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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익산 (주)태광] 차 부품 레이저가공 선도, 전북 유일 '크레인 붐' 생산

철을 절단하고 구부려 용접까지 해야 마무리되는 자동차 부품생산 공장을 여성기업인이 운영하고 있다. 이런 험한 공정들로 가득한 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여성CEO라는 사회적 편견이 더욱 힘든 여건이라고 한다.시간이 지나면서 신뢰가 쌓여가며 여성기업인이라는 편견은 이젠 당당함으로 변했지만 이렇게 변하기까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10여명으로 시작한 이 기업의 임직원은 50여명으로 늘었고, 이젠 자동차 부품에 머물지 않고 크레인과 특장차 부품으로 영역을 확대해 가고 있다.도내 유일한 붐(boom, 크레인 등 본체에 부착해 짐을 매달아 올리거나 이동시키는 것) 전문 생산업체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며 전국의 업체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익산의 작지만 강한 기업 (주)태광(대표 오희순)을 다녀왔다.△기술중심 기업(주)태광은 레이저가공과 CNC절단, 절곡, 파이프가공, 붐 제관 전문 업체다. 강철판을 이용해 구부리고 자르고 용접하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쉽지 않은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이다.도내 유일한 붐 제조업체로 성장하고 있는 태광은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이로 인해 도내는 물론 국내 시장에서도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이렇게 성장하기까지 자그마치 10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 1000㎡정도의 면적에서 대표와 전무, 상무, 이사 등 전 직원이 임원진으로 출발한 태광은 이젠 8600㎡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규모의 성장은 10여명에 불과했던 직원이 50여명으로 늘었고 이직률이 적은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심어져 있다.특히 이직률이 적은 기업이라는 이미지는 태광이 출발한 가족 같은 기업이라는 태동의 목적을 잘 뒷받침하고 있다.△전문화가 경쟁력태광의 경쟁력은 직원 개개인이 가진 기술노하우에 우수한 최신기계장비가 뒷받침한다. 특히 회사 설립 이듬해부터 운영되고 있는 기술개발실은 훌륭한 기술력을 갖추는 토양이다. 기술개발실에선 최신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자동화, 규격화를 이뤄간다. 지금까지 6종 50여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자동화를 이뤄낸 결실도 기술개발실의 혁신적인 노력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10년 넘게 전국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는 제품은 단연 크레인 붐이다. 안테나처럼 줄였다가 늘이는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크레인 붐은 무엇보다 규격화된 안전이 첫 번째 기술력이고 두 번째는 제품의 꼼꼼한 마무리 기술이다. 직원들의 전문화와 최신 정밀기계를 바탕으로 기술력을 갖춘 태광은 이런 기술력을 대내외로부터 인정받고 있다.△꾸준한 신제품 출시 중소기업의 가장 큰 어려움은 부족한 연구진과 이에 따른 신제품 출시다. 하지만 태광은 과감한 투자를 통한 기술력 향상과 꾸준한 신제품을 출시하며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독일에서 들여온 2대의 레이저절단기는 각각 10억원이 넘는 고가의 기계로 20mm두께의 강판을 길이 6m까지 절단이 가능하다. 보통 2~3m절단기를 갖춘 동종업체들을 멀찌감치 따돌리는 경쟁력 중 하나다. 이 레이저절단기는 간단한 컴퓨터 조작으로 정밀한 절단이 가능해 다양한 제품에 적용이 가능한 장점을 가졌다. 이로 인해 태광이 생산하는 크레인 붐도 그 종류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다.특히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스카이 붐대를 비롯해 최근에는 탱크로리에 이르기까지 제품의 다양화를 이뤄가고 있다.△멈추지 않는 성장태광은 설립 3년 만에 공장을 신축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다. 처음 면적대비 8배 이상 규모가 성장하기까지 8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런 시간이 흐르는 사이 상호가 변경됐고, 품질인증을 획득하는 등 내실을 다졌다. 2010년 4월 2공장을 증설하고 2012년에는 익산시로부터 최우수 중소기업으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뤘다.기술 중심의 직원들의 전문화를 이뤄낸 태광은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제조사의 인정을 계기로 속속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멈추지 않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오희순 대표 "과감한 투자와 직원 전문성이 경쟁력, 여성CEO에 대한 사회 편견 없었으면"회사의 규모나 범위를 넓히기보다 시스템 선진화와 전문화를 통해 경쟁력을 꾸준히 키워가고 있습니다.(주)태광 오희순 대표는 여성CEO 답지 않게 과감한 투자와 직원들의 전문화를 제1의 경쟁력으로 꼽는다.이런 오 대표의 경영철학은 태광의 성장세를 이어가는 초석이기도 하다. 회사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투자했던 국내 최대 규모의 레이저절단기 도입은 태광이 성장하는 배경이며 오 대표의 과감한 결정이었다.오 대표는 회사가 나아가는 분야의 전문화와 그것을 위한 투자는 회사의 버팀목이기에 멈출 수가 없다면서 도내 최초의 레이저가공 산업을 선도한 회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업계에서 가장 경쟁력을 갖춘 회사라는 인식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이렇게 도내를 대표하는 한 분야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태광의 가장 큰 어려움은 여성기업인이 이끄는 업체라는 편견이 자리했다.금융권 지원이나 행정적 지원, 관련 업체들의 세미나 등에서 흔치않은 여성기업인의 시선은 얼마나 버티겠나 혹은 실질적인 대표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대체적 분위기였다고 한다.오 대표는 험한 공정들로 가득한 업체라서 그런지 기업운영자금을 빌리거나 관련 업체의 세미나에서 여성대표에 대한 시선은 좋지 않았다며 오랜 신뢰가 쌓이면서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지만 사업초기에는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여성에 대한 편견이었다고 했다.그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고, 앞으로는 사업영역을 더욱 확대할 수 있는 기술력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라며 기술력을 가진 정예요원들이 태광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 기획
  • 김진만
  • 2014.05.15 23:02

(19) 동학 연구·활동가들 - 신명국 이사장 "공동체 의식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 고민해야"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전후해 당시 사건을 새롭게 조명하고 기리는 작업들이 민간차원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섰던 곳이 사단법인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이사장 이영호, 약칭 동백사)다. 100주년을 앞두고 1992년 창립된 이 단체는 학술·출판사업, 문화예술사업, 기념조형물 건립사업 등을 통해 갑오년의 역사를 곧추 세우고 대중들과 호흡해왔다.학계 전문가·언론인·시민활동가·종교인 등이 모여 탄생시킨 동백사는 20여년간 시민사회단체 활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으며, 현재 전국 각지의 동학 관련 20여개 단체가 태동할 수 있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실제 동백사에서 작업했던 그간의 편찬 자료와 기념조형물, 문화예술사업들은 100주년 이후 지금까지도 학계의 연구와 기념사업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동백사의 중심에 섰던 대표적 인사 중 한 분이 신명국 원광학원 이사장(63,옛 이름 신순철)이다. 그는 동백사 출범의 산파역이었으며, 10여년간 사무처장·사무총장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계와 현장을 아우르며 20여년간 ‘동학’을 사랑해온 신 이사장을 지난 8일 만나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일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기려야 하는지 들어보았다.신 이사장은 이날 인터뷰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그림을 바꾸고, 기념사업의 상징적 공간을 만들자는 데 힘을 줬다. 또 민간차원에서 기념사업의 중심적 역할을 해왔던 동백사의 해체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00주년기념사업회가 어떻게 발족됐습니까.“1989년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던 해입니다. 당시 국내에서 이를 기념하는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됐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전북에서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이 됐던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문화저널〉에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준비하자’는 기고를 했으며, 전북대 호남사회연구회가 정읍에서 세미나를 가지며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이후 91년 문화계·언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이 결성됐고, 이듬해 준비위원회 발족을 거쳐 창립대회를 가졌습니다. 한승헌 변호사·조용술 목사·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이 공동 대표를 맡아주셨습니다.”-개인적으로 동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혹은 배경이 있다면.“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룬 정치적 민주화가 우리사회를 변화시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원불교 전공자로서 원불교 대종상이 추구하는 개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희망과 기대는 대선에서 여지없이 깨졌고, 며칠간 울었습니다. 사회구조의 변화가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인간으로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학교 강의만 할 수 없어 ‘동학’으로 도망을 간 겁니다.”-10여년간 동백사 사무처장, 사무총장 등을 맡으며 여러 활동을 주도하셨는데, 동백사의 성과를 꼽는다면.“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동학란으로 배웠습니다. 5.16혁명 이후 동학혁명으로 정리됐지만, 정부는 국가사업으로 키우지 않고 정읍사건으로 묶었습니다. 동백사 발족 당시 기업들은 협찬을 꺼렸고, 교수들 조차도 발기인 참여를 꺼려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반정부운동으로 보고 뒷감당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죠. 동백사만의 역할은 아니지만, 시민운동 차원으로의 확대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이런 의식들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봅니다. 또 연구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내부적으로 연구분야에 편중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국내외 학술대회 개최와 동백사에서 펴낸 여러 권의 책들은 동학 연구에 큰 자산이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런 활동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동백사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이사회에서 제안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설립된 만큼 재단으로 힘을 모아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의 돈으로 기념사업을 할 경우 방향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방향을 잘못 잡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혹은 견제를 통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재단에서 잘 해야하고, 그래야 통합효과가 있겠지요.”-2주갑, 어떻게 기려야 하겠습니까. 우선 연구부문을 짚어주시죠.“동학농민혁명 2주갑은 연구 쪽에서도 의미있는 해가 돼야 합니다. 그동안 연구가 전봉준 중심의 호남 주력부대 위주로 연구됐습니다. 이 부문은 어느 정도 다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적인 봉기인 데, 다른 지역의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 수준입니다. 황해도에서는 전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원됐고, 서산·태인 홍성 등 충청 내포지구 역시 주력 못지 않게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호남의 주력들이 체포된 후에도 전남 장흥, 경북 영해단, 충북 청주 등에서 이듬해 7월까지 싸운 기록이 나옵니다. 북한지역의 연구는 미답지 입니다. 지역연구로 혁명의 그림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1930년대 김상기 박사가 고부봉기에서부터 우금치 패퇴로 끝낸 혁명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호남 사건으로 묶은 혁명의 원판을 복원해야 합니다. 지역 연구로의 확대와 함께, 세계사적 의미를 조명해야 합니다. 중일관계 혹은 대국사만이 아닌, 아일랜드·필리핀 등 작은 국가들의 농민전쟁과 비교하는 등 세계사적 안목에서의 시야 확대가 필요합니다. 세계사에서 농민이 중심이 돼 근대화를 이룬 국가는 없었습니다. 동학이 그랬다면 우리의 오늘은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기념사업이 왜 필요하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 게 바람직한지.“자라나는 후배들에게 어떻게 보여줘야 하느냐가 기념사업입니다. 그것은 교육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부터 경쟁으로 가고, 친구도 경쟁 상대인 데, 어떻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고 할 수 있으며,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줄 수 있겠습니까. 공동체 의식을 되살릴 수 있는 기념사업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념조형물, 역사기념물만 하더라도 몇 m올리느냐 경쟁을 합니다. 느낌이 있는 기념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기념사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진행돼야 합니다. 특히 관련 대표적 공간이 필요합니다. 다행이 정읍에 기념공원조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느낌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신명국 이사장의 못다한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신명국 이사장은 안동이 고향으로, 전북과의 연고는 원광대 원불교 학과에 진학하면서다. 애초 사업회 사무처장에 전북대 이종민(영문과)·하우봉 교수(사학과)가 거명됐으나 두 분이 고사하는 바람에 맡게 됐단다. 익산을 오가면서 사업회 일을 맡는 게 버거웠으나 10년 가까이 사무처장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무처장을 그만둘 수 있었던 것은 1998년 갑상선암(4기)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우면서다. 그럼에도 한승헌 이사장이 처장직 사퇴를 받아주지 않아 간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로 한 이사장을 감동(?)시켜 얻어냈다.별도의 외부 지원을 받지 않고 회원들 회비에 의존하던 현실에서 사무처 직원들 월급을 감당하지 못해 이종민 교수와 함께 각각 1000만원씩 개인 대출을 받을 만큼 사업회의 사정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많을 때는 500명의 회원이 있어 든든한 힘이 됐단다.학자 개인으로서는 연구분야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사업회에서 여러 권의 책을 냈지만, 그 자신의 이름이나 자신이 소속한 대학(원광대 사학과)으로 욕심을 내지 않았다. 사무처장을 맡은 관계로, 주요 학술대회 등에서도 사회나 토론을 주로 맡아 주제발표에서 멀어졌다.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기념일 제정과 관련, 그는 논란 자체가 불명예라고 했다. 기념일을 제정하지 못한 것 자체가 ‘그 분’들에게 불효며, 안에서 치고 받고 싸우더라도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또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보지 않고 조병갑의 삼정문란으로 몰고 간 당시 상황과, 세월호 사건을 유병언이라는 개인 책임으로 몰고 가는 현상도 100년을 뛰어넘어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 기획
  • 김원용
  • 2014.05.14 23:02

취임 한달 박영태 전북지방조달청장 "조달행정 혁신, 지역경제 무한 성장 가능성 깨우겠다"

전북지방조달청 신임 수장으로 박영태 청장(55)이 취임했다. 열악한 전북 경제의 부흥을 갈망하는 도민들의 성원과 기대가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가운데 박 청장도 이에 발맞춰 ‘위기를 기회로, 시련을 도약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도내 공공조달 활성화에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각오를 밝혔다.건설업계에서는 지금의 시기를 ‘제2의 IMF’로 여기고 있는 만큼 건설 내실화 및 투명하고 청렴한 조직문화 정착 등 박 청장이 넘어야 할 파고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평직원으로 입사해 전국 곳곳의 도시를 누비며 실무를 쌓고 35년 만에 전북조달청의 수장으로 온 만큼 박 청장에게 거는 도민들의 기대가 높다. 박 청장을 만나 전북조달청이 앞으로 진행할 사업과 비전, 그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등의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전북 근무는 처음인데 부임 소감은 어떠신지요.“천년의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멋과 맛의 고장 전북에서 일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전북의 재정자립도, 지역내총생산(GRDP) 등을 살펴보았을 때 타 지역에 비해 경제적인 여건이 좋지 않지만 새만금 개발 및 혁신도시 이전 등으로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잠재된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공공조달을 통해 이 지역의 경제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잠재된 성장 가능성을 깨우고 활용하는 것이 현재 저에게 주어진 소임인 것 같습니다.”-전북조달청이 하는 업무를 도민들께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죠.“한마디로 조달청은 가정의 어머니 같이 나라의 살림을 하는 기관입니다. 공공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해주고 건물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에 대한 공사계약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 관공서의 물품과 국유재산에 대한 관리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원자재 비축사업도 요즘같이 물가가 불안한 시기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업무로 비축한 원자재를 적기에 방출해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경영 안정화를 돕고 있습니다. 그 외 공공조달의 기관망인 나라장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공공건물의 감리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나라장터 전자입찰시스템을 아파트 단지 등 민간부분에 까지 확산해 보다 나은 조달 시장을 만들어 가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향후 업무의 중점 추진 방향을 어떻게 잡고 계신지 궁금합니다.“중소기업, 여성기업 등 취약계층에 대한 판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비정상적인 조달 관행이나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기업이 일하고 싶은 지역조달시장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조달청은 정부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추진 등 변화된 환경에 맞춰 조달 행정의 효과와 투명성을 더욱 높이고, 변화·혁신을 조직문화로 체화시키기 위해 ‘제2기 조달행정 혁신방안’을 마련해 40개 과제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서비스, 신성장 제품 거래의 활성 및 혁신지향 조달, 청년 여성 경제활동 촉진, 중소기업 기술·경쟁력 견인 조달, 공공기관과 조달협력 확대 등으로 전북청 역시 이 같은 혁신 성과가 실질적으로 나타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올 해 조달사업 목표치 및 사업 중점 방향은 어떤지요.“전북은 2012년도 1조4385억 원 조달실적을 정점으로 사회기반사업 축소에 따른 도내외 건설시장 축소로 2013년 1조3270억 원으로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올 해 또한 조달사업 규모는 지난해 실적과 비슷한 1조3290억 원 수준입니다. 전북조달청은 본청의 경제혁신을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한 ‘제2기 조달행정 혁신방안’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정했습니다. 이를 위해 조달사업 적기 조기 집행과 사업의 조기 발주 및 계약 행정 소요일수 단축 등 신속한 사업 집행에 모든 업무를 집중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기업에 대한 공공판로 지원을 내실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규제를 개선하고 적정한 가격을 책정하는 등 중소기업의 지속적 성장 가능성에 업무 초점을 맞출 계획입니다. 특히 도내 전통문화업체 및 우수기술을 보유한 업체에 대해 공공조달을 통해 판로가 확보되도록 추가 지원할 계획으로 하도급 지킴이 및 나라장터 민간개방 등 혁신사항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개방·공유·협력·소통을 일궈내겠습니다.”-도내 우수조달업체 물품 판로 확대 및 지역 업체 이용 방안이 있다면.“우수조달업체의 공공시장 판로확대를 위해 공공기관과 지역 중소기업 및 도내 우수조달업체와 3자 합동간담회를 개최하고, 각종 조달업무 설명 책자에 도내 우수조달물품 지정과 전통문화상품 등록 현황 등을 수록해 발간, 이를 도내 공공기관에 송부 할 것입니다. 특히 각종 공공기관 모임에서 도내 우수제품들이 설계에서부터 반영될 수 있도록 거듭 강조하겠습니다. 지역 업체의 안정적인 생산 활동을 돕기 위해 유동성자금을 적극 지원하고자 계약과 동시에 계약금액의 최대 70%까지 선금을 지급하고 대금은 청구 후 4시간이내에 지급토록 하겠습니다. 또한 계약서만으로도 대출이 가능한 네트워크론도 적극 활용토록 하겠습니다.”-조달우수제품의 도내 활용량은 어떻게 되는지요.“최근 3년간 도내 우수제품 공급 실적을 보면 2013년 8.3%에 불과한 이용률이 올해 현재 9.6%로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이는 지난해 우수조달업체 간담회를 통해 기업이 원하는 사항이 무엇인지 소통하고, 도내 우수조달업체 현황 CD 제작·안내 및 언론기관에서 적극 홍보한 결과로 생각합니다. 이 같은 상승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수조달업체는 기술 개발과 품질 확보에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공공기관은 진행사업이 도내 우수제품으로 이행 가능여부를 우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조달행정 전문가로서 지자체의 긴급 발주 남발을 견제할 방안이 있으신지요.“각 수요기관들도 적기예산확보의 어려움과 조기집행 등 사업의 긴급성으로 불가피하게 긴급발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긴급 발주를 하게 되면 공고기간이 짧아 업체들의 입찰참여가 제한되며 예산의 효율적 집행을 저해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6월 말에 계약이 폭주되는 사태를 사전에 막고자 수시로 공공기관에는 안내문을 발송하고 방문 협의해 상반기 내내 계약이 균등하게 집행될 수 있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조기집행을 적절히 사용하면 내수시장에 활력을 불러 올 수 있고, 균등한 발주는 기업이 규모 있는 경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지대임을 알아야 합니다.”-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도민을 위한 국가기관으로써의 역할은 2013년도 전북조달청의 지방업체 지원실적(전북 91.8%, 전국 64.5%)을 보면 짐작이 가능합니다. 전북조달청은 한 번도 전북경제를 생각하지 않고 조달업무를 수행한 적이 없으며 지역기업의 수주확대는 곧 도내 일자리의 증가를 가져오고 지역경제가 활성화 된다는 원리를 알고 있는 똑똑한 국가기관입니다. 기업은 이제 더 이상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읽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고 품질을 확보했을 때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공공조달시장에서 아무리 지역물품을 구매하더라도 민간시장에서 외면 한다면 도내 기업은 하나, 둘 사라질 것입니다. 공공과 민간 모두 지역기업에 애착을 가져야 됨을 부탁드립니다.”● 박영태 청장은 공직 35년 '조달 달인' 재활용센터 설치 공헌지난 4월17일 제27대 전북지방조달청장으로 부임한 박영태 청장(55)은 전남 광양 출신으로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1978년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조달청 시설계약·물품구매업무·규제개혁법무담당관 등을 두루 거친 조달 행정 전문가다.박 청장은 입사 당시 공보담당관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등 언론과도 밀접한 관계를 쌓은 경력이 있다.박 청장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달 행정은 ‘불요불급 물품 구매 억제 및 보유 물품의 재활용’으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보유 조달 물품이 있음에도 이를 방치, 세금을 낭비하자는 것을 없애자는 것이다.예를 들면 가전이나 자가용 등 사용가능한 물품의 관리전환을 통해 이를 매각하거나 사용하는 조달청 재활용센터를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박 청장은 전자조달국 물품관리과에 재직할 당시 물품관리 및 사용 공무원의 인식제고, 예산절감을 위한 ‘기관별 물품관리 종합 평가제’를 개발, 관리 부실기관에 벌점을 주고 우수기관 표창을 통해 연간 수십억 원 상당의 예산을 절감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박 청장은 “제2기 조달행정혁신 과제의 실질적 성과가 전북지역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지역특화제품 및 조달우수제품의 지속적 발굴을 통해 지역경제에 일조하고 비정상적인 조달관행 및 불합리한 조달규제 등을 철폐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박 청장은 이어 “나라장터 단일창구 기능과 원스톱 서비스를 강화해 수요기관의 맞춤형 서비스를 내실화 시키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이강모
  • 2014.05.12 23:02

[(16) 군산 (주)진흥주물] 차 부품 주조 기술력, 미국 군용트럭 생산업체도 인정

뿌리산업은 자동차, 조선, IT 등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기초를 튼튼히 하고 산업구조의 근간을 지탱하고 있는 기반산업이다.소재를 제품과 부품으로 형상을 만들어 가공하는 금형, 주조, 용접, 소성가공, 표면처리, 열처리 등의 기초공정을 수행하는 뿌리산업의 기술력이 생산제품의 품질은 물론 국가 기술력의 척도가 된다.독일과 일본 등 뿌리산업 선진국은 이들 뿌리기업들을 전통과 혁신을 기반으로 기술력을 유지 발전시키고 히든챔피언으로 육성하며 명품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켜 왔다. 최근 정부도 2017년까지 뿌리산업을 세계 6위 규모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이른바 3D업종으로 불리면서도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세계시장에서 당당히 기술력을 인정받아 온 대한민국 대표 뿌리기업 (주)진흥주물. 2012년 본사를 군산으로 옮긴 (주)진흥주물이 모진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로 성장해 가고 있다.△작지만 강한 뿌리기업으로 성장진흥주물은 1971년 인천에서 진흥주물제작소로 시작해 그동안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지만 강한 회사로 우리나라 산업의 근간이 되는 뿌리산업을 일궈 왔다.1992년 디젤엔진부품 양산을 시작해 대우중공업 계열사로 성장해 오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당시 공장 신축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이상덕 현 대표가 직원들과 함께 경영권을 인수해 2003년 종업원 지주회사로 재탄생했다.이후 어려운 여건에서도 힘든 업종이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 이른바 3D업종에서 ACE(Automatic, Clean, Easy)산업으로 바꾸기 위한 신규 주조라인 구인 구축에 주력해 왔다.전통주조기술에 IT기술을 접목시킨 엔지니어링 설계기술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부품제조공정을 지켜보며 결과를 미리 예측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불량률을 획기적으로 감소시켰다.또한 기술 및 품질 혁신이라는 경영비전 아래 2005년부터 부설연구소 설립으로 다양한 제조기술 개발에 나서 제조기반의 핵심기술이 주조산업이라는 것을 증명해 왔다.이와 함께 타타대우상용차. 현대기아자동차, 한국지엠, 두산인프라코어 등 국내 대기업에 자동차 및 건설기계용 고품질 주물부품 공급으로 제품 경쟁력을 높이고 있으며 오시코시, 크라이슬러 등에 제품을 수출해 오고 있다.특히 미국 방산용 차량 생산업체인 오시코시사와 장기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독자기술로 강도와 연성이 뛰어난 ADI재질을 개발해 미군 지뢰매복방호차량(MRAP)의 핵심부품인 차동기어박스를 공급해 왔다.실제 아프가니스탄에서 미 군용트럭 밑에서 지뢰가 터졌을 때 다행히 트럭 중량 차동기어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부품이 견고해 탑승자들이 화를 면하는 일이 있었다.이후 해당 부품 납품업체가 대한민국의 진흥주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진흥주물의 기술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중소기업의 한계를 극복한 기술개발 공로로 2009년 12월 제9회 주조기술경기대회 대통령상과 함께 21세기 주조산업을 이끌어 갈 선도기업으로 인정받았다.개발 제품도 전량 미국에 수출하며 2010년 11월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 2000만불탑을 수상하는 등 세계시장으로 도약하고 있다.△군산시대 본격 개막 진흥주물은 2012년 10월 군산공장을 준공하면서 곧바로 본사를 인천에서 군산으로 이전했다. 한국지엠과 타타대우상용차, 두산인프라코어 세아베스틸은 물론 전주 현대상용차공장이 도내에 자리하면서 상생협력을 통한 동반성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주조공장에 이어 2013년 12월 가공공장인 군산 제2공장까지 준공되면서 본격적인 군산시대가 개막됐다.총 410억원이 투자돼 오식도동 3만3058㎡의 부지에 1만376㎡ 규모로 건립된 군산공장에는 총 149명의 인원과 연간 3만6000톤(매출액 650억원)의 생산규모를 갖추었다. 2015년에는 3공장을 건립하기 위해 50억원이 추가 투자될 예정이다. 이로써 진흥주물은 현재 인천공장을 포함, 연간 총 6만6000톤(매출액 1200억원)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군산공장에는 최적의 조형강도를 실현하기 위한 유압 스퀴즈 타입(squeeze type) , 에너지 절약 및 품질확보를 위한 진공 믹서(mixer) 등 최신 설비를 갖추고 탁월한 품질 확보 및 자원순환을 위해 주형 내의 제품 냉각을 극대화 시키며 생산공정 혁신의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하지만 본격적인 군산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난제들도 만만치 않다.숙련기술인력 채용이 쉽지 않은 점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오르고 있으며, 바이전북과 바이군산 등을 통해 도내 완성차 업체 등에 부품소재 공급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또 최근 3년 동안 5차례에 걸쳐 26% 상승한 전력요금 등 직간접비 증가도 부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진흥주물은 이같은 난제들을 그동안 지속해 온 기술혁신과 품질혁신을 바탕으로 혼이 담긴 제품을 생산해 내며 헤쳐나갈 계획이다.호남권 등 국내시장에 트럭 및 농기계 소재 공급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유럽시장 상용차, 북미시장 농기계와 군용트럭 디젤엔진, 일본시장 로봇과 건설장비 등 해외시장 성장전략 다변화로 성장세를 이어가는 비전을 세웠다. 특히 군산 본사를 중심으로 한 진흥가족문화를 토대로 기본에 충실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술력과 생산규모를 실현해 나갈 방침이다.● 이상덕 대표 "기업의 경쟁력은 사람"대우중공업에서 25년을 근무한 이상덕 대표는 1997년 당시 진흥주물 공장 신축 프로젝트를 직접 지휘하는 책임자였다.IMF 위기로 대우중공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자, 자식처럼 돌보며 키워 온 진흥주물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서 직원들과 함께 경영권을 인수받기로 했다.마침내 이 대표는 2003년 2월 진흥주물을 종업원 지주회사로 재출범시켰다. 충분한 자질과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자 회사로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직접 추진했던 사업인 만큼 반드시 성공시키겠다는 각오였다.진흥주물은 반드시 되는 회사, 성공할 수 있는 회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대표부터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직원들을 대하는 행동을 바꾸었습니다. 직원들과 유대감을 높이고 자신감을 불어넣으려 노력했습니다6개월이 지나면서 회사 경영상태는 점차 정상궤도를 찾아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직원도 잃지 않았고 오히려 직원들이 탄탄한 동료애로 재무장하는 계기가 됐다.당시 많은 회사가 문을 닫았고, 저희도 역시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고생해온 직원들을 내보낼 수 없어 노경협의회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직원을 감축하지 않는 대신, 급여를 감봉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이 대표는 이를 위해 출근시간을 오전 조는 한 두 시간 앞당기고, 오후 조는 늦추는 방식으로 전력 사용이 가장 높은 시간대를 피해가는 방식으로 경비를 줄여나갔다.이 대표는 임원급 직원들에게 비우는 경영을 강조한다. 자신이 쌓아온 것과 익힌 것은 모두 물려주고 본인은 다시 채우라는 주문이다. 기업의 진정한 경쟁력은 직원 개인의 자질이 얼마나 성장하고 있느냐가 관건으로 결국 제품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며, 회사의 브랜드 가치도 인재가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이상덕 대표는 말했다. 당장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원을 감축했다면 위기가 지나간 이후 들어오는 주문량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을 겁니다. 직원채용을 위해 대학을 방문할 때마다 이야기 합니다. 진흥의 다음 CEO를 찾으러 왔다고.

  • 기획
  • 이일권
  • 2014.05.08 23:02

(18)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최순식 선생과 딸 최고원 씨 "지역에 대한 애정" 부녀가 김제 원평 혁명사 연구 헌신

교토애니메이션사가 만든 애니메이션 타마코 마켓의 주무대는 우사기야마 상점가다. 상점가란 마을 단위의 재래시장인데, 쇠락해가는 이 상점가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요즘 일본 지자체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야마다 나오코 감독은 교토에 실제로 존재하는 데마치 상점가를 모델로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상점가와 상점가 사람들의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그림 속에 담아냈다. 이 애니메이션 덕에 데마치 상점가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상인들의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고 한다.지역에 대한 애정은 이렇게 지역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컨텐츠를 찾아내고 이를 지역 활성화의 발판으로 삼게 한다. 그리고 그 컨텐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다.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려면 지역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안 돼요.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모른다면 밝힐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선친인 향토사학자 故 현학 최순식 선생(1933~2008)의 뜻을 이어받아 김제 원평 지역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는 최고원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국장(44)은 이렇게 말했다.이 부녀를 움직인 것은 원평 지역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삶의 공간과 맞닿아 있는 무덤최고원 씨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었다.풀이 무성한 야산길을 지나 얼마 후 당도한 곳은 원평 구미란 전투 때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이 묻힌 무덤.구미란 전투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던 농민군이 다시 일본군과 맞선 전투다. 이 때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무덤을 만들어놓은 것이 바로 이곳 무덤군이었다.마을과는 직선거리로 100m나 떨어져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웠다.그런데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봉분임을 알리는 흰 표지와 원평 구미란 전투 동학농민 무덤군이라고 적힌 알림판이 서있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무덤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모습이었다. 2005년 태풍 때 쓰러졌다는 나무가 여전히 누워있고, 봉분의 형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돼 있었다.어릴 적에 자주 와서 놀았는데, 그 때에는 지금보다 봉분 모양이 제대로 돼 있었죠.형체가 희미해져가는 봉분에 숫자가 적힌 흰 표지를 놓아 위치를 표시한 사람은 최씨였다.기념사업회가 관리를 하고는 있지만 예산이 부족해 1년에 한 번 벌초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이곳이 더 훼손되기 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고 최씨가 말했다. 한 차례 반려됐지만, 5월 중에 다시 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라고.그런데 왜 더 격이 높은 사적지 같은 것이 아니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길 원하는 것일까?사적지로 지정되면 문화재 관리를 위해 주변 주민들이 다 나가야 한대요. 그렇지만 주민들의 삶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죠.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양쪽 모두 보존하는 게 맞다고 봐요.△원평을 사랑한 사학자 최순식 선생최고원 씨의 원평 지역과 지역 사람들에 대한 이런 애착은 故 최순식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최순식 선생은 본래는 역사를 직접 연구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29세라는 조금 늦은 나이로 전북대에 들어가 정치학 등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당시 원평 지역에서 최씨 집안은 대대로 인정받던 유지 집안이었다.그는 고리대금을 써야만 했던 마을 서민들을 위해 1970년에 원평 새마을금고를 창립하기도 했다. 한 번 부도가 난 것을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이렇게 지역에 대한 애정이 큰 데다가 동학 농민군을 도운 최세현의 손자이기도 한 그가 지역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글을 통해 금산사 주변에서 조상대대로 누백년을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향토사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밝힌 그는, 80년대에 모악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했다.그는 미륵신앙과 정여립증산동학 사이의 연관성을 조명했다. 원평 장과 금구금산 지역의 사금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모았고, 가까이에 있는 모악산과 금산사는 미륵신앙과 개벽사상 등 종교적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됐던 곳으로, 후백제 유민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역할도 했다.이러한 지역적 특성과 정서의 영향을 받아 정여립이나 김덕명, 전봉준, 강증산 같은 인물들이 혁명개벽의 뜻을 품게 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그는 또 1893년에 원평에서 집회가 열렸으며 이 집회가 동학농민혁명이 혁명 차원으로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혔고, 1919년에 원평에서 있었던 31 만세운동이 동학농민혁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것도 밝혀냈다.특히 그는 지주도 농민군도 모두가 피해자라는 관점에서, 혁명 뒤에 감춰진 역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이러한 성과들은 이후 이뤄진 연구들의 밑거름이 됐다. 정읍이나 고창의 동학농민혁명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원평 지역의 혁명사는 그의 노력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게 된 셈이다.이외에도, 최 선생은 구미란 전투에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농민군을 위해 무명농민군 위령제를 1994년부터 지내기 시작했다.이처럼 원평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토대를 찾아내고 기리는 데 헌신한 최순식 선생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공적비를 세웠다.△중요한 건 현재의 역사2008년에 최순식 선생이 급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뜨자, 최고원 씨가 그의 유지를 받들기로 했다.최씨는 우선 위령제의 명맥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념사업회 결성을 서둘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지원조례 제정에도 힘을 쏟았다.조례는 2010년 3월에 김제시의회에서 통과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역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다.무관심에 맞서야 했고, 빠듯한 예산으로 위령제나 묘역 관리 등 할 일들을 해야 했다. 최근에는 구미란 전투 농민군 무덤과 원평 집강소 등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이렇게 매일매일 바쁜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최근 모악산 문화공동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주민들과 같이 지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뭔가를 모색해보는 단체예요. 지역의 고유한 문화자원과 주민들이 상생하도록 하기 위한 거죠.최씨는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한다며 치러지는 사업들이 오히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일종의 박제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천편일률적인 기념사업, 어느 곳에 가도 똑같이 있는 조형물기념공원 조성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그녀가 찾은 길은 바로 현재의 역사였다.과거의 역사가 중요하단들 현재의 역사만큼 중요하겠어요? 지역 주민의 일상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의 기념 정신이 이어지는 게 진정한 기념사업이라고 봐요.그녀의 기념사업 모토는 작게 만들고 적게 세우고 비워둔다란다. 비워둔 그 공간은 지역 주민들의 삶이 채울 것이다. 이런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 향토사학자의 역할인 셈이다.

  • 기획
  • 권혁일
  • 2014.05.07 23:02

[(15) 부안수협] 뽕잎고등어·참조기…수산물 가공 '효자사업' 개척

부안수협(조합장 김진태)은 전국에서 몇 안되는 건실한 협동조합이다. 군단위를 영업기반으로 하는 협동조합 중 유일하게 전국 8위권 복지조합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난 2007년 부안수협 조합장으로 취임하여 취임 7년째를 맞이하고 있는 김진태 조합장은 취임 6년간의 업적평가에서 전국 최우수조합으로 선정되어 경영대상을 수상했다.또한 이에 따른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에는 수협창립 51주년 기념식에서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산업포장을 수상하는 겹경사를 맞이하기도 했다. 김 조합장은 경영대상과 산업포장은 개인의 영광이 아닌 부안수협을 사랑하고 아껴주신 5000여 조합원 한분 한분의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조합원을 대표하여 받은 상인만큼 이에 자만하지않고 전 임직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조합원과 어업인이 행복한 수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자산규모 5878억원의 거대조합으로 성장부안수협은 김 조합장 취임당시 1321억원이었던 예탁금이 5319억원으로 403% 순증하였으며 대출금은 1114억에서 4428억원으로 397% 순증되는 등 자산규모 5878억원의 거대 조합으로 성장하였다.이는 취임당시 김동조 상임이사를 비롯한 전 임직원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면 군단위 조합도 전국 최우수조합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철저한 사전조사를 거쳐 과감한 사업추진을 한 결과이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부안수협은 13개의 상호점포(전주권 7개 지점, 익산권 2개 지점, 부안 4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한해 25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하는 실적을 거두었다. △14년 연속 흑자 시현, 6년연속 출자배당부안수협은 지난해 결산에서도 13억 4000만원의 당기순이익을 달성하여 14년 연속 흑자시현과 6년 연속 출자배당을 실시, 조합원에게 6억2600만원의 직간접배당을 지급하였으며 조합원 소득증대사업으로 1억1400만원, 수산종묘방류사업 1억5000만원, 수산단체 지원금 6200만원 등 조합원 복리증진과 소득증대 사업비로 총 6억3500만원을 환원하였다. 이와 함께 지난 5년간 조합원 자녀를 위한 1억 50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올해도 25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조합원이 주인인 협동조합최근 수산자원의 고갈과 이상기온에 따른 어획량 감소, 유가 상승에 따른 출어비 부담 가중으로 인하여 관내 어업인은 그 어느 때 보다 힘겨운 조업활동을 하고 있다.김 조합장은 요즘 어촌현장에 나가 어업인의 고충을 같이 몸소 느끼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으로 항포구 위판장에 매일 나가 어황을 체크하고 있다. 또한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시내권 상호금융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부안수협의 경영성과는 군단위 수협으로 지역기반이 약한 가운데에서 이룬 성과라 더욱 더 그 가치가 크다. 김 조합장은 부안수협이야 말로 진정한 향토기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전주권 7개 지점, 익산권 2개 지점에서 많은 수익을 창출하여 부안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각종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는 만큼 향토기업인 부안수협을 애용하여 줄 것을 당부했다.△협동조합의 꽃 경제사업 활성화새만금공사로 인하여 부안지역 어업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겼으며 수협 또한 어선구조 조정에 따른 어선세력 약화, 위판량 감소 등으로 인하여 판매사업이 부진한 상황이다.이에 금융사업에만 전념할 수 없다는 취지하에 가공사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부안수협은 부안군 뽕특화사업과 수산물을 접목한 상품개발에 힘써 뽕잎 추출액을 이용하여 염장한 뽕잎고등어, 뽕잎참조기, 뽕잎맛김 등의 신상품을 출시하여 특허획득을 하였고 현재는 연매출 40억의 효자상품으로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있다.단순한 상품개발에 따른 수익 창출보다 이로 인한 부안군 특화산업 홍보 및 관내 생산 수산물 소비에 따른 어업인의 소득증대에게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또한 2010년부터 부안관내에서 많이 생산되는 숭어를 상품으로 가공하여 전국에 납품하고 있으며 올해도 튀김용 새우순살 60톤을 납품하여 새로운 소득원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부안수협은 협동조합의 근본 취지인 조합원의 권익보호와 소득증대에 기여하고자 150여 임직원이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통하여 조합원이 주인인 협동조직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항상 임직원에게 조합의 뿌리는 조합원이라는 근본이념을 주지시키고 있으며 조합원과 소통하며 함께 하는 조합을 만들어 감으로써 진정한 협동조합의 정체성 확립을 실천하고자 앞장서고 있다.● 김진태 조합장 "어업인 삶의 터전 지키기 온 힘"부안은 예로부터 산들바다의 먹거리가 풍부한 고장이었다는 김진태 조합장은 바다의 애환이 서려있는 우리 어업인은 바다사업을 천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무분별한 개발로 인하여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고 언급한 뒤 부안은 새만금공사로 인하여 401k㎡에 달하는 어업인의 삶의 터전이었던 황금어장을 빼앗겼으며 최근 서남해 해상풍력단지 개발사업이 부안군 위도면 남동측에 건설될 계획이어서 어업인들의 어려움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고 안타까워 했다.이와 관련 김 조합장은 자연 친화적인 대체에너지 개발 및 해상풍력 기술강국으로의 도약을 위한 미명아래 마지막 남은 어업인의 삶의 터전 마져 빼앗으려는 정부당국에 분개하지 않을수 없다며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만큼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이와 함께 김 조합장은 사업예정지는 곰소만에서 유입되는 해안선으로 수산자원의 기초먹이가 되는 동식물 프랑크톤과 각종 어류의 산란서직지로 천혜의 어장을 이루는 곳이며 주요 어종의 회유장소로 부안어업인의 어장터로 그 누구도 이를 훼손하거나 탐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 뒤 자연 그대로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기획
  • 양병대
  • 2014.05.01 23:02

(17)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아산 최현식 선생 "제폭구민·보국안민, 동학혁명 정신 잊으면 헛일"

향토역사학자 고(故) 최현식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1세대 격이다. 학계로부터 외면받던 혁명의 흔적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발자취를 담은 연구서가 나올 정도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에서 선구자였다.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2006년 발간한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라는 책에는 최 선생이 자신의 역작인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이 세세히 담겨 있다. 그가 갑오동학농민혁명사를 세상에 내놓은지 34년, 현재까지도 동학을 연구하는 후학들로부터 동학연구 지침서가 되고 있는 이 역작에는 그의 땀과 열정이 녹아있다.전국 각지를 발로 뛰며 자료를 모으고 분석했던 그의 열정이 동학혁명사에 주춧돌이 됐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런 그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자.△아산 최현식의 생애와 활동 아산 최현식 선생은 1923년 고창군 아산면 중월리에서 태어났다.그는 서당공부를 하다 늦깎이로 아산 석곡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41년 일본으로 유학했다.애초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그는 다수의 언론사에서 근무하면서 필력을 다듬었다.고창 출신인 그가 정읍에 정착한 것은 1952년. 이후 그는 1956년 우연히 장봉선 선생이 쓴 〈전봉준실기〉를 접한 뒤부터 동학연구에 매진했다.당시동학란으로 폄하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지역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활동에 들어간 것.마땅한 사료가 없던 시절, 그는 마침 195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학 자료들을 집대성한 동학란기록이라는 자료집을 토대로 본격적인 연구활동에 돌입했다.하지만 한정된 사료로는 깊이 있는 연구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동학유적지, 농민군 유족 등을 만나는 등 현장에서 답을 찾아나갔다.동학농민군의 발길이 닿은 모든 지역에는 그의 발자국이 겹쳐 있다. 그는 전북은 물론 강원도 홍천, 경상도 성주에 이르기까지 동행없는 길을 수없이 걸었다.동학농민군이 진을 쳤던 무장의 호산봉이나 황토재의 도교산이 현지에서 여시메봉으로 불린다든지 한자로 짜맞춘 지명이라든 하는 게 다 최 선생의 노고에서 비롯된 값진 수확이다.아주 단순한 사안일지라도 사건 전개에 정통한 지식과 해당지역에 관한 인문지리를 두루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렇게 녹두장군과 동학농민군의 원혼으로 떠도는 파랑새를 뒤쫓은 지 24년이 되는 1980년 1월, 마침내 대표적인 그의 역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동학농민혁명의 올바른 복원과 자리매김을 위해 그가 바친 열정과 노력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필독서요 지침서인 〈갑오동학혁명사〉에 결집돼 있다.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후속연구에 필요한 상세한 주석은 물론 주도 인물들의 후손까지 추적, 인물지로 엮어놓은 노작 중의 노작이다.이에 198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갑오동학혁명사의 발간이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갑오동학혁명사는 방대한 자료수집과 유적의 세심한 답사와 확인이 결합된 갑오동학혁명사는 권위에 안주하고 있던 당시 역사학계에 경종을 울렸다.주류 역사학계로부터 무시와 괄시를 받았던 그는 향토사학자라는 태생적 한계를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해 냈다.이처럼 열정적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했던 그는 흐르는 세월을 이길 수 없었는지 지병을 앓던 끝에 2011년 끝내 세상을 떠났다.하지만 1980년대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동학연구사에 한 획을 그은 갑오동학혁명사는 현재까지도 동학연구자들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최현식 선생의 저서로는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혁명 인물사료 탐구〉, 〈최현식과 동학농민혁명사〉 등 다수가 있다. 그는 그동안의 연구업적을 높이 평가 받아, 2013년 제3회 동학농민혁명 대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현식 선생의 또다른 진면목최현식 선생은 학문적 연구활동 외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여러 기념사업을 주도했다.그는 1967년 몇몇 뜻있는 이들을 모아 갑오동학혁명 기념사업회를 정읍에서 결성했다.이어 이듬해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를 처음 시작했다.또한 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서도 맹활약했다.실제 정읍 태인초등학교 터에 방치됐던 태인 동헌을 보수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76호)로 등록하는데 힘을 보탰고, 지역의 지명 유래를 밝히는 데도 주력했다. 정읍문화원장으로 재직할 때는 백제 가요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승돼왔던 정읍사악곡인 수제천 연주단을 만들기도 했다.하지만 이 같은 여러 활동의 기반에는 역시 동학이 있었다.그는 생전에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을 올바로 이어받아야 하는 핵심은 그 정신, 동학농민군이 높이들었던 제폭구민(포악한 것을 물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을 구함)과 보국안민(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기치를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이를 잊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었다.△최현식을 기억하는 사람들 1980년 5월 11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당시 야당의 대표로 정읍에서 제13회 갑오동학혁명 기념문화제에 참석해 연설 하신 것을 명분으로 신 군부에 의해 우리사업회가 강제 해산 당했었습니다.관변으로 전락된 사업회를 다시 민간주도로 환원시키기 위해, 100주년 행사인 고부봉기 역사맞이 굿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 여세를 몰아 1995년 민간주도의 사업회를 재건 할 때 처음 뵈었습니다. 강직하면서도 합리적인 분이셨으며 후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좌우를 아우르며 재건의 당위성을 설명 하실 때는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이갑상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현식 선생을 원칙을 우선시 한 학자로 기억한다.이갑상 이사장은 상식에 준하면서도 원칙을 우선으로 한다는 점이 가장 감명 깊게 다가왔다면서 또 후배들에게 쉽게 말을 놓지 않는 모습에서 참어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그는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도 후학들이 사건의 연도를 묻는 질문에는 몇년, 몇월까지 모두 암기하시던 총기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말했다.최현식 선생은 또 자신의 의견만 강요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가진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조광환 전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은 최 선생은 자신의 연구에 오류가 있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인정하는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며 향토사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이런 사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후배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또 역사학자로서의 최 선생을 높이 평가했다.최 선생이 남긴 〈갑오동학혁명사〉는 후배 연구자들의 입문서로 꼽히고 있습니다. 거시적이고 세부적인 관점에서 동학혁명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갑오동학혁명사는 동학연구자와 일반인들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기획
  • 최명국
  • 2014.04.30 23:02

농협중앙회 김문규 상무 "농생명산업 메카 전북혁신도시 활성화에 역할 다할 것"

전북은 최근 들어 새만금개발과 더불어 세계적인 농생명산업의 메카로 급부상하고 있다. 특히 농업관련 시설이 집중되는 전북혁신도시가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가운데, 농협의 역할과 기대 또한 커지는 분위기다.이에 전북일보는 김문규(57) 농협중앙회 상무를 만나 농업인들의 생활향상과 권익보호, 또 농생명산업 활성화를 위한 농업의 역할 등을 들어봤다.김 상무는 농협중앙회장을 보좌하는 총 10명의 상무 중 전북 출신으로는 유일한 고위직 인물이다.- 먼저 전북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해 고향에서 전북본부장을 지내고, 농협은행 부행장과 중앙회 상무로 잇따라 승진했는데 소감이 궁금합니다.전국에서 모여든 농협대학 동기생이 꼭 100명 이었는데, 제가 유일하게 상무까지 승진해 남았고 모두 퇴직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하루하루 업무에 전념해오는 동안, 많은 도민들이 도와주고 그동안 같이 근무했던 직장 동료와 선후배 그리고 농업인들을 비롯한 주위 분들이 적극적으로 아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 첫 출근할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해 농업인들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겠습니다.- 중앙회 상무로서 현재 상호금융지원본부장을 맡고 계신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직책 입니까.농협중앙회 사업은 교육지원사업, 농업경제사업, 축산경제사업, 상호금융사업으로 나뉘어져 있고, 소관 사업별로 대표이사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상호금융지원본부장은 중앙회 사업 내용 중 상호금융사업 전반에 걸쳐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국 1158개 회원 농축협(지점포함 4563개 점포)의 예금적금사업, 대출사업 및 건전성 관리지도, 금리운용 및 자산부채 관리(ALM) 등 리스크관리, 상품개발 등입니다. 마케팅 지도, 신용사업의 경영지도 등 농축협 신용사업과 관련된 전반적인 지도관리 업무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시중은행과 달리 회원 농축협의 상호금융은 도서지역과 산간오지를 불문하고 조합원이 있는 전국에 걸쳐 소재해 있고,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전북은 오랜 기간 농도였으나 전북농협의 사업추진 물량이 전국에서 차지하는 사업의 비중이 감소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전북 인구는 1966년 252만명을 정점으로 매년 감소해 2012년말 기준 189만명까지 줄었고, 도내 농가인구 또한 1990년에 70만8000명에서 2012년말 26만명으로 대폭 감소했습니다. 이에 따라 회원 농축협의 조합원수 또한 감소 추세에 있고, 농외소득이 다른 시도에 비해 낮아 농가소득이 전국 평균에 못 미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적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합원 소득과 직결된 경제사업 추진 과정에서 지자체와의 협력사업인 통합마케팅 전문조직 육성 지원, 공동선별출하 작목반 육성, 로컬푸드 직매장 설치 지원, 유통가공시설 장비 지원, 농식품 6차산업화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등 나름대로의 특화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최근에는 타도 못지 않게 사업량이 크게 확대돼 나가는 추세입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농협이 농민에게 봉사하기 보다는 신용사업에 치중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습니다.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앙회의 경우 지난 2012년 3월 사업구조 개편을 단행, 중앙회 산하에 경제지주회사와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고 신용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여 어려운 농업농촌농업인을 지속 지원 할 수 있는 체제로 개편했습니다. 중앙회 및 자회사의 경영 결과 발생한 잉여금은 주인인 회원 농축협과 조합원에게 배당되거나 농업인 실익사업 등을 통해 전부 환원하고 있습니다. 농협이 조합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사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데, 농축산물 판매사업과 영농자재 구매사업을 하면서 원가에 미치지 못하는 사업을 하거나, 조합원에 대한 실익제공 차원에서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지도사업 등을 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신용사업이 수익창출원(Cash Cow)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운영구조를 이해해야 합니다.-농생명 수도를 표방한 전라북도는 전주완주혁신도시를 중심으로 농업의 메카를 형성하겠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러한 추진 과정에서 농협이 참여하거나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은 있습니까.농촌진흥청한국농수산대학농업과학원식량과학원축산과학원원예특산과학원 등 농업관련 기관이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게 돼 농업정책과 기술을 개발하게 된 것은 정말 잘 된 일입니다. 종자 주권 확보 프로젝트인 골든시드(Golden Seed)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김제에 민간육종단지인 시드밸리(Seed Valley)가 조성될 예정이고, 익산에 국가식품클러스터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협도 전북도정의 동반자이자 농정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당연히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농협의 협동조합적 기능과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참여해야 합니다. 중앙회와 지역 농축협에서 참여해야 할 분야와 방안 등을 별도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문규 상무는 익산 출신전북 농업인 대변 창구 역할 톡톡농협중앙회 김문규 상무(57)는 익산시 용동면이 고향이며, 이리남중, 강경상고를 거쳐 농협대학교(14회)를 졸업했다.농협대학교는 그가 입학 당시 전국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농협 기간요원 양성의 요람 역할을 했고, 오늘날 중앙회 요직에 많이 진출해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다.1978년 익산군농협에 첫 발령을 받아 지금까지 37년째 농협에 몸담고 있다.입사 초기 익산군농협 근무 때 새마을소득 개발사업 소 입식사업 지도를 위해 농촌마을을 돌던 그는 오토바이 사고로 크게 다쳐 지금도 얼굴에 상처가 있는데 동료들은 이를 훈장이라고 부른다.업무에 대한 열정과 창의력이 남달라서 차장 시절 농협 전 임직원 중 전국에서 단 한 명에게만 수여하는 제안대상을 받기도 했다.감사실에 근무할 때에는 일선 영업점포에서의 금융거래 내용을 실시간으로 체크할 수 있는 전산 상시감사시스템을 전 금융기관 최초로 도입해 부정이나 비리 등 금융사고를 예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전북에서는 무주군지부장, 지역본부 부본부장, NH농협은행 초대 전북본부장을 지냈다.본부장 재임시 지역인재 채용에 앞장서 도내 4개 주요 대학에서 직접 취업특강을 실시하는 등 현장과의 스킨십에도 능한 편이다.지난해 6월 NH농협은행 부행장으로 승진한데 이어, 올해 초 농협중앙회 상무로 영전했다.전북 출신으로는 황의영 전 상무 이래 3년만에 중앙회 상무가 탄생, 도내 농업인이나 조합장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대변하는 창구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후문이다.재직 중 서강대 경영대학원 금융 MBA 과정과 전북대 최고위(ACE) 과정을 수료하는 등 사회적 교류나 연구활동에도 힘쓰고 있으며, 틈날 때마다 고향 어머니를 찾아 뵙는 효자로 알려져 있다.

  • 기획
  • 위병기
  • 2014.04.28 23:02

[(14) 고창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 반찬의 달인들, 하루 20톤 생산…'전국 업계 1위' 우뚝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대표 김성배)은 1965년 청량리시장에서 깻잎절임과 무말랭이로 출발해 49년동안 장인정신으로 식품산업 외길을 걸어온 절임반찬 전문업체다.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은 2012년 김성배 대표의 고향인 고창 흥덕산업단지에 최첨단 시스템을 갖춘 공장을 신축 이전하고, 황토고창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식재료를 원료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김 대표는 생물권보존지역 고창지역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수산물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맛과 영양이 풍부하기에 여러 작목반과 연계하여 고창의 농수산물이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절임반찬 50년 외길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은 청량리 재래시장 좌판에서 출발해 총 인원 45명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1980년에 경기도 양주에 제 1공장(절임작업용)을, 2000년에 제 2공장(생산 및 창고)을 신축하고, 중국에 OEM공장은 물론 국내외에 수직 수평적 전략적 제휴업체를 다수 확보하는 등 사세를 넓혔다2013년 전 품목 HACCP 인증을 받았으며, 전국 유통망을 확충했다. 또한 (주)케이-푸드 농업회사법인을 설립하고, 소비자 직거래 채널확대, CJ오쇼핑 런칭 등도 마쳤다. 지난해 연매출 80억 원을 달성했으며, 올해 목표는 30명 고용에 매출 100억 달성이다. 앞으로도 청정고창의 깨끗한 먹거리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연구 개발을 통해 엄마손의 정성이 그대로 고객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50년 전통의 맛 책임지는 장인들제품의 맛을 책임지는 이들은 9명의 반찬 달인들이다. 길게는 35년 짧게는 10년의 경력을 가진 조림, 절임, 무침 달인의 손끝에서 수작업으로 탄생, 매일 전국에 배달된다. 1일 생산 20톤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전국 반찬업계 1위를 당당히 지켜오고 있으며, 주요 판매처는 전국 도매, 재래시장, 케터링, 대형마트, 식자재전문회사, 대기업직원 식당 등이며 주문 생산방식으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가공하고 있다.김 대표는 생활환경 및 식문화의 변화로 이제는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시대에서 사먹는 시대로, 소비자의 트렌드가 급격히 바뀌어가고 있다.며 그렇기에 식품은 더욱 감성까지 아우르는 전문화가 요구되며, 그 전문화에 케이엔비푸드시스템이 앞장서고 있다고 말했다.모든 레시피 및 재료를 관리하고 있는 김재덕 공장장(29년 근무)은 모든 직원이 첫째가 위생이고 둘째가 맛이라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으며, 그 사명감이 지금까지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가 만든 밑반찬은 고창에서 생산되는 신선한 야채만을 선별하여 간장과 식초, 소금 등에 절여 아삭한 식감과 새콤한 맛을 즐길 수 있어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아 준다.대표적인 반찬으로 △절임류=무말랭이무침, 깻잎무침, 파래무침, 고들빼기무침 등 △장류=된장깻잎, 된장고추무침, 초산알마늘 등 △조림류=콩장조림, 연근조림 등 △젓갈류=오징어젓, 낙지젓, 밴댕이젓갈 등.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은 맛과 더불어 위생적인 시설을 강조하는 김 대표의 의지로 전품목(절임류, 수산물조림, 농산물조림)에 걸쳐 HACCP인증을 받았다. 매일 위생교육을 실시하고, 청결 위생복 착용을 의무화 하는 등 소비자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은 전통식품 수준에만 머물러 있던 절임 및 조림식품을 시대조류에 따라 변화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한식의 세계화에 기여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노력하며 식품 제조의 외길을 걷고 있다.● 김성배 대표 "서구 패스트푸드 대응, 전통식품 지키기 혼신"장인정신과 사명감으로 물밀듯 밀려드는 서구 패스트푸드(Fast Food)에 대응해 우리 전통식품을 지켜나가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지난 50년간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 잡아 온 저희 제품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차별화된 제품 생산에도 주력하겠습니다.순할머니반찬으로 시작해 절임반찬 50년 외길을 2대째 걸어 온 (주)케이엔비푸드시스템의 김성배(44) 대표. 김 대표는 전국 어느 곳을 다녀 봐도 고창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을 보지 못했다며 바다와 산, 들, 그리고 사람들 식품 가공산업에 안성맞춤인 곳이다고 말했다.김 대표는 중학교 때 떠난 고향을 2012년에 사업을 위해 다시 찾았다. 고창에 내려오면서 회사 상호도 경북식품에서 케이엔비푸드시스템으로 바꾸고 황토 고창 엄마손반찬이라는 브랜드까지 새롭게 만들었다. 고창에 왔으니 고창특산물을 이용해 제품을 만들어 보자고 맘 먹었죠. 그런데 복분자가 의외로 무말랭이와 궁합이 잘 맞는 거예요. 거기다 고창산 무우가 무말랭이 만들기에 최고더군요. 케이엔비푸드가 고창에 와 개발한 최고의 제품이 복분자무말랭이조림이다. 고창의 깨끗한 공기와 물이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거 같다고 나름 분석하는 김 대표는 고창농산물로 만든 황토 고창 엄마손반찬을 전 국민이 믿고 먹을 수 있는 최고의 브랜드로 키우는 것을 향후 목표로 삼고 있다.

  • 기획
  • 김성규
  • 2014.04.24 23:02

(16) 동학 연구·활동가들 - 故 삼암 표영삼 선생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 바꾸는 것"

필자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서 심사담당관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등록 업무를 담당했다. 그런데 100년이 훨씬 지난 일이어서 그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임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장조사를 매우 심도 있게 진행했다. 그러나 심의위원회 직원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았다. 다시 말해 전문가의 시선과 관점이 필요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삼암 표영삼 선생을 처음 뵙게 됐다. 신청서에 나와 있는 몇 줄 만을 가지고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이럴 경우 표영삼 선생을 모시고 현지 사실조사를 실시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증언했다. 그러나 울분이 앞서 설명이 조리 있게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증언내용은 조각조각으로 구성됐다. 바로 이때 표 선생의 진가가 발휘된다. 그는 몇 개의 조각을 가지고 퍼즐을 맞추듯이 증언을 기초삼아 증언의 앞뒤 관계를 명확하게 짚어준다. 당시 동학교단의 상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심도 있게 분석해준다. 표영삼 선생의 분석으로 묻혀있던 역사가 비로소 우리 앞에 생생하게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설치돼 국가적 차원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에는 바로 표영삼선생의 공이 크다. 조사는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경기도 용인, 강원도 인제와 홍천, 경상도 청송과 영양, 경상도 상주와 예천, 충청도 태안과 서산 그리고 예산, 충청도 보은과 영동, 전라도 전주와 임실 그리고 남원, 전라도 정읍과 고창 그리고 부안과 김제, 전라도 곡성과 화순 그리고 보성, 전라도 장흥과 강진 그리고 무안, 이 모든 곳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족에 대한 조사에서 표 선생은 늘 함께 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표 선생과 조사를 함께 다니면서 이분의 인간적 면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도교 교인으로서 그리고 동학연구가로서 생각과 행동, 말과 행동이 일치하시는 분이셨다. 동학과 천도교가 추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다. 선생은 평소 부인과 아들에게 존대를 했다고 한다. 아침밥도 평생 선생이 담당했다고 한다. 물론 조사과정에서 거의 손자뻘에 해당하는 필자에게도 항상 존대해 주셨다. 그리고 가끔 진정한 동학정신은 끊임없이 삶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필자는 표 선생과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조사를 같이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8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필자는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장기를 기증하고 공식적인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선생은 돌아가시면서까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던 것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고 표영삼 선생 생애와 활동] 천도교 신자이자 연구가'다시 개벽' 강조표영삼선생은 1925년 12월 17일 평안북도 구성군 오봉면 봉덕동에서 부친 표원묵과 모친 김안화 사이에서 출생했다. 원래 이름은 表應麟이었으나 나중에 표응삼으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표영삼으로 개명했다. 천도교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부 표춘학 덕분이었다. 조부가 천도교에 입교한 것은 1900년이었다. 선생의 집안은 3대를 잇는 계대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외가도 독실한 천도교인 집안이었다. 자연스럽게 천도교인으로 성장했다. 1950년 6월 25일 남과 북이 전쟁으로 소용돌이 칠 때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전쟁이 한창 중인 1951년 선생은 부안군 줄포면사무소에서 임시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그는 배급을 담당했는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족 수를 확인하는 등 합리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주인 없는 시신을 직접 묘를 만들어 주는 등 주민들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휴전에 앞서 1952년 12월경 부안에서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천도교청년회를 부활하는 데도 적극 노력했다. 1952년 12월 24일에 부활된 천도교청년회에서 문화부장 겸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된 것을 비롯해 휴전 이후 1953년 8월 개최된 제1차 확대위원회에서도 총무부장 겸 중앙위원으로 선임돼 청년회 활성화에 기여했다. 1961년 이후 10여년 동안 노동현장에 투신해 체신노조, YH노조 설립 등을 지도했다. 노동현장에서 물러난 뒤 1977년 다시 천도교로 돌아와 신인간사 주간, 교화관장, 상주선도사, 교서(교사)편찬위원 및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남은 일생을 천도교 연구에 매진했다. 저술활동으로는 주간으로 활동했던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에 많은 기고를 통해 이뤄졌다. 설교를 비롯해 사적지 답사기, 논문 등 130여 편이 실렸으며, 저서는 〈동학 1〉 〈동학 2〉가 있다. 〈동학 3〉은 유작이 됐다. 그가 천도교와 관련해 남긴 연구성과는 크게 교리연구, 교사연구, 동학유적지 조사 등 세 분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동학유적지의 조사와 정리는 표영삼선생이 독자적으로 구축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이상 성주현, 〈표영삼 선생의 생애와 동학유적지조사〉, 2009 참조) 이같은 공로로 표 선생은 정읍시가 제정한 올 동학농민혁명 대상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는 표영삼 선생은 동학조직과 사상등에 대한 연구자들과 동학의 연결고리가 됐으며 유적지와 후손들의 발굴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표영삼 선생이 남긴 교훈표영삼 선생은 그의 저서 〈동학 1〉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동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이중적인 세계관을 부정한다. 살아가는 이 세상만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감성계와 초감성계로 나누어보는 이원적 관점 자체를 거부한다. 때문에 내일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모든 시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한울님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동학의 꿈이 돼 버렸다. 동학의 발자취는 이제 겨우 100년이 좀 넘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신분제의 타파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항거, 잘못된 나라는 바로잡는데 30만이라는 귀중한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삶의 틀을 바꾸자는 다시 개벽을 위한 희생이었다. 좁은 땅에서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냈다면, 보통의 신념집단이라면 자취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동학의 꿈이 모든 사람들의 지향하려는 꿈과 통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현실의 모순이 자각되는 한, 동학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살아있을 것이다.표영삼 선생은 삶의 틀을 바꾸는 다시 개벽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기본적인 가치로 삼았다. 선생이 제시한 이러한 가치가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추구해야할 방향이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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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23 23:02

혁신도시 이전 앞둔 농촌진흥청 라승용 차장 "전북에 세계적 농업연구 메카 건설, 이제 시작"

라승용 농촌진흥청 차장은 농고 출신으로 9급으로 시작해 1급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로 유명하다.오는 7월 농촌진흥청의 전북혁신도시 이전을 앞두고 수원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농진청의 이전 의미와 향후 기대효과 등을 들어봤다.농진청 공공기관 지방 이전 추진단장을 맡아 전북혁신도시의 농업분야 연구군 집적과 건설을 위한 기본구상을 완성한 그는 오늘의 전북혁신도시 농업생명연구단지를 만드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먼저 농촌진흥청은 어떤 기관인가 설명을 부탁합니다.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은 국가의 기본산업인 농업의 발전과 농업인의 복지향상 및 농촌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도모하기 위해 농업, 농업인, 농촌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연구 개발 및 보급, 농촌지도, 교육훈련, 국제협력을 수행하는 기관입니다. 농진청은 본청과 4개의 소속연구기관, 1개의 재단으로 돼 있습니다. 4개의 소속 연구기관은 농업의 기초기술을 개발하는 국립농업과학원, 식량작물에 관한 기술을 개발하는 국립식량과학원, 원예작물 및 특용작물에 관한 기술을 개발하는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축산에 관한 기술을 개발하는 국립축산과학원 등이며, 각 연구기관에서 개발된 기술의 산업화실용화를 촉진시키는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이 있습니다. 정원은 정규직만 1856명인데 그 중 연구직이 1094명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행정직, 지도직, 기능직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농진청이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농진청이 수원에 자리잡은 지 52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한다는 것은 단지 시설과 직원의 공간적물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 농업연구의 역사와 전통정신을 새로운 연구시설과 청사에 담아 전북혁신도시로 옮겨 우리나라 농산업 발전을 견인하고 세계적 농업연구의 중심이 될 새로운 농업연구 메카를 전북에 건설하는 시발점이 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북으로 이전하는 농진청 및 소속기관은 총 6개로 우선 본청과 국립농업과학원은 오는 7월부터 8월 사이에 이전을 완료할 예정이며, 국립식량과학원,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국립축산과학원은 내년 3월부터 이전을 시작합니다. 농업기술실용화재단은 2016년에 이전할 계획입니다.-농업은 사양산업이란 인식으로 인해 일부 도민들은 농업관련 기관 이전의 효과를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선진국들은 예외 없이 모두 농업에 많은 투자를 하여 전 세계의 농산업 분야를 잠식해 가면서 후진국들을 농업적으로 종속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농업적 종속은 단지 식량뿐만이 아니라 종자농자재농기계가공식품유통기술 등 다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즉 농산업을 포기한 후진국에서는 농업이 사양산업이지만 미국프랑스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농산업이 국가의 성장을 견인해 나가는 중요한 성장산업인 것입니다. 기존 농산업은 주로 단순한 재배법에 의한 농산물 생산이 전부였으나, 현대 농산업에는 생명공학정보통신첨단소재로봇나노테크지리정보 등 다양한 분야의 기술과 융합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으며 그 파생 산업도 지속적으로 창출,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북은 식품산업농기계산업발효산업종자종묘산업관광산업 등에서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고 앞으로 큰 변화가 기대됩니다.-농업관련 기관 대거 이전으로 인해 시험포만 몇 개 설치되는 게 아니냐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습니다.전북혁신도시내 농업생명연구단지의 면적은 630만9000㎡(191만평)로 전북혁신도시 전체 면적의 약 60% 정도며, 그 중 시험포 면적은 344만7000㎡(104만평) 이고 나머지 면적에는 159개의 시험연구시설이 들어서게 됩니다. 시험포장 중 단순한 농산물 생산을 위해 사용되는 면적은 전혀 없으며 모두 새로운 품종개발, 신품종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재배기술 개발, 개발된 기술의 현장 적용을 위한 시험연구 등에 활용될 예정이며, 159개 시험연구 시설에서는 농업과학기술 개발에 필요한 각종 시험, 연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수원에서 근무하는 이전대상 인원은 약 3550명(계약직 포함) 정도 되는데 실제 전주로 이사할 인원은 약 1900명 내외가 될 것으로 추정하며 나머지 인력 약 1650명 정도는 이사 후 현지에서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 농진청의 1년 예산은 1조원 가량이고, 이중 사업비는 약 6000억원 정도 되는데 사업비의 상당 부분은 현지에서 사용될 예정입니다. 김제가 전북혁신도시에서 배제되면서 고향 친구들로부터 자네는 앞으로 고향에 내려오지 말게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꽤 오래 남았었는데 이제 이전이 눈앞의 현실이 되면서 다행입니다. 농진청 직원들이 현지에서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전북도민들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라승용 차장은 '김제 출신9급 농림직 출발, 1급 승진 '신화'라승용 농촌진흥청 차장(571급)은 김제시 신풍동이 고향으로 현재도 그의 어머니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3남1녀 중 장남, 그것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김제중앙초, 김제중학교, 김제농고(현 김제자영고)를 졸업했다.영농학생으로 학비를 절약, 각종 장학금을 받으며 김제농고를 졸업, 1976년 농림직 9급으로 공직에 입문했다.첫 발령지로 국립 부산생사검사소에 발령받은 그는, 군 전역 후 국립자재검사소에 잠시 머물다 농촌진흥청 농약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원의 삶을 시작했다.해충방제 연구와 농약등록 업무를 총괄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92년 연구관 승진시험을 통과, 원예연구소에 발령받으며 원예분야와 인연을 맺었고, 호남농업연구소 식물환경과장을 맡으면서 작물분야 연구에 본격 접했다.농진청 연구운영과장연구정책과장을 거치면서 산학연과 함께하는 특화작목사업단을 기획운영, 농업현장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연구와 컨설팅 모델도 만들었다.2007년부터는 연구개발국장으로서 농업과학기술의 중장기 계획 완성과 차세대바이오그린 사업을 시작했다.2008년 말 농진청 소속기관 중 하나인 국립축산과학원장에 응모, 비전공자로서는 최초로 원장에 발탁됐고, 연구행정형 최우수기관으로 평가받아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그는 농진청 연구직 최초로 4개 연구기관에 모두 근무하는 기록을 썼다.2012년에는 국립농업과학원장으로 부임하면서 1급으로 승진, 농업 기초기반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다.지난해 초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농촌진흥청 차장으로 발탁돼 이양호 청장과 호흡을 맞춰가면서 현장중심, 정책중심의 연구와 지도, 교육체계를 만들어가고 선진농업기술을 3세계에 전달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 중이다.라 차장은 이처럼 치열하게 업무를 추진하면서도 방송통신대를 마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아 학창시절 못다한 꿈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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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병기
  • 2014.04.21 23:02

[(13) 순창장류(주)] 생산 시스템 현대화 '전통메주 국내 1위 업체' 자리매김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는 순창의 농산물을 순창의 기술로 세계인의 식탁에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메주 생산의 위생적인 현대화 시설을 갖춰 안전한 먹거리와 양질의 장류 제품을 생산하는 장류 생산의 새로운 성장 거점 기업이다.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며 기술개발 및 품질표준화를 통한 세계적 식품화를 목표로 설립됐다. 2009년 메주공장(제1공장)을 완공함과 동시에 전통 메주 자동화 생산시스템 설비를 구축하여 시험생산했으며,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를 설립하고 HACCP 인증을 획득했다.이어 2012년에는 장류공장(제2공장)을 완공하고 한식메주와 간장 등을 생산하고 있다.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는 메주 자동화 생산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안전하고 위생적인 메주를 공급하고 있으며, 지역원료의 우선 구입과 지역 인력을 고용함으로써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에서 생산된 전통식 메주는 주변 민속마을과 순창에 위치한 기업에 납품하고 있으며, 한식간장과 된장은 직접판매 또는 온라인 판매가 되고 있다. 임직원은 12명으로 관리팀, 품질검사팀, 생산팀으로 구성되어 있다.관림팀은 기획, 총무, 인사, 회계/경리, 자금, 영업, 구매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품질검사팀은 신제품개발 및 제품생산에 관한 개량연구, 장류에 관련된 기초과학연구, 기업부설 연구소 설립 및 운영관련 업무와 기술도입, 이전 및 기술계약 관련업무, 특허권 등 산업재산권 개발 및 관리 업무, 국내외 규격인증 관련업무, 산학연 공동연구개발 과제 수행업무 등을 맡고 있다. 여기에 생산팀은 자재관리 및 생산에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흑자 운영으로 3.5% 배당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가 지난 3월 28일 열린 제4회 정기주주총회에서 2013년도 매출 흑자를 계기로 주주들에게 은행 수익보다 높은 3.5%를 배당하는 것으로 확정했다.주총 자료에 따르면 2013년도 14억5000만원 매출과 7000만원의 영업이익, 그리고 1억4000만원의 단기순이익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2014년 3월 20일 기준 홈쇼핑 12억 매출과, 2015년 메주 350톤의 홈쇼핑 판매계약을 확보함으로써 국내에서 메주 단일품목으로는 국내 1위 생산공장으로 자리매김 되었다.특히 향후 2014년 매출 30억과 2015년에 매출 50억 달성을 경영목표로 제시했다.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는 2013년 생산콩 총 321.7톤을 구매했으며, 2014년 상반기 매출증대에 힘입어 순창 콩 130톤을 추가로 구매함으로써 2014년에는 총 400톤의 콩을 구매하여 농가에게 안정적인 소득이 창출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방침이어서 향후 순창 콩의 지속적 계약재배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HACCP과정으로 생산되는 순창된장간장순창장류(주)는 전국 최초 HACCP(헷삽)메주 승인을 받았으며 사용되는 원자재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순수 순창콩 100% 메주로 만든 순창된장과 간장이 명절 선물 인기상품은 물론 홈쇼핑 등에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특히 순창된장과 간장은 순창에서 생산되는 콩을 계약재배 방식으로 구매해 헷삽메주공장에서 우수한 순창발효미생물과 현대식 제조설비를 활용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기존 제품에 비해 품질과 위생적인 측면에서 한단계 높아졌다.또 순창된장과 간장은 순창군수가 인증하는 저염 기능성 제품으로 도시민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높은 소득을 올리는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순창장류(주)애서 판매되는 선물셋트는 현재 1호부터 3호까지 있다. 간장, 된장, 감식초, 고추장이 들어있는 1호제품은 3만9000원에 판매되며, 간장 2개, 된장 2개 셋트로 이뤄진 2호상품은 3만7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3호는 이번 설명절에 새로 추가된 상품으로, 간장 1개, 고추장 1개, 된장 1개, 청국장환 2개가 4만9600원에 판매된다. 순창장류(주)에서 생산되는 순창된장, 순창간장은 최근 웰빙을 추구하는 도시민의 입맛에 딱 맞는 제품으로 고급스러움과 세련미까지 갖춰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김중필 대표이사 "맛과 품질, 대기업 제품과 차별화...전국 식품시장 유통망 확보 박차"김중필 대표이사는 우리나라 전통장류 식품시장 규모는 50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장류식품산업은 꾸준한 수요와 안정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는 현대화된 국내 최고의 위생적인 생산설비와 한국 장류산업의 메카인 순창이라는 브랜드를 발판으로 전통장류 식품시장에서의 성공을 확신한다고 말했다.특히 김 대표이사는 전통장류 식품기업에서 오랜 기간 장류식품을 연구하며 쌓은 노하우와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를 작지만 강한 강소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고 강조했다.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 대표이사를 맡은 후로 김 대표는 맛과 품질의 균일화를 위한 생산시스템 구축과 전국적인 판매망 확대를 위한 공격적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전국적인 인지도 확대를 위해 홈쇼핑 판매에 도전하여 추석 명절과 설 명절에 순창의 대표적인 지역특산품으로 인기를 높여가고 있다.김 대표이사는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는 전국 최초로 현대화된 생산 공정으로 위생적인 자동화 생산시스템을 도입해 균일화된 맛과 품질, 소비자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 생산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며 대기업이 선점한 식품시장에서 초기 전국적인 유통망 확대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맛과 품질, 생산설비 등에서 차별화된 경쟁우위를 갖고 있어 단기간에 전국적인 식품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그는 농업회사법인 순창장류(주)에서 생산된 메주, 간장, 된장은 순창을 대표하는 지역특산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면서 순창지역 농민들과 고추장민속마을의 제조업체와 긴밀한 협업시스템을 구축, 지역경제 활성화에 일조하는 견실한 식품기업으로 키워나가겠다고 강조했다.김 대표이사는 또순창장류(주)는 2011년 5억4000만원 매출에서 2012년 7억2000만원 매출, 2013년 10억1000만원 매출을 달성해 군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농업회사법인으로 꾸준하게 성장하고 있다면서 내년에는 매출 30억과 순수영업이익 2억원을 달성하는 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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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남근
  • 2014.04.17 23:02

[(15) 동학 연구·활동가들] 배항섭 교수 "'근대' 에만 매달리는 연구 한계…미래지향적 접근 중요"

농민전쟁은배항섭 교수(성균관대)는 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을 가리켜 시종 농민전쟁이라고 불렀다.2004년에 동학농민혁명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일단 국가적으로 공인된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이다.어떤 이들은 이 사건의 본질은 민중봉기고 동학이라는 종교의 역할은 미미했으니 동학이라는 단어를 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동학이라는 조직이 갖는 의미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며 반박하기도 한다.배 교수는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했다. 농민이 주도한 대규모의 변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전쟁이라고 부를 만하다는 것이다.논쟁이다. 용어 하나를 놓고서도 논쟁이 벌어진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계각층이 제 나름대로의 논리를 펴며 연구를 진전시키고 있다.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임술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운동 등의 책을 펴냈고 지금도 꾸준히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동학농민혁명 연구의 권위자 배항섭 교수를 만나 지금까지 진행된 학계의 연구와 논쟁의 흐름을 들어봤다.△동학혁명 연구, 군사정권기 거쳐 80년대에 절정시작은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시대적 배경이 그랬다.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항쟁을 했던 농민들은 여지없이 반역을 일으킨 무리였다.일본인 사학자들은 이를 식민사학에 연결시켜, 조선사회는 이만큼 부패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는 논리를 펴나갔다.동학농민혁명에 관한 한국인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김제 출신의 김상기(서울대 교수 역임)가 동아일보에 동학과 동학난이라는 글을 연재하면서부터다.해방 이후에는 한우근이 반외세적 성격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며 해방 이후 세대의 연구를 이끌었다.월북 학자인 전석담은 1949년 마르크스주의 사관을 통해 동학혁명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했다. 그는 동학혁명을 민중항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봉건적 질서를 완전히 타도하지 못하고 근대적 자유를 누리는데에는 실패했다며 이를 한계로 꼽았다.또 50년대에는 김용섭이 민중의 의식 성장이 낳은 변혁운동이라는 관점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김용섭의 이런 연구는 4.19 혁명의 경험과 맞물려 이후의 연구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반봉건반외세라는 공식은 이 때 굳어지기 시작한 것.516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혁명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동학혁명을 건드렸다.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아오는 근대를 향한 열망이 함께했다. 그 반대편에서는 민중에 의한 사회 변혁이라는 이상이 투영된 연구가 이뤄졌다.동학농민혁명 연구는 80년대에 폭발하듯 쏟아졌다. 이이화, 정창렬, 신용하 등의 걸출한 학자들이 저마다의 연구성과를 발표했다.소장학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는 연인원 50명이 투입된 1894년 농민전쟁연구라는 5권짜리 책을 내놨는데, 이들이 해온 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1994년은 동학혁명 100주년이었다. 전국적으로 연구 붐이 일었고, 본보도 기획취재팀을 꾸려 자료를 발굴했다.△100주년 이후 퇴조잃어버린 20년그리고 100주년이 지난 다음에는 연구들이 확 줄어버렸어요.의외였다. 100주년을 계기로 더 활성화된 것이 아니라 퇴조해버렸다니, 그 이유가 뭐였을까?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진전이 시작됐고, 1992년에는 문민정부가 들어섰죠. 그런 과정 속에서 사회 변혁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이죠.여기에, 1990년대 말에는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먹고사니즘이 우리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떠올랐다. 사회 변혁이 세간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냉전이 종식되고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사조들이 나타나면서 이념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이뤄지던 일국사 중심주의적 연구 경향도 비판을 받았다. 우리 학계는 여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동학혁명에 대한 연구는 올 스톱에 가까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박사학위 논문조차도 가뭄에 콩 나듯 한 상황이었다.새로운 과제에 입각한 새로운 연구가 이뤄져야 하는데, 많은 연구자들이 100주년을 기점으로 농민전쟁 연구에서 손을 놓았고, 신진 연구자들의 유입은 이뤄지지 않고, 이렇게 침체된 것이 최근 20년이었죠.△동학농민혁명은 과연 근대를 지향했는가연구가 전반적으로 침체된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학계에서 요즘 가장 핫한 이슈는 무엇인지 물었다. 배항섭 교수는 근대에 관한 논쟁을 꼽았다.재일사학자 조경달은, 농민군들이 서구적 근대를 지향했다는 주류적 견해와는 달리, 농민군들이 반자본주의와 반식민주의를 포함한 다른 의미의 근대를 지향했다고 주장했다.그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를 근대성의 요소로 본다면, 농민군이 주장한 토지의 평균분작과 같은 것은 이에 배치된다고 봤다. 따라서 서구적 개념의 근대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특히 전세계적으로도 민중혁명은 근대적 체제를 세우려 했던 부르주아 혁명과는 달리 어떤 새로운 요소가 자신들의 삶을 위협할 때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서 일어났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됐다.배 교수의 생각은 어떨까?그는 농민전쟁이 분명 근대를 지향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근대라고까지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근대와 반근대라는 구분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독자적인 영역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근대성 틀 벗고 다양한 의미 살려야반봉건반외세라는 것도 서구적인 기준에 농민전쟁을 맞추는 것이죠. 서구적 근대화를 우리가 달성했어야 하는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그걸 찾아내려고 하고.교과서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이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운동이라는 단원 아래 근대적 개혁 추진 과정이라는 부분에서 소개되고 있다.식민사관의 반작용이었다. 우리도 독자적으로 근대화를 이뤘다고 말해야 했고,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서구의 경험에 이만큼 미달한 상태에 놓였다.사실 환경문제 같은 것만 보더라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라는 것 자체가 회의와 비판의 대상이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근대에만 매달리는 연구는 문제가 있죠.현재에 맞는 연구, 동학혁명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살리는 연구. 배항섭 교수는 그런 새로운 연구 경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 사건이 서구와는 얼마나 달랐는지, 얼마나 우리의 독자성이 있었는지를 보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 기획
  • 권혁일
  • 2014.04.16 23:02

취임 100일 이태연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장 "지역 특성 맞는 산업의 선택과 집중 전략 중요"

이태연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장이 취임한 지 지난 10일로 꼭 100일이 지났다. 경기도 수원 출신인 그는 모두 네 번의 지역 근무 가운데 지난 1995년에 이어 전북 지역에서만 두 차례 근무를 하게 됐다. 이 본부장은 밤낮으로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일 전주시 팔복동에 있는 중소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 본부장실에서 그를 만나 취임 소감과 업무를 추진하면서 느낀 점,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어봤다.-어느덧 취임한 지 석 달이 넘었습니다. 먼저 소감은.“과장 시절이던 지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전북지역본부에서 즐겁고 보람되게 근무했었는데, 다시 전북 중소기업에 도움 드릴 수 있는 업무를 맡게 돼 대단히 반갑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임 후 도내 중소기업의 현황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이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면서 보냈습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고 느낍니다.”-지난 100일간 근무하면서 도내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은 어떤 점이라고 느끼셨나요.“과거 전북에 근무했을 때 200만이 넘던 인구가 190만 아래로 감소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인구가 줄어든 것은 그만큼 일자리도 감소했다는 얘기가 될 것이고, 일자리가 줄어든 만큼 경제의 활력도 떨어진 것 아닌가 합니다. 중진공이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중소 제조업 현황만 놓고 본다면 도내 기업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수익성이 낮은 측면이 있습니다. 또 협력 중소기업으로부터 부품을 공급받는 관계를 갖는 대기업의 수가 적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중소기업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 있습니다.”-그렇다면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지역 특성에 맞는 산업의 ‘선택’과 ‘집중’전략이 중요합니다. 이 선택과 집중에 의한 육성으로 중소기업과 다양한 협력 관계를 갖춘 대기업을 유치하고, 성장성 있는 중견 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한 방안이라고 봅니다. 국가 식품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식품전문 산업단지를 집중 지원해 안정성과 수익성이 확보된 식품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도내 특성에 잘 맞는 정책이라 생각합니다. 또 탄소산업 육성도 10년 이상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이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전임 근무지였던 울산에 비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의 비중이 큰 전북입니다. 전북 중소기업의 발전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울산은 지난 2011년 7월부터 1년 6개월을 근무했습니다. 울산은 대기업 중심으로 석유화학과 자동차, 조선의 3대 주력 업종의 높은 산업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성장과 그 발전의 괘를 같이하면서 중소기업의 자체적인 성장을 위한 노력과 경험이 부족한 것은 창조 경제 시대의 약점으로 지적됩니다. 이에 반해 전북은 새로운 시장과 제품을 창조하기 위한 중소기업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많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도내 중소기업들의 성장 가능성은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더 크게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흔히 중소기업의 경우 인력 미스 매치를 큰 애로 사항으로 꼽고 있는데요.“중소기업의 인력 문제는 하나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오는 것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에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에서는 지난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총 28개의 으뜸기업을 선정했습니다. 이와 관련 올해 하반기에는 중소기업의 인식 개선과 우수한 지역 인재의 매칭을 위해 도내 대학과 연계한 ‘으뜸기업 CEO 특강’을 실시할 계획입니다. 현재 도내 2~3개 대학 및 으뜸기업 CEO들과 지속적으로 협의 중인 사안으로 대학교의 정규 교양과목으로 개설해 중소기업과 우수 인재의 만남의 장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또 중소기업에 장기 근무한 직원에 대한 복지 제도 향상을 위해 올해 하반기 ‘성과보상공제기금 제도’운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핵심 인력 성과보상공제기금은 기업주와 핵심 인력이 5년 간 매월 일정 금액을 공동으로 적립하고, 핵심 인력이 만기까지 재직할 경우 공동 적립금을 성과 보상금으로 지급하는 제도입니다.”-창조 경제와 일자리 창출이 화두입니다. 중진공에도 중요한 시기가 될 듯합니다. 이와 관련 중진공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창조 경제는 벤처·중소기업이 경제성장의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중진공의 중소기업 육성 정책 자체가 창조 경제의 핵심 사업입니다. 특히 중소기업이 새로운 시장에 새로운 방식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집중 육성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 청년 창업자에 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창업 지원에 대한 비중을 점차 높이고 있고, 일자리를 새로이 창출하는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1명당 0.1%씩 최대 2%의 금리 인하 혜택도 드리고 있습니다.”-재임 기간에 역점을 두고 진행할 사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10인 미만 소규모 제조 기업을 위한 ‘소공인 특화 자금’지원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올해 도내 소공인 지원 예산은 72억 원으로 지난해 예산 20억 원에 비해 350% 이상 증가해 담보력이 부족한 도내 소공인의 유동성 확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소공인이 정책 자금을 활용할 수 있도록 홍보하고 더불어 생산 현장의 다양한 문제와 개선점을 제시하는 원포인트 레슨 컨설팅도 병행해 실시할 예정입니다. 기업에 대한 중진공의 건강진단 노하우가 빛을 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끝으로 도민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100일 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들었던 것은 전북 지역의 경제가 뒤처져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약점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약점이 강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풍족한 것이 잘 사는 기준이 아닌 멋스럽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당장의 캐쉬카우 사업은 아니지만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한스타일, 탄소, 식품 등을 협업해 육성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중진공도 도내 산업이 발전하고 경제가 넉넉해지는데 일조하도록 발 벗고 뛰겠습니다. 중진공의 문은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에게 늘 열려 있으니 편하게 찾아 다양한 지원 수단을 최대한 활용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이태연 본부장은 중소기업 '건강진단' 지식 해박…M&A 전문 딜러 자격증도중소기업진흥공단 이태연 전북지역본부장(52)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중소기업 컨설팅과 기획 관리 분야에 경험을 두루 갖췄다.이 본부장은 정보화 지원 분야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고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전사적 자원 관리(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일조했다. 본사 기획조정실과 경영지원실에서 근무하면서 핵심 브레인의 역할을 해 왔다.수원 수성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취득했다. 지난 1988년 중소기업진흥공단 공채 18기로 입사해 경영지원실 노무담당부장과 경기지역본부 기업혁신지원1팀장, 기획조정실 성과관리팀장, 경영지원실 총무팀장, 울산지역본부장 등의 주요직을 역임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근무 당시 지식경제부 국가균형발전 추진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중소기업에 건강진단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노하우로 경영지도사(생산관리) 자격증과 M&A 전문 딜러 자격증 등을 소지하고 있다.평소 대내외 업무 추진력은 물론 친화력이 뛰어나 직원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앞으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정책 자금의 융자·투자와 마케팅 지원, 인력 양성, 컨설팅 지원 등 중소기업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문민주
  • 2014.04.14 23:02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 "사회변혁 위해 젊음 불태우는 세대에게서 희망 발견"

인터넷 검색어에 그의 이름 석 자를 쳐보았다. 크고 작은 기사와 블로그 글이 적잖이 쏟아졌다. 모두가 여성인권과 여성평등을 향한 치열한 분투의 현장기록. 2000년대의 치열했던 여성운동 현장에 그의 삶이 촘촘히 놓여있었다. 절망과 분노, 기대와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20대와 30대의 아름다운 청춘과 40대를 가로질러온 30년 세월을 온전히 여성운동에 바친 그에게 세상은 얼마큼 변했을까. 한국여성단체연합 김금옥 상임대표(50)를 만났다. 사회의 고질적 병폐와 견고한 장벽을 허무는 싸움이 쉬울 리 없지만 그는 고단함 대신 패기가 넘쳐보였다. 1990년대 전주에서 여성운동을 시작했던 그는 2000년대 초반, 한국여성운동연합 정책국장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대학시절 학생운동 동지로 만나 결혼한 남편과 10년째 주말 부부로 지내며 전주와 서울을 오가고 있다. 짧지 않은 세월, 사회변혁을 위해 현장을 지켜온 그 힘의 근원은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그는 내가 기꺼이 선택한 길이니 어떤 일이 주어지든 피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그를 길 위로 부른 분명한 주체가 있었다.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들의 절규,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소명이었다. 인터뷰는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의 여성미래센터 한국여성단체연합 그의 집무실에서 있었다. -사무실이 아주 좋습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이 마련한 건물이라는데 재력이 탄탄한 모양입니다.세 들어 살다가 그것도 단체의 자력으로 내 집을 얻었으니 자랑스럽긴 하죠.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좀 버겁습니다.(웃음) -그래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여성운동 관련 단체와 활동가들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미래여성센터라는 이름도 상징적이고요. 재원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여연 사무실이 있던 장충동 건물을 팔아 기본 재원을 만들었어요. 당시 여성 단체들의 전세금과 독일 재단의 지원금으로 마련했던 여성평화의 집 이었는데, 건물이 너무 낡아 정비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아예 새 건물을 마련하자고 뜻을 모아 추진했죠. 2005년에 간신히 팔려 임시 사무실을 얻어 지내다 모금으로 재원을 보태 이 건물을 얻었습니다.-김 대표가 서울로 올라온 직후겠군요. 그렇죠. 처음엔 정책국장으로 있다가 2005년에 사무처장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 새로운 사옥 마련 사업이 막 시작되어 제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얻느라 서울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그렇다보니 부동산 용어에 익숙해져서 부동산 투기꾼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니 자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서 건축설계에 조경까지 공부하며 예산을 절감했습니다.-서울로 옮겨온 것이 2004년인데, 그동안 쉴 새 없이 일하셨더군요. 성매매방지법을 비롯해 김 대표가 일했던 지난 10년 동안 여성인권과 관련해 성과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군요. 한국여연과 인연이 된 것이 2004년 1월인데, 정책국장으로 일을 시작했을 때가 마침 선거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어요. 와서 보니 그 전해 말에 여연에서 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 운동을 진행하고 있더군요.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도 국회에 내놓고 있었고, 성매매방지법 제정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전문가들이 각국의 선진법을 검토하면서 우리나라의 윤락행위방지법을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그런 사업 모두 한국여연이 중심에 서야할 일이었습니다.-당시맑은정치 여성네트워크의 성과 또한 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성들의 국회진출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워낙 여성 국회의원이 적었으니까요. 여성 국회의원 100인보내기 운동을 내세워 한국여성단체협의회와 통합선거 여성연대를 만들어 운동을 벌였는데 여성의 정치참여 확대를 위한 법제도를 개선하고 국회의원 30% 할당 등 기본적 방향은 함께 추진했지만, 단체의 지향성은 서로 다르니 여연은 맑은 정치네트워크를 따로 만들어 후보 선정기준으로 삼았어요.-어쨌든 성과도 좋았고 반향도 컸지요. 물론이죠. 17대 때 여성의원들이 가장 많이 들어갔어요. 13%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기초의원까지 합하면 비로소 아시아 평준이 됐다고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여성연합의 맑은 네트워크 정당이 가장 많은 여성 의원을 당선시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때는 정당도 여야 구분하지 않았어요. 오로지 여성으로만 승부했지요.(웃음)-그해에 성매매방지법도 만들어졌죠.성매매방지법은 2004년 3월에 통과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일이었는데 그 법이 통과하는 현장을 저 혼자 보았어요. 당초 2월 말일엔가 국회에 상정되어 우리 단체에서도 방청을 하러 갔는데, 안건이 밀리면서 처리 되지 못해 다음 회기로 넘어갔거든요. 그 날은 또 안 될 수도 있겠다 싶어 혼자 갔는데 통과된 거예요. 그때의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성매매방지법 제정의 기쁨은 김 대표께 특히 각별할 것 같습니다. 그 법의 동인이 된 것이 군산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이지 않습니까. 사실 성매매방지법은 사회적 논쟁의 지점도 많고 합의하기 쉽지 않은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산 화재사건이 우리 사회에 아주 강한 메시지를 던졌고, 그에 대해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웠거든요. 전문가들이 소신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성매매방지법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던 셈이에요. 그때 내용을 보면 처벌법과 보호법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만장일치, 하나는 기권이 나왔어요. 군산 개복동 윤락업소 집결지 화재사건은 2002년 1월 29일, 그곳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14명이 화재로 숨진 사건이다. 그에 앞서 2000년 9월, 군산시 대명동에서도 20대 여성 5명이 숨지는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모두가 매매춘 여성들이었다. 당시 전기누전으로 밝혀진 이 화재는 20여분 만에 진화됐지만 희생된 매매춘 여성들의 일기와 수첩이 발견되면서 인권을 유린당한 채 감금된 일상을 살아야 했던 성매매여성들의 삶이 낱낱이 밝혀졌다. -군산 개복동 화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곳 피해 여성들의 국가대상 소송을 비롯해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위한 토대를 이루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했었죠. 대명동 화재사건도 그렇지만 연이은 개복동 화재는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사실 그 사건은 어쩌면 단순 화재 사건으로 묻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매매여성들을 지원하는 새움터가 있어 실상이 밝혀질 수 있었죠. 개복동 화재가 난 직후 저희가 갔을 때 현장은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어요.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현장을 보며 분노가 치밀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신매매와 감금상태에서 성매매와 성착취를 당하며 살고 있는 여성들이 21세기에도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그런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군요. 그런 희생을 딛고서야 법을 만들 수 있었던 셈인데, 성매매방지법보다 훨씬 앞서 추진되었던 호주제 폐지법보다도 앞서 제정될 정도로 사회적 공분이 컸습니다.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6개월 후 시행된 첫날이 9월 23일이었는데, 바로 그날 군산화재사건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한 대법원 확정판결이 났어요. 9월 23일은 그래서 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성매매방지법이 시행되면서 후유증은 없었습니까. 엄청났어요.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그 곳에서 나온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렇게 되니 업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법제정에 반기를 들었죠. 사실 그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적이고 조직적입니다. 얼마나 지능적으로 진화하는지 놀라워요. 개별범죄가 아니라 조직범죄이기 때문에 더 그렇죠. 기득권 권력과도 연결되어 있고. 규모가 큰 집결지는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인데 성매매여성들의 주소지를 옮기게 해 투표권을 갖게 하고 그것으로 세력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제정도 그렇지만 이 법이 어떻게 정착되어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엄청난 반발이 있었어요. 성매매방지법을 교묘하게 왜곡시켜 성매매여성들을 자극해 거리로 나오게 했지요. 사실 성매매라는 용어는 객관적으로 알선업자와 수요자를 말하는 겁니다. 여성은 거기서 주체가 아니거든요. 우리 쪽에서 제안했던 법안에는 성을 사는 사람과 알선업자는 처벌하되 여성들은 처벌하지 않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이견이 나오면서 조항 몇 개가 빠져 통과되었어요. 제정된 성매매방지법은 본인이 자발적인 성매매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입증을 해야 처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어려운 일이죠. 그런 내용을 악용해 업주들이 니들 생존권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거리로 내몰았어요. 여성들이 길거리로 마스크와 모자 쓰고 나와 시위를 하고,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항의 전화와 협박이 쏟아졌지요.-그래도 보람 있는 성과였고, 성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죠.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이 법이 시행되면서 언론도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외신들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가 스웨덴인데, 우리 법도 스웨덴에 버금가는 내용으로 만들었거든요. 사실 군산 화재 사건이후에 미국무성이 내놓는 인권보고서에 한국이 3등 국가로 찍혔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만들어지면서 다시 1등급으로 올라갔습니다.-화제를 돌리겠습니다. 격변의 시대 상황에서 시민운동은 새로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운동 역시 그 흐름의 중심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2000년대는 특히 부침이 심했던 시기여서 여성운동도 큰 틀에서 보면 시민사회운동의 변화와 같은 연상에 있습니다. 그래도 여성운동은 특히 돋보이는 성과들이 있었습니다. 성매매방지법 호주제 폐지 등 법제정 성과가 나왔고. 여성들의 정계 진출도 두드러졌죠. 가시적인 성과들이 유난히 많았던 셈인데, 그래서 비판도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여성인권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고민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말씀이겠군요. 맞습니다. 그런 비판들을 수용하면서 법제도를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권리로 실현될 수 있게 할까 대중적 확산의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촛불시위 이후 이런 고민은 여성운동 진영에서 더 본격적으로 하게 됐지요.-그렇게 된 시대적 환경이 있는 것 아닙니까. MB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여성부 존속문제까지 나오면서 그동안 일궈온 사회변화의 물결이 후퇴하는 환경에 직면했던 때문이죠. 개인적으로도 그때 당시의 상황을 목도하면서 제 그동안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청춘을 바쳐 함께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환경이 거꾸로 돌아가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더군요.-그런 상황에서도 미래여성센터를 열었고 여성인권 문제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진전된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악한 환경을 알면서도 여성운동에 나서거나 사회변혁을 위한 일에 자기 꿈을 갖고 실현해가는 젊은 세대들을 만나면 다시 의지가 생기거든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토대가 여전히 탄탄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을 보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각자 다른 삶이 있음에도 함께 가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런 곳에서 희망을 보게 되요 -공동대표를 거쳐 올해 상임대표를 맡았습니다. 부담이 적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담이었습니까. 지금까지 여성운동을 해오면서 조직 안에서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자세를 지켜왔습니다. 상임대표가 안겨졌을 때도 그런 의지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상임대표로서 갖게 되는 부담은 또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상임대표는 진보개혁적인 사회운동을 하는 시민운동 영역의 여성부문 대표성도 갖고 있는데다 그 대표성 때문에 격려도 비판도 받는 자리예요. 한편으로 한국여연은 대중적 신뢰와 한국사회의 진보적 여성운동에 기여했던 공로가 있습니다. 여성단체 연합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명예도 있고요. 그러한 명예를 상임대표라는 이름으로 갖게 되는 것이 가장 부담스럽더군요. -가뜩이나 일을 몰고 다니시는 편인데, 앞으로 하실 일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 여연은 중임제만 허용합니다. 공동대표와 상임대표까지 중임을 거치는 셈이니 2017년이면 제 임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2017년은 우리 단체가 3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새로운 여성운동의 기틀을 만들어야하죠. 여성노인문제, 여성빈곤화 등 새로운 의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의제를 발굴해 대안을 모색하고 30주년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런 저런 모색들을 올해와 내년에 해야 합니다. 올해가 그 시작인 셈입니다.● 김금옥 상임대표는 군산 출신, 여성운동 30년 외길성매매 방지 법제화 앞장김금옥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군산에서 태어나 성장했다.원칙과 공정함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아온 부모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부당한 일에 늘 맞서왔으며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려고 이름을 금옥(錦沃)으로 지었다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난 후 평등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됐다.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가 일찌감치 학생운동에 뛰어든 것도,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선 것도 그러한 의식의 영향이 컸다.총여학생회장이 되어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북지역 여성운동의 기틀을 다진 전북민주여성회에서 일했다.여성인권과 여성평등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성폭행에 대한 사회적 이슈를 불러일으킨 김부남 사건 대책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성폭력예방센터에서 활동했던 그는 노동운동 현장에도 관심이 높아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94년 결혼한 이후에는 위기에 놓였던 전북여성단체연합에 들어가 제 2의 창립을 도왔다.전북지역 여성운동의 토대를 만들고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발굴해 정책과 사업으로 이끌어낸 보람은 있었지만 대학원 진학의 꿈은 꺾였다. 20대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운 여성운동의 궤적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로 꼽는 것은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이끌어낸 군산 개복동 화재 피해자 지원과 성매매여성 지원 대책 활동이다.2000년 대명동화재의 악몽이 가시기도 전에 2002년 개복동 화재가 일어나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가 인신매매와 강압적인 성착취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관성적으로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새로운 운동영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창조적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위해 2003년 전북여연에서 나와 필리핀에 갔다. 국제적인 시민운동단체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운동의 새로운 영역을 모색하고 싶었다.1년 남짓 NGO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길을 찾았지만, 한국여성단체연합의 제안을 받고 서울로 갔다.2004년 1월이었다. 정책국장으로 시작해 사무처장과 공동대표를 거치는 동안 늘 일을 몰고 다녔다. 성매매방지 호주제폐지 법제화로 여성평등 여성인권의 사회적 장치를 마련한 것도, 한국여연의 번듯한 거점을 마련한 것도 그가 중심에서 일구어놓은 성과다.여성운동의 대중화를 늘 고민해온 그는 최근 여연 상근 활동가 출신 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 형식의 연구소를 만들었다.2017년 임기가 끝나면 그곳에서 새로운 열정으로 일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4.10 23:02

(14) 동학 연구·활동가들 - 정남기 유족회 고문 "동학혁명은 민족의 유산, 주민참여형 사업 개발 필요"

동학농민혁명 유가족들의 위상은 혁명에 대한 평가와 궤를 같이 했다. ‘난’으로 치부되던 일제강점기까지 이름을 숨기고, 고향을 등진 채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경우도 많았다. 선대가 혁명에 참여했던 사실을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때는 혁명이 본격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100주년 즈음이었다. “이전까지 유족 스스로도 인식이 안됐고, ‘내가 후손이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동학농민혁명유족회 발족 당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족회의 산파역을 맡았던 정남기 전 회장(71, 현 유족회 상임고문)을 만나 혁명이 어떻게 기려져야 할지 들어보았다. 정 전 회장은 유족회 결성 당시 총무를 맡았고(초대 회장은 김인배 후손 김영중씨), 2000년부터 10년 가까이 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했다.-100년이 지난 뒤에야 유족회가 결성됐습니다. 어떻게 유족회가 출범했는지.“지도자들의 후손을 제외하고 일반 참여자들의 후손은 그동안 밖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을 꺼리는 분위기 아니었습니까. 유족회 발족도 유족이 아닌, 역사문제연구소를 이끌던 이이화 선생을 중심으로 각계 인사들이 나서 주셨습니다. 100주년이 되던 1994년 3월3일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발족했습니다.”-유족회의 그동안 성과를 꼽는다면.“유족회의 가장 큰 목표는 혁명에 참여했던 선대의 명예회복이었습니다. 서훈범국민추진위원회가 꾸려졌고, 언론인 출신의 김중배씨가 위원장을,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가난하고 못 배운 후손들이지만, 모금운동을 벌이는 등 유족들이 참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2004년 특별법이 제정으로 명예회복의 성과를 거뒀고, 법에 따라 1만여명이 유족으로 등록하게 됐습니다.”-혁명을 기리는 데 유족회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 데요.“‘공적서 하나 받으면 뭐하냐”고 불만을 갖는 유족들도 있어요. 그러나 진정한 후손은 정신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혈통은 후손이면서 반혁명적으로 간다면 진정한 후손이라고 할 수 없죠. 참여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조기숙 교수(이화여대)가 고부봉기의 빌미를 제공했던 조병갑의 증손이지만, 유족회에 와서 진정어린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후손 같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선조가 관군이고 진압군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며, 편견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혁명은 모두의 것입니다. 상생과 화해로 가는 것이 후손된 도리입니다. ”-유족들 사이에 보상을 바라는 분위기도 감지되는 데요.“독립운동 유족과의 형평성을 들어 보상을 염두에 둔 유족들도 없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또 특별법상 유공자로서의 훈격도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고 추상적·선언적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여자의 후손 중 손자들도 많지 않고, 아직 정치·사회적으로 혁명에 대한 인식이 낮아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다만, 국가의 추모행사 주관을 의무화 하는 등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4월11일 관련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혁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을 말씀하셨는데, 유족들이 더 절감하겠지요.“유족들이 못 나고, 못 배워서 역사를 바로세우지 못한 책임도 있지만, 국가적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민족분단의 상황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높이 평가하는 북한을 의식한 점도 있지만, 전국민이 자랑스러운 혁명으로 여길 수 있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혁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유족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입니다. -국가뿐 아니라 자치단체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보는 데요. 특히 전북이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는 점에서 전북지역 자치단체들이나 전북정치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역대 전북도지사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말로는 전봉준을 외치면서 동학과 전봉준을 위해 투자한 게 있습니까. 제주 4.3사태만 보십시오. 제주도와 도민들이 똘똘 뭉쳐 국가적 관심을 끌어내지 않았습니까. 동학농민혁명이 몇 백배 큰 사건인데 국가 행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전봉준 장군을 꼽았지만, 2006년 한 조사 결과 전봉준을 꼽은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북지역 국회의원들 중에서도 없었다는 이야기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역사인식을 제대로 하는 도지사와 국회의원이 나와야 합니다.-전국 각 지역에 기념사업회가 꾸려지고, 여러 기념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는데.“10년전, 20년전 방식 그대로 답습해서는 달라질 게 없습니다. 기념행사장에 노인들을 불러서 숫자만 채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학술대회도 많이 해봤고, 죽창 들고 거리행진도 많이 하지만 주민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민참여형 사업개발이 중요합니다. -기념사업을 둘러싸고 지역간·단체간 갈등이 여전한 데요.“100주년 때 기념우표 발행을 놓고 천도교와 혁명 관련 사업회간 명칭을 놓고 싸워 결국 우표발행을 못했습니다. 기념일을 놓고 언론에서 정읍과 고창간 싸움으로 몰고 가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표발행 때도 무장기포일로 기념일을 삼는데는 이론이 없었고, 몇 차례 학술대회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에 무장기포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고창에서 기념일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읍에서 문제를 삼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앞으로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을 거치면 공감대를 형성할 것으로 봅니다.”●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 고문은 기자 출신…언론재단 이사장 지내 "반골기질, 동학 할아버지 닮았다"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 상임 고문은 고창 아산 출신으로,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1970년대 초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 전신)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디딘 그는 기자협회 합동통신(연합통신 전신) 분회장으로 활동하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됐으며, 1988년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에 복직해 조사부장, 편집부장, 논설위원실장, 민족뉴스취재본부장, 동북아정보문화센터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퇴직 후에는 연합뉴스 동북아시아정보문화센터 상임이사 겸 소장과 한국편집미디어협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2005년부터 만 3년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와의 인연은 정 고문의 할아버지(정백현 1869~ 1920, 본명은 근영)가 혁명 당시 농민군 지도부인‘비서’로 활동했기 때문. 백산결진 당시 송희옥과 함께 비서로 임명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당시 총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의‘비서’라는 풀이도 있지만, 심부름 역할을 하는 비서가 아닌, 비밀스런 글을 작성하는 임무를 말하는 것으로 이이화 선생은 풀이했다.정 고문은 고교시절(고창고) 조부의 혁명 참여 사실을 알았으나 부친은 철저히 숨겼으며 100주년 때 쯤에서야 말씀하셨단다. 26세에 혁명에 참여했던 조부는 서울로 피신해있다가 3년뒤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대신 증조부가 고창 흥덕관아에 잡혀가 고문 끝에 사망했다. 조부는 동학입도 당시 상황을 적은 일기 〈진암견문록〉을 남겼으며, 정 고문이 전주역사박물관에 기탁했다.그는 자신의 반골성향이 “동학 할아버지에게서 그 힘이 나온다”고 자신있게 말한단다.

  • 기획
  • 김원용
  • 2014.04.09 23:02

신임 김성배 전북한의사회장 "한의약법 제정, 국민건강 위한 대승적 차원서 접근해야"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인 한의학. 한 때 한의약에 대한 수요가 많아 한의사는 최고의 인기 직종 중 하나로 떠오르기도 했다. 1990년 대 후반부터 약 10년 간 대학입시에서 전국 상위득점 0.5%의 인재들이 한의학과에 몰릴 만큼 한의사의 인기가 높았다.현재 한의학은 개별 한의원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의술을 검증할 만한 충분한 임상연구 성과가 부족하다보니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여기에 전통의학에 대한 편견, 의학계의 불신과 공격, 심지어 한의사들에게는 의사들에게 허용된 의료기기 사용을 막는 현재의 의료법 체계 등도 한의학의 위기에 한 몫을 했다.그러나 최근 한의학계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져 전통의 방식을 넘어서 특화된 치료 의학을 구현하는 한의사들이 늘고 있다.이에 본보에서는 이달 3일 제24대 전라북도한의사회장으로 취임한 김성배 회장(51·갑자한의원)을 만나 직면한 한의학의 문제와 나아가야할 방향 등에 대해 들어봤다.-전북한의사회장으로 취임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감사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의사협회는 변화의 소용돌이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 한의사 회원들이 소통하고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 우리가 원하는 여러 가지 우리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의사들의 이익은 물론 안심하고 진료에 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요즘 한의계가 어렵다는 얘기가 많은데요. 어떤 면이 어렵나요.“현재 한의학이 어려운 이유는 한의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보건의료 정책에서 한의학이 소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료기기 사용 문제와 한방 건강보험의 소외 등입니다.”-현재 한의학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방금 말씀하신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인데요.“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권리가 아닌 의료인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현대의료기기는 양의사의 산물이 아닌 현대 과학을 통해 개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서양의학 원리가 들어간 것도 아니고 한의학 원리가 들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의료기기의 사용과 관련된 대표적인 법률이 의료법과 의료기기법이 있는데, 그러한 법률 어디에도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조항은 없습니다. 의사와 한의사가 발전된 의료기기를 쓰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오직 환자의 질환상태를 정확히 살피고, 질병을 치료하자는데 있습니다. 또한 환자의 알권리가 중요시되는 현 시대에서 의료인들은 환자의 질환상태를 정확히 알려주고, 치료경과 등의 설명을 위해서는 현대 의료기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다행히 최근 안압측정기 등의 검사기기에 대한 헌법재판소에서 그러한 취지의 판결이 나온 바 있어, 그에 따른 법률적 판단이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한의학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보건의료 정책에서 한의학이 소외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한방건강보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는데요. 어떠한 문제입니까?“통계청 조사결과, 한방 의료기관에 대한 만족도는 다른 종별 의료기관보다 계속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방 의료에 대한 건강보험은 전체 재정의 약 4%미만의 낮은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한방 의료는 좋은데, 비싸서 한의원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한의원에서 침, 뜸을 제외한 추나요법 및 한방물리요법, 약침 등의 효과 있는 필수적인 시술은 대부분 비급여로 국민에게 부담이 전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한방 의료기관의 건강보험보장율이 62.6%였는데, 이마저도 2011년에는 49.7%로 떨어졌습니다. 국민들이 살기는 계속 어려워지고 있는데, 만족도가 높은 의료마저 비싸서 이용을 못한다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해결되기 위해서 건강보험정책의 어떠한 부분에 대한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한방 의료가 정책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은 많습니다. 우선 만성질환자 관리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관리제도에 한방 의료기관이 빠져 있습니다. 고혈압, 당뇨 등의 만성질환을 1차 의료기관에서 관리하게 되면 본인부담금의 일부를 경감해 주는 제도인데요. 98.5%가 1차 의료기관으로 구성돼 있는 한방 의료기관이 빠져 있으니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오히려 역차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4대 중증 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성질환)의 한방건강보험을 적용해야 합니다. 한약 및 약침술 등으로 이러한 중증질환의 치료에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한방 의료에서도 건강보험을 적용시켜 저소득층 환자들의 의료비 부담을 완화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약에 대한 개선도 중요할 듯 싶습니다. 아직도 한의원에서는 탕약만을 처방하는 줄 아시는 분들이 종종 계시는데요. 한의원에서는 복용이 편리하고, 효능이 우수한 복합제제 등의 제형이 변화된 한약을 다양하게 처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합제제의 보험급여확대가 되지 않는 문제로 효과 높은 한약의 편리한 복용 문제 및 환자 부담 경감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이는 결국 건강보험 재정의 악화 및 환자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는 형국입니다.”-최근 한의약법이 발의되면서 양의계가 이에 대해 항의하며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이에 대해 설명해 주시지요.“한의약법은 당연히 필요한 법안입니다. 한의약과 관련된 부분은 지금 의료법과 약사법에 애매하게 끼어있는 형국입니다. 그 마저도 수 십 년 동안 제도권에서 핍박받으며 누더기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해결하고 한의약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의약법이 필요합니다. 한의약법을 통해 한의약과 관련된 개념들을 정립하고 국민들께 보다 전문적인 의료서비스, 나아가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미래 신 성장 동력으로서의 한의학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한의사를 위한 법이 아닌 국민과 대한민국을 위한 법안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단순히 하나의 직능단체가 반대한다고 해 문제가 될 사안이 아닌, 국민과 국가를 위해 보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양의사들도 이러한 부분을 좀 널리 이해해 국민, 그리고 환자의 이익에 서서 생각했으면 합니다.”-마지막으로 어떤 현안에 중점을 두고 전북한의사회를 이끌 계획이신지요.“이미 말씀드렸다시피 한의학은 우수한 치료효과를 가지고 있고, 이에 따라 한계에 봉착한 서양의학의 뒤를 이을 이른바 대체의학입니다. 지금도 세계의 전통의학시장은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전통의학시장을 한국이 아닌 중국 등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한의학이 훨씬 우수한 인적 인프라와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의학을 정부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제대로 지원하고 육성한다면 한국은 미래에 새로운 진정한 성장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한의사의 자유로운 의료기기 활용과 다양한 한약제제 개발, 한의약법 제정 등은 국민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진료권 선택의 문제이며,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 부담 없이 우수한 한의학 치료를 받으실 수 있는, 즉 국민건강, 삶의 질 향상과 직결된 문제이지 결코 한의계의 발전만을 위한 사항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러한 부분에서 적극 알리고 나아갈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김성배 회장은 전통의학 '외길 인생'1990년 원광대 한의학과를 졸업한 김성배 전북한의사회장은 원광대 대학원에서 한의학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이후 원광대 부속 한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친 그는 원광대 한의과 대학 외래교수 및 겸임교수, 충북 세명대 외래교수로 활약했다.진안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전통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라고를 졸업하고 원광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쳐왔다.

  • 기획
  • 강정원
  • 2014.04.07 23:02

[(12) 임실 산수영농조합] '상황버섯 추출액 술 제조' 발명특허…전통주 시장서 주목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에 위치한 산수영농조합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상황버섯을 인공으로 재배했던 신지식인 류용희(68)씨에 의해 설립됐다.이 일대 5개 농가들이 모여 지난 2003년 12월에 법인을 구성한 이곳은 전국적으로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해 유명세를 탄 곳이다.평소 벼와 밭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했던 농민들은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웰빙시대에 걸맞은 가공식품을 꿈꾸며 전통주 생산에 주목했다.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산에서 캔 더덕과 도라지, 칡 등으로 가용주를 만들어 서로 나눠 마시던 약용주가 이들을 기업인으로 이끈 것이다. 산수영농조합은 20년 이상 자란 뽕나무 원목에서 발생된 상황버섯을 혼합, 웰빙시대에 바이오토피아를 꿈꾸며 전통술을 생산하는 법인이다.△상황버섯주상황버섯주는 이 지역 박사고을에서 생산된 쌀을 주원료로 삼아 막걸리를 제조하고 이를 진공, 증류해 순수곡물 증류주로 뽑아낸다.여기에 20년 이상의 뽕나무 원목에서 생성된 상황버섯을 진공추출기를 통해 6시간에 걸쳐 유효성분을 우려낸 다음 전통주 제조기법으로 빚은 술이 상황버섯주다.각종 언론매체와 학계에서는 상황버섯의 효능에 대해 악성 암 액질의 해독작용이 신속하고 발암물질의 분해 및 배설작용을 촉진한다고 발표했다.특히 일부 화장품 제조사에서는 노화방지와 기미, 주근깨 발생을 억제하고 피부의 미백효과도 뛰어나 상품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일반 주민들 사이에서도 상황버섯주는 건강을 위한 가용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여성들도 하혈과 복통 음통 등 약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보통 가루로 만들어 물과 혼합한 후 1년에 2~3개월에 걸쳐 장기간 복용하면 체내 면역력이 증가되고 혈당과 협압강하, 항혈전 등에도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제품의 특성 및 유래문헌에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상황이란 언어는 뽕나무 상(桑)에 누를 황(黃)이란 말로서 한의서에는 상이(桑耳)와 상목이(桑木耳) 등의 이름으로 소개됐다.보편적으로 뽕나무에서 나오는 황색버섯이란 뜻으로 풀이되고 있으며 동의보감과 신농경초본, 봉황록 등 고서에는늙은 뽕나무에 달린 황금버섯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불로초로 알려졌다.이중 대표적인 버섯으로는 식품종원에 등록된 폐리누스 린테우스와 폐리누스 바우미가 있고 바우미의 경우는 산수영농조합이 인공재배에 성공, 생산중에 있다.상황버섯에는 다당체 및 베타클루칸의 성분이 함유, 인체에 면역력을 키워주는 성분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원형상태로 판매되어 왔다.하지만 산수영농조합에서는 이같은 사실에 착안, 2차 가공을 통해 전통주로서의 생산과 판매를 목적으로 전주대 교수팀에 유효성분 추출시험을 의뢰했다.이를 바탕으로 2006년에는상황버섯 추출액을 이용한 상황주 제조법에 대한 발명특허를 받았고 전북의대에서는 상황버섯주가 간과 위의 손상에 보호효과가 있다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산수영농조합은 이후 꽃송이버섯주와 마우터, 남자25 및 낭랑18세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하는 등 발명특허와 의장등록, 상표등록을 마치고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활동을 펼쳐왔다.△생산 및 판매 현황현재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중 가장 인기를 끄는 상품은 마우터(MOUTER)로서 알콜성분 40% 함유에 750㎖의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이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중인 알콜성분 28%의 마우터는 술에 약한 여성들이 대부분 약용으로 구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우터는 쌀을 주원료로 삼아 약주를 제조한 다음 이를 순수곡물 증류주로 다시 제조해 2050년의 뽕나무 원목에서 자란 상황버섯을 첨가한 제품이다.마우터는 2005년 문화일보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한 전국 발효식품 부문에서 대상을 획득, 이후 명품으로 자리매김했다.이와 함께 2006년에는 전주국제발효식품 부문에서도 우수상품으로 지정, 전통주로서 주류시장의 높은 관심을 끌었다.현재 전국 유명백화점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 직매장을 두고 있다.특히 이곳에서 생산된 인기품목중 여성들이 즐겨찾는 제품은뽕나무산수상황주로서 375㎖ 용량에 알콜성분 13%가 인기를 끌고 있다.임실지역에서는 군청과 농협 등 공공기관에서 건배주로 지정됐고 인터넷을 통해 전국 각처에서 주문량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 판로에는 문제가 없다.가격도 비교적 저가로 알려져 식당에서는 5000원 정도면 즐길 수 있고 직매장에서는 훨씬 저렴한 값으로 구입할 수 있다.알콜성분 17%에 750㎖과 375㎖의 용량으로 생산중인남자25의 제품은 25세의 혈기가 왕성한 남자가 기운을 유지한다는 내용으로 생산되고 있다.설립 당시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연간 수억원에 달하는 매출고를 올린 이곳은 그러나 최근 들어 전통주의 하락세로 하향세를 타고 있다.특히 경쟁업체의 유사제품이 마구잡이로 출시되면서 경쟁력도 예전보다 상당히 둔화되고 있다고 관계자는 설명했다.하지만 전통주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신제품을 꾸준히 개발하고 생산과정에서도 저비용 고효율로 개선하는 운영에 힘입어 판로는 지속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류용희 대표 "유사품 난립 고전, 명품 만들기 최선"유행에 따라 애주가들의 선호도가 바뀌고 있지만 상황버섯주는 전통주를 바탕으로 태어난 웰빙시대의 건강식품이므로 시중의 주류와 편견을 달리해야 합니다.농촌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흙과 함께 지내온 산수영농조합 류용희 대표의 상황버섯 애찬론이다.젊음을 상황버섯에 미치다시피 매달려 온 그가 안정적인 농업에 그치지 않고 주류시장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민 것은 끊임없는 자기발전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40대에 이르러 상황버섯의 인공재배에 성공한 그는 당시 엄청난 값에 팔렸던 자신의 걸작품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 그가 상황버섯주에 눈길을 돌렸던 것은 함께 농사에 매달렸던 주민과의 행복을 나누기 위해서였다.하지만 그의 목적과 야심은 그보다 한층 더 높은 원대한 곳에 있었다.동양에서는 상황버섯의 효능과 존귀함이 널리 알려졌지만 서양에서는 대부분 모르고 있다며수출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 싶었다게 류 대표의 이상이었다.상황버섯을 재배하면서 90년 후반에 들어 틈틈이 가용주를 만들어 주변에 소개했던 그는 자신감을 얻고 주류회사 설립을 결심했다.하지만 식품으로서의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와 각종 인증이 필요했고 소요되는 자본금도 예상과 달리 커다란 난제로 다가왔다.당시 나의 젊음은 무한한 도전정신으로 활활 타올랐다는 그의 열정은 결국 영농조합법인으로 세상에 빛을 발했다.류 대표는시중에 갖가지 유사품들이 난립한 까닭에 고전하고 있지만 생산과 판로에 정진하고 있다며상황버섯주가 명품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남은 생을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박정우
  • 2014.04.03 23:02

(13) 동학 연구·활동가들 - 김양식 박사 "동학 배경지식 뒷받침돼야 생생한 문화콘텐츠 가능"

올해로 2주갑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력투쟁 정도로 치부됐다면 그 이후 100주년이되면서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한 대목으로 평가됐다.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학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80년대 반정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역사학도들이다.당시 혈기 왕성했던 이들이 차차 역사학계의 전면에 나서면서 혁명 관련 연구활동도 그 성과를 드러내게 됐다.이 중 두드러진 연구성과로 학계의 기린아로 꼽히고 있는 김양식 박사(54·충북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를 만나 그동안의 연구활동과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한양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인 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거리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군사정권의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대학 동아리를 통해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민중을 계몽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싹 텄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중이 주도가 된 동학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깊이 파고들면서 어느새 제 전문분야로 자리잡게 됐죠.” - 연구활동 중 가장 주안점을 둔 분야는.“근대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면 토지 문제가 가장 큽니다. 처음엔 이런 국유지 관련 토지분쟁을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 과정에서 집강소(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를 다룬 기존 연구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 연구자들은 집강소의 역할을 너무 일률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또 집강소는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과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 사이 열린 회담에서 합의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당초 집강소의 설치 목적은 민정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흐트러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농민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기능이 민정기능으로까지 확대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점차 반농민군이 힘의 우위를 점하면서 다시 치안유지만을 맡는 것으로 기능이 축소됐습니다. 이처럼 혁명을 다룬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 그간의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활동을 평가한다면.“혁명 과정에서 민중의 존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소홀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중의 투쟁에만 천착하다보니 동학의 조직과 실체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던 것 같습니다. 1주갑 이후의 연구가 투쟁사 중심이었다면 2주갑 이후는 연구의 폭을 넓혀, 동학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 배경과 동학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 동학 2주갑의 역사적 의의는.“21세기 한국의 운명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변화의 물줄기 속에서 큰 격변에 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의 혁명이 자본의 혁명이었다면 최근의 혁명은 정보를 가치로 삼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정보화사회에서 정보에 소외되고 조종당하는 상황이 심화하면서 정보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도 눈 여겨봐야 합니다. 동학혁명을 거울 삼아 당시 민중들의 고민, 시대적 상황,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현재 시대에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 2주갑을 맞이했지만 아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미흡한 데요.“대중들이 혁명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콘텐츠 계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창출하기 위한 대중문화예술가들의 혁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콘텐츠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미지가 수탈과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빠져 있어, 동학을 해석하는 관점의 폭이 좁은 것도 문제입니다. 이에 앞으로는 혁명이 발발하게 된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동학이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동학이 우리나라 국가 형성에 미친 파장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이런 배경지식이 뒷받침돼야 보다 생생한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 김양식 씨는 공대 출신…10년 넘게 동학연구충북 청주 토박이인 김양식 박사는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는 다양한 연구활동을 통해 충북 역사바로세우기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충북발전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충북의 역사와 문화, 민속, 사상 등을 조사·연구하고 있다.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전공으로 삼아 충북지역의 동학 교단의 역할, 혁명에 투신한 충북인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동학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그는 원래 이공계 출신이다. 하지만 80년대 반정부 투쟁에 나서면서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역사교육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한국 근대사를 주로 연구하다가 동학의 형성과 농민혁명 전개과정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십여년 전부터 동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주요저서로는 〈지리산에 가련다〉 〈근현대 충북의 역사와 기억〉 〈충북의 하늘위에 피어난 녹두꽃〉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이 있다.그는 연구활동을 위해 전북을 자주 찾는다. 혁명 유적지가 다수 분포된 고창과 정읍, 전주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지인들로부터 ‘반 전북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그는 “충북과 전북은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의 성향 등 닮은 구석이 많다”면서 “연구활동을 위해 자주 찾다보니 어느새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그는 존경하는 동학연구자를 묻는 질문에 “이이화 선생님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다”며 “이 분들의 연구 발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동학 2주갑을 맞아 이제는 동학의 근간에 대해 좀 더 파고들고 싶다는 김양식 박사. 그는 지금도 좁은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무더기로 쌓아놓은 각종 서적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을 것이다.

  • 기획
  • 최명국
  • 2014.04.02 23:02

취임 한달 이광한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북도회장 "공공공사 공구 분할·분리 발주로 지역업체 참여 넓혀야"

대한전문건설협회 전북도회 제10대 수장으로 이광한 회장(58·(주)삼화토건 대표)이 취임한지 한 달째 접어들고 있는데 열악한 전북 경제의 부흥을 갈망하는 건설인들의 성원과 기대가 그 어느 때 보다 높다.이 회장도 이에 발맞춰 ‘위기를 기회로, 시련을 도약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내실 있고 안전한 주택사업 활성화에 총력을 쏟고 있다.하지만 올해도 지역 경제의 초석이 되는 건설 물량 확보, 전문건설협회 조직의 내실화 및 투명하고 청렴한 건설문화 정착 등 넘어야 할 파고가 만만치 않다. 특히 새만금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해안 개발에 대한 기대가 높아가고 있고, 전북혁신도시, 만성지구, 효천지구, 에코시티 등 굵직한 건설 개발 사업들이 산재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도 함께 부풀어 오르고 있다. 이 회장을 만나 도내 전문건설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 및 넘어야할 파고 등에 대해 들어봤다.-취임 후 분석한 도내 전문건설업계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계신지요“현재 건설경기는 대내외적인 경기침체로 위축돼 있으며 전문건설업계는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에 너무도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전문건설인 스스로도 지나친 과당경쟁과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기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선 단결과 화합이 가장 필요합니다. 전문건설인 스스로 사사로운 명예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변화와 개혁의 선봉에 나서 건설업계의 가장 큰 ‘손톱 및 가시’로 불리는 적정공사비 확보를 위해 단결된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전북도회 차원의 대책이 있다면 “정부의 불합리한 정책을 개선시키고 업계의 합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협회를 중심으로 회원사가 단합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적정한 실적공사비와 원가심사제도를 겉돌게 하는 제약들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 각 부처와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물론 전국 각 도회들과의 연대를 통해 전문건설인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국가계약법과 지방계약법 모두 분리발주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하향 수직적 명령 방식인 통합 발주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건설산업의 고질적 병폐인 불공정 하도급과 이에 따른 부실공사, 중소업체의 경쟁력 부실을 부르고 있습니다.”-지금까지 협회가 이룬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전문건설업은 1975년 단종건설업으로 제도화됐으며, 1985년 협회가 창립한 이래 25년을 맞고 있습니다. 협회 회원사간 정보교류와 긴밀한 협력으로 지금의 협회 초석이 마련됐습니다. 큰 집으로 불리는 건설협회와도 그간 논란을 빚은 사안들에 대해 불신을 종식시킬 때가 됐습니다. 도내 종합건설업체와 전문건설업체 모두가 상생 발전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큰 집과 작은 집 간 고질적 병폐로 꼽혀온 주계약자공동도급 제도도 서서히 변화의 길목에 서 있습니다. 실제 올해 전북도가 설계중인 2건의 공사를 주계약자공동도급제로 발주하기로 약속 받은 바 있습니다. 큰 집인 건설협회와 작은 집인 전문건설협회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고민이 이뤄질 수 있는 상생의 기틀을 만들어 가겠습니다.”-정부나 지자체에 건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으신지“전북은 건설업이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타 시도에 비해 훨씬 높기 때문에 건설경기 활성화는 곧 지역경제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건설경기 활성화를 위해서는 공공공사 발주물량을 늘려야 하지만 정부 정책방향이 SOC 분야를 축소하고 있는 만큼 지자체 역량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에서 발주되는 100억 미만 공사라도 지역업체가 수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 건설물량의 공구 분할과 공종별 분리 발주를 통해 지역 업체에 실질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해 개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전주시의 경우 지난해 150억 규모의 삼천생태하천복원사업을 2개 공구로 분할 발주해 지역 업체는 물론 종합건설과 전문건설 모두 상생할 수 있는 표본 모델을 만든 바 있습니다. 각 지자체들 모두가 지역 발전이라는 큰 틀에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입니다.”-도내 업체들에게 아쉬운 부분은 없으신지요“도내 전문건설업체의 공사수주액은 전국대비 3%에 그치는 아주 저조한 실적입니다. 이에 비해 도내 전문건설업체 숫자는 전국의 5%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업계 간 과열 경쟁이 저가하도급을 부르고, 이는 결국 적정공사비는 커녕 적자공사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계약자형 공동도급제도 및 소규모복합공사의 범위를 확대, 정착시키고 지역업체 하도급 의무화를 추진해 수주물량을 확보하는 한편 저가하도급, 무자격업체 하도급을 근절해 건설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원가심사제 폐지와 함께 표준품셈에 할증기준을 최대한 반영해 부당감액금지 규정을 지켜 적정공사비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생각입니다.-마지막으로 도내 건설업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정부 주도의 토목공사 등 대규모 건설프로젝트가 나오기도 쉽지 않은 상태이고 상대적으로 공공공사도 대규모로 집행하는 추세에 있는 실정에서 과거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관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단 수주하고 보자는 식의 무분별한 수주방식을 지양하고, 선택과 집중, 안정성과 수익성을 최우선시하는 수주전략, 리스크경영의 도입 및 상시적 운영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또 새로운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신성장 동력사업 발굴과 특화된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는데 주력했으면 합니다. 우리 업계의 1년 실적 금액을 보면 전북 내 공사보다 타지역에서 수주하는 공사비용이 높은 상황으로 대외적 경쟁력을 가지는 길만이 생존, 번영할 수 있는 대책입니다. 환경변화에 적응하고 생존·발전하기 위해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정립하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 드리며, 불요불급한 사업은 축소하고 꼭 필요한 사업비는 과감히 반영해 회원사에 대한 지원업무가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 회원 모두의 단합과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한 분위기를 조성, 회원사 모두 수익구조 개선과 수주물량 확대를 위해 모든 역량을 결집시키겠습니다.”● 이광한 회장은 공직 20년 경영 15년 전문건설업계 산증인이광한 회장은 충남 출신이지만 20년간의 해양수산부 소속 공직생활을 접은 뒤 군산으로 이사해 전북이 ‘제2의 고향’이다.이 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주)삼화토건은 지역보다 외지 시장을 공략, 매년 100억 원 이상 공사를 수주를 하고 있는 중견기업이다. 특히 공직생활 재직 경험과 전문건설업 15년 경영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역 내 경쟁보다는 타지 시장 진출에 앞장, 전문건설협회 전북도회 제9대 부회장 및 전문건설공제조합 제12, 제13대 대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도내 1500여 전문건설사를 관장으로 건설업계의 수장이 된 그는 모든 문제점의 해답을 현장에서 찾는 전문 건설업계의 산증인으로 불리고 있다.이 회장은 전문건설인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신의, 성실, 배려, 그리고 인내’를 꼽는다. 이는 사업가 마인드와는 별도로 동종업계가 서로 돕고 믿고 의지해 나가야 한다는 소통의 의미를 담고 있다.이 회장의 별명은 ‘날 다람쥐’로 주말 대부분의 시간을 등산에 할애한다. “땀을 흘려야만 낮은 곳을 볼 수 있다”며 등산이 곧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이 회장은 “회원 모두의 단합과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한 분위기를 조성해 협회의 대외적 위상을 보다 더 강화시키겠다”고 말했다.이어 “회원사 모두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미는 강한 선후배의 결속력으로 지금의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한다”며 “조직의 투명성과 화합을 통해 변화와 혁신을 꾀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의 힘을 하나로 묶어 강하고 힘 있는 협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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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4.03.3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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