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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무주 선미농산(주)] 신선 식재료 변함없는 10년 손맛 '무주 대표 김치 업체'

무주군 안성면 공단로의 터줏대감 선미농산(주)은 무주군 대표 김치 생산업체다. 배추김치부터 깍두기와 갓 김치, 석박지, 백김치, 오이소박이 등 선미농산(주)에서 생산하는 김치 종류만도 10여 가지.오로지 맛과 품질로만 승부하겠다는 박은경 대표(32세)는 먹는 음식, 그것도 우리 밥상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김치를 생산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오늘도 김치를 담그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며 좋은 재료로 감동을 주고 맛으로 신뢰를 심는 선미농산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선미농산의 주 거래처는 무주덕유산리조트를 비롯한 기흥휴게소와 청주, 무주군 일원의 유치원과 학교 등 150여 곳. 거래처 대부분이 입소문으로 확보되고 있다는 설명에서도 김치 명가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선미농산의 연 간 매출은 20여 억 원에 달한다. 이는 설립 당시에 비해 200%에 가까운 매출 신장으로 비결을 묻는 질문에 박 대표는 주저없이 변함없는 맛과 무주군 일원에서 생산된 최고 품질의 재료, 그리고 무주사람들의 정성이라고 말한다.하지만 1년 365일 김치를 담가야 하는 사업의 특성 때문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무주에서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라고 전하는 박 대표. 그래도 무주산(産) 농산물을 우선으로 한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계약 재배를 통해, 나머지는 시장에서 발품을 팔며 좋은 재료를 확보하고 있었다.위생적이고 안전한 제품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온 선미농산(주)은 2012년 HACCP(Hazard Analysis Critical Control Point)식품의 원재료 생산에서 부터 최종소비자가 섭취하기 전까지 각 단계에서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위해요소가 해당식품에 혼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관리 시스템) 인증을 받아 식품생산업체가 반드시 갖춰야 할 신뢰 기반을 구축했다.20여 명의 종업원들도 모두 무주 사람들이다. 다듬기부터 씻고, 절이고 버무리는 모든 과정이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되는 만큼 사람을 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 선미농산(주)이 꾸준히 손맛을 지켜온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선미농산의 태동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북 청산이 고향인 박봉현(62세)씨가 무주군 안성농공단지에 사업장을 마련하면서 시작됐고, 10년 세월 동안 변함없는 맛과 품질을 지켜온 덕에 지금은 업계에서도 알아줄 정도로 입지를 굳히고 있었다.올해 7월 딸에게 가업을 물려준 박봉현 씨는 물설고 낯설었던 무주가 이제는 우리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삶의 현장이자 제2의 고향이 됐다며, 깨끗한 무주에서 생산된 김치라는 것만으로도 상품가치가 올라가서 그 덕을 보고 있는 만큼 지역사회에 이바지하는 업체가 되기 위해, 대대손손 자랑스러운 가업으로 물리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고 전했다.선미농산(주)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 대표 기업으로도 꼽힌다. 여성인력에 대한 적극적인 고용 조치를 실행하는 여성친화일촌기업으로서 올해 4월에는 전북광역새일지원본부 취업연계 및 사후관리사업의 일환으로 무주군과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8월에는 관내 기업들과 마음을 모아 누전으로 집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은 안성면 정 모 할아버지(73세, 안성면 공정리)를 도울 수 있는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이제 선미농산(주)의 목표는 김치 하면 선미농산이라는 인식을 심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것. 한국의 맛으로 대표되는 김치를 수출해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선미농산의 모태 무주를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각인시키겠다는 각오인 것이다.태권도 성지 무주에서 성장하고 있는 선미농산이 김치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고 김치로 인해 무주가 또 한 번 대한민국의 상징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을 지에 관심이 모아지는 대목이다.● 박은경 대표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더욱 정성"태권도와 김치는 한국을 대표하는 것들이잖아요. 태권도 성지 무주에서 생산되는 김치는 맛도 위생도, 품질도 모두 다르다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김치 유산균은 장 기능 개선 효과는 물론, 아토피 치료에도 효과가 탁월하다고 강조하는 박은경 대표(32)는 하지만 식단이 점점 서구화되고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는 식습관이 확산되면서 몸에 좋은 김치 또한 우리들 식탁에서 멀어지게 돼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전했다.이어 우리 국민들이 좋은 식습관을 회복하고 건강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선미농산이 일조를 하고 싶다며 김치가 밥도둑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 있도록 맛있는 김치를 담가서 전국의 소비자들과 만날 것이라는 각오 또한 잊지 않았다.아버지가 힘들게 일궈 놓은 선미농산 김치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날마다 살아있는 김치 맛을 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박 대표는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내 아이가 먹는 김치, 내 가족이 먹는 김치, 내 이웃, 나아가 세계인들이 즐겨먹는 김치라는 생각으로 맛만 봐도 선미농산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더욱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기획
  • 김효종
  • 2014.11.06 23:02

[(41) 청일전쟁 중국 역사현장- 산동성 웨이하이]7000톤급 북양함대 철갑함 복원 '치욕의 역사' 되새겨

난은 평정됐다.홍수전이 숨을 거둔 지 한 달 만에 천경이 함락됐다. 다시 청의 남경으로 돌아온 도시에는 양강 총독이 머무르게 됐다.내우는 정리돼가는 듯 보였지만, 외환은 여전했다.제2차 아편전쟁(1860)에서 또다시 굴욕을 당한 청은, 이어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제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흥 일본제국의 대만 침공(1874)과 류큐 합병(1879)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1876년에는 조공국이었던 조선이 일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개항을 하게 되면서, 조약문을 통해 자주국을 선언했다.청으로서는, 이대로는 중화제국의 면모가 서질 않았다.△북양함대의 도시 웨이하이산동성 웨이하이(위해威海)는, 조금 과장 섞어 말하자면 중국어 좀 많이 쓰는 여수 같은 느낌이었다.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변에는 하나 걸러 하나 빈도로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었고, 그만큼 한식당도 많았다. 정돈된 도로망과 건축물이 이루는 경관도 비슷했다. 웨이하이가 여수와 비슷한 이유는 또 있다. 바로 이곳이 근대 청 제국의 자존심이었던 북양함대의 근거지였다는 것이다.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와 닮은꼴이다.서로가 닮은 걸 알았는지 1996년 두 도시는 자매결연을 했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산동반도 동쪽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는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오래 전부터 군사적경제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당 대에는 신라의 법화원이 세워졌고, 명 대에는 왜적에 대비한 요새가 들어섰다.지형적으로도, 완만하게 들어간 만을 류공다오(유공도劉公島)가 막아서는 모양새로, 군항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리홍장(이홍장李鴻章)이 북양함대를 건설하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로 이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양무운동과 청의 중흥해군 건설은 20년 동안 이뤄졌습니다. 대만 침공(1874) 등에서 일본의 야심을 파악하고, 해군이 약한 것이 청의 문제라는 인식에서 해군 건설이 추진됐죠.왕지화(王記華49)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은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이같이 말했다.1874년부터 1880년께까지는 준비단계였다. 당장 해군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없으니 열강에 가서 운용법과 같은 것들을 배워나갔다.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청의 해군은 대대적인 확장을 거치게 된다. 중앙정부의 지원도 탄탄했고, 리홍장의 의지도 강력했다. 북양대신이었던 그는 북양함대에 모든 자원을 집중했다.그는 독일에서 딩위엔(정원定遠)과 천위엔(진원鎭遠)이라는, 7000톤이 넘는 철갑함도 도입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최강이었다.그 결과,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양함대는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떠올랐다.△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톈진조약(1885) 이후 겉으로는 평화로워보이던 동아시아도, 속사정은 상당히 복잡했다.메이지 유신을 통해 성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마친 일본은 원료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찾아 팽창할 수밖에 없었다. 급격한 사회 변화에 따른 국내 갈등은 말할 것도 없었고, 1870년대에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일본의 이익을 위해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의 그림자도 여전했다.청도 사정이 복잡했다. 이미 일본의 대만 침공과 류큐 합병에 무기력하게 끌려간 경험이 있는지라,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종주권을 놓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이런 양국의 입장은 군비 경쟁으로 귀결됐다. 청의 북양함대가 급부상하자 일본은 그에 맞설 신형 함선들을 경쟁적으로 도입했다.이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불씨를 당겨버린 것이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이었다.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조선은 청에 파병을 요청했고, 조선에 대한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세를 과시하고 싶었던 청은 곧바로 아산만에 원병을 상륙시켰다.문제는 톈진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들어있던 양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경우 서로 통보한다는 내용을 근거로 일본도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전주 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하고 조선 조정도 양국에 군대를 물릴 것을 요구했지만, 이런 기회를 일본이 놓칠 리가 없었다.왕지화 연구관원은 동학농민혁명은 구실에 불과했다고 잘라 말했다.청일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하기 전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며 조선을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다. 동아시아를 향한 팽창의 야욕이었다.일본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엮은 책 동아시아를 만든 열 가지 사건은 아예 청일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됐다고 언급하고 있다.△청의 잃어버린 20년괴상하게도, 청이나 일본이 아닌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됐다.1894년 7월 25일 아산 인근 풍도 앞바다의 포성으로 시작된 전쟁은 평양, 압록강 하구 등에서의 전투를 거친 뒤 1895년 3월,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청이 자랑하던 북양함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전후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의 결과, 청이 지불해야 했던 전쟁배상금만 2억냥이었다. 당시 청의 연간 재정이 8000만냥이었으니, 재정난은 뻔한 결과였다.여기에 일본은 대만, 요동 반도 등의 영토도 요구했다. 독일프랑스러시아의 3국 간섭으로 이 같은 요구는 철회됐지만, 대신 이들 열강이 중국의 도시들을 떼어갔다.안 그래도 힘들었던 중국 장삼이사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왕지화 중국갑오전쟁박물관 연구관원 "일본 국제정세 위협은 현재도 진행"-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메이지유신 이후의 근대화 노력으로 일본의 군사력은 강해졌다. 당시 중국은 리홍장의 주도 하에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군비 증강에 주력했는데, 이것이 북양함대다. 하지만 청일전쟁 즈음에는 정부의 재정난과 서태후의 사치 등으로 인해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훈련도 부실해졌다. 반면 일본은 전쟁에 대한 준비가 철저했다. 1890년 이후 4년 동안 이뤄진 집중 투자로 군세를 따라잡았다.- 청일전쟁 당시와 지금의 국제정세를 비교해본다면?공통점이라면 일본의 위협을 들 수 있겠다. 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평화헌법 재해석으로 인해, 일본은 현재 동북아의 가장 큰 불안 요소다. 120년 전의 길을 일본이 걷고 있는데, 한중 학자들이 힘을 합쳐 견제해야 한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120년 전에는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이었다면, 현재는 동등한 관계다. 또 120년 전과는 달리 지금의 중국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다만 중국도 주변국과의 마찰이 자꾸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불안요소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 후 중국 민중의 반응은 어땠는지?막대한 배상금으로 인해 재정난이 가속화했다. 또 중화민족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다. 뤼순(여순旅順), 칭다오(청도靑島)가 각각 러시아와 독일에 넘어가고, 웨이하이도 영국에 넘어가면서 위기의식이 생겨났다. 무술 변법이 실패한 뒤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신해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런 상황일수록 민족이 단결하게 된다.- 청일전쟁을 국가적으로 기리는 기념일은 있는지?국가적으로 통일된 기념일은 없다. 다만 전국 각지에 갑오전쟁 박물관이 있다. 기념일이라고 하면 9월 3일이 항일전쟁기념일인데, 이 날은 후에 일어난 중일전쟁을 기리는 날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4.11.05 23:02

[21.다문화가족 관계성 회복·증진 프로그램]온 가족 함께 뛰고 공 굴리니…문화장벽 '싹~' 행복지수 '쑥~'

정말 즐겁고 재미있었어요. 내년에도 또 할 거죠?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주관하는 다문화가족행복운동회가 지난달 25일 전북도교육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렸다.이 행사에는 결혼이주여성과 남편, 자녀, 시부모 그리고 한국에 방문한 이주여성의 친정 부모님 등 300여명이 참여해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다문화가족행복운동회는 가족간의 친밀성을 높이고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는 목적의 사업으로 다문화가족들의 뜨거운 성원을 받고 있다.2000년 이후 다문화가족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제 다문화가족은 우리사회 하나의 구성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도 세계화, 결혼연령 인구의 성비 불균형 등으로 다문화가족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앙정부의 제2차 다문화가족기본계획에 따르면 전국 다문화가족의 수는 2020년에는 약 10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전라북도의 2만6000명에 이르는 다문화가족의 수도 2020년에는 4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다.다만 상업적 국제결혼이 정부 통제정책의 영향으로 결혼이민자 증가 속도는 다소 하락한 양상이다. 그러나 일정한 비율로 결혼이민자의 유입이 안정화돼 있다. 따라서 다문화가족의 수는 현재 수준에서 지속적인 증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2012년 전국다문화가족 실태를 보면, 2009년의 실태조사 때에 비해 국내 거주기간이 5년 미만인 이민자의 비중이 상당부분 감소한 반면에 5년 이상 국내에 체류한 이민자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것은 신규로 유입된 결혼이민자의 비중이 다소 줄어들고 기존 결혼이민자의 국내 체류기간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결혼이민자들의 한국 거주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일반적으로 가족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내국인과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족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부부간의 소통 부재로 일어나는 문제, 고부간의 갈등, 자녀와의 관계 등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문제들이 지금의 수준보다 더 큰 폭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문화가족을 위한 관계성 회복과 증진 프로그램의 중요성은 더욱 크다.△다문화가족행복플러스전북도는 다문화가족 행복플러스라는 이름으로, 각 시군과 함께 다문화가족이 가정 내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의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진행한 다문화가족 행복운동회도 이 행복플러스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다문화가족 행복플러스 사업은 다문화가족캠프, 부부교육, 고부간의 관계증진 교육, 자녀와의 소통향상 교육, 임신 중인 이주여성에 대한 임신육아에 관한 교육과 태교 등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다문화가족들의 특성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진행된다.이런 교육을 받게 돼서 정말 좋아요. 감동이 있는 교육입니다.베트남에서 시집 온 한 이주여성의 남편 A씨는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진행된 부부관계 개선을 위한 교육에 참여했다.그는 감동이 있는 교육이었다며 교육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느꼈다고 밝혔다.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는 가족의 건강성 회복을 위해서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는 프로그램과 정서적 관계성을 증진시키려는 두 가지의 큰 줄기를 갖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주수진 상담사는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대화하면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이다면서 남성과 여성은 본질적으로 다르고, 살아온 배경과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는 또 다문화가족의 경우 문화적 이질성으로 인한 충격과 서로 다른 언어로 인해 소통의 한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교육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신체적 친밀감 쌓기와 정서적 공감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다문화가족 갈등 예방 중요한 역할다문화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결혼이민자와 배우자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는 다문화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남편, 아내, 시부모, 자녀 등에 관한 다양한 관계성 향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그런데 가족의 중요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남편들의 프로그램 참여가 그렇게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비해 남편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교육을 받으면서 가족의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노력이 아내인 결혼이민자의 몫으로 치우쳐 있는 경향이다.가정 내에서 실질적인 책임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가족의 관계개선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여전히 여성, 결혼이주여성의 몫이 되고 있다.전주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동준 팀장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문화가족의 관계회복과 증진을 위한 행복플러스 사업은 다문화 가족의 갈등을 예방해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그는 그러면서도 다문화가족의 행복은 가족구성원의 노력 정도와 여부에 따라서 단시일에 효과를 볼 수도 있지만 갈등이 깊어진 경우 오랜 시일이 걸릴 수도 있는 만큼 교육을 통해 인식의 변화에 참여해야 한다며 다문화가족 운동회 등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친밀감과 정서적 교감을 향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동준 전주다문화가족지원센터 팀장 "친밀도 높이고 관계 돈독, 올해는 남편들도 많이 참여"-다문화가족 행복운동회에 다문화가족들의 참여도와 반응은 어땠나요?다문화가족 행복운동회는 가족의 친밀성을 높여내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열렸습니다. 지난해에는 남편들의 참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들의 참여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토요일에도 일하시는 남편이 있어서 참여하지 못한 가정들도 있고 여전히 온 가족의 남편들이 다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남편의 참여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가족관계 증진을 위해 남편들의 의식과 의지가 점차 향상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문화가족들이 겪는 갈등과 어려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외국인들이 한국 사람들에게서 제일 일찍 배우는 것이 욕설과 빨리 빨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언어습관과 급한 생활습관은 가족관계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의사소통함에 있어서 언어를 익히는 기간 동안 소통의 한계가 있습니다. 가족마다 차이가 있지만, 결혼 초기에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급한 성격을 가진 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자극하여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합니다. 결혼하고 언어소통이 일정하게 이루어지는 경우에 결혼이주여성들이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을 한국말로 풀어냈을 경우에 남편이 이것을 참지 못하여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가족의 갈등예방을 위해 어떤 프로그램을 진행합니까?한국인의 언어습관과 급한 성격으로 인해 관계 문제에 어려움이 발생되기 때문에 분노조절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교육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격적 언어표출 방법보다는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언어의 기술에 대한 것도 교육을 진행합니다.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사랑의 케익 만들기, 가족이 함께 입을 수 있는 티셔츠 만들기 등 여가를 즐기면서 관계가 증진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4.11.04 23:02

[혁신도시에 둥지 튼 전기안전공사 이상권 사장] "전북, 전기안전 R&D 산업 중심으로 육성하겠다"

한국전기안전공사 본사가 전북혁신도시에 신사옥 ‘새울림’이란 이름으로 둥지를 튼지 4개월하고도 10일이 지났다. 전기가 몸에 흐르는 혈액이라면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인체의 혈액 공급을 원활하게 돕는 심장역할을 한다. 한국전기안전공사의 조직은 6처 4실 1단이며, 부설기관으로 전기안전연구원, 전기안전기술교육원 등이 있고 각 지역에 13개 지역본부 및 47개 지사가 운영되는 거대한 공기업이다. 하지만 신사옥을 전북혁신도시로 옮기고 난 뒤부터 제2의 부흥을 위해 산적한 문제들이 많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중앙 정부와의 연계 및 청렴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체적 움직임이다. 이런 가운데 법조인을 거쳐 정치인, 그리고 현재는 한국전기안전공사 수장을 맡고 있는 이상권 사장에게 거는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상권 사장은 지난 2월21일 취임한 이래 6월16일 전북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특히 열악한 전북 경제의 부흥을 갈망하는 도민들의 성원과 기대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가운데 이 사장도 이에 발맞춰 ‘전북에서의 제2의 도약’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기 안전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사장에게 향후 조직의 운영방침과 지역 사회를 견인할 사회공헌 비전 등을 들어봤다.-전북지역 근무는 처음인 것으로 아는데 내려오신 소감은.“전북혁신도시로 내려온 지 이제 넉 달하고 열흘이 지났습니다. 아직 많은 것이 새롭고 낯설지만, 전북도민과 전주시민 여러분의 친절한 배려와 환대에 공사 가족 모두 보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북 생활이 처음이지만 현재 전북도로부터 명예도민증까지 받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앞으로 전북도를 비롯한 도내 각 기관과의 협력, 전북도민들이 한국전기안전공사를 이전(移轉) 기업이 아닌 전북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사랑과 신뢰로 보답하겠습니다.”-법조인, 정치인에 이은 중요기관 중책을 맡은 각오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먼저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에 상당히 위축되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중책을 맡은 이상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고를 지향하기 위해 뛰겠습니다. 그간 공사 사장으로서 전국 시도 사업 현장을 찾아다니며 직원들 애로사항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중동, 두바이와 베트남 하노이 해외사업소도 둘러보며, 국익을 위해 땀 흘리고 있는 직원들 모습에 커다란 자부심 느낍니다. 사장이 해야 할 몫은 직원들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고객과 직원들 있는 현장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소통과 신뢰의 열린 경영’ 펼쳐나갈 생각입니다.”-한국전기안전공사의 경영 철학이나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면.“취임하면서 가장 먼저 약속한 것은 공사 기본업무를 혁신하겠다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기본임무 수행에 충실한 공직자가 되어줄 것’을 강조했죠. 이를 위한 경영비전으로 혁신, 신뢰, 소통에 기반한 ‘본(本) 경영’ 선언, 기본(Basic) 임무 충실, 고객에게 열린(Open) 자세, 국민안전기관으로서의 책임(Responsibility), 기업 혁신(New) 등을 꼽을 수 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근무 중 안전’입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기관이 스스로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면 고객과 국민이 어떻게 우리에게 안전을 위탁할 수 있겠습니까?”-전북 사회와 소통하고 연계하기 위한 전략이 있다면.“우리 공사는 이곳 전북을 미래 ‘전기안전 R&D 산업 중심’으로 육성하기 위해 다방면의 실천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지역 산학연이 함께하는 ‘실증단지 조성’을 검토 중으로 고급 일자리 창출과 교육 분야 유동인구 연 5000명이 예상됩니다. 또한 중소기업인을 대상으로 공공구매상담회를 정례화시켜 지역 중소기업제품 우선 구매 등 통해 판로 확보를 지원할 방침입니다. 우리 공사는 지난 9월, 전북도와 ‘지역연계사업 MOU’를 체결, 신입직원 공채 시 지역인재 채용비율을 기존 10%에서 15%로 늘린 바 있으며, 도내 농수특산물 및 지역중소기업, 장애인 생산물을 우선 구매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다문화, 조손가정 대상 무료 전기안전점검, 기초생활수급자 등 안전취약가구 대상 LED 조명등 교체사업, 농촌마을 전기안전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그린홈, 그린타운 봉사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전기안전공사가 하는 중요 업무를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전기를 우리 인체의 ‘혈액’에 비유하면, 한국전기안전공사는 혈액을 신체 각 기관에 안전하게 흘러가도록 하는 ‘심장’이라고 볼 수 있죠.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지난 1974년 창립 이후 지금까지, 전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와 올해로 40주년을 맞았습니다. 발전소 등 주요 산업시설에서부터, 아파트 등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전기설비에 관한 검사와 점검은 물론 전기안전 119(1588-7500) 긴급출동서비스를 포함해 낙도오지 주민들 위한 ‘전기안전 보안관 제도’, 쪽방 촌과 저소득 국가유공자가구 위한 주거시설 개선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지금 전기안전공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과 이를 위한 개혁 계획은.“전기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공사의 존립이유이자 핵심이죠. 그러나 아쉽게도, 공사를 비롯한 범정부 차원의 노력에도 우리나라 전체 화재사고 중 전기화재 사고 점유율은 수년간 20%대로 제자리걸음 상황입니다. 전기화재 점유율을 오는 2016년까지 선진국 수준인 15%대로 끌어내리는 것이 제 임기 중 가장 큰 목표죠. 특히 검사 제외 시설물에서 지속적으로 사고가 발생, 막대한 경제적 피해는 물론, (원전 가동중지 사고 등) 안전에 대한 국민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어 지속적인 법령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국민을 위한 공기업으로서 도민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전기는 오늘날 우리 삶에 있어 한시라도 없어선 안 될 필수 에너지원인 반면 늘어난 수요와 중요도에 비해, 전기안전에 대한 국민인식은 아직도 미흡합니다. 안전은 누가 대신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켜나가는 것으로 머리가 아닌, 우리 몸이 기억할 때까지 반복해서 훈련하는 것이 최고의 재난 예방대책이라 생각합니다. 전북혁신도시에 새롭게 기반을 마련한 만큼 이전 기업이 아닌 전북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도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이상권 사장은 법조·정치인 인맥 탄탄, 검사 출신 소통형 CEO한국전기안전공사 이상권 사장(59)은 국내외에서 유명한 소통파 팔방미인으로 불린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사장은 홍성고등학교, 건국대학교 법학과를 나와 1982년 사법고시(24회)에 합격했다. 검찰청 부장검사를 거쳐 변호사, 국회의원, 새누리당 원내부대표에 이어 현재는 한국전기안전공사 수장을 맡고 있다.이 사장의 다양한 사회생활이 말해주듯 그는 국내 어디에 내놔도 연을 맺고 있는 다양한 층이 많아 국내 대표적인 ‘소통형 CEO’로 꼽힌다.그는 지난 2011년 자신의 에세이 저서로 ‘쥐뿔도 없는 자존심 덩어리’를 발간해 세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쓸모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보다는 국익과 사익, 가정을 위해 자존심도 버릴 줄 알아야 더 큰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다.그는 검사 재직시절인 지난 1991년 법무부장관 표창과 검찰업무 유공 표창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수사했던 주임 검사로서 우리 사회에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크게 부각시킨 장본인으로 불린다. 또한 검사재직 시절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을 거치면서 공명선거를 유도한 공을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10년 11월에는 국회 의정활동분야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그의 화려한 이력이 한국전기안전공사의 경영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이강모
  • 2014.11.03 23:02

[(36) 진안 영농조합법인 'CK푸드']오리훈제·소시지 육가공 전문업체…작년 매출 60억

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제2농공단지에 (대표 이상훈48) 위치한 영농조합법인 CK푸드는 오리훈제품과 햄소시지, 베이컨 등을 전문생산하는 업체로 생산품중 70%가 오리제품이다.CK푸드는 이상훈 대표를 중심으로 10년에서 15년 경력을 가진 동반자 4인과 일반 직원 30명이 근무하고 있다.이 대표는 1988년 군 제대후 대학내에 있는 건국유업 건국햄사업부의 실습생때부터 육가공과의 인연이 시작됐다.졸업 후 대학원에서 육가공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2000년 1월까지 건국햄에서 각종 육제품 생산담당과장으로 근무했다.이후 지인의 소개로 배나무골 오리집이라는 다소 큰 오리전문 외식업체로 이직을 했으며 이때부터 오리고기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식재료를 미리 가공해 가맹점포에 공급하는 메인주방의 개발실장으로 2005년 중반까지 근무하다 이곳 진안에 자그마한 공장을 인수해 현재의 공장으로 신축하기까지 이르렀다.이 대표는 생산라인을 전문 자동화 설비로 갖추고 사업규모를 점차 확대해 나갔으며 2008년에는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HACCP)에 적합한 가공생산라인위생설비를 구축해 인증업체로 지정됐다.CK푸드는 안전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철저한 위생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2012년에는 경영혁신형 중소기업(MAIN-BIZ)로 선정됐다.현재 CK푸드의 거래처는 대형마트, 오리 전문식당 등 전국적으로 130여곳에 이르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은 60억 규모다.CK푸드의 생산 품목을 살펴 보면 훈제바비큐와 삼겹훈제, 오리 너비아니, 소시지, 생 유황오리 신선육 등을 만들고 있다.오리훈제 바비큐는 국내산 신선냉장 오리의 뼈를 완전히 제거한 후 다양한 양념으로 양념 후, 스모크하우스에서 참나무로 훈연, 가열해 익힌 제품으로 불포화 지방산을 다량함유하고 있어 현대인의 식생활에 알맞으며 맛 또한 좋아서 가정에서 영양간식, 고급안주로 인기가 많으며 식당에서는 보다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삼겹훈제는 삼겹을 일정한 크기로 절단한 후 다양한 양념으로 양념 후, 스모크하우스에서 참나무로 훈연, 가열해 익힌 제품으로 가정이나 식당에서 구이용으로 즐기며 일반 삼겹살 구이보다 기름기가 적고 은은한 참나무 향이 스며들어 색다른 맛을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소시지는 국내 최초 마에스터의 기술력으로 정통 독일식 햄과 소시지의 참맛과 질감을 느낄 수 있고, 맛의 고급화로 기존의 소시지와는 비교 할 수 없는 맛을 자랑한다.또 오리 너비아니는 기존 돼지육으로만 만들었던 너비아니를 오리육을 첨가해 생산한 제품으로 생산자가 용도에 맞게 완자, 햄버거패티, 떡갈비 등으로 여러가지 변화를 줄 수 있는 제품이다.● 이상훈 대표이사 "직원들 가족처럼 근무, 회사 운영에 큰 힘, 고객 만족 바른 먹거리 생산 최선다할 것"이상훈 대표이사는 3년 이내에 연매출 100억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벌써 100억 목표를 달성해야 했는데 거의 해마다 터지는 조류독감에 매번 매출 하락과 원료값 상승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표 달성이 늦어지고 있지만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강한 의지를 보였다.이 대표는 원년 맴버와 직원들이 가족처럼 근무하고 있는 것이 회사를 운영하는데 크게 힘이 된다고 언급한 뒤 아쉬움이 있다면 젊은이들 구인이 어렵고 물류에 시간과 경비가 다소 드는 점이 사업을 운영하면서의 아쉬움이라 하겠다고 말했다.이 대표의 이어 우리 CK푸드는 고객 여러분과 건강한 생활속에서 함께하는 기업으로 맛과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고객으로 부터 신뢰받는 기업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며 한결같은 마음 자세로 혼과 정성를 다해 바른 먹거리로 고객이 원하는 맛을 창조하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기업이 되겠다고 밝혔다.또한 그는 제2의 고향으로 진안에 살고있으며 같이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 만족할 수 있는 직장으로 자리매김을 하기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고 덧붙였다.

  • 기획
  • 김태인
  • 2014.10.30 23:02

[(40)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②기념시설] 1951년 박물관 개관…봉기부터 난징 함락까지 '한눈에'

장쑤성(江蘇省)의 성도 난징은 풍요로운 양쯔강 하류 평원에 자리하고 있다.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이 도읍으로 삼았던 도시이고,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중화민국의 임시정부를 설치했던 도시다. 이 외에도 여러 왕조의 도읍지였던 도시답게 고색창연한 멋이 가득하다.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금릉읍(金陵邑)이라 불렸으나 삼국시대 들어 오나라의 손권(孫權)이 건업(建業)이라고 개칭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초기에는 응천부(應天府)라 부르다가 후에 난징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때의 도시 이름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난징은 그러나 화려한 이력 이면에 난징조약, 난징대학살과 같은 역사의 큰 아픔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새겨진 역사의 다양한 흔적들은 난징 곳곳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태평천국운동 당시 태평천국의 수도가 바로 난징이었고, 이를 기념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동학혁명 통해 만난 태평천국중국 난징(南京)의 부자묘 서쪽에 있는 태평천국역사박물관에는 1850년 태평천국 봉기부터 1864년 태평천국의 수도인 난징 함락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사료가 전시돼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곳은 원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황제가 되기 전해 사용했던 오왕부(吳王府)였다. 이후 명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에게 주어져 정원으로 바뀌었다.또 청대에는 건륭제가 이곳을 첨원이라 이름 짓고, 남행 때 머물었다. 태평천국 시대에는 동왕 양수청(楊秀淸)이 왕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반세기 가까운 시간 주인이 수차례 바뀐 이 곳은 1951년, 태평천국 100주년을 맞아 중국 유일의 태평천국박물관으로 개관했다.박물관에는 당시 태평천국군이 사용하던 무기의복, 주요 지도자의 행적, 태평천국군의 세력도를 그린 지도 등 2800여점에 달하는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다. 특히 태평천국 관료 관복인 단룡마괘(團龍馬掛), 태평천국이 인쇄한 흠정사계조례(欽定士階條例) 등 희귀 원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은 2012년 교류협력에 관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뒤 두 민중운동의 학술 연구의 성과와 간행물자료의 상호 교환, 학술대회 공동 추진 등을 추진해 왔다.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한 해인 올해 8월에는 정읍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를 통해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의 자료유물이 국내에 처음으로 전시되기도 했다.△태평천국군이 함락한 난징난징시내에는 근대사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청나라 시대 양강 총독서, 태평천국의 천조궁전, 중화민국 임시정부 쑨원(孫文) 임시 대총통부, 국민정부 총통부 등으로 사용됐다. 그동안 집주인이 바뀐 것을 다 따지면 40번에 가깝다. 그만큼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곳이다.총통부는 현재 근대사 역사박물관으로 꾸며졌다. 총통부는 건물과 정원으로 구분되고 앞쪽의 건물들은 청 때부터 있던 전통 건축들과 20세기에 지은 양식건축들로 이뤄져 있다.건물로 들어서면 우측은 태평천국 당시 궁전으로 쓰였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천왕 홍수전의 집무실, 태평천국 100주년를 기린 기념비 등이 이곳이 옛 태평천국의 궁전 자리라는 것을 알려준다.1851년 3월 홍수전이 이끄는 수십만의 태평천국군은 난징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열흘 후 훙수전은 천왕(天王)의 복장을 갖추고 정식으로 입성했다. 이후 11년간 난징은 태평천국의 수도였다. 홍수전이 1851년 1월 청조 타도와 평등한 지상천국 건설을 내걸고 1만여명의 추종자와 봉기한 이후 그의 사망과 함께 태평천국이 멸망하기까지 13년간, 무려 2000만명 이상이 전투와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총통부는 오랜 세월이 흐르고, 주인이 여럿 바뀌면서 태평천국의 화려했던 시대를 보여줄 유물이 다소 아쉬웠다. 1982년 총통부는 전국 중점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됐고, 2004년 국가 4A급 풍경구로 선정됐다.● 장티에바오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 "중국 학계, 반청 기치 높게 평가, 1990년대 후반 연구 폭 넓어져"동학농민혁명에는 태평천국운동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의식이 깊게 자리했습니다. 불합리한 사회체제 개혁에 앞서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이 동학농민군의 면면에 흘렀다고 봅니다.이달 14일 중국 현지에서 만난 장티에바오(張鐵寶60)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중국의 대표적인 태평천국운동 전문가이다.그는 낯선 이방인들의 질문 하나하나에도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의 차가 식는 줄도 모른 채 성심껏 답변했다.-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는 많은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동감합니다. 두 사건 모두 농민소지주 등 피지배층이 주도가 된 민중운동입니다. 또한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 것과 당시 청나라와 조선이 이후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습니다.-태평천국이 바꾸려했던 것은 무엇입니까.천왕 홍수전은 반만흥한의 기치를 내거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청나라의 반대편에 섰습니다. 그는 또 봉건적 토지제도를 혁파하려 했고,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를 견지했습니다. 남녀평등 사상을 내세우는 등 기존의 봉건적 질서와 다른 길을 갔습니다.-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지.태평천국은 시종일관 청나라에 반대했습니다. 청나라 정부에 대한 반감이 거센 탓에 당시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구 열강세력에 대해 정부와 함께 대응하려는 노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조선 정부에 대한 변혁 보다 탐관오리 등 당시 지배층에 칼 끝을 겨눴습니다. 또한 외세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당시 정부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는 일에 선을 그었습니다. 동학농민군에 깊게 자리한 민족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태평천국이 몰락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지도부의 갈등과 반목이 심해지는 등 수면 아래 잠자던 내부모순이 태평천국을 결국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또 주요 구성원이 농민, 소지식인으로만 제한되면서 구현하려는 사상의 폭도 좁았습니다. 게다가 청 정부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애초 적게 걷던 세금이 많아지면서, 주 지지층인 농민들의 이탈이 가속화한 것도 몰락의 주요 원인입니다.-현재 중국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을 어떻게 바라보고 싶습니까.시대별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습니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청나라 정부에 저항한 점이 높이 평가되면서 학계정치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100주년인 1951년을 기점으로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학계 연구가 활발해졌습니다. 다만 문화대혁명기를 거치면서 태평천국의 역사적 의미사상이 저평가됐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연구의 폭이 크게 넓어졌습니다. 이때부터 태평천국군과 반대편에 선 당시 청나라 정부의 입장, 대응전략 등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 기획
  • 최명국
  • 2014.10.29 23:02

[20. 경로당, 제2의 삶의 터전으로] 고스톱 치던 공간…돌봄센터·세대간 소통의 장 탈바꿈

노인복지법 제36조 노인여가복지시설에 대한 법령을 보면 경로당을 지역 노인들이 자율적으로 친목 도모취미 활동공동작업장 운영 및 각종 정보교환과 기타 여가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를 제공함을 목적으로 하는 시설로 규정하고 있다. 2013년 12월 말 기준 전북도 신고 경로당 수는 모두 6472개소로 회원수는 19만9092명이다.65세 이상 전라북도 노인 인구 31만2000명 중 63%가 경로당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어르신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가시설, 경로당의 기능과 역할을 돌아보고 바람직한 운영 방안을 모색해 봤다.△경로당 활성화로 노인문제 해결최근 노인인구 증가로 인해 여러 가지 노인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고독사한 노인이 몇 개월 뒤 발견되거나 치매노인과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등의 기사로도 접해 볼 수 있듯이 고령화에 따라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제 노인문제는 그 당사자나 가족이 그 짐을 오롯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지역사회 노인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당사자와 가족의 짐을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사회에 귀감이 되고 있는 경로당이 있다.남원시 금동경로당은 건강한 노인이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돌보는 노-노케어를 실시하고 있다.이 곳에서는 생업에 종사하느라 가족이 온종일 함께 할 수 없는 초기 치매환자와 언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나 가족이 함께 하기 힘든 심한 천식 환자 등을 돌보고 있다.또한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며 우울증세를 보이는 홀로노인 등을 오랫동안 함께 한 이웃인 경로당 사무장이 경로당에 모셔와 돌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이렇게 경로당을 지역 요보호 노인의 돌봄센터로 운영함으로써 가족들의 수발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다.이로써 지역사회가 제기능을 할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은 물론 피돌봄 노인에게 친숙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돌봄 환경 변화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이처럼 금동경로당은 돌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등 지역사회 노인문제 대응에 대한 모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금암노인복지관에서 경로당 활성화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김하수 사회복지사는 경로당 활성화 방안에 대해 가장 먼저 경로당 임원들의 역량에 따라 운영의 투명성과 활성화 정도가 다르다며 회장, 총무 등 경로당 운영을 책임지는 리더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모범 사례를 전파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밝혔다.그는 또 경로당은 주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복지시설인 만큼 다수의 노인들이 경로당을 통하여 지역사회의 돌봄이나, 정서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지역사회와 밀착기능을 강화해야한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농촌지역과 도시의 경로당은 성격이 다르다며 농촌지역의 경우 빈곤노인, 거동불편노인, 독거노인 등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보호하고 돌보는 공동생활공간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으며 도시의 경로당은 주로 취미, 여가, 문화, 건강증진 등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그는 서비스의 중복이나 누락없이 효율적으로 지원될 수 있는 통합적인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세대간 이해도 높이기지난 15일 전주시 팔복동에 있는 복덕부녀 경로당에서 13세대가 함께하는 세대 음식만들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모처럼 젊은 대학생들과 경로당 어르신들이 음식 준비로 분주했다. 손자 손녀들이 즐겨먹는 피자, 샌드위치를 함께 만들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만든 음식의 일부는 인근 지역에 혼자 사는 어르신들에게 전달하여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생 정귀선 씨(23세)는요리경험이 많은 할머니들이라 양파썰기를 하는데 서툰 칼질을 잘 가르쳐 주셨다. 감자 삶는 법도 가르쳐주셨다며 어려워하실 줄 알았는데 처음 만드는 피자도 오히려 우리보다 더 능숙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들이 일의 순서와 방법을 잘 알고 진행하는 걸 보고 감탄했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손자 손녀에게 만들어 줘야겠다며 피자재료를 어디서 구하는지 묻기도 하였다.복덕부녀경로당 이점순 회장(84여)은 손자 손녀들하고 나들이도 가고, 공연도 보고, 이렇게 음식도 만들어 나눠먹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며 환하게 웃었다.이 프로그램은 세대간 이해도를 높이고 세대 통합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금암노인복지관에서 경로당 활성화사업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였다.사업을 담당한 김하수 사회복지사는 평소 경로당 어르신들은 누워서 TV를 보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시는데 복지관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는 참석률도 높아지고 강사의 지도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전주시에만 570여개의 경로당이 있는데 6개의 노인복지관에서 13개씩 경로당을 선정하여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운영이 활성화된 일부 경로당을 제외하면 대다수 경로당들이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고스톱을 치거나 낮잠을 자는 공간으로 방치되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경정희 전북도 경로당광역지원센터장 "통합복지 서비스체계 구축 필요, 노인 여가 복지시설로 활용해야"-전북도 경로당광역지원센터는 어떤 사업을 하는 기관이죠.전라북도의 경로당 수는 6472개로 노인복지시설의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역 어르신들과 가장 친근하고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은 단지 어르신들의 사랑방 기능으로만 제한되어 그 무한한 가능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전라북도 경로당광역지원센터는 이 가능성을 재발굴하여 단순한 쉼터 기능에서 벗어나 노인들을 위한 전문적이고 통합적인 복지서비스 제공을 통해 경로당 안에서 어르신들의 모든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관입니다.-현재 경로당 운영의 가장 큰 문제점과 해결 방안은.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경로당 프로그램 운영의 비효율성입니다. 경로당 관련 노인복지기관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함에 따라 서로 간에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아 프로그램 수혜 경로당들의 중복과 소외가 반복되고 있는 실정으로 전라북도 전역에 설치된 경로당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인복지기관이 모두 함께 협력하는 경로당 통합복지서비스 체계 구축이 필요합니다. 전라북도 경로당광역지원센터는 지난해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 전라북도 치매관리센터 등 총 10개의 노인복지기관과 협약을 맺었으며 올해 14개 시군 각각의 노인복지 관련 기관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협력체계 구축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향후 전라북도 대표 경로당 복지전문기관인 전라북도 경로당지원센터가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수행하여 효율적인 경로당 활성화를 위한 중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복지서비스 최적 모델을 개발 보급할 계획입니다.-경로당이 앞으로 어떤 공간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첫째 경로당은 기본적으로 해당 지역의 노인여가를 책임지는 통합 노인여가 복지시설로 활용돼야 합니다. 현재 경로당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여가는 TV시청, 말벗, 화투놀이 등 수동적이고 단편적인 여가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며 주기적으로 경로당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는 곳은 전라북도 전체 경로당의 25.1%에 불과합니다.둘째 경로당은 지역노인의 일상과 가장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집과 같은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로당 시설의 선진화가 필요합니다. 도내 많은 경로당이 노후되어 보수가 필요하며 경로당 간의 시설 편차가 심해 이용 회원들의 위화감이 조성되는 등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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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28 23:02

남원 남농영농조합법인 김영숙 대표 "친환경 농업시장 주목…2차 가공으로 부가가치 높여"

남농영농조합법인(대표 김영숙, 이하 남농)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젊은이들이 어려운 농촌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고향 농촌으로 달려가 설립한 영농조합법인이다.남원시 덕과면 사율리에 자리잡은 남농은 지난 20여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친환경농업이라는 시대적 화두에 집중, 연매출 100억 원에 육박하는 남원 대표 영농조합으로 성장했다.남농은 이제 생산과 가공, 유통, 서비스를 아우르는 6차 산업의 큰 틀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남농이 추구해 온 생산자 농민들의 1차 울타리 구실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다. 지난 23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남농 사무실에서 김영숙 대표이사를 인터뷰, 농업의 6차산업화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았다.-남농은 창립 22년된 농민 기업인데, 주로 어떤 사업을 합니까.초창기에는 서울, 성남 등 수도권에 사는 형, 동생 등을 대상으로 고향 쌀 판매 사업을 했고, 아이쿱 생협 등과 손잡고 우리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사업을 주로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친환경농업에 초점을 맞춰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곡종합처리장(RPC)은 대강면에 있고, 원예 청과는 이곳 덕과 사업장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0억 여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단기적으로는 매출 100억 원을 넘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합원은 약 300명 정도 됩니다. 남원 지역 생산 조합원들이 20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군산, 익산 등 타지역 조합원들입니다.-남농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19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가 상당히 나온 상황에서 농민회 조직을 통해 어려운 농촌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농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변화에 대한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이 농촌 현장에 들어갔는데요, 농산물 판매사업 과정에서 남농영농조합법인이 탄생하게 됐습니다. 남원농민회가 1989년 1월에 창립됐고, 남농은 1992년에 출범했습니다.-남원농민회의 경제사업은 어떻게 진행됐습니까.남원농민회의 목표는 살맛나는 농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부터 우리가 어떻게 경제사업을 할까 하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했죠. 그 결과, 현재 우리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도시에 팔기로 했습니다. 꿀을 팔았고, 쌀도 팔았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통일벼 수매가 중단, 농민들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 때 남원농민회 회원 16명이 화물차를 구입해 쌀을 서울에 직접 판매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마침 1994년 영농조합법인 특별법이 만들어지자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출범시킨 겁니다. 꿀을 팔면서 경제 마인드를 키웠고, 서울에 쌀을 직판하면서 쌀 출하작목반을 만드는 등 사업을 확대했습니다.-남농으로 법인 전환한 후 사업이 잘 됐습니까.남농은 전국에서 34번째 출범한 영농조합법인이데요, 성남과 서울에 쌀 판매점을 잇따라 냈고, 1994년에는 유통센터, 1995년에는 도정공장을 지었습니다. 대도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쌀 판매를 적극적으로 벌인 결과, 19951996년에는 쌀 사업이 엄청 번창을 했고, 성남 직판장이 3개로 늘었습니다. 78㎏ 소포장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등 쌀 판매를 선도적으로 치고 나갔죠.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당시에 쌀 사업만 했습니까.내부적으로는 쌀만 잘 판매한다고 농촌 일이 잘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고민이 있었고, 복합영농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1994년도에 덕과사매보절지역 농민들과 함께 채소 시설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작 들녘에 시설하우스 사업을 끌어들인 것이죠. 채소가 생산되면 곧바로 팔아야 하기 때문에 채소 유통센터와 저온저장창고도 지었습니다. 질 좋은 채소를 생산하기 위해 퇴비장도 지었죠. 남농이 사업체로 진화하는 초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기부터 준비를 잘한 것 같습니다.초반에는 그랬지요. 그러나 느닷없이 쌀 판매 현장에 먹구름이 끼었습니다. 1995년 무렵, 소비자 요구가 양에서 질로 변했는데, 남원지역 쌀을 수도권에 팔고 있던 남농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소비자층에서 밥맛이 없다는 반응이 나온 것이죠. 이런 쌀을 어떻게 먹어? 하는 반응이 나오면서 남농의 서울 쌀 사업이 망했어요. 다행히 1994년부터 1996년 사이에는 채소 사업 쪽에서 진행한 무농약 친환경 딸기 브랜드 새벽딸기가 큰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 소비자들 사이에 무농약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컸고, 새벽딸기는 현대백화점까지 진출했습니다. 당연히 새벽딸기 작목반이 만들어졌고요.그럼에도 불구하고 1996년 무렵에 흑자 내던 사업들이 적자를 내면서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사업을 전체적으로 정리해야 했습니다.-쌀 사업에 큰 변화를 꾀해야 했겠군요.서울에서 쌀 사업을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지역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남원과 임실, 순창, 무주, 장수, 진안, 곡성, 구례까지 지역의 농협과 일반 매장에 남농의 쌀을 팔았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죠.-미곡종합처리장(RPC) 사업도 이때 구상됐나요.남농의 당시 경영진은 많은 것을 깨달았죠. 쌀은 쌀대로, 원예 청과는 원예 청과대로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고민의 결과물이 RPC 사업과 친환경쌀 전략입니다. 당시 쌀 시장은 큰 변화가 있었어요. 도정공장, 도매점들이 미곡종합처리장과 대형마트에 밀려 사라져갔고, 이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들이 쌀 시장 대부분을 가져갔습니다. 그 틈에서 우리의 위치가 위험했고, 남농은 RPC에서 친환경쌀만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덕과에서 하던 사업을 분리, RPC를 대강면에 짓고 전문 경영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2006년부터 남원지역에 친환경쌀 작목반을 만들고, 전북지역 유통망을 확대했습니다. 아이쿱 생협에도 2010년 결별할 때까지 공급했죠.-남원지역 미질에 대한 시비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당시 우리는 그냥 우리쌀이면 다 좋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원, 특히 덕과면 일대의 미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먼저 작목반을 구성하고, 품종을 다수확이 아닌 고품질 쌀로 단일화했습니다. 친환경 농법, 즉 소식 재배와 땅심 높이기 등 땅으로 되돌려주는 농업을 하도록 유도하고, 논에 볏짚을 깔았죠. 결국 미질이 크게 좋아졌는데, 그 관리 비용이 여전히 만만찮아요.-새벽딸기로 시작된 청과는 어땠습니까.청과도 어려웠습니다. 청과 사업을 위해 서울에 유기농 전문 매장 금수강산을 만들었고, 나중에는 남농 지분을 51%로 한 남농CS라는 유통회사로 발전시켰어요. 그런데 당시 시장은 친환경 청과만 취급해 회사가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남농CS에 납품한 조합원들 외상이 쌓여갔고, 원성이 높아갔죠. 가만 둘 수 없었어요. 제가 2004년 대표로 취임한 후 담판을 짓고 결별했어요. 수년에 걸쳐 외상값은 모두 받아냈습니다. 결국 청과부문의 서울 사업도 중단한 것입니다. 남농은 1998년부터 아이쿱 생협과도 사업을 같이 했는데, 딸기 작목반 등 우리지역 개별 작목반들은 생협 쪽에 물건을 판매하면서 살아 남았습니다. 남농은 당시 걸음마 단계인 아이쿱이 맨 땅에 헤딩할 때 외상으로 물건주고 키워주었지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아이쿱이 산지를 가져갔어요. 우리를 거치지 않고 직거래를 한 것이지요. 그런 속에서 청과사업은 꾸준히 해 왔습니다. 전국적으로 일반시장에서는 보금자리, 생협시장에서는 청암농장의 딸기쨈이 유명했는데, 이들에게 딸기를 판매했어요. 초기부터 그런 사업을 계속 했고, 그래서 저희는 청과 정품부터 비품까지 판매할 수 있는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어요.-결국 초기부터 10년 넘게 진행한 사업들이 좌초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농민이 1차 농산물을 잘 생산하게 해서 유통시키는 것을 남농의 역할이라고 규정짓고 지난 20년을 달려왔습니다. 돌이켜보면 1차 농산물은 너무 경쟁이 치열하고 부가가치도 낮습니다. 동지라고 믿고 함께 해 온 아이쿱 생협 속셈도 결국 산지를 모두 계열화하고 싶은 것이었어요. 우리는 농부가 살 수 있는 조직을 추구하는데, 그들은 우리와 농부들을 떼어놓으려고 한 것이죠. 결국 2010년에 아이쿱과 결별하고, 거래를 단절했습니다.-당시 아이쿱과의 거래가 적지 않았을텐데, 대안이 있었습니까.다행히 우리가 계속 추구해 온 친환경농업 시장이 커지고 있었고, 친환경농산물을 학교 급식시장에 직접 공급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2006년부터 전북지역 일부 학교에서 친환경쌀을 썼는데, 너무 소량이어서 수익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학교 쪽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아이쿱 생협과 거래를 중단한 후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노력한 결과, 아이쿱 매출을 웃도는 학교급식을 확보했습니다. 남농은 현재 서울 11개 구청 65개학교, 부산 연제구 21개교 등에 납품하고, 전북지역에서는 남원과 임실지역 학교에 공급하고 있습니다.-농산물 가공사업 진출은?농산물 사업은 직접 생산자들을 만날 수 있는 면을 넓히고, 상호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구조를 갖춰 부가가치가 높은 진화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첫째는 1차 생산품을 가공해 생산하는 사업, 둘째는 복합영농입니다. 쌀 농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청과 등과 결합할 수 있는 복합영농, 친환경영농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자, 양파 등 이모작을 시도하고, 청과 산지 구축을 계속 주문하고, 가공사업을 진행했습니다. 마침 2012년말부터 전북 학교급식에 친환경 원예농산물이 공급되도록 결정됐습니다. 큰 힘이 됐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청과 산지를 만들고, 가공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청과는 반드시 가공사업과 함께 해야 합니다.-두레아띠 등을 통합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요.그렇습니다. 2012년 두레아띠, 2013년 꿈엔들 잊힐리야를 통합했는데요, 모두 농산물 가공사업장들입니다. 남농이 1차 생산물을 2차 가공하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사업, 즉 초창기부터 그렸던 그림이 이제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는 셈입니다. 남농은 인터넷 상에서 친환경먹거리 전문 쇼핑몰 유기엔(www.62n.c o.kr)을 운영하며 유기농 미곡과 친환경 청과, 가공식품 등을 판매하고 있습니다.-소비자 초청행사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1990년대부터 소비자 초청행사를 계속 이어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서울과 부산 급식학교 학부모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봄과 가을로 나눠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행사는 봄에 5회, 가을에 8회 합니다. 또 학생 학부모가 지역을 찾아오는 행사는 봄과 가을에 각각 3회씩 진행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6차산업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지요.소비자들이 덕과에 내려오면 지역의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농사체험이 1번이예요. 조합원들이 생산하는 논에 가서 봄에는 모내기, 가을에는 벼베기를 주로 하는데, 이외에 봄에는 감자 캐기, 가을에는 고구마 캐기, 미꾸라지 잡기도 하지요. 마침 덕과면 옆에 사매면 혼불 마을과 서도역이 있는데, 딱 좋은 관광문화코스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도역 레일바이크를 타고, 혼불 문학관도 들러 봅니다. 지역에서 생산된 쌀로 떡메치기를 하며 떡도 만들죠. 가을에는 탈곡 등 벼수확 체험을 하고, 짚을 꼬아서 재밌는 놀이도 해 봅니다. 우리가 만들어 내놓은 제품들을 맛보게 하면, 그들이 사가고, 모두 함께 식사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모두가 황홀해 합니다.-남원시에서도 많은 지원 협조를 할 텐데, 만족하십니까.남농의 지난 20년을 돌이켜보면, 선택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친환경농업을 남원 전역에서 하다보면 관리가 너무 힘들어요. 행정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행정이 지원하면 농가 소득이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친환경농업과 관련, 김 대표께서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이 지역 사매 덕과 보절 3개 면을 친환경 유기농업 특화지역으로 전면화 하는 것을 우리가 해보려고 합니다. 봄부터 경작자 모임을 계속 추진하고 있어요. 어차피 우리가 여기에 자리를 굳힌 만큼 대단위 유기농단지로 만들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지리산 온 사람들이 여기에 들러 하루쯤 머물러 가고, 먹고 체험하고, 그러면서 지역에 활기가 도는 것이죠. 좀 더 넓게 보면 남원과 임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요. 임실 치즈마을에 오시는 분들이 우리 지역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이것이 6차 산업 아닐까 생각해요. 그동안 남농의 선배들이 추구해 온 살맛나는 농촌 만들기라는 가치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생산과 소비, 도시와 농촌이 동행하는 방향으로 우리 남농의 브랜드 가치를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김영숙 대표는 '농민과 동행' 원칙, 10년간 영농조합 이끌어10년 째 남농영농조합법인을 이끌고 있는 김영숙 대표(51)의 어릴 적 꿈은 농촌에서 사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이었다. 완주 이서가 고향인 김 대표는 농촌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알았다. 어른이 되면, 농촌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서에서 전주여고까지 통학을 했는데, 아침마다 딸 버스비 빌리러 다니는 것이 엄마 아빠의 일이었다. 그런 가난한 농촌살이를 벗어나고 싶었다. 꿈이 컸던 그녀는 부모님이 권하는 상업고와 교육대학을 가지 않고 4년제 사범대를 갔다. 그것이 얼마나 부모님에게 버거운 결정이라는 것을, 철딱서니없는 짓이라는 것을 그 당시는 몰랐다.스물다섯에 남편 황의동씨와 결혼,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시댁에서 농촌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소녀시절 찬란하게 떠나겠다고 다짐했던 그 농촌으로 돌아간 것이다.힘든 농촌 시집살이였지만, 이겨냈다. 그 당시에는 운동적인 삶을 표현하고 싶었고, 그게 농촌이라고 판단했다. 내가 농촌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농민운동의 가치와 맞다고 생각했다.남편이 농사 짓다가 남농영농조합법인 실무자로 들어갔다. 혼자 농사지을 수 없어 함께 입사, 조합 일을 익혔다. 1994년 일이다. 조합은 당시 몇 년간 수도권 쌀 판매 덕분에 잘 돌아가는 듯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앓고 있었다. 운영자금이 없어 빚으로 연명하다보니 농가에 제 때 돈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남자들이 판을 벌리고, 어려워진 살림살이를 일으켜 세우지 못한 채 다 떠났다.2004년,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남농 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게 됐다. 적자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고, 빚을 갚아 나갔다. 흑자 구조로 바꿔야 살맛나는 농촌을 만들겠다며 세운 남농 문을 닫지 않는 길이다. 그러다보니 억척스러워졌고, 주위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김 대표가 지난 10년 남농을 이끌어 올 수 있었던 힘은 원칙이었다. 농민 조합원의 울타리가 되겠다는 원칙, 그들과 언제까지나 동행하겠다는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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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4.10.28 23:02

광주은행 인수한 JB 금융지주 김한 회장 "지역은행 한계 극복, 시장점유율 확대 기대"

JB금융지주가 전북은행 보다 규모가 두배나 큰 광주은행을 인수하면서 서남권 최고의 금융그룹으로 도약했다. 광주은행 인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김한 JB금융지주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 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은 지난 2010년 3월 전북은행장 취임이후 거둔 성과에서 엿볼 수 있다. 지방은행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수도권 등으로 영업망을 확장해야 한다는 경영마인드는 취임당시 83개였던 점포를 96개로 늘렸고 당시 7조원대에 머물렀던 전북은헹의 자산규모를 두배 넘게 증대시키는가 하면 이듬해 우리캐피탈을 자회사로 편입하고 2013년 JB금융지주를 설립하는 등 괄목상대한 행보를 보여왔다. 그 결과 전북은행을 기반으로 설립된 JB금융지주의 자산은 40조원으로 급신장했다. 이처럼 자산이 급증한 가장 큰 이유는 광주은행 인수 효과에 따른 것이다. 이와 관련 김 회장으로부터 광주은행 인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봤다.-JB금융지주가 지난해 7월 출범 했습니다. JB금융지주 설립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요.“지역사회에서 은행 사이즈가 작아지면 돈을 공급할 능력이 줄어들면서 지역의 경제 상황도 나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전북은행이 건실하게 커 나간다면 지역사회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할 수 있게 되고 이는 결국 은행과 지역사회가 같이 성장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JB금융지주의 설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진 것으로 JB금융지주의 비전은 지역에 기반을 둔 ‘중서민, 중소기업 중심의 소매전문 금융그룹’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새만금사업 등 향후 지역의 대형 금융수요 증가에 적극 대처하면서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강화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전라북도에 JB금융지주 산하 금융기관 및 그룹 자회사의 통합 상품 제공 등으로 양질의 금융서비스 제공 및 일자리 창출, 세수확대도 가능해 질 것입니다.”-광주은행 인수를 추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요.“요즘 금융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이러한 환경에서는 규모를 키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전라북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구가 줄고 있는 상황에서 전북에서의 영업망에는 분명 한계가 있고 이를 타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울을 비롯한 인천과 대전 등에 지점을 오픈해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도 지역은행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적극적인 노력의 일환 이었습니다. 이번 광주은행 인수도 그러한 측면에서 꾸준히 준비해 온 과정이 결실을 맺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결과 금융그룹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산규모도 40조원에 달하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또 광주은행 인수로 사업 확장과 함께 수익성이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며, 계열사 간 연계 영업 강화 등을 통해 시너지를 창출 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인수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요. “2011년 9월 우리캐피탈 인수와 지난해 7월 JB금융지주 설립과 함께 명실상부한 최고의 소매 전문 금융그룹의 비전을 달성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발판으로 광주은행 인수를 준비하였습니다. 2013년 6월 광주은행 매각 방안이 발표된 이후 광주은행 인수를 위한 예비입찰제안서를 제출했고, 12월 31일 광주은행 매각 관련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지난 1월과 9월 두 차례의 유상증자를 통해 3100억원을 조달했고 9월에는 국내 최초로 2000억원 규모의 코코본드를 발행하여 인수자금 준비를 마치는 등 매각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 되었으며 금융위원회가 지난 1일 개최된 정례회의를 통해 JB금융지주의 광주은행 자회사 편입승인과 잔금 납부로 광주은행 인수작업이 사실상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만 지난 2월 임시국회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 개정안 처리 지연으로 매각 일정이 두 달 연기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인수 후 기대되는 파급 효과는 무엇인지요.“전북은행과 광주은행의 공동망 운영으로 호남권 전역에서 JB금융그룹의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만큼 호남지역의 시장점유율 확대를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규모의 한계로 활성화되지 못했던 계열사 간 연계영업을 강화하고 이에 따른 마케팅 비용절감 및 브랜드 파워 제고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룹사간 연계영업·공동마케팅·IT공동이용 등의 시너지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전북도민들과 지역경제계는 광주은행 인수가 전북지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북은행과 광주은행이 별개로 운영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부분에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당장 지역내 파급효과는 미미하나 새만금 등 지역내 대형프로젝트나 현안사업의 경우 지역은행으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때 광주은행 인수로 규모의 경제가 달성되어 적극적인 자금 지원을 통한 지역사회 공헌이 가능합니다. 또한 JB금융지주라는 큰 지붕 아래 전북은행은 소매 고객 중심으로 광주은행은 기업 고객 중심으로 각각 운영해 위험을 분산하고 조직을 안정화 시켜, 이를 바탕으로 지역의 현안 사업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면서 중소기업 상인과 서민들을 위한 소매전문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히 임하겠습니다.”-광주은행 노조가 차기 은행장 후보로 자행 출신을 요구하는 가운데 김 회장님이 차기 광주은행장 후보로 선정됐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후보를 수락한 이유는 무엇인가요.“제가 광주은행 인수를 주관했고 이사회에서도 JB금융그룹 차원서 양 은행의 장점을 살려 광주은행 인수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제가 후보가 돼야 한다는 강력한 요청이 있어 수락하게 됐습니다. 실제 앞으로 광주은행도 전산시스템을 교체해야 하는데 전북은행과 연계하면 애초 500∼700억원 정도로 예상되는 교체비용을 300억원 정도로 줄일 수 있습니다.”-차기 광주은행장으로 취임하시면 어떤 행보를 보이실지 궁금합니다. 향후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우선적으로 임직원 및 지역사회와의 화합에 주력해 인수로 인한 우려감 등을 해소할 계획입니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여수신을 늘리고 영업을 확대해 지방은행으로서의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지역사회 공헌에도 많은 관심을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JB금융지주 회장으로서 향후 그룹의 운영계획과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인지요..“종합금융그룹의 면모와 위상이 갖춰진 만큼 앞으로는 자회사간 연계영업 및 공동상품 개발 등 그룹의 시너지를 극대화 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수립하고 추진할 계획입니다. 지주사 및 자회사의 경영건전성 제고를 위해 선제적 통합리스크 관리 체계를 마련, 잠재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지속 성장기반을 마련해 JB금융그룹이 호남금융을 넘어 서남권 전체의 주역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한 회장은 다방면 고루 섭렵한 국내 금융공학 1세대김한 회장은 김연수 삼양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장남이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예일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고 삼일회계법인과 미국 GM본사, 동부그룹 미국 현지법인 등을 거쳐 1989년 대신증권 국제본부장으로 입사하면서 금융 쪽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았다. 파마그룹 서울사무소 대표, 메리츠증권 부회장, 금융감독위원회 기업조정위원 등 자산운용, 증권, 보험, 은행 등 다방면을 두루 거쳤으며, 국내 금융공학 1세대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2010년 제10대 전북은행장에 취임했으며, 2013년 JB금융그룹회장 겸 전북은행장으로 취임했다.

  • 기획
  • 강현규
  • 2014.10.27 23:02

열여섯번째 서예전 산민 이용 선생 "서예인들 고전 읽어야 생명 가진 진실한 예술 할 수 있죠"

문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노정이 같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야 비로소 제 생명을 얻는다. 기록으로부터 출발한 문자는 시대를 건너면서 그 존재의 가치에 새롭게 눈뜨게 한다. 서예는 그러한 문자가 이루어낸 예술적 성취다.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옛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고 했다. 당대의 명필 추사 김정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던가.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다. 물질문명의 편리함과 속도감이 정점에서 맞닿은 오늘날, 서예의 존재는 무상(?)하다. 일상의 문화로부터 자리를 빼앗긴 서예는 예술의 영역에서 특정계층의 사유물로 존재한다. 어찌 보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일찌감치 서예의 가치에 눈을 떠 삶의 중심을 오롯이 이 문자예술의 영역에 가두어 살아온 서예가 산민 이용 선생(67)에게도 서예의 존재가 무거울까.전통서예와 현대서예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예의 영역을 넓히고 그 가치를 대중들에게 확산시켜온 그가 열여섯 번째 전시회를 열고 있다(10월 25일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1981년부터 2년 간격으로 줄곧 대중들과 만나온 그는 옛 글과 문장이 지닌 철학의 깊이를 문자의 조형성으로 다시 해석해 내놓았다. 전통의 영역은 더 견고해지고 창조의 영역은 더 치열해졌으니 교류와 융합의 미덕이 크다. 사실 옛 것의 가치에 천착해온 그의 서력(書歷)은 애애초 외형적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고진한 필치가 생동 운필하는 문자향은 소품이나 대작을 막론하고 스스로를 품어 관객들을 취하게 한다.이번 화두는 선(禪)을 묻다다. 진중한 화법으로 묻지만 즉답을 구하진 않는다. 대신 작가의 바람은 따로 있다.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태를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일깨우는 힘이 있거든요.문자의 예술적 성취는 외형에만 있지 않으나 이번 전시에서는 80년대부터 주목해온 금문(金文)의 조형세계는 단연 압권이다. 법화경을 금문으로 옮겨내는데 걸린 시간만 2년. 천착해온 집념도 그렇지만 산민만의 서체로 생명을 얻은 법화경 금문의 회화적 균형미가 놀랍다.최근,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부집행위원장으로 다시 축제의 현장에 합류한 그를 만났다. 위축되어 있는 듯 했던 서예의 존재가 새로워졌다. 기분 좋은 발견이었다.-작품의 규모가 놀랍습니다. 근작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몇 점을 제외하고는 최근 작품들입니다. 글씨 쓰는 일이 일상이니 작품을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역시 금문과 예서로 써낸 법화경이군요. 길이만 해도 200m가 넘는다니 우선 그 노동력이 감탄스럽습니다.금문 작업만 꼬박 2년 걸린 작품입니다. 예서는 아직 마무리를 채 하지 못했지만 내놓았습니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는데 펼쳐놓고보니 보람은 있습니다.-물론 2년 동안 이 작품만 써오신 것은 아닐 테지만 그 긴 시간동안 한 작품을 이어내야 하는 공력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서예는 같은 호흡으로 써내려가야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 글씨를 써낸 호흡으로 뒷 작업을 이어내는 일이 쉽지는 않죠. 그래서 자기 공부는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법화경은 그런 점에서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주제가 선을 묻다입니다. 답을 주시지 왜 구하십니까.(웃음)작품을 하다보면 경향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낍니다. 예전에는 논어 등 고서에 담긴 글, 인생살이에 가르침이 되는 글귀에 마음이 가닿았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교화적인 글 보다는 스스로를 사유하게 하는 글감들에 마음이 가더군요.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禪)적 사유랄까, 그런 글귀를 나누고 싶었습니다.-동적이고 치열해지는 세태와 관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치열해지는데 그런 정적 사유의 힘에 눈뜨게 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그래서 더 사유의 가치 발견이 더 필요해지는 것 아닐까요. 자연과 삶을 관조하며 살자고 하기에는 사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지요. 잘 살아가기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사유하면 성찰하게 되고 성찰하면 세상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서예는 옛 사람들에게 일상의 문화였습니다. 오늘에도 그런 문화의 가치가 유효할까요.물론입니다. 오늘날 빚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사람다움을 갖추지 못한 환경에 있습니다. 서예는 올바른 인성과 인격을 갖추게 하는데 좋은 바탕이 됩니다.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외면받기 십상이지만 디지털 시대에서 더 유효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서예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서예문화는 위축되고 있는 것이 현실 아닌가요.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서예인구는 정체되어 있습니다. 줄지도 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지요. 예전 한 시기, 유행처럼 번졌던 서실(서예학원)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교육의 형식이나 주체가 다양해졌기 때문입니다. 자치단체나 대학이 서예교육을 맡고 나섰잖아요. 전국적으로 열리는 공모전이 수백 개에 이르는 것도 그것을 증명합니다.-대학의 서예학과가 폐지되는 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인문학이나 순수예술의 위기와 맥을 함께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비단 서예만의 문제가 아니죠. 물론 서예가 예전보다 위축된 것은 사실입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서예는 자리를 빼앗겼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설되었던 원광대 서예과의 폐과 확정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근래 들어 아시아 3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서예를 주목하는 경향에 비추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서예 부흥을 기대할 수 있는 움직임인가요.우리나라만 해도 국회에서 서예진흥법 입법 작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서예진흥운동의 결실이지요. 국회에서 이런 작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정치성을 의심하는 분들도 있지만 세계 외교 분야에서는 아시아 3국 뿐 아니라 서예를 외교의 통로로 삼는 예가 늘고 있습니다. 서예는 인문학 부흥과도 직결된 분야이기도 하고요. 서예박물관의 활성화도 눈여겨볼만한 일입니다.-아시아 3국 서예문화는 어떻습니까.중국은 10여 년 전부터 광풍이라고 할 정도로 서예바람이 대단합니다. 이름 있는 서예가의 작품은 구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주문이 밀려있습니다. 자연히 서예가들의 활동이 활발해질 수밖에 없죠. 그러나 서예문화의 위상으로 본다면 한국서예가 우위에 있다고 봅니다. 중국 서예는 역사도 깊고 저변도 넓어 크게 발전할 여지가 있지만 문화혁명의 여파로부터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본 서예는 너무 일찍 서구화되면서 소위 전위서예 같은 형식이 확산되었죠. 너무 앞서가다 보니 서예 본질에서 벗어난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 비해 한국 서예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현대서예의 창작 영역을 확대해왔고 그 성취도 높습니다.-서예의 대중화는 아시아 3국의 공통적인 과제겠군요.물론입니다. 사실 한중일 모두 서예대중화를 주도한 시기가 비슷합니다. 세대로 볼 때도 비슷한 연령층이고요. 60대 후반부터 70대 초반에 이르는 세대랄 수 있겠는데, 한국 역시 우리세대가 서예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자료의 덕을 보기 시작했거든요. 중국과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서예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얻은 셈입니다.-세대의 특성을 더 이야기 한다면 이전에는 완전히 도제식 교육에 의존했었죠. 그래서 임서의 미덕이 가장 크게 부각되었었는데. 그렇다면 선생님 세대에 이르러 글씨의 자기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이전에는 서예와 관련된 책도 별로 없어서 스승이 써주는 글씨에만 매달려야 했어요. 공부할 수 있는 통로가 한정되어 있었죠. 물론 오래 공부를 하다보면 자기글씨가 나올 수 있지만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창의성을 발휘하기 어렵지 않겠어요. 문자향 서권기라고, 그만큼 책(자료)을 섭렵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 점에서 자료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게 된 우리세대는 행운이었죠.-오늘과 같은 디지털시대에 손글씨와 같은 아날로그적 요소가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예문화의 부흥이 기대되기도 합니다.물론입니다. 손글씨 쓰기는 매우 좋은 교육이에요. 특히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정서에는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내 경험으로 보자면 직접 손글씨로 쓰는 것이 온전히 내 것으로 돌아오더라고요. 책을 읽다가 좋은 글감을 만나면 지금도 반드시 만년필로 쓰는데, 그 쓰인 형태까지도 기억이 되거든요. 무엇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마음을 다스려주는 행위라고 봅니다.-서예 대중화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80년대부터 현대서예운동을 주도해오셨는데요.80년대 중반부터 현대서예 운동이 일기 시작했어요. 현대서예협회 이사장을 맡으면서 더 열심히 앞장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다시 전통서예를 찾게 되었어요. 물론 그 사이에도 전통서예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작업의 중심이 변화했죠.-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전통이 탄탄해야 비로소 현대서예, 창작의 새로움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서예를 앞세워 너무 쉽게 접근하는 움직임이 보였어요. 기초 없이 글자를 자기 마음대로 해체시키고 조합하면서 예술을 빙자한 근본 없는 작업들이 밀려오는데 겁이 나더라고요.(웃음)-금문에 천착하신 것도 그런 경향과 관련이 있겠군요.그렇습니다. 금문은 청동기에 새긴 문자입니다. 중국의 은나라 주나라시대에 활발했죠. 금문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그것이 지닌 회화성 때문입니다. 제가 현대서예를 했던 것도 임서보다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서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업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다보니 글자의 원류 쪽으로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겁니다. 문자의 원류에 가까워질수록 회화성이 빼어난 특성을 발견했지요. 제 경우는 금문 속에 답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어디서 처음 금문을 접하셨나요.고서에서 만났죠. 가슴이 뛸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이 글자가 다 짧은 것들인 거예요. 길어봤자 2-300자. 양에 차지 않았죠. 그래서 중국의 고서와 자료를 섭렵하며 온갖 금문을 모아 연구했습니다.-금문을 발표한 것은 꽤 오래전으로 알고 있는데요.현대서예 운동을 한참 할 때니까 80년대 중 후반쯤 일겁니다. 그때 전시회에 금문을 내놓았더니 반응이 별로였어요. 새롭다는 분들도 있었지만 좀 이질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컸죠.-그런데도 꾸준히 연구하고 재해석하면서 산민의 금문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집까지 낸 이유가 궁금합니다.어떤 서체도 따라올 수 없는 회화성이죠. 글자의 의미를 새기며 한자 한자 금문체로 만들어내는 그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취감이 크거든요. 지금은 회화적인 예술성에 주목하는 서예가들이 많아져 보람이 있습니다.-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서예축제로는 아시아권에서도 처음이었죠.그렇죠. 지금은 북경비엔날레가 생겼지만 우리와는 형식 자체가 다르고 권위나 위상도 우리가 우위입니다. 북경비엔날레는 규모는 크지만 전시 중심의 단일 행사거든요. 해를 거듭해가면서 발전하겠지만 서예의 대중화를 겨냥한 축제로서의 의미는 아직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가 유일합니다.-축제는 규모도 중요하지만 외형적인 성장만이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축제의 정신을 어떻게 구현해내느냐가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물론입니다. 서예비엔날레는 그런 점에서 제 길을 잘 걸어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면서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대중화를 위한 현대 작업의 노정도 주목하는 취지를 잘 반영해왔으니까요.-10여 년 동안 중심에서 활동하시다가 잠깐 쉬셨죠. 올해 다시 부집행위원장을 맡게 되셨는데 서예비엔날레의 방향이 궁금합니다.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서예비엔날레가 이룬 성과는 적지 않습니다. 우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 성과를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과제가 없는 것은 아니죠. 이 축제를 시작할 때도 그랬지만 서예의 대중화는 여전한 과제입니다. 대중들이 공감하고 서예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이 더해져야 합니다. 서예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내는 일도 그렇고요. 서예비엔날레를 끌어갈 전문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 과제를 풀어내는 일에 힘을 합할 생각입니다.산민은 책 욕심이 크다. 한때는 광주의 고서점을 뒤지느라(?)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우리 고서는 물론이고 중국의 고서에 이르기까지 그가 갖고 있는 자료는 엄청나다. 책만도 만권이 넘고 소소한 자료는 그의 서재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 왜 그렇게 고서에 집착하는 것인가 궁금했다.고전은 오늘의 거울이거든요. 고전을 읽어야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특히 고전을 읽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글씨의 형식미가 아무리 빼어나다해도 생명은 가질 수 없습니다. 서예는 진실한 예술이거든요.고전에 놓인 길이 어찌 서예의 길 뿐이겠는가. 그가 대중들에게 전하고 싶은 답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용 선생은 강암 송성용 선생에 배움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탄생 앞장산민 이용 씨는 김제가 고향이다. 한약방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글씨 쓰는 일을 익혔다. 서예를 제대로 배우고 싶었으나 아버지는내 글씨 배워서 뭐하냐며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서예와 관련된 책과 자료를 건네주시며 평생 학문을 가까이하고 글씨를 쓰며 살아라. 대신 글씨 쓰는 일로 먹고 살지는 말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어기고 글씨 쓰는 일로 먹고사는 전업서예가가 됐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홍익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다. 불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정작 미술을 전공하는 일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어지러운 시대 상황이 그를 학교 밖으로 몰았다. 일간지에 체제 비판 글을 기고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 꼬박 열흘 동안 고생하고 나왔다. 그 뒤 자신의 호를 스스로 삼민(三民)이라 지었다. 농민(聾民) 맹민(盲民) 아민(啞民). 귀가 있어도 듣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지 않으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후에 강암 선생은 제자에게 삼민 대신 산민(山民)이란 호를 주었다.그즈음 군대를 갔다. 최전방에 배치되었지만 글씨 잘 쓰고 바둑 잘 두는 잡기(?) 능한 사병을 눈여겨 본 상관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이곳저곳 불려 다니다 보니 소속 군대조차 불분명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부대 사고에 연루돼 월남으로 갔다. 돌아와서는 복학 할 생각이었으나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책 판매원을 하기도 하고, 기업의 공채로 직장생활도 했다. 강암 송성용 선생을 찾아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동안 써둔 습작을 들춰본 스승은 그에게 말했다. 글씨 좀 쓰겄네.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사시공부에 잠깐 마음을 두었지만 법원 행정직 시험을 거쳐 법원 직원이 되었다. 서예를 병행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그 직장도 6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온전히 서예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고서와 온갖 자료를 섭렵하며 폭을 넓혔다. 40대에는 현대서예 운동의 선두에 섰다. 1981년부터 2년에 한번꼴로 전시회를 열어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1997년, 서예 축제로는 최초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탄생시켰다. 50대와 60대로 건너가는 시기 10여년을 서예비엔날레의 기반을 다지고 동력을 만드는 일에 고스란히 바쳤다. 보람은 컸지만 내공을 쌓는 시간이 너무 오랫동안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업(?)으로 돌아와 고서를 섭렵하고 금문 연구에 천착했다. 그동안 출간한 책만도 수십 권. 〈예서시탐〉 〈한묵금낭〉 〈금문천자문〉 〈명문100선〉 〈금문총서〉 등은 스테티셀러가 되었다. 한국현대서예문인화협회 이사장,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집행위원장과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올해 다시 서예비엔날레 부집행위원장을 맡아 현장에 합류했다. 이번 전시는 열여섯 번째 개인전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4.10.23 23:02

[(39) 중국 태평천국운동 역사현장을 가다-①프롤로그] 반봉건·반외세 '아래로부터의 개혁' 동학혁명과 닮아

● 동학혁명과 유사점 - 종교조직 기반 피지배계층 주도 봉기, 토지 균등분배근대화 운동에 영향● 동학혁명과 차이점 - 반청 기치 건국교주가 천왕에 올라, 내부 지도층 간 살육전으로 몰락의 길올해로 120주년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은 갑오년 당시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었다.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봉건사회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반봉건 근대화운동이며,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제국주의 세력을 타파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이런 동학농민혁명의 궤적은 프랑스혁명과 중국 태평천국운동과 견줄 수 있다. 특히 종교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반제국주의를 표방한 점에 있어서는 태평천국운동(1851~1864년)과 깊은 유사점을 갖는다.이 두 사건 모두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청나라와 조선의 근대화운동에 일정부분 영향을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에 전북일보는 지난 12일부터 16일까지 중국 근대 최대 민중혁명이었던 태평천국운동의 본거지였던 중국 난징(南京)과 동학농민혁명의 국제적 배경이 된 갑오 청일전쟁의 무대였던 웨이하이(威海)를 방문했다.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답사를 통해 동학농민혁명과 태평천국운동의 연계점, 두 사건이 이후 국제정세에 미친 영향 등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중국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이념, 중국 현지 태평천국운동청일전쟁 기념시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국의 관점 등에 대해 4회에 걸쳐 짚어본다.△태평천국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청나라 말기 관료와 군대의 부패와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이 심화하면서 사회적 무질서현상이 빚어졌다.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은 제자리이고, 아편 유입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인해 농민 가계는 더욱 악화됐다.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성(廣西省) 역시 이런 일반적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특히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이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 요소도 커졌다.이 가운데 독특한 관습과 방언을 이어오면서 광동성 내 화북 출신 이주민들과 현지 한족 사이 분쟁도 격화됐다.이주민들은 힘을 모으기 위해 하나의 단체로 규합됐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런 이주민들의 종교결사로부터 시작됐다. 종교결사인 배상제회의 창시자이자 태평천국운동의 지도자인 홍수전(1814 ~1864년)은 광둥성 출신으로, 먼 선대가 화북에서 이주해왔다.몇 차례 과거시험을 치르는 등 관리를 꿈꿨던 홍수전은 과거시험을 치르는 길에서 우연히 읽게 된 그리스도교 선교책을 본 뒤 독자적인 그리스도교리를 바탕으로 1844년 배상제회를 창시했다. 배상제회는 홍수전의 지인인 풍운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신도가 급격히 늘어났다.배상제회는 우상 파괴와 향촌민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면서 향촌사회 기존 세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배상제회는 신도들을 무장조직화했다.또한 이들은 당시 청나라 지배계층인 만주족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청나라와의 결전도 피할 수 없었다. 2만여명에 달하는 강력한 무장집단을 이루게 된 배상제회는 1850년 7월 봉기해 청나라 군대와 곳곳에서 충돌하며, 북진했다. 이 과정에서 1851년 1월 11일 홍수전은 태평천국의 수립을 선언하고 3월 천왕(天王)에 즉위했다.이후 홍수전은 휘하의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안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에 각각 봉하는 등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이 즈음 태평천국군의 병력은 50만명으로 늘었고, 1853년 3월 드디어 강남의 중심지 난징을 점령한 뒤 수도로 삼았다.△태평천국의 이념태평천국의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매개로 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인 태평천국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됐다.1853년 간행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는 태평천국의 지향점이 될 정치경제사회의 체제이념과 정책이 정립한 것이다.이를 보면 토지와 생산물을 포함한 만물을 국가가 관리분배하도록 했다. 토지의 경우 노동력에 따라 균등하게 분배하되 분배를 위해 기존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한다는 규정은 없었다.이는 대체로 사유권의 강력한 통제를 통한 균등한 경제체제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한 태평천국은 난징 점령 직전부터 반청혁명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광범위하게 알렸다. 이는 농민광산노동자유민 등 사회 피지배층의 절대적인 호응을 받는 계기가 됐다.반면 이 때문에 당시 지배계층인 신사, 지주, 부유한 상인의 외면을 받기도 해 향후 태평천국의 고립을 좌초하기도 했다.△태평천국의 몰락태평천국운동이 몰락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지도층의 반목이었다.난징에 도읍을 둔 후 천왕 홍수전은 명목상의 지도자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주위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친족과 부하 등 2만여명이 살해되면서 태평천국군 전력은 큰 손실을 입었다.이후에도 내부 지도층간 살육전과 숙청이 이어지면서 내부 갈등은 심화됐다. 또한 향촌에서의 세력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한인 관료 및 지주층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무장세력과 청나라 군대는 점차 포위망을 좁히면서 태평천국을 압박했다. 그러면서 초반 사태를 주시하던 서구 열강이 청군에 대해 근대무기와 훈련법을 전수하면서 청나라 군대의 위세도 강화됐다.전방위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태평천국은 1864년 7월 수도인 난징이 증국번의 군대에 점령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다.△동학농민혁명과의 비교태평천국운동과 동학농민혁명은 모두 농민 등 피지배층의 주도로 일어났다.이들 농민군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맞선 투쟁, 외세의 침략행위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에서 유사성이 두드러진다.또한 종교조직을 통해 봉기의 명분을 쌓고 세력을 규합한 것과 이후 청나라와 조선이 외국 열강의 침략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보면 두 사건을 같은 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다.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태평천국이 시종일관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국가전복을 꾀한 것에 비해 동학농민군은 때론 조선 조정과 타협하기도 하는 등 국가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는 일에는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정부체제를 변혁하기 보다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지주에 대한 저항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장티에바오(張鐵寶) 난징 태평천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은 이상적인 사회구현을 꿈꾸고, 반외세를 기치로 내건 점에서 두 역사적 사건은 공통점이 많다며 이런 민중혁명이 이후 양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4.10.22 23:02

[19. 여성새로일하기센터 집단상담 프로그램]"'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자신감 길러줘요"

내 마음 속 작은 텃밭에 씨앗이 자라날 수 있게 도와주신 집단상담 프로그램 운영자님께 감사드립니다.전북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운영하는 집단상담 프로그램 참여자의 수료식 소감이다. 집단상담은 경력단절 여성들이 신속하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취업의욕 고취구직기술 향상 등의 직업진로 지도와 취업알선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고용보험법제26조 고용촉진 시설에 대한 지원,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제17조의2 경력단절 여성의 능력개발과 고용촉진지원에 따라 고용노동부 지원으로 전국 130개소 여성새로일하기센터를 비롯한 고용센터, 민간(또는 지방자치단체)등에 위탁해 실시하고 있다.크게 3개 프로그램으로 나뉘어지는 집단상담 프로그램은 먼저 win프로그램으로 취업의욕 상실 및 자신감이 부족한 경력단절 여성들을 대상으로 생애설계, 자신감 향상, 이미지 메이킹 등 취업의욕 고취구직기술 향상 등을 지원한다.다음은 win 프러스 프로그램으로 취업을 앞둔 경력단절 여성에 대해 자신감 및 효능감 향상, 직장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직장적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마지막으로 재복귀 지원프로그램으로 재취업 지원서비스를 통해 취업한 경력단절 여성 중 6개월 이내 이직한 여성을 대상으로 프로파일을 통해 유형을 진단하고 이에 따라 재복귀를 위해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일반적으로 경력단절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에는 win 프로그램과 win프러스 프로그램을 적용운영하고 있으며, 4일에서 5일(20시간) 동안 진행하는 집단상담은 취업을 희망하는 구직여성을 대상으로 하며 10명에서 최대 15명이 참여할 수 있다.운영하는 프로그램은 고용노동부와 여성가족부가 공동으로 제작한 집단상담 프로그램 표준 운영 매뉴얼에 따라 지역, 참여자 연령, 학력 등의 편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섯 개의 모듈로 구성했다.모듈은 자기이해를 돕기 위한 나의 마음 이해하기, 나의 스타일 발견하기, 직업정보를 찾기 위한 선호하는 직업 찾기, 마지막으로 진로계획과 구직전략을 제시해주는 취업의 문 들어서기, 내 직업에 도전하기 등으로 구성된다.친구의 권유로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한영숙씨(46여)는 지방대 국어교육과 졸업 후 결혼과 함께 3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에만 신경써온 전형적인 전업주부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언젠가는 활용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식조리기능사, 요양보호사, 특수아동치료기능사, 컴퓨터자격증까지 온갖 자격증을 섭렵했다. 하지만 40대 중반에 접어든 요즘 들어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라는 두려움, 막막함에 정작 도전은 해 본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 저편엔 어떤 일이든 도전하고 싶고 남편의 월급만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경제력을 갖고 남편과 아이들에게 당당해지고 싶다고 했다.모자를 눌러쓴 화장기 없는 차가운 이미지에 생기 없는 목소리, 세상이 싫고 혼자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참여하게 됐다는 송미선씨(39여)는 2년 전 남편과 이혼 후 딸아이 양육을 위해 취업을 했지만 잦은 야근에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렵고 매번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전직을 위해 쉬는 기간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집단상담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집단상담 첫째날, 전체 프로그램 소개와 참가자들 간 자기소개, 성격검사가 진행된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을 이해하고 서로 간에 친밀감을 형성함으로써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스타일을 파악, 긍정적인 자아감을 회복함으로써 재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된다.둘째날, 직업선택 이전에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자신의 직업 흥미나 직업 가치관 등을 탐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자신의 특성을 명확하게 알게 되고 자신에 적합한 직업을 연결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직업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셋째날, 주요 직업관련 사이트에 대한 소개와 탐색이 이루어지고 선호하는 직업과 정보를 찾아보는 실습을 진행한다. 이를 통해 직업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정보 탐색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또한 선호직업군 종사자와 인터뷰를 통해 해당 직업 현장경험을 공유하고 희망직업의 현실 가능성을 파악하게 된다.넷째날, 참여자들의 인간관계망과 취업 장애 요인들을 탐색하고, 취업을 위한 실천 계획을 수립,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활동들이 진행된다. 이는 취업에 필요한 실제적인 실천전략을 수립하고 준비하는 활동으로, 단기적인 행동방향을 정하게 해주고 취업을 위해 구체적으로 준비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마지막 날, 실제 구직단계에서 요구되는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대해 배우고 모의면접을 위한 카메라 테스트 등에 참여하게 된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구직활동을 준비하게 된다. 또한 프로그램이 종료되는 시점인 마지막 날, 프로그램 참여를 통해 변화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수료식을 진행하게 된다.집단상담 참여자는 전라북도의 경우 7개 여성새로일하기센터(전주 2개소, 익산군산정읍남원김제 각 1개소)를 통해 2014년 기준 1600여명(전국 130개소 2만8000여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고용센터와 민간위탁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또한 집단상담 수료자 중 70%이상이 재취업에 성공하고 있다. 때문에 일자리를 갖고 싶지만 경력단절 기간이 오래되어서, 나이가 많아서, 스펙이 없어서 등 이런저런 이유로 용기가 나지 않는 여성들이 있다면 집단상담 프로그램 참여를 적극 권유해 보고 싶다.물론, 집단상담 프로그램이 여성 취업의 만능 해결사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신에 대한 존중감을 살리고 취업에 대한 의지를 일깨우는데 있어서만큼은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프로그램이 진행되는 5일 동안 재취업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참여자들 간 소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줌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당당하고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달라진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수형 직업상담사 "다른 사람과 함께 취업 고민 해결을"-집단상담 프로그램 운영의 필요성은.일반 구직자가 느끼기엔 집단이라는 단어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참여자분들이 집단이라는 단어를 듣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참여해야 할지 많이 망설였다는 얘기를 자주 듣곤 하죠.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강점은 취업을 하는데 힘든 점을 혼자만 고민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친화력이 생기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 가졌던 거부감이 오히려 마지막 날에는 자신감을 갖게 하고 취업결심을 할 수 있게 하는 마력을 가지게 됩니다. 5일 동안 취업이라는 씨앗이 자랄 수 있도록 햇빛조절(대인관계 및 의사소통)과 충분한 거름(자신감)으로 취업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집단상담 운영 때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매번 참여하는 분들의 성향이나 특색이 있다 보니 매 회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항상 긴장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이 있는 전날이면 항상 밤잠을 설치며 다음 날 어떤 다양한 분들이 참여할까를 생각하며 기대반, 설렘반으로 첫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수료한다고 해서 자격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면 집단상담 프로그램의 의미는 없는 것이기에 매 순간, 매 시간을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참여자 분들이 모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참여했는데, 그 기대란 바로 자신감과 취업이겠죠. 그 기대에 보답을 해야 하기에 직업상담사로서 많은 노력과 함께 가장 어렵고 큰 숙제라 생각합니다.-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방법은.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을 때에는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 말고 지체 없이 가까운 새일센터, 고용센터를 방문하거나 전화로 신청하면 됩니다. 또 취업은 하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생각되는 분, 자신감이 결여되어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에게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4.10.21 23:02

김제 참조은밀협동조합 신정애 대표이사 "밀 농사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 출발했죠"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 신정애 씨(56). 벼농사와 우리밀을 이모작하는 신정애 씨는 지난해 진봉과 만경 일대 농민 26명을 조합원으로 규합,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설립했다. 신씨가 대표이사를 맡았다. 1년 농사를 지었는데 성공적이다. 250필지에서 400톤을 생산, 전량 수매 처리했다. 올 가을 밀 파종을 앞두고 종자 보급을 위해 참여 농가를 조사한 결과는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다. 희망농가가 계속 늘고 있어 종자 대금을 선착순으로 받아야 할 정도다. 내년 7월 수매량이 700800톤 정도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밀 협동조합을 설립한 신 대표를 비롯, 참조은밀 조합원들의 목표는 밀 생산은 물론 밀을 가공하고 유통 서비스하는 분야까지 아우르는 6차산업의 완결이다. 익산의 작은 양계장에서 출발, 수조원 대 식품 대기업으로 성장한 하림이 수직계열화 사업구조를 성공적으로 이뤘듯, 우리밀 살리기 정신으로 뭉친 참조은밀 조합원들의 열정도 대단하다.신정애 대표이사(56)를 지난 10일 진봉면 고사리 신 대표이사의 자택에서 인터뷰 했다. 인터뷰 자리에는 참조은밀협동조합 이한섭, 김현중 이사도 함께 했다.전주에서 김제 만경읍을 지나 진봉면 지역으로 진입했을 때 서해안 새만금 방면으로 확 트인 너른 들녘은 온통 황금색이다. 밀은 지난 6월 쯤에 수확, 7월까지 수매가 끝났다. 지금은 밀농사 준비 기간이다. 가을 땡볕에 한창 여물어가고 있는 벼를 수확하고 나면 곧바로 밀 농사가 시작될 것이다.신정애 대표이사의 자택 마당에 들어서는데 출타하려고 막 포터트럭 운전석에 오르던 아저씨가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더니 아내(신 대표이사)를 부른다. 신 대표의 남편 유기문씨(60)다. 현관문이 열리고 신 대표가 얼굴을 내밀었는데 웬지 거동이 불편하다. 거실에 들어서니, 창가에 침대가 있다. 병원 침대다.-몸이 많이 불편하시군요?제가 지난 7월 2일 밀 수매 작업을 하다가 톤백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어요.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살려준 것 같아요. 감사하고 있습니다.참조은밀협동조합 설립 후 첫 수매가 시작된 지난 7월2일, 이날은 신 대표에게 매우 뜻깊은 날이었다. 조합원들이 생산한 밀을 수매하고, 그들에게 땀의 결실을 돌려 주는 일이다. 신 대표는 수매 현장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밀이 담긴 톤백을 싣고 창고 쪽으로 들어서던 트랙터가 도로 과속방지턱을 넘으면서 갑자기 기우뚱 했고, 갑작스럽게 떨어진 밀 톤백(1000kg)이 신 대표를 덮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대형 사고였다. 모두가 영락없는 사망사고로 생각했지만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갈비뼈와 골반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병원에서 꼼짝 할 수 없었다. 사고 4개월 째인 요즘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지만, 걷기가 불편하다.-1990년대 초반 우리밀 살리기 운동이 일어날 당시만 해도 우리밀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협동조합을 만든 동기가 있습니까.아시다시피 조합은 작년 9월에 만들었는데요, 제가 밀에 관심 가진 지는 오래됐어요. 밀농사를 본격적으로 지은 것은 10년 전이구요. 밀에 관심을 갖고 있는 터에 김제시우리밀영농조합법인을 알게 됐고, 이사로 2년간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진봉면에서는 저를 비롯해 많은 농가들이 밀 농사를 100필지 이상 짓고 있었죠. 그런데 우리밀 생산량이 4만 톤을 넘어선 2011년 밀 파동을 겪은 후 진봉면 농가들이 아무도 밀을 갈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소득이 있어야 하는데, 수매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자 밀농사를 기피한 거예요. 밀은 제가 관심을 가진 후 열정을 쏟은 작목입니다. 진봉면에 밀이 없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행히 이한섭 이사 등이 도와주셔서 참조은밀협동조합을 만들게 됐습니다.-뻔한 질문 같지만, 어떤 취지를 갖고 출발했습니까.저희들은 생산자니까, 처음에는 생산을 해서 판매만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회의를 거듭하면서 가공과 유통, 서비스 등 밀과 관련된 여러 사업을 두루 해나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어요. 정부에서도 협동조합을 권장하고, 또 농업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6차산업 개념을 추구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이죠. 우리가 농사만 지을 것이 아니라, 2차산업도 하고 서비스 쪽도 모색해 보자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저희 조합은 운영을 책임지는 이사가 5명인데, 생산 부문에 신정애이한섭김현중 이사, 가공 부문 임철진 이사, 소비자 부문 김남이 이사 등입니다. 임철진 이사는 우리밀 동우라는 상호로 우리밀 짜장면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지난해 400톤을 생산했다고 들었습니다. 생산이사님들은 밀농사를 얼마나 짓습니까.제가 26필지(벼 70필지, 1필지=1200평, 1평=3.3㎡) 짓고요, 이한섭 이사 15필지(벼 25필지), 김현중 이사 7필지(벼 23필지)입니다. 첫 해에 26농가(250필지)가 참여해 비교적 수월하게 출발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사실 출발 단계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어요. 막상 밀농사 짓기로 의기투합하고 조사해보니까 일선 농가에 종자용 밀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거예요.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겨우 확보할 수 있었지만, 진땀이 났었죠.-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사실 저희가 지난해 협동조합 설립을 생각한 것은 갑작스러운 것이었어요. 밀 농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서두른 것이죠. 그렇게 하다보니, 집안 식구들한테 미쳤다 소리도 들었어요. 잠을 줄여 가며 업무를 챙겼고, 국회와 농림부 등 밀 농사와 관련된 기관이라면 문턱이 닳도록 다녔죠. 그 전에 밀농사를 지었으니까 당연히 종자가 있다고 생각하고 별 신경을 안썼는데, 막상 농사를 시작하려는데 종자가 없는 거예요. 당시 농민들이 밀농사를 작파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자까지 팔아치운 것이지요. 작년에 밀농사를 지은 것은 정말 기적이예요. 기적.-신 대표께서는 밀가루 음식을 좋아했습니까.어렸을 때 어머니는 밭에 밀을 갈았어요. 직접 빻아서 얻은 밀가루를 가지고 여름에 칼국수 해주고, 빵 쪄주고, 수제비 해주셔서 먹고 자랐어요. 저 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30대 때 굉장히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밀가루 음식을 모두 끊었죠. 시집 식구들이 밀가루 음식을 좋아해서 힘들었는데, 결국 시집살이 5년만에 집에서 라면을 추방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안전한 먹거리에 관심이 높아졌죠. 이 허벌차도 제가 만든 차인데요, 모든 음식을 가능하면 제가 만들어서 먹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사먹어요. 제가 다양한 식재료를 이용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으면서 우리밀이 좋다는 것도 알았죠. 자연스럽게 수입밀에 대한 좋지 않은 정보도 알게 됐고, 그런 과정 속에서 김제시우리밀영농조합에서 우리밀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여한 거예요. 10년 전에는 가톨릭단체, 농민단체, 개인 등이 조금씩 밀농사 불씨를 살리는 과정이어서 종자 구하기도 어려웠어요. 정부에서 밀 농업을 포기했었잖아요.-밀 농사는 언제부터 지었습니까.직접 지은 것이 10년 넘었어요. 남편은 보리를 갈았죠. 보리는 필지당 5060가마 정도를 얻을 수 있고, 정부에서 수매를 했지만, 밀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게다가 밀은 수확 시기가 보리보다 늦어 벼 농사에 애로가 있는 것이 사실이예요. 남편은 농부예요. 식구들 먹여 살려야 하니까 소득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남편하고 싸우기 일쑤였어요. 남편을 설득하고, 고집을 부렸어요. 결국 밀농사를 지었는데, 한 3년은 밀 농사 경험 부족으로 힘들었어요. 정부의 밀 재배 교육도 없었고, 품종도 좋지 않았어요. 필지당 30 가마 정도 수확하는데 그쳤어요.-지금은 밀농사 성적이 어떤가요.농부는 소득이 떨어지는 작목은 짓지 않아요. 돈이 안들어오는 농사를 지으면 망하잖아요. 남편에게 항상 미안했지요. 오로지 안전한 먹거리 생산만을 내세워 언제까지 남편을 설득할 수 있을까 고민도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소득이 나아졌어요. 올해 같은 경우 농가 평균 생산량보다 웃도는 결과를 얻었어요. 밀의 생육 특성을 이해하게 됐고, 밀농사 노하우도 생겼거든요. 물론 정부의 관심과 연구 덕분에 밀 품종도 좋아졌어요.-서울 방배동에 직영하고 있는 짜장면집 운영은 어떤가요.농사꾼에게 소득이 중요하지만 안전한 먹거리 생산은 엄중한 의무죠. 정성들여 생산한 안전한 농산물을 누군가에게 먹여 그들이 건강해지면 그 이상 보람이 있겠습니까. 참조은밀협동조합이 추구하는 이념입니다. 서울에 짜장면집 너른들 동우를 개점한 것도 그런 취지입니다. 전주에서 짜장면 사업으로 성공한 임철진 이사의 사업 노하우, 능력을 믿었기에 좀 더 쉽게 결정한 것이구요. 너른들 동우에서 사용하는 밀은 모두 조합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향후 체인사업으로 확대할 생각입니다. 소규모 음식점이더라도 부부가 기술을 익혀 직접 만들어서 운영하는 체인사업을 구상 중입니다.-그 외에 어떤 구상을 갖고 있습니까.진봉면 청보리축제 때 우리밀 짜장면 부스를 운영해 굉장히 많은 인기를 모았는데요, 제가 우리밀로 빚은 우리밀막걸리도 반응이 무척 좋았어요. 밀 막걸리는 진봉면 특화사업으로 생산되는 연 막걸리보다 훨씬 맛있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호평을 얻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동안 꾸준히 전통주 기술을 익히고 있습니다. 조합이 아직 자금력이 부족해 주정 시설을 할 수 없고, 해썹 인증까지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돈과 기술력에 대한 고민을 좀 더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또 조합이 생산한 밀을 인근 제분소에서 OEM방식으로 제분, 인터넷 판매 등도 하려고 합니다. 쿠키와 떡 케익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일단 농한기에는 쿠키와 케익을 생산할 있도록 함께 조합일을 하고 있는 딸과 조카딸이 떡 케익과 제과제빵 기술을 익히고 있구요. 지난번 지평선 축제 때 아이들이 쿠키를 만들어 선보였는데, 마가린 대신에 버터를 넣는 식으로 했더니 맛이 괜찮았나 봐요. 마침 바이어 한 분이 찾아와 유치원에 넣겠다며 계약을 했어요. 이렇게 어린이집 하나가 둘 되고, 둘이 셋 되면서 조합이 활성화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체험농장과 체험교육장도 운영할 계획입니다.-체험농장은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지요.우리밀 교육을 겸한 체험농장을 하려고 합니다. 소비자들에게 수입밀이 왜 좋지 않은지, 왜 로컬푸드 국산밀을 먹어야 하는지를 알리고, 안전한 먹거리 교육을 해야 건강한 밥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수입밀 소비량이 98%에 달합니다. 거의 모든 밀가루 음식에 수입밀이 사용되는 것인데, 수입밀이 왜 좋지 않다고 보십니까.밀이 국내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리가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이 개입됩니다. 미국 등 해외에서 화물선에 실려 장거리 운송되는데, 이 과정에서 밀이 벌레 등에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상상 이상의 훈증처리가 가해집니다. 매우 독한 소독약에 곡물이 완전히 노출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수입밀입니다. 저희는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희 조합은 밀을 수매하면서 농가들에게 함수율 12%를 유지하라고 주문합니다. 13%만 맞춰도 되지만 12%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훈증처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예요. 함수율 12% 상태에서는 바구미 생기지 않지만, 13%에서는 바구미가 생기거든요.-밀을 직접 제분해 밀가루 제품을 소량 판매하겠다고 했는데요, 가능한 일인가요.밀가루공장은 첨단 기계 설비 때문에 저희 조합 정도의 자금력으로는 힘듭니다. 하지만 구례 등에서 일부 우리밀 제품을 하고 있어요. 저희는 다행이 인근 익산에 제분공장이 생겼어요. 게다가 제분공장 사장님이 찾아오셔서 조합 참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밀 6차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정애 대표이사는 건강한 밥상 만드는 우리 밀 생산보급 '전도사'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내다. 농촌에서 살림을 맡아 하는 주부이자, 세상에 하나 뿐인 딸 아이의 엄마다. 그러나 그녀에게 또 하나 함께하는 것이 있다. 우리 밀이다.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밀은 쌀 다음 가는 주요 식재료다. 쌀 소비가 70%라면 밀 소비는 30%다. 밀가루 음식은 천지에 널려 있다. 빵을 비롯해 칼국수, 수제비, 라면, 국수, 만두 등 다양하다. 밀가루 음식이 우리에게 익숙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이지만, 근래 쌀 소비가 줄면서 밀가루 소비세는 더욱 견조해졌다.신 대표는 밀가루 음식을 무척 싫어했다. 건강 때문이었다. 몸이 허약했던 그녀가 결혼했을 때 시집 식구들은 밀가루 음식을 밥보다 더 좋아했다. 그녀가 시집에서 라면 상자를 없애는데 5년이 걸렸다. 그런데 요즘 그녀 집에는 라면이 있다. 우리밀 라면이다. 우리땅에서 농사지은 밀로 만든 라면은 아무리 먹어도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신 대표가 우리밀을 남편과 딸처럼 사랑하게 된 데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국민 모두의 건강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밀 생산과 보급이 절실했다.신 대표가 김제시우리밀영농법인에서 활동하다가 지난해 김제시 진봉면 지역의 밀 농가를 중심으로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설립, 대표이사를 맡게 된 사연이다.신 대표의 꿈은 크다. 단순히 밀 농사를 짓는 것으로 적당히 끝내고 싶지 않다. 참조은밀협동조합을 생산 뿐만 아니라 밀 가공과 유통,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6차산업의 모델로 성장시키는 것이다.이런 신 대표의 꿈과 농업 농촌 사랑은 외동딸 유지혜씨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유지혜씨는 영농후계자이자, 전업농이다. 밀 생산을 기반으로 한 6차산업이 진봉 들녁에 무르익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4.10.21 23:02

중요무형문화재 소병진 소목장 "한민족 혼 서린 전주장(全州欌), 박물관·교육관 지어 기록·보존"

열다섯, 판사를 꿈꾸던 소년은 50년이 지난 2014년 9월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小木匠) 보유자가 됐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푸름을 잃지 않고 꽃을 피어 내는 인동초(忍冬草)처럼 시련과 고난의 역사를 이겨낸 소병진(64) 소목장은 마침내 중요무형문화재 등록이라는 결실을 맺었다.소병진 소목장은 나무를 다루는 일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 했다. 특히 전주장은 주로 500년 이상 묵은 질 좋은 고사목의 무늬(용목)를 골라 사용하는데 이 원목도 바로 쓰이지 않는다. 원목은 노지에서 눈과 비바람, 햇볕을 품으며 진을 빼고, 크게 켜서 건조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위해 필요한 시간 10년. 이후 본격적으로 가구가 제작되는 데만 2년이 걸린다.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전주장이 다시 부활하기까지, 장인과 나무의 기다림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조선한식가구(전주장)로 지정되기도 한 그는 1대 고(故) 강일봉, 2대 김석환, 3대 최규환, 4대 이해민 선생 등에 이어 5대째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7일 완주군 용진면 운곡리에 자리한 소병진 소목장의 작업실에서 그를 마주했다.-지난달 중요무형문화재 55호 소목장 보유자가 되셨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은 우선 개인의 영광이고 전북도 그리고 소씨 가문의 영광입니다. 4년 전 중요무형문화재 선정 탈락이라는 아픔을 맛봤지만,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실력’만으로 해낸거죠. 전북 사람이 조선 역사의 보루(堡壘)인 전주장을 통해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합니다.”-대한민국 가구 제작 부문 명장 1호 등 최초,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주는 부담도 있을 법 한데요.“최고, 최소, 최연소 등 제 앞에 붙는 단어들이 주는 부담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그렇지만 저를 나타내는 말들을 지켜 내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역시 다르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요즘에도 하루 평균 12시간은 작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소목장은 아주 예민한 일이라 일주일만 대패를 안 잡아도 손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0.0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 과학이 숨어 있는 일이 바로 소목장이죠.”-나무, 가구와의 인연이 궁금해집니다.“고향인 완주군 용진면 용흥리는 소(蘇)씨 가문의 집성촌으로 목수 마을로도 유명했습니다. 당시 동네에만 15명의 목수가 있었죠. 목수 일은 고조 때부터 내려온 가업으로 아버지는 건축물을 다루는 대목(大木) 일을 하시면서 일 년씩 외지에 나가 계시곤 했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대목 대신 장롱과 궤함 등을 제작하는 소목(小木) 기술을 배워 칠남매 중 허리(넷째)인 내가 동생들을 가르쳐야겠다고 말입니다. 그 길로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가구 공방에 다니는 8촌 형을 따라 ‘전주 중앙가구’에 들어가 소목 일을 배웠습니다. 제 나이 열다섯이었습니다.”-다른 가구나 장식품들 가운데 ‘전주장’을 재현하시게 된 계기나 동기는 무엇인지요.“일명 ‘목수 공무원’이 되는 곳이 서울 동일가구였습니다. 휴일이면 공방이 쉬기 때문에 동일가구와 홍익가구 등 내로라하는 가구점이 즐비한 인사동에 들려 각종 가구를 구경할 수 있었죠. 어느 날 한 골동품 가게에서‘전주태극이층장’을 보는 순간 ‘이것은 내가 기필코 복원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월급을 타면 느티나무를 사서 고향 집에 쟁여 놓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죽은 나무를 모으는 것에 의문을 품었지만, 저는 나무가 마를 때까지 기다린거죠.”-‘전주장’의 제작 과정에서 특별한 점이 있다면.“전주장은 국내 느티나무나 먹감나무, 참죽나무, 적송고재(홍송) 등을 사용해 각 부위의 무늬를 살리고, 결구를 견고하게 제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전주장 제작의 특이한 점은 전면과 뒷면의 각각 다른 부재 적층 사이에 전주 한지를 넣어 붙이는 적층기법으로 가구 판재가 수축하고 팽창하며 갈라지는 폐단을 막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입니다.”-‘전주장’의 매력을 꼽는다면.“조선시대 가구라는 점만이 전주장의 매력은 아닙니다. 조선의 탄생부터 멸망을 함께 하면서 한민족의 혼이 서려 있다는 역사성과 더불어 쓰임새, 디자인에 전주장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특징들이 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느티전주버선장의 경우 9개의 다리를 가진 주꾸미 5마리를 통해 5대를 거치며 45명의 자손을 얻으라는 뜻의 ‘씨족사회’의 확장성, 박쥐를 통한 집성촌의 특징, 불로초를 통한 장수 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전주장’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지요.“전북도민 나아가 온 국민이 전주장에 대해 알기를 바랍니다. 등잔 밑이 어둡지 않게 전북에서부터 전주장을 보호·육성하고 움직이는 역사인 무형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기술을 배우던 50년 전과 현재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과 여전히 변하지 않은 점을 든다면.“예전에는 가구를 만드는 사람을 일컬어 ‘농방쟁이’라고 표현했으나 요즘은 선생이나 장인, 소목장 등 기능 보유자로 대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문화 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와는 달리 사회 전체적으로는 문화 예술이 여전히 홀대받고 있음을 느낍니다. 전주장이 전주한옥마을에는 없는 현실, 좋은 문화유산을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울 뿐입니다.”-향후 계획이나 바람이 있으시다면.“무형문화재는 기능 보유자가 살아 있을 때에만 비로소 빛을 발합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인정되니 이제는 박물관이나 교육관을 만들어 전주장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시 급해집니다. 지금까지 제작한 작품들만으로도 충분히 박물관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아 고민입니다. 집필 중인 전주장에 대한 논문을 완료하고, 소목장(전주장)의 유네스코 등재라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소병진 소목장은 전통가구 제조법 연구, 조선시대 전주장 복원소병진 소목장은 조선의 멸망과 맥을 함께한 전주장을 복원해 내면서 올해 9월 문화재청 지정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55호로 선정됐다. 오랜 기간 조선 한식 가구의 제작 기법을 연구하면서 전주장을 재현해 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완주군 용진면이 고향인 긍재 소병진은 1950년 칠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광자진취(狂者進取). 즉 열정적인 사람은 진취적으로 고난을 무릅쓰고 나아간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그는 15살에 당시 경기 이남 지역에서 가구 제작 기술이 발전한 ‘전주 중앙가구’에서 처음 소목 일을 배웠다. 이후 ‘서울 동일가구’로 옮겨 고급 기술을 터득한 뒤 전주로 내려와 개인 공방을 차렸다. 동일가구에서 근무할 당시 눈여겨봤던 전주장의 제작 기법을 연구한 지 20년이 흐른 지금 ‘전통 목가구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전주장의 원형을 완전히 습득해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소병진 소목장은 1971년 국제 기능 올림픽 전북대회(가구 제작)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기능인으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92년 10월 대한민국 명장 가구 제작 1호로 선정, 2012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소목장(전주장)으로 지정되면서 전주장 복원의 사명이라는 스스로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고 있다.현재는 완주군 용진면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우석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가구디자인전공 겸임 교수(1996년~)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 객원교수(2011년~) 등을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 기획
  • 문민주
  • 2014.10.20 23:02

[(35) 군산 (주)명품수산] 7년간 생산기술 축적, 국내산 '가자미 액젓' 상품화 성공

오랜 숙성으로 생선살이 가수분해(加水分解)돼 액체화되면서 음식의 감칠 맛을 더해 주는 액젓. 전통 숙성 발효제조법으로 생산되는 액젓은 갖가지 요리에 사용되면서 우리 민족 고유의 깊은 맛을 더해 준다.특히 군산 연근해 등 서해에서 많이 포획되는 가자미로 만든 가자미 액젓은 액젓류 중 최고로 알려져 왔지만, 액젓 회수율이 적어 상업화에 한계를 느껴 왔다.수년 전 군산에서 가자미 액젓 맛에 푹 빠진 한 어업인이 가자미 액젓을 세계 최고의 피쉬 소스(fish sauce)로 만들겠다며 기술개발에 나섰다.최고의 가자미 액젓을 생산하겠다는 일념으로 지난 7년 동안 각종 특허 등 10여종의 지적재산권을 취득하며 마침내 삼색삼미의 명품 가자미 액젓 상업화에 성공한 (주)명품수산을 찾았다.△자연과 과학의 만남군산 명품 수산에 들어서면 각종 특허증과 인증서, 등록증이 벽면을 통째로 장식하고 있다. 지난 2008년부터 오로지 명품 가자미 액젓 생산에 몰두해 온 명문갑(62) 대표의 발자취이다. 지적 재산권만도 수산물 가공 관련 특허 4종, 숙성용 용기 특허 3종, 디자인 등록 9종, 상표등록 3종에 이른다.서해안 특히 군산 연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가자미는 수산물 숙성발효식품 중 액젓류에서 최고의 제품으로 알려져 왔다.하지만 가자미를 염장 발효시켰을 때 액젓 회수율이 적고, 멸치와 까나리 등 대량 유통이 가능한 타 액젓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갖추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제조 자체가 어려웠다.이 때문에 일부 가정에서는 가자미를 직접 염장해 숙성시키거나 젓갈가게 등을 통해 소량 생산 유통되면서 높은 가격대가 형성돼 상품화에 어려움을 겪어왔다.2008년부터 제품개발에 착수한 명 대표는 짜게 하면 맛을 잃고 싱겁게 하면 상해버리는 실패를 매년 반복하며 가자미와 소금, 정제수 비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이 과정에서 숙성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고 숙성용기에 대한 연구개발에 들어가 마침내 2011년 해법을 찾아냈다.통 안에 통이 있어 이들 사이를 정제수가 온도차에 따라 대류하는 자연대류 방식의 숙성용기를 발명해 특허 출원했으며 이를 사용한 액젓 제조방법까지 특허를 취득하면서 위생적인 환경에서 원활하고 완전한 숙성이 가능하도록 했다.철저한 식품위생관리를 위해 모든 생산공정을 식품의약안전처에 질의해 가며 계획하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신선한 가자미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2012년 해망동 수협위판장 앞에 공장터를 마련한 명 대표는 생산라인 설계를 수직으로 계획하는 등 공장 설계부터 남달랐다.40여억원이 투입돼 그해 12월 준공된 공장은 4층과 5층에 숙성고를 갖추고 3층 여과살균 시설, 2층 병에 제품을 주입하는 충진 시설, 1층에 출하시설을 갖춘 자연 낙하 이동방식을 갖추었다.생상라인 구축과 함께 바로 염장에 들어간 가자미는 약 22개월의 숙성기간을 거쳐 김장철을 앞둔 이달부터 첫 제품이 나오기 시작해, 마침내 오는 20일 준공식을 겸한 개업식을 갖고 소비자들을 찾아간다.△ 삼색삼미 명품수산 가자미 액젓명품수산 가자미 액젓 1리터에는 가자미 1㎏이 숙성 분해돼 있다.생물로 구매한 가자미 10만㎏이 지난 22개월간 숙성 분해 과정에 들어가면서 1톤 용량 숙성용기 100개에 가득하다.명 대표는 제품 출시를 앞두고 공신력있는 시험연구기관 수곳에 각종 성분분석을 수차례 의뢰해 깜짝 놀랄만한 결과를 얻었다. 특히 미국 200ppm, 유럽 100ppm 이하인 식품 히스타민 규제선이 2ppm에 불과해 수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태국음식의 근간에 있는 태국 액젓 피쉬소스와 비교해 가자미 액젓이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김치 브랜드 등 한류 음식문화의 밑간으로 수출 교두보를 확보하며 세계시장 진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명품수산은 지난해 기술보증기금으로부터 벤처기업에 선정됐으며, 지난 6월 한국식품안전관리인증원으로부터 HACCP 인증을 받으며 재래 생산방식 위주의 우리나라 액젓산업을 청결하고 위생적인 환경으로 전환시키며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군산대학교 산학협력단과 지난 5월부터 액젓 숙성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효소 개발을 위해 공동 R&D사업을 진행하는 등 액젓산업을 위한 투자를 지속하고 있다.명품수산은 본격적인 가자미 액젓 출시를 앞두고 김장을 앞둔 시기인 점을 고려해 소비자들에게 고급형 1리터 1만원과 1.8리터 1만7000원에 공급하기로 했다.또 일반형 1리터 8000원, 1.8리터 1만3000원에 출시했으며, 혼합형은 1리터 6000원, 1.8리터 1만원 등 원가 수준에서 가격을 결정했다.● 명문갑 대표 "소비자들에게 더 큰 믿음으로 보답할 것"어업인 집안에서 태어나 고기잡이를 천직으로 알았던 명문갑 대표는 지난 1979년 군산으로 이주했다.선장으로 고기잡이 배 두척을 이끌고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누비던 명 대표는 1989년 8월 어청도 근해를 덮친 해일로 배 두척 모두를 하루 아침에 잃고 빈털터리가 됐다.그해 10월 빚을 내 부인 하상희(53)씨와 함께 주공시장 골목에 2평짜리 생선소매 가게를 시작한 명 대표는 원산지를 정확히 밝히고 소비자 입장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진실함으로 손님을 끌기 시작했으며, 전화주문을 받아 생선회를 떠 전국에 배달하고 조기와 박대를 진공포장해 택배 배송하는 방식을 최초로 도입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액젓만큼은 어쩔 수 없이 가져다 팔면서 제품에 대한 신뢰도를 자신있게 장담하지 못하던 중 액젓도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했다.최고의 액젓을 찾던 명 대표는 가자미 액젓에 매료되면서 그동안 벌어 놓은 재산을 모두 투자하는 모험(?)을 감행했다.액젓은 숙성기간 등 생산주기가 길어 초기 자금회전이 어려운 점을 견뎌야 하지만, 안전한 수산물을 공급하겠다는 소비자와의 약속을 신앙으로 묵묵히 버텨 왔다.그동안 원재료인 가자미를 직접 구매해 당일 처리하기 위해 수협중매인으로 등록하는 등 제조원가 절감을 위해 부부가 함께 새벽부터 밤까지 달려 왔으며, 3년전부터 자녀들까지 함께 하면서 든든한 후원군을 얻었다.최근 구매 상담 차 방문한 도매상들이 너무 맑고 깨끗한 액젓에 황당해 하다가 냄새와 맛을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액젓 생산 공정의 긍정적 변화를 변화를 선도하고 있다는 칭찬에 어려움도 잊고 있다.명문갑 대표는 모든 공정을 공개할 수 있을 만큼, 투명한 생산과정을 자신하며 실제 액젓 1리터에 얼마의 원료가 숙성 발효되는지 확인 가능하다며 평생을 수산업에 종사해 온 어업인으로 소비자들에게 진실로 답하고, 더 큰 믿음으로 보답하기 위해 최고 품질의 액젓 생산을 위한 연구 개발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4.10.16 23:02

[(38)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강원도] 홍천 풍암리 전적지에 1977년 위령탑 세우고 매년 제사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서석 5일장이 들어선 날이었던 데다, 마침 또 장터 입구에 휴대폰 가게가 새로 문을 열면서 개업 행사를 벌여 일대가 떠들썩했다. 우스꽝스런 분장을 한 사람이 연신 북을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고, 막 하교하는 참이던 학생들이 멈춰 서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서석면이 통째로 나 아직 안 죽었어! 하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듯했다.서석은 예로부터 원주, 강릉, 인제, 횡성 등과 연결되는 교통이 편리해 장돌뱅이들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홍천군 동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서석은 그리고 강원도 지역 동학농민군이 보루로 삼던 거점이기도 했다.△피가 고여 자작자작 했다던 자작고개장터를 뒤로 하고 야트막한 구릉을 시나브로 오르다보면 서석면사무소와 보건지소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보건지소를 오른쪽에 끼고 계속 올라가면 자작고개라는 고갯길이 나오고, 그 왼편으로 동학농민혁명군 전적지가 있다.1977년에 세워진 위령탑과 2012년에 조성된 기념공원이 전적지를 구성하고 있는데, 기념공원은 다른 어느 기념공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조성돼 있었다.어릴 적에 이 길을 지나서 학교를 다녔는데, 장마철만 되면 사람 뼈가 튀어나오곤 했어요. 그 땐 한국전쟁 생각만 했었지, 유골들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죠.서석면장을 지냈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헌신했던 심형기 씨가 고갯길을 가리키며 말했다.여기서 희생된 농민군이 학자 조사에 따르면 800명이라고 하는데, 갑오실기 같은 기록을 보면 수천 부지기라고 돼 있거든요. 그만큼 많이 희생이 있었다는 거죠.1894년 9월에 농민군 2차 봉기가 시작되고, 북접 교단도 기포령을 내렸다. 홍천대접주 차기석은 홍천 동부 지역과 봉평 등지를 근거로 활동하면서 농민군과 투쟁 물자를 모았다.10월 13일에 홍천 내면 동창을 친 것도 그런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 때 농민군이 집결한 내촌면 물걸리 일대에 지금은 기미만세공원이 조성돼 있다.차기석 부대는 세곡을 모아두는 곳이었던 동창을 침으로써 물자를 충당하면서, 서쪽 경기도 일대에서 홍천을 넘어오던 민보군과 관군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이 때 창고를 관리하던 김덕원이라는 사람이 물자를 풀어 농민군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이들은 그러나 장야평 싸움에서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동쪽으로 밀려 서석 방향으로 후퇴했는데, 이 때 농민군이 진을 쳤던 자리가 바로 전적지 자리다. 산과 고개로 둘러싸인 분지 가운데서 홀로 섬처럼 머리를 내밀고 있는 듯한 지형으로, 사방 곳곳이 잘 보여 방어진을 치기에는 아주 좋은 자리였다.10월 22일, 민보군과 관군이 서석에 들이닥침으로써 풍암리 전투가 벌어졌다. 지형 상으로는 농민군이 유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농민군은 적들의 총에서는 빨간 물이 나올 뿐이라는 주술적 믿음에 의지해 싸웠지만, 낫과 쇠스랑 정도로 신식 소총을 든 군대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이 전투에서 결국 농민군 8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그 광경이 어찌나 참혹했던지, 이 때 흘러내린 농민군의 피가 고개를 적셔 길바닥이 자작자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자작고개란다.△전라충청도만 생각하는 인식 아쉽다홍천 지역에서는 서석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 번듯한 사무실도 없는 형편이지만, 서석면홍천군과 함께 매년 전적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제삿날을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70년대까지도 음력 10월 23일 즈음에 동시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27가구나 됐었기에, 자연스레 이 날이 제삿날이 된 것이다.1977년에 위령탑이 세워지고 나서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천도교 예법으로 청수봉전이라는, 맑은 물을 떠놓고 예를 갖추는 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하지만 지금은 추위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양력 날짜로 기념을 하고, 이 때 서석면민집회를 함께 진행한다고 한다.원래는 동학 관련한 이야기는 서로 쉬쉬하고 그랬는데, 70년대 이후에 위령탑도 세워지고 혁명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이제는 역적으로 보는 정서는 많이 없어졌죠.고장의 역사를 들춰내고 기념하려는 노력이 거둔 결실이 바로 이런 걸까.사람들이 우금치, 전라도, 이런 곳만 생각하지 서석은 모르거든요. 이렇게 희생자가 많았던 곳인데.△강릉 관아의 농민군 4일 천하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험하기가 그지없었다. 크게 돌아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렸으면 좀 수월했으련만, 무슨 고집이었는지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운두령을 넘기로 했다.서석을 뒤로 하고, 동학농민혁명군이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현했던 강릉을 찾아가는 길이었다.1894년, 홍천 지역의 차기석 세력과는 다른 세력이 그보다 먼저 평창,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동학 교단과 연관이 있었고 경기충청도의 북접 주력과 합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차기석 세력과는 달리, 반봉건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고 자생적으로 나선 세력이었다.평창의 오덕보라는 이를 중심으로 모인 농민군은 1894년 9월 초 강릉 방면으로 진격했다.대관령을 넘은 농민군은 9월 4일 강릉 관아를 점령하고 자치를 실시했다. 이들은 억울하게 붙잡힌 이들을 풀어주고 이서배(하급 관료)를 잡아 가뒀다. 또 지주들의 땅 문서를 거뒀으며, 농민들에 대한 징세를 감면했다.2011년에 복원된 강릉 관아에는 이와 관련된 설명은 붙어 있지 않았지만, 농민들이 호령하고 이서배들이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농민군 자치는 그러나 4일 천하에 그쳤다. 경포 인근 선교장의 대부호 이회원이 지휘한 반농민군의 습격으로 농민군은 평창 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농민군이 선교장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선수를 친 것이다.패퇴한 농민군은 전열을 정비해 강릉을 다시 치려 했지만, 민보군과 관군,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평창 등지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1월 하순 무렵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11월 12일에는 홍천 내면 지역에서 항전을 벌이던 차기석 또한 접전 끝에 체포됐다. 그는 강릉부로 압송돼, 11월 22일에, 강릉 관아의 교장에서 처형됐다.이런 역사를 기억이나 하는지, 강릉 선교장은 그저 말없이 으리으리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관광객이 초가을 햇볕 속에서 양반 가옥을 찾았고, 그들의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도 이곳이 동학농민혁명 시기 반농민군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는 설명은 없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4.10.15 23:02

[18. 이주여성 큰언니 '통·번역지원사'] "낯선 한국땅…언어소통 불편 덜어드려요"

갑자기 몸이 아파요. 한국말을 잘 못하니까 병원에 같이 가주셨으면 좋겠어요.결혼 이주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자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근무하는 중국어 통번역지원사 왕줘어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가서 그를 도와줬다. 낯선 땅에서 아직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이 결혼 이주여성에게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통번역지원사는 정말 소중한 멘토이고 의지할 수 있는 친언니 격이다.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후앙시아핑씨(가명전주)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하는데, 가정통신문에 기록된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남편이 바쁜 날이거나 출타를 하기라도 하면 학교에서 발송된 가정통신문을 읽어볼 수는 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후앙시아핑씨는 어느 날부터 가정통신문이 중국어로 된 것을 받아보게 됐다며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초등학교에서 의뢰해 들어오는 가정통신문을 번역해주면서 자녀의 학교생활에 대한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만족감을 표현했다. 다문화가족의 한국생활 정책에 가장 필요한 서비스 중에 하나가 통번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번역 서비스에 대해 취재해봤다.△통번역 서비스의 필요성위 사례에서 봤듯이 한국인과 혼인한 결혼이민자들은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언어문제로 인한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언어문제로 인해 위기 아닌 위기 상황에 직면한다. 자국에서 같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낯선 한국 땅에서는 이 언어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 위기상황으로 연결될 수 있다.외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는 282명의 통번역지원사가 배치되어 결혼 이민자들의 초기 정착과정의 어려움을 돕고 있다. 전북에도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 24명의 통번역지원사가 초기 정착과정의 결혼 이민자들의 멘토가 되어 이들을 돕고 있다.결혼이민자는 가족간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경제활동을 위한 직장생활을 함에 있어서, 한국의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에서의 모든 영역에서 한국어의 원활한 소통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필수적인 한국어 능력의 향상을 위해서 결혼 이민자들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전문적인 한국어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그러나 한국어를 원활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단시일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정한 정도의 언어능력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의 기간에는 자신보다 언어능력이 뛰어나고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돌봐줄 수 있는 이웃이 필요하다. 초기 정착과정의 결혼 이민자들에게는 자신을 대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변호도 해줄 수 있는 멘토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특히 결혼이민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에는 외국인 신분이다.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갈 동안에는 한국의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해 합법적인 체류비자와 체류기간을 부여받는다. 남편과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경우 체류기간의 연장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남편과의 이혼과 별거상태에 있다거나 남편의 범죄로 인해 수감되었던지, 남편이 사망하였던지 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들이 있을 경우에는 자신의 이러한 사정들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잘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러나 결혼 이민자들은 출입국관리사무소를 무척이나 무서운 기관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결혼이민자 자신의 과실에 의해 문제가 발생되지 않았으면서도 이것을 증명하는 것에 있어서 두려움과 어려움을 가진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설명해야 하는데, 자칫 잘못 설명될 경우 체류기간을 연장받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불법 체류상태가 되는 것이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통번역지원사는 결혼이민자의 체류비자와 기간연장, 국적 취득 등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통번역 서비스 분야 다양화해야다문화가족의 혼인이 증가하면서 이혼율도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의 최근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다문화가족 이혼건수는 2012년 1만3701건으로 나타났다. 전라북도의 이혼건수도 501건인데 17개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10번째로 높은 이혼율을 보였다.다문화가족의 언어와 문화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이 상당히 날로 다양화 되면서 이들 가정의 소통의 문제가 심각함을 발견할 수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통번역지원사들은 상담 시 전문상담사와 함께 동석하게 된다. 부부와 고부간의 갈등과 문제 등에 있어서 결혼 이주여성의 한국어 능력으로 유추해 볼 때 상호간의 의사소통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경우도 통역을 동석하여 이루어지는 상담이 진행되면 상호간의 의사소통에 상당한 정도의 문제가 있음을 확인한다.결혼 이민자가 부부와 시부모와의 가정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생활용어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구사하지만, 자신의 내면적인 감정을 세밀하게 드러내고 소통하는 것에서도 상당한 한계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상담에 있어서도 통번역지원사의 역할을 두드러진다. 일반 내국인에 대한 상담이 1시간 소요된다면 외국인인 결혼 이민자와의 상담은 한국어와 외국어를 몇 차례 통역을 통해 주고받는 수고스러움이 발생한다. 따라서 상담의 시간도 두 배 이상이 걸리기도 하는데, 통번역지원사의 수고스러움이 크다.통번역지원사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다양한 업무를 담당한다. 가족생활 및 국가 간 문화차이 등 입국 초기 상담, 결혼이민자 정착지원을 위한 국적과 체류 관련 정보제공, 임신출산양육 등 생활정보 안내 및 상담, 한국어 교육 등 교육과정 통역지원, 전화 및 이메일 통번역 업무처리, 가족간의 의사소통 통역, 행정 사법기관 이용 시 통번역, 병원보건소경찰서학교 등 공공기관 이용 시 통번역, 위기 상황 시 긴급지원 등을 지원하면서 통번역지원사는 다문화가족의 정착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필리핀 통번역지원사 리디아씨는 필리핀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발생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통번역지원사를 통해 고민과 문제를 털어놓고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해서 한국에서 정착하는데 시간을 아끼고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 분야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주저하지 말고 통번역 서비스를 이용해 달라고 주문했다.● 중국어 통번역지원사 왕줘어 씨 "한국 체류기간 2년 이상, 양성교육과정 이수해야"-다문화가족에 대한 통번역지원의 언어는 몇 개국 정도 됩니까.베트남과 중국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베트남을 지원하고요. 필리핀의 따갈로그와 영어를 지원합니다. 각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마다 통번역 지원의 언어가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3개국의 언어를 중심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캄보디아어, 태국어, 러시아어, 몽골어 등은 다른 지역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내에 일찍 한국으로 시집을 온 결혼이민자 자원봉사자들이 있어서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통번역지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까.통번역 지원사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체류한 기간이 2년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학력은 고졸 이상이어야 하고요. 한국어능력시험에서 3급~4급 이상을 패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한국어능력은 외국어대학교 등에서 별도의 평가시험을 통해 수준을 체크합니다. 또 별도의 통번역지원사 양성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합니다.-통번역지원사 양성교육 과정은 어떻게 됩니까.양성교육 과정은 통번역 영역, 한국어 영역, 결혼이민자 관련 법과 인권, 상담 등에 관한 교육 등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교육과정은 50시간으로 보통 서울에서 합숙교육 형태로 짜여 있습니다. 이 양성교육과정 이외에도 해마다 4회씩 보수교육을 통해 통번역지원사로서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통번역 지원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통번역 지원서비스를 받으려면 먼저 통역이나 번역에 관한 신청서식을 작성해야 하는데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문의하면 그 서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긴급한 경우에는 먼저 서비스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서비스는 무료로 진행이 됩니다. 다문화가족에 관한 공적인 사항이 아닌 다른 부분은 서비스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4.10.14 23:02

전북 이전 한달 맞은 농촌진흥청 이양호 청장 "전북을 농생명연구 중심지로 만드는데 기여"

지난 9월15일 전북혁신도시에서 신청사 개청식을 갖고 본격적인 전북시대를 시작한 농촌진흥청이 개청 한 달을 맞고 있다. 국립농업과학원을 포함해 국립식량과학원국립원예특작과학원국립축산과학원 등 산하기관의 전북혁신도시 이전이 내년 8월까지 모두 완료되면 농촌진흥청의 전북 이전으로 지역인재와 주민들의 취업기회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농촌진흥청 이전으로 종자산업 R&D 인프라 구축을 위한 김제 민간육종단지와 익산 국가식품 클러스터 등이 연계되면 전북은 명실상부한 농업생명의 허브로 자리매김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신청사 개청식과 국정감사 등 한 달 새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한 이양호 농촌진흥청장을 지난 10일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52년간의 수원시대를 마감하고 전북시대를 개막했습니다. 전북혁신도시 이전 감회와 새 출발하는 각오는 어떠신지요.전통적인 농도인 전북은 신성장동력의 원천으로 농생명연구의 메카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전북혁신도시 신청사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원년을 맞아 우리 농업농촌이 대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하고, 특히 농촌진흥청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현재까지의 기관 이전 진척 상황은 어떻습니까.전북혁신도시 이전을 위해 2011년 7월에 공사를 시작한 이래 농진청 본청과 국립농업과학원의 이전을 완료됐습니다. 나머지 소속기관인 국립식량과학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도 현재 공정률 약 75%로 계획대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년 2월 완공 예정으로 내년 3월부터 전북혁신도시로 본격 이전할 예정입니다.-직원 이주 현황과 향후 계획은 어떤지요.현재 약 900여명의 직원이 전주로 이전했으며 이 중 약 35%가 가족과 함께 전주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내년 3월 이후 전기관의 이전이 완료되고 교육 등 정주여건이 개선되면 대부분의 직원이 가족 동반으로 정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농진청의 전북이전이 지역경제 생산 유발효과와 고용창출 등 지역발전을 견인할 것이란 기대가 높습니다.농진청은 중앙행정기관으로 정규직은 공개채용으로 선발하고, 농업연구 현장에서 시험연구를 보조하는 인력은 전북도민 중심으로 채용하고 있습니다. 청사 이전 후 우리 청 홈페이지에서 운영하는 인력풀인 인력뱅크 회원 7000여명을 대상으로 8월말에 461명을 채용했고, 9월 초에 장애인근로자 32명을 채용했으며 10월 초에도 153명을 추가 채용했습니다. 아울러 국립식량과학원 등 3개 기관의 이전이 시작되는 내년 2월 초에는 약 400여명의 인원을 일괄 채용할 예정입니다.-농진청이 추진하고 있는 각종 연구사업의 전북지역 확대 등 전북 농업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협력 계획은 있으신지요.개청식 후 전북지역 13개 시군 19개 경영체에 대해 농업경영, 농산물마케팅, 브랜드관리, 조직관리 등 분야별 전문가를 투입해 현장 밀착형 경영 및 마케팅 컨설팅을 처음으로 실시했습니다. 농진청 이전으로 연구현장에서 개발된 최신 생산기술뿐만 아니라 경영과 마케팅기술이 전북지역 영농현장에 바로 접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농진청은 전북도 농업기술원 및 전북지역 대학과도 긴밀하게 협력해 지역농업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농진청의 전북혁신도시 이전으로 농업 및 식품 유관기관, 도내 대학 및 지자체 등과의 관련분야 공동연구 개발을 위한 협의체 구성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농진청이 협의체 구성에 주도적으로 나설 의향은 없으신지요.전북을 농업의 실리콘 밸리로 육성하는 데 필요한 현안 공유 및 대안 모색 등 상호협력을 위해 전북 농업연구협력 협의체(가칭) 출범을 위한 실무추진단 회의를 농진청 주도로 오는 17일 개최할 예정입니다. 전북도, 전북농업기술원, 국가식품클러스터지원센터, 전라북도생물산업진흥원, 한국원자력연구원(첨단방사선연구소) 등 11개 기관이 참여합니다. 협의체 구성을 통해 전북지역 대학, 연구기관, 기업체와의 유기적 협력체계를 구축해 농진청 이전에 따른 지역의 농업과학기술 발전 및 경제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겠습니다.-최근 기상이변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대응책은 어떻게 추진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지구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과 재해가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온도, CO2 및 강수량 등)에 따른 작물별 생산성 등 영향평가와 안정적 작물 재배적지 재설정 등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따라 신 기후변화 시나리오 기반 디지털 미래농업기후도를 완성했고 고랭지배추, 난지형한지형 마늘, 감자, 참다래 등 5종을 대상으로 신 기후변화 시나리오 기반 주요 원예작물 재배지 변동 예측지도를 제작했습니다. 기상재해, 병해충, 고온 등에 적응성이 높은 품종을 개발하고 기상재해 피해 최소화를 위해 기상재해 조기경보 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농업의 6차 산업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계획하고 계신지요.농업농촌의 6차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 개발, 생산가공체험, 관광외식 등을 연계한 6차 산업화 모델 정착, 현장 전문가리더 양성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전북은 6차 산업화를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지역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진청에서도 전북에 적절한 R&D, 시범사업 등을 지원해 농업의 핵심정책인 농업농촌의 6차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청의 역량을 집중하겠습니다.-마지막으로 도민들께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은.농진청의 전북 이전을 환영해 주시고 따뜻이 맞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북혁신도시에서 강화된 첨단연구시설과 전 직원의 열정 및 의지로 지역의 농식품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전북농업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농진청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받고,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전북 도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이양호 청장은 정부 농업 핵심부서 두루, 농협법 개정 마무리 지어경북 구미 출신인 이양호 농촌진흥청장(55)은 대구 영남고와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1982년 제26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주 OECD 대표부 1등 서기관, 농림부 행정관리담당관, 기획예산담당관, 조직인사담당관, 홍보관리관, 농식품부 농업정책국장, 식품산업정책실장, 기획조정실장 등 농업정책 전반에 대한 핵심부서를 두루 거쳤다. 농업정책 핵심 파트에서 일하면서도 아랫사람에게 항상 귀를 열어두는 넉넉한 리더십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졌다.평소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이지만 업무 추진에 있어서는 꼼꼼한 일처리로 직원들의 신망이 두텁다는 평이다.이 청장은 농식품부 근무 당시 여러 이해 관계가 얽혀 있었던 농협법 개정을 마무리 지은 정책기획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11년 농식품부 농업정책국장으로 일하면서 당시 기획조정실장이던 박현출 전 농진청장과 함께 농협중앙회를 설득하고 기재부 등 관계부처의 이견 조정을 통해 논란이 많았던 농협의 신용과 경제 분야를 분리시킨 농협법 개정을 마무리 지었다.전북혁신도시 이전과 함께 사실상 농진청 전북시대의 초대 청장 역할을 맡은 이 청장이 국가와 전북 발전에 기여하는 농촌진흥청의 새로운 도약의 기반을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지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 기획
  • 강인석
  • 2014.10.13 23:02

전북도립미술관서 '컬렉션' 전시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어린 시절, 궁핍한 환경에서도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식민지 시대, 가난을 못 견디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교포 1세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은 그를 더 이상 화가로서의 꿈을 갖지 못하게 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어디에 가든 성실하게 일했다.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지만 나보다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생활철학이 긍정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힘을 안겼다. 실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빚더미에 쌓인 전자제품 가게를 일으켜 세우면서 30대에 부를 이루었다.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처한 재일교포 작가들을 지원하고 싶었던 그는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까지 1만여 점 작품을 수집한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가 됐다. 그러나 그가 수집한 작품들은 그의 것이 아니다. 모든 작품을 광주시립미술관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여덟 곳 도립 시립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우리나라 메세나 운동의 선구자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75). 그는 미술품 기증으로 이름을 알린 재일교포 2세 화가이자 사업가다. 대기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로라하는 재벌 2세도 아닌 그가 재산의 대부분을 쏟아 수집한 미술품을 온전히 대한민국의 관립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는 무엇일까.마침 하정웅 컬렉션을 기증받은 시도립미술관들이 지난해부터 특별한 전시회를 기획했다. 하정웅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기도의 미술이다. 다섯 번째 순회전 차례인 전북도립미술관 전시가 지난 9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전북도립미술관이 개관했던 초기, 재일교포 화가 손아유의 작품을 비롯해 200여점의 작품을 기증하면서 그는 이 지역에도 아름다운 기증운동의 꽃씨를 심었다.개막식 참석을 위해 아내 유창자씨와 함께 전주에 온 하 이사장을 만났다. 세 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그의 이야기는 칠십 여생 험난했던 인생노정만큼이나 격정적으로 굽이쳤다.명역역(明歷歷) 노당당(露堂堂). 좋은 일은 반드시 좋은 일로 돌아온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왔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나쁜 짓 하지마라, 하늘이 다 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가르침이 제게는 신념이 되었는데, 덕분에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도 눈을 뜰 수 있었을 겁니다.이산(離散)의 고달픈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그의 노년은 유난히 아름답고 빛이 났다.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이 가져온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길은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리면서도 좋은 일에 마음을 두었던 그의 선택이 그래서 더 소중해 보였다.- 전국시도립미술관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하정웅 컬렉션 특별전에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많은 분들이 관심 가져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으로 지금까지 9개 관립미술관에 1만여 점 정도 기증해왔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기증운동을 하다 보니 관계자들이 소통하면서 이 전시를 기획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또 다른 보람을 갖게 된 셈인데, 제 컬렉션으로 지역과 지역이 교류하는 계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국내에서는 이 전시가 내년까지 이어지던데 일본 전시도 계획되어 있습니까.국내전을 마치면 일본 6개 도시 순회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일교포들은 물론이고 컬렉션을 기다리는 미술애호가가 많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도시에서도 전시회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단순히 컬렉션을 과시하고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특별전에 기대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저는 컬렉션을 시작할 때 분명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디아스포라가 중심이었죠. 맨 처음 재일교포작가들의 작품부터 수집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10억, 우리 민족만도 700만 명 정도가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산의 삶은 위태롭습니다. 늘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기 일쑤죠. 저 역시 국적은 한국이지만, 삶의 터전은 일본인 디아스포라입니다. 미술을 통해 저와 같은 운명을 가진 디아스포라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면 세상에 이바지 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미술품 수집을 시작했을 때 재일교포작가 작품을 주목했던 이유가 거기 있었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부모님은 가난 때문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오셨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고단한 삶이었죠.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는 특별한 일을 시켰어요. 마을 뒤편에 절이 있었는데 그 곳에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봉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명절이면 음식과 함께 저를 그곳에 보내어 절을 올리고 오라고 하셨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덤이었습니다.-이름 없는 노동자들이었겠군요.제가 살았던 아키타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습니다. 아키타에 일본에서 제일 깊은 다자와코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이 호수에 댐을 만들고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그 현장에서 일하게 된 노동자들이었어요. 그들 중에는 힘든 노동과 추위에 시달리다 도망치거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무덤도 그들 중 누군가의 무덤이었겠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산의 아픔을 알게 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그 일이 미술품 수집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이름 없이, 그것도 내나라도 아닌 곳에 끌려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운명이 강하게 와 닿았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턴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었거든요. 그래서 처음 그림을 모으기 시작할 때 이 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목표가 분명했는데 왜 미술관 건립은 하지 않으셨습니까.미술관을 짓기 위해 땅도 사고 설계까지 마쳤어요. 호수 옆이었는데 제 뜻을 존중하고 환영하는 일본인들이 많았습니다. 행정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 했죠. 그런데 그즈음 한일관계가 악화되었어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졌죠. 갑자기 상황이 경색되면서 미술관 건립을 환영했던 일본인들이 돌아서기 시작하더군요. 90년대 초반이었어요. 인연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접었습니다.-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수집한 작품도 많았을 텐데요.작품 양도 그렇지만 기도의 미술관을 위해 수집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쉬움이 더 컸지요. 그런데 뜻하지 않은 운이 돌아왔어요. 그 사이 땅값이 다섯 배로 오른 겁니다. 다 팔았죠. 그래서 더 많은 작품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요. 결과적으로 땅 투기한 셈이 됐습니다.(웃음)-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처음 기증한 것이 그 즈음 아닌가요.맞습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죠. 82년엔가 광주에 가게 되었어요. 전화황이란 재일교포 작가 작품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싶어 서울과 대구, 광주에서 순회 전시회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과로를 했던 탓인지 광주에서 쓰러졌어요. 일주일동안 시각장애인 안마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회복되었는데, 그때 그 안마사가 부탁을 하더군요. 시각장애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 마련을 도와달라고요.-그 분이 이사장님을 잘 알아보셨군요.(웃음) 그래서 도와주셨습니까.사정이 아주 절박했어요. 광주에만 2천명 이상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먹고살 기반이 없다. 자립을 못하니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짐이 되어 살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교육이라도 시켜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다고 하는데 참 딱하더라고요. 나도 시각장애를 가진 분들과의 인연이 있거든요.-어떤 인연인가요.고등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그때 시각장애인들이 서로에게 의지해 기차를 타고 내리는 것을 보며 감동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들과 친구도 되었고요. 그리고 저 역시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시력을 잃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돕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경제적으로만 지원하는 일은 의미가 없어 먼저 당신들이 의지를 갖고 시작해보라고 했어요. 200만원만 모금을 하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지요.-약속은 지키셨습니까.물론입니다. 1년도 안되어 연락이 왔더군요. 모금운동으로 목표액을 만든 겁니다. 애초 약속은 30평 부지에 사무실 공간 30평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160평 부지에 120평짜리 건물을 지어드렸습니다. 장기적으로 이 공간의 활용도를 생각해보니 그만한 공간은 확보되어야겠더라고요.-광주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잘된 출발이었죠.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나서서 씨앗을 뿌린 셈인데 당시만 해도 그런 운동이 드물 때여서 모범적인 시민운동의 결실로 꼽혔습니다. 93년에 다시 광주에 갔는데 오승윤씨를 만나 광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건물을 지어놓고도 소장품이 없어 전시회 하나도 제대로 기획하지 못하는 처지였어요. 50점 정도 기증을 부탁하더군요. 하정웅 컬렉션 전시실을 마련하자는 것이었어요. 일본으로 관계자들을 초대한 자리에서 212점을 기증했습니다. 내 컬렉션의 출발이 된 전화황의 작품 92점을 비롯해 모두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었습니다. 광주의 정신과 맞는다고 생각했고, 기도의 미술관을 만들어 가장 중심에 놓아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이사장님에게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귀한 작품들이었겠습니다. 개인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기증한 예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그런 기증이 처음이어서인지 화제가 되었죠. 그런데 한편에서 비난이 쏟아지더군요. 기증한다더니 재일교포 작품만 했다고. 숫자만 많지 쓰레기 같은 그림들이라고요. 기가 막혔습니다. 나를 이름이나 알리려는 졸부쯤으로 평가하는 것은 마음 쓰지 않으면 될 일이지만 작가들의 작품을 그렇게 평가절하 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그 안에 이우환선생의 작품도 있었다면서요.그 당시는 이우환씨가 아직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지 않은 때였죠. 이우환 작품이 당시 열 두 점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100호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거래되고 있으니 미술관으로서는 큰 자산이 됐습니다. 당시 쓰레기로 평가받았던 작품인데.(웃음) 기증한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현실과 문화를 알고 선택한 것들이에요. 역사적 맥락에서 가치 있다고 판단한 작품들입니다. 작품수나 외양만 보고 평가하는 일은 비문화적이죠.-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광주시립미술관에 여러 차례 작품을 기증하셨지 않습니까.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300점 기증했습니다. 한국 작가는 물론, 피카소 샤갈 달리 헨리무어 등 이른바 하정웅 컬렉션으로 불리는 작품들입니다. 광주시립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70퍼센트 가까운 양이라고 들었습니다.-그래서 소장품 기근을 겪고 있는 관립미술관들이 이사장님의 작품 기증을 기대하게 된 것 같습니다.다 같은 여건이니까요. 여력이 되면 돕고 싶었고, 그래서 기증운동이 확산된 것입니다. 특별한 계기도 있어요. 40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덕수궁 미술관에 갔어요. 그 건물이 이방자 여사가 살던 집이었지 않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미술관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들고 역사적 공간에 미술관을 들여놓아야 하는 문화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소장품도 없었죠. 우리나라 역사를 4천년, 5천년 역사라고 내세우면서 변변한 미술관 박물관 하나 갖지 못한 현실에 정신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문화진흥을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겁니다.-미술품을 수집할 때 어떤 기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컬렉터들은 아무래도 작품의 가치를 명망성에 두게 되지 않나요.저는 처음부터 역사적인 맥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와 같은 운명을 갖고 있는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역사성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보면 아무래도 디아스포라 작가들이나 그런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습니다. 역사성을 반영하고 현실과 사회를 직시하면서 그에 대해 비판하고 경고하는 그런 세계를 갖고 있는 작품들이죠. 그런 작품들이어야 관객들이 미술을 통해 역사를 읽고 우리가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지향해야 하는가를 인식하게 됩니다.-일본과 한국을 오가시면서 문화 활동으로 헌신하는 이사장님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하실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내가 살아온 과정에서 배운 경험을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매체 인터뷰 역시 그런 통로가 되겠지요.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도와주는 정신, 나누는 정신을 나는 추양(推讓) 정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행복을 찾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하정웅 컬렉션은 그러한 기도의 철학이 바탕입니다. 그 취지를 살리는 일을 좀 더 오래 지속하고 싶습니다.하 이사장은 전주를 여러 차례 오고갔다. 전주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그는 전주만의 문화 전통을 잘 지키는 것이 미래의 가장 큰 힘이라고 조언했다. 인터뷰 말미, 따끔한 충고도 더해졌다. 한옥마을이 참 좋았었는데, 어제 둘러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일과성 바람이랄까. 한옥마을다움이 없는 이상한 문화에 잠식되었더군요. 그런 바람은 정말 위험합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가 살아 있는 마을을 지키세요. 주민들이 나서야합니다.● 하정웅 이사장은 미술품 1만점 국내기증 재일교포 2세메세나 운동 선구자하정웅 이사장은 재일교포 2세다.전남 영암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식민지 치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 1세이고 동향인 어머니 역시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갔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부모님은 하루 벌이 노동으로 5남매를 키웠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명민했으나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곤궁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아버지를 도와 일을 할 생각이었던 그를 일본인 스승이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아무리 어려워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 그래야 행세라도 할 수 있는 시대다. 아들이 전해준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가르치겠다며 암거래 쌀장사로 학비를 댔다. 졸업만하면 일류회사 취직이 가능했던 명문 아키타 공업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미술교사가 아키타현 공모전에 그의 작품을 출품했다. 첫 출품에 입상의 기쁨을 안았다. 여러해 동안 출품하고도 번번이 낙선했던 스승은 제자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니가 내 선생님이다. 그 말 한마디에 자존감을 얻었다.졸업 직후 학교 추천으로 취업을 했다. 전기회사였는데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데다 적성도 맞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처럼 하루 벌어 사는 노동을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디자인 학교를 다녔다. 2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영양실조에 과로가 원인이었다. 3개월 동안 어둠속에서 지냈으나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야 했다. 조총련 조직에서 재일동포들이 인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해달라며 그를 불렀다. 4년 동안 온전히 동포들의 인권을 찾는 일에 매달려 살았다.스물 네살에 재일교포인 윤창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즈음 조총련 조직과도 결별했다. 신혼살림을 마련하면서 인연이 된 가전제품 상점을 우여곡절 끝에 인수하게 됐다. 1964년 도쿄올림픽 개최를 한해 앞둔 해였다. 전자제품 바람이 일본 전역에 불어 그의 상점도 성업이었다. 3개월 만에 떠안았던 빚을 갚고도 큰 돈을 벌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자신처럼 꿈을 갖고 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한 동포들을 돕기로 했다. 첫 대상은 재일교포 화가들이었다. 작가들을 지원하고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집한 작품은 1만 여점. 피카소 샤갈 뭉크 앤디워홀 달리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부터 이우환 손아유 등 세계 화단에서 주목받는 한국인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되어 있다. 그는 애초 일본에 의미 있는 미술관 건립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계획이 무산되고 난 후 지방도시에서는 처음으로 문을 연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을 시작했다.기증운동은 더 확대되어 한국의 웬만한 도립 시립미술관이 그로부터 적게는 수백점, 많게는 수천점의 작품을 기증받았다. 화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작품을 수집하고 기증하는 메세나 운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9년부터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보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최근 자신의 삶을 담은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을 펴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10.09 23:02

[17. 새 직업으로 뜨는 '인터넷 개인방송 BJ' 명암] '억' 소리 나는 수입…'악' 소리 나는 사고

노트북과 캠 앞에서 먹기만 해도 돈을 벌 수 있다? 정답은 Yes 다.컴퓨터와 캠만 있으면 어떤 방송이든지 할 수 있는 개인방송이 대세다. 공부를 하는 모습이나 자신이 다니는 산책길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면 그 자체가 컨텐츠가 되는 개인방송. 개인방송은 말 그대로 개인적인 방송을 의미한다.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장점 때문에 최근엔 초등학생까지 자신만의 컨텐츠를 내세워 방송에 나서고 있는 시대다.아프리카tv는 매일 약 10만 개의 방을 열고 일평균 방문자는 300만명 수준으로 집계된다. 평균 방문자 중 170만명은 휴대폰 앱 방문자다. 이들의 방송은 아이템 판매와 방송에 게시되는 광고가 수입이다. 유명 BJ(Broadcasting Jockey)들은 한 달 수입이 3500만원이라는 고백도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이렇듯 개인방송의 유명 BJ들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개인방송의 먹방 동영상이 끊임없이 게시되면서 화제를 만들고, 애청자들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한다. 유명 개인 방송인들의 방송을 자주 보는 애청자들은 몇십만에 육박하고 있다. 실제로 아프리카 TV에서 1위를 차지한 BJ의 경우 누적 시청자 수가 8월 21일 기준으로 1억 7000여 만명을 넘는다. 새로운 직업군으로 떠오르는 BJ 명과 암을 취재해봤다.△유스트림? 다음팟? 아프피카 tv 누구냐 넌개인방송을 할 수 있는 사이트는 제일 많이 알려진 아프리카 TV를 비롯해 다음팟, 유스트림등이 있다. 이런 사이트들은 BJ가 방송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트다. 개인방송 사이트에서 제일 유명한 아프리카 TV는 국내 최초, 최대 인터넷방송 사이트다. 또한 별풍선 등 아이템의 판매와 방송에 게시되는 광고가 주 수입이다. 유스트림은 미국의 개인방송 사이트로 버락 오바마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활용해 유명세를 탄 사이트다. 현재는 영어, 일본어, 한국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로 서비스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인 방송보다는 불꽃축제 같은 행사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다음팟은 아프리카 TV와 달리 별을 주는 등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이렇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방송인이 있는 만큼 방송의 종류도 다양하다. 게임을 하며 같이 해설도 하는 게임방송과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먹방이 제일 대표적이다. 다양한 카테고리 안에는 게임, 먹방 뿐 아니라 공부를 하는 방송까지 등장했다. 또한 노래를 불러주는 노래방송, 먹기도 하지만 자신이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요리방송도 있다. 특히 최근엔 공정한 중계가 아닌 한팀에 유리한 해설과 사투리를 접목한 방송도 인기다.△개인방송, 이것이 좋더라개인방송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인터넷이 대용량 동영상을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 첫째다, 둘째는 사람들이 개인미디어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들의 과감한 자기표현을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아프리카TV는 매력적이다. 이렇게 공중파에서 볼 수 없는 상황들을 담아내며 대안 언론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BJ가 개인방송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요인은 실시간 방송이다. 시청자가 그저 수용자의 입장인 일반 방송과 달리 아프리카TV에서는 BJ와 시청자가 방송 내내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는다.24시간 세계의 현지 상황을 컴퓨터에서 볼 수 있는 방송도 있다. 방은 세계 명소를 24시간 내내 볼 수 있는 방이다. L.A. 산타모니카, 영국 타워브릿지 등 다양한 나라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EBS와의 협약을 통해 아프리카 TV에서 EBS도 볼 수 있게 됐다.△ 개인방송, 이것이 문제로다그러나 아프리카TV가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BJ들의 수입원인 별을 받기 위해 선정적으로 노출하는 BJ들도 존재하는데, 그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아프리카TV에는 성인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다. 특히 게시된 광고들과 BJ들에게 주는 별들이 지나친 상업화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또 아직까지 자신의 몸매를 드러낸 채 방송하려는 여자BJ들에 대한 비난도 적지 않다. 또 초등학생이 아프리카TV BJ를 할 경우 그들은 아무런 보호막 없이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채팅방에 접하게 되는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평소 개인방송을 자주 시청한다는 대학생 조소연씨(22전주)는 먹방은 밤에 살찔까 봐 먹지 못하는 것들을 대신 먹어주니 대리만족이 되는 것 같다라며나와 비슷한 평범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공중파 방송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력이라고 말했다.회사원 이진상씨(35전주)는 최근엔 방송중에 BJ가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몸에 락스를 뿌려 사회 문제로 대두하는 등 사건이 발생하는 만큼 최소한의 규제가 필요해 보인다며 BJ들이 별을 받기 위해 자극적인 행동을 할 때는 신고하거나 퇴출하는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민 청년 CEO '창업일기'- 창업을 꿈꾸는가!'1010' 플랜하라!일부 언론에서 소개되는 IT분야 및 외식 서비스 분야에서 몇개월만의 대박창업, 단 몇년만에 강소기업을 만들어버린 청년CEO들. 이들의 성공사례가 알려지면서 현실적 창업마인드는 한국인의 빠른 습성을 자극해 더욱 조급하게 따라하기식을 만들고, 보다 비현실적인 창업 마인드가 형성되기 시작한다.필자 또한 과거 7년간의 시행착오들을 일기를 통해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도 7살 밖에 안된 유치원생처럼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누군가는7년이면 이제 안정화 되었겠네요라고 말하지만, 나 자신은 사실 이 말을 제일 듣기 싫어 한다!(속사정도 모르면서!) 왜냐하면 3년이 지난 후 부터 계속해서 그런말들만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개 창업한지 3년만 넘으면 정상 궤도에 오른다는 착각을 하기 쉽다. 나는 이런 이들에게 일명 10-10 플랜(텐텐플랜)을 소개하고자 한다.창업 전후 10년간은 반드시 경험을 쌓으며 초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나 자신의 경험을 더듬어 보자.평범한 대학 신입생인 나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휴학을 하여 본격적인 사회활동 경험을 쌓는다. 패스트푸드점, 한식당, 건설일용, 다단계, 노점상, 지하철판매직, 서비스직, 영업직, 신문배달, 상담원 등등.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경험하며 생활비를 벌게 된다.하루의 아침은 다양한 식자재 매입과 더불어 조리생산포장배송세척상담 관리영업기술개발 등 경영에 없어서 안되는 부분들의 집합체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부분들을 이미 그 나이때 우연치 않게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군대시절 2년간 읽은 책이 200여권. 경제문화경영투자주식부동산재테크 등 수많은 분야들을 읽어보면서 저자들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 해 보기 시작한다.군대를 제대하고 3년간은 창업전 마지막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무대였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영업을 위주로 하였으며, 동시에 군대에서 읽은 책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한 교육 서비스 분야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실감했으며, 창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본금 또한 모으기 시작한다.창업 후, 그 분야에 최소 10년간의 도전과 노력할 생각이 없다면 창업은 꿈도 꾸지 말아라!단 몇년만의 성공 창업이란 말은 일찌감치 잊어버리자. 10년 뒤에도 반드시 살아 남을 수 있는 창업 아이템을 찾아봐야 한다. 내가 10년 뒤에도 이 사업을 지속 가능하게 경영할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창업은 애초에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또 창업 이후에 무엇 무엇 때문에 안된다. 외부 상황 때문에 안된다는 벽에 부딪힐 확률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번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이러한 벽을 뚫거나 뛰어 넘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한 벽에 부딪혀 10년내 지레 포기를 하거나 한계를 설정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말라는 의미다. 나 자신은 이제 만 7년이 지났다. 아직도 3년이란 시간이 더 필요하다. 향후 3년간 내공을 더 단단하게 쌓는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다. 대박은 없다. 하지만 10-10플랜을 모른다면 반드시 쪽박(?)이 찾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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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0.0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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