확대해 나가려고 합니다. 기업이 주체가 되어 문화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면서 문화 활동을 확산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문화바우처가 시행되고 있지만 그것도 덕적도 같은 곳에 가보니 아무런 소용이 없더군요. 당장 육지에 나가야만 활용할 수 있으니 생업에 매달려야하는 주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고 게다가 변변한 공간도 없으니 문화 활동은 남의 일로 되어버리는 것이죠. 다니면서 보니 작은영화관처럼 지역마다 환경과 특성에 맞는 맞춤형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더군요. -문화가 다양한 만큼 형식에 있어서도 다양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사실 위원장님께 말씀하신 작은 영화관 같은 문화공간은 전북이 처음입니다. 작은도서관 작은영화관 작은목욕탕 등 의 시도를 전북이 주도했죠. 그런 좋은 사례를 지역적으로 확산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국립발레단의 호두까지 인형 공연을 촬영용 영사기로 기록했는데, 공연 실황을 영화로 만들어 작은영화관에 보급하는 것도 좋은 콘텐츠가 될 것 같더군요. -궁극적으로 문화융성위의 목표는 어떤 것입니까. 모든 국민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문화 활동의 주체가 되거나 또는 문화예술활동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문화예술을 통해 국민들의 개개인 삶이 풍성해지고, 삶의 질 자체가 높아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문화융성위의 기본 목표이자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입니다. -이제 좀 화제를 바꾸어보겠습니다. 부산영화제를 만들어 세계의 5대영화제로 성장시켰습니다. 전주에도 전주국제영화제가 건강한 영화제로 잘 성장해나가고 있습니다. 부산영화제의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비경쟁 영화제로는 세계 탑 랭킹에 올라갈 수 있는 좋은 영화제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특색 있는 영화제로 가져가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발굴해서 세계에 소개시킨다는 기조는 그래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 기본방향은 1회 때부터 지금까지 부산영화제가 지켜온 근간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시아 변두리, 한국의 부산이란 도시까지 해외의 영화인과 영화계 인사들이 찾아오겠는가를 스스로 물으면서 단련했습니다. 프로그램과 프로젝트가 좋지 않으면 영화제의 미래는 없어지죠. 새로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 바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킨 동력이었습니다. -문화 분야의 행정전문가, 특히 영화 행정가로서의 소중한 경험과 열정을 쏟아낸 부산영화제를 떠날 때 섭섭하진 않았습니까. 천만에요. 제가 부산영화제를 하면서 영화의 전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8년 동안 공을 들였습니다. 기획과정 3년, 예산 확보하는데 3년, 공사하는데 2년. 그래서 거기에 쏟은 애정과 노력을 아는 주윗분들이 개관은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만류하더군요. 그런데 집행위원장 사임은 저 스스로 이미 오래전에 정해놓은 것이었어요. 새 건물에서 영화제를 하게 되면 영화제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사람이 맡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개관 1년 전에 그만둔다고 공언해왔지요.-당시 위원장님의 결단과 아름다운 퇴진이 또한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감사할 일이죠. 저로서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구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그해 영화제 개막식에 왔었는데 나는 김 위원장처럼 그렇게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며 부럽다고 하더군요.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부터 부산영화제까지 위원장님이 한국영화산업에 미친 영향 또한 큽니다. 오늘의 한국영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산업적으로는 올해 시장 점유율 60%까지 이루었죠. 또 1천만 관객 시대, 1억명 관객시대가 왔고요. 지난해 전체 영화 관람인구가 2억 명을 기록했고, 그 중 한국영화가 1억 명을 넘어섰으니 양적으로 대단한 성장을 한 셈입니다. 질적으로도 국제영화제 수상이 반드시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98년 이후 한국영화가 칸 영화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돋보이는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부작용도 있습니다. 98년에 멀티플렉스 극장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3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전국상영관의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수직계열화 문제가 생기고 독립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드는 안타까운 환경도 있습니다. 대기업과 영세한 중소기업, 특히 독립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내는 일이 절실합니다.-그동안 한 나라의 문화는 지역문화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오셨습니다. 우리나라 지역문화의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늘의 지역문화를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이번 현장 탐방에서도 돌아보니 자생적인 문화 활동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더군요. 대도시에서는 원도심 재생운동이 있고, 마을단위에서는 문화로 마을을 가꾸는 활동들이 돋보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활동들을 확산시키려면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지역문화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문화융성위도 지역문화의 자생력을 발전시켜가는 길을 찾는 일이 큰 과제입니다.● 김동호 위원장은 문화예술진흥법 초안 만들고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지내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은 1937년생이다. 고향은 강원도 홍천. 세살 때 서울로 이사해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해 있었던 때 말고는 줄곧 서울에서 성장하고 살아왔다. 선친은 광산업을 했는데 사업이 실패한 뒤 여러 일에 손을 댔지만 결국 재기하지 못해 곤궁한 시절을 보냈다. 제동국민학교와 경기중고를 거쳐 서울법대를 들어간 후에도 생활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청량리 집에서 지금의 대학로에 있던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했고, 교과서 한권 사지 않고 대학을 마쳤다. 사법고시 대신 취직의 길을 선택한 것도 가족의 생계가 위태로웠던 현실 때문이었다. 1961년 문화공보부 공무원이 됐다. 밤새워 일하면서도 승진시험을 놓치지 않아 고속(?)으로 사무관이 되는 길을 얻었다. 기획부서에서 일을 한 것도 동료들보다 빨리 승진하는 통로가 됐다. 공보와 문화 분야에서 두루 일했는데, 72년에 문화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화정책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진흥법 제정, 문화예술진흥원 설립, 문화예술진흥 5개년 계획 등이 모두 그의 손안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문화예술진흥법 초안은 당시 유네스코에서 발간한 각국의 문화정책을 숙독하고 전공(법학)을 살려 그가 직접 만들어낸 것이다. 같은 부처에서만 8년 동안이나 기획실장을 지냈지만 차관 승진을 못한 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나왔다. 영화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됐다. 한국영화를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특히 자국의 영화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전 세계를 다니는 미국영화인협회(MPAA)의 잭 발랜티 회장의 로비 활동을 보면서 한국영화계의 합법적인 로비스트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세계영화계와 교류하기 위해 해외영화제 진출의 폭을 넓히고 영화인들을 독려해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몬트리올영화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가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 상영 프로젝트를 만들어 모스크바 헝가리 우즈베크스탄 카자흐스탄 루마니아 등 각국을 돌면서 한국영화 알리기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종합촬영소 건립을 추진해 성사시켰다. 전관개관을 앞두고 있던 91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발령이나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문화예술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고 밤에는 직원들을 만나 예술의전당의 미래를 위한 개혁안을 만들었지만 문화부 차관 발령이 나면서 개혁안 추진은 끝이 났다. 92년부터 차관으로 일했던 11개월 동안에는 개관을 코앞에 두고도 터덕거리고 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을 떠안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쉬고 있던 1995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제안을 받았다. 작지만 세계가 주목하는 영화제가 우리나라에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젊은 영화인들과 의기투합했다. 아시아의 신인감독과 새로운 영화를 세계에 소개시킨다는 기조를 세우고 영화제의 골격을 만들어 예산을 확보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에 교류했던 해외영화제와 해외영화인들과의 친교를 확대하면서 부산영화제의 위상을 다지기 시작했다. 세계의 5대영화제로 우뚝 선 부산영화제의 오늘은 김동호위원장의 아름다운 고투(苦鬪)가 이루어낸 결실이다. 세계 건축사가 주목할 만한 기념비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부산 영화의전당 역시 그의 열정으로 추진됐던 결실. 부산영화제 15회를 끝으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으며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지난해 대통령직속 문화융성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초대위원장으로 위촉돼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원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3.27 23:02

[(11) 장수사과영농조합] 683개 사과농 참여…판매 소득 '1년 600억' 견인차

생산농가들이 직접 운영하는 믿을 수 있는 장수사과영농조합은 최고 품질의 장수사과만을 생산합니다.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에 위치한 장수사과영농조합(대표이사 하경준)은 집하장 2016㎡, 선별장 661㎡, 저장고 495㎡의 시설을 갖추고 8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장수사과영농조합은 지난 1992년 송재득 회장을 비롯한 30여명의 농가가 작목반으로 운영하던 것을 보다 체계화하기 위해 1995년 영농법인 설립인가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683개 농가가 참여해 1만2000t의 사과를 생산, 600억원의 소득을 올렸다.△안정적 판로확보 눈길특히 지난해의 경우 기상여건이 좋고 기술력 향상에 힘입어 농가마다 평년에 비해 수확량이 20~30% 정도 늘었다. 지난해 추석에는 1일 최고 5t 트럭 120대(300t)분의 사과가 출하되는 등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장수사과영농조합은 사과만으로 블루오션을 열어 제친 개척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장수사과영농조합은 현재 683개 농가가 820㏊를 경작하고 있으며, 이중 장수읍에 390개 농가 489㏊가 집중돼 있다. 생산된 사과의 70%는 서울지역에 납품하고, 나머지는 인근 지역과 직판으로 판매된다.장수사과영농조합은 31개 반으로 구성된 작목반을 대상으로 연중교육과 우수사례발표, 품평회 등을 실시하고 있으며 조합전체 교육과 타지역의 과원 견학도 연 4차례 이상 진행하고 있다.△탁월한 마케팅 전략 주목장수사과와 장수사과영농조합은 우수한 마케팅 전략을 앞세워 상품인지도를 높이고 있다.조합법인은 과수농가 생산물을 공동수매판매하면서 수매 대상을 지역내 과수농가로 한정해 이익이 모두 지역으로 환원된다. 특히 사과를 비롯해 장수의 특산물인 한우, 오미자, 토마토 등 붉은색 농축산물을 테마로 한 장수 한우랑사과랑 축제를 통해 지역생산 농축산물의 상승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해 열린 제7회 장수 한우랑사과랑 축제는 36만여명의 관람객이 행사장을 찾았으며 행사장 판매액 35억원, 지역경제파급효과 515억원이라는 성과를 올리며 전북도 최우수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이와 함께 장수사과는 지역순환농업으로 생산되며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를 도입해 믿을 수 있는 고품질 안심사과로 지난해 가락시장 우수출하자농산물대전에서 사과부문 최우수 농산물로 인정받는 등 품질 면에서 소비자 만족도를 높여나가고 있다.특히 홍로는 과실표면에 동녹 발생이 적고 착색이 우수하며 치밀한 육질과 아삭아삭한 맛이 타품종과 차별화 된다. 장수사과는 홍로 70%, 후지 25%, 명월망월 등 기타 품종이 5% 정도를 점유하고 있으며, 홍로의 경우 장수지역 평균 수확기를 9월~10월로 본다.장수사과는 고기압과 저기압의 교류가 활발한 해발 400m 이상의 분지에서 재배되어 생육상태가 좋을 뿐 아니라 당도가 높아 달콤새콤한 맛으로 한번 맛보면 그 맛을 절대 잊을 수 없다.또한 일교차가 큰 산간고랭지에서 재배되어 육질이 아삭아삭하고 과즙이 풍부하며 중생종인 홍로가 전체 품종의 70%이상으로 선물용으로 크게 인기를 얻고 있다.이와같은 이유로 장수사과의 인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올해 장수사과영농조합 참여농가들은 지난해에 이어 높은 수익을 올리며 웃음꽃을 가득 피울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경준 대표이사 "믿고 먹을 수 있는 사과 생산, 안정적 유통체계 마련 최선"지난해 제10대 장수사과영농조합장으로 당선된 하경준 대표이사는 세계 최고의 품질을 인정받는 사과를 생산하겠다면서 재임기간 안정적인 농자재판매장 운영과 유통체계를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 대표이사는 장수사과 대부분이 추석사과로 추석을 앞두고 홍수 출하되다보니 추석이 지나면 판로가 안정적이지 못한 게 현실이라며 전국시장 개척으로 집중출하를 방지하고 안정적인 유통판매망을 확충해 장수사과의 명성을 높여나가겠다고 말했다.그는 특히 장수농업기술센터와 공존하에 영농기술교육을 강화하고 농가별 맞춤형 교육으로 장수사과 품질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나가겠다면서 사과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그는 또 우량묘목 생산, 꽃가루지원, 프래쉬처리지원 등을 통해 고품질 사과생산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농약을 비롯한 각종 영농자재판매장을 만들어 조합원의 편익을 제공하겠다며 조합원 모두가 만족하고 신뢰받는 장수사과영농조합이 될 수 있도록 알차게 꾸려나가겠다고 말했다.하 대표이사는 하루에 사과 한 개를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사과의 효능이 뛰어나다며 소비자들이 믿고 드실 수 있도록 안전하고 맛있는 사과생산에 전념하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정익수
  • 2014.03.27 23:02

[(12) 동학 연구·활동가들 - 이이화] "동학, 드라마·영화화…다양한 예술장르로 대중화해야"

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그 자체가 역동적인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혁명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도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별 울림을 주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최대 민중항쟁이었던 그 역사가 전면에 부상한 것은 고작 100주년에 즈음해서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역사의 베일을 벗기려는 노력이 있었고,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타고 학계의 재조명 작업이 내부적으로 진행됐지만,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아직도 많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지만, 오늘의 모습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우리 앞에 서기까지 연구자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역사찾기’를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본 기획에서 혁명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묻혀있던 자료를 찾아내고, 현장을 누빈 연구자와 활동가를 만난다. 이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역사학자 이이화(77)는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봉준 장군처럼 키가 작고, 목소리가 크고, 고분고분하지 않은 기질과 비슷해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찾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많은 활동을 한 것이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는 30대 때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과 연구활동을 바탕으로 1989년 역사문제연구소 부설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책과 현장을 넘나들었다.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후 관련 공식 직함은 없지만, 2주갑은 그를 현장으로 다시 불러냈다. 지난 20일 기념재단에서 제작하는 홍보영상물 촬영을 위해 정읍을 찾았고, 전북일보 리더스아카데미 강좌에 연사로 초대돼 관련 특강을 했다. 이달 중 경북 영덕과 전남 무안에서 특강도 잡혀 있다.그는 현재 동학농민혁명의 대중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런 일련의 활동 역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대중화 작업으로 여긴다.-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나 배경이 있었다면.“늦은 나이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광주고)을 마쳤습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중 참기름 장사를 하던 어머니가 위암으로 쓰러지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틈만 나면 국립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이 때 역사학도가 될 것을 결심했어요. 그런데 80년대 암흑의 시대, 역사학자로서 무슨 역할을 할까. 그리 자문하면서 동학 관련 연구서와 자료들을 찾아보고 답사를 다니며 ‘왜 이들이 목숨을 걸고 봉기했을까’를 화두로 삼게 된 것이죠.”-당시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접근했나요.“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있을 때 규장각에서 수집했던 자료를 검토하고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특히 젊은 연구자들과 답사팀을 꾸려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까지 유적지를 탐방했고, 유족이나 관련자를 찾아 증언을 들었습니다.”-동학농민혁명의 오늘의 역사로 서기까지 선생님의 공적인 많은 데, 그 역할을 자평하신다면.“공로자라고 해서 원광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녹두대상도 받았지만, 운동은 혼자 하는 게 아닌, 같이 하는 것입니다. 특별법 하나만 봐도 연구자와 단체, 국회의원들이 힘을 합해 뜻을 모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2주갑을 맞아 돌아보면 몇 가지 큰 진전과 성과에 자부심을 갖기도 합니다. 역사문제연구소에서 30권의 사료총서를 내 연구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토대를 제공했고, 특별법을 만들어 법적으로 참여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습니다. 특별법에 바탕을 둔 재단 발족으로 혁명의 지속적인 조명과 선양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유족회 발족도 성과였습니다.”-그간의 연구를 평가한다면. “제 개인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된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을 정창렬 교수와 함께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매천의 며느리가 기증한 원본 중 의병 부문은 전주대 호남학연구소에 잘 보관돼 있으나, 동학 관련 부분의 원본이 사라져 애석합니다. 100주년을 전후해 국내 자료가 많이 발굴됐으며, 전북일보의 발굴 사료인 전봉준의 제자가 기록한 〈석남역사〉(박문규) 역시 귀중한 사료로 평가합니다. 다만, 일본 자료가 아직도 많이 발굴되지 않아 관심이 필요합니다.” -기념재단 이사장 혹은 연구자로서 그간의 활동에 아쉬운 점도 있을 텐데요.“김대중 대통령이 퇴임 후 동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제작이 안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100주년때 거의 모든 신문들이 연재물로 다루었고, 지상파 방송에서도 4부작 혹은 5부작 다큐로 제작했지만, 대중화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수미의 ‘파랑새’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조수미 씨에게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문학, 음악, 연극,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예술적으로 대중화 하는 작업이 따라야 합니다.” -대중화를 위한 개인적인 계획이나 욕심이 있다면.“서울 남산에 안중근·김구 동상이 있습니다. 여기에 동상 하나를 더 세우고 싶은 데, 그게 전봉준 입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친하지만, 친분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 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마지막 보람 있는 일로 꼭 이루고 싶습니다. 그것은 서울 남산에 또 하나의 동상 하나가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국민적 정신으로 우뚝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2주갑을 맞아 기념사업들이 활발히 준비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방향은.“과거 추모제로 치러졌던 기념사업이 축제적으로 접근하는 분위기 입니다. 잔이나 올려놓고 제의적로 치렀던 형식적인 의례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합니다. 다만, 지역이기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기념사업이 결코 밥그릇 싸움이 돼서는 안 됩니다. 특히 동학기념일 제정은 혁명의 대중화와 국민적 인식 제고, 사업의 집중화를 위해 아주 중요한 데, 지역이기주의로 흘러 안타깝습니다.”(동학농민혁명 기념일과 관련, 그는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다. 대신 대다수 학자들이 무장기포일에 손을 든 상황에서 우금치전투 패배일이 어떻냐고 조크를 했다고 했다.)-2주갑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주시죠.“동학농민혁명은 대내적으로 평등, 대외적으로 자주를 부르짖었고, 북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남으로 여수 진주까지 떨쳤습니다. 토지제, 신분제, 남녀차별 등 전근대적인 사회구조를 바꾼 일대 혁명이었고, 그 정신은 미래로 가는 빛입니다. 그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의미를 아는 것이 혁명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역사운동가 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민중사학계 거목'이이화 씨는 발로 뛰는 역사운동가다. 그의 관심 영역은 민중이다. 역사학자로서 처음 이름을 올린 것도 신분차별의 타파를 내세운 허균에 관한 연구였고(1973년 창작과비평에 발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과 친일인명사전편찬 등에 깊이 관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그의 관심을 피해가지 못했다. 동학에 대한 관심 역시 같은 맥락에서다.발로 뛰는 사학자는 8순을 눈 앞에 뒀지만, 지금도 현장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술과 담배도 그의 오랜 친구다. 그와의 인터뷰도 늦은 저녁에 전주의 한 가게맥주 집에서 진행했다. 필름통 잿털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대구 출신의 그는 전북과 특별한 인연은 특별히 없지만, 동학을 고리로 오랜 세월 많은 인연을 쌓았다.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이 지난 뒤 관련 일을 떠나 장수에서 집필활동에 전념하기도 했다.그는 지금까지 공저를 포함해 100여권의 책을 냈다. 그의 대표작인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는 9년간의 집필로 이루어진 대작이다. 〈녹두장군, 전봉준〉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를 비롯,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만화 한국사〉(전 9권) 〈평등과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운동〉 등이 그의 저서다. 많은 역사서를 내고도 그의 책 발간에 관한 허기는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사를 정식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너무 헤프게 쓴 것 같다는 반성을 달고서다. 경기도 파주로 거처를 옮긴 것도 그 때문이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손을 대지는 못했단다. 그의 혁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 기획
  • 김원용
  • 2014.03.26 23:02

[⑧ 동향과 과제] 탄소섬유로 더 가볍고 강하게…모든 산업분야 확산

탄소산업은 일본이 전 세계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방위산업과 항공기 산업 분야에서는 일본이 독점하고 있다. 전투기, 미사일 등은 물론 에어버스 A-380, 미국 보잉 787기 등 민항기에도 일본의 탄소섬유가 쓰인다. 민항기를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만들더라도 일본의 탄소섬유를 쓰도록 품질인증 등의 방식으로 묶어놨다. 설계도면에서부터 일본의 탄소섬유가 반영돼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장의 진입이 어렵다. 따라서 탄소산업계는 그동안 자전거나 테니스 라켓, 배드민턴 라켓 등 스포츠 용품, 또는 지진대비 건축용 자재 등의 시장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그런데 탄소섬유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은 자동차에서다. 독일의 BMW와 폭스바겐 등이 지난해 탄소섬유를 적용한 전기자동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출시했다. 특히 폭스바겐에서는 ℓ당 111㎞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선보여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시까지만 해도 탄소섬유는 가격이 비싸고 시장 확장성이 낮은 것으로 생각됐는데 자동차 산업계에서 갑자기 새로운 지평이 열린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동차산업에서는 항공기와 달리 아직까지 탄소섬유에 대한 품질인증이나 규격화, 표준화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한국 등 모든 나라가 경쟁할 수 있는 마당이 열려 있다.△중국의 자동차 산업중국은 스모그가 심한 나라이다. 도심에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공해가 없는 전기자동차밖에 없다. 앞으로 모든 시내권에서 전기자동차를 사용하도록 하겠다는 게 중국정부의 방침이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서 전기자동차의 값을 내리고 매연가스가 없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1회 충전으로 200㎞ 이상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하면 생산비의 50%, 150㎞ 이상 주행할 수 있는 자동차에는 30%를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중국의 자동차회사들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기자동차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더불어 중국에서도 탄소섬유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자동차의 무게를 줄이려면 탄소섬유가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탄소산업의 미래자동차산업은 하나의 신호탄일 뿐이다. 앞으로는 탄소섬유의 적용이 가전제품, 생활용품 등 산업의 거의 모든 분야로 확산될 전망이다. 탄소는 훌륭한 구조재일뿐 아니라 열과 전기 전도성 등 기능성도 좋기 때문에 각종 전자제품과 OELD TV, 곡면 TV, 태양광 등에 폭넓게 적용될 것이다.특히 무인항공기와 경비행기, 국방산업 등은 우리가 앞으로 관심을 갖고 관련기업 유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분야이다. 해양을 탐지하고, 날씨를 예측하고, 정찰과 감시를 담당하는 무인항공시대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몇 년 후면 우리 곁에 다가올 무인항공기는 얼마나 가볍게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100% 탄소복합소재를 사용하게 된다. 이처럼 탄소섬유는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혁명을 준비 중이다. 강신재 원장은 이제 일본과 한국, 중국의 탄소산업 경쟁은 시작됐다. 내년부터는 매년 15% 이상씩 탄소시장이 성장할 것이다고 말했다.△관광산업과 연계과학기술은 관광산업과 연계될 때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도내 곳곳에 실증체험 장소를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경제적 효과를 내야 한다. 고창에 산악자전거단지(탄소섬유 사용)가 있듯이, 부안에는 연료전지 자동차를 위한 전지저장소를 만들 수 있다. 지리산권 자동차시험주행 코스와 연계해 친환경 소재 부품인증 시험 체험파크로 만들 수도 있다. 탄소복합소재 적용 차량을 위한 각종 대회를 만들 수도 있다. 디자인상, 경주상은 물론 최고 연비상을 주는 것이다. 최고 연비를 얻기 위해서는 탄소소재의 사용이 불가피하다. △국내 거점 선점해야그러나 탄소사업이 발전한다고 해서 전북이 국내 탄소산업의 중심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니 오히려 전북의 탄소산업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실제로 대구경북에는 현재 탄소복합소재와 관련된 661만㎡(200만평) 규모의 하이퍼텍스산업단지 및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공약에 따른 것으로 국가예비타당성조사를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전북도 더 이상 앉아서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메가탄소밸리를 국책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국방항공기와 전기전자, 에너지, 스포츠, 산업, 의료용 등 다양한 분야로 나눠서 중점적으로 연구 개발하고 관련기업을 집적화해야 한다. 탄소섬유를 선점하게 되면 많은 기업과 사람이 몰려들고 돈이 생겨나게 된다. 강신재 원장은 탄소산업의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탄소산업은 100년 먹을거리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전북이 탄소산업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단합하고 분발해야 한다며 개인적으로는 대기업 10개와 중견기업 20개, 소기업 100개를 집적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이러한 기업들이 지역에 자리잡으면 국내외적으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끝>

  • 기획
  • 이성원
  • 2014.03.25 23:02

남원 출신 이철우 총리실 정부업무평가실장 "창조경제 확산·공공부문 개혁, 지역사회 재정비 필요"

국정의 주요 흐름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지휘하는 국무총리실은 관가의 지휘소나 마찬가지다.올초 국무총리실은 1급 전원(10명)의 사표를 받아 그 중 절반인 5명을 경질하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면서 세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그 와중에서 요직으로 꼽히는 정부업무평가실장에 전북 출신 이철우 씨(54행정고시 31회)가 발탁돼 정책평가의 실무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이 실장을 만나 현 정부의 정책기조와 지역발전을 위한 해법은 무엇인지를 들어봤다.-올초 국무총리실 10명의 1급공무원 중 5명이 사표를 쓰고 떠났는데 그 와중에서도 중책을 맡게된 배경이 있을 듯합니다.총리실에 변화를 위한 자극과 긴장을 주기 위해 1급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중책이 주어진 것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동안 총무비서관으로서 1년8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주어진 업무를 열심히 수행한 점을 인정받은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무총리실이 정부 부처 중에서 세종시로 최초로 이전했는데 이러한 청사이전 사업을 성공적으로 지휘했고, 정부가 바뀌면서 국무조정실과 국무총리비서실로 조직개편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통합적인 인사예산 운영시스템을 정착시켜 조직의 안정을 이룩하고 효율성을 제고한 실적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업무평가업무를 보면, 먼저 각 부처가 담당하고 있는 국정과제(현재 140개)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이행과정을 관리하고 연말에 이행실적과 성과를 평가합니다. 다음으로 각 부처가 수립하여 집행하는 정책의 성과를 자체적으로 관리하고, 스스로 점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부처 자체평가를 지원하고 있습니다.-이제 지방정부도 철저하게 성과관리에 역점을 둬야 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견해를 부탁합니다.정부 성과관리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국민에 대한 책무성 강화이므로, 중앙정부 뿐만 아니라 지방차원에서도 성과관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성과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감합니다. 지방자치단체도 자체적으로 성과관리를 운영하고 있으나, 주로 투입 대비 산출 위주의 성과지표를 설정운영하는 사례가 많다는 지적이 있어 실제로 이룩한 결과와 성과위주의 성과관리체계가 보다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지방자치단체가 성과관리를 보다 내실있게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 관련부처 등을 통해, 지방자치단체 특성에 맞는 성과지표 개발 지원, 성과관리 및 평가관련 교육 강화 등을 적극 지원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전북처럼 인구가 적고 낙후된 곳일수록 행정의 효율성이 강조되어야 할 것 같은데, 지방정부가 가야할 지향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지역의 인구규모, 발전수준을 떠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주민복리를 증진하는 것은 지방정부가 해야 하는 기본적인 임무이면서 영원한 숙제입니다. 주민의 욕구(needs)와 기대 수준은 지속적으로 커져감에 따라서, 전북과 같이 제한된 자원과 녹록하지 않은 여건을 가진 지방정부는 행정 효율성과 같은 지혜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방정부도 창조경제 확산공공부문 개혁 등을 통해 지역사회의 기초를 재정비하고 지역경제 활력을 배가할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는 내부의 관료주의와 비효율성을 타파함은 물론, 지역주민과 지역기업체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생태계가 자생적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조타수(steering)와 조력자(supporting)의 역할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전북에서 공직을 처음 시작했기에 전북행정의 문제점과 개선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이 보일 것 같습니다.제가 근무했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상전벽해가 이뤄져서 주민들이 선출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적극적인 리더십 아래서 지역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꼭 행정에 국한된 지적은 아닙니다만, 저를 포함해서 전북도민들이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일에 임하고 보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공직에 계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이고, 안타까웠던 순간은 어떤게 있습니까.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농림수산식품부 원양협력관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개방직이었던 그 직위에 제가 외부인으로서 공모해서 임용됐는데, 수산분야에는 문외한이어서 조직내에서 일부 저를 못미더워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임용된 지 몇 달 후에 한일 어업회담이 시작될 예정이었는데, 분명히 제 업무임에도 불구하고 상사는 다른 국장에게 이 업무를 맡기려 했지요. 제가 상사와 면담해서 아직 몇 달 남았으니 그동안 제가 하는 일을 지켜본 후에 판단하시라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제가 한일 어업회담을 비롯한 어업회담 업무를 계속 맡게 되었고, 어느 때보다 훌륭한 회담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를 받은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까웠던 일은, 국무총리실로 옮겨서 처음 근무하던 시절에 저를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켜주신 직속 상사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제 고등학교 선배인 전북 출신이었습니다. 이분은 당시 총리실 내에서 탁월한 업무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서 기획총괄국장으로 오랜 기간 근무하였고 1급 승진이 유력하였는데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살아계셨더라면 저로서는 더욱 많은 일과 인생경험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멘토가 되어주셨을텐데, 몹시 슬픈 기억입니다.-끝으로 도민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나 평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우리가 뒤떨어진 부분만을 파고 또 파면서 아파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진 것, 예를 들면 풍부한 문화적 전통자산, 농업을 바탕으로한 양호하고 변화무쌍한 자연환경 등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려 나갈 것인가에 지혜와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우리가 가진 훌륭한 자산들이 경제적으로 무궁무진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우리의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철우 정부업무평가실장은 28년 공직총리실 요직 두루 거친 '소신파 행정가'이철우 국무총리실 정부업무평가실장은 남원 쌍교동에서 태어나 전주 완산중과 전주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진학, 법학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고교를 차석으로 졸업했으나 행정고시에는 좀 늦은 1987년에야 합격했다.1989년부터 1992년까지 전북도청에서 정책개발계장, 세정과 평가계장, 세외수입계장을 역임했다. 1992년 말 국무총리행정조정실로 자리를 옮긴 후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총리실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국무회의와 차관회의를 담당하는 의정과장, 기획2과장, 혁신인사과장, 규제총괄과장 등을 역임했다.2004년 6월부터 2006년 2월까지 특허청에서 근무할 당시 위조상품 단속과 지식재산 보호 강화를 위해 위조상품 신고포상금제도를 도입한 일화가 있다.2009년 6월 개방직 고위공무원인 농림수산식품부 원양협력관으로 일하면서 말도많고 시끄러운 한중한일한러 어업회담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주목을 끌었다.2011년 4월 국무총리실로 복귀, 평가총괄정책관으로 재직하면서 국정과제 평가와 정부업무평가의 통합연계방안을 마련해서 평가제도 개선에 한 획을 긋기도 했다.2012년 5월부터 올초까지 국무총리실 총무비서관국무조정실 총무기획관으로 재직하면서 정부 최초로 시행한 국무총리실 세종청사 이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올 1월 1급 승진과 함께 국무조정실 정부업무평가실장을 맡아 지난해 국정과제 등 정부 업무평가를 마무리하고 올 국정과제 관리계획과 정부 업무평가 계획을 수립하는데 주력하고 있다.성품이 원만하고 소탈해 부하 직원들의 의견을 편하게 잘 들어주며 상급자의 지시를 성실하게 수행하지만, 원칙을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소신을 표명하는 뚝심도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세례받은지 30년 되는 천주교 신자이며, 등산 매니아로서 지난 2012년 백두대간 종주를 완주하기도 했다.

  • 기획
  • 위병기
  • 2014.03.24 23:02

[(10) 무주 남영제약영농조합] 지역 특산품 천마 주원료, 건강기능식품 명품화 주력

지역의 특산물로 세계 제일의 건강식품 제조회사를 꿈꾸는 곳이 있다.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제품 생산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곳, 지난 20여 년 간 한결 같은 마음으로 건실하게 기업을 일구고 있는 곳, 바로 무주 남영제약영농조합(대표 최민휴)이다.무주군 무주읍 가옥리에 위치해 있는 남영제약영농조합의 생산현장은 제1공장과 2공장으로 나뉜다. 제1공장에서는 의약품 생산 및 관리가, 제2공장에서는 HACCP(Hazard Analysis Critical Control Point 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이 적용된 설비에서 식품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남영제약영농조합은 HACCP 지정업체로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심어주고 있다. 이 곳에서는 무주군 대표 작목인 천마를 비롯해 인삼, 꿀, 생지황, 백복령, 찹쌀, 엿질금 등을 주원료로 황실진고, 무주천마발효진골드, 무주도라지발효고, 도라지엑기스, 천마초코크런치 등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 제품 중에서도 황실진고(경옥고)와 무주천마순골드(Pouch), 무주천마순고(조청) 등은 친환경 재배된 천마를 주원료로 하고 있으며 남영제약영농조합만의 추출, 농축, 발효기술이 탄생시킨 특허 상품으로 꼽힌다. 남영제약영농조합은 도내에서 유일하게 전통방식으로 경옥고를 생산하는 업체로, 재래식 제조 방법(7일 소요)을 유지해 경옥고의 우수한 기능을 그대로 보존하는 핵심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남영에서는 원료의 선별에서 가공, 포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부설연구소를 통해 철저히 품질검사하고 있으며 데이터베이스 관리를 통해 생산 활동을 체계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제품개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2008년부터 등록된 특허가 7건, 출원된 특허가 2건, 그리고 상표등록과 상표출원 성과가 각 1건에 이른다. 2011년에는 벤처기업, 여성친화기업, ISO9001, ISO14001 인증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CLEAN사업장, 농공상융합형중소기업, 친환경농산물 인증을 받았다. 이어 2013년에는 부설연구소를 설립하고 HACCP 지정업체로 선정되는 등 한약재 원료를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와 제품개발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건강식품과 의약품, 임가공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남영제약영농조합의 최근 3년 간 매출을 분석해 보면 건강식품의 매출이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남영제약영농조합에서는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해 각종 건강식품 개발에 기업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으며, 우수한 천마 기능식품을 브랜드화해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전략으로 명품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외에도 HACCP 위생교육을 정례화 시키고 철저한 자가 품질 검사 실시, 휴대와 보관이 용이하도록 하는 소포장 실시, 제품의 단가를 낮추는 등의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병행해 기업 성장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또한 산학협력(정기적 체험학습현장 실시), 지역사회 봉사활동 추진, 무주천마마라톤대회 개최 등 스포츠 활동을 통한 홍보 및 마케팅을 펼치며 기업과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데도 주력하고 있다. 한편, 올해를 수출 원년으로 목표를 세운 남영제약영농조합에서는 미얀마 양곤에 지역거점사무소 설치(전주대, 무주지역업체 연합사무소)하고 동남아시장 확보에 주력한다는 방침이어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최민휴 대표 "소비자 신뢰 쌓는 일은 기업가 양심에서 출발"기업은 소비자와의 신뢰가 우선 두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영제약은 우리나라 제1의 한약제조업체, 전 국민이 즐겨먹는 건강식품 생산업체라는 자존심으로 고객과의 신뢰를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무주군 특산물 천마를 원료로 하는 만큼 지역의 대표 기업이라는 자부심으로 무주천마를 더 많이 알리고 지역의 위상을 더 많이 높여 나가기 위해 노력해 나갈 것입니다 남영제약영농조합 최민휴(57) 대표가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잘 나가던 대기업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접고 무주로의 귀농을 택했던 최 대표가 농업인이자 기업인으로 살면서 마음에 항상 품었던 것은 바로 양심. 소비자와 신뢰를 쌓는 일도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일도 모두 양심에서 출발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20여 년을 변함없는 마인드로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기업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한약재 제조로 사업을 시작했던 최 대표는 2009년부터 천마식품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청정 무주를 특화해 소비자들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 최 대표는 공장을 증설하고 현대화된 HACCP 시설 정비, 벤처 인증, 이노비즈 인증, 기업부설연구소를 설립하는 등의 투자를 지속하며 사업을 안정화시키고 있다. 남영제약영농조합에서는 현재 천마와 인삼, 복령, 꿀을 주성분으로 한 황실진고(경옥고)를 개발해 제품 특허와 BUY 전북 인증을 취득한 상태며, 수출도 추진 중에 있다.최 대표는 무주에서 재배한 천마로 이만큼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지역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올해로 4회 째로 접어들고 있는 전국 천마 마라톤 대회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봉사활동들을 병행해 무주천마를 알리고 지역발전에 이바지 하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김효종
  • 2014.03.20 23:02

[(11)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김덕명 장군]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유일하게 남은 집강소 보존을"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2인자라고 불린 한 사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함께 재판 받고 운명을 같이한 전봉준 장군의 선명한 사진은, 얼굴조차 기억되지 않은 그와 대비될 뿐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 사나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전과 구전을 통해 떠도는 이야기가 그를 기억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혁명가이자, 김제 금구 일대에서 대접주로 활동하며 조선왕실과 일본군의 블랙리스트 최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가 없었다면 전봉준김개남손화중 장군의 활약도 없었을 것이라고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동학농민혁명 전 과정에서 지도부 참모로써 인적물적 자원을 공급하는 막중한 역할을 한 김덕명 장군의 이야기다. 김덕명 장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그의 증손자인 김석태 씨와 함께 지난 17일 김제시 금구면 원평을 찾았다. 김 씨는 현재 전국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을 맡고 있다.△원평과 김덕명원평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곳이고, 김덕명 장군은 그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 남아 있는 유적조차 소홀하게 관리되고 있는 현실이죠.원평에서 만난 (사)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최고원 상임이사의 첫 마디다. 최 이사는 평생 원평에 머물려 향토 사학을 연구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전해주는 기본 사료를 보면 원평과 관련한 기록은 거의 찾을 수 없고, 동학혁명의 역사에서 김제 원평이 갖는 위치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게 최 이사의 설명이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 단계에서 원평집회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지만, 1894년 혁명 전개 과정 서술에서 원평은 옆으로 비켜져 있는 실정이다. 그 이면에는 일본군의 문서 수집에 대한 집착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군 지휘부는 동학농민군과 접전을 할 때 무엇보다 먼저 동학농민군이 보유한 문서를 수집토록 지시했다. 이를 토대로 동학농민군 조직과 활동 사항 등을 파악한 일본군은 도처에서 농민군을 철저히 진압할 수 있었다. 반면 동학 조직에서 작성한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에 지역별 인물별 연구가 전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여러 구전과 극소수 문서 등을 종합해 보면 원평은 집강소의 대도소가 있었고 동학혁명 때는 태인지방과 함께 농민군 주력부대가 일본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원평은 농민전쟁의 중심지였고 이곳에 터전을 잡고 있던 지도자가 바로 김덕명 장군이다. 김덕명은 언양 김씨로 본 이름은 준상, 자가 덕명인데 자를 이름처럼 써온 것은 다른 농민군 지도자와 같다. 그는 그리 가난하지 않은 중농 집안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글을 익혔지만, 고리타분한 경서보다 병법 책을 읽어 뜻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와 가까운 한 일족이 대지주로 군림하면서 벼슬을 사서 세도를 부리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이들 김씨들의 재실이 있는 장흥리 안정 절골에서 종중회의를 할 때 이런 행태에 분노해 재떨이와 목침을 던지며 의기를 보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처럼 그는 젊은 시절부터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고 의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체포됐을 때 관변 기록인 순무선봉진등록에는 이놈은 크게 도소를 원평점에 설치하고 사사로이 국가의 곡식과 돈을 거두어들이면서 평민을 침학한 자이다고 기록됐다. 또 그의 판결문에는 또 김덕명이가 금구지방에서 무리를 모아 당을 이루고서 관고의 군대에 쓰는 물건을 마구 빼앗고 민간의 돈과 곡식을 약탈하면서 혹은 관가와 혹은 마을에서 멋대로 날뛰며 소요를 일으켜서 분수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것이 그 끝간 데가 없다고 적혀있다. 이 기록은 그가 집강소의 중심지도자로서 많은 군수품을 거두고 지주를 응징하며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하지만 우금치에서 패한 뒤 원평으로 왔으나 기다리고 있는 건 고향의 품 대신 배신이었다. 그는 안정 절골에 있는 산지기 집으로 몸을 피했다. 산지기는 폐사가 된 안정사에 부처를 모셔 놓고 무당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김씨 문중의 토호들에게 구명을 호소했으나 구명은 커녕 이들은 오히려 관가에 고발했다고 전해진다. △전봉준과의 인연그가 언제부터 전봉준이나 김개남과 만남을 이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증언과 정황 등을 통해 동학농민혁명이 있기 전부터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과 함께 고부 조소리로 이사하기 전에 원평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전봉준의 외가가 언양 김씨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원평은 언양 김씨의 집성촌이기 때문이다. 김덕명은 지식인으로 지역에서 재력을 가진 세력가였다.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그가 직접 참여한 기록은 없으나 전봉준보다 나이가 8년이나 많고 이 지역의 동학 대접주로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김덕명은 연장자로서 전봉준과 뜻을 같이 한 동지이자 물질적 후원자였던 것으로 보인다.김석태 회장은 할아버지(김홍구)의 이야기로는 전봉준 장군이 어릴적 원평에서 증조할아버지(김덕명)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물적인적 자원을 동원해 전봉준 장군을 도왔다고 말했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역사의 현장이 사라진 뒤 이것을 재현하면 역사와 단절을 수반할 수밖에 없어요. 현장을 보존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연결이고 더 나아가 미래에 동학의 정신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지요. 문화재 등록을 서둘러야 할텐데요.김석태 회장은 방치된 원평집강소를 보며 개탄스런 표정을 지었다. 현재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원평집강소는 망치질 한번에도 건물이 주저앉을 정도로 훼손됐다. 뜯겨진 천정 사이로 보이는 상량문에 光緖捌年壬午三月二十(광서팔년임오삼월이십1882년 건립) 문구만이 건물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사라져가는 역사 현장은 이뿐만이 아니다. 김덕명 장군의 생가터, 우금치에서 대패한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은 구미란 등은 각종 자료 등의 부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방치되고 있다. 당시 동학은 보편적 정서였어요. 동학농민군이나 김덕명 장군이나 불의를 참지 못해 일어났고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죠. 동학의 정신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는 현재도 살아 있어야 하고, 앞으로 미래를 살아갈 세대도 분명히 알아야 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김석태 회장의 마지막 말은 살아 있는 역사마저 천대하는 전북지역 자치단체에 경종을 울리는 듯 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3.19 23:02

[⑦ 탄소섬유복합체용 소재] 철 10배 강도…가볍고 얇게 만들 수 있어 전자부품 각광

일반적으로 차량 무게가 1% 가벼워지면 연비가 1%씩 향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동차는 사양의 고급화와 온실가스 배출규제 등으로 차체의 중량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철강을 대체할 수 있는 가볍고 우수한 기계적 강도를 지닌 탄소 복합재료가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항공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항공기의 무게를 줄이면 연비가 향상되고, 탑승인원이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또 골프채, 낚싯대, 자전거 등 레저산업은 물론 핸드폰과 OLED TV, 노트북 하우징재로도 탄소 복합재료가 널리 사용된다. 탄소섬유 복합재료는 철보다 강도가 10배 우수하고, 밀도는 1/5 수준으로 가벼우며, 고온에서의 열적 안정성과 내피로성, 내열성, 내부식성, 내화학성 등이 우수하여 우주/항공, 풍력에너지 및 국방용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복합재료는복합재료는 성질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거시적으로 혼합되어 보다 유용한 기능성을 발현하는 재료를 말한다. 자연에서는 짚으로 기초를 만들고 점성이 좋은 진흙으로 공간을 채워 만든 제비집이나, 볏짚에 진흙을 섞어서 만든 황토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이불에 풀을 먹여서 빳빳하게 만드는 것도 복합재료의 일종이다. △기지재의 종류 탄소섬유복합재료의 기지재(Matrix)로는 고분자 물질이 많이 사용된다. 크게 열경화성(Thermalset)과 열가소성(Thermalplastic)으로 나눌 수 있다. 열경화성 수지로는 에폭시 수지, 우레탄 수지 등이 있으며, 주제와 경화제가 혼합되어 경화라는 반응이 일어난다. 반면 열가소성은 나일론 열가소성 폴리에스터, 폴리아세탈 등으로 열경화성 물질과 다르게 단독으로 사용된다.열경화성과 열가소성의 가장 큰 차이는 경화(가교) 반응의 유무라고 할 수 있다. 열가소성 수지는 열을 가하면 녹아 흐르는 현상(melting)이 일어나지만, 열경화성 수지는 열을 가해도 녹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고 고온에서 탄화현상이 발생한다. 또 열경화성 수지는 열에 강하고 내화학성 및 물리적 특성이 우수한 반면에 재활용이 어렵고 생산시간(경화시간)이 필요하다. 열가소성 수지는 녹여서 재활용 할 수 있지만, 열에 약하고 내화학성이 취약하다. 따라서 복합재료의 용도에 따라 사용하는 고분자 물질을 다르게 해야 한다. △고압 RTM탄소섬유 복합체 제조에 주로 사용되는 에폭시 수지는 물성 및 내화학성, 특히 열에 강한 내산성이 우수하지만 경화 반응을 하기 위한 추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량 생산에 걸림돌이 되어 왔다. 최근에는 이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인 고압-RTM(Resin Transfer Molding) 성형법이 사용되고 있다. 높은 압력으로 주제 및 경화제를 균일하게 섞어 혼합 시간을 단축하고 경화반응 시간을 줄일 수 있어 생산 단가와 공정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이러한 제품은 공정뿐만 아니라 고분자 물질과 함께 개발 되어야 효과가 있는데, 최근에서 경화시간을 단축시키면서도 기존 제품에 비해 고온에도 견딜 수 있고 화재 때 불에 타거나 번지지 않는 난연성의 고기능성을 부여하였다. 이는 자동차 산업에서 대량 생산뿐만 아니라 전기 전자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전자제품 활용최근 전자 제품 트렌드는 모빌리티(이동성)다. 성능은 올라가면서 디자인은 더욱 미려해야 하고, 무게는 가벼워야 한다.특히 TV, 모니터, 핸드폰, 태블릿 PC 등 디스플레이 분야의 경우, 다양한 기능을 부여하기 위해 많은 부품들이 들어가지만 제품의 무게는 감소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기존에 사용하고 있는 부품을 가볍고 얇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중 주목받고 있는 재료가 탄소섬유복합체이다. 탄소섬유복합체는 철과 비교할 때 무게 및 비중은 낮아도 높은 강도를 가지며, 기존 플라스틱 물질과 비교하면 월등히 좋은 물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얇게 적용할 수 있다. △OLED TV와 울트라 경량 노트북최근 LG전자에서 발매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의 경우, 탄소섬유복합체를 적용해 4.3mm의 초슬림 두께와 17kg(55인치 기준)의 경량 디자인을 구현했다. 곡면형 OLED TV에서 탄소섬유복합체의 채택은 더욱 강하고 가벼운 장점을 극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레노버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 2014에서 탄소섬유복합체를 적용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노트북을 공개했다. 화면의 크기는 14인치인데 무게는 1.27kg에 불과한 울트라북 X1 카본이 그것이다.현재 출시되고 있는 OLED TV 뒷면 커버에는 프리프레그(Prepreg : 에폭시수지를 탄소섬유에 미리 함침시킨 시트형태의 중간제품)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프리프레그를 적층하여 만드는 공법은 성형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기존 휴대전화 및 모니터 하우징도 일반 RTM 공법으로 제품이 생산되고 있으나, 가사 시간 및 경화 시간이 오래 걸려 생산단가가 높고 대량생산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일부 업체들은 앞에서 언급한 고압-RTM 공법을 이용한 제품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앞으로의 과제전자재료분야에 탄소섬유복합체를 적용하기 위해 에폭시 수지가 가져야 하는 특징은 난연성이다. 난연성은 또 다른 말로 자기소화성이라고 한다. 불이 붙었을 때 몇 초안에 꺼지느냐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예전에는 할로겐계열 난연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이는 화재 때 유독 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사용이 점진적으로 제한되고 있으며, 할로겐 함량이 없는 난연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다. 또한 에폭시 합성 때 에피클로린하이드린이란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에폭시화를 하기 때문에 클로린이란 물질이 잔존하게 되는데 이 또한 함량을 제한받기 때문에 클로린이 함유되어 있는 부가 물질을 제거하는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탄소섬유복합체는 경량화라는 장점으로 인해 전자제품 부품용으로 사용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또 국내 전자제품의 부흥으로 인해 휴대전화 케이스, 테블릿 PC 등 타 제품으로 적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 기획
  • 이성원
  • 2014.03.18 23:02

남원 출신 설영주 한전원자력연료(주) 상임감사 "공기업 방만 경영 개혁 때 직원들 공감대 중요"

공기업 이사장이나 감사 등 임원은 신이 내린 직장중에서도 가장 선망받는 자리다. 많은 권한과 혜택이 주어지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감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공직사회나 사기업에 비해 오늘날 공기업에 많은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 방만경영이나 도덕적 해이에서 비롯된다.현 정부들어 대통령부터 공기업 개혁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도 이러한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다.경영 투명성 확보와 윤리경영을 위한 해법을 찾기 위해 설영주 한전원자력연료(주) 상임감사(61)를 대전 유성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전원자력연료(주)는 정부 재투자기관으로, 핵연료의 국산화와 핵연료 주기기술의 자립을 위해 1982년 설립된 국내 유일의 핵연료 설계 및 제조 전문회사다. 쉽게말해 국내 23기의 원자력발전소에 소요되는 핵연료를 독점적으로 생산, 공급하는 회사다.-원자력 연료(핵연료)가 우리 국민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향후 국가차원에서 어떻게 관리하고 육성해야 한다고 보십니까.에너지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가 오늘날 선진 경제대국으로 발전하고 국민들이 잘 살수 있게 된 것은 전력산업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이는 화력발전과 함께 큰 축을 이룬 원자력발전이 그 원동력이 됐습니다. 수입한 우라늄을 이용해서 우리 회사(KNF)가 설계하고 제조해서 원자력발전소에 공급하는 원자력연료(핵연료)는 우리나라 전력에너지의 40% 이상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소결체 1개에서 생산되는 전기량은 약 1,800 KWh로써 1가구의 8개월 사용량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5위의 원자력발전 국가이고 원전 수출국이지만 경제 발전과 비례하여 향후 에너지 수요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입니다.-원전이나 원자력 하면 무조건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원전의 안전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국내 원전업체의 성장중심 과정 속에서 일부 직원들의 도덕성 상실로 국민들에게 실망을 드린 것도 사실입니다. 원전은 위험성을 철저히 통제하고 안전하게 운영 관리할 수만 있다면 풍요로운 인류사회 및 경제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에너지 자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도 원전의 안전과 쇄신을 강조하신 바 있는데, 천만다행으로 우리나라의 원전은 이러한 자연재해에도 시설들이 안전하게 운용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조치가 잘 돼 있습니다.-감사로서 재임하는 동안 가장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어떤게 있을까요.흔히 감사라고 하면 적당히 월급이나 받고 누리는 자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3년 전 감사에 부임하자마자 개혁을 위해 뛰고 또 뛰었습니다. 작년 7월 무려 3000만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국부의 해외유출을 막은 일이 있습니다. 미국 원자력 기업인 웨스팅하우스(WEC)를 상대로 원자재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전체 비용의 10%인 3000만달러(한화 약 300억원) 이상을 절감한 것이죠. 외람되지만, 우리 회사가 설립된 32년 역사에서 최고의 성과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과거 전량 수입에 의존해 온 증기발생기 전열관의 예비타당성조사 정부과제 탈락 상황에서 제가 직접 나서 기획재정부, KDI 관계 심의위원을 대상으로 설득해서 국산화 토대를 만들고 일자리 창출을 한 사례도 기억에 생생합니다.-그런 노력들은 회사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추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저항이 있었을 듯 합니다.흔히 개혁하는 게 혁명하기보다 어렵다고 하죠. 회사의 방만경영을 개혁하고 조직의 능률적인 개혁쇄신이나 고품질의 안전한 원자력연료를 생산, 공급하자는 원칙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이해관계 등에 얽매여 선의의 시도와 노력에 대해 끝없이 저항하는 현상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원전산업의 수출 강국 도약을 위해 사심 없이 청렴성의 정신으로 리더십과 역량을 발휘하려 밤잠을 설쳤습니다. 나 개인을 위한 일이 아니고, 회사와 조국을 위한 일이라고 설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정확한 원칙을 고집했습니다. 경영 투명성과 철저한 감사직무 수행, 전방위적 경영쇄신 및 개선활동에 이젠 모두가 인식을 함께하고 있고, 감사 기능이 단순히 트집을 잡는 게 아니고,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는데 이젠 공감하고 있다고 봅니다.-요즘 정부 차원에서 방만경영 해소를 위한 제도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이미 직원 MV활동(체력단련의 날)을 폐지하는 등 자구노력을 벌써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노사합의하에 비생산적비효율적으로 시행해 오던 매달 해오던 체력단련의 날 행사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11억7000만원을 줄인 것입니다. 경영관리본부장 직속 기구로서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건설 관리팀에 대한 조직편제를 직속기구에서 분리해 신규사업단으로 개편토록 했고, 건설공사 업무에 대한 전반적 직무감사 실시 및 업무 부조리 근절 활동을 펼쳤습니다. 2016년까지 건설되는 핵연료 성형가공시설 증설(제3공장)과 논산플랜트(NSA)등 2개의 대형공사를 포함, 공사과정 전후에 있을 수도 있는 부조리 예방과 안전한 시공에 주력하고 있습니다.-끝으로 도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지만, 한번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전북은 도세와 경제구조는 취약하지만, 이를 상쇄하고 남을 문화예술 자원들이 많습니다. 조선왕조의 기반을 이룬 전통문화는 물론, 새로운 경쟁력을 지닌 아이템들이 다른 시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주 한옥마을의 성공사례는 물론, 순창의 장수연구소, 남원의 김병종 화백 미술관 같은 경우는 미래 문화자원의 하나입니다. 전통문화와 창조적 문화를 하나로 엮어내는 것이야말로 전북의 발전 대안이 될 것입니다. 전북이 문화를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육성해서 크게 번성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전세계적인 추세가 원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도민들께서도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환경친화적인 원전 연료가 공급되고, 사용될 수 있도록 항상 관심을 가져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설영주 감사는 공공기관 개혁 '전도사' 감사 전문성 '자타공인'공기업 개혁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한전원자력원료(주) 설영주(61) 상임감사는 남원에서 출생, 남원초용성중전주제일고(옛 전주상고)를 졸업한뒤 상경, 19세에 서울시에서 공직을 시작했다.군대를 마친후 뒤늦게 단국대학교에 입학, 1982년 단국대 총학생회장과 전국대학 총학생회장연합회 회장으로서 본격적인 학생 운동권 활동을 펼쳤다.대학원 졸업 후 당시 장충식 단국대 총장의 배려로 같은 대학 산업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제13대 국회의원 총선 때 집권여당인 민정당 최연소 후보로 서울 성동을에서 출마했으나, 차점득표에 그치며 낙선했고, 14대 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후 정치 활동을 접은 그는 지역 사회의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봉사 활동을 펼쳐왔다.인컴코리아를 설립, 중소기업 경영자문 활동을 했고, 바른사회 시민회의 발기인 및 운영위원, 새만금 국가사업 추진을 위한 지원활동, 역사문화유적 보존활동을 해왔다.3년전 주변의 추천으로 한전원자력원료 상임감사로 발탁돼 다양한 정책활동 경험을 살려 단순한 견제감시 기능에 그치지 않고 경영 활성화를 위한 성과를 일궈냈다.그는 타고난 지도력을 인정받아 대전감사협의회 회장, (사)한국감사협회 부회장, 한국원자력학회 평생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감사인과정을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할만큼 감사로서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군림하지 않고 근로자들과 함께 어우러져 현장을 누비는 성품으로 인해 1000여명의 직장 동료 모두와 형님아우하면서 지낼만큼 격의없는 사람으로 통한다.

  • 기획
  • 위병기
  • 2014.03.17 23:02

[(10)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최경선 장군] '생묘' 남긴 선봉장…후손들 "농민군 국가유공자 대접을"

마님, 더는 못 가겠습니다요. 조금 쉬었다 가시지요.지게를 진 장정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했다. 다 떨어진 짚신, 여기저기 때가 묻은 남루한 옷, 눈 밑의 짙은 그늘.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것 같은 모양새였다.하지만 마님은 고개를 저었다. 한 시라도 빨리 고향 땅에 당도해 일을 마무리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호통을 쳤다.지금 때가 어느 땐데 엄살을 부리느냐?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가자.주저앉았던 장정은 아무 말 못하고 슬금슬금 다시 일어섰다. 주저앉아 쉬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고, 지금은 그 때가 아니었다. 장정이 짊어진 것은 사람의 주검이었다. 그들은 반역죄로 처형당한 주검을,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수습해서 고향 땅 태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때는 1895년 을미년, 동학혁명군 영솔장 최경선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5대 장군 중 유일하게 생묘 남겨여기가 축현마을이에요. 저기 왼쪽에 보이는 산이 조왕곡이라는 덴데, 최경선 장군 묘역이 저기 있어요.정읍 시내에서 제3산업단지를 끼고 동쪽으로 달리다 들어선 길에서, 최경선의 손자인 최명언 정읍유족회 회장이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원래는 더 높은 곳에 있었는데, 묘역을 조성하면서 접근성을 높이려고 이장했어요. 동학 연구자나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니까.묘역 가는 길은 콘크리트로 단단히 포장돼있었다. 이 묘역은 1996년에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성금을 모아 조성했다.지자체의 외면 속에서도 유족회, 시민단체, 개인 등으로부터 약 5000만원을 모아 뗏장을 덮고 묘비를 세웠다. 민예총 소속 조각가 김운성에게 의뢰해, 죽창 든 농민군을 형상화한 조형물도 세웠다.조형물이 총 11개인데, 우리는 12개라고 말해요. 사실 묘역에 두는 조형물을 홀수로 세우는 경우는 없거든요. 그건 일부러 그런 거예요. 나머지 하나는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혁명정신이라는 거죠.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그런데 최경선 묘역만 이렇게 잘 정돈돼 있는 이유가 뭘까?이 이사장은 묘역을 처음 조성할 때에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특히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다른 인물의 유족들이 항의를 많이 했다고 한다.이 이사장이 그들을 납득시킨 단 한 가지 근거는 바로 생묘라는 점이었다.당시에는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다 역적이었고, 그래서 다들 무서워서 시신을 제대로 수습을 못했죠. 그런데 최경선 장군의 시신만은 성균관 진사를 지낸 형님이 하인들을 대동해서 모시고 온 겁니다.최경선의 형 영대는 산길로만 며칠에 걸쳐 시신을 운반해온 뒤 몰래 묻었다. 그리고 그 위치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오로지 족보에만 한 줄 적어 넣었을 뿐이었다.최명언 회장조차 직접적으로 전해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가 조상의 묘소를 찾은 것은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족보에 적힌 위치를 직접 찾아본 뒤였다.△사발통문 작성부터 함께했던 핵심 인물1859년에 태인에서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최성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최경선은 밑바닥 계층으로서의 농민과는 거리가 멀었다.당시 태인의 전주 최씨 집안은 상당한 부호였다. 맏형 영대는 성균관 진사였고, 최경선은 벼슬길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학식을 갖춘 엘리트였다.그랬던 그가 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다만 1889~1890년 사이에 전봉준과 만나 교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혁명에 대한 생각을 품어왔다고 추정할 수는 있다.1895년에 이루어진 재판의 기록물인 전봉준 공초에는 너는 최경선과 친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는가?라는 질문에 전봉준이 동향이므로 서로 친한 것이 5~6년이 된다고 대답한 대목이 있다.또 최경선에 대한 판결을 적은 제30호 판결선언서에는 전봉준의 모주(謨主음모를 꾀한 주체), 고굉(股肱팔과 다리)이 되어 종시기사(終時其事)에 참여라는 표현이 나온다.이로 미루어볼 때, 최경선은 거사를 구상하는 단계에서부터 전봉준과 함께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당시 다른 양반 지주층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거나 아예 반농민군 활동을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사발통문에도 이름을 올린 그는 태인 지역에서 동학 교인들을 모아 전봉준과 함께 1894년 1월 10일(음력) 고부봉기를 일으켰다.3월 백산봉기 이후에는 영솔장(군사를 직접 거느리며 지휘하는 선봉장)으로서 농민군을 이끌었다. 황토현에서의 승전을 시작으로 전주성 점령에 이르기까지 농민군 진격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2차 봉기 때, 전봉준의 주력부대가 공주 방면으로 북상하자 최경선은 휘하 부대를 이끌고 손화중과 함께 광주로 향했다. 나주에서 수성군과 공방전을 벌이던 그는, 전봉준 부대가 우금치, 태인에서 연패하고 해산한 뒤에도 동복, 남평 등지를 누비며 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그러나 결국 동복 벽성리에서 밀고로 붙잡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처형됐다.최경선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아들이 있었지만 어려서 사망했고, 딸도 있었지만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그의 시신을 수습한 형 영대는 그의 여섯째 아들 종식(족보상 이름은 헌규)을 장군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최명언 유족회장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남은 자의 섭섭함최경선은 이렇게 동학혁명의 전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동학사를 정리한 오지영이 5대 장군으로 평가했던 인물임에도 세간의 인지도는 높지 않다.교과서에도 전봉준이나 손화중, 김개남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최경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최명언 회장은 물론 섭섭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그는 국가가 대우하는 것부터가 미흡하다고 말했다. 2004년에 제정된 특별법에 의해 참여자라는 지위는 받았지만, 여전히 국가유공자로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기념일 제정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도 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자는 논의가 시작된 지는 오래됐지만, 혁명정신을 제대로 기리자는 뜻이 지자체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서, 논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있다.이렇게는 안 되는데.다시 갑오년을 맞은 감회를 묻자 그는 동학혁명이 잘 알려져야 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남은 자의 섭섭함이 진하게 배 나오는 목소리였다.

  • 기획
  • 권혁일
  • 2014.03.12 23:02

취임 두달 양갑수 중소기업중앙회 전북본부장

양갑수 중소기업중앙회 전북지역본부장이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지난 1월 1일 고향 전북으로 돌아와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주시 팔복동에 있는 중소기업중앙회 전북지역본부 본부장실에서 그를 만나 취임 소감과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어봤다.-어느덧 취임한 지 두 달이 넘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첫 근무인데 먼저 소감은.“올해 취임 후 전북 지역 중소 기업인들을 많이 만났지만 대부분이 올해를 희망적인 한해로 전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6·4 지방선거와 관련해 도내 중소기업이 희망을 갖고 생산 및 경영 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방안 가운데 하나로 도내 중소 기업인과 협동조합, 여론 선도 기관 등의 목소리를 담은 ‘전북 지역 중소기업 희망 메시지’를 제작하고 있습니다.”-도내 중소 기업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여기에서 ‘희망’이라는 것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내부적인 소비만을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즉 타 지역 사람들이 유입된다거나 외부 기업 유치를 통한 산업의 활성화, 인재의 영입 등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전북 지역의 국제적인 혹인 전국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전주국제영화제나 새만금 사업 등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행사 기간에 도내 중소기업 관련 전시회 등을 개최해 외부 젊은 인력이 전북 지역에 와 자연스레 창업 활동을 하고, 취업을 할 수 있도록 포석을 마련하는 것입니다.”-지방자치단체나 중앙 정부와의 연계성이 중요할 듯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논의 사항이 있습니까.“지금도 전북도의 일자리, 기업 관련 부서와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구체적인 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새만금 지역을 활용한다면 큰 예산의 소요 없이 전국의 인재들이 부담 없이 창업 및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는 랩(Lab)형식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기업 및 외자 유치 시 만드는 대규모 센터의 선결 허가 조건으로 일정 지역 내에 창업·벤처 개념의 랩을 추가로 구성하는 것을 옵션(Option)으로 넣는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당장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허가 조건으로 랩 형식의 공간 구축이 가능한 측면이 있습니다. 건축 설계를 할 때 일부 공간에 젊은이들이 자연스레 창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는다면 어느 지역, 대학에 상관없이 아이디어만 있다면 소액의 비용으로 창업을 할 수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입니다.”-전북 경제의 미진한 부분은 어떤 점이며, 중소기업중앙회가 올해 핵심 사업으로 추진할 분야는 어느 영역입니까.“어떤 분은 전북 지역을 농업 도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농업의 선진화와 더불어 산업의 선진화도 필요합니다. 단순히 농업 도시이기 때문에 산업을 도외시할 것이 아닌, 산업 부분에서도 첨단을 달릴 수 있는 변화가 요구됩니다. 독자적으로 중소 벤처나 정보 기술(IT) 타운을 만들어 젊은 인력이 도내에 유입되도록 공략해야 합니다. 이제는 계속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닌 젊은 인재 영입을 통한 최첨단 산업의 융성을 이뤄야 합니다. 이 속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앞선 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젊은 인재들이 전북에 모이게 하는 것이 산업의 낙후성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제조업, 유통업, 요식업 등 중소기업을 구성하는 분야는 많지만 이 속에서 전북에서 정말 필요한 영역은 첨단과 벤처, IT, 바이오 등의 신(新)산업입니다. 다양한 연구 인력이 도내에서 부담 없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드는 데 중소기업중앙회 또한 최선을 다할 것 입니다.”-앞서 언급하신 벤처나 IT 타운 조성 시 중소기업중앙회는 어떤 역할을 차지하는 것인가요.“중소기업은 기본적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습니다. 중소 벤처 타운으로 표현한 이유도 공동·집적·협동의 부분을 접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이라는 표현 자체도 올드(Old)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벤처나 최첨단의 느낌으로 간다면 한결 신선한 분위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금지원보다는 젊은 인재가 도내에서 활동할 때 발생하는 애로 사항을 옆에서 같이 체계화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요 근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서로 다른 두 종류 이상의 것을 섞어 새롭게 만든 퓨전(fusion)입니다. 새로운 기업이 함께 소통·협력할 수 있는 매커니즘(mechanism)을 구축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전북도와 협의해 자체적으로 시설을 운영하게 된다면, 이를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본부장님 저서(著書)의 특징을 보면 공공구매 쪽에 관심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공공구매 분야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얘기할 정도로 오래 활동했습니다. 공공구매는 판로 부문의 인큐베이팅(incubating)입니다. 개별 기업이 직접적으로 일반(민간)시장에서 경쟁을 하는데 후발주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공공시장에서 우선적으로 인큐베이팅처럼 일정 부분 구매를 통해 자신감을 얻게 하고 제품에 대한 질 측면을 조정하게 합니다. 전통 제조업 부문에서는 전북 지역의 구매력이 크지 않습니다. 지역의 제품 구매를 통해 구매력이 커지고 일자리 창출, 지역민의 고용, 소비의 활성화 등 선순환 구조가 생성됩니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지역의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끝으로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현장에서 발로 뛰면서 바라보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지역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업인 스스로 요구해야 합니다. 최첨단 산업 및 해외 산업 기술의 동향을 수시로 체크하고 습득해 자신에게 접목시켜야 합니다. 못 따라가더라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지역 제품들이 당장 효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타 지역은 외국에 법인을 설립해 그 지역 제품의 판로를 열어 주고 있습니다. 전북도도 바이(Buy)전북 제품을 직접 미국 현지에서 수입할 수 있도록 현지법인이 설립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갑수 본부장은 남원 출신 최연소 본부장 수출 지원정책업무 달인중소기업중앙회 양갑수 전북지역본부장(46)은 남원 출신으로 조직 내에서 최연소 지역 본부장으로 승진한 케이스다. 중소기업중앙회 입사 후 줄곧 중앙회 본부에서 근무했고 올해 1월 1일자로 전북지역에 내려와 고향에서의 첫 근무를 하고 있다.양 본부장은 공공구매 분야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고 통상 정책 FTA(자유무역협정)나 무역협정 WTO(세계무역기구) 등 수출 지원 정책 업무의 전문가로 통한다.서울 상문고와 한성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원 석사(사업관리학)와 건국대학교 박사 학위(경영학)를 받았다.지난 1995년 중소기업중앙회에 입사해 공동사업부 과장과 단체수의계약제도개선팀 과장, 공공구매지원팀장과 국제통상실장, 통상정책실장 등의 주요직을 역임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근무 당시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평가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공공구매 제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우리 회사 제품 정부에 팔아먹기(2004년)’와 ‘공공구매 제도의 변천(2011년)’등의 관련 저서를 냈다.또 해외 통상 전문가로 남다른 활동을 해 2001년 대통령 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 표창과 2002년 중소기업청장 표창, 2008년 국무총리 표창 등을 받았다.앞으로 협동조합 및 중소기업의 발전과 더불어 전북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문민주
  • 2014.03.10 23:02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주민설명회 "형식적"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건설 주민설명회에 대해 주민들이 형식적인 설명회라며 발끈하고 나서 진통이 예상된다.한국도로공사는 6일 전주시 삼천3동 주민센터에서 서학동과 평화2동, 삼천3동 주민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만금 고속도로 노선선정에 따른 주민 의견 청취를 위해 설명회를 개최했다.그러나 설명회에는 아무런 자료도 제시되지 않은 채 관계자들은 노선에 대한 설명만 늘어놨다.이에 주민들은자료 하나 없이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구체적인 내용을 하나도 알 수 없다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설명회를 추진하는 배경이 뭐냐며 강력히 항의했다. 급기야 일부 주민들은 설명회장을 빠져나갔다. 논란이 일자 도로공사 관계자 등은 급히 도면을 복사해 나눠 주고 프로젝터에 띄웠다. 그러나 건설될 고속도로 구간을 소개하는 것 외에는 별도의 설명은 이뤄지지 않은 채였다. 일부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공사를 추진하려는 속셈 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 A 씨(39)는 마을별로 설명회를 진행해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이런 형식적인 주민설명회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며 주민들의 기본적 의사를 묻기보다는 이렇게 공사를 한다는 단순 소개에 지나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트렸다.이어 진행된 설명회에서는 순천~완주고속도로와 교차하는 완산분기점(은석마을 인근) 위치, 국도 21호선과 새만금~전주 고속도로 간의 높낮이 차(6.5m), 소음발생 등의 여러 문제점이 지적됐다.총 1조8000억원이 투입돼 김제 진봉면~완주 상관면을 잇는 총연장 55.8km의 새만금~전주 고속도로는 현재 기본설계 용역 중으로, 이날 도로공사는 최근 작성된 초안에 대한 설명회를 열었다.도로공사는 오는 12월께 최종 노선을 확정하고 기본설계에 들어갈 예정이다.구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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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나네
  • 2014.03.07 23:02

일제 침탈 사료 찾기 나선 군산 동국사 주지 종걸 스님

지난 설 연휴, 근대문화유산이자 국가등록문화재인 군산의 사찰 동국사가 빗장을 걸었다. 절집 문을 연지 100년여 만에 처음이었다. 내막가거 왕막가추(來莫可拒 往莫可追 ). 사람을 피해 산속 깊이 들어가 살았던 9세기 선승 법상(法常)도 문하에 들고자 몰려오는 수많은 제자들을 내치지 않고 들어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잡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산문을 폐쇄했다면 예삿일이 아니다. 평일이면 300~400명, 주말에는 1000명도 넘게 들른다는 이곳 동국사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때마침 설 연휴를 맞아 찾아왔던 수천 명 관광객들이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은 절집뿐만이 아니었다. 근대문화유산 도시로 관광의 이미지를 높이겠다는 정책이 무색해지면서 더 난감해진 것은 군산시였다. 사실 동국사의 산문 폐쇄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절집 시설은 훼손되고 쓰레기는 쌓였다. 국가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보호도 낙관할 수 없게 됐다. 동국사는 관리의 어려움을 시에 호소했지만 묵묵대답이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산문 폐쇄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던 셈이다. 더 이상 관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산문을 닫는 것 밖에 답이 없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동국사를 여러 해 째 홀로 지켜온 종걸스님의 결의는 단호했다. 그러나 빗장을 건지 5일이 채 안되어 산문은 열렸다. 시가 대책 마련에 나선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어지는 관광객들의 걸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국사는 왜 주목받는 사찰이 된 것일까. 동국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우리나라에 세웠던 500여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이다. 일본의 조동종(曹洞宗) 사찰로 지어져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조계종 선운사의 말사로 등록됐다. 외관 장식이 없고 창문이 많은 대웅전은 건축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동국사의 이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동국사의 이력이 새롭게 더해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자료가 발굴되고 내용이 공개되는 과정에서 일제 침탈 자료 수천점이 수집됐다. 그만큼 침탈의 역사는 더 명료해졌다. 학계도 주목하게 된 이 역사의 기록을 찾아내고 정리해 일제 침탈의 역사를 우리 앞에 내놓은 사람은 놀랍게도 역사학자가 아닌 동국사 주지 종걸스님이다. 인터뷰가 있던 날, 스님에게 보내온 택배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서 보은감사(報恩感謝)라고 새겨진 도시락이며 일장기, 수공예품 등이 쏟아졌다. 모두가 일제강점기 자료들이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던 스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것 참, 이렇게 철저하게 식민사관을 심었으니. 고작 60년 밖에 안 된 역사인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정말 큰일이에요. 스님의 소리가 높아졌다. -어디서 온 자료들인가요. 경매에서 사들인 거예요. 내가 옥션을 하거든. 옥션 하는 스님은 낯설죠?(웃음) 그런데 할 수 없어요. 자료를 구하려면 이런 통로가 아니면 어렵거든.-자료의 진위를 가리는 일이 쉽지 않겠는데요. 인터넷 옥션으로 하시다보면 더 그렇겠구요. 그래서 경매 현장에 가능하면 직접 갑니다. 자료 내용도 꼼꼼히 보고 제대로 된 자료를 가릴 수 있으니까요. 그동안 많은 자료를 접하다보니 이제 눈에 들어와요. 가치가 있는 자료인지 진품인지.-수집한 일제강점기 자료들이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 많은 자료를 모으신 건가요.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자료 중 일제강점기 것만 5천점 정도 되는데 침탈사 관련해서는 양적으로도 그렇지만 꽤 의미 있는 사료들이죠. 그중에는 일본 아오모리현의 조동종 운상사 주지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이 보내준 사료도 적지 않습니다.-이치노헤 스님은 지난해 조선 침략 참회기란 책을 내셨죠. 조동종이 일본의 조선 침략과 조선인 황민화 정책에 얼마나 깊숙이 개입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내는 이 책의 내용을 보고 스님의 용기에 감동 받았습니다. 스님과의 인연이 궁금하군요.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가 일본 조동종을 알게 되었어요. 일제강점기 침탈 사료를 수집하다보니 연구자들과도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한 스님을 소개받게 되었지요. 스님은 저의 일제자료 수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어요. 일본에는 아직도 그런 자료가 많이 있어서 뜻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거든요.-2012년 동국사에 참사문비를 건립한 것도 그런 인연 덕분이었겠군요.일본 불교의 종파인 조동종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이치노헤 스님은 자신이 속한 조동종의 그러한 과거 역사를 검증하고 사죄하는 일을 해왔죠. 중국과 우리나라를 답사하고 조동종의 전쟁 조동종은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가란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스님이 해온 일을 들여다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동국사로서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동국사에 세워진 참사문비를 보면 침탈을 사죄하는 내용이 절절하던데요. 그 참사문이 20년 전에 조동종 종무총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공식 문서라면서요. 이치노헤 스님도 그 문서를 보고 일본 불교가 본연의 자리에서 벗어나 침탈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동국사의 이력을 찾다가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까지 만들어 큰 힘을 주는 이치노헤 스님께 그 참사문을 새겨 동국사에 건립하는 것을 제안해 참사문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제막식에는 양심 있는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도 참가했었는데, 지금 일본에서는 그것 때문에 스님이 곤욕을 치르고 있어요. 조동종 본부에서 참사문비 철거를 요구하고 있거든요.-아베 신조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하겠죠. 일본 우익세력의 준동도 이제 도를 넘어선 것 같던데 이치노헤 스님 같은 분들이 겪을 고통을 짐작할만합니다. 그렇지만 스님은 웬만한 압력과 협박에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작년 부산에 갔을 때는 일본 영사관 관계자로부터 한국입국이 제한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스님의 의지는 더 결연해졌어요. 저도 스님 덕분에 일제의 조선침탈 뿐 아니라 중국침탈에도 눈을 뜨게 되어 해마다 남경학살 추모식에도 동행합니다.-스님은 어떻게 일제침탈의 역사에 주목하게 되었습니까.제가 동국사에 온 것이 2005년입니다. 그해에 대웅전 남쪽 범종 명문을 탁본했는데, 내용을 보니 단재 신채호 선생이 떠오르더군요.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과거역사라고 해봤자 고작 60여년 지난 일인데, 이 사찰이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주지는 누가 거쳐 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거예요. 한 줄의 글도, 한 장의 사진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 저를 움직이게 했지요. 일본 사찰로는 유일하게 남은 이 절을 통해 일제 식민지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만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동국사의 의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자료 수집에 나섰어요.-불과 60여 년 전 역사라고는 하지만 자료 찾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실제 전국을 다니면서 보니 대부분 훼손되었거나 멸실되었더군요. 특히 전라북도 안에는 일제 사료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에는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드나들기도 쉽지 않고 경비도 부담이 되었어요.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하나씩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습니다.-전북에 일제 강점기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군산을 비롯해 수탈의 기지였던 전북이야말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더군요. 해방되던 해에 전북에서 모든 자료를 15일 동안 소각했다는 기록을 철수작전이란 일본 자료에서 보았습니다. 공장과 관공서 소각장에서 태웠는데, 일주일동안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을 정도로 많은 양을 태웠다고 합니다. 당시 도청의 국장급 정도 되는 일본인 관료가 진행한 일인데, 이 사람이 각 시군에 자료를 다 태우라고 지시를 내렸더군요. 전북에 유독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 싶었죠. -그럼에도 스님은 많은 양의 사료를 수집했으니 근대문화유산도시를 표방한 군산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제 침탈사와 관련한 사료로는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양으로도 그렇지만 질적으로도 괜찮은 사료들이 많습니다. 다만 아직은 개인적으로 수집한 것들이어서 공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사실은 이제 보관의 문제도 심각한 지경이에요.-우선은 그렇게 많은 사료를 보관하는 일이 어렵겠는데요. 자치단체나 대학에서 이런 사료들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 뜻밖입니다. 자치단체에 무상기증의 뜻을 밝혔는데 합의되지 못한 조건이 있어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일제 침탈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은 전시공간을 동국사 근처에 마련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야 동국사가 갖고 있는 상징성, 역사적 의미가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거창한 박물관 같은 시설이 아니고도 제대로 시설만 갖춘 전시실이면 좋겠어요. 그런데 자치단체로서는 그것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한편에서는 이런 사료들을 특정 종교에 대한 지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지요.-연구자들이 주목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혹시 다른 지역이나 기관에서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을까요. 다른 지역으로 넘어갈까 걱정도 되는군요. 올해 성균관대에서 예산을 세워 일부 사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이죠. 사실 사료라는 것이 무조건 수집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그동안 몇 차례 기획전시를 했는데 개인적으로 역부족이었어요. 전시공간이 없어 법당 한쪽에 전시장을 마련했는데 시설은 변변치 않지만 아쉬운 대로 전시는 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올해는 신사와 군사 자료를 전시합니다. 제 바람은 동국사 근처에 전시실을 마련하는 것이니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지난 설 연휴에 산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여건이 좀 나아졌습니까. 그런 결정을 내릴 때는 얼마나 답답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겠습니까. 화장실은 시도 때도 없이 고장이 나고 언제 어떤 시설이 훼손될지도 모르겠고, 쓰레기는 쌓이고 도저히 그대로는 안 되겠더군요. 절박한 심경으로 내린 최후통첩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몇 가지 대책을 시가 세운다니 기다려봐야죠.-군산은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까지 조성하면서 근대문화유산의 도시로 가꾸어나가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는데, 그 상징적 공간인 동국사의 존재를 주목하지 않는 상황은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초 근대역사문화경관지구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참 황당했었어요. 내부적으로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 침탈의 역사가 중심이 되는 사업이라면 동국사는 중요한 공간이잖아요. 치욕의 역사도 역사입니다. 후손들이 그런 역사를 기억해 오늘의 교훈으로 삼게 하는 일이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스님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신다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하면서 일본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그러니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일본강점기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가 남긴 연설 내용을 보세요.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우리(일본)는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조선인은 분열하기 좋아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이간질하기 좋아한다.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정말 섬뜩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거기 있습니다.-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일본의 아베 총리는 아베 총독의 손자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군요. 물론입니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일본 관료들의 역사관을 보세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은 정말 어처구니없잖아요. 게다가 최근에 있었던 우리의 교과서 왜곡사건은 또 어떻습니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는 이 치욕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일은 일제강점기 역사를 직시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실질적인 사료를 찾아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깨우쳐주는 일이 중요해요. 제가 사료수집을 중단할 수 없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동국사는 종걸스님을 만나 제 역사를 찾았고, 스님은 동국사를 만나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에 눈을 떴다. 동국사는 조계종 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다. 스님이 동국사에 머무를 수 있도록 확정된 시간은 앞으로 3년이다. 그래서 스님은 마음이 조급해진다고 했다. 동국사 근처에 일제 침탈사 전시관을 마련하는 일이 과제로 안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을 바로 세웠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스님은 믿고 있다. 그 믿음이 곧 희망이다.● 종걸 스님은 - 40대에 출가2005년부터 동국사와 인연종걸스님의 고향은 경남 함양이다. 어린 시절 그는 외갓집에 살았다. 외할아버지는 학문에 관심이 커서 집에 서당을 차리고 선생을 모셔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게 했다. 스님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깨너머로 서당공부를 했다. 정자문화가 꽃피었던 함양은 마을 가깝게 흐르는 강위에 정자가 유독 많았으며 강과 정자를 잇는 암벽에는 암각화가 이어졌다. 고향의 풍요로운 문화와 분위기를 좋아했던 어린 시절, 같은 또래와 어울리기 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다. 아버지는 과거급제한 집안의 장손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라 중학교 졸업할 즈음 교육을 위해 거창에 살림을 냈다. 기독교 계열의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스님이 되는 길을 선망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행자생활을 1년 정도했지만 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고등학교 학력은 갖추어야 스님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왔다. 그러나 절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요원해졌다.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을 했지만 몽중몽(夢中夢)이라, 모든 일상의 꿈이 절집에 닿아있었다. 인생에 큰 변곡점은 없었으나 꿈을 꾸어도 절집에 있는 꿈을 꾸었고, 몽상을 해도 산속에서 노는 삶을 상상했다. 속세의 삶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40대에 출가를 결행했다. 그때서야 집안에서도 진즉 풀어줬어야 할 일이었다며 받아들여주었다. 중앙승가대학을 거쳤고, 승가대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선운사 내장사를 거쳐 군산 성불사 주지로 있다가 은사인 재훈스님의 뜻을 따라 동국사로 옮겨와 재훈스님이 입적하신 이후 동국사 주지가 되었다. 2005년 동국사와 인연을 맺은 이후 9년. 수행하는 시간 외의 대부분 일상은 일제강점기 역사의 흔적을 좆는 일에 대부분 놓였다. 동국사 역사를 추적하다 발전된 일제침탈사 사료수집은 적지 않은 경비를 필요로 했으나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스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평화운동가이자 진보적 종교인인 이치노헤 쇼코 스님과의 인연은 역사관을 더 치열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종걸스님이 그동안 수집한 사료는 5000여 점. 절집의 여러 공간을 채우고도 모자라 스님의 방은 간신히 누울 자리만 비워놓고 온갖 사료들이 들어차있다. 그래서 사료 관리하는 일이 점점 더 버거워지지만 사료 수집은 계속할 생각이다. 군산경실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3.06 23:02

[(9) 진안 (주)그린파이프] 폴리에틸렌관 전문 생산…매년 꾸준한 성장 눈길

진안군 제2농공단지 내 위치해 있는 (주)그린파이프는 건축토목분야에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PE(폴리에틸렌, Poly ethylene) 하수관과 이음관 그리고 PE수도관을 전문적으로 생산유통하고 있다.지난 2006년 법인을 설립하여 2007년 진안 제2농공단지에 공장을 준공하고 현재까지 착실히 성장기반을 닦고 있는 기업이다지역출신인 고영민(43) 대표가 패기를 앞세워 지난 2006년 법인설립이후 국토의 환경을 보전한다는 자부심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진안군 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회사로 성장하기 위해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주)그린파이프 연간 매출 100억을 목표로신뢰와 믿음을 사훈으로 10여명의 직원이 구슬땀을 흘리며, PE이중벽관, PE다중벽관, PE수도관 및 하수이음관 등을 생산하고 있다.공장설립 이후 동종업계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성장으로 매년 35%이상의 매출 상승률을 보이며 현재 목표 매출액에 근접하고 있으며, 목표 매출액 달성 및 초과를 위해 신제품 개발, 품질경쟁력 확보, 전문인력 양성 등에 힘쓰고 있다.신제품개발로 현재 실용신안 1건 출원, 특허 2건 출원중에 있으며, 현재도 계속 (주)그린파이프만의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10여개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제품의 상용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품질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한 결과로 각종 인증 10여건을 취득하였고, 현재도 국제 인증 및 다수의 국내 인증취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영민 대표는 이와 같은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 양성을 필수로 생각하고 있다. 각 부서별 전문성은 살리면서 전직원의 멀티플레이어화를 지향해 넓은 분야에서 깊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각 직원의 교육자금을 별도 관리하여 직원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고영민 대표의 노력으로 대부분의 직원이 제품개발, 품질관리, 생산관리 등은 물론이며, 영업활동까지 가능한 직원이 다수 근무하고 있고, 이러한 인재들은 이직률 또한 낮다. (주)그린파이프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퇴사율은 0%에 이를 정도로 사원 모두가 회사에 대한 애착이 높으며, 그만큼 사원복지가 잘 돼 있어 머물고 싶은 기업으로 꼽히는 것이다.주 5일 근무에 연차, 정기휴가는 물론이며 4대 보험 이외에 직원들 상해보험까지 가입돼어 있다. 또한 신입사원 초봉이 2000만원에 이르며 여기에 실적에 따른 인센티브, 정기보너스, 장기근속자 포상, 퇴직금이 지급되고 있다. 건강관리 지원을 위한 건강검진 비용, 금연수당도 지원하고 있다.기숙사 운영은 기본으로 자체 구내식당 운영,자기계발비(학원수강), 도서구입비 지원하고 있으며,여기에 업무와 관련한 자격증을 취득할 시 자격증수당이 주어지며, 가족 구성원이 많을 때 주어지는 가족수당도 지원하고 있다.부수적으로 직원들의 생일을 알려 함께 축하하고, 여름 휴가에는 하루더 휴무일을 정해 고영민 대표를 포함 전직원과 직원의 가족들이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도록 하여 직원간의 가족애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이러한 고 대표의 직원에 대한 복지는 사회 공헌에도 이어지고 있다.매년 진안군에서 열리는 노인1000잔치는 진안군 각 읍면 노인 1000여명을 모셔 진행하는 노인 효도 잔치이다.이 행사는 진안군 사회복지재단에서 주최하여 진안군 5개 업체의 후원으로 진행되며, (주)그린파이프 고 대표는 2009년 1회 행사부터 현재까지 단 한번도 빠뜨리지 않고 후원하고 있다. 또한 고 대표는 사회경제개발에 이바지한 어르신들께 잠시나마 기쁨을 드리는 자리를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고 말하며 불우이웃돕기 성금기탁, 쌀전달, 장학금 전달 등을 통하여 회사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대표의 머릿속엔 항상 최고의 기술력과, 인력을 보유한 기업만이 발전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최고의 인력으로 기술력을 발휘하여 끊임 없는 개발을 통해 만든 PE하수관과 PE수도관으로 전북도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오폐수로 인한 환경오염이 없어지는 사회,국민들이 맑은물을 마실수 있는 권리를 누릴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고영민 대표 "불량제품 납품하면 국민이 피해"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에 대한 신뢰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제품을 생산해 소비자들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는 회사로 키워 나가겠습니다.(주)그린파이프 고영민(43) 대표는 회사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신뢰라고 강조했다. 동종 업종의 후발주자인 (주)그린파이프가 선두주자들을 따라 잡기 위해서는 소비자들로부터 신뢰 받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이에 고 대표는 현재 도내에도 동종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많은 회사들이 있지만 땀 흘려 노력한다면 충분히 승산이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주)그린파이프는 공장을 준공하고 제품 생산을 시작한지 7년여 만에 진안군을 기반으로 전북도내 뿐아니라 전국으로 납품처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특히 고 대표가 회사 설립전 5년여에 걸쳐 이 부분에 영업을 해온 것이 큰도움이 되고 있다.고대표는 영업을 하면서 제품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선호도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하게 됐다면서 소비처의 기호를 정확히 판단해 새로운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또 고 대표는 (주)그린파이프에서 생산되는 주로 자치단체 등 관청에 납품하고 있다면서 불량 제품을 납품할 경우 국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만큼 공익성을 갖고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고 대표는 현재 진안군을 기반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면서 이를 바탕으로 회사를 성장시켜 도내 으뜸만이 아니라 전국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계획을 밝혔다.회사의 경영 방침에 대해 고 대표는 회사 설립 이전부터 이익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면서사원들의 복지는 물론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회사로 키워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
  • 김태인
  • 2014.03.06 23:02

[(9)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손화중 장군] 최연소 '5대 장군'…후손 "기념일만 집착하는 세태 씁쓸"

△지략과 포용력 갖춘 손화중손화중 장군(1861~1895)은 정읍시 과교동에서 비교적 부유했던 토반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혁명에 투신하지 않았다면 한 세월 넉넉히 살았을 법하다.그의 동학과의 인연은 지리산 청학동에서 시작됐다. 그는 1880년대 경치가 아름답다는조선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처남 유용수와 함께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당시 영남지방에서는 동학이 한참 퍼지고 있었다. 동학사상에 심취한 그는 후천개벽의 동학 종교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교했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이라는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감, 마침내 갑오년 3월 고창 무장에서 포고문을 공포하고 전국적인 동학혁명 대장정에 나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지략과 포용력을 갖춘 그는 동학군의 봉기를 막후에서 지휘하면서 동학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앞서 그해 1월 고부봉기 때도 전봉준과 함께 앞으로의 투쟁 방법에 대해 상의하는 등 혁명의 처음부터 깊이 관여하면서 동학군의 진로를 결정했다.손화중 장군 후손에 따르면 혁명 이전부터 전봉준은 손 장군을 스승처럼 대하며 혁명의 시기와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무장기포 이후 그는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석권했으며, 갑오년 3월 백산대회에서는 김개남과 함께 총관령으로 추대됐다.그는 전주성 점령 후 2차 봉기 때 광주에서 기포, 북상하는 전봉준을 대신해 광주와 나주 등 후방을 지켰다.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전라도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그는 이에 우선 관군을 진압할 필요를 느껴 1894년 10월, 11월 나주성의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등 후방 작전을 주도했다.하지만 끝내 관군의 반격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로 후퇴했다.이후 고창 질마재에서 체포된 후 일본군에 넘겨져 다음해인 1895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동학 대접주 손화중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34세로 지도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인 1만여명을 거느린 대접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고결한 인품과 학식 덕분이었다.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무장에서 시작한 것은 이곳을 근거로 하는 손화중의 강력한 동학조직이 있었서이다.총 8000여명이 집결했다는 백산대회에 참여한 동학군 가운데 손화중이 이끈 농민군은 절반에 가까운 3500여명에 달했다.또한 동학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기록되고 있는 황토재싸움도 사실상 손화중의 조직이 주도적인 역할을 해 거둔 승리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례 2차 봉기 이후 그는 북상에 참여하지 않고 나주 장성 지역에 머물면서 일본군의 후방교란에 대비했다. 이는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강력한 나주지역 반농민군세력의 준동을 막자는 의도에서 나온 결과였다. 또한 후방에서의 군량미 확보도 그의 책임이었다. 전쟁에 있어 든든한 후방지원군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그만큼 그는 믿을 수 있는 동학 지도자였다.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북상하던 동학군이 와해되면서 그의 목숨도 위험에 처하게 됐다.끝내는 관군에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서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섰던 그의 활약상도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됐다.△반목 보다 화합 통해 동학정신 계승해야2004년 동학혁명이 일어난 지 110년 만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정으로 동학농민혁명 후손들도 기를 펴고 살게 됐다.이 때부터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한 논의가 모아졌지만 각 지방자치단체간의 이견으로 기념일 제정은 난관에 부딪혔다.이에 최근 동학혁명 유족회 측은 최근 특별법 공포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지역갈등 때문에 기념일을 정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지역성이 없는 날을 기념일로 하자는 의견이다.이를 바라보는 동학 후손들의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손화중 장군의 손자 손홍렬씨는 기념일이 뭐가 대수라고, 이렇게들 싸우는지 모르겠다면서 혁명의 정신을 유지, 계승하는 것이 현재로선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손씨는 이어 동학이 난에서 혁명으로 인정 받은 지도 10년이 됐는데도 혁명정신보다 보여지는 기념일에만 집착하는 세태가 씁쓸하다고 덧붙였다.손씨는 백성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애쓴 선조들의 얼과 기개를 본받아 대립 보다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4.03.05 23:02

32. 순창 쌍치초 - 가족 같은 분위기 '왕따 없는 학교' 큰 자긍심

순창 쌍치초등학교 교사들은 쌍치라는 강한 어감에 종종 곤혹스러워했다. 고민 끝에 장두실 교장과 장원규 교감은 역발상의 묘책을 내놨다. 인성과 학력, 쌍(雙)이 하나되어 물결 치(置)는 학교라는 슬로건이다. 덕분에 다른 학교 교사들과 쌍치초를 소개할 때마다 웃음꽃이 피어난다.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학교 홍보 전략이다.△6남매 프로젝트 부각 1909년 건립된 쌍치초는 6남매 사랑의 한가족 프로젝트로 통한다. 전교생 42명 중 다문화가정 학생은 8명이나 된다. 학생수 급감으로 개교 105주년 위상은 주춤하지만, 가족 같은 학교 분위기에 대한 자긍심은 강하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프로젝트6남매 사랑의 한가족(이하 6남매)으로 인해 쌍치초엔 그 흔한 왕따가 없다. 6남매는 인성 교육의 희망이다. 6남매는 1~6학년 학생들이 학년별로 1명 이상씩 참여해 나라별 이름을 딴 조를 만들어 각 나라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 조사하는 일로 시작됐다. 이후 학교의 모든 활동에 6남매가 적용됐다. 몽골팀(몽골의 법칙), 일본팀(가화만평아이시떼루), 우즈벡팀(한우사랑우진가쁘리엣), 인도팀(여섯숟가락) 등 6개 팀은 매주 수요일 3~4교시 창의체험을 묶은 블록타임을 활용해 텃밭 가꾸기, 다문화 요리축제, 김장 체험, 친구사과 데이 등을 소화한다. 우주베키스탄 팀인 한우사랑에 참여한 박세진 군(3년)은 6남매는 우리와 외국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라면서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음식인 볶음밥 쁠로프를 만드는 법 등을 배우는 게 즐거웠다고 말했다. 쌍치초의 학력 신장 대안은 돌봄교실의 내실화와 책 읽기로 요약된다. 주변에 학원이 없는 이곳은 어느 지역보다 공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오후 8시까지 이어지는 돌봄교실에서는 논술영어수학한자과학 등 과목별 수업과 가야금바이올린태권도하모니카 등 특기적성 수업이 뒤따른다. 2000년 초만 해도 쌍치초는 가야금 등 전통예술 수업을 앞세워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1998년부터 가야금병창과 사물놀이반 등을 운영해온 쌍치초가 각종 국악대회에서 두각을 보이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사)국악진흥회가 선정하는 전통예술 모범학교 2년 연속 선정됐던 것. 하지만 최근엔 학생수가 모자라 가야금반을 운영할 수 없게 됐다며 장두실 교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쌍치초는 독서의 활성화를 위해 어렵사리 학부모 독서클럽도 챙겼다. 독서교육글쓰기 지도법 등을 연수받은 학부모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독서 시간에 책을 읽어주거나 서가를 정리해준다. 교사들이 세심하게 제작한 독서일기는 학부모들의 호응이 높다. 2012년 전북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통과 여파로 전북에서 일기쓰기 검사가 사라지면서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는다며 볼멘 소리를 해왔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이에 쌍치초는 독후감과 일기를 접목시켜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총동문회 활성화가 관건예전부터 쌍치가 아주 골짜기였어요. 총동문회가 만들어진 게 3년 됐는데, 활동이 거의 없어요.양병원 쌍치초 총동문회장(23회)은 뒤이어 미안하다고 했다. 대신 양 회장은 1950년대 학창 시절의 한토막을 들려줬다. 그는 초교 4학년 때 625를 만났다. 시내로 피난갔죠. 수복되면서 쌍치로 와서 졸업했어요. 배고픈 때라 학교 보리밥 한 뭉치씩 주면 그거 먹는 재미로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가 기억하는 쌍치초의 전성기는 1970년대다. 전교생이 600~700명에 육박했던 쌍치초의 쇠락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지만, 동문들은 내실있게 명맥을 잇는 일이 우선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어렵사리 수소문한 결과 쌍치초 동문들을 가까스로 찾을 수 있었다. 대왕기업 운수 대표로 있는 고석진씨(32회)와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 육군본부 35사단장을 했던 안주섭씨(35회), 전북민예총 회장을 지냈던 신형식 전북대 교수(화학공학부45회), 양만섭 대진대 교수(영문학과45회), 쌍치초를 잠시 다닌 이학영 국회의원이 거의 전부다. 200여 명 남짓한 총동문회 활동은 이제 걸음마 단계. 동문회가 대개 60~70대 쌍치 토박이들로 구성 돼 젊은 동문들로 전반적인 쇄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양 회장은 젊은 친구들이 바통을 넘겨 받아 총동문회를 활성화시켰으면 한다면서 쌍치초의 숨겨진 역사를 누구나 아는 역사로 기록하는 일부터 솔선수범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끝>

  • 기획
  • 이화정
  • 2014.03.04 23:02

'출범 10년' 과학기술인공제회 김영식 이사장 "올 여름 군산서 위그선 뜨면, 새만금에 세계 이목 집중"

과학기술인공제회가 출범한지 만 10년이 지났다. 과학기술인공제회는 3만명이 넘는 회원들의 생활안정지원과 복지서비스 등을 추진하는 곳으로, 주력업무는 과학기술인 생활안정지원 제도를 비롯, 의료교육휴양문화법률레저분야 등 80여개 이상 기관과 협약을 맺고 회원들에게 다양한 생활복지서비스를 제공해주는 곳이다.전북 출신 김영식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을 만나 국내 과학기술의 현주소와 향후 과제, 전북의 과학기술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과학기술 전문관료로서 30년 동안 과학기술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을 해오다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을 맡은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먼저 과학기술인공제회는 어떤 곳이고, 향후 성장 방향에 대한 비전은 무엇입니까.우리나라처럼 부존자원이 빈약한 국가는 오직 인적자원의 개발에 의해 선진화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수한 두뇌들이 과학기술에 종사하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전반적인 복지와 서비스를 돕는 곳이 필요하다는 전제아래 법률에 의해 설립된 곳이 바로 과학기술인공제회입니다. 한마디로 과학기술인이 행복해야 국가과학기술경쟁력이 강해진다는 점에서 과학기술인들의 행복전도사라고나 할까요.-구체적으로 요즘 하시는 일은 어떤게 있습니까.과학기술부 등에 근무할때는 주로 과학기술정책이나 연구개발정책, 과학문화를 확산시키는 일들을 해오면서 다양한 과학기술인들을 만나왔다면, 최근에는 증권전문가나 펀드매니저 같은 자산 운용가를 만나거나 자산관리를 위해 회계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가들을 만나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역점사업은 과학기술인이 행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과학기술인 사기진작을 위한 연금확충, 회원확대를 위한 공제회알리기 활동, 미래를 바라보는 과학기술인 복지정책에 도움을 주기위한 세미나 등을 국회와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습니다. 우리 공제회는 지난 10년동안 100배의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355명의 회원이 3만5000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자산은 211억원에서 2조 1740억원으로 증가했습니다. 수익률은 지난 10년간 매년 5% 이상이었고, 지난해의 경우 1040억원에 이르렀습니다. 올해는 회원수 4만1000명, 자산은 2조800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공제회 이사장으로 재임하면서 크고작은 보람이나 성과도 있을 듯 합니다.과학기술인 사기진작과 건전한 투자를 하기위해 원칙과 방향을 정립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과학기술인 사기진작을 위한 각종 대책이 대선 공약에 들어가도록 노력했는데 일정 부분 달성돼 큰 보람을 느낍니다. 국가 과학기술혁신역량강화 분야가 정부 국정과제에도 포함된 것은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의 불확실성 지속, 국내경기 침체, 저금리기조의 장기화가 예상되고 분담금의 안정적 관리와 건전한 투자를 위해 회원지급율을 부득이 지난해 8월일부터 0.5% 인하하여 지원하고 있는데, 이번 축소조정으로 지급액이 다소 줄어들게 돼 마음이 아픕니다.-공직자로서 생활하시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한가지를 떠올리신다면 어떤게 있을까요.요즘엔 날씨 예보가 상당히 잘 맞는데, 이것은 2010년 6월에 쏘아올린 천리안 위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저는 통신,해양, 기상을 관측하는 위성인 천리안 위성을 우주에 띄우기 위해 한국대표단장으로 적도근처에 위치한 꾸르 발사장 현지에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발사가 몇차례 연기되면서 발사현장은 성급히 발사해서는 안된다는 우려 속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요. 우리 대표단은 우리가 만든 위성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발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현장을 점검하고 또점검하며 프랑스 측과 여러차례 조율을 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급하게 받다가 제 허리가 삐끗하면서 움직일수 없게돼 이틀을 누운상태에서 현장을 지휘하게 되었고, 발사당일에는 아픈 몸을 이끌고 통제소에 머물면서 발사 카운트다운을 지켜보다가 발사가 성공에 이르자 제가 그대로 일어나 발사성공 멘트를 날리게 되었는데 그때 저에게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과학기술인 공제회 회원중 전북인 수가 1.5% 이내인 이유는 무엇이고, 이처럼 적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공제회 회원 3만5000 여명중 전북지역에는 1.4%인 470 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원도와 제주도 보다는 좀 높은 편이지만,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크게 낮은 수준 입니다. 과학기술인공제회 회원이 적다는 것은 한마디로 과학기술인재가 적다는 뜻이고, 전북의 과학기술 활동이 미약하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전라북도의 새로운 먹거리를 찾고, 활기찬 미래에 도전하려면 국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전북도를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유능한 청소년을 포함한 과학기술 인재 관리 육성에 더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추진하는 사업중 군산항 위그선 사업이 있는데, 올 여름 군산에서 위그선이 뜨게되면 전세계 이목이 새만금에 쏠릴 것입니다. 그 기회를 잘 포착해서 전북이 전세계 위그선 관광산업의 메카로 부각될 것으로 확신합니다.-끝으로 도민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전북이 더 발전해 나갈려면 도민 모두가 긍정의 힘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북의 발전을 위해 추진하는 각종 사업들이 미진할 때마다 일부에서 전북에서 할 수 있겠어, 아마 안될껄이라고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따까울 때가 많았습니다. 이젠 우리도 아쉽다. 더 잘해보자. 할 수 있어라는 긍정에 찬 확신도 하고 지원도 해주는 그런 노력을 해 나가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도록 항상 성원해주신 도민들께 감사드리고, 전북이 더 크게 발전하는데 출향인의 한사람으로서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김영식 이사장은...군산 출신, 요직 두루 '과학기술계 '실력파'한국과학기술인공제회 김영식 이사장(58)은 군산 회현이 고향으로 전북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과학기술 관료로 1급까지 승진한 케이스다.우리나라의 종합적인 과학기술 전략을 수립하고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정부출연연구기관 육성, R&D 정책 수립, 우주개발 등 굵직굵직한 정책을 추진하는 현장에는 항상 김영식이 있었다.군산중고를 졸업한 뒤, 전북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전북대 재학시절 ROTC를 받는 가운데 4학년때 기술고시(14회)에 합격, 기술관료의 길을 걷게된다.한양대학교 산업공학 석사와 러시아 NAMI 음양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과학기술처 근무 당시 원자력정책과장, 연구기획과장, 과학기술부 공보관, 기초연구국장, 원자력국장, 국립중앙과학관장,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책실장, 연구개발정책실장 등 주요 보직을 모두 거친뒤,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과학기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파로 널리 인정받고 있을뿐 아니라, 뛰어난 대인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2004년 IAEA안전조치협정의 추가의정서가 발효된 직후 IAEA로부터 플루토늄 추출 및 우라늄 농축으로 핵물질 의혹을 받던 때에 국제사회를 설득하고 국내 핵물질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 마침내 2008년 한국이 핵물질을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포괄적 승인을 받아냈다.특히 우리 연구용원자로를 요르단에 수출하면서 요르단 국왕과 기공식을 함께 가졌던 일들이 가장 크게 인상에 남는다.

  • 기획
  • 위병기
  • 2014.03.03 23:02

[(8) 군산 서광수출포장(주)] 고강도 수출용 골판지 포장상자 생산 중견업체로 우뚝

제품 생산 과정에서 포장은 제일 마지막 순서에 이뤄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포장은 제품과 소비자와의 만남에서 가장 첫번째 순서가 되며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제품 보호와 운송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포장이 때로는 이미지 상승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수출길에 오르는 제품 포장은 소비자들에게 제품은 물론 수출국의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한다.가내수공업 형태로 운영되던 기존 골판지 포장업체를 지속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중견기업으로 성장시켜 온 서광수출포장(주). 제품 보호와 운송이라는 포장상자 본연의 업무를 넘어 뛰어난 내구성과 기능성으로 전 세계인들이 일상에서도 즐겨 찾는 명품 종이상자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품격이 다른 포장용 종이상자 1996년 군산 옥구읍 상평농공단지에 창업한 서광수출포장(주)은 상평농공단지 조성과 함께 입주해 이곳에서 19년째 공장을 운영해 오고 있다.현재 서광수출포장(주)은 수출용 식품포장, 식품 첨가물 포장, 화학약품 등을 포장하는 골판지 종이상자 등을 생산해 군산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을 담아 주로 영국과 스웨덴, 덴마크 등 유럽지역에 보내고 있다.제지업체에서 생산한 판지를 매입해 절단 및 곡절과정을 거쳐 가공하는 단순작업으로 보이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포장상자에는 이곳만의 첨단기술이 담겨 있다.골판지부터 일반 종이상자와 강도 자체부터 다르다. 수출용 컨테이너에 사용되는 골판지는 위에서 내리 누르는 무게를 견디는 압축강도가 10㎏/㎠로 일반 상자용 골판지의 열배 이상이다.상자들에 제품이 담기면 창고에서 20일 이상 보관되고 이후 수출용 선박에 실려 20일 이상 험난한 파고를 견뎌내야 한다.컨테이너 선적 당시 상자 사이의 작은 틈새가 긴 항해를 거치다 보면 사이가 점차 벌어지면서 상자가 무너져 내리거나 제품이 파손될 우려가 있어 정밀한 설계가 요구된다.서광수출포장(주)은 재질 선정과 설계, 제작은 물론 컨테이너 적재형태까지 고려해 상자를 제작하는 노하우로 소비처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특히 일반적인 골판지 종이상자는 모서리를 풀이나 책철로 이어 붙이지만, 식품용 포장의 경우 풀을 접착제로 사용할 경우 온도와 습도 등 주변 환경변화로 부패하기 쉽고, 접철의 경우 녹가루가 생기거나 제품 파손의 우려가 있어 광섬유가 들어간 테잎 형태의 핫멜트를 사용해 상자를 접착하는 기술은 자체 터득했다.또 포장 상자에 이물질에 흡입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쇄기 및 접착, 접철기 사용 시 먼지가 발생해 유착되는 것을 방지하는 먼지 흡입장치를 개발 상용화했다.거래처에서 요구한 도안, 크기, 강도 등 사양에 맞춰 생산한 후, 오염 방지를 위해 생산즉시 30개 씩 비닐 랩으로 포장하는 등 생산과정에서 청결을 최우선으로 하는 등 격이다른 수출용 골판지 종이상자를 생산해 오며 매년 75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이 같은 노력으로 서광수출포장(주)은 지난 2012년 5월 ISO9001:2008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서를 받았으며, 지난 3월 상공업 진흥을 통해 국가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식경제부장관 표창을 수상했다.△외형보다 내실, 무차입 경영창업 초기 2년여 동안 파, 상추, 쑥갓 등 주로 농산물 포장 종이상자를 생산하며 전국을 무대로 거래처 확보에 주력해 오던 서광수출포장(주)은 가격에 비해 부피가 큰 제품 특성 때문에 물류비용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이때부터 반경 40분 거리 내에 있는 거래처 확보로 영업 전략을 수정해 현재 대상 군산공장과 한국지엠 군산공장, IS TECH 등 식품 및 수출업체에 수출용 종이상자를 공급하고 있다.처음부터 거래처 확보가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군산에 입주한 대기업들이 기술력과 자금 상황이 좋은데도 기존 거래처들을 활용하는 구매시스템을 유지하는 바람에 수도 없이 샘플을 들고 발품을 팔고 다녔다.그렇게 한걸음씩 내딛으며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공장은 네 차례, 사무실은 두 차례에 걸쳐 차근차근 확장해 왔다.무리한 확장이나 납품보다는 대금회수에 치중해 가며 외형보다는 내실을 기하면서 창업 이래 무차입 경영을 해 왔다.종업원 16명 중 운전직 등을 제외한 메인기술자들이 근속연수 15~16년으로 이직율이 낮은 것도 이 회사의 자랑이다.손 대표는 회사를 직원들과 함께 공동체로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 신혼초기 암을 치료하는 바람에 2세를 갖는 시기를 놓치고 부인과 단둘이 생활하는 손 대표에게 회사는 직원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다.매년 봄가을 직원체육대회를 시행하고 지난해 전 직원 부부 제주도 여행을 실시하는 등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또 모든 직원이 12년째 지역 독거노인들에게 김장김치를 담가주고 효도관광을 지원해 왔으며, 은파호수공원에 청소도구와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정기적으로 환경정화운동을 벌이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다.● 손명엽 대표 "무리한 확장보다는 내실회사, 직원 삶의 터전으로"서광수출포장(주) 손명엽(56) 대표는 회사를 확장해 나가는 것보다 직원들과 함께 공동체로 운영해 모두의 생활터전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고 포부를 밝혔다.고향 장수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원광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손 대표는 해병대 제대 이후 예비군훈련장에서 동료들을 통솔하는 그의 모습을 눈여겨 본 중대장의 소개로 지함업계와 인연을 맺었다.당시 내수용 제품생산에 주력하는 회사는 향후 어려움에 처할 것을 직감하고, 수출용을 취급하는 길만이 향후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길이라는 신념으로 7년만에 창업을 결심했다.36세이던 1996년 6월 군산 옥구읍 상평단지에 서광수출포장(주)(주)을 창업한 손 대표는 현장에서 다져진 경험과 교훈을 거울삼아 현재까지 무차입 경영으로 회사를 이끌어 오고 있다.모처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 손 대표는 자전거가 생활화 된 유럽인들이 특정 회사의 종이상자를 자전거에 고정시켜 적재함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일본에서 생산된 종이상자가 튼튼하고 수명도 길어 자전거 적재함으로 즐겨 사용하게 된다는 말에 손 대표는 무작정 상자를 구입해 귀국했다.밤낮없이 상자의 재질과 접착방법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손 대표는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광섬유 핫멜트 접착제를 활용한 종이상자를 생산해 냈다. 이 상자들은 동남아 등지에서 자전거 적재함으로 활용되며 품질을 입중하고 있다.현재 우리나라 포장산업 수준이 일본과 유럽의 60~70% 수준이라는 손 대표는 이들과 맞먹는 제품을 생산해 낼 계획이다.손 대표는 플라스틱에 비해 종이는 100% 재활용이 가능한 친환경 소재로 쓰임새가 상상 이상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며 종이상자에 전자칩을 부착해 상자의 이력과 특성 등에 대한 정보 추적이 가능해지면 사용연한과 취급가능 품목은 물론,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소위 박스갈이도 불가능해 질 것이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4.02.27 23:02

[(8)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김개남 장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후손 '역사교과서 왜곡'에 맞서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은 2014년. 두 갑자가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봉건왕조 국가에서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픈 국민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오는 64지방선거에 출마 예정인 많은 지역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동학의 정신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후손들은 두 번 울어야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동학 난, 민란 등으로 폄하돼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지 못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못된 후손들은 눈물을 곱씹어야 했다. 가까스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후손들은 역사전쟁 2라운드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김개남 장군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역사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여다본다.△전라좌도 호령하던 김개남김개남 장군(1853~1894)은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거두다. 전라좌도를 호령하던 그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인 강경파로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급진적 성향을 보여 후대에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1894년 8월 평양전투에서의 대승을 전기로 청을 굴복시킨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시작한다. 이 때 남원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은 좌도의 농민군 7만명을 남원에 집결시켜 대회를 열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은 후일을 도모코자 대회를 만류했지만 김개남 장군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 어렵다며 두 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봉건세력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실제 그는 집강소 시기에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전라좌도의 양반들을 가혹하게 정치했다. 화산 같은 김개남 장군의 폭발성과 추진력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분기에 기름을 부었지만 혁명의 대세가 기울자 그의 성격은 독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에 그쳤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오해가 증폭되고 있다는 게 유족들의 주장이다. △항변 없는 죽음 역사 논쟁으로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시기나 2차 농민혁명 때 보여준 김개남 장군의 다소 격한 행동들이 상대적으로 부각돼 포악함 또는 냉혹함이 그의 기질을 형용하는 어휘가 되고 말았다.이는 김개남 장군의 경우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유언과 판결문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유족들의 설명이다. 1894년 12월 1일 측근의 고발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 장군의 위력에 위축돼, 그를 서울로 압송 중 농민군에 의해 탈취 당할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아무런 재판 과정 없이 체포 이틀 후에 서교장에서 참수했다. 1894년 12월 3일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남원 일대에서 핍박받은 양반 토호들에 의해 짓밟혔고 그의 간을 꺼내 씹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이송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시됐다. 8척 장신에 호령을 하면 앞산이 쩌렁거렸다는 무골은 판결문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갔다. 입과 입으로 전해온 김개남 장군의 진짜 모습은 어렴풋한 신화와 함께 과격한 모습이 양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교학사 교과서에는 김개남 장군에 대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중략)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살육과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184쪽)고 서술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이라는 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이다. 전세가 불리해진 것은 김개남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김개남 장군의 증손인 김종기씨는 이 교과서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김개남 장군이 양반 계층에 대해 엄혹하게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폐단을 바로잡는 차원에서였고, 오히려 민중 대부분은 그런 김개남 장군을 열렬히 지지했다.김씨는 동학혁명의 본거지인 전북 지역에서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전주의 상산고는 지난해 12월 31일, 교학사 교과서를 지학사 교과서와 함께 역사 수업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상산고 동문회를 비롯해 전북 지역 및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상산고는 일주일 뒤에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철회했고 교학사는 뒤늦게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지만, 유족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김씨는 현재 교학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동학정신, 역사왜곡 막아가난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왜곡은 참을 수 없었다. 가난은 대물림돼도 부끄럽지 않으나, 역사 왜곡이 대물림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김종기씨의 이 한마디는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담고 있었다. 김씨는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역사왜곡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시민들이라고 했다. 올해 초 대한민국 사회를 달군 교학사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결국 전국 수 백개 학교 가운데 한 곳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양심적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비록 이들의 얼굴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역사왜곡을 함께 막아낸 동지다면서 같이 싸워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이들에게서 동학의 정신을 엿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가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은 지도자 계층의 그릇된 역사인식 때문이다면서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알려주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국민이 많아지게 되면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2.26 23:02

31. 정읍제일고 - 전국 3대 명문 농업고…'인재 양성 메카' 명성 되찾기 시동

정읍제일고 정대주 교장은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했다.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학교지만, 학생수가 부족한 게 현실이라서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중입니다. 정읍 지역의 특수성도 한 몫 했다. 인구 12만 명도 안되는 지역에 중등학교 11개가 몰려 있어 학생수 부족난이 가속화되고 있다. 올해 개교 104주년을 맞는 정읍제일고는 과거의 명운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장관만 3명 배출 전국 3대 명문 농업고로 꼽힌 정읍제일고는 동문들의 이름만으로 그 존재감을 과시한다. 특히 정계관계재계교육계종교계까지 두루 아우르는 동문들의 활약은 명문고의 자긍심을 잇게 만든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정읍제일고 동문 중 역대 장관이 세 명이나 된다는 것이다. 고(故) 정준모 전 보사부장관(10회)은 일제 강점기 때 법조인경찰을 거친 뒤 3~4대 국회의원, 보사부장관을 역임했다. 공노명 아시아재단 이사장(38회)도 요직을 두루 거친 중량급 외교관이었다. 1983년 외무부 정무차관보 재직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의 협상 대표로 나섰고, 초대 모스크바 영사처장을 맡아 한국-소련 수교의 수훈갑이 됐다. 비록 1개월 남짓이었으나 허재영 국토정책연구원 이사장(40회)도 건설부장관을 지냈다.국회의원도지사시장을 거친 동문들도 차고 넘친다. 신석빈 전 국회의원(14회)은 정준모 전 장관보다 먼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으로, 전북도청 내무국장을 맡았으나 625 전쟁으로 납북된 뒤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고(故) 송능운 전 국회의원(18회)도 일제 강점기 시절 정치가이자 기업가로 활동했다. 한 때 교편을 잡기도 했으나 신태인읍주조장을 경영하면서 도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고, 1950년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점을 찍었다. 전북교육감과 국회의원을 거친 고(故) 설인수씨(33회)는 부안군수, 국립도서관장을 거쳐 제3~4대 전북교육감을 역임했다. 순창임실남원 지역의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출마, 전국 최다 득표로 국회에서 문공위 간사로 활동했을 만큼 식견과 경륜을 높게 평가받았다. 김원철(37회), 이형근(38회), 김계식(45회), 김연식 씨(47회) 등 교육장을 거친 동문들도 많다. 초대 민선지사인 김상술 전 도지사(29회)는 군산 화력발전소섬진강댐 등을 건설하는 등 지방자치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윤철상 전 국회의원(58회)과 국승록 전 정읍시장(38회)도 정계 동문 중 빠지지 않는다. 종교계는 송월주 스님(42회)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했으며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심화된 1980년대 말부터 시민운동에 참여해왔으며, 지역감정해소국민운동협의회 공동의장경실련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유종섭 전 (주)외환카드 대표이사 사장(43회)은 한국여신전문금융업협회 회장, 부영 대표이사 사장 등을 거친 CEO로 재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다. △취업 역점 경쟁력 관건정읍제일고의 교명 변천사는 근대 최초의 실업교육학교의 그늘과 맞물린다. 공업이 우선시되면서 1988년 농고에서 농공고로 변경됐고, 2003년부터 농공고라 불렸던 실업계 고등학교 명칭이 사라지면서 지금의 정읍제일고가 됐다. 1990년대 초엔 농업 계열이 공업 계열보다 적어지는 역전 현상이 생겼고, 한때 재학생 1566명의 10학급에 달했던 학급수가 494명의 6학급으로 감축됐다. 뒤이어 3만여 평(9만9000㎡)이던 부지도 남북로 등 도로 개설과 학생복지회관 신축 등으로 줄어들면서 양분되며 부침을 겪었다.이 같은 현실에서 한식양식조리사 자격증 획득, 농업공업컴퓨터 기능사 자격증 취득, 골프 선수 육성 등을 통해 취업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 운영에 고심 중이다. KPGA 정회원으로 활동 중인 안정건 군(3년)을 비롯해 세미 골프 선수 4명은 골프 인재로 주목을 모은다. 정읍제일고의 최대 고민은 신입생의 확보다. 정대주 교장의 열성으로 올해 입학생 미달 사태는 면했다. 이에 대해 정 교장은 다른 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진학 선호가 늘어나는 반면 전북은 학부모학생의 관심이 적다며 안타까워했다. 공단을 끼고 있는 수도권경북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졸업생들이 대기업에 취업하는 사례를 심심치 않게 보는 반면 공단이 거의 없는 전북의 경우 대학 진학이 먼저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부가 특성화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늘리면서 무상교육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정예부대로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은 반갑다. 정 교장은 다른 지역의 경우 특성화고 학생들이 전자전기, 디자인, 금융 등 각 분야에서 실력 있는 산업 역군으로 육성되고 있다면서 앞으로 일반고 학생들 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특성화고에 진입하고, 기업에서 선호도가 점점 높아지면 특성화고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많이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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