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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유성용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 "의견 수렴 통한 국도·하천 정비, 전북발전 디딤돌 역할"

제50대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으로 유성용 전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정책관(48)이 지난 12일 취임했다. 국가발전 동맥의 근간인 도로와 하천 등 호남지역 SOC 사업 추진의 중추적 역활을 담당하는 최고 사령탑으로서 앞으로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게 됐다. 특히나 그는 전북출신으로 상대적으로 지역개발 낙후 및 소외감 등이 팽배해 있는 도민들에게 있어 깊은 관심과 기대를 갖기에 충분하다. 업무파악 및 현장 방문 등으로 하루 24시간이 너무 짧은 분주한 나날을 연속 보내고 있는 신임 유 청장을 21일 만나 전북발전과 관련한 향후의 역점 사업과 추진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취임하신 지 10여일 정도 지났는데, 소감 한 말씀 해 주시죠. “그간 중앙정부에서만 근무하다가 지방의 기관장으로 처음 근무하게 되어 아직까지 조금 얼떨떨합니다. 취임과 동시에 정신없이 업무파악하고, 현장 몇 군데 둘러보았는데 벌써 10여일이 지나버렸습니다. 익산청이 관할하는 지역이 전북을 포함해 광주·전남 등 호남 전체에 이르다보니, 관리할 현장도 많고 현장까지 거리가 먼데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도 했지만, 업무에 헌신적인 직원들과 기대에 찬 지역민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어느정도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차근차근, 욕심내지 않고, 지역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나아갈 생각입니다.”△전북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실 계획인지.“익산청은 전북을 비롯한 호남지역의 국도와 국가하천 건설 및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기관으로, 지역민들의 생활과 밀접한 일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나 익산청이 전북지역 자치단체나 유관기관, 지역주민 등으로부터 많은 의견을 듣고, 그 의견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자체 및 유관기관들과 전북발전을 위한 중·장기적 발전 전략을 함께 구상하고,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관련 기관이 머리를 맞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익산청이 주도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우선순위에 따라 국도를 건설하고, 국가하천을 정비하여 지역민의 생활을 보다 편리하게 하겠습니다. 개발과정에서 소중한 재산을 수용당하는 주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 하겠습니다.”△2014년 익산청에서 추진하는 전북지역 주요사업 내용을 말씀해 주신다면.“익산청은 올 한해도 전북을 더 발전시키고, 전북 지역민들의 생활을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한 도로와 하천 사업들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먼저, 새만금사업의 성공적 추진과 주변 관광 활성화를 위한 고군산 연결도로 사업과 군장대교 건설공사 등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습니다. 둘째, 고속도로와의 접근성 개선을 위한 오수-갈마, 남원-곡성간 도로건설공사와 교통불편 해소를 위한 부전-쌍치, 진안-적상간 도로건설 사업, 그리고 위험도로 개선사업과 교차로 개선사업도 예정대로 진행할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전주시 순환도로망을 완성시키는 용진-우아와 익산국가식품클러스터 진입도로, 장수-번암 우회, 순창-쌍치 건설공사 등도 새로 시작될 예정이어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하천사업으로는 만경·동진강 상류에서부터 새만금지역까지 생태·녹지축을 조성하는 한편, 맑은 물이 새만금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하는 수질개선사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국가하천 정비사업인 고부·원평천 사업과 익산의 강경천, 군산의 고척천 수계치수사업을 올해 완공해 홍수 등 재해로부터 안전한 하천을 만들어 갈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전주천 등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여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는 ‘고향의 강 사업’과 섬진강 요천지구 등 지방하천 재해예방사업도 추진하겠습니다.”△익산청에서도 새만금사업의 성공을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던데.“익산청에서는 새만금사업의 성공을 위해 접근성 개선을 위한 도로 건설사업과 새만금의 수질 개선을 위한 만경·동진강 하천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선 고속도로와 KTX 정차역 등에서 새만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격포-하서, 부안-태인, 정읍-신태인, 신태인-김제간 도로건설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새만금 관광활성화를 위한 고군산군도 연결도로 사업과 충남에서 새만금으로의 접근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군장대교 사업도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경·동진강 하천정비사업은 새만금 수질개선을 위해 환경부·농림부와 함께 추진하는 사업입니다. 고수부지의 84%를 차지하고 있는 경작지를 정리하고, 지류하천의 오염원을 차단해 맑은 물이 새만금으로 흘러들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만경강과 동진강 전 구간에서 주민들이 쉽게 접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고, 제방 증축과 퇴적토 준설을 통해 재해에 안전한 강으로 변모시킬 계획입니다.”△전북경제 활성화 대책이 있다면.“최근 경기침체가 장기간 계속되고, 정부의 SOC 예산 축소로 공사 발주 물량이 줄고 있는데다 부동산 경기 침체까지 이어지면서 지역 경제가 장기간 회복되지 않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익산청에서는 우선 지역경제의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금년도 전북지역 예산 6266억원 중 60%인 3760억원 이상을 상반기 중에 조기에 집행하여 자금이 원활히 흐르도록 할 계획입니다. 또, 올해 발주하는 사업을 최대한 빨리 착공하도록 하고, 이들 사업의 입찰 공고시 지역 업체 참여 비율을 확대해 주도록 관련기관에 요청토록 하겠습니다. 이밖에 익산청에서 시행하고 있는 계속사업과 관련해서도 지역업체가 하도급에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당업체에 권고할 계획입니다.”△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 지역민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고 싶으신지.“‘지역발전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청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저는 취임하면서 ‘지역발전과 지역주민의 불편 해소’를 익산청의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익산청장으로 있는 동안 늘 ‘지역발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지역주민들의 불편을 덜어 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귀 기울이겠습니다. 이를 위해 지방자치단체장은 물론 지역주민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많은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지역내 대학과 연구기관의 전문가 의견수렴에도 적극 나설 생각입니다.”● 유성용 청장은 국토부 내 '주택 정책통' 기획·분석력 탁월 평가정읍 출신인 유 청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국토부내 대표적인 부동산정책통이다. 전주 상산고를 거쳐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대학원(석사)에 이어 안양대학교에서 도시공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토부 공공주택과장, 도시정책과장, 주택정책과장을 거쳐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개발정책관 등을 역임했다. 다양한 지식과 특유의 섬세함으로 기획력과 분석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택지개발과장, 공공주택과장, 주택정책과장 등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의 굵직굵직한 주택정책 수립에 참여하는 등 국토부내 주택정책통으로 불린다. 그는 또한 다정다감한 친화력으로 폭넓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평소에는 부드럽지만 업무 추진시에는 강력한 추진력을 보이는 외유내강형 리더다. 고향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 개발정책관으로 근무할 당시에 새만금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닌 사례는 지역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유 청장은 익산국토청장으로 취임하면서도 ‘지역발전과 지역주민 불편해소’를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지역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천명한 그의 행보에 지역사회 관심이 보다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고 있다.

  • 기획
  • 엄철호
  • 2014.02.24 23:02

40년만의 회향전 마친 김병종 교수

개막을 하루 앞둔 전시실은 부산했다. 화가의 그림을 넉넉하게 품은 다섯 개 전시실이 30여년 세월을 교직하며 어깨를 잇는 동안 모악산의 기운은 생동하는 듯 공간을 가로 질렀다. 해가 엎드려가는 늦은 오후, 서울에서부터 달려온 관객이 있었다. 다음날 폐암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시인이었다. 수술 받는 병실에서 이 그림을 생각하며 기운을 받고 싶어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던 시인은 잰걸음으로 전시실을 돌아보았다. 되돌아가는 시인의 걸음이 가벼웠다. 지난 16일 끝난 김병종 교수의 회향전이 열린 전북도립미술관의 한 컷 풍경이다. 김병종 교수(62, 서울대 미술대)가 30년 화업의 의미를 담아 올해 초 고향에서 처음으로 회향전(回鄕)을 열었다. 전북도립미술관 5개 전시실과 전주한옥마을의 교동아트미술관을 가득 채운 그의 그림들은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케 했다. 전시는 한 달을 훌쩍 넘기는 짧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관객 행렬은 이어졌다. 엄마 따라 온 초등학생은 그림이 너무 재밌다. 나도 화가가 되고 싶다는 글을 남겼고, 바보예수 연작이 놓인 전시실을 돌아보던 50대 관객은 끝내 눈물을 흘렸다. 80년대부터 시작된 그의 화업 노정은 늘 빛났다. 그의 작업은 고난을 마주했을 때 더 힘을 얻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그리고 다시 만난 길 위에서의 연작은 10년을 주기로 그의 분출하는 창작 열정을 담아 우리 앞에 놓였다. 돌아보니 그의 작업에 국내외의 평론가들이 주목하며 헌사를 올리는 이유가 있었다. 늘 한 장르와 한 소재에 머무르지 않고 실험적인 영역에 도전해온 예술정신은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 세계를 주목하게 했다. 전시 막바지, 화가를 만났다. 인터뷰의 대부분 시간이 화가의 유년에 놓였다. 그 기억은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에너지로 차고 넘쳤다. 그의 화폭에 생명이 넘실거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회향의 의미가 각별하게 와 닿는 전시였습니다. 전시회 또한 기대 이상의 많은 관객들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외형적 성공도 그렇지만 교수님께는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털어놓자면 이처럼 훈훈하고 아름다운 전시를 또 어디서 할 수 있을까 할 만큼 만족스러운 전시였습니다. 작가로서는 대단히 축복받은 기회라고 할 수 있죠. 전시실과 작품이 이처럼 잘 소통될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작품을 펼쳐놓은 전시실에 처음 들어섰는데 모악산의 어떤 신비한 기운이 전시공간에까지 들어와 가득 차있는 느낌이 있었어요.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도립미술관의 공간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입니다. 처음 도립미술관을 이곳에 지을 때 지역사회로부터 엄청난 저항이 있었거든요.미술관의 역할로 보자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받은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지은 대도시의 아름답고 세련된 미술관은 얼마든지 많이 있죠. 이즈음에는 미술관이 본래의 기능에 충실한 미술관보다는 아무개 건축가 작품으로 브랜딩 되면서 정작 그 공간에 전시되는 미술작품들은 종속품으로 존립하게 된 경우가 많습니다. 도립미술관은 그런 미술관과는 달리 관객들이 작품으로 만나고 어우러질 수 있게 하는 공간성이 돋보이는 곳이더군요. 전시장을 다녀간 전문가들도 한결같이 그런 독특한 분위기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전시회의 여진이 상당히 큽니다.(웃음)-그 어느 때보다도 설레였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외국의 이름난 미술관이나 갤러리 초대전과는 어떤 점이 달랐는지 궁금합니다. 전시 할 때 작가는 늘 공간을 염두에 둡니다. 독일의 구아르니미술관, 파리의 몽뜨니나 가나보부르 갤러리, 헝가리의 기욜시립미술관 등에서도 전시 했지만 500호 1000호를 비롯한 대작과 화업 30년을 읽어낼 수 있도록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내는 공간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전시는 공간 규모도 그렇지만 특히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면서 따뜻한 기운이 소통하는 전시는 아니었어요. 작품을 내보이고 관객들이 왔다 흩어지는 통상적 전시랄까. 그래서 저의 사적 비전을 전시를 통해 공적 논리화 시키는 이런 대규모 전시로 연출된 유니크한 분위기가 더 강하게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관객들의 반응도 특별했습니다.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로 이어지는 연작의 스펙트럼이 주는 감동이 워낙 강했던 것 같은데, 그림이 관객들과 어떻게 소통되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작품에 몰두하면 완전히 자아중심적이 됩니다. 관객들과 소통하겠다는 의지까지 미치지 못하죠. 주관적인 어떤 느낌 속에서 만들어내는 작품에 공감하고 호응해주는 관객들의 반응은 그래서 더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은 물론 국내보다 외국 전시에서 더 크게 와닿습니다. 그런데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지난 30여 년 동안의 여정 속에서 돌이켜보면 다양한 울림으로 왔던 것 같습니다. 바보예수 연작은 초기에 대단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어요. 바보라는 단어가 신성모독이 아니냐는 지탄부터 거칠게 부딪쳐 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보예수라는 명제가 갖는 상징성을 이해하고, 오히려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끄집어내는 관객들, 진정성을 갖고 진솔하게 그림과 교유하는 관객들의 늘어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겠죠. 물론입니다.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그런 관객들을 만났을 때예요. 저를 다시 일으켜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거든요.-관객들과의 소통을 이야기하자면 화첩기행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화첩기행은 지금껏 시도된 기행문학 중에서도 화첩이라는 형식을 새롭고 독창적인 영역으로 확대시키면서 낙양의 지가 를 올렸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죠. 두려울 만큼 독자들의 반응이 높았었습니다. 사실 저의 40대와 50대의 가장 굵은 지점이 온전히 화첩기행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죠. 화첩기행은 제가 내밀하게 실험해왔던 결과물입니다. 문학소년, 문학청년기를 보내면서 안고 있던,문학이라는 가지 않는 길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늘 수채화 같은 문장과 시 같은 그림을 한 화면에 놓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했거든요.-이번에 북아프리카기행을 담은 5권을 내면서 예전의 화첩기행을 전면 개정해 출간했는데 개정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첫 권을 낸지 15년 지나니 내용의 보완이 필요했습니다. 5권을 펴내면서 이 기회에 내용도 보완하고 전집 형식으로 구성했어요.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보여준 열광적 반응은 아니지만 독자들의 관심이 기대 이상으로 높다고 합니다. 옛 가수가 다시 무대에 선 것처럼 긴장도 되는데, 제 작품에 대한 순수한 독자층과 색깔 있는 문장에 호응하는 독자층이 어우러지면서 제게 글을 쓰게 하는 힘의 동력이 됩니다.-그림은 물론이고, 교수님의 강연을 듣거나 글을 보면 고향과 유년의 기억이 유독 짙고 깊습니다. 유년의 기억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열두 살, 열세 살까지의 삶이 한 사람의 생애를 책임 짓는다고 생각합니다. 제 작품의 주제, 이를테면 바보예수나 생명의 노래 연작의 원소도 모두 유년시절의 종교체험과 자연체험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죠. 연을 날리는 실이 연자에서 풀려나듯이 그림의 근원을 좇아가보면 역시 연자에 감겨있는 실처럼 내 유년의 나날들이 거기 감겨 있습니다. 지리산의 부성적 강인함과 섬진강의 모성적 푸근함에 제 유년시절이 놓여있습니다.-화가로서는 매우 소중한 체험이었겠습니다. 오늘의 김병종을 있게 한 유년의 체험이 그래서 더 궁금해집니다.어렸을 때부터 저는 유난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그 재능을 인정받지 못했죠. 아버님이 열 두살때 돌아가셨는데, 집안 어른들은 집안이 기울어지는 것과 제가 그림을 그리는 것의 관계를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환쟁이를 만들 수는 없다 싶었겠죠. 그래도 늘 그림을 그렸어요. 땅에도 그리고 허공에도 그렸죠. 그러다가 들키면 쥐어 박히는 일이 허다했는데, 그 어린나이에 나는 이 길을 갈 수 밖에 없나보다는 생각을 했었어요.-그러한 예술적 재능은 누구로부터 받았습니까.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취미로 사군자를 그리셨어요. 제가 열두살 때 돌아가셨는데, 학교 가다 다시 돌아와도 혼내지 않고 오히려 잘했다고 해주셨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3남 3녀를 키우셨는데, 그만큼 힘이 드셨을 텐데도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결코 부유하지 않은 생활이었는데도 그런 환경을 절감하지 못할 정도로 늘 낙천적이고 긍정적이셨어요. 우리 형제가 모두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떤 어려움을 마주해도 그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점이 있습니다.-어머니도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셨습니까. 반가워하지는 않으셨죠. 제가 엉뚱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했던 전시회 주제가 유혹이었어요. 어른들 눈으로는 이상한 그림들이었죠. 크리스마스 카드를 그려 팔고, 만화나 부교재를 그대로 그려 아이들에게 반값으로 팔기도 했어요. 펜으로 똑같이 그린 책이니 아이들은 좋아했지만 부교재를 권한 체육선생님은 아주 기분 나빠하셨죠. 이런 일들이 어머니와 형님들의 귀에 들어가면 상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더 강압적으로 그림을 못 그리게 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유년의 나를 알릴 수 없는 곳, 이해받을 수 없는 곳, 억압된 곳이란 인식이 제 삶에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으로 작용해왔던 것 같아요. 아직도 열두 살 어린아이가 자라지 않고 내면에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그림 그리는 일을 끝내 놓지는 않았군요. 그림에 대한 욕구가 봇물 터지 듯했거든요. 나름대로 절제는 했지만 장강대하처럼 나오는 욕구를 통제하기 힘들었죠. 그런 열정은 지금도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교수님의 엄청난 작업양은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강의실에 들어갈 때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한 희열 때문이 아니라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죠. 그래서 제대로 했느냐고 하면 명쾌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양적인 면에서라도 뒤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해온 것 같긴 합니다.-이번 전시는 한 화가의 화력을 들여다보는 의미로서 뿐 아니라 고향과 유년시절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그동안 연작들이 10년을 주기로 새롭게 등장했지만 그 중심을 관통하는 주제는 역시 생명입니다. 그 원소 역시 유년시절로부터 나온 것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서울대 미술대 출신 중 외국으로 가 다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기 발전을 위한 일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자기세계를 찾는 일은 감성의 문제입니다. 예술가가 자기만의 원소를 발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죠. 내 경우에는 생명이라는 원소를 모으기 위해 외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가 지닌 토속적 정서 속에 널려있는 자원과 재료들이 아직도 무궁무진하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곳을 고향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작업을 통해 연자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끊임없이 서로 먼저 다투어 나오려고 하는 것들은 결국 유년의 체험과 상상력의 응축이고 소산이예요.-남원에 건립되고 있는 미술관에 관심이 높습니다. 미술관 하나가 도시의 문화를 이끌고 발전시키는 선례가 많이 있더군요. 유년을 보낸 고향 남원은 특별한 도시였습니다. 유년의 나날들에 자연이 주는 풍성한 감성과 색채는 넘쳐났는데 문화적인 공간이나 체험은 전무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좁고 답답한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림 그리는 일을 반대하고 핍박했던 것도 문화공간의 부재에서 온 것 일겁니다. 저의 어린 시절 야생의 들풀처럼 아무런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을 돌려주고 싶다는 바람이 큰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산 규모는 다른 미술관에 비해 아주 적던데 그 역할에 대한 지역사회의 기대는 커서 부담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국에서 제일 작은 미술관이 될 것 같아요. 적당한 규모가 필요하지만 어떤 콘텐츠로 미술관을 구성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여서 규모에만 연연하고 싶진 않습니다. 남원이 지닌 문화적 잠재력을 이 공간에서 키워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시 못지않게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구성해 남원 문화를 이끌어가는 예총과도 교류하면서 유니크한 공간으로 운영해볼 생각입니다. 마침 남원시에서 복합문화공간인 한타운 아트밸리를 조성하고 있는데 소리문화체험과 도예가들의 작업장, 고서점과 자연캠프 등이 들어선다고 하더군요. 제가 구상하고 있는 미술관의 프로그램이 이 공간들과 결합하면 더 좋은 인프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김교수는 이번 전시에 대한 감회가 특별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그는 30년 작업을 한자리에 펼쳐놓고 보니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몽롱했던 행선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그가 다시 열어놓을 새로운 길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김병종 교수는 한국화 새 지평 연 '화첩기행' 화가로 유명김병종 교수(서울대 미술대)는 1953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책읽기와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던 그는 책이 많았던 친구 집에서 빌린 책들을 가리지 않고 읽으며 책읽기의 갈증을 풀었지만 그림그리기는 아이의 재능을 미리 막고자 했던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로 늘 경계의 대상이 됐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어머니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이었지만 막내아들의 재능을 응원하진 않았다. 그럴수록 장강대하처럼 분출되는 욕구는 스스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넘쳐 중학교 2학년 때 남원 시내 다방에서 첫 전시를 열고 시집을 펴냈다. 늘 그림을 못 그리게 되지는 않을까 조바심으로 불안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찬밥 비벼먹고 완행열차 타고 영등포역에 내렸다. 좋은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는 여물고 단단한 것이었으나 그에게 그리는 일은 잘 해보라는 응원을 받으며 해온 일이 아니라 눈물겨운 간절함으로 해온 절박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못 그리게 되는 악몽을 꿀 정도로 그리는 일에 대한 핍박은 트라우마가 되었지만 서울대 미술대를 들어간 후 재능은 제대로 빛을 냈다. 전국대학미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시와 소설로 서울대문학상을 휩쓸었으며, 희곡 여러 편이 무대에 올려졌다. 동아일보 (1980)와 중앙일보(1981) 신춘문예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대한민국문학상과 삼성문화재단 저작상 등의 수상작가로서도 이름을 알렸다. 90년대 후반에는 글과 그림을 아름답게 조화해낸 화첩기행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기행문학의 여정은 지금까지도 계속돼 최근 북아프리카기행으로 다섯 번째 화첩기행을 펴냈다. 80년대, 작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새로운 형식과 명료한 주제의식으로 한국화의 새 지평을 열어왔던 그는 가장 한국의 원초적 정서를 다양한 형식에 담아내면서 국내외 평론가들의 관심과 헌사를 받아왔다. 프랑스 헝가리 영국 미국의 이름난 미술관과 갤러리가 그를 초대했으며 런던의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술대 학장과 미술관장을 지냈으며 30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해오면서도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뒤질까 두려워 그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원 송동면에 2016년 문을 열 작고 아름다운 미술관이 건립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2.20 23:02

[7. 완주 (주)썬텍에너지] 바이오 매스 활용한 친환경 에너지사업 '업계 선두'

산업단지에 설치한 친환경 열병합 발전 시스템을 이달부터 상업운전하면서, 에너지 전문 토털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썬텍에너지가 제2의 도약기에 접어들었다. 에너지 진단 전문업체(1종)인 썬텍에너지는 열병합 발전 시스템을 직접 설비할 수 있는 역량까지 대외적으로 검증 받으며, 사업의 지평과 외연을 새롭게 확장한 셈이다.△ 친환경 열병합 발전 시스템 가동 썬텍에너지가 전사적 차원서 역량을 모으고 있는 열병합 발전 시스템은 바이오 매스 전용 CFBC(Circulating Flu idized Bed Combustion) 보일러가 핵심 장치이다. 썬텍에너지는 지난해부터 조립과정에 들어간 이 시스템에 대한 시험가동 과정을 거쳐 드디어 20일 상업운전에 성공했다.이 보일러의 가장 큰 장점은 대형 열병합 발전 보일러를 소형화시켜, 에너지를 분산형으로 공급할 수 있는 로컬 에너지 체제 구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보일러가 정상가동 상태로 접어들면서 시간당 35톤의 스팀과 최대 3MWh의 전력을 생산한다. 썬텍에너지는 이 보일러에서 생산되는 스팀은 완주산업단지에, 전력은 한국전력에 각각 판매한다.특히 이 보일러는 바이오 매스를 완전연소하는 열병합 설비를 갖춰 대기오염 물질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친환경 장치이다. 바이오 매스는 나무나 풀해조류가축 분뇨 등을 에너지원으로 해서 전력을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썬텍에너지는 대형 위주의 열병합 발전시스템을 소형화시키고, 상업운전 상태로 접어들면서 국내 유수 기업들과 기관들이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며 중소형 바이오매스 전소 설비로는 국내 최초 사례라고 설명했다.우드 펠릿 등 목질계 바이오매스 연료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화석연료의 10%에도 못미친다. 또 우드 펠릿은 기후변화협약에서도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것으로 인정되어, 청정에너지로 각광받고 있다.썬텍에너지는 완주산단에서 열병합 발전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가동, 바이오 매스 CFBC 보일러가 안정성과 실용성을 겸비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검증 받았다. 이에 따라 국내외 업체들이 썬텍에너지와 협약체결을 추진하고 있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 플랜트 수출길도 열리고 있다.△ 에너지 진단 전문기관호남지역 유일한 에너지진단전문기관(1종)인 썬텍에너지는 에너지 다소비 산업체와 건축물을 대상으로 실질적인 진단을 실시, 손실 에너지에 대한 개선방안을 도출하고 시설설치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투자사업을 벌이고 있다.또 에너지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부문별 맞춤형 진단 형식으로 목적진단을 통해 개선 아이템을 발굴하고 있다. 이 서비스를 제공 받은 도내 주요 업체들이 15-20%에 달하는 에너지 절감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썬텍에너지는 해외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중국 등지의 식품공장과 알루미늄 제련공장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에너지 진단을 수행, 도내 에너지 관련업체로서는 가장 활발한 수주실적을 보이고 있다.△ 에너지 절약 전문기업썬텍에너지는 에너지 절약 전문기업(ESCO: Energy Service Company) 영역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 ESCO는 에너지 사용자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기존 시설을 교체하거나 보완할 때, 에너지 진단을 통해 솔루션을 도출하고 이를 실질적인 성과로 잇는 사업분야이다.썬텍에너지는 최근 3년간 ESCO사업을 통해 약 6만 TOE(석유환산톤)를 절감시켰다.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무려 700억원에 달한다.△ 연구개발에도 과감한 투자썬텍에너지는 자체적으로 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개발 분야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기술연구소가 추진하는 주요 연구분야는 각종 보일러의 연소 기술 및 촉매기술 연구, 에너지 진단 및 개선 활동의 프로세스 개발, 해외 에너지 선진기술의 국내 도입 검토, 신재생 연료의 적용기술 개발과 검증, 해외 온실가스 감축사업, 유기성 폐기물 연료화 사업 등이다.● 고원영 대표이사 "에너지 절약 솔루션으로 윈-윈"썬텍에너지는 그린 경영을 지향합니다. 친환경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업무를 처리하는 회사로서 친환경 경영은 당연한 목표입니다.썬텍에너지 고원영 대표이사는 에너지 사업이란 에너지 다소비 업체에도 실질적인 이익을 주고, 수주업체에도 이익을 주는 윈-윈 경영이 가능한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에너지 절약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에너지 진단부터 시작해 솔루션을 도출하고, 이를 투자로 연결시켜 에너지 다소비업체들이 운영비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에너지 진단업체도 감축비의 일부를 수익으로 나눌 수 있는 상생 효과를 거둘 수 있지요.고 대표가 최근 밤낮으로 매달리는 분야는 바이오 매스를 이용한 친환경 에너지 사업. 지난해부터 완주산업단지에 열병합 발전 플랜트를 설치하는 사업에 모든 역량을 쏟았습니다. 이들 결과가 이제 막 결실을 맺어 관련 설비가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열병합 발전시설은 플랜트를 소형화시켜, 중앙 집중식 에너지 공급체계를 분산형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발전장치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열병합 발전 플랜트는 고 대표의 중대한 결심에서 비롯되었다. 에너지 소비자들에게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설명하는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공허한 언어와 수식어 보다, 이를 직접 만들어 보여주는 게 훨씬 낫겠다는 생각에 우드펠릿을 연료로 사용하는 친환경 보일러를 직접 설비했습니다. 수십억원이 투입되는 이 보일러 설비는 경영의 유동성을 언제나 챙겨야 하는 사업가로서 쉽지 않는 실천계획이었다.

  • 기획
  • 김경모
  • 2014.02.20 23:02

민주당 지도부 입성한 정균환 최고위원

정균환(70) 전 의원이 최근 민주당 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화제다. 9명의 민주당 지도부 중 한 명인 최고위원은 공천방식이나 지방선거 후보 결정 등 당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의 최고위원 임명을 두고 일부에서는 전북몫 배려라거나 전통적인 민주 지지파 껴안기 등 여러가지 관측이 나돈다.민주당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과 수도권에서 버거운 싸움을 벌여야 할 상황이며, 텃밭인 호남에서마저 안철수 신당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민감한 시기에 당 지도부에 입성한 민주당 정균환 최고위원을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나 현 정국에 대한 진단과 지방선거에 대한 궁금증 등을 들어봤다.- 최근 민주당 최고위원을 맡으면서 도민들은 그 배경은 무엇이고 향후 역할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민주당이 어려운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당의 요청에 모른 척 할 수 없어 지도부에 들어왔습니다. 민주당의 정통성을 복원하고 국민에게 다가가는 당을 만드는데 일조하는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64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있으나 민주당 내에는 전국선거 경험이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풍부한 야당 경험을 토대로 한 강력한 대여 투쟁을 하는데 힘을 모을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당 원로로서 항상 당에 직간접적으로 조언해 왔는데 이번 최고위원 임명을 계기로 한번 더 도민에 대한 봉사의 마음을 가다듬고 민주당이 우뚝 서는데 힘을 모을 생각입니다.- 최근 정치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과 진단,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보십니까.현재 정치상황은 한마디로 박근혜 정부의 불통 철벽 정치에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당인 새누리당 또한 대화와 타협이 아닌 분열의 정치를 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민주당이 어려울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민주당의 정통성은 현장에 있고, 국민 속에 있다는 것을 망각해선 안됩니다. 제가 볼때 민주당은 국민의 목소리에 듣기 위해서 현장으로, 더 낮은 자세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일선 현장에서 더 열심히 민생을 챙기고 국민의 아픔을 달래줘야 합니다.- 안철수 신당 바람이 가장 거센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전북인데, 그 이유는 무엇이고 민주당의 타개책은 무엇입니까.도민들은 변함없이 민주당에 대한 무한 지지를 계속했으나 성공하지 못하면서 이에대한 반발심리, 반사심리가 극에 달해있습니다. 실컷 지지해주니까 성공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전북만 도태되고 변방으로 내몰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많습니다. 도민들이 민주당에 아쉬움을 표시하고 있는 현상을 비유하자면, 내 자식이 밖에서 맞고 오면 화나고 분한 것이 부모의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민주당이 더 잘하라고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자식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면 다시 보듬어 주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고 봅니다. 이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도민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민주당이 제대로 된 인물을 지방선거에 내세워야 합니다. 이를 토대로 최선을 다했을 때 도민들은 다시한번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보낼 것입니다. 어려움이 많겠지만 결국 전북에서 민주당이 도지사, 시장군수는 물론, 지방의원 대부분을 석권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선 민주당의 정체성 확립과 복원에 앞장설 것입니다. 민주당의 정체성 확립은 김대중 정신의 복원입니다.- 야권이 하나로 뭉쳐도 거대 여당에 맞서기 쉽지 않은데 현재 민주당과 안철수 신당은 야권연대 또는 연합에 대한 공감대조차 찾기 어려운 듯 합니다.솔직히 민주당이 가진 현실적 딜레마일뿐더러 당에서도 실제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야권이 혁신 경쟁하다가 오히려 새누리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국민이 많습니다. 지금은 개혁과 혁신 경쟁을 안철수 신당과 해야 하는 상황인데, 한편으로 전쟁에서 적의 힘이 강하면 연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민주당과 안 신당은 선의의 경쟁 상대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의 적은 새누리당이라는 것입니다. 안 신당도 이같은 국민의 여망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내에서 안 신당 후보로 강봉균 전 민주당 도당위원장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고, 한편에선 이에맞선 정동영 전략공천설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결론적으로 당의 공천방식은 최종 결론때까지 당 지도부에 있는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민주당 당헌과 당규에 공천은 경선을 거치도록 명문화하고 있지만, 경쟁력 있는 후보를 위해 전략공천을 할 수도 있다고 돼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북도지사 공천방식 등에 대해 최고위원회 등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지역에서 준비하시는 분도 있고, 이외에도 하마평에 오르는 분도 있습니다. 지방선거에 대한 구체적인 로드맵이 만들어지고, 공천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향후 여론 추이, 정국상황 등이 중요한 변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날 전북은 갈수록 위축되고, 특히 중앙 정치무대에서 계속 소외되고 있는데, 그 해법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박근혜 정부 들어 지역 차별이 훨씬 더 심화되고 있고 호남지역 차별은 도가 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국민통합을 이야기했지만 국민분열 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지역으로 편 가르고, 이념으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국가 균형발전을 위해 호남 차별부터 시정돼야 하고, 정부 차원에서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전북은 정당별 경쟁구도가 형성되지 않아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에서도 소외된다는 지적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국가 균형발전과 지역발전을 위해 지역분권이 강화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역분권은 시대적 요청이자 흐름인데, 현재 각 자치단체들이 블록화 되고 있습니다. 전북은 호남과 광주와 연계해 지역 블록화로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지역 블록화로 예산의 효율성을 높이고 공존 공생해야 합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전북은 제 고향이자 정치적 고향입니다. 오늘날의 저를 만들어주시고 있게해 준 곳입니다. 도민 여러분의 사랑을 더 크게 펼치고자 지금 중앙에서 정치를 하고 있지만 전북의 관심과 사랑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중앙에서 고향 전북을 위해 더 열심히 활동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지역을 찾아 도민들의 목소리를 듣는데 힘쓰겠습니다.● 정균환 최고위원은...DJ 신임, 4선 의원 친노와는 대립각도정균환(70) 민주당 최고위원은 고창에서 태어나 고창중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 축구 선수로 활동할 만큼 만능 스포츠맨이다. 대학 졸업 후, 진보정당인 사회당에 입당, 사회정의와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력도 있다.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결성되자 곧바로 참여해 전두환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그가 정치적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은 민추협에서 재야운동의 거목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때문이다.1988년 13대 총선 때 고창에서 출마해 당선 된 후 16대까지 내리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7년 국민의 정부가 탄생된 이후 초대 여당 사무총장을 지내고 두 번의 원내대표를 역임할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여권 실세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비리에 연루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뚝심있고 원칙을 고수하던 그에겐 이후 시련이 계속됐다.참여정부 때 대북특검에 반대하고 민주당 분당 때는 민주당 지키기에 앞장서면서 친노와는 뚜렷한 대립각을 세웠다. 이후 탄핵 역풍이 불었고, 정권의 미움을 사면서 정균환 죽이기의 표적이 돼 결국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간 대결구도 속에 치러진 2006년 지방선거 때 그는 민주당 후보로 나서 선전했으나, 열린우리당 김완주 후보에 석패했고, 2010년 도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결국 출마하지 못했다.2007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야권 재통합에 앞장서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막상 공천을 받지 못해 18대 총선때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19대 총선 때도 호남기득권을 버리는 결단으로 서울 송파병에 출마했으나 석패했다.

  • 기획
  • 위병기
  • 2014.02.17 23:02

[6. 김제 (유)한스] 콘크리트에 신기술 접목, 상하수도관·맨홀 제품 차별화

차별화 된 상하수도 제품 및 토목제품을 건실하게 생산판매하는 기업으로, 20여년 전 부터 하수도 관련 제품에 많은 연구개발비와 시설물 투자로 신제품을 양산하여 특허 및 인증 등을 45개 보유하고 펌프장맨홀, 콘크리트관, 제수변맨홀, 조립식교량 등을 국내 하수관거정비사업 현장에 납품, 그 기술력을 인정 받고 있는 (유) 한스(대표이사 이근호).(유) 한스는 지난 45년간 콘크리트 2차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해 온 도내 콘크리트제품 생산회사의 선두주자 격인 (주)신흥콘크리트의 자회사이기도 하다.김제시 흥사동 서흥공단에 자리한 (유) 한스는 기업을 운영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략이 있다. 바로 미래에 있어야 할 기술과 제품을 남보다 먼저 생각하고 이를 토대로 향상된 제품을 생산하여 국내시장을 석권한다는 전략이다.최근에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따른 대응책으로 집중호우와 빠른 표면배수처리를 할 수 있는 진동전압 배수관을 개발,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이 제품은 국내 최초로 기존 VR관에 배수 홈을 가공한 것으로, 기존 집수정을 활용한 빗물처리보다 3배 이상 향상된 배수능력을 확보하여 종배수로관 및 도심지 등에 널리 사용될 것으로 전망된다.이밖에도 다양한 맨홀을 개발했으며, 특히 펌프장맨홀 및 제수변맨홀, 한전맨홀 등은 품질과 설치기간이 단축되는 장점을 갖고 있어 소비자들로 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특히 최근들어 전국적인 폭염지역으로 낙인찍힌 전북도내의 열섬현상을 저감할 수 있는 옥상녹화블록과 보투수성 인터로킹블록을 개발, 판매 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이근호 대표이사는 아무 기능이 없을 것만 같은 콘크리트에도 신소재와 신기술을 접목하면 무한한 기능성 제품으로 탈바꿈 할 수 있는 혁신제품 덕분에 지역사회에 기여할 여유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유)한스는 지난 2008년 심산장학재단을 설립, 연간 1억여원이 넘는 장학금을 도내 장학생들에게 지급 하고 있으며, 특히 명절에는 고객들이 보내온 선물을 신입사원 및 가정방문실 수녀들과 함께 직접 불우이웃을 찾아 전달하며 희망과 용기를 복돋아 주는 등 선행을 베풀고 있다.직원들은 또한 연간 기부금 총액을 전직원 월급1회 지급총액 이상으로 한다는 목표로 최근 3년 동안 4억여원을 기부하는 등 지역사회와 함께 하고 있다.(유)한스는 사회봉사활동 뿐만 아니라 직원 복지향상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어 직원들이 애착심을 갖고 근무 하고 있는 회사로 정평이 나 있다.지난해 220억원의 매출 달성에 따른 인센티브로 전직원을 일본 및 중국에 산업연수를 보냈고, 2013년도 도내 우수중소기업인상에 선정 돼 직원 90여명이 홍콩 및 마카오 투어를 실시했으며, 올 2월에는 18세기 조선의 화성 행궁축성이 오늘날 세종시 신도시 조성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화성 행궁 건설의 토목, 건축방식에 개선하여 단기간에 축조 할 수 있었던 기술력을 직접 보고 체험하기 위해 임진각 및 경복궁, 수원 화성행궁 투어를 추진했다.이 대표는 품질과 기술력을 충분히 확보한 지역상품을 도민과 지방 정부기관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져줄 때 지역중소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면서 도내 일등기업이 국내 일등기업이라는 자부심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민들과 지방 정부기관의 많은 애정과 성원을 바란다고 당부했다.그는 콘크리트제조업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긴 노동시간이라는 선입견이 있어 인재들이 입사를 기피 하는 현상이 있다면서 우리 회사는 작업환경 개선 및 근무시간 단축이 유능한 인재를 채용할 수 있다는 방침아래 지난 2010년 부터 2013년까지 작업환경 개선활동으로 작업환경이 많이 개선됐으며, 설비 개선과 전문기관의 위탁 교육 등으로 생산성이 16% 향상 돼 근로시간이 1시간 단축됐고, 금년에는 10시간 작업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하고 임금은 동일하게 책정, 지역의 훌륭한 인재들이 입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덧붙였다.(유)한스는 2013년 생산성향상 및 매출증가에 따른 인센티브로 직원들에게 올 2월 특별상여금을 지급, 직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근호 대표이사 "기업 운영 최우선 덕목은 사회적 책임"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이익창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것도 중요한 하나의 책무로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는 차별화 된 상수도제품 및 토목제품을 건실하게 생산, 국내 하수관거정비사업에 납품하며 국가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앞으로도 하수도 관련 제품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 관련 업계에서 으뜸 가는 회사가 될 수 있도록 전직원들과 힘을 합쳐 노력하겠습니다(유) 한스 이근호 대표이사는 기업을 운영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덕목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이 대표는 콘크리트제품 생산회사가 안정성에 문제가 있는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이제 거의 모든 회사가 이상이 없는 제품을 생산한다면서 다만, 어느회사가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보다 더 향상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하느냐에 승패가 달려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그는 과거에는 향상된 콘크리트제품을 연구개발하기 위해 일본 등 선진국을 수 없이 찾아다니며 벤치마킹 했다면서 이제는 인터넷 등 매체가 발달 돼 있어 언제어디서든 검색이 가능하여 수시로 (인터넷을) 검색해가며 관련 업계제품의 동향을 파악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이 대표는 우리 회사가 김제에 자리 하고 있는 만큼 지역발전과 김제시민들과 함께 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면서 좋은 제품을 생산하여 지역사회 및 국가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한편 이근호 대표는 신지식인 및 산자부, 행자부, 기획재정부장관상, 대통령 산업포장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을 보유 하고 있다.

  • 기획
  • 최대우
  • 2014.02.13 23:02

[(7)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① 전봉준 장군] '녹두장군' 직계 미궁…천안 전씨 비석 세우고 제사

동학농민혁명군 후손들의 피폐한 삶은 지도자들의 후손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체포된 지도자들 대부분이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그 가족들은 오랫동안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을 달고 다녀야 했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당장 연명조차 버거웠고, 관의 감시와 주변의 눈총 또한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2004년에야 특별법 제정으로 명예회복과 복권이 이루어졌지만 사건이 발생한 지 110년은 그 후손들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안된 이들에게 지도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차라리 사치였다.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김개남손화중최경선김덕명 장군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선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들여다본다.전봉준 장군(1855~1895)을 제쳐놓고 동학농민혁명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고부봉기와 무장기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백산대회(1894년 음력 3월26일~3월29일)에서 총대장으로 추대된 후 내내 혁명의 중심에 섰던 최고 지도자였다. 그를 기리는 시설물들이 그의 행적을 따라 정읍과 고창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설치돼 있다. 그가 태어난 고창 당촌(고창읍 죽림리)에 생가가 만들어졌고(2000년), 혁명 당시 살았던 정읍 이평면 장내리의 고택은 사적지로 지정돼(1981년) 관리되고 있다. 동상 혹은 부조 등으로 그를 형상화 한 조형물도 10여곳에 이르며, 그의 이름을 딴 전봉준공원(정읍 내장산 입구)까지 조성됐다. 선조묘와 부모묘도 천안전씨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당시 역사가 재조명되고 재평가 받으면서 전봉준 장군이 이렇게 기려지고 있지만, 정작 그의 직계 가족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베일에 쌓인 가계사실 전봉준 장군의 생애 자체가 베일에 가려진 부분이 많다. 1차적 자료라고 할 그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가족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내용들은 재판당시 진술과 구전 등으로 알려진 정도다. 그가 고창 당촌에서 출생했다는 사실은 오지영의 〈동학사〉(1940년)에 나온 내용으로, 고창의 향토사학자 이기화씨가 천안전씨 족보와 구전 등을 통해 확인했다. 가족 상황 역시 명확하지 않다. 직접적인 자료는 1차 재판에서 진술한 6명이라는 게 전부다. 부인과 자녀 4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정읍의 향토사학자 최현식(1923~2011)씨는 생전에 전봉준 장군의 가계(家系)를 추적했다. 그는 2남 2녀중 장녀 전옥례 여사(1880~1970)를 만나 들은 증언을 〈갑오동학혁명사〉에 담았다. 증언자인 전 씨는 15세의 나이로 화를 피해 진안 마이산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변성명하고 금당사 공양주로 지내다가 23세에 결혼, 두 아들을 두었다. 전봉준 고택은 자신이 어려서 살았던 집이라고 했으며. 그동안 숨어 지내다가 갑오동학혁명제가 열리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는 것이다. 장남(용규)은 손을 두지 않고 사망했으며, 차남(용현)은 행방불명, 차녀(성녀)는 고택 부근에서 살며 결혼해서 딸을 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가족관계를 증명할 만한 기록이나 주변의 증언이 뒷받침 되지 않아 직계 후손에 대한 사실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특별법 제정에 따라 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벌인 유족 심사에도 4~5명이 전봉준 장군의 후손이라는 유족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관련 증빙 자료가 없을 뿐더러 전봉준 장군의 시신조차 수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전자 감식 등으로 판별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국회서 학술대회 계획직계 가족이 없는 상황에서 천안전씨 차원에서 전봉준 장군이 기려지고 있다. 고창과 정읍지역 천안전씨 문중은 갑오년 1주갑인 1954년 고택 부근에 단비를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낸다. 〈갑오민주창의통수천안전공봉준지단〉이라고 쓴 이 단비는 김제 출신의 역사학자 김상기 박사(서울대 교수 역임)가 명명했다. 종중에 의해 설립됐지만, 장군이민주투사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한 첫 시설물인 셈이다. 종중은 이 단비의 역사성을 들어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바라고 있다.묘지 관리와 제사는 계손(系孫)인 전만길 씨가 50년간 관리했으며, 현재 그의 아들인 전성준 씨(54, 서울서 사업)가 2004년 작고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봉사손이 되었다. 전 씨는 아버지는 글자도 모르는 분이었지만 끌림과 혈족이라는 확신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50년간 제사를 지내셨다고 말했다.장군의 제사는 100주년 때부터 천안전씨 대종회 차원에서 기일인 매년 양력 4월24일 시향제로 치러지고 있으며, 시향제에는 200~300명이 참여하고 있단다.천안전씨 대종회는 지난해 전봉준장군유적보존회를 사단법인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로 확대 개편, 장군을 기리는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법인 이사장을 맡은 전해철 씨(81)는 기존의 시향제를 올해부터 국민적 추모제로 치르고, 국회에서 학술대회를 열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의 학술대회는 집강소를 통해 풀뿌리민주주의를 시도했던 그 정신을 살릴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전 이사장은 충남도로부터 승인을 받아 천안전씨 중심으로 법인이 시작됐지만, 향후 전국적인 모임이 될 수 있게 지역별 지부를 만들어 문호를 활짝 열 계획이라고 했다.전봉준 장군을 기억하고 기리는 활동들이 이렇게나마 이루어져 위안이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다운 삶을 꿈꿨던 장군의 정신은 시설물이나 제사만으로 기려질 수 없다. 또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작정의 미화도 장군을 욕되게 한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선친 이어 전봉준 장군 제사 모시는 전성준 씨 "서울에 전봉준 장군 동상 서는 날 올 것"당시 함께 처형된 손화중김덕명최경선 장군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습니까. 전봉준 장군의 시신도 분명히 수습됐을 것이며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선친에 이어 2004년부터 전봉준 장군의 단소(가묘)를 관리하며 제사를 모시고 있는 전성준 씨(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 사무총장)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전봉준 장군이 실제 묻힌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냈다.아버지는 단소 관리를 위해 집에서 8킬로 정도 떨어진 단이 있는 곳까지 새벽에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사 때 허름한 차림의 한 노인이 찾아온 적도 있었답니다. 거제도에 살고 있으며, 친손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후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장군의 시신과 친손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과 함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사람이 중심인 세상을 만드는 게 장군의 뜻 아니었습니까. 우익이냐 좌익이냐 따지고, 정치적 심벌로 이용하려 하는 것은 그의 정신을 퇴색시키는 일입니다.그는 또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단소가 처음에는 조촐했는데 지금은 군더더기(비석, 석등)가 붙어 화려한 쪽으로 치장된 것 같다고 했다. 처음으로 돌려 사적지나 문화재로 등록되길 희망했다.고창의 생가 역시 가난했던 장군의 집으로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낮아질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기리는 사람이나 단체에서 경구로 삼았으면 좋겠단다.독립지사나 애국지사처럼 서울 한복판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건립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전적지나 기념관이 아닌, 서울의 중심부에 동상이 서는 날이 동학농민혁명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 아니겠습니까.

  • 기획
  • 김원용
  • 2014.02.12 23:02

30. 익산 용안초 - 인근 학교들과 공동수업, 건강한 교육공동체 모델 '안착'

익산 용안초등학교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다. 학교의 면적이 3만9600㎡라는 공원을 연상시키는 대규모 부지를 갖고 있는 반면 학생수는 고작 40여 명에 그친다. 이 상반된 얼굴을 가진 용안초가 올해로 개교 101주년을 맞았다. 21년 째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임용구씨(8628회)는 이전엔 모든 면민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다고 추억했지만, 오지화 돼가는 농촌학교의 숙명을 감내하려는 학교동문들의 고심은 깊다.△작은학교 네트워크 두각 처음 학교에 왔을 때만 해도 황무지만 덩그러니 있다는 인상이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수업을 줄여주는 대신 막일을 참 많이 시켰습니다. (웃음) 이 정원은 그렇게 땀 흘리면서 일군 거죠. 내가 지은 집처럼 애착이 있습니다. 최정호 용안초 교장은 1990년대 이 학교의 기틀을 닦은 교사였었다. 학교 부지는 자그마치 3만9600㎡나 된다. 용안의 상징인 무학산을 배경으로 소나무 동산, 실습장, 테니스장, 게이트볼장 등을 갖춘 교육 공원 같다. 최 교장은 용안은 금강을 끼고 편안하게 누워 있는 용의 모습이라면서 조선시대부터 각종 산물이 풍부하고 인심이 좋아 관리들도 울고 왔다가 웃고 갔다고들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드넓은 부지 만큼이나 학교 관리는 쉽지 않았다. 급감하는 학생수 앞에서 학교의 규모와 역사도 때론 무용지물로 느껴지는 이유다. 그러나 최 교장의 학생수 확보를 위한 회심의 카드는 작은학교 네트워크를 활용한 학교군 사업이다. 용안초 인근에 있는 용북초, 용남초, 성북초와 연계한 공동수업 등이 그것이다. 학교별로 80분 공동수업의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축구같은 스포츠는 머릿수가 안 맞았으나 공동수업 결과 호응도가 높았다는 최 교장은 체육대회도 네 학교가 합심해 치렀다. 고삼순 교감도 교사와 학생학부모지역민 등이 연 온가족한마음축제는 마치 1970~80년대 시골학교 운동회 같았다고 전했다. 이들 4개 학교는 현장학습, 영어캠프, 학습발표회, 학부모 기타교실 등을 통해 작지만 건강한 교육공동체의 모델로 안착 중이다. 이같은 내실있는 교육과정은 일부 전학생들의 발길을 향하게 만드는 추동력이 됐지만, 학생수 급감 해결은 현재진행형 과제다. △고 전철환 전 총재 등 배출20년 넘게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임용구 회장은 바통을 넘겨줄 후배가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지난해 용안초 100주년 기념행사도 임 회장의 연륜으로 동문들을 규합해 치렀을 정도다. 100주년 기념행사 때 그는 용안초 동문들을 수소문해 역사 속 인물을 재조명하며 용안초의 자긍심을 독려했다. 황금재 동문(33회)은 한국전쟁 직전의 육탄 10용사 중 한 명이다. 1949년 개성 송악산에서 빼앗긴 고지를 되찾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든 황금재 동문은 1950년 특무상사로 특진했다. 임용구 총동창회장은 윤택중 전 육군 소장(48회)과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한 유남규 전 소장(35회)도 빼놓을 수 없는 동문으로 꼽았다.고(故)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38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인 IMF 경제환란 극복을 위한 금융시스템 정립에 기여한 공로자다. 특히 정부 재정정책과 한은 통화정책 간 균형감각에서 IMF 외환위기를 잘 극복한 공로로 전 전 총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진보성향의 학자로 한국경제발전학회 회장과 금융통화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이진수 국립암센터 원장(49회)은 국내 항암제 개발을 위한 선봉장을 맡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MD앤더슨암센터에서 1992~2001년 흉부두경부 종양내과 교수로 재직한 그는 지난 2001년부터 국립암센터 폐암센터장, 부속병원장, 연구소장 등을 거친 인재다. 고(故) 임해정 전 군산대 총장(43회)은 교사 출신 총장으로, 그가 저술한 경제학원론을 비롯한 다수의 논문은 경제학 전공자에게는 필독서였다. 고인이 작고한 이후 부인 장인자 여사는 도서 500권 이상을 학교에 기증했다.유독 정계 인맥이 약한 용안초는 4선을 한 임종규 익산시의원(48회)이 유일하며, 법조계도 졸업연도가 불명확한 김영진 창원지검 검사장만이 손에 꼽힌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11 23:02

[5. 남원 (주)금성산업] 산업재산권 600여개…'신개념 방호울타리' 국내외서 인정

남원시 용정동 광치농공단지 내 (주)금성산업(KSI Ltd.)은 기존 금속판 가드레일의 단점에서 착안해 충격 흡수력을 강화한 세이프티 롤러라는 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업체다. 2004년도에 폐차 타이어를 활용한 세이프티 롤러를 최초로 특허출원한 이후 EVA재질 사용과 차량 충돌메카니즘 분석으로 현재 그 기능이 업그레이드 됐다. 주판 알이 회전하는데서 제품의 원리를 적용한 세이프티 롤러는 차량의 가드레일 충돌 때 충격에너지를 회전에너지로 바꿔주는 제품으로, 빠른 속도로 진행중인 차량이 가드레일을 뚫고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해 준다. 즉 세이프티 롤러와 충돌한 차량을 도로로 안전하게 유도하는 방호울타리인 셈이다. 금성산업은 이밖에도 교량난간, 펜스, 방음벽, 가로등 등을 주력제품으로 생산중이다. 본사인 남원 공장과 수도권사업소(안양시 관양동)에 7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고, 2013년 기준 내수 판매는 170억원 규모다.△제품 평가 및 반응은세이프티 롤러는 2009년도에 국제발명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최고혁신제품상을 받았고, World Highways라는 영국 유수의 도로교통 잡지는 지속적으로 세이프티 롤러를 지면에 할애하기도 했다. 업체 측은 세이프티 롤러가 출시된 이후 국내는 물론 해외시장에서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설명했다.또 세이프티 롤러는 국내 충돌시험에서 우수한 성능으로 인증을 획득했다. 업체 관계자는 도로교통연구원의 테스트 결과에서 세이프티 롤러의 원상복원력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가장 엄격한 충돌시험기준을 요구하는 미국 충돌시험(MASH)까지 통과했다. 회전형 가드레일로 유일하게 미국인증을 획득하는 등 성능의 우수성이 전 세계적으로 입증되고 있다.△업체의 올해 목표는지난해 금성산업의 수출시장은 연간 5억원 정도로 미약한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태국,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란 등 10개국에서 이뤄진 샘플시공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올해 전망은 밝은 편이다. 이 업체는 이 같은 기반으로 올해 본격적인 수출업체로의 도약에 팔을 걷어 부쳤다. 미국과 유럽 등지로까지 해외시장을 확대해 100억 수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업체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가드레일 시장은 대략 수십조원으로, 세이프티 롤러의 해외 공략은 지역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올해 매출 300억원 및 수출 100억원을 달성해, 3년내에 교통시설물 업계를 리드하는 글로벌 선진기업이 목표라고 강조했다.△추구하는 가치는대표이사의 사무실 벽은 각종 등록증으로 빼곡하다. 국내외 특허 28개, 실용신안 10개, 디자인 등록 570여개 등 총 600개가 넘는 산업재산권은 이 회사의 도전정신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이다. 끊임없는 연구와 제품개발은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채 대표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이 업체는 또 최고의 제품으로 교통사고 사망률 제로를 꿈꾸고 있다. 아름답고 안전한 세상을 내 손으로라는 모토 아래, 탑승자의 안전을 지키고 차량의 손상을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제품에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통사고 사망자와 분담금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제품개발을 통한 기업경쟁력 강화가 추구하는 가치다.● 채종술 대표이사 "고향 남원서 교통시설물 시장 제패하고 싶다"채종술(54) 대표이사는 남원 수지면 출신이다. 남원은 지리적으로 기업하기 좋은 편은 아니다면서도 그가 1994년에 남원시 용정동 광치농공단지 내에 회사 본사를 설립한 것은 고향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채 대표는 고향인 남원에서 대한민국 시장을 제패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이런 채 대표가 기업을 운영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략이 있다. 바로 기술력이다. 금성산업이 기존 저부가가치 도로시설물을 기술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탈바꿈하려고 금속 가드레일 성형기, EVA 사출기 및 프레스기 등 필요한 생산설비를 완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를 토대로 향상된 제품을 생산해 국내시장 석권은 물론 해외시장 다변화를 꾀하려는 목적이다.채 대표는 업체의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탄소섬유와 같은 신소재의 적극적인 도입과 함께 태양광 같은 친환경 신재생에너지를 기존 제품에 융합한 제품 개발, 지능형 및 감지형 선진적 교통시설물 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것이라며 교통시설물 부문에서 최첨단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혁신성과 테크놀리지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교통사고 사망률 제로의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제품개발을 실현해야 한다는 채 대표에게도 지역사회에 주문사항이 있다. 그는 매출 300억원 및 수출 100억원 달성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인재육성 등의 공헌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매출 300억원 달성을 위해서는 지역 내 공공기관이 지역 기업의 제품을 적극 도입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한편 채 대표는 경찰청장 감사장(2004년), 사단법인 산학연 전국협의회 표창장(2006년), 전북중소기업청장 표창(2007년), 서울 국제발명전 금상(2009년), 기획재정부장관 표창(2010년), 특허스타기업 선정(2010년), 대한민국 철탑산업훈장(2010년) 등의 수상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 기획
  • 홍성오
  • 2014.02.06 23:02

[5. '프리프레그'] 탄소섬유·첨단복합재 이어주는'핵심 소재'

탄소섬유는 강철보다 강하고 알루미늄보다 가벼운 꿈의 신소재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단순한 실 (fiber) 또는 천 (fabric)에 불과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할 수 있듯이, 단순히 실의 형태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탄소섬유는 그 형태와 물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부품의 형태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기지재(matrix)를 만날 때 비로소 복합소재(composite)로서 의미를 갖는다.△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 성형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Carbon Fiber Reinforced Plastic, CFRP)은 탄소섬유를 강화제로 하고 플라스틱을 기지재로 하는 대표적인 탄소섬유 복합재료이다. 탄소섬유는 CFRP에서 높은 강도와 탄성률을 담당하고, 플라스틱은 각 섬유간의 힘을 연결해 부품의 형태를 담당하게 된다. CFRP 성형법에는 탄소섬유와 플라스틱을 일정한 비율로 혼합한 뒤 사용하기 편한 형태의 중간재로 만들어 사용하는 중간재 활용법과 중간재를 사용하지 않고 곧바로 탄소섬유와 플라스틱이 만나면서 복합재 부품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직접성형법으로는 수적층법(hand lay-up), 인발(pultrusion), 필라멘트와인딩(filament winding), 수지주입성형(resin transfer molding) 등의 공법이 있다.이러한 직접 성형법은 별도의 중간재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경제적이긴 하지만, 수지/탄소섬유 비율의 편차, 수지 물성의 한계, 복합한 형상 구현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한계도 있다. 따라서 첨단 복합소재 부품에는 프리프레그(prepreg)라는 중간재를 이용한 성형법이 주로 사용하게 된다.△프리프레그란프리프레그란 Pre-impregnated material의 줄임말로, 수지와 탄소섬유를 미리 일정한 비율로 함침시켜 놓은 시트 형태의 탄소섬유복합소재용 중간재를 말한다. 프리프레그를 사용하면 수지와 탄소섬유비율을 정밀하게 조절 할 수 있으며, 직접성형법을 적용하는 것보다 성형물의 섬유 체적비를 높일 수 있어 신뢰성이 높은 고품질 복합재 부품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시트 형태의 프리프레그를 필요한 부분에 원하는 섬유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재단하여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프리프레그 수지의 종류프리프레그에는 열경화성과 열가소성 수지가 모두 사용될 수 있지만, 현재까지는 대부분 에폭시 수지와 같은 열경화성 수지를 사용하고 있다. 열경화성 수지는 한 번 열을 가하여 성형하면 경화가 이뤄지며, 일단 성형된 프리프레그는 다시 열을 가하여도 녹거나 재성형이 되지 않는 수지를 말한다. 열경화성 수지 프리프레그는 제조가 용이하고, 물성이 우수하며, 다양한 성형공법이 알려져 있어 대부분의 탄소섬유 복합소재에 주로 적용된다. 반면 성형시간이 길어(보통 1시간 이상) 대량생산에는 불리하다. 최근에는 성형시간을 대폭 줄이고(1분 내외) 재성형/재활용이 가능한 열가소성 수지가 적용된 탄소섬유 프리프레그가 등장하였으며, 자동차와 전기전자 외장 부품용도 적용을 위해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국내 산업동향국내에서는 SK케미칼, 한국카본, TB카본 등의 업체에서 에폭시 수지를 기지재로 한 탄소섬유 프리프레그를 상업 생산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낚싯대, 골프채, 자전거 부품 등에 사용되는 스포츠레져용 프리프레그가 주였으나, 최근에는 산업용 내열 프리프레그, 자동차용 고강도 프리프레그, CNT가 첨가된 기능성 프리프레그 등의 개발이 완료되어 상업 생산 중에 있다. 이들 회사에서는 일방향 탄소섬유 프리프레그와 직물형 탄소섬유 프리프레그를 생산하고 있으며, 상당량의 프리프레그를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수출하고 있다. 또한 최근 SK케미칼, LG하우시스, 한화 L&C 등에서는 대량생산에 적합한 열가소성 수지 프리프레그를 개발하여 자동차, 전기 전자 용도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업체의 항공용 소재 인증 부재로 항공용 프리프레그는 전량 Hexcel, Cytec, Toray 등과 같은 외국 업체에서 수입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항공우주 시장의 성장 및 방위산업 소재 국산화 필요성이 대두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탄소섬유와 마찬가지로 항공용 프리프레그에 대한 국내 업체의 항공 소재 인증 및 품질 관리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민간 기업의 의지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도 시급한 실정이다.△프리프레그 성형탄소섬유 프리프레그를 이용한 복합소재는 스포츠 용품, 자동차 부품에서부터 항공기,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되고 있다. 프리프레그를 이용한 첨단 부품을 만드는 성형 공정은 재단 공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적층의 형태는 성형공법에 따라 다르며 낚싯대와 같은 봉형 구조물은 멘드렐이라 불리는 쇠 막대기에 말아서(rolling) 적층하며, 자동차 외판과 같은 판상 구조물은 몰드 표면에 프리프레그를 한 층씩 붙이며 적층하게 된다. 적층된 프리프레그는 열과 압력에 의한 경화 공정을 거쳐 부품으로 탄생하는데, 성형 공정은 열과 압력을 주는 방식에 따라 오토클레이브 성형, 진공백 성형, 시트 롤링공정, 프레스 성형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최첨단 부품을 만드는 공정이지만 여전히 수작업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일부 부품들에 대해서는 대량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앞으로의 과제최근 몇 년간 탄소섬유 복합소재에 대한 국내 기업의 관심이 부쩍 늘었으며, 이에 따른 결실로 핵심 소재 중 하나인 탄소섬유 국산화에 대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탄소섬유 프리프레그 생산량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일부 품목은 내수는 물론 동북아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얻고 있다. 그러나 프리프레그의 고품위화 및 항공용 소재 인증 부재로 항공용, 방산용 프리프레그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프리프레그는 탄소섬유와 첨단복합소재를 이어주는 핵심 소재이다. 고기능성 프리프레그 수지 개발과 항공용/방산용 프리프레그 생산 설비 확보 및 인증 체계를 확립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또한 부품성형 자동화, 표준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탄소섬유에서 고품위 복합소재 부품에 이르는 가치체계(value chain)의 국산화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 기획
  • 이성원
  • 2014.02.05 23:02

[(6) 전남 장흥 용반마을 농민군 후손들] 한 마을 15명 처형된 날, 합동제례로 넋 기리다

△이사경 접주와 용반마을동학농민혁명은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전라남도 장흥에서도 매우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이방언 대접주의 지휘 아래 이인환, 이사경 등의 접주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이사경 접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장흥 부산면 용반마을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사경은 1894년 6월경 용반마을 근처에 있는 자라번지라는 곳에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이 집강소는 장흥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 것으로 <일사>(장흥 유생 박기현 저) 에 따르면 장흥군 부산면 자라번지에서 장흥 동학도들이 대회를 열고 농민군이 죄있는 사람을 들을 잡아들여 징치하고 있으며, 26일에는 강진 병영의 우후(虞侯)를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400냥을 징발하기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사경의 부친 이호인은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동생 호의, 호신까지 입도시켜 활동하였으며, 몸이 아파 죽게 되자 아들 이사경에게 접주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호인은 실질적으로 이 지역 동학교도들을 관리한 선두주자로서 생을 다하게 되자 주변의 교도들과 상의하여 아들인 이사경에게 접주의 지위를 대물림한 것이다. 이후 이사경은 용반리 농민군을 이끌고 12월 4일 벽사전투, 12월 5일 장녕성 전투, 12월 7일 강진전투, 12월 10일 강진병영전투 등에 참여하였으며 12월 15일 장흥 석대 전투, 12월 17일 옥산전투 등에 참여하였다가 이후 용반리로 피신하여 생가 근처의 기역산에 은신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돌아가며 이사경에게 음식을 주면서 보호하였으나 기역산 너머 유치대리에 사는 모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1895년 1월 벽사역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사경 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는 증조부 이사경 접주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인품 또한 넉넉하여 따르는 사람들이 그를 접주로 추대하였다고 어릴 적 동네 어른들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다. △농민군은 처형되고 마을은 전소용반리는 장흥지역 동학농민군 활동의 거점으로서 인천이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있어 마을사람 대부분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이렇게 마을 전체가 참여하자 이에 대한 토벌도 매우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체포된 용반리 동학농민군들은 장흥 원도리 벽사역에서 뒤로 손을 묶인 뒤 쌓아올린 짚단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화형으로 처형되었다. 처형된 시신은 겨울 날씨의 혹독한 추위에 꽁꽁 얼어 방치 되어 그 참상이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시신을 찾았으나 얼음덩이처럼 굳어 있어, 그 아내와 이웃 아낙들이 한 사람은 머리 부분을 한 사람은 발 부분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용반마을 출신 동학농민군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는 젊은 시절 떡 방앗간을 하면서 조부와 같은 제삿날에 동네 부인네들이 갑오 동학 때 돌아가신 어른들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떡을 맞춰간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조모 안봉문이 조부 이세근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 왼쪽 속 섶 가슴 쪽을 가위로 잘라 두었었는데, 그 자국을 보고 화형을 당한 시신들 속에서 조모가 조부의 시신을 찾아 왔다고 한다.고 하여 그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날 무렵 농민군 토벌대는 이 마을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당시 300여 가구가 있었는데, 이중 3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불타지 않은 3가구는 빈소가 설치되어 있던 어떤 집의 아래채, 집을 막 지어 지붕만 덮어 놓은 집으로 지붕만 타고 집채는 타지 않은 집, 마을 뒤편으로 멀리 떨어진 배밭 골에 있어 너무 허술하여 그냥 둔 집 뿐이라고 한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용반마을과 용반마을 사람들이 치뤄야 할 댓가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이후 용반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족보에 사망한 날과 다르게 기록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후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초와 핍박을 당하게 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 용반마을 앞 들판은 참 넓고 넓다. 어떻게 이렇게 넓은 들이 있을까 싶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넓은 들판에서 열심히 일하고 여기서 수확한 곡식들로 충분히 살아가고도 남았다. 마을은 결속이 잘되었다. 화합도 잘 되었다. 300가구가 넘는 마을은 평화로웠다. 그런데 관리들은 그 넓은 들판에서 수확한 곡식을 약탈해갔다. 결국 이 마을 전체가 이사경 접주를 중심으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생존의 문제였다. 누군가 그들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농민군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마을은 불태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끝나고 120년이 지난 오늘 장흥 용반마을은 여전히 풍요롭고 한가롭다. 120년 전의 불태워진 흔적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의 역사는 후손들의 몸과 마음으로 이어져 면면히 흘러오고 있다. △유족회 주관 매년 합동제례2014년 1월 24일 오후 2시,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용반리에서 합동제례가 있었다. 합동제례를 지내는 이유는 이 마을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이 모두 1895년 1월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례는 장흥동학농민혁명유족회에서 주관하여 진행되었다. 제례의 준비는 이사경접주의 증손자 이정태씨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이세근의 손자 이연기씨가 맡았다. 이들은 아직까지 이 마을에 남아있는 농민군의 후손들이다. 이 제례에 위패가 모셔진 동학농민군은 장흥 용반 접주 이사경을 비롯하여 이호인, 백인명, 최진문, 최승문, 이원찬, 최창업, 이원종, 이호의, 이세근, 이회근, 이호신, 이순근, 이수공, 이몽근 등 15명에 달한다. 이러한 모습은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120년이 지난 지금에 까지 후손들이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동학농민군을 잊지 않고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제례를 지내고 그것을 이어간다는 것은 후손들이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 후손들에게 계속 물려주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지난 시점에 우리는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다. 장흥군 용반리의 동학농민군의 후손들처럼 동학농민군의 처절한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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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5 23:02

29. 장수초 - 사계절 야생화 활짝 '공원 같은 혁신학교' 정착

해발 400m 이상 고원지대에 위치한 장수군은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항상 맑은 물이 흐른다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을 타고 넘실대는 이곳은 예사로운 땅일 리 없다. 최근 이곳에서 건강한 부농의 가능성을 알아본 군민들이 귀촌하면서 한 때 학생수 급감에 고심하던 장수초등학교(교장 한창수)는 한 시름 덜었다. 교장교사들의 합심으로 2년 차에 접어든 혁신학교도 학생수 증가에 힘을 보태고 있다.△최근 3년간 학생수 증가장수초는 올해 개교 102주년을 맞았다. 장수서덕산초가 통폐합된 장수초는 시설로만 보면 전주지역 어느 학교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2006년 교육부의 학교모형정책학교 지정을 계기로 디지털도서관, 골프연습장, 다목적 운동장, 영어카페, 연못까지 갖췄다. 2009년 책 3000권과 함께 교내에 설치된 학교마을도서관은 방학에도 학교를 한산하지 않도록 만드는 문화사랑방이 됐다. 방학을 맞아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이곳 도서관을 애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프라에 귀촌 인구의 증가로 최근 3년 간 장수초 학생수는 증가세다. 한창수 교장은 당분간 학생수가 줄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혁신학교 여파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봤다.최근 장수초의 새로운 명물은 사계절 피고 지는 야생화다. 휴대폰 카메라로 키 낮은 야생화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하나 하나 소중한 모습들을 기록해온 한창수 교장은 봄엔 돌단풍매발톱, 여름엔 섬초롱벌개미취자주달개비하늘나리, 가을엔 곰꼬리풀백공작, 겨울엔 복수초 등을 술술 꿰며 가꿔 왔다. 한 교장은 사람이 겨울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겨울꽃눈을 잘라 보면 옷을 입고 있다. 봄꽃은 봄을 맞아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그 전해 여름과 가을에 이미 꽃을 만들어놓고 겨울을 날 뿐이라고 귀띔했다. △분야별 졸업생 두각장수초를 빛내는 건 승승장구해온 졸업생 면면일 것이다. 장수초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인맥을 자랑한다. 일단 정계 쪽으론 문화관광위원장을 역임했던 고(故) 최성석 전 국회의원(32회)을 필두로 유기홍 장수군의회 의장(46회), 박용근 전 도의원(61회), 장영수 도의원(66회) 등이 눈에 띈다. 2003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멕시코 칸쿤에서 쌀 개방에 반대하며 할복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고(故) 이경해 전 도의원(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회장47회)도 이곳 출신이다.행정 쪽은 핵심 인물들이 더 촘촘하게 포진되어 있다. 이경옥 안전행정부 제2차관(59회)이 대표적이다. 또 엄봉이 전 장수군수(14회)와 최중엽 전 익산시청 부시장(25회), 빈영언 전 중소기업청 전북지방청장(49회), 전신기 전 공정거래위원회 국장(50회), 신용태 완주군청 부군수(52회) 등을 빼놓을 수 없다.군 쪽은 정경모 전 해군소장(27회), 이종호 전 육군대령(29회) 등이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이영석 전 전북도시가스 사장(40회), 최판옥 전 현대중공업 상무이사(47회), 김종구 전 삼성전기 부사장(49회), 이재현 롯데로지스틱스 대표이사(53회)가 재계의 리더로 활동했다. 또 서규석 전 한국문화방송 전무이사(29회), 고(故)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33회), 이규형 전 국기원 원장(47회), 전영천 전 유도연맹 국제심판(60회), 김종연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62회)이 문화예술체육계 인맥 지도를 완성한다. 특히 이규형 전 원장은 국가대표태권도시범단 단장, 국기원 태권도시범단 감독, 계명대 석좌교수로 활동했다.△교장교사학부모 합심 혁신학교 정착 장수초 혁신학교의 성공은 교장교사들이 한마음으로 뭉친 데 있다. 올해 전근 예정인 교사 4명이 잔류한 것도 혁신학교 안착에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업무 과중을 줄이기 위해 전시성 행사를 줄이는 대신 수업 혁신, 교원 역량 강화에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수석교사와 함께하는 과목별 수업공개는 학생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인성 강화 교육은 명상 수업 시도로도 이어졌다. 10분도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교사들도 학생들이 차분해지면서 집중력이 강화됐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장수초 혁신학교 정착에는 지역사회의 네트워크도 주효했다. 아버지 14명으로 구성된 모임이 진행한 1박2일 캠프(7월), 가족 문학 기행(10월)과 가족 학예발표회(11월) 등을 비롯해 지역의 박물관미술관 등과 연계한 체험 강화로 교사와 학생, 학부모가 서로 성장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4.02.04 23:02

지난달 문 연 전북광역치매센터 서만욱 센터장

우리사회는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치매 환자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2012년 광역자치단체별 치매환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2년 말을 기준으로 전북지역 치매환자 수는 3만861명이다. 이는 전국 16개 시·도 가운데 8번째로 많은 숫자다.치매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치매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해 조기 발견 및 치료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또한 ‘고령화에 따른 국가 재앙은 암보다 더 무섭다는 치매에서 비롯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전북의 노인 인구는 전남과 경북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많다.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치매에 대해 예방과 치료방법 연구 등 치매사업을 총괄하는 전북광역치매센터가 지난달 23일 전북대병원에서 개소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이에 본보는 전북광역치매센터 서만욱 센터장을 만나 전북광역치매센터 지정의 의의와 치매 환자의 실태 및 예방 등에 대해 들어봤다.-전북대병원에 ‘전북광역치매센터’가 문을 열었습니다. 전북광역치매센터 지정의 의의와 역할은 무엇입니까. “작년 7월, 보건복지부에서 국가치매관리종합계획을 시행함에 따라 전국 병원을 대상으로 공모 사업을 실시한 결과, 전북대병원이 시설과 인력, 연구 등 노인치매 분야에서 전문성을 높게 평가 받아 전북광역치매센터로 지정됐습니다. 앞으로 전북도내 치매사업 관리를 총괄하며 치매예방과 치료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예정입니다.”-전북광역치매센터에서 앞으로 진행하는 사업과 연구 활동은.“전북광역치매센터에서는 앞으로 ‘치매 걱정 없고 노년이 건강한 전북’을 비전으로 크게 보면 치매예방, 조기발견, 치료 및 재활에 대한 통합적 관리를 우선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전문성강화를 위한 맞춤형교육사업, 대상별 시범운영을 통한 체계적 프로그램 개발보급, 치매관리서비스망 구축 및 유기적 연계체계 강화, 치매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통한 인식개선 홍보사업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센터는 오는 2016년까지 3년간 운영됩니다. 운영 기간이 끝난 뒤에는 어떻게 되나요.“치매관리법이 2012년 2월 시행됐고, 이에 따라 국가치매관리종합계획을 3년마다 수립해야하기 때문에 3년 마다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치매사업은 지속사업으로서 더 활발히 추진될 것으로 보여집니다.”-전북은 전남과 경북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노인인구가 많은 지역입니다. 이로 인해 전북의 치매환자도 해마다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전북의 치매환자 실태는.“지난해 12월 말기준 전라북도 내 65세 이상 인구는 약 31만2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합니다. 2012년 보건복지부 치매유병률 조사에 따르면, 65세이상 인구의 9.18%가 치매에 이환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추어보면 전라북도에는 약 2만2000여명의 치매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향후 노인인구 증가로 치매 환자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지난 2012년 기준 전북지역의 치매환자 수가 전국 16개 시·도 중 8번째로 많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치매 예방 및 조기 발견·치료 등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무엇보다도 치매는 습관병이기 때문에 예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0대에도 치매가 발병할 수 있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습관을 기르고 치매 의심증상이 있을 경우 바로 검사해서 조기에 치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치매예방에 있어서는 ‘생각 바꾸기’가 중요합니다.생각 바꾸기에서 ‘생’은 ‘생각을 젊게 하자’, ‘각’은 ‘각성하고 금주·금연하자’, ‘바’는 ‘바른 자세로 활기차게 걷자’, ‘꾸’는 ‘꾸밈없는 뇌 건강 식단을 준비하자’, ‘기’는 ‘기분 좋게 이웃을 위해 봉사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그리고 치매로 발전할 수 있는 경도인지장애환자의 경우 초기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현재 전북에는 34개 협약병원(만 60세 이상)에서 치매무료검진이 가능합니다.”-지난 2012년 치매관리센터에서 전북도민들을 상대로 한 ‘치매 지식 및 태도 조사’ 결과, 치매에 대한 도민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치매에 대한 인식도를 높이기 위해 센터에서 구성할 수 있는 치매 인식개선 교육이나 방안 등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다양한 사업 중에서도 올해에는 교육홍보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 할 예정입니다. 원내외 도민강좌, 치매학술 심포지엄, 치매진료전문화교육, 가족교육, 보건소 치매사업 담당자 워크숍, 치매특별등급 서비스 제공인력 교육 등 도민을 위한 차별화된 맞춤형 홍보, 교육을 통해 치매관련 정보제공으로 도민 인식개선에 이바지 할 계획입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치매는 환자보다 보호자가 더 힘든 병입니다. ‘요즘 내가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 거린다’ 등 걱정이 되신다면 먼저 가까운 보건소 및 신경·정신과 병·의원에서 치매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조기에 발견되는 치매 중 15% 이상은 완치가 가능하며, 비록 치료가 되지 않는 치매일지라도 약물이나 인지자극 치료 등을 통해 진행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서만욱 센터장은 국내 첫 보톡스클리닉, 노인신경학 명의 평가1982년 전북대 의과대학을 졸업한 서만욱 전북광역치매센터장은 1986년 서울대병원에서 신경과 전공의 과정 및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전북대 대학원 의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서 센터장은 미국 앨러바마대학병원 임상신경생리연구소 연수 과정을 거쳐 미국 캔자스의과대학 파킨슨병-치매연구소 객원교수로 활약했다.파킨슨병 등 노인신경학의 ‘명의(名醫)’로 불리는 그는 통증치료에 보톡스클리닉을 도입해 의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서 센터장은 국내 최초로 1996년 전북대병원에 보톡스클리닉을 개설, 안검경련, 편측안면경련, 목 비뚤어짐, 뇌졸중후편측강직, 하지경련 등에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진통 효과의 탁월함이 밝혀져 두통치료에도 성공적으로 쓰이고 있다. 또 그는 ‘환자의 말을 가장 잘 들어 주는 의사’로 유명하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환자들은 ‘서 센터장과 상담을 하고 나면 금세 병세가 호전된 것처럼 몸이 가벼워진다’고 말한다. 복잡한 수술이나 약물치료 없이 대화만으로 병이 반쯤은 나은 셈이다. 그래서인지 서 센터장에게 진료를 받은 환자들은 서 센터장은 ‘이 시대 최고의 명의 중 명의’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신경과 과장 겸 주임교수와 전북지역 노인보건의료센터장, 대한 파킨슨병·이상운동질환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아시아오세아니안 임상신경생리학회 우수논문상과 대한신경과학회 우수논문상 등을 수상했다. 국제학술대회에 35편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 기획
  • 강정원
  • 2014.02.03 23:02

[(5) 우금치 전투서 부상 최원국과 후손들] 총상 딛고 무기 만들며 새로운 투쟁 꿈꾼 동학 투사

1800년대 중반 조선왕조의 병란과 농민항쟁은 군현이나 도의 경계를 넘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1984년 11월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전국으로 확대됐다. 함경도를 제외하고 거의 전국에 걸쳐 전개됐다.그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이해 10월, 전봉준 장군은 재봉기를 결정했다.이에 충청도와 전라도 인접지역의 농민군은 완주 삼례에 집결했다. 동학 교주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려 동학조직을 재무장토록 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그해 11월,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강원도에서 모인 북접농민군은 손병희 통령의 지휘 아래 충남 논산으로 행군해서 남접농민군과 합류했다. 동학사 기록과 관군보고서에는 갑오년 논산에서 공주까지 산과 들에 사람이 꽉 들어찼다거나 벌떼처럼 밀물이 넘치는 것처럼 밀려왔다고 적었다.논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의 남접과 손병희 통령의 북접이 합세한 세력이었다. 남접은 노성과 효포 쪽으로 공격했고, 북접은 이인에서 봉황산과 하고개를 공격했다. 그러나 화력의 열세로 일방적으로 패배를 당했다. 전봉준 장군은 공초에서 2차 접전 후 1만여 군병을 점고한즉 불과 3000여명이요, 또 두 차례 더 싸운 뒤 점고한즉 500여명이었다고 했다.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총탄에 스러져갔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당시 공주 우금치 전투에 참가한 익산 왕궁 출신 최원국(崔元局)은 이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구사일생으로 전장을 떠나 귀향해 후일을 기약했다.△우금치 전투 참전군 대패최원국은 1863년 생으로 왕궁면 온수리에서 터를 잡고 살아왔다.농업에 종사했던 그가 동학에 입도한 계기는 확실치 않다. 왕궁 지역에서는 동학혁명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다만 왕궁 지역은 1894년 9월 재봉기의 집결지인 삼례와 가까워,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특히 후손들은 그가 혁명 초기부터 활동해왔다는 증언을 하고 있어, 1차 봉기 이전부터 혁명에 깊숙히 관여해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최원국의 장손 최병관씨(79)는 모친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당시 백산이며, 정읍이며 인근지역으로 날듯이 돌아다니셨다고 들었다고 말했다.하지만 최원국의 주요 행적은 우금치 전투 때부터 두드러진다.갑오년 11월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참전한 일본군은 1개 중대씩 3대로 나뉘어 동로군은 충주에서 강원도로 들어가 순회했고, 중로군은 청주로 직행해서 옥천 보은 금산 일대로 남하했다. 서로군은 천안 홍주 공주로 내려갔다. 동학농민군은 수많은 희생자를 냈지만 완강히 저항했다. 전봉준 장군은 북상의 요지인 공주 점거를 당면 목표로 정했다. 이때 우금치전투가 벌어졌다. 우금치는 최대 규모의 공격이 감행된 주전장이었다. 공주 이인과 효포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그와 함께 11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홍주와 문의 등지에서 6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모든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대패했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군의 상경은 좌절됐다.당시 전투에서 최원국은 농민군의 일원으로 참전, 진격하다가 다리에 총탄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새벽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밑에 깔려있었던 그는 심한 갈증을 느낀 나머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봤을때 전날까지만 해도 동고동락했던 전우들의 시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그는 인근 농가로 피신, 간단한 응급처치를 끝낸 뒤 고향으로 쓸쓸히 내려왔다. 그의 가슴 속에는 다시 한번 들고 일어나 일본군을 응징하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화력 열세 절감, 신무기 개발 전념최원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인 익산 왕궁으로 귀향했다.이때부터 그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을 극복할 수 있는 신무기 개발 및 화약 제조에 투신했다.그는 우선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함께 자신의 초가집 처마의 여러 해 동안 묵은 썩은 새(초가집의 지붕을 엮은 이엉) 물과 소변으로 화약을 만들었다.또, 남몰래 화승총을 쏘는 연습도 하며 후일을 기약했다.당시 그는 총구에 화약을 재고 콩밭 일곱 두렁을 달려가면서 총을 쏠 수 있어야 1등 사수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하지만 일본군의 농민군 색출 작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삶을 살았다.이에 그는 장남 한수와 차남 두수를 일가 친척들에게 양자로 보내고, 막내 덕수와 부인만 데리고 처가로 떠났다. 이때부터 그의 논이며 밭이 친일파 지주들에게로 넘어가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에게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짚신을 삼아가며 어렵게 번 돈의 대부분이 여기에 쓰였다.손자 최병관씨가 기억하고 있는 최원국은 이렇다.3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렴풋이 할아버지께서 골방에 앉아 짚신을 삼고 계신 모습이 떠올라. 어린나이에도 깊게 패인 할아버지의 주름과 불편한 다리가 인상 깊었어.그는 이후에도 계속 독립투사 및 동학 도인들과 꾸준히 접촉해오다, 광복을 맞이하기 전인 1936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그의 부당한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쟁과 반봉건 정신은 후대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동학의 정신 계승유지하는 자랑스러운 후손 되고파최병관씨는 한 번도 할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가족들과 후손들이 고초를 겪긴 했지만, 그 모두가 다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그러면서도 뒤늦게서야 혁명에 투신했던 농민군들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쉽다면서 이제라도 동학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는 할아버지대의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우리나라가 좀 더 강한 힘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했다.외세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스러져간 수많은 농민군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되기 때문.지금의 잘사는 대한민국은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돼. 모두가 힘을 모아 더 강대하고, 잘사는 한국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해.

  • 기획
  • 최명국
  • 2014.01.29 23:02

28. 김제 금구초 - '융합 인재' 양성 중점, 공교육 활성화 모델 '안착'

김제 금구초등학교(교장 장충식)는 전주지역 초등학교 못지 않은 경쟁력을 갖췄다. 초등학교마저도 전주로 진학하길 원하는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학력 신장으로 이어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금구초는 최신식 시설을 바탕으로 특성화된 창의교육 등을 활성화하면서 공교육 활성화 모델로 안착 중이다. 전주에서 금구초로 역전학을 선택할 만큼 금구초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졌다. 총동문회는 물론 지역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장학회가 생겨나 학생들에게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따뜻한 나눔의 모델을 잇는 것도 빛나는 전통이다.△장태수 선생 금구초 기틀 마련금구초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장태수 선생(1841~1910)이다. 장 선생은 조선시대 외교사절단으로 활동했을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으나 1907년 고종황제의 순종 이후 김제 금구로 낙향했다. 인재 양성에 뜻을 품은 장 선생은 1907년 사재를 털어 신명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선생은 단식 20일 만에 요절했고,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명륜당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후 신명학교와 명륜당의 후학양성 의지는 1912년 금구공립보통학교의 개교로 이어졌다. 금구초는 농어촌 학생의 급감으로 쇠락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2005년 금구초와 금구중의 통합 운영으로 학력인성 신장에 주안점을 두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장충식 교장은 금구초가 전국의 과학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게 된 데에는 전북교육청의 발명교육 연구학교(2010~2012), 2012년 교육부의 창의경영학교 미래형과학교실 운영학교(2012~2015)에 힘입은 바 크다고 설명했다. 최근 금구초의 핵심 열쇳말은 융합인재교육(STEAMScience Technolo gy Engineering Art Mathematics)이다. 각각의 현상을 유기적으로 연결된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하고, 여러 사건을 조합해 해석하는 사고능력이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초교 12학년 교과과정에 통합교과를 신설한 것도 이 일환이다. 이애자 금구초 교감은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 즐거운 생활을 하나로 묶은 통합교과는 하나의 주제로 다방면의 교과목을 연계로 확장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금학완산장학회 등 나눔의 모델 활성화학교에 필요한 일 없습니까. 꼭 도와주고 싶어서요.지난 27일 전화를 받은 장충식 교장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다른 학교는 이런 장학금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른다는데요.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39회 졸업생 온영복씨는 고향에 있는 금구초에 곧잘 전화해 안부를 묻곤 한다. 학교 행사시설비 명목으로 100~500만원을 선뜻 내놓는 온정에 장 교장은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고 했다. 평생 구멍가게를 운영해온 김학보씨는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학생들 뒷바라지 해주고 싶다며 1억원을 쾌척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중학교 진학이 좌절된 것은 평생 한(恨)으로 남았다. 1978년부터 이어온 김씨의 통 큰 기부는 2002년 금학장학회 설립으로 체계화됐다. 박기남 신포우리만두 설립자도 장학금 기탁을 유언으로 남겼다. 김제가 고향인 박기남 설립자의 딸인 박혜란 신포우리만두 대표는 2012년 완산장학회를 설립, 매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2012년 금구초 총동문회가 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거둬들인 성금 5000만원도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대물림되고 있다. 총동문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종준 전주병원장(48회)은 우리가 받은 것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동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장성원 전 국회의원 등 동문 배출미온적이던 총동문회 활동은 100주년 기념사업을 계기로 결집됐다. 현재 김제시의원으로 활동하는 온주현 100년추진위원장(50회)을 주축으로 100주년 기념비, 100주년 기념관 건립, 금구초 100년사 발간까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동문들의 활약에 기인한 바가 크다. 먼저 2005년 금구초금구중 통합은 장성원 전 국회의원(39회)의 지원이 한 몫 했다. 학교 앞 도로가 뚫리면서 금구중 학생들의 안전이 위협받았던 데다 학생수가 줄게 되면서 금구초와의 통합을 추진했던 것. 장 의원은 당시 국회 예결위 위원장을 맡아 금구중 신축을 위한 예산 확보에 적극 협조했다. 또 김진기 부산성가병원장(39회)과 총동문회장인 김종준 전주병원장(48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호영남 의료계 인맥으로 꼽힌다. 금호미쓰이화학 대표로 지내는 온용현씨(53회)와 김병관 태광건설 회장(61회)은 성공한 선후배 CEO로 평가받는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최초로 보도해 유명세를 떨친 장두원 전 KBS전주방송총국장(40회)과 1986년부터 지난 25년간 국가 질량표준 확립유지를 위한 연구에 주력해 대통령 표창(2011)을 받은 정진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성과확산부장(60회)도 금구초를 거쳤다.

  • 기획
  • 이화정
  • 2014.01.28 23:02

LX대한지적공사 김영표 사장 "전북서 '제2 창사'…국토공간정보 조사·관리 메카 기대"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인 토지수탈 및 토지세 징수를 목적으로 만든 종이지적(地籍)을 계량화된 디지털지적으로 바꿔 역사를 바로잡고 국민의 재산권을 지키기 위한 지적재조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사업의 주체는 LX대한지적공사(사장 김영표)로 37년간의 서울 여의도 시대를 마감하고 지난해 11월25일 공기업 최초로 전북혁신도시에 신사옥 둥지를 틀었다.전북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한 LX대한지적공사의 ‘제1 목표’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져 잘못 사용되고 있는 종이지적의 경계가 전국 토지의 15%에 이른 다는 점을 감안, 전북에서 왜곡된 역사와 진실을 바로 잡아나가겠다는 것이다.종이지적의 디지털지적 전환을 통한 일제 잔재 청산과 지적주권 회복 및 경계 분쟁 해결의 중심에 서있는 김영표 사장을 만나 LX대한지적공사의 향후 업무계획 등을 들어봤다.-전북혁신도시로의 본사 이전 의의와 소감은“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할 12개 기관 가운데 최초로 본사를 옮긴 LX대한지적공사의 새 보금자리인 이곳은 예로부터 터가 좋기로 소문난 곳입니다. 밝은 달빛아래 비단을 펼쳐놓은 듯 한 완사명월(浣紗明月)의 형상에 복거지지(卜居之地), 즉 사람이 살기 좋은 지리, 그리고 경제, 인심, 산수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명당이죠. 아직 정주여건이 다 갖춰지지 못해 불편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차차 직원 가족의 동반 이주도 빨라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특히 상반기 안에 국토교통부와 함께 사명을 ‘한국국토정보공사’로 변경, 전북혁신도시를 21세기 국토정보 발전에 가장 적합한 도시로 만듦으로써 모두가 살고 싶어 하는 최고의 삶터로 가꿔 나가겠습니다.”-현재 LX대한지적공사의 현실을 자체 진단한다면“우리는 지금 거센 위기의 파도에 직면해 있습니다. 장기적 경기침체로 경제 성장 동력도 약화됐고 부동산 경기는 바닥을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 공사의 지표도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5년간의 흑자 행진이 멈춰있으며, 내년 후년의 전망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지요. 먼저 공공기관의 수장으로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소명이 있고 국가와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구체적 성과로 답해야 합니다. 현재 전북에서 제2의 창사를 맞은 우리 공사는 창조경제와 국민행복 실현을 담당하고 있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공사의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이 있다면“먼저 공사의 경영지표를 정상궤도로 올려야 합니다. 건설경기 침체로 공사 수익이 나빠지고 조직의 잠재적 위기요인이 되는 만큼 매출 증대를 위한 비즈니스 모델 발굴, 뼈를 깎는 비용절감 노력 등 실효적 대책을 속히 실천해야 합니다. 일단 결정되면 시간을 끌면 안 됩니다. 각 본사와 본부에서도 현장에 눈과 귀를 집중시키고 개선할 점은 없는지 꼼꼼히 점검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정책수립과 실천에 10의 노력을 기울였다면 그것을 점검하고 평가하는데 90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조직의 패러다임도 창조적으로 개혁할 계획입니다. 세계 최고의 국토공간정보 조사 관리 전문기관으로 발돋움 할 역량 마련에 집중, 국가 공간정보의 허브기관으로서 공간정보 신사업발굴과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매진할 방침입니다. 특히 LX공사는 지적측량을 떠나 생존할 수 없듯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방할 것은 과감히 문을 열 돼, 민간과 차별화 한 공적 역할을 지속, 통일시대에 대비한 북한 지적조사도 꾸준히 준비해 나가겠습니다.”-강조하신 창조경제를 조직문화에 비유한다면“창조경제는 융합적인 사고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발합니다. 칸막이를 과감히 뛰어넘고 기존의 관행을 탈피하는 통합적 사고와 창의적 발상이 필요합니다. 새벽별 보고 출근해 ‘주야장천(晝夜長天)’ 야근하며, 휴가도 못 쓰는 경직된 조직문화로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임직원 모두가 연가의 절반 이상을 의무적으로 사용케 하고 자기개발과 여성인력 활용에 유리한 유연근무제도를 더욱 활성화시켜 직원 모두가 ‘창조적 희망’을 갖고 발전적 미래를 설계하는 강하고 경쟁력 있는 조직을 만들겠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을 꽃 피울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제 역할로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시스템, 능력과 실적 중심의 평가시스템을 고도화하겠습니다. 바꿀 것은 과감하게 바꿔 정부3.0을 선도하는 LX공사로 만들어 가겠습니다.”-재임 기간의 목표와 국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우리 공사는 지적 기반인 국토와 건축물을 3차원 입체화 한 사이버국토라는 국가 정보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공간정보산업은 정보, 아이디어, 기술과 융복합해 고부가가치를 이룰 미래 핵심산업으로 지적 기반의 공간정보에 새로운 철학과 가치, 문화, 예술, 꿈과 미래를 담은 ‘한국형 공간정보’ 모델을 창조하는 것이지요. 여기에 블루오션 시장 개척, 수익 창출 수출전략 마련 등 공사의 수익구조 다변화에 노력할 것입니다. 특히 천년고도이자 문화예술의 도시인 전주에서 세계적 메카로 도약하는 제2의 출발이 될 것으로 확신하며, 지역균형발전과 공간정보산업 진흥을 통한 창조경제를 선도하는 동시에 공간정보산업에 전북의 문화·예술을 융합시킬 수 있는 신사업을 발굴하겠습니다. 우리 지적공사 및 직원 모두는 외부에서 굴러온 돌이 아닌 당당한 전북인 임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특히 도민들의 극진한 환대에 고개 숙여 감사드리며, 전북 가족인 저희를 애정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영표 사장은 일본학자가 만든 틀 깨고 한반도 새 산맥지도 완성우리나라 국토지리 정보분야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신화로 불리는 ‘작은 거인’ 김영표(62) LX대한지적공사 사장은 경남 남해군이 고향으로 해병대 중위 출신이다.경남중과 경남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공과대학 응용수학과(전자계산)를 거쳐 Asian Institute of Technology(AIT)에서 산업공학 및 경영학(공학석사)을 전공했으며, 경원대학교 대학원 도시계획학과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이후 관동대학교 산학협력단 교수, 국토연구원 부원장, 국토연구원 원장, 국토연구원 기획경영본부 본부장, GIS연구센터장, 한국GIS회장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다 지난해 11월 1일 LX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김 사장의 행보 중 가장 특이한 점은 국토연구원 박사로 재직할 당시다. 지난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가 만든 우리나라 14개 산맥체계를 틀을 깬 것이다. 당시 산맥의 기준을 땅 밑 지질로 삼느냐 아니면 땅 위 지형으로 삼느냐는 논쟁이 일었고 김 사장은 인공위성을 이용해 산지의 크기와 높이를 파악하는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토대로 ‘새 산맥지도’를 내놓았다.새 산맥지도에 따르면 그간 교과서에 등장했던 낭림·강남·적유령·묘향·차령·노령산맥 등은 실제 산맥이라고 보기 힘든 ‘유령 산맥’이었다. 산 위의 지형이 낮은 언덕처럼 보이고 여기저기 끊긴 곳도 많아 도저히 산맥으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김 사장이 내놓은 새 산맥지도는 백두대간이라는 한국 전통 개념을 잇는 48개의 크고 작은 산맥이 포함돼 있다. 특히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한반도 산맥 연구에서 비롯된 현행 교과서 산맥 체계를 새롭게 규정했다는 점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 기획
  • 이강모
  • 2014.01.27 23:02

[4. 정읍 (유)대도] 신기술 특허 '사료공장 설비'…전국 동종업계 '신뢰도 1위'

정읍시 하북동 제2산업단지에서 TMR사료배합기 등을 생산하는 (유)대도(대표 권봉주)는 지난 10여년간 성실하게 쌓아온 경험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축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특히 대도에서 납품되는 사료 생산설비 및 TMR 사료 배합기는 전국의 관련 업계에서도 선두권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축산업계의 신뢰를 받고있다.지난 21일 눈이 날리는 대한(大寒) 추위 속에서도 대도 3000㎡ 면적의 공장내부에서는 숙련된 직원들이 작업하는 용접기의 불꽃과 쇳소리가 울려퍼지며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납품 기일에 맞추기 위한 직원들의 손놀림은 여느 대기업 생산공장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교함을 수반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권봉주 대표는 사료 배합기도 대부분 자동화 설비로 구축되기 때문에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고 있다며 공장내부 공정을 보면 단순한 것 같지만 고객들의 눈높이를 맞추면서 만족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고 밝혔다.대도는 전국 30여개의 동종업계에서 매출 규모로만 볼 때는 4위권이지만 인지도와 신뢰도는 1~2위를 달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생산설비 납품 후에도 유지 관리를 지속하면서 고객들의 만족도를 높게 유지하고, 고객들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을 병행한 결과이다.권 대표는 동종업계 및 축산업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의 필요성과 아이디어를 얻는다며 납품하면 차츰 증설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때문에 신기술 개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권 대표는 과거 IMF때 부도를 겪으며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지만 청년시절 엔지니어로서 쇠를 만졌던 현장 경험을 토대로 기술력 확보에 노력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권 대표는 가축사료 포장기 특허출원(2006년), 가축사료절단기특허출원(2007년), 가축사료 압축장치특허출원(2008년), 목초 건조장치 특허출원(2009년)등 그동안 신기술 특허 5건, 실용신안 1건에 최근 신기술 2건의 등록을 앞두고 있다.현재 18명의 직원들이 힘을 합쳐 1일 생산량 100~200여톤 규모의 사료배합기를 생산하며 연매출 50~60억원을 달성했다.생산설비 플랜트는 1~2개월정도, 대규모 시설은 6개월정도 공정기간을 거치는데 소비자가 원하는 시설과 크기로 공장을 만들어준다. 그동안 전국에 40여곳의 축산시설에 납품됐다.2006년 △경남 김해 필코 TMR 제조설비공사 △정읍 단풍미인한우 사료공장 설비공사 △경북 대구 달성 섬유질 사료공장 설비공사 △익산 군산축협 TMF공장 설비공사 2007년 경북 문경축산조합 공장설비 △경기 광주한우조합 사료생산설비공사 △울산 한우회 TMR제조 설비공사 △대구 달성 TMR사료 공장설비 공사, 2009년 △영광 청보리 TMR사료 생산설비공사 △익산 군산축협 TMF공장 추가 생산설비공사 △춘천 철원 축산업협동조합 바이오 사료공장 설비공사 △고창축협 사료공장 설비공사 △정읍 순정축협 사료공장 설비납품, 2010년 △전주김제완주축협 압축포장라인 증설공사 △경북 대구달성 섬유질 사료공장 증설공사 △전남사료 TMF발효 사료공장 설비공사, 2011년 경남 함양축협 TMR 사료공장 건립공사 등이다.지난 2009년에는 품질경영 시스템 인증(ISO 9001:2008/KS Q ISO 9001:2009획득)및 환경 경영시스템 인증(ISO 1400:200 4/ SK Q ISO 14001:2004획득)을 획득하며 생산품질 향상과 지역 경제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북도 지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생산품목은 공장형 사료 플랜트와 농가형 사료 배합기(고정식과 레일식), 농가형 사료 배합기(견인식), TMR압축 포장기, TMR 사료 공장 제조설비 등이다.발효기의 특징은 사료효율을 높여주고 조사료 대체효과가 크다. 변에 냄새가 없고 연변(설사)이 사라지며 소화율이 높아져서 가축이 건강해진다.사료배합기및 발효기 오거는 배합능력이 좋고 배합시간이 빠르다. 오거 파이프및 오거(스크류)칼날이 두껍고 특수강 재질을 사용하며 절단용 칼날이 부착되어 있어 조사료의 많은량 투입에도 무리없이 절단이 가능하다.특허 출원제품 중 가축 사료포장기는 기존의 포장방식 노동력이 최하 2~3인이 필요로 했는데 자동 실링을 사용할 경우 1인만으로 노동력을 줄이수 있어 경제적 효과가 크게 기대된다.가축사료 압축장치도 조사료만의 포장이 가능하고 운임을 줄일수 있어(조사료 25kg포장압축가능) 사료값을 줄일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물론 보관 및 유통기간이 길며 발효효과를 충족한다.● 권봉주 대표 "구인난 속 시장 포화상태, 기술력 있어야 생존 가능"(유)대도를 경영하는 권봉주(52) 대표는 30대 후반에 친구들과 인천에서 창업했었지만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40대 초반에 전북지역 영업현장을 누볐던 경험을 기반으로 현재 정읍공장에서 자리를 잡고 재도약했다.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권대표는 요즘 청년들은 쇠를 만지는 작업을 3D업종으로 생각해 인력난으로 애를 먹고 있다고 밝혔다. 현 공장 정원은 25~30여명이지만 구인난으로 18명이 일하고 있다는 것.권대표는 더불어 사료생산설비 시장이 점차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관련 시장의 장기적인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고 진단하고 기술력과 신뢰도를 확보하는 것만이 소비자를 붙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소비자를 우선적으로 배려하는것이 기업경영 철학이다는 권대표는 단순히 내가 돈을 벌겠다는 것보다 소비자 편에서 생각하고 신뢰를 얻는것이 장기적으로 회사가 살아남는 길이다고 말했다.

  • 기획
  • 임장훈
  • 2014.01.23 23:02

전주출신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중앙대 교수

지난해 11월 29일 이른 저녁, 서울의 국립국악원 우면당 300여석 객석을 가득채운 관객들은 환호했다. 가야금에 판소리를 얹힌, 혹은 판소리에 가야금을 새긴 새로운 병창의 세계. 무대는 치열했으며 객석은 설레였다.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가야금병창으로 들려준 호남가에 신명났던 객석은 판소리 춘향가를 가야금과 아쟁, 북에 얹어낸 입체창과도 같은 새로운 연희형식을 만나 온전히 매료됐다. 가야금 선율은 긴장과 여운의 경계를 넘나들고, 소리의 공력은 깊어 소리가 먼저인지 가야금이 먼저인지 분별하는 일 조차 무의미해졌다. 가야금연주자 김일륜 교수(54, 중앙대)의 스물두 번째 독주회. 농현담성(濃絃淡聲)이란 주제를 붙인 그의 소릿길 두 번째 무대였다. 최옥삼류 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그는 전통을 올곧게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도전을 해온 연주자다. 80년대 중반부터 국악실내악단(어울림)과 가야금삼중주단(서울 새울)을 만들어 국악실내악운동을 펼쳐온 그는 가야금만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국악대중화의 새로운 물꼬를 튼 주역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면서 국악대중화의 지평을 즐거움으로 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전통과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한쪽도 소홀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음악세계로 만들어내는 지치지 않는 열정이 궁금했다.돌아보면 가야금 선율로 연주하는 캐논변주곡에 맞춰 춤을 추는 비보이 광고로 화제가 된 숙명가야금연주단도 그가 만들어낸 최초의 가야금오케스트라다. 연주곡들은 또 어땠는가. 전통가락이 아닌 비틀즈의 팝송이나 비발디의 사계, 탱고음악까지 대중들에게 친숙한 곡들을 가야금으로 연주하고,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춤까지 추는 파격적인 시도에 경계와 비판이 없었을 리 없다. 음악은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변할 수밖에 없어요. 그 시대에 필요한 음악과 양식을 접목시켜 가야금을, 우리음악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대중들이 즐길 수 있게 하는 일을 연주자들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어요. 전통을 흔들거나 깨트리는 일이 아니고, 더 가치 있게 지켜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판과 우려도 두렵지 않죠. 그가 밝게 웃으며 되물었다. 도대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확신에 가득찬 그와의 인터뷰는 그래서 더 즐거웠다. -작년에는 연주회가 유독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말에도 지천명산조축제에 독주회까지 바쁘셨죠. 연주를 많이 하는 편이긴 하지만 지난해는 독주회까지 겹쳐 좀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독주회는 판소리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입혀내다 보니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했어요.-반응이 아주 뜨겁던데요. 이미 2011년 독주회에서도 시도했던 형식 아닌가요. 춘향가 한바탕을 떼어서 가야금에 올려서 불렀습니다. 지난 독주회에서는 사랑가부터 이별가까지 했고, 이번 무대에서는 옥중가부터 마지막부분까지 이었어요. 가야금 뿐 아니라 무대에 선 아쟁연주자와 고수도 함께 했는데 아니리도 주고받고 하다 보니 작은 입체창 무대 형식이 되었습니다. 관객들도 새롭게 접하는 형식이었으니 화제가 되었던 것 같아요.-실내악단 어울림에서도 국악가요를 불렀는데, 소리에 남다른 재능과 애정이 있나봅니다. 어릴 때부터 소리가 좋았어요. 중간에 판소리 배우는 일을 작파했지만, 병창도 그렇고 저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죠. 늘 마음에 두었던 판소리를 2009년부터 시작했는데, 3년 만에 떼었어요.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쳤는데, 기왕에 시작한 일이니 다섯 바탕은 못해도 적벽가는 꼭 하고 싶습니다. 내년 3월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인데, 삼국지부터 읽으려고요.-늘 새로운 것을 향한 열정이 식지 않는 비결이 뭘까요.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 가락을 몸과 마음에 얹고 살아와서 그런 것 아닌가 싶어요. 무엇인가 시작을 하면 온전히 몰두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거기서 다시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되거든요. 일상이 그런 것 같아요.-서울대 국악과 출신들은 대부분 정악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민속악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은데, 그에 비해 그동안 민속악 분야의 작업을 많이 해온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없었나요.우려가 많았지요. 실제로 하고 싶은 일을 접은 적도 많습니다. 그래도 제 음악을 확장시키기 위해 여러 장르를 공부하고 섭렵하는 일을 밀어내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죠. 덕분에 조금은 그런 분야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사실 도제식 교육이 바탕인 국악분야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완고해서 계통을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죠. 그런데도 그 새로운 도전과 시도가 줄기차게 이어졌던 것을 보면 스승으로부터 미움을 안받으셨나봅니다.(웃음)그런 우려가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에 많은 스승들이 힘을 주셨어요. 제가 시도하는 실험적인 일들이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일탈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지점은 오히려 전통의 가치를 제대로 이어가는데 있거든요.-실제 가야금의 전통가락을 얻기 위해 많은 공력을 쏟으셨죠. 산조만 해도 여러 가야금명인들의 산조를 다 섭렵했는데, 한 연주자가 여러 유파를 연주하는 일은 굉장한 공력이 필요한 일 아닌가요. 가야금연주자로서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술은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산조는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분야거든요. 그래서 한 유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데도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지만 여러 유파의 산조를 섭렵해야 비로소 제 음악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일전에 교수님의 산조연주에 어떤 류의 산조를 연주하더라도 원곡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극찬을 들으면 연주자로서 이제 됐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황송하죠.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렇다고 생각해 안주하고 싶다거나 연습을 게을리 한 적은 없습니다. 연주자는 평생을 연습해도 늘 부족하거든요. -김일륜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기 시작한 것은 역시 국악실내악단 어울림이겠죠. 국악은 고루하고 재미없다는 인식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슬기둥과 어울림이 국악실내악단으로 창단하면서 우리악기와 연주를 대중화하는 일에 나섰어요. 국악실내악운동의 물꼬가 트였지요. 우선 대중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음악이 친숙해져야 하니 국악가요도 만들어 연주했는데, 노래를 제가 불렀어요. 그때부터 부른 가요가 제법 되어서 그 곡만 모아 음반으로 낼까 계획하고 있습니다.-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도 이름을 알렸죠. 연주 실력도 빼어난 세 명 가야금주자들이 모인 단체여서 더 그랬고요. 90년에 창단했는데 가야금중주단으로는 그것도 처음이었죠. 새로운 울림이라는 뜻을 담아 서울 새울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91년에 창단공연을 비롯해 그 이후에도 박범훈 백대웅 이병훈 선생님 같은 작곡자들이 창작곡을 많이 주셨어요. 국악 대중화에 기여했다면 이런 뜻과 열정이 모여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실제 실내악 운동은 국악대중화의 물꼬를 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교수님 개인적으로도 동력이 되었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실내악 운동은 제게 굉장한 에너지가 되었어요. 덕분에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무연고도 없는 숙명여대 대학원에서 가야금만으로 대학원을 만들어 저를 불렀거든요. 한 학년에 10명씩 40명 학생들과 만나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가야금오케스트라를 생각해냈어요. 처음엔 연주할 수 있는 곡이 없어 가야금 파트를 나누고 기존 관현악단에서 연주하는 곡들을 다시 구성해서 나누어 연습했죠. 그러면서 비틀즈의 팝음악, 비발디의 클래식 작품 등 대중들이 친숙한 곡들을 편곡해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요즈음 연주단체들이 쓰는 비틀즈 메들리도 저희가 처음 얻어 연주한 것이에요. -국악실내악도 그렇고 전통 악기인 가야금으로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었죠. 우리 가야금이 5음계라는 것, 한계가 분명하거든요. 중국 일본 악기는 음역이 넓어 우리 악기보다는 한결 나은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어요. 86년도엔가 대만에서 서울대로 유학 온 쟁 연주자가 있었는데, 그를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따로 초대해 쟁을 배웠죠. 그러면서 숫자보를 비롯해 중국의 음악을 폭넓게 접하게 되었는데, 우리 가야금이 어떻게 개량되어야하는지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답을 찾기 시작했어요.-음계를 넓히는 작업이 가장 우선이었겠군요.그렇죠. 정악청부터 민요청까지. 물론 그 안에는 산조청이 들어가죠. 그것이 다 호환될 수 있는 음역이 이 플렛부터 에이 플렛까지인데, 25현을 7음계로 쌓아보니까 되더라고요. 그때가 90년대였는데, 마침 박범훈교수님도 그런 부분을 많이 고민해서 22현으로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었거든요. 95년에 제가 연주했던 새산조 22현이 그 곡입니다. 국내 초연이었죠. 그래도 저음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25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악기장에게 부탁해서 25현 가야금을 만들었어요. 줄 간격까지 다 정해주면서 제작했는데, 그동안 안고 있던 문제점이 어느 정도 해결된 거예요. 그렇게 제작한 가야금이 지금은 가야금 연주자들의 필수적인 악기가 되었죠.-25현 가야금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군요. 만들어진 배경도 흥미롭고요. 악기장 입장에서는 전통악기를 만드는 일과 다르니 마뜩치 않았겠습니다.악기장 선생님은 처음에 25현을 의뢰하니까 나는 12현만 만들지 그런 악기는 안 만든다고 단호한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요가 많아지니까 하루는 내가 25현 만들어도 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발 만드시고 연주자들에게 싸게만 돌려주세요했지요.-의미 있는 일을 하셨군요. 25현은 12현 전통가야금 연주가 지닌 깊은 맛과는 또 다르지만 대중들이 가야금과 친숙해지는 데는 좋은 통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변화 있고 다양한 곡을 연주하거나 서양악기와 협주는 25현이어야 하니까요. 12현 전통악기로는 그런 변화를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죠.-전통악기 연주자가 악기까지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에 비판은 없었습니까. 왜 없었겠어요. 죄인처럼 만들었죠. 야단도 들었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연주자로서 좋은 연주에 필요한 것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야금의 음역 확대가 꼭 필요했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요.-다시 판소리를 하게 된 이야기를 해보죠. 가야금으로는 다 이루어놓으셔서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셨습니까.사실 판소리는 누구나 시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판소리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작 해보니 어렵긴 하지만 춘향가 한바탕을 떼고 나니 그래도 아마추어 소리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즐기더라도 제대로 즐기고 싶은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판소리가 가야금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인데, 제 음악을 넓혀주는 통로가 되죠.-소리를 하거나 아쟁을 하거나 모두 교수님의 작업 정점에는 가야금이 있고, 또 그 중심은 김일륜의 음악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뒤돌아보니 열심히는 했더군요. 안정된 직장을 갖고나서도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왔던 것 같은데, 그런 길이 후배 제자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고 존중 받을 수 있으면 좋겠죠.-늘 새로운 것을 공부하게 하고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대단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 음악 연주자로서 어떻게 하면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을까 늘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과 태도가 일상이 된 것 같아요. 그것이 도전하게 하고 실험하게 하는, 이 시대의 음악을 찾아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인터뷰 말미, 그에게 우리 음악은 어떤 것이냐고 물었다.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우리 음악은 제게 일상의 공기예요. 그러니 이 길을 열심히 갈 수 밖에 없는데,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전에 국악이 누렸던 대중화의 인기몰이까지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사람들이 대중음악 듣듯이 국악을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사실 외국의 팝에 환호하고 대중가요에 마음을 뺏긴 세태에 일상 속 전통음악의 부활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그는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30년 가깝게 이 시대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 그가 쌓아온 흔적과 결실을 돌아보며 갖게 된 확신일 것이다.● 김일륜 교수는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일인자다양한 음악세계 시도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일인자로 꼽히는 김일륜 중앙대교수는 전주 토박이다. 양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중간에서 수레바퀴처럼 하나가 되는 태몽을 꾼 아버지가 그의 이름을 일륜(日輪)이라 지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춤과 소리를 배웠고, 남다른 재능을 주목받았다. 아버지(김세영씨)는 예술에 남다른 일가견을 갖고 즐기는 애호가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남도의 허백련 화백을 찾아 나서 여러 달씩 집을 비웠던 기억이 생생하게 놓여 있다. 취미로 그림을 즐겼던 아버지는 그를 곁에 두고 화선지를 말게 하거나 난을 치는 것을 보게 했으며 천자문을 가르쳤다. 뭔가 알 수는 없지만 화선지에 번지는 먹의 농담(濃淡)이 황홀했다. 단소를 즐겨 불렀던 아버지는 아예 국악원(전주국악원) 열고 운영했는데, 덕분에 그는 소리며 춤을 그곳에서 배웠다. 워낙 재능이 탁월하기도 했지만 시키지 않아도 소리를 따라 부르며 좋아했던 그를 명고수 김동준선생이 눈여겨보아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걸걸한 목소리가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더 이상 소리를 배우지 않고, 대신 가야금을 시작했다. 사춘기가 오면서 가야금을 손에서 놓았지만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그는 중고등학교시절엔 고적대장이며 응원대장을 도맡아 했다. 전주여고 들어갈 땐 동네의 예쁜 약국아줌마를 보고 약사가 되고 싶어 이과를 택했다. 그러나 고3 올라갈 즈음 그의 재능을 알고 있던 음악선생님이 서울대 국악과 지원을 권유했다. 가야금 연주자로서의 길이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 4학년,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한 미국 15개 대학 순회연주회에 참여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그에게 연주자로서의 길을 어떻게 가야하는지 깨우쳐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곧바로 국립국악원 민속반에 들어갔다. 가야금병창을 맡게 되자 박귀희선생을 찾아가 병창을 배웠다. 스승은 어디 갔다 이제 왔냐고 반색할 정도로 그를 아꼈지만, 아쉽게도 적통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같은 직장에 몸담고 있던 남편(임재원 서울대 교수)을 만나 결혼하면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으로 직장을 옮겼다. 국악대중화를 향한 도전과 실험이 시작됐다. 80년대 중반, 국악실내악 운동의 중심축이었던 어울림에 참여, 전통음악 뿐 아니라 창작음악과 국악가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고 연주하면서 관객들을 국악으로 끌어들였다. 최초의 가야금중주단인 서울 새울을 창단해 가야금 앙상블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고, 1999년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가 된 이후에는 숙명 가야금연주단을 창단해 가야금의 대중화를 시도했다. 비발디의 사계, 비틀스의 팝송 등 친숙한 음악이 가야금에 얹혀 대중들을 끌어들였다. 그의 실험적인 도전은 늘 주목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찬사에 들뜨거나 우려에 위축되지 않고 우리음악의 대중화의 의지를 지켰다. 중앙대 국악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지난 2007년. 그는 두 번째 가야금 오케스트라인 중앙가야스트라를 만들어 가야금의 창작세계를 더 새롭게 실현해가고 있다. 지난해 11월에 가진 농현담성까지 22회의 독주회를 가졌으며 최옥삼류, 정남희제 황병기류, 성금연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신관용류 가야금산조를 완주했다. 독집만도 최옥삼류 가야금산조 농현을 비롯해 다섯 장의 음반을 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1.23 23:02

[④ 탄소나노튜브] 인장강도 철보다 370배 강하고 열전도율 높은 '꿈의 신소재'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나노 과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태동하게 되었고, 이러한 나노과학은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수 있는 과학기술로써 부각되고 있다.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 CNT)는 꿈의 신소재, 21세기 나노 기술의 보석으로 불리면서 나노과학기술의 대표적인 나노물질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대학과 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가 시작돼 일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탄소나노튜브 생산과 응용제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한화나노텍, 금호석유화학, 효성 등의 대기업이 진출하면서 소재 및 응용제품의 상용화 실현을 앞당기고 있다.탄소나노튜브의 응용분야로는 고기능성 복합체, 에너지 저장 소재/첨가제, 조명, 단전자소자, 트랜지스터 등이 있다. 이중에서 상업화 관점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분야는 탄소나노튜브를 충전제로 사용하여 특성을 향상시키는 고분자 복합플라스틱과 에너지 저장소재 등이다.△탄소소재의 팔방미인 탄소나노튜브는 1991년 일본 NEC 부설연구소의 이지마 박사가 길이 수십 nm ~ 수 ㎛, 외경 2.5~30 nm의 가늘고 긴 빨대모양의 탄소로 이루어진 나노튜브를 발견했으며, 최근에는 탄소나노튜브의 대량합성을 목적으로 기상화학증착법(CVD)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탄소로 이루어진 결정체들의 집합을 탄소 동소체라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탄소동소체로는 다이아몬드, 흑연, 플러렌, 탄소나노튜브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정사면체를 이루며, 탄소나노튜브는 나노크기의 직경으로 실린더형태로 말려서 이루어진 형태이다. 하나의 층이 말려서 이루어진 경우를 단일벽 탄소나노튜브, 두 개 이상의 층이 말려서 이루어진 경우를 다중벽 탄소나노튜브라고 한다.탄소나노튜브는 높은 강도, 낮은 전기비저항, 높은 열전도율을 보유한 꿈의 신소재이다. 실례로 다중벽 탄소나노튜브의 밀도는 알루미늄보다 낮지만, 인장강도는 철(A36 steel)보다 약 370배 이상 강하며, 전기비저항과 열전도율은 각각 구리 및 다이아몬드와 유사한 값을 가져 가볍고 강한 전기도선과 방열 소재로 사용할 수 있다.△첨단산업소재의 소금나노미터 직경을 보유한 탄소나노튜브의 1차원적 구조와 더불어 독특하고 우수한 전기적, 물리적 및 화학적 특성 때문에 고기능성 복합소재에서 트랜지스터와 분석용 소재 등 응용분야가 다양하다. 탄소나노튜브 복합체는 탄소나노튜브를 수지 내에 분산시켜 만든 복합체이며, 일반적으로 고분자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충전제(filler)의 특성을 가진 기능성 재료가 된다. 탄소나노튜브 복합소재는 반도체 칩트레이(Chip tray)등의 대전방지가 필요한 플라스틱에 적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자파 차폐용 플라스틱과 LED에서 발생되는 열을 방출하기 위한 방열 플라스틱 등 응용분야가 다양하다.△유연투명전극최근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응용분야로 각광은 받고 있는 것은 유연투명전극이다.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투명전극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기존의 ITO (Indium Tin Oxide) 투명전극을 대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연디스플레이에 적합한 소재로써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주)상보는 2013년 7월말에 경기도 양촌에 탄소나노튜브 투명전극 공장을 완공해 월 20만개의 터치센서를 생산중이며, 2014년에는 월 300만개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다. 탄소나노튜브를 소재로 한 투명전극은 향후 액정표시소자(LCD), 유기발광 표시소자 (OLED), 전자종이와 태양전지 등의 다양한 소자에 응용될 전망이다.△다기능성 플라스틱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다기능성 플라스틱 개발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정부에서는 2010년부터 세계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10대 핵심소재(WPM, World Premium Materials)로써 에너지 절감용 나노복합소재를 선정, WPM사업에 2018년까지 1조원의 정부 연구개발자금을 투입할 계획이다. 또 5조3000억원의 기업투자를 유도하여 세계 3200억 달러 규모의 시장에서 325억 달러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이중 에너지 절감용 나노복합소재는 초경량 구조용, 에너지 흡수용, 에너지 절감용 고방열 나노복합소재로 구분되어 있으며,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은 탄소나노튜브를 비롯한 나노탄소소재를 이용한 전자파 차폐특성을 구현하는 에너지 흡수용 나노복합소재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에너지 저장소자탄소나노튜브는 에너지 저장소자의 첨가제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탄소나노튜브를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음극, 양극에 첨가할 경우 전기전도성을 향상시키며, 이는 충방전 시간을 단축하고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실제로 일본의 소니사는 탄소나노튜브를 적용한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개발하고 있으며, 미국 택사스대학은 양극물질로 실리콘 입자와 하이드로겔(Hydrogel) 및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하여 대용량 고수명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하였다. 더욱이 세계적으로 웨어러블 디스플레이의 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고용량, 장수명 및 급속 충방전이 가능한 웨어러블 배터리의 개발이 각광을 받고 있다. 뉴저지 공대(NJIT)에서는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휘어지는 배터리를 개발하였고, 라이스 대학에서는 어떤 표면에도 인쇄할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가 첨가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하였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삼성전자와 LG전자에서 휘어지는 스마트폰이 출시된데 이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휘어지는(Flexible) 배터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섬유의 개발탄소나노튜브로 구성된 섬유의 개발은 탄소섬유를 능가하는 특성을 보유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달라스의 텍사스대와 라이스대를 중심으로 탄소나노튜브 섬유개발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특히 라이스대학에서는 소형 LED전구에 전기인가 및 지지가 가능한 탄소나노튜브 섬유를 개발하였다.국내의 한국전기연구원에서는 전기전도도 ~50,000 S/m, 인장강도 122.4 MPa을 보유한 다중벽 탄소나노튜브섬유를 개발하였다. 이는 앞으로 유연소자의 전극에서 웨어러블 디스플레이까지 다양한 응용분야에 적용될 전망이다. △탄소나노튜브 생산현황 및 전망탄소나노튜브의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하게 생산하는 업체는 벨기에의 Nanocyl과 독일의 Bayer이다. 국내에서는 금호석유화학, 한화나노텍, 제일모직, 효성 등의 대기업을 중심으로 탄소나노튜브 생산이 활발히 진행중이다. 특히, 금호석유화학은 2013년 아산(충청남도)에 탄소나노튜브 공장을 신축하여 연 50톤의 생산용량을 확보한 상태이며, 시장성숙도에 따라 연 300톤까지 생산량을 확대할 계획에 있다.탄소나노튜브의 상용화를 위해서는 탄소나노튜브 생산공정의 개선과 수요처의 확대를 통해 가격을 낮추어야 한다. 또한, 고분자 등의 매질내에서 분산성이 향상된 탄소나노튜브 개발이 필요하다. 특히, 전도성 탄소나노튜브 플라스틱의 경우 전기/전자 부품 및 포장재의 대전방지소재에서 자동차의 휀더, 사이드 미러 하우징등으로 응용분야가 확장될 전망이다.

  • 기획
  • 이성원
  • 2014.01.22 23:02

[(4) 전주성 전투서 전사한 김준식과 후손들] 민초들이 잘 사는 세상 위해 목숨 내놓은 '역적 집안'

지난해 끝자락을 뜨겁게 달궜던 화두는 단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였다.시작은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인사말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응답하면서 들불처럼 번졌다. 가슴 속에 담아두고 있던 안녕치 못한 이유를 끄집어낼 창구가 열린 셈이다.120년 전에도 그랬다.시절이 하 수상했다. 무너져가던 조선 정부는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민중은 안녕치 못했지만, 그 울분을 모아낼 공간이 없었다.첫 번째 대자보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사람을 하늘같이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신흥 종교 동학이었다.1892년부터 보은, 삼례 등지에서 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집회는 처음에는 혹세무민 혐의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죄를 벗겨달라는 교조신원(敎祖伸寃)에 초점을 두고 시작됐다.하지만 봉건적인 구습에 짓눌려 있던 농민들과 일부 깨어있던 지식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곧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가 나타났다.종교집단에서 민중 그 자체로 탈바꿈한 동학은 커다란 물결이 되어갔다.그리고 대규모 집회가 있던 삼례에서 불과 3km 떨어진 왕궁에서, 김준식(金俊植)이라는 이름을 가진 훈장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분연히 일어나 그 물결에 합류했다.△왕궁서 글 가르치던 훈장 김준식김준식은 1856년 생으로, 왕궁 이탄마을(현 익산시 왕궁면 구덕리 이탄마을)에서 훈장으로서 지역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손자 김경철씨(81)에 따르면, 그는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천주를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원히 잊지 않으면 온갖 일을 알게 된다) 13글자를 외우던 동학 도인이기도 했다.그가 동학에 입도한 계기는 확실치 않다. 왕궁 지역에서는 동학혁명과 관련 있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다만 왕궁 지역은 1892년 11월과 1893년 2월에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삼례와 가까워, 그도 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894년 갑오년 음력 2월, 38세의 그는 두 살 어린 동생 양식(養植)과 함께 집을 나섰다. 농민군이 봉기해 백산에 거점을 형성하던 무렵이었다.농민군에 합류해 함께 싸우던 그는 그 해 5월에 전사했다. 농민군이 점령한 전주성을 수복하려던 관군과 이를 저지하던 농민군이 치열하게 맞붙던 때였다.1941년에 간행된 전주부사에는 (1894년 5월 1일)상오 10시부터 하오 4시까지 벌였던 이날 싸움으로 동학농민군의 시체는 계곡을 가득 메웠다고 기록돼 있다. 김준식은 이날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훈장 출신 등 지식인 계층은 격문과 같은 문서 작성정리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며 다만 모든 지식인이 그런 일을 맡은 것은 아니며, 직접 전투에 나선 이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준식은 후자에 속하는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김준식이 전사하고 얼마 후, 동생 김양식도 세상을 떠났다.사망 경위가 확실치는 않지만, 전주성 점령 후 농민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던 중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이 때 워낙 많은 농민들이 말 그대로 몰살당해서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기 목숨 돌보지 않고 뛰어든 것은 이들의 조부도 마찬가지였다.김준식의 조부 김기풍(金基豊)은 조선 후기에 민초들의 삶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혁신적인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 때문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됐고, 고산 마명리(현 완주군 고산면 방죽안)에 모여 살던 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피난퇴거시련의 연속고산 마명리에서 나와 왕궁 이탄마을에 겨우 자리를 잡은 이 집안에, 김준식양식 형제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준식의 부인 박씨가 1895년에 보쌈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갑작스럽게 부모를 잃은 아들 덕문(德文)은 17세의 몸으로 여동생과 함께 피신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현재 김경철씨가 살고 있는 거목마을은 거목(巨木)이라는 이름 그대로 원래 큰 나무가 짙게 우거져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친척집을 전전하던 김덕문은 이곳에 피난처를 만들고 살기 시작했다.존재 자체를 숨겨야 하던 시기였으니, 살림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다.일제 강점기가 지나가고, 거목마을에 흩어졌던 일족이 모여들었다. 피난처였던 이곳은 어느덧 22가구가 사는 마을이 됐다.하지만 1970년에 이 마을을 관통하는 호남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김씨 일가는 현대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 다시 생이별을 맞았다.김경철씨의 집은 간신히 수용을 면했지만, 직선거리로 불과 40m 떨어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에 지금도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것이 아니다.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던 땐데 저항을 할 수 있었겠어요라며 쓴 웃음을 보였다.이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다보니, 호적에도 이가 빠진 부분이 많았다.그가 고조부로부터 내려오는 역적의 역사를 알게 된 것도, 호적의 빠진 부분을 채워 넣으러 일족을 찾아 돌아다니면서였다.△다시 갑오년, 자랑스러운 역사 후손에 알릴 것그는 동학혁명 당시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광주를 봐요. 전부 폭도로 몰렸잖아요. 비슷하다고 봐야죠.자식이 넷, 손주가 여덟인 그는 가능한 한 조상의 일을 자손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1831년에 작성된 것부터 1890년대의 것까지 호구단자 21장을 고이 모셔두고 있는 것도, 족보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것도 이 때문이다.1894년으로부터 120년, 두 갑자가 되는 해를 맞아 그에게 특별한 감회가 없는지 물었다.김경철씨는 후손으로서 새삼 자랑스럽죠.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거잖아요라며 담담한 소회를 밝혔다.그는 피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하지만 당당히 나서 저항했던 조상들의 미완의 혁명을 이렇게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 기획
  • 권혁일
  • 2014.01.22 23:02

27. 익산 금마초 - '나'보다 '우리'…아이들 공동체 의식 키우기 주력

정만일 익산 금마초등학교 교장의 별칭은 문지기 선생님이다. 한파가 몰아닥치는 날에도 중무장을 한 뒤 교문 앞을 서성인다. 시무룩한 표정의 아이들은 없는지, 골이 잔뜩 난 학생들은 없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다. 정 교장은 그 상태로 수업에 들어가면 집중할 수 없지 않겠느냐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200여 명 남짓하는 전교생들의 이름은 물론 가족사까지 꿸 수 있었던 것은 교사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와서 귤이라고 하나 주고 가면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가 날 수가 없어요. 그는 화창하게 웃었다.△나 아닌 우리가 되자내 철학은 딱 하나예요.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자는 것입니다.정 교장의 철학은 간명했다. 일본에서 13년 간 파견교사로 근무한 특이한 경력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절대 튀면 안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초등교육과정은 나만 잘 살면 되는 사회가 아닌, 우리가 어울려 사는 사회를 위한 기본 소양을 갖추자는 것. 각 분야에서 학생들의 수상 소식 등을 세간에 알리는 대신 학교에서 소개하고 격려하는 데 그친 것도 교장의 확고한 철학 덕분이다. 체육에 일가견이 있었던 정 교장은 생활체육의 대중화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살면서 정부와 자치단체가 생활체육인 양성을 눈여겨봤다. 3년 전 정 교장이 학년별로 특화된 생활체육을 가르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하지만 의욕만큼 성과는 따라주지 않았다. 성공 보다는 실패 사례가 더 많아요. 이번엔 멋쩍게 웃었다.유일한 성공 사례는 다문화 페스티벌이다. 전교생 200여 명 중 다문화 학생은 10명. 3년 째 학부모 등을 초청해 학생들에게 색다른 추억을 선물해왔다. 다국적 의상 입어보기, 전통음식 만들기 등을 통해 중국러시아필리핀미국 문화를 접해볼 수 있도록 한 것.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정 교장은 화를 잘 내지 않는 편이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기, 실내화 신고 학교 밖에 나가기 등은 그러나 그의 미간을 유일하게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그를 보며 홍성훈 총동문회장(건양대 교수55회)은 정만일 교장은 인성교육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이런 철학에 적극 응원하고 싶다면서도 모교 사랑을 잊지 말고 졸업생들이 더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다목적 체육관 건립 눈앞총동문회를 귀찮게 하는 전화가 여러 번 오고간 끝에 금마초등학교를 오랫동안 재직했던 퇴직교사를 만날수 있었다. 1960년대 금마초에서 교편을 잡았던 소병도씨다. 증조부, 조부, 아들까지 4대가 금마초를 졸업한 뼛속까지 금마초 예찬론자다. 그는 금마초의 전신으로 사립학교인 익창학교와 기영학교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중심도시였습니다. 반상(班常)의 구분이 심한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익창학교는 양반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기영학교는 평민들이 다니는 학교였어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 이후 일본인들이 두 학교를 없애고 익산공립학교로 세웠습니다. 이 역사를 아는 이들은 많지 않죠. 1950년대 소씨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해도 학년별로 세 학급씩 존재했다. 큰 아버지가 금마초 교장이었다는 소씨는 당시 보기 드물게 여자 농구팀을 육성해 소년체전까지 출전했지만, 전 농구선수인 박찬숙씨가 뛰던 숭의초에게 대패를 당했다고도 했다. 1911년 개교 당시 금마초는 금마시장 터에 위치했다. 625 전쟁 때 빨치산이 습격해 참사가 일어났던 데다, 도시개발이 이뤄지면서 금마로 이사오게 된 것. 홍성훈 회장의 부친 역시 금마초 교장을 지냈다. 부자지간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홍 회장은 변변한 체육관이 없었던 금마초의 숙원인 다목적체육관 건립을 성사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쓰는 데 일조했다. △교육계학계 인맥 두각 총동문회의 활동은 최근에서야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 이름을 날린 동문들의 면면은 몇몇 동문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총동문회 등을 통해 금마초를 빛낸 동문들은 다음과 같다. 금마초 동창들은 유독 학계에 많이 포진해 있다. 졸업 연도가 뚜렷하지 않은 지태순 선생은 자수성가해 모은 돈으로 1948년 익산중을 설립하고 1964년 익산초, 1966년 익산고를 차례로 세웠다. 사람이 재산이라는 그의 신념은 익성학원의 설립으로 이어져 아들손자 등 3대에 걸쳐 지역 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조국 독립의 주춧돌 역할을 해온 독립투사 김학곤홍순갑씨와 1980년대 청와대 안전처장까지 지낸 최윤수씨도 금마초를 거쳤다. 한국은 물론 세계 물리학계에서도 정평이 난 소광섭 서울대 명예교수(46회) 역시 금마초 출신이다. 소 교수는 2002년부터 한의학에서 침을 놓는 경혈과 경혈을 따라 흐르는 경맥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작업으로 남다른 이력을 추가하며 암 등 난치성 질환 치료를 임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연구해오고 있다. 의사 출신인 민주당 김용익 국회의원(53회)과 그의 형인 김용태 전 김안과병원장(45회), 이기수 경희대 치대 학장(45회) 등도 의료계 인맥이다. 유기태 도의회 교육위원(48회)을 비롯해 소금숙 한림대 수학과 교수(55회), 전북대 교수로 재직 중인 임기영 반도체과학기술학과 교수(54회), 최진규 지역건설공학과 교수(54회), 최원규 사회복지학과 교수(60회) 등은 물론 이기학 원광대 생명나노화학부 교수(55회) 등이 뒤따른다.새누리당의 의료영리화 방침에 대해 민주당 의료영리화저지특위 위원장을 맡은 김용익 의원은 최근 소신있는 발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이성원씨(43회)와 SBS로 활동한 이승주씨(57회), 장기간 총동창회장을 맡았던 강덕원(38회)송정규(43회) 전 익산시의원도 금마초 총동문회의 얼굴이다.

  • 기획
  • 이화정
  • 2014.01.2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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