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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옥 전북테크노파크 원장 "2020년까지 도민 1인당 소득 4만불·일자리 1만개 목표"

백두옥 제4대 전북테크노파크 원장이 취임한 지 오는 30일로 꼭 100일을 맞는다. 행정고시 26회 출신인 그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27년간 관료 생활을 했고 이 중 9년을 대만과 인도네시아 등에서 상무관으로 지내며 현지 기업의 눈과 입, 귀가 돼 주었다. 이후 서울중소기업청장과 창업진흥원장 등을 역임하고 지난 4월 22일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와 임기 3년의 전북테크노파크 원장을 맡게 됐다.상공부 수습 사무관으로 근무할 당시 필리핀의 바나나 7000톤을 구상무역 형태로 들여와 판매한 수익금 150억원을 중소기업진흥기금에 전달하는 등 중소기업 지원업무는 시작하면 해결하거나 매듭짓는 ‘소방수(消防手)’ 역할을 자청해 왔다. 그는 어쩌면 중소기업과의 인연이 그때부터 닿아 현재 도내 기업 지원의 거점 역할을 하는 전북테크노파크 원장으로 자리하게 됐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전북테크노파크에서도 소방수가 되길 바라는 그를 전주시 팔복동에 있는 전북테크노파크 원장실에서 만났다.-취임한 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먼저 소감은.“저는 1983년 산업통상자원부(옛 상공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해 창업진흥원장으로 근무하다 좋은 계기로 30년 만에 고향인 전북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지금은 창의성이 활발히 꽃 피는 지식 정보화 시대, 창조 경제 시대인데 전북은 ICT 융합, 소프트웨어 적용 산업 및 창업 부분이 미진한 것 같아 이 분야를 활성화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중앙정부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9년 정도 일해 본 결과 우리 중소기업들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글로벌화입니다. 앞으로 전북지역의 글로벌화 속도가 배가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전북테크노파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원래 테크노파크란 기업과 대학, 연구소 등 인적·물적 자원이 집적화된 산업 단지를 말합니다. 전북테크노파크는 이러한 산업 단지에서 R&D 등 기술 고도화 작업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조직으로 2003년 12월 설립됐습니다. 산자부와 전라북도의 출연기관으로 국가 기획 과제와 지역 특화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전북테크노파크 원장 응모 당시 발표했던 프리젠테이션(PT) 내용이 궁금합니다.“전북테크노파크 운영 계획을 PT를 통해 15분 내외로 발표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북의 4대 성장 동력산업 외에도 전북의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새만금이라는 큰 마당을 활용한 사물인터넷이나 3D 컴퓨터, 나노, 바이오기술 등 다양한 미래 기술을 제시했습니다. 향후 10년 또는 20년을 내다보는 전기자동차실증단지, 사물인터넷실증단지 등을 구축해 제품을 만들고, 초기 벤처기업의 아이디어를 시제품으로 제작해 주는 미국의 테크숍(Techshop)과 같은 시제품 제작소를 통해 새로운 제조업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자동차·기계, 녹색에너지, 융복합소재산업, 식품·생명산업 등 전북의 4대 성장 동력산업과 관련해 전북테크노파크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성장 동력산업 구조 고도화를 위해 우선 해당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8개 연구회(16개 분과)의 전북과학기술위원회를 통한 상시 기획 체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전라북도 전략산업협의회, 정책 포럼 개최 등의 산학연 협의체 운영으로 정보 공유를 통해 산업 육성 방향을 수립하고, 국내외 산업 이슈에 대한 정보 제공을 위해 산업정책정보 브리핑, 이슈&테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민선 6기 지방정부의 산업 육성 정책 방향인 농생명, 탄소, ICT 융복합 등과 연계한 주요 산업 분야의 전략 수립을 구상 중에 있습니다.”-산업통상자원부, 서울지방중소기업청, 창업진흥원장 등 새로운 직책을 처음 맡았을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직책을 처음 맡게 되면 조직이나 기관의 비전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전은 그 조직이 달성해야 할 청사진, 목표, 꿈을 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하고, 직원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비전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그렇다면 전북테크노파크의 비전은.“제가 강요하기보다는 직원들 전체가 가진 생각을 모으기 위해 비전 공모를 했습니다. 민선 6기 지방정부를 맞아 전북테크노파크에서는 새로운 비전으로 ‘창조적 산업혁신의 허브, Challenge 2020’을 제시하고, 2020년까지 달성할 구체적 목표로 ‘전북도민 300만 시대, 전북도민 1인당 소득 4만 불, 전북 일자리 1만 개 창출’을 내걸었습니다.”-서울지방중기청과 창업진흥원 등 중소기업 가까이에서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활동(에피소드)이 있었다면.“창업진흥원에 근무하면서 중소기업들의 애로 기술을 해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기업에서 디자인이 예쁜 가습기를 판촉용으로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딸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사용 3개월 후에 고장이 났는데 A/S를 받을 데가 없어 난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중소기업들의 발전을 위해서는 안정성이나 신뢰성에 대한 인증이 있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SSM(Super SuperMarket) 문제로 작은 동네 슈퍼를 운영하시는 분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에는 중소기업들은 시장경제 논리보다 사회 정책적으로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존경하는 인물이나 역할 모델이 있으신지요.“닮고 싶은 사람은 정약용 선생과 이율곡 선생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에서 공직자의 자세를 논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3차 면접시험에서 면접 위원이 ‘만약 자신의 뜻(소신)과 상관의 지시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정약용 선생은 사대부의 벼슬살이하는 방법은 언제라도 벼슬을 버린다는 의미로 ‘버릴 기(棄)’ 한 글자를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저 또한 소신을 펼치는데 맞지 않는다면 그만두겠다고 답했던 기억이 납니다.”-만약 현재 면접관이 똑같은 질문은 한다면 어떨까요.“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설득을 해야 하고, 만약 안 된다면 뜻이 관철되도록 시간을 갖고 추구해 나가겠다고 답하겠습니다.”-끝으로 도민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많은 기업들이 창업하고,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며, 사람이 모이는 300만 시대가 되려면 도민들이 마음을 열고 보다 개방적인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민들의 개방적인 마인드가 외국인 방문, 외국 기업 유치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 기업, 우리 도민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해야 전라북도가 살고 싶은 도시, 기업을 세우고 싶은 도시가 될 것입니다.”● 백두옥 원장은- 9년간 대사관 근무, 현지 기업 애로 해결 앞장전북테크노파크 백두옥(60) 원장은 익산 남성고등학교와 원광대학교 영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벤터빌트대학 대학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동아대학교 대학원 법학과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그는 지난 1983년 행정고시(26회)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상공자원부 서기관으로 근무하다 1997년부터 9년간 외교부 주대만대표부 산업자원관, 산업자원부 수출입조사과장, 외교부 주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산업자원관으로 활동했다. 이후 산업자원부 지역개발총괄과 및 무역구제정책과에서 부이사관으로 근무하고 중소기업청 감사담당관, 서울중소기업청장, 창업진흥원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 기획
  • 문민주
  • 2014.07.28 23:02

[(24) 장수드림협동조합] 32개 농가, 장수사과·오미자 가공식품 공동생산·판매

장수드림협동조합(이사장 이한구이하 장수드림)의 성장세가 무섭다. 해마다 매출규모를 늘리며 장수지역 가공산업계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장수드림은 장수에서 생산되는 최고 품질의 장수사과와 오미자를 가공식품으로 만들어 서울, 수원, 대구, 부산, 전주 등 전국 각지의 대형마트에 납품하면서 매출을 키우고 있다.장수드림은 장수군에서 실시한 농산물가공창업교육 수료생을 중심으로 농산물가공을 희망하는 32개 농가가 합심해 모인 공동체로, 지난해 8월 설립된 농업회사법인이다.조합원들은 사과, 오미자, 토마토농가가 함께 어우러져 조직화를 이루고 가공 산업의 규모화를 도모하는 한편 장수군농산물종합가공센터를 활용해 공동가공, 공동브랜드 및 공동포장재를 사용해 제품을 생산 판매한다.생산시설과 저장시설을 갖추고 있는 장수군농산물종합가공센터는 농업인 공동가공설비로, 농업인 등의 농외소득 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거 농업인의 농산물가공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지난 2011년에 설립됐다. 장수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새로운 소득원 개발에 목말라하면서 농산물가공 등 농외소득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이에 부응하듯 뜻있는 농업인들이 장수드림을 설립해 사과와 오미자 등 지역 특화작목 가공을 통해 소득을 창출하기 시작한 것이다.장수드림은 장수지역에서 생산되는 좋은 원료로 가공제품을 만들고, 이를 통해 웰빙과 장수를 열망하는 소비자들에게 장수라는 꿈을 이뤄드리자는 모토로 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다.장수드림 이한구 이사장(76)은 지난 1998년에 귀농해 2000년부터 사과농사를 시작했고, 올해로 14년째가 됐다.이 이사장은 그동안 청산골작목반을 이끌어오며 작목반원들 24명 모두가 GAP 인증을 획득하는데 힘써왔으며, 현재 미생물연구회 운영을 통해 미생물을 이용한 유기농사과농법 연구에 힘을 기울이는 등 장수사과의 발전을 위해 여러모로 힘써왔다. 지난해부터는 장수드림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7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발한 활동으로 농산물 가공산업의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하고 있다. 장수드림에서 생산하는 가공제품에는 사과즙, 사과잼, 사과칩, 오미자청이 있다. 장수드림 생(生)사과즙은 당도 13브릭스 이상의 사과를 파쇄, 착즙해 순간고온살균을 통해 파우치로 포장되어 사과의 맛과 향이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미자청도 오미자를 깨끗이 세척해 설탕과의 배합을 통해 3개월 이상 저온숙성을 거쳐 추출, 살균처리를 통해 고운 빛을 유지하고 유통 상의 안정성을 확보했다. 장수드림의 사과칩은 사과를 그대로 슬라이스 해 건조시켜 껍질째 사과를 섭취할 수 있는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사과잼은 진공농축방식을 통해 제조돼 사과의 영양파괴를 최소화 했으며 사과과육이 살아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무엇보다 장수드림은 △해발 600m 고지대에서 생산된 질 좋은 원료사용과 △위생적인 장수군농산물종합가공센터에서의 제품생산이라는 쌍발엔진을 앞세워 가공산업의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또한 식품박람회 참가 및 온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장수와 장수드림가공제품을 적극 소개하는 한편 컬리너리투어 등 소비자와의 직접적인 만남의 기회를 가져 장수드림가공제품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이한구 이사장 "소비자 인정받는 제품 생산, 6차 산업 활성화 앞장설 것"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만큼 앞으로 장수드림협동조합을 더욱 발전시켜 장수의 농산물 가공산업을 확고히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1차 농업과 3차 산업의 연결고리를 자처하며 6차 산업을 활성화 시키는데 앞장서겠습니다이한구 이사장은 처음 접해보는 농산물가공이 힘들 때도 많았지만 꿋꿋이 인내하며 판로를 개척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며 고집스런 원재료 품질관리를 통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다보니 소비자들이 인정해주고 재구매 요청을 해올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특히 백순동 총무와 이사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장수드림협동조합은 없었을 것이라며 동료들에게 회사 발전의 공을 돌렸다. 이 이사장은 앞으로도 조합원들이 가공기준을 잘 지켜갈 수 있도록 마인드를 공유하며 더 좋은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공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이제 가공산업의 힘찬 첫발을 내디딘 만큼 더욱 노력해서 조합원들이 상생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
  • 정익수
  • 2014.07.24 23:02

[(29)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남 장흥] 농민군 2000명 사망 '최후 격전지' 새롭게 기려

올 연초 전남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매년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으로 치르는 합동제례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농민군들이 모두 같은 날 처형됐기 때문이다.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분만 15명. 동학농민혁명에서 치열했던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대목이다.동학농민혁명 당시 관군일본군과 농민군 사이 최후 사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장흥이다. 그럼에도 장흥은 한동안 혁명연구사의 변방에 있었다. 최근 혁명 유족과 향토 사학계의 줄기찬 노력 덕분에 장흥지역 혁명의 발자취가 점차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3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들의 최후 전투지인 석대들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되고, 오는 12월에는 기념공원도 준공을 앞두고 있다.장흥지역은 우금치 전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농민군이 최후까지 항전한 곳이다. 당시 장흥지역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 패배로 위축된 혁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항전했다.반외세 반봉건의 정신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장흥 농민군의 시대 정신은 현재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낯설기만 하다.△장흥지역 동학 유적장흥지역 동학 지도자의 활동 반경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크게 용산면, 관산읍, 회진과 덕도, 대덕읍, 유치면 등에 집중돼 있다.용산면 도르뫼 들판에는 이방언이 농민군을 집결해 훈련을 했던 곳이며, 부용사는 관군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긴 농민군의 은신처이다.관산읍에 위치한 옥산전투지는 솔치재를 넘어오는 일본군과 농민군이 죽천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남송마을 무연고 묘지는 옥산전투 중 죽은 이름 없는 수백기의 농민군이 묻혀 있는 곳이다.회진과 덕도의 회령성은 이인환이 이끄는 농민군이 무혈입성, 화포와 조총 등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한 곳이다.대덕읍과 유치면에는 월정전투지, 농민군 야전사령부가 있던 연지리가 있다.또한 현재의 유치면 조양리와 신풍리 일대는 영암에서 넘어온 일본군에 맞서 농민군이 항전한 곳이다.△이방언과 푸조나무장흥읍 용산면 어산리에 위치한 푸조나무(천연기념물)는 느릅나무과로 나이가 약 400살 정도로 추정된다. 이 나무 밑에 120년 전 농민군이 집결했다.장흥의 동학지도자 이방언을 필두로 모인 농민군은 이곳에서 전투를 위해 집결하거나 훈련을 했다.이방언은 당시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1888년에는 전라감사와 담판을 지어 무리한 조세를 시정하는 등 지역에서 높은 신망을 받았다.이방언은 갑오년 전봉준의 무장기포 당시 이인환, 강봉수 등과 함께 장흥지역 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 진영에 합류했다.그는 장성 황룡전투를 지휘, 대승을 거두어 남도장군이라는 별칭을 얻었다.하지만 이후 석대들 전투 이후 체포되 장대(현 장흥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처형됐다.옛 역사를 간직한 이 나무에서 예로부터 부락 주민들이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국가의 안녕과 질병 없는 한 해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당시 농민군도 더 나은 나라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곳에서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다.△석대들 전적지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과 관군 간의 사투가 벌어진 전남 장흥군 장흥석대들전적지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제498호)으로 지정돼 있다.석대들 전적지는 정읍황토현전적지(사적 제295호)와 공주우금치전적지(사적 제387호), 그리고 장성황룡전적지(사적 제406호)와 더불어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나고 기 지정된 전적지와 비교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장흥읍 남외리에 위치한 석대들 전적지는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 3만명이 넘는 농민군이 참여해 항전을 계속하다 2000명 이상이 사망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 전투 현장인 석대들 벌판과 동학농민군이 깃발을 꽂았다고 전해지는 석대(石臺), 석대들 전투에서 사망한 관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영회당(사진)등 모두 3만5700㎡(52필지)가 국가사적이다. 장흥 석대들 전투는 동학농민 혁명과정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군 주력과는 별개로 이루어진 전투로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항전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다.현재 남외리와 석대들판 사이 옛날 작은 석대가 있던 자리에는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소년 뱃사공 농민군 살리다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농민군 강진과 석대들 인근 자울재 쪽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을 쫓아 한반도 최남단까지 내려왔다. 동학군은 몸을 숨겼고, 관군의 수색은 집요했다. 500명의 동학군이 좁은 섬 덕도에 숨었다. 관군의 수색망은 좁혀졌고, 농민군들은 생사의 기로에 섰다. 그때 소년 뱃사공이 돛배를 몰고 와 밤마다 조금씩 수를 나눠 동학군을 인근의 다른 섬으로 피신시켰다. 윤성도의 손자 윤병추씨(80)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목숨을 내걸고 쫓기던 동학군을 하루가 멀다하고 배에 태워 인근 섬으로 피신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윤병추씨는 남도 끝까지 쫓긴 동학군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던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 중고등학생용 교재 학교 보급, 자치단체 지원 조례 제정 추진2004년 설립된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는 장흥지역 혁명 유적지 발굴 및 선양 사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특히 직접 발로 뛰는 유적지 답사활동을 통해 이야기 장흥동학농민혁명이란 책자도 발간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문충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여겨진 장흥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생생한 발자취를 찾아 헤맸다며 농민군 후손과 향토 사학계의 노력 덕에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사적지로 인정 받게 됐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오는 12월이면 석대들 전적지 인근에 기념공원과 기념관이 설립될 것이다며 이후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전남도와 장흥군 차원의 조례 제정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기념사업회는 최근 중고등학생용 교재를 일선 학교에 보급,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이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생생한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문충선 사무국장은 동학농민혁명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 4.19의거,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정신적 뿌리라며 그 정신을 후대에 알릴 수 있도록 관련 교육 및 홍보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 기획
  • 최명국
  • 2014.07.23 23:02

[⑦ 여성의 희망 '시간선택제 일자리'] 4대보험 가입 정규직 혜택…구직자들 '싱글벙글'

씬 깜언! 씬 깜언!(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은 구직신청 후 3~4번의 동행면접의 과정을 거쳐 방과후 학교 영어강사에 취업한 뉘엔티안씨가 동행했던 취업설계사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이다. 베트남여성 뉘엔티안(29)은 3년 전 한국인 남성과 결혼 후 우리나라에 이주해 살고 있는 결혼이민여성이다. 얼마 전 시어머니와 함께 센터를 방문한 뉘엔티안은 결혼 전 베트남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경력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의 돌봄 시간이 자유로운 시간제일자리에 대해 문의, 취업에 성공했다.뉘엔티안 씨는 자녀의 돌봄과 가사로 인해 종일 근무가 어려운 여성들에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만족한다며앞으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대해 취재해봤다. △시간선택제 일자리? 누구냐, 넌경제용어사전에 의하면 근로자가 근로시간과 업무 시작종료 등 근로형태를 정할 수 있고 임금과 복리후생 등에서 전일제 근로자와 차별이 없는 일자리를 일컫는다. 지난 2013년 11월 13일 정부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활성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일부에선 같은 해 6월 제시되었던 고용률 70% 로드맵 숫자에 매몰돼 일자리 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삼성그룹의 시간선택제 계약직 6000명 채용을 필두로 2017년까지 정부 및 공공기관에서는 1만 3000명을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시간선택제 일자리창출 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근로시간 단축제도 등을 정비해 공공부문에서 조성된 분위기를 민간부문으로 확산되도록 할 계획으로 기업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요구했다. 기업을 중심으로 민간부문 시간선택제일자리사업을 추진 하고 있는 전주고용센터의 경우 2014년 5월 기준 51개 사업장 260명이 시간선택제일자리사업 승인됐다. 그렇다면 어떤 기업들이 민간부문 시간선택제일자리사업에 참여할 수 있을까? 먼저 공공기관이나 사업주가 지원 대상 근로자에 대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이 사업 외에 인건비를 지원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청이 가능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근로조건은 고용보험 등 4대 보험에 가입하고 소정근로시간이 주 15시간에서 30시간 이하 이면서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해야 하며 또한 사업주는 시간선택제 근로자에 대해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8조에 따라 임금 등 근로조건에 있어 통상근로자와 차별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시간선택제 일자리창출 사업 지원수준은 근로자 1명 당 월 80만원 한도(대기업은 월 60만원 한도) 내에서 사업주가 지급한 임금의 50%를 1년의 기간 내에서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가까운 지방 고용노동관서에 사업계획서 심사 및 승인을 받도록 한다. 선정이후 기업에서는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채용하고 지원금 신청을 하면 된다.△ 시간선택제 운영기업 효과는 뭘까?C식품 및 식품서비스분야 기업은 2013년 경력단절여성 150명을 채용했고 2017년까지 5000명을 채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도도입은 장시간 근무 관행 개선과 기존 직원들의 업무부담 완화 및 생산성 향상, 경력단절여성 채용을 통한 여성인력의 사회진출 확대 분위기 조성을 위한 일이라고 하나 결과적으로 경력단절여성 고용으로 숙련된 전문인력 확보는 물론 일과 가정의 양립지원, 기존 시간제 근로자 처우를 개선하기에 상당한 효과가 나타났다는 의견이다. D떡전문점에서는 피크타임의 업무 집중도 완화를 위해 50명 경력단절여성을 대상으로 시간선택제 근로자를 채용하였고 이를 통해 노동 강도와 업무 스트레스가 감소, 고용창출은 물론 조직 몰입도와 업무 만족도 증대 효과를 이끌어냈다고. 우리지역 내 시간선택제 일자리창출 지원 사업 참여기업인 전주시 인후동에 위치한 K교육지원서비스기업은 올해 처음으로 아동 대상 교육 강사를 시간제 근로자로 5명을 채용했다. 능력 있는 경력단절여성이 가정을 돌보면서 일 할 수 있도록 선택 가능한 근무시간 활용으로 고용안정은 물론 여성일자리창출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시간 선택제 명암 시간 선택제는 양질의 일자리가 적고 임금이나 수당 등 처우 면에서 전일근로자와 격차가 심해 구직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비판도 거세다. 또 자칫 정규직은 남성, 여성은 시간제로 인식이 고착화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과 시간선택제 일자리 도입 이후 홍보부족으로 인한 사업 인지도 약화 등의 문제로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여성고용률 제고에 핵심이 되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4대 보험가입, 최저임금 등 근로조건 보장, 임금 등에 차별을 받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 근로제도로 출산과 육아 등의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떠나야 했던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재취업이라는 여전히 희망의 돌파구이기도 하다. 전주고용센터 최정철 주무관은 먼저 기업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간선택제 일자리의 가장 큰 장점은 기업에서 필요로하는 맞춤형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시간선택제를 활용, 탄력적인 인력운영으로 특정 시간, 특정 기간에 업무량을 집중할 수 있어 효율적인 인력운영 시스템이 마련되고 일가정 양립을 통해 근로자의 이직을 방지해 구인난 해소와 유능한 인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이어기업에서 시간선택제 근로자 1명 채용 시 월 80만원 한도로 임금의 50%를 지원받게 되는 등 경제적 절감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며시간선택제 일자리 직무가 대부분 단순노무직, 생산직, 서비스직, 사무직 순으로 조사돼 정부 의도대로 반듯한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확대되기 위해선 전문직 등 다양한 직종에서의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강조했다.● (유)가온교육 양승훈 대표 "숨어있던 우수인력 확보 기존 직원 업무부담 덜어"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다는 걸 처음엔 몰랐어요. (유)가온교육 양승훈 대표 (50)는 저희같이 교육서비스업을 운영하는 경우엔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성패를 가늠하는 것인데 숨어있던 우수한 인력을 찾아내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소득이다라며현재 5명의 시간선택제 인력을 지원받고 있는데 그 분들 모두 경력단절여성으로 결혼 전 어린이집과 유치원 강사경력이 있는 분들로 결혼과 함께 자녀양육 등의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셨던 경력단절여성이다고 소개했다.양 대표는 종일근무가 아니다 보니 일과 가정이 양립되고 가정경제도 살리는 일거양득이라며무엇보다 일을 통해 자신감도 생긴 것 같다고 하시는 모습을 볼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시간선택제 일자리 도입 당시 기존 직원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여성인력이 대부분인 저희 직원들은 당연히 이해해주고 본인 입장이 되어 생각해 주는 분위기여서 오히려 고마웠다며현재 기존 직원들과의 마찰도 없고 강의 노하우 전수 등 전 직원들이 서로를 이끌어주며 업무를 공유한다고 말했다.그는 아직 시간선택제 일자리에 대한 정확한 개념파악과 이해가 부족한 기업들이 있다 보니 경력단절여성들을 많이 수용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며많은 기업이 참여해서 우수한 인력활용을 통한 여성일자리 창출에 기여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간선택제 방과후교사 박선님씨 "돈도 벌고 자녀들도 키우고, 당당한 엄마로 즐겁게 생활"시간선택제 일자리의 가장 큰 장점은 일도하고 가정도 돌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유)가온교육 방과후교사 박선님씨(38)는 사실 일은 하고 싶은데 아이가 너무 어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만 하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만 했다며우연히 시간선택제 일자리 채용공고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결혼 전부터 일했던 분야 인데다 무엇보다 일을 마치고 아이들을 챙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맘에 들었다고 참여배경을 설명했다. 박 교사는 종일 근무하는 것보다 급여가 작은 건 아쉬움도 있지만 정규직원들과 차별이 없고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종일제 전환도 가능하다고 하니 그동안 경력과 스펙을 쌓아 두자는 제 나름의 전략도 있다고 웃어 보였다.또다행히 취업에 성공하고 이제 어엿한 직장인으로 당당한 엄마와 아내로 즐겁게 생활하고 있다며저처럼 일은 하고 싶지만 아이나 돌봐야 할 가족들로 인해 망설이는 여성분들이 있다면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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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2 23:02

신임 이철재 국제라이온스협회 전북지구 총재 "도민 가려운 곳 긁어주는 봉사활동 발굴, 내실 있게 추진"

국제라이온스협회 356-C(전북)지구 제 37대 이철재 총재(61)가 ‘함께하는 세상, 희망의 빛으로’라는 주제 실현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섰다.지난 2002년 전주 청지라이온스클럽에 입회한 이 신임 총재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 해왔다.봉사는 생활 속의 습관이라는 이 총재는 “임기 동안 전북지역 라이온 가족 모두가 진정으로 주인의식을 느끼면서 강력하고 내실 있는 봉사단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내년 6월까지 전북지구 라이온을 이끌어갈 이 총재에게 1년 동안의 지구 운영목표와 중점사업 등에 대해 들어봤다.-지구 총재로 취임하신 소감을 부탁드립니다.“먼저 지구 창립 후 36년이란 긴 역사를 가진 우리 지구의 제 37대 총재로 취임한 것을 무엇보다 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쁨과 함께 책임감 또한 막중함을 느낍니다. 앞으로 1년 임기 동안은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클럽 전체와 전북도, 나아가 세계에 봉사를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총재직을 수행하겠습니다. 우리 라이온들과 함께 전북지구가 타 지구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지구 발전에 앞장서겠습니다.”-전북지구의 2014-2015 운영목표는 무엇입니까.“한회기 동안 총재 주제를 ‘함께하는 세상, 희망의 빛으로’라고 정하고,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이론)과 거래적 리더십(지도자와 부하 간에 비용-효과의 거래관계로 수행되는 리더십)을 통해 교육중심의 지구운영, 라이온 활동홍보 강화, 회원 유지관리 및 신생클럽 탄생, 단위클럽 멘토링 관리시스템 운영, 투명한 지구운영 등으로 자긍심을 드높여서 글로벌 시대에 부응하는 자랑스러운 전북지구 봉사인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지구운영 방향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요즘 세계경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라이온이 희망입니다. 혼자 할 수 있는 봉사는 적지만 우리가 함께 하면 많은 봉사를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봉사는 인간이 태어나 가장 훌륭한 투자라고 합니다. 투자의 가치를 만들어 일생의 보람을 우리 라이온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지구와 지역 및 클럽이 삼위일체가 되어 서로 소통하며 역할을 중요시하는 조직으로 발전해 우리가 행한 봉사를 통해서 감동이 일어나고 또한 봉사활동을 하는 우리들 역시 스스로가 감동을 느끼는. 그런 진정한 봉사를 실현하자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저는 임기동안 우리 라이온가족 모두가 진정으로 주인의식을 느끼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내실 있는 봉사단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구운영을 투명성과 공정성 그리고 객관성을 담보로 하는 민주적 운영방식을 통해서 라이온 가족 간에 소통과 화합을 최우선으로 해 일생 동안에 있어서 최고의 한해로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전북지구의 2014~2015 중점 추진사업은 무엇입니까.“국제협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은 물론 우리 지역에서 꼭 필요한 봉사활동을 발굴해 추진할 계획입니다. 우선 각 지역별 지상파 홍보를 활성화해 봉사활동을 알리고, 많은 도민들이 봉사활동을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라이온 봉사대상 지구와 지역 간 매칭 사업, 지구와 클럽 간 합동봉사, 장애아동 돕기 기금 마련 위한 청소년 음악회 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농촌 환경개선 사업과 의료봉사도 추진할 방침입니다. 이밖에도 35사단과 합동으로 진행하고 있는 봉사활동, 재해를 입은 국가를 지원하는 LCIF기금(국제협회 봉사기금) 기탁 등 지구에서 계속하고 있는 사업도 적극 추진할 것입니다.”-회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남을 위해 어떠한 훌륭한 일을 시작할 때까지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라이온스 창시자 멜빈존스의 좌우명처럼 봉사인으로 동참했기 때문에 우리 라이온 모두는 성공했다고 자부심을 갖고 말할 수 있습니다. 봉사를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운 마음씨의 행동 표현입니다. 따라서 우리생애에 잘 선택한 봉사대열에 후회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철재 총재는 '함께하는 봉사' 2002년에 입문“봉사활동은 혼자서 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여럿이 함께 꾸준히 봉사활동을 할 때 그 효과는 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이온 가족과 함께 올 한해 열심히 전북지구를 이끌어 나가겠습니다.”오는 23일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는 국제라이온스협회 356-C(전북)지구 제 37대 이철재 총재(61)는 “봉사는 생활 속 습관이다”면서 “누가 시켜서가 아닌 몸에 배어 있을 때 진정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자신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닌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봉사에 임해야 한다”면서 “항상 낮은 자세로 일관되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전북지구 제 16대 김영구 총재의 권유로 2002년부터 전주 청지라이온스클럽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는 이 총재는 “라이온이 되기 전에는 장학금 전달, 불우 이웃 돕기 등 개인적인 봉사활동을 해왔다”면서 “라이온이 된 뒤에는 개인이 혼자 하기 힘든 봉사활동도 여러 라이온과 함께 하면서 보람과 긍지를 느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나 자신이 잘나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전북지역 라이온들이 봉사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전했다. 이 총재는 이달 초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총재학교 교육을 수료했다. 이 총재는 또 이 기간 제97차 세계대회에 참석해 전 세계 라이온스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교류하고, 우호를 다졌다. 그는 “전북지구가 세계 762개 지구 중에서 봉사활동 등 지구 운영 전반에서 1등을 차지해 전 세계 라이온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는 등 전북지구의 위상을 각인시켰다”면서 “이는 여러 선배회원들이 일궈낸 업적으로, 이 같은 선배들의 업적에 누가되지 않도록 올 한해 전북지구를 열심히 이끌어 나가겠다”고 강한 의지를 밝혔다.임실 출신인 이 총재는 전주대 체육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전주 제3지역 3지대위원장, 홍보 부총재, 지구 제2부총재, 지구 제1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이 총재는 현재 이중본 대표, (주)NES 회장, (주)찬드림 이사 등을 맡고 있다.

  • 기획
  • 강정원
  • 2014.07.21 23:02

여성국극 부활 나선 이소자 선생 "전통 잇는 아이들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

창극은 최초의 작품 은세계가 1908년 공연된 이후 1950년대 말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우리의 공연예술 양식이다. 새로운 대중문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부유하기도 했었으나 1962년 국립창극단이 문을 열어 그 맥을 이어왔으니 100여년 한국적 공연양식의 온전한 역사는 지켜져 온 셈이다. 2년 전쯤에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던 유영대 고려대 교수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판소리 연구자이기도 한 유 교수는 국립창극단 무대를 통해 창극의 양식을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시대에 맞는 창극을 발굴해내는 작업으로 주목을 모았다. 그가 지향했던 창극은 보편적 음악극으로서의 양식. 그래야만 창극이 우리시대의 공연양식이 될 수 있다고 유 교수는 확신했었다.한 시기, 대중들과 호흡했던 창극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보존의 가치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공연무대에서 새로운 가치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최근 창극의 또 다른 변형 양식인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을 꿈꾸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그것도 판소리의 탯자리인 남원에서 움트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자연히 관심이 더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운동을 이끌어낸 사람이 원로 여성국극배우 이소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올해 여든 넷. 이소자선생의 나이다. 선생은 여성국극의 초창기 무대를 지켰지만, 그 명맥을 온전히 이어온 국극배우는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수십억 원에 이르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의 부활과 발전에 내놓겠다며 기증식을 가졌다. 지난 6월 남원에서 열린 국악인의 밤에서다. 놀란 것은 국악인들만이 아니었다. 이 지역과 연고도 없는 선생은 왜 남원에서 여성국극을 부활시키려하는 것일까. 선생에게 여성국극은 어떤 의미인가, 삶의 여정이 궁금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선생은 손사래부터 쳤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인터뷰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선생은 열정에 넘쳐보였다. 인터뷰는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그의 자택에서 있었다. -건강하십니다. 전화 목소리만으로도 연세를 짐작하기 어렵던데요. 직접 뵈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군요. 젊게 봐주니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걸음도 후적후적 다녔는데, 아무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조심조심 걷게 되요.(웃음) 팔십 노인인데 특별히 아픈데 없이 이만큼 유지하고 사는 것도 감사해야죠.-남원과는 지역적 인연이 있습니까. 특별한 인연은 없어요. 젊은 시절 유독 전북지역에 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인연이라면 그것이 전부예요.-집 분위기가 공연 연습실 같습니다. 무대 의상이나 소품들이 참 많군요. (그의 집은 넓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은 무대의상과 소품으로 들어차있고, 거실 곳곳에도 소품들이 놓여있었다)공연을 위해 내가 만든 의상이에요. 경비를 좀 줄여보려고 이것저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하죠. 소품도 그렇고. 애초에는 이 건물 지하에 연습실이 있었는데 남원에 설립한 햇님여성국극보존회 운영비를 보내야 해서 세를 내줬어요. 그래서 춤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은 거실에서 연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지금도 춤을 가르치십니까. 내가 만든 창작무용이 있어요. 밤길 이라고 이야기가 있는 춤인데,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 있지요. 탈 같은 소품도 필요하고.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있어 배운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가르쳐줘요. 탈 만드는 기술은 나만의 비법이 있는데 안 가르쳐줘요. 아직 공개하고 싶지 않거든요. (웃음)-남원에서 열린 춘향제때 여성국극 춘향전을 공연했는데 평은 어땠습니까. 올해 무대가 두 번째인데 아주 좋았어요. 평도 괜찮았고, 아이들도 즐겁게 했습니다. 작년 무대는 첫무대여서인지 아무런 경험이 없는 애들을 가르쳐서 무대를 올리려니 어려움이 많았거든요.-주로 판소리를 전공한 학생들이었겠지만 국극이란 양식이 아주 생소했을 텐데요. 국극은 또 연기에 좀 더 비중이 있지 않나요. 소리는 잘하는데, 연기를 맞추려니 더 힘들었어요. 그래도 한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애들이 곧잘 하더군요. 작년에는 학교에서 결정한 일이니 할 수 없이 하는 아이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지원자도 많아지고, 자기 역할에 관심도 많아 이 아이들이 연습을 잘 하면 남원에서 좋은 여성국극을 만들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우선 가르치는 내가 더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지난 3월부터 남원을 오가면서 애들을 가르쳤죠. -아이들을 지도할 때 선생님 목표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욕심이야 애들을 좋은 국극배우로 만드는 것이죠. 아직은 고등학생들이지만 졸업하고 나면 여성국극단에 참여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이죠. 우선 판소리 실력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 금세 따라오더라고요. 사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본 공연장에서는 리허설도 제대로 못했는데 학교 강당에서 리허설을 완벽하게 해서인지 실수도 없었고, 그런대로 좋은 기반이 되었습니다. -여성국극을 연고도 없는 남원에서 재현해내시는 것이 궁금합니다. 2011년에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내가 제작한 여성국극 춘향전을 올렸어요. 순전히 사비를 들여서 제작한 무대였죠.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오랫동안 가져왔던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현하는 첫 번째 시도였어요.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용기를 얻었지요. 그러다가 남원 국악예고 이상호이사장님을 지인으로부터 소개받았습니다. 그래서 춘향제에도 초대를 받았는데, 이상하게 남원과의 인연이 마음에 딱 와 닿았어요. 몇 번 오고가면서 여기면 되겠다 생각했지요. 그래서 작년에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발족했습니다.-지난 6월에는 선생님의 재산을 온전히 여성국극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기증식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감동의 파장이 컸습니다. 애초에는 내가 가고나면 적당한 사람에게 재산을 맡기고 여성국극을 발전시키는 일을 하게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내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선생님 살아 계실 때 이런 일을 다 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옳은 이야기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사단법인을 추진할 때 힘든 과정이 있었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도움보다는 경계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기증식으로 확실하게 방향도 정하고 의지도 보이고 싶었습니다.-기금은 얼마나 되고 어떻게 쓰여지는지 궁금합니다. 구체적인 금액으로는 환산해보지 않았고, 다만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이 좀 있습니다. 서울과 용인 쪽에 집과 땅이 있지요. 그것들을 다 처분해 기금으로 돌릴 생각이에요. 이 집도 이제 엄밀히 말하면 내 집이 아닌 거죠. 이미 기증 했으니까. 이제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아마 기금 운영 형식은 장학재단을 통한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우선 어느 정도 정리되면 여성국극 전용극장을 건립할 생각입니다.-여성국극의 부활을 삶의 목표로 세운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의 젊은 시절을 바쳤던 것이고, 또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국극은 참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여성국극 무대에서 가장 가슴 설레고, 행복했던 것 같아요. 그만큼 매력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 명맥이 딱 단절되었잖아요. 물론 몇몇 공연이 그사이 재현되어 다행이지만, 어디에선가는 지속적으로 여성국극이 올려지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연세로 보아서는 여성국극 1세대가 아니실까 싶은데요. 아닙니다. 나는 좀 늦게 시작했어요. 이십대에 배우가 되었으니까요. 나는 소리는 못했어요. 판소리를 잘했다면 제 삶이 달라졌을 겁니다. 소리 공부를 안 해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때부터 소리를 배우기에는 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배우로서의 역량을 쌓기 위해 연기 연습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아요. 1세대는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1.5세대쯤이나 될까요.-어떻게 배우가 되셨는지가 궁금하군요.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왔어요. 하루는 거리를 걸어가는데 한 남자가 오더니 배우냐고 물어봐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했죠. 그랬더니 공연 연습실로 데리고 갔어요. 지금 기억으로는 십자성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배역을 하나 주더군요.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이 잘할 리 없죠. 그래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완전히 뺏겼습니다. 절간 같은 곳에서 몇 달씩 연습을 하면서 밥이나 겨우 얻어먹는 생활이었는데도 열심히 배웠어요. 공연이라고 해야 평지도 아닌 곳에 가설무대를 만들고 멍석을 깔고 솜뭉치 같은 것으로 조명을 만들어서 했는데 첫무대에 섰을 때는 떨려서 앞이 하나도 안보였어요. 대사만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지 안 틀리고 겨우 해냈지요. 그 후에 아세아 극단으로 들어가서는 제법 배우다운 활동을 했습니다.-그럼 여성국극단 활동은 언제부터 하신 겁니까. 아세아극단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정도여서 그만두고 부산으로 갔죠. 그때 부산에서 백조가극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된 강효실씨가 했던 역할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는 사람이 여성국극을 구경가자고해요. 햇님여성국극단이었어요. 박귀희 김소희씨가 참여했던. 당시에는 그분들이 다 그만둔 이후였는데, 공연이 너무 좋더라고요. 얼마나 그 공연을 하고 싶었는지 대사도 없는 남장 역을 맡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하는 품이 초짜 같지 않다는 무대감독의 말도 용기가 되어 망설일 것도 없이 여성국극에 발을 디뎠어요.-국극은 창극의 다른 용어로 시작되었지만 소리보다는 극의 비중이 커진 양식이죠. 당시 여성국극은 시기는 길지 않았지만 한 시절, 정말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공연이었어요. 여성들로만 구성되었으니 여자배우들이 남장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것도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습니까.바보온달을 목포에서 공연할 때였어요. 평강공주를 사랑하는 고야수라는 악역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야수의 졸병을 맡았는데, 고야수 역할을 맡은 배우가 너무 악역이어서 못하겠다고 한거예요. 내게 그 역할이 왔어요. 일생일대의 기회였지요. 당시 무대에는 마이크 두개가 전부였는데, 뭔가 제대로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대사도 그렇지만 한껏 폼을 잡으며 관중들을 웃음 터지게 했어요. 나중에는 그것이 유행이 되어 마의 태자 등 다른 단체 단원들도 그런 방식을 따라했지요. 그 뒤로는 주로 악역만 했는데 여성국극에서는 악역이 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다른 배우들은 관중들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피하죠. 저는 기꺼이 했어요.-대중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여성국극 역시 단명한 우리 공연양식 중의 하나입니다. 1960년 초반에 국극단이 사라졌죠.나도 60년 이후에는 단체 활동은 못했어요. 그래도 여성국극에 대한 마음을 온전히 접지 못하고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을 모아 작품을 만들었어요. 68년엔가는 KBS의 의뢰를 받아 방송도 했는데,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그 뒤로는 극단 활동을 하신 겁니까.74년에 미국 이민을 갔어요. 세상을 좀 넓게 보고 싶어서 갔는데,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고생을 많이 했죠. 예술을 작파하고 뷰티샵이나 명품가게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어요. 겨우 아파트 임대비 해결하는 빠듯한 생활이었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나중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영주권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77년에 잠깐 나왔을 때 여성국극 공연을 하던 동료들의 제안을 받아 국극을 다시 하기 시작해 2-3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성국극 부활을 절실한 꿈으로 안게 되었을 겁니다. 여성국극을 내 힘으로 살려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2009년에 완전히 귀국하면서 그 꿈은 더 단단해졌지요. 그래서 춘향전부터 만든 겁니다. -여든 살에 새로운 출발을 하신 셈이군요. 2011년에 제작해 올린 춘향전이 첫 결실인데, 제작비 부담은 없었나요. 미국에 있으면서 먹는 것 하나까지 아끼면서 돈을 모았어요. 30년 세월입니다. 처음에 부동산을 샀는데, 다행히 그것을 잘 활용해서 이번에 내놓을만한 재산이 되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여생, 헛된 삶이 된 것 같진 않아 감사하고 있습니다.선생과의 인터뷰는 흥미진진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 춤꾼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야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길에서 만난 여성국극. 30년 이민생활에서도 늘 여성국극단 시절의 무대를 추억하며 살았다는 그의 오랜 꿈은 이제 현실이 된다. 그런데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과연 여성국극은 대중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일본에는 다카라스카가, 중국에는 월극이란 여성배우만의 공연 양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성국극이 있지요. 지금은 볼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여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외레 우리만의 공연이 살아나야 한다고 봅니다. 보존의 의미로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전통이지 않을까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상설공연을 하고, 그래서 젊은 세대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외국인들이 우리 공연양식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남원이 여성국극을 살려내는 터전이 될 겁니다.선생의 웃음이 환했다.● 이소자 선생은 군산서 캐스팅 '배우의 삶'전 재산 기부 '여성국극' 부활이소자 선생은 1930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영희.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는지 그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3남매와 강보에 싸인 그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가뜩이나 곤궁했던 시절, 어머니가 가장인 그의 집은 늘 배고픈 일상이었다. 소학교를 거쳐 배화여중에 입학할 때만 해도 춤을 잘 추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늘 예능에 끼를 보이는 딸을 건사하느라 노심초사했던 어머니는 그가 집밖으로 나다니지 않고 집에서 음전하게 살림하다 좋은 사람만나 시집가는 것을 원했다. 14후퇴 때 어머니와 군산으로 내려와 지냈던 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극단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배우가 되었다. 이를테면 길거리 캐스팅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시작된 배우로서의 생활은 가난하고 궁핍했으나 하고 싶었던 일이어서 행복했다. 당시 대중들의 인기를 휩쓸었던 햇님여성국극단의 공연을 보고는 매료돼 고민 없이 여성국극 배우가 되었다. 대부분 소리를 하다가 배우가 된 단원들과는 달리 소리 공력이 없었던 그는 소리를 배우지 못한 것이 늘 아쉬웠다. 연기에 더욱 공력을 쏟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했던 여성국극단은 60년대 초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공연활동을 하다가 74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것이 2009년, 35년 이민사는 외로움과 가난함의 시간으로 엮어졌다. 생계를 위해 예술을 내려놓고 개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면서 모은 돈으로 한국에 부동산을 샀다.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돈을 쓰지 않았다. 덕분에 5년 전 영구귀국 했을 때 그는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갖게 됐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여성국극 부활의 꿈을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비를 들여 제작한 춘향전을 2011년 서울 무대에 올리면서 힘을 얻고 의지를 다졌다. 2013년, 뜻을 같이 하는 인사들과 함께 남원에서 햇님여성국극보존회를 출범시켰으며 지난 6월에는 전 재산을 여성국극 기금으로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남원국악예술고등학교 국악인재들을 여성국극 배우로 키워내는 일을 여생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그는 여성국극의 온전한 부활이 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17 23:02

[(28)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완주] 대둔산 '농민군 최후 항전지' 문화재 등록 팔 걷어

전주가 온전한 고을이라면, 완주는 완전한 고을이다. 이름이 그렇고, 지리적인 생김새가 그렇다. 전주를 꼭 감싸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전주에서 다른 지역으로 나가려면 완주를 거쳐야 한다.완주가 꼭 감싸고 있는 것은 전주 뿐만이 아니다.동학교도들 사이에서 전봉준과 같은 변혁 지향적인 세력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 1892년 11월에 완주 삼례에서 있었던 삼례 집회였다.그리고 실패로 끝난 혁명의 최후 항전이 1895년 2월, 완주 대둔산에서 있었다.완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그대로 꼭 감싸고 있는 곳인 셈이다.△삼례 역참 터석 삼 자에 예도 례 자를 쓰는 삼례(參禮)는 조선 초 회안대군 이방간이 자리잡던 곳이라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왕족에 대한 예우로 세 번 예를 갖췄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조선시대에는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하고, 특히 서울로 가는 길목이어서 지리적인 요충지로 꼽혔다. 동학 교도들이 이런 곳에서 교조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외치는 집회를 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동학 교도들이 집회를 연 자리를 정확히 어떤 지점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김정호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은 이 마을 전체가 집회 장소였을 수 있다고 말한다.그래도 한 지점을 꼽자면 대체로 삼례 역참 터를 드는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역참은 중앙 관리가 파견되는 기관이라며 이곳에 모였다는 것으로 삼례 전체를 장악했다는 추정이 가능한 만큼, 집결장소로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삼례 역참 터는 역사에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1894년 9월이다.청과 일본이 각각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전봉준은 이곳에서 제2차 봉기를 준비한다.대도소를 설치하고 각지에 통문을 보내는 등 재기포 준비를 서두른 전봉준은, 준비가 끝나자 10월 12일에 공주로 향했다.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이 태동했고 2차 봉기의 중심이었던 지점임에도,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어떤 안내판이나 표지도 없다. 지금 그 자리에서는 교회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김정호 회장은 한쪽에 몇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념관을 세울 예정이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이에 대해 완주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삼례 집회 지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을 위해서는 학술적으로 먼저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삼례봉기 역사광장대신, 삼례집회와 봉기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자리는 조금 떨어진 곳에 조성돼 있다.역참 터에서 삼봉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삼례도서관과 향토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면, 왼편에 쇠스랑 든 손을 형상화한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힘-하나되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조형물은 동학농민군 출진상, 추념의 장, 동학농민혁명봉기비 등의 다른 조형물과 함께 삼례봉기 역사광장을 지키고 있다.2003년에 조성된 이 광장은 예술적으로 의미가 잘 형상화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힘-하나되어는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하지만 광장 곳곳에 잡초가 나 있고 석재가 들떠있는 모습이 보여, 관리는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김정호 회장은 원래 이 옆에 박물관을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다며 하지만 계획대로 잘 이뤄지지 않아 현재는 벽돌공장이 자리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한편 역사광장에서 도서관 방향으로 50m쯤 걸어 올라가면 이도재영세불망비라는 비석이 서 있다.이도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서 농민군을 진압했던 인물이다. 김개남을 체포한 뒤 서울로 보내지 않고 전주 초록바위에서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대둔산 최후항전지다시 차에 올랐다.대둔산은 삼례에서는 한 시간 가량 국도를 타고 달려야만 닿을 수 있다.완주군과 충남 금산군논산시에 걸쳐있는 대둔산은 높이는 해발 879m에 불과하지만 산세가 험준해 쉬이 오르기는 어려운 산이다.동학농민군에 가담해 싸우던 금산지역 유지 최공우는 대둔산의 이런 점을 이용했다. 1894년 말과 이듬해 초 사이에 동학 지도자들이 대부분 체포된 상황에서, 그는 대둔산의 산세를 방패삼아 마지막 항전을 시도했다.앞으로는 일본군이 올라오는 게 보이고, 뒤로는 절벽이 있어요. 그래서 앞만 잘 지키면 버틸 수 있었는데, 일본군이 이걸 역이용해서 뒤로 올라가서 토벌한 거죠.접근조차 하기 어려운 곳에서의 항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895년 2월 18일, 뛰어내렸지만 나무에 걸려 목숨을 부지했다는 한 명을 제외하고, 항전하던 농민군은 전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케이블카 정거장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드는 지점에 이를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완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매년 삼례봉기 기념광장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한데, 기념탑 앞 알림판이 너무 낡아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1894년, 1895년이 1984년, 198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기도 했다.대둔산을 자주 찾는다는 한 등산객은 매번 산을 오르내리면서 보기는 했지만 이곳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말했다.조만간에 이것도 전부 고쳐야지요.김정호 회장이 안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항전지가 빨리 문화재로 지정되고,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한편 완주군은 대둔산 최후항전지를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한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산림청 등의 협조를 얻어 절차를 밟아 하반기에 문화재 신청을 하겠다는 것이 군의 계획이다.●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 - 다음달 사단법인으로 독립, 지역 유적혁명사 발굴나서완주군의 기념사업은 완주동학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있다. 김정호 변호사가 3년 전부터 기념사업회의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삼례 출신인 김정호 회장은 동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털어놨다. 그는 동료 변호사를 끌어들여 유적지 답사를 시작했는데, 답사를 계속할수록 동학에 대한 열정이 솟아났다고 말한다.완주기념사업회는 삼례 봉기를 기념하는 행사와 대둔산 최후항전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진행한다.특히 다른 지역에 비해 덜 알려져 있는 완주 지역의 혁명사를 발굴해내는 데 힘을 쏟고 있다.김정호 회장은 뭐든 자료를 문서화해서 남겨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유적지의 위치 정도는 남겨놔야 나중에라도 보고 연구든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완주기념사업회는 오는 8월에 사단법인으로 독립할 예정이다.내년에는 완주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발굴하는 것이 목표다.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것들을 찾아 내년 10월께 책을 낼 예정이라고.

  • 기획
  • 권혁일
  • 2014.07.16 23:02

[⑥결혼이주여성, 취업역량강화 사업] 움츠렸던 일자리 구하기, 전문교육 받고 자신감 쑥쑥

한국에 와서 이렇게 자격증을 따게 돼서 너무나도 기뻐요.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베트남에서 시집온 지 6년차인 찬티득씨는 6살 난 아이의 엄마이면서 어린이집 선생님으로 일을 하고 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실시한 보육교사자격증반에서 10개월 동안 꾸준히 교육을 받고 2014년 1월에 졸업을 한 이후, 현재는 한 어린이집에서 보조교사로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전라북도는 결혼이민자들의 안정적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14개 시군과 협력하여 취업을 위한 다양한 교육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취업역량강화 교육사업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다문화강사양성교육, 바리스타 양성교육, 한식요리사 양성교육, 보육교사, 간호조무사, 정보기술자격 교육, 봉제교육 등 무척 다양하다. 찬티득씨는 다양한 직업훈련 교육 중에서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이뤄진 교육에 참여해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에 성공한 케이스이다. 많은 결혼이민자들이 취업해 직장을 갖기를 희망한다. 2012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연구에 의하면 다문화가족의 72.5%가 취업에 대한 의사를 표출할 정도다. 여성결혼이민자로 한정했을 때에도 66.1%가 높은 취업의사 요구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결혼이민자의 취업은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 취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있더라도 한국어능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으면 취업 하기는 어렵다. 실태조사에 의하면 미취업 사유로 45.1%가 한국어가 서툴러서라고 답하고 있다. 결혼이민자는 초기 정착과정에서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결혼이민자의 취업은 한국어능력이 일정 정도 갖춰져 있지 않으면 취업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한국어 소통능력을 갖춰야 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또 결혼이민자들은 결혼 이후 곧바로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임신과 자녀 양육문제로 인해 결혼초기에는 취업이 용이하지 않은 현실적 조건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부정적인 상황으로만 볼 문제는 아니다.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취업을 담당하고 있는 송미현씨는 결혼이민자들이 한국사회정착을 위한 배움의 시간으로 잘 활용한다면 자기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와 여성새로일하기센터 등에서는 다문화가족을 위한 역량강화 교육으로서 취업과 직업을 위한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만큼 결혼이민자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가족구성원의 관심과 지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가족의 경제적 환경이 자기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취업교육 등에 집중하기 어려운 현실적 조건도 있다. 당장 하루하루 벌어서 살아가야 하는데, 장기적인 관점도 중요하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 어떤 곳이라도 당장 취업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취업전략은 단기적인 취업전략과 중장기적인 취업전략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의 지향이 필요하다. 중앙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와 기초단체를 중심으로 시민의 취업률 향상을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그러나 취업이 단기적 일자리로써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다. 결혼이민자에 대한 취업전략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12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연구에 의하면 결혼이민자들은 자기전문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단순노무형태의 취업 자리와 서비스업 등에 주로 취업하여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이민자들은 본국의 고유한 언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자원을 가지고 있고, 한국의 문화 속에서 결혼이민자 본국의 문화를 갖고 있는 등 다양한 문화를 몸으로 체득하고 경험한 문화적 자원에 있어 큰 장점이 있다. 따라서 결혼이민자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원과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지앙판씨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지 4년이 됐다. 지앙판씨는 3살 난 딸을 키우면서도 한국어교육을 꾸준하게 익혀 한국어 능력 시험 토픽 4급을 가지고 있다. 지앙판씨는 2013년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실시하는 다문화강사양성과정에 참여해 교육을 받은 후 지금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문화강사가 돼 자신의 언어적 자원과 문화적 자원을 이용해 다문화전도사로서 활기찬 활동을 하고 있다.송미현 취업교육 담당자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결혼이민자들에게는 단순노동직이나 서비스업 등의 시간제 일자리나 단기적 일자리로 쉽게 취업할 수 있는 단기취업교육과 취업을 알선하고 있고, 한국어 능력과 한국적응에 대한 일정한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결혼이민자들에게는 전문성 개발을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결혼이민자들의 맞춤형 교육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것을 주문했다.● 송미현 다문화지원센터 취업교육상담사 "한국어 서툰 여성도 손쉽게 가족들 적극적인 협조 필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취업프로그램은 무엇이 있습니까.결혼이주여성들의 능력향상으로 한국에서 원활한 경제적인 안정을 지원하기 위해 교육기간에 따라 단기교육과 중장기교육으로 나뉩니다. 중장기교육으로 보육교사3급자격증반이 있으며, 단기교육으로는 섬유산업분야 전문인력양성과정, 정보기술자격ITQ자격증반, 퀼트교실, 다문화강사 양성과정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외부 기관과 연계해 섬유봉제교육, 정보기술자격ITQ자격증 취득 과정도 실시했고, 간병사 양성교육프로그램, 퀼트교실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 제일 인기있는 프로그램은.이번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획사업으로 진행된 퀼트교실은 인기가 높았던 취업교육입니다. 한국어가 미숙한 결혼이주여성들도 손쉽게 따라 할 수 있어 중도탈락 없이 진행됐습니다.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핀큐션, 동전지갑, 배게 등의 작품을 완성해 자존감도 향상됐습니다. 퀼트교육은 결혼이주여성들이 자비를 들여 고급과정을 계속해서 받고 있을 정도로 결혼이주여성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은 교육입니다.-취업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방법은.회원등록이 된 이주여성 중 한국거주기간이 2년 이상이며,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는 결혼이주여성 누구나 취업교육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이상 또는 동등이상의 학교 졸업한 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취업교육에는 졸업증명서가 필요합니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는 구인구직도 알선합니까.네.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홈페이지에 들어오시면 구인신청과 구직신청도 할 수 있습니다. 구인구직알선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요. 희망구직직종과 구인의뢰처와 상이한 직종일 경우 알선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보통 구직자는 사무직이나 통번역에 관심이 많으나 구인업체는 외식업체나 생산직종이 많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요양병원에서 인력을 요청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취업교육과 관련해 당부하고 싶은 말은.결혼이주여성들이 취업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가족분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혼이주여성들이 취업교육을 이수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결혼이주여성들은 스스로 지구력을 가지고 교육을 이수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전문적인 능력일수록 많은 시간과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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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15 23:02

취임 6개월 조승용 LH 전북본부장 "도민 주거 안정·환경 개선 사업 효율적 추진 충실할 것"

올해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핵심 경영 모토는 ‘비상경영’이다. 국내 최대 규모이자 대표적인 공기업으로서 국민들의 공기업 개혁 요구에 ‘맏형’으로서 앞장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다. 이런 가운데 열악한 전북 경제의 부흥을 갈망하는 도민들의 LH 전북본부에 대한 성원과 기대도 그 어느 때 보다 높다. 취임 6개월이 지난 LH 전북본부 조승용(52) 본부장도 이에 발맞춰 위기와 시련을 기회로 전환시키려는 힘찬 발돋움을 하고 있다.하지만 전북혁신도시에 이어 만성지구, 효천지구, 완주 삼봉지구, 군산 신역세권, 익산 식품클러스터 사업 등 조 본부장이 넘어야 할 파고가 만만치 않다. 특히 전북의 미래라 불리는 새만금사업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는 만큼 지역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도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있다. 조 본부장을 만나 LH 전북본부가 넘어야 할 파고 및 향후 중점적으로 추진할 사업 비전 등에 대한 청사진을 들어봤다.-도내 부동산시장을 어떻게 진단하고 계신지요.“새만금개발에 대한 기대, 전북혁신도시 건설사업의 순조로운 추진과 국가식품클러스터 조성사업 등으로 도내 부동산 경기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택공급이 대폭 늘어나면서 지역에 따라 미분양물량 적체도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부동산시장의 패러다임이 공급자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됐고 저출산·고령화 및 1, 2인 가구의 증가와 보편적 주거복지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장의 요구를 반영해 기존 공급자 중심의 공영개발을 통한 아파트 대량 공급 방식에서 수요자 중심의 환지방식 도시개발이나 주거환경개선사업 등 도시재생 방향으로 선회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전북본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우리 공사는 그동안 사업조정과 자구노력 등 경영정상화 방안을 실시해 부채증가 속도를 둔화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아직 부채의 절대 규모가 워낙 커 신규 사업 등을 추진하는데 재무적 부담이 있습니다. 고비용 저효율의 사업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신규 사업 추진시 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 제도에 준하는 엄격하고 객관적인 사업성 검토를 거쳐 추진여부를 결정할 계획입니다. 현재 자금부담을 줄이고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는 저비용 개발을 위해 전주효천지구 도시개발사업(67만3000㎡)을 환지방식으로 추진 중인데 7월초에 보상 착수한 상태이며, 10월 공사 착공을 목표로 업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내 무주택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전주시 반월동 일원에 국민임대주택 842호 건설을 추진 중이며 현재 사업계획변경이 완료되는대로 내년 상반기에 착공할 계획입니다. 익산시 평화동 일원의 구도심 주거환경개선을 위해 지자체 및 지역주민과 협의를 통해 연내 사업시행인가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우리 공사는 재무안정 기반 하에서 임대주택건설사업 등 지역개발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지역경제발전과 도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LH공사에게 주어진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겠습니다.”-추진 사업중 잘된 점과 미흡한 점을 평가해주시죠.“인구 3만 명 수용을 목표로 한 전북혁신도시가 작년 말 1단계 사업준공을 마쳤고 금년 말에 2단계 사업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전북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을 촉매로 혁신성과 역동성을 갖춘 특성화된 도시를 건설해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추진됐고 농촌진흥청 등 농업생명 공공기관과 지방행정연수원, 국민연금공단 등 지식서비스 공공기관이 이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북혁신도시는 ‘Agricon City‘라는 개발컨셉에 따라 물, 자원, 에너지 순환체계를 구축하고 원형지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계획됐습니다. 또 단지 내 중심축을 연장 3.9㎞, 폭 30m에 이르는 파크웨이(Park Way)로 연계함으로써 사업지구를 동서로 연결해 주민화합과 휴식여가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이전 공공기관 근로자와 전주시, 완주군 유입인구의 주택수요를 고려해 적정인구 수용을 통한 자족성을 갖춘 쾌적한 도시로 거듭날 것입니다. 전북을 대표하는 혁신도시를 성공적으로 건설하게 된 점을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합니다.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국가식품클러스터산업단지 조성사업도 급성장하는 글로벌 식품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식품기업·연구소·연관산업체 등이 집적된 클러스터를 조성해 동북아 식품시장의 허브로 육성하기 위한 국가 정책사업입니다. 국가식품클러스터는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농업분야 국책 R&D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농·식품산업의 광역적 클러스터 구축 및 상승효과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국가식품클러스터가 조성되면, 직간접 효과로 고용유발은 2만3235명, 생산유발효과는 4조3304억 원으로 전망되며, 150여개 식품기업이 입주해 농어업 소득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입니다. 반면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보상이 완료된 완주삼봉지구가 완주군청 미이전과 수요부족 등으로 착공이 지연되고 있지만 LH 전북본부는 사업계획 변경, 수요 발굴 등을 통해 조속히 공사에 착공할 수 있도록 다각적으로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전북혁신도시와 만성지구, 효천지구가 전북에서 가질 비중과 역할을 판단한다면.“만성지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전북혁신도시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 혁신도시와 연계 개발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효천지구는 전주서부신시가지와 연접해 전주의 신 주거지역으로 각광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향후 만성지구와 효천지구가 개발되면 총 인구 3만여 명이 거주하게 되며 법원·검찰청 이전에 따른 관련 업무기능이 이전되어 전주시의 신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도시는 서로 전주서부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양축에 있는 부지로 도시의 부분 개발이 아닌 균형개발을 이끌 것으로 기대됩니다. 전북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을 촉매로 혁신성과 역동성을 갖춘 특성화된 도시를 건설해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추진됐습니다. 농촌진흥청 등 농업생명 공공기관과 지방행정연수원, 국민연금공단 등 지식서비스 공공기관이 순차적 이전을 완료하고 있습니다. 사업지구가 동서로 연결돼 주민화합은 물론 적정인구 수용을 통한 자족성을 갖춘 쾌적한 도시로 거듭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도민에게 당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LH 공사는 국민 주거생활의 향상 및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통해 국민경제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됐습니다. 전북본부도 공사 설립 목적에 따라 임대주택을 지속적으로 건설하고 매입임대주택이나 전세임대주택을 공급함으로써 도내 무주택 서민의 주거안정 및 전월세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며, 혁신도시나 산업단지 조성을 통해 지역발전을 위해 앞장서 나아가겠습니다. 도민 여러분께서 LH공사가 추진하는 정부 정책사업이나 주거복지사업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시기 바라며, LH 전북본부도 전북도 발전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국민의 눈높이와 행복도를 일일이 맞추기 어렵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과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때론 채찍질이 삶의 질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지만 가끔 한 번씩 어깨를 다독이는 따듯한 격려도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는 주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따듯한 관심과 함께 많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조승용 본부장은 28년 주요 부서 두루... '닮고 싶은 상사' 정평지난 1월 취임한 조승용 본부장은 세종특별시 개발을 관장한 1등 공신이다. 전북본부장으로 오기 직전까지 세종특별사업본부 도시처장을 역임, 기반시설 조성부터 건물이 올라가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조 본부장은 지난 1985년 입사한 이래 28년간 근무하면서 홍보실과 비서실, 판매기획실 등 주요 부처를 두루 거친 베테랑으로 직원들 사이에서 정평이 자자하다. 대전 출신으로 대전고, 중앙대를 졸업한 뒤 지난 85년 LH에 입사해 본사와 주요 현장을 두루 거쳤다.특히 평사원으로 입사해 1급 본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 ‘닮고 싶은 지휘관’으로 인기가 높다.조 본부장의 업적 중 가장 자부할 수 있는 사업은 대전 둔산지구 신도시 보상, 분양업무와 세종특별시 개발을 선도적으로 주도한 것이며,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하는 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시선이 나오고 있다는 게 조 본부장의 설명이다.조 본부장은 대전광역시에 모든 도시 주요 행정부처가 집중되다보니 도시의 역기능이 생겨났고 이를 세종시가 대처해 도시의 균형 발전이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그는 “전북의 경우도 대부분 행정 및 시설이 전주에 집중되다보니 전주를 위주로 대부분 개발 사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며 “타도시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전북을 고려할 때 농업과 식품 등의 특화 사업을 집중 추진해야 전주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경쟁력도 같이 상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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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4.07.14 23:02

[(23) 무주 농업회사법인 (주)붉은진주] 머루와인 전문생산, 대한민국 대표 명품술 '숙성 중'

(주)붉은진주(대표 주장돈)는 지난 2003년에 설립돼 최신의 생산시설과 최고 수준의 저장시설을 갖추고 무주군 대표 특산품 머루와인(붉은진주 Sweet / Dry)을 생산하는 농업회사법인이다. △건강한 와인문화의 토착화 △이웃과 더불어 가는 이윤추구 △웰빙을 추구하는 양조기술 △자연과 같이하는 청정양조 △와인 대중화를 위한 기술 개발을 기업 이념으로 하는 (주)붉은진주는 최고 품질의 머루와인을 생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주)붉은진주의 태동은 주장돈 대표의 아버지 주성규 씨(57(주)붉은진주의 전신 칠연양조 대표)의 머루 재배로부터 시작됐다. 머루 재배에 적합한 환경과 토양을 지닌 무주군에 머루재배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과잉 생산의 고충이 생겨났고 주성규 씨는 1998년 머루와인 생산기술 개발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2001년 와인 시험생산까지 마친 주 씨는 2003년 칠연양조를 설립하고 과실주 제조면허를 취득하는 등의 노력을 펼치며 본격적인 머루와인(붉은진주) 생산에 나서게 된 것.이후 △대한민국 탑 브랜드 대상(와인부문) 수상 △국내산 술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와인엑스포(비넥스포) 참가 △신지식인 인증 △지리적표시제 등록 △지식서비스 최우수 기업 선정 △우리 술 품평회 대상 수상 △코리아 와인 어워즈 금상 등을 수상하며 최고 품질의 머루와인 생산 업체로서의 입지를 굳혀 왔다.몸에 좋은 머루와인을 생산해 건강한 대한민국 만들기에 일조하겠다는 포부, 가장 한국적인 와인으로 세계인들에게 당당히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 가장 무주다운 특산품으로 지역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주성규 씨의 열정이 오늘의 붉은진주를 있게 했다.주 씨는 올해 초 칠연양조를 농업회사법인으로 전환하고 (주)붉은진주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포부와 의지, 열정을 아들 주장돈 대표에게 고스란히 물려줬다. 저온숙성탱크를 비롯한 실험실과 여과시설, 살균시설, 병입 및 마개시설, 상표 및 포장시설 등의 생산공정에 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한 (주)붉은진주의 연간 생산 능력은 100t 정도. 하지만 연간 30t 정도만 생산하며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다. 생산량에 의존하지 않고 최고 품질에 욕심을 내겠다는 것. (주)붉은진주에서는 엄선된 머루만을 사용한다. 머루재배 경험을 살려 좋은 머루를 고르고, 농가의 마음을 헤아려 머루 매입에도 바짝 신경쓴다. 매년 30~50t 정도의 머루를 사들여 머루와인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는 머루와인은 자연 발표법의 다단계 여과과정과 저온 숙성을 통해 산머루 특유의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12% 정도의 알코올을 함유하고 있어 맛이 부드럽다. 무엇보다도 포도주보다 풍부한 색소와 다량의 유기산을 함유하고 있어 건강 특산품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현재 이곳의 머루와인이 납품되고 있는 곳은 머루와인동굴을 비롯한 면세점과 특판, 온라인 쇼핑 매장 등으로 철저한 품질관리 노력이 각종 수상으로 이어지며 (주)붉은진주 머루와인의 인지도와 매출 상승을 가져오고 있다. (주)붉은진주의 다음 목표는 세계 시장이다. 국내 와인으로는 유일하게 프랑스 와인엑스포에 참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붉은진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머루와인으로 세계인들의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것. 무주의 물과 바람이 기른 산머루로 무주 사람이 만든 무주산머루와인. 세계 시장에서 당당히 인정 받는 그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무주산머루와인 해발 900m의 고랭지 기후에서 재배되는 머루에서 추출한 원액 100%로 만들어져 다량의 유기산과 폴리페놀성 화합물 및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게 들어있는 알칼리성 건강와인이다. 특히 에피카테킨 함량이 높아 충치와 구취, 혈당, 혈압의 상승을 억제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분분석 결과 머루는 포도에 비해 항산화성분인 폴리페놀과 플라보노이드가 1.8배, 안토시안이 3.3배가 높으며 나트륨 함량은 3.1배가 낮고, 칼륨과 칼슘 함량은 2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머루주의 유래머루주의 역사는 신라시대 부터인 것으로 전해지며 조선전기 세종실종지리지와 강원도지리지 편에 머루의 생산과 머루주 관련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중기 실학자인 홍만선(1643~1715)이 쓴 산림경제 증류본초에 머루주 담그는 법이 기록돼 있기도 하다.● 주장돈 대표 "산머루 타임지 선정 10대 장수 식품, 제품 다양화세계 시장 진출 모색""머루와인과 더불어 음료수와 팩, 화장품 등 붉은진주의 다양한 머루 제품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장돈 대표(32)는 머루와인을 세계 시장에 올려놓는 것은 물론 머루를 원료로 한 제품을 다양화 하는데 보다 심혈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주 대표는머루농사를 짓고 머루와인을 만들면서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장인으로서의 인내와 기업인으로서의 양심, 그리고 책임감을 배웠다며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분야에서도 붉은진주의 명성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또한 산머루는 포도에 비해 항암효과가 월등할뿐더러 철분을 비롯한 미네랄과 수용성 비타민 등 필수영양소가 풍부한 타임지 선정 10대 장수 식품이라며 여기에 무주가 최적화된 머루재배단지라는 장점을 더해 무한경쟁 속에서 당당히 빛나는 붉은 진주,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들에게 인정을 받는 붉은진주로 남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 기획
  • 김효종
  • 2014.07.10 23:02

[(27)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전주] 동학농민혁명 불꽃 가장 찬란하게 피운 곳인데…

1894년 사건에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데는 전주가 있었다. 민중들이 감영을 점령한 것이 조선역사상 처음이었고, 집강소를 통해 민중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진 것도 한국 역사상 최초였다. 여전히 논란이 있고 동학농민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학자도 있지만, 특별법으로까지동학농민혁명으로 정리된 데에 바로 전주의 역할이 컸다. 전라도 수부, 전라감영이 자리한 전주성의 점령과 이를 바탕으로 한 집강소 설치가 당시 봉건주의적 이념과 제도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이렇게 1차 봉기의 화룡점정이었으며, 2차 봉기로 가는 중요한 열쇠를 쥐었던,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빛났던 그 전주가 오늘에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시민들 가까이에 있는 전주 덕진공원이 그 답을 대신할 것 같다.덕진공원에는 전북의 법조3성의 동상을 비롯, 간재 선생 유허비, 신석정백양촌 신근김해강이철균 시비 등 전북인 낳은 많은 인물들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3대 지도자를 기리는 시설도 여기에 들어서 있다.시민들 가까이에, 여러 위인들 속에 3대 지도자를 기억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덕진공원 시설물이 나름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유적지도 아닌 곳에 제각각으로 설치된 지도자 3인의 시설은 별 울림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실제 안내판 하나 설치되지 않은 공원 구석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알고 있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하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푸는 데 전주가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찾기란 이렇게 힘들다. 집강소 설치와 폐정개혁을 단행해 근대 민주정치를 열었던 상징적 공간에서 조차 그 역사를 떠올릴 수 없는 것이 현주소다. 정읍과 고창 등지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과잉이라면, 전주에서 왜 상대적으로 외면을 받고 있을까.덕진공원에서 보듯이 전주의 역사적 자원이 풍부한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후백제의 도읍지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이미지를 살리는 데 정책의 힘을 실으면서 동학이 끼어들 틈이 적었다. 특히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저평가 속에 조선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동학을 힘있게 부각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여기에 전주를 지역권으로 하는 기념사업회가 없었던 점도 전주에서 동학의 위상을 세우지 못한 배경이 될 듯하다. 전주 소재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일찍이 발족돼 많은 사업들을 벌였지만, 전국적 사업쪽에 관심을 두면서 상대적으로 전주를 소홀히 했다고 사업회 관계자들도 자성하고 있다.△전주입성비 조차 점령 의미 못살려현재 전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할 수 있는 기념시설은 덕진공원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다. 기념시설 또한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거나 고증작업 없이 설치돼 보완이 요구되고 있다. 1981년 전주청년회의소와 풍남청년회의소에서 설치한 덕진공원내 전봉준선생상의 경우 선생이라는 이름부터가 낯설다. 전봉준 장군이 한 손에 사발통문 뭉치를 움켜잡고 패랭이를 쓰고 있는 형상의 동상 얼굴 또한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게 학계 의견이다.가장 대표적인 전주지역 기념시설인 동학농민군 전주입성비도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주 완산공원내에 설치된 이 비는 1991년 전북도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립한 전주성 점령과 관련된 유일한 기념물이다. 완산은 동학농민군과 관군이 전주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 스스로 전주성에서 철수하기까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이화 선생은 전주성 입성은 잘못이며, 전주성 점령이 적확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무혈입성이라도 농민군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동학농민군이부안 백산기포 또한 사실과 달라 교정이 필요하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는 전주입성비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나 시민적 공감이 없이 세워져 전주성 점령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주성 점령에 앞서 금구에서 진격했던 용머리고개,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농민군이 숙영했던 전주 삼천, 완산칠봉 전투지 등을 안내하는 기념시설이 전무하다. 다만 김개남 장군이 처형됐던 초록바위 안내판에는 처형지임을 안내하고 있고, 천도교에서 100주년을 기념해 전주 한옥마을에 건립한 동학혁명기념관이 그나마 상징적인 기념시설이 되고 있다.△전북의 대표정신, 전주에서 살려야전북일보가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6월 창간호에서 전북도민의식 조사를 실시한 결과 동학농민혁명이 전북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전북도가 1999년 조사한 도민의식 조사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이 전북의 대표정신으로 생각하는 데 80% 이상이 동의했다. 혁명의 불을 지핀 곳이 정읍이라면 혁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피운 곳이 전주라는 점에서 전주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 지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현재 추진되고 있는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전라도 전체를 통괄했던 역사에만 머무르게 할 지, 근대민주주의의 역사를 쓴 집강소의 역사에도 힘을 실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전라감사의 집무실을 핵심으로 삼더라도 뜰 앞에 전라감사 김학진과 동학농민군 최고지도자 전봉준의 화약을 기리는 조형물이라도 설치해 전주화약의 의의를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문 처장은 또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은 프랑스 혁명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점령한 것과 비견된다며,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을 세운 것처럼 전주에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기념시설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21세기 전주 역사문화정책 핵심 기제- '근대민주주의 태동시킨 고장' 역사적 위상에 대한 재인식을19세기말,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는 동양적 근대와 서구적 근대가 극적으로 교차한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1894년 5월 31일이었고,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근대적인 폐정개혁을 단행한 것이 그해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6년 지금의 서문교회 자리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가 들어왔고, 곧이어 예수병원과 신흥학교 터전이 마련되었다. 이처럼 전주성 주변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중요한 역사문화유적들이 즐비하다. 이는 전주가 조선 건국자의 본향일 뿐만이 아니라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자 적극적으로 근대를 수용, 우리나라 근대민주주의를 태동시킨 매우 중대한 역사적 위상을 지닌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인류역사 전체 틀에서 보면 전주가 지닌 조선왕조의 본향이라는 위상은 역사발전의 역방향이고, 근대적 폐정개혁 단행으로 전제왕조를 극복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역사발전의 순방향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기치를 든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수부이자 조선건국자 본향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 설치를 요구, 감사 집무실이었던 선화당에 집강소 총본부격인 대도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을 강제한 실질적인 힘이었다. 이처럼 전주는 조선건국자의 본향이자 전제왕조체제를 극복하고 근대민주주의를 실현시킨 역사적인 고장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의 역사문화정책은 풍패지향(豊沛地響)에 붙들려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가 지닌 역사적 위상을 지역발전의 핵심기제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는 행정기관의 역사인식 부재 탓도 있지만 지난 한 세기 동안 극심하게 굴절되어온 근현대사의 부침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동학농민군이 쓰러진 후 조선은 일제식민지로 전락했고, 해방 후에는 세계사적 차원의 동서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빚어진 극심한 좌우대립 민족분단 한국전쟁 등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그 연장선상에서 1960~1990년대 군사정권시기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근대민주주의 효시라는 전주의 역사적 위상은 역사의 뒤안길에 암매장된 채 철저히 망각되었고, 조선건국자의 본향이라는 박제화 된 절름발이 역사인식이 자리했다. 21세기 문화관광시대, 우리는 서둘러 지난 한 세기 동안 박제화 된 전주의 역사적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인식에 나서야한다. 풍패지향이라는 외날개짓의 한계를 서둘러 깨닫고, 더 늦기 전에 퇴화 일보직전인 역사발전의 순방향, 근대사 관문으로서의 역사적 위상이라는 날개를 활짝 펴야한다. 근대 민주주의 효시라는 날개의 핵심깃대가 동학농민혁명사와 그 역사유적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문병학 시인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 기획
  • 김원용
  • 2014.07.09 23:02

[⑤ 전북도 '청년희망창업' 프로그램] 대박날 사장님께 '통 큰 지원'…성공신화 꿈 도전하세요

잉여인력, 88만원세대직업도 없고, 마땅히 할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연애와 결혼출산까지 포기한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다.여전히 대학가에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업으로 삼아 마흔 가까이 된 취업 준비생들이 학원가를 맴돈다.그러나 한켠에서는 아이디어와 재능으로 창업에 도전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스스로 고용주가 되겠다는 도전에 나서는 이들을 정부가 나서서 돕고 있다.이들을 위한 창업 도전 역시 하나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면, 창업은 더는 취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게 아니다.전북도가 청년 사업가들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조금은 심적 부담을 덜고 창업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취재해봤다.△창업에 도전한 이들은?전북도에 따르면 6말 기준 청년 창업을 교육을 마친 인원만해도(24기수)1145명에 이른다. 1145명이 관련 교육을 받은 내용을 분석해보면 도소매 569명, 서비스 388명, 음식점 342명 등에서 보듯 대부분이 단순 업종에 포진해 있는 상태다. 이밖에 제조가 56명, 건설 28명, 운수 9명이다. 기타 53명이 창업했다. 숫자로 지칭하는 데이터만 보면 매우 우수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창업자들이 적지 않다. 현장에서는 창업 후에 지속적인 관리도 절실하지만 아직까진 양적 확대에 치중하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창업 후 지속율을 의미하는 데이터를 분석해 공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 창업에 도전한 A씨는 창업 후에 겪는 여러 문제점들을 보완해주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스스로 창업하려는 사람들에게 산적해있는 어려움도 많다며특히 청년 창업자들이 겪는 행정적 문제에 한계를 느낀다고 하소연했다. △청년희망창업 참여 어떻게 할까?창업을 희망하는 젊은 이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오는 14일 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전라북도에서 청년 희망 창업을 모집하는 것.대상은 현재 도내 1년 이상 거주자로 만 20세부터 39세의 창업준비자다. 단, 과거 도내 1년 이상 거주자는 공고일 전 6개월 이상 도내에 주소지가 있는 자.교육생 부담금 5만원만 부담하면 문화콘텐츠, 문화외식, 유통, 생활서비스 4개 업종에 대해 창업 수업을 받을 수 있다.8월 27일부터 9월 26일까지 110간 동안 창업이론, 현장실습, 아이템 탐방, 비즈니스 모델링 등을 교육받을 수 있다. 업종별 20명 내외로 인원 충원시 조기마감한다.전북도가 모집하는 청년희망창업에 참여하면 수료자 특전이 주어진다.최고 3000만원까지 창업자금 특례보증 지원한다. 금리 4.12%정도로 (본인부담 2.12%, 도 지원 2%), 1년 거치 4년 균등상환 또는 3년 일시상환이 가능하다. 개인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금액 차등 적용된다.이밖에 창업 후 1년 이상 정상 경영 시 추가 1000만원 융자 가능한 성장자금, 희망창업자 맞춤형 마케팅 지원, 경영컨설팅 등 사후관리지원도 받을 수 있다. 전북도 관계자는 인터넷( http://www.jbhope.or.kr)과 전라북도 경제통상진흥원 교육지원팀의 방문접수로 신청이 가능하다며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고 말했다.△청년희망창업 수퍼스타V 선정 뭐지?전북도는 질적 성장을 위해 지난 2012년부터 청년창업자 중 성장가능성이 높은 유망 업체를 선정, 성공적인 희망창업자 롤모델로 13개 기업을 지원 육성하고 있다. 청년 희망창업자 수퍼스타V 선발 육성 지원이 바로 그것. 청년창업자 중 1년 이상 건실한 운영 사업체로 지원규모는 기업당 1000만원에서 1500만원을 지원한다. 올해 수퍼스타V 선발 업체는 강산도영농조합법인, 디텍, 강태하불족발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청년희망창업 수퍼스타V 선정은 청년 희망창업 교육을 수료하고 창업한 업체중 성장 가능성이 높은 업체 발굴로 도내 예비 창업자 등에게 창업에 대한 꿈과 도전의식 등을 심어준다며선발업체인 성장지원(마케팅, 시설 개보수, 시스템 개선 등)업체의 경우 억대의 매출 신장 및 고용효과에도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상민 청년 CEO '창업 일기'- 직원 중 상위 10%하위 30% 집중 관리해야지난 2007년 나는 도시락업체 하루의 아침을 창업했다. 도시락 사업을 어느 날 갑자기 실행한 게 아니다. 학교에 다니며 아침을 거르고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친구들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고, 군대에서 구체화했다. 그러나 창업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았다. 수없는 시행착오 끝에 창업 2년 뒤 연매출을 10배로 성장시켰다. 작은 성공은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도전 중이다.창업일기 코너를 통해서 내 작은 경험들을 공유한다. 또 다른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1. 인재의 핵심 1:6:3 법칙언젠가 우리 회사 한 신입사원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A씨는사장님, 제가 예전에 무엇무엇 해봐서 아는데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다른 회사는 이렇게 하던데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이 직원은사장님, 우리 회사는 한 달 단위로 뭐가 자꾸 바뀌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그 신입사원의내가 예전에 무엇무엇 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경험담은 현재와 비교하는 것을 넘어섰다. 언제나 수박 겉핥기식의 경험을 가지고 마치 전부인 양 말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나를 놀라게 한 직원도 있었다. 그러나 조그마한 가게에서 끊임없이 도전해보려는 인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잠시 일하는 곳으로 스스로 정의를 내린 뒤 업체를 방문하기 때문에 핵심 인재는 10명에 1명 정도 있으면 많다는 것을 나는 경영을 통해 느꼈다. 나머지 부류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듣고 따라갈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통계적으로 10명 중 6~7명 정도는 이러한 조직 내 리더들을 보고 따라간다. 만약 리더가 잘못 판단을 하면 6~7명의 사람은 잘못된 판단 속에서 일하고 있을 수 있다. 마지막 가장 안타까운 10명 중 2~3명의 사람은 마치 잔디 속 안 좋은 잡초처럼 힘이 빠지게 하는 부정적이거나 조직에 적응을 못 하는 부류였다. 이들은 그 어떤 논의 사항에도 의심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한다. 내가 경영을 하며 생긴 이 1:6:3 법칙은 조직을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경영자라면 1:6:3 법칙을 가지고 1과 3 부류의 집단을 집중적으로 관리 할 필요가 있다. 상위 10%부류의 사람들은 회사의 핵심 인물로 선발해야 한다. 하위 30%부류의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착출되어 변화의 기회를 준다거나 교체를 해주는 것이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그것이 나머지 70%를 위하여 결단을 해야 될 부분이다. 나는 여전히 더 나은 일터를 위하여 1:6:3법칙을 활용하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 3의 집단에 있다면, 긴장하라. 그리고 변화하라. 그 집단에서 언제 낙오될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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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08 23:02

사회적 약자 인권보호 앞장 김 윤태 우석대 교수 "건강한 사회, 사법 판단에 앞서 자체 정화 가능해야"

최근 몇년새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영화 도가니로 유명한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비롯해 염전 노예 사건, 서울 인강원 사건 등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국민적인 공분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전북지역에서도 장애인 복지시설인 자림원에서 발생한 성폭행 논란으로 인해 지역사회의 근심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장애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새삼 주목받고 있는 곳이 있다. 우석대 인지과학연구소와 사회심리연구소다. 이들 기관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적장애인들의 실제 인권침해 여부를 규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모은다. 두 기관을 이끌고 있는 우석대 김윤태 교수(유아특수교육과)로부터 인권침해 실태와 건강한 지역사회 만들기에 대해 들어본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적장애인들의 인권침해여부를 규명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는지.독일로 건너가 마부르크 필립스대학에서 심리운동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7년부터 우석대에서 재직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에 우석대에 한국심리운동연구소를 설립했고, 2년 뒤인 2009년에 우석 인지과학연구소를 차례를 세웠습니다. 공교롭게도 연구소가 출범한 시기를 전후해 지적장애인들의 인권침해에 대한 논란이 커졌습니다.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은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실제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를 규명하고 싶어 했고,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곳은 우석대가 유일합니다. 지난 2009년 국가인권위와 수사기관이 수소문 끝에 우석대를 먼저 찾아왔고, 지금까지 줄곧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유일하게 지적장애인들의 성폭행감금 등을 규명할 수 있는 만큼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던 사회적 약자 인권침해 사건들을 거의 빠짐없이 조사했다고 봅니다. 처음 맡은 사건이 광주인화학교 청각장애학생들에 대한 피해를 진단분석하는 일이었습니다. 장애인들의 기초생활수급비를 착복하고 장애인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해 물의를 일으켰던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도 같은 해에 맡았습니다. 2012년에는 시설장과 교사들이 장애인들을 감금하고 폭행한 현비동산 사건에 대한 피해실태를 진단했고, 지난해에는 전주자림원 피해 사건을 맡았습니다. 올해 들어서도 염전 강제노역 사건과 서울 인강원 피해 사건에 대해 장애인들의 피해를 규명했습니다.△ 지적장애인들에 대한 인권침해를 규명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셨다면.사건 하나하나에 공력을 쏟는 만큼 모든 사건들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인화학교 사건의 경우 우석대 심리과학연구소가 가장 먼저 맡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인화학교 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발생한 사건을 더듬어서 기억의 파편을 꿰맞추는 지난한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국가인권위와 검찰이 2박3일간의 시간을 줬습니다. 제한된 시간 동안 피해자들과의 교감과 관찰을 통해 심연 속의 억압사례를 차근차근 객관적인 데이터로 만들었습니다.△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도 빼놓을 수 없는데.원주사랑의 집 사건의 경우 당시 복지시설 운영자가 변호사를 통해 우리 연구소의 근거자료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습니다만, 오히려 법적공방을 통해 연구소의 결과물이 객관적이고 공신력이 크다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원주 사랑의 집 운영자의 피해자들에 대한 착취방법은 치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수사기관의 조사를 방해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실명을 바꿨고, 한 피해자에게는 전신에 복지시설 전화번호를 그려넣는 악행도 저질렀습니다. 당사자가 복지시설에서 감금과 구타에 못이겨 도망을 쳐도 문신에 써있는 전화번호를 통해 복지시설로 되돌아오도록 말이죠. 또 운영자는 목사가 아니면서도 목사로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판사가 재판과정에서 운영자에게 왜 목사로 행세했느냐고 물었는데, 운영자가 장애인을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목사라고 대답하는 촌극이 있었죠.△ 멀지 가지 않아도 우리 지역에서는 전주 자림원 사건이 있습니다. 자림원에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의 특성인 혈연지연학연이 사건의 본질을 가로막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자림원에서 실제 성폭행을 저질렀던 사람이 대학에서 강의를 나가고 있습니다. 해당 대학에 문제제기를 했더니 아직 유죄판결도 안났는데 어떻게 강의를 그만두게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어요. 지역사회가 사법적 판단 보다는 자체적으로 정화할 수 있는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있는 지역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지역사회를 위한 제언을 하신다면.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서 한국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역민들이 부조리와 사회적 모순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입니다. 지역민들이 나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개선할 것인지, 정실에 이끌려 사건을 무마하는데 급급할 것인지는 지역민의 판단입니다. 복지시설 인권침해에 대해 전북과 서울시의 판단이 다릅니다. 서울지역에서 불거진 인강원 사건은 자림원 사건과 비교하면 문제 정도가 1/100에 불과합니다만, 박원순 시장은 인강원 이사진 전체에 대해 해임 명령을 내렸습니다. 박원순 시장은 한발 더 나아가 서울시에 있는 시설들을 없애고 장애인들이 사회와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습니다.△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장애인들을 위한 배려와 지원을 강화하면서도 마음이 아픈 사람을 보듬는데 주력할 예정입니다. 2006년부터 성공회와 손잡고 사회통합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고전문가들의 치료를 제공한다는 게 사회통합치유센터의 설립목적입니다. 서민들이 사회적 우울을 떨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 교육정책에 대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겠습니다. 현재 곽노현 전 교육감을 비롯해 강승규 우석대 교수, 박거용 상명대 교수, 송순재 감리교신학대 교수 등과 한국교육정책포럼을 만들어 총괄간사를 맡고 있습니다. 교육전문가국회의원들과 다양한 교감 및 소통을 통해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을 재정립하는 일을 꼼꼼하게 추진할 예정입니다.● 김윤태 교수는- 아시아 최고 수준 우석대 심리운동연구소 이끌어우석대 김윤태 교수는 시민주권론자다. 시민들이 사회에 적극 참여해야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2010년 곽노현 전 교육감을 도와 서울교육감에 당선시킨 뒤 교육감 취임준비위 비서실장을 맡고도, 정작 서울교육청에 입성하지 않은 일화도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김윤태 교수는 지난 2006년 장애인특수교육법 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였던 곽노현 전 교육감과 인연을 맺었고, 곽 전 교육감에게 교육감 출마를 처음 권유했던 당사자로 알려져 있다. 64지방선거를 앞두고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전북도당 공직선거후보자추천관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국내 대표적인 특수교육 전문가인 김윤태 교수는 독일에서도 여덟번째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심리운동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유명하다. 김윤태 교수가 이끌고 있는 우석대 심리운동연구소는 한중일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고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신옥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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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우
  • 2014.07.07 23:02

디자이너 은병수 대표 "모든 디자인, 삶에서 시작…전통공예도 산업화 가능"

더할 나위없는. 2009년에 열렸던 제3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다. 영어로는 The Clue(실마리)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제목이 붙었다. 명징하지 않는, 그래서 다소 불친절하게 보이는(?) 주제의 이 전시회는 앞서 치러졌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한편의 사건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전통으로부터 새로운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는 일은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 더할 나위 없는 우리 디자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 답을 찾는 일은 산업화된 사회, 그 중심에서 가치의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디자인 분야에서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을 맡아 전시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던 은병수 대표(56)는 답을 얻었을까.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한국의 디자인 영역에서 새로운 길을 열며 디자인 가치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서 디자인회사를 처음으로 창업해 90년대 각종 전자제품을 비롯, 기업의 브랜드 제품 디자인을 주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던 그의 행보는 한국 디자인 발전의 노정과 맞닿아 있다. 디자인의 역할과 가치에 미처 눈뜨지 못했던 시절부터 악전고투하며 기업들의 관심을 제품디자인으로 이어냈던 그는 3년 동안의 세월을 오롯이 전통문화유산을 만나고 한국미술을 공부하는 일에 매달리면서 한국적 디자인 VIUM 을 탄생시켰다. 그동안 개발해낸 전통문화 상품은 130여종. 장인과 디자이너가 협업으로 만들어지는 이들 비움연작은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해결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수공예의 가치와 산업화 시대의 규모화 생산이 충돌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공예품의 산업화 가능성이다. 모든 디자인은 삶으로부터 옵니다. 일상용품의 근본에는 공예가 깃들어있어요. 전통공예를 일상으로 다시 들여와야 합니다. 과제가 많지만 수공예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폭을 조금만 넓히면 산업화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습니다.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2009년에 열렸던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반향이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시회를 통해 우리의 디자인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제기했었는데 답을 얻었습니까.전시회 기획의도가 꼭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문제제기였던 셈인데 우리 전통문화로부터 디자인의 실마리를 찾자는 제안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우리의 의식주부터 한글과 국악을 모티브로 한 학(學)과 락(樂)을 내세운 소주제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최근 전통문화 자산을 콘텐츠로 활용해 우리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개발하는 작업이 부쩍 활발해진 것 같습니다.한국의 디자인은 한국적인 미와 문화적 가치를 담아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내 얼굴을 가질 수 있어요. 우리 문화를 들여다보면 훌륭한 자산이 많습니다. 소재로서도 그렇고 정신적 가치도 우리 디자인에 꼭 담아야 할 콘텐츠입니다.-처음부터 우리문화에 천착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저 역시 서양식 관점으로 디자인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제품디자인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요. 디자인적 요소를 고민 하면서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없었으니까요.-우리문화를 들여다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디자인 회사를 만들어 초창기 어려움도 이겨내고 잘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영국 디자인박물관에서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 디자인에 관심을 보여 전시회에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제작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는데 수많은 제품디자인을 들춰봐도 보낼 것이 없는 겁니다. 우리의 한계를 스스로 확인하면서 충격이 컸습니다. 결국은 전시회에도 참여하지 않았죠.-제품 디자인 대부분이 호평을 받았고 여러 기업들로부터 제품을 의뢰 받았던 회사인데, 정작 자체적인 평가가 그렇게 인색했다니 뜻밖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저희도 궁금했습니다. 금세 답이 나오더군요. 우리만의 색깔, 우리만의 얼굴이 없었던 거예요. 우리만의 디자인을 위해 근본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때가 90년대 후반이었습니다.-그럼 사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겠군요.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들과 우리문화 공부를 시작했어요. 답사도 하고 책도 읽으면서 한국적 미의식을 공유했죠. 때마침 외환위기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일거리도 줄어들었어요. 그 기간이 딱 3년이었습니다. 우리문화에 집중한지 3년 후부터는 상품 개발에 나섰습니다. 샘플작업을 한 3년 정도 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니 비로소 우리문화 가치를 담은 상품이 만들어지더군요.-VIUM이란 브랜드가 그 결실이군요.그렇습니다. 목기와 옻칠, 나전, 금속공예 등 다양한 기법의 전통공예에 디자인을 담아 현대적 상품을 개발했는데, 종류가 늘어나면서 이 상품들을 통합하는 브랜드가 필요했던 것이죠.-상품 생산 못지않게 마케팅이 중요했을 텐데요. VIUM은 국내보다는 해외를 겨냥한 브랜드여서 해외 시장의 마케팅이 중요했습니다. 뉴욕에 전시판매장부터 냈던 것도 그 때문이죠.-뉴욕 전시장 개설은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아쉽게도 얼마 안 되어 문을 닫았던데요. 그랬습니다. 브랜드 이름이 비움인데, 실제로 투자비를 다 없애고 원점으로 돌아왔으니 경제적으로도 다 비운 셈이 되었죠.(웃음) 뉴욕 진출 실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시장을 오픈하기 바로 직전에 911테러가 일어났는데 그 여파가 컸고요. 투자를 과도하게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중심지역에 공간을 너무 크게 시작했던 것이죠. 그래도 어떻게 극복해보려고 했는데 3년 동안 유지하다보니 경제적 부담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제품 디자인으로 번 돈을 비움으로 탕진한 셈이 되었군요.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실패했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뉴욕에 전시장을 개설했던 덕분에 유럽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되었거든요. 크고 작은 전시회에 초대되기도 하고 주문이 이어지기도 했는데, 2006년 파리 메종 오브제에 특별초청된 것은 적잖은 성과죠.-비움의 상품은 대부분 장인들과 디자이너의 협업일 텐데, 대량생산까지는 아니어도 주문 생산의 수준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면서 생산량을 맞추는 일이나 비용 면에서 대중화가 가능한가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공예를 활성화하려면 결국 산업화 차원으로 이끌어내야 하는데, 우리의 여건으로서는 힘들거든요. 생산량이 많아져야 종사자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데 수공예로 이루어낼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까요. -비움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아시아 국가와의 협업을 도입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공예의 전통적 생산 방식이 단절된 지 오래죠. 예전에는 마을 단위나 가족 단위로 공예품을 제작했지만 지금은 몇몇 기능보유자들에 의해 기법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현실이거든요. 필리핀이나 베트남은 다릅니다. 여전히 공예 인구가 많죠. 비움은 장인들과의 협업으로 1차 작품을 제작한 다음 상품화시키는 단계의 제작은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인력과 협업합니다. 우리나라 장인들의 수공예적 가치를 살리는 상징적인 작품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존중하면서 대량생산을 위한 협업을 진행하는 겁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공예의 산업화는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전통공예를 부활시키고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 선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예의 산업화를 내세우긴 하지만 정작 우리 일상에서도 공예는 자리를 잃어버렸는데 그 자리를 회복하는 일 또한 절실한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공예의 역사는 삶의 역사와 맞닿아 있습니다. 디자인의 역사가 오랜 북유럽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예를 일상에서 단절시키지 않았어요. 그에 비해 한국은 60~70년대 초반, 산업화를 내세우면서 전통 공예의 가치를 놓치고 말았죠.-대학 교육과정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산업디자인과가 각 대학마다 개설되어 있고, 해마다 배출되는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지만 정작 일상용품을 디자인하는 작업은 미미한 것 같거든요.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전자제품 디자인은 잘하는데, 주전자 같은 일상용품의 디자인은 잘못합니다. 공예 전공자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근래 들어 산업공예라는 분야가 생겨서 환경이 달라지긴 했지만 공예와 디자인이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습니다.-2000년대 중반부터 진행해 오신 아시아 디자인 작업이 궁금합니다. 아시아의 공예와 디자인을 주목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2004년 아시아 워크숍에 초청받았는데, 그때 그 나라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와 공예 기술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디자인을 꾸준히 탐색해왔지요. 그 나라들은 경제력은 우리보다 미미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철학이나 자기들만의 독특한 디자인의 미학은 수준이 높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시아디자인전을 여러 차례 기획해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연재료와 전통기술, 현대화된 상품 디자인까지 그들의 작업은 협업을 위해서도 기반이 잘 갖추어 있습니다. 앞으로 다양한 형식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낼 계획인데 이미 지난해에 베트남, 필리핀, 라오스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실험적 협력을 했습니다.-지역에서도 전통공예를 일으켜 문화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업들이 개발 단계에만 머물거나 진전된다고해도 마케팅 단계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가 있더군요. 지역 뿐 아니라 공예를 산업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케팅이 중요합니다. 장인과 디자이너를 연계해 상품을 개발하는 코디네이션은 어려운 일이 아녜요. 자치단체가 이런 사업에 나선 경우라면 더구나 마케팅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사업단 같은 조직이 상설화되어 있다면 마케팅 전문가가 포함된 TFT를 꾸려 목표를 설정하고 장기계획을 세워 매출의 목표, 생산 단가는 물론 투자 규모와 수익 배분까지 구체적인 내용으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례들이 있습니까. 필리핀은 우리에게 저개발국가로 인식되는 나라죠. 그런데 그 나라 수공예 가구는 아주 좋습니다. 대나무 라탄 수초 같은 자연산 재료로 만드는 것들인데 그 나라에서는 판매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필리핀 정부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일종의 무역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 가능성 있는 디자이너 그룹을 선정하고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TFT를 구성했습니다. 해외마케팅과 국내마케팅, 기술지원 팀을 두었죠. 선정된 디자이너들은 서양에서 디자인을 공부했으면서도 자기나라의 전통공예 기법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디자인과 전통공예를 접목해서 상품을 개발하게 한 것이죠. 3년 만에 유럽시장에 첫 수출을 했습니다. 지금은 그 그룹들의 매출이 엄청납니다.-우리나라 공예의 경쟁력이 더 걱정되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아시아권 나라와의 협업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공공디자인 작업은 어떻습니까. 서울시청의 상징적 공간이 된 시민청은 콘셉트를 잘 살린 공간으로 호평받고 있는데요. 그 공간은 원래 홍보관 이었는데 일방적인 홍보관 보다는 시민들의 자율과 참여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싶어 바꾼 예입니다. 밥상에 빈 그릇을 놓고 그들이 재료를 채워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는데, 실제 활용이 기대 이상으로 잘되고 있어 다행입니다.인터뷰 말미, 은 대표에게 디자인의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를 물었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을 배려하고 사람을 나누고,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과거에는 사람보다는 산업을 위해 디자인을 했어요. 부끄러운 일이죠.나눔의 철학을 담아내는 그의 디자인이 우리 사회를 위해 우리의 일상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지 더 궁금해졌다.● 은병수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 디자인 회사 창업전통공예 부활 이끌어은병수 은카운슬대표는 부안 줄포면 파산리가 고향이다. 양조장집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유학을 가 부모님 대신 형과 누나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시골에서는 제법 잘산다는 말을 들었지만 부모님이 한 달에 한 번씩 보내주시는 생활비는 열흘도 못가 바닥나는 바람에 7남매의 서울 생활은 늘 가난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 돈의 단위가 다르게 쓰인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자동차 만드는 일을 어떻게 하면 실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공과대학이 아닌 미술대를 택한 것은 순전히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서울대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가 공업디자인을 공부하면서는 디자인의 가치에 눈을 떴다. 현대자동차와 금성사에 취업의 문이 열렸지만, 자동차 회사가 아닌 금성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년 남짓한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유학을 떠나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1989년에 디자인회사 212디자인(당시는 212코리아)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디자인회사였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 사업 초기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다. 그러나 웅진코웨이 정수기 등 전자제품과 굴착기, 전기자동차와 스쿠터까지 다양한 영역의 기업 제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옷을 입기 시작했다. 1994년,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그를 영국디자인박물관이 초대했다. 전시 포트폴리오를 위해 그동안 제작해낸 제품디자인을 정리하면서 그는 어느 것 하나 내 얼굴이라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한 고민과 탐색의 여정이 시작됐다. 한국 전통문화와 미술을 공부하면서 한국적인 미와 가치에 눈을 떴다. 2001년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은병수만의 얼굴, VIUM-비움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해 전통공예 장인들과 현대적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100여종의 1차 상품을 개발해 뉴욕 맨해튼에 전시 판매장을 냈다. 911테러의 여파가 컸지만 애초 계획대로 강행했다. 그러나 가중되는 운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2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회사의 경제력도 비움이 됐다. 그런데 그 실패가 기반이 되어 새로운 길이 열렸다. 아시아권 국가의 공예디자인과의 만남이었다. 그가 고민해온 전통과 현대, 장인과 디자이너의 협업은 비로소 날개를 달았다. 한국 전통을 더욱 부각시키는 디자인 작업은 아시아 디자인 프로젝트와 이어져 다양한 전시회에 초대됐다. 우리나라 공예의 부활을 위해 아시아권 국가와의 협업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그는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예술총감독을 맡아 한국적 전통과 디자인 융합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기도 했다. 공공디자인 작업도 활발해 서울 광화문 KT본사 1층의 복합문화공간, 서울시 청사 시민청, 지난봄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 화제의 공간들이 그의 손을 거쳤다. 비움의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생활 소품뿐만 아니라 공공 구조물, 상징물, 공간 등에 우리 문화의 가치를 담는 디자인 작업을 확장시켜가고 있는 그는 공공 사이트와 구조물 변환 프로젝트, 지역 사회 상징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03 23:02

[(22) 진안 아그로닉스(주)] 농산물 유통 전문기업…철저한 이력관리에 직영 농장까지

농업회사법인 아그로닉스 주식회사는 지난 2010년 4월 28일 진안군 제2농공단지내에 설립 되었다.아그로닉스(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재배환경관리 및 농산물관리에서 유통까지 책임지는 똑똑하고 믿을 수 있는 글로벌 농산물 유통기업을 추구하고 있다.아그로닉스(주)는 설립과 동시에 전문경영인 오수환 대표이사(47)를 선임해 미래를 선도하는 글로벌 농산물 유통기업이란 비전을 목표로 경영기획팀, 채소사업12팀, 식량자원팀, 진안APC센터 조직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했다.창사 이래 다각적인 사업개발과 지속적인 인프라 구축을 통해 농업의 수급안정화를 도모하여 농산물의 가치창조에 기여하고 있다.특히 사업초기인 2010년 매출액 425억원을 달성하며 사업 시작부터 진안군의 대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아그로닉스는 진안에 위치한 진안APC에서 전처리시설과 냉동냉장창고, 잡곡선별포장센터, 진공농축설비시설 등의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전처리시설에서는 무와 당근 등을 용도에 맞게 세척 및 가공하여 업체들에게 납품중이며, 지난 2011년 10월에는 무다듬라인을 증설하여 1일 25톤이 생산가능하다. 이는 전국 최대규모이다.이듬해 2011년 6월에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배추홍고추풋고추에 대해 농산물우수관리시설 지정을 받았으며 2013년에는 농산물 전처리 라인에 HACCP인증을 획득하여 안전성을 강화하고 농산물생산유통업체로서의 신뢰를 확보했다.또한 원료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한 관리비용 증가와 농산물시장의 가격 경쟁 심화를 극복하기 위해 각 작물에 이력추적관리를 실시하고 있다.냉동냉장창고는 냉장 22개동, 냉동 4동으로 나뉘어 있고, 축적된 노하우를 가지고 농산물등 제품에 맞게 온도를 설정하여 품질에 변화를 최소화 시켜 장기간 보관이 용이하다. 아그로닉스(주)는 또한 지난 2012년 진공농축설비를 도입해 무엑기스와 무농축액을 생산 중이며 현재는 신규 제품 개발을 진행중이다. 또한 전남 해남군 황산면에 위치한 11만평 규모의 직영 농장도 운영중이다.직영농장에서는 배추마늘양파고추수수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산지 우수 농업인과 계약재배로 원료의 90%를 공급받고 있다.아그로닉스(주)는 수확기에 곡물과 건고추마늘양파 등을 비축해 연간 사용량을 확보하고 있으며 녹즙원료인 당근, 양배추 미나리 등은 전북지역에서 수매를 확대해 냉동창고에서 보관해 녹즙제조업체로 납품중이다.그리고 농림수산식품부의 2013년 밭작물 브랜드 육성사업에 선정되어 현재 진안군 및 전라북도와 계약재배중인 유기농 영안벼의 확대 생산과 진안군이 추진하는 유기농밸리 100사업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밭작물 브랜드사업은 FTA, DDA 등 농산물의 시장개방 확대에 대형유통업체 성장에 따른 유통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밭작물 생산 및 유통구조 개선으로 비용절감 및 마케팅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아그로닉스(주)와 진안군은 이번 사업자 선정을 위해 2012년 1월 농림부에 공모사업 신청서를 제출 했으며 농림부는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를 통해 엄격한 심사를 거쳐 사업 대상자를 최종 확정했다.이로써 현재 아그로닉스(주) 진안APC센터에 잡곡선별포장센터를 준공하여 직영 밭작물과 전북지역의 쌀을 선별 및 소포장해 온오프라인에서 판매중이다.또한 밭작물브랜드 사업시작과 동시에 아그로닉스(주)의 양곡 브랜드인 한알의한 약속브랜드와 진안군 공동브랜드인마이산 정기담은을 런칭하면서 진안지역 농가들과 계약재배와 라이신 함량이 높은키크는쌀 영안벼를 판매중이기도 하다.아그로닉스(주)는 지역과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고민 하고 있으며, 농산물의 생산가공판매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을 통해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오수환 대표이사 "소비자에게 안전한 농산물농업인에겐 소득 안정"국내시장을 넘어 미래를 선도하는 글로벌 농산물 유통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아그로닉스(주) 오수환(47) 대표이사는 기업형 농업경영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하고 생산된 농산물을 유통가공판매함으로써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는 한편 급변하는 농업환경에 대비해 생산유통 부분에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프라 확충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그는 지역상생발전에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2012년에는 진안군 친환경농업인연합회와 진안군 그리고 아그로닉스(주)가 업무협력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전북대학교 환경생명연구소와도 MOU를 체결해 농산물의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특히 진안군과는 100개의 유기농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조성하는유기농밸리 100프로젝트를 진행, 농업 경쟁력 강화와 부가가치 제고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이뿐만 아니라 이주여성을 적극적으로 고용해 다문화가정 휴먼 네트워크를 형성, 지역 일자리 창출에도 큰 힘이 되면서 여성친화기업에 선정됐고, 최근에는 지역 내 공익사업확대에도 동참하기 위해 진안군 마을기업인 진안마을 주식회사에 출자를 하기도 했다.오수환 대표이사는 시장개방과 기후변화 등 우리 농업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당사는 농업인과 힘을 합쳐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만들어가고 싶다면서 앞으로도 당사는 소비자들에게 믿을 수 있는 안전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해, 농업이 지속가능한 가치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농업인의 소득안정과 농업분야의 위기대응능력 강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김태인
  • 2014.07.03 23:02

[(26)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남원] 천도교 성지이자 전라좌도 심장부…'동학과 혁명' 공존

경주에서 포교활동을 펼치던 동학 창시자 최제우는 갑자기 짐을 꾸려야 했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1861년 성리학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최제우가 가르치는 도를 서학으로 몰기 시작한 뒤, 음력 11월 경주관아에서 그의 활동을 중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최제우는 경주를 떠나 울산, 부산 등을 거쳐 전라도 남원으로 왔다. 그해 음력 12월이다. 이후 남원 교룡산성 은적암에서 6개월간 체류하며 동학의 근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핵심 사상을 가다듬는다. 정확히 32년 후 남원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전라좌도 중심지가 된다. 1894년 전주성 점령 이후 여러 지역에 집강소가 설치됐지만, 지방토호 등 보수세력이 강했던 남원과 운봉은 집강소 설치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을 이끌고 남원성에 도착 동학대도회소를 설치한다. 김개남은 남원도호부의 관할인 담양순창무주임실곡성진안용담장수를 넘어 순천광양낙안보성 등까지 남원대도회소의 관할에 포함시켜 전라좌도를 호령했다. 이처럼 남원은 동학농민혁명에서 동학과 혁명이 공존하는 유일한 장소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들을 엮어 남원동학농민혁명 순례길 벨트를 만들었다.△동학 교리의 모태 은적암순례길 벨트 출발지인 남원 교룡산에 위치한 은적암(隱蹟庵). 한병옥 전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장이 길을 잡았다.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이 주둔했던 선국사(善國寺)를 지나 20여분 정도를 오르자 작은 암자터가 나왔다. 오르기 어려운 곳은 아니지만 한 전회장의 안내가 없었다면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다. 관아로부터 활동중지 명령을 받게 된 최제우는 이곳으로 몸을 피했다. 1861년 11월 제자 최중희와 함께 경주를 떠나 울산부산진해고성여수구례를 거쳐 약 두 달 만에 남원에 도착했다. 은적암은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백용성이 처음 출가한 곳이기도 하다. 최제우는 이곳에서 6개월간 머물며 동학 교리의 근간을 마련하고 집필과 포교에 들어간다. 천도교 전주종리원 연혁과 오하기문에 따르면 최제우는 이 시기에 전주지례금산진산까지 왕래하며 포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제우가 남원에 머문 약 6개월은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집필을 한 시기다.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포교가사집인 용담유사의 핵심을 이루는 글들이 이 기간에 작성됐다. 특히 주목해야 할 글은 동학론이다. 최제우는 그동안 유림들에 의해 서도 혹은 서학으로 불리는 천주교도로 내몰리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신념체계를 분명히 하기 위해 쓴 글이 동학론이다. 최제우가 동학이란 용어를 처음 쓰면서 동학을 신념체계로 정립한 곳이 바로 남원이며 교룡산의 은적암이다. △전라좌도 동학대도회소 남원유림사상을 기반으로 한 지방토호 등 보수세력이 강했던 남원에서 김개남 장군을 맞이한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양반 토호들이었다. 남원지역에 집강소 설치가 불가능하자 김개남은 1894년 6월 12일 태인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순창옥과담양창평순천 등을 돌아 6월 25일 남원성에 도착한다. 이 때 김개남을 남원으로 인도한 사람은 김홍기 남원접주와 이사명 진안접주다. 한학을 공부하며 경제적으로도 풍족했던 장인 최봉성의 영향을 받은 김홍기는 남원대접주 등을 역임하면서 5000여호를 동학에 입문시켰다. 이사명은 본관이 전주 이씨로 수 차례 과거 시험을 치렀을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이들의 도움으로 남원성에 입성한 김개남은 옛 남원군청 자리에 전라좌도 동학대도회소를 설치한다. 김개남은 동학대도회소가 자리를 잡아가자 백성들을 착취했던 아전, 유림, 토호들의 재물을 반환케 했고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의 대표를 뽑아 공평하게 분배하는가 하면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면서 포교에 힘쓰는 한편, 식량무기 등을 비축해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해 7월 15일 남원대회에 5만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수 있었다. 아쉽게도 김개남 장군과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이 활약했던 대도회소는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사라진 자리에는 기념비 하나 없는 실정이다. △혁명의 꿈 묻힌 방아재남원 산동면에서 관음재와 방아재를 넘으면 곧바로 운봉이다. 120년 전 동학농민군은 운봉으로 가는 길목이 한 눈에 보이는 이곳에 깃대바위를 만들고 승전을 다짐하는 기를 꽂았다.그러나 지금은 차를 타고 채 10여분이 안돼 갈 수 있는 이곳은 동학농민군에는 갈수 없는 길이었다. 남원시가지는 평균 해발 100m, 운봉고원은 460m 정도다. 350m 이상 고도차이가 있는데다 백두대간 산줄기로 막혀있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국경 등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험난한 지형이었다. 결국 남원지역 동학농민군의 꿈은 이 능선에서 좌초되고 말았다. 김개남 장군이 제2차 봉기에서 청주성 공격에 나선 뒤 남원에 남은 농민군 1만여명 중 7000여명은 산동방 부동에 진을 치고 운봉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당시 운봉에는 박봉양을 주축으로 한 민보군이 남원에 있는 동학군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남지방으로부터 300정의 무기와 화약 등을 지원받아 전투력을 강화했고, 영남지방 보수 세력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박복양은 2000여명의 병력을 방아재에 배치하고 선제공격할 기세를 보이다가 도망치는 척하면서 농민군을 유인했다. 계략에 말려든 농민군은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적이 산상에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천보총을 일제히 발사해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소들이 놀라 뒤돌아 달리며 미친 듯이 울부짖고 난폭하게 날뛰며 뿔로 찌르고 발길질을 하니 밟히고 찔려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처음에는 동학에 동자도 몰랐지요.지난 2004년 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은 한병옥 전 회장은 시민사회단체 운동가 출신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해 온 학자도 아니고 유족도 아니다. 그런 그가 초대회장을 맡게된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유족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한 전 회장은 어쩔 수 없이 나섰다고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남원지역 동학농민운동 역사를 보존계승하고 알려야 한다는 신념이 묻어났다. 남원 동학혁명기념사업회는 한 전 회장을 중심으로 매년 유적지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또 남원동학을 알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책자발간 및 학술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전라좌도 동학농민혁명 희생영령 추모제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남원동학농민혁명 순례 벨트는 기념사업회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 중에 하나다. 은적암(최제우 경전집필)-교룡산성(동학농민군주둔지)-구 남원역(남원성전투지)-구 군청지(대도소설치지)-광한루원(서형칠약방)-요천(동학농민군훈련장)을 잇는 1코스와 방아치전투지-쪽뚤-깃대바위-류태홍묘-여원치-박봉양공적비 2코스 등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남원 지역 동학농민혁명사를 널리 알린다는 계획이다.

  • 기획
  • 김정엽
  • 2014.07.02 23:02

[④사례로 본 노인 빈곤 현주소] 한달 수입 고작 14만원…몸까지 불편 '생계 막막'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2011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빈곤 노인일수록 소득수준이 높은 노인에 비해 자살 생각을 2.3배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65세 이상 노인을 연가구소득 기준으로 5그룹으로 분류했을 때 최하위 20%에 속하는 노인이 자살을 생각한 비율은 16.3%로 가장 높았던 것으로 조사됐다.노인이 자살을 생각하는 원인은 소득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소득 최하위 20% 계층은 경제적 어려움이 37.8%를 차지해 가장 비중이 높았고, 그보다 형편이 나은 소득 하위 20% 역시 경제적 어려움이 36.8%로 비슷했다.소득 중위 20%는 본인의 건강이 자살을 생각케 하는 원인(42.5%)이라고 꼽았으며, 상위 20%와 가장 부유한 최상위 20%는 외로움지인의 사망갈등관계 등 대인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각각 38.7%, 43.8%를 차지했다. 이는 소득수준에 따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는 원인이 서로 다름을 나타낸다.이처럼 양극화 현상은 노인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현상에도 나타나고 있다. 노인 자살을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고령 인구의 경제문제, 사회복지 및 사회 안전망 문제로 풀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한 노인의 사례를 통해 노인 빈곤의 현주소를 짚어본다.전주의 한 노인복지관 경로식당에서 매일 점심식사를 하는 김분순(가명, 84여전주시 인후동)씨.김 씨는 매일 전동스쿠터에 수거한 폐지를 가득 싣고 위태위태하게 도로를 달린다. 운전자들은 운전 중 좁은 도로에서 김 씨를 마주치게 되면 운전하는데 방해가 되어 짜증스런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폐지를 가득 실은 스쿠터를 식당 앞에 대놓고 식사를 한다.식당앞에서 만나 힘든 점은 없는지 여쭤봤다. 유난히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한 게 이상해 살펴보니 귀가 어두워 목소리 조절이 잘 안됐다. 보청기를 끼면 소리가 울려 무슨 소리인지 분간이 안되고 빼면 소리를 잘 못 듣는다. 김 씨는 겨우 힘든 처지를 토로한다. 김씨는 2년 전에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려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하여 수급비지원이 끊겼다고 한다. 젊은 시절 부산에서 살았는데 피붙이가 아닌 양자 6명을 호적에 올려 양육했다. 그 후로 개가를 해 전주에서 살게 되었고 남편과는 사별한 상태였다.문제는 양녀 넷은 출가했지만, 아직 아들 둘이 호적에 남아 있어 김씨는 수급자에서 탈락했다. 이들은 지금 연락도 되지 않을 뿐더러 사는 형편 또한 어렵다고 했다. 동사무소 관계자는 호적정리를 하라고 하지만 김씨는 불쌍한 사람들을 호적에서 정리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부했다며 안타까워했다.이처럼 노인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정책과 제도는 미흡하고 빈곤노인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막막하다. 84세의 어르신이 단지 용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니라 생활과 생계를 위해 날마다 폐지수거라는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하고, 그것도 수술과 질병으로 고통스런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서야하는 처지가 얼마나 고단할까를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상황이다.김 씨처럼 수급자에서 탈락한 경우라면 상황은 더 막막하다. 김 씨의 삶은 처참할 정도다.김 씨는 실제 30년 전 인근에 관공서를 지을 때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함바식당(현장식당)을 운영하였고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건물벽 옆으로 수거한 폐지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건물은 등기도 없는 가건물이라고 했다. 외부로 통하는 문을 열면 바로 거실 겸 주방으로 사용하는 장소가 있다. 한눈에도 외벽이 너무 얇고 허술해 여름에는 무척 더울 것 같고, 겨울에는 너무 추울 것 같았다.실제로 겨울에는 방안에 수돗물이 얼어서 사용할 수 없어 보였다. 김 씨는 중학교 2학년 외손자가 있다. 손자는 딸의 아들로 생후 일주일 되면서부터 양육했다고. 나이 마흔에 낳은 딸이 아버지도 없이 낳은 아이를 돌볼 처지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 딸은 병(뇌출혈로 수술)이 들어 아이를 돌볼 수도 없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했다.마침 이웃에 살고 있는 주민 양찬숙(가명)씨가 김 씨의 사는 형편을 대변했다.양 씨는 몇 년 전에만 해도 1톤 트럭 분량의 폐지를 모으면 12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지금은 4-5만원 정도 밖에는 못 받는다. 한달에 폐지를 수거해 받는 4-5만원과 9만 여원의 노령연금, 손자앞으로 나오는 수급비가 생활비의 전부라며두 달에 한번 동사무소에서 손자앞으로 쌀 20kg이 지급된다. 냉장고와 세탁기는 오래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무릎을 굽힐 수 없어 청소를 할 수 도 없다고 말했다.이어 밤에 폐지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늦은 밤까지 전동스쿠터로 폐지를 수거하러 다닌다면서 어두운 밤길에 교통사고라도 당할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이렇듯 정부의 노인정책과 제도 밖에 있는 노인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과 도움이 그 어느때 보다 절실이 요구된다그러나 김씨처럼 손자와 함께 생활하는 경우는 독거노인친구만들기 사업 대상자 발굴에서도 제외된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김 씨처럼 당장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없다는 게 안타까워 무기력증을 느끼는 복지사들의 상담도 적지 않다며노인 빈곤 문제가 어르신이 처한 형편을 볼 때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복잡다단하계 얽혀 있는 만큼 종합적인 접근과 해결을 도울 수 있는 사례 관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 기획
  • 기고
  • 2014.07.01 23:02

취임 3개월 박대수 KT 전북본부장 "농어촌 초고속 통신망 확대…도농간 격차 해소 노력"

정보통신이 경제와 군사력, 그리고 국가의 힘을 상징하는 시대다. KT는 최근 새로운 사장 선임과 함께 전폭적으로 이뤄진 구조조정, 낙하산 임원 거취 문제 등 제2의 대표적 공공 통신사로서의 부흥을 위해 산적한 문제들이 많다. 우선 가장 시급한 과제는 불거진 내부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인적청산과 내부봉합이다. 이런 가운데 고향 전북을 떠난지 30년 만에 KT 전북본부 수장이 되어 돌아온 박대수(51) 전북본부장에게 거는 기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박 본부장에게 도민들이 만족할 통신서비스 제공과 도민의 눈과 귀가 되어줄 정보제공 계획 등 미래전략 수립과 경영혁신에 필요한 비전설정 능력 등을 들어봤다.-고향 전북의 KT 수장이 되어 내려온 소감은.“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전북에서 일하게 돼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전주에서 보내다 학업을 위해 전주를 떠나게 됐고 30여년 만인 지난 4월 KT 전북 수장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너무 오랜만의 귀환이라 낯설지 않을까 우려됐지만, 지인들을 만나보니 서먹함은 사라지고 고향의 푸근함이 너무 좋아 ‘전북인’이라는 자부심이 더욱 커졌습니다. 전북의 수장으로서 지역의 통신사업 발전과 최상의 고객서비스 제공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다양한 분야에서 체득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더욱 신뢰받는 전북본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농도와 산간, 그리고 섬지역이 많은 전북 통신의 개혁 방안이 있다면.“농어촌지역 초고속인터넷 광대역 회선을 확대해 도농간 IT 인프라 격차 해소를 위해 투자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시 단위 통신시설은 통신3사(KT, LGU+, SK) 모두가 집중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나 농어촌 지역은 투자비 대비 효율성 저하로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에 KT 전북본부는 정부와 공동투자를 통해 농어촌지역 초고속인터넷 광대역화 투자 사업을 2010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올해는 투자를 16억으로 확대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휴대폰 음영지역 해소를 위해 별도의 투자 방침을 세웠습니다. 올해 60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1600개소에 중계기 설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LTE-A 무선서비스 커버리지 확장 및 휴대폰 품질개선으로 음영지역을 해소하려 합니다. 더욱이 농촌 인구가 증가 추세에 있는 만큼 초고속인터넷 광대역 회선 확대 사업도 적극 추진해 귀농인의 편익 증진을 돕겠습니다.”-지역 중소기업 육성과 지역 물품 판로 확대 방침은 있으신지요.“KT 전북본부는 통신시설 공사와 통신물품 구입은 원칙적으로 지역 중소기업을 통해 추진합니다. 광케이블 포설 및 선로·관로공사와 전용시설, 전송장비 납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역과 상생하고 있습니다. 현재 전북본부에는 32개 전북지역 통신시설 협력업체 600여명의 종사자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연간 통신시설 투자비용은 230억 원에 달해 미약하나마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으며, 더불어 전통시장 살리기 운동에 동참해 상시적으로 온누리상품권을 구입해 지역농산물 및 특산물 구입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사랑나눔 행사는 연간 1억 원을 들여 지역 내 불우시설과 불우이웃에 작은 정을 나눠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역 중소기업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더불어 함께하는 전북의 대표적 기업으로 자리하겠습니다.”-KT 전북본부가 하는 주요 업무를 간략히 소개해 주신다면.“KT는 100년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1등 통신회사입니다. 먼저 KT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유선과 무선 통신서비스와 IT서비스입니다. 전화, 핸드폰, TV, 인터넷, 전용회선 등과 함께 어린이 안심서비스, 브랜드택시 등 안전 및 실생활과 밀접한 사물통신형 IT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 미래생활에 대비해 스마트에너지, 통합보안, 차세대미디어, 헬스케어, 지능형 교통관제 등 5대 융합서비스를 집중 육성할 계획입니다. 또한 그룹사를 통해 BC카드, 금호렌터카, 텔레캅 등 생활 밀착형 서비스 지원을 주로 하는 기간통신사업자입니다. 특히 지역 사회공헌을 위해 사랑의 봉사단을 운영, 올해는 2억 원을 봉사기금을 조성해 도내 소외계층을 위한 지원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부임 3개월이 지났는데 전북본부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전북본부의 최대 장점은 바로 고객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기반으로 전북본부가 KT 내에서 경쟁력 있는 ‘작지만 강한 전북본부’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신뢰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고객 최우선’을 슬로건으로 더 많이 노력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단점을 말하자면 지난 4월 대규모 명예퇴직 이후 완전히 정상화되지 못한 고객서비스와 영업력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신다면 1등 KT의 유전자를 기반으로 최상의 고객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북본부가 지역사회에서 고용과 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해 나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십시오.”-국민들이 모르는 KT 서비스의 중점 홍보 사안이 있다면.“과거에는 유선전화를 기반으로 고객 집에 단순히 인터넷 망을 연결해 인터넷과 TV시청을 제공하는 통신회사였지만 고객의 욕구가 다양, 복잡해짐에 따라 통신 패러다임이 변화됐습니다. 지금은 TV와 PC를 렌탈해주는 스마트렌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가계통신비 절감을 위한 ‘올라잇 결합’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상품은 LTE폰 65요금제 2대를 사용하는 고객이 올라잇 결합을 하시면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외 다양한 통신비 절감 방안이 되고 있습니다. 현명한 계산이 필요할 때입니다.”-민영 공기업으로서 도민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공기업인 KT가 2002년 민영화되면서 여러 유수의 통신사업체들이 생겨나 합당한 가격으로 통신의 질이 좋아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며, 그 중심에 KT가 있습니다. 전북본부의 지역경제 기여도를 언급하자면 자회사, 출자회사, 협력사 등 종사인력은 3000여명으로 도내 경제활동인구의 0.33%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근로소득 및 공사 발주 등 연간 2000억 규모의 비용을 지출, 도내 총생산액의 0.5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게 도민의 관심과 사랑 덕택입니다. 최고의 품질과 차별화된 서비스로 도민이 사랑하는 KT, 도민과 함께하는 KT가 될 수 있도록 도민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박대수 본부장은 전주 출신…보직 두루 통신규제정책 전문가지난 4월25일자로 KT 전북본부장에 취임한 박대수 본부장은 “도전, 융합, 소통을 통한 1등 KT 구현에 전북본부가 그 주축이 되도록 노력하고 즐거운 일터를 조성해 고객으로부터 신뢰와 존경받는 기업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박 본부장은 전주 출신으로 전라고와 서울대 계산통계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9년 연구원으로 KT에 입사해 기획조정실 경영연구소 경제분석연구팀, 사업협력실 사업협력담당, 대전법인사업단장, 국내영업총괄 Public고객본부장, 충남고객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KT에 재직하면서 학위 파견기간을 제외하고 통신요금, 접속통화료, 통신관련 법제도 등 규제정책 연구 및 대응 업무를 담당하는 등 대표적인 통신규제정책 전문가로 정평이 높다.1992년 입사 3년 만에 미국 뉴욕주에 있는 렌슬러 폴리테크닉대학 경영과학 박사과정 중에 미국 1대 통신회사인 AT&T 친구들과 선의의 경쟁을 했고 이 부분이 바로 자신의 인생의 전환점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그는 KT만이 가진 고유한 공공기관의 특성을 자긍심으로 여기는 정통 ‘KT 맨’이다. 수익 창출만을 우선하는 다른 통신사보다는 공적인 부문과 도민 편익, 그리고 수익을 같이 생각하는 KT다운 민영 공기업이라는 것이다.박 본부장은 “지난 2009년 공정경쟁을 훼손하지 않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KT 자회사인 KTF와의 합병인가를 정보통신부로부터 얻어낸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소개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4.07.01 23:02

[(25)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김제] '전봉준 최후 항전지' 구미란엔 이름없는 무덤들만…

요즘은 하늘만 쳐다보는 게 일상이 되버렸습니다., 40년째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어요. 한 해 한 해 무명 동학군의 무덤이 좁아지고 있습니다.지난 19일 김제 원평 구미란 유적지. 수풀을 헤치며 이곳을 오르던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과 김남근 구미마을(구미란) 노인회장은 걱정이 앞선다. 원평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현장이 날로 훼손되고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기 때문이다. 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사는 거의 원평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평은 동학농민군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교통의 요지기도 했고, 조선 말기 상설시장이 들어설 정도로 번화가였다. 지리적 여건도 당시 지도부들이 모여 거사를 도모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원평 김덕명 장군 생가 동남쪽 상두산 자락을 넘으면 김개남 장군의 생가가 있는 정읍 지금실이다. 두 지역의 거리는 불과 20리가 안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거두인 이들이 혁명 이전부터 교류를 가지며 미래를 꿈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전봉준 장군의 활동 동선도 원평과 인연이 깊다. 원평취회를 통해 지도자로 급부상한 전봉준 장군은 이듬해 4월 원평에서 김덕명 장군의 세력을 규합,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또 전주성을 점령하기 직전 전열을 가다듬은 장소이며,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가 설치된 곳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도 바로 이곳 원평이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에 비해 원평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바로 이웃 동네 고창정읍은 전담부서까지 두고 관련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생소하게 들릴 뿐이다.△구미란구미란 전적지. 간단한 안내표지판 하나가 구미마을 뒤쪽 조그마한 야산을 가리키고 있었다. 김남근 회장의 길안내가 없었다면 이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무명 동학농민군의 무덤으로 가는 길도 험했다. 무덤이 있는 곳은 해발 40여m 중턱에 지나지 않지만, 수풀을 헤치고 미끄러운 오르막을 걸어야 했다. 1년에 3번 실시하는 잡초 제거작업이 구미란 유적 관리의 전부다. 외형상 초라한 모습이지만 구미란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봉준 장군이 이끈 농민군의 최후 항전지기 때문이다. 신영우 충북대 교수는 구미란 전투를 참혹했다고 기술했다. 이 전투에 관한 기록은 진압군이 쓴 몇 구절밖에 없기 때문에 전투상황조차 재구성할 수 없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본 구미란 전투는 참혹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단지 시체 37구와 쌀 500석 조총 등을 포획했다고 적혀 있지만, 이는 일본군이 우금치전투의 희생자를 대폭 축소해 기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분석이다. 이이화 역사학자도 구미란 전투의 치열했던 상황을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는 우금치에서 패한 전봉준은 다시 세를 규합해 3000여명의 농민군을 원평 구미산에 집결시켜 진을 펼쳤다. 뒤따라 온 일본군과 관군 300여명은 진을 치고 대치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포격을 퍼부었다. 서로 진의 거리는 1000보쯤 됐다고 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재래식 무기를 쓴 농민군은 불리했다.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지만, 농민군은 더욱 결사 항전하며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저녁 무렵 관군은 먼저 산위에 올라 육박전을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시체가 쌓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우금치에서 대패한 전봉준은 이 전투에서 반전의 계기를 잡고자 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고 재기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채 도피 길에 올랐다. 이 때문에 전주역사박물관에 있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유골을 이곳에 봉안해 추모묘역 조성사업을 진행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구미란 전적지에 대한 고증과 방치되고 있는 유적지에 대한 보존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목이 잘린 뒤 120년 동안 방치된 동학 농민군 지도자의 유골 역시 김제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농민군무명묘역이 있는 이곳을 성역화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무산될 듯하다.△원평집강소동학농민혁명에서 집강소가 갖는 의미는 크다. 당시 농민들이 폐정 개혁을 골자로 국가를 대신해 행정, 치안 등을 직접 도맡는 것은 파격중의 파격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철수한 뒤 전라감사 김학진이 농민군으로 하여금 집강소를 설치해 치안을 유지케 했다. 사실상 농민군 조직과 활동을 인정하고 향촌사회의 자치기능을 농민군들에게 위임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농민군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시 김학진과 전봉준 장군이 전주성에서 회담을 갖고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라 대타협으로 전면 설치 운영됐다. 이에 따라 전라감영에 전라좌우도소가 설치됐고, 전라도 지역 53군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당연히 전략적 요충지인 원평에도 집강소가 세워졌고, 현재는 민가에 설치된 집강소 자리로는 유일하다. 원평집강소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당시 도축을 하며 재산을 모은 백정 동록개가 건립한 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되자 신분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김덕명 장군에게 헌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매우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원평집강소는 수 십년 동안 방치 상태였다가, 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서야 겨우 문화재 등록이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붕괴 위기에 처해 있다. △김제지역기념사업회김제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지난 1987년 모악향토문화연구회(회장 故최순식)에서 김덕명장군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고 최순식 회장이 지내온 동학농민군위령제를 지난 1994년부터 구미마을(구미란전적지) 주민들이 마을행사로 주관했다. 위령제의 명맥과 기념사업을 위해 2008년 7월, 구미마을 주민들과 함께 원평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라는 명칭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그 뜻이 김제 전역으로 전해지면서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구성됐다. 12월 22일에 위령제와 함께 학술강연회를 진행하는 창립대회를 열었다. 2009년 3월 사단법인으로 승인되었고, 2010년 3월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가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김제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사의 위상정립과 유적지를 보존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2009년부터 원평장터 기미독립만세운동 기념행사와 구미란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를 주관해오고 있으며, 지난 5월 9일, 120주년 동학농민혁명과 금구원평취회 121주년을 기념하는 다시여는 원평취회를 개최, 올해를 기점으로 김제의 동학농민혁명 문화제를 매년 5월마다 추진할 예정이다. 2013년도에 동학농민군지도자의 유골을 구미란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에 안장하기 위해 나섰지만 무산되었고, 구미란동학농민군무덤 발굴과 집강소건물 문화재 등록을 위한 절차를 진행했으나 문화재청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구미란 동학농민군무덤과 집강소건물의 토지와 건물 소유주로부터 동의를 얻어서 등록문화재 지정을 재차 추진하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6.25 23:02

[③경력단절 여성 취업지원 '새일센터'] 사회 재진출 원하시나요?…지금 'job'으로 오세요

혹시 저 같은 나이에도 일자리를 찾을 수 있나요? 전북여성새로일하기센터 취업 창구 앞에서 얼추 50살은 훌쩍 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기웃거린다. 무슨 소리? 당연히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며 손을 이끌었다. 김모 씨(48전주)는 결혼 전 화장품 판매점에 3년 정도 근무했고 이후엔 아이들 키우랴, 남편이 운영하는 작은 동네 슈퍼 신경 쓰랴, 나름 스트레스를 받던 중 이제는 내 손으로 돈도 벌고 나만의 일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센터를 방문한 것이다. 용기를 갖고 센터를 방문한 김 씨는 현재 센터 전문취업설계사를 통해 구직 등록과 함께 제조분야 기업체 동행면접을 위한 이력서를 준비하는 등 청년 못지않은 열정과 의욕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김 씨는 높기만 한 취업의 문턱에서 어려움이 생길때마다 새일센터에서 함께 고민하면서 하나씩 실력을 쌓아간다며센터에서 만난 취업 여성들의 경험담을 나누는 것 도 사회 적응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경력단절 여성 어디로 가야죠?여성가족부는 가사 및 육아 등으로 장기간 직장으로부터 이탈된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직장체험 및 여성 고용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체계적으로 노동시장 재진입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촉진법 제13조 제1항에 의거 2009년도부터 여성새로일하기센터(이하 새일센터)를 운영하고 있다.새일센터는 전국에 총 130개소가 있다. 이중 도내엔 7개(전주2, 군산, 익산, 정읍, 남원, 김제) 새일센터가 운영 중이다. 새일센터가 없는 8개 군 지역(완주, 임실, 무주, 진안, 장수, 고창, 부안, 순창)은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에서 위탁을 받아 전북광역새일본부가 총괄하고 있다. 각 군의 여성일자리 담당부서가 두 명의 취업설계사와 함께 지역여성들의 취업지원을 위해 일하고 있다.또한 각 새일센터마다 5명의 전문취업설계사와 2명의 직업상담사 등 취업전문가가 상주한다. 이들은 구인구직 상담은 물론 직업교육훈련, 동행면접, 취업연계와 취업 후 사후관리까지 여성취업에 관한 전문 토털서비스를 실시, 도내 경력단절여성들의 사회 재진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실제 김 씨처럼 센터별 각기 다양한 취업지원 프로그램운영으로 실제 새일센터를 통해 취업에 성공한 도내여성은 2009년 새일센터 개소 이래 상용직 취업자 수가 1만 7945명에 달하고 있다. △ 궁금하다 새일센터! 새일센터를 이용 시 어떤 혜택이 주어질까?새일센터의 주된 역할은 첫째, 취업을 희망하는 경력단절여성들에게 취업정보를 제공하고 취업 성공시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한다.둘째, 기업에 취업한 여성들이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고용이 유지될 수 있도록 사후관리서비스를 제공한다.다음은 위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새일센터의 역할과 새일센터를 이용하는 구직자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아보자. 먼저, 여성구직자의 주요 유동지역인 대형마트, 아파트장터 등을 통해 찾아가는 직접 방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구직신청 이후 전문취업설계사와 1:1 매칭을 통해 심층상담, 직업능력진단 등 취업성공까지 지속적인 관리모드에 돌입한다. 또한 취업을 위해 도내 산업분야별 리쿠르팅 투어(기업체 탐방)를 통해 본인의 희망기업을 사전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취업 후엔 새일여성인턴 프로그램도 함께 지원한다고. 더불어 취업 1개월을 기념하는 첫 월급 축하데이에는 축하 메시지 전달과 함께 동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간식까지 취업자 이름으로 지원한다. 이를 통해 조직 내 구성원으로서 소속감과 존재감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직원들과 화합할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장기근속을 유도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전북여성일하기센터 관계자는 다시 말해 기업에게는 좋은 파트너가, 여성들에겐 아줌마가 아닌 당당한 직장인으로서 명함(名銜)을 가질 수 있는 고품질 취업지원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이라며취업에 대한 꿈이 더 한층 넓어지고 가까워지기 위해 지금 당장 가까운 새일센터를 방문하면 전북 여성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보금 전북여성새로일하기센터장 "구직자는 꿈과 희망 되찾고 기업에게는 인재발굴 기회"-해마다 취업자 수 증가와 더불어 상용직, 좋은 일자리 분야 취업자가 증가하고 있는데 비법이 있나요? 지난 십수년간 우리나라 평균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꾸준히 증가해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주목할만한 점은 새일센터를 통해 30대는 물론 40대 이상 여성 중고령층 주도의 고용률 증가가 최근 몇 년 사이 경력단절여성 취업의 주된 특징으로 손꼽히고 있다는 점이지요. 경력단절여성 취업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새일센터의 인지도는 구직여성은 물론 도내 구인기업을 대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중 여성친화일촌협약인증 기업을 대상으로 새일여성인턴지원, 재직자 대상 경력단절예방특강, 기업환경개선, 기업자금대출이자할인 등 다양한 혜택이 제공되고 있는게 큰 비법이라면 비법입니다.-경력단절 여성 상당수가 사회로 나가기까지 큰 두려움을 느끼는데.몇 년 전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걸을 때면 저에게 냉장고 불량을 상담하던 어머니들이 이제는 본인부터 자녀들의 일자리까지 요청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작년 한해에만 우리센터에서 취업한 여성들은 4433명이지요. 이중 60%가 상용직이니 자신있게 자랑하고 싶기도 합니다. 특히 한번 맛을 보면 맛을 안다는 어느 광고처럼 한번정도 세일센터를 통해 구직자를 연결한 기업체 대표들은 여성특유의 부지런함과 당당함, 그리고 끈질긴 지구력으로 다시 직원이 필요하면 우리센터에서 훈련받은 여성들을 선택하겠다고 할 정도 입니다.-경력단절 여성을 위해 센터에서 가장 신경쓰는 일은?새일센터는 경력단절여성에게는 꿈과 이름을 되찾아주고 기업에게는 여성인재발굴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자리분야 전문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엔 전북여성일자리인식전환 특강과 취업박람회를 열었습니다. 도내 경력단절 여성들이 취업성공에 대한 자신감과 경제활동에 대한 의지를 일깨워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프로의 세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목표를 설정하고 겪을 수 있는 과정들을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서였죠. 센터의 역할은 조직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입니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자신의 경제적 자립과 노후 대비라는 목표를 세울 경우 이를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는 센터를 방문해 자신의 커리어를 설계하는 것 입니다. 취업을 희망하는 모든 여성들의 방문을 적극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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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6.2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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