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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화가 하반영 선생]"내 작품 세계는 사랑…많이 그리는게 좋은 그림 얻는 길이야"

화가 하반영 선생이 완주군 상관에 작업실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여름 초입이었다. 말년의 삶을 고향 군산에 의지해왔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이주소식은 뜻밖이었다. 90세가 넘어서도 변하지 않는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아온 선생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던 고향을 떠나야했던 이유도 궁금했다. 사실 선생은 암투병중이다. 지난해 가을, 선생의 대장암 수술은 우리나라 의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95세 암환자의 대장암 수술 시도도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뜬히 이겨낸 환자의 정신력과 건강이 화제였다. 수술 받은 환자가 화가 '하반영'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의 이목은 더 집중됐다. 수술 받은 지 사흘 만에 선생은 병상에서도 화구를 챙겨 그림을 그렸다. 상관면 소재지에 있는 작업실은 병원에서 퇴원 한 후 선생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통원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에 있는 선생은 걸음만 불편할 뿐 건강해보였다. 시간은 줄었지만 붓을 잡지 않는 날은 거의 없다는 선생은 올해 96세, 여전히 세상에 남길 이야기가 많다. 장르와 형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화풍을 구축해온 선생의 붓이 마르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투병의 일상에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선생은 지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백수전을 꼭 하고 싶어. 이대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어. 아흔아홉 살에 전시회를 하게 되니 이제 3년도 채 안 남았거든. 열심히 그려야지."선생의 생애는 한 세기 한국미술사위에 온전히 놓여있다. 그 이유만으로도 선생은 한국미술의 살아있는 역사다. -기대보다 훨씬 건강해보이십니다. 작업실이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다 보니 걷기가 예전만 못할 뿐 지낼만해요."-치료는 어떻게 받으십니까.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정도 통원치료하지. 대장암수술이 잘되었어요. 그런데 수술 하지 못할 부위에 종양이 또 있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경과가 좋다고 하니 다행이지."-선생님 연세에 암수술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워낙 건강이 좋았던 모양이에요."건강을 타고 났나봐. 여든만 넘어도 수술하기 쉽지 않다던데. 한 달 정도 금식하는 일이 힘들었지만 의사가 검사해보더니 수술해도 되겠다고 하더라고. 암튼 내 수술이 화제가 되어 방송도 나가고 그랬잖어."-수술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드셨을 텐데 백수전 계획도 그때 하신건가요. "백수전 계획은 오래됐어. 몸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암 상태도 좋아졌다고 하니께 할 수 있을 것 같어. 내가 지금도 보청기 없이 이야기하고 안경 안 쓰고 신문 보거든. 이만하면 되지 않겄어.(웃음)"-충분하시죠. 요즘도 날마다 그림 그리십니까. "생각만큼 몸이 따라 주진 않지만 붓은 늘 잡지. 암수술 끝나고도 가장 먼저 붓 가져오라고해서 손힘 먼저 봤어. 몸이 불편하니 다소 둔해졌지만 다행이다 싶었지." -건강을 타고나셨다고는 해도 비결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내가 가방끈이 짧잖어. 그래서 한 가지 일, 그림 그리는 일에만 완전히 집중해온 덕이 아닌가 싶어. 많은 일에 신경 쓰지 않고 그림 그리는 것만 붙잡고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왔거든. 세상 눈치 안보고. 이것저것 생각하면 복잡해지잖아."사실 선생이 걸어온 삶의 풍경은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과는 거리가 멀다. 개인사적으로는 더 그렇다.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하기도 한데, 누군가는 그것의 근원을 선생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지목한다. -그럼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셨군요. "군산 신풍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야 들어갔는데 일본인 교장이 내 그림솜씨를 늘 칭찬했어. 일제 때 선전(조선전람회)이 있었는데, 교장선생님 권유로 출품했거든. 그때는 내가 학생이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냈는데 최고상인 총독상을 받았어. 학교는 4학년 다니고 안다녔고."-왜 학교를 그만두셨는지요. "집을 나왔거든. 거의 혼자 지냈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일찍부터 술 담배를 배우고 휩쓸려 다녔지. 학교 그만두고 완구공장에서 일하다 열일곱 살에 군산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어." -극장 간판 그림은 따로 배우셨나요. "그건게 어디 있어 그냥 그렸지. 내가 처음 그렸던 것이 게리쿠퍼가 총잡고 있는 것이었어. 브로마이드를 보고 그렸는데 잘 그렸다고 놀라더라고.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고해서 다니기 시작했지. 근데 내가 배경은 잘 그리는데 인물은 못 그렸어요. 그래서 데생을 열심히 공부했지. 그때 월급도 많이 받았어. 전주시장이 25만원 받을 때 내가 45만원 받았다니까. 우쭐했지."-그 뒤에 전주로 오신거군요."전주로 가고 싶더라고. 그때 전주가 시로 승격됐거든. 전주극장 간판을 그렸어. 당시 전주극장에는 일본인이 간판을 그리고 있었는데 진짜 실력이 좋았어요. 그이가 한 달 동안 나한테 간판 잘 그리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점만 찍어 전체상을 완성하는 기법을 그때 배웠지." -형편이 곤궁하지는 않았겠습니다. "월급을 95만원까지 받았으니까. 인심 꽤나 쓰고 다녔지. 술사고 밥사고. 그래서 인기가 많았어요. 나는 인력거타고 다녔다니까."(웃음)-본격적인 그림은 언제부터 그리셨나요. 극장간판만 그렸다면 화가로 입성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요."나는 간판쟁이 출신이지만 그것이 부끄럽지는 않아. 내가 그것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으니까. 그즈음 해방이 되었는데,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생겼거든. 그래서 거기 출품을 했어요. 보자기에 놓인 무와 감을 그렸는데 입선했고, 2회때는 풍경화를 그렸는데 낙선했어. 그래도 7회 때까지 연속 입상을 했어. 이만하면 내가 가방끈은 다른 사람들보다 짧아도 그림 실력은 됐다 싶더라고. 국전에 출품하면서 간판 그리는 일은 그만뒀지."-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사실 힘들었어요. 가족들도 고생했지. 순수미술로 바꾼 50년대부터는 그림만 그리면서 살았는데 잘 팔리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시작한 것이 무대미술이었어. 연극 무대나 다른 공연 무대의 장치를 제작했어요. 언젠가 피카소 기념관을 간적이 있는데 피카소가 젊은 시절 제작한 서커스 무대장치를 그대로 남겨놓은 것을 보니 부럽더라고."-스승은 없었나요. "있었지. 금릉 김영창 선생님. 전주에서 만나 모셨는데 본격적으로 사사한 일은 없어. 내가 금릉 선생을 모시고 지낼 때 하루는 이의주가 내 그림을 보고 금릉 그림과 똑같다고 하더라고. 당장 그림을 바꾸었지. 나는 예술은 자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생에게 배운 것만 지향하다 보면 영락없이 선생의 그림을 그리게 되거든."-그래도 학교 공부는 필요하지 않았을까요."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상처가 된 적은 있지. 내가 그림을 그려서 내다 팔았는데, 인물화를 그렸거든. 그랬는데 미술대 학생들이 와서는 '저것 간판쟁이 그림'이라고 외면하더라고. 그때부터 인물화는 안 그려. 72년엔가는 강원도로 들어가 5년 만에 나왔는데 그때 국전에 마지막으로 냈는데 특선을 했어. 경기전 고목. 그 후로 그림이 좀 팔리기 시작했어요."-국제공모전에도 출품 하셨죠."실력을 가늠해보려면 그 방법 밖에 없었으니까. 일본 국제공모전인 이과전(二科展)에서 최고상을 받은 후로 일본에서는 내 그림이 인기 있었어. 전시회를 열면 작품 대부분이 팔렸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팔렸지만 일본에서는 나를 알아주었거든."-그럼 일본 유학의 기회도 있었겠는데요."일본인 친구가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일본에 와서 활동하라고 강권했지. 집도 주고 모든 생활비까지 지원하겠다고. 고민은 해봤지만 일본으로 가면 내가 영영 거기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안 갔어요. 지금도 오기만하면 모든 것은 다 지원하겠다는 편지가 와."-젊은 시절,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활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파리 생활은 언제인가요. "79년 나 환갑때. 서양의 미술 흐름을 현지에서 경험하고 싶었어. 그때 친분이 있었던 고암 이응로 오지호 선생이 파리에 있었거든. 6개월만 있다 와야겠다고 떠났는데 파리 8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열심히 그리고, 그곳 화가들과 교류도 하면서 1년도 훨씬 더 지나서 돌아왔어요. 르 살롱 공모전 우수상과 꽁파르죵 공모전 금상을 그때 수상했는데 꽁파르죵 금상은 미테랑 대통령한테 직접 받았어."-국제적으로도 선생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겠습니다."그렇지. 파리에서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그 그림을 모아 85년엔가 뉴욕초대전을 하고 87년에는 미국평론가협회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미국에도 좀 알려졌지."-선생님은 다작은 정평이 났습니다. 다작의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요. "나는 많이 그리는 것이 좋은 그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화가가 그리는 일 말고 할 일이 뭐있겠어.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창작세계를 모색하고 탐구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기 사상과 시대를 증언하는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지난 96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전라북도와 가고시마현의 미술인 교류전이 열렸다. 그때 가고시마에서 머무르는 5일 일정동안 선생의 손에는 늘 스케치북이 들려있었다. 어느 곳에 있든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선생의 스케치북에 담겼다. 그때 동행했던 젊은 후배들에게 선생의 치열한 일상은 큰 교훈과 감동이었다.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궁극적으로 구현하고 싶은 세계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랑이에요. 인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사랑. 작품에는 이야기를 담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작가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죠. 나는 형식이나 기법이 한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작품이 세상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선생을 두지 마라는 것도 바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예요. 내 사상 내 길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최근 그림은 다 추상 작품이군요. "사실적인 묘사의 내면에도 추상이 있어야 해요. 그것이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랄 수 있지. 사진도 내면적 추상이 있는데 아직도 그냥 있는 그대로만을 옮겨내는 그림들이 많거든. 나도 구상작업을 많이 했어요. 그것이 잘 팔리니까. 그러나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추상으로 돌아오고. 그런 과정이 늘 반복됐지."-군산 근대미술관에서 선생님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데, 100점을 내놓으셨다면서요. "내 미술관 건립이 추진된 적이 있는데, 시에서 근대미술관으로 다시 추진해 개관했어요. 그때 기증했지."-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시죠. "쿠바에서 헤밍웨이 기념관을 갔어. 조그만 여관(호텔)인데 바다가 보이는 그곳 방에서 집필했대요. 초라했지만 유품을 잘 전시해 놓았더라고. 우리 기념관들은 너무 깨끗하고 화려한 경향이 있잖어. 정작 작가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나는 작은 화실에서 그림 그리다가 붓 놓고 잠든 것 같이 가고 싶어. 내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지금으로서는 백수전을 갖고 싶은데 사실 그 꿈은 너무 큰 것이어서 좀 이중적이기도 하지"(웃음)선생에게 백수전은 그림으로 온 생애를 걸어온 노화가가 마지막 힘을 다할 수 있는 지점이다. '몸이 허락하고 형편이 된다면 100호짜리 화폭을 창가 쪽으로 세워놓고 물감 뿌리고 붓질하면서 맘껏 그리고 싶다'는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니 부유와 궁핍, 자유와 속박, 고난과 평화가 경계 없이 가로질러 놓여있다. 그 부침의 세월이 파란만장하지만 선생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술가의 결기다.

  • 기획
  • 김은정
  • 2013.07.11 23:02

"걸작은 가난에서 나온다"…남에게 아낌없이 베풀며 검약생활

1918년생인 하반영 선생은 최고령 현역작가다. 그리는 일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그림과 관련된 일상을 크게 흩트리지 않고 보낸다. 뇌혈전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은 이후 지난해 대장암 수술까지 받은 선생은 예술을 향한 의지의 경계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선생의 아흔여섯해 삶은 한국미술의 역사에 온전히 놓여있다. 고향은 김천이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군산으로 이사하면서 군산사람이 됐다. 측량기사로 일했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유복자가 됐다. 선생은 하씨지만 오랫동안 김씨로 살았다. 어머니가 군산 양조장집 안동 김씨에게 재가했기 때문이다. 본명은 구풍(俱豊). 철이 들어 스스로 하씨 성을 다시 찾았지만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일찌감치 예명인 반영(畔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아홉 살에 학교(군산 신풍초등학교)에 들어가 4학년까지 다녔지만 어린나이에 집을 나와 자유롭게(?) 살았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의 '그림 잘 그린다'는 격려가 그를 화가로 키웠다. 그림과의 인연은 극장 간판이 시작이다. 열일곱 살에 처음 군산극장 간판을 그렸으며 후에는 전주로 옮겨 극장 '간판장이'로 지내면서 영화인들은 물론, 전주의 화가, 문인들과 교류했다. 유머가 빼어나고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으로 주변에는 늘 예술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라북도에서 처음 시작된 전시회며 예술단체 중심에 선생이 앞서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신석정, 김해강, 서정주, 이병기 시인과 가까웠으며 금릉 김영창 선생을 첫스승이자 마지막 스승으로 모셨다. 고암 이응로, 오지호, 전혁림 선생과도 교분이 깊고 운보 김기창 박래현 부부와도 인연이 있다. 6·25전쟁으로 부산 피난시절엔 이중섭을 만나 여관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담배은박지에 그린 이중섭의 그림은 팔리지 않고 화선지에 실경을 그린 선생의 그림은 잘 팔려 함께 먹고 지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는 아낌없이 그림을 내놓아 수많은 자선전을 독립적으로 열거나 참여했다. 50년대 후반, 오지호선생과 함께 시화전을 열어 한하운 시인을 도운 일을 화가로서 한 일 중 가장 아름다운 일로 꼽는다. 환갑이 된 1979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8대학에서 공부하며 르 살롱전과 꽁파르죵 공모전에 참가 우수상과 금상을 받으며 주목 받았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큰 며느리 김용옥씨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선생은 '내 인생에 김용옥 시인을 만난 것이 인생에 제일 잘한 일'이라며 존중하고, 김씨는 '아버지는 화공 아닌 화신(畵神)'이라며 선생의 예술혼에 외경심을 보낸다. 선생은 며느리의 환갑을 앞두고 '내가 너를 위해 100점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선언(?)한 후 그 약속을 지켰으며, 며느리 김씨도 시아버지의 뜻을 받아 써낸 시를 모아 지난 2010년 화시집 〈빛, 마하, 生成〉을 발간, 화제가 됐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 미국과 프랑스 등 수많은 전시회를 열어 횟수를 세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스스로를 화공이라 부르며 '걸작은 가난 속에서 나온다'는 철학으로 남에게는 아낌없이 베풀면서도 자신은 검약하는 생활을 지켜왔다.

  • 기획
  • 김은정
  • 2013.07.11 23:02

6. 남원 운봉초 - 106년 전 지리산 자락 객사에 설립한 사립만성학교

△학교가 걸어온 길예로부터 남원 운봉은 전쟁과 재난, 기근 등 3재가 없어 살기 좋은 고장을 말할 때 주로 인용하는 조선 십승지 중 4승지로 불린다. 여기에 해발 470~700m 고원의 드넓은 옥토가 만석꾼을 내고, 그들에게서 나온 서민적 풍류에 이웃 간 돈독한 정까지 더해졌다.최근에는 지리산 둘레길과 연계돼 관광객이 꾸준히 찾고 있는 명품 '힐링'의 고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이처럼 천혜의 자연환경과 넉넉한 인심을 자랑하는 지리산자락에 자리한 운봉초등학교(교장 김상원)의 모태는 1907년 지역 유지들이 객사 운성관 자리에 설립한 사립만성학교이다.일제강점기에 들어선 1911년 학제 개편에 따라 교명은 사립운봉보통학교로 바뀌었고, 학교 감시 및 식민지 교육 목적으로 일본인 교원이 처음 부임했다.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설립된 학교는 이때부터 조선어 시간을 제외한 모든 수업은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1920년대 학제가 4학년제에서 6학년제로 바뀌면서, 학생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조선의 역사 및 문화교육을 억압하고, 말귀 알아듣는 신민을 양성하기 위한 기초적 교육에만 몰두했다.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점차 운봉에서 일어났다.문맹퇴치와 민중계몽, 민족교육을 기치로 운봉초 출신 정운태(15회), 정운경정현수(16회) 등 세 사람은 1920년대 말 야학회를 조직했다.이들은 20여명의 아이들에게 자주독립정신과 농촌경제 성장에 대해 가르쳤다.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식민교육은 끝을 맺었지만, 1950년 6.25를 치르면서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모두 불에 타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이후 교육 정상화와 베이비붐을 타고 취학아동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운봉지역에는 속속 학교가 들어섰다. 하지만 지속적인 이농현상으로 이때 들어선 4개 학교(운남, 운성, 운천, 고남)은 현재 모두 운봉초로 통합됐다.2001년 강당을 새로 건립했으며, 2002년에는 유치원 교실의 현대화 시설을 완비하는 등 교육환경개선에 주력했다.2005년에는 농어촌 현대화학교 교사 증개축에 따라 현재 모습으로 학교의 내외관을 갖췄다. 교정 안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는 학교가 흥망성쇠를 거치는 와중에도 굳건히 자리했고, 오늘날에는 학교를 상징하는 나무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한편 올해 101회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를 거쳐 간 학생은 모두 9594명이며, 현 전교생은 모두 145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운봉초는 인근 향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중요시했다.이 영향으로 교육계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대표적 인물로 서정용(27회) 전 남원교육장을 꼽을 수 있다.그는 1981년 남원군교육청에서 시교육청으로 명칭이 변경된 이후 첫 교육장으로 부임, 고향의 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모교에 대한 애정도 깊어 자주 학교를 찾아 교직원, 학생들을 격려하기도 했다.배봉기(57회) 광주대 교수는 국내 아동문학계의 거두로 불린다. 그는 1981년 소년중앙 문학상과 1985년 계몽문학상에 동화, 국립극장 장막 공모에 희곡, 스포츠서울.영화진흥공사 공모에 시나리오, 문학사상 신인상에 장편소설로 등단했다.현재까지 동화, 동극, 희곡,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희곡집으로 '잔인한 계절', '우리 시대의 사랑'이 있고, 동극집으로 '말대꾸하면 안 돼요?'가 있으며, 청소년 소설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노래'가 있다.대산재단과 문예진흥원 창작 기금을 받았으며, 대한민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거창국제연극제 장막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장막 공모에 당선했다.13.14회 서울연극제와 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지원 공연, 한국연극 100주년 기념 공연 등 다수의 희곡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이와 함께 1965년 모교인 운봉초 교장을 지낸 박성옥(29회) 및 강일석 전 교장(51회), 최태규(51회) 전 교감 등이 학교를 빛냈다. 진안과 부안, 완주군수를 역임하고 전주 부시장으로 정년퇴임한 박준명(30회)은 42년 간 공직에 몸담아 온 행정 전문가이면서도 서예가로 꾸준히 활동했다. 전국신춘휘호대전과 전국서예대전에 초대되기도 한 준프로급 실력을 자랑한다. 또한 수필집'돌아보며 내다보며'로 '한국시'문학대상을 받았던 문인이기도 하다.2007년 운봉읍장으로 정년퇴임한 박진기(48회)는 현재 지역사회에 남아 강살리기남원시네트워크 대표, 국민환경연합본부 대표 등을 지내며 정기적으로 환경정화운동에 나서고 있다.법조계에서는 김점동(55회) 변호사가 눈에 띈다.김 변호사는 전주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서울지검 동부지청과 전주지검 전주지청 등에서 검사생활을 했다.그는 1994년부터 고법유치위원회를 발족해 수많은 탄원, 성명, 서명운동 등을 통해 2006년 기어이 광주고법 전주 유치를 이끌어내는 등 도민 사법서비스 향상을 위해 힘써왔다.현재는 (사)전북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로서 지방자치행정과 의정활동 견제하고, 관 위주의 행정문화를 개혁하는 시민참여 행정문화의 정착에 힘쓰고 있다.특히 항소법원 설치, 전주 탄소밸리 구축 사업부지 강제수용 성명, 사회복지 제도 개선, 기금운용본부 전북이전 등 전북발전을 위한 다양한 시민활동을 펼치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2012년 도교육청 '혁신학교'로 지정된 운봉초는 교육혁신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운영하고 있다.이는 농어촌학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학생 수 급감, 교사 노후화 등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다.현재 전교생이 145명에 불과하지만, 특화작물 육성교육혁신으로 귀농귀촌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은 위안거리다.2009년 부임한 김상원 교장은 '참학력 신장을 위한 교육과정,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교육목표로 삼고 △신체두뇌 발달을 위한 아침놀이 활동 △시험 없는 학교 △종일 돌봄교실 △체계적 독서교육 △교사 자율성 신장 등 학교문화 바꾸기에 힘쓰고 있다.특히 민속놀이, 공놀이 등 협동심과 창의력이 필요한 운동을 매주 화~금요일 1교시 수업 전에 실시하고 있다.또한 교사들의 연구능력 신장을 위한 연수동아리 운영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김상원 교장은 "배움과 즐거움이 있는 수업혁신과 민주적 학교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에 힘쓰고 있다"며 "교육공동체가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10 23:02

전북대 외국인유학생지원센터 한국생활 적응 상담 실시

전북대 국제교류부는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교 적응을 돕기 위해 지난 2009년부터 외국인유학생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센터 관계자로부터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사관리 프로그램 현황을 들어봤다.-외국인 유학생들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있다면.△국제교류부에 소속된 외국인유학생지원센터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국내 및 대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생활의 고충에 대한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비자연장 등 출입국 관련 민원 서비스, 각종 공지사항 알림 서비스, 행사 안내 및 지원 등을 제공해 편의를 돕고 있다. -어떤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Buddy 프로그램'과 'IFP(Intern ational Friendship Program)' 등을 통해서도 유학생들의 생활 적응을 돕고 있다. Buddy 프로그램은 1년에 4차례에 걸쳐 시행되며, 전북대 구성원과의 일대일 만남을 통해 한국어 습득 및 한국생활의 적응에 도움을 주고 있다. IFP는 내국인과 외국인 학생을 그룹을 형성해 함께 생활함으로써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친밀감을 형성시킨다. 이밖에 해마다 설날과 추석에 '외국인 큰잔치'를 개최해 전북대의 외국인 구성원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초대하고 있다. 외국인 큰잔치에서는 외국인 유학생 학술문화한마당, 한국어 말하기 대회, 전통의상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외국인 유학생 수에 따른 수업의 질적 문제에 대한 우려가 있다면.△외국인 유학생의 수가 늘어날수록 수업에서 유학생을 배려하면서 수업의 질이 저하되는 등의 문제로 한국 학생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이에 신입 유학생 선발때 한국어 교육을 더욱 철저히 수료하도록 하는 등의 방법이나 TOPIK 4급 이상이 돼야 선발하는 방식으로 노력하고 있다. 또한 한국 학생들은 '입학한 유학생들도 같은 학생'이라는 생각을 갖고 더불어 소통할 수 있는 자세를 갖길 바란다.이민주(전북대 신방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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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9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순창 동계면 장군목 계곡

순창군 동계면에 위치한 장군목 계곡은 섬진강의 상류에 천혜의 수석공원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회문산 골짜기에서 섬진강에 합류돼 장군목에 이르는 500여리 가량 물길은 섬진강 중에서도 가장 향토적이며 자연미 넘치는 풍경을 연출한다.강물은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강물 따라 이어지는 길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한다.장군목은 경치 뿐 아니라 풍수로 보아서도 명당 중의 명당이며, 용궐산 장군이 건너편 적장의 목을 칼로 쳐 그 목이 장군목에 떨어졌다 하여 장군목이라 부른다.순창의 명가 남원양씨가 장군목 앞 구미리에서 600여년동안 터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은 다 장군목이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장군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묘하게 움푹 패인 바위들이다.천태만상의 바위들이 물줄기를 따라 3km 정도 늘어서 있는 가운데 요강처럼 생긴 바위인 "요강바위"는 장군목의 상징이다.널찍하게 깔린 판석에 거인의 발자국인 듯 구불구불 깎여 파인 바위들 속에서 보면 마치 기계로 뚫어낸 듯한 둥근 구멍이 뚫린 바위가 바로 요강바위다.높이 2m, 폭 3m에 무게가 무려 15톤이 된다는 요강바위는 어른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깊은 웅덩이가 패여 있다.한국전쟁때 마을 주민 중 바위에 몸을 숨겨 화를 면한 사람도 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장군목을 찾아 요강바위 위에 앉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로 전국의 수많은 여인네들이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바위를 타고 넘는 강물이 바위를 깎아내 부드러운 곡선을 빚어놓은 요강바위는 15년전에 도난을 당해 경기도까지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도난당하게 된 내력은 어느날 외지인이 마을로 이사를 와 마을사람들에게 인심을 후하게 한다음 어느날 하루 마을 주민들을 단체로 관광을 시켜줬단다.그 틈에 외지인은 중장비를 끌고 와서 무려 15톤이 넘는 요강바위를 실어내가고, 그 바위를 팔 요량으로 경기 광주시의 한 야산에 숨겨놓았다가 붙잡혔다.바위는 증거품이 돼서 전주지검 남원지청 마당에 놓였으며,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바위를 옮겨오는 데 든 돈만 500만원이었다.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3년 만에 요강바위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뒤로는 여전히 이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요강바위 뿐 아니라 주변에 널린 바위들은 가운데가 둥글게 패여 장군목을 흐르는 물살이 빚어낸 신묘함 그 자체다.하나같이 일부러 조각해 놓은 듯 섬세하고 정교하지만, 실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 동안 강물이 쓰다듬고 어루만져 태어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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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남근
  • 2013.07.09 23:02

[17. 도내 외국인 유학생 실태]의사소통·학과 공부 고충 호소…차별화된 프로그램 필요

굳이 서울 신사동이나 이태원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전북지역에서도 쉽게 외국인을 만날 수 있다. 길을 가다가 외국인을 보고 신기하게 쳐다보던 때는 오래 전 일이 되었다. 그 만큼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글로벌화 되었다. 더욱이 캠퍼스 안에서도 다른 언어, 다른 피부색의 외국인 유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유학생수 30년만에 90배 폭증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조사한 유학생 분포현황을 보면 지난 1980년 1015명에 불과했던 전국의 외국인 유학생 수는 30년이 넘은 지난 2011년 8만9537명으로 나타났다. 90배 가량 폭증한 셈이다. 특히 지난 2004년 정부는 2012년까지 국내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수를 10만 명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의 '스터디 코리아 프로젝트'를 공표했고, 이에 힘입어 우리나라의 외국인 유학생 수는 2007년 3만8649명에서 지난해 9월 9만3232명으로 늘어나는 등 더욱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전북대의 외국인 유학생 수도 지난 2008년 600여명에서 2011년에는 1162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전북대 재학생의 약 5%에 해당된다. 외국인 유학생을 국적별로 살펴보면 중국출신의 유학생이 879명으로 가장 많고, 몽골 150명과 네팔 26명이 뒤를 잇는다. 과정별로는 학부과정이 709명, 석사과정이 342명, 박사과정이 111명으로 나타났다. △언어소통 문제 가장 불편 그렇다면 전북지역 대학에 재학중인 외국인 유학생들의 학교생활 만족도는 어느 정도일까. 외국인 학생들의 전체적인 학교평가는 전반적으로 우수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의사소통과 학과공부에 있어서 차별과 함께 몇가지 불편함을 겪고 있었다. 그 가운데 공통적으로 꼽은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문제였다. 중국 길림농업과학기술대에서 전북대를 찾은 교환학생 서정씨는 "솔직히 수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며 "수업이 끝나고 한국인 친구가 문법이나 해석을 도와준다"고 말했다. 서정씨는 현재 한중 통역사가 되기 위해 현재 전북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고급반을 수강중이다. 카자흐스탄 유학생 나제즈다 하가이씨(전북대 무역 석사과정)도 "전공수업을 듣다보면 교수님의 한국말이 너무 빠르다"며 "한국어가 어려워 전공 수업을 들을 때마다 많은 부담을 느낀다"고 같은 고충을 털어놨다. 심지어 중국 출신의 A씨는 "교수님 강의를 이해하기 어려워 한국어 교재를 보고 공부하려 했지만 그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며 "중국어로 된 전공 책으로 공부했지만 이조차 한국의 책과 내용이 달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유학생들은 인간관계 면에서도 어려움을 토로한다. 중국 유학생 A씨는 학과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다. 학과 학생들이 A씨에게 학과 정보조차 제공해 주지 않았고, 길을 걷다 마주친 어느 학생이 학과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학과 체육대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독일 유학생 B씨는 전북대앞 구정문(알림의 거리)를 나갈 때면 외국인이라는 수근거림이 불편했다고 전했다. 석사과정의 중국 유학생 C씨도 '중국에 청바지가 있느냐, 물은 나오느냐' 등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C씨는 "한국인과 외국인이 각각 절반을 이루는 수업에서 한 한국인 학생이 휴강이 된 사실을 한국인 학생에게만 알리고 외국인 학생에게는 알리지 않았다"며 "한국인 학생들은 아시아계 외국인들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고 전했다. 특히 외국인 유학생은 한국 학생들만큼 정보력이 빠르지 않다. 학교에서는 외국인 유학생이라는 선을 벗어나지 못한 제한적인 수준의 도움을 줘 토익이나 기본적인 스펙에 대한 지원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한 외국인 유학생은 "한국어 교육과 영어교육이 증가되고 외국인 학생들의 기초적인 실력향상을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신설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유학생들에 자극 받기도 그렇다면 전북지역 대학생들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볼까. 전북대 3학년인 지윤아씨는 "외국인 유학생과 팀이 돼 본적은 없지만 팀프로젝트가 점수로 연관되다 보니 아무래도 같은 팀이 안됐으면 하는 마음은 내심 있었다"며 "그럼에도 같은 공간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먼 나라까지 와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자극이 된다"고 밝혔다. 전북대 이성경씨도 "전공 수업에서 종종 외국인 유학생들을 만나는데 커리큘럼상 팀프로젝트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때 외국인 유학생과는 같은 팀이 되지 않길 바란 적이 있다"면서 "실제로 외국인 유학생과 같은 팀이 된 적이 있는데 한국말이 서툴기 때문에 이해력이 다소 늦었던 것은 있지만 열심히 참여하려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반면 일부 유학생들은 팀프로젝트에 참여 자체를 꺼리는 사례도 없지 않다는 게 한국 학생들의 귀띔이다. 원광대 3학년 엄소라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종종 보지만 주변에 한국학생과 외국인 학생간의 특별한 친분을 맺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라고 전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르는 외국인 유학생들. 같은 공간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심지어 말 한마디 나누어 본 기억이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의 유학생들 '끼리끼리' 어울림 또한 조금은 자제해야 하겠지만 외국인 유학생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지나친 오해와 무관심을 개선하면서 다가가는 것도 '다름'을 인정하는 지성인의 진정한 자세가 아닐까. /이민주(전북대 신방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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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8 23:02

8. 전북연구개발특구 미지정 - 정치력·체계적 준비 부족…전북 소외 '부채질'

전북도가 오는 8월 연구개발특구 지정에 재도전한다. 그동안 지적됐던 문제를 보완해 지정 요건과 현 정부의 창조경제 기조에 맞춰 신청서를 제출한다는 방침이다. 제조업 중심으로 산업이 개편되고 있고 새만금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전북의 차별화된 특구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이에 앞선 전북은 지난 2010년 광주대구부산와 더불어 연구개발특구 지정을 신청했지만 현재까지 유일하게 검토보류 중이다. 그동안 전북보다 늦게 신청한 부산의 경우 정치력으로 특구 지정에 성공하면서 '전북 소외론'도 현실화됐다. 특구 지정 조건의 미흡과 함께 정치력과 중앙 정부와의 공조 부족 등도 제기되면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전북 소외론 대두전북은 지난 정부의 정책기조인 '5+2 광역경제권'의 '서자(庶子)' 내지는 '얼자(孼子)'였다. 5+2 광역경제권의 피해패배의식 속에서 각종 연구개발 사업의 예산 배정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었다. 국가의 연구개발 예산은 늘어나지만 전북의 비중은 지난 2008년 2.2%에서 2010년 1.8%까지 낮아졌다는 게 전북도의 설명이다. 지역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으며, 특히 관련 예산이 연구개발특구나 과학기술원을 중심으로 배정되는 만큼 소외가 가중되고 있다는 게 내부 진단이다. 지난 정부의 전북 소외는 부산의 연구개발특구 지정으로 가속화됐다. 지난해 10월 말 부산은 대전, 대구, 광주에 이어 네 번째 연구 개발특구로 지정됐다. 전북은 부산보다 일찍 신청했는데도 아직까지 내부 검토에 머물고 있다. 당시 부산도 전북과 마찬가지로 특구 조건이 일부 미흡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특구 지정에 성공해 정치력으로 특구가 결정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당시 정부는 서부산권 19.34㎢ 지역에 2020년까지 세계 최고의 연구개발 기반의 조선해양플랜트 특구를 조성한다고 밝혔다. 부산 특구 지정 뒤 전북의 특구 지정 여부는 더욱 불투명해지기도 했다. 현 정부의 부처 개편에 따라 소관 부처가 지식경제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되는 동안 업무가 표류하기도 했다.△구두 약속은 립서비스인가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전북을 방문해 동서횡단철도와 새만금신항만 배후물류산업 복합단지 조성, 새만금 내부간선도로망 동서2축과 남북2축 구축, 전북연구개발특구 지정 등에 긍정적 견해를 피력했다.박 대통령은 당시 "전북의 경우 식품산업의 메카가 될 가능성이 많고, 그린에너지 같은 것도 전북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이라며 "이같은 부분을 잘 특화시켜서 R&D특구로 조성한다면 좀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하지만 취임 뒤 지난 3월 대통령 업무보고에 지역공약사업조차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고, 나머지 전북연구개발특구 지정과 같은 구두 약속은 배제됐다. 최근에는 대선공약에 공식적으로 반영됐던 지방공약마저 타당성을 따져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어서 구두 약속까지 챙기기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정치력 부재와 준비 부족외부적인 전북 소외론과 함께 내부적인 문제도 지적된다. 정치력의 부재와 함께 체계적인 준비 부족도 거론되고 있다. 또한 지난해 부산이 특구로 지정될 때도 전북도에서는 부산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전언이다. 전북도 관계자는 "특구와 관련해 그동안 중앙 정부와의 네트워킹이 잘 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전북은 지난 2010년 3월 '농생명식품과 탄소복합 소재' 분야를 특화해 전주권 연구개발특구 지정을 추진했다. 당시 지식경제부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익산에 조성 중인 국가식품클러스터와 중복된다는 지적을 했다. 또한 '정부 출연 연구소 3개 이상'이라는 요건도 갖추지 못했다. 전북도는 지난해 말 이를 충족하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그린 융복합 혁신 클러스터 구축'을 비전으로 하고 특화 분야를 친환경 복합소재산업, 농식품생명산업, 그린에너지 산업으로 바꿨다. 당시 지식경제부가 제시한 법적 요건을 총족하기 위해 전주완주익산뿐 아니라 첨단방사선연구소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소재연구소안전성평가연구소 전북영장류시험본부가 모여 있는 정읍 첨단과학산단까지 특구 신청 지역을 72㎢로 확대했다.대통령이 바뀌자 다시 수정됐다. 현 정부 들어 미래창조과학부가 '면적 축소와 보완'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기술개발의 사업화라는 연구개발특구의 목적에 맞게 지구별 기업 현황과 연구기관의 보유기술을 조사해 기술의 수요공급에 대응하도록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 있는 방법론을 주문했다. 아울러 국내외 연구소 유치 계획과 연구 인력의 유입 방안 등도 요구했다. 이에따라 전북도는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를 제외하고 필요한 지역만 특구에 넣는다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전주정읍완주 등 3개 시군에 걸쳐 봉동지구(완주), 덕진팔복지구(전주), 이서(완주)효자(전주)지구, 정읍지구 등 4개 지구로 나눈 18.3㎢의 변경안으로 다음달 연구개발특구를 신청할 계획이다. '인간 중심 그린 융복합산업'이라는 기조 아래 농생명식품, 친환경 복합소재, 그린 에너지를 특화 분야로 설정하고 새 정부의 핵심 정책인 지역의 창조경제에 초점을 맞췄다.하지만 여전히 기존 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된 곳에서는 추가 지정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숫자가 많아 특구라는 말이 무색해진다는 시각도 여전하다. 만약 연구개발특구 지정 신청이 반려될 경우 전북이 입을 타격도 크다. 전북도 관계자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전북 연구개발특구에 대해 공감,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만큼 이번에는 지정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전북연구개발특구 추진 일지△2010년 03월=전북연구개발 특구 지정 신청서 제출. 당시 광주대구부산전북 4개 시도가 신청.△2011년 01월=광주대구 특구 지정.△2012년 10월=경남 특구 지정 신청, 경기도 지정 준비.△2012년 11월=부산 특구 지정.△2012년 12월=전주완주익산정읍 포함 전북 특구 사업계획서 보완. △2013년 01월=전북 특구 지정을 위한 전략환경영향평가 주민설명회. 대통령 인수위 업무보고시 비공약으로 제외.△2013년 03월=전북 특구 육성사업계획서 수정. 익산 식품클러스터 제외, 면적 축소.△2013년 06월=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도내 국회의원 면담. 전북 특구 설립 필요성 촉구.△2013년 08월=전북 특구 지정 재신청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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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명
  • 2013.07.08 23:02

취임 100일 전북출신 이경옥 안전행정부 제2차관

이경옥 안전행정부 제2차관이 취임한 지 지난달 말로 꼭 100일이 지났다. 전북 출신 첫 안행부 차관으로 임명된 그는 새 정부의 지방행정 정책을 진두지휘하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달 27일 서울 세종로에 있는 안전행정부 제2차관실에서 그를 만나 차관에 오른 소감과, 업무를 추진하면서 느낀 점,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전북출신 첫 안전행정부 차관에 임명됐는데 우선 소감이 궁금합니다."국정 운영의 중추부처이자, 지방행정의 총괄 부처인 안전행정부의 제2차관으로 취임한 것만으로 무척 영광스럽고 또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항상 성원해 주시는 전북도민들께 감사드리며, 도민들의 무한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안행부 제2차관의 업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고, 취임 후 3개월 남짓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안행부 2차관의 주요 업무는 크게 네 가지 입니다. 우선 국민이 언제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안전정책 및 재난관리 업무를 꼽을 수 있습니다. 자치제도 개선과 지역발전 사업을 추진하는 지방행정 관련 업무, 자치단체의 재정정책 및 지방세제 정책을 총괄하는 지방재정세제 관련 업무, 그 밖에 자치단체 감사 및 공무원 윤리복무 제도 등에 관한 업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취임 이후 석 달 간 바쁘게 현장을 다니고, 국민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국민이 안전행정부에 얼마나 많은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안전행정부, 더 나아가 박근혜 정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항상 기억하고, '안전한 사회, 유능한 정부, 성숙한 자치'를 실현하기 위해 전 직원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국민 안전문제, 특히 정부 3.0 구현에 주력하는 분위기인데 이의 목적은 무엇이고, 지역주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점은 과연 어떤게 있습니까."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명칭을 바꾼 것은 국민안전을 최우선으로 두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존의 상황관리적 안전대책에서 벗어나 예방적본질적근원적인 종합안전대책을 마련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 3.0의 개념은 공공정보를 적극적으로 개방해 국민과 공유하고, 부처간 칸막이를 없애고 협력함으로써 국민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정부 운영 패러다임입니다. 정부 3.0 추진을 통해 주민들이 투명한 정부, 유능한 정부를 체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공공정보 개방을 통한 일자리 창출,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 제공 등은 주민 여러분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행부에 근무하는 경찰을 일선으로 돌리는 등 현장에 주력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일이 있는데, 지금까지 지방경찰청 또는 일선 경찰서 인력배치를 어떻게 바꿨고, 또 향후 변경계획이 궁금합니다."안행부는 현장중심의 업무를 실시하기 위해 안행부 파견 경찰관 숫자를 줄여 현장에 배치한 바 있습니다. 경찰청도 현장 민생부서 강화를 위해 9000여명의 인력을 수사, 형사, 지구대 등 현장 중심으로 배치했습니다. 국정과제로 선정된 경찰 인력 2만명 증원에 앞서 당장의 현장인력 부족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민생치안 현장 인력을 보강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경찰관 2만명 증원이 이뤄질 경우 4대 사회악 척결 및 민생치안 분야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등 현장 강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힘쓰겠습니다."- 대체휴일제는 국민적 관심이 크고, 국정과제인 만큼 도입이 될 것 같은데 안전행정부의 입장은 무엇입니까."대체공휴일제는 장단점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과도한 노동시간을 줄이고 관광산업 활성화 등 내수 진작에 도움이 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자영업일용직 근로자 등 취약계층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산업부문의 생산차질도 우려됩니다. 논란이 있는 만큼 여론수렴 과정에 있고, 최근 대체공휴일제 도입 방향에 대한 종합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몇 가지 안이 나왔는데 설날추석 등 명절 연휴와 공휴일이 겹치는 경우, 어린이날이 공휴일과 겹치는 경우를 대체공휴일로 도입하자는 안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최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김제부안평택시 등이 참가한 가운데 매립지 행정구역 결정 방안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는데 군산시는 불참한 바 있습니다. 새만금 경계에 대해 지금까지의 추진 상황과 향후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새만금 제3호제4호 방조제는 2010년 중앙분쟁조정위원회 심의, 의결에 따라 군산시 관할로 결정했습니다. 이에대해 김제시와 부안군이 대법원에 '행정구역 결정 취소소송'을 제기, 현재 대법원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새만금 제1호제2호 방조제는,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의 결정신청에 따라 공고 등을 거쳐 3개 시군이 각자의 입장에서 의견을 제출했고, 곧 중앙분쟁조정위원회에 심의를 의뢰할 계획입니다. 향후, 귀속 자치단체 결정은 새만금 제3호제4호 방조제 구간에 대한 취소소송 진행경과를 지켜보면서 중앙분쟁조정위원회의 심도 있는 심의를 통해 합리적으로 결정할 방침입니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입니까."행정자치부 자치제도과장 시절, 주민투표제 및 주민소송제 등 다양한 주민참여제도를 도입했던 일이 공직생활 중 가장 보람있던 기억입니다. 치열한 고민과 연구를 거쳐 법률 제개정안을 만들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과정이 비록 힘들었지만, 행정의 책임성 확보를 위한 주민참여제도를 제 손을 거쳐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오랫동안 지역정가에서 총선 또는 지방선거에 나설 수 있는 잠재적 후보군으로 꼽혀 왔는데 향후 정치적 포부가 궁금합니다."고위 공직자는 사심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데 모든 것을 다 바쳐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는 안전행정부 제2차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미리 어떤 자리를 내다보지 않고, 항상 당면한 업무에 최선을 다한 결과 여기까지 왔습니다. 도민 여러분께서도 제가 제2차관으로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마칠 수 있도록 항상 성원해주시고, 지켜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기획
  • 위병기
  • 2013.07.08 23:02

이경옥 안전행정부 제2차관은

이경옥(55) 안전행정부 제2차관은 장수가 고향이다. 전주 해성고와 전북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이후 일본 규슈대학교 법학과 석사, 전북대 법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행정 관료의 길을 걷게됐다. 사무관(5급) 시절, 장수군 민방위과장과 전북도 지역경제계장 등 일선 현장에서 민생문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한다.안행부에서 그는 다양한 직책을 거치면서 행정에 대한 안목을 넓혔다. 안행부 지방이양팀장, 행정관리담당관, 지역경제과장, 자치제도과장, 자치행정과정 등 요직을 지내면서 탄탄한 인맥도 쌓아갔다.이후 그는 전북도 기획관리실장, 전주시 부시장, 기획예산처 균형발전재정 기획관을 역임한 후 2007년 말부터 2010년 9월까지 전북도 행정부지사로 오랫동안 재직했다.김완주 지사와 호흡을 맞춰 전주부시장, 전북도 부지사로 재임하면서 지역에서 제법 이름도 알려졌다.2010년 안행부 소속 제7대 국가기록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의 공직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타고난 처세술과 인맥, 그리고 근면을 바탕으로 그는 2011년 9월 안행부 차관보로 자리를 옮겼다.차관보 시절, 전국의 자전거 도로를 현장 시찰하고, 매주 자전거 라이딩을 즐겨 '자전거 차관보'라는 별명도 얻었다. 마침내 올 3월에는 안전행정부 제2차관으로 임명됐다. 전북 출신 인사로는 첫 안행부 차관이었다.이 차관의 생활신조는 우직(愚直)이라고 한다. '우직'이라는 말에는 어리석다고 할 정도로 바르게 살면서 조금 손해를 보아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살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다른 사람을 잘 배려하고, 적을 만들지 않는 능란한 그의 처세술을 감안하면 사실 우직이라는 생활신조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한걸음, 한걸음 최선을 다해온 결과 차관에까지 올랐다고 한다.그는 업무를 처리할 때 항상 "현장에 답이 있다"고 말한다. 차관 취임 후 매주 안전 취약 현장과 사회복지시설 등 현장 방문을 실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는 부하 직원들에게 좀 성가신 상관이다. 왜냐하면 "1%라도 나와 관계가 있으면 내 업무로 생각하자"고 하기 때문이다. 융통성 있는 대인관계를 바탕으로 소탈한 성품에 유머감각도 풍부한 편이다.

  • 기획
  • 위병기
  • 2013.07.08 23:02

새만금 농업용지 개발 속도낸다

새만금 농업용지와 관광용지 개발이 본격화됐다.국무조정실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은 4일 새만금 농업용지 5공구(면적 15.1㎢) 조성공사의 첫 삽을 떴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사업시행자인 (주)한양은 한국농어촌공사에 지난 달 26일 착수계를 접수했다.전체 7개 공구로 구성된 새만금 농업용지 가운데 용지 조성공사에 들어간 것은 5공구가 처음이다.이번 농업용지 조성공사는 오는 2017년까지 총 1456억원을 들여 용수로, 배수로, 배수문, 도로, 저류지 등을 설치한다.특히 대규모 농업회사가 입주할 부지(면적 7㎢)는 오는 2015년까지 용지 조성을 마무리할 예정이다.또 농업용지 뿐 아니라 관광 인프라 구축사업도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신시도에 호텔, 식당, 판매시설을 갖춘 대규모 복합휴게시설 건설사업이 하반기에 착공되기 때문이다.또한 방조제 인근 매립용지인 신시~야미 관광레저용지에 대해서는 사업 시행자를 연말까지 선정한다.전북도 관계자는 "새만금 개발이 농업용지를 중심으로 본격화된다"며 "나머지 용지 개발도 속도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은 새만금 투자 활성화 과제를 마련해 오는 12일 열리는 새만금위원회에서 논의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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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대식
  • 2013.07.05 23:02

7. 무주 기업도시 유치 - 대기업의 '장밋빛 청사진' 에 애꿎은 주민들만 상처

무주 기업도시는 '동부권의 새만금'으로 불렸다. 무주군과 대한전선이 지난 2005년 정주인구 1만명 규모로 개발하겠다며 정부로부터 사업권을 따낼 때만해도 이 같이 통용됐다. 하지만 사업 착수 5년 만인 2010년 10월 무산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 됐다. 오히려 순진하게 대규모 개발사업을 믿고 기다렸던 주민들에게는 아픔과 고통만을 가져다줌으써 대규모 개발사업 유치 실패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를 고스란히 노출하게 됐다.△ 무주 기업도시 선정정부는 지난 2005년 7월8일 중앙청사에서 이해찬 국무총리 주재로 기업도시위원회를 열고 기업도시 시범사업을 신청한 8개 지역 중 무주와 전남 무안, 충북 충주, 강원 원주 등 4개 지역을 시범사업지로 결정했다. 무주는 국가균형발전 기여도나 사업실현 가능성, 지속발전 가능성 등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 관광레저형 희망지역(4곳) 중 유일하게 선정됐다.당시 대한전선은 오는 2015년까지 무주 안성면 공정리와 금평리, 덕산리일대 약 767만㎡에 총 1조4171억원을 투입해나가겠다며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레저 및 상업업무, 주거숙박시설 등으로 나눠 관광지조성 등 각종 개발사업이 진행될 예정이었다.무주군과 대한전선은 무주 기업도시가 추진됨으로써 조성단계에서 1조8312억의 생산유발 효과와 5921억원의 부가가치 창출 효과, 2만2220명의 고용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전북도와 무주군은 곧바로 '태스크포스팀(TF팀)'을 구성하는 등 무주 기업도시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행재정적 지원에 나섰다.참여정부가 혁신도시, 세종시 등과 함께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3대 사업으로 추진해온 기업도시는 당시 무주와 부안, 남원에서 관광레저형, 군산과 익산에서 산업교역형, 전주완주군산익산정읍남원김제 등은 혁신거점형 기업도시를 검토했다. 하지만 무주만 선정됐다.△5년 만에 날아간 기업도시균형발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무주 기업도시는 애초 2008년 하반기면 착수될 것으로 전망됐다. 무주군과 공동사업 시행자인 무주기업도시(주)가 곧바로 토지보상에 필요한 물건조사와 감정평가를 실시하고, 토지보상을 실시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무주기업도시(주)는 지난 2007년 1월 23일 대한전선(440억원96%)과 무주군(18억원4%)이 출자해 자본금 458억원으로 설립됐다.그러나 2008년 10월 주 출자사인 대한전선은 경기침체와 경영악화를 이유로 사업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다. 토지조사가 75% 가량 진행된 채 사실상 중단된 것이다. 이상기류는 같은 해 5월 23일 무주군과 무주기업도시가 공동으로 일간신문에 게재하려던 '보상계획 열람 공고'가 급작스럽게 취소되면서 감지됐다. 보상계획 공고는 기업도시에 편입되는 토지 및 지장물을 보상하기 위해 밟아야 하는 필수 절차다.이어 문화체육관광부는 2011년 1월18일 "다각적인 회생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무주 기업도시 개발계획 승인을 취소하고 개발지구 지정도 해제했다. 전국 6대 기업도시 중 첫 무산 사례이고, 시범사업지 선정 5년여 만이다. 전북도는 이에 맞춰 주민 이주단지 건설사업 중단을 지시하는 한편, 토지거래허가구역도 전면 해제했다.기세좋게 출발했던 무주 기업도시. 2005년 관광레저형 기업도시 유치가 확정될 당시만해도 지역발전, 특히 낙후된 동부권발전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글로벌 경기불황과 모회사인 대한전선의 경영악화 등으로 인해 답보상태에 빠지면서 사업 무산까지 이른 것이다.△사업 무산으로 주민들만 피해무주 기업도시가 무산되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 몫이 됐다. 무주군 안성면 일원 7.6㎢가 기업도시 사업지로 지정된 직후 지난 2010년 8월까지 그 일대는 토지거래허가구역과 개발행위허가제한구역으로 잇따라 지정됐다. 모두 150여세대에 320여명의 주민들이 땅 매각은 커녕 집조차 수리할 수 없이 생활해 왔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억울함은 무주기업도시 사업 취소 이후 수백억원대의 손배소를 제기한 것에서 뒷받침한다.무주 기업도시가 무산된 데에는 속도를 내려는 무주군과 달리 무주기업도시(주)의 최대 주주인 대한전선이 사업성 문제를 들어 선뜻 투자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북도와 무주군이 공동 투자자도 찾아봤지만 경기불황 등으로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무주기업도시는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이나 투자자들의 추가 출자 등 새로운 여건만 조성되면 추진할 것"이라고 했지만, 정부와 지자체에 재정적 여유는 없었다.그런 가운데 전북도와 무주군, 대한전선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졌다. 물론 무주 기업도시가 실패한 것은 글로벌 경기불황 등으로 인해 마땅한 투자자가 없었다는 게 주 요인이다. 하지만 대규모 지역개발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고 수년동안 기다려온 주민들의 억울함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전북도는 현재 무주 일대를 신발전지역으로 지정, 지원할 계획이다. 또 무주 태권도원을 중심으로 '지리산덕유산권 힐링 거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사업 시행자인 무주군과 대한전선만 믿고 기다려온 주민 피해를 온전하게 보상하기는 힘들다. 전북도 관계자는 "사업시행자가 무주군과 대한전선측이지만 도에서도 주민들의 재산피해 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지원해왔고, 앞으로도 주민피해를 덜어주기 위해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무주기업도시 추진일지△2005년 05월 27일 = 토지거래계약허가구역 지정(도) △2005년 07월 08일 = 무주 기업도시 시범지역 선정 △2007년 10월 02일 = 개발구역지정 및 개발계획승인 고시(국토부,문화부) △2008년 05월~ = 대한전선 보상계획 중단 및 사업추진 유보 △2010년 10월 01일 = 실시계획승인신청 기간만료 △2010년 12월 14일 =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 △2011년 01월 25일 = 개발구역지정 해제 고시(문화부)

  • 기획
  • 구대식
  • 2013.07.04 23:02

5. 군산 중앙초 - 일제 저항정신 면면히…야구 명문학교로 '발돋움'

△학교가 걸어온 길1907년 문을 연 군산 중앙초등학교(교장 박동수)는 올해로 개교 106주년을 맞았다. 학교 개교 당시 공립 군산보통학교 인가(4년제)를 받은 학교는 1921년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었다.1938년 소화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됐다.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격리해 교육하는 풍토에 중앙초는 조선인 학생들만이 다니는 학교로 인식됐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계승하는 순효과도 있었지만, 일본인 학생에 비해 여러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이에 중앙초 학생들은 인근 일본인 학교 학생들과 자주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 월명산 아래 신흥동부터 해망터널로 연결된 군산내항 매집지 일대가 모두 조계지였다. 당시 일본인은 이처럼 번듯한 평지에서 살았고, 조선인은 인근 산자락으로 내쫓겨 초라한 움집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았다.일제는 인근 내항을 통해 조선의 곡물 등을 수탈했다. 현재도 내항의 접안시설로 사용 중인 뜬다리는 당시 가설한 것으로 수탈의 상징과도 같은 유산이다.이 같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 반발, 독립을 쟁취하기 일해선 민중들의 자발적 항거인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학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직접 맞닥뜨렸다.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중앙초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나라잃은 설움을 표출했다.이 와중에 당시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다행히 광복을 기점으로 학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1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이 지은 노랫말을 통해 학교의 앞날을 축복하기도 했다.이후 학교는 전교생이 4000~5000여명에 이르렀고, 1963년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지덕체를 아우르는 전인적 교육을 선도하는 명문 학교로 발돋움했다.2007년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는 재학생과 학부모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식 및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다.군산역 이전으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중앙초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한편 학교는 올해 104회 졸업식을 열었으며, 현재까지 거쳐간 학생은 모두 3만1768명이다.△학교를 빛낸 인물군산중앙초는 정치계 거목과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을 다수 배출했다. 11살 어린나이에 3.1운동에 투신한 김판술(10회)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대표적 정치인이다.그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산지역구로 출마해 정계에 입문해 5,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1961년 장면 내각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격랑을 헤쳐온 우리 의정사의 산증이다.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미군정의 농지개혁을 비판하고, 국민방위군 사건을 질타해 '대쪽'의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강현욱(43회) 전 전북지사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516대 국회의원, 환경부장관과 전북지사, 국무총리실 새만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거쳐 현재 학교법인 조선대 이사장, 새만금 명예 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다.그는 특히 새만금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세계 최장 방조제(33.9km) 준공, 새만금 종합개발계획(MP) 및 수질대책 수립, 투자유치 등 새만금사업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대내외적으로 신망이 두텁고, 국제감각이 뛰어난 그는 전북지사 시절 미국 LA에서 연 농수산물 특판행사에서 229만8000달러의 현장판매와 200만달러의 수출계약 실적을 올리기도 하는 등 세계 속에 전북의 위상을 확립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법조계에서는 신상규(54회) 전 광주고검장이 눈에 띈다.서울대 법학과를 졸업, 사법고시 21회를 통해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창원인천지검장, 광주고검장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동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동덕여학단 이사장으로 선출돼 교육계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1963년 창단한 중앙초 야구부는 전국대회에서 3차례 우승을 차지한 야구 명문이다. 특히'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군산상고의 전성기를 일군 선수들 중 상당수가 중앙초 출신이다.대표적 인물로는 김성한(63회)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비롯해 신경현(80회한화), 정대현(83회롯데), 이대수(86회한화) 등 30여명이 프로와 대학에서 선수 및 지도자로 활약 중이다.김성한 코치는 중앙초 야구부 1세대로서 군산상고, 동국대를 거치면서 투수와 타자를 겸했다.그는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선수로 프로에 입문, 불같은 공격력으로 해태가 한국시리지를 7번이나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14년간 해태에서 뛰는 동안 그는 1338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86, 781타점, 762득점, 207홈런을 기록했다. 1985, 1988년 패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 1992년 올스타게임 최우수선수, 골든글러브(6회), 홈런왕(3회), 타점왕(2회), 최다안타(2회) 등을 기록했다.2004년 기아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한 그는 현재 해태 시절 은사인 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같은 팀에서 수석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정대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 투수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이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결승전서 3-2로 앞선 9회말 1사 만루 위기서 등판, 병살타로 마무리하며 상대인 쿠바에 피눈물을 안긴 주인공으로 명성이 자자하다.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시작으로 WBC대회까지 국가대표만 14년째이다.군산교육의 산실로 꼽히는 중앙초는 수많은 교육자를 내기도 했다.중앙초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영배(52회) 전 교장, 노용주(56회) 군산 산북초 교장 등이 있다.특히 현 박동수(58회) 교장은 2012년 모교로 부임, 제자이자 후배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도약을 위한 노력중앙초는 발명교육센터를 운영해 발명에 관심과 소질이 있는 인재를 키워나가고 있다.올해 도교육청 '아토피예방중심학교'로 지정되면서, 인성과 건강을 두루 갖춘 학생을 육성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박동수 교장은 마지막 교직생활을 모교에서 마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갖고 있다.한때 전교생이 4000명이 넘던 시절은 간데 없고 현재는 전교생이 177명에 불과한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희망도 있다. 인근 옛 군산역 일대에 개발붐이 불고 있어서다.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새롭게 들어설 예정으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한 각종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박동수 교장은 "학교 설립 초기에는 항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한 중앙초는 전북을 대표하는 학교"라며 "학생들이 훌륭한 선배들처럼 국가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7.03 23:02

【16. 은퇴 후 노후생활】"자원봉사 적극 참여 자기실현·자존감 높여야"

은퇴 후에 무엇을 하며 세월을 보낼 것인가? 소득을 올리고 업무성과를 높이는 일은 현업에 종사할 때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고 책임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직이나 현업에서 물러난 뒤 30~40년 동안 어떤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성공적인 노후가 될 것인가? 운동, 여행, 등산, 예능, 문예 활동 등 개인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일을 골라서 보람 있게 노후를 보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평생을 산에만 올라가고 여행을 다닌다고 해서 노후생활이 가치 있고 보람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원봉사활동을 성공적으로 노후를 보내는 역할의 하나로 꼽는다. 노인들의 자원봉사 활동은 그들의 여가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 중 하나다. 퇴직으로 상실한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보충해주고 유용감과 자존감을 지켜주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공익사업과 사회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소외감과 무력감을 극복해주며 자기성장과 자아실현을 돕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노인자원봉사 실태2009년 통계청 사회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전체 자원봉사 참여율은 19.3%로, 미국26.4%(2008년), 영국 59%(2008년), 캐나다 36%(2007)에 비해 훨씬 낮은 편이다. 그중 노인자원봉사 비율은 미국과 허주에 비해 현저히 낮다. 미국은 65세 이상 노인의 40%가, 호주는 17%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지만 한국은 60세 이상 7%, 65세 이상 5.3%로 매우 낮다.2010년 보건복지부 사회복지분야 자원봉사 통계연보에 따르면 주민등록인구 대비 자원봉사자 비율은 광주가 5.8%로 가장 높았고, 전북은 2.46%로 16개 시도 중 12위를 차지했으며, 전국평균(2.68%)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난해 전북발전연구원의 노인생활실태조사에서도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노인은 3.9%이며, 자원봉사 활동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노인은 86.9%로 조사됐다.△ 해바라기자원봉사단 활동"와! 멋있다. 선생님 저 줘요, 저요"여기저기서 탄성이 쏟아졌다. 손뼉을 치는 소리도 요란했다. 20여 명의 학생들은 할아버지 선생님이 꼬아서 만든 풍선 꽃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지난 12일 오후 전주북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 전주에 사는 할아버지 선생님 선용하씨(77전주 호성동)가 풍선아트 수업을 벌이고 있는 교실 풍경이다. 선씨는 지난해부터 이 학교 학생들에게 풍선아트 방과 후 수업을 하고 있다. 선씨는 1998년 말 34년 동안 몸담아왔던 공직생활을 접었다. 퇴직 후 6개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선씨는 어느 날 '이렇게 세월을 보내서야 되겠는가'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직업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막상 자원봉사활동을 하려고 생각해보니 마땅히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공직에선 업무처리에 남보다 뒤진 적이 없었던 과거를 떠 올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제야 자원봉사활동도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풍선 아트 자격증에 도전했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선씨는 풍선아트의 전문가가 됐고, 대학평생교육원, 노인복지관, 노인요양원, 경로당, 초등학교 등에서 풍선아트 수업도 하고 공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웃음치료활동, 레크리에이션 지도, 게이트볼 지도 등 대학과 복지관 평생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해 강의를 듣고 집에서 스스로 익히면서 취득한 자격증만 8가지다. 이 자격증들이 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자신감이 됐다. 지난 2007년부터는 풍선아트를 배운 노인들이 뜻을 모아 '해바라기자원봉사단'을 조직했다. 현재 회원은 27명으로, 연령은 72세부터 80세까지이며, 행정공무원, 교육공무원, 자영업, 전업주부 등 전직 직종도 다양하다. "노인이라고 해서 늘 수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돼요. 베풀고 나누는 마음으로 이웃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선씨는 자원봉사단 조직의 동기를 이렇게 말하고, "3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자기를 지켜준 것도 자원봉사활동이었다"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 봉사단은 개인적으로 실천하는 봉사활동 외에 매월 2차례 이상 전체 회원이 자원봉사활동을 펼친다. 노인요양원 웃음치료 지도, 풍선아트 지도, 학교 화장실 청소, 노인복지관 청소 및 꽃밭 가꾸기 봉사활동, 학교 방과 후 활동지도, 복지관 회원 대상 레크리에이션 지도, 노인복지관 주간보호시설 방문 위로, 노인복지관 안내, 식사도우미활동, 경로당 청소, 자연보호 등을 하고 있으며, 초등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전달하고 있다. '체력이 다 해서 육체적으로 활동할 수 없을 때 장학금으로라도 봉사를 하자'는 회원들의 뜻이 모아졌다. 초등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매년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환경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 3명씩 선정, 1인 당 50만원씩의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회원들이 쌈짓돈을 모아 매월 1만원의 회비를 거둬 장학기금을 충당한다. 그는 "회원 중에는 자기 몸이 아파도 약값을 아껴 회비를 내기도 한다"면서 "남들은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랑과 나눔의 뜻이 깃든 소중한 증표"라고 강조했다. 신정모 (전북실버뉴스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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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 2013.07.02 23:02

【16. 은퇴 후 노후생활】"사회발전·개선 앞장서는 '신 노년세대'로 거듭나야"

"노인자원봉사활동은 고령화 사회를 책임 있게 이끌어가는 노인세대의 중요한 역할입니다."대한노인회 전북노인자원봉사센터 김규섭 회장은 "노인들이 가족과 사회에 부담 주고 부양받는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참여의 주체로 다시 서서 능동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사회발전과 개선에 앞장서는 '신노년세대'로 거듭나야 한다"고 노인자원봉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한노인회 전북노인자원봉사지원센터는 2012년 3월 창립됐다. 올 6월말 현재 총 100개 클럽이 조직되었고 참여 회원은 1650명에 이른다. 60세 이상 노인들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고령자는 89세로 평균연령은 75세다. 한 개 클럽은 12명에서 15명의 회원으로 조직되었고 경로당 회원, 노인복지관 회원, 일반 단체 회원들이 클럽에 가입해서 정보를 나누며 클럽별로 활동한다. 대한노인회는 올해 안으로 전국에 1500개의 봉사클럽 조직을 유도할 계획이다.전북노인자원봉사지원센터는 전도적으로 노인자원봉사클럽을 조직, 클럽 당 연 20만원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노인자원봉사자들이 자율적으로 월 2회 이상 자원봉사 활동을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센터는 자원봉사클럽의 리더로서 자원봉사클럽 활동을 지속적이고 효율적으로 전개하도록 하기 위해 3회에 걸쳐 코치 209명을 선발, 1일 또는 1박 2일의 코치양성교육을 실시했다. 이 센터에서는 올 7월부터 시?군 지역별로 자원봉사자의 자세와 역할을 다지기 위한 자체 소양교육을 실시하고, 이어서 8월에는 5개 권역별 코치보수교육을 실시해 자원봉사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고 봉사활동의 질적 수준을 높여갈 계획이다.김 회장은 "노인자원봉사자들은 봉사 대상자와의 약속이 관계형성과 신뢰구축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원봉사활동이 본인의 경륜과 전문 분야에 적합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노인일자리 취업교육과 봉사활동이 자연스럽게 연계되도록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인자원봉사지원센터 사업을 통해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위상을 높이고 세대 간 교류와 연대감을 확보하도록 하기 위해 노인자원봉사의 새로운 붐을 일으키고 싶다"고 희망과 기대를 나타냈다. 신정모(전북실버뉴스레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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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7.02 23:02

【진안 농업법인 생태밸리진안(주)】"버섯 저렴하게 보급 농가 소득창출 도움"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에 보상을 받고, 또 다른 여유와 삶을 소득사업과 함께 영위하는 '힐링 & 리빙의 1번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농업법인 생태밸리진안(주) 박두용(57) 대표이사는 "태어나서 퇴직때 까지가 '인생 1막'이라면, 퇴직 후부터 생마감때 까지가 '제2막'"이라며 이같이 말했다.박 대표는 "20여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지역의 현실을 둘러보니 생활의 편리성 등은 이전에 비해 많이 발전했지만 소득구조 전환이라든지 소득증대를 위한 농가의 의식구조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며 "이로 인한 생활, 교육환경 등의 변화에 부응하는 윤택한 삶, 삶의 질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통감했다"고 포문을 열었다.이런 현실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농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기에 우선적으로 지역 선후배들과의 공감을 통한 상생을 계획한 것도 이 때문이라는 박 대표.그는 "일련의 계획을 바탕으로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고, 철저한 사전 계획하에 주주들의 역할분담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오늘의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했다"면서 "이제는 도출된 성과를 토대로 합리적 경영 원리를 접목시켜 공동분배를 통해 주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역상생 논리에 입각해 버섯 배지를 농가에 저렴하게 보급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아울러 박 대표는 "농가 수확물의 전량 매입을 원칙으로 농가소득 증대에 이바지하고, 조합원은 물론 지역과의 상생을 통해 낙후된 농업 생산력을 극대화할 복안이다"고 전했다.이어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일이 위정자 만이 고민할 일은 아니다"며 "올바른 사고와 철학을 갖고 열심히 일한다면 윤택한 삶을 영위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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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문
  • 2013.07.02 23:02

【진안 농업법인 생태밸리진안(주)】자연·사람·지역 상생 추구…잘 사는 농촌 만들기 앞장

힐링(healing) & 리빙(living)을 표방한 농업법인 생태밸리진안주식회사가 주목받고 있다. 인생 2막, 건강하고 윤택한 삶을 전제로 사람과 자연, 지역간 상생을 추구하는 미래지향적 농업법인으로 지역사회에서 회자되면서다.지난해 10월 진안읍 정곡리 828-1번지 일대 6만6000㎡에 둥지를 튼 농업법인 생태밸리진안(주). 사람과 자연이 합(合)하는 '상생'을 창립이념으로,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십시일반 자금을 모아 법인을 구성했다. 지금은 창립 8개월여 만에 모든 기반조성과 생산시설 설비를 마치고 본격적인 소득원 확보에 나선 상태다.양서류(개구리) 및 파충류 증양식, 균류(목이버섯)재배, 곤충류(장수풍뎅이) 증양식 등 3가지를 통해 생태보전 및 소득창출을 꾀하고 있다.특히 법인은 지역 경제활동 인구의 고령화 정점에 서 있는, 이른바 은퇴세대가 중심이 되는 소득창출과 자연 순환식 농법에 따른 환경보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도 갖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친화적 방법으로 개구리 및 파충류 그리고 목이버섯을 재배한다는 점이다.투입 노동력도 중장년층 이상의 고령층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단순 집약형.소요되는 자원(목재가공, 부산물 2차 처리) 역시 순환적 방법에 의해 자연적으로 처리, 오염원 발생이 전혀 없는 친환경적 농법을 도입했다.법인은 단백질이 풍부한 개구리를 양성적으로 식용화, 건강 식품화 해 소득을 창출함은 물론,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방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이 외에도 건강식품 및 의약품 개발에 곤충을 접목시켜 이를 자원화 할 계획까지 세워놨다.또, 농가에 목이버섯 재배기술을 보급한 뒤 수확된 버섯을 전량 법인에서 수매하는 시스템으로 농가소득 향상에 일조, 기업이념을 실천하겠다는 계획이다.특히 법인은 목이버섯 생산 및 유통을 담당할 자본금 15억원의 (유)버섯마루와의 전략적 제휴관계까지 형성해 놓은 상황. 이를 통해 사업의 안정성 확보와 함께 비전을 동시에 담보하기도 했다.이는 지역 농업환경 및 구조적 여건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일로 평가받고 있다.기존 영농조합 및 농업법인들의 영세성과 이에 따른 불안정성을 타개할 수 있는 롤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소득 외에도 법인 종사자 및 지역 주민, 관광객의 휴식과 치유를 위해 편백나무 숲을 조성하고, 새천에 가재와 물고기 등을 방사해 생태를 복원시키기로 했다.유휴부지에 크로바를 이식해 지력을 회복시켜 곤충을 비롯한 온갖 동식물들이 자연에서 서식할 수 있는 공간을 형성, 향후 생태 자연학습장으로도 활용한다는 복안이다.친환경 재배를 토대로 한 이같은 노력들은 이제 서서히 그 결실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목이버섯 배지 5000본을 노지 시범 재배한 결과, 2톤(시가 2000만원 상당)의 목이버섯을 수확하는 성과를 올렸다.이에 힘입어 올 가을에는 20만본의 배지를 노지에 식재, 약 8억원 가량의 매출이 기대되고 있다.박두용 대표는 "'생태건강도시'에 부합될 수 있는, 삶의 활력과 소득이 뒷받침되는 정주공간을 조성하는데 있어 지역민은 물론이거니와 귀농인에게도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진안을 대표하는 생태특구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한편 6~7명의 소수 인원이 의기투합해 출범한 생태밸리진안(주)은 현재 40명이 넘는 주주들이 십시일반 모은 8억의 탄탄한 자본금으로 성장, 공동노동, 공동분배 원칙을 삼고, 나래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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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문
  • 2013.07.02 23:02

6. 전주탄소산업 - 전북도-전주시, 효성공장 위치·부지 놓고 신경전

지난 5월 13일 전주시 팔복동 친환경복합산업단지. 국내에서는 최초이자, 일본과 미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꿈의 신소재'로 불리는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국가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주)효성의 탄소섬유 생산 전주공장 준공식 현장이었다. 행사장에는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김완주 전북도지사, 송하진 전주시장, (주)효성 이상운 부회장 등 기업체 대표 및 시민 500여명이 참석, 국내 첫 중성능(T-700급) 탄소섬유 생산을 축하했다. 18만2000㎡ 부지 위에 들어선 (주)효성 전주공장에서는 연 2000톤 규모의 탄소섬유가 생산된다. 효성은 오는 2020년까지 1조2000억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할 계획으로, 생산능력도 연 1만 7000톤 규모로 확대할 계획도 갖고 있다. 이는 올해 국내 탄소시장 규모의 6배를 생산하는 규모이자, 세계 탄소시장(5만t)의 30% 수준이다.탄소섬유는 전주시가 미래 성장동력으로 집중 육성해온 분야로, 자치단체의 사업이 국가사업으로 채택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전주 탄소산업 시작이 모습을 준공식 현장 한 켠에서 바라본 한국탄소융합기술원(구 기계탄소기술원) 및 전주시, 그리고 (주)효성 전주공장 관계자들은 또다른 한편으로 씁쓸해 했다. 핵심은 사업과정에서 겪었던 전북도와의 갈등이다. 실제 전주탄소 섬유가 생산되기까지 전주시와 탄소융합기술원측은 전북도와 적잖게 충돌했다.그 부딪힘은 한국탄소융합기술원(구 전주기계탄소기술원)이 효성과 공동으로 탄소섬유 기술개발을 추진키로 협약을 맺은 지난 2008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한국탄소융합기술원전주시, 그리고 전북도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효성 전주공장의 위치 등 탄소산업의 지역적 배치를 둘러싼 갈등이었다.전주 탄소산업은 김완주 지사가 전주시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2005년께 시작됐다. 김 지사는 탄소섬유를 비롯한 탄소산업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성장가능성을 평가했다.곧바로 전주기계산업리서치 센터(현 한국탄소융합기술원)를 중심으로 추진하던 부품소재산업이 탄소산업으로 중심축이 이동됐다. 이 구상은 당시만해도 매우 파격적인 기획으로, 담당 정부부처인 지식경제부에 탄소와 관련된 담당부서는 물론이고 담당자 조차 없을 정도로 국내기반이 매우 취약한 시기였다. 정부 관계자는'대기업도 못하는 것을 일개 자치단체가 하겠다니 믿지 못하겠다'며 전주시의 구상을 평가 절하하기도 했다.그렇지만 전주시는 전주기계산업리서치센터내 장비를 탄소관련 장비로 교체하는 등 사업을 밀어부쳤다. 이 시기는 송하진 시장이 전주시정을 맡기 시작한 민선 4기였다. 송 시장의 민선4기는 2006년 7월부터 시작됐다.인력확보를 위해 외국에서 탄소를 연구했던 박사급 인력과 탄소섬유 개발 경험이 있는 동양제철 소속 연구진을 영입했다. 그리고 일본 도레이로부터 '연구용으로 쓰겠다'고 약속하고 탄소섬유 연구개발에 필요한 장비를 도입했다. 총 100억원 투입된 장비는 2년 후인 2007년말 완전 구축됐다. 이들 시설이 들어선 산업단지(도시첨산업단지)도 2006년 12월에 완공됐다.김 지사의 구상이 송하진 시장에 의해 개화된 것. 송 시장은 장비구축 작업을 마무리하고, 이를 활용해 탄소섬유 생산할 수 있는 후속작업에 착수했다.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파트너, 즉 대기업 물색에 나선 것. 송 시장은 국내 공업섬유분야에서 선두주자였던 (주)효성을 선택했다. 전주시와 물밑접촉을 이뤄질 당시 효성은 탄소섬유 전문가를 2차례나 전주에 파견해 장비 및 생산환경을 점검하는 등 손익계산을 꼼꼼히 따졌다.사전점검을 마친 효성은 2008년 4월 최종 결정을 내리고 이상운 효성 부회장이 전주를 직접 방문해 계약을 체결했다. 전주시와 효성은 '개발시기는 6년(2014년), 개발 이후 1년 이내 연산 1000톤 이상의 규모를 갖춘 공장을 전주에 건설한다'고 약속했다. 연구개발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연구가 중단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계약이후 2년만에 범용 탄소섬유 개발(2010년)를, 그리고 그 뒤 1년만에 고성능 탄소섬유 개발(2011년)에 성공했다. 당초 약속한 개발시한을 3년 정도 앞당긴 셈이다.△자치단체간 갈등그 사이에 전북도와 전주시간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전주시 입장에서는 전북도가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측은 전북도가 제대로 된 예산지원을 하지 않으면서 방해만 한다는 불만이 집중적으로 나온 시기도 이 때였다.특히 이 시기는 송하진 시장이 전주시장에 취임 후인 지난 2007년 8월 김 지사가 시장시절에 의욕적으로 기획해 놓은 경전철 사업 중단을 선언, 양측간에 냉기류가 흐르던 시점이었다. 또 2008년 2월 전주시 상수도 유수율 제고사업의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불거진 의혹에 대한 전북도의 감사를 둘러싸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정면 충돌하는 등 양 자치단체간 감정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상황이었다. 이 같은 물밑 신경전은 효성이 중성능 탄소섬유 개발에 성공하고, 생산공장을 짓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던 2011년 초께 더욱 표면화됐다.먼저 효성의 전주공장 위치. 전북도와 전주시의 생각은 달랐다. 전주시는 당연히 전주에 효성공장 건설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전북도에서는 전주시 이외의 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전북도는 직접 효성측을 찾아가 전주가 아닌 완주에 공장을 지을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효성의 한 관계자는 "전북도에서 찾아와 '완주로 가면, 땅값도 싸고 개발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전주에 공장을 짓지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황당하기까지 했다"며 고 어이없어 했다.전북도는 논리는 균형개발이었다. 전주의 경우, 팔복동 도시첨단산업단지내에 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 나노집적센터, 테크노파크 등의 연구시설이 있는 만큼 연구중심으로 가고, 공장 등의 산업시설은 완주를 비롯한 인접 시군에 배치해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전주시는 지난 2008년 1월 KIST(한국과학기술원) 전북분원을 전북에 유치했을때의 상황을 들며 반박했다. 시 관계자는 "당시 우리는'전주시는 연구중심으로 갈테니, 연구시설 집적화를 위해 KIST전북분원을 전주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전북도는 이를 거부하고 완주에 배치했다"면서 "도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이런 사이에 효성측은 '합의가 되지 않으면 울산으로 갈수도 있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결국 송 시장과 당시 조지훈 전주시의회 의장이 나서 이상운 효성 부회장을 수차례 만나 설득한 결과, 이상운 부회장이'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전주를 최종 결정했다.탄소공장 위치가 일단락되자, 이번에는 부지확보 문제가 불거졌다. 전주시는 효성측에 공장부지를 제공하기 위해 현 효성 전주공장 부지인 팔복동 BYC인근의 생산녹지(친환경복합산단 3단계 부지, 153만3000㎡)를 공장용지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통상 산업용지 개발에 부지매입과 행정절차 이행, 공사 등에 따른 기간이 5년 정도 걸린다는 점을 감안해 미리 준비한 것.이를 위해서는 전북도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여러차례 거부당했다. 가까스로 전체 계획 면적 가운데 일부(28만4000㎡)만 승인을 얻어 산업용지로 개발해 효성측에 제공했다. 나머지 면적은 현재까지 전북도가 승인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갈등의 후유증-탄소산업 중심 흔들자치단체간 갈등은 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 효성측 연구진의 노력 덕분에 탄소섬유 개발성공과 양산이란 결과물을 얻어내는 등 무난히 넘어갔지만, 후유증은 심했다.가장 큰게 전주 탄소산업의 국내 위상이다. 전주시 한 관계자는 "사업추진 및 예산을 확보하러 정부부처에 가면 담당자자들은 '왜 그렇게 전북은 싸움만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정부에서 지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며 안타까워했다.이로인해 전주 탄소산업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고, 성공적 기반을 구축했음에도 국내 위상은 확고하게 자리하지 못한 상황이다.전북도가 오래전부터 추진해왔던 '초고강도 복합소재 국산화개발사업'이 수차례 실패한 후에서야 가까스로 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정부가 탄소산업 육성을 위해 주요 소재 6가지(탄소섬유, CNT, 인조흑연, 카본블랙, 그래핀, 활성탄소) 소재 및 융복합상품을 글로벌 스타산업으로 육성하는 'C-STAR'사업을 전북을 비롯한 3개 지역으로 분산하려는 계획에서 보듯 국내 탄소산업의 주도권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이와는 달리 전북도와 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전북도 전략산업의 하나로 전기차 기술개발과 인프라 구축 등을 목표로 추진됐던 '그린카'산업이 울산으로 넘어간 것도 또다른 손실로 꼽힌다.● 전주 탄소산업 추진 일지 △2002년 05월=전북 지역산업 육성을 위한 운영조례 제정 △2002년12월=(재)전주기계산업리서치센터 창립 총회 △2003년 02월=(재)전주기계산업리서치센터 설립 허가(산업자원부) △2004년 11월=기계산업리서치센터 건축 완공 △2004년 12월=기계산업리서치센터 입주업체 모집(7개사) △2006년 10월=산자부 핵심기능 기계부품소재실용화사업 선정(103억) △2006년 12월=전주도시첨단산업단지 생산시설확충사업 완공(3개동, 1500평) △2007년 12월=탄소섬유생산시스템 기반구축 완료(소재성형동 및 장비구축 완료) △2008년01월=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북분원 복합소재기술연구소 설립 △2008년 04월=(주)효성과 탄소섬유공동기술개발 계약 체결 △2008년 10월=전주기계탄소기술원으로 법인명칭 변경 △2009년 01월=전주기계탄소기술원 개원 △2009년 12월=범용 탄소섬유 개발 성공(T-300급) △2010년 10월=국제탄소연구소 개관 △2011년 03월=중성능 탄소섬유개발(T-700급) △2011년 06월=(주)효성 전주권 탄소섬유양산공장 유치 MOU 체결 △2012년 03월=(주)효성탄소섬유 공장 착공 △2013년 04월=한국탄소융합기술원(구 전주기계탄소기술원)으로 명칭 변경 △2013년05월=(주)효성탄소섬유 공장 준공, 양산체제 돌입

  • 기획
  • 김준호
  • 2013.07.01 23:02

조영철 전북도농업기술원 원장은

조영철 원장은 1981년 경기도 고양군 농촌지도소에 농촌지도 공직자로 입문해 농촌진흥청 기술연수과장, 지원기획과장, 농촌지원국장을 거쳐 2008년 7월 전북도농업기술원장으로 취임했다.1957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해 서울대에서 학석사를 마친 그는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재다.'함께 하는 삶'을 생활 철학으로 여기고 있는 조 원장은 개인의 능력개발과 담당 업무에 대한 소신과 책임을 중시하며, 직원 상호간의 수평적 관계를 통해 조화를 이루는 팀웍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이다. 그는 2008년부터 전북도농업기술원장을 맡아 5년 동안 눈코뜰새 없이 전북 농업발전을 위해 뛰었다. 사업 추진에 필요한 그의 예산 확보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2009년에서 2011년까지 3년 연속 농촌진흥사업 국고보조금 전국 1위의 업적만 봐도 그의 능력이 과연 어느정도인지 쉽게 대변해주고 있다. 또한 농촌진흥사업 3년 연속 최우수 기관상 수상, 2010부터 2012년까지 역시 3년 연속 홍보 최우수상 수상 등은 조 원장의 또다른 능력을 엿보게 한다.조 원장은 지도조직에 활력을 붙어넣기 위해 진흥청-도-시군간 교류도 적극 추진했다. 도기술원에서 시군으로 3명, 시군에서 도기술원으로 9명, 또 중앙과 시군 교류 또한 적극적으로 추진해 농촌진흥사업 추진에 활력을 불어 넣은 사례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회자되는 얘깃거리다.아울러 지난 2005년 녹조근정훈장을 받은 그는 인간관계가 원만해 신망이 두터우며, 업무추진에 있어 이론과 실무에 밝아 추진력이 탁월하고 농업농촌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가진 전문가였다. 지난 5년간 그가 이뤄 놓은 성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 기획
  • 엄철호
  • 2013.07.01 23:02

5년간 전북농업 이끈 조영철 도농업기술원장

풍년농사를 이루는 것은 농부가 농사만을 잘 지어서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농사적 연구와 기술이 뒷받침 돼야만 가능하다. 지난 2008년 7월, 제4대 전북도농업기술원 원장으로 취임해 5년간 전북농업을 이끌었던 조영철 원장(56)이 전북을 떠났다. 농촌진흥청 1일자 인사에 따라 국립식량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북지역 풍년농사는 물론 지역 농업인들의 삶의 질 향상과 돈 버는 농업 실현을 위해 14개 시군 들녘을 뛰고 달리며 지역 농업인들과 애환을 함께 했던 조원장을 지난달 27일 만나 이임의 아쉬움과 그간의 주요성과를 들어봤다.-현장에서 기나긴 시간을 농업인들과 함께 했던 만큼 막상 떠나려면 많은 아쉬움도 있을 것 같은데요."오는 18일이 되면 만 5년이 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참 긴 시간입니다. 2008년 전북도농업기술원으로 발령받고 영광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향이 전북이 아니고 전남 영광입니다. 그래서 학연, 지연 없이 소신 있게 농촌진흥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됐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소신있게 객관적인 시각으로 전북도의 농업을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지난 5년이 아쉬운 점도 있지만, 보람 있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생산자에게는 돈 버는 농업을, 소비자에게는 안전한 먹거리 제공 실현시키겠다고 늘상 강조해 왔는데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십니까."2009년에 전국 최초로 직렬(연구지도) 중심의 국 체제에서 기능(농식품, 친환경)중심으로 개편하는 등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꿈과 희망이 있는 농촌, 돈 버는 농업실현'을 목표로 5개 전략을 중심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농식품가공 개발 및 소득화 기후변화 대비전략 구축, FTA 대응 신품종 및 우량종자 보급, 믿고 신뢰하는 농산물 생산 보급 등은 분명 전북농업농촌의 활력화입니다. 전북도의 농가 평균소득은 2012년 기준으로 2622만6000원입니다. 전국평균의 84.5% 정도입니다. 우리 농업은 생산이 전부가 아닙니다. 생산에서 가공, 유통, 체험으로 이어지는 6차 산업이 이루어지고 이것으로 호주머니가 두둑해질 때 농업인은 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5개의 전략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지역 농특산물을 가공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소규모창업지원, 품질향상, 농산물표준화, 명품화 등 제품 브랜드와 창업보육프로그램을 운영해 매년 30개소씩 안정적 가공기반 조성과 마케팅에 주력했고, 기술원 자체적으로는 농식품분야에서 산업재산권 16건을 취득해 이중 8건을 산업체에 기술 이전했습니다. 또 2011년부터는 아이디어는 있으나 생산기반이 없는 우수한 인재와 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농식품 콘테스트를 개최해 우수 농산물을 개발상품화했습니다."-특히 강조하고 싶고 보람을 갖게 하는 성과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먼저 기후변화와 관련해 사과품질 추이분석 및 고온 극복방안 등 기후변화 대응 안정생산기술 11건, 온실가스 평가 3건, 저감기술 1건 등을 가시적인 성과로 봅니다. 또한 농업인들을 위해 신품종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화훼, 벼, 오미자, 버섯, 수박 등 지난 5년간 우리도가 새롭게 개발한 신품종은 11작목 63품종으로 이것 모두를 출원등록했습니다. 화훼 신품종(안개초, 국화, 장미, 스타티스, 나리, 원추리) 보급으로 로열티 절감 효과를 냈습니다. 전북은 특수미를 많이 재배하는 지역으로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전북지역에 적합한 특수미 신품종인 신명흑찰과 신농흑찰, 신토흑미를 개발해 품종을 선발하고 맞춤형 재배기술을 농가에 보급함으로써 농가소득에 기여했습니다. 이밖에 지난 2011년 군산 대야면에 전국 최초로 만든 파프리카 시험장 역시 많은 자긍심과 보람을 갖게 합니다."-정말 열심히 뛰고 달려오신 것 같은데 혹시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우리 기술원 직원들이 열심히 노력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연속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됐습니다. 농촌진흥사업에서 전국 9개도, 7개 특광역시중 3년 연속 전국 1위를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도의 연구, 지도직 공무원들의 역량이 우수하고, 농업에 대한 열정으로 얻어낸 결과입니다. 굳이 아쉬운 점이라 하면 FTA 대응 신소득 작물 발굴과 재배기술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아직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콜라비는 우리지역에 도입해 생산성을 검토했고, 대체 사료작물인 케나프는 활용 가능성을 평가한 결과 우수해 한우, 젖소에 실증 급여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은 다소 미흡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구기간이 짧아서입니다. 한가지 연구가 성과를 내기까지는 대략 5~6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연구 2년만에 생산기술 및 가능성이 보이는 우수 계통이 선발된 만큼 향후 2~3년이면 충분히 실용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대내외적으로 급변하는 농업농촌의 환경 속에서 전북 농업이 취해야 할 앞으로의 방향과 정책을 제시하신다면."무엇보다도 FTA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우리지역 특성을 고려한 경쟁력 있는 유망품목을 선정하고, 비교우위에 있는 농식품의 융복합 기술개발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지역은 품질면에서 시설채소, 사과, 화훼, 버섯 등이 우수하고, 생산비 절감부분은 쌀, 무, 마늘, 양파 등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생산여건이 우수한 과채류(파프리카, 멜론, 딸기 등)를 수출작목으로 육성해야 합니다. 전북도가 우위에 있는 작목을 더욱 집중 개발해 경쟁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또한 국정과제인 농식품의 6차 산업화를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농가소득은 감소하고 농외소득원에 대한 농업인의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생산, 가공, 유통, 관광이 결합된 6차 산업화로 소득창출과 농촌사회 활성화에 노력해야 합니다. 6차 산업화 산학연 협력 네트워크 구축해 농촌체험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개발하고 품질관리로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봅니다."-마지막으로 전북 농업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농업은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국가 기반산업입니다. 그동안 산업화과정을 거치면서 농촌의 많은 젊은이가 떠나고 농촌은 지금 노령화 돼 있습니다. 땀 흘려 한해 농사를 지어도 소득은 낮은 편입니다. 그러나 농업의 경제적 공익적 가치는 국민의 먹거리 생산은 기본이고, 식량안보와 환경보전, 경관 및 전통 등 무궁무진 하기 때문에 농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육성 발전시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중심에 우리 농업인이 있습니다. 우리지역은 비옥한 땅과 무한 애정으로 우리 농촌을 지키는 농업인이 있기에 전북 농업의 미래는 밝습니다. 지속가능한 농업을 사랑하고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전북 농업인들이 있어 전북의 농촌은 밝은 희망이 있습니다."

  • 기획
  • 엄철호
  • 2013.07.01 23:02

'전주밥차' 채수영 사장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어요. 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밥차'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기능으로 분류해보자면 그보다 앞서 시작된 '함바식당'이나, 세련된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케이터링 서비스' 류가 된다. 이 밥차의 성장이 참으로 놀랍다. 예전에는 영화나 드라마, 뮤직비디오나 뮤지컬 제작현장의 전유물로 기능했지만 이제 국토대장정이나 동아리 체육대회 같은 현장에서도 존재의 가치를 빛낸다. 덕분에 수도권을 비롯해 각 지역마다 적지 않은 '밥차'가 운영되고 있다. 시장경제로 보자면 '밥차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은 사업성이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이 '밥차'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이동 식당차'로 시작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이니, 아무리 길게 잡아도 10년을 조금 넘는 연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침이 없이 성장해온 '밥차시장'의 존재는 흥미롭다.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 '전주밥차'가 있다. '전주밥차'는 '밥차'란 이름을 만들어낸 연원이자 그 자체로 밥차의 역사다. 물론 90년대 초부터 음식 관련 업체들의 '외식부페'나 '캐터링 서비스'가 현장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온전히 '밥차다운 밥차'는 '전주밥차'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지금 '전주밥차'는 밥차시장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크고 작은 기업들이 '전주밥차'를 부르기 위해 줄을 서고, 영화나 드라마 제작현장에서도 섭외 순위 1위도 불변하다. '전주밥차'의 채수영사장(44)을 처음 만난 것은 2006년 봄이다. 밥차를 시작한 것이 2002년, 5년차 밥차의 젊은 사장은 도전과 열정이 넘쳐보였다. 이미 전주밥차의 이름을 한껏 올리고 있었지만 온전한 '밥차'를 만들기 위한 실험과 투자가 필요했던 때여서인지 경제적 여건은 녹록치 않았었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밥차시장의 선두를 지키고 있는 '전주밥차'의 성장과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사이 밥차가 8대로 늘어날 정도로 사업 규모가 커졌지만 채사장은 여전히 밥차가 있는 현장에 있었다. 1.2톤 밥차위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하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행복해보였다. -여전히 밥차를 지키고 있군요. 지금도 직접 하십니까. "밥차 사장이 현장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요. 오늘 아침 일찍 올라왔습니다. 현장에 문제가 생겨서 불 끄러 왔어요.(웃음)" -사장님이 직접 와야만 해결되는 큰일이 무엇일까요. "큰일은 아니고요. 스태프들이 저녁식사를 맛있게 하면 해결되는 일입니다. 10개월째 식사를 제공하고 있는데, 조금 변화를 주려고 밥차팀을 바꾸었더니 바로 민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올라왔지요."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곳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다. 전주밥차는 지난해 9월부터 이곳에서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스태프 식사를 1년 가깝게 전담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공연팀의 식사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채사장이 '오늘은 괜찮죠?'라고 묻더니 환하게 웃었다. '만족스럽다'는 답을 들은 덕분이었다. -예전보다 일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다른 업체에게 일을 넘겨줄 정도면 매출도 적지 않겠군요. 이제 직접 현장에 나오지 않고 관리만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경제적으로는 많이 좋아졌지요, 그렇다고 제 할 일이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하다 보니 저만의 노하우가 생겨 웬만한 곳은 혼자 다닙니다. 운전하고 현장에 가서 음식 만들고 배식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해결해도 380명 정도의 점심과 저녁은 너끈합니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전주밥차 채사장은 혼자 다니는 사람으로 이름났어요."-밥차를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대학을 졸업하고 CF나 영상물을 제작하는 기획사를 차렸어요. 그런데 지역의 일거리가 한정되어 있고, 일을 맡아도 스태프를 구성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 제작 현장을 다니면서 가졌던 고민이 스태프들의 식사였어요. 현장에서 밥다운 밥을 먹을 수는 없을까 생각하다가 외식부페나 케이터링서비스가 아닌 현장에서 직접 밥을 해주는 방법을 찾게 되었는데, 그것이 밥차였어요."-그때도 밥차가 있지 않았을까요."현장에 와서 식사를 주는 차는 있었죠. 그런데 그 차들은 대부분이 이미 조리된 밥이나 반찬을 가져와서 도시락처럼 배식해주는 식이었죠. 모든 음식을 현장에서 조리해 먹을 수 있게 하는 즉석 밥차는 없었습니다."-밥차란 이름도 전주밥차가 처음 썼다면서요.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저는 밥차란 이름이 서민적이어서 친근했는데 다른사람들의 밥차에 대한 선입견이 그렇게 안좋은줄 몰랐어요.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심한지 멸시하고 무시하고, 난장 밥장사처럼 함부로 대하기 일쑤였으니까요. 그런 편견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 사업을 시작하고 가장 어려웠던 것도 그런 편견과 사회적 인식이었어요."-가장 힘든 점이 사회적 편견이었다니 뜻밖입니다. 경제적 여건은 괜찮았나요. "어려웠지요. 보기에는 차한대에 간단한 설치만 하면 될 것 같지만 밥차는 새로운 영역이어서 계속 투자를 해야 했거든요. 게다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 혼자 힘으로 대학을 다니고 사업도 혼자 힘으로 시작해서 형편이 늘 빠듯했어요."-투자란 것은 밥차 시스템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그렇죠. 제 경우 밥차를 연구하고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꼬박 3년 걸렸어요. 어떤 현장을 가도 기능을 다할 수 있는 현재의 모델을 얻은 것이 2005년이니까요."-어떤 문제들이 있었던가요."우선은 대부분의 현장이 실내가 아닙니다. 특히 영화제작 현장 같은 야외는 기상 여건도 다 다르죠. 어느 때는 바람이 불어 불이 날아다니니까 제대로 조리할 수 없고, 어느 때는 수백 명 밥을 하기 위해 가스 화구를 계속 사용하니까 밥차가 열기를 못 이겨 문제가 생기기도 하구요. 여러 번 경험하면서 뜯고 다시 만드는 과정을 거쳐 화구를 개발했습니다. 이제는 다됐다 싶었는데 한번은 스태프들이 '청소좀 해야겠다'고 하더라고요. 밥차위에 조리 찌꺼기들을 채 치우지 못하고 배식 하다 보니 지저분한 광경을 그대로 보게 된 것이죠. 그래서 배수구 설치 시스템을 고안해냈어요."-이제 완벽한 시스템을 얻으셨습니까. "전주밥차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완벽하다고 자신하죠. 현장을 다니다보면 가파른 경사도 올라가야하는데 잘못하면 뒤집어지고 쏟아지고 난리가 나죠. 전주밥차는 그럴 염려가 전혀 없어요. 짐들이 서로가 서로를 다 잡아주어서 경사진 곳을 올라가도 끄떡없거든요."-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쳤겠군요. 다른 밥차들은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이제는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대한민국의 밥차 상당부분이 저희 차의 시스템을 가져간 것이에요. 그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거든요. 새벽에 몰래 와서 차 내부를 사진으로 찍어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일 배운다고 왔다가 아예 차를 갖고 도망간 예도 있습니다. 그래도 전주밥차 덕분에 밥차를 잘 만들 수 있었다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으니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녜요."-밥차다운 밥차를 만든 것도, 자의든 타의든 대중화한 것도 결국 전주밥차였네요. 그 전에는 온전한 밥차라고 보기 어려웠겠어요."그래서인지 허영만 화백께서 저희 차를 꼼꼼히 보시더니 '야 이것이 진짜 밥차'라고 하시면서 차에서 경험이 묻어나온다고 하셨어요. 그 인연으로 식객 주인공이 되었죠."-저도 보았습니다. 식객 70화이던가요. 밥차가 대중화되는데도 식객만화가 기여했을 겁니다. 서울 종로에 식객촌을 조성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저희도 초대되었습니다. 10여개 업체가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식객 주인공들 중에서 선정했다고 하더군요. '전주밥차'를 걸고 처음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어서 설레고 기대도 됩니다. 12월에 오픈할 계획인데 실내디자인을 준비중입니다."-서울 한 중심에 식당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죠. 게다가 벌써부터 '식객촌'에 대한 기대가 커서 제주도와 동부산에도 유치한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전주밥차'의 더 큰 성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예 회사를 서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니겠죠."전주밥차의 고향이 전주인데 옮겨가면 안 되죠. 그런데 고민은 있습니다. 저희 사업자등록증이 도소매유통으로 되어 있어서 세금을 몇 배로 내고 있거든요. 이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려면 음식으로 사업자를 내야 하는데 전주에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역 밥차들은 음식업 사업자로 등록되어 있거든요. 다른 지역에서 되는 일이 왜 정작 음식 도시 전주에서는 안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놀라운 일이군요. 밥차를 음식업 사업자로 못 내주는 이유가 뭘까요. "식당 시설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수도권 밥차 업체들은 별 문제 없이 설명하고 사업자 등록을 다 했거든요. 그동안 여러 번 시도 했는데, 세무서와 구청이 원론적 입장만 고수하고 있어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잘 해결되어야 할 일이군요. 전주밥차가 서울에 주소지를 둔다면 앞뒤가 맞지 않죠. 이 지역의 한계 같습니다."이번에 다시 길을 찾아보고 안 되면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어차피 서울에 식당이 생기는 것이니 옮길 수 있는 길도 있구요."-화제를 돌려보죠.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일이 좋아서 밥차사업도 착안했는데, 영화제작의 꿈은 버렸습니까. "포기하지 못할 꿈이죠. 현장을 못 떠나는 이유 중에는 그 꿈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나 광고 드라마 공연 현장에 가면 괜히 신이 나요. 저도 제작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거든요."-영화나 연극을 왜 그렇게 하고 싶으셨습니까. "광대의 특권 때문이었을 겁니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통로로 영화와 연극을 생각했어요.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을 담아내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희곡도 써봤고, 기획사를 하면서 그 꿈을 실현하고 싶었지만 현실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그래도 영화현장에서 밥을 제공하고 있으니 한국영화에 기여하는 힘이 큽니다. 전주밥차의 밥심으로 만들어지는 한국영화가 많잖아요.(웃음)"2002년부터 함께 했던 영화들이 많이 있죠. 최근에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참여했어요. 그런 현장에서 일할 때면 영화제작의 꿈이 더 가까이 오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꼭 돌아가고 싶습니다."-전북일원에서 제작되는 영화현장은 거의 전주밥차의 몫이었겠군요. "거짓말 같겠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전주시 지원을 받으며 제작되는 영화현장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외레 다른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에는 끊임없이 불려 다니는데, 제가 노력을 해도 우리 지역에서 제작하는 영화현장의 문턱이 너무 높더라고요. 지금은 포기했습니다. 일도 밀리고요."-식객촌 식당 개업 준비로 하반기는 바쁘실 것 같습니다. 사회적 기업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인가요. "제가 얻은 밥차운영의 노하우를 조금은 어려운 분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밥차라는 것이 자기 노력만 있으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밥차 시스템과 운영의 노하우만 익히면 삶이 팍팍한 분들이 일어서는데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데 에도 좋은 통로가 되지요. 기회가 되면 그런 일에 기여하고 싶습니다."-밥차시장이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동안 대기업들의 포식(?) 대상이 안되었던 것이 신기합니다.(웃음)"그럴 리 있겠습니까. 당연히 했었죠. 알만한 대기업 식품관련회사가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밥차의 특성상 자본이 뛰어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아무리 자본이 많아 투자를 한다해도 규칙적이지 않는 현장의 특성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거든요. 결국 사람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요."홍보물 하나도 붙이지 않은 작은 트럭 앞부분에 '촬영'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는 그의 밥차가 눈에 들어왔다. 전주밥차 다운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고객들에게 드릴 수 있는 예우예요. 일종의 동질감 같은 것이죠. 근사한 디자인으로 차 외관을 꾸미면 외식업체의 식당차로서는 알려지겠죠. 그러나 저는 어떤 현장에서든 그 현장의 스태프란 자세로 일하고 싶거든요." 개조한 차의 주방쪽 문을 올리니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대박을 기원합니다.'모두 함께 즐거워질 수 밖에 없는 풍경이 아닌가.

  • 기획
  • 김은정
  • 2013.06.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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