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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 유가공' 이지혜 대표 "FTA 대비 유가공 모색…현실 안주해선 아무것도 못 지켜"

임실은 치즈의 고장이다. 1964년 임실성당에 부임한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84디디에 세스테벤스)가 농민들의 가난을 해결하고자 산양을 키우며 치즈를 만들어 키운 덕분이다.지정환 신부가 농민들과 함께 만든 것이 정환치즈다. 지정환 신부는 1971년 정환치즈를 조선호텔에 납품(70㎏), 임실치즈를 세상에 알렸다.이후 지정환임실피자 등 브랜드가 나오고, 임실피자농협도 생겼다. 임실군은 임실치즈테마파크를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이제 임실군은 낙농과 치즈의 고장으로 우뚝 섰다.하지만 임실을 비롯해 우리나라 낙농업계가 잘 나가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잘 나가던 낙농가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8000호에 달하던 국내 낙농가는 올해 5000호 아래로 내려섰다고 한다. 낙농인들의 나이도 5060대 이상으로 고령화 추세이고, 젊은 층 수혈이 제대로 안되고 있다. 낙농업도 원유 생산 뿐 아니라 2차, 3차 산업화를 통해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전략이 시급해진 것이다. 젊은 후계농 육성은 물론 다양한 소비층을 겨냥한 맞춤형 마케팅 전략도 요구된다.이런 가운데 원유생산에 안주하지 않고 가공과 체험목장 등 2차, 3차 산업화에 도전해 큰 결실을 거둔 곳이 있다. 지난 4일 임실군 지사면 영천리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 유가공을 방문, 이지혜 대표(45)로부터 낙농업의 6차 산업 성공 전략을 들어봤다. 목장을 맡고 있는 이 대표의 남편 조봉수씨(49)는 출타중이었다.큰 길에서 목장으로 이어지는 좁다란 길로 들어서자 젖소, 목장을 연상시키는 마을벽화가 눈에 띄었다. 작은 산을 등지고 세워진 유가공체험장 앞에는 모형 젖소가 방문객을 맞았다. 목장과 유가공체험장은 동남향으로 양지바른 곳이었다.-조용하고 햇볕 잘드는 곳이군요. 목장으로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언제부터 목장을 시작했는가요.남편이 서울에서 토목기사로 일했어요. 저는 서울에서 성장해 남편을 만났고요. 큰아이가 갓난아이일 때 건강이 좋지 않아 힘들었는데, 공기 좋은 곳에서 아이를 돌보라는 의사 선생님 권유로 1994년 남편 고향인 이곳으로 내려왔습니다. 사실 정착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가 낙농의 매력에 빠져 눌러앉게 됐어요.-서울에서 성장했다면 농사 경험이 전혀 없었을 텐데 낙농을 하겠다고 나선 계기가 있었습니까.이 곳에서 지내다가 알게 된 친구가 낙농가였어요. 젖소 키워 원유를 생산하고 사는 모습이 좋았어요. 게다가 수입면에서도 서울 생활보다 낫겠다 싶어 남편에게 목장을 하며 살자고 했죠.-남편도 같은 생각을 가졌는가요.그렇지 않았어요. 남편은 서울 생활을 원했는데 제가 고집을 좀 피웠죠.-남편이 반대하면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뜻을 관철시켰습니까.축사만 지어주면 내가 알아서 키우겠다고 설득했지요. 목장 부지가 문제였는데, 마침 집안에 이전이 안된 땅이 2500평 가량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형제(남편은 7형제 중 다섯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저희가 어머님 모시고 이곳에서 목장을 하겠으니 땅을 주세요하고 요청했어요. 다행히 모두가 저희 뜻을 받아주셨어요. 그 땅이 바로 이 부지예요.-처음 젖소 몇 마리로 시작했습니까.1997년 송아지 5마리로 시작해서 지금은 80두 정도의 젖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큰 소가 아닌 송아지를 키우면서 사육 경험을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지금은 남편이 목장을 운영하고, 저는 유가공공장과 체험을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목장 운영만으로도 꿈을 이룬 셈인데, 유가공공장을 하면서 체험목장까지 업그레이드하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2006년 무렵에 임실군이 치즈클러스터, 치즈테마파크 등 사업을 진행했어요. 그 때 원유 납유 뿐 아니라 낙농가들이 직접 유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동기 부여 프로그램도 내놨는데, 그것이 치즈생산전문가과정이예요. 아무나 과정에 참여할 수 없고 낙농을 하고 있는 농가가 1순위였어요. 전남 순천대에서 과정을 수료했는데, 당시 15명이 수료했지요. 그 중 저를 포함해서 절반 정도가 유가공공장을 창업, 운영하고 있습니다.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원유 생산량이 최고점에 달하면서 원유가 남아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정부는 우유 감산정책을 통해 젖소를 강제 도태시키는 한편 유제품 개발에 나섰다. 이지혜 대표는 이 때 유가공 생산 기술을 배워 2010년 영농조합법인 대한목장유가공을 창립한 것이다.-유가공 쪽에 눈을 돌린 이유가 있는가요.낙농육우협회 여성분과 사무장을 맡는 등 안팎으로 열심히 일하고 배우고 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FTA 때문에 1차산업의 위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미리 2차3차산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현실에 안주해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고, 이룰 수도 없다는 생각이 저를 유가공공장 창업으로 이끈 겁니다.-남편은 어떤 입장이었는가요.많이 걱정했지요. 유가공사업에 뛰어든 후 힘든 일이 너무 많았지만, 제가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남편이 있었기에 극복하고 좀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남편이 너무 고마워요.-유가공공장에서는 어떤 제품을 생산하는지요.요구르트, 자연치즈, 아이스크림 등을 생산하고, 생햄 가공도 하기 위해 생햄 숙성실도 만들었습니다. 이들 제품들은 HACCP인증된 청결한 위생시설에서 체세포, 일반세균을 자체 기준(체세포 20만 이하, 일반세균 1만 이하)에 맞춰 생산됩니다.-언제 가장 힘들었습니까.2012년 초에는 자금 사정까지 겹치며 너무 힘들었어요. 주변의 멘토, 친구들이 도와줘서 용기를 낼 수 있었죠. 그 분들은 저에게 금융 지원도 아끼지 않았지만, 제가 정신적으로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어요. 내가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이때 마침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역외보육업체로 선정돼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재단에서 제품개발과 판로, 세무, 회계, 예산, 홈페이지 제작, 포장 디자인 등에 대한 교육 지원을 해주거든요. 창업 초기 기반에 대한 교육 지원을 받으니까 마음이 든든해지더라구요.-대한목장유가공은 목장과 유가공공장 모두 HACCP 인증을 받았고, 친환경 무항생제 제품 인증, 낙농진흥회 체험목장 인증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사육하고 관리합니까.저희 부부는 동물이 행복해야 사람도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고 목장과 유가공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유제품의 품질은 원유를 생산하는 젖소의 건강한 사육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저한 사양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목장을 맡고 있는 남편(조봉수 대표)은 사양관리 기준에 따라 적정량의 사료를 먹이고, 태어날 때 개체마다 타고난 능력에 맞게 키우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무리해서 인위적으로 착유량을 늘리려고 하는 것은 동물학대라고 생각해요. 사육장에는 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에 깔짚을 깔아주는데, 저희는 일반 낙농가 대비 1.5배 정도 더 많은 깔짚을 사용한다고 자부합니다. 최대한 안락한 환경, 자연스러운 사육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씁니다.-체험목장 운영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2011년부터 시작했습니다. 1:1젖소분양프로그램, 치즈만들기, 요구르트만들기 등 다양해요. 앞으로는 소시지 체험 프로그램도 할 계획이예요. 치즈 제조 과정에서 나오는 유청(치즈 물)은 영양분이 풍부해요. 이것을 먹여 키운 돼지고기로 소지지를 만드는 것이지요. 낙농진흥회 체험목장은 도내에 2개가 있는데, 목장을 하면서 유가공체험을 하는 곳은 저희 대한목장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임실에 일반 체험목장이 4개 정도 운영되고 있습니다.-체험목장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요.유치원과 어린이집 원생들이 주를 이루는데, 연간 평균 6000명 정도가 다녀갔습니다. 임실과 완주, 전주, 군산 등 도내는 물론 타지역에서도 오고 있습니다.-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합니까.낙농체험학습 기본 프로그램은 다양합니다. 도시나 농촌이나 모두 목장을 접하기 힘든 여건이니까 아이들이 젖소들에게 건초를 주고,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는 체험을 진행합니다. 우유를 직접 짜보는 착유는 동물학대 시비도 있지만 내년부터 진행할 생각으로 준비중에 있습니다. 치즈를 직접 만들어보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먹기만 했던 치즈를 아이들이 직접 만들면서 느끼고, 먹고 하는 활동이죠. 유가공공장을 둘러보는 시간도 갖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보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연에서 배우는 프로그램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 가장 인기 있습니까.모두 좋아하지만 치즈만들기와 요구르트만들기는 특히 인기있습니다. 직접 치즈쿼터를 자르고, 뜨거운 물에 치즈를 늘려 스프링치즈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신선한 원유로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을 만들고요. 작은 손으로 조물락거리며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이 직접 느끼는 교육 효과는 매우 크다고 생각해요.-유치원 등과 결연, 1:1 젖소분양시스템을 구축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시스템인가요.유가공공장을 가동해서 생산한 저희 요구르트를 공급하려면 소비자들에게 어떤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제가 만든 좋은 요구르트이니 드세요 라며 소비자에게 접근하기 보다는 저희 요구르트를 마실 수밖에 없는 동기부여를 제공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유치원 친환경급식을 생각했고,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젖소 한 마리를 키워 요구르트를 마시도록 하는 시스템을 착안했습니다. 실제로 마케팅에 나선 결과, 50여 개 유치원 등 시설이 제 생각에 동의해 젖소를 1마리씩 분양받아 우유요구르트를 일반 가격보다 훨씬 저렴하게 공급받고 있습니다. 분양 받으면 어린이 이름이나 가족 이름으로 젖소 이름을 만들어줍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저희 친환경요구르트는 현재 전주, 군산 등 도내 100곳 이상의 유치원, 어린이집 등에 공급되고 있습니다.-이 대표께서는 단순한 원유 생산납품에 그치던 목장에서 유가공제품 생산 및 유통, 체험목장까지 123차산업을 아우르는 6차산업 모델을 구축했다고 생각합니다. 6차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서울에서 살던 제가 낙농을 하겠다고 할 때 주변의 반대, 자금난, 판로 걱정 등 어려움이 너무 많았지만 현재로서는 제가 생각했던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했지만, 저는 운이 좋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한 임실지역 10여개 유가공공장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낙농인이 목장을 하면서 2차, 3차 산업 분야까지 성공적으로 진행해 나가기란 너무 힘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목장은 규모화하고, 유가공 쪽은 전문지식을 갖춘 전업인이 맡아 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봅니다. 6차산업이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요.-임실이 낙농과 유가공 치즈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소비자들이 치즈를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조만간 대한목장치즈아카데미센터를 출범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일반 가공치즈가 아닌 고급 숙성치즈를 만드는 아카데미 과정을 만들어 고급 치즈 소비층과 좀더 가깝게 소통하는 겁니다. 소비자들이 치즈의 진가를 알고, 직접 자기 치즈를 만들어 먹는 환경이죠. 치즈도 문화 교육적 접근을 해야 판매가 촉진된다고 믿습니다. 퇴직자들이 귀농해서 각자 독특한 숙성치즈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는 구조도 만들어야 합니다. 숙성치즈를 만드는 가공장이 많아지면 임실 인구도 늘고, 경제도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실군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숙성치즈 만드는 가공장이 많아지면 숙성실과 판매점, 음식점, 문화공연장을 세우고, 치즈를 주제로 한 축제도 엽니다. 이런 것이 이뤄질 때 비로소 성공적인 6차산업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한 말씀 더 덧붙인다면, 저는 충북 영동에서 운영되는 와인숍에 제가 생산한 치즈를 공급한 적이 있습니다. 역발상으로, 제가 운영하는 치즈숍에 영동이나 무주 사람들이 와인을 팔러 오도록 하는 것도 구상하고 있습니다.-향후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낙농, 유가공의 저변을 확대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진로체험교육장 운영 계획을 갖고 있는데, 이는 교육계 등 당국의 관심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축산, 낙농 현장도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희같은 경우는 아들 모두 낙농과 유가공 일을 잇기 위해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 낙농가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낙농과 축산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어야 낙농의 지속발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지혜 대표는 아들 치료 위해 남편 고향으로 귀촌, 낙농 매력에 '푹'고향이 충청도인 이지혜 대표는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성장, 사실상 서울 토박이다. 임실 지사면이 고향인 조봉수 대한목장 대표를 만나 결혼해 쌍둥이 아들 대한씨(24)와 민국씨를 두었는데, 신생아 예방접종하러 병원에 갔다가 날벼락같은 말을 들었다. 큰 아이 대한이가 발육이 느린 것 같아 의사에게 증상을 설명했더니 뇌성마비가 의심된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대한씨를 데리고 서울대병원 등 대학병원 다섯 곳을 전전했다. 1994년 공기좋은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재활에 전념해 보라는 의사 조언에 따라 남편 고향으로 내려왔다. 대한이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지극 정성을 다했다. 대한씨는 15개월만에 걸을 수 있었다. 말도 잘했다. 1세 이전에 조기 발견, 뇌를 자극하는 재활치료를 계속한 결과였다. 첫째 대한씨는 현재 군대 생활을 하고 있다. 둘째 민국씨는 한국농수산대학 낙농학과를 올해 2월 졸업했다. 부모를 도와 목장과 유가공공장 일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아들 둘이 낙농 가업을 이어가게 됐다며 좋아 한다.애초 이 대표 부부는 대한씨 병세가 호전되면 서울로 올라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농촌 생활에 푹 빠졌다. 낙농업을 결심한 것이다.이 대표는 매사가 적극적이다. 서울에서 성장, 농사를 몰랐지만 특유의 적극성을 발휘해 목장일을 했다. 임실군이 치즈생산전문가과정을 진행하려할 때는 가공산업에 희망이 있다고 확신, 전남 순천까지 장거리 통학을 하며 2년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유가공공장을 창업하고, 판매의 어려움을 친환경요구르트, 체험목장, 젖소 1:1분양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극복해 냈다.이 대표는 축산의 꽃은 낙농이고, 낙농은 과학이라고 말한다. 젖소의 생리를 정확히 알아야 고품질 우유를 차질없이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대한목장 유가공은 가족 경영체제다. 남편 조봉수씨가 목장, 유가공 및 체험목장 운영은 이 대표가 맡고 있다. 아들과 조카들이 근무한다. 이 대표는 대한목장유가공에 새로운 가족이 생기게 됐다며 즐거운 표정이다. 얼마전 퇴직한 큰 형님 내외가 귀농, 조만간 목장 일에 본격 합류하기 때문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4.12.09 23:02

8년간 전북대학교 이끈 서거석 총장 "끊임없는 변화와 개혁 통해 대학 자신감 키웠죠"

서거석 전북대 총장(60)이 8년의 임기를 마치고 10일 퇴임식을 갖는다. 직선 총장으로 8년을 꼬박 채우며 재임기간 전북대 위상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에 퇴임을 앞둔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지난 4일 대학 총장실에서 만난 서 총장은 “8년간 장기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는 느낌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서 총장은 “전북대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보겠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어떻게 보면 길고도 아득한 시간이지만 번민과 고뇌보다 즐거움과 보람이 더 컸기에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 것 같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배려, 애정 어린 비판과 조언 덕분에 두 차례의 총장직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며 밝게 웃었다.-2006년 말 취임 후 지난 8년을 전북대의 ‘성장 도약기’로 평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과거 거점 국립대라는 간판에 만족하며 현실에 안주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대학의 위상도 7~80년대 5위권에서 2000년 중반에 40위 밖으로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대학 경쟁력 향상 방안을 마련하고 교육과 연구, 학생 취업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었고, 그 결과 대학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0위권으로 올랐습니다. 전국 대학평가 담당자들은 최근 20년간 한강이남에서 가장 발전한 대학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취임 초기와 지금의 대학을 비교할 때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하나만 꼽는다면.“자존심의 회복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교육과 연구, 행정서비스, 학생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본분을 다할 때 대우받을 수 있는 분위기로 바꿨습니다. 패배의식과 좌절감에서 벗어나 구성원 모두가 합심하면 우리도 한국을 대표하는 명문대열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고 봅니다.”-그런 자신감은 결국 대학이 경쟁력을 갖게 됐다는 것인데요,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고 보는지요.“대학 경쟁력의 핵심은 교육·연구의 경쟁력입니다. 그동안 우리대학은 다른 대학에서 좀처럼 하기 힘든 파격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교수·연구 분야의 시스템을 대폭 손질했습니다. 교수들이 변해야 대학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승진 요건과 재임용 요건 강화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연구 실적이 부족하면 더 이상 교수직을 유지할 수 없도록 하는 ‘퇴출제’도 국립대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일부에서 구성원들과 소통에 소홀하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있는데.“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누구나 싫어합니다. 그러나 변화와 개혁은 총장 한 사람만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매학기 교수 순회 간담회를 열었고, 학생들과 끝장 토론을 갖기도 했습니다. 소통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참 열심히 했다고 자부합니다.”-총장 재임기간 어려웠지만 참 잘했다는 일 하나를 내세운다면.“익산대와의 통합입니다. 처음 익산지역 주민들과 익산 정치권에서 통합을 강하게 반대했던 사안입니다. 1년에 걸쳐 주민들을 직접 설득하고, 교수들과 많은 간담회를 통해 동의를 이끌어냈습니다. ”-이루지 못한 것 중에서 특별히 아쉽게 여기는 게 있는지요.“계획을 세운 것 모두 다 유치했으나 유일하게 약대를 유치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약대 신설을 인구비례에 의해 정하면서 전북지역이 제외됐습니다. 약대가 설립되더라도 전북지역 학생만 입학하는 것도 아니고, 약대 졸업생들이 전북에서만 활동하는 것도 아니라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아쉽습니다.”-향후 전북대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저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라면.“전북대가 유치한 4대 대형연구소에 기대를 걸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5번째로 설립된 고온플라즈마응용연구센터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인수공통전염병연구소, 대학 최대 규모의 식물공장을 보유한 LED농생명융합기술연구센터, 그리고 미국 최대 규모의 연구소와 공동으로 설립한 로스알라모스연구소-전북대 한국공학연구소 등은 세계에 내놓아도 경쟁력 있는 연구소들입니다. 연구소 운영이 본격 궤도에 오르면 지역 성장동력 산업은 물론이고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후임 총장 혹은 대학 구성원들이 그간의 성과를 더욱 발전시켰으면 하는 게 있다면.“말씀드린 것처럼 학사 전반에 대한 제도와 시스템은 전국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될 만큼 앞서 있습니다. 독창적인 이 제도들을 다른 대학에서도 도입하고 있어 차별성이 없어질 수 있습니다. 업그레이드를 통해 안정적·지속적으로 발전시켰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들인 많은 공이 방심하면 한순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지역민들과 지역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도 많을 텐데요. “대학은 지역발전의 싱크탱크가 되어야 합니다. 대학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분야 등을 총 망라한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상주하는 곳입니다. 전북대만 해도 1100분의 교수들이 있고, 지역발전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매년 5~6000명씩 나옵니다. 이분들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지역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도민들이 이런 지역대학에 전폭적인 지지와 애정을 보내줘야 합니다. 지역 주민이 외면하는 지역대학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지역사회, 특히 자치단체들이 대학과 지역발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학 발전을 위해 다각적인 지원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서울에만 장학숙을 세울 게 아니라 지역에 장학숙을 세우는 것도 그 하나입니다.”서거석 총장은 총장 임기를 마친 후 1년간 안식년을 갖고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복직할 생각이다. 1년의 안식년 동안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구 겸 충전의 시간을 가질 계획이란다.● 달라진 전북대 위상- 잘 가르치는 대학 '1위', 각종 평가 잇단 순위권전북대 곳곳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전국 몇 위’ ‘세계 몇 위’라는 자랑이 쏟아진다. 대학 구성원들은 물론, 지역 거점 국립대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갖게 할 만한 ‘숫자’들이다. 평가기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종합적으로 국내 10위권 든 평가들이 많다. 국립대 1~2위를 다투거나 세계 대학평가에서 Top10 이내로 진입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으로 좌우되는 대학에 대한 대외평판도 점수를 제외하고, 교수의 연구실적·교육여건·국제화지수 등 대학경쟁력의 실질적 요건만을 기준으로 하면 전남대·충남대는 물론 경북대·부산대를 앞질렀다는 게 전북대의 홍보다. 인구, 경제력, 산업체 등 전북보다 5~6배 우위에 있는 부산지역의 대표 대학인 부산대학을 앞선 것을 두고 대학측은 전북에서 부산을 앞서고 있는 기관이 어디 있느냐고 자랑한다. 전북대는 또 올해 아시아대학평가에서는 87위로 아시아 Top100에 진입하기도 했다. 서 총장 취임 후 2년 만에 세계 수준의 논문이라 할 수 있는 SCI논문 증가율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으며, 이후 교수 1인당 논문수와 연구비, 연구비 총액에서 잇따라 국립대 1위를 기록하면서 연구 실적도 2배 이상 높아졌다. 교수 논문의 질적 수준 평가인 라이덴 랭킹에서도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연속으로 국내 종합대학 Top5에 들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학부교육을 선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잘 가르치는 대학’ 평가에서 전국 1위를 차지했고, 향후 5년간 지원되는 대학 특성화 사업도 전국 1위였다. 350억 원을 투입하는 이 사업에는 34개 학과에서 학생 8500명이 혜택을 받게 된다. 학생 만족도 전국 1위 평가도 받았다.

  • 기획
  • 김원용
  • 2014.12.08 23:02

시대를 노래하는 소리꾼 남상일 "판소리 대중화, 소리꾼부터 다가가야 관객이 답합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전주의 조소녀 명창 연습실에서 소리 잘하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제 또래의 여자 아이들 틈에서 유독 자신감 있게 소리하는 그 아이가 눈길을 끌었다. ‘타고난 국악 재목’이라고 했다. 그 뒤로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당당하게 소리하는 것을 가끔씩 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지역방송사의 국악프로그램에 얼굴을 내밀더니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창극단 단원이 되어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아 무대를 석권(?)했다. 국악계 안팎에서 일찌감치 부터 알려졌던 그의 이름이 대중들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8년 TV의 시사뉴스 프로그램 뒤에 이어지는 ‘시사난타’란 코너에서다. 판소리로 담아내는 그의 시사풍자는 시청자들을 들썩이게 했다. 판소리 실력에 입담, 거기에 연기까지 겸비한 재능의 힘이었다. 소리꾼 남상일씨(36). 국악인으로서는 드물게 팬 카페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던 그는 지난해 초 10년 동안 몸담았던 국립창극단을 나왔다. 국악대중화를 실천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프리랜서(?)가 된 후 그의 활동은 더 활발해져 종횡무진, 무대의 경계는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 수많은 무대가 그를 찾고,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이 그를 앞세웠다. 그의 이름에 ‘만능’ ‘재주꾼’ ‘국악계의 싸이’ 등의 별칭이 붙었다. 대중들은 환호했으나 명창으로 성장을 기대했던 국악계에서는 우려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제식 교육의 질서가 여전히 확고한 판소리 판에서 보자면 그는 여지없이 이단아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경계와 우려에 마음 쓰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다양한 무대에 화답하고, 다양한 장르와 결탁(?) 했으며 대중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몸을 낮추어 다가갔다. 소리꾼 남상일의 길은 달라졌을까. 궁금했다. 인터뷰 시간을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은 분주했다. 11월에는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는 그를 12월 첫날 서울 예술의전당 커피숍에서 만났다. 서른 중반을 넘겼는데도 얼굴에 장난기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남아 있다. “이제 명창이 되려는 꿈은 접었느냐”고 물었더니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금세 진지한 답이 돌아왔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자면 저는 명창이 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50대 60대가 되어서도 ‘명창’의 기준이 오늘과 같을까 생각해보면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소리를 하고 있는 한 시대와 소통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거든요. 그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명창이라면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아요.”그는 국악, 그중에서도 판소리의 대중화를 꿈꾼다. 그는 갈 길이 멀지만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30대를 이 길 위에 온전히 놓은 이유다. -하루도 쉴 날 없이 공연과 강연이 이어지면 소리공부할 시간이 없겠군요. 소리꾼으로서는 조바심이 생길 법 하겠는데요. “공연도 그렇지만 요즈음엔 행사나 특강에 초대되는 일이 많아요. 지칠 정도로 일상이 바쁘긴 한데 그렇다고 소리공부를 등한시 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연이나 특강 준비과정이 소리 공부거든요.”-특강이 부쩍 많아졌다고 하시는데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나요. “판소리 이야기죠. 우리 소리에 관심이 많아진 것은 분명한데 여전히 판소리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잖아요. 그런 인식을 깨고 싶어서 우리 소리를 재미있게 흥겹게 들려주고 이야기 하는 거죠.“-관객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제가 어쨌든 방송에 자주 나오니까 일단은 친근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보다 소리도 잘하고 멋진 분들이 적지 않지만 제가 하는 이야기나 소리는 그 친근감 덕분에 훨씬 더 흡인력이 큰 것 같더라고요. 그럴 때는 방송 출연이 국악대중화를 위해서 의미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죠.”-작년 초에 국립창극단을 그만두었는데, 활동은 기대했던 만큼 이루어지고 있나요.“넘치고 있죠.(웃음) ‘물들어올 때 배 띄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지금이 제게는 그 때인 것 같아요. 30대 소리꾼으로서 할 수 있는 일,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여유로워질 겨를이 없어져요.”-국립창극단에서는 작품마다 주인공을 도맡을 정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었지 않습니까. 그만큼 그만두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돌아보니 단원 생활이 어느새 10년이 되었더라고요. 창극단 활동도 좋지만 제가 추구하는 길을 함께 병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어요. 외부 일이 많아지면서 제 활동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개인활동에 대한 비판도 있어서 더 이상 직장에 누가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또 한쪽을 놓아야 그 한편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컸고요.” -남 대표의 활동을 둘러보니 대중들에게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시사난타라는 방송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더군요. 방송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고등학교 때 방송 고정으로 처음 출연했는데 대학 시절 국악프로그램 진행과 공연 등으로 출연이 잦아졌어요. 그렇다보니 시사뉴스 프로그램과 인연이 닿았는데 개인적으로도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판소리로 세태를 풍자하는 코너였는데, 시대 상황이 판소리 사설이 만들어진 세태와 어쩌면 그렇게 닮아있는지 저도 놀랐다니까요.”-대본도 직접 썼나요. “주제를 작가가 알려주면 판소리에서 맞는 대목을 제가 골라서 전해주는 방식으로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딱딱 들어맞는 대목들이 있는지…. 치열하게 시대를 통찰해낸 판소리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 공부가 많이 됐죠.”-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면서 국악인 남상일에 대한 인지도가 더 높아졌는데 그럴수록 국악계의 우려는 더 높아지는 것 아닌가요. 좋은 재목 잃은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도 있던데요. “애정 있는 분들의 조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있습니다. 더러는 좀 억울한 비난도 있지만 제가 소리꾼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소리꾼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믿고 선택한 것이니 우려나 비난까지도 감수해야겠다는 마음이에요.”-애니메이션 더빙 작업에도 참여했던데요.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라는 작품인데 판소리는 이 작품에서 소설이 가진 해학을 재현해내죠. 도창과 주인공 역을 맡았는데,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었어요. 다른 장르를 통해 판소리를 알릴 수 있으니 그 역시 좋은 기회죠.”-이야기를 듣다보니 지금 실천하는 작업의 중심이 온전히 판소리에 있는 것 같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지금까지 완창회를 한 번도 안하셨다면서요. “완창을 못해서는 아니고요. 반창은 여러 번 했는데….(웃음) 작년 제야에도 안숙선 선생님과 중앙대 한승석 선생님과 수궁가 완창을 나누어서 했어요. 이번 주말에도 내년에 프랑스 공연을 앞두고 안숙선 선생님 모시고 수궁가를 공연합니다.”-판소리판의 질서로 보아서는 완창회의 비중이 크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저는 완창무대가 갖는 의미를 크게 두고 있지 않아요. 많은 선생님들이 완창이야말로 자신과의 싸움이고 이 과정을 통해서 한 단계 성숙해진다고 말씀하시죠. 맞는 말씀인데 제가 생각할 때는 완창이 의미는 있지만 짧은 소리라도 대중들을 감동시키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예전에 조상현 선생님도 5분짜리 10분짜리 소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어요.”-그렇다면 문화재 이수나 전수에도 관심이 없었겠군요. “오래전부터 그런 부분에는 관심도 없고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능력도 그렇고요. 또 소리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제 나름의 상처도 안았고. 그래서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하는 방식을 혼자서 터득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제가 소리꾼으로서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바탕이 되었던 것 같아요.”-안숙선 명창과는 특별한 사제지간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면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입시때 선생님이 면접을 보셨는데 제게 소리 말고 다른 것 뭘 할 줄 아느냐고 물으셨어요. 가야금도 하고 춤도 춘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춤을 추어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음악도 없는데 어떻게 춥니까’했더니 ‘내가 장단 쳐주마’하셔서 춤을 췄죠. 입시인데도 정말 즐거웠어요. 운 좋게 선생님 제자가 되었죠. 적벽가와 수궁가를 선생님으로부터 2년씩에 걸쳐 받았습니다.”-선생님을 각별히 존경하는 특별한 배경이 있습니까.“선생님은 다른 분들과 많이 다르시더라고요. 늘 창극에 대해 판소리에 대해 고민하시거든요. 당장 개인적인 사사로운 고민이 아니라 우리 음악의 큰길을 고민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런 부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남대표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조언을 해주십니까.“걱정이 많으실겁니다. 주위에서 많은 소리를 들으실테니까요. 그래도 정작 제게는 말씀을 아끼시지요. 그래서 저는 제자를 믿고 ‘너 하는데 까지 해보라’는 가르침을 주시는구나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용기를 낼 수 있고요.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이어가는 이 작업이 판소리를 위한 일이라는 것이고, 이 길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겁니다.”-요즈음 이루어지는 창작판소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딱히 창작 판소리를 즐겨하는 것도 외면하는 것도 아닌데, 분명한 것은 창작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판소리 창작도 결국 정통판소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아예 음악적 고유한 틀까지 무시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저도 가끔 작창을 의뢰를 받는데, 작업을 하다보면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그대로 따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저는 창작판소리도 정통판소리의 선율을 잘 지키면서 시대적 의미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통판소리가 가진 요소를 그 안에 다 녹여서 제대로 살려낼 수 있어야 좋은 창작판소리라고 할 수 있겠죠.”-남대표가 만든 창작판소리 ‘노총각 거시기가’는 많이 알려져 있던데요. “무대에서는 정통판소리를 주로 많이 하는데 제가 드물게 작업 한 것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창작판소리로는 유일하게 국악관현악곡으로 편곡 됐어요. 그 덕분에 전국의 많은 관현악단과 협연을 해봤습니다. 호응도 높고 저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중심에 두는 것은 역시 정통판소리예요.”-즐겨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적벽가를 제일 좋아하고 즐깁니다. 박봉술 바디를 안숙선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는데 제 소리와 잘 맞는 것 같아요.”-남대표의 소리 특징이 있던데요. 다른 소리꾼에 비해 소리가 맑고 깨끗한데다 상청이 강하고…. 근데 소리꾼으로서는 거친 목이 더 환영받지 않나요. “제 소리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합니다. 웅장함과 힘이 부족하죠. 소리꾼에게는 몸이 악기인데 몸집이 작으니 그런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다행히 요즈음은 음향이 좋아서 제 소리도 살 수 있게 됐죠.(웃음)”-소리를 해오면서 위기는 없었나요. “이상하게 변성기도 겪지 않았어요. 저는 소리할 때가 제일 편하고, 딱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거든요. 부모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죠.”-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시련도 없었습니까. “있었겠지만 지나고 나면 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가장 큰 시련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충격이에요. 아버님은 양복점을 운영하시면서 제가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2006년에 갑자기 암이 발명했는데, 이미 늦었더라고요. 1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는데, 1주일 전까지 제가 하는 공연에 늘 동행하셨어요. 아버님 항암제는 저였거든요.”-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그런 질문이 제일 난감한데, 언제부터인가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 철학이 되었어요. 아마도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만 세상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 얻은 생각일겁니다. 그래도 굳이 갖고 있는 뜻이 있다면 나이가 들면 좋은 창극을 만들 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국악스타를 만들어내는 일에도 앞장서고 싶어요. 지금 제가 하는 이 다양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을 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남상일씨는 전주 출생, 국악 신동서 '국악계 싸이'로남상일씨는 올해 서른여섯 살, 젊은 국악인이다.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예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고향을 떠났다. 본격적인 소리 공부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시작했지만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장난감보다 TV에서 나오는 우리소리 우리가락을 더 좋아해 ‘열광(?)하는 특별한 아이였다. 까닭 없이 울다가도 우리 소리가 나오면 울음을 그치고 따라하는 아들을 눈여겨 본 아버지는 아이의 소리를 녹음한 테이프와 편지를 방송에 나오는 조상현 명창에게 보냈다. 뜻밖에도 명창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무릎장단에 맞춘 ‘사랑가’와 ‘이별가’를 녹음한 테이프와 ‘이대로 부르게 하라’는 편지가 들어있었다.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그 테이프로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소리를 익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전주의 조소녀 명창의 문하에 들어가 소리를 배웠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소리 공부가 재미있었다. 타고난 소리에 기질이 다분한 남상일은 어느 사이에 국악계가 주목하는 국악신동이 되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그에게 첫 시련이 닥쳤다. 국악경연대회 참여를 둘러싸고 뜻밖의 오해와 소문에 휩싸이면서 혼자 소리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지만 꿋꿋이 버텨냈다. 그때부터 독립군처럼 소리 공부를 했다. 전주예고에 들어가서는 학교의 자랑이 됐다. 동아콩쿨 1등 입상을 비롯해 각 대회를 휩쓸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가 ‘존경하는 스승’ 안숙선 명창을 만났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재능을 주목한 국악 방송 프로듀서들이 그를 불렀다. ‘시사난타’를 비롯해 시대의 언어를 판소리로 담아내는 시사방송 프로그램까지 가세해 그를 끌어들였다. 빼어난 판소리 실력에 입담 좋고 청중을 끌어들이는 흡인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는 길지 않은 동안에 국악스타로 섰다. 2003년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10년 동안 단원으로 지내면서도 작품마다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기쁨을 안았다. 그러나 국악 대중화를 위한 활동에 마음을 두고 있던 그는 창극단원으로서의 활동과 외부 활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10년 만에 사표를 냈다. 다양한 형식의 공연과 강연, 축제와 행사의 초청 등이 이어지면서 그의 실험은 날개를 달았다.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았으며 ‘국악계의 싸이’라는 별칭이 주어질 정도로 많은 대중들을 얻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명창 재목’의 외도(?)에 염려와 비판이 쏟아졌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며 ‘남상일 100분쇼’로 최고가 국악콘서트를 열어 화제를 모으고 다양한 장르의 무대와의 협업으로 국악 대중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판소리 마니아를 위한 완창회보다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재밌는 국악콘서트를 많이 열고 싶다는 그는 30대에 즐길 수 있는 이 작업을 할 수 있는 만큼 해볼 생각이다. 민속악연주단체인 ‘수리’대표와 젊은 소리꾼들이 주축이 된 ‘우리창극연구회’ 대표를 맡고 있다. 전국에서 그를 찾는 무대가 많아 휴일 없는 강행군을 하고 있지만 내년 2월에는 ‘남상일 100분쇼’를 다시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KBS국악대상(2012)과 한국방송대상 문화예술인상(2012) 등을 수상했으며 지난해에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로 선정됐다.

  • 기획
  • 김은정
  • 2014.12.04 23:02

[(39) 순창 (주)성가정식품] 느리게 담그는 '일품 장맛'…손가락 꼽히는 순창 장류업체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힐링문화가 사회전반에 확산 되면서 우리 식탁에서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던 전통음식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그중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김치와 고추장된장간장 등 발효식품은 항암효능을 비롯해 혈압강하작용, 혈전 용해 효과 등이 알려지면서 특히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그러나 사회적 트렌드에 발맞춘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아쉽게도 김치와, 고추장, 된장 등 발효식품은 전통의 맛 보다는 대기업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지는 가공 제품에 급속히 시장을 잠식 당하고 있다.특히 비교적 담그는 시간이 짧고 과정이 간단한 김치와는 달리 오랜 시간이 걸리고 담기 복잡한 고추장된장 등 장류는 이제 5060대 어머니 세대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담그는 전통장류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게 현실이다.어쩌면 머지 않아 우리 콩고추로 느리게 담그는 전통 된장 고추장을 식탁에서 맛보기가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이런 상황에서도 고추장으로 전국적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순창에서 전통방식 그대로 장인의 손길로 고집스레 고추장, 된장, 간장을 담고 있는 작지만 강한기업 (주)성가정식품(www.damga.co.kr)을 소개한다.△대를 잇는 전통의 옹고집 장맛성가정식품은 1996년 설립되어 지금은 20명의 직원과 위생적인 최첨단 생산 시설을 갖췄으며 자본금 14억원을 자랑하는, 순창에 있는 전통 장류업체 중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유망한 기업이다.이처럼 단기간에 성가정식품의 장류제품들이 인기를 끌며 기업이 성장한 이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순창의 맑은 물과 깨끗한 자연환경 연평균 기온 12.4도, 습도 72.8%, 안개일수 77일 이라는 발효에 매우 좋은 자연환경에서 장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대를 이어 고집스럽게 전통의 방식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 성가정식품의 식품에 대한 신뢰의 철학이 가장 큰 이유다.성가정식품의 모든 제품은 엄선한 국내산 농산물로 엄격한 품질관리 및 집안대대로 내려오는 전통방식 그대로 장을 담가 공장장류와는 비교가 안되는 장기간 발효와 숙성을 거쳐 보다 깊고 풍부한 시골 할머니의 손맛을 느낄수 있다.특히 주요 원료인 고춧가루와 대두, 찹쌀 등은 순창 지역의 농가와 계약재배한 원료만을 사용해 순창고추장만의 맛을 살리고 있다.△전통에 과학을 더한 맛성가정식품은 순창만의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고 있다.그러나 전통의 방식이라고 해서 대충 눈대중으로 제품을 만든 다거나 비위생적 방법을 사용 하지는 않는다.실제 성가정식품은 2010년 식약청으로부터 HACCP(위해요소 중점관리기준)시설 지정 및 2011년 식품안전경영시스템 ISO22000 인증을 획득했다.성가정식품은 이처럼 전통에 과학을 더해 믿을 수 있는 위생적 제품을 생산해 구수한 어머니의 전통 장을 원하는 중장년 소비자 층은 물론 믿을 수 있고 영양만점의 식품을 원하는 젊은 층까지를 아우르며 시장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3無 정신으로 만든 제품성가정식품의 시작은 현재 김대표의 어머니께서 순창성당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고랭지 배추로 김치를 담그는 봉사에 참여를 한 것이 시초가 됐다고 한다.이후 신부님의 권유로 장류를 취급하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와 현재는 대를 이어 2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정성을 들여 전통식품 개발과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특히 김대표는 어머니의 식품에 대한 철학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장류 제품들은 3무 원칙에 따라 합성보존료, 화학조미료, 인공색소를 첨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균 18개월 이상 3년 미만의 장기 발효 숙성을 거쳐 제품을 만드는 등 전통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다.이 때문에 소비자들이 신뢰할 수 있고 한번 성가정식품의 전통장류를 맛본 고객들은 반드시 다시 찾는 단골이 된다고 한다.실제 성가정식품은 설립단계부터 성장을 이어와 지금은 자본금 14억원으로 전통장류식품 업체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또 2013년도 전국 농식품 파워브랜드대전에서 기관장 수상을 수상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장아찌절임류로 제품 다양화성가정식품은 전통장류 제조업체다.그러나 전통장류만을 만드는 식품회사는 아니다.성가정식품은 전통장류 관련식품으로 세대를 아우르고 더 나아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한 야심찬 꿈을 갖고 있는 회사다.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장류를 활용한 다양한 절임류 식품 생산에 나서 이제는 장류의 매출액 못지 않는 매출실적을 올리고 있다.그중에서 가장 큰 매출실적을 올리고 있는 제품은 국산깻잎에 한식간장과 국산 대파, 마늘 등을 버무린 양념깻잎이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성가정 양념깻잎은 100% 국내산 원료에 삼무원칙이 적용된 제품으로 최근 큰 인기를 끌고 있다이와 함께 무말랭이,더덕장아찌, 매실장아찌, 감장아찌, 취장아찌 등 장아찌류만도 11가지 제품이 넘는다.또한 최근에는 대상FNF(주), 종가집과 풀무원 계열사인 올가홀푸드(주), (유)우리농 등 회사에 제품을 납품하며 시장을 확대해 가고 있다.최근 성가정식품은 브랜드인 장을 담는 집안 이란 의미의 담家를 만들어 본격적 마케팅에 들어갔다.이제 담家는 이런 의미를 넘어서 제품 하나까지도 정성과 자연을 담아 옛 어머니의 사랑을 담는 기업으로 커가기를 원하고 있다.● 김종덕 대표 "국내산 식재료만 사용, 젊은 층 눈높이도 맞춰"한국인을 대표하는 맛은 장맛입니다. 성가정식품은 전통 장맛을 고집하며 전통 장류를 식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식품으로 만들겠습니다.(주)성가정식품 김종덕 대표는 어머니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방식으로 장을 담그기 때문에 화학조미료나 합성보존료 색소 등은 일체 첨가하지 않고 소금 또한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이 입증된 미네랄이 풍부한 신안 천일염을 사용한다고 말했다.김 대표는 요즘 아이를 둔 젊은 층의 엄마들은 식품의 맛보다는 건강에 좋은 믿을 수 있는 식품인지에 훨씬 무게를 두고 제품을 구입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젊은 층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국내산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 위생적 제품생산을 위해 최신 위생설비를 갖춘 생산동 및 냉장창고 5개를 신축해 최대한 위생적으로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김 표는 또노란빛을 띠는 시골 된장도 산소에 노출되면 갈변이 나타나는 시간이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발효공법에 많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이런 발효법을 거친 제품은 장맛이 깊어 끓여 먹었을 때 진하고 구수한 맛을 내 소비자들의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소개했다.

  • 기획
  • 임남근
  • 2014.12.04 23:02

[(45) 교과서 속 동학농민혁명] "농민군 정신 현대적 재해석, 미래지향적 내용 담아야"

1894년에 동학이라는 종교 집단을 중심으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의미, 영향, 그리고 명칭과 같은 기본적인 내용들까지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르다. 사실은 하나지만, 그 사실을 현재로 불러내는 사람의 관점이 새로운 진실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여럿 중에서 국가가 택한, 또는 수용 가능한 관점이 교과서에 실려 학교로 간다.교과서는 곧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잣대다. 여기에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시각을 형성시킨다는 점에서도 교과서의 서술 내용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해방 직후의 교과서와 동학난광복 직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4월까지는 교수요목기였다.미군정청은 1945년 9월, 60명을 위촉해 한국교육심의회를 발족시키고, 이를 통해 교수요목이라는 교육방침을 내놓았다.1954년에는 교육과정 시간배당 기준령이 공포됐고, 이듬해 8월에 정식으로 교과과정이 공포됐다. 이 시기를 1차 교육과정기로 구분하고 있다.이 무렵까지 사용된 역사 교과서들은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난으로 표현하고 있다.기본적으로 동학농민혁명과 같은 농민봉기는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고, 이 때문에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도 대체로 반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무엇보다도, 조선대한제국이 멸망하고 곧바로 제국주의 일본의 강압적 식민통치가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역사적인 평가를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정권 입맛 따라 바뀐 해석이 같은 시각이 수정된 것은 1963년, 제2차 교육과정이 나오면서부터였다.1973년(일반계 고등학교는 1974년, 실업계 고등학교는 1976년)까지 지속된 이 시기에, 역사교과서들은 동학난(란)이 아닌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들고 나왔다.왜 갑자기 동학난에서 동학혁명으로 점프한 것일까?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변을 정당화하기 위해 혁명이라는 개념을 빌려 쓰면서 그 역사적 정통성을 동학농민혁명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김한종 교원대 교수의 동학농민전쟁의 명칭과 그 의미(2005)라는 논문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국적 있는 교육을 표방하면서 대외항쟁사를 교육과정 속에서 많이 강조했다.이에 따라 자연히 동학농민혁명이 가진 반외세의 성격에 교육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70년대 중반부터 3차 교육과정이 시행되면서, 교과서상 명칭은 동학혁명운동으로 바뀌었다.이 역시 개념적으로 잘 다듬어진 용어는 아니었고, 반외세에 초점을 맞추는 교육 기조 역시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다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농민사회운동이자 농민전쟁과 같은 표현을 통해 반봉건, 사회운동적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2차 교육과정기의 교과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1980년대 시행된 4차 교육과정에서는 혁명이라는 표현이 빠지고 동학운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김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1212 쿠데타와 517 비상계엄 확대,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을 거쳐 집권한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구태여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혁명이라고 부를 이유는 없었다고 짚었다.이 시기에는 또한 서술 자체도 단순한 여러 민족운동 중 하나 정도로 간소화됐다.1987년 민주화를 겪으면서, 교육과정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됐고, 명칭도 동학농민운동으로 다시 바뀌었다. 명칭에 동학과 함께 농민이 나란히 놓이면서, 드디어 주체가 동학교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농민들이기도 했음이 교과서에서 인정된 셈이다.그리고 이 용어는 67차 교육과정을 지나 2009 개정교육과정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까지도 계속 쓰이고 있다.△ 혁명과 운동 사이에서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일단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이 국가적으로 공인됐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교과서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 사건을 표기하고 있다. 정부의 편수 지침에 따른 것이다.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소장은 그 원인으로, 현행 교과서 자체가 개화운동 및 독립운동 중심으로 집필이 이뤄지다보니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면 교과서의 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들었다.그는 혁명이라고 하면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는 개념인데, 운동 차원으로 보고 있다 보니 운동이라는 수준에 맞게끔 짧게 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결국 혁명이 되지 못한 운동은 갑오개혁의 부수적 요소 정도로밖에 서술되지 않는다.현행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 동학농민혁명을 별도 단원으로 두어 설명하는 것은 1종에 불과하고, 대부분 갑오개혁과 한 단원으로 묶어 설명하고 있다.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뭉뚱그리는 교과서도 있다.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가 수정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의 개편내용과 근대사 서술 비판(2006)이라는 논문에서 언급한 대로, 민중운동을 하나의 독립적인 주체로서 다루려고 하지 않으려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젊은이에 감동 주는 미래지향적 서술을배항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역사교과서 서술 내용의 새로운 모색(2012)이라는 논문을 통해 농민군이 지향했던 바나 실제로 보여준 행동 등을 들어, 교과서에서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09 개정교육과정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에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항목이 명시된 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이 같은 정신을 교과서를 통해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배 교수는 반봉건 반외세만 외치는 것은 이제는 의미가 없다면서 농민군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얘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미래지향적으로 깊이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이어 그는 위정자들이 약속을 외면하고 가렴주구하지 않도록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사회경제정치의 민주화를 언급했다. 이같이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미래지향적인 내용이 교과서에 담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북교육청 발간 동학농민혁명 교재 - 교과서로 제작한 첫 사례, 평등민주자주정신 주목전북도교육청은 지난달 초등학생용 및 중고등학생용 동학농민혁명 교재를 발간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학교 교재 발간은 처음 있는 일이다.초등학생용 교과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함께하는 동학농민혁명 등 크게 세 단원으로 구성됐다.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 단원은 평등민주자주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돼 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인권 교육과도 연계할 수 있다는 것이 도교육청 관계자의 설명이다.평등민주자주라는 세 가지 주제는 중고등학생용 교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세 번째 단원인 동학농민혁명이 이루려는 세상은 무엇인가요?라는 단원에서 이를 다루고 있는데, 평등을 시민의 저항권과, 민주를 지방자치와, 자주를 주체적자주적인 삶과 연결 짓고 있다.발간 작업에 참여했던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전국적으로 처음 만들어졌고, 자료나 내용도 전문가 및 교사들의 토의를 거쳐 완성돼 의미가 있다면서 새로운 시각을 많이 반영해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권혁일
  • 2014.12.03 23:02

[(44) 예술작품 속 동학농민혁명] "혁명정신 대중화 꾀할 기념비적 대형 작품 나와야"

모지도다 모지도다 우리 사또가 모지도다. 어린 것이 쪼금 잘못을 허였다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집장사령놈을 눈 익혀 두었다 사문 밖을 나가면 급살을 내리라 저런 매질이 또 있느냐 나 돌아간다 내가 돌아간다 떨떨거리고 나는 간다.남원에 부임한 신임 사또가 수청을 거부한 춘향에게 가혹한 횡포를 가하는 모습을 그린 춘향가 중 못 보것네 대목이다. 폭정을 가하는 탐욕스러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대한 민중들의 비난과 분노가 담겼다. 1894년 1월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했을 당시 농민군들이 춘향전 중의 사또를 비판하는 대목을 부르면서 쳐들어갔다고 한다.민중 안에서 오랜 시간 전래되며 그 생명력을 이어온 판소리가 동학의 함성으로 표현됐다고 진보성 박사는 분석했다. 인간다움을 갈망하던 농민군들의 강렬한 몸짓을 판소리와 연결시킨 것이다.판소리 예술로 까지 끌어올려진 당시 농민군의 함성이 오늘의 문화예술에 어떻게 투영되고 있을까.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로 음악연극무용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동학농민혁명을 기억하는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역사가 갖고 있는 무게에 비춰 여전히 미흡하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문화예술계에서의 관심이 거의 없었으며, 100주년 때 활발했던 작품활동도 그 후 잠잠해졌다. 2주갑을 맞은 올해도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는 게 학계와 예술계의 평가다.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변혁운동임에도 예술작품들이 너무 빈약한 실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세계화를 위해 예술 작품을 통한 혁명의 대중화가 또 하나의 과제가 되고 있다.△관립 예술단체 중심 한계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은 올해 전북지역 문화예술계에서 혁명을 소재로 한 창극, 마당극, 연극, 음악, 무용 등이 이루어졌지만 기대에 못미쳤다. 그나마 명맥을 이은 게 관립 예술단에 의해서였다.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이 7월 무명의 농민군을 그린 꽃불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무대에 올렸고, 도립국악원 관혁악단이 10월 칸타타 황토재 희망의 노래를 같은 장소에서 공연했다. 전주시립극단은 연극 녹두의 꿈으로 관객들을 만났다.또 전주시가 주최하고, 스토리텔링 문화그룹 얘기보따리(사)푸른문화가 주관한 가보세 갑오년, 전주성이 8월 전주한옥마을 특설무대에서 열흘간 진행됐다. 민간 차원에서는 10월 전주 경기전 앞에서 열린 모악 천하 대동제가 120주년의 의미를 실었다.또 사단법인 전북민예총이 2014 전북민족예술제 타이틀로 대한민국? 대한민국!을 걸고 120년 전 혁명의 역사를 주제로 내세웠다. 과거 동학농민은 현재의 서민이며, 이들의 희노애락을 예술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미래의 희망을 모색하는 자리였다.전시 쪽에서는 전북민족미술인협회가 2014년 정기회원전으로 7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들었다. 가보세 통일로의 전시회에는 27명의 미술인들이 120년 전,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들고 이 땅의 백성들이 사람사는 세상을 열고자 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열망을 가슴에 품고 침몰하는 세월호, 침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위에 희망의 돛을 달자에 동참했다.(사)전북민족미술인협회 10명의 작가들은 릴레이 개인전을 통해 혁명의 역사를 한국화, 유화, 판화, 담채화, 도예, 테라코타, 조각 등으로 보여줬다. 농민화가 박홍규 씨는 릴레이전과 별도로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동학혁명 120주년 기념 판화전 피노리 가는 길을 갖기도 했다.△전국 각지서 예술축제로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가 단순한 기념식에서 벗어나 예술축제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120주년을 맞아 전북에서뿐 아니라 동학농민혁명이 활발했던 전국 각지에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가 열렸다. 6월 충북 보은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120년 역사맞이 보은생명평화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회인 보은취회를 재현하고, 전국민족극한마당이 펼쳐졌다.극단 모시는사람들의 뮤지컬 들풀2는 동학을 소재로 한 올 무대 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성 있는 작품으로 꼽혔다. 6월 과천시민회관에서 올려진 이 작품은 2주에 걸쳐 5000명에 육박하는 관람객을 동원, 흥행몰이에도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들풀Ⅱ는 20년 전에도 관심을 모았던 작품으로, 뮤지컬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합류해 손질을 가했다.극단측은 사랑을 테마로 삼아 너무 무겁지 않게 접근한 것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OST에 대한 구입 문의가 이어질 만큼 관객들의 호응을 바탕으로 오는 8일 천도교 중앙총부 초청으로 무료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또 전남 무안을 배경으로 삼은 국악뮤지컬 파랑새 공연이 극단 갯돌에 의해 11월 무안군 승달문화예술회관 무대에 올려졌다. 남도 씻김과 신명의 원형을 현대적 어법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마당극, 민요, 놀이, 무예, 퍼포먼스, 풍물, 탈춤 등 전통연희를 결합시켰다.부산에서도 동학농민혁명은 숨을 쉬었다. 극단 새벽이 20년 전 공연을 손질해 발림극(몸짓과 손짓)으로 재연한 새야 매야를 무대에 올렸다.△영화드라마 통한 대중화도 과제다양한 장르에서 예술작품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20주년을 맞은 오늘에까지 대혁명의 역사에 턱없이 못미치는 문화예술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올 전북도립국악원과 전주시립극단의 동학농민혁명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부분 참여했던 김정수 전주대 교수는 100주년 때와 달리 120주년이 갖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작기도 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세대가 퇴장하고 젊은층의 무거운 주제에 대한 외면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가 기념공연의 감소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민주화 운동의 힘이 넘쳤던 100주년 때는 임진택 문호근 김명곤 등 서울에서 활동하는 인사들까지 동학쪽에 힘을 실어 모든 예술장르에서 기념 공연들이 활발했던 것과 대조를 보인 현실을 두고서다.이와 함께 관립 단체의 작품들이 대형 작품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단발성으로 그치는 데는 재정문제와 시스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도립국악원만 하더라도 회계연도가 1년 단위여서 2~3년에 걸쳐 대규모 작품을 만들기 어렵고, 창극관현악무용단 3개 단체가 각기 성과를 내야 하기에 협력을 통한 대형 작품제작에도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어렵게 무대에 올린 작품도 순회공연이나 상설공연을 할 여력이 없어 사장되는 문제가 있다고 분석했다.그는 또 기념비적인 작품이 아니라도, 작아도 알차고 진지하고 애정어린 작품이 계속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북도에서 운영하는 문예진흥기금 중 동학콘텐츠 관련 예산을 별도로 편성하거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지원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혁명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TV드라마영화 등 영상매체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영화로는 1991년 동학 2대 교주로 혁명에 참여했던 해월의 삶을 조명한 개벽(임권택 감독) 이후 특별하게 주목받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다.다만, 일본인 감독 마에다 겐지가 다큐멘터리 영화계획을 발표하고, 영화제작에 들어가 주목을 받았다. 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동북아뿐 아니라 온 세계의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깊은 의미와 진실을 알려주고자 한다고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

  • 기획
  • 김원용
  • 2014.12.02 23:02

취임 한달 임용택 JB전북은행장 "내실 경영, 국내서 가장 강한 은행으로 발전시킬 것"

김한 JB전북은행장 후임으로 지난달 취임한 임용택 은행장이 취임 한달을 맞았다. 전북은행 사외이사를 역임한 바 있는 임 행장은 그동안 은행의 세부 업무내용 파악과 향후 청사진 구상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한 전 행장 취임 당시 7조원대였던 전북은행 자산은 지금은 14조원대로 급격히 늘어나며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산규모를 갖게 됐다. 신임 임 행장으로부터 전북은행의 현 주소와 향후 운영계획 등을 들어봤다.-취임 한 달이 돼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이 되셨을텐데 전북은행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인가요.“지속되는 경기침체와 저금리 기조로 은행권의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는 금융환경 속에서도 전북은행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차별화 전략을 통해 많은 성과를 이뤄낸 저력이 무엇보다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저력의 밑바탕에는 ‘하면 된다’는 직원들의 열정과 전북은행을 성원해주시는 도민과 고객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전북은행도 다른 은행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수익구조인 예대 마진 등을 이용한 수익증대를 위한 사업포트폴리오의 다변화라는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또한 영업기반인 전북지역의 경제규모가 열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의 노령화 속도가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도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약점을 보완할 대책은 무엇인지요.“먼저 수익원을 다변화하기 위해 카드사업 부문을 강화해 나갈 계획입니다. 카드사업은 수익창출 효과가 높은 사업으로 타깃 고객을 전북지역 위주에서 수도권 및 중부지역 등 역외지역으로 확대하고 IBS(Information Based Strategy)를 통한 고객분석 역량 강화로 마케팅 효율성을 극대화해 나갈 계획입니다. 또한 영업기반 확충을 위해서 JB다이렉트 상품과 같은 비대면 채널 강화와 함께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수도권과 중부지역의 영업기반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최근 서울에 13번째 지점을 개점하며 외연을 확장하셨는데 향후 서울과 대전 등 다른 지역에 대한 추가 개점은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요.“현재까지 추진한 점포전략과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자금력이 풍부한 수도권과 대전권에 점포를 추가 개점할 예정입니다. 점포 형태는 임대료가 비싼 1층 대신 2층 이상에 개설하고 점포 면적도 기존 점포의 1/2 수준으로 줄이고 인력도 4~5명인 소형점포 위주로 운용해 비용을 최소화할 예정입니다. 은행권 전체적으로 보면 지점을 줄여가는 추세이지만 저희는 단순한 지점 수 축소보다는 지점의 역할과 기능의 변화에 더 주목하고 있습니다. 수도권 진출 관련 저희 은행의 근거지인 전라북도 지역의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역외진출을 계속 검토할 생각입니다.”-취임 당시 자산 증대보다는 내실있는 경영을 강조하셨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인지요.“전북은행은 2009년 총자산 7조2000억원에서 2014년 현재 총자산 14조원 대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지속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규모를 확보한 만큼 이제는 양적 성장보다는 내실있는 질적 성장이 이뤄져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위해 통합적인 리스크 관리 강화와 함께 자산 건전성 확보에 주력해 나갈 것 입니다. 또한 꾸준한 점포 효율화와 비대면 채널 활성화 등을 통해 경쟁력을 확대해 나가고 그룹사간 시너지 창출을 위해 광주은행 및 우리캐피탈과의 공동 마케팅 및 공동상품 개발 등도 적극 추진해나갈 방침입니다. 특히 최근에 출시된 우리캐피탈의 JB Auto Plus카드 등을 통해 계열사간 공통 고객대상으로 Cross-sell 기회를 넓혀 나가는 등 시너지 효과 창출 방안을 마련해 적용해 나갈 예정입니다.”-취임후 일선 현장을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느끼신 점은 무엇인지요.“전북지역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업들이 어렵고 현장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통계에서 볼 수 있듯이 전북의 워킹푸어가구는 6.3%로 전국대비 2배 수준이고 기업 1사당 연평균 소득은 전국평균의 1/3, 자영업 1사당 연평균 소득은 2000여만원으로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습니다. 향후 중소기업과 서민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정책과 방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안행부의 자치단체 금고 선정기준 강화로 최근 도내 자치단체 금고 수주전이 한층 치열해 졌습니다. 향토은행으로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향후 수주경쟁에서 어떤 전략을 펼치실 계획인가요.“지역내에서 조성된 자금을 지역내 중소기업 및 서민금융을 지원하기 위해 금고를 유치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역내 자금의 역외유출을 방지하고 지역내에서 금융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저희 전북은행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지원하되 자치단체와 전북은행이 서로 Win-Win 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합리적인 금고유치 전략을 추진할 계획입니다.”-고향은 전남이지만 전북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외가와 처가가 모두 전주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이 전북도청에 근무하셔서 전주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많은 친척들이 전주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전주는 저에게 포근하고 따뜻한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전북은행 발전을 위한 청사진은 무엇인지요.“앞으로도 정도경영을 기조로 우리의 체질에 맞는 우리만의 차별화 전략을 지속적으로 구사해 나갈 계획이며 소매금융을 기본 축으로 한 내실중심의 경영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가장 강한은행으로 발전시킬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역외시장을 포함한 영업기반의 확충, 전략적 차원의 업무 다각화, 자산운용의 효율화 추진, 국가 정책 트랜드에 부합하는 금융서비스 강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조직문화 및 인재양성 등에 주력할 계획입니다.”● 임용택 은행장은 전남 무안 출신…김한 JB금융지주 회장과 '20년 친분'JB전북은행 임용택 은행장은 전남 무안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졸업한 뒤 대신증권을 거쳐, Partners 설립 및 대표이사, 토러스투자전문(주) 대표이사, 토러스벤처캐피탈(주) 대표이사, 메리츠 인베스트먼트 파트너스(주) 대표이사, JB우리캐피탈 사장, 전북은행 사외이사를 역임했고 현재 JB금융지주 비상임이사로 재임 중이다.김한 JB금융지주 회장 겸 광주은행장과는 대신증권 재직시 부터 인연을 맺어 20여년 동안 개인적 친분 및 사업분야에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임 행장은 전남 무안군·신안군·목포시 등지에서 8·10·11·12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민주한국당 원내총무, 신한민주당 부총재를 역임한 임종기 전 의원의 아들이기도 하다.

  • 기획
  • 강현규
  • 2014.12.01 23:02

[(38) 장수군조합공동사업법인] 장수사과·토마토…'산지 유통 선도기업' 자리매김

장수군 거점산지유통센터(이하 S-APC)가 장수군조합공동사업법인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산지 유통의 선도기업으로 빠르게 착근하고 있다.장수군조합공동사업법인(대표 김동근이하 장수군조공)은 생산농가가 고품질 안심 농산물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생산과 유통의 전문화 시스템을 구축해 지원하는 장수지역 생산 전진기지.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열정으로 공익적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장수군조공은 직원 22명과 장수농협, 장계농협, 장수군사과영농조합 등의 참여조직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력상품인 사과, 토마토, 파프리카 등을 선별하고 유통하는 장수군 농산물 산지유통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장수 IC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대한민국 제1호 거점산지유통센터인 장수군조공(구 S-APC)은 지난 2004년 7월 농림부 FTA 기금사업으로 선정, 국비 87억원, 도비 35억원, 군비 53억원 등 총사업비 175억원을 들여 부지면적 2만5148㎡(7607평)와 건축면적 1만1066㎡(3347평)에 비파괴 선별기와 포장시스템을 갖춘 선별시설, CA 저장고를 포함한 고효율 저온 저장고, 예냉고 및 채소전용 저온저장시설 등을 보유중이다.지난 2006년 준공당시 S-APC는 농림부가 농산물 수입 개방에 대비해 FTA 기금으로 만든 대한민국 제1호 거점산지유통센터로, 장수군민의 기대는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었다. 하지만 S-APC은 애초 관심과 기대를 벗어나 운영미숙으로 인한 경영악화 등의 어려움으로 많은 우여곡절과 변화의 과정을 거쳤던 게 사실.S-APC는 권토중래 끝에 지난 2011년 장수군조공으로 설립등기를 완료하고 변모를 일신했으며, 2012년 1월 업무개시를 계기로 산지유통 종합대상 및 연합사업 100억원을 달성했으며, 지난해 산지유통평가 우수조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과실생산유통지원사업 연차평가 200억원 달성탑을 수상했으며, 올해 들어서도 산지유통평가 우수조직으로 선정되는 등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올해 매출 300억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장수군조공은 통합마케팅의 하나로 정가수의매매 정착에 앞장서고 있으며, 생산농가와 소비자의 이익을 위한 유통전문 조직으로써 체계구축에 의한 경쟁력 있는 고품질 장수농산물유통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기존의 유통 운영 방식을 과감히 개선하면서 규모화와 조직화에 주력하고 있는 장수군조공은 출하농민들의 노력한 대가를 돌려주고 소비자에게는 건강하고 신선한 농산물을 제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무엇보다 장수군조공은 농산물의 생산, 수확 후 처리, 포장, 저장과정 등 각 단계에서 농산물에 혼입될 수 있는 농약, 중금속, 유해 미생물 등 각종 위해요소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이와 함께 안전성이 확보된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도록 현장교육은 물론 농가를 직접 찾아 과학적이고 깨끗한 농산물을 확보하기 위해 전 직원이 발벗고 나서고 있다.특히 장수군조공은 장수지역에서 최고의 품질로 생산되는 장수사과와 토마토 등을 전국의 대형마트 등에 납품을 하고 있으며, FTA(자유무역협정)에 맞서 해외 판로도 개척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유통의 합리화와 차별화된 농산물로 고객이 감동받고 생산농가가 열정을 쏟을 수 있도록 고객만족 서비스 극대화와 고객가치창조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한편 수확기 등 농산물 홍수출하로 인한 가격하락을 대비해 가공시설 확보와 모든 농가들이 생산한 농산물이 대규모 생산농가나 특정농가와 차별 없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유통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풀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김동근 대표 "관내 경합조직 협력체계 구축할 것"농가에서는 고품질 농산물 생산에만 주력하면 됩니다. 판매는 장수군조합공동사업법인에서 책임지겠습니다.지난 4월 장수군조합공동사업법인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동근 대표(51)는 공선출하회를 통한 농가조직 강화는 물론 능력과 경험을 갖춘 구성원들의 협력과 조화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조직으로 성장시키겠다면서 군단위 통합조직 운영으로 과실전문 조직운영 및 유통주체와 교섭력을 갖춘 공동계산중심의 생산자조직으로서 참여조직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김 대표는 사업경합 해소 및 기존시설 계열화를 통해 관내 경합조직 일원화로 협력체계 구축하겠다며 브랜드 마케팅을 강화해 안정적 판로는 물론 통합마케팅을 통한 조직화, 규모화, 전문화를 기반으로 농가소득의 안정화를 이루겠다고 강조했다.김 대표는 특히 기존의 선별하고 판매하는 APC의 기능을 벗어나 농가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많은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며 주력상품인 사과, 토마토, 파프리카는 물론 장수군에서 생산되는 오미자, 쌈채소 등 모든 원예농산물의 유통을 책임질 수 있는 장수군조공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그는 장수군조공은 농산물 가격 책정을 농가들이 직접하고, 원하는 가치를 이끌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며 유통시장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농가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 기획
  • 정익수
  • 2014.11.27 23:02

[(43) 문학 속에 나타난 동학농민혁명] '농민투쟁'·'민중운동'…시·소설에 '혁명 정신' 담아

태평양시대 개막 전야였던 19세기 중엽 한반도는 거대한 태풍의 눈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몰고온 거대한 태풍이 중국과 아시아 대륙을 통째로 날려버릴 기세로 휘몰아쳤다. 태평양에서 솟구치고 대륙에서 내리꽂히던 태풍이 1894년 갑오년 한반도에서 폭발하였다. 이런 대폭발 앞에서 민족의 안전과 안전의 기본토대인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고자 동학농민군들은 의연히 봉기했다. 그것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때로부터 120주년이 지난 지금 태평양의 움직임과 중국 대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1894년 갑오선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절실한 때인 것 같다.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중대한 위상으로 인해 일제식민지시기, 해방 이후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구축시기에 빚어진 좌우대립과 민족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도리어 극심하게 왜곡되고 축소되었다. 나아가 동서냉전체제 하부구조로 볼 수 있는 군사정권시기를 거치면서 극심하게 굴절되기까지 했다.한국 근현대사의 극심한 굴절과 부침으로 인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반란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인 인식이 공존해왔다. 역사는 두 차원의 시간성을 지닌다. 실제로 사건이나 행위가 일어난 시점과 그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는 시점에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난 120년 동안 한국문단의 시인, 소설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동학농민혁명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한국문단에 발표된 문학작품은 장편소설 22편, 장편시 9편, 단편시 265편으로 총 296편에 달한다. 이들 작품들은 편의상 1980년 전과 후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창작된 최초의 작품은 1947년 〈연간조선시집〉을 통해 발표된 조운의 시(詩)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이다. 이 작품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국내에 보급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마르크주의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한 역사학계 연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일제식민지시기 일본인 역사가들은 동학농민혁명의 반외세 민족운동으로서의 인식을 철저히 통제하고 차단하는 한편 조선왕조의 부패상만을 부각시켜 식민통치를 미화하는데 이용했다. 나아가 동학 사교집단의 반란 혹은 고부군수 폭정에 따른 전라도 고부지역의 민란, 전봉준 사건으로 축소했다. 마치 세월호 침몰사고의 원인을 세모해운 유병언의 개인문제로 호도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조운 시인의 고부 두승산(古阜 斗升山)은 일제의 위와 같은 역사왜곡과 축소를 강하게 질타하는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 시는 농민대중을 농민혁명의 주체로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한국문단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한 두 번째 시는 전북일보 1963년 9월 29일자를 통해 발표된다. 신석정 시인의 갑오동학혁명의 노래가 그것인데, 이 시는 1963년 당시 516정권이 동학농민혁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 전북지역 원로와 서울의 갑오동학혁명기념사업협회 건의를 수용하여 1963년 8월 25일 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 9월 6일 착공식을 가진 후 혁명정부가 서둘러서 공사를 추진하여 27일 만인 1963년 10월 3일 정읍 황토현의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을 가졌다. 이 기념탑 제막식 나흘 전에 전북일보 지면을 통해 신석정의 시가 발표되었다.새야 새야 파랑새야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청포장수 울고 간다징을 울려라 죽창도 들었다이젠 앞으로 앞으로 나가자눌려 살던 농민들이 외치던 소리우리들의 가슴에 어련히 탄다갑오동학혁명의 뜨거운 불길받들고 나아가자 겨레의 횃불오늘도 내일도 더운 피 되어태양과 더불어 길이 빛내자 - 신석정, 갑오동학혁명의 노래전문(全文)한편, 419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도 함께 상승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67년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과 껍데기는 가라외 3편의 단편시가 발표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이 사건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1970년대 김관식황동규문병란 등 10편의 시 발표로 이어졌고, 소설은 1960년대 서기원 〈혁명〉(1965), 최인욱 〈전봉준〉(1967)이 발표되었고, 1970년대 이용선 〈동학〉(1970), 유현종 〈들불〉(1976), 박연희 〈여명기〉(1978) 등이 발표되었다.이후 1980년부터 2014년까지 문학작품 창작은 크게 늘었다. 시 분야에서 장편 8편, 단편 247편, 소설분야에서 중장편 16편으로 총 271편 발표되기에 이른다. 이는 1895년부터 1979년까지 25편의 문학작품이 발표된 것에 비하면 가히 폭발적인 증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민족민주운동 세력이 급성장하여 동학농민혁명의 민중성과 변혁지향성의 현재화를 구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980년대 이후 발표된 시는 임홍재 청보리의 노래(1980), 안도현 서울로 가는 전봉준(1985), 양성우 만석보(1985), 고운기 봉준이 성님(1987), 고은 첫닭 울면(1988), 김남주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1988) 등이 있고, 소설은 안도섭 〈녹두〉(1988), 박태원 〈갑오농민전쟁〉(1988), 문순태 〈타오르는 강〉(1989), 한승원〈동학제〉(1994), 송기숙 〈녹두장군〉 등이 있다.한국문단의 작가들이 발표한 문학작품에 나타난 동학농민전쟁 인식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농민해방투쟁적 인식이다. 이는 1920년대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 반일민족해방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조운의 고부 두승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서구적 근대문명 부정에 따른 무정부주의적 경향으로 이는 419혁명을 계기로 창작발표된 신동엽의 장편서사시 금강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셋째, 반외세운동적 인식으로 1960년대 신동엽, 1970년대 김관식, 황동규, 문병란. 1980-90년대 김남주, 곽재구, 김용락 등의 시들에서 볼 수 있다. 넷째, 반독재운동적 인식으로 장효문, 송수권 등의 장편서사시에 잘 나타난다. 다섯째, 민중해방운동적 인식으로 1980-90년대 창작발표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인식이다.주목할 것은 1980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문학작품 발표가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작품 발표가 급격하게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으로 근대 이후를 자처했으며 또 그렇게 인식되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탈근대주의(Post-modernism) 담론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최근 뉴라이트 계열의 식민지근대화론 등의 시대적 상황변화 등도 배경으로 들 수 있을 것 같다.역사를 돌이켜보면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판도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우리는 망국(亡國)과 일제식민지라는 치욕을 맞았다. 오늘 한반도 주변상황은 짙은 안개속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군국주의 추구하고 있고, 한반도에는 정체불명의 6자회담이 실재한다. 갑오선열들의 넋을 불러 오늘 우리의 좌표를 묻고, 내일을 향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심장할 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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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6 23:02

[24. 다문화자녀 지역 프로그램 뭐가 있나] "얼굴색 달라도 우리는 친구"…무대에서 마음의 상처 치유

행정자치부의 2013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국제결혼한 다문화가족 자녀의 수는 16만 6333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전북도의 경우 다문화가족 자녀의 수는 9200명에 이르는데, 전주시가 1581명으로 가장 많고 무주군이 220명으로 제일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다문화가족 자녀들 중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들은 전북도교육청의 2013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3209명이다.초중고등학교에 재학하는 학생수가 지금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곧 이들의 수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증가하면서 이들이 다양한 도전과 어려움에 직면하는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실제 전주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한 다문화가족 자녀가 비다문화 자녀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때 비다문화 자녀가 다문화자녀에게 야, 너는 한국사람도 아닌데 왜 애국가를 불러!라는 말을 던졌다.이 말에 다문화가족 자녀는 울음을 터트렸다.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김동준 팀장은 다문화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상처를 받게 된다면 또래 관계 뿐만 아니라 학교 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다른 나라에서 온 부모에 대해서도 창피하게 생각하게 된다면서 다문화가족 자녀의 자존감 향상과 함께 어떤 차별적 환경과 위기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는 회복 탄력성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다문화가족과 비다문화가족간 공감대 쌓기정말 잘한다. 나도 하고 싶어요.한 다문화가족 자녀의 말이다.지난 19일 전주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에서는 다문화 가족과 함께 하는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가 무대에 올려졌다.이 행사에는 결혼이주여성과 자녀 등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큰 호응과 행복한 웃음 속에 공연이 마무리 됐다.다문화가족 부모와 자녀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필리핀에서 건너온 이주여성 가롤린 씨는 일곱 살 배기 딸과 함께 뮤지컬에 출연했다. 약 5개월간의 공연을 위한 연습기간 가롤린 씨와 딸은 좀 더 친근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서로를 지지하는 폭이 더욱 커졌다.이번 뮤지컬 무대는 다문화가정의 엄마와 자녀, 비다문화가정의 엄마와 자녀 등 20여명이 지난 5월 말부터 25차례에 걸쳐 연습한 끝에 완성됐다.엄마와 함께 만든 뮤지컬 공연은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다문화 뮤지컬 더불어 숲의 프로그램에서의 공연은 다문화가족 인생의 무대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고, 뮤지컬을 공연하는 동안 상호를 지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했던 것도 중요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다문화 지역민 통합 문화지원사업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주관하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지원한 뮤지컬 더불어 숲 프로그램은 전북도의 다문화 지역민 통합 문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됐다.이 프로그램은 뮤지컬 더불어 숲이라는 주제 아래 다문화가족과 비다문화가족이 함께 참여해 만들어진 작품이다.다문화가족은 이주여성을 비롯해 다문화 자녀가 참여했고, 비다문화가족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공모를 해 선정된 사람들로 구성됐다.다문화가족과 비다문화가족이 함께 참여한 이번 프로그램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다. 다문화 지역민 통합 문화지원사업은 다문화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함께 다문화가족 자녀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다문화가족만 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시민과 함께 만드는 소통과 통합을 목적에 두고 있다.다문화 지역민 통합 문화지원사업은 전주시, 김제시, 장수군, 고창군, 완주군이 함께하는 사업이다.전주시는 뮤지컬 더불어 숲을 중심으로 문화적 활동을 진행해왔고, 김제시는 지평선 어울림 합창단, 장수군은 물뿌랭이 마을 합창단, 고창군은 모로모로 축구단, 완주군은 타드림 난타교실 등의 주제로 다문화가족을 중심으로 지역민이 참여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다.△다문화가족 자녀 자존감 높이기다문화가족 자녀의 자존감은 부모에 대한 존중감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우리 사회는 아직 아시아권에서 온 이주민들에 대해 다소 하향적인 차별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시선은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부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 여기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따라서 아시아 이민자들을 존중하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하다.또한 다문화가족의 부모들은 자녀를 가르칠 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아시아 국가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려줘야 한다. 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다문화가족 자녀의 자존감 향상은 사회적 지지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들의 자신감을 키워주고, 자존감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끝〉● '오즈의 마법사' 출연 박민지 양 "사람들 앞에 나가기 싫었는데 공연하며 자신감 크게 늘었죠"-어떻게 이번 뮤지컬 공연에 참여하게 됐나요.엄마가 뮤지컬 공연이 있다고 하면서 하라고 알려줬어요. 뮤지컬은 노래도 부르고 여러 가지 것을 다할 수 있으니까 해보고 싶었어요. 공연도 나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어떤 역할을 맡았고 생각나는 대사가 있나요.저는 양철나무꾼 역할을 맡았어요. 양철나무꾼이 마음이 없어 마음을 갖고 싶어서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러 갔는데요. 오즈의 마법사가 양철나무꾼에게 한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양철나무꾼은 마음이 없다고 하지만, 마음 또한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 다만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씨와 그렇지 못한 마음씨가 있는 것이야. 마음이 있다면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있단다-엄마와 함께 뮤지컬에 참여했는데.다른 뮤지컬은 아이들만 하는데요. 엄마랑 함께 했던 것이 느낌이 좀 달랐어요. 서로 도와가며 차근차근 대사를 외우고, 노래를 배우면서 더 친해진 것 같아요.-평소보다 자신감이 늘었다고 생각하는가요.처음에는 사람들 앞에 나가기 싫었었는데, 이제는 사람들 앞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예전에 비해 자신감이 크게 늘었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 다음에도 역할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싶어요.-장래 꿈은 무엇인가요.댄스 가수가 되고 싶어요. 노래하고 춤을 추니까 좋아요. 노래하고 춤을 출 때면 다른 힘든 생각도 안 들고 즐겁고 행복해요. 학교 성적 같은 것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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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25 23:02

익산 에덴농장 홍인숙 대표 "사과 참 맛있다 입소문, 체험농장 성공으로 이어졌죠"

내일 지구가 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1987년 중장비 사업에 실패한 후 사과농장에서 제2인생을 출발한 에덴농장 정학재-홍인숙씨 부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오로지 과일 맛으로 소비자 신뢰를 얻고, 체험 관광농장 프로그램을 성공시키며 6차산업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에덴농장 홍인숙 대표(56)를 지난 11일 익산시 왕궁면 제석사지로 80번지 에덴농장에서 인터뷰했다. 이날 과수원에서는 50여 명의 유치원 아이들이 과일 따기 체험활동을 하고 있었다.-과수원에 와서 그런지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는군요.오늘은 조금 왔는데, 100명 200명 몰려드는 날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둘러보니까 사과나무, 배나무가 상당히 굵은데 농장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아들 7살 때인 1987년에 여기 들어와 농사지으며 살았어요. 그 때 사과나무를 처음 심었는데, 3000평으로 시작했어요. 지금 농장 규모는 사과 6000평, 배 2000평, 감 500평 정도예요.-도시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는데, 갑작스런 농촌생활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당시 상황에서는 농사라도 지어야 했어요. 농사짓는 방법을 모르니까 남들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했죠. 힘들었죠.하지만 홍 대표는 농사를 지어 잘 살기는 힘들다는 회의감이 컸다고 털어놨다. 실제로 3년이 지나고, 4년이 지나도 노력한 만큼 소득이 나오지 않았다. 남편을 향해 계속 농사 지을 거면 같이 안살겠다고 하소연도 많이 했다. 그런 어느날, 홍 대표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닥쳤다.운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모든 게 미리 다 준비돼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어요. 18년 전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결국 걷지 못하고 있어요. 그 때 아,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내 아이들도 나처럼 학교 수업료도 제대로 못내 선생님 눈치를 보며 어렵게 살 것 아니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끔찍한 일이죠. 그 때 아들이 중학교 2학년, 딸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거든요.홍 대표 남편 정학재씨는 당시 마을 이장이었다. 가을 막바지 수확을 마친 후 이장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은 작업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농장일을 하고 있다.-설상가상인데,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가요.남편이 다친 뒤 용기를 내서 농사에 전념했지요. 그동안에는 남편 뒤에서 거들어 주는 일만 했는데, 제가 모든 것을 챙기다보니 억울하고 화나는 것이 많았어요. 사과를 수확해서 공판장에 가면 한 상자에 1만원 밖에 손에 못 쥐었어요. 그런데 시장 가격은 3만원 하는 거예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느날 남편이 입원한 원광대병원 병실에서 남편 고향 누나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때 순간적으로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어요. 아, 이 분한테 우리 사과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난 거예요. 우리 사과가 참 맛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 그 분에게 사과를 드리면서 식당 아줌마들하고 나눠 먹어보시라고 했죠. 물론 주문하면 곧바로 배달해 주겠다는 말도 덧붙여서. 식당 아줌마가 50명 정도 됐는데, 주문이 상당히 들어왔어요. 그 배달을 다니다보니 지금은 택시기사보다 익산시내 골목길을 더 잘 알아요.-인터넷도 그 때 생각했는가요.인터넷은 한참 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컴퓨터에 익숙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됐어요. 고교 졸업 후 금성사 컴퓨터실에서 근무했거든요. 또 대학에 다니지 못한 한이 있어서 2002년에 방송통신대에 들어갔는데, 컴퓨터학과를 선택했지요. 그런 것들이 농사 짓는 제게 결정적 도움이 될 줄 그 때는 몰랐죠.-컴퓨터 지식을 농장 운영에 어떻게 활용하게 됐는가요.사람이 살면서 기회가 몇 번 온다고 하잖아요. 어느날 한 친구가 제게 조언을 했어요. 얘, 농업기술센터에 가면 컴퓨터 교육이 있잖아. 너는 컴퓨터 할 줄 아니까 그런 것 한 번 해봐하는 거예요. 그래서 농업기술센터 컴퓨터 교육장에 가봤죠. 그날 마침 블로그 만들기를 하는 날이었어요. 그게 7년 전 일이예요.-컴퓨터를 남들보다 잘 했을 것은데요.그 때 선생님한테 가장 잘한다고 칭찬받았어요. 잘하면 재미있고, 칭찬 받으면 더 재미있잖아요. 게다가 더 즐거운게 있었어요. 제가 인터넷에서 블로그를 만들어 운영하기 전까지 저는 그저 농촌 아줌마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평범하게 농사짓는 아줌마가 아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 생각을 담아 올리는 글에 댓글을 달아 동의하고, 응원하는 등 반응해 주는 것이 참 좋았어요. 그 안에 내 모든 걸 펼쳐놓고 참 열심히 했지요.-또 한번의 기회가 왔는가요.두 번째 기회는 4년 전에 왔어요. 올해 추석이 9월 7일, 좀 빨리 왔잖아요. 그 때도 추석이 빨랐어요. 추석이 빠르면 조생종 사과는 수확이 문제예요. 조생종은 추석 지나서 익는데, 그 때는 사과 소비가 급감하거든요. 그래서 추석 전에 수확을 하는데, 그 때는 사과 따는 일이 너무 재미가 없더라구요. 그러던 어느 순간,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어요. 바로 체험형 관광농장이예요.에덴농장은 익산시 금마면 소재지에서 왕궁면 소재지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 있다. 소비자 접근성이 좋은 것이다. 직접 사과 사러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는데, 그 중에 사장님, 사과 한 번 따보면 안될까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홍 대표는 별 생각없이 한 번 따보시라고 했다.제가 그 생각을 착 잡은 거예요. 사과를 직접 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렇다면 그들이 농장에 와서 사과를 딸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인터넷 블로그며 카페 활동을 한 3년간 열심히 할 때거든요. 익산에 카페활동하는 젊은 엄마들이 5000명 정도 회원으로 있는 익산사랑나눔뜰이라는 카페가 있어요. 거기에 제 글을 올렸어요. 제목을 자연을 나누어 드립니다라고 붙여서 사과 체험농장을 운영하니 오시라고 했죠. 그 때 10월 123일이 연휴였는데요, 첫날에 세 가족이 왔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자기 활동을 사진찍어 카페 같은데 잘 올리잖아요. 내가 직접 홍보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홍보하는 거예요. 그런 효과예요. 1일부터 11월 중순까지 한달 반 사이에 2500명이 저희 농장에 다녀갔어요. 그래서 아, 이게 되겠구나 확신했죠. 지금 체험농장이 그렇게 출발했습니다. 사과하고 배만 있으니까 단조로운 생각이 들어서 감도 심었고, 고구마와 땅콩도 심어서 체험농장으로 활용하고 있어요. 자꾸 변화를 모색하며 가는 중입니다.홍 대표는 인터넷 카페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그동안의 공력을 모아 2010년 3월17일 만든 eden9004님의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블로그 제목을 친환경 사과와 배, 감이 익어가는 마을 익산 에덴농장 등으로 바꿔가며 친환경 농장을 소비자들에게 부각시켰다. 2013년 11월에는 에덴체험농장으로 제목을 바꿔 체험할 수 있는 농장임을 알렸다.-순간적인 아이디어가 성공으로 이어졌군요.우리가 일상 생활 하면서 아, 이거 하면 괜찮겠다하고 머리를 스치는 것들이 있거든요. 나는 그것을 잘 잡는 것 같아요. 일단 괜찮다는 확신이 서면 과감하게 결정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것이죠.-인터넷과 체험농장 운영 등으로 직접 판매를 하고 있는데, 성과는 어떻습니까.10년 전부터 생산량을 모두 판매하고 있지만, 체험농장으로 전환하면서 훨씬 일이 훨씬 즐겁습니다.-생산량을 모두 판매하는 비결이 뭔가요. 인터넷 홍보 등 적극적인 판촉인가요.제가 잘하는 것은 과일을 맛있게 만드는 것이예요. 결과적으로 제가 한 일은 그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고객들이 저희 블로그를 보고, 또 저희 과일을 드셔보시고 저희를 신뢰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그 분들 사이에 이 사람은 농사를 나쁘게 짓지 않는다. 맛있게 짓는다이런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사과, 배, 감이 참 맛있던데요, 맛좋은 과일 생산 비결은 뭡니까.10년 전 익산 과수농가들에 대한 교육이 있었는데, 그 때 강사로 초빙된 충주농협 정길영 선생이 새로운 전지법을 알려주었어요. 과수원에서는 일반적으로 겨울과 여름 두 번에 걸쳐 전지작업을 하는데, 이 분은 여름 전지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농가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인데, 저는 이 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무더운 여름에 전지작업하는 것이 힘들고, 인건비도 만만찮잖아요. 그런데 또 농장에 거름을 주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도 받아들였어요. 비료 비용과 인건비가 절감 되잖아요. 나무가 튼튼해지고, 게다가 비용이 절감된다는 말이 가슴에 닿았던 것이죠. 그렇게 한 3년 하니까 나무가 죽는 것 같더라구요. 비상이 걸렸죠. 그런데 4년째 되니까 나무 껍질이 모두 벗겨지면서 속에서 새 살이 나오더라구요.-어떻게 된 일일까요.땅에 비료를 주면 땅 속 뿌리들이 땅 위쪽에서 제공되는 양분만 흡수하며 자라는 것 같아요. 그런데 갑자기 비료를 주지 않으면 나무 뿌리가 당장은 힘들게 되죠. 결국 나무가 살기 위해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자연속 영양분을 찾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나무가 더 튼튼해지고, 과일맛도 좋은 것 같아요.-아주 간단하군요.저는 실제로 거름이라는 것은 전혀 안줍니다. 제가 자연 그대로 키운다는 말이 그거예요. 그래도 충분해요. 해마다 농장 토양검사 하는데, 영양분이 넘쳐요. 나뭇잎이며 낙과 등 모두가 좋은 거름이거든요. 익산은 농민들 교육이 많은데, 배 교육 선생님도 거름 주지말라고 강조해요. 제가 시골 살면서 많은 것을 느끼는데요, 좋은 정보를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예요. 농부들은 전통적 농사 방법을 거부하기 힘들어하지만, 좋은 것이라면 받아들여야죠. -비료를 주지 않으면 수확량이 떨어지지 않습니까.욕심만 버리면 돼요. 다른 농장 사과가 5㎏ 한 상자에 10개 들어가면, 우리 것은 13개가 들어가요. 사과가 작으니까요. 사실 거름을 많이 주면 과일이 엄청 커져요. 그런데 고객이 원하는 것은 큰 사과가 아니라 맛있는 과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공판장에 낼 과일이면 공판장 기준에 따라 크기를 키우고 예쁘게 농사짓겠지만, 저는 집에서 직접 파는 것이니까 맛만 있으면 돼요.-체험형 관광농장이 잘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체험 관광객은 어느정도 됩니까.처음 시작한 2011년에 2500명 정도 다녀갔는데, 그 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2012년 3000명, 2013년에 4000명 가량 다녀갔어요. 올해는 일주일 전에 4500명이었으니까, 사과 수확이 끝날 때가 되면 5000명은 될 것 같습니다.-체험농장을 운영하면서 어린이, 학생들 대하는 노하우도 늘었겠군요.사실 체험 학생이 100명, 200명씩 몰려들어오면 잔뜩 긴장이 되는데, 게다가 선생님들이 지켜보니까 더욱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어떤 기회에 농업기술원 직원분이 텃밭체험 진행하는 것을 보고서 저도 힌트를 얻었어요. 어렵게 할 것이 아니라, 농장의 모든 것들을 자연스럽게 활용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유치원생들이 체험 대상이라면 풀잎이나 나뭇잎에 맺힌 이슬을 가리키면서얘들아, 이게 이슬이야. 이슬은 어떻게 맺힐까하는 식이죠. 또 아이들이 어른 존중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씁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간 중간에 과일을 쪼개서 나눠줄 때 얘들아, 이거 선생님부터 드려야지? 하고 선생님 먼저 드린 뒤 아이들에게 나눠줍니다. 과일을 껍질 째 먹도록 하는 것도 친환경 농사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이구요. 그런 철학을 갖고 체험농장을 운영합니다.-체험농장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은 없습니까.사실 저희 농장에 체험 고객이 많이 오면 좋겠지만, 한계는 있잖아요. 저희 농장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다양한 체험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제 농장 주변에서 고구마 체험 농장, 땅콩 체험농장, 만들기 체험장 등 다양한 공간이 있으면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체험오는 고객이 많으면 우리 농산물이 입소문을 타고, 주문도 들어오니까요. 아직 농민들 관심이 부족하지만, 한 번 우리 지역에 온 도시민들을 연계해 줄 수 있는 체험형 관광 프로그램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농산물 가공 사업도 하십니까.가공 사업은 허가를 받지 않았고, 저희 농장 과일을 허가 받은 건강원에서 즙을 추출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과일을 건조해서 판매하는 부분도 고민중입니다. 지난해 건조기를 들여놓았는데, 본격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려면 조금 더 갖춰야 합니다.-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신다면.끊임없이 변화해 나갈 겁니다. 언제나 내 입장이 아닌 고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그래야 저에게, 그리고 농촌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인숙 대표는 남편 사업 실패교통사고갖은 시련 이겨낸 '억척이'전주가 외가인 홍인숙 대표는 부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부산여상을 졸업하고 금성사 컴퓨터실에서 근무하던 20대 초반에 중장비 사업을 하는 남편 정학재(51)씨와 결혼했다. 잘 나가던 남편 사업은 결혼 6년여만에 기울었다. 일을 해 주고 받은 어음이 휴지조각이 됐기 때문이다.가족 앞에 제시된 선택지는 농사였다. 그나마 남편이 물려받을 수 있는 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사를 모르고 살아온 홍 대표는 어쩔 수 없이 농사꾼이 됐다. 1987년, 아들이 7살되던 해였다.시댁에서 논의 끝에 사과농사가 결정됐다. 사과 묘목을 심었지만, 과일을 수확해 판매하려면 34년을 기다려야 한다. 남편은 중장비 회사에 취직하고, 홍 대표가 농사를 지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주산, 부기나 할 줄 알았지 농사 짓고 살 줄 몰랐던 홍 대표에게 농촌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큰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이 불편해졌다. 어려운 시련이 닥쳤지만, 그 때마다 억척스럽게 이겨냈다. 이제 생산한 과일을 완판한다. 그렇게 27년의 세월이 흘렀다.홍 대표는 이제 자연과 더불어 호흡하고, 농장 체험하러 오는 방문객들과 함께 자연이 주는 선물의 고마움을 실감한다. 학창시절, 매월 수업료를 제대로 못내 속상했던 홍 대표는 이제 어려운 살림 속에서 고등학교 졸업시켜 준 엄마가 너무 고맙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사과농장을 운영하면서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었고, 체험농장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농사는 품질로 승부를 내야 한다. 농산물의 품질이란 자연 그대로의 맛이다. 그 자연의 맛이 에덴체험농장을 만들었다. 홍 대표는 그 기본에 충실했다.

  • 기획
  • 김재호
  • 2014.11.25 23:02

부임 3개월 장석원 전북도립미술관장 "전북예술계 새 출구 '아시아현대미술전' 통해 문 열 것"

지난 8월 말 전북도립미술관장으로 임용된 장석원 관장(63). 그는 전북 미술계를 넘어 예술계에 변화와 새바람을 일으키겠다는 포부를 제시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아시아현대미술전과 청년작가 육성, 레지던시를 통해 지역작가를 아시아 미술시장으로 내보는 한편 도내 현대미술사 정립에 힘쓰겠다는 주요 비전을 내세웠다. 지난 21일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자락에 있는 도립미술관에서 장석원 관장을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주요 정책의 추진 과정과 계획, 현재 진행하는 개관 10주년 특별전 등에 대해 들어봤다.-부임 3달이 가까워집니다. 그동안 바쁘게 달려 오셨습니다.“지난 8월28일에 제3대 전북도립미술관장으로 왔는데 꽤 긴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기대와 걱정의 목소리, 역할에 대한 주문 등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이를 모두 포용하기는 어렵고, 큰 주제로 수용하고 출구를 여러 개 열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분명하게 도립미술관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보여주고 그런 일이 갖는 의미나 가치를 알려 설득하고 공감토록 하겠습니다.”-아시아현대미술전를 주요 비전으로 내세웠는데요. “아시아는 식민지 경험과 정치·경제적 성장 등 동질성을 지니면서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이 될 것입니다. 이에 국제성은 아시아를 두드려야 합니다. 단순히 도립 미술관의 국제적인 행사 차원을 넘어 도내 문화예술의 한 화두가 될 수 있게 미술이 앞서 출구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입니다. 도내는 좋은 작가와 전통적인 문화유산이 풍부한 곳인데 통로를 열지 못하고 수직적인 구조에서 청년·중견작가가 나갈 곳이 없어 내부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아시아 미술계에서 관계자들이 여기에 노크를 하게 만들고 도내 작가들에게도 활력을 주어야 합니다. 먼저 내년 9월께 5억 원의 예산으로 국내·외 작가 60여명, 큐레이터 등을 초청해 이들의 전시와, 학술대회, 도내 미술을 조명하는 자리 등도 함께 마련할 계획입니다. ”-결국은 인적 자원이 바탕입니다. 청년작가를 선정하고 레지던시를 구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죠. “아시아현대미술전이나 레지던시 등 미술관과 연계된 국내·외 기획 전시에 선보이고자 심사를 거쳐 지난달 16일 ‘전북청년 2015’전시 대상자로 김병철(42), 김성민(47), 이주리(42), 탁소연(36) 작가를 선정했습니다. 보고전 형식으로 연말에 전시를 연 뒤 내년 6월에는 선정과정에서 탈락했지만 여전히 주목해야 할 작가와 함께 가능하면 본관 전체를 할애해 전시를 열겠습니다. 올해 선정 과정에서 제기된 의견을 참고해 해를 거듭할수록 연령을 낮춰 안정된 청년 작가군을 발굴·배출하면 십 년 뒤쯤에는 이들이 도내 화단을 끌고 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작가에게 창작공간을 지원하는 레지던시의 경우 사설은 사업 수행에 한계가 있는 만큼 도립에서 실시해야 하는 당위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장소 섭외 등의 문제로 내년 말께 만들어 국내·외와 도내 작가가 교류하는 교두보를 놓겠습니다.” -원로작가에 대한 관심도 높으십니다. 이번 소장품 구입에서도 원로작가들을 배려한 것으로 압니다.“대외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하는 만큼 근현대 도내 미술자료를 구축하겠습니다. 연간 2차례씩 도내 원로 작가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올 소장품 구입에서도 전북미술사 정립을 위해 재조명이 필요한 작가들의 주요 작품을 포함했습니다. 고창 출신으로 38세에 요절한 진환 작가, 전북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지난해 작고한 임상진 작가, 국내 최고령 작가 하반영 화백의 작품 등이 그것입니다. 특히 임상진 작가의 유족은 유작 20여점을 기증해 아름다운 선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 개관 10주년 특별전 ‘열정의시대 피카소부터 천경자까지’가 진행 중입니다만 관람객의 확보가 여의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임용된 시점에는 이미 90%이상 특별전이 추진된 상태였습니다. 좀더 보강하는 길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이 가장 빛났던 시대의 모더니즘과 한국이 가장 비참했던 시절의 미술을 비교했습니다. 대여 과정에서 국내 명작이 상당수 거부를 당해 제대로 올 수 없었던 점은 죄송하지만 2년 전의 거장전에 비해서 유화가 대부분으로 내용은 더 충실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현재 관람객은 평일 400~600여명, 주말 800여명으로 수익을 내고자하는 목표치에 모자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2년 전과 비교하면 이미 각 학교에서 예산 집행이 끝난 상태에서 개인 부담으로 관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들에게 제대로 된 문화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립미술관 직원이 짝을 지어 일주일에 4차례씩 150여개 학교와 한옥마을 등에서 홍보를 했습니다. 직원들이 일부 학교에서 잡상인 취급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하는 모습에서 마음이 저렸습니다.”-소신주의자로 통하고, 도립미술관장으로 오실 때도 미술가의 자존심을 강조하셨습니다.“예술가의 자존심을 꺾고 예술행사를 한다는 자체가 맞지 않습니다. 임시방편으로 곤란을 모면하기 위해 예술가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최후의 자존심을 허물고 일을 추진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반발하는 모양새로 볼 수도 있지만 도립미술관장 이전에 미술인으로 지켜야할 최소의 양식이라고 여깁니다. 아시아현대미술전의 추진 과정에도 원칙과 가치관은 여전히 존중돼야 합니다. 저 또한 비평가로서 비판 활동을 많이 한 만큼 건강한 비판은 수용·반영해 추진하겠습니다.”● 장석원 관장은 김제 출신 미술 비평가, 전남대서 후학 양성도오는 2016년 8월까지 2년간 도립미술관을 이끌 장석원 관장은 김제 출신으로 전주고와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남대 교수를 휴직 중이다. 그는 학교에서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한 편에서는 미술비평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는 지난 1970년대 말 전위 미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미술평론의 길에 들어섰고 〈공간사〉 편집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 2000년 광주비엔날레 전시기획실장을 거쳐 2004년 예술감독을 역임했고, 이후에도 광주비엔날레에 대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장 관장은 임용과정에서 심사위원 모두에게 고른 점수를 받았으며 전략적 리더십, 조직관리·변화관리 능력, 전문가적 능력 등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년 뒤 근무실적을 평가받아 최장 3년까지 임기를 연장할 수 있다. 그는 “도전할 거리를 찾던 가운데 고향에서 뜻을 펼치고 싶어 관장에 도전했다”며 “아시아현대미술전, 청년작가 육성, 한국여성미술제, 전북현대미술사 복원에 몇 개의 전시 등 머릿속의 구상을 실천하려면 갈 길이 바쁘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4.11.24 23:02

무주서 농사 짓는 김광화·장영란 부부 "우리 삶 바탕은 생산이 먼저…욕심 내지 않으면 자급자족 가능"

이 가족의 일상을 누군가는 귀농의 삶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참살이라고 한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귀농이고, 육체와 정신의 건강한 조화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전한 참살이다.책과 매체에 기고한 글을 통해 김광화 장영란씨 부부 가족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여러해 전이다. 부부가 따로, 혹은 같이 써낸 여러 권 책들은 대부분 딸과 아들까지 네 식구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기록한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다.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지만, 이 가족의 삶은 특별했다. 자급자족의 삶을 추구하는 가치와 자연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순응의 태도가 놀라웠고, 부부의 사랑과 아이들의 교육 방식이 감동적이었다.무주에 들어온 지 16년. 함께 농사일을 하며 자연의 흐름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깨우치는 삶을 실천하는 이 가족의 일상을 만나보고 싶었다.메일로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휴대전화 문자로 답이 왔다. 무슨 도움이 될는지요. 거절의 의미가 강했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뷰는 이뤄졌다.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즐거웠고, 특별한 경험이었다.김광화(57) 장영란(55)씨 부부를 만났다. 스물 네 시간 대부분의 일상을 공유하는 부부의 삶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신뢰와 사랑이 깊고, 그만큼 풍요로웠다. 서로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했으나 굴곡진 노정을 거쳐 이제는 자연이 주는 가치에 함께 눈뜨게 된 덕분일 것이다.부부의 자급자족 이야기 역시 흥미로웠다. 우리도 자급자족의 삶을 공유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욕심내지 않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진 않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직장생활 하다가 은퇴하는 사람들만 해도 60평생 돈을 벌어서 소비하는 삶을 살아오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좋은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 삶의 바탕은 생산이 먼저여야해요. 그 바탕에 삶을 내려놓으면 자급자족은 어렵지 않습니다.사실 우리에게는 선망하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자급자족할 수 있는 삶 역시 그렇다. 이 부부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마음 따뜻하게 해주는 풍경이다.-앞 산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겨울 준비는 다하셨나요.어제까지 좀 바빴어요. 이제 콩타작이 남았고, 소소하게 손질하지 못한 것들이 있죠. 농촌일이라는 것이 언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곧 김장하고 메주도 끓이고 땔감도 하고 일이 많습니다.-달력이 특별한데 직접 만드십니까.말일이 가까워지면 다음 달 달력을 만들어요. 저것은 생강꽃을 그린 것인데, 그림을 따로 배운 적이 없으니 원근감도 없고. 그래도 즐거워요. 달력이 안 붙어 있으면 생활이 답답해지거든요.-지난해 개정판으로 낸 자연달력 제철밥상도 이 달력 만들기로 시작되었겠군요.자연에서 배운 것을 나누고 싶었거든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펴낸 책이죠.-무주 오시기 전에 산청에서 교육공동체 생활을 하며 간디학교를 함께 만들었는데 왜 떠나셨습니까.지금 생각해보면 공동체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나 이해 없이 시작했었던 것 같아요. 삶의 가치나 추구하는 지점이 같지만 함께 생활하는데는 불편함이 많았었거든요. 2년 정도 공동체 생활을 했는데 그동안 우리가 향유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은 다 나누었어요. 공동체 안에서는 많은 가치들이 충돌하게 됩니다. 가치의 빅뱅이랄까. 폭발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들이 팽창하는데, 그런 가치들을 인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하면 부담이 따르죠. 그 과정에서 자칫 너는 공동체성이 부족해라거나 소양이 부족하다며 개인을 공격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되거든요.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삶의 바람직한 목표를 위해 좀 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선택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가장 중요한 것을 부부공동체라고 하셨는데 부부공동체는 성공하셨습니까.아직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농사를 지어보면 다 된 것 같아도 마지막 거두기를 잘못하면 망하잖아요. 완성이란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죠.-어느 글에선가 보니 김 선생님은 부부연애 전도사를 자처하셨던데요.아직 전도를 적게 해서인지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고요.(웃음) 저는 진정한 연애는 부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서로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은 과장하기 마련인데, 부부로 살아가면서는 단점은 받아들이고 장점은 서로 북돋아주고 그런 형태로 나가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아내에 대해 그런 마음이 커지고 그렇다보니 다시 연애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부부공동체만 잘되면 우리 일상은 훨씬 행복해질 겁니다.-서울을 떠나 내려오셨을 때는 어땠습니까.막막했죠. 제가 시골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는 남편이 큰 병에 걸렸거나 큰일이 있는 것이라고들 했어요. 귀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었을 때니까요. 도시를 떠날 때는 새로운 탈출구가 절실해서 선택한 것인데, 너무 막막하니까 아무 생각도 안들더군요. 지금 돌아보면 애들이 있으니 씩씩한 것처럼 행동했지 않았나 싶어요.-무주로 오실 때는 더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농사일을 본격적으로 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막막함이란 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학습한 두려움이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실 사회가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 두려움이잖아요.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시골에 와서 살면서 알게 되었죠. 그 전에는 몰랐는데 이곳에 살면서 내 자신을 돌아보니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고 아이들에게 그 두려움을 대물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그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셨나요.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아이들의 선택이었어요. 이곳에 왔을 때 작은 아이는 어려서 학교 갈 나이가 아니었고 큰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녔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더군요.-모든 일상을 가족들이 함께 하는데 문제는 없었나요.많았죠. 스물 네 시간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정을 공유하는데 갈등이 없을 수 없죠. 부부싸움도 여기 들어온 후로 훨씬 많이 했고요. 아이들도 엄마 아빠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영향 받았죠. 도망갈 때가 없잖아요. 학교에 다닌다면 그 시간만큼은 떨어져 있게 되지만 부부싸움 한 엄마 아빠와 같이 지내야 하니까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죠. 그래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운영하는 블로그가 많이 알려졌더군요. 자연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을 도시 사람들에게도 나누는 행복이 클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곡식꽃 이야기가 많던데요.여러해 전부터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곡식꽃을 주목하게 되었어요. 단순한 흥미나 관심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된 곡식꽃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벼가 꽃이 피는지 콩이 꽃을 피우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잖아요. 언제부터인가 곡식꽃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다 보니 많은 세계가 거기 있더군요. 곡식꽃만해도 종류가 많아 추위를 타는 꽃도 있고, 웬만한 추위에도 끄떡없는 꽃이 있죠. 그 다양한 세상에 감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곡식은 이런 작물들이 연애하고 사랑한 결실이에요. 농작물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결실을 맺는지를 들여다보면서 배우고 깨우친 것들을 나누고 싶었습니다.-작물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과정들이 인생과도 같다는 말씀이군요.옥수수 한 알 쌀 한 톨이지만 그 생물학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면 서로 사랑해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는 그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숭고하고 뜨겁습니다. 우리 삶도 그런 식물의 세계를 배우고 닮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거든요.-듣기만 해도 흥미롭습니다. 곡식마다 또 특성이 다르겠지요.그런 관점으로 보면 더 그렇지요. 옥수수는 옥수수대로, 당근은 당근대로 밤나무는 밤나무대로 독특한 특성이 있어요. 옥수수만 해도 한 알을 만드는 과정이 참으로 치열하거든요. 옥수수는 우리가 수염이라고 부르는 그 부분이 암술입니다. 옥수수 암술은 다른 작물보다 긴편인데 움직임이 아주 독특하죠. 수정할때 보면 아래로 처지지 않고 중력을 이겨내면서 옆으로, 때로는 위쪽을 향해 바로 섭니다. 자기 주위에 날아드는 꽃가루를 가능하면 더 잘받기 위한 암술의 노력이에요. 옥수수 꽃가루는 바람이 없어도 2미터 정도 나는데, 바람을 타면 몇 백미터까지 날아가 수정을 하죠. 이렇게 노력하는 과정을 보면 어떤 숭고함까지도 느껴져요. 옥수수를 먹다보면 알이 꽉 차지 않고 비어있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것은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정이 안된겁니다. 그럴 때는 되게 마음이 짠해요.(웃음)-모든 곡식들이 꽃을 피우나요.거의 그렇죠. 씨앗을 거두다 보면 씨앗 하나가 얼마나 많은 꽃을 피우는지 궁금해집니다. 마늘은 여섯 쪽으로 나오고, 우리가 키우는 작물 중 가장 많은 꽃을 피우는 것은 당근이더라고요. 당근은 십만 개 내외의 꽃을 피웁니다. 당근 씨앗 하나에서 그렇게 많은 꽃을 피우니 얼마나 경이롭습니까. 그래서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손을 많이 남기려는 본성을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당근을 좋아하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가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제 주위를 둘러보니 당근을 좋아하는 지인이 아이를 넷이나 두었더라고요. 가설에 힘이 실리는.(웃음)-요즈음에는 어떤 작물이나 개량종이 많이 나오지 않나요.물론이죠. 우리는 토종 작물을 키우는데 수정이 안 되어도 열매를 갖는 개량종이 많습니다. 오이도 그중 하나죠. 그래서 무정오이가 많습니다. 토종 오이는 지나면 노각이 되거든요. 개량종은 길이는 길어지는데 안에 씨앗이 아주 부실합니다. 토종은 통통하죠. 자기 몸 안에 씨앗을 품기 위한 스스로의 변화예요. 자기 안에 씨앗을 맺는 오이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런 오이를 유정오이라고 부릅니다. 씨앗도 없고 부실한 오이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봐요.-곡식꽃에서 특별한 행복을 얻은 것 같습니다.작물과 마주하면서 공감하고 그들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기쁨이 크죠.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 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예요. 곡식꽃 이야기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도 소소하지만 가치 있는 이 즐거움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시골에도 곡식꽃이 예전보다 많이 없어진 것 아닌가요.그럴 겁니다. 꽃을 다 좋아하지만 정작 우리를 먹여 살리는 꽃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만드는 벼꽃이나 콩꽃, 김치를 만드는 배추꽃 무꽃도 그렇죠. 시골에서도 이런 꽃들에 별 관심이 없어요. 왜냐면 꽃을 피워야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열매를 거두는 작물은 꽃을 피우지만 무나 배추도 지금은 다 씨앗을 사서 심잖아요. 배추나 무꽃은 늦여름에 심어 겨울을 나면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우죠. 그런데 가을에 배추 무를 뽑고 나면 밭을 다 갈아엎잖아요. 모든 작물농사가 이런 식으로 되다보니 농촌에서도 꽃이 많이 사라질 수밖에 없죠. 이런 순환이 계속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먹는 것이 자연에서 왔다는 것조차 잊게 되겠죠. 그것이 안타까워서 곡식꽃 작업을 하게 된 겁니다.-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꽃들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군요. 도시사람들에게는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몇 군데 매체에 연재하고 있고, 강의도 하는데, 젊은 층들의 호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습니다. 강의를 부탁해도 꼭 곡식꽃 이야기를 끼워서 하거든요. 보통 꽃은 피었을 때만 사랑받고 피고나면 그냥 쓰레기인데, 곡식꽃은 지고나면 더 예쁩니다. 앞에 열매를 달고 뒤의 꽃은 시들어 가는데 그것이 참 예뻐요.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큰 영감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지고 나서도 예쁜 것을 볼 수 있다면 세상을 보는 시각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생각해보면 우리 생활이 풍요로워지긴 했는데 삶의 근원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은 많이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가치 있는 것들을 외부에 의존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 찾아내는 일상의 즐거움이 소중하죠.부부에게 곡식꽃은 새로운 기쁨을 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여러 해째 남편은 사진으로 곡식꽃을 담고 아내는 글로 꽃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부부가 함께 해나가는 이 작업의 결실은 우리들에게 또다시 좋은 선물로 안겨질 것이다. 그 결실이 기다려진다.● 김광화장영란 부부는 대안학교 교육공동체 생활건강한 먹을거리 관련 책 여러권경상도 출신인 김광화씨와 서울 토박이인 장영란씨는 1998년 두 아이를 데리고 무주로 들어왔다. 교사였던 남편과 국문학을 전공한 아내 모두 삽십대 후반, 세상살이가 더 진지해지는 즈음이었다. 부부는 그보다 2년 앞서 남편의 제안으로 서울을 떠나 경남 산청에서 대안학교(간디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교육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동체 삶에 한계가 왔다. 스스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무주로 올 때는 산청으로 떠났을 때보다도 앞날이 더 막막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무모했던 선택 덕분에 삶이 새로워졌다. 초등학생인 딸과 여섯 살 터울인 아들은 시골 생활에 부부보다도 더 잘 적응했다. 무주는 부부보다 앞서 자리 잡은 허병섭 목사와 인연이 닿았던 덕분에 얻은 삶의 새로운 터였다. 논을 구하고 농사를 시작했다. 이웃들은 젊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을까 걱정했다.처음에는 벼농사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체득한 농사일과 풍경이 스승이 됐다. 중학교 1학년이던 딸이 봄소풍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했다.네 가족이 스물 네 시간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삶이 시작됐다. 나쁘진 않았으나 도시에 있을 때보다 부부싸움이 잦아졌다. 엄마 아빠의 갈등은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부부는 갈등이 심화되면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된 환경에서 아이들과 대화는 부부싸움에서 벗어나게 한 큰 힘이었다. 가족들이 서로의 무의식 세계까지 알게 되는 환경.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통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소통하기 위해 노력 했다. 아이들이, 아빠가, 아내가, 엄마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더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이가 됐다.처음에는 벼농사에만 집중하다가 식구들이 먹는 먹을거리를 스스로 해결해보자고 생각했다. 자급자족하는 일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먹을거리를 직접 생산해낼 수 있게 됐다.딸은 3년 전에 서울로 갔다. 역시 청년공동체에서 잘 지내고 있지만 가정을 이루면 시골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누나가 살던 아래채를 물려받은 아들은 밥을 같이 먹고 일은 같이 하지만 철저하게 독립된 생활을 한다.부부는 7-8년 전부터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는 곡식꽃을 공부하며 사계절 꽃의 변화를 기록하고 사진으로 담고 있다.건강한 먹을거리에 관심이 많은 가족은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글쓰기의 일상이 가져온 빛나는 결실이다. 〈자연달력 제철밥상〉 〈숨 쉬는 양념 밥상〉 〈아이들은 자연이다〉 〈자연 그대로 먹어라〉 〈열두 달 토끼밥상〉 〈피어라 남자〉 등 인데, 이 중 부부가 펴낸 책 <아이들은 자연이다>는 꾸준한 인기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 스스로 절판했고, 〈자연달력 제철밥상〉은 지난해 내용을 보완해 개정판을 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11.20 23:02

익산 출신 김문규 농협중앙회 상무 "상호금융 예금·대출 규모 400조 돌파, 국내 유일"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 농업에 종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리채로 인한 어려움을 기억할 것이다. 고리채가 기승을 부리던 1969년 농협은 상호금융사업을 처음 시작했다. 1961년 농협이 창립되고, 이후 53년이 지나는 동안 농촌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농협의 상호금융 사업도 해마다 달라지는 농촌과 고객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한편, 금융기관으로서 경쟁력을 키우며 성장해왔다.지난 10일 한-중 FTA가 타결되면서 농촌을 지켜온 농민들은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농촌은 농산물 수입개방과 가격 하락,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가운데, 농축협의 상호금융사업을 총괄 지원하는 전북 출신 김문규 농협중앙회 상무 겸 상호금융지원본부장을 만나 농협 상호금융이 농촌과 농업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들어봤다. 특히, 농협 상호금융이 지역 대표 금융기관으로서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향후 각오도 들어봤다.-먼저 상호금융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쉽게말해 농협 상호금융은 지역 농축협의 금융사업을 지칭합니다. 전국 지역 농축협의 금융업무 지도 및 지원하고, 농축협 여유자금 운용 등의 업무를 상호금융본부에서 담당하고 있습니다. 상호금융은 조합원간 상호 자금융통을 통해 자금의 부족과 잉여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상호부조적 금융을 말합니다. 농협의 상호금융은 1969년 당시 농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던 고리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고, 결과적으로 농촌지역의 사채의존도와 금리를 큰 폭으로 낮추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1980~90년대를 지나며 지역 농축협 금융사업은 발전 기반을 갖추게 됐고, 영농자금이나 농가부채대책 등 정책자금을 농가에 연결해주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자부합니다. 농협 상호금융은 지난 2012년 농협중앙회 사업구조개편을 통해 대표이사 체제로 전환, 지역 농축협 금융사업 지원을 강화할 수 있게됐습니다.-그러면 요즘 가장 집중하는 분야는 무엇입니까.지역 농축협은 농산물의 생산유통을 지원하고 농촌 지도사업과 복지사업 등을 펼치고 있고, 상호금융 사업은 이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상호금융지원본부에서는 현장에 맞는 경영개선방안을 제시하고 건전성 관리에 힘써 농축협의 건전경영과 상호금융 사업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지역 농축협의 금융사업 지원을 위한 상호금융 조직은 1969년 7월 시작해 올해로 만 45년이 됐습니다. 처음 150개 조합에서 시범실시됐던 상호금융 업무가 현재는 전국 1156개 농축협, 4572개 지점을 통해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난달말 현재, 예금규모는 243조원, 대출규모는 166조원으로 예금과 대출 합계가 400조원이 넘는 국내 유일의 금융기관입니다. 상호금융지원본부에서는 2011년도부터 농축협을 직접 방문해 소위 현장컨설팅을 실시중입니다. 경영컨설팅 담당팀은 지역 농축협을 직접 방문해 해당 농축협의 재무구조를 분석하고 맞춤 처방전을 제시하는데, 조합 경영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지역 농축협은 시중은행과는 달리 신용도가 다소 낮은 농업인 등 서민들이 주된 대출 고객이어서 연체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때문에 체계적인 리스크 관리 시스템과 관련 지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달말 현재, 연체채권 비율이 2.98%로 전년 동기(3.70%)에 비해 0.72%p나 줄었습니다. 이는 상호금융권(수협,신협,산림조합)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며 제1금융권(은행) 수준에 근접한 수치입니다.-일반 고객의 입장에서는 금융신상품 개발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고객의 수요를 파악하고 농협이 가진 특색을 살린 상품들을 출시해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고 노후준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을 반영해 개발한참좋은행복설계통장을 예로들면, 출시해 영업한지 97일만에 판매액 2조원, 판매좌수 30만좌를 달성했습니다. 중소 자영업자 등을 위한 혜택을 담은사장님성공대출이나, 도시와 농촌의 부모와 자녀를 이어주고 가족구성원 간 금융거래시 혜택을 주는도농사랑가족통장등도 농협의 특색을 살린 상품으로 인기몰이중 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사회공헌 상품도 출시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2월 출시된 농협행복통장은 지역사회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공익상품으로 1조6997억원 판매를 통해 13억원의 사회공헌기금을 조성해 지역사회 나눔에 뜻 깊게 쓰인 바 있습니다. 올해는지역 대표 금융기관답게 판매금액의 일부를 지역사회로 환원하는지역사랑나눔예적금을 지난 10월에 출시했습니다.-직접 금융기관 창구를 찾아 거래하는 대면거래의 비중이 전체 거래의 10% 내외 밖에 안 될 정도로 e금융의 비중이 커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스마트폰의 대중화가 금융거래의 양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농축협의 e금융 고객은 지난달말 기준 955만 1000명이고 이 중 스마트뱅킹 고객도 328만명에 달합니다. 농협은 올해 안전하고 편리한 e금융 거래를 위해 차세대 시스템을 구축했고, 나만의 은행주소, 피싱가드 등으로 e-금융사고 예방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스마트뱅킹 이용자가 손쉽게 우리 농축산물 등을 주문결제할 수 있는 NH바로바로 앱 등을 개발, 유통과 금융이 결합된 농협만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안목은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그에 맞게 전문적 역량을 갖춰야 합니다. 그동안 지역 농축협에서 외화환전은 가능했지만 해외로 돈을 송금 할 수는 없었기에 농촌의 많은 다문화가정과 외국근로자들이 모국으로 돈을 송금하기 위해서는 시중은행을 찾아 군이나 시지역으로 나가야하는 불편을 겪었습니다. 이 같은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우리는 계속 정부에 건의했고, 지난 7월 기획재정부에서 상호금융권 최초로연간 3만 달러 한도로 농축협에서의 해외송금을 허용방안을 발표, 농협은 이제 내년 1월부터 외화 송금서비스를 제공 할 예정입니다. 물론, 최근들어 금융사기 피해 예방에 주력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을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김문규 상무상호금융지원본부장은 요직 두루거친 '정통 농협맨', 전북 농업인 대변 창구 역할김문규 농협중앙회 상무(57)는 익산 용동 출신으로 이리남중, 강경사고를 거쳐 농협대학교를 졸업했다.전북에서는 농협중앙회 무주군지부장, 지역본부 부본부장,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을 지냈다.지난해 6월 NH농협은행 부행장으로 승진한데이어, 올1월 농협중앙회 상무로 영전했다.전북 출신으로는 황의영 전 상무 이래 3년만에 중앙회 상무가 탄생, 도내 농업인이나 조합장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대변하는 창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평가다.그는 중앙회 상무로서 상호금융지원본부장을 맡은 지도 벌써 1년이 돼간다"며 상호금융 사업은 농축협이 농업인들에게 원활하게 자금지원과 융통을 할 수 있도록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하는데, 경제상황과 제도적 여건 등 경영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하지만, 그는 농협의 정체성을 생각하고 금융사업의 기본으로 돌아가려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쉼없이 고민했다고 한다.그는 농업인에게 혜택을 주는 금융, 좋은 상품과 서비스가 있고 그리고 고객이 만족하는 금융, 안전하고 건실한 금융을 추구한 덕에 올 한 해 많은 부분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 기획
  • 위병기
  • 2014.11.20 23:02

[23. 고독한 노년의 삶] 병·빈곤·외로움…어르신들 "의지할 친구가 필요해요"

지난해 12월 말 기준 전북지역 65세 이상 노인 인구 31만2000명 중 6만5054명(20.9%)은 홀로노인인 것으로 나타났다.도내 노인 5명 가운데 한 명은 배우자나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셈이다.이런 홀로노인들을 무엇보다 힘들게 하는 건 경제적인 어려움과 고독감이다. 도내 홀로노인 중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기초생활보장과 차상위계층의 수는 2만475명으로 전체 홀로노인의 31%를 차지한다. 또한 홀로노인이 우울증에 걸리는 비율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20% 가량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201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만명 당 자살자는 28.5명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이 중에서도 60대는 인구 10만명당 자살자가 40.7명, 70대가 66.9명, 80대 이상이 94.7명이다. 노인 자살의 심각성이 더욱 잘 드러난다.△홀로 사는 노인들의 열악한 삶통계숫자로만 접하는 노인 우울 및 자살률로는 구체적인 개인의 삶과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전주 금암노인복지관의 홀로노인 친구만들기사업 담당자인 강성대 사회복지사와 함께 홀로노인들의 일상을 들여다 봤다.2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김모 씨(73)는 일반주택 곁에 딸린 쪽방에 거주한다. 월세 10만원에 살고 있는 김씨는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다. 전기장판 하나와 얇은 이불로 1년을 버틴다. 냉장고도 가동하지 않고 취사도구는 먼지가 쌓인 채 방치돼 있다. 뚜껑이 부러져 덜렁거리는 작은 전기밥솥에 밥이 반쯤 남아 식어 있었다.김씨의 한달 수입은 기초연금 20만원과 국민연금 20여만원이다. 가끔 인근 농촌으로 일을 나가 5~6만원의 일당을 받고 일을 했지만, 올해 들어 수술한 허리의 통증과 건강악화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문제는 김씨에게 치매로 의심될 정도의 심각한 건망증이 보인다는 것이다. 주 2회 만나는 사회복지사와 일주일전에 함께 했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초연금이 들어오는 통장을 분실해 자주 재발급 받으며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경향도 보인다.셋집에 사는 서러움을 토로하며 김씨는 수입의 거의 전부를 복권을 구입하는데 지출한다. 집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전주시 외곽에 거주하는 송모 씨(87여)는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외딴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자녀들은 왕래를 거의 하지 않고 있어서 송씨는 하루 종일 이야기 할 사람이 없다. 허리수술, 무릎관절수술로 통증에 시달리며 눈에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려 사물을 분간하기 어렵다. 냉장고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음식이 말라붙어 있다. 개수대에는 밥그릇 하나가 더러운 물에 담겨있고 화장실은 집 밖에 멀리 떨어져 있어 이용하기가 불편하다. 좀처럼 밥을 거르지는 않지만 반찬은 김치 한 가지 뿐이다. 송씨는 사회복지사가 방문할 때마다 서럽고, 슬프고, 쓸쓸해서 이렇게 살아 뭐하냐는 생각만 든다고 노래부르듯 말한다.정모 씨(72여)는 임대아파트에 홀로 산다. 함께 살던 어머니가 고령과 질병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한지 수년째다.기초연금 20만원 외에 수입이 없는 정씨는 임대료가 체납돼 강제퇴거 위기에 있다. 정씨는 치매로 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지가 드러날까봐 극도로 경계한다. 집에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거부한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거실에는 온갖 물건들이 쌓여있어 발디딜 틈이 없다.△홀로노인 친구 만들기 사업올해 보건복지부가 홀로노인의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한 시범사업으로 추진한 홀로노인 친구 만들기 시범사업에 전북지역에서 전주 금암노인복지관, 군산나운종합복지관, 남원시노인복지관, 익산노인복지관 등 모두 4개의 기관이 선정됐다. 사업의 목적은 가족,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홀로노인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친구를 만들어줘 홀로노인의 고독사자살예방, 우울증 경감과 활기찬 노후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다.강성대 사회복지사는 홀로노인 친구 만들기 사업의 효과에 대해 스스로 주변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외롭게 지내던 홀로노인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표정이 밝아지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즐겁게 대화하는 등 많은 변화를 보였다고 말했다.전주 금암노인복지관 서양열 관장은 복지관에서 사회적으로 외로운 노인들의 여가활동을 위해 힘쓰고 있다. 홀로노인을 찾아다니며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그분들의 외로움을 달래줘야 한다고 말했다.그는 또 가정에서도 노인들이 혼자 살고 싶다고 해도 그대로 믿지 말고 함께 살 수 있으면 모시고 살고 정말 거부한다면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친밀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그는 국가는 노인들이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진단 비용을 무료로 해주고 치료에도 특혜를 줘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복지정책을 확립해야 한다면서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나 어떤 문제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상담센터가 많이 생겨야 한다고 밝혔다.● 전북대병원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 송은주 "규칙적 운동 우울증 예방 가족들 관심 갖고 나서야"-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전북대학교병원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는 응급실에 내원한 자살 시도자를 대상으로 정서적 안정 회복, 재활촉진, 자살 재시도 방지 교육 등 다양한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한 우리 병원 응급실과 정신건강의학, 각 지역내 정신건강증진센터, 사회복지시설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자살 시도자에 대한 심리치료 및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노인 우울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은.우울증은 신체질환이나 사망률이 증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01년 WHO 자료에 따르면 1990년도에는 주요 우울증(Major depression)이 주요 장애 및 사망 원인(disease burden) 질환 중 네 번째를 차지하였다. 2020년도가 되면 두 번째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우울증은 노인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노인들의 우울증을 방치하는 것은 자살시도를 높일 수 있다. 우울증에 대해 좀 더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우울증의 치료 방법과 예방책이 있다면.자살 시도자의 자살 재시도로 인한 사망률이 일반인들에 비해 25배~50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살시도는 정신건강의학적 병임을 인지하도록 치료 동기강화를 위한 면담과 정신건강의학적 치료를 시급히 시작해야 한다. 자살 재시도 방지를 위한 정신건강의학적 치료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가족이 인지하고 환자의 치료동기를 강화하고 지지해야 한다. 우울증은 치료반응이 매우 좋은 정신과 질환이다. 치료율이 90%에 달하지만,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 우울증은 약물치료 및 정신치료와 함께 규칙적인 운동이 빠른 회복을 돕는다. 우울증은 규칙적 운동(하루에 산책 30분 이상), 기본적인 건강 유지법(비타민미네랄 복용, 설탕하얀 밀가루술카페인의 지나친 섭취 금지)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질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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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8 23:02

전주 출신 최수규 중소기업청 차장 "현장 중심 정책, 중소상공인 살맛 나는 세상 만들기 최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선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이 살아야 한다. 외형상 삼성, 현대 등 대기업 몇 개가 수출을 다하고 국가경제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내실이 튼튼한 중소상공인들의 뒷받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정부들어 소상공인, 전통시장, 창업, 동반성장 등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중소기업 관련 정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항상 어려움을 토로하는게 현실이다.이런 가운데 최근 부임해 중소기업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중소기업청 최수규 차장(56·1급)을 만나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위한 향후 계획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대전정부청사 중소기업청 차장실에서 이뤄졌다.-현 정부 출범과 더불어 청와대 비서관으로 재직하시다가 최근 중소기업청 차장으로 부임하셨는데 소감과 각오가 궁금합니다.“지난해 1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파견돼 중기청을 떠난 후, 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을 거쳐 오랜만에 친정인 중기청에 복귀했습니다. 서로 힘들더라도 서로 어깨를 다독이던 중기청 선후배들과 가까이서 함께 일할 수 있게 돼서 기쁘지만, 차장이라는 중책을 맡게돼 부담 또한 큽니다. 어떻게 하면 중기청이 ‘일 잘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결과적으로 중소상공인들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되는 일이 무엇일까를 쉴틈없이 고민하고 있습니다.”-청와대 참모로 활동했기 때문에 현 정부의 중소기업 관련 마인드를 누구보다 잘 아실 것으로 보는데, 바람직한 중소기업 정책의 요체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대통령께서도 항상 현장을 찾고 계신데 한마디로 ‘현장 중심의 정책’이 바람직한 중소기업 정책의 요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60~70년대와 같이 정부가 기업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어려우며, 정부는 중소기업이 창조적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경영환경을 구축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현장의 중소기업들이 원하는 바를 신속히 파악하여, 현장에서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고 현장의 수요를 반영하지 않은 정책은 오히려 기업에게 새로운 ‘손톱 밑 가시’로 작용할 위험이 있습니다.”-전주 남부시장을 예로 들면, 한옥마을의 한류 열풍과 맞물려 최근 야시장을 개장해서 선풍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데 한류와 연계한 글로벌 명품시장 육성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글로벌 명품시장은 외국 관광객을 타깃으로 주변에 유명 관광지와 한국적 콘텐츠를 보유한 전통시장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육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요 지원내용은 우리나라 특유의 활기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야시장 개설, K-pop, 난타공연 등 다양한 문화체험 기회 부여, ‘명품 면세거리’ 조성, 외국인 입맛에 맞는 퓨전메뉴 개발, 외국인 종합안내센터, 통역 가이드 배치 등 입니다. 전주 남부시장은 세계적인 관광지인 한옥마을과 전주비빔밥, 전동성당, 한지문화축제 등 다양한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문화와 지역먹거리가 있는 곳인데다 지난달말 오픈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시장 내 한옥마을 야시장도 모범 사례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이번에 발표된 ‘개성과 특색 있는 전통시장 육성방안’은 그간의 획일적인 시설개선 중심의 모방형 지원에서 벗어나 대형마트 등과 차별화된 그 시장만의 지속가능한 특색을 찾아서 대표브랜드화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전통시장은 시설 및 마케팅 기법 측면에서 대형마트, 백화점 등과 비교우위를 가질 수는 없는만큼 차별화된 개성과 매력을 갖지 않으면 고객을 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소상공인들은 지역신용보증재단을 통해 보증을 받는데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역신용보증재단을 건전하게 성장 발전시키기 위한 대책은 무엇이고, 소상공인들에게 혜택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입니까.“전국 16개 지역신용보증재단에서 담보력이 부족한 지역 소상공인에게 보증서를 발급하여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고, 중기청은 지역신보를 통해 세월호 관련 1조원 특례보증 등 그간 14조8000억원의 보증을 지원해왔습니다. 전북신보재단의 경우 지난 2002년 설립이후 3967억원의 보증을 지원하는 등 지역 소상공인 자금지원에 역할을 톡톡히 해 왔습니다. 저신용·저소득계층에 대해서는 햇살론으로 1조원을 지원해 자금애로를 덜어주고, 보증 신청서류를 대폭 축소해 소상공인들의 보증이용의 편리성을 높일 방침입니다.”-도세가 약한 전북의 경우 지역기업 및 소상공인 육성 지원에 어려움이 많습니다.“전북은 중소기업 중에서도 소상공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92%로 전국 평균 87%보다 높아 경제기반이 취약한 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 같은데 어려운 경제여건을 하루아침에 바꿔놓기는 어렵겠지만,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처방책으로, 지역산업의 특성화 전략과 국책사업의 유치와 연계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전주로 이전한 (주)효성 탄소공장과, 전주에 소재한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을 연계해 전북이 한국탄소산업의 메카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은 좋은 사례로 생각합니다. 국가적 자원으로 평가될 새만금사업, 국가식품클러스터 구축 등 크고 작은 국책사업들을 지역산업과 연계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필요가 있고, 김제 지평선단지에 조성될 뿌리산업 클러스터 육성 등 성장 동력을 뒷받침할 배후산업 육성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이같은 대외적 노력과 함께, 전북지역 내의 양극화 해소와 질적인 개선도 중요합니다. 중소기업 지원·유관기관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사업별·업종별로 연차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여, 지역 내 불균형 해소와 시·군별 특성화 전략을 구축하는데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최수규 차장은 쌀집 아들, 중소기업·전통시장 정책에 애착최수규 중소기업청 차장은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부속초, 전주서중, 전주고를 졸업한뒤 고려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이후 미 오리건주립대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지난 1986년 행정고시(30회)로 공직에 입문했다.중소기업청의 전신인 공업진흥청에서 행정 관료로 첫발을 시작해 중기청에서 잔뼈가 굵었다.그가 국내 최고의 중소기업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 전주 남부시장에서 ‘남흥상회’란 쌀가게를 운영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전통시장이나 소상공인의 삶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중기청에서 관료생활을 한 것도 바로 지역 상공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중기청 판로지원과장, 정책총괄과장, 창업벤처국장, 경기지방청장, 중소기업정책국장, 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을 거쳐 이번에 중기청 차장으로 부임했다.공직생활중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그는 “판로지원과장 재직때 ‘전통시장 시설현대화사업’을 처음 시도했던 일"이라고 말했다.어려운 시장상인을 돕자는 취지에서 진행된 작은 정책이었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상전벽해라고 할 정도로 정부내 큰 정책이 된게 최고 보람이라고 한다.청와대 중소기업비서관 재직 시절, 현 정부 창조경제의 주역인 벤처·창업기업 활성화를 위해 지난해 5월 발표한 ‘벤처·창업 자금생태계 선순환 방안’정책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라고 한다.소탈한 성품으로 누구에게나 격의없이 대하는 편이나 업무에 관해서는 불도저처럼 밀어부치는 뚝심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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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4.11.17 23:02

[(42) 청일전쟁 그 이후 - 중국 난징의 희생자들] 1937년 일본군, 민간인 30만명 학살…'목 베기 시합'까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우위를 점했다.그래도 아직은 일본이 열강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한, 그리고 을미사변(1895)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공포와 반감이 극에 달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이며 줄타기 외교를 시도했다(아관파천1896).하지만 조선의 이런 중립국화 전략도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며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일본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은 동아시아에 없었다.청은 무술변법 등을 통해 재기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신해혁명으로 무너졌다.쑨원(손문孫文) 측과의 약속을 깨고 신생 중화민국의 독재자가 된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사망한 이후에는, 대륙은 대군벌시대에 빠져들었다.그리고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의 역사는 민국 수도 난징(남경南京)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난징은 무덤 도시?난징에 올 때마다 공기가 무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동행한 통역 겸 가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난징이라는 도시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란다.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난징 관광을 가리켜 무덤 관광이라고까지 표현한다고.일단 난징의 무덤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중산릉이다. 중국의 국부(國父)로 일컬어지는 쑨원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에 걸쳐 건립됐다.중산릉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 중산에서 따온 것이다. 황제의 무덤에만 붙이는 릉이라는 글자는 황제를 끌어내리고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글자지만, 중국인들이 얼마나 그를 추앙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당시 중국 인구 3억9200만명을 나타내는 392개의 돌계단 위에 그의 사상인 삼민주의(민족민주민권)를 나타내는 현판이 걸린 묘당이 자리잡고 있다.중산릉 옆에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 묻혀 있는 명효릉도 있다. 명은 강남에서 건국된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대륙을 통일한 나라다.지금은 특별한 도시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난징 시내에는 자부심이 숨어 있다.1912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수도로 정해진 곳이 난징이었고, 따라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주요 활동 무대도 난징과 그 인근이었다.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를 거둔 1949년 이후에도, 대만으로 피신한 중화민국은 여전히 이곳을 헌법상 수도로 명시해두고 있다.그래서 총통부 관저 옆에는 중화민국 수립 무렵을 재현한 1912 거리가 조성돼 있기도 하다.하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주권국가를 향한 열망이나 어떤 영광만이 이 도시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잊히지 않을 숫자 30만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공황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물론 동아시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나치 독일이나 파쇼 이탈리아가 그랬듯, 일본은 이런 상황의 타개책으로 군국주의적 팽창 카드를 꺼내들었다.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동북3성을 점령한 뒤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해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溥儀)를 수장으로 앉혔다.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 중-일 간의 군사적 충돌의 연장선에 있다. 일각에서는 중일전쟁의 시발점을 만주사변으로 보기도 한다.1937년 7월, 우연히 발생한 병사 실종사건을 구실 삼아 대대적인 대륙 침공에 나선 일본은,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중국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하지만 그 해 10월에는 상하이(상해上海)가 함락됐고, 장제스(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11월에 충칭(중경重慶)으로 수도를 옮겼다.그리고 12월, 난징이 함락됐다.구타와 가혹행위가 만연한 비인간적 병영 문화와 전쟁 스트레스는 집단 광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것은 난징과 주변지역에 살던 민간인 30만명이 학살되는 참극으로 나타났다.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와 노다 쓰요시(野田毅)라는 두 군인은 누가 먼저 100명의 목을 베는지를 놓고 시합을 벌였고, 일본의 언론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전쟁은 중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고, 중국인은 물론 이 참극을 잊지 않았다.2007년에 확장 개관한 난징 대학살 기념관은, 건물 자체에 그런 한이 사무쳐있는 듯했다.기념관 앞 광장에 설치된 십자가 모양의 대형 구조물 앞에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는 공간을 지배하는 무거운 분위기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모든 전시물에는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로 된 설명이 붙어있다. 희생자의 유가족 등을 추적해 모은 희생자 각각에 대한 정보를 일종의 아카이브로 전시해놓은 것도 눈에 띄었다.△국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희생자난징에는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 또 있다.우리 역시 겪은 일이지만, 중국에서도 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이념 대립이 당연히 존재했다. 오죽하면 두 차례나 내전을 치렀을까.1927년 장제스의 공산당원 숙청으로 시작된 제1차 국공내전은 1936년 서안 사건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단 힘을 합쳐 일본에 대항하기로 하면서 일단 종결된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이 내전의 결과로 대륙을 지배하게 된 것은 공산당이었다.위화타이(우화대雨花臺)는 그런 이념 대립의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난징 국민당 정권은 당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들을 잡아 이곳에서 처형했다. 중국 공산당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처형당한 공산주의자가 10만여명에 달한다고 한다.그 처형장 자리를 내전 끝에 다시 밟게 된 중국 공산당은, 1950년 그 자리에 혁명열사릉원을 건립했다.기념관 안, 추모 자리에는 수천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한 명도 잊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그런 중국 공산당이 나중에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학살을 자행한 것을 떠올리면, 역시 역사는 한 쪽만의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그리고 정말로 이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지 않을 수 없다.그런 감정 속에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대한민국에게, 우리는 어떤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자작고개나 우금치, 구미란 등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억할 의지가, 뒤이은 일제의 강압 식민통치 과정에서, 이어진 전쟁과 각종 사고와 여러 폭력 속에서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을 자신이 우리에게 있는가?우리가 당한 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잊지 않으며,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려는 노력은 있는가?난징이 준 숙제다.

  • 기획
  • 권혁일
  • 2014.11.12 23:02

[22. 일하는 여성 지원정책]임신에서 재취업까지…'워킹맘 부담' 덜어드립니다

정부는 지난해 6월 고용률 70% 로드맵을 발표한 후 주요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낙후돼 있는 여성고용률 제고를 위해 직장어린이집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이후 시간 선택제 일자리 활성화 추진계획과 함께 일하는 여성의 생애 주기별 경력유지 지원 방안 등 다양한 정책노력을 경주해왔다.그러나 다양한 제도 시행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여성정책연구원 민관 합동 현장점검(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남녀 1132명 대상)과 고용노동부한국노동연구원(온오프라인 정책 모니터링단)이 여성고용정책 추진현황을 모니터링하고 현장 점검한 결과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한 제도 시행이 정책수요자의 인지도가 낮고 직장문화 인식 개선은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물론 정책 추진결과가 모두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여성고용 현황을 살펴보면 최근 15세 이상 여성 고용률이 처음으로 50%를 돌파했다. 15세부터 64세까지 여성 고용률은 지난해 6월 54.7%에서 올해 9월 55.4%로 상승했다. 또 여성고용제도 활성화 측면에서 도입된 시간제보육은 올해 8월 기준, 총 98개소에서 시범실시하고 있다. 내년에는 230개소로 확대된다.더불어 직장어린이집의 경우 의무사업장 직접설치 비율을 늘려가고 있다. 산업단지 공동어린이집은 정부 지원 확대, 규제완화로 지난해 9곳에서 올해 24곳으로 크게 늘었다.이 밖에도 남성 육아휴직이 증가하고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홍보 강화에도 주력하고 있다. 또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 활용 제도는 이제 시작단계이나 육아휴직에 비해 이용자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다만, 출산육아기 여성의 고용률이 급락하는 M-Curve 현상 지속으로 선진국과의 격차는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고, 비정규직 중심의 재취업, 경력단절에 따른 짧은 근속으로 남녀의 임금격차도 OECD국가 중 가장 큰 것으로 확인됐다.그러나, 앞서 지적한바와 같이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한 제도시행의 실효성이 적고, 지속적인 제도개선과 인식강화 필요성 제기에 따라 새로운 제도와 문화가 요구되고 있다.이에 여성고용 후속보완 대책으로 지난달 15일 경제장관회의에서 보육돌봄 효과성제고, 모성보호 활성화, 여성고용의 질 개선, 일가정양립인식문화개선 등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그렇다면 여성들이 일과 가정 사이에서 자신의 역량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사업주는 더 많은 여성을 고용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마련한 다양한 지원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자.△임신육아기 근로자 지원책크게 임신출산기 지원과 영유아기 지원으로 나뉠 수 있다.먼저, 임신출산기 지원은 첫 번째 출산 전후 휴가제도로 사업주는 임신 중인 여성근로자에게 출산 전과 후 90일 휴가를 주어야 하며, 출산 후엔 반드시 45일 이상이 확보되도록 하고 있다.또한 유산이나 사산(자연유산인공 임신중절 포함)시에도 임신기간에 따라 휴가기간이 최단 5일부터 최장 90일까지 정해져 있다. 더불어 임신 중인 여성근로자가 태아검진에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경우 사업주가 이를 허용하는 것을 의무화 하고 그에 따른 임금을 삭감하지 못하도록 근로기준법 제74조의 2에 명시했다.두 번째로는 배우자 출산휴가 제도이다. 배우자 출산휴가 제도는 배우자가 출산한 경우 휴가를 청구할 수 있는 제도로 사업주는 근로자에게 3~5일의 휴가를 부여해야 하며, 휴가기간 중 최초 3일은 유급으로 부여해야 한다. 다만 배우자가 출산한 날로부터 반드시 30일 이내 청구해서 사용해야 한다.세 번째는 임신출산 진료비 지원 제도이다. 임신 여성 한 명당 50만원, 다태아의 경우 70만원 한도로 지원되며, 난임부부 시술비의 경우 신선배아와 동결배아를 구분, 최대 6회까지 지원된다.마지막으로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지원 제도로 출산가정에 산후가정방문서비스를 지원하는 서비스 이용권이 지급되며, 이용자 주소지관할 시군구 보건소에 산모 또는 가족 등이 신청하면 된다. 다만 모든 산모에 해당되는 지원 사업이 아닌 만큼 관할 보건소에 대상자에 해당되는지 여부를 먼저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영유아기, 근로자 지원책첫째 육아휴직제도로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가 있는 경우 최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으며, 휴직기간동안 월 통상임금의 40%를 육아휴직 급여로 지급받을 수 있다.두 번째는 영유아 건강관리지원으로 만 6세 미만 모든 영유아 대상, 건강검진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로 건강검진 7회와 구강검진 3회 비용지원이 가능하다.세 번째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급여제도이다.육아기 근로자들이 전일제 육아휴직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도는 최대 1년 사용 가능하며, 주당 15시간 이상 30시간 이하로 단축근로가 가능하다.다음으로는 월 평균 소득 150% 이하 가구에서 출생한 미숙아, 선천성 이상아에 대한 의료비 지원과, 소득과 무관하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만 3세~5세 전 계층을 대상으로 한 육아 학비 지원이 있다.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정부 지원정책은 궁극적으로 생애주기별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증대, 계속근로와 고용안정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도 신설에만 급급하기보다는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후속보완 대책을 발표한 만큼 정부는 물론, 기업수혜자 모두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육아휴직 이용자 김미숙 씨 "여성에 대한 배려가 곧 기업의 생존전략, 사업주 인식이 중요"지난 9월 둘째아이 분만 후 육아휴직에 들어간 김미숙 씨(36)는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간관리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인정 받는 직장여성으로, 섬유제조업 입사 8년차 경리과장이다.처음엔 3개월간의 출산휴가를 생각하였으나 3개월이 지나고서가 큰 문제였다. 시댁과 친정에 도움을 요청할 형편이 되지 않다 보니 당장 회사에 출근하게 되면 아이를 어떻게 맡겨야 할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고민이 된 것이다.사실 법적으론 가능하다는 휴직계를 내고 싶지만 회사 사정으로 보나 양심상 1년 동안 기다려 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경력도 그렇지만 다른 직장에서 어서 오라고 환영해 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머리 좋고 잘나가는 젊은 후배들에 치일 것 같아 두려웠어요.하지만 이런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됐다. 사장님의 배려로 마음 놓고 육아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김미숙씨의 육아휴직에 대한 공백은 대체인력이나 시간제 일자리를 활용할 예정이라는 사장님의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김 씨는 이렇듯 기업 운영자의 인식이 변해야한다면서 육아휴직은 인력손실이라는 시각보다 오히려 좋은 여성인력을 적극적인 육아휴직 활용을 통해 우수 여성인력을 확보하는 등 여성에 대한 배려가 곧 기업의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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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1.11 23:02

부안 구름호수마을 김성구 위원장, 울금·돼지감자 친환경 웰빙작물 주력···가공·판매까지

부안군 진서면 운호(雲湖)마을은 한자명을 따서 구름호수마을로 불린다. 곰소내소사~모항해수욕장 사이 해안도로변에 자리잡은 운호마을 앞으로는 서해바다가 망망하고, 뒤로는 변산 신선봉과 군신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42가구가 62㏊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겉에서 보면 그저 한적한 산골마을일 뿐이다.하지만 구름호수마을은 20년 전부터 뭔가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왔다. 이제는 조그만 산골 작은 마을에 도시민들이 농사 체험하러 찾고, 농산물 사러 찾는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오디, 울금, 돼지감자, 여주, 감, 마늘, 양파, 가시오가피 등 농산물이 입소문을 타면서 인터넷 공간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농식품부가 주관한 2015년 일반농산어촌개발공모사업에서 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마을만들기사업이 선정됐고, 이 마을 김성구 위원장은 농촌융합산업사업자 예비인증을 받았다. 벼농사, 고추농사를 짓던 마을이 몇 년 전부터 지역 특산품을 만들고, 이를 가공 판매하는데 성공하면서 그야말로 6차산업의 모델이 됐다.지난 달 30일 운호 정보화마을에서 김성구 위원장(61)을 인터뷰했다.-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 마을만들기 사업이 지난 달 정부가 공모한 농산어촌개발 사업에 선정 됐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업들이 진행됩니까.운호 구름호수권역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은 31억 원 규모이고, 운호 주변 7개 마을이 사업 대상입니다. 이 사업 유치에 나선지 7년만에 거둔 결실이어서 감개무량합니다. 권역 주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복지 공간을 확충한다고 보면 됩니다. 체육, 공원, 도서관(소회의실 겸용), 작은 영화관, 공연, 사물도 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농사만 짓는 1차산업 공간인 운호권역을 농산물 가공 판매 서비스 등 2차, 3차 산업 공간으로 확대하고 나아가 주민들이 복합문화공간에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궁극적으로 6차 산업을 지향하며, 그 성공모델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고 있습니다.-내년부터 사업이 진행되면 운호 구름호수권역 주민들의 삶의 질이 매우 높아질 것으로 기대됩니다. 운호마을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운호마을은 현대인들이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요구하는 특용작물을 친환경적으로 재배, 판매하면서 도시 소비자들과 소통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농산물을 생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 판매하는 시스템을 잘 갖췄고, 친환경 건강식품에 주력한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주로 어떤 농산품을 판매하고 있습니까.운호마을은 주로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지었습니다. 요즘은 울금과 돼지감자, 여주, 오디 등 현대인들이 주목하는 건강 기능식품 생산이 많아졌습니다. 가시오가피, 감, 양파, 마늘 등도 생산합니다.-위원장님은 특용작물 재배로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이끌어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를 짓게 됐는데, 처음부터 특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추 농사에 터널재배방식을 도입, 저는 물론 마을사람들이 높은 소득을 올렸죠. 그 덕에 1993년 서울종묘가 주는 농민대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9박10일짜리 일본 선진지 견학도 다녀왔습니다. 그 때 오끼나와 농업연구소에 다니는 소메야라는 분의 집에 갔는데, 20평 정도 텃밭에 제가 모르는 작물이 심어져 있더라구요. 향기가 좋고, 생강처럼 생긴 뿌리는 노란색을 띄었는데, 호기심에 무슨 작물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울금이라며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된다는 거예요. 한번 해보라고 권하는데 마음이 끌렸어요. 그들의 실험 연구 자료와 울금 18㎏을 가지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방송사 6시 내고향에 울금 재배가 소개됐는데 소비자 반응은 시원찮았습니다.울금은 카레에 들어가는 강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커큐민이 주성분이다. 기를 소통시키고, 어혈을 푸는데 도움이 된다. 간장염, 담석증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암 치료에 보조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식품이다.-고추를 재배하다 울금에 빠졌는데, 잘 됐습니까.사람 건강에 좋은 세계적 식품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울금에 미쳤는데, 사실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울금은 국내에서 생소했습니다. 게다가 처음에 너무 많은 면적에 재배했어요. 많은 울금을 생산했지만 거의 팔지 못해 썩히기 일쑤였습니다. 78년간 그랬는데, 사람들이 울금의 가치를 알고 찾아주기 바라며 고집스럽게 농사지었죠. 힘들어도 너무 좋은 작물이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김성구 위원장은 울금 농사를 첫해에 8000평, 이태에 1만2000평 지었다. 3.3㎡당 78㎏ 생산할 수 있는데, 농사가 잘 되면 10㎏도 생산했다. 8㎏ 기준으로 60톤 이상을 생산했으니, 엄청난 양이다.수확해서 창고에 쟁여 놓았는데, 결국 못팔고 상당량을 버렸어요.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래도 이걸 버리지 못한 것은,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지요.-아무리 좋은 농산물이라도 팔리지 않으면 계속 농사지을 수 없잖아요.사실 울금만 바라볼 수 없었죠. 집안 살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2002년에 돼지감자를 시작하게 됐습니다.돼지감자는 뚱딴지라고 불리는 다년생 식물로서 주변에 자생한다. 당뇨, 해열, 변비, 비만에 효능이 있다고 알려진다. 천연 인슐린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돼지감자는 어떻게 재배하게 됐는가요.돼지감자는 밭두렁이나 야산에 자생하는 식물인데요, 어느날 시골 방앗간에 갔다가 돼지감자 볶는 것을 보고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당뇨에 좋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러던 중 원광대 김윤철 교수(약학과)를 찾아가 오디와 돼지감자 둘 중 어느 것을 재배하는 것이 낫겠냐고 문의했더니, 김교수가 돼지감자를 재배하라고 권했어요. 열을 가해도 주요 성분이 파괴되지 않는 장점이 있고, 앞으로 세계적 식품이 될 거라고 조언했어요. 게다가 안팔리면 자기가 다 팔아주겠다는 거예요. 김교수를 믿고 돼지감자를 재배하게 됐죠.-돼지감자도 울금처럼 대규모로 시작했나요.3000평으로 시작했습니다.-그 많은 종자를 어떻게 구했습니까.마침 장수 계북면에 돼지감자를 재배했다가 골치를 앓게 된 농가가 있었어요. 돼지감자로 연료를 만들어 수출한다면서 업자들이 농가와 계약재배를 했는데, 물건을 가져가지 않은 것이죠. 계북면에 사는 지인을 통해 2톤 정도를 캐올 수 있었죠. 그 농가들은 돼지감자가 처치 곤란이었고, 저는 절실했습니다.-농사는 잘 됐습니까.돼지감자 3000평을 심었더니, 당장 어머니부터 미친 놈이지. 좋은 밭에다 천지에 널려 있는 것을 왜 심어하며 이해를 못했어요. 마을 사람들도 미친놈이라고 했어요. 농사는 잘 됐어요. 그런데 2년간 박살이 났어요. 돼지감자는 3.3㎡당 생산량이 20㎏ 정도 되는데, 3000평이니 60톤이 생산된 셈이죠. 부직포 덮고, 비닐 덮고 해서 창고에 정성스럽게 보관했는데 모두 썩고 말았어요. 돼지감자가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열 때문에 폭삭 썩었어요. 그래서 아마 알콜을 만들려고 했던가 봐요. 남들 눈에 보이기 부끄러워서 세 아들과 함께 한 밤중에 몰래 처리했지요. 몇 년 실패하고 나서야 건조 가공을 생각해 냈어요.-그래서 가공 일은 잘 됐습니까.돼지감자를 처음 식품으로 취급하려다보니 재배와 보관 방법, 가공방법 등을 잘 몰라서 힘들었습니다. 시행착오, 실패를 많이 경험했죠. 생산량이 많은데다 열이 많이 나 창고 보관이 어려웠어요. 저온저장고도 대용량이어서 부담이었고요. 그래서 건조 가공을 생각했죠. 건조해 뒀다가 필요할 때마다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엑기스용은 냉동해서 사용하고요. 지금은 수확한 돼지감자를 곧바로 세척해서 건조합니다. 모든 시설을 갖췄죠.-제품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돼지감자 환, 분말, 엑기스 등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제품 가격도 제가 정했는데, 처음 360g 한 봉지에 5000원으로 정했다가 따져보니 수지가 맞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1만원을 받고 있습니다.-울금은 별 재미를 못 본 셈인데, 돼지감자는 반응이 괜찮았나요.제가 돼지감자를 재배하는 사실이 운좋게 6시 내고향에 방송됐어요. 돼지감자를 재배하기 시작한지 2년 후 일이죠. 울금은 방송 나간 뒤 반응이 별로였는데, 돼지감자는 소비자 반응이 좋았어요. 특히 2010년 10월5일 방송이 나간 뒤 대박이 났어요. 소비자들로부터 엄청난 전화가 왔고, 그 때 고객이 많이 확보됐어요. 돼지감자가 전국에 택배로 팔리고 있어요. 돼지감자가 없었다면 저는 부도났을 겁니다.돼지감자가 잘 팔리자 울금을 찾는 소비자가 예전보다 많아졌다.김성구 위원장은 지금 돼지감자 2만평, 울금 6000평을 짓는다. 몇 년 전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여주도 600평(하우스 3동) 짓는다. 이제 팔 수 있는 만큼만 생산하고,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앞장서 대규모로 재배하지 않는 지혜도 얻었다.-그동안 씨를 뿌렸고, 2010년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군요.지금은 그 해 생산한 것은 모두 팔립니다. 옛날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꾸준히 팔리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20년 전, 울금을 선택했다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후회하지 않았습니까.울금농사 짓기 전에 고추를 대규모로 지었는데, 1994년 울금 8000평, 고추 1000평 정도 했습니다. 완전히 울금으로 작목을 전환한 것이죠. 울금의 가치를 확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너무 힘든 일이 많았지만, 울금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울금으로 돈은 못벌었지만,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울금은 건강에 좋은 식품입니다. 현재는 대중성이 확보되지 않았을 뿐입니다.-어떤 효능이 있습니까.지금은 정보화시대 잖아요. 사람들이 더 잘 압니다. 또 카레를 알잖아요. 그래서 카레 원료인 울금도 아는데, 울금은 간에 좋습니다. 애주가들이 울금 환을 먹고 술을 먹으면 간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해독이 잘되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취기가 없고, 두통이 없는데, 전주 이강주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울금입니다.-많은 사람들이 울금보다 강황이라는 용어에 친숙한 것 같은데요.울금은 가을울금이라고 하는데, 꽃이 하얗습니다. 강황은 봄울금이라고 하는데 꽃이 보라색입니다. 또 울금 뿌리는 노랗지만, 강황은 희끄므레 해요. 완전히 달라요. 가을울금이 진짜 울금입니다.-여주는.여주는 한 3년 전부터 짓고 있습니다. 돼지감자 하다보니까 여주 찾는 소비자들이 있어서 농사를 짓는데, 따로 판매하기보다는 울금이나 돼지감자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덤으로 끼워줄 생각이예요. 여주도 돼지감자처럼 혈당을 강화시켜주니까 필요한 제품입니다.-품목별 생산량은 어느정도인가요.생물 기준으로 울금 30톤, 돼지감자 200톤, 여주 3톤 정도 합니다. 건조하면 크게 줄어들죠.-소비자들이 체험하러 많이 오는가요.매년 6월이면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이 때는 주로 오디따기 체험이고, 11월말부터 다음해 3월말까지는 돼지감자 수확 체험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돼지감자 캐기 체험은 눈이 와도 합니다.-연간 몇 명 정도 오는가요.주로 도시 소비자들이 오는데요, 운호정보화마을과 자매결연을 맺은 인천시 간석4동 주민들은 매년 옵니다. 체험 소비자는 연간 3000명 정도 됩니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입소문 내서 주변 사람들이 오는 식이더라구요.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울금, 돼지감자, 여주, 감, 마늘, 양파, 고추, 참깨, 들깨 등이 잘 팔리는 것은 도시 소비자들과 소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그렇게 소득이 나오는대로 조금씩 적립했다가 매년 마을 기금으로 100만원을 전달하고 있습니다.-위원장님은 6차산업 인증을 받았더군요.농촌융복합산업사업자예비인증서를 지난 10월 1일자로 받았는데요, 부안군에서 유일합니다. 농촌의 희망은 6차산업화에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농가들이 사업에 참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운호정보화마을과 원암산들바다영농조합법인, 우동향토산업, 줄포 후촌정보화마을 등 4개가 1개 권역이 돼 사업을 진행하게 될 것입니다.● 김성구 위원장은 녹색농촌체험정보화마을팜스테이각종 사업 지정 받아내김성구 위원장은 운호마을 토박이다. 9대 째 살고 있다. 8녀4남 중 장남인 그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는데, 막둥이 아들 현범(22)씨가 한국농수산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다.현범씨가 집안 농사를 10대째 이어가게 됐다. 장교로 전역한 그는 예비군 중대장을 했다. 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농사를 짓게 됐다.김 위원장은 그 때 농촌은 너무 힘들었다. 농가소득이 100만원, 200만 원도 안됐다. 1년에 영농자금 30만원, 50만원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농가가 많았다고 회고했다.1980년대 말, 김 위원장은 소득 향상을 위해 터널고추 재배법을 도입했다. 그의 개혁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농촌이 더 많은 소득을 올려 도시 못지 않은 문화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는 2005년에 녹색농촌체험마을, 2006년에는 정보화마을 신청을 해 지정받았다. 2013년에 향토산업, 2014년에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 지정을 받았다. 팜스테이 지정도 받았다. 이런 사업들을 기획하고, 서류 만들어 기관에 신청하면서 운호 구름마을을 세상과 한층 가깝게 만들었다.1년이면 몇 백만원씩 경비가 들어가지만, 사비로 충당한다. 김 위원장은 운호 구름호수 정보화마을 사무실에서 주민들을 대상으로 매년 6개월 과정 컴퓨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 주민은 물론 곰소, 격포에서까지 온다. 주민들이 컴퓨터를 배워 블로그, SNS 등 사이버 공간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며 젓갈도 판매한다. 다들 좋아한다. 컴퓨터 교육받은 할머니가 손주들과 카톡으로 대화하고, 사진도 찍어서 주고 받는다.김 위원장은 최근 곰소에 시골장터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주민들이 생산한 감도 팔고, 조, 마늘, 호박 등 농산물을 판매한다.김 위원장은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까, 신뢰를 쌓을 수 있을까 항상 고민한다. 부안군 506개 마을 리더들이 농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그 꿈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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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14.11.11 23:02

성균관 서정기 '호남 최초' 관장 "사회 이끌려면, 자신부터 끊임없이 개혁하고 쇄신해야"

국내 1000만 유림의 총본산인 ‘성균관’, 그 수장을 맡고있는 전북 출신 서정기 관장(76·남원)은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다.제30대 관장인 그는 호남최초의 성균관장일뿐 아니라, 사서오경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부 역주해 학문의 깊이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지난 3월 취임한 이래 전국 230여개 향교 책임자인 전교들과 뚝심있게 개혁을 추진하면서 유림쪽은 말할 것도 없고 종종 사회 각 분야의 관심을 받고 있다.서울시 종로구 성균관대 입구에 있는 성균관장 집무실에서 전북 출신 서정기 관장과 만나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과 향후 성균관 재건 계획 등을 들어봤다.-호남 최초의 성균관장을 맡으신 소감이 어떻습니까.“일제의 침략에 호남유림의 항일의병항쟁이 가장 치열했는데, 해방 이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침체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 호남출신으로 관장이 되었으니 다시 전통을 이어 성균학풍을 일으켜 윤리세계를 건설하는 막중한 시대적 사명감을 느낍니다. 지난 3월 유림을 대표하는 전국 600여명의 임원들이 투표를 한 결과, 분에 넘치게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됐습니다. 뿌리를 전북에 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멎진 관장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성균관장이란 자리는 어떤 것이고, 임기 3년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 궁금합니다.“사실 성균관은 본래 수선(首善)의 성지요, 원기(元氣)의 중심으로 나라의 지도자를 기르고 풍속을 일으키는 국가적 기능을 수행하므로 성균관장은 유림의 수장으로서 국민의 사표가 되고 학풍을 조성하는 책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3년의 임기동안 저는 성학(聖學)의 도통(道統)을 확립해 동방예의지국의 국풍을 재건하는 일에 헌신 노력할 것입니다. 취임 후 성균관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불감증으로 인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국가를 살리기 위한 첫걸음 입니다. 사회를 지도하려면 일단 자신부터, 내가 속한 집단부터 끊임없이 개혁하고 쇄신해야 합니다.”-오늘날 급변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성균관장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하신다고 보십니까.“이제는 제국주의의 패도(覇道)정치를 종식하고 민본주의의 왕도(王道)정치를 구현해야 하는데, 먼저 명륜당에서 토요강좌를 통해 덕치인정(德治仁政)을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왕도정치의 이상세계를 널리 알리는 일이 시급합니다. 더 이상 유림이 가만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1000만 유림이 모두 나서 도덕 부흥운동을 펴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지난 여름 방한했던 교황과 만난 감회와 어떤 메시지를 주고 받았는지 소개해 주십시오.“교황이 방한했을때 한국천주교인에게 부모조상을 받드는 제사를 공식 인정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고, 로마교황은 한국민이 어려운 역경을 많이 겪었음에도 민족의 긍지와 품위를 지키는데 감탄한다고 말했습니다."-시대는 변했지만 유교가 할 일은 여전히 많이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현대는 유교가 창조한 민본주의, 즉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대입니다. 유교의 합리주의와 중용사상 및 대동정신이 완전히 실현되어 자유, 평등, 해방의 인권을 누리고 자주, 민주, 통일의 주권을 찾아 복지낙원의 왕도정치시대가 될 때까지 헌신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개인적 이기주의에 함몰돼 이렇게까지 불행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배우고 출세해 벼슬을 하면 국가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도리입니다.”-전북에 국한해서 생각하면, 유도회나 향교가 가야 할 지표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전라북도는 산자수려한 환경과 충효절의(忠孝節義)의 풍속과 예악(禮樂)문화가 발달한 고장입니다. 따라서 전북의 향교와 유도회는 전통문화를 창달하여 새 시대 세계 속에 빛나는 유교정신을 선양하는 일에 총궐기하여 새 시대를 선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도 틈나는대로 전북을 자주 방문해서 특강을 하고, 전북이 더 풍요롭고 행복이 가득한 곳으로 자리잡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평소 강연을 많이 하시는데 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나요.“공자의 인(仁)사상과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을 강론하면서 고매한 인격을 길러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화평세계 건설에 이바지하여 죽은 뒤에 이름을 역사에 드날리고 길이길이 제사밥을 받아 먹는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사회에 부족한 동정심, 양보심, 존경심을 함양하고, 사리사욕을 버리고 인성을 회복하는게 결국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곧 나 자신의 행복을 높이는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느끼신 소감과 우리 정치권에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대오각성하여 다시는 이러한 불행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정치인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장할 책무가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를 대대적으로 척결하는 정풍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끝으로 전북 도민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전북도민 여러분께 성균관장으로서 드릴 말씀은 사람이 사는 도리는 위로는 조상을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조상님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손에게 길이 전해서 뿌리있는 가문의 영광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결국 끊임없고 고민하고 성찰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서정기 관장은 학생운동 두 번 투옥 '성균관대 복학생 1호'서정기 제30대 성균관장은 전북은 물론, 호남 출신 첫 성균관장이다. 상대적으로 유림이 적은 호남에서 관장을 배출했다는 것은 그가 지역색이나 친소를 떠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높은 반열에 올라있음을 짐작케 한다.남원 산동에서 태어나 용성중, 서울 한성고,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한 서정기 관장은 일반인의 선입견과 달리 두번이나 투옥된 경험을 가진 특이한 이력이 있다.4.19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종로경찰서에 구속됐는가 하면, 대학교에서 퇴학당해 어렵게 복학한 이력도 있다.그에게‘성대 복학생 1호’란 별명이 그냥 붙은게 아니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었다.전남 벌교 철도 경찰관인 아버지는 좌·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인 여·순 반란사건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훗날 그가 성균관대 재학시절 데모하다 붙잡혀 구속됐다 풀려나고 복학할 수 있었던 것도 철도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를 애석하게 여긴 주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구속 전력으로 인해 앞날이 막힌 그는 대학졸업 후 3년동안 두문불출 사서오경 중심으로 공부를 하면서 “왜 선인들이 공부를 했는가를 어렴풋이 깨닫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지금까지 무려 47권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무섭게 파고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234개 향교 책임자인 전교를 비롯해 유도회 지부장 등이 참여하는 선거에서 그가 성균관장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남다른 덕성을 인정받았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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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4.11.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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