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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노인의 성(性) - 주책 아닌 건강한 욕구…노인 10명 중 6명 월1회 이상 "성생활"

성은 삶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함에도 성을 이야기 할 때 조심스러워 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특히나 노인의 성은 관심밖의 영역이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 폐경을 전후로, 남성의 경우 발기부전이 성기능을 상실하는 시점으로 받아들인다. 성에 대한 욕구와 성행위는 젊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자건 남자건 노인이 이성에 대해 깊은 눈길을 보내면 대개노망혹은주책이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노인의 성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자연스럽고 민망한 느낌을 갖는 건 성은 곧 성행위라고 생각하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도내 노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과 상황을 취재해봤다.△노인의 성(性) 2012년 전주시 노인복지관 이용노인을 대상으로 노인의 성(性)생활 태도에 관해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60.2%가 월 1회 이상 성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생활의 상대는 주로 배우자며, 20.4%는 성생활에 만족감을 나타냈고 67.5%는 보통으로 응답했다. 응답자의 75%는 성생활이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성생활 방해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으로는 62.3%가 건강문제를 선택했다. 위 조사를 실시한 안골노인복지관 이승재 부장은 현대사회의 노인문제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노인들의 성 문제는 노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분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한 올바른 인식전환이야 말로 긍정적인 노인 성문화 형성과 건강한 노년기를 보내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나이가 들면서 성적 능력이 서서히 감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성생활은 여러 가지 요인, 즉 심리적, 정신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다르기에 노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감퇴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인들의 만남 어디서 이뤄지나노인들은 주로 복지관이나 콜라텍에서 이성을 접하고 만난다고 한다. 전주의 한 노인복지관 직원들에게 주변에서 경험하는 노인들의 성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들어보았다.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중 댄스스포츠는 남녀가 짝을 이루어 진행한다. 댄스스포츠는 운동효과도 커서 노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노인들은 모두 한껏 멋을 부리고 와서 한 시간 남짓 즐겁게 댄스를 즐긴다. 가끔 직원들에게 파트너를 구해달라는 요구도 하는데 너무 나이 들었거나 옷차림이 초라하거나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거부당한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복지관에서는 컴퓨터 수업도 진행하는데 가끔 악성코드에 감염되어 수업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수업이 끝나고 빈 강의실에 혼자남아 야한 동영상이나 수영복을 입은 여성사진을 감상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한다. 여성 직원들과 이야기 할 때 과하게 신체적인 접촉을 시도해 불편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노인들은 복지관의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하는 건전한 방법으로 성욕구를 해소하기도 하고 야한 영상을 감상하면서 해소하기도 한다. 젊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노인, 성을 말하다정모(64전주시 서신동)씨는노인의 성은 젊은사람의 성 못지않게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며노인들은 스스로 건강을 잘 유지하여 늦도록 행복한 삶을 누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인들에게 흔히 발생하여 성생활을 방해하는 전립선 비대증을 적기에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전주시 인후동에 거주하는 조모(80)씨는 노인이라도 성에 대한 태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성에 대해 담담한 사람,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70%정도는 중요하고 좋아할 것이라고 말한다. 연령에 따라 다르겠지만 건강한 75세 이하의 노인들은 자력으로 해결할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자위행위, 복지관, 콜라텍에서 만난 이성과의 교재, 성매매를 통해 해결하는데 적은 돈으로 성을 사서 해결하는 경우도 보았다고 한다. 조 씨는 몇 년 전 전주시에서 주최하는 새사랑맺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즐겁고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실제 오랜 연인이나 재혼으로 연결된 사례는 못 보았지만 만남의 기회가 부족한 노인들에게는 그런 자리자체가 아쉽다고 한다.조 씨는 요사이 매스컴에서 자주 등장하는 노인의 성범죄는 극히 일부의 사실을 언론에 다룸으로써 노인 전체의 심각한 문제인양 생각돼 오히려 노인의 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고 한다.△노인의 성에 대한 교육 및 상담 프로그램전주시에서는 양지노인복지관과 안골노인복지관에 성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성고민과 관련된 상담뿐아니라 부부갈등, 가족갈등, 대인관계, 자녀와의 갈등 등 심리상담, 성격 및 심리검사를 병행하고 있다. 또한 노인 성의식 개선프로그램, 부부관계만족도향상프로그램, 노인자아존중감향상캠프, 공개강좌 등을 실시한다.노인복지관 이용노인의 성생활 태도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안골노인복지관 이승재 부장은 고령화사회가 가속될수록 노인의 성문제는 날로 심각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노인의 성문제 해결방안 모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노인의 성에대한 고정관념을 바꿔서 노인과 사회의 성에대한 잘못된 생각이나 부정적 인식을 바르게 제공하는 사업이 필요하다며노인의 성에대한 교육 및 상담에 관한 프로그램개발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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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6 23:02

"사회적 편견이 노인의 性 음지로 몰아내"

-안골노인성마음상담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나요.“성상담을 비롯하여 심리상담, 가족상담, 부부상담 등의 개별상담과 노인성의식개선프로그램, 노인자아존중감향상프로그램 등의 집단상담 그리고 성·생활·경제·의료 정보 등을 제공하는 공개강좌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배우자가 없는 어르신들이 이성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은빛새사랑맺기 사업도 실시하고 있습니다.”-어르신들의 주된 상담 내용은 무엇인가요.“2014년 상반기 상담내용별로 보면 심리상담 35.8%, 가족상담 30.2%, 성상담 22.6%,기타 11.4%가 상담을 받았으며 성별로는 여성이 62.3%이고 혼인상태별로는 배우자가 없는 어르신이 69.8%로 유배우자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르신들의 성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면 좋을 까요.“성은 늙고 젊음을 떠나 방법이나 횟수의 차이일 뿐 노인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노인의 성에 대해 노인은 점잖아야 한다는 이유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노인의 성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과 편견들은 노인의 성을 음지로 몰아가고 있으며, 그로인해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노인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노인의 성 문제와 노인들을 탈 성적 존재로 만드는 편견적인 사회 인식에 관심을 갖고 노인의 성을 보다 자연스럽게 추구할 수 있게 하는 복지 정책 및 사회문화 정책이 필요합니다.”-상담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저도 물론 그렇구요. 상담실을 찾는 어르신들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라기보다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고 반응해 주는 것에도 큰 위안을 받으십니다. 지난 겨울에 아내와의 성적갈등으로 상담실을 찾은 어르신이 계셨어요. 저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몇 회기의 상담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내담자는 상담자인 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셨어요. 저는 어르신의 언행이 불편하여 상담실 이용을 자제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잘하고 있는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서야 저는 저의 잘못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상담자로서 내담자의 마음을 읽어주며 공감해 주면 되는 것인데 잘잘못을 말하는 순간 내담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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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26 23:02

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 이 철 근 단장 "도민 응원 큰 힘…스포츠·지역 융합, 팀 성적·경제 윈윈"

요즘 도내에서 가장 잘 나가는 것 중의 하나가 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이다. 뚜렷하게 내세울 것 없는 지역에서 도민들에게는 하나의 위안이자 자랑거리다. 지난 23일 경기에서 FC서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긴 했지만, 독보적인 1인자의 위치를 굳히며 후반기 들어 선두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철근 단장을 만나 봤다.-후반기 들어서 선수들이 펄펄 날면서 승승장구 하고 있습니다. 팀을 이끌고 있는 단장으로서 무척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단장의 입장으로서는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준비하고 해야 할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북팬 여러분들께서 적극 응원해주시고 기뻐해주시니 저도 힘이 납니다.”-최근 들어 팀과 팬들이 함께 호흡하는 지역밀착 마케팅이 자주 눈에 띕니다. 정인환 선수가 아이스크림 1만개를 팬들에게 선사하고 이동국 선수가 치킨 미니세트 3000개를 증정하는 등 선수와 팬들이 가까이 하려는 모습들이 좋아 보입니다.“후원의집 운영 등 지역밀착 마케팅은 오래전부터 다양하게 실시해왔습니다. 그 처음은 벽지학교 학생 초청행사인데,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막 끝나고 전북현대에 처음 왔을 때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우연히 장수에 있는 동화댐 위로 올라갔는데, 동화분교라는 초등학교가 보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가 보니 학교 복도에 박지성 선수의 사진이 있었습니다. ‘아하, 시골 아이들도 축구를 좋아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에게 상의한 뒤 축구공과 학용품을 나눠주고, 나중에는 2군 버스를 보내 홈 경기에 초청을 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서 두릅을 싸서 편지와 함께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두릅은 이미 말라버린 뒤였지만 고마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도내 초등학교 분교의 연락처를 파악해 일일이 전화해서 홈 경기에 초청했습니다. 현재는 매년 5000명 정도의 벽지학교 학생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또 선수들은 급여의 1%를 기부해서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지역밀착에 대한 단장님의 소신은 무엇입니까?“저는 프로 스포츠와 지역이 융합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북현대와 각 지자체들이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서로에게 도움이 돼야 합니다. 농산물 유통구조의 문제 등으로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도내에서 생산되는 수박이나 양파 등을 팬들에게 선물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검토했습니다. 관중들이 경기장을 많이 찾아주시면 우리는 더욱 힘을 내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고, 우리의 성적이 좋아지면 지역과 지역 특산품 등의 이미지도 그만큼 향상돼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최근 많은 축구팬들이 포항 스틸러스의 유소년 육성 프로그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외국 용병 없이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은 유소년 시스템이 잘 됐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전북 현대의 유소년 시스템은 어떻습니까?“인재육성은 우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입니다. 2020년에는 전북현대 선수들의 절반이 전북출신으로 꾸려지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유소년반과 U-15, U-18 등 육성반은 현재의 120명 수준에서 운영하면서 현재 300명인 보급반(취미반)을 크게 늘릴 예정입니다. 이를 위해 전주공고 인근에 51억원을 투자해서 국제규격과 유소년 규격을 갖춘 2개 면의 축구장을 건설할 예정입니다. 이 축구장은 우리가 짓는 것이지만, 생활체육인들에게도 개방될 것입니다. 우선 전주시내 보급반을 1000명으로 늘린 뒤 인근 군산과 익산, 김제, 정읍, 남원 등으로 확산시켜 나갈 예정입니다. 희망자가 너무 적으면 않되겠지만, 도시당 50명만 넘으면 코치를 파견할 것입니다. 또 시즌이 끝나면 곧바로 유소년팀 코치 4명을 유럽으로 보내 선진축구를 배워올 수 있도록 하는 등 코치들의 자질향상을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2020년이면 불과 6년 남았는데, 도내 출신 선수들이 전북 현대 주축선수의 50%를 차지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전북현대는 선수들이 가장 오고 싶어 하는 팀입니다. 클럽하우스 등 시스템이 가장 잘돼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은 선수를 데려와서 성적을 내는 것은 일시적인 방안은 되겠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전주가 축구의 도시, 축구에 미친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성적도 좋아야 하지만, 지역출신 선수들이 주축으로 뛰면서 지역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인재육성 프로그램을 강화하면서 투자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일부 성과도 보이고 있으며, 2년 뒤부터는 우리 소속팀이 전국대회를 휩쓸게 될 것입니다.”-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는데 따른 부담도 클 것입니다.“우리의 연간 입장수입이 10억원 정도인데, 모기업의 투자는 300억원 가까이 됩니다. 따라서 현재의 전북 현대는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한 방법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모기업에 손을 벌릴 수만은 없으며, 장기적으로는 구단이 자생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선수들을 발굴 육성해서 트레이드를 통해서도 돈을 벌어야 하고, 좋은 성적을 거둠으로써 기업의 이미지와 홍보효과도 높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스포츠와 기업의 마케팅을 결합시키는 방안도 다양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년에는 중국 시장에서 자동차 판매 향상을 위해 연봉 20억원 짜리 중국선수를 영입할 계획입니다. 스포츠가 해외 마케팅에도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죠.“전북 현대는 지역과 함께 가는 팀입니다. 여러분들의 응원에 우리는 더욱 힘이 나고, 더 좋은 성적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모든 도민들이 1년에 한번 씩은 꼭 경기장을 찾아서 힘찬 박수를 보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철근 단장은- 친선경기 통한 조직 화합 2002 월드컵 유치도 한몫53년 경기도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덩치가 크고 힘과 순발력이 좋아 운동에 많은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축구선수, 중학교 때는 농구 선수를 했으며, 외삼촌들과 함께 성인 축구경기에도 자주 참여했다.현대차 지점장을 맡고 있던 86년에 현대차 본사와 전체 지점을 통틀어 축구단을 구성, 울산 공장 축구팀과 친선경기를 자주 갖곤 했다. 당시에는 노사분규가 심할 때라 회사에서도 생산직과 판매직 상호의 애로와 실정을 이해하라는 취지로 친선경기를 적극 지원했다.이를 계기로 울산현대 축구단 사무국장 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두 차례에 걸쳐 고사하다가 95년 울산현대 사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2002년 월드컵 유치전 현장에 뛰어 들게 된다. 당시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한일 공동개최가 아닌 우리나라 단일개최를 추진하던 때. 각국 위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울산 현대 축구단을 이끌고 아프리카와 중동 등 각국을 돌아다니며 친선경기를 했다. 중동국가를 방문했을 때는 경기예정 시간이 이슬람 예배시간과 겹쳐 경기가 한 시간 동안이나 지연되는 등 고생도 많았다.3년여의 활동을 마치고 자동차 판매 지점장으로 복귀했으나 2003년 전북 현대 사무국장으로 다시 축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해 2005년부터 현재까지 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 단장을 맡고 있다. 2006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과 2009년 및 2011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전북현대를 명문 구단으로 만들었다.

  • 기획
  • 이성원
  • 2014.08.25 23:02

[(28) 부안 사회적기업 '바다의 향기'] 웰빙 김 가공…지역 사회적 약자들 삶 터 자리매김

장애인들과 함께 행복한 꿈과 희망을 그려가는 기업이 있어 화제다.바로 부안군 부안읍 봉두길 사회복지시설지구 내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바다의 향기(대표 유정호, 시설장 조상완)가 그 주인공이다.바다의 향기는 2011년 1월 부안군으로부터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을 위탁받아 공장동(788㎡)과 사무동(248㎡) 등 총 1036㎡ 부지에서 부안군 장애인 근로사업장으로 출발했다.부안군이 그동안 열악한 환경과 근로조건에서 작업하던 장애인들에게 보다 나은 작업환경을 제공하고 근로소득 증대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전북 최초로 장애인 근로사업장을 설립한 것이다.(사)부신정회(대표 유정호)에서 위탁 운영하는 바다의 향기는 김 가공을 통해 근로능력은 있으나 일반기업 취업이 힘든 중증장애인들에게 직업훈련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자체 수익을 창출해 법정임금액을 지급하는 전국에서 유례가 드문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이다.장애인 38명(중증장애인 26명)과 다문화가정 3명, 고령자 7명 등 총 63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고용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았다.바다의 향기는 국내 최대 김 전문기업인 삼해상사(주)에서 원초(생김)를 제공받아 건조와 구이 과정을 거쳐 완제품으로 다시 납품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자동설비를 갖춘 건조과정(화입라인)에서는 금속을 검출해내고 다른 업체와 차별화된 화입패드 개수를 삽입해 4~12시간 동안 건조를 거쳐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구이과정에서는 국산 신안 천일염과 국내산 참기름을 사용하고 제품 생산을 위한 일련의 과정은 깨끗하고 청결한 작업장에서 진행하면서 철저한 위생관리에 집중하고 있다.국산 신안 천일염과 국내산 참기름을 사용하고 조미료(글루타민산나트륨)를 쓰지 않아 아이들 먹거리로 고민하는 엄마들과 웰빙식품을 찾는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주요 생산품은 명절선물세트 등으로 적합한 해미金김 세트와 생파래김, 재래김, 김밥김, 도시락김 등이다. 특히 자체 브랜드인 해미金김은 최근 대중국농수산수출협의체에 가입해 중국 진출을 추진하는 등 그 맛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바다의 향기는 다양한 수출품 생산 경험과 높은 품질을 바탕으로 해외시장 진출에 집중한다는 계획이다.이와 함께 바다의 향기는 사회적 기업으로서 이웃사랑 실천에도 앞장서고 있다.전 직원들은 매월 월급의 일정 부분을 자발적으로 모금해 부안군 관내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과 유니세프에 기부하고 있다.또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한부모조손가정에 해미金김 선물세트를 기부하는 등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바다의 향기는 장애인과 함께 희망을 펼치는 곳, 중증장애인도 수출전문가가 되는 곳, 다문화가정과 고령자도 떳떳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다.그래서 바다의 향기는 오늘도 모든 근로자들이 당당한 지역사회의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함께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바다향기에서 생산되는 제품구입 문의전화는 (063)583-0035로 하면된다.● 유정호 대표 "장애인 모두가 지역사회 주역될 수 있도록 최선"장애인과 다문화가정, 고령자 등이 지역사회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사회적 기업인 부안 바다의 향기 유정호 대표는 장애인과 다문화가정, 고령자들의 권익 향상을 가장 먼저 강조했다.본인 역시 장애라는 아픔을 갖고 있기에 이들의 권익 향상에 누구보다도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부안군 하서면 백련리가 고향인 유 대표는 16살에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해 구두닦이와 식당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던 중 23세 때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쪽 대퇴부를 절단, 장애를 안고 귀향했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된 스스로의 처지를 부끄러워하며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호구지책으로 만화방을 운영했으나 장애인으로 의기소침한 심정은 변하지 않아 거의 만화방에 갇혀 살다시피 했다.그러던 중 TV 다큐멘터리를 보다 장애는 좀 불편할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좁은 만화방을 나와서 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됐다. 그렇게 나온 세상은 다른 장애인들이 있었고 유 대표는 그들과 교류하면서 삶의 의욕을 되찾게 됐다. 유 대표는 그때부터 나 혼자가 아닌 우리 장애인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부안군 장애인연합회 회장, 장애인복지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다 2007년 10월 (사)부신정회를 설립하고 3년간 준비과정을 거쳐 2011년 1월부터 바다의 향기를 부안군으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중이다.당시 바다의 향기는 장애인 당사자가 위탁받아 운영하는 전국 최초의 장애인 근로사업장이었다.유정호 대표는 장애인 회사에서 식품(맛김, 조미김)을 제조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사회적 장벽이 높다는 것에 새삼 놀라울 때가 있지만 전 직원이 포기하지 않고 달려왔음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복지와 경영이라는 통합된 마인드로 바다의 향기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유 대표는 앞으로도 안전한 먹거리 생산과 장애인 모두가 지역사회의 당당한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견인하는 소중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기획
  • 양병대
  • 2014.08.21 23:02

[(33)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예산] 대접주 박인호 생가터에 축사…혁명의 역사 '방치'

충남 예산은 동학농민혁명군 6만여 북접군의 활동 중심지였다. 당시 농민군을 지휘했던 덕의대접주 춘암 박인호(1855~1940) 선생은 내포지역에서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기치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교화, 동학교단을 조직했다.그는 충청 서부지역의 북접을 이끌면서 지방관대지주의 수탈과 착취가 극심했던 1880년대 이 지역에서 교세를 확장했다. 특히 유림세력이 강성했던 지역 특성상 지방관과 지역 유력자가 결탁, 농민들을 억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그를 비롯해 접주들은 갑오년 2월 덕산 봉기를 시작으로 농민군을 규합했다.박인호 선생의 9월 기포령을 시작으로, 인근 각지에서 들불처럼 농민군이 들고 일어나 태안서산대흥 등 인근 관아를 점령했다. 혁명의 불꽃이 고창정읍지역을 넘어 양반의 고장이라고 불리던 충청도로까지 확산된 것. 하지만 인근 아산만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 진압에 나서면서, 농민군의 수난은 시작됐다.지금도 예산지역 곳곳에는 한순간이라도 반짝였던 농민군의 승리의 역사와 이를 이어가고자 했던 농민군 지도자들의 고뇌에 찬 숨결이 자리하고 있다.△예포대도소 1880년대 예산에 처음으로 전파된 동학은 관의 감시와 탄압, 유림세력의 배척에도 불구하고 지도부의 꾸준한 포덕활동으로 많은 교인을 양성했다.그러던 중 갑오년 전북지역에서 혁명의 불씨가 거세게 타올랐고, 사태를 관망하던 예산지역 동학지도부도 혁명에 동참하면서 혁명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갑오년 9월 30일 기포한 내포 농민군들은 10월 1일 태안과 서산관아를 공격, 수감돼 있던 농민군을 석방시켰다. 이후 당시 농민군을 이끈 박인호와 박덕칠은 현재 예산 삽교읍, 덕산에 전진기지 성격의 대도소를 설치했다. 특히 삽교읍에 설치된 예포대도소는 농민군지도부가 전투준비를 위한 군수물품을 비축하거나 인근 지역과의 연락을 맡았다.하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관군의 공세도 매서웠다. 갑오년 10월 11일 호연초토사 이승우는 내포동학농민군 본부인 예포대도소를 불시에 공격했고, 이에 농민군은 패퇴했다. 관군은 대도소를 불태우는 동시에 혁명군에 협조한 농민들의 세간살이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지난 17일 찾은 삽교 예포대도소 옛터에는 현재 주거지가 들어서 있고, 인근에 세워진 안내판만이 이곳이 당시 농민군의 사령부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상기시켰다. 바로 인근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삽교읍 하포리에는 박인호 선생의 유허비,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는 현재 축사로 쓰이고 있었다.갑오년 일대를 호령했던 대접주의 위상과는 동떨어진 너무나 초라하고, 방치된 생가터를 보며 충청지역이 왜 동학의 불모지로 불리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대흥관아터예산군 대흥면에 위치한 대흥관아는 갑오년 10월 7일 예포대접주 박덕칠이 이끈 농민군이 일시 점령한 곳이다. 당시 박덕칠은 목천 유진수, 홍주 박성순, 대흥 차경천 등을 앞세워 군량창고와 무기고를 부쉈다. 군수 이창세는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부랴부랴 현장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1979년까지 대흥면사무소로 사용되던 관아터는, 면사무소를 신축하면서 현재 바로 옆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관아로 들어서는 길에는 이승우 영세불망비를 비롯해 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관료들의 업적을 기린 비석 등 수십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걸어서 5분 가량 거리에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생가가 있던 마을이 있다. 지역 대토호였던 조병갑 일가의 99칸 기와집은 당시 농민군이 헐고 불태워 현재 남아있지 않았다.혁명의 불씨를 제공했던 조병갑을 단죄하고자 했던 농민군의 불같은 기세를 엿볼 수 있었다.△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예산읍 관작리에 위치한 기념공원은 2010년 관작리 전적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조성됐다. 관군일본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던 농민군은 갑오년 10월 24일 승전곡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후 같은 달 26일 농민군은 홍주목 중군 김병돈과 군관 이석범이 이끄는 관군의 습격을 받는다. 이에 농민군은 전열을 다시 정비, 다음날 3만여명의 병력을 모아 이날 관군과 일대 격전을 펼친다. 4000~5000여명에 달하는 토벌군은 농민군을 향해 포를 쏘며 접근했다.농민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토벌군 진영의 야산을 포위, 육탄전을 벌여 끝내 토벌군을 패퇴시켰다. 이 전투는 농민군의 최대승전으로 평가되고 있다.예산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2007년 기념사업회가 정부 지원을 받아 설립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면서 현재는 제대로 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공원에는 전적비만이 덩그러니 서 있어 황량하기 그지 없었고, 잡초마저 제때 제거하지 못해 길목 곳곳이 끊긴 채 방치돼 있었다.동행한 박성묵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은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찾는 사람도 없어지면서 공원을 유지보수하기도 힘든 처지이다면서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아 다양한 선양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사업회의 역량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씨 주도 2006년 발족농민군 유족 명예회복 앞장기포 후 한 달간의 짧은 항전 때문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예산지역 동학농민혁명은 지역의 한 시민활동가의 노력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박성묵 회장은 발로 뛰며 예산의 혁명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박인호 선생의 발자취를 연구하던 그는 예산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선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2006년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이 일은 농민군 유족을 만나면서부터 기획됐다.동학농민혁명의 불모지로만 알았던 예산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을 찾았을 때 정말 희열을 느꼈습니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숨죽이며 살아왔을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한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그는 동학의 정신은 1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고 믿는다.3.1운동을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정신의 뿌리인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량을 확립할 수 있다고 믿어서다.그는정체성 없는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와 국민이 있기 때문에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터무니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며 확실한 민족의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동학을 우리 민족의 중심사상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4.08.20 23:02

[⑪시간제 보육서비스 시범사업] 맞벌이 부부, 부담없이 안심하고 아이 맡기세요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3년 전부터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는 권미라(36전주시 서신동)씨는 아이가 19개월에 접어들면서 슬슬 무언가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양육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열두번 마음이 요동을 친다. 아이는 내손으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가정양육을 선호하지만 한편으론 결혼 전 세무서에서 일해 왔던 경력을 다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일을 찾아보려니 아이를 맡아줄 만한 곳이 마땅치 않고 또 종일제 근무보다는 시간제로 일하면서 아이 키우는 재미도, 가정살림도 병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다. 보건복지부는 현행 종일제 어린이집의 쏠림현상을 완화하고 부모들의 선택권이 다양화 될 수 있도록 맞춤형보육지원 확대 차원, 7월 28일부터 전국 71개 기관(14개 시도, 61개 시군구)에서 시간제 보육 시범사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전북지역의 경우 전주와 정읍, 고창지역에 각각 1개소 총 3곳의 어린이집이 이번 시범사업에 참여한다. 시간제 보육서비스 시범 사업의 명과 암에 대해 취재해봤다. △시간제 보육? 누구냐 넌종일제 보육을 이용하지 않더라도 지정된 제공기관에서 시간제로 보육서비스를 이용하고 이용한 만큼 보육료를 지불하는 신개념 보육서비스다. 특히 이번 시행되는 시범사업은 양육수당 수급자를 대상으로 전업주부의 경우엔 병원외출 등 전업주부로서 긴급하고 일시적인 수요에 대응하며, 맞벌이 가구의 경우엔 기본적으로 가정양육을 희망하지만 취업 등으로 인한 단시간 보육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이다.주 5일(월~금) 오전 9시부터 오후6시까지 제공되며 생후 6~ 36개월 미만 영아를 대상으로 하는 시간제보육 서비스는 기본형과 맞벌이형 두 가지이다. 다만 이용시간과 지원 단가(기본형 : 월 40시간 지원, 시간당 2000원 자부담, 맞벌이형 : 월 80시간 지원, 시간당 1000원 자부담) 부분에 차등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시간선택제 근로자 가구라면 정부지원을 통해 시간당 1000원의 저렴한 비용으로 보육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처럼 시간제보육은 시간선택제 일자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육아와 자신의 일을 병행하면서 경력단절을 예방하고자 하는 여성들을 위해 유연한 보육지원체계 마련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대안이 된 것이다.전라북도육아종합지원센터 최은주 센터장은 7월 28일부터 전국적으로 시범 실시되는 시간제보육은 수요자 입장에서 종일제 보육을 하지 않더라도 양육수당을 받으면서 필요한 시기에 이용한 만큼만 보육료를 지불하는 차별화된 보육서비스라며 특히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이 직업교육에 참여하는 등 재취업 준비를 위해 시간을 활용할 수 있고 그동안 일을 하고 싶어도 보육부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했던 애로사항을 정부가 해결해주는 맞춤형보육제도라고 했다. △시간제 보육서비스제도, 아직은 걸음마 아직은 시범실시 기간이다 보니 지역 내 운영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점이 아쉬운 점이다. 보건복지부는 제공기관 수를 현재 71개소에서 하반기 최대 120개소까지 추가 확대함으로써 서비스 이용에 접근성을 강화하고 더불어 15년부터 올 시범사업 결과를 바탕으로 본 사업으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시간제보육아직 시작단계로 시간제보육서비스 제도 운영의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특히 시범사업이라고는 하나 전북에는 단 세 곳으로(전라북도 어린이집 2014년 3월 기준 1666개소, 전주시 744개소) 시간제보육에 대한 홍보가 앞선다 해도 이용에 한계가 보인다.또 시간제보육서비스 이용 가능한 전라북도 내 양육수당 수급자는 14년 6월 기준 2만5549명이며 이중 전주시 거주 수급자는 9663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전주시의 경우 완산구에 단 한 곳으로, 시간선택제 참여를 위해 아이를 맡기고 싶어도 거리와 시간에 문제가 발생된다. 무엇보다 시간제보육 신청 시 사전에 아이사랑보육포털(PC)에 공인인증서 로그인이 필수인 회원가입 후 시간제보육 아동등록을 완료해야 한다. 물론 지역에 있는 육아종합지원센터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겠으나 실제 컴퓨터 활용에 어려움이 있는 이용자 배려가 아쉽다. 또, 온라인신청은 1일 전까지만 가능하고 전화신청은 당일까지 가능하다. 다만 시간제보육 제공기관에서 수용인원(6개월~36개월 기준 1개반 5명)이 마감되었을 경우엔 이용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경우 예정된 외출이 아닌 불가피한 상황에 당장 시간제보육을 이용해야 할 경우 정작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가장 중요한 토요일 등 공휴일은 이용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물론 시간제보육교사수급, 휴일근무에 따른 인건비, 시설운영 등 여타 제반문제가 있겠으나 시간제 보육을 이용하는 경우 대부분 시간 선택제 근무를 위한 이용 외에 재취업이나 학업을 준비하는 경우, 기타 예정된 외출 시엔 이용이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가족의 도움을 받거나 베이비시터를 이용해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시간제보육서비스의 저렴한 비용으로 인해 수요가 증가할 경우 정작 이용해야 할 대상이 배제될 가능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간제 보육서비스를 원하는 주부들의 개선 확대 목소리가 높다권미라(36전주 서신동)씨는 야근이나 출장 등으로 인해 야간보육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국공립 어린이집을 통한 야간보육서비스의 단계적 확대, 맞벌이 자녀가 환영받는 보육환경을 조성한다는 계획은 반가운 소식이라며금번 시범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시간제보육사업과 더불어 일하는 엄마, 자녀 돌봄 지원 확충을 통해 성공적인 사업으로 이끌려면 실질적인 서비스 이용으로 이어질수 있도록 개선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제 보육서비스를 말한다 "시설 확충해 더 많은 사람 혜택을...아이들 프로그램 부족 늘 아쉬워 "△시간제보육 이용자 윤미희씨주부 윤미희 씨(23)는아이가 25개월로 들어서면서 이제는 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아이를 마음 놓고 맡아줄 곳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제 보육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주변 엄마들에게 듣게 되었다고 말했다.윤 씨는아이에게도 갑자기 엄마와 분리시키기 보다는 연습을 시킨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의외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라며 4시간동안 먹을 간식과 아이의 특성을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저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이어 가까운 새일센터에 시간제 근무가 가능한 곳을 희망한다는 구직신청을 해두었고 지금은 면접을 기다리고 있다며 웃어보였다. 윤 씨는 친정부모님은 시골에 계시고 그렇다고 시부모님께 아이를 맡길 상황도 아니고 제 욕심만 챙길 수 도 없었던 저의 상황처럼 비슷한 엄마들이 상당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며시간제 보육사업이 더 많이 확대되어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렸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시간제보육교사 임애란씨시간제 보육을 희망하시는 부모님들이 의외로 많이 계시는 것 같아요. 아직은 시범단계이다 많은 아이들을 수용할 수 없는 점이 가장 아쉬운 점인 것 같습니다보육경력 6년 4개월의 임애란 교사(41)는현재 이용 가능한 연령대가 6개월부터 36개월까지로 초과이용이 없을 경우 하루 최대 이용시간은 4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며 아이마다 이용시간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단순 돌봄이 아닌 짧은 시간 이지만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 운영 개발이 앞으로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 교사는 기존에는 짧은 시간 일시보육을 요청하는 경우 종일반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시간제보육의 경우 별도의 시간제보육반 운영과 전담 교사가 있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부모님들 입장에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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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9 23:02

진안 동향면에 귀농한 이재철·박후임씨 부부 "마을 살리기는 농촌 희망…'마을'다운 방식으로 복구하고 파"

마을의 위기는 오래전에 찾아왔다. 사람들은 떠나고 두레와 품앗이 전통으로 지켜져 오던 공동체 문화가 무너지면서 마을의 존재는 잊혀지기 시작했다. 마을을 해체한 것은 산업문명과 자본이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마을은 여전히 존재한다. 존재는 하되 마을이 지녔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린 현실은 더 공허하다. 마을을 살리자는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2000년대에 들어서다. 도시의 삶을 접고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 살리기는 농촌의 희망이 됐다. 그리고 10여년. 그렇다면 마을살리기 운동의 궤적을 딛고 선 오늘의 농촌마을은 다시 살아났는가.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봉곡마을의 이재철(44) 박후임씨 부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귀농 9년차. 목사인 아내 박후임씨와 신학도였던 남편 이재철씨는 봉곡마을에서 마을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고, 봉곡교회의 행복한 노인학교를 운영하며 단절되었던 농촌 문화를 가장 마을 다운 방식으로 복구해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시에서 종교를 통해 나눔과 소통의 가치를 실천했던 부부는 땅과 자연의 소중함, 생명의 의미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오랫동안 안아 왔던 교회 밖 보이지 않는 목회활동의 고민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귀농이었다. 늦은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고 귀농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부부는 그러나 낯선 땅 진안에 터를 잡은 지 3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마을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벽은 그만큼 높고 견고했다. 그 벽을 없애는데 3년 걸렸습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농사일도 3년은 겪어봐야 몸에 들어온다고 하시더군요. 도시에서의 삶에 익숙해진 마음과 몸을 농촌의 삶으로 돌려놓는 일이 쉬웠을 리 없지요. 내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억울함을 털어내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안에서 그런 갈등과 다투고 풀어내다 보니 모든 탓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이 있고서야 마을과 사람들을 얻게 되었죠.인터뷰는 여름 한낮, 봉곡마을의 마을박물관 안에 있는 행복한 노인학교 교실에서 있었다. 박물관이라고해야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 널찍한 교실과 복도가 전부지만 소박하게 전시실로 꾸며진 교실 안, 학선리 주민들의 생애사를 온전히 보여주는 온갖 일상용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웠다. 전시품 중 새울마을 할머니가 내놓은 다리미의 설명글이 있었다. 나 수무살 먹어 시집올때 어머니가 해주셨다. 다리미다. 숯불 담아서 옷다려 이부라고 할머니가 삐뚤빼뚤 직접 쓴 글을 읽다보니 가슴 따뜻해졌다.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농촌에 들어오는 일이 어렵진 않지만 정착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고들 합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마을과 떨어져 산다면 도시에서의 삶을 옮겨 살 수 있겠지만, 마을 안에 들어와서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갈등은 당연한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다르고 살아온 방식이 다르니까요.-그런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생각하는 것,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니 불편이 따르더군요. 고민과 갈등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문화의 차이였어요. 낯설고 불편하고 어색했죠. 그런데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 같아요. 어느새 우리도 낯선 문화에 적응이 되어있더군요. -처음 귀농 하실 때 돈은 있었습니까.(웃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으면 좋겟지만 저희는 돈이 없었어요. 1000만원이 전 재산이었죠. 그중 500만원으로 중고 트럭을 사고 나니 500만원이 남더군요. 그래도 큰 불편은 없었어요.-귀농을 결심하려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이야기겠는데요. 저희는 좀 특별한 경우일겁니다. 그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데,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어떤 사람은 500만원으로도 성공 하지만, 어떤 사람은 몇 억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관을 갖고 그 의지를 지켜 가느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처음에 가진 땅도 없었는데 농사는 어떻게 지을 수 있었습니까. 2005년 9월에 빈집을 얻어 들어와 도배만 하고 살았어요. 가을에는 할 일이 없어 마을 어르신들 일을 도와드리면서 얼굴 익히는 시간을 가졌고, 겨울에는 골목길의 눈을 열심히 치우면서 지냈습니다. 마을 어른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덕분인지 논과 밭을 빌려주시더군요. 그래서 이듬해부터 천 평 정도의 천수답과 밭을 얻어 농사일을 시작했어요. 나름대로 친환경 농법을 시도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고구마는 멧돼지가 먹고 고추는 탄저병이 와서 안 되고, 논은 거름이나 논자재 준비가 안 되어 있다 보니 실패하고. -농사일만으로 생활은 해결되셨나요. 아니죠. 그래서 위기감을 갖게 되었어요. 그해 가을을 보내면서 두 사람 생활이라도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민 했어요. 가계부를 정리해보니 매달 현금으로 50만원만 수입이 되면 최소한의 생활은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큰돈은 아니지만 어떻든 수입을 올릴 통로가 필요했겠군요. 그래서 더불어 식구란 이름으로 회원을 모집했어요. 회원들이 매달 2-3만원씩 보내주면 50만원은 되겠다. 대신 농작물을 보내드리는 것이죠. 돈에 대한 등가의 개념이 아니라 많이 나오면 많이 보내고 적게 나오면 적게 보내는. 대부분 지인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공유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20명 정도인데 잘 해결되고 있습니다.-회원을 더 늘리면 소득도 늘어날 텐데요.그렇긴 하지만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너무 부담이 되니까요. 최소한의 수입만으로도 저희 가 뜻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족하죠. 작년에 집을 지어서 빚은 좀 졌지만 이 수준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집을 갖게 되었으니 재산이 늘어난 셈이군요. (웃음)땅 사는 일은 안하려고 했어요. 땅을 갖게 되면 묶이게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2007년 즈음 교회 분들과 마을 어르신들이 땅을 사라는 권유를 강하게 하셨어요. 땅을 사놓아야 우리 동네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어요. 그런 마음을 알고는 외면하지 못하겠더라고요.-마을 일을 들여다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사실 저희가 농촌에 온 이유는 마을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마을 안에 있는 빈집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을 어르신들과 농사일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농촌의 문제, 농촌의 현실, 마을이라고 하는 공간이 우리 가슴속에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렇다보니 마을일을 하게 되었는데 어르신들이 잘 하지 못하는 일들, 가령 행정 업무나 서류 작성이나 마을을 대표해 회의에 참석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마을 살리기도 그렇게 시작되었겠군요.그렇죠. 처음에 했던 일이 농촌개발사업인데, 공공부문 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 사고의 전환이랄까 어떤 물음이 생기더군요. 10년, 20년 후에 이 마을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그때도 이 마을은 존재 할 수 있을까 하는.-마을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것에 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처음에는 오롯이 소득의 문제로만 보았어요. 도시에 비해 농촌에는 자본의 투입이 미미한데서 모든 문제가 이어진다는. 그래서 나름대로 소득사업을 추진하고,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꼭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득사업을 하다보면 많은 갈등이 불거지더라고요. 이해관계가 첨예한 곳에는 갈등이 많잖아요.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건물 먼저 짓고 보조금만 일단 받고 보자는 그런 인식도 있고. 어느 사이에 마을의 어른들을 가르치고(?) 마을의 질서를 바꾸려는 마음이 강해졌어요. 기존의 질서에서 불합리한 예를 보면 무조건 뜯어고치려고 하는 마음이죠. 그 시기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일을 많이 하시는 만큼 어려움도 커졌겠습니다. 다행히 깨달음이 있었어요. 어느 순간, 내가 없었어도 이 마을은 10년 전, 5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는. 나름대로의 삶의 모습과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마을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어르신들의 삶을 제대로 보게 된 것 이예요. 참 오만했구나하는 자책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엇을 열심히 바꾸려고 하지 않았어요. 원인을 들여다보면 문화의 차이였거든요. 대개 귀농한 분들이 갈등을 겪는 이유는 농촌을 도시의 관점으로 보려니 그런 겁니다. -결국은 시간이고 기다림이지 않을까 싶군요. 농촌에서는 시간의 간격을 길게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살다보니 마을 어르신들의 삶이 훌륭하더군요. 남들이 다 떠날 때 땅을 지키면서 생명의 먹거리를 생산을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마을을 지키고 있는 분들의 삶은 존경스럽습니다. 종교적으로 이야기 하면 도시에 있는 교인들보다 훨씬 더 천국에 가까이 있는 삶을 산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행복한 노인학교나 마을박물관을 열게 된 동력이 궁금합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삶에 존경심을 갖게 된 것이 동력이랄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알게 모르게 나는 배우지 못해서 남아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의 삶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사회에서 농촌은 영향력이 없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시장경제로도 농촌은 효율성이 낮은 대상이죠. 그러나 한국사회가 어떻든 간에 마을 어르신들 스스로의 삶에 사랑을 부여해줄 수 있는 방식이 절실했습니다. -노인학교는 박목사님이 주도하셨죠.봉곡마을에 자리 잡고 3년쯤 되면서 남편은 마을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는 다른 일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농사일이 좋고 그것만이 내일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저도 서서히 마을이 제 안으로 들어오면서 남편이 할 수 있는 마을의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마을의 일이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죠. 저는 어르신들과의 관계가 중요했어요. 행복한 노인학교를 하면서 어르신들을 더 깊이 만나게 되었죠. 특히 할머니 이야기반을 만들고 한글반을 운영하면서 어르신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달았어요. -마을 박물관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을 박물관을 제안 한 것은 이곳에 살고 계신 분들이 스스로 삶의 자존감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매개체가 뭘까 고민하다가 박물관을 생각했죠. 처음에는 사진을 모아보자고 시작했는데, 마침 귀농귀촌인 지역사회 기여사업에 공모를 해서 150만원을 첫해에 지원받았어요. 처음부터 큰 사업으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학선리 마을의 100여 가구를 대상으로 했는데 사진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나절이 걸리기도 했으니까요. 사진을 수집하다보니 어느 집에선가 방치된 생활용품이 눈에 띄었어요. 장롱에서 사성이 나오기도 하고, 헛간에서 베틀이 나오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모아져서 박물관이 채워졌지요.-마을박물관 일을 해오시면서 얻은 가치가 적지 않겠습니다. 주제가 오래된 기억 미래를 열다 이던데요. 배운 것이 많지요. 처음부터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소박하게 시작한 것이 주효했던 것 같아요. 이곳 마을 박물관을 통해 어르신들과 그 후손들이 삶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날 수 있는 매개체, 도시와 농촌이 만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살리고 싶었죠. 여기서 도시는 출향인들을 뜻합니다.-박물관 운영이 장기적으로 볼 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우선 보관 상태가 좋지 않아서 걱정이고요. 그냥 볼거리로 남아 있는 박물관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내용을 채워넣어야죠. 노인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우선은 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인터뷰를 끝내고 부부가 지은 흙집을 들렀다. 볏짚과 황토를 이용한 스트로베일하우스라고 했다. 에너지 자립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생태건축물인데, 그 건축가가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귀농귀촌인진안군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아내와 영농회장을 맡고 있는 남편은 이제 귀농이란 틀이 자연스럽지 않을 만큼 온전히 봉곡마을의 주인이 됐다. 마을의 미래를 위한 일에 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삶을 내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재철박후임씨 부부는 서울 구로공단 목회활동 나눔과 사랑 실천이재철 박후임씨는 진안에서 새로운 삶을 꾸린 귀농 9년차 부부다. 충북 제천이 고향인 남편 이 씨와 경기도 파주가 고향인 아내 박씨는 2005년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안에 터를 잡았다. 부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목사였던 아내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남편은 추구하는 종교적 가치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신뢰를 갖게 됐다. 삶의 지향이 같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96년 목사가 된 박 씨는 서울 구로공단의 새터교회에서 17년 동안 목회활동을 했다. 구로공단 주변의 가난한 여성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었다.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교회의 모습을 추구했던 그는 어린이집이나 공부방 등을 통해 나눔과 사랑을 실천했다. 목회 10년째, 의식의 변화가 밀려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주말농장을 운영하면서 자연과 함께 할 때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연으로부터 위로받고 상처를 치유하는 아이들의 변화는 놀라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면서 교회나 잘 짜인 조직이 아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주목하게 됐다. 안식년을 맞은 해에 처음 교회 밖을 나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의 문화를 만나면서 지금껏 경험했던 신앙의 폭을 넓혔다. 그는 신학공부를 하며 이웃 간의 대화, 종교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남편을 만나 2004년 부부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목회를 통해 본질적인 삶의 문제와 가치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은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귀농은 이들 부부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자신들의 새로운 삶을 뉘일 땅을 찾기 위해 강원도부터 해남 땅끝 마을까지 각 지역을 돌아다녔던 부부는 지인의 소개로 진안에 빈집을 얻어 정착했다. 귀농의 삶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도시와 농촌 문화의 경계는 높았다. 그 경계를 허물고 온전히(?) 마을사람이 되기까지는 꼭 3년이 걸렸다. 빌린 땅에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길도 마련했다. 지인들을 중심으로 더불어 식구 회원을 만들고 쌀과 작물을 나누면서 기본적인 생활비를 해결했다. 3년이 지나면서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농촌의 현실이 부부의 삶 안에 들어왔다. 남편은 농촌개발사업을 비롯해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맡고 나서고 아내는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해 행복한 노인학교를 제안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마을의 역사를 담는 박물관도 열었다. 지난해 이들 부부는 집을 새로 지었다.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언젠가는 떠날 외지인이 아니다.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실현하고 싶다는 부부의 미래는 몇 십 년 후에도 건재 하는 농촌 마을의 존재에 놓여있다. 이들의 농촌살리기 운동을 주목하는 이유다.

  • 기획
  • 김은정
  • 2014.08.14 23:02

[(27) 고창 참바다영어조합법인] 복분자·오디 접목한 청정 수산물 가공 '선두 주자'

고창군 신림면 세곡리에 위치한 참바다영어조합법인(대표 박종학이하 참바다)은 1997년 작은 규모의 단순 수산물 가공 공장인 후포 냉동으로 수산업에 뛰어 들었다.올해로 창업 18년째인 참바다는 작지만 큰회사를 경영이념으로 본사 및 123공장, 100여 명의 직원과 3500톤의 연간 생산능력, 205억 원(2013년)의 매출을 올리는 명실상부한 수산업계의 선두주자다.크린씨푸드 제조의 선두 주자가 되자는 창업이념으로 국내 수산물 유통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싱싱하고 깨끗한, 다양한 종류의 수산물을 안정적으로 소비자에게 공급 하기 위해 신제품 개발 및 시설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한 지역 농수산물을 접목시킨 제품을 개발(복분자 풍천장어, 복분자 고등어, 오디), 당사의 다양한 유통망(홈쇼핑, 온오프라인, 홈페이지, 해외수출)을 활용한 판매를 통해 농어민들의 소득향상에 기여하고 있다.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도 결실을 맺었다. 농수산홈쇼핑 최우수업체(2002년), 중소기업 경영대상(2004년), 신지식인상(2005년), 식약청 HACCP 인증(2007년), 소비자 선정 우수관리식품업체(2008년), 소비자중심경영 시스템(CCM) 인증 획득(2010년), BUY전북 상품 인증(2011년) 등이 그 결과물이다.△고객직원중심, 사회환원 경영참바다는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큰회사로 성장했다는게 수산업계의 평가다. 이는 소비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기업이 성장한다는 신념과 직원들의 평생 직장이 될 수 있는 기업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 사회환원이 기업의 당연한 의무라는 사명감으로 경영에 임했기 때문이다.고객중심을 위하여 2010년 전라북도 및 수산업계 최초로 CCM(소비자중심경영)인증을 획득 받아 CCM인증 매뉴얼을 통한 고객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의 불만을 사전에 예방하고 소비자 만족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여 경영활동에 접목시켰다. 이러한 소비자 중심의 경영 노력을 인정받아 2011년 소비자의 날에 소비자 권익증진 유공자에 선정되었다. 직원중심을 위해서는 직원들의 복지 확대, 쾌적한 근무환경 조성 등을 통해 직원들의 주인의식 고취 및 이직을 사전에 예방했다. 2009년 2억여 원을 투입하여 체력단련실 등 복지 시설을 증설하였으며, 쾌적한 작업환경을 위해 노후화된 공장시설을 현대화 하였고, 직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학자금 대출 및 기숙사 등을 계획하고 있다. 사회환원의 실천은 무상장학회 운용을 통해 매년 60여 명의 전라북도 소재 초중고 학생을 선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참바다의 장학사업은 형편이 어렵지만 모범생에 들지 못하는 비 모범생을 대상으로 한다. 탈선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바른 성장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또한 장학사업에 그치지 않고 푸드뱅크, 교회 등에 자사 제품의 협찬과 불우한 이웃들의 따듯한 겨울나기를 위한 사랑의 연탄 배달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주요 제품참바다가 생산하는 주요 제품으로는 △단순가공류(손질 동태포, 해물패키지, 모듬 초밥류) △손질생선류(복분자 자반고등어, 복분자 참치, 홍삼고등어, 손질명태) △구이류(복분자 민물장어 구이, 홍삼 민물장어 구이, 복분자 바다장어 구이) △볶음/찜류(장어아귀찜, 해물떡찜, 오징어쭈꾸미낙지볶음) △탕류(장어해물알탕, 해물부대찌게, 전복뚝배기탕) △죽류(장어, 매생이, 새우, 쇠고기, 전복) 등이 있다. △기부문화형편이 여유로울때 사회공헌을 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되어 창업과 동시에 무상장학회를 설립하여 매년 6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점차 확대할 계획이다.또한 독거노인 및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년 1000만 원~2000만 원 상당의 자사 식품을 기부하고 있으며, 불우이웃을 위한 연탄배달과 난방유 지원 등 사회환원을 꾸준히 이행하고 있다.△한발 앞선 미래 비전지금까지 쌓은 노하우(know-how)와 유통경로, 경영능력, 경영 철학 등을 토대로 오랜 숙원 사업인 종합 식품회사로의 도약을 위해 노력중이다.지역 쌀의 소비 촉진을 위해 떡과 즉석 죽을 곧 생산할 계획이며, 오리 훈제 등 고객들이 편하게 먹을수 있는 즉석 식품과 도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제품들을 개발 중이다. 수출 3년차의 수출 초보기업이지만, 매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2012년 세계 9개국(미국, 중국, 호주, 베트남, 대만, 뉴질랜드, 두바이, 필리핀, 영국)에 1억4000만원(13만불)의 제품을 수출하는 등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해외 판로개척 및 마케팅 활동을 통해 전라북도 대표 식품기업으로, 더 많은 고용창출과 사회 환원을 책임지는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각오다.● 김종학 대표 "철저한 식품안전위생관리, 튼튼하고 착한 회사 만들 것"20대 후반부터 보증과 사기로 인해 여러번 사업의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아내의 암투병까지 겹쳐 생을 포기할 위기가 몇차례나 있었지만 생을 포기할 그 힘으로 다시 한번 도전해 보자며 1997년 수산물 가공공장을 시작했습니다.김종학 대표는 밑바닥에서 다시 출발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뢰경영, 광역 유통망 확보, 사회공헌 등 뚜렷한 3대 목표를 설정하고 정진했다. 그는 싱싱하고 깨끗한 수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신양식어업 개발에 과감히 투자를 하는 등 고객의 식탁에 청정수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7년이 지난 지금 국내 수산물 유통의 새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대표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작지만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된 비결에 대해 갈수록 소비자의 품질 및 위생, 안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이에 따른 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식품안전경영시스템을 도입, 운영하는 등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 대표는 창업과 함께 설립한 무상장학회를 통해 매년 비 모범생 6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장학사업이 모범생을 대상으로 추진되는데, 당사는 탈선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바른 성장에 도움을 주고자 비 모범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김 대표의 꿈은 고창군민이 건실한 향토기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튼튼하고 착한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 기획
  • 김성규
  • 2014.08.14 23:02

[(32)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내포] 자생·독립적 군세…전라도 외 지역 중 기념사업 가장 활발

살아남은 사람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우거진 소나무 숲 속에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만 가득했다.올라온다! 일본군이 올라온다!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총소리가 이어졌다.일방적인 화력이었다.최후까지 맞서 싸우리라 다짐했던 내포 지역 동학농민군은 그렇게 하나하나 총에 맞아 죽거나 끌려가 참혹하게 살해됐다.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은 그렇게 피로 물들어야 했다.△내포 지역에 동학이 전래되다내포 지역은 지금의 충남 서북부, 즉 태안서산당진홍성예산 등의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이중환이 택리지에 충청도에서 내포가 가장 좋다고 언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안정된 지역이었다.하지만 제아무리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내포 지역이라 해도, 조선 말기 사회의 모순은 피할 수 없었다. 수탈과 학정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말하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1890년, 최형순이라는 사람이 동학 교주 최시형을 찾아 입도한 뒤 태안 지역에 동학을 퍼뜨렸다. 최형순과 함께 박희인이 적극적인 포교에 나섰으며, 불과 3년여 만에 내포 지역에서 동학은 상당한 위세를 구축하게 됐다. △봉기, 그리고 실패갑오년에 전라도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고, 내포 지역에서도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봉기가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1차 봉기 기간에는 커다란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았다.시간이 흐르자 상황은 바뀌었다.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라도에서는 남접의 2차 봉기가 이뤄졌다.1894년 10월 1일, 농민군은 태안 원북 방갈리에서 기포했다.이 때 기포한 농민군은 전봉준 등이 이끈 전라도 지역의 농민군과 최시형손병희 등의 북접 세력과는 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 자생적독립적인 군세였다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은 말했다.관아를 공격해 군수를 잡아 죽이고 갇혀있던 동학 지도자들을 구출한 농민군은 이어 서산, 해미 등을 석권하고, 기세를 몰아 홍주성(지금의 홍성) 공격에 나섰다.그리고 농민군은 대패했다. 비록 내포 지역을 석권하면서 기세가 올랐다지만,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성 안에서 굳게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결국 진격로를 따라 다시 그대로 쫓겨간 농민군은 태안을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 지금 추모탑과 전래비,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곳에서 잡혔음을 알리는 비석이 있는 백화산 자락이 그들의 마지막 자리였다.냇물 흐르는 거 아까 보셨죠? 여기가 전부 피로 물들었다고.△교장바위, 혹은 교살바위추모탑과 전래비 뒤편에는 바위 봉우리가 있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잡아 참혹하게 죽이던 곳이 바로 그 바위였다.그 당시에 일본군이 여기서 공개처형을 한 거예요. 그래서 교살바위라고 했지.교살바위라는 말의 어감이 너무 섬뜩해서였을까? 지금은 교장바위라고 불리고 있다.장살, 장형이라는 말에 쓰이는 지팡이 장자를 쓰는데, 안내문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운영하던 정류소에 돌을 던지던 조선인 어린이들을 감싸주며 그 아이들과 바위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는 보통학교 일본인 교장의 일화가 적혀 있었다. 그 교장의 인덕을 기리는 의미에서 교장바위가 됐다는 것.물론 그것도 역사지만, 일본인을 기리는 내용이 안내판에 있으니까 좀 그렇잖아요. 동학 관련 내용은 빠져 있고. 문영식 선생은 이 때문에 태안군에 민원을 여러 차례 넣었단다. 이에 대해 태안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동학 관련 내용을 담은 새로운 안내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조만간 교체 예정이라고 답했다.△태안 지역 기념사업 현황내포 지역, 그 중에서도 태안 지역은 동학 교세가 대단했고, 혁명의 열기는 전라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전라도 이외 지역 중에서는 태안 지역의 동학 관련 기념사업이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지고 있으며, 정리된 자료도 방대하다.태안 지역의 동학농민군 관련 자료들은 대부분 문 회장의 아버지인 문원덕 선생이 밝혀낸 것들이다. 특히 1965년에 작성된 순국 혁명군 명단 288인 기록물은 국가기록물로 인정돼, 후에 동학농민군 유족 인정 관련 자료로서 요긴하게 활용됐다.1978년 세워진 추모탑 역시 문 선생의 작품이다. 관의 주도로 세워진 다른 지역의 기념물과는 달리, 선생이 설계부터 모금까지 발로 뛰어가며 완성시켰다.문 선생이 이처럼 헌신적이었던 것은, 그가 바로 내포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문장로 접주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문영식 회장은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태안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주도해오고 있다.동학 정신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목표가 몇 가지 있다.하나는 기념관 건립 사업을 잘 매듭짓는 것. 태안군은 이번 주부터 건립 준비 작업에 착수했는데, 이를 제대로 해내는 것이 일단의 목표란다.또 하나는 원북면 방갈리 기포지에 기념물을 세우는 것.현재 기포지에는 화력발전소가 들어서 있다. 문원덕 선생이 생전에 그 자리에 기념탑을 세우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 유지를 잇고 싶다는 것이었다.발전소 내에라도 조형물을 세우려고 여러 번 찾아갔어요. 그런데 좋다, 세워주겠다고 약속을 받아도 이 사람들이 자꾸 바뀌고 발령이 나니까 또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 하고.이에 대해 태안화력발전소 측에 문의한 결과,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태안 지역의 다른 유적들 - 농민군 처참하게 쓰러져간 '목네미샘'내포 지역 항쟁의 중심지였던 만큼, 태안에는 유적도 많이 남아있다.농민군이 습격했던 태안 관아는 백화산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있다. 관아 자체는 없어졌지만, 경이정이라는 건물은 기념사업회 사무실 바로 근처에 남아 있다.이원면 사창리에는 목네미샘이라는 곳이 전해진다. 이곳은 1894년 11월 일본군의 토벌작전 당시 농민군이 처형당했던 장소다.일본군은 큰 작두에 농민군의 목을 놓고, 다른 농민군에게 서로 밟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농민군의 목 넷이 굴러 떨어졌다고 해서 목네미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서산 지역에서는 1차 봉기 기간에 이 지역 최초 봉기가 있었던 원벌 집결지와 2차 봉기 당시 농민군이 공격했던 서산 관아가 대표적인 유적지로 전해져오고 있다.또 당진 지역에는 승전곡 전투지가 있다. 1894년 10월 24일 2만여명의 농민군이 지형을 활용한 전술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곳으로, 이후 농민군은 홍주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4.08.13 23:02

[⑩다문화가정 이중언어교육사업] 엄마나라 언어로 교감…움츠렸던 아이들 자신감 '쑥'

이제 아이에게 엄마 나라 책을 읽어줄 수 있게 되었어요. 중국에 있는 친정식구들과 조금씩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중국에서 한국에 시집온 지 9년차 된 리쓰친씨의 말이다. 리쓰친씨는 8살과 6살 그리고 2살 난 세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리쓰친씨는 언어 두배 기쁨 두배 프로그램을 받기 전에는 자녀가 중국말로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제 자녀에게 중국어를 지도하는 방법을 교육 받은 이후 자녀의 변화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전라북도는 세이브칠드런과 협약을 맺고 2013년부터 다문화가족자녀를 위한 이중언어교육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세이브칠드런은 전라북도의 14개 시군에 설치되어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중심으로 다문화가족 자녀들이 엄마나라의 언어를 잘 구사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결혼이민자가 자녀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엄마가 자녀에게 베트남, 중국, 캄보디아 등 모국어를 가르치게 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적 방법과 기술을 배우게 되는데, 언어 두개 기쁨 두배라는 타이틀 아래 이중언어교육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엄마나라의 언어를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모국어 교육은 무척 중요하다. 단순히 엄마나라의 언어를 익히는 언어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의미를 넘어선다. 다문화가족 자녀가 엄마나라의 언어를 익힌다는 것은 엄마에 대한 자신감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엄마나라의 언어를 익힘으로써 엄마나라에 대한 관심은 증가하고 엄마와의 긴밀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수단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엄마나라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기초체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엄마나라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마에 대한 존중감과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문화가족 자녀이 성장하면서 엄마가 아시아권의 결혼이민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렇게 엄마를 타인 앞에서 자랑스럽게 인정할 수 없게 된다면 가족과 사회에 있어서 건강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주수진 상담원은 초등학생을 지나 중학생이상 되는 자녀들이 엄마가 베트남 사람, 필리핀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며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 관계없이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한다며 자존성 향상의 문제를 이중언어교육과 연결시키며 중요성을 부각시켰다.다문화가족 자녀의 모국어 지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 중요성에 대해 사회적 함의가 이루어지면서 정부차원의 이중언어 지원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여성가족부에서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이중언어교사를 배치하여 베트남어, 중국어 등 아시아 이주여성 국가의 언어를 다문화가족 자녀에게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이중언어교육에 있어서 비(非)다문화가정의 자녀들도 수혜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것은 다문화가족 자녀만을 대상으로 하게 될 경우, 차별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을 고려하여 다문화가족 자녀와 비다문화 자녀가 통합적 교육의 형태 속에서 베트남어, 중국어 등 아시아권 언어교육이 이루어진 바 있다. 다문화가족 자녀에 대한 교육은 교육부 소관이어서 금년도는 여성가족부 소관의 이중언어교육사업에 대한 조정기간으로 삼고 잠시 중단되어 내년부터는 이중언어교육은 교육부소관으로 바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여성가족부 소관의 이중언어교육은 결혼이민자에 대한 언어교육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이중언어 환경 조성사업의 형태로 전환될 예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앞서 세이브칠드런과 전라북도는 이미 2013년부터 14개 시군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중심으로 결혼이민자들이 자기나라 언어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하는 언어 두배 기쁨 두배사업을 실시하고 있어서 선진적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언어 두배 기쁨 두배의 이중언어교육사업은 결혼이민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에게 자신의 고국언어를 가르치고 싶어 했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고, 어떠한 교재와 교구를 필요로 하는지도 잘 몰라 어려워했다. 그러나 이제 결혼이민자 엄마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교사가 되어 자신의 나라의 언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아직은 다소 서툰 점이 드러나지만 결혼이민자들은 이제 고국의 언어로 자녀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다. 연구 보고에 의하면 어머니의 사용언어 및 의사소통 유형은 아동의 언어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부모와 유아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은 유아의 언어능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전주시다문화가족원센터 정성자 팀장은 세이브칠드런과 전라북도가 함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통해 실시하고 있는 언어 두배 기쁨 두배 사업은 결혼이민자 엄마와 다문화 자녀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엄마나라 언어의 교육과정을 통해 상호간의 소통을 강화시켜주고 있다면서 이중언어교육의 효과성이 교감능력 향상과 소통의 강화 측면에서도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다며 다문화가족들이 언어지도교육 언어 두배 기쁨 두배 사업에 지속적 관심을 가져줄 것을 주문했다.● 정성자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팀장 "중국베트남몽골어 등 지원 엄마와 자녀간 상호작용 증진"- 언어 두 개 기쁨 두 배는 어떤 사업 입니까?전라북도와 세이브더칠드런이 협약을 맺고 자녀에게 이중 언어 교육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한 달에 한번 씩 이루어지는 부모교육, 자조모임을 통해 자녀지도력, 자녀와의 소통기술, 부모자존감을 향상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지원하고 있는 언어는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이중언어 교육과의 차별성이 있다면 무엇입니까?기존의 이중언어 교육이 전문 강사가 자녀들에게 교육을 하는 방식이었다면, 언어 두 개 기쁨 두배의 이중언어교육사업은 KIT, 카드. 활동지를 통하여 엄마가 자녀에게 엄마나라 언어를 가르치며 모아 상호작용을 증진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엄마나라의 전래동화를 활용한다고 들었는데, 교육은 어떤 형태로 진행 됩니까?총 24권의 교재가 지급되는데, 이중 한국 이솝우화 8권 각국 전래동화 16권이 지원 됩니다. 1년간 지원되는 프로그램은 세이브더칠드런 주관 부모교육 2회, 다문화센터 주관 부모교육 4회가 실시되며, 교육 내용은 모아 상호작용을 위한 인식 및 기술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 실시됩니다. 이중언어 자조모임은 전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경우 8회 진행되고, 교육 내용은 부모의 역량강화 및 자존감을 향상 시키고, 이중언어 말하기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프로그램입니다.- 모든 연령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합니까?중국어, 베트남, 몽골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결혼이주여성 자녀로 만 4세 ~ 8세가 대상입니다.- 언어 두 개 기쁨 두 배 사업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회원등록이 된 중국, 베트남, 몽골, 기타국가 결혼이주여성중 만 4세 ~ 8세의 자녀를 둔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시고 센터에 신청하시면 됩니다. 단, 프로그램이 3월에 시작되니, 2015년 프로그램에 참여 하실 수 있도록 미리 신청 접수하시기 바랍니다.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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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12 23:02

남원 '다산육종' 운영 박화춘 박사 "버크셔 순종 100%, 지리산 흑돈 브랜드로 차별화 성공"

우루과이라운드가 발효된 1995년 이후 글로벌시장의 문은 더욱 활짝 열렸다. 요즘은 자유무역협정(FTA) 체제 하에서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돼 가는 상황이다. 얼마 전에는 정부가 쌀시장 완전 개방을 선언했다. 제조업 수출 비중이 높고, 농수축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이 취약하다. 대한민국에게 FTA체제는 기회다. 하지만 농수축산업 종사자들에게 절망과 위기를 안겼다.하지만 희망과 기회는 여전히 현장에 있다. 수입 농산물 홍수 속에서도 국산 농산물의 품질 경쟁력을 높여 위기를 기회로 돌려놓는 농부들이 많다. 전북일보는 새로운 기획 6차산업이 미래다에서 농업의 가치를 새롭게 세워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농업의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지리산 둘레길 2코스 출발지가 있는 남원시 운봉읍은 해발 500m에 달하는 고지대, 지리산 아래 청정 고원이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장 아지발도가 이끄는 대군을 섬멸한 황산대첩의 현장이고, 조선 말 판소리 명창 송흥록 선생의 생가지가 있는 판소리 고장이다.고도가 높은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정부가 1971년 호주에서 들여온 양을 지리산 바래봉 일대에 방목하기도 했고, 국립 가축유전자원시험장(축산기술연구소), 축산고등학교 등 측산 관련 기반이 있는 곳이다.이곳에서 흑돈 농장인 다산육종을 운영하는 박화춘 박사(52)는 귀농인이다.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나와 농촌진흥청과 축협중앙회에서 근무하며 잘 나갔던 육종 전문가다. 그가 10년 전 돌연 귀농, 똥냄새 속에서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왜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돼지 똥 냄새가 진동하는 농장으로 갔을까. 지난 9일 박화춘 박사를 만나 그의 농장과 생햄가공장, 식당, 6차산업의 꿈을 부풀리고 있는 사업예정지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그 속마음을 들어봤다.-박 박사께서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농촌진흥청과 축협중앙회에서 축산과 육종 업무를 담당한 인재였습니다. 귀농을 결심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농촌진흥청에 근무할 때는 1400억 원 규모의 전문종돈업육성사업을 담당해 진행하는 등 열심히 일했습니다. 또 1996년 축협중앙회로 직장을 옮긴 뒤 종돈개량사업을 총괄하는 등 육종 관련 업무를 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교과서는 양식이 아니라 상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주변의 기라성같은 선배들과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현장의 일을 배우기 위해 고창군 대산에 있는 축협 종돈사업소 근무를 자청할만큼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그 때 전공으로 먹고 살지 말자, 전공을 부전공화하자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전공 업무 외에 돼지 키우는 일, 사료와 관련된 일, 축사와 관련된 일 등도 현장에서 배우고 연구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망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됐죠. 제가 그곳에서 종돈 개량업무만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축협과 농협이 통폐합 됐습니다. 실망감이 컸고, 고향에서 돼지농장을 하기로 결심했죠. 2000년 말에 지금의 부지에 농장을 지었고, 2003년 초 완전 귀농했습니다.-돼지 농장인데 다산육종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유가 있는지요.다산은 多産이 아니구요, 정약용 선생의 호 다산을 따서 지은 이름입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 정신을 표방하고자 했습니다.-처음부터 농장에서 흑돼지를 키웠습니까.처음에는 백돼지(요크셔, 우리나라 대부분 돼지 농장에서 사육)였고, 흑돼지는 2003년 남원시가 흑돈클러스터사업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으로 키웠죠. 제가 흑돼지를 않고 백돼지 농장만 계속 했으면 지금 규모의 농장 3개는 했을 겁니다. 흑돼지 일을 하면서 매년 10억씩 까먹었죠.(웃음)-그런데 왜 흑돼지 사업에 뛰어든 겁니까.말씀드린대로 남원 흑돈클러스터사업이 진행되면서 참여했습니다. 꺼먹돼지라고 불리는 흑돼지는 어려서 저희 집에서도 키웠고, 도내에서는 남원과 진안 등에서 지역 특산가축으로 인식이 돼 있었죠.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신토불이 토종 흑돼지, 꺼먹돼지, 똥돼지는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버크셔, 요크셔종을 들여다 개량하는 과정에서 없어졌고, 일제가 개량했던 잡종 흑돼지도 육종관리가 안돼 처음의 특성을 크게 잃었습니다. 하지만 국내 양돈시장의 대세인 요크셔 백돼지보다 훨씬 품질이 좋은 흑돼지의 경쟁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흑돈클러스터사업에 매진한 것이지요.- 박 박사님은 박화춘박사의 지리산흑돈이란 브랜드의 흑돈을 생산 보급하고 있습니다. 또 남원흑돈클러스터의 고원흑돈과 국내 생산기반을 고려한 브랜드 버크셔K 등 남원에는 3가지 흑돈 브랜드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모두 제가 육종 관리하고 있는 버크셔 순종 100%의 흑돈 브랜드입니다. 다만 박화춘박사의 지리산흑돈은 제 농장에서 생산되는 흑돈 브랜드이고, 고원흑돈은 클러스터 참여농가들의 흑돈에 사용되는 브랜드입니다. 버크셔K는 저희가 공급하는 순종 버크셔를 생산하는 국내 농장의 흑돈에 쓰도록 만든 브랜드입니다. -사실 국내에서 흑돈, 흑돼지는 그 맛이 차별화돼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장에서 남원, 진안, 장수산 흑돼지는 일반 돼지고기보다 비싸고, 제주도흑돼지도 가격이 비쌉니다. 지리산흑돈과 일반흑돈의 차이를 말씀해 주십시오.털이 까맣다고 모두 흑돈이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검은털을 가진 돼지 중에서 버크셔 품종의 털색은 열성유전이지만, 다른 흑돈 품종의 털색은 우성유전입니다. 그래서 재래흑돈은 순종, 잡종 모두 검은색 털이고, 잡종흑돈은 검은색 계통의 털색을 지닙니다. 하지만 순종 버크셔흑돈은 네 다리와 꼬리, 머리 등 여섯 곳이 백색(육백보물)인 것이 특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혈통 관리입니다. 버크셔흑돈은 철저한 혈통관리로 고품질의 육질이 고르게 생산되지만, 여러 품종간 교배가 계속돼 온 잡종흑돈은 상품의 품질 편차가 큽니다. 국내에서는 다산육종에서 생산하는 버크셔 흑돈만이 유일한 순종 100% 버크셔이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박 박사님의 버크셔 고기 특징은 무엇입니까.고급 브랜드의 조건은 안정적인 맛, 안정적인 공급, 안정적인 가격에 있다고 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료를 먹여 사육하는 것이지요. 이들 조건을 모두 갖춘 다산육종의 버크셔 순종은 그 맛이 소고기 이상으로 탁월합니다. 맛있는 육질의 조건은 육질이 부드럽고, 촉촉하고, 고소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육질 내 적색근섬유수 비율이 높고, 가열감량이 낮고, 도축 후 24시간 PH가 높아야 합니다. 다산 버크셔흑돈은 적색근섬유수 비율이 1012%, 가열감량 18% 이하, PH5.8 이상의 고른 품질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버크셔 지방은 불포화지방산과 올레인산, 리놀렌산 함량이 높아 고소하고 건강에 좋습니다. 고기를 구울 때 지방 융점이 섭씨 50도에 불과해 잘 타지 않습니다. 지방을 그냥 마셔도 될 정도입니다."-과거에 국내에서 버크셔 흑돈 생산을 시도하지 않았나요.제가 흑돼지 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2003년까지 우리나라에 버크셔를 들여와 사업하려고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들의 흑돼지 사업은 사업성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2003년도까지 모든 버크셔가 1명의 바이어에 의해 미국의 단일 농장에서 들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튜티힐인데, 모돈이 120두 정도인 작은 농장이예요. 이렇게 작은 농장에서만 버크셔를 수입했으니, 그 수가 적었고, 따라서 금방 근친이 돼 도입 후 얼마 안가서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많은 자료를 검토 분석하고, 일본 가고시마 흑돼지 농장 등을 둘러보면서 제가 하면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죠."-결과적으로 다산육종과 박사님이 이끌어 온 남원흑돈클러스터의 흑돈 사업은 성공한 것으로 판단되는데요.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돼지 사육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흑돼지 사육은 안되는 사업입니다. 그걸 육종 개량 등으로 적극 활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경제성이 없는 사업이란 얘기죠. 그래서 대기업들이 하지 않는 거죠. 저는 육종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지역(남원시)에서 흑돼지 아이템을 갖고 흑돈클러스터를 하자고 했고, (육종을)배운 게 죄고, 지역에 기여하고자 해서 남원흑돈클러스터사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비전문가는 뛰어들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흑돼지 사업은 끊임없이 연구 노력하고, 새로운 모토를 가지고 끌어갈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들의 흑돼지 사업은 이제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섰고, 권할 수 있다고 봅니다.-흑돼지 사업의 성공은 결국 차별화된 맛인 것 같습니다.그렇습니다. 버크셔사업은 고기를 팔려고 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화된 맛, 음식문화를 팔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는 그런 음식사업을 잘 하는 사람,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밸류라인을 구축하고자 노력합니다."-박사님은 요즘 농업의 6차산업화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그렇습니다. 저는 버크셔의 가치를 공유하는 밸류라인을 구축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한 6차산업 구조의 완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고품질의 순종 버크셔 육종 및 생산을 위한 연구개발, 부위별 가격 불균형 해소를 위한 다양한 상품개발, 밸류라인 구축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 SNS마케팅 등을 통한 유통 확대, 문화가 있는 마케팅 등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부인이 맡아 하고 있는 지리산생햄 가공장을 연계한 6차산업 구조도 구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생햄은 돼지 뒷다리를 천일염에 절인 후 1년 이상 발효시켜 만드는 고급 가공식품입니다. 운봉은 해발 500미터의 청정한 자연조건을 갖췄습니다. 또 다산육종이 고품질의 버크셔 뒷다리를 공급합니다. 명품 생햄 생산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죠. 스페인 이베리코생햄(하몽)이 생산되는 가공공장과 농장, 유통망 등을 벤치마킹했고, 저희 지리산생햄은 요즘 국내에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생햄은 부가가치가 매우 큰 사업 아이템입니다. 신세계백화점서 팔리는 하몽은 뒷다리 하나가 430만원에 달합니다. 돼지 뒷다리가 두 개이니 소 한마리 가격인 셈이죠. 지리산흑돈 생햄 가공장을 운봉 뒷산 중턱에 마련한 5600평 부지에 세울 계획입니다. 카페와 펜션까지 만들어 지리산둘레길 여행자, 관광객들이 운봉에 머물면서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일 것입니다. 6차산업은 꿈의 산업입니다. 농수축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치를 향해 공부하고, 연구하고, 사업계획을 세워 추진하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김제 민간육종단지, 농진청 혁신도시 입주 등 계기로 전북이 육종의 중심지로 부각할 정도로 전북은 기회를 잡고 있다. 종자, 육종 중요성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종자산업은 앞으로 가치의 척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요리할 때 양념이 어떻게 들어가느냐가 중요했지만, 녹차를 직접 먹인 돼지고기와 단지 녹차가루를 뿌린 돼지고기가 다르듯이, 종자는 가치의 척도가 되고 산업의 근간이 될 것입니다. 종자가 좋지 않으면 산업이 안되는 거죠. 종자, 육종 분야에서 전문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현장에서 손에 흙과 똥을 묻히며 연구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됩니다."-귀농하려는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그동안 귀농교육을 다니면서 강조한 것이 젊은가. 기술이 있는가, 3억 원이 있는가다. 만약 이 세가지가 충족되지 않은 채 귀농하고자 한다면 도시에 사는 동안 자기가 아는 사람 50명만 확실히 챙기라고 권합니다. 귀농해서 생산한 농산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충성도 높은 도시 소비자를 확보하는 마케팅 전략을 사전에 펼치라는 것이죠. 꾸러미사업이 이런 식이죠. 귀농하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가치를 만들 궁리를 하고, 실력을 쌓은 뒤 귀농해야 성공합니다."● 박화춘 박사는 가축육종학 전문가남원흑돈클러스터 사업 성공 견인박화춘 박사는 학생시절 하룻밤 자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면 쌀 10가마를 벌수 있다며 공부했다. 외길은 없다. 나에게 주어진 길이 있으면 열심히 할 뿐이라는 신념도 그의 뼛속까지 배어 있다. 홀어머니의 고생을 보면서 자란 탓이다.그는 운봉에서 초중고를 나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해발 500m 고지대인 운봉에서 자란 그는 집에서 키우는 흑돼지에 친숙해 있었고, 축산고를 거쳐 대학도 축산학과를 선택했다.가축육종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한 그는 1994년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축산과학원 축산연구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현장을 중시, 1996년 축협중앙회 종돈개량부장으로 일터를 옮겼다.그는 돈이 안되는 농업, 부가가치가 없는 농업은 머슴살이 농업이라고 말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사구시를 좌우명으로 삼은 까닭이다. 이같은 생각이 그를 공무원에서 현장이 더 중시되는 축협으로, 그리고 농장으로 이끌었다.그는 육종 전문가답게 귀농 10년만에 2만평이 넘는 농장을 일궜고, 이곳에서 버크셔 종돈과 새끼 등 1만 2000두의 돼지를 기르고 있다. 남원흑돈클러스터 사업을 주도해 궤도에 올려놓았고, 그의 생햄은 2012년 전주국제발효식품엑스포를 찾은 영부인 김윤옥 여사의 큰 관심을 받을 만큼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그는 농업이 인간의 가치, 존엄성을 파는 사업이 돼야 2세들도 긍지를 갖고 자랑스럽게 영위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농민들이 일할 환경을 만들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는 돼지농장이 성공하려면 고기 소비처인 식당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건강과 힐링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고품격 음식문화가 자리잡아야 농장도 함께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급과 보통의 차이를 인정해 주는 풍토를 만들어 주어야 농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고, 음식업을 고급 서비스업으로 만들어 정부가 지원해야 일자리가 늘고 결국 농업이 산다고 말한다. 그의 지향점은 6차 산업화의 성공에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4.08.12 23:02

신임 구대영 전주기상대 대장 "정확·신속한 기상정보 제공, 도민 생명·재산 지키기 앞장"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 없이 과거와 다른 이상기상이 해마다 나타나고 있다. 최근 전북지역을 비롯해 전국에서 폭염과 집중호우가 잇따르고 있다. 이처럼 극한기후현상의 발생일수는 예년에 비해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같은 이상기상으로 기상예보와 관측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지난달 21일 부임한 구대영 전주기상대장을 만나 극한기후현상의 원인과 이에 따른 준비, 예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노력 등을 들어봤다.-전주기상대장으로 부임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소감 부탁드립니다.“학창시절을 보냈던 고향에서 근무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지만 책임도 막중함을 느낍니다. 과거에 짧은 기간 전주에서 업무를 한 적이 있지만 그동안 제주공항, 김포공항 등에서 항공기상업무를 주로 해왔는데 이번에 전주기상대장으로 부임 받았습니다. 기회를 주셨으니 기상업무가 고향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소신껏 일하겠습니다.”-최근 폭염이 이어지고 일부지역에서 기상관측 이래 최고 기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폭염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올해 6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전주지역의 일 최고기온이 30℃ 이상인 일수는 32일이었고, 지난달 30일에는 전주에 폭염경보까지 발효되면서 35℃이상의 기온을 이틀간 기록했습니다. 특히 지난달 31일 정읍은 7월 최고기온 1위(37.3℃), 순창은 7월 최고기온 2위(36.3℃)를 기록했습니다.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반도는 여름철에 고온 다습한 특성을 가진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북태평양 고기압의 가장자리를 따라 덥고 습한 공기가 계속해서 유입되는 가운데, 낮에는 강한 햇볕에 의해 기온이 올라가 폭염이 나타납니다. 또 이렇게 낮에 가열된 열이 밤에 충분히 소산되지 못해 열대야가 나타나는 곳도 많았기 때문에 무더위가 이어졌습니다.” -이상기상으로 기상예보와 관측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예보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계획인지.“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기온이 1.8℃ 상승해 전 지구 기온상승보다 2배나 높은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말 한반도 평균기온은 지난 30년보다 4℃이상 상승할 전망이고, 강수량 또한 17% 증가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고온, 호우, 태풍 발생빈도는 지금보다 급증하게 돼 자연현상을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최종 날씨를 판단하는 예보관의 예보기술은 매우 중요함을 고려해 예보기술세미나, 사례분석, 모의훈련 및 학습강화 등을 통해 예보능력 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예보관들에게 장기간 국내교육과 더불어 영국 해외 연수 교육으로 전문성 확보에 힘쓰고 있습니다.”-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 기온이 상승하고 그와 더불어 폭염으로 인해 시민들이 많은 불편을 느끼는데,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은 있습니까?“세계적인 현상입니다만 기후변화를 이해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활동으로 인해 배출된 가스가 온실효과를 이루어 지구기온이 상승하고 이로 인해 이상기상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상기상으로 인한 지구환경변화에 어떻게 대응할까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각 분야에서 온실가스 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에서 이산화탄소를 줄이려는 노력과 더불어 숲을 조성하고 습지를 보존하는 생태 환경적 노력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 조성은 온난화를 막는 방편이도 하지만 우리에게 쉼터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더위의 느낌을 낮게 해주는 간접효과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도시에서는 열섬으로 인해 여름이 힘든데 시민들이 쉴 숲이 많으면 체감더위는 더 낮아집니다. 여건이 된다면 기상청에서 관측하고 있는 기후계절 관측목 군락지를 활용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오셔서 쉴 수 있는 공간이 기상대관측환경부지에 조성되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태풍, 집중호우 등에 의해 피해도 자주 발생하고 있는데,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자연재해는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지만 대비하면 피해는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특히 고귀한 우리 생명은 기상정보를 활용하고 대응하면 지킬 수 있습니다. 도민들의 고귀한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방재기상업무 수행에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자연재해는 위험한 기상으로부터 유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봄부터 찾아오는 황사, 호우, 태풍, 대설, 지진, 낙뢰, 강풍 등이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위험기상 요소들입니다. 이러한 위험기상 발생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도민들에게 알리는 일, 그리고 이러한 위험기상 발생 시 스스로 대응해야 하는 위험기상대응 교육 등 기본업무를 충실히 해 도민들이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국가 농업 클러스트 전북 이전과 관련해 전주기상대에서 지원할 수 있는 분야가 적지 않을 것 같은데요.“부임해서 언론기사를 비롯한 기타 자료를 보고 도민들이 노력하는 일 들이 무엇인지를 공부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일과 문화적 삶이 윤택해지기를 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농업, 관광, 신산업육성, 복지, 도시경관 조성, 유통, 기후변화 대응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심초사하고 있는 분들이 많음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일을 하는 데에는 기상기후정보가 필수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생활기상뿐만이 아니고 각 산업현장에서 기상정보를 활용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산업별 응용기상정보생산 서비스에도 한 층 더 노력할 예정입니다. 특히 농업이 전통산업이자 주요산업인 전북지역의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북농업기상정보서비스 시스템 구축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농업현장, 농업정책, 농업연구, 농산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원하는 기상기후정보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조사해 적시에 정보가 전달되도록 하는 농업기상정보시스템을 전주기상대에 별도로 구축하려고 추진 중입니다. 이를 통해 농업현장의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농업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하는데 일조하고자 합니다.”● 구대영 대장은 기상청 공직생활 38년, 항공 관련업무 전문가구대영 전주기상대장(56)은 전북도민을 위한 최상의 기상정보 제공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구 대장은 전주 해성고를 졸업하고 1977년 경기 수원의 농업기상관측소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전주 출신인 그는 1998년부터 주로 제주지역에서 근무해왔다. 항공기상청 제주공항기상대장과 제주지방기상청 기후팀장·예보과장, 항공기상청 김포공항기상대장 등을 역임했으며, 15년 이상을 항공기상업무를 담당하는 등 항공기상업무의 전문가로 통한다.그는 얼마 남지 않은 공직생활을 고향에서 도민들에게 봉사하며 마무리하고 싶어 자원해서 전주기상대장으로 왔다.구 대장은 남은 임기 동안 전주시민은 물론 전북도민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또 전북농업기상정보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해 농업현장의 자연재해를 예방하고 농업 생산성 향상에도 기여할 계획이다.

  • 기획
  • 강정원
  • 2014.08.11 23:02

[(26) 순창 한국씨엔티(주) 방적공장] 고품질 면사 의류업계서 인기몰이…지역발전에도 한몫

한국씨엔티(주)(대표이사 김훈석, 공장장 이동호)는 지난 2010년 전라북도, 순창군과 MOU체결 후 2012년 순창군 풍산면 풍산농공단지에 방적공장을 준공해 원사를 생산판매하는 기업이다. 한국씨엔티가 순창에 둥지를 튼 이후 순창 지역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선도하고 있다. / 현재 130명 고용인원과 년 매출 380억원에 이르며, 특히 향후 조성될 제2풍산농공단지 예정지에 대규모 투자를 예정하고 있어, 보다 안정된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경제발전도 더한층 가속화될 전망이다.△한국씨엔티, 순창에 둥지를 틀다 한국씨엔티라는 기업을 유치하게 된 데는 순창군의 지속적인 노력이 한 몫 했다.순창군이 기업운영 활성화로 침체되어 있는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기업유치에 사활을 걸면서 지속적으로 노력한 끝에 한국씨엔티는 다른 곳에 공장을 지으려던 애초 계획을 변경하고 순창으로 공장신축을 결정했다.행정과 기업이 윈윈해야 한다는 신념을 모토로 다양한 기업정책을 펼친 결과, 물류비나 고용인원 부족 등의 문제로 다소 기업하기 꺼려했던 순창지역이 이제는 기업이 선호하는 곳으로 바뀌게 됐다.△한국씨엔티 순창공장 연혁현황 한국씨엔티는 레저, 제조, 교육, 건설, 금융, 레미콘 등 관계회사만도 8개나 된다. 무안컨트리클럽, 한국씨엔티 시멘트, 방적, 남화토건, 센트럴상호저축은행 등 계열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전남북 지역의 내로라하는 기업으로 자리잡고 있다.그중에서도 한국씨엔티 순창공장은 세계적인 면사를 생산하는 업체로, 436억을 투입해 풍산농공단지 3만4107㎡ 부지에 1만7903㎡ 건축면적, 지하1층 지상2층 규모로 지난 2012년 준공됐다. 지난해 380억 매출에 이어 올해 매출예상액은 450억으로, 연간 생산량은 9450톤이며, 130명의 고용인원 중 순창지역민만 90여명에 달한다. △품질 좋은 면사 인기몰이한국씨엔티가 만든 면사는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으면서 유명 의류업계에서 납품을 요청하고 있다.공장이 건립된지 채 1년도 안된 지난해만 380억의 매출을 올리면서 재고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지금도 일주일 분량치밖에 재고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며, 국내 유명 브랜드인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지난달에만 순창을 수차례 방문했다.특히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대한민국에서 이곳의 실을 따라올 회사가 없다며, 대한민국 최고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실을 곧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이에 한국씨엔티는 현재 전국에 걸친 면사 납품업체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독차지하며 세계 속의 면사 생산을 위해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한국씨엔티 순창공장의 장점한국씨엔티가 만든 면사가 이처럼 품질이 좋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첫째 공장설계 차별화를 통한 제품 품질 차별화로 인해서다.정방기 기계간 240mm 넓이 확대 설치로 전염사절이 감소되어 질 좋은 면사가 생산되는 것이다.둘째 중천정 샌드위치 패널을 설치해 단열효과로 온습도가 유지되면서 적정온도에서 만드는 실 품질이 그만큼 오래도록 빛을 잃지 않게 된다.셋째 공조용량 확대 설계로 각 공정 사절이 최소화되고, 집진실 용량 확대 설계로 낙물이 증가되어 깨끗한 제품이 생산되고 있으며 또 높은 호주면 조합으로 원사가 강력하고 염착성이 보장되는 특징이 있다.넷째 실시간 공정관리로 균일한 품질이 유지되는 것은 각 공정 실시간 생산데이터 모니터링을 통해 생산 안정화를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품질편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원면부터 각 공정 슬라이버 실시간 품질 테스트 또한 품질을 높이는 비결 중의 하나다.△사회공헌에도 힘써한국씨엔티는 지난해 12월 순창군에 1억원을 쾌척했다.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조금이나마 지역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는 한국시엔티는 어려운 여건에서 학업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옥천장학회에 5000만원, 순창군민의 여가선용에 도움이 되고자 순창군 체육진흥기금으로 5000만원을 기탁했다.이같이 지역을 위한 다양한 지원 덕분인지 상복도 터졌다. 지난해 12월에는 투자유공부문 우수기업으로 선정되어 산업통상자원부장관 표창을 수상했으며, 6월에는 한국씨엔티 계열사인 남화토건(대표 최상준)이 건설산업 유공 금탑산업 훈장을 받은 바 있다.이처럼 한국씨엔티는 기업의 성장과 안정성은 물론 품질 창출과 사회공헌 공로부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기업의 올바른 경영에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다.● 이동호 공장장 "2016년 제2공장 건립으로 재도약, 지역민과 함께하는 모범기업될 것"한국씨엔티 방적공장이 순창으로 오게 된 데는 순창군청 관계자 여러분의 힘이 컸습니다. 처음 이쪽으로 오기 전부터 시작해 공장을 짓는데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또 생산하게 되면서도 항상 순창군은 저희에게 협조적으로 처리해 주셨습니다한국씨엔티 순창공장 이동호 공장장은 순창군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앞으로도 순창군의 발전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피력했다.특히 이 공장장은 풍산제2농공단지에 2016년에 착공하게 되는 한국씨엔티 제2공장이 건립되면 약 600억의 매출과 230여명에 가까운 고용인원이 창출될 것이라며 지역 주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한다고 말했다.그는 또 2공장에서는 기능성 섬유 등 특수사를 만들 계획으로, 국내를 벗어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품질 좋은 실을 만드는 것이 우리 회사의 목표다며 지금도 경기도 동두천, 의정부, 남양주, 부천, 대구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친 면사 납품으로 불경기를 잘 모르는 실정이다고 말했다.이 공장장은 앞으로 우리 회사는 기업과 행정, 지역민이 함께하는 모범적인 기업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며우리회사의 목표는 대한민국 최고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최고의 실을 만드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임남근
  • 2014.08.07 23:02

[(31)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충남 공주] 혁명의 꿈 묻힌 우금티 '역사의 그늘' 오늘날에도 여전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정읍 황토현 전승지와 전주성 점령이 빛이라면 공주 우금티는 그림자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던 동학농민군이 당시 충청도 수부였던 공주감영을 점령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했으나 한일연합군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던 곳이 바로 이 우금티였다. 우금티의 그림자는 오늘에까지 역사적 상흔을 안은 채 길고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농민군이 우금고개를 넘지 못하고 혁명의 꿈을 고개에 묻었듯이, 공주에서 그 혁명의 역사는 오늘날도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보였다. 최대의 격전지를 연상시킬 수 있는 기념시설도, 선양사업도 지역사회의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농민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추모예술제가 공주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었다.△잘못 끼운 단추 위령탑기념탑 타일이 이렇게 흉물스럽게 벗겨졌는데 어떻게 이리 방치할 수 있나요? 지난달 30일 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진 우금티 사적지에서 만난 방문객의 첫 반응이었다. 공주가 고향으로, 현재 경기도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는 그는 고향을 지키는 아버지와 함께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고교생 딸에게 알려주려고 찾았단다. 뙤약볕을 뚫고 찾은 이곳의 모습에 실망한 그는 더 이상 내용물들을 들여다보지 않은 채 서둘러 현장을 떴다.2차례의 공주전투에서 수천 명의 농민군이 숨졌던 우금티의 피어린 역사가 위령탑에 상징적으로 새겨졌으나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역사적 희생물로 평가되고 있다. 정읍 황토현에 세워진 기념탑보다 10년 늦은, 1973년 건립된 우금티 위령탑은 당시 천도교 공주교구장이었던 이창덕 씨를 중심으로 건립위원회를 꾸려 만들었다. 100여 ㎡ 부지에 황토현기념탑을 닮은 8m 높이 위령탑의 비문은 동학농민혁명이 5.16과 10월유신으로 이어진다고 새겼다. 님들이 가신 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의 피어린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중략)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5.16과 10월유신, 박정희 대통령 등의 비문은 누군가에 의해 뭉개지면서 탑 자체가 수난의 역사가 됐다. 농민군의 원혼을 볼모삼아 정권을 정당화시키려 했던 기념물로 전락하면서 이 기념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시민사회 활동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얼핏 벗겨진 외형이 안타까울 수 있지만, 농민군의 원혼을 욕보인 기념물로 평가하는 쪽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념물이 되어버린 셈이다.실제 본보 취재팀이 100주년 당시 이곳을 답사한 후 20년이 흘렀지만 공주에서 우금티전투를 기리는 사업들은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해 보였다. 20년 전 우금치에서 우금티로 이름이 바뀌고(동학농민혁명 당시 이름), 1994년 이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됐으며, 주변에 조형물 몇 개가 설치된 정도가 변화된 모습이었다. △보수적 지역풍토 속에 한계 드러내동학농민혁명 전체 과정에서 큰 상징성을 갖는 공주에서 당시 역사가 외면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역적으로 보수적 풍토가 강해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곳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서울 진격을 막아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이 더 우위라는 이야기입니다.동학농민전쟁우금티기념사업회 윤여관 운영위원장(51)은 이런 풍토 속에서 진행되는 기념시설과 기념사업의 한계를 지적했다. 공주시에서 위령탑의 보수작업과 리모델링을 하려 하지만, 사업회에서 이를 막는 것도 그 이유란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게 사업회의 사업인 셈이다. 한 번 만들어졌으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켜야 한다. 위령탑 역시 마찬가지다. 얼마나 성급하게 만들어졌으면 30년 밖에 안 된 탑이 이런 몰골이겠는가. 이 자체가 우리의 모습을 성찰할 수 있는 반면교사로 보는 것이다.윤 위원장은 100년, 200년이 지난 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이곳이 폐허가 되면 거기서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또 땅을 다룰 줄 아는 미적 시각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설피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늘날처럼 성장주의 사회에서 배고파 일어난 농민군의 마음을 살필 수 없다고 여겼다. 내 배만 채우려는 시대에 사는 우리가 기념할 만한 자격이 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도 던졌다. 나눔과 배려의 동학사상을 바탕에 깔지 않은 기념물은 언젠가는 다시 쓰레기가 될 것이며, 이것저것 조악하게 만든 시설만을 설치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역사적 공간 적극 활용 필요이런 현재의 시민사회 활동과 모습이 너무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초기 우금티사업회를 이끌었던 조재훈 충남교육연구소 이사장(67, 전 공주교대 교수)은 동학농민혁명 관련 공주의 역사적 공간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의 보수적 특성상 100주년 당시만 해도 위령제에 대해서도 지역사회의 거부감이 강했습니다. 전라도 사람들의 제사를 왜 공주시민들이 지내야 하느냐고 반대운동까지 있었습니다.조 이사장은 기념일을 만들고 예술제 등 여러 행사들을 진행하면서 그런 위화감이 많이 없어지고 이해가 넓어졌다고 했다.그는 특히 공주시에서 추진하려 했던 우금치 전적지 성역화 사업이 무산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공주시는 애초 2002년까지 전시관 등을 건립할 계획으로 주변 토지를 매입하는 등 의지를 가졌으나 무산됐고, 이후에도 대학에 용역을 맡겨 사업계획을 세웠으나 흐지부지 된 것을 두고서다.공주가 교육의 도시 아닙니까. 탑도 다시 만들고, 전투지 탐험로를 만들어 학생들 체험도 할 수 있는 산교육장을 만들면 역사관광자원으로서도 가치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관련 자료 수집과 연구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그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백제가요 정읍사 등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공주부여에 갇힌 백제문화제를 익산 등으로 확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정신적인 측면도 강조했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시청 책상 엎어가며' 우금티 전투지 지켜동학농민혁명의 최대 전투지였던 공주는 우금티 외에도 동학 관련 유적지가 산재해 있으나 위령탑 외에 달리 기념시설들이 많지 않다. 혁명의 전사를 이룬 교조신원운동이 최초로 일어났던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집회 터, 공주에서 농민군과 관군 간 첫 전투가 벌어졌던 남월 전투지, 우금티 전투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지 견준봉과 두리봉, 우금티 전투에 앞서 공방을 벌였던 이인전투지와 효포능치 전투지 등에는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다만 농민군 18명이 숨졌다는 송장배미에는 기념석과 기념조형물(윤여관 작)이 설치돼 공주전투를 알리고 있다. 이곳은 도로가 뚫리면서 자칫 사라질 위기에 있었으나 우금티기념사업회에서 시청 책상을 엎어가며 지켜냈다.공주대공주대 교수와 향토사학자, 농민운동가 등을 중심으로 꾸려진 우금티사업회는 공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지켰던 파순꾼. 우금티 고개 자체를 없애려는 도로공사에 맞섰고, 현재도 원래 능선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매년 추모 제례와 연극공연, 체험프로그램, 토론회 등의 추모예술제를 열어 당시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기억하도록 해왔다. 올해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작품을 대본으로 우금티 극단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지역에서 사용하는 혁명대신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명칭도 눈에 띈다.

  • 기획
  • 김원용
  • 2014.08.06 23:02

[⑨ 놀이문화 추구하는 청년 세대] 놀면서 가치 있는 즐거움 찾기…"사회발전 동력"

청년이 놀이를 찾는다. 나이와 성별, 혼인 여부를 떠나 그들은 흥미가 있는 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 즐거움을 의미로 연결시킨다. 사실 청년과 놀이문화는 떼놓고 볼 수 없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길거리응원과 촛불시위처럼 청년들은 어디서든 즐거움을 바탕으로 한 문화를 형성한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문화만 봐도 즐거움은 곧 행동의 원동력이다. 특히 최근 청년 놀이문화를 들여다 보면, 즐거움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재미보다 일이 더 가까운 청년들은 즐거움에 내포된 가치를 쫓는다. 자신이 재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도전하고, 거기서 얻어진 즐거움을 또 다른 가치에 연결시킨다. 최근엔 스스로가 가치 있는 즐거움을 만들어 제공하는 젊은이들도 생겨났지만, 극소수다. 어떻게 놀면서 즐거운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을까? 전주 시민놀이터에서 그 해답을 취재해봤다.△어른들의 놀이터가 있다고? 전주 시민놀이터는 동문예술거리에 위치해있다.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던 것이 다른 예술인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소중한 공간이다. 전주에서도 동문예술거리를 중심으로 자생적발생적 문화를 생성해 나가고, 그것이 시민들에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이 바로 전주 시민놀이터다.전주 시민놀이터 관계자는 기성세대가 보기에 청년세대의 놀이문화는 가볍고 소비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청년의 놀이의 핵심은 즐거움과 가치가 합쳐졌다는 게 핵심이라며 놀이문화가 곧 사회발전의 동력이라는 측면에서 청년들의 놀이문화적 사고에 대한 수용은 앞으로 사회가 해결해야할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았다고 강조했다. 이어항상 열려있는 전주 시민놀이터를 많이 찾아달라고 당부했다.△놀이터 찾아간 어른들 뭐하지?전주시민놀이터는 연중 3일(1월1일, 설, 추석 당일) 빼곤 언제나 열려 있다. 대관하고자 하는 시민이 있는 경우 24시간 연습이 가능하다. 대관 비용은 3시간 기준으로 공간별로 별도 책정하고 있다고. 놀이 공간 안에는 뭐가 있을까?전주 시민놀이터는 지상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 있는 이야기 놀이터의 떠듬 공간은 자율적인 카페형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구비되어 있다. 떠듬 공간에서는 시민놀이터를 오가는 분들의 다목적 모임이 이루어질 수 있고, 따로 회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공간도 있다.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대관한다. 평소에 전시회가 열리기도 한다. 소리놀이터인 두드림 공간이 마련된 2층은 방음시설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악기연습이나 노래 연습 등이 가능한 공간이다. 따로 악기가 준비되어 있거나 음향시설이 준비되어 있진 않기 때문에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한다. 밴드연습을 원하는 경우에도 창작지원센터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3층에 있는 창작 놀이터는 넓은 마룻바닥과 전면거울이 있는 모둠공간과 아이디어 회의나 기획회의 등을 할 수 있도록 모둠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극, 춤 연습 등을 하기에 좋다. △ 나처럼 놀아봐요 이렇게!최근엔 거리공연을 의미하는 버스킹을 하는 청년들도 늘어나고 있다. 전북대 앞, 전주교대 근처 등 대학가 주변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하나의 놀이다. 노트북으로 반주를 틀어놓고 자신의 실력을 오롯히 증명받는 젊은 이들은 노래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붙든다. 대형 포털사이트를 중심으로 거리공연 버스킹을 하는 모임과 장소 등을 공유하는 카페들도 늘어나고 있다.평소 길거리 공연을 즐기는 김수연씨(25전주)는 예전에는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40대 초반 음악하시는 분들도 꽤 생겼다며 전주시민놀이터처럼 어른들은 위한 놀이터가 곳곳에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상민 청년 CEO '창업일기' - 우리들만의 진급 시험시험. 그리고 평가. 인생은 시험과 평가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시절 수능시험부터 시작해 자격증 하나를 따거나 취업을 준비하더라도 평가된다. 하다못해 사업을 하는 나 역시 정부 및 금융기관 평가를 받는 것이 기본 중 기본이니 말이다.회사 설립 4년 8개월 만에 진급시험을 만들었었다. 당시 임직원 모두 분위기가 살벌(?)해졌던 기억이 난다. 누구는 진급하고 누구는 떨어졌네. 과연 평가는 객관적으로 되었을까?그리고 그 평가에 임하는 사람 또한 열심히 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반대 기류에도 진급시험 도입 후 그 기준을 조금씩 강화해 나갔다.만약 시험과 평가가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분명 인사권자의 재량과 또는 CE0의 주관적인 평가가 비일비재할 것이다.내가 도입한 진급평가에서는 크게 이론평가와 실무평가 2가지를 본다. 공통 이론평가는 우리들의 경영이념과 사훈, 비전과 목표, 역할과 책임 등 기본 사규들에 관련된 평가다.실무평가 역시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팀에서의 실기와 실무 이론에 관한 평가다.이를 직원들에게 모여놓고 알리자 마자 대다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직원 중 한사람은 이렇게 말했다.사장님! 공부하기 싫어서 이곳에서 단순업무 하려고 왔는데 갑자기 평가라니요?또 다른 직원은 사장님 내 점수가 공개되면 쪽(?)팔려서 어떻게 회사 다니겠어요? 등등.아마도 처음 시행하는 하루인들의 평가는 각기 다른 불만이 드러났다.그러나 진급시험을 도입한 분명한 이유는 CEO로서 이제, 누구나 하루의아침 배에 태울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진급평가가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는 많지만 도입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표과는 만 3개월 이상 된 사원들이 점차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에 비해 이직율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이것은 바로, 혁신 근무시스템 도입 등 끊임없는 꿈의 일터 만들기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결과물이 아닐까 한다.우리와 맞지 않는 반하루인들은 아쉽게도 배에 태울 수 없는 룰이 있어야 하고, 개인적 노력이 없는 하루인들은 진급이 더디어야 맞는 것이다.이러한 것들을 누구나 투명하게 평가를 받아야 하고, 잘한 것은 칭찬을 받아야 하며, 잘못한 것은 혼날 줄도 알아야 한다.실제 진급시험 도입 후 혼나서 스스로 자책하거나 딜레마에 빠지게 된 직원이라도, 분명 자신의 실수를 기회삼아 더욱 더 노력하는 모습을 스스로 또는 주변 직원들에게 보여주는 체계가 되었다. 그때 반대했던 그 직원들이 지금은 그 평가체계가 자신한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누구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진급시험 평가는 전국적인 한식문화를 선도하는 기업, 나아가 세계적인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첫 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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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8.05 23:02

취임 한달 임재호 건강관리협회 전북지부 본부장 "첨단 장비 이용한 맞춤형 검진, 도민 건강증진 앞장"

평균 수명의 연장으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발달에 따라 성장과 산업의 자동화 등으로 여가시간의 증대와 함께 육체 활동의 부족, 불규칙한 생활, 스트레스 등에 따른 질병도 증가하고 있다.이에 현대인들은 각종 운동을 비롯해 식이요법, 건강기능식품 등 건강을 위한 여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기적인 건강검진을 통한 자신에 맞는 운동 및 식이용법 등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이에 본보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건강지킴이’, ‘행복도우미’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건강관리협회 전북지부의 임재호 본부장(58)을 만나 건강검진의 필요성 등에 대해 들어봤다.-한국건강관리협회 전북지부 본부장으로 부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2008년에 이어 두 번째 전북지부 본부장을 맡으셨습니다.“감사합니다.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고향에 많은 봉사를 해야겠다는 욕심이 앞섭니다. 두 번째 본부장을 맡고 전주에 와보니 많은 발전과 함께 건강에 대한 전북도민들의 생각과 마음가짐도 많이 변화돼 ‘어떻게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됩니다. 우리 전북지부의 의료진 및 직원들과 힘을 모아 도민들의 건강증진과 행복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한국건강관리협회는 건강검진 전문기관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관 소개를 부탁합니다.“한국건강관리협회는 1964년 창립된 이래 국민의 건강증진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다양한 보건의료봉사를 수행해오고 있는 건강검진 전문기관입니다. 전국 16개 시·도지부 건강검진센터를 중심으로 질병의 조기발견을 위한 근거중심의 건강검진, 질병예방을 위한 건강생활실천 캠페인 및 보건교육 등의 맞춤건강증진서비스 ‘메디체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고자 소외계층 대상의 건강검진 서비스 및 자원봉사활동, 몽골, 캄보디아, 수단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건강증진사업을 지원하는 등 국내외를 포괄하는 공익사업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앞서 말씀하신 ‘메디체크’의 의미와 특징은 무엇입니까.“‘메디체크’는 한국건강관리협회 BI로, Medical과 Check-up의 합성어입니다. 근거중심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건강검진프로그램을 통해 고객의 건강상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검진하는 협회만의 ‘맞춤건강증진서비스’를 의미합니다. 메디체크 특징은 개개인의 나이, 가족력, 과거병력, 건강상태 등을 고려한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본인에게 적합한 근거중심의 맞춤형 건강검진 제공하고, 검진결과에 따른 맞춤 건강생활실천상담과 질병 고위험군에게는 다양한 건강증진프로그램 지원하며, 질병의 발견 시 서울대학교병원 등 전국 540여개의 협약진료기관으로 치료연계를 하고 있습니다.”-협회의 건강검진 프로그램에는 어떤 것 들이 있나요.“기본 종합검진 외에 CT 및 MRI 종합검진과 각종 초음파검사, 국가 암 검진을 비롯한 공단검진, 공무원검진, 기업체 임직원 종합검진, 청소년검진, 예비부부검진, 영유아검진, 학생검진에 이르기까지 검사에 대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 검사항목을 선택해 검진할 수 있기 때문에 본인에게 필요한 검진을 받을 수 있는 고객 중심의 ‘맞춤형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건강검진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협회 차원의 노력도 요구되는데, 어떤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까.“협회에서는 홍보보건교육사업으로 건강정보 및 건강 교육 자료제작, 건강체험터 및 캠페인 전개, 흡연예방 및 금연사업, 건강관리 공개강좌, 건강클리닉 운영 등을 통해 건강검진의 필요성 및 건강한 삶을 위한 올바른 지식과 건강생활 실천을 위해 앞장서고 있습니다.”-연령대에 따라 신체적인 특징과 주요 건강문제가 다릅니다. 건강검진을 받아야하는 시기도 다른 것 같은데, 연령대별 적정 검진시기는.“영유아기부터 각 연령대에 적합한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인 건강검진 주기는 20~30대의 경우 1~3년에 한 번 실시하는 것이 좋으며, 40대는 2년에 한 번, 50대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은 꼭 받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40대 부터는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의 생활습관병이 나타나기도 하고, 심장질환의 발병률이 높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1~2년에 한 번씩은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질병에 대한 가족력이 있을 경우(생활습관병, 암 등)에는 20대부터 해당 질병을 체크해 볼 수 있는 건강검진 권장하고 있습니다.”-전북지부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우리 지부는 분야별 우수한 의료진 12명을 확보하고 있으며, 초전도(1.5T) MRI, 저선량 나선형 CT, 초고화질 위·대장 내시경 장비, 시간당 3200T 분석용 생화학 분석기, 고화질 초음파진단기 등 정밀 검진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 검진 비용이 건강보험 수가의 저렴하고 합리적인 것이 특징이며, 전국의 대학병원 및 종합병원 등과 업무협약이 돼 있어 본인이 원하는 병원에 진료 희망 시 즉시 예약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전북지부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실 건가요.“건강과 직결되는 것이 ‘장수(長壽)’입니다. 도민들이 건강한 생활을 유지·관리하고 실천하기 위해 건강증진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협회와 지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습공동체 등을 운영해 능력개발을 통한 직원들의 수준을 향상시켜 도민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또 지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건강증진사업을 도민들에게 이해시키고, 동참시키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 등 교육활동에도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데에도 앞장설 예정입니다.”● 임재호 본부장은 전주 출신…국민 건강지킴이 30년 외길지난달 1일 한국건강관리협회 전북지부 본부장으로 부임한 임재호 본부장(58)은 전북도민의 건강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등학교,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85년 한국건강관리협회에 입사한 그는 전북지부 건강증진 부장과 본부 보건교육부장·총무부장, 서울지부 건강증진부장 등을 역임했다. 2006년 승진한 뒤 강원지부 본부장과 본부 건강증진본부 본부장(2007년)을 거쳐 2008년 고향인 전주에서 전북지부 본부장을 맡아 2년여 동안 도민들의 건강증진에 앞장서왔다. 특히 전북지부 본부장 당시 지하 1층, 지상 6층의 현재 전북지부를 신축, 도민들이 쾌적하고 편리한 시설에서 건강검진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은 그는 2010년 본부로 올라가 협회 홍보교육본부장을 맡아 협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건강증진사업 프로그램 등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고 동참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본부와 전북지부 등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민들의 건강증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강정원
  • 2014.08.04 23:02

〈백석평전〉 펴낸 안도현 시인 "현재진행형 '백석의 삶'…영원한 탐구 대상이죠"

1980년대 초반부터 일었던 한국사회의 문화운동은 기존의 어떤 형태의 운동보다도 더 대중적이고 힘 있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시대와 현실을 공유하게 했다. 그 문화운동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었다. 60년대 김수영이나 신동엽으로 대표되는 참여문학운동, 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을 돌아보면 우리사회 문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은 문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80년대에 뜨겁게 전개됐던 전북지역의 문화운동 역시 젊은 문학인들이 주도했다. 역사와 시대를 직시하는 문학인들은 남민시 동인이나 땅전과 같은 무크지 운동을 이끌어냈다. 20대였던 시인 안도현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30년.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해오는 동안 세상과 늘 치열하게 맞서있었던 시인의 삶은 온전히 글로 담겨 수많은 독자들을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진보지식인으로 주목받아온 그는 지난해 7월 이후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됐다. 그렇다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한다는 그의 시정신을 만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어려워진 것일까. 지난 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항소심에서 무죄 판결) 정치참여의 후유증을 단단히 겪고 있는 안도현 시인(53)이 최근 백석평전(다산북스)을 펴냈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시인을 만나는 일은 새롭다. 더구나 스무 살에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났다는 시인이 10년 넘게 준비해온 이 평전은 시인적 직관과 통찰력으로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구성해내는데 성공했다는 찬사와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한다. 그렇고 보니 안도현의 시에서 백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53)을 만났다. 시대의 경계를 가르고 백석과 안도현이 만나는 지점을 만나고 싶었다. 인터뷰는 우석대 그의 연구실과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백석과의 인연이 꽤 깊더군요. 스무살 때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나셨다니 30여년 세월인데 그때는 백석의 존재가 완전히 가려져 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저도 박항식 교수님이 펴낸 수사학에서 백석의 시를 처음 읽었어요. 모닥불이란 시였는데, 그동안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사슴〉이란 시집이 있고 〈문장〉에 가끔 작품 발표를 했다는 것이 전부였어요.-월북시인에 대해 관심이 높았었던 때였나요. 오히려 관심을 갖는 일조차 금기시 되던 때였죠. 월북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87년 6월 항쟁 이후에 그들의 작품이 책으로 나오면서 이루어졌다고 봐야겠죠. 우리 사회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월북 납북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그때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평남 정주에서 태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활동한 재북작가여서 발표된 시도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었죠.-백석 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스무 살 때까지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였다는 겁니다. 시 한편이 주는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향토적인 듯하면서도 모던하고, 시인이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도 독특했어요. 아주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는 듯 한 감동이었습니다. 백석만의 그러한 독특한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30년 동안 짝사랑해왔다는 고백이 있던데요. 스무 살 이후 시인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까. 별로 없었죠. 30-40년대 잡지 속에서 한 두 편씩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작고하신 이광웅 시인이 백석시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니까 87년쯤 되었을 것 같은데, 노트 한권을 보여주시더군요. 백석의 시를 직접 필사한 것이었어요. 정갈하게 쓰인 그 노트에 새로운 백석의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백석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많은 시가 실려 있지만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연구 작업은 여전히 미진한 것 같습니다. 우선은 발굴된 그의 시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시집은 사슴 한권뿐인데, 그 마저도 국내에 대여섯 권 있을 정도로 귀하죠. -그래서 이번 평전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앞서 나온 일대기와 시선집이 없었다면 연구의 진전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기왕에 나와 있는 백석 일대기는 여러 한계로 오류가 있거나 백석을 지나치게 과장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애초 평전의 취지를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하자는데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평전을 펴낸 특별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정서적으로는 30여 년 동안 내가 깃들일 둥지로 나의 시를 견인해준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백석의 후기 시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30년대에 모던보이로 불리던 시인이 만주로 건너간 후에, 또 해방 후 북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다른 시를 쓰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요.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기왕에 나온 다른 책들과 다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었어요.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지요.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행적을 비교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독자들에게는 백석의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의 연애담이 아무래도 흥미로울 텐데요. 사실 자야여사가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펴낸 후 독자들의 관심이 더 높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에세이 역시 기억의 오류로 사실이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어요.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도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백석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들에 비해 대중적 관심이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수많은 시인 중에서 그런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긴 하죠. 정지용 김기림 신석정 등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들은 이미 해방 후 교과서를 통해 알려지고, 그러면서 교과서적인 시인으로 굳어졌지만 백석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백석이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1988년 이후이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실린 것은 90년대 중반부터거든요. 늦게 알려진 덕분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측면이 있고, 다른 시인들은 문학사적으로 규정되었거나 평가가 이미 이루어진 옛날시인처럼 느껴지는데, 백석과 그의 시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보니 백석의 작품이 발굴될 때마다 언론이 주목하게 되고 관심이 증폭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백석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살았던 시인인데도 친일의 혐의가 없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백석은 해방 이전의 민족시나 저항시 계열의 시인이 아니었지만 친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직전에는 거의 모든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썼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일본 유학에 조선일보 장학금으로 유학생활을 했어요. 친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이념이 대립된 시대에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었을까요.아니죠. 오히려 어느 한쪽을 확실히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런데 독특한 것은 시는 또 아주 모던한 경향을 보이거든요. -문학사 쪽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백석을 굳이 민족시인으로 규정하거나 전체적으로 색칠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 지식인의 민족의식, 특히 글 쓰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민족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었습니다. 북에 돌아가서 쓴 시들도 겉으로는 체제 찬양하는 시지만 당시 북에서 발표됐던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보면 표현방법에 있어서 백석만의 특징이 아주 강합니다.-시 못지않게 동시로도 작품 활동이 활발했었다고 하던데요.백석은 북에 돌아간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고 동시를 썼어요. 동화시 같은 새로운 장르도 개발했지요. 그러다가 57년쯤 격렬한 아동문학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백석은 동시가 이데올로기로부터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교훈이 담겨있긴 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그런데 백석이 동시를 발표하자 북한 문단의 주류 아동문학 작가들이 공격을 시작했죠. 백석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아동문학평론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류 측은 아동문학작품에도 사상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백석은 아이들이 읽는 작품은 사상성 보다는 문학성 예술성이 먼저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문학창작의 자율성과 집단적 획일주의가 맞선 셈인데, 이 논쟁으로 결국 백석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백석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보십니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아쉬운 것은 해방이후에 발표한 시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에 순응적인 시들이 많다보니 단순하게 체제순응의 시라고 규정해버리고 있거든요.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새로운 평가와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서문에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하셨더군요.(웃음) 그래서인지 백석의 시와 닮은 점이 보이기도 합니다. 거대담론보다는 일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관심도 그중 하나일 듯 하고요. 조심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백석으로부터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계를 보는 태도와 자세겠지요.-화제를 돌려보죠. 요즈음 시는 어떻습니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시가 너무 많다고도 하는데 가뜩이나 시가 안 읽혀지는 시대에 독자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특히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난해해서 시인이나 비평가들조차도 읽기 힘들어합니다. 한국현대시 자체가 소수 전문가들의 소유로 변해가는 어떤 전환기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경향은 세계적인 흐름 이예요. 일상문화의 변화 탓도 있을 겁니다. 스마트 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향이 더 강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들의 시쓰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 안에서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니까.-청소년기에 시를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창의력을 키우는 텍스트로 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학교교육 안에서는 시가 거의 유일한 셈입니다. 시교육의 목표를 창의력 신장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러나 오늘의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이 시를 국어시험에 나오는 지문의 하나 정도로 압니다. 시를 즐기지 못하고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7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후에 정말 시는 한편도 안 쓰셨습니까. 1년 동안 메모도 안했습니다. 제 시쓰기는 보통 어떤 소재를 만나면 메모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옮겨 나중에 시를 쓸 때 꺼내어 쓰거든요. 아예 시를 안 쓰겠다고 마음먹었더니 메모도 안 떠오르더군요.-세상에 대한 관심도 무디어지는 것 아닐까요.할 이야기는 트위터로 하죠. 절대 무디어진 것은 아녜요.(웃음) -시는 언제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될까요. 제 나름대로 시인이 시를 안 쓰는 것도 세상과 맞서는 방식일 수 있겠다 싶어서 택한 일인데 예상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비우고 좀 더 새로운 시쓰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안도현 시인이 펴낸 〈백석평전〉은 한편의 장대한 소설 같은 책이다. 백석을 향한 짝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존경이 품격 높은 그만의 상상력과 조우하면서 백석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진행형인 백석은 안도현의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문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해주는 일은 시인 안도현이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선물이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백석 처럼 시인은 잠시(?) 시를 내려놓고 있다. 더 큰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안도현 시인은 전북 문화운동 이끈 주역통일교육운동도 앞장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을 정도로 문재를 날렸다. 경희대 장학생 입학자격을 얻었으나 원광대 국문과를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80년대 초부터 지역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켰던 그는 시인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전교조 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해직교사가 됐다. 94년 복직이 되어 다시 교단에 섰지만 3년만인 97년, 이번에는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대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내놓은 지 1년만이었다. 전업 작가가 된 후 창작 작업은 더 치열해졌으며 시집과 산문집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인기작가가 됐다. 그는 한동안 연애시류의 시쓰기와 대중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산문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른바 인기작가나 대중작가 되고 대중적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는 동안에도 그는 통일운동과 교육운동을 실천했다. 북한어린이돕기로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사회변화에의 갈망을 정치운동으로 풀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정치활동은 치열해졌다. 덕분에 〈연어〉의 작가 안도현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치적 진보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정치활동 보폭은 갈수록 넓어져 2010년 62 지방선거때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진영 후보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선거캠프를 주도했으며, 국회의원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후원회 대표가 되어 벌이는 그의 정치활동은 더 이상 대중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정치활동 전면에 나서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올해 봄,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돼 법정 다툼을 거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그의 정치활동이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전개되면서 대중들은 시인 안도현이 앞으로 정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갖기 시작했지만 정치는 하고 싶다. 그러나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후 자유로워졌다. 대구매일신문(1981년)과 동아일보(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등단한 그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북항〉까지 열권의 시집을 냈으며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을 비롯해 여러 권의 산문집을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짜장면〉 〈증기기관차 미카〉 등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연어〉는 130쇄를 기록, 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2004년, 우석대 문예창작과과 신설되면서 교수로 임용돼 다시 교단에 선 그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백석의 시와 생애를 통찰한 〈백석평전〉을 펴내 주목 받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7.31 23:02

[(25)임실 신평농공단지 (주)미가] 고품질 청정 김치 생산…농산물 계약재배 주민소득 기여

(주)미가는 임실군 신평면 신평농공단지에서 김치 관련 부식재를 오랫동안 생산해 오던 고향식품의 후신(後身)이다. 전신인 고향식품은 20여년에 걸쳐 이곳에서 김치를 생산, 왕성한 신장세를 보였으나 진안으로 사업체를 옮긴 후 방만한 운영으로 문을 닫았다.2013년 초에 공장을 인수한 (주)미가 고해석 대표는 전남 목포에서 오랬동안 김치를 생산했던 업체로서 다양한 노하우를 지녔다.이를 바탕으로 가동 1년만에 (주)미가는 김치 생산 판매고가 전년비 250%를 뛰어넘는 신장세를 기록했으며, 새로운 제품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최근 사운을 걸고 개발한해초김치는 (주)미가만의 걸작품으로서 식품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공장 현황= 전북 임실군 신평면 신평농공단지의 농업회사법인 (주)미가는 2009년 7월에 전신인 고향식품을 인수, 둥지를 틀었다.공장부지 6600㎡의 규모에 건물면적이 3300㎡인 이곳의 주요 생산품은 포기김치와 절임식품 등 모두 10여종이다. 관리부와 생산부를 비롯 영업부와 구매부로 구성된 조직에 이어 부설연구소를 확보, 다양한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생산시설로는 원재료를 1차로 가공하는 절임과정에 이어 세척, 완제품 시설을 두루 갖춘 최첨단 위생시스템을 구비했다.△생산품목= (주)미가에서 생산하는 제품에는 포기김치와 총각김치깍두기파김치갓김치열무김치 등이 주류를 이루고 최근에는 해조류를 가공해 곁들인 신제품 해초김치가 선을 보이고 있다.대부분 임실지역에서 계약재배를 통해 납품되고 있는 농산물은 성수와 지사, 관촌지역 준고랭지에서 재배된 배추가 이용된다.하지만 성수기에는 대량의 김치를 생산해야 하는 까닭에 부족한 부분은 전남 해남 등지에서 보충되고 있다.생김치로서 사시사철 밥상의 꽃으로 불리는 포기김치는 부재료인 마늘과 참깨, 고추 및 양파 등 대부분 국내산을 이용하고 있다.여기에 준고랭지에서 생산된 열무와 파김치도 꼬득꼬득한 식감과 함께 잊지못할 뒷맛을 남겨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광양과 여수 등지에서 원재료가 공수된 갓김치는 특유의 성분으로 인해 날로 주문량이 늘고 있으며 깍두기는 기본 품목으로 따라간다.(주)미가는 최근 미역과 김, 톳을 비롯 다시마 등이 첨가된해초김치를 개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으로 기대된다.바다에서 건진 생생한 해조류는 맛은 물론 영양소가 풍부한 우리 밥상의 대표적 식재료다.각종 미네랄도 풍부한 데다 다양한 비타민이 함유됐고 칼로리도 낮은 까닭에 여성들의 다이어트식으로 강력히 추천되고 있다.특히 다량의 식물섬유 성분으로 인해 우리 몸에 면역력을 키워주고 특유의 알긴산 성분은 변비를 없애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청정해역의 해조류가 김치를 감싸는 까닭에 깊은 맛과 신선도가 오랫동안 유지, 면학중인 학생들에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이와 함께 일본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건김치(말린김치)의 국내 생산을 위해 관련 시설을 추가로 설치중에 있다.건김치의 경우 급속도로 냉동시에는 함유된 유산균이 파괴될 소지가 많아 저온숙성을 통해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미래의 우주식품으로 전망되는 건김치는 관리 및 휴대가 편리하기 때문에 군부대 비상식량과 비행기 기내식, 여행용 등으로 각광이 예상된다.현재 다용도의 건김치 개발을 위해 국내 김치업계가 사업에 참여하고 있어 식품업계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이곳에서 1일 생산량은 절임배추의 경우 20톤을 생산하고 있으며 완제품으로는 15톤이 매일 전국 각지로 배송되고 있다.△거래처 및 마케팅 현황= (주)미가의 제품은 대부분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이 대부분이고 지방자치단체나 학교 등지에 대량으로 납품되고 있다. 또 주요 부재료는 만두공장과 식품회사에 공급되고 제품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아 판매량은 날로 확대될 전망이다.생산된 전 제품을옹채김치로 명명한 이곳은 소비자들에게 4가지 약속으로 제품에 대한 신뢰도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첫번째는산좋고 물좋은 전북 임실지역의 식재료 사용으로서 청정지역 임실의 이미지를 심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화학조미료 첨가 근절 건강한 천연재료 사용으로 전통방식에 따른 신선한 농산물만을 고집하는 경영철학이다.세번째는신안군에서 공급한 천일염 사용을 고집하고 네번째는HACCP 인증 위생시설로 깨끗한 먹거리 공급을 자랑하고 있다.(주)미가에서 생산된 제품은 농어민과 직계약 재배를 통해 원료공급의 안정성에 무게를 두고 중간유통의 마진을 최소화, 원가절감 극대화에 힘쓰고 있다.가격경쟁력은 기존 업체와의 차별화를 바탕으로 경쟁우위를 확보하고 협력업체와의 안정적 거래처 확보로 판매 효과를 늘리고 있다.주요 거래처는 식품회사와 대형마트, 학교 등 모두 30여개소로서 지난 한해에만 매출액이 56억원을 기록했다.식품회사인 (주)새아침에는 지난해 김치 1종류에 걸쳐 납품액이 6억원에 달했고 하나로마트에는 3억6000만원을 공급했다.또 수도권 기업체와 지방 등 학교 등지에도 최저 1억원 이상의 제품을 납품, 날이 갈수록 주문량이 늘고 있는 추세다. 올해의 경우도 매출 향상을 위해 농수산물유통식자재 프로그램에 따른 학교급식 납품에 주력하고 타 업체와 업무협약도 확대하고 있다. 더불어 인터넷과 통신판매, 김장철 절임배추 행사와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로 (주)미가의 홍보 판매를 강화할 계획이다.특히 영업 활성화 방안으로는 지자체와의 협약으로 특산물형 김치를 개발하고 도매거래처에는 맞춤형 개발로 적극 대응할 방침이다(주)미가는 특히 청정임실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깨끗한 신뢰감을 줄 수 있도록 전국의 거래처에 다양한 홍보에 펼치고 있다.이와 함께 원재료 생산확대를 위해 지역내 농가들과 계약재배를 강화하고 고용촉진 등으로 주민소득에도 일조, 지역경제 활성화에 새바람을 일으킨다는 전략이다.● (주)미가 고해석 대표 "청정임실 이미지 앞세워 믿고 찾는 김치 생산할 것"맵다는 이유로 외국인들에게 냉대를 받아왔던 한국김치가 이제는 특유의 매운 맛과 식감으로 나날이 수출이 늘고 있습니다.옹채김치라는 브랜드로 전국 각지의 지자체와 학교, 대형마트 등에 납품중인 (주)미가 고해석(52) 대표의 김치예찬론이다.임실 신평농공단지에 입주한지 1년여 만에 매출신장 250%를 올린 전문 경영인 고 대표는 목포가 고향이다.임실에 자리하기 전 목포에서도 20여년 동안 김치생산을 해왔다는 고 대표는 지금도 현지에서 가족들이 영업 중에 있다고 밝혔다.이 때문인지 (주)미가의 운영관리와 판매, 마케팅은 신생사 답지않게 탄탄대로를 걸으며 매출신장에 주력하고 있다.김치업계에서 활동하던 중 때마침 임실의 신평농공단지 김치공장이 비어있다는 소식에 그는 지난해 주저없이 인수했다.전에 영업했던 고향식품의 제품은 김치업계에서 인정하는 상품으로 알려졌다며 임실은 식품과 걸맞는 청정지역이라는 생각에서 뛰어들었다고 회고했다.고 대표는 그동안 목포에서 활동했던 김치생산과 판매, 거래처를 바탕으로 1년여 만에 30여개소의 거래처를 새로 확보해 기반을 구축했다.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성남시 등 지자체와 대형마트에는 OEM(주문자위탁생산)방식으로 대형계약을 수주했고 농산물유통공사와의 업무협약으로 학교 등지에도 납품계약을 체결했다.그는 목포보다 임실에서의 사업활동이 영업이익상 매우 크다며 지리적으로나 지역 특성 등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다고 덧붙였다.고 대표는 어느정도 기반이 굳히면 지역에도 환원사업을 펼칠 계획이라며 믿고 찾는 최고의 김치생산에 적극 힘쓰겠다고 말했다.

  • 기획
  • 박정우
  • 2014.07.31 23:02

[(30)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무안·함평] 일본군·관군, 각종 기록과 함께 바다에 농민군 수장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함평의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농민군이 전사한 고막교(古幕橋).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현재 절반만 온전히 남아있고, 절반은 원형과는 상이하게 복원돼있으며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안내표지판조차 없다. 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고막교가 무안함평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무안함평지역 동학농민혁명은 배상옥 장군을 중심으로 고부나 삼례, 공주 지역 등에 못지 않은 규모와 인원들이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활동했던 만큼의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웃한 장흥과 나주는 치열한 항쟁이 벌어져 사료 등이 많이 발굴된 편이지만, 전투의 외각지대에 있던 무안함평은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과 함께 각종 기록과 자료를 바다에 쓸어 넣었다.△무안함평지역 동학사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은 무안지역 농민운동이 1862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전국 70여개 고을 중에서 전남 지방은 무안을 포함한 18개 지방에서 봉기했다. 이때 무안의 박창응 등이 농민들을 소집해 진정서를 올리고 관에 항의하고 감영에 들어가 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잡혀서 태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시작된 무안 농민들의 부정에 대한 항의와 올곧은 정신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나 1893년 2월의 서울 집회 등에서 나타났다. 특히 1894년 3월 백산 집회 때는 전라도 53개 고을 중에서 33개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운집했는데,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에 따르면 참여한 지방 중에서 장령 급이 제일 많이 참여한 곳이 무안이다. 농민 자치 시기에는 청계면 청천리 달성 배씨 사당인 청천사에 집강소를 세워 탐관오리의 징계, 신분해방운동과 사회신분제의 폐지 추진 등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봉기 때에도 무안 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하려 했지만 일본군에 의한 배후 세력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북상하지 않았다. 이어 11월 20일에 나주성 공격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함평 농민군은 무안 지역 농민군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1894년 11월 무안 농민군이 나주를 향해 진격하다가 함평의 고막포 일대에서 나주수성군과 격전을 치를 때도 함평의 농민군이 참여했다. 당시 함평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대접주 이화진, 김경옥, 이춘익, 이재민 등이다. △창포장수 배상옥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조선 후기에 구전되던 민요로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슬퍼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절망을 담아냈다. 무안에도 이와 비슷한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민중의 절망대신 구체적인 동학의 대장을 지칭하는 노래로 전해져 온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간다. 기존의 노래와 다른 것은 청포장수를 창포장수로 표현한 점이다. 창포장수는 창포만을 중심으로 동학군을 이끌고 활약하며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 불려 졌던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 장군을 일컫는다. 창포는 포구로 무안에 문화를 전파하는 해상통로 구실을 했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간척되기 전에는 드넓은 뻘밭으로 인해 각종 해산물이 지천으로 났던 곳이다. 배상옥 장군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농민의 시위나 혁명을 주도했고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남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전남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청계면 청천리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정신을 구현했다. 또한 해제면 석용리에 거주하면서 포교활동을 했고 그곳에 연병장을 설치해 혁명군을 훈련시켰다. △주요 유적지붉은 고개= 무안읍 성남리 초당대학교 인근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길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무안에서 목포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붉은 고개로 불린다. 무안지역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매복해있던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농민군의 피가 이곳을 물들였다고 한다. 청천재= 청계면 청천리에 있는 달성배씨 제각인 청천재는 집강소가 설치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집강소였다는 데는 이견이 있지만, 당시 동학농민혁명을 배척했던 유교 집안에서 배상옥 장군의 명예훼복을 알리는 문서를 제각에 걸어놓은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의사비= 무안군 해제면 석산 마을 인근에 있는 삼의사비는 최장현, 최기현, 최선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모아 마을 인근에서 훈련을 시켰고, 배상옥 장군과 함께 나주성 전투에 나섰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배종열 무안동학기념사업회 고문 "혁명정신 계승 안돼...우리 사회 중심 잃어"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대한민국 사회에 사상적 기반이 빈약하다고 꼬집었다. 부당한 권력과 압력에 맞서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빨갱이와 동일 선상에 놓여 평가받고 있는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손들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이 돼서는 민주화 운동을 펼쳤습니다. 반면 농민군을 탄압했던 후손들은 친일파가 됐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어요. 배 고문은 이같은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을 바로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배 고문은 지난 2011년 출범한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무안 지역에는 제대로 된 기념시설조차 없는 상황입니다.배 고문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동학농민혁명 문화콘텐츠 자원화다. 우선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유적지를 연계한 답사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무안의 동학농민혁명을 알린다는 계획이다. 또 청소년들에게 보다 쉽게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기 위한 교육콘텐츠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7.30 23:02

⑧도내 노인일자리 실태 - 대부분 월 소득 20만원 선…노후대책 턱도 없어

노인빈곤율 및 노인자살률 증가 등 고령화에 따른 사회문제의 증가로 정부에서는 노인문제에 대한 종합적 해결방안으로 2004년 노인일자리사업을 정책적으로 도입했다. 노인에게 맞춤형 일자리 제공을 통한 소득창출 및 사회참여의 기회를 확대하는 노인일자리사업은 보건복지부와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광역 및 기초지자체, 노인복지관, 시니어클럽 등의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돼왔다. 그러나 노인일자리는 여전히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지속 가능한 노인일자리 사업은 뭘까? 실태를 취재해봤다.노인일자리사업은 크게 사회공헌형과 시장진입형, 시장자립형으로 나뉜다. 사회공헌형에는 공익형, 교육형, 복지형이 있으며 시장진입형에는 시장형과 인력파견형이 있고 시장자립형일자리는 시니어인턴십, 고령자친화기업, 시니어직능클럽으로 분류된다. 노인일자리사업은 불안정한 노후소득 보장을 보완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04년 3만5127자리로 시작한 노인일자리사업은 시작 10년째인 2013년 26만1598건으로 해마다 확대되어 왔다. 재정투입 역시 2004년 292억원에서 2013년 4669억으로 확대되었다. 전북도에 따르면 2013년 전라북도 노인일자리 창출실적은 1만8219건으로 이는 전체대비 7.1%를 차지한다. 전년대비 464건 증가한 것이다. 유형별로는 공익형 1만1028건, 교육형 1817건, 복지형 3947건, 시장형 995건, 인력파견형 432건이다. 복지관에서 시행하는 노인일자리는 사회공헌형 일자리가 대부분이며 참여기간은 9개월이다. 월 36시간 활동에 20만원의 보수를 받는다. 이중 시장진입형은 10%정도를 차지한다.지난 10년동안 노인일자리사업이 꾸준히 진행되고 확대되면서 노인들의 사회참여와 경제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노인빈곤문제에 노인일자리사업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많은 개선과제를 남기고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자리사업에 참여하려는 노인들은 대부분 만족감을 표시하지만 적은 급여 등은 아쉬워했다.조영옥(68전주시 인후동)씨는 복지관에서 시행하는 생활근린시설관리지원사업 참여자로 주3회 공원주변 청소와 망가져 방치된 시설물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일자리에 참여한다. 조 씨는혼자 집에서 지내려니 답답하고 당장 생계문제도 있어서 주변 지인을 통해 복지관 일자리사업을 알게되었다며 일자리에 참여하기 전에는 건강도 안 좋고 사는 게 힘들었는데 일을 하니까 몸도 좋아지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즐겁고, 맘이 편하고 생활에 보탬이 된다고 이야기 한다.경제적인 이유 말고도 일자리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 의미있는 답변을 해준 경우도 있다. 초등학교 급식도우미로 활동하고 있는 김윤경(68전주시 덕진동)씨는 일하기 전에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뜨개질이나 바느질로 혼자서 시간을 보냈는데 급식도우미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아이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하고,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도 힘을 얻어서 상부상조하는 일이다며 사회에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데 만족감을 표시했다.이어 김 씨는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아이들이 먹고 나면 식탁도 닦고, 바닥에 흘린 음식을 줍고 청소하며 식판정리 등을 돕는다며 6명이 일하는데 3명씩 조를 나누어 일주일에 3번 일을 한다. 월 20만원이 하는 일에 비하면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또현재 9개월 동안 일하고 3개월을 쉬어야하는데 일년내내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이렇듯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도 가능한 시장진입형 일자리가 확대되어야 하며 연중 지속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져야 한다는 게 참여자들의 바람이다. 특히 소득 50만원이상을 받을 수 있는 질 좋은 일자리가 확대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시행하고 있는 노인일자리사업의 경우에는 9개월이라는 참여기간과 20만원이라는 보수에 대한 불만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또한 참여 횟수의 제한과 남성노인이 참여할 수 있는 일자리분야가 제한적이라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어서 노인들의 만족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공일자리사업의 다변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 마을기업과 같은 세대통합적 일자치 창출 △기업연계를 통한 노인일자리 활성화 위한 전문교육과정 개설에서 해법을 찾는다.도내 노인 일자리 사업 발굴에 앞장서고 있는 주식회사 천년누리 서양열 대표 역시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면서 지속가능한 노인일자리사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정책적 개선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양열 대표는 현재와 같은 일률적인 사업기간과 20만원의 급여액에 한정하지 않고 필요에 따른 참여횟수와 기간, 급여액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일자리 유형에 따라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고 참여시간과 전문성을 고려한 보수 차등지급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우리나라는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는 가운데 높은 실업률과 낮은 고용률로 청년층 고용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세대 간 일자리 전쟁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청장년, 여성, 노인이 함께 할 수 있는 통합적인 일자리 창출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서 대표는 50대 이후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준비할 수 있는 전문교육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며노인일자리사업이 고령화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경감하고 노인이 처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참여를 통한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변화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박귀녀(금암노인복지관 사회복지사)● "지역특성 기반 사업 수립 실질적인 교육 노력 필요"- 전북노인일자리센터 장우철 사무국장지속가능한 노인일자리사업은 전문성 향상 교육으로부터 시작합니다.전북노인일자리센터 장우철 사무국장은 노인일자리사업은 인구고령화에 대응하고 생산적 노화를 지향하는 노인복지정책을 추진하고자하는 목표로 뒀다며 저소득층 노인의 소득보전과 다양한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4년 참여노인 2만5000명에서 시작하여 현재 30만명 이상으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 국장은 노인일자리사업의 효과는 참여노인들의 자존감과 생활만족도 향상 같은 심리사회적 측면의 효과, 의료비 절감 효과, 건강증진효과 등으로 나타났지만 이러한 긍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일자리로 가기 위한 길이 여전히 멀어보인다고 지적했다. 장 국장은 노인일자리사업의 효과성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지역특성에 기반한 사업계획 수립 및 할당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했다. 즉 농촌 지역과 도시지역, 소득수준이 높은 지역과 낮은 지역을 고려한 노인일자리 욕구파악과 수요처 및 사업량 책정, 전담인력의 직무명확화, 고용안정화 등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또 유관기관간의 협력체계 강화를 위해 정기포럼 및 세미나 개최로 노인일자리의 중점사항을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노인일자리 사업의 체계적 발전과 인식수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장 국장은 형식적인 교육을 실질적인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일자리의 영역이 확대되고 노인의 참여도가 증가하면서 사전교육과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프로그램 및 전문교육 기관의 역할이 아쉽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지차체와 노인일자리 전문기관이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체계화하여 각 수행기관별로 교육운영을 지원하고 중장기적으로 노인과 중장년층을 포함한 이전직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제도화하고 전문적인 이전직 컨설팅 및 전환기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시스템 구축을 통해서 노후에 자신의 상황과 능력에 맞는 일자리와 자원봉사, 사회참여 방안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 장 국장은 정부재정에만 의존하는 사업틀에서 벗어나 민간영역과의 활발한 교류와 참여 방안 확대를 통해 보다 지속가능한 노인일자리사업으로 발전해야 한다강조했다. /전북노인일자리센터 장우철 사무국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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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7.2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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