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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못갖춘마디 - 윤미애

그분이 오셨다. 섣달 열여드레 시린 달빛 받으며 오신 모양이다. 서걱대던 댓잎도 잠든 시각. 제주가 위패에 지방을 봉하자 열린 대문사이로 써늘한 기운 하나가 제상 앞에 와 앉는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망설이다 들어온 걸음일까. 촛불은 병풍에 두 남자의 실루엣을 그리며 천장 향해 솟는다. 허리가 꾸부정한 제주가 한 순배 술을 올리고 용서라는 절을 하자, 고개 숙이고 있던 그의 아들은 신뢰라는 절을 한다. 망자의 아들과 그 아들의 업둥이가 지내는 내 아버지 제사 날이다.큰 오빠는 아버지에게 못갖춘마디 같은 자식이었다. 깨진 유리온실 속의 시들어 가는 화초 같은 아들이었다. 가슴여미는 아픔으로 무섭게 스치거나 소용돌이치다가 비워진 쉼표와 마지막 마디의 음표가 만난 후에야 완성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자식 때문에 더 많이 아파야했고 더 많이 내어주고 보듬었는지도 모른다.자식 셋을 연이어 잃은 아버지의 상심은 컸다. 품에 안아보지 못한 자식들로 인해 외아들로 자란 아버지는 한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일로 쫓겨난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찾아 나선 걸음에 얻은 자식이 큰 오빠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태어나자마자 골골대며 잦은 병치레로 부모님의 애간장을 어지간히도 태웠다. 시오리 신작로 길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는 콜록거리며 담요에 쌓여 병원을 오가는 오빠가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아버지 생의 여린내기 음반 위에서 불안정하게 구르고 있는 선율처럼 위태로워 보였다.그 후, 내리 아들 딸 넷을 더 얻어 여린내기로 시작된 아버지의 삶은 음역을 넓혔다. 가난했지만 자식으로 인해 마음만은 부자로 살았던 그때, 아버지의 인생연주라는 선율은 안정감 위에서 봄 아지랑이처럼 다복한 꿈을 꾸며 따뜻하게 피어올랐다. 그렇지만 할아버지의 무릎을 독차지하고 응석만 늘어가는 큰오빠 때문에 형제간에 엄살, 정 투정이라는 나지막한 외침들로 아버지의 악보선율은 그리 매끄럽지는 못했다.약해진 마음이 더 문제였다. 허약한 몸을 무기삼아 오빠는 동생들의 내리사랑까지 자신의 것으로 여겼다. 형의 도움을 받아야 할 오빠들이 되레 신발 안 돌멩이 같은 그의 가방을 메고 먼 등하굣길을 오갔다. 나와 여동생도 노는 시간이면 손톱 밑 가시 같은 오빠를 살피려 달려갔다. 또래들한테도 따돌림을 당해 외톨이가 되어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형제들의 노력은 가히 필사적이었다.어쩌다 미처 그를 돌보지 못해 다치거나 앓아눕기라도 하는 날이면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그에 상반되는 벌도 달게 받아야 했다. 보통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내림나장조인 아버지의 선율은 못갖춘마디로 인해 가사와 마디가 불일치해 자연스럽지 못했다.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로인해 우리들은 일찍이 가족이란 청하지 않아도 내리는 눈비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 거역할 수 없는 섭리 앞에 작은 나를 느끼며 순응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나이가 들어도 오빠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점점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져 갔다. 맏이로써의 책임감도 신뢰도 저버렸다. 어렵게 벌어 보내온 다른 오빠들의 돈마저 사업자금으로 탕진했다. 부도를 내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는 모든 전답을 빚쟁이들한테 내어주고 오빠를 찾아다녔다. 미덥지 못한 오빠보다 더 이해하기 힘든 건 아버지였다. 우리는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났다. 나 또한 평생 자식 편애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앙칼지게 대들어도 봤지만 그를 향한 당신의 믿음에는 도돌이표도 쉼표도 없었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혈육 인데. 같이 가야지 하면서.오빠는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기고서야 결혼을 했지만 생산을 하지 못했다. 그 원인이 당신 아들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는 나오지 않는 헛기침 두어 번으로 아린 속을 달래는 듯 했다. 장손으로 조상보기 부끄럽다며 양자들이기를 권하는 일가친척들의 등살에도 아버지는 반응이 없었다. 부실한 몸에 가진 것 없는 오빠에게 양자 줄 사람 또한 없어 보였다. 세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열이라는 뜨거운 대립과 융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 마디라는 능선을 불협화음으로 숨차게 넘어오던 아버지의 연주는 절정에서 숨고르기가 필요해보였다.그해 시월,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을 두 손이 필요했을까? 누군가 대문 앞에 놓고 간 업둥이를 오빠는 숙명처럼 거두었다. 그리고 그 업둥이를 안고 온 사람이 바로 당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조금씩 변해 갔다.마지막에야 완성되는 사람이 있다. 그 무엇에 대해 절실한 결핍을 느끼면서 아주 느리게 성숙했던 내 오빠가 그랬다. 똑똑하고 건강했던 형제들 속에서도 결코 낙오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힘이었다. 즉흥적으로 벌하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실수도 게으름마저도 껴안고 용서하며 기다려주었던 아버지. 헌신과 평범함으로 못갖춘마디의 빈틈을 아우르고 포용력을 보여줌으로써 사랑과 구원이라는 완성된 연주를 이끌어 냈다.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때론 놓친 삶이라도 되돌이표로 되돌려 다시 갖춘 삶을 살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다. 연주자들은 말한다. 못갖춘마디를 연주할 때는 앞에 한 박자 쉬는 부분을 명확하게 느껴야 된다고. 그래야만 막판 셈여림의 조절이 가능하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놓친 한 박자도 한 번 더 믿어주고 보듬어 주면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진리를.아버지의 말년은 평온했다. 오랜 병상생활을 하면서도 영특한 업둥이로 인해 일생 다하지 못한 즐거움을 누리셨다. 큰아들의 늦은 성공으로 여유와 효도를 받으며 꼭짓점의 마지막 음표를 완성한 후에야 생을 마감하셨다. 누군가가 그랬다. 결코 갈대는 약한 식물이 아니라고. 속에서 자라나는 새끼 갈대가 바람에 깔리지 않고 자라기를 바라며 지켜주다 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몸을 뉘인다고. 갈대가 여름까지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던 그 이유처럼. 그렇게 살다 가셨다.아버지가 보인다. 생각을 접어보면 그의 사랑과 좌절도 보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는 틀 속에 가둬 놓은 채 기대하거나 요구하기만 했던 지난날들. 이상하다. 아이 다섯을 키우고 이제 겨우 아버지를 이해했을 뿐인데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 놓친 못갖춘마디의 첫음절을 붙잡고 마디마디 넘어오던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되어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춘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밀도·울림 있어 신뢰할 만한 작품"

생명력을 가진 것들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실험합니다.문학 역시 그러한 것은 생명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독자들은 새로운 문학의 모습을 신춘문예 당선 작품을 통해서 발견하려고 기대합니다. 그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올해에도 참신한 방향을 궁구하고 모색하려는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크게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그러나 무모하다 싶은 실험, 일체감과 통일성이 부족한 작품도 있었습니다. 안이한 타성에 젖어 있거나 목적의식이 두드러져 보이는 주제, 수사적 표현에서 독창성이 의심되는 작품들도 있었습니다.예선을 거쳐 올라온 아홉 사람 중에서 이정희 씨와 박복영 씨가 최종까지 남게 되었습니다.이정희 씨의 손이 만평이다는 여유 있는 호흡과 적절한 전환이 돋보이지만 처음 3행에 걸었던 기대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끝나버린 아쉬움이 컸습니다. 칼은 은유와 생략으로 간결미를 보인 반면 그만큼 추진하는 에너지가 부족했습니다.이에 박복영 씨의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가 최종 당선작으로 무난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박복영 씨의 다른 시들, 점묘화법, 소리의 걸음을 읽다 등도 비슷한 밀도와 울림을 보여주어 더욱 신뢰감을 갖게 되었습니다.내용도 없이 시끄럽고 현란한 작금의 세상에서 응답도 보상도 없는 문학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부디 여러분이 걸어가는 문학의 길에 눈부신 광명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갈매새, 번지점프를 하다 - 박복영

아찔한 둥지난간에 올라 선 아직 어린 갈매새는 주저하지않았다.굉음처럼 절벽에 부딪쳐 일어서는 파도의 울부짖음을두어번의 날갯짓으로 페이지를 넘기고어미가 날아간 허공을 응시하며 뛰어내린 순간,쏴아, 날갯짓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하강하던 몸이 떠올랐다.한 번도 바람의 땅을 걸어본 적 없으므로 가는 발가락은 오므린 채 가려웠다.하강은 추락을 꿈꾸지 않는 법.가슴 깃털을 헤집고 파고드는 처녀비행의 속도는 두려움이 되지 않았다.끊임없이 밀려와 절벽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꽉, 물고허공에 길을 찾는 갈매새가 잠시 수평선을 읽었다.굽은 부리에서 거친 파도의 현이 흘러나오자휜 바람줄을 따라 기우는 날개가 다시 팽팽해졌다.태어나서 처음 바람을 거스르는 동안 갈매새는 바람의 부피를 다 가늠할 수 있을까.포물선의 꼭지점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아슬아슬한 궤적이 허공에서 지워지고 바람줄을 따라가며바람이 풀어놓는 행의 단서를 찾는 동안 가슴 가득 차오르는 생의 씨앗들.의문들이 빠져나올 때마다 날개가 책장처럼 펄럭였다.갈매새가 날개를 당기며 내려다 본 벼랑 끝엔벗어둔 신발 같은 텅 빈 둥지 옆으로누군가 방생한 키 작은 해국들이코카콜라 병뚜껑 같은 머리에 노랗게 흰 뼈를 우려내고 있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작] 엄마의 빨간 구두 - 최빛나

승아네 엄마도 삼 개월 만에 가출했잖아.가출이 아니라 돈 벌러 간 거라니까!그럼 소식조차 없는 이유가 뭔데?팽팽한 토크 배틀이 이어졌다. 외국인 엄마는 가출한다는 태수의 주장과 그럴 리 없다는 영호의 주장. 그 사이에 심판처럼 앉아있던 나는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모르는 비밀이 있다. 사실, 우리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성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짐짓 심각한 얼굴로 영호가 물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머릿속엔 새엄마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젯밤 있었던 일까지 떠오르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물함의 교과서를 두세 권씩 집어 아무렇게나 가방에 챙겨 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야! 조성진! 갑자기 어디가?이따 축구하기로 했잖아!교실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뒤로 날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정문 앞에 도착하니 시커먼 하늘에선 한두 방울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더욱 확실해졌다. 집을 향해 뛰는데 아이들이 말한 가출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쫓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제일 먼저 신발장부터 살폈다.그 자리에 있어야할, 새엄마의 빨간 구두가 보이지 않았다. 안방에도, 부엌에도 엄마는 없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엄마를 찾아 뛰기 시작했다.안녕하세요. 나는 흐엉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굴리며 새엄마가 인사했다. 두 달 전, 처음 본 새엄마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작은 몸집에 까무잡잡한 피부, 누런 치아.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촌스럽기 그지없는 빨간 구두뿐이었다.이 사람이 나의 새엄마가 된다니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언젠가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진희에게 깜씨라고 놀렸던 일, 국제결혼 한 정태네 가족을 보고 아무 이유 없이 비꼬았던 일 등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아빠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친구들한테 보이는 내 입장은 생각해봤어?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새엄마가 앞에 있는 것도 잊고 굵은 침을 튀어가며 흥분했다. 내 따발총 공격에 불같이 화낼 줄 알았던 아빠는 대답 대신 내 손을 꼭 잡아줬다. 다 이해한다는 아주아주 자상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건 담임 선생님의 백 마디 말보다 더 강압적으로 다가왔다. 에휴, 아빤 정말 고단수라니까. 나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새엄마가 온 뒤로 좋은 점이라곤 아빠가 일찍 들어온다는 사실 한가지 밖에 없었다. 새엄마는 요리도 할 줄 몰랐고 한국말도 서툴렀다. 게다가 얼마 후 있을 운동회에 찾아올 생각만 하면 불안해 잠도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베스트 영호에게만 살짝 털어놓을까 생각했지만 그 녀석도 백퍼센트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친구들에게 차일피일 엄마 얘기를 미루고 있던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제대로 명중하겠는데?대박 재밌겠다. 일단 던져보자!친구들이 창가에 껌처럼 붙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양손에는 빨갛고 파란 물풍선을 쥐고 있었다. 요즘 우리 학원에선 차가운 물을 볼록하게 채운 물풍선을 갖고 노는 게 유행이었다. 서로에게 던지거나, 지나가는 행인에게 기습적으로 떨어뜨려 골탕 먹이는 식이었다. 짓궂은 행동이었지만 무더위와 공부에 지친 우리에게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었다.뭐 재밌는 거 있어?나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무심코 그곳을 바라봤다. 작고 검은,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새엄마였다. 그제야 학원 수업 마치고 새엄마를 치과에 데려다주라던 아빠의 문자가 번쩍 떠올랐다.물폭탄 맞으면 피부도 하얘지는 거 아니냐?충격으로 아프리카 갈지도 몰라.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태수의 손에선 물풍선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새엄마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폭탄을 맞게 할 순 없었다. 나는 태수의 손을 황급히 잡고 소리쳤다.안 돼! 잠깐만!아이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뭐야? 갑자기 왜 그래?설마 네가 아는 사람이라도 되는 거야?태수가 좋은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 눈이 매섭게 반짝였다. 평소 나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저 녀석에게 새엄마가 외국 사람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대답했다.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수가 물풍선을 힘껏 집어 던졌다. 퍽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황급히 창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숨죽이고 몸을 웅크렸다.대박! 명중이야!아이들은 목표물이 홀딱 젖었다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재밌어죽겠다는 듯이 배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학원 수업이 끝나고 나올 때까지도 새엄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에 젖은 차림 그대로였다. 아이들은 가지 않고 있는 새엄마를 보고 우릴 혼내려는 게 아니냐며 쑥덕거렸다. 어쨌든 나는 새엄마와 마주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친구들 사이에 섞여 고개를 푹 숙이고 살금살금 빠져나갔다. 문밖으로 완전히 나오고 나서야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오 마이 갓! 새엄마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으악! 걸렸다! 다들 튀어!새엄마가 나를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누런 이를 드러내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쳤다. 멍하게 서 있던 내 손을 누군가가 잡아 당겼다. 얼떨결에 나도 뛰기 시작했다. 언뜻 새엄마의 실망스런 눈빛이 스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뜀박질을 멈추면 나 역시 의심받을 거였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새엄마가 왔는지부터 살폈다. 새엄마의 빨간 구두는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나는 새엄마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내 방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생각을 떨치려 휴대폰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엄마 병원에 모셔드렸어?뒤늦게 온 아빠가 내게 물었다. 치통을 참아내는 엄마가 걱정된 모양이었다. 나는 통화하는 척 슬그머니 일어섰다. 아빠가 내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으며 무섭게 말했다.엄마 병원에 모셔다드렸냐고!아빠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아까 일을 사실대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지? 못 봤다고 잡아뗄까? 고민하는 사이 새엄마와 눈이 턱하니 마주쳤다. 커다란 두 눈 가득 걱정스러움이 가득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하려는데, 그보다 더 먼저 새엄마가 이렇게 말했다.학원을 찾지 못했습니다. 흐엉 실수입니다. 미안합니다.내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식사 시간, 음식을 씹지 못하는 새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몸이 안 좋은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차가운 물폭탄을 맞아서 더 심해진 것이 분명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는 깨작거리고 안 먹던,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를 보란 듯이 한 숟갈 크게 떴다. CF찍는 배우처럼 맛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꿀꺽 삼켰다.하지만 새엄마는 나를 보지 않았다.몸이 안 좋습니다. 그만 먹겠습니다.새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소파 위에 작은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새엄마에게 달려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엄마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조차 없었다. 결국 그렇게 찜찜한 하루가 지났다.그리고 다음날 새엄마가 사라진 것이었다.엄마! 엄마!집안 곳곳을 다 뒤졌다. 거실에도, 안방에도, 그 어디에도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의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엄마가 사라졌다고 문자를 남기는데 미처 닦지 못한 빗물이 휴대폰 액정 위로 뚝뚝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엄마는 대체 어디를 간 것일까? 아이들 말처럼 정말 집을 나간 것일까?엄마를 찾으러 무작정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 사이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있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 눈은 빠르게 엄마를 찾았다. 언젠가 새엄마와 함께 지났던 익숙한 길이었다. 새엄마가 부끄러워 한 발짝씩 늘 앞서 걸었던 길. 이곳에서 나는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엄마 없어도 무섭지 않지? 성진이는 이제 다 컸으니까 어떤 두려운 상황이 와도 다 이겨내는 거다?친엄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피자집이었다. 최신형 게임기를 손에 쥐어주며 엄마는 마지막 유언처럼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렁한 눈빛으로 엄마가 나를 보는 순간에도 나는 새로운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 알지 못했다. 그것이 엄마와 함께 한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그 후로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다는 것을.무서웠어. 새엄마가 나를 떠날까봐. 내가 마음을 열면 또 다시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거야. 바보같이.마음이 나에게 속삭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속마음이었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엄마가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에 젖은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그때였다. 터벅터벅 신발 하나가 눈앞에 멈춰 섰다. 익숙하게 보아온, 빨간 구두였다. 설마, 설마. 나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꾸욱 누르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나의 새엄마가 서 있었다.비가 와서 우산 갖다 주려고 했습니다. 어떡해. 다 맞았습니까?엄마의 손에는 내 파란색 우산이 들려있었다. 새엄마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비에 젖은 나를 닦아주었다. 호수처럼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툭하고 울음이 터지더니, 어찌할 새도 없이 와르르 흘러내렸다.어느새 비가 갠 하늘 위로 무지개가 고운 다리를 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햇살에 비친 새엄마를 가만히 바라봤다. 새엄마가 나를 향해 해바라기처럼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내 눈에 더 이상 새엄마는 타지에서 온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햇살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나의 진짜 엄마였다.엄마는 내가 밉지 않아?엄마는 대답 대신, 다 이해한다는 눈으로 내 손을 꼭 잡아줬다. 언젠가 아빠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아주아주 자상한 눈빛으로 말이다. 칫, 누가 부부 아니랄까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그때였다.야! 조성진! 거기서 뭐하냐?멀리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구를 끝내고 왔는지 태수의 손에는 축구공이 들려있었다. 그제야 축구 약속도 어기고 부랴부랴 집으로 뛰어갔던 내 자신이 생각났다. 새엄마는 친구들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엄마 먼저 가겠습니다.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뒤돌아서는 엄마의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괜찮아!엄마가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도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야, 축구도 안 하고 거기서 뭐하냐?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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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심사평] "독창· 참신성 아쉬워…동심의 시각으로 봐야"

신춘문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독창성과 참신성입니다. 기존의 모습과 다른, 실험정신이 충만한 동화가 우리의 동화문단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응모 동화는 제재나 형식이 참신하지 못하고 고루하여 그러한 기대에서 다소 벗어났습니다.최종심에 오른 5편의 작품을 보면 정유나의 낮은 계단은 지체부자유자가 보행보조기를 타고 서른 두 계단을 극복하니 높게 버티고 있던 계단이 낮게 보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보행기를 고철이라고 한다든지,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아버지가 경마에 빠지는 등 작위적 불행한 환경 도출은 극복의지의 당위성을 희석시켰습니다.하늘을 나는 백층이는 산동네에 백층이 넘는 계단을 비행기 그림으로 변신을 시켰더니 주인공을 태우고 밤하늘을 날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동화에서 제목의 기능은 동화의 핵심인데 백 계단을 백층이라 한 것과 깔딱이란 별칭이 낯설고 계단과 주변의 애환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습니다.엄마 인증제는 비록 엄마 인증 기준에는 미달되었지만 자녀 사랑은 특 1급이라는 내용인데 엄마 인증제 필요성의 당위성이 부족했습니다.꿀이와 별이는 꿀벌들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동화에 삽입시켰으나 과학 동화에 가까웠고 특히 동화 분량이 20매 내외인데 40매를 웃돌아 기준에 미달했습니다.최빛나 씨의 엄마의 빨간 구두는 그동안 많이 다룬 다문화 가정 소재여서 참신성은 결여되었으나 새 엄마로 들어온 외국인 엄마와의 갈등 해소 과정을 문장 및 화법의 간결함이나 짜임새 있는 구성을 통해 공감을 주었습니다. 팽팽한 토크 배틀 등 약간의 동화적 부적절한 언어가 거슬렸지만 가능성을 높이 사서 당선작으로 뽑았습니다.동화작가로 입문하려는 분들에게 고언을 하고자 합니다.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정보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화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합니다. 힘든 현실의 배경을 작위적으로 설정하고 동심이 아닌 어른의 시각으로 무리하게 교시적 교훈을 주려는 태도와 가슴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고 머리로 짜내는 캐릭터 설정을 버리기 바랍니다.

  • 기획
  • 전북일보
  • 2015.01.02 23:02

[2015 전북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소감] "어둠 속 반짝이는 별처럼 묵묵히 정진할 터"

한숨 자고 일어나면 봄이 오길 바랐습니다. 평년보다 따뜻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몸도 마음도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노트북에 빈 공간을 채워갈 때마다 제대로 쓰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의 무지를 확신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상냥한 목소리는 당선이라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온 세상이 환하게 물들면서 모든 감탄사의 조합들이 입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유독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숨이 차 올려다본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렀습니다. 가슴에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줄 몰랐습니다.숨 고르고 돌아보니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길 위에 선 지금, 더 많이 치열하게 고민할 과제가 주어진 것 같아 양 어깨가 무거워졌습니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제 흐름대로 걷고 싶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넘어지고 방황하고 끌어안겠습니다. 아직 많이 미약하지만 어둠 속 반짝이는 별처럼 그렇게 묵묵히 정진하겠습니다.한 해에 두 딸의 등단 소식을 듣고 함박웃음이 끊이질 않는 존경하는 아버지와 늘 사랑으로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여러모로 손볼 데가 많은 부족한 졸고를 너그러이 품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전북일보사에도 가슴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누가 되지 않게 노력하겠습니다. 거창한 포부를 품기 보다는 소소한 울림이 있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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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1.02 23:02

[(50) 전문가 제언 - 미래를 향해] 동학농민혁명 현대적 위상 정립, 세계로 외연 확대 과제

■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제는 세계화해야 할 때다 "갑오년 미완의 혁명, 세상을 깨우다 연재를 함께 시작한 지 1년이 되었다. 감회가 새롭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좋은 기회를 잘 살려보자는 생각도 했었다. 동학농민혁명 연구자로서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의미 있게 기념할 수 있을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은 민간에서 주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적 인식을 난에서 혁명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2014년 120주년에는 정부가 주체가 되어 기념사념을 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를 대신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주도적으로 추진하였으며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많은 기념사업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국가적 또는 국민적인 차원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이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국회에서 국회의장이 주최하는 세미나가 개최되기도 하였다.이제 동학농민혁명과 그 정신은 더 이상 한반도의 문제로 국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을 세계화해야 한다. 지난 10월 28-29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동학농민혁명, 평화 화해 상생의 시대를 열다라는 주제도 대규모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을 한반도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분석하려고 하였다. 한중일 석학들이 모여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한국사연구회지난 11월 21일 청일전쟁동학농민혁명과 21세기 동아시아 미래 전망이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역시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였다.혹자는 동학농민혁명을 세계4대 시민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공허한 메아리가 아닌가 싶다. 한반도를 제외한 지역에서 어느 누구도 동학농민혁명을 세계 4대 시민혁명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 냉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세계 4대 혁명으로 위상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바로 우리가 동학농민혁명이 가지는 세계사적 보편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세계 속에 알리는 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야 한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위한 플랜을 짜야할 때가 왔다.■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현 시대상황 맞게 재해석을"조선왕조의 극심한 부정부패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최고조에 달했던 1894년 갑오년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난 우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항쟁이 동학농민혁명이다. 이 사건은 일제식민지시기와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된 동서냉전체제 구축시기에 빚어진 민족내부의 극심한 좌우익 대립,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등의 정치적 혼란을 거치면서 반란사건 혹은 전라도 전봉준사건으로 왜곡되고 축소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졌다. 나아가 1960~1990년대 군사정권집권기에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과정에서 특정종교와 특정지역에 시혜적으로 편중되어 이전시기 이 사건에 가해진 왜곡과 축소가 극복되기는커녕 도리어 심화고착화되었다.다행스럽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이던 지난 1994년을 전후하여 전국 각지에서 순수 민간 기념사업 단체들이 창립, 왜곡되고 축소된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로써 실로 한 세기만에 동학농민혁명의 변혁지향성과 민중지향성의 현재화가 실현되었다. 그 결실이 2004년 2월 대한민국 제17대 국회에서 제정공포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다. 그런데 특별법이 제정, 공포된 이후 도리어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기념사업 또한 침체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의 밑바닥에는 1980~1990년대 동서냉전체제가 해체되고, 21세기로 접어들면서 형성된 이른바 FTA(자유무역협정)라는 시대적 상황이 깔려있다.따라서 향후 기념사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19세기말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올렸던 동학농민군의 슬로건을 21세기 초입 현재의 시대상황에 맞게 재해석해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반도를 가운데 두고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남과 북 그리고 중국러시아, 미국일본으로 구성된 6자회담이라는 회의체의 실재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시대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도 1894년 갑오선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할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김양식 충북발전연구원 연구원 "동학혁명 새 연구지평 열자"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은 근 1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유발하면서 내전인 동시에 국제전쟁으로까지 비화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시스템이 파멸을 고하고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중화체제가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로 전환되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는 상당한 수준으로 축적된 상태이나,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첫째, 지난 60여 년 동학농민혁명 연구는 기본적으로 오지영이 저술한 〈동학사〉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최근 〈동학사〉 내용이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입증된 만큼, 동학농민혁명사 기본틀은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둘째, 동학농민혁명 연구사에서 지난한 쟁점의 하나는 동학의 역할과 위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1894년 대사건에서 동학의 비중은 매우 크며 동학을 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동학의 비중은 매우 큰 것이 사실이다. 그 때문에 동학을 매우 강조한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종교적 외피론, 또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접근하는 연구자가 있는 등 그 인식편차가 매우 컸다. 앞으로 또다른 시각에서 동학을 새롭게 평가하고 농민혁명과의 관련성을 논증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학제가 융합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셋째, 동학농민혁명은 갑오개혁과 맞물리면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 상호 연계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한 경우는 매우 드문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두 사건을 상호 대립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보다 전체상을 알기 위해서는 1894-1895년의 조선을 하나의 시공간으로 설정하고 그 전체상을 해명하는 구조론적인 연구방법이 필요하다.끝으로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동아시아 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청일전쟁과 맞물리면서 전개되었고 이를 계기로 동아시아의 일그러진 근대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침략과 양민 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 상흔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따라서 앞으로의 동학농민혁명사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내적 연구에서 벗어나, 좀더 그 외연을 확대하여야만 한다. 그를 통해 조선과 동아시아가 일그러진 근대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 위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을 새롭게 규명해야만 할 것이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유물유적 보존과 전승을"근래 지역문화와 지역정신 정립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역문화를 브랜드화하고 지역공동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지역발전 전략차원이다.전북지역은 외세를 물리치고 새사회를 염원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요 중심지이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전북의 정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사람들도 동학농민혁명을 지역적 자긍심으로 승화시키는데 망설임이 있다.이는 그만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현재의 우리 가까이로 끌어오는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신을 기리고 그 역사를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동학관련 유적 유물의 조사와 수집, 보존과 전승은 그 좋은 방안이다.그런 점에서 전북도와 동학관련 단체에서 검토했던 동학관련 자료들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 광주 5.18 관련기록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에서 비롯되었고, 세계문화유산이 천여개에 이르러 그 가치가 예전만 못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인 전북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는데 매우 유효한 방안이다.얼마전 사발통문 소장자로부터 도지정문화재로 지정이 될 수 있으면 박물관에 기탁할 용의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상징과 같은 유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지역정신으로 정립하거나 동학관련 자료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고자 할 때 매우 요긴한 자료이다. 발견당시 문화재청에서 문화재지정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했는데 지금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전북도문화재 지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동학과 관련해 오랜 숙원이었던 동학농민군지도자 유골의 정읍 황토현 안장이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의 부결로 올해도 무산되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을 지역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전라감영이 있었고 동학 대도소가 설치되었던 전주에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을 안장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지역발전의 토대로 삼기 위해서는 그 정신을 끌어안고만 있지 말고 지역민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 동학관련 유적유물의 적극적 문화재 지정과 기념물 조성을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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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31 23:02

29일 공식 취임식 이남호 전북대학교 총장 "전인교육 통한 차별화된 인재 양성, 취업 질과 양 개선"

이남호 전북대학교 신임 총장은 총장 후보시절부터 몇가지 ‘어록’을 남겼다. ‘성장에서 성숙으로’‘빠른 변화에서 바른 변화로’‘색깔있는 인재양성’등 후보시절 걸었던 슬로건이 대표적이다. 같은 맥락에서‘명품 교육프로그램’‘캠퍼스의 명품 브랜드화’ 등 명품 브랜드를 강조했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목수형 총장’이 되겠다는 말도 했다. 이‘어록’들이 이 총장의 향후 대학을 이끌 아이콘이 되고 있다. 29일 취임식을 갖고 공식 출범하는 이남호 제17대 전북대 총장으로부터 대학 운영방향을 들었다.-지난 15일 총장에 취임했습니다. 현재 전북대 상황을 진단하신다면.“우리대학은 2017년 개교 70주년을 앞둔 상황에서 지난 10년간 전국 대학들이 부러워할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들이 겪고 있는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 압박이라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위기 상황에 우리대학도 비켜갈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기존과 같은 성장시대의 접근법으로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멀리 보고, 크게 생각하는 성숙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교육과 연구 분야 등 대학 전반에 대한 제도와 시스템을 점검하여 더욱 더 발전시켜야할 부분은 더욱 강화하고 미흡한 점들은 새롭게 보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총장상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대학은 작은 돛단배가 아니라 거대한 범선입니다. 규모나 기능적인 측면에서 2000년대 초반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때문에 노련한 목수,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있는 경험 있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노련한 목수는 주춧돌부터 세우고 마지막에 지붕을 올려야 집을 제대로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설계도만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집을 지어본 사람입니다. 좋은 목재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가치와 쓰임새를 잘 알고 습니다. 지붕을 먼저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다지는 ‘목수형 총장’이 되겠습니다.”-지난 총장선거 과정에서 구성원 간의 갈등도 있었는데, 어떻게 풀 요량이십니까. “대학발전의 전제조건은 구성원 간 조화와 화합입니다. 선거방식을 놓고 표출된 교수회와 대학본부의 갈등, 선거기간 흩어진 마음들을 지혜롭게 모으는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엇보다 구성원과 늘 소통하고 화합하는 총장이 되겠습니다. 항상 낮은 자세로 경청하며 구성원과 눈빛을 주고받는 직접 소통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학내의 일상 업무는 부총장을 중심으로 처장들이 책임지고 처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전북대 고유의 색깔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레지덴셜 칼리지와 오프 캠퍼스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미래사회는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새로운 유형의 리더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대학 교육도 전문지식 전달에만 치중하는 ‘학원형 교육’에서 벗어나 인성, 사회성, 창의성, 감수성 등을 종합적으로 키우는 전인교육이 필요합니다. 다른 대학들과는 차별화된 우리 전북대만의 인재브랜드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이 취업의 질과 양을 개선하고 중도탈락률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우수학생 유치, 대학 브랜드 인지도 제고에도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총장님께서는 산학협력단장 시절 연구비를 크게 확충했습니다. 앞으로 연구비 확충에 대한 기대가 큰데요.“연구의 시작은 연구자의 의지에서 출발하지만, 그 과정엔 ‘연구비’라는 든든한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국립대 재정 중 일반회계는 대부분 인건비 등 경직성 경비이고, 기성회회계는 폐지가 불가피합니다. 발전기금 모금 또한 지방대학으로서의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연구비 수주 등 산학협력 수익이 유일한 돌파구입니다. 현재 연간 1300억 원 수준인 연구비 수주액을 2000억 원 시대를 열어서 4년간 총 7000억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습니다. 저는 산학협력단장 재임 당시 3년간 총 3400억 원을 유치한 경험과 노하우,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습니다.”-재임 중 꼭 이루고 싶은 과제 하나를 꼽으신다면.“약학대학 유치는 우리대학 경쟁력 향상과 지역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내야 할 절박한 일입니다. 약학대학은 일선의 약사를 양성·배출하는 1차적 소임을 넘어서 생명과학의 블루오션입니다. 우리대학은 의학, 치의학, 수의학 분야는 물론 자연과학, 농생명, 고분자나노 및 화학공학 분야 등 신약개발을 위한 학제간 협동이 수월하도록 그 기반이 잘 구축되어 있습니다. 약학대학 유치는 우리대학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모멘텀 중의 하나입니다. 지역민들께서 우리대학이 약대를 유치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시기 바랍니다.”-지역거점대학으로서 전북대와 지역사회와의 관계정립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보시는지.“지역과 하나 되는 대학도시를 조성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은 지역과 경계를 허물고 온전히 하나가 된 대학도시의 전형입니다.혁신도시, 국가식품클러스터와의 연계망을 구축하고, 전북 연구개발특구 추진에 따른 대학 내 연구센터와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겠습니다. 또한 탄소와 농생명 분야를 중심으로 지자체와의 협력을 통한 창업지원 및 일자리를 창출하고, 혁신도시로 이전한 국가기관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기 위해 취업연계 프로젝트를 가동하겠습니다. ‘지역을 캠퍼스로’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지역밀착형 평생교육·문화·예술·봉사 생태계를 조성하겠습니다.”-도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이 있으시다면.“대학과 지역발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역대학이 발전해야 그 지역이 발전하고, 국가 균형발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민들께 외면 받는 지역대학은 존립 근거가 없습니다. 지역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있을 때 지역대학은 지역사회의 자긍심이 될 것입니다. 전북대학교를 전라북도 최고의 브랜드로, 도민들께서 진정 자랑스러워하는 대학으로 만들어서 보답하겠습니다. ”● 이남호 총장은 '궁신접수' 좌우명, 겸손·진취성 중시이남호 총장은 대학산학협력단장을 두 차례 지내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국립대 최초로 연구비 1천억 원을 달성했고, 세계 최고 수준의 미국 로스알라모스연구소 등 70여개의 중대형 국책 연구사업을 유치하는 등 전북대 연구 지형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궁신접수’(躬身接水, 아무리 훌륭한 보석잔이라 해도 찻잔이 차 주전자에서 물을 얻으려면, 찻잔의 위치는 차 주전자보다 낮아야 한다는 말)를 좌우명으로 삼아 항상 겸손·겸양의 지혜를 생각한다. 빠른 결단과 기획 조정력이 장점.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은 성격이란다.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진취적인지·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지·팀워크를 잘 이루는지를 본다고. 주량은 소주 1병 반 정도로 술자리 분위기를 맞출 정도. 취미는 산책과 등산으로, 퇴근 후 건지산을 산책하며 사색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부인 김영식 씨와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남원 출신-전주고-서울대에서 학·석·박사 △1992~1997 익산대학 교수 △1997~2014 전북대 교수 △전북대 지식재산권 심의위원회 위원장·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위원장·학술연구위원회 위원장·산학협력단 단장(4대, 5대) △전북테크노파크 운영위원·전북도 녹생성장위원회 위원·전북과학기술위원회 위원 △한국목재공학회 상임이사·한국가구학회 이사·한국목공교육협회 이사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청장상·제16회 자랑스러운 전북인대상 학술언론부문·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13회 과학기술우수논문상·한국가구학회 학술상·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제1회 과학기술우수논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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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원용
  • 2014.12.29 23:02

성바오로복지병원 안득수 의무원장 "누구에게나 오는 죽음, 이해하면 삶은 더 소중해져"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을 봤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다.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 환자와 가족들에게 닥친 임종의 순간을 마주하는 일은 편하지 않았다. 영화촬영을 허락한 임종환자들은 남은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내어주었단다. 그들이 남겨준 선물로 가슴 먹먹해진 시간은 길게 갔다.생각하는 일조차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우리는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불편해하는지 궁금했다.호스피스 활동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내과전문의 안득수 박사(76, 성바오로복지병원 의무원장)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안 원장은 인터뷰를 꺼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시간을 내주었다.인터뷰가 있던 날은 눈이 내렸다. 며칠 전부터 하루건너 눈이 내린 참이었다. 완주군 소양면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가는 길, 눈을 뒤집어 쓴 하얀 산들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동안 20분 남짓한 거리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아스팔트길이 얼어붙은 탓이었다.안원장이 일주일에 이틀 나가 근무하는 성바오로복지병원은 요양병원이지만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많다. 그는 이곳에서 환자들의 진료와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 호스피스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임종을 맞았다.인터뷰 역시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환자들의 죽음을 지켰던 시간이 쉬웠을 리 없지만 안 원장은 오히려 나 스스로에게 축복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사람들은 죽음을 애써 피하려고 하죠. 입 밖으로 꺼내는 일조차 꺼립니다. 왠지 불운해질 것 같은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삶의 그 끝에 죽음이 있어요. 죽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삶이 더 소중해집니다. 가치 있는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어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그래도 죽음을 우리의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불편하다. 이런 마음을 읽었을까. 안원장이 웃으며 말했다. 죽음을 알면 행복해집니다.-이곳은 환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많지 않아요. 한 50명 쯤 될 겁니다.-요양병원이지만 아무래도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들이 많겠군요.치료와 요양을 위해 들어온 분들도 있지만 임종을 맞는 분들이 많습니다.-치료를 받아 완쾌되기를 바라는 환자들과 어쩔 수 없이 임종을 기다리는 환자 사이에서 원장님 역할이 특별할 것 같습니다.환자들의 대부분은 임종을 맞게 된 사람들이어서 역할이 특별히 다를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면서 조금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죠.-임종을 편안하게 맞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특별한 과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원장님이 생각하시는 죽음은 어떤 것입니까.누구나 피할 수 없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죠.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죠.-환자 대부분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물론이에요. 그래서 호스피스가 필요한 것이죠. 제가 이 병원에 온 것이 2009년인데, 그동안 120명 쯤 임종을 본 것 같아요. 그 분들 중 절반 정도는 제가 손을 잡고 임종의 순간을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이 편안하게 가셨어요.-처음부터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런 환자들은 어떻게 돌보십니까.이곳에 들어온 분들은 대부분이 더 이상 치료 받는 일이 의미 없게 된 환자들입니다. 처음 환자와 마주할 때는 환자가 느끼는 물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우선이죠. 그런데 이런 환자들은 물리적 고통 못지 않게 불면증이나 괴로움을 안게 됩니다. 물리적 고통도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마련인데, 이러한 상황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사에게 신뢰를 갖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는 특히 그렇죠.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뢰를 심리학적 용어로 라포르(Rapport)라고 하는데, 그것이 형성되지 않으면 호스피스도 의미 없게 되어버려요.-단순히 의사로서 치료해주는 것만으로도 라포르가 형성될까요.그렇진 않죠. 환자가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는구나라는 마음을 가져야 가능하겠죠.-원장님께서는 어떻게 환자들의 마음을 얻었는지 궁금합니다.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우선은 내 마음을 온전히 환자에게 가게 해야 해요. 이를테면 노인 환자들은 대변을 못 보는 경우가 많은데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내 손가락으로 파내기도 합니다. 환자들이 그런 과정을 갖고 나면 자연스럽게 라포르가 형성되더라고요.-의사로서의 치료 뿐 아니라 간병일 까지 나누시는군요.간호사들이나 간병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필요하면 해야죠.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두니 별 거부감 없이 하게 되더라고요.-의료기술로 해결 되지 않는 고통을 계속 호소할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자신의 고통이 덜어지지 않으면 라포르가 형성되기 어렵지 않을까요.아무래도 고통을 제대로 덜어주지 못하면 어렵겠죠. 치료를 하는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몸에 생기는 물리적 고통을 해결해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적 고통을 치유해주는 것이예요. 이 두 가지가 잘 해결되어야 진정한 라포르가 형성되죠.-정신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하겠군요.라포르가 이루어지면 환자는 자신의 고민을 다 털어놓게 됩니다. 고백하는 것이죠.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고백을 듣기도 합니다. 가족 사이의 미움과 갈등은 물론이고,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감춰놓았던 1급 비밀까지 듣게 되요.(웃음) 환자들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인데, 저는 제 신앙으로 얻은 답을 전해줍니다. 내 의견이지만, 환자 대부분이 그 답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죠. 그런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게 되더군요.-끝까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물론이죠. 끝까지 간직하고 가려는 사람도 있어요. 이생에 대한 집착을 끝내 털어내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은 아예 안하려는 분들이죠.-임종 순간을 지킨 환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그 많은 환자들의 순간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가능하면 제가 치료한 환자들의 임종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의 최후 숨(last breath)을 내가 지킬 수 있기를 늘 기도하지요. 인간의 삶을 마무리 하는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임종의 순간에 제가 병원에 없으면 연락이 오는데, 그럴때는 어느 시간이든 달려옵니다. 그래서 제 운전 실력이 좋아졌습니다.-원장님은 천주교 신자지만 임종 환자들이 모두 신앙을 갖고 있진 않죠.이곳에 오시는 분들 중 60%정도는 천주교 신자인데,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이라도 저는 그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세상과 화해하고 편안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진심을 담는 기도에 많은 분들이 감응해주십니다.-편안하게 임종을 맞지 못한 분들을 보낼 때는 안타깝겠습니다.그런 분들은 대개 일찌감치 부터 희망을 포기하고 불안해하다 임종을 맞습니다. 죽으면 내가 어떻게 될까하는 두려움으로 불가항력적인 삶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거든요. 그럴 때는 마음이 아프죠.-결국 편안한 죽음이란 세상과의 화해라고 할 수 있겠군요.그렇습니다. 세상과 화해하면 모든 것이 풀어지죠. 결국 사랑의 문제인데 살아오면서 쌓았던 갈등 미움, 욕심을 털고 나면 기쁨과 사랑으로 임종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특별히 마음에 남아 있는 임종 환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모든 분들이 마음에 남아있지만 몇몇 분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폐암으로 임종을 맞는 분이 있었는데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혼자 지내다가 병을 얻었는데, 늘 지갑에 20만 원 정도의 현금을 갖고 있었어요. 함께 식사도 하는 친한 사이였는데, 하루는 자기가 호주머니에 항상 칼을 넣고 다닌다고 털어놓는거예요. 통증이 오면 내가 이러다가 비참하게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언제라도 그런 때가 오면 조용하게 산으로 가서 마감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편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죠. 결국 칼을 돌려 받았죠. 6개월 정도 투병하다 돌아가셨는데,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가족들과 화해하고 편하게 가셨는데, 그 후에 가족들이 제게 적지 않은 돈을 가져왔어요. 그 분 유언이었답니다. 병원 후원금으로 쓰였죠.-어린 환자들의 임종은 더 가슴 아프시겠어요.열여덟 살 소녀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습니다. 한번은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원장님께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결국 약속을 못 지켰는데 그나마 임종은 편안하게 맞아 외로가 되었습니다.-아무리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다해도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다보면 심적 고통이 클 것 같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어떤 것인가요.드문 경우이긴한데 끝까지 죽는 것을 대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치유를 계속 희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다는 것을 인정 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워낙 크다보니 임종의 순간까지 편안함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죠.- 죽음의 질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죽음 알림 주간이 있고, 데쓰 카페(Death Cafe)가 운영된다고 하던데요.죽음의 질(생애 말기 치료) 1위 국가가 영국입니다. 어느 자료를 보니 한국은 32위더군요. 영국에서는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활발합니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준비를 정책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원장님께서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까.의사에는 네 가지 종류의 의사가 있습니다. 종기 고치는 의사, 병 고치는 의사, 의료기술이 좋은 의사 그리고 마음을 고치는 의사예요. 의료기술이 빼어난 의사를 우리는 명의(名醫)라고 하죠. 마음까지 고치는 의사는 심의(心醫)인데, 내가 생각하기에 심의는 명의보다 더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는 않죠. 누구나 명의와 심의가 되기를 원할 겁니다. 저 또한 바람은 컸지만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지금 하시는 일에 만족하십니까.스스로 선택한 일이니까요. 통념으로 보자면 나는 이제 인생의 절정에서 내려오고 있는 중이지요. 의료인으로서도 그렇고. 의사의 길에 들어서면서 인턴으로 출발했다가 지금 다시 인턴의사가 된 것 같아요. 육체적 고통이 가장 절정에 이르는 임종 시간이 대략 3시간인데, 그 시간을 함께 하고 나면 눈에 핏줄이 터지기도 하고, 탈진해서 걸을 기력도 없는 때가 많아요. 그래도 되돌아보면 그 순간이 참으로 축복받은 시간이었다는 알게 되는데 그렇게 임종을 잘하고 나면 보람과 기쁨이 또 새로운 힘이 됩니다.죽음을 주제로 한 인터뷰는 조심스러웠다. 무겁고 진지한 시간을 예상했던 것도 주제의 버거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볍진 않았으나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다. 안원장의 편안하고 따뜻한 웃음과 친밀한 화법 덕분이었다.죽음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면 삶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죽음을 애써 외면하지 않고 생각하며 살다보면 성찰의 시간이 많아지거든요.어수선한 연말, 한해를 보내며 죽음의 한편을 알게 됐다. 귀한 선물이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안득수 원장은 임종 맞은 환자들과 마음 교류하는 '호스피스 의사'안득수 원장은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농촌 살림으로는 어려움 없이 보냈지만 아버지가 수리조합장에 출마하면서 가산이 줄어 금세 집안 형편이 어렵게 됐다. 부모님은 장남인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즈음 의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고민 없이 전남대 의과대학에 들어가 내과전문의가 됐다. 고학으로 학비를 벌어야했던 대학시절, 고단한 생활과 마음의 고통을 의지할 곳 없을 때 천주교를 만나 신자가 되었다. 부모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었지만 평생 안고 살았던 위장병을 치료하고 아들 덕분에 병이 나았다며 기뻐하는 어머니를 보며 의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본격적인 의사 생활을 전주에서 시작하면서 전주사람이 됐다. 성모병원과 전북도립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전북대 의과대학 교수와 전북대 병원장을 지내고 2004년 은퇴했다. 2007년부터 2년 남짓 개인병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처음으로 경제적인 자유로움을 가족들에게 안길 수 있었지만 어느 날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일을 늦기 전에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젊은 시절, 후배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주하며 죽기 전에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보람 있는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내와 상의도 하지 않고 사표를 내고 성바오로복지병원으로 왔다. 2009년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선택을 반대했던 아내도 뜻을 함께 해주었다. 학위를 끝내고 개업할 기회가 왔을 때도 학교에 남기를 권했던 아내 덕분에 지금껏 경제적인 여건에 마음 쓰지 않고 의사로서 행복한 삶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본격적인 호스피스 활동이 시작됐다. 임종환자를 만났던 초기, 마음을 열지 않는 환자들을 보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의사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답을 찾았다. 성바오로복지병원에서 일한지 5년, 100명이 넘는 임종환자들이 그를 찾아 보살핌을 받았다.죽음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말하는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알게 되면 삶을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잘사는 것(well-being) 못지 않게 잘 죽는 것(well-dying)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한다.1986년 천주교 전주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회장으로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한 이후 평신도 협의회 총회장전동성당 사목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도 새벽 다섯 시 반, 전동성당 첫 번째 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1990년대 초, 고즈넉해서 좋았던 전주 한옥마을에 집을 지어 살고 있는 그는 여전히 한옥마을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주민이다.

  • 기획
  • 김은정
  • 2014.12.25 23:02

[(42) 부안강산명주] 바닷바람 맞고 자란 오디 엄선 '명품 뽕주' 생산

부안에는 과실 중의 황제라고 일컫는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활용한 맛좋은 뽕주가 유명하다. 부안특산품이기도 한 뽕주는 깊고 부드러운 맛에 남성은 물론 여성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그 중에서도 부안군 부안읍 석정리 83번지에 위치한 부안강산명주(회장 이영식)는 우수한 기술력과 변산반도 해풍을 맞으며 자란 엄선된 오디를 활용해 최고의 뽕주를 생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부안 잠업산업 재도약 견인부안강산명주는 부안군이 잠업산업의 재도약을 선언하면서 변산면 유유마을에 누에타운 건설을 추진하던 2007년 사업 구상에 착수했다.2007년 8월 3000여㎡의 부지에 486㎡ 공장을 가동하면서 대표 브랜드인 강산뽕주를 첫 출시했다.강산뽕주는 출시 5개월만인 이듬해 1월 농협유통 전주점 입점에 성공하면서 영업력을 과시했다. 같은해 12월 국군복지단 위탁물품 납품업체로 선정되는 결실도 맺었다.국군복지단 위탁물품 납품업체는 내년 2월 4년차 계약을 앞두고 있다.2009년 1월에는 롯데마트 전국지점에 입점하면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고 같은 해 5월 납품대리점 총 60개를 달성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리게 된다.2010년에는 중국 다롄의 5개 대형 백화점에 입점할 물량을 첫 선적하면서 수출의 물꼬를 텄으며 새만금방조제 60개국 주한외교사절단 공식만찬주 선정, 우체국쇼핑 계약 등 다양한 성과를 달성했다.△ 질 좋은 원료로 최상의 술 빚어부안강산명주가 이렇게 단기간 성장을 하게 된 것에는 이영식 회장의 향토기업 경영철학이 주효했다.이는 뽕주 원료인 오디를 해풍이 풍부한 해변에서 재배해 당도가 높은 부안산 오디만을 사용하고 종업원도 부안 출신만으로 고집하면서 독특한 향토사랑을 실천하는데서 출발한다.정직하게 질 좋은 재료를 많이 사용하고 잘 보살펴주면 맛은 거짓이 없다는 철학으로 뽕주 생산에 집중하고 있다.그래서 부안강산명주는 엄선한 오디를 발효시켜 1년 이상의 숙성과정을 거쳐 생산되고 있어 오디주의 특징인 깊고 진하며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또 약주와 탁주는 부안군에서 생산된 쌀만을 사용하는 제품으로 발효시킨 원액을 숙성시켜 빚어내는 전통주로 깔끔한 감칠맛과 한약재를 첨가해 풍미를 더했다.이와 함께 끊임없는 연구와 기술개발을 통해 복분자 음료 특허 획득과 ISO 9001 인증 등 우수한 기술력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사회 환원도 앞장부안강산명주 이영식 회장의 지역사랑을 대단하다.부안산 재료만을 사용하고 종업원도 부안 출신으로만 고집하는 것도 유명하지만 지역사회 나눔 실천도 열정적이다.이 회장은 최근 김종규 부안군수를 만나 나누미근농장학재단 장학금 1000만원을 기탁했다.이 회장의 장학금 기탁은 지난 201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5회째이며 그동안 기탁한 금액만도 6000만원에 달해 지역 교육 발전 및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이영식 회장은 지역인재 육성이 가장 생산성 있는 투자라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동안 군민들게 받은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밖에도 부안강산명주는 부안 관내 어려운 이웃들과 독거노인, 한 부모가정, 다문화가정 및 사회적약자 가정에 매년 정기적으로 후원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사회 분위기 조성에 동참하고 있다.● 이영식 회장 "다른 회사보다 앞서가려면 소통이 중요"부안강산명주가 소통을 통한 자기개발과 연구개발이 통합적으로 잘 이뤄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부안강산명주 이영식 회장은 가장 먼저 소통을 강조했다.이 회장은 처음에는 술맛만 좋으면 되는 줄 알았다며 헌데 술맛도 좋아야 하고 영업도 해야 하고 기술개발도 해야 하고 신제품도 계속 출시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이어 그는 그래서 특허 획득과 ISO 9001 인증 등 기술개발에 나섰다고 말했다.특히 그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 타 회사보다 앞서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소통이다. 결국 일이라는 게 사람이 직접 만나서 하는게 가장 빠르고 정확하기 때문이라며 계속적인 소통을 통한 자기개발과 연구개발이 통합적으로 잘 이뤄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그는 또 항상 저희 부안강산명주를 아껴주시고 지켜봐 주시는 모든 분들게 감사드린다며 모두가 힘든 시기에 회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좋은 오디를 생산하고자 노력해주신 농민들과 강산뽕주를 맛있게 드셔주시는 소비자 여러분께 항상 감사하고 고맙다고 전했다.

  • 기획
  • 양병대
  • 2014.12.25 23:02

[(49)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첫걸음

2014년 갑오년이 불과 며칠 남지 않았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으로 이와 관련하여 많은 기념행사와 학술대회가 있었다. 1994년 100주년만큼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 의미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다. 특히 각 지역에서 각 지역의 기념사업 주체들이 자발적으로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다양하게 펼쳤고, 학술적 영역에서 역시 학회와 기관 그리고 기념사업단체들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기념행사와 학술대회의 큰 흐름 중에 하나는 동학농민혁명을 보는 관점을 한국사에 국한시키지 않고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동학농민혁명이 한국사 속에 갇혀있어서는 안된다. 벗어나야만 한다. 그것을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할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방법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그 무엇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세계유산으로 가능성이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남아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정비하고 보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여해야하고 또 여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현재까지 진행된 우리나라의 유적지의 세계유산 등재에는 대략 10년 동안의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 것을 볼 수 있다.반면에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의 등재 필요성과 목록을 어떻게 잘 정리하느냐에 따라 등재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현황을 보면, 훈민정음(1997년), 조선왕조실록(1997년), 직지심체요절(2001년), 승정원일기(2001),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2007년), 조선왕조의궤(2007년), 동의보감(2009년), 일성록(2011년), 5.18민주화운동기록물(2011년), 난중일기(2013년), 새마을운동기록물(2013년) 등이다.세계기록유산은 세계적으로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그 활용을 진흥하기 위하여 1992년부터 유네스코가 도입시행하고 있는 제도이다. 문화재청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와 함께 우수한 기록유산을 발굴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함으로서 뛰어난 기록문화를 보유한 문화국가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우리 기록유산이 인류 공동의 유산으로 보존되고 활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바로 이러한 세계기록유산에 가장 부합되는 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세계기록유산 선정의 기준은 유산의 진정성, 독창적이고 비대체적인 유산, 세계적 관점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 등인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여기에 대단히 부합한다. 유산의 진정성이란 해당 유산의 본질 및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정품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모두 정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독창적이고 비대체적인 유산이란 특정기간 또는 특정 지역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 경우인데,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말 한국, 중국,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세계적 관점에서 유산이 가지는 중요성이란 한 지역이 아닌 세계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여부인데,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사의 역사적 지향을 변화시켰으며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볼 때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는 충분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유네스코에서 통용될 수 있는 보다 정치한 논리를 만들고,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목록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동학농민혁명 관련 자료를 모두 모아 놓은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30권, 1996)를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성격별로 분류해보면 동학경전 및 천도교 기록(13건), 동학농민군 기록(13건), 민보군유생기록(82건), 조선정부 기록(11건), 관군토벌군기록(29건),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원회 기록(3794건)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동학교단 기록, 동학농민군 기록, 민보군유생 기록, 조선정부기록, 관군 기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생성된 기록들이 공존하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기록은 100여년이 지난 다음 한국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들 개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조사하고 등록한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전체라고 볼 수는 없다. 여기에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매우 많은 기록들을 포함해야 한다.현재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여러 기관과 개인이 소유하거나 보관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에 대한 목록을 만들고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기관과 개인들에게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일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추진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여겨진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범국민적인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등재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서 소장 기관과 단체와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세부 추진계획을 세워 추진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주제로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논리를 구축하고 기본적인 데이터를 집적할 필요가 있다.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2년마다 지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일정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 문화재청은 2015년 11월 세계기록유산등재대상을 선정하고 유네스코는 2017년 7월 세계기록유산을 최종결정하게 된다.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이다. 동학농민혁명에는 자유, 평등, 평화, 민주, 개혁, 인간존중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인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이러한 정신이 동학농민혁명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 등재는 동학농민혁명에 내재되어 있는 이러한 높은 가치를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당면과제인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를 실현하는 것이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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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12.24 23:02

고창 '손맛 영농조합법인' 정연미 대표, 직접 지은 농산물로 반찬 만들어 믿음 가득한 먹거리 판매

세상은 누구에게나 독자적인 사업 기반을 마련할 기회를 제공하고, 그 기회를 실현할 창업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하지만 아무나 창업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창업하는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함이 있다. 창업을 성공 신화로 이끄는 사람에게는 위대한 정신이 있다. 숱한 어려움을 돌파하고, 자신의 파이를 넓혀가는 재주가 탁월하다. 누가 뭐라해도 현대 정주영, 삼성 이병철, 애플 스티브 잡스 회장 등은 특별하고 위대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창업은 도시에서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근래 자유무역협정으로 위기감이 고조된 농촌에서도 창조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창업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도시민을 대상으로 한 농산물 직거래 판매, 계약 재배 판매, 농산물 가공 판매, 농촌 체험, 농촌 관광 등을 바탕으로 사업화하는 농업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하지만 창업은 신나는 도전이면서 여전히 넘기 힘겹고 두려운 산인 것이 사실이다.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메이플-스톤 공동체 지원사업에서 우수 창업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이제 첫 발을 떼고 있는 마을기업 손맛 영농조합법인(이하 손맛) 정연미 대표(45)를 지난 17일 고창군 아산면에 위치한 고창여성농업인센터 사무실에서 만나 창업 과정과 성공을 향한 의지를 들어보았다.이날 고창을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는 폭설이 내렸지만, 고창여성농업인센터의 꾸러미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산과 무장 일대에서 농산물을 가져온 여성 농업인45명이 모여 꾸러미 상자에 농산물을 정성스레 담고 있었다. 단단히 포장된 이 꾸러미들은 택배를 통해 다음날이면 회원 식탁에 오를 것이다.-손맛은 소규모 반찬류 가공공장인데, 여성농업인들에게 적합한 사업 아이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창업을 하게 됐습니까.지난 2010년 고창여성농업인센터가 하는 꾸러미 사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농촌에서 도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꾸러미 사업은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은 물론 식혜, 된장, 고추장, 파김치 등 집에서 여성 농업인들이 직접 만든 농산품을 정해진 규격 단위로 포장, 판매하는 사업이예요. 꾸러미 사업에 참여하면서 농식품 가공 사업장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여성농업인들이 가정에서 직접 만든 농산품을 소포장 꾸러미로 판매하는 것인데 시설비 투자가 부담스러운 가공 시설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어느날 꾸러미 작업을 함께하는 분이 다른 곳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했어요. 꾸러미 반찬류를 대상으로 식파라치가 신고를 했고, 꼼짝없이 벌금을 물었다는 거예요. 저희는 순수하게 가정에서 만든 것을 판매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식파라치들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이죠. 소규모 반찬류지만 위생 가공해야 모든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누가 창업 아이디어를 냈습니까.꾸러미 작업 동료들 사이에 가공 시설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이 돼 있었는데, 제가 지난해 말 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를 세워 공동체 사업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안했어요. 모두가 의기투합, 한번 해보자며 나섰지요.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는 지난해 10월 정읍시와 고창군이 공동으로 만든 행정과 주민의 중간 지원조직이다. 주민이 주체가 되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 사업을 발굴 육성하고, 지속 발전하도록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농림축산식품부와 지역발전위원회가 주관한 2013년 기초생활권 연계협력사업에 2013년 5월 선정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사업에는 2015년까지 3년간 국비 14억9000만원, 정읍시 1억3000만원, 고창군 3700만원 등 총16억5700만원의 사업비가 투입된다. 메이플은 정읍단풍, 스톤은 고창고인돌유적지를 지칭한다.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는 마을단위와 3인 이상이 공동으로 창업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업 신청자들은 한달간 창안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광역창안대회에서 범위에 들면 1단계 사업비 300만원을 받고, 2단계 사업비는 3000만원 이내에서 지원받는다.-그래서 사업공모에 응했습니까.사실 저도 40대 중반이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한 상황이기 때문에 뭔가 적극적으로 해보고 싶었거든요. 남편이 원예 관련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봐 왔고, 이런 저런 고민도 해봤고요. 그래서 농사도 시작했고, 꾸러미 사업에도 동참했거든요. 마을이든 창업이든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가능하고, 마침 꾸러미 동료들 대부분이 찬성했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신청했습니다.-잘 됐습니까.꾸러미 동료 34명과 함께 창안학교를 열심히 다녔어요. 교육받는 과정에서 사업계획서를 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아 300만 원을 지원받았어요. 300만 원을 가지고 사업계획서대로 4월부터 8월까지 추진했어요. 선진지 견학, 사업화할 반찬 종류 정하기, 표준 조리법 개발하기 등 저희가 만들어 제출한 사업계획서대로 진행한 것이죠. 도시 소비자들에게 설문지도 돌렸어요. 열심히 뛰었죠. 이 평가에 26개 팀이 참가했는데, 평가 결과 우리 손맛이 1등을 했어요. 그래서 3000만 원을 더 지원받게 됐어요. 너무 기뻤지요.-첫 도전에서 1등을 했으니 그 기쁨을 말로 형언하기 힘들었겠습니다. 지원금 3000만 원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300만 원을 지원받아 수행한 과제가 뿌리단계였다면, 3000만 원을 지원받아 하고 있는 지금 단계는 줄기단계예요. 저희가 처음 목표했던 가공시설을 보유, 가동하고 생산하는 단계로 가는 것이죠.-3000만 원으로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시설까지 하려면 부담스럽지 않습니까.사실 자부담이 있지만, 3000만원을 지원받아서 식품 가공시설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더라구요. 그래서 저희는 자금력이 부족한 현재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뭔가를 고민했고, 이런 방법을 세웠어요. 제가 사는 동네 옆에 있는 반암정보화마을에 반암권역사업으로 세워진 식품공장이 하나 있어요. 신선식품이라는 한과 제조공장이죠. 그런데 신선식품은 한과만 만들기 때문에 1년에 2개월 정도밖에 공장을 가동하지 않아요. 정부 보조금을 들여 세운 소중한 공장인데, 1년 중 10개월 가량 놀리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래서 저희와 신선식품이 협약을 맺고, 반찬류 생산에 필요한 몇가지 시설을 추가한 뒤 다양한 가공식품을 생산하게 된다면 국가적 낭비도 없고, 여러면에서 서로 윈윈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군청에서는 처음 이중보조 문제 소지가 있다며 꺼려했는데, 저희가 사업장을 따로 만드는 등 조정을 거쳐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신선식품 공장에서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는 중입니다.-신선식품 쪽 반응은 어땠습니까.신선식품은 노령 인력 위주로 한과를 만들거든요. 지역의 젊은 인력이 참여해 다양한 반찬류를 가공 생산하면 신선식품에도 여러 가지 도움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다행이군요. 그 과정에서 따로 사업장을 냈다고 했는데, 무슨 시설인가요.이곳은 고창 읍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아산면이잖아요. 어차피 읍내 쪽 홍보도 필요하기 때문에 고창읍 현대아파트 상가에 홍보관 겸 판매장을 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저희가 3단계로 계획을 세운 농가식당으로 진출, 부가 수익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 농산물을 이용해서 고창스러운 맛을 내는 농가식당을 하는 것이죠.-처음 반찬류를 보다 엄격하게 위생 여건이 갖춰진 공장에서 가공 생산하기 위해 사업을 추진했고, 그 꿈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금 어떤 기분인가요.작년 12월에 사업 신청한 뒤 올들어 교육받으며 사업계획서 짜고, 뿌리단계를 진행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즐거웠습니다. 평가에서 1등하고 3000만원을 지원받아 줄기단계를 진행하는 지금은 더욱 신나죠. 그러나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동안 줄기단계 사업을 끝내고 정산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웠습니다. 다행히 신선식품과 협의가 잘 되고, 행정당국에서도 협조해 줘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습니다. 메이플-스톤이 열심히 지원해 주고 있지만 창안대회 후 사업자들에게 좀더 세밀한 컨설팅 기회를 제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희는 갑작스럽게 사업자가 되었잖아요. 몰라서 센터측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고 생각해요. 세무, 회계 등 배워야 할 게 너무 많고요. 내년에는 컨설팅을 받아볼 계획입니다. -사실 손맛은 이제 보육단계의 스타트업 기업인데 마케팅, 수익 계획 등은 어떻게 세워뒀습니까.기본적으로 고창여성농업인센터의 고창텃밭꾸러미, 성내면의 언니네텃밭 등 꾸러미 사업체에 납품하고, 로컬푸드와 마트 등을 통해 판매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아산에 운영 중인 온몸농촌유학센터에 도시에서 오는 체험 가족이 많기 때문에 이들과 소통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손맛의 제품들을 소개하고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판매는 인력 문제가 있어 아직 보류 상태입니다.-그동안 농산물을 생산해 소규모 꾸러미 판매를 했습니다. 실제로 가공 유통 쪽으로 사업을 진행해 보니 어떻습니까.사업을 쉽게 생각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창안학교에서 알려준다고 하니까 배워가면서 하면 되겠다 싶어서 뛰어든 것인데, 실제로 해보니 간단하지 않습니다. 1년 정도 됐는데 여전히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일단 시작한 이상 절대 실패하고 싶지 않고, 한걸음 한걸음 잘 내딛으며 나아가고 싶습니다. 마트에 가 보면 중국산이 넘치는데, 소비자들이 정직하게 만드는 우리 농산물을 더 소비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예요.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아요. 센터에서 이런 저런 도움을 많이 주고 있습니다만, 초보 대표로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너무 많아요. 처음 뿌리에서 줄기단계로 오르면서 신났습니만, 어느 순간 회사가 돼 있었고, 수익을 내야 하는 부담이 커지는 것이죠. 적어도 운영비는 나와야 하는데, 인건비는 벌어야 하는데 등 생각이 많아졌어요. 그동안에는 제가 농사 지은 것 꾸러미로 내고 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현재 계획으로 보면 손맛에서는 반찬류를 취급합니다. 취급 품목은 정해졌습니까.그동안 파김치 등 15종의 반찬 조리법을 개발했고, 소비자 호응도 조사도 마쳤습니다. 그동안 가정에서 개인적 경험에 의해 만들던 반찬을 표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표준 조리법을 만들면서 반찬과 생산자를 묶어 전문화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리수쨈-정경자 회원 식이죠. 이처럼 전문반찬생산 체제로 갈 생각입니다. 그래야 맛 좋은 고품질 반찬류를 생산 제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처음부터 품목이 너무 많으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품목도 최대한 좁혀 출발할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손맛이 그동안 표준 조리법을 개발한 반찬류는 15종이다. 양파김치는 고춧가루, 매실엑기스, 잡젓, 찹쌀풀죽, 깨, 육수(멸치, 다시마), 부추, 대파, 당근, 밤꿀이 주요 재료이다. 4등분한 양파를 절임물에 1시간 정도 절여 간을 맞춘다.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1시간 정도 끓여 육수를 만들고, 찹쌀죽도 걸죽하게 쑨 다음 양념류를 넣고 잘 버무린다. 부추와 대파를 넣어 색감을 풍부하게 한 양파김치는 식감을 자극한다. 이렇게 개발한 반찬류는 파김치, 열무김치, 보리수쨈, 밀북새미, 땅콩조림, 오이소박이, 고추된장소박이, 버섯장아찌, 깻잎김치, 치커리장아찌, 삼채쫑장아찌, 곤드레장아찌 등이다.-보리수쨈, 밀북새미 등은 생소한데요.양파장아찌, 열무김치, 파김치, 장아찌처럼 반찬류는 아니지요. 보리수는 기관지에 좋은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어서 쨈으로 개발했어요. 천식, 기침, 가래에 효능이 있고, 혈액 순환에도 좋다고 합니다. 비타민 C도 풍부해서 감기예방에도 좋고요. 식빵에 찍어 먹을 수 있는 제품입니다. 밀북새미는 지금 거의 사라진 전통음식이예요. 밀과 팥을 넣어서 만드는데, 오래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납니다. 건강에 좋고, 고창의 맛을 대표할 수 있는 가공식품을 연구 개발해 나갈 겁니다.-손맛에는 어떤 여성농업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까.처음 7명이 출발했는데, 5명이 출자해서 손맛 영농조합법인이 출범했습니다. 수박, 배, 무, 배추, 복분자, 블루베리, 고구마, 옥수수 등 각각 다양한 농사를 짓는 여성 농업인들이 참여하고 있구요. 손맛이 좋은 분들이어서 맛좋은 반찬류를 소비자들에게 드릴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고창은 전역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가장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짓고, 그렇게 생산된 농산물로 소비자 입맛에 맞는 반찬류를 가장 위생적으로 생산해 제공할 계획입니다. 처음 저희가 이 일을 시작한 목적입니다. 항상 가족의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 마음으로 식재료를 엄선, 가장 위생적인 시설에서 맛좋은 고품질 반찬을 만들어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그 다음으로 체험농장, 농가식당 등도 차근 차근 추진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정연미 대표는 1996년 고창 귀촌, 다품목 소량 농사서울에서 막 신혼 살림을 하던 정연미 대표는 남편 직장 때문에 1996년 고창군 흥덕면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고창군이 남편 회사와 추진한 3만평 규모의 첨단 유리온실 사업이 물거품되었고, 정 대표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때 정 대표 남편이 본사 복귀를 포기하고 고창에서 살기를 원했다. 정 대표가 고창 주민이 된 사연이다.정 대표 부부는 1998년 고창군 해리면 동호 해수욕장 인근에 1000평 규모의 오이 하우스 농장을 지었고, 오이농사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폭설 등 자연재해, 기름값 상승이 젊은 귀농 부부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큰 폭설 피해를 입고 7년여만에 오이 농사를 접어야 했다.2005년 고창읍으로 이사한 뒤 남편은 현재 시설하우스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2010년 아산면 반암리 영모정마을로 이사한 정 대표는 남편 사업이 안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농사일을 시작했다. 처음 300평의 밭에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초보 농사꾼에게 해프닝이 벌어졌다. 시장에서 구입해 심은 고추가 공교롭게도 꽈리고추였던 것이다. 농약을 하지 않아 벌레 피해도 있었지만, 다행히 고창여성농업인센터 꾸러미사업을 통해 처리할 수 있었다.이듬해 블루베리를 심었고, 올 봄에는 복분자를 심었다. 고구마와 옥수수 등도 조금씩 심어 수확했다. 지금은 농사가 600평으로 늘었다. 혼자 하기는 조금 버거운 농사다.꽈리고추 처분하느라 인연을 맺었던 고창여성농업인센터에서 느낀 바가 있어 2012년부터는 꾸러미 판매를 위해 다품목 농사를 짓게 됐다.사실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농사를 지으면 단품종 농사보다 훨씬 바쁘다. 그래도 꾸러미 농사가 좋다. 대부분 농산물은 지인들에게 직거래 방식으로 판매하고, 그래도 남는 농산물은 센터 꾸러미에서 판매한다.블루베리 농사는 다른 작물에 비해 고수익이다. 거름주기, 가지치기, 잡초관리만 하면 잘 자라준다. 하지만 수확할 때 잔손이 많이 가는게 흠이다. 농사를 더 늘린다면 블루베리를 늘리고 싶다. 그러나 요즘 블루베리 재배가 포화상태라는 말이 있어 조심스럽다.

  • 기획
  • 김재호
  • 2014.12.23 23:02

[(41) 고창 만선영어조합법인] '복분자 간장게장' 특허…꽃게·굴비 등 수산물 가공 판매

고창군 상하면 진암구시포로에 위치한 만선영어조합법인(대표 차성현)은 입맛을 살리는 바다 반찬이라는 의미의 해찬미소를 브랜드로 수산물 등을 가공판매하는 회사다.총16명의 직원을 둔 만선영어조합법인은 名(이름 명)품이 아닌 銘(좋을 명)품을 만드는 기업을 경영이념으로 보기에만 좋은 제품이 아니라 품질이 좋은 제품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작지만 강한기업이다.차성현 대표는 전 지역이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청정한 고창 지역 농수산물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고품격이다. 내 고향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수산물을 유통단계에서 발생하는 중간마진의 거품을 빼고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싶어 만선영어조합법인을 설립했다고 설립취지를 밝혔다.△향토기업 만선영어조합법인만선영어조합법인은 꽃게와 굴비, 고등어, 먹갈치 등 수산물을 가공판매하는 회사로 출발했다. 2009년 공장을 설립하여 2010년에 입맛을 살리는 바다의 반찬이라는 의미로 해찬미소라는 브랜드 명을 달았다. 만선영어조합법인에서 생산되는 해찬미소 제품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창에서 나는 농수산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고창에서 나온 먹거리라는 점을 가치로 내세우며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2010년 단일품목 국내 최초로 절임류(간장게장) HACCP인증 , 냉동수산식품(어류) HACCP인증, 복분자 간장게장 및 그 제조방법 특허등록, 크린사업장 인정, BUY전북상품 인증 등을 받았다. 2012년에는 복분자 간장게장 대만 수출, 해찬미소 참굴비 베트남 수출, 2014년 인증사회적기업 지정, (주)LF FOOD 납품, 서울 하나로마트 16개점 납품계약, 복분자 간장게장 LA수출, 모싯잎 송편 미국 수출, 해찬미소 참굴비 뉴질랜드 수출 등 짧은 기간동안에 괄목할 만한 성장세을 보이고 있다.△주요 생산 제품만선영어조합법인은 100% 국내산 암꽃게에 고창산 복분자를 가미한 복분자 간장게장, 복분자 양념게장 등 절임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또한 크고 싱싱한 국내산 조기만을 엄선하여 국내산 천일염으로 절인 해찬미소 참굴비, 매콤달콤 특제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린 고추장굴비, 맛이좋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신선한 노르웨이 고등어만을 사용한 해찬미소 노르웨이 고등어를 가공해 마트와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판매하고 있다.이밖에 100% 국내산 쌀과 청정 모싯잎으로 빚은 전통웰빙식품 호식이 모싯잎 송편, 모싯잎 개떡 등 떡류 제품도 생산 판매하고 있다.△사회환원 사업만선영어조합법인은 고창군 기초푸드뱅크 협약을 통해 매년 3000 만원 상당의 물품을 결식아동, 독거노인, 재가장애인 등 소외계층에 제공하고 있다. 매월 상하면 관내 경노당에 40만 원 상당의 모싯잎 송편을 어르신들 간식으로 제공하고 있으며, 매년 연말연시에 군 희망복지지원단과 협조하여 장애인 시설인 아름다운마을과 아동생활시설 요엘원에 자사제품(200만원 상당)을 기부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차성현 대표는 애향청년회, 새고창로타리클럽, 구시포상가번영회 등의 사회활동을 통해 육체적, 금전적 봉사를 꾸준히 실천해 오고있다.△미래 비전만선영어조합법인은 인증 사회적기업으로서 지역에서 가공판매하는 제품을 전국으로 판매하고 그 이익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 있다.매년 증가되는 판매량으로 인해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신규 채용을 늘리고 있으며, 신규 인력으로 인한 제품의 품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인력을 중점적으로 양성할 계획이다.직원들의 이직률을 줄이고 안정적인 생활 보장을 위해 장기근소자 예우와 인센티브제를 도입하고 있으며, 월1회 이상 직원들과 경영자와의 소통의 시간을 갖고 있다.현재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공정을 오는 2월까지 첨단시설 및 자동화라인을 갖춘 제2공장을 신축하여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작업자들의 편리성을 높여 고품질제품을 생산한다는 방침이다.향후 5년 안에 50명의 고용목표를 달성하고, 취약계층 일자리창출기업으로 거듭나며, 지역사회에 협력하고 올바른 식품문화를 선도하는 건실한 향토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목표다.● 차성현 대표 "안전한 식품 만들기 중점, 직원 복지 향상에도 최선"수산업에 종사하다 보니 우리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이 품질만큼 인정을 못받는 다는 안타까움에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 고향에서 생산된 질 좋은 농수산물을 유통단계에서 발생하는 중간마진의 거품을 빼고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안전한 식품을 만들겠으며,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겠습니다. 해찬미소의 제품을 구매하시는 모든 고객님들이 해찬미소의 제품을 믿고 구매하실 수 있도록 믿음을 드리는 기업이 되겠습니다.차성현 대표는 이지역 해안가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로, 어려서 부터 생계를 위해 30년 넘게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민들의 힘든 점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어떻게 하면 안정적인 판매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았다.차 대표는 그 해답을 수산물 가공에서 찾고자 달려들었지만 가공산업은 어업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나 어려울수록 품질 및 위생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고, 순간순간의 유혹들을 견디다 보니 서서히 나아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힘들었던 지난 날을 담담하게 회고했다.차 대표는 또 기업을 운영하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결코 경영자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경영주와 근로자들이 서로 공감하고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로 헤쳐나갈 때 해결되고, 기업은 성장한다는 확신을 배웠다고 덧붙였다.차 대표는 기업을 이끌어 가는 주체는 근로자이며, 근로자에 의해서 회사의 미래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근로자들의 복지향상을 최우선으로 여기겠다며 100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규모보다 내실있는 기업으로 가꾸어 가겠으며, 사회적 기업으로서 모두와 함께하는 따뜻한 기업, 이익보다 나눔을 먼저 실천하는 기업을 만들겠다 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
  • 김성규
  • 2014.12.18 23:02

[(48) 유적지·기념시설 관리 실태] 전국 동학혁명 유적지 353곳 중 국가지정문화재 6곳뿐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맞았지만 전국에 관련 유적지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전북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유적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적지의 문화재 지정 및 등록 숫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졸속 복원과 함께 동학농민혁명 정신에 맞지 않는 기념물 설치 등은 동학농민혁명의 세계화에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현재 문화재 등록이 시급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중심으로 현황과 과제 등을 진단해 본다.△유적지 문화재 지정 거북이 걸음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현재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되지 않아 하루가 다르게 훼손되고 있다. 유적지에 대해, 문화재 지정등록을 시급하게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지는 모두 353개소이며, 전북에 있는 유적지는 156개소(43%)로 가장 많다. 광주전남(83개)이 다음으로 많았고, 충남(40개), 대구경북(30개) 등의 순을 기록했으며, 서울울산(1개)이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유적지 숫자에 비해 문화재 지정 및 등록 현황은 턱없이 부족하다.현재까지 전국 유적지 가운데 6개가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 문화재 9개, 시군 향토문화유적 3개, 등록문화재 1개 등이 문화재로 지정됐다.동학농민혁명이 아닌 다른 사유로 문화재에 지정된 유적지는 모두 52건으로, 이곳은 동학농민혁명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곳이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 만으로 지정됐다고 보기는 어렵다.이 경우까지 합해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중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71개소로 등록률은 20%에 불과하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동학농민혁명이 세계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역사적 사건인 만큼 유적지에 대해 철저한 연구 및 고증을 거쳐 문화재로 등록하는 게 시급하다면서 100주년, 2주갑 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해에만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게 아니라 평소에도 꾸준히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김제 원평집강소수십년 째 방치된 동학농민혁명 중요 유적지인 원평집강소는 붕괴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치단체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왔었다. 지난 3월 전북일보가 원평집강소의 붕괴 위험성을 지적한 뒤, 관계 당국의 대처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자 지난 6월 23일부터 3일 동안 연속 보도를 통해 보존 대책을 촉구했다.보도 직후 김제시는 원평집강소 긴급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대대적인 보수 공사와 함께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했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최규성 국회의원(김제완주)은 원평집강소 보수공사에 특별교부세 투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원평집강소 보존 문제는 결국 문화재청이 11월 집강소 건물과 부지를 긴급 매입해 복원한 후 김제시에 위탁관리를 맡기기로 최종 결정하면서 일단락됐다.△완주 대둔산 최후 항전지완주군은 현재 운주면 대둔산 7-8부 능선에 자리잡은 대둔산 최후 항전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다.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번지 해발 715m의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한 최후 항전지는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해 2월 18일까지 3개월여 동안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곳이다.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최후 항전지는 암벽등반가들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자리잡아,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더하다.△전남 장흥 최후 전적지 석대들전남 장흥의 동학농민혁명 최후 전적지인 석대들 성역화 사업은 두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 2009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성역화 사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고, 석대들 일대가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인근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전남 장흥군은 지난 2009년 장흥읍 남외리 석대들 일대 3만5201㎡의 부지에 96억원을 들여 장흥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성을 알릴 수 있는 기념관과 조형물 등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장흥군은 애초 지난 2009년 5억5000만원을 들여 기본 및 실시설계를 실시하고 부지를 매입, 2010년에는 10억원을 들여 착공할 예정이었다. 또 기념관 및 조경사업은 2011년부터 80억5000만원의 예산으로 추진해 2012년 완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국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완공은 내년으로 미뤄졌다.이에 더해 지난 2009년 석대들 전적지가 국가지정 사적지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이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반발하며 한동안 공사 속도를 내지 못했다.한편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모두 체포된 이후 3만명이 넘는 농민군이 참여해 항전을 계속하다 2000명 이상이 사망한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다.△충북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지난 2007년 7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완공된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건립 과정에서 홍역을 치러야 했다. 충북지역 시민단체들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유적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제기하면서다.실제 공원 입구에 세워진 기념물에는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1894년 7월 청일전쟁 발발 전쟁 참화에 시달린 백성 1894년 8월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 계획 세워 순으로 표지석이 세워졌다.하지만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제대로 기술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박달한 사무국장은 보은의 동학농민운동은 1893년 보은취회부터 시작됐다. 이 표지석의 설명대로라면 동학농민혁명은 왜세의 침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면서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자주적 자발적으로 발생한 운동이며 결코 피동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봉기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12.17 23:02

'병원 고치는 의사' 명지의료재단 이사장 이왕준 "환자중심 의료환경 정착…고향 발전에 힘 보탤 것"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1998년 전문의 자격을 득했다. 탄탄대로의 삶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업이 예정돼 있던 병원이 IMF로 인력을 뽑지 않았다. 백수생활이 이어졌다. 그 때 그의 인생을 바꿀 무모하지만 과감한 도전이 시작됐다. 망한 병원이 있는데 인수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모두 만류했다. 하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그 때가 1998년 가을이다. 15년이 지난 현재, 인천사랑병원이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이 병원은 지역의 거점병원으로 성장했다.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직업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사람을 고치기보다 병원을 고치는 의사로 통하는 이가 있다. 명지의료재단 이왕준 이사장(50)이다. 지난 10일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명지병원에서 이 이사장을 만났다.-우선 본인 소개를 좀 해주시죠.1964년 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병원을 하셨던 아버지 영향을 받아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사회생활은 모르는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저의 삶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바뀌었습니다. 야학 활동을 하다 학생운동에 투신했습니다. 1986년 구학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교도소에 다녀왔습니다. 덕분(?)에 9년 만에 의대를 졸업했습니다.의대 졸업과 동시에 한국의료의 반성과 개혁을 모토를 내걸고 월간신문 청년의사 창간을 주도했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외과 레지던트 과정을 할 때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메디컬드라마 종합병원의 제작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당시 주인공이었던 이재룡의 실제 모델이기도 합니다. 1998년 외과 전문의를 딴 뒤, 같은 해 11월 문을 닫은 병원을 인수해 인천사랑병원을 열었습니다. 이후 관동의대 명지병원이 경영난을 겪다 매물로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인수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병원을 고치는 의사라는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현재는 명지의료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을 맡고 있습니다.-현재 운영하고 있는 병원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신다면요.현재 운영 중인 병원은 명지의료재단의 모체가 된 인천사랑병원과 경기도 고양의 명지병원, 충북에 있는 제천 명지병원, 청풍호노인사랑병원 등 4곳입니다. 여기에 파주LED부속이원과 인천사랑노인요양원, 인천 해송노인요양원, 서울과 경기에 각각 정신보건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들 병원의 전체 병상 수는 1600병상입니다. 의사만 350명이고, 2300명 직원이 환자만을 위해 한 마음이 돼 일하고 있습니다. 연매출은 2000억 원 정도입니다.-평범한 의사의 길이 아닌 병원 경영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의대에 다니면서 언젠가는 병원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1992년 의과대학을 9년 만에 졸업했는데 그 어느 곳에서도 인턴으로 받아주지 않았던 경험이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습니다. 당시 경기도 시흥에 있는 80병상 정도 되는 병원에서 응급실 당직의사를 지냈습니다. 만일 그 때 고난을 겪지 않고 큰 조직에 들어가 톱니바퀴처럼 일했다면 현재의 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역에 뿌리를 내린 환자중심의,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병원 모델을 국내 의료계에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인천사랑병원을 의료문화개혁의 실험장으로 활용했고, 그 실험이 성공을 거두면서 명지병원을 인수하게 됐습니다.-의료인으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앞으로의 목표는.2009년 명지병원을 인수하기 전 가족들과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그 때 1+10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국내에 명지의료재단의 1만개 병상을 만들고, 해외에 10개 병원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현재 1만개 병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착착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해외사업도 순항하고 있는데요. 우선 내년에 네팔에 자선병원을 열 계획입니다. 2016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 국제검진센터가 문을 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해외사업도 본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한국의료수출협회 회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우수한 의료서비스를 수출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그동안 많은 상을 받으셨는데, 지난 10월 고향에서는 처음으로 상을 받으셨다면서요.의사이자 병원경영자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훈포장을 받았지만 고향에서 상을 받은 건 처음입니다. 지난 10월 5일 임실에서 열린 소충사선 문화제에서인데요. 국민건강보건 향상에 앞장선 공을 인정받아 의약부문 본상을 수상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대학에 진학한 이후 어느 자리에 가던지 전라북도, 전주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항상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습니다. 외부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 성과를 인정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고향을 위해 기여하고, 봉사 하는 일이 많아지길 바라고 있습니다.-끝으로 고향에 계신 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전라북도가 차별이라면, 차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국 17개 시도 중 가장 낙후돼 있고, 너무 소외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전라북도에 새로운 발전과 도약의 계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고향을 위해 뭐든 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전문분야인 의료와 교육 영역에서 전북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습니다. 고향을 위해 보탬이 되고자 하는 저의 길을 도민들께서 지켜봐주시고, 많은 응원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환자 제일주의' 실천 명지병원은 '동화나라' 어린이 응급실'울창한 숲' 건강검진센터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명지병원. 이 병원에는 국내 유명병원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특별한 게 있다. 병원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이 있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나라 어린이 전용응급실부터 암 환자의 취향에 따라 조명이 바뀌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화 또는 동영상 상영시설을 갖춘 방사선치료실, 울창한 숲을 그대로 옮겨 놓은 건강보험검진센터까지.이 같은 특별한 모습과 이 병원만의 특별한 환자관리는 전국 유명병원 관계자들의 벤치마킹 대상이다. 거의 매일 병원을 보기 위해 의료계 종사자들이 찾아온다. 명지병원이 이처럼 특별한 외형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환자제일주의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2009년 현재의 명지의료재단에 인수된 명지병원은 그동안 적잖은 산고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10년 안에 대한민국 10대 병원 진입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글로벌 의료통합시스템 구축이라는 비전을 이뤄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먼저 지역 거점형 종합병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특성화전문화에 박차를 가해 급성기 질환에 대한 완벽한 진료시스템이 구축됐다. 2011년 고양시와 파주시, 김포시와 부천시, 개성공단까지 경기 북서부 권역의 응급의료를 책임지는 권역응급의료센터로 지정된데 이어 중증외상센터와 소아전용응급의료센터도 잇따라 문을 열었다. 수익이 없다는 이유로 초대형 병원들도 꺼리는 신생아 중환자실도 운영 중이다. 덕분에 의료기관 인증을 비롯해 진료의 적정성 평가 등 정부의 의료기관 평가에서도 최우수 등급을 놓쳐본 적이 없다. 명지병원에는 교수와 전공의를 포함해 모두 250명의 의사가 일한다. 간호사 등을 포함하면 1200명이나 된다. 이들은 750병상에 입원한 환자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고 있다.

  • 기획
  • 박영민
  • 2014.12.16 23:02

'태국 패키지 교육 수출' 김응권 우석대 총장 "지방대학 장점 잘 살리는 게 최상의 교육경쟁력"

내년도 아세안 공동체 출범을 앞두고 동남아국가들과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이 국가적 차원에서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지난 11~12일 부산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도 그 일환이다. 정부 차원에서 뿐아니라 민간에서도 급성장 하는 동남아 국가들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우석대학교가 지난달 20~24일 태국 현지에서‘패키지 교육수출’활동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김응권 총장과 서창훈 이사장, 태권도사업단·영유아사업단 관계자들로 구성된 방문단은 태국에서 대학이 갖고 있는 역량을 홍보하고, 양국 대학교류의 길을 활짝 여는 성과를 올렸다. 대학측은 이번 태국에서의 교육활동을 ‘교육 수출’로 이름 붙였으며, 양 사업단을 묶어 ‘패키지 교육수출’이라고 설명했다.특히 지난 3월 취임 후 그동안 대학내 체질개선에 집중해온 김응권 총장(52)은 이번 태국 방문을 통해 우석대의 경쟁력을 확인하고 대학의 역할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했다. 김 총장을 만나 태국과의 교류 의미와 성과를 들어보았다.-우석대의 ‘태국 교육수출’은 어떻게 이뤄지게 됐습니까.“올해 우석대 태권도사업단과 영유아사업단이 교육부의 지방대학 특성화사업단으로 선정됐습니다. 우석대에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이 적지 않고, 이들 차별화된 특성화사업 프로그램을 해외에도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한글·아리랑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3대 문화브랜드인 태권도, 영유아 지원은 나라마다 공통적인 이슈에 해당되는 만큼 우석대의 교육역량과 자산을 수출하는 게 당연한 셈입니다. 마침 태국의 명문대학인 탐마삿대학과 태국 태권도협회가 초청의사를 밝혔고, 이를 계기로 대학의 자산과 역량을 알리는 패키지 교육수출이 구체화됐습니다.”-태국 교육수출 성과를 소개한다면.“우석대의 역량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프로그램만 좋으면 지방대학의 울타리를 넘어서 국내 최고는 물론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함께 참여한 학생들도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이 이렇게 큰 의미가 있었다’며 자신의 전공에 확신을 갖게 한 점도 부수적 수확입니다. 또 지방대학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고정관념과 패배의식을 깰 수 있는 기회였다고 봅니다. 지방대학의 장점을 어떻게 최고로 만들 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대학간 자매결연 등을 통해 글로벌 교육을 내세우는 대학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석대의 이번 태국에서의 교육활동이 기존의 대학교류와 다른 점이 있다면.“우석대를 포함해서 국내 대학들이 무수하게 많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상당수는 자매결연을 위한 자매결연에 그치고 있습니다. 단순한 MOU체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어느 학교와 교류관계에 있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죠. 이번 패키지 교육수출은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그동안의 대학교류와는 궤를 달리 했습니다. 우석대의 경쟁력 있는 교육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교류가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성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태국에서 태권도에 대한 호응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잘 아시다시피 태권도는 한류 3대 브랜드로 해외에 자랑하는 분야 아닙니까. 우석대 태권도사업단이 특별한 것은 단순하 격파기술이 아닌, 공연작품으로 승화시켜 브랜드의 가치를 높인 것입니다. 또 태국 태권도협회와 MOU를 체결했으며, 내년 중으로 태국 태권도협회장이 우석대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태국은 동남아지역의 허브역할을 한다는 특수성이 있는 만큼 태국과의 친선관계가 원활하게 구축되면 동남아 전체 국가와의 교류도 수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태권도 학과 졸업생들의 해외 진로개척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영유아사업단에 대한 관심도 컸다고 하던데요.“우석대 영유아사업단의 중핵인 아동발달지원센터는 사실 7~8년 전부터 보건복지부의 사회서비스 프로그램 지원을 받아 전북지역 취약계층 아동들의 발달검사 등을 꾸준하게 수행했었습니다. 이번 태국으로의 교육수출도 아동발달지원센터 연구원들이 그동안 전북지역 다문화가정 아동들을 보살피며 축적한 노하우가 근간이 된 셈입니다. 특히 이번 방문활동에서 태국 저소득층 아동들의 발달검사를 지원하고, 부모들에 대해서도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를 보여줬습니다. 일반적으로 0~5세 아동들에 대해 조기에 어떤 경험을 하느냐가 해당 아동들의 지능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지만, 태국 아동들은 발달검사를 받을 기회가 아예 없는 실정입니다. 현지 부모들이 자녀들의 특성을 몰랐다가 한국에서 온 우석대 특성화사업단 연구원·학생들의 조언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워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아동발달지원센터는 정부의 지원프로그램과 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이 융합하면서 특성화사업의 기틀을 잡았다는 점에서 향후 확장성이 크다고 봅니다.”-영유아사업단의 교육수출이 내년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태국방문을 통해 왕실식목사업회와 각별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왕실식목사업회는 빈민구제와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단체로, 내년도 우석대 영유아사업단이 태국빈민아동 교육지원을 위한 캠프를 운영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내년에 태국 아동들을 대상으로 발달프로그램 운영, 한국어 교육, 태권도 지도 등 패키지 교육전수에 나서게 되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총장과 서창훈 이사장도 민간외교에 적극 나섰다고 하던데요.“짧은 기간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서 이사장은 태국 왕실식목사업회 관계자와 교육부 관계자를 면담했고, 총장은 태국 태권도협회와 MOU를 체결하는 쪽으로 역할을 나눴습니다. 정부차원은 아니지만 민간차원의 우호증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태권도협회장으로부터 ‘태국 태권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게 소원이며, 우석대가 태국 태권도 발전에 밀알이 됐으면 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태국 뿐만 아니라 다른 동남아 국가로 우석대의 교육수출 대상국가를 차츰 늘리려고 합니다.”● 김 총장의 '대학 발전 철학' "교수·직원 모두가 각자 직무 최선을"김응권 총장은 태국방문을 통해 대학발전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진 모습이었다. 교육부 관료로 있을 때와 직접 현장에서 대학을 이끌면서 실망도 했지만, 태국 방문을 통해 대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면서다. 자신의 의욕과 달리 더딘 변화에 양이 차지 않았던 그에게 새 돌파구가 된 것처럼 보였다. 우석대가 잘할 수 있는 게 뭔지를 파악해서 최고로 만드는 게 중요하며, 그 실마리를 태권도사업단과 영유아사업단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학과들에 대해서도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적극 모색할 계획이란다.그는 대학 발전의 길을 ‘링겔만효과’로 설명했다. 독일의 심리학자 링겔만이 줄다리기 실험을 통해 입증한 논리다. 줄다리기 할 때 1명이 100%의 힘을 쏟았다면, 2명일 땐 93%, 3명일 땐 85%, 8명이 할 땐 49% 밖에 힘을 보태지 않았다는 실험결과가 있다. 집단 속에 있으면 ‘나하나 쯤이야’하는 생각을 앞세워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시너지효과의 반대개념이 다름 아닌 링겔만효과라며, 이의 극복이 과제란다.“대학의 환경은 갈수록 시시각각 심각하게 변하가고 있는데, 환경이 좋았던 시절의 나태한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적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 링겔만효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구성원 각자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수나 직원이든 자신의 직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한 뒤 확실하게 업무를 추진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의 성장가도가 열릴 것이다.”

  • 기획
  • 김원용
  • 2014.12.15 23:02

[(47) '뜨거운 감자'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 "10년간 끌어온 논쟁…기념재단 중심 기념일 결론 내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은 이제 남북통일보다 어려운 일이 돼버렸네요.지난달 27일 대전에서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 참석한 한 관계자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소모적인 논쟁에 종착점을 찾을 수 없다는 푸념이었지만,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현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한 말이기도 하다.올해 동학농민혁명 2주갑(120주년)을 맞아 국가기념일 제정에 대한 기대가 있었지만 끝내 무산됐다. 기념일 제정에 있어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합의는 쉽지 않다. 소모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사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후대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은 어느덧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이날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정말 창피하다. 동학농민혁명과 무관한 사람들이 이를 본다면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면서 미완의 혁명을 완성시켜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기에도 부족한 데 기념일 제정 문제만 나오면 서로 다투고 있는 모습이 지겹다며 자조 섞인 목소리를 냈다.이날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분명한 점은 이제는 기념일 제정을 더 이상 미룰 수 없고 기념일 제정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을 더욱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대다수였다는 사실이다.△소모적 논쟁만 10년 째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 제정 논의는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됐다.이를 계기로 기념일 제정 토론회가 지난 2004년 6~11월까지 3차례 열렸지만, 결론을 맺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이듬해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동학농민혁명 명예회복심의위에서 기념일 제정을 위한 심의를 8차례 개최했지만, 격론 끝에 다시 무산됐다. 당시 관련 단체들은 표면적으로 기념일 제정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결정을 미뤘다.그렇지만 속으로는 각 지역에 대한 이해관계가 깔려있어 무산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때부터 기념일 제정을 둘러싼 갈등이 본격화됐다.이후 3년 동안 이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도 뜨거운 감자를 손대기 싫어했고, 총대를 메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반전의 계기는 있었다. 지난 2010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출범하면서다. 기념재단은 정읍 이전 등 당장 닥친 현안을 해결한 뒤 곧바로 기념일 제정에 돌입했다.그리고 이듬해인 2011년 동학농민혁명기념일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재단은 언론문화법조학계 인사 등 23명으로 기념일 제정을 맡을 추진위원 선정해 2개월 동안 활동했지만 끝내 합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지역 간 갈등의 골만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기념재단은 지난 2012년 국민여론조사로 기념일을 제정하자고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고, 재단은 기념일 제정 잠정 중단 결정을 내렸다.이후 기념재단은 첨예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정읍과 고창의 관련단체 관계자들과 합의점을 찾으려 했지만, 동학 2주갑(120주년) 기념대회 이후 재논의키로 결정했다.동학농민혁명 관련 단체들은 2주갑을 맞은 올해는 기념일 제정이 이뤄지길 기원했다. 지역 간 갈등을 풀고 대승적으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란 반전 드라마를 기대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제정 토론회에서는 고성과 욕설이 오가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기념일 제정 주요 제안일그동안 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기념일 후보군이 제안됐다. 현재 △고부봉기일(2월14일정읍) △특별법공포일(3월5일유족회) △무장기포일(4월25일고창) △황토현전승일(5월11일정읍) △전주성입성일(5월31일전주) △2차 봉기일(10월11일) △우금치전투일(12월5일공주) 등이 거론된다.이 가운데 가장 첨예한 대립을 벌이고 있는 곳은 정읍과 고창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흑역사(黑歷史)는 무장기포일을 주장하는 고창과 황토현전승일을 주장하는 정읍의 해묵은 갈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무장기포일은 농민군이 정식으로 포고문(결의문)을 발표하고 전국 봉기를 선포했던 날이다. 고창지역 관련 단체들은 무장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표명했고 이를 통해 동학교도나 일부지역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혁명의 전국화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포고문 발표를 계기로 조직적 대오를 갖춰 혁명이 시작됐다. 학계는 고창 무장의 봉기를 계기로 국지적 농민항쟁에서 전국적 농민전쟁으로 전환했다고 본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을 대표하는 역사성상징성이 있다는 의견이다.고창지역 단체들은 고부봉기를 최초의 봉기로 보는 시각에 대해 민란 수준이었으며 곧 실패했기 때문에 무장기포일의 상징성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정읍지역 관련 단체들이 주장하는 황토현전승일은 동학농민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날이다. 전라감영군 등 연합부대 2400명을 거의 전멸에 이르게 한 전과는 동학농민혁명기간 중 최대의 승전이었다. 이 승리에서 자신감을 얻은 동학군들은 호남의 전 지역으로 봉기를 확대시켰다. 황토현전투가 최초의 전쟁 양상을 띤 전투로서, 관군을 격파해 혁명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것이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삼아야 한다는 쪽의 주장이다. 정읍지역 단체들은 최초의 전투일이자 승전일로 역사적 상징성과 대표성은 물론, 무장기포에 비해 대중적 인지도에서도 앞서기 때문에 황토현전승일을 기념일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기념재단이 종지부 찍어야지난달 열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토론회에서는 기념일 제정 절차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첫 번째 안으로 기념재단, 유족회, 천도교령 3자 협의체가 결정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결론이 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대표성을 가진 단체들이 결정을 하자는 취지다.하지만 반대 의견에 부딪혀 끝내 채택되지 못했고 내년 2월에 관련 단체들이 모두 모여 결정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기념재단도 이에 맞춰 오는 2015년까지 공청회 등을 통해 다시 의견을 모은다는 계획을 내놨다. 10년 동안 이어졌던 논쟁을 다시 이어가겠다는 결정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기념일과 관련된 논쟁은 그동안 충분히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지난 10년 동안 충분히 논의된 만큼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그 중심에는 기념재단이 있어야 하고, 관련 단체들은 어떤 결정이든지 수용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 기획
  • 김정엽
  • 2014.12.11 23:02

[(40) 임실전통한과] 섬진강 청정 농산물 사용, 100년 이어온 전통한과 업체

우리나라에서 전통한과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추정되지만 문헌에 정확히 기록된 것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와 음료로 궁중이나 귀족사회에서 활용됐던 풍습이 시간이 흘러 곡류를 이용한 강정이나 유과 등이 곁들여 지면서 비롯됐다.임실군 덕치면 인덕로에서 영업중인 임실한과(대표 문기섭)는 화려한 궁중한과가 아닌 일반 가정에서 대대로 즐겨온 서민들의 음식이다. 전통 기법으로 내려온 경험을 바탕삼아 이 지역 주민들이 공장을 설립, 전국 각지에 임실한과를 납품하고 있으며 신제품 개발로 희망찬 미래를 설계중에 있다.△임실전통한과 유래전북도로부터 지난 1976년에 전통식품부업단지로 지정돼 사업자를 등록한 임실전통한과의 발자취는 1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00년대 초 당시 문대표의 할머니는 순창에서 이곳에 시집을 왔으나 찢어지는 가난에 배고픔의 설움을 벗어나지 못했다.궁리를 거듭한 나머지 할머니는 친정에서 배운 한과를 심심풀이로 시장에 내다 판 것이 오늘의 3대째 가업으로 이어졌다.5일장인 강진장에서 선보인 할머니의 한과는 양반집의 경우 손님접대용과 일일 간식용으로 널리 인기를 끌었다.반면 일손이 바쁜 서민에는 곡식이 귀한 시절인 까닭에 설날과 추석, 돌아가신 어른들의 제수용으로 비싸게 구입됐다.자신을 얻은 문대표의 가족들은 이때부터 농사일을 제치고 전문직업으로 전환, 인근 순창 등지로 판매 영역을 넓혔다.궁핍했던 살림은 조금씩 허리를 폈고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지난 92년에 작고하면서 현재의 문대표가 가업을 물려 받았다.△사업장생산과정임실전통한과는 마을 주민 5명이 참여해 공동으로 운영되며 이들이 직접 농사지은 쌀과 콩, 참깨 등으로 한과를 생산한다.부족한 원료는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철저히 고집하고 연중에 걸쳐 구입, 지역민의 소득에도 일조하고 있다.전체 면적 360㎡의 공장에는 원재료를 잘게 부수는 분쇄실과 모양을 갖추기 위한 성형실,1차로 말리는 건조실을 갖췄다.또 완성된 한과를 기름에 튀기는 유탕실과 제품별로 대바구니와 종이상자에 담아 예쁘게 치장하는 포장실도 마련됐다.지방별로 제조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임실전통한과의 경우 찹쌀을 7일간에 걸쳐 물에 불린 후 분말형태로 곱게 빻는다.빻은 가루는 가마솥에서 2시간 동안 찐후 성형실에서 모양을 갖춘 다음 건조실에서 딱딱하게 굳은 상태로 말린다.말린 제품은 기름에 튀기는 유탕과정을 거쳐 고물(쌀튀김가루)에 버무린 후 포장과정을 거쳐 완성된다.이같은 한과의 완성품 과정에는 20여회의 손질이 소요되고 대략 10여일이 걸리는 까닭에 대부분 사전 주문에 의해 판매된다.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주종품인 한과 이외에도 유과와 깨강정, 약과 및 쌀강정 등 모두 7종의 품목으로 구성됐다.제품의 특징은 국내 최고의 청정지역인 섬진강 상류지역에서 생산된 쌀과 콩, 참깨 등의 엄선된 농산물이 자랑이다.△신제품 개발중국과의 FTA 체결 등으로 정부가 쌀산업에 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으나 정작 국내의 쌀소비 정책에 대한 지원책은 다소 미비하다는 여론이다.특히 일부를 제외하고 2차와 3차 등 쌀가공 산업에 대한 관심도와 지원책은 열악한 것으로 알려져 그에 따른 대책이 절실하다는 게 문대표의 설명이다.때문에 쌀을 이용한 다양한 신제품과 식품개발에 공헌한 기업과 주민에는 보조와 연구지원책을 확대, 국내 벼농가와 쌀시장 안정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임실전통한과는 최근 기존의 제품에 얽매이지 않고 소비자들에 새로운 전통맛을 선보이기 위해 다양한 신제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들의 기호도를 높여 보존과 생산성 향상을 이룸과 동시에 기업발전 등 1석3조의 효과를 올리겠다는 발상에서다.현재 준비중인 신제품은 빼빼로데이(11월11일)에 대응키 위한 초콜릿한과를 개발,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입맛부터 사로잡는다는 계획이다.여기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중국의 월병처럼 국산 홍삼을 한과에 첨가, 홍삼강정 및 홍삼정과 출시를 눈앞에 두고 있어 기대를 걸고 있다.또 호두와 땅콩을 비롯 팥 등을 이용해 새로운 맛을 도출하는 전통한과를 개발하므로써 새로운 기업경영을 모색중에 있다.△판매전략임실전통한과에서 생산된 제품은 현재 전국 마트와 고속국도휴게소, 인터넷 개인주문 형태로 직접 판매되고 있다.특히 명절에 이어 결혼과 회갑연에는 기업체와 공무원단체 등 연중에 걸쳐 대량주문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일손이 바쁠때는 날밤을 새기 일쑤다.최근에는 전주한옥마을 등지에서 주문량이 쇄도하고 있지만 정작 방문객이 많은 임실지역 치즈테마파크와 필봉문화촌 등지에는 판매점이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현재 임실군에서는 다양한 지역특산품으로 지정,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홍보판매를 지원하고 있지만 다소 미흡하다는 여론이다.때문에 임실전통한과는 새로운 신제품을 바탕으로 대형마트와 백화점에도 납품계약을 추진,생산량 확대에 총력을 집중한다는 방침이다.더불어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해 전국의 자치단체와 기업체 등지에도 제품의 특성과 품질을 적극 홍보해 명물한과의 입지 강화에 주력할 계획이다.● 문기섭 대표 "쌀 소비 촉진 차원 정책적 지원 강화 필요"임실전통한과 문기섭(53) 대표가 한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92년 부친이 작고하면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에 발을 들인데서 비롯됐다.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과 경남 창원 등지에서 직장을 다녔던 그는 당시 회사 동료인 부인 김순하(50)씨를 만나 예쁜 딸을 얻는 등 신혼에 젖어 있었다.부친이 사망함에 따라 모친의 간곡한 권유로 귀향한 그는 당시 부인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설득, 현재의 한과공장 자리에 둥지를 틀었다.문대표는 특히 정부에 대한 국내 쌀소비 정책에도 이견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내세웠다.자치단체로부터 쥐꼬리만한 소규모시설개선 지원에 그치는 정책은 쌀소비 정책에 한계가 있다며 2차와 3차 등 가공식품업체와 연구개선에도 전폭적인 지원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소견이다.이럴 경우 업체들은 시설투자와 신제품 개발에 앞다투고 아울러 일자리 창출과 상품성 향상에도 크게 일조할 것이라는 입장이다.문대표는 농사짓는 사람으로서 한과의 세계적 명품생산에는 한계가 있다며 전문기관과의 협조체계 강화 및 연구지원 차원의 대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박정우
  • 2014.12.11 23:02

[(46)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혁명의 '시작과 끝' 한눈에…희생 농민군 넋 기린다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민중항쟁이었다. 호남지방만이 아닌 조선 땅 대부분에 걸친 거대한 변혁의 움직임인 혁명의 불길은 당시 조선과 청나라, 일본을 둘러싼 동북아시아 정세를 뒤흔든 대역사였다. 하지만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일반시민들이 엿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탓에 혁명에 대한 인식은 뒤떨어졌다.이처럼 제반여건이 미흡한 점이 여러차례 관련 학계·유족회측에서 지적되면서,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에 대한 공감대도 확산됐다.그 결과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이념을 현대적 가치에서 재조명하고, 총탄에 스러져간 무명 농민군을 추모하기 위한 역사적 공간인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하지만 기념공원의 운영비 부담 주체 등을 두고 잡음이 일고 있어, 이런 산적한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숙제로 남아 있다.△기념공원 조성 배경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과 전북도, 정읍시는 정읍 황토현전적지 일대 33만5800㎡에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앞서 이 사업은 1990년대 말 당시 전북도가 정읍 황토현 유적지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설립하면서부터 가시화됐었다.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담지 못하는 역사적 현장의 사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기념공원이 조성돼야한다는 필요성이 강하게 부각된 것이다.하지만 사업 주체 선정이나 예산 확보면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기념공원 설립에 대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학계·유족회측에서 기념공원 설립을 강하게 요구하자, 2010년 김생기 정읍시장은 민선5기 시장공약사항에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공동묘역 조성’이라는 계획을 포함시켰다.이후 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협약을 맺은 후 발주와 시행을 맡아 공동추진한 연구용역은 대학교수, 건축, 건설, 디자인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기본계획을 만들어 냈다.이 기본계획은 기념재단 명의로 문체부와 기재부의 심의,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적정성 검토 등을 거쳤고 정읍시와 전북도의 적극적인 예산확보활동까지 더해져 국회를 통해 383억원의 예산이 반영됐다.△2017년 완공 예정기념공원은 2017년 완공될 예정이다. 부지는 정읍시와 전북도가 모두 제공했다. 이곳에는 혁명 당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공간과 위령탑 등의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또 청소년 역사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역사문화체험관과 연수동, 야외캠핑장, 숙박시설 등을 마련한다.황토현전적지는 1894년 4월 7일(양력 5월 11일)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치른 최초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승지다. 1963년 10월 3일 첫 기념시설물인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이곳에 건립됐다. 이 탑은 ‘동학란’이라 불리던 당시의 역사에 대해 최초로 ‘혁명’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희생자 명예회복의 초석을 다졌다는 의미가 크다.앞서 지난 10월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 일대에 건립될 예정인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설계 공모 당선작이 발표됐다.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은 해당 공모 최우수상(당선작)으로 ‘땅의 기억을 환기’라는 주제의 안계동(대표설계자, 동심원 조경기술사 사무소)·노윤경(공동설계자, 우리 동인 건축사 사무소)·정욱주(서울대)·최정민(순천대) 씨의 작품을 선정했다.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관계자는 “기념공원은 혁명 초기, 가장 중요한 전투였던 황토현 전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공간이자,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혁명의 역사적 기록을 담아내는 중심공간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면서 “동학 이념의 현대적 가치를 널리 전파하기 위한 거점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역사적 체험 공간으로기념공원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기억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상상하고 체험하는 장으로 꾸며질 계획이다.방문객이 동학혁명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기억의 들판’을 통한 경관적 체험, ‘동학의 길’에서의 서사적 체험, 장소적 상징성을 지닌 ‘울림의 기둥’, ‘씨앗을 뿌려 헌화’하는 추모공간, 전장과 경작을 체험하는 ‘체험의 장’ 등으로 꾸며진다.이 중 기억의 들판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방문객들은 황토현의 옛 길을 걷고, 바라보며 황토현 전투의 현장을 감상할 수 있다.또한 옛 농경생활과 황토현 전투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마련된다.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농민 항쟁의 지역적 분포를 알 수 있는 상징물도 조성된다.기존의 사발통문 광장을 시작으로 방문자센터, 캠핑장, 연수동, 교육관, 편의시설, 기념관, 전시추모공간을 거쳐 전적지를 연결한다.이 동선은 단순한 연결 및 통과동선이 아니라 시설구역과 들판을 매개로 휴식과 조망할 위한 장소이다.이 밖에도 총탄에 스러져간 농민군을 추모하는 공간도 꾸며진다.한 동학관련단체 관계자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기념공원이 설립되면, 그동안 체계적으로 기리지 못했던 혁명의 정신과 의미가 자손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다”면서 “정읍 황토현 기념공원이 우리나라를 뛰어넘어 세계 속에서 빛나는 농민혁명 기념시설의 ‘메카’로 자리잡길 기대한다”고 말했다.△기념공원 운영비 부담 주체 ‘논란’ 국비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향후 운영비 부담 주체를 두고 전북도와 문화체육관광부의 이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모두 기념공원 국비 운영에 긍정적 의견을 내고 있지만, 공원부지(전북도·정읍시·정부 공동소유) 통합관리 주체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문광부 특수법인)에서 운영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경우 부지 소유가 전북도라는 이유로 매해 운영비를 도가 부담하고 있어, 기념공원 부지 통합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면 자칫 전북도가 운영비를 부담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앞서 전북도와 문광부 등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조성 관련 기관들은 지난 8월 27일 기념공원 부지통합 관리에 대한 협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기념공원 예정부지(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33만6992㎡) 대부분을 소유한 전북도와 정읍시는 정부에 부지 무상양여 의사를 밝히면서 통합관리 주체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기념공원 부지 소유 비율은 전북도 44.68%, 정읍시 49.78%, 국유지 5.41%, 사유지 0.13% 등이다. 앞서 전북도는 법률 검토를 마친 결과 행정재산의 무상양여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다. 반면 문광부는 행정재산의 무상양여는 현행 법을 위반할 소지가 있는 만큼 부지 통합 관리는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2011년부터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전북도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다. 당시에도 전북도는 문광부 산하 기관인 기념재단에 운영비 부담을 요구했지만, 재단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아직 자치단체의 운영비 부담 여부는 논의 단계에 있지만, 최근 정부가 지역에서 국비로 추진하는 사업에 대해 자치단체의 운영비 부담을 요구하고 있는 추세로 봤을 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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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명국
  • 2014.12.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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