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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52.2% 압도적무당층도 30% 기록

올 411총선에서도 민주당의 강세가 이어질까. 최근 통합작업을 마무리한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에 도민들의 지지는 여전했다. 전북일보가 411총선을 앞두고 정당지지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도민의 52.2%는 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조사됐다. 한나라당은 8.3%,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등이 신설 합당한 통합진보당은 6.4%로 나타났다. 진보신당은 1.6%, 자유선진당은 1.4%였다. 하지만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은 30.1%로 상당히 높았다.민주당은 모든 지역에서 4050%대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고창부안이 59.1%로 가장 높았으며, 진안무주장수임실(55.6%), 전주 완산갑(55.4%), 정읍(55%), 김제완주(52.5%), 남원순창(52.4%), 익산갑(50.8%), 군산(50.6%)이 뒤를 이었다. 50% 이하는 전주 완산을(48%)과 전주 덕진(47.5%), 익산을(47.3%)이었다.한나라당은 전주 완산을에서 11.3%로 유일하게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6~9%대의 한 자릿수에 머물렀으며, 고창부안이 6.3%로 가장 낮았다.통합진보당은 전주 완산을(10.3%)과 전주 덕진(10.4%) 등 2곳에서 10%대의 지지를 받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3~8%대의 지지를 얻었다. 진보신당은 전주 덕진에서 3.4%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고, 나머지 지역은 0.6~2.1%로 지지율이 낮았다. 자유선진당은 모든 지역에서 2% 이하의 지지율을 기록했다.무당층은 익산갑(33.6%)과 익산을(33.1%), 남원순창(33.1%), 정읍(31.6%), 군산(30.8%) 등 5곳에서 30%가 넘었다. 연령대별로는 30대(33.4%)가 가장 많았으며, 19세20대는 31%, 40대 29.7%, 50대 30.2%, 60대 이상은 27.8%였다.

  • 기획
  • 김준호
  • 2012.01.02 23:02

"인권·안전 수호 임무 충실"

임진년(壬辰年) 희망찬 새해를 맞아 도민 여러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전북경찰은 지난 한 해 동안「현장중심 도민만족치안」을 치안목표로 '고객만족 모니터센터' 신설, 농축산물 절도 등 민생침해범죄 강력단속으로 체감치안을 확보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그 결과 대과없이 비교적 평온한 전북치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아울러 144일 동안의 장기간 지속된 버스파업 또한, 원만히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저희 전북경찰은 이에 안주하지 않고 경찰에 대한 국민의 무한한 신뢰와 애정만이 합리적인 수사권 조정 등 경찰숙원 해결의 근본열쇠임을 깨달았습니다.이에 나날이 변화하는 치안환경속에서 인권과 안전의 수호자로서 경찰 본연의 임무에 더욱 충실할 것을 도민 여러분께 다짐드리고자 합니다.먼저, 범죄와 사고로부터 서민생활의 안전을 확보하겠습니다. 민생치안의 '핵'이라 할 수 있는 강·절도 특히, 농축산물 절도범죄를 강력단속하고, 아동·여성 성폭력, 노인상대 전화금융사기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겠습니다.다음으로, 교통사망사고 예방 등 선진 교통질서를 확립해 나가겠습니다.지난해 전북은 교통사망사고 감소율이 전국 상위권에 해당합니다.그러나, 인구 10만명당 도내 교통사고사망자는 18.4명으로 전국평균 10명에 비해 84%가 많아 아직도 갈 길이 먼 실정으로서 교통사고로부터 안전한 전북을 만들겠습니다.

  • 기획
  • 기타
  • 2012.01.02 23:02

"불법 선거운동 엄단할 것"

안녕하십니까, 전주지방검찰청 검사장 임권수입니다. 60년만에 돌아온다는 흑룡의 해인 2012년 임진년을 맞이하여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흑룡처럼 도민 여러분 모두 뜻하시는 소원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작년 8월 전주지검 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권의 행사로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법질서를 확립하며, 지역주민을 배려하는 따뜻하고 친근한 검찰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저희 전주지검은 전일상호저축은행 비리 사건 등 부정부패 사건을 엄정처리하고, 전주시내버스 파업 사건 등을 일관된 기준으로 처리하여 법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전북이 더욱 밝고 희망찬 사회로 자리잡고, 건전한 지역 경제가 확립될 수 있도록 검찰권을 행사해 왔습니다. 도민 여러분! 임진년 새해에도 저희 전주지검은 도민들이 안심하고 희망차게 살아가실 수 있도록 검찰 본연의 업무인 부정부패 척결 및 법질서 확립을 위해 더욱 매진하려고 합니다. 특히, 다가오는 4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총선거도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라는 성격 등으로 인하여 선거 분위기가 과열되고, 혼탁한 양상을 띨 가능성이 높습니다.이에 저희 전주지검은 공명선거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철저히 해나가겠습니다. 불법 선거운동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신속한 수사를 통해 신분, 지위, 당선 여부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처벌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

  • 기획
  • 기타
  • 2012.01.02 23:02

"공정한 재판·도민과 소통"

존경하는 전북도민 여러분, 2012년 임진년(壬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소원 성취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임진년은 흑룡(黑龍)의 해입니다. 물속에 있던 잠룡(潛龍)이 하늘로 올라가 비룡(飛龍)이 되듯이 여러분이 품은 뜻을 마음껏 펼치시기를 바랍니다.용(龍)은 변화(變化)를 주관합니다. 우리와 우리 가족, 나아가 우리 전북과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람 있고 희망찬 모습으로 변화되었으면 합니다.저희 법원은 그 동안 국민과의 소통을 통하여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법정에서나 법정 밖에서나 꾸준히 노력하여 왔습니다.올해에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법정에서 당사자의 주장을 충분히 들어 공정하고 따뜻한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하겠습니다.또한, 전자소송과 국민참여재판 제도의 충실화에 힘쓰도록 하겠습니다.또 법정 밖에서도 민원인들이 보다 편리하게 법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민원업무를 개선하는데 힘쓰겠습니다.또, 법원견학이나 찾아가는 법률문화교실 등을 통하여 여러분과의 소통의 장을 넓혀가겠습니다.국민들의 가장 낮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법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이러한 노력들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민 여러분께서도 아낌없는 이해와 협조를 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존경하고 사랑하는 도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기획
  • 이강모
  • 2012.01.02 23:02

"가고 싶은 학교 만들기"

존경하는 도민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교육가족 여러분!201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전북교육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새해는 어느 계절보다 차갑고 맑은 한 겨울 복판을 뚫고 솟아오르기에 우리의 정신을 더욱 새롭게 일깨우는 것 같습니다. 전라북도교육청에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정책추진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중·기 발전계획 등 전북교육이 나아갈 이정표와 한 단계 도약할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작년 3월에 출범한 혁신학교가 교육주체들의 자발성과 지역성을 바탕으로 학교 고유의 빛깔과 특성을 조금씩 발현하게 됨을 매우 뜻 깊고 기쁘게 생각합니다.혁신학교는 새해에 30개교의 추가 운영으로 가고 싶은 학교의 면모를 더욱 추진력 있게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2012년에는 전북교육이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도민여러분의 아낌없는 지혜와 신뢰의 힘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교육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입니다. 전라북도교육청은 새해를 맞아 새로운 도전과 희망으로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도민·사랑하는 교육가족 여러분! 새해에는 용이 솟구쳐 오르듯, 여러분의 삶이 행복하고 즐거운 일로 약동하시길 기원합니다.

  • 기획
  • 구대식
  • 2012.01.02 23:02

"생산적 의정활동 최우선"

희망찬 '임진년(壬辰年)'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새해에는 도민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지방의회 출범 20년을 맞은 지난해 전북도의회는'성년'에 걸맞는 성숙된 지방의회로 한 단계 더 도약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저희 전북도의회는 지역현안 관련 공청회, 시민사회와 함께하는 예산심의, 의회연구모임 확대 등 지방의회 문을 주민을 향해 활짝 열어 놓고 열린 의정을 실천했습니다. 주민의 입장에서 집행부의 잘 잘못을 지적하고, 잘못된 행정관행을 뜯어고치겠습니다.또한, 행정개혁의 견인차 역할을 자임한 것도 도민의 기대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일이었습니다.사회가 다변화 됨에 따라 지방의회에 거는 기대와 역할도 갈수록 커져갑니다.따라서 새해에도 바람직한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정책의회, 도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생산적인 도의회로 거듭나도록 더욱 노력할 것입니다.2012년 임진년은 60년만에 한번 돌아온다는 흑룡띠 해입니다.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용기와 비상, 희망을 상징하는 영적인 동물로 인식돼 있습니다. 용이 승천해 활개를 치듯이 우리 전라북도가 희망찬 미래를 향해 힘찬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도의회가 앞장서겠습니다.도민 여러분께서도 더 큰 관심과 사랑으로 도의회를 지켜봐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 기획
  • 김준호
  • 2012.01.02 23:02

"도민 삶의 질 향상에 역점"

도민 여러분! 임진년 용의 해, 새해 인사 올립니다. 저는 2012년 한해, '삶의 질'을 도정의 중심으로 두고자 합니다. 서민들이 문화와 스포츠를 마음껏 즐길 수 있게 제도·시설을 정비하고, 좋은 일자리와 질 높은 교육환경을 만드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친환경 무상급식과 12세 이하 무상접종도 실시하겠습니다. 또한 새해에도 일자리·민생·새만금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전북의 10대 성장산업을 더욱 발전시켜서 일자리와 연계시키고, 기업유치를 통해 좋은 일자리도 만들겠습니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 소상공인과 골목상권을 돕는 정책, 물가안정 등 민생안정 정책은 더 열심히, 더 강하게 하겠습니다. FTA 대책도 절실합니다. 지역농업을 친환경으로 바꾸고 유통구조를 강화해서 전북만의 성공모델을 만들겠습니다. 새만금 사업도 재원확보와 추진주체, 그리고 민간참여를 유도해서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겠습니다. 도민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은 '함께하는 힘'입니다.함께하는 도정을 위해 더 많은 도민들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이를 통해 새로운 생각과 혁신적 마인드를 가진 활동가들이 도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겠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손을 맞잡아야 하는 순간이며 우선 저 자신이 가장 먼저 듣고 또 듣겠습니다. 그리고 변하고 또 변하겠습니다.

  • 기획
  • 김종표
  • 2012.01.02 23:02

도민 76.5% "대대적 물갈이 필요"

도민 10명중 7명은 오는 4월 11일 실시되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인물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북일보가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뷰에 의뢰해 지난 12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에 걸쳐 도내 거주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8804명(선거구별 각 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이 같이 나타났다.'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6.5%가 '능력있고 참신한 정치신인이 출마할 경우 인물교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면 '큰 정치인으로 키우기 위해 경륜을 가진 정치인이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은 17%로, '경륜보다는 인물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4.5배나 많았다.선거구별로도 모든 선거구에서 '인물교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게 나타났다. 교체의견이 가장 높은 지역은 전주 완산갑으로 81.6%에 달했다. 뒤를 이어 완산을(80.3%), 익산을(80%), 군산(79.2%) 순이었다. 반면'경륜있는 정치인이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은 정읍(26%)과 전주 덕진(23%) 등 2개 지역만 20%대를 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모두 10%대에 머물렀다.연령층별로는 40대에서 경륜 14.2%, 교체 81.1%로 교체의견이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19세·20대(경륜 15.9%, 교체 79%), 30대(경륜 16.7%, 교체 77.8%), 50대(경륜 16%, 교체 78.7%), 60대(경륜 20.5%, 교체 69.7%) 등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지정당별 응답결과에서도'통합진보당, 진보신당'지지층 및 무당층의 교체의견은 80% 이상이었으며,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경륜 21.0%, 교체 72.9%'로 교체의견이 51.9%p나 높게 나타났다.이와함께 도민들은 이번 총선에서'일자리창출과 청년실업 해소'(26.4%)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정당지지도에서는 민주통합당이 52.2%의 높은 지지를 받았으며, 무당층은 30.1%로 높게 나타났다.전북도 및 14개 시·군 단체장의 직무활동은 긍정적으로 평가됐다.이번 조사는 임의전화걸기방식으로 진행됐으며,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1.04%p였다. 선거구별(각 800명) 조사의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46%p였다.

  • 기획
  • 김준호
  • 2012.01.02 23:02

소설 당선작 - 어느 시대의 연애

9876호 버스의 메모리칩을 컴퓨터 USB포트에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9시 25분 녹화부터 슬로우 화면으로 보기 시작했다. 29분 30초, 버스가 흔들렸다. 접촉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 장면 파일을 총무부 김 차장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메일을 보냈다고 따로 연락하지 않고 구석에 달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총무부에는 선명운수 모든 사무실에 설치된 CCTV 녹화 모니터가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오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짓, 전화 통화 내용,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앞에서 묵직해진 성기 따위가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선명운수의 칠백 여대 버스 앞문과 뒷문 위에는 감시카메라가 달려있다. 누가 지갑을 훔치는지, 슬쩍 여자 엉덩이를 만지는지 또는 급정거 때문에 다쳤다는 승객의 항의가 진짜인지 녹화 화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메모리칩은 버스마다 두 개씩 있다. 수위아저씨는 버스 운행이 종료되면 메모리칩을 빼고, 다른 칩을 꽂아놓는다. 녹화된 칩은 번호대로 정리한 후 영상자료실로 보내준다. 나는 하루가 지난 녹화 장면을 보는 것이다.칩이 고장 나지 않고 녹화가 잘되는지 점검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메모리칩 리더기에 칩을 번호대로 스무 개를 꽂고 2배속 버튼을 눌렀다.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작은 모니터 스무 개가 동시에 켜졌다. 층층이 쌓여 있는 모니터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닮았다. 모니터를 훑어보며 캐비닛 문을 열고 유니폼을 꺼냈다. 나를 지켜보는 카메라가 신경이 쓰여 검은색 테이프로 렌즈를 막고 싶다. 나는 후다닥 청바지를 벗고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며칠 동안 한 통의 전화도 없이 시계 역할만 충실히 하는 전화기였다. 배터리가 없다고, 충전을 해달라는 간절한 신호였다. 사람들에게 휴대전화는 소통을 의미하지만 내게는 단절을 말하는 도구였다. 하루 종일 곁에 두어도 전화나 문자는 오지 않았다. 가끔 대출 상담이나 성인용품을 판다는 스팸문자가 전부였다. 휴대전화도 표정이 있다면 지금쯤 나를 측은하게 보고 있을 것이다. 전화기의 전원마저 꺼져 나는 이 세상과 불통 중이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지금 누군가 나를 애타게 찾고 있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연락이 안 된다는 핑계가 생겼다.영상자료실에서 일을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다. "전문대학도 나왔다며? 서른 살에 팔십 만원 받아서 살 수 있어? 결혼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지. 대형면허 따서 버스나 몰아." 회사 사람들이 흉을 볼 때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없이 웃었다. 나는 이 일이 좋다. 박봉이지만 윗사람이 없어서 편했고, 대학에서 전기를 공부해 카메라나 녹화기가 고장 나면 쉽게 고칠 수 있었다.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버스에 탄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군가를 정해 매일 지켜본다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 사람의 이름부터, 직업, 어떤 성격인지 따위를 상상하는 것은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커피믹스 두 개를 넣은, 진한 커피를 마시며 화면을 보았다. 6742호 버스가 노량진역 앞을 지나고 있었다.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노량진의 풍경이 보기 싫어 4배속 버튼을 눌러 빨리 감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손에 보온병과 방석을 들고 중앙고시학원 앞을 지나가는 수험생들. 잔뜩 움츠린 어깨를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입춘 무렵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나는 노량진 고시촌을 떠났다. 오 년만의 탈출이었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처음 준비하는 수험생을 현역, 그 뒤부터는 재수생, 삼수생, '장수생'이라고 부른다. 나는 1차 시험에 몇 번 붙었을 뿐 여전히 장수생이었고, 노량진에서 불로장생할 운명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이백 명이 듣는 강의에 일 분만 늦어도 맨 뒤에서 수업을 들어야 했고, 졸음이 몰려오면 각성제 성분이 들어있는 피로회복제를 보약처럼 마셨다. 공부를 마치고 고시원에 돌아가면 어둠이 기다릴 뿐이었다. 삼만 원을 아끼려고 창문이 없는, 관(棺) 같은 방에서 오 년을 머물렀다. 비가 오는지, 눈이 내리는지 알 수 없고 아침이 밝았는지조차 시계를 봐야 알 수 있는 조붓한 곳에서 나는 햇빛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고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공부 감옥이었다. 그 동안 친구들의 결혼 소식을 무시했더니 하나둘 연락이 끊겨 외톨이가 되었고 그렇게 서른 살을 맞이했다. 2년 안에 합격을 자신하며 공부를 시작했지만 어느덧 나는 패배자가 되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렸고, 공무원 시험에 청춘을 바치도록 강요하는 세상을 혐오했다. 무엇보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열패감이 무서웠다. 새해가 되고 공무원 시험 모집 요강이 노량진 곳곳에 붙을 때 탈출을 결심했다. 고시촌에 하루만 더 있어도 미쳐 정신병원에 실려 갈 것 같았다. 손때 묻은 책과 낡은 이불, 유행이 한참 지난 청바지와 추리닝만이 장수(長壽)의 흔적이었다.집에 돌아갔지만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았다. 그래도 햇빛을 보며 일어나는 것이 처음에는 좋았는데 그것이 도리어 나를 괴롭혔다.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유폐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활기찬 월요일의 신선한 기운 대신 눈부신 태양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태양이 나를 무능하다고 질타했다. 나는 커튼을 치고 방에 덩그러니 앉았다. 고시원과 다를 게 없었다. 텔레비전을 켰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 광고를 하고 있었다. '지루하게 사는 건 젊음에 대한 죄'라고 외치며 새로 나온 차를 거침없이 운전하는 또래 모델을 보니 울컥해 텔레비전을 껐다. 문득 재수생일 때 헤어졌던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먼저 합격해 시청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대기업 회사원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쉬지 않고 두근거렸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피곤하고, 불쾌했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어 무작정 집을 나섰다.골목을 빠져나가 모퉁이를 돌 때였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얼굴에 복이 많아요." 검은색 청바지에 점퍼를 걸치고, 블랙 크로스백을 멘 사람들이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도를 아십니까'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 그들과 롯데리아에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내는 내게 콜라값을 내라고 했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버스카드와 천 원짜리 한 장밖에 없었다. 그들은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인사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결국 나는 혼자였다. 막막하게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데 북한산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느닷없이 산에 가고 싶어졌다. 산은 나를 다독여주고 내 마음을 헤아려 줄 거라 확신했다. 버스에 올라 뒤쪽 좌석에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대학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랐다. 빈자리에 사람들이 하나둘 앉았는데 내 옆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전염병 환자나 냄새나는 노숙자처럼 여겨져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능한 사람 곁에 있으면 무기력이 전염된다고 그들의 눈빛이 말했다. 사람들이 루저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시선을 붙잡은 것은 버스 창문에 붙은 구인 안내였다. '온종일 혼자서 녹화된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 구합니다. 35세 이하. 특별한 자격 없음.'EPIER. 그녀를 만날 시간이다. 902번 버스 1980호의 메모리칩을 컴퓨터에 꽂았다. 아침 7시 20분, 신림동 동사무소 정류장에 버스가 멈추었다.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902번 버스는 열 대가 있다. 1981호부터 차례대로 살펴보았지만 그녀는 없었다. 감기에 걸려 결근을 한 것일까. 마지막으로 1989호의 메모리칩을 꽂았다. 7시 50분, 그녀가 버스에 올랐다. 어제는 평소보다 삼십 분 늦게 집을 나선 모양이다. 그녀는 짧은 검은색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 그리고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었다. 그녀는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 7시 20분 무렵이면 어김없이 버스에 올라 A로터리 H백화점 앞에 내렸다. 월요일에는 버스를 타지 않는데 분명 백화점에서 일할 것이다. 그녀는 늘 'EPIER'라고 적힌, 작은 흰색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EPIER'는 고급 화장품 브랜드였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소매치기 때문이었다. 지난 주 902번 버스에서 지갑이 없어졌다는 신고가 다섯 건이나 들어왔다. 피해자였던 그녀가 선명운수에 직접 찾아왔다. 총무부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녀를 보았다. 김 차장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말하는, 부드럽고 힘이 있는 목소리가 좋았다. 무엇보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을 것 같은 환한 얼굴과 경쾌하게 웃는 모습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그녀는 복도에서 나를 만나자 생긋 웃으며 지나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튿날부터 소매치기를 잡기 위해 902번 버스를 꼼꼼하게 살피며 매일 화면으로 그녀를 만났다.화면을 빨리 감았다. 밤 아홉 시 삼십 분 무렵 H백화점 정류장을 살폈다. 그녀가 버스에 오르지 않았다. 1982호, 1981호의 메모리칩을 차례대로 꽂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보았지만 EPIER 가방을 든 사람은 없었다. 심장이 급하게 뛰었다. 나는 커피를 발칵발칵 들이켰다. 뜨거워서 혀를 데일 뻔 했다. 남자친구와 거리를 걸으며 데이트를 하고 있는 걸까. 1984호 메모리칩을 넣었다. 밤 9시 50분쯤 그녀가 버스에 허겁지겁 올라 버스카드를 단말기에 갖다 댔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큰소리로 울렸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지갑을 꺼냈고,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끄러운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녀가 쭈그리고 앉아 동전을 주울 때, 뒤에 있는 남자들이 치마 끝을 곁눈질했다. 그녀가 요금통에 천 원을 넣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고생하세요." 그녀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왜 늦었어요? 피곤하죠?" 나는 중얼거렸다.선명운수와 카메라 장비를 거래하는 도매상은 청계천에 있었다. 장비를 골라 주문하고 집으로 가려고 버스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라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이 좋은 날씨에 여자 친구 안 만나고 뭐해?" 버스 기사가 거울로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며칠 전 카메라를 고쳐주며 인사를 나눈 기사였다.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버스는 광화문을 지나 A로터리로 향했다. "다음 정류장은 H백화점입니다." 안내 방송을 듣는데 그녀가 떠올랐다. 내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내 상황을 보여주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여자는 그녀 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했다. 버스가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내렸다. 백화점을 보는데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이 떠올라 만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문이 닫힐 때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일곱 시였다. 떡볶이 포장마차에서 튀김과 떡볶이를 먹었다. 옷에 간장이 묻지 않게 신경을 썼다. 어묵 국물이 담긴 종이컵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 왔더니 피곤했다. 쉬지 않고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귀가 따가웠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지만 소개팅을 앞둔 듯 설레었다. 백화점 옆에 새로 생긴 영플렉스 쇼핑몰에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쇼핑을 다니는 또래 연인의 웃음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어떨까. 밖으로 나가려는데 모자판매대가 보였다.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챙이 넓은 카키색 모자를 집었다. 푹 눌러 써야 어울리는 모자라서 마음에 들었다. 아홉 시 삼십 분이었다. H백화점 창문을 보며 모자를 푹 눌러쓸 때 뒷문이 열렸고 직원들이 나왔다. 다들 비슷비슷해 그녀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한참 동안 지켜보자 EPIER 가방과 찰랑찰랑 윤이 나는 긴머리가 보였다. 그녀가 선하품을 하며 내 앞을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EPIER의 향기다.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릴 뻔 했다. 오랜만에 여자 친구를 본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장난을 쳤다. 그녀의 이름은 나미였다. 나미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쾌한 이야기를 하며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분위기 메이커였다. 더욱 호감이 생겼다. 입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미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는 척 딴청을 피웠다. 902번 버스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몰려갔다. 나미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연인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운전기사가 내 얼굴을 보았지만 모자를 쓰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다. 영상자료실에서 일한다고 하면 요금을 안 내도 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미는 피곤한지 자리에 앉았고 나도 옆에 따라 앉았다. 나미는 창문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그녀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싶었다. 신림동 동사무소 앞에 버스가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나미는 잠에 깊이 빠졌다. 나는 벨을 누르는 척하다가 살짝 그녀를 건들었다. 나미가 눈을 뜨며 창밖을 보더니 놀라 일어섰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자 그녀가 뒤따랐다. 우리는 나란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는 GS25 편의점에 들어가 물건을 골랐다. 나는 가게 앞 간의의자에 앉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CCTV에 찍히기 싫어서 모자의 챙을 넓게 폈다. 그녀는 생리대와 컵라면, 햇반을 샀다. 계산을 할 때 점원이 추첨권을 건네자 나미는 작성을 해 추첨함에 넣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꼭 당첨되면 좋겠어요. 아르바이트 힘들죠?" 담벼락 옆 골목으로 그녀가 걸어갔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안심을 하고 뒤를 밟았다. 방심하며 느긋하게 걷는데 멀리 남학생이 달려오자 가로등이 켜졌다. 가슴이 내려앉아 차 뒤에 숨었다. 나는 나미의 그림자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었고 나는 천천히, 살금살금 뒤쫓았다. 그녀가 왼쪽 골목으로 꺾었다. 놓치지 않으려고 속도를 냈다. 길 끝에 있는 낡은 빌라 안으로 그녀가 들어갔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녀가 계단을 걸어갈 때마다 센서등이 켜졌다. 3층 계단참에서 왼쪽 끝 방 앞까지 불이 이어졌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방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 바로 잠을 자는 것 같았다. 나는 골목을 나오며 편의점에 들어가 커피를 사 마셨다. 그녀와 커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을 하자 뿌듯했다. 계산을 할 때 아르바이트생이 추첨권을 주었다. 추첨권에는 주소와 전화번호를 쓰도록 돼 있었다. 대충 적어 추첨함에 넣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인사를 했다. 새로 산 장비를 들고 차고지로 향했다. 추석이 지났지만 낮에는 여전히 후텁지근했다. 넓은 차고지 한복판에 버스 열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 버스에 들어가자 화학성분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고 숨이 탁 막혔다. 아직도 새차증후군에 적응이 안 됐다. 버스에 시동을 켜면서 창문을 열었다.드릴로 앞문 위에 구멍을 뚫고 센서를 달았다. 문이 열리고 승객이 버스에 오르면 센서가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운전석 위에 카메라를 달았다. 녹화기는 메모리칩을 쉽게 꽂고 뺄 수 있는 곳에 설치해야 한다. 바닥에 달면 비 오는 날 물이 들어가 금방 고장이 난다. 버스 천장에 녹화기를 단단하게 달았다. 대충 달면 승객 머리 위에 떨어질 수 있었다. 뒷문에도 카메라와 센서를 달았다.설치가 끝났다. 나는 밖에 나가 오 분 동안 서 있다가 앞문으로 버스에 올랐다. 그러고 나서 몇 분쯤 서성거리다가 뒷문으로 내렸다. 녹화 테스트를 한 것이다. 녹화기의 메모리칩을 빼서 노트북에 연결을 시켰다. 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내 모습이 모니터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선명운수에서 일하기 전까지 버스에 카메라가 달렸다는 것을 몰랐다. 타인 앞에서는 짐짓 멋지게 행동할 수 있지만 구석에 숨겨진 카메라 앞에서는 본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문득 나미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그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퇴근을 하고 신림동으로 향했다. 정류장 앞 공중전화로 H백화점에 전화를 했다. 몇 초 후 EPIER 매장으로 연결이 되었다.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여덟 시 삼십 분까지 영업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와의 첫 통화였다. 나는 마음을 야무지게 먹고 가방을 챙겼다. 모자를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제의 기억을 되짚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골목길이 많아 한 번 길을 잃었지만 어렵지 않게 빌라를 찾았다. 빌라에 들어가 천장을 살폈다. CCTV는 없었다. 101호 문에 교회 홍보 전단지가 붙어있었는데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계단참을 지날 때마다 나를 경계하듯 불이 켜졌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오는지 살폈다. 어제 불이 들어온 방은 301호였다. 문에 피자집, 치킨집 전단지가 어지럽게 붙었다. 앞에 쓰레기봉투를 대충 살펴보니 맨 위에 컵라면 용기가 있었고 그 밑에 휴지로 싼 생리대도 보였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혹시 문이 열리면 전도하러 왔다고 말하려고 교회 전단지를 꺼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먼저 살구색 밀착장갑을 끼고 주머니에서 만능키를 꺼내 도어 열쇠 구멍에 넣고 천천히 돌렸다. 바로 철컥, 소리가 났다. 문은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힘없이 열렸다. 오래된 빌라, 특히 원룸은 잠금장치가 허술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놀이동산 귀신의 집에 온 것 마냥 어두컴컴하고 스산했다. 고시원 방문을 열 때와 같이 어둠이 나를 맞이했다. 손으로 벽을 만지며 스위치를 찾았다. 몇 번을 만지작거리다 스위치를 눌렀지만 불이 켜지지 않았다. 휴대전화 조명으로 집 안을 비추었다. 창문마다 두꺼운 검은색 커튼이 쳐 있어서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 옆 벽면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켜졌다. 스위치에는 뽀얀 먼지가 앉았고 누를 때 뻑뻑했다. 한 명이 살기에 적합한 원룸이었다. 그녀의 냄새를 맡으며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의 작은 창문에도 검은색 썬팅지가 붙어 동굴 같았다. 불을 켰다. 칫솔은 하나뿐이었고, 변기 둘레에 오줌이 끈적끈적하게 묻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다녀간 흔적은 없었다. 거울을 보려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거울이 사선으로 깨져 반쪽만 남았다. 몸이 으스스하고 오싹해졌다. 책상 귀퉁이에 있는 전화 요금청구서를 보았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책꽂이 맨 위에 대학 졸업 앨범이 있었다.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고, 전문대학 피부미용과를 졸업했다.여덟 시였다. 나미의 진짜 모습을 더 알고 싶었다. 가방에서 녹화 도구와 공구를 꺼냈다. 현관문 옆에 큰 신발장이 있었고 안에 전기단자함이 보였다. 드릴로 단자함에 녹화기를 달고 전선을 밖으로 꺼냈다. 드릴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워 신경이 쓰였다. 옆집 사람이 벽을 두드렸다. "곧 끝낼게요." 구시렁거리며 서둘렀다. 그때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칫거리다 공구를 가방에 넣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파 일찍 돌아온 걸까. 방금 전 나와 통화를 끝내고 백화점에서 바로 출발을 해도 도착할 시간이 아니었다. 아니면 시골에 사는 어머니가 올라왔을까. 두근거리는 마음 한 편에 짜릿함이 컸다. 빛이 없어 답답했다. 욕실 창문을 열기 위해 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뿐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에 힘을 줘서 세게 밀었더니 겨우 열렸다. 손끝이 빨갛게 변했다. 창문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잠시 뒤 벨이 울렸다. "식사 왔습니다." 그 한마디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변기 뚜껑을 열고 쭈그려 앉아 오줌을 쌌다. 오줌이 튀어 바닥이 끈적거리면 안 된다. 카메라는 커튼봉에 달았다. 녹화할 때 센서가 작동하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렌즈는 독수리의 눈동자를 닮았다. 테이프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끝을 자르려고 칼을 찾았다. 부엌 싱크대를 열었지만 없었다. 가위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도 문구용 가위나 칼이 없었다. 눈여겨보니 유리컵, 사기 그릇 따위는 하나도 없고 모두 스테인리스 그릇 뿐이었다. 가스레인지 옆에 있는 찌그러진 양은냄비가 처량하게 보였다. 5628호 버스가 새벽에 교통사고를 냈다. 사건 처리를 위해 경찰서에서 녹화 영상을 달라고 했다. 사고 순간의 화면이 저장이 안 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찰에서는 전체 화면을 요구했고 나는 화면을 복원하느라 청계천과 용산을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미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복원이 돼 며칠 만에 나미의 집에 갈 수 있었다. 토요일이었다. 공중전화로 나미에게 전화를 했다. 빗방울이 공중전화 부수 밑으로 들어와 바지 끝단이 축축했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차도 있었다. 오후가 아니라 저녁 같았다. 한참이 지났지만 나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백화점에 전화를 하자 EPIER 매장으로 연결을 해주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자 바로 전화를 끊었다. 안심하고 그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 친구의 집에 몰래 찾아가는 남자친구였다.문을 열고 301호에 들어가자 어둠이 나를 반겼다. 방안에 눅눅하고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화면으로 그녀를 만날 차례였다. 녹화기에서 메모리칩을 꺼내 노트북에 연결을 했다. 화면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고 가끔 휴대전화 불빛에 그녀가 보였지만 정전이 된 집안과 다를 게 없었다. 혹시나 하며 중간 부분을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집에 불을 켜지 않았다. 커튼 때문에 가로등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화면 정지 버튼을 누르려는데 그녀가 고함을 지르고 쌍욕을 했다. 놀란 나는 볼륨을 높이고 스피커 옆에 귀를 갖다 댔다. "미친 년, 쌍년 그러니까 너 년 쌍판이 그렇지. 그 얼굴에 그 화장품 바르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또라이. 그 시간이면 성형외과에 가서 얼굴이나 뜯어라. 정과장 개새끼야. 네가 과장이면 다냐? 미친 새끼들." 나미는 거친 목소리로 신들린 무당이 사설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외쳐댔다.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일까. 분명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욕하고, 혼자 듣고 있었다. 그녀 안에 다른 사람이 숨어 있었다. 이십 분 정도 그러다가 '잠 좀 잡시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중얼거리며 주문처럼 뭔가를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고시촌에 들어간 지 4년이 됐을 때였다. 그해 마지막 시험을 보고 난 직후였다. 까닭 없이 화가 났고, 수시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보다가 나도 몰래 욕을 중얼거리면 옆방에서 벽을 두드렸다. 나는 또 욕을 뱉으며 한강 둔치까지 뛰어갔다. 물론 달려가면서도 욕을 했고, 길가에 보이는 깡통을 걷어찼다. 멋진 차가 보이면 야구방망이로 찌그러트리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몇 시간 동안 욕을 하면 목이 마르고, 힘이 쭉 빠졌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내 안에 숨은 다른 나와 마주하다 멀리 동이 터올 때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면 허탈해 죽고 싶을 때가 많았다. 다행히 1차 시험에 합격해 공부를 하느라 그 증상이 없어졌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막막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다시 화면을 보았다. 녹화 시간을 보니 오늘 아침이었다. 휴대전화 불빛이 조금 보이고 그녀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침대에 누워 통화를 했다. 그녀는 어젯밤 일은 깡그리 잊고 다시 상냥하게 대화를 했다. "보일러가 고장 나서 찬물에 머리 감았잖아. 보일러 고칠 시간이 어디 있어? 월요일은 돼야지. 오만 원? 빌려줄 수 있어. 걱정 마." 그녀는 친절한 나미 씨로 돌아왔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 다시 구시렁거렸다. "미친 년, 지금까지 안 갚은 돈이 얼마야?" 그녀는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나는 냉장고 옆에 있는 보일러 전원을 눌렀다. 보일러는 점화되더니 바로 꺼지며 컨트롤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베란다 세탁기 옆에 보일러가 달려 있었다. 책상 의자를 가져다가 보일러 앞에 놓고 올라가는데 몸이 휘청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보니 의자 다리가 부러진 채 대충 테이프로 붙여 있었다. 창문에도 금이 가 실리콘으로 붙여놓았다. 나미가 화가 나면 어떻게 하는지 머릿속에 자세하게 그려졌다. 창문틀과 세탁기에 의지해 올라가 보일러 덮개를 열었다. 대학생 때 보일러 시공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을 더듬었다. 보일러 내부 연료 전원을 껐다고 다시 켰다. 가스 공급은 충분했다. 문제는 점화봉에 붙은 불이 쉽게 꺼지는 것이었다. 산소 공급이 안 될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보일러 밑 배기관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는 다시 보일러 전원을 누르자 가동이 되었다. 불붙는 소리가 경쾌했다. 잠시 뒤 방안에 온기가 돌았다.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고, 상쾌하게 일어나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그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의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베란다 구석에 쌓여있는 약봉지가 보였다. 맨 아래에 있는 것은 누렇게 변했고 지난주에 받아온 약도 있었다. 일주일치 약을 하나도 먹지 않고 그대로 버렸다. 약봉지 속에는 신경정신과에서 발급한 처방전도 들어 있었다. 무슨 약인지 궁금해 나는 처방전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빗방울이 굵어져 운동화 속에 물이 스며들었고 가을 점퍼를 입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침대에 누워 낮잠이나 자지 않고 뭐하고 있냐고 사람들은 나를 한심하게 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의 연애가 즐겁다. 정류장에서 가까운 약국은 휴일이라 문을 닫았다. 주말 당번 약국 안내문을 읽고 십 분을 걸었다. 우산을 써도 비에 흠뻑 젖었지만 상관없었다. 걸어가는 동안 약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약국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침을 하는 어린 아이부터 코를 킁킁거리는 할아버지까지 약을 사기 위해 기다렸다. 약사들은 환자의 증상을 듣고 부산스레 약을 챙겼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하며 처방전을 내밀까.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말주변이 없는 것을 탓하며 고민을 했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환자들이 나가자 약국에는 혼자 남았다. 약사가 나를 불렀다. "이 약 어디가 아플 때 먹어요?" 처방전을 내밀었다. "함부로 환자의 증상을 말해줄 수 없는데. 어떤 관계죠?" "여동생이 며칠 전부터 잠을 못 자고, 이상해요. 그런데 이 약을 먹더라고요. 어떤 약인지만 말해주세요. 백화점에서 일을 하는데." 어눌하게 말하는 나를 잠깐 바라보던 약사는 우울증 치료제라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일하면 가면성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해요. 웃고 있지만 속에서는 분노하고 있죠. 화가 날 땐 숨기지 않고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울증에 좋은 음식 많이 먹고요." 약사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미는 지금도 웃으면서 속에서는 울고 있을 것이다. 나미에게 오빠 같은 남자친구가 돼 주고 싶었다. 나는 약국을 나와 A로터리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백화점 정문에서 심호흡을 크게 했다. 백화점이 위압적으로 나를 내려 보았지만 기죽지 않았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으로 들어갔다. EPIER 화장품 코너는 남성 구두 매장 옆에 있었다. 그녀는 아줌마 손등에 화장품을 발라주고 있었다. 여자는 손등을 코에 대고 향기를 맡더니, 더 구경하고 오겠다고 말하며 옆 매장으로 옮겼다. 나미는 허리를 굽히고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지금 그녀는 화를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화를 터트려주고 싶었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 앞에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세일을 맞이해 남성 신상품도 많이 들어왔어요." 나는 화장품을 보는 척 하며 그녀의 눈동자를 살폈다. 웃고 있지만 공허했다. 칙칙한 피부를 밝게 하는 화장품을 추천해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화이트닝 제품이라며 디톡스 화이트 옴므 세트를 꺼냈다. 가격이 십오만 원이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더니 샘플을 발라주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향기 한 번 맡아보세요." 화장품 냄새보다 그녀의 향기가 더 좋았다.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손님이 아니라 직원이었다. 가슴에 붙은 명찰에 정과장이라고 적혔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면서 어깨동무를 했다. 그녀가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설을 참고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계산할게요." 나는 아버지의 카드를 내밀었다. 정과장이 "즐거운 쇼핑 하세요." 라고 말하며 옆 매장으로 옮겼다. 나는 그의 등을 노려보았다. "보일러 시공을 하느라 얼굴이 많이 탔어요." 나미에게 말했다. "보일러 시공 하세요? 제가 손님께만 선크림 하나 몰래 넣어드릴게요. 자외선 차단 지수가 놓아요. 여쭤 볼 게 있는데 저희 집 보일러가 갑자기 안 되는데 왜 그럴까요?" 그녀는 주변 눈치를 보며 보일러 상담을 했다. 처음으로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그럴 때가 있어요. 전원 공급이 잠깐 차단되곤 하거든요. 본체 전원 껐다가 다시 켜면 작동 될 거예요." 나미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씩 하며 웃었다. 웃음이 진심이길 간절히 바랐다. 화장품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며 스마트폰으로 가면성우울증에 좋은 음식을 검색했다. 의사들은 초콜릿과 바나나를 강력 추천했다. 세로토닉 성분이 있어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A로터리 선물 가게에서 여러 종류의 초콜릿을 사서 예쁘게 포장을 했다. 일요일이라 나는 안심하고 나미의 집에 갔다. 그녀는 지금 정신없이 손님을 만나며 억지로 웃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젯밤 어떻게 보냈을지 궁금해 얼른 녹화 장면을 보았다. 잠을 자기 직전 욕설을 내뱉는 것은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욕을 하다가 전화가 오자 반색을 하며 통화를 했다. "보일러 고장 나서 어떻게 고치나 걱정했어. 난 뭐든 안 되는 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일러가 제대로 작동되더라. 얼마나 기뻤는데." 나미가 경쾌하게 웃었다.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보았다. 밝은 웃음소리에 긴장이 풀렸다. 마침, 휴대전화가 울렸다. 택배회사에서 온 문자였다. 수취인이 없어서 물건을 집 앞에 놓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물건을 주문한 적이 없었고 몰래 선물을 보내줄 지인도 없었다. 잘못 온 문자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가방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카메라를 뜯고 전선을 정리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훔쳐보고 싶지 않았다. 그림자 연애는 이제 지겨웠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는데 초콜릿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집 앞에 두고 가면 누가 가져갈 수도 있고, 그녀가 발견한다면 뭔가를 의심할지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도로 가방에 넣고 301호를 빠져나왔다. 애써 준비한 선물이었지만 전달하지 못해 허탈했고 용기가 없는 나를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빌라 밖으로 나와 삼층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 발걸음이 무거웠다.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택배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명 내게 온 물건이었다. 발신자는 GS25 편의점이었다. 상자를 뜯었더니 지난번에 응모한 추첨권이 당첨되었다는 안내문이 들어있었다. 내용물은 올리브유 세트였다. 식용유를 식탁 위에 놓고 상자를 버리려고 택배 운송장을 뜯는데 문자가 왔다.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GS25 더욱 사랑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발신자는 1544-12' 라고 적혔다. "제가 더 감사하죠." 중얼거렸다. 나는 평생 당첨, 당선, 합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오 년 동안에 처음 당첨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같은 날 추첨권을 응모했던 나미는 선물을 받지 못했다. 오늘 301호에 온 택배는 없었다. 당첨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나는 GS25에서 보낸 문자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그러고는 상자에 붙은 운송장에 적힌 내 이름을 지우고 나미의 이름과 주소를 정확하게 적었다. 빌라 앞에서 301호를 올려다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쉬는 날이었지만 그녀는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것이다. 가방에서 아버지의 등산 조끼를 꺼내 걸치고 모자를 썼다. 오늘은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계단을 뛰어올라 301호 앞에 섰다. 쓸쓸하게 누워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고 마음이 심란했다. 벨을 눌렀지만 대꾸가 없었다. 301호 문 틈새에서 차가운 기운과 짙은 어둠이 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벨을 누르고는 '택배 왔습니다.' 크게 외쳤다. 복도를 타고 건물 전체로 퍼졌지만 정작 그녀는 조용했다. 나미가 나를 외면하는 것 같았다. 옆집에서 '사람 없나 봐요. 대신 맡아드릴게요.'라고 친절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꼭 싸인을 받아야 해서.' 나는 마지막으로 벨을 눌렀다. 한참 지나자 마지못해 "집 앞에 두고 가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싸인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기쁨을 숨기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할 것이다. 잠시 뒤, 문이 열렸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베란다 쪽에서 보일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복도 불빛이 눈부신지 눈을 찌푸렸다. 모자챙으로 얼굴을 가렸더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행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섭섭했다. "죄송합니다. 얼른 나와야 하는데. 싸인 어디에 하면 되죠?" 나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싸인 안 하셔도 되는데 제가 깜빡했어요. 나미 씨 맞으시죠? 여기 물건입니다." 그녀에게 상자를 건네며 뒤돌아섰다. 계단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창문에 비친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상자를 흔들어보더니 나를 불렀다. "저기요. 에피어 화장품 쓰세요?" 그녀에게서도 EPIER의 향기가 났다.

  • 기획
  • 이화정
  • 2012.01.02 23:02

"여운 남는 결말·섬세한 묘사 돋보여"

전반적으로 요즘 시대 현실을 반영하는 다문화 가정, 결손 가정. 장애아 등 소외계층을 다룬 생활동화가 많았다. 아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것도 눈길을 끌었다. 아쉬운 점은 판타지 동화나 현실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동화가 드물다는 점이었다. 또한, 기존 동화에서 흔히 다루어진 소재와 주제의 작품이 많은 것도 아쉬웠다. 최종심에서 검토한 작품은 양율의 '기분 좋은 운동회 ' 박순길의 '아빠는 다카에 갔다' 김소희의 '파출부 아빠' 김근혜의 '선물'이었다. '기분 좋은 운동회'는 장애를 가진 아이를 배려하는 따스한 이야기였으나 기존동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과 결말이 단점이었다. '아빠는 다카에 갔다'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를 다룬 동화로서 고향의 나라에 간 아빠에게 띄우는 편지글의 형식이 눈길을 끌었으나 외할아버지가 엄마와 아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작위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파출부 아빠'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뒤바꾼 설정이 기발하고 구성과 문장도 무난했다. 그러나 친구 아빠를 파출부로 오해하는 장면이나 파출부로 쓰게 되는 과정이 억지로 꾸며 만든 느낌이 드는 게 흠이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선물'은 단연 눈에 띄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빠를 생각하는 아이의 애틋한 마음이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동화다운 문장과 자연스러운 이야기 전개. 그리고 가슴 훈훈하면서도 따스한 감동의 여운을 남기는 결말과 섬세한 묘사가 돋보였다. 동화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는 좋은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게 되어 기쁘다. 꾸준히 정진하여 훌륭한 동화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 기획
  • 이화정
  • 2012.01.02 23:02

"이 기운 이어나가 좋은 작품 쓰겠다"

4학년 1반 교실 뒤에는 귀퉁이가 떨어진 나간 자그마한 책장이 앉은뱅이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책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책은 몇 권되지 않았습니다. 책은 아이들의 손길을 전혀 받지 못해 늙어갈 뿐이었습니다. 담임은 시력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맨 뒷자리에 앉는 것은 일종의 복권 당첨이었습니다. 소녀는 앉은뱅이 책장을 배경으로 선생님의 눈을 피해 책을 읽었습니다. 몰래한 책읽기는 소녀가 저지른 최초의 일탈이었습니다. 책 많은 집에서 사는 게 소원이 되었고 소설가가 되겠다며 순정소설을 써서 혼자 키득거렸습니다. 소녀는 작가를 꿈꾸며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후로 많은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 보다 돈을 좋아하게 되고, 순정 소설을 쓰는 것 보다 스케줄 짜는 일에 시간을 더 투자하면서 꿈은 저만큼 멀어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묻어 두었던 꿈단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동화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무도 읽어 주지 않을 것 같던 제 글에 생명을 넣어 준 박정희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따끔하면서도 애정 어린 도움을 준 행글행글(행복한 글읽기, 행복한 글쓰기) 글벗 전은희, 이순미, 조현순, 황희정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도와 준 남편과 금쪽 같은 아들 민석, 시부모님, 친정 식구들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기운 이대로 이어나가 더 좋은 작품을 쓰는 동화작가가 되겠습니다.

  • 기획
  • 김원용
  • 2012.01.02 23:02

동화 당선작 - 선물

"넌 무슨 선물 받고 싶어?""응? 나?"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날 보던 도연이가 손가락으로 주은이 팔을 쿡쿡 찔러요. 주은이는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차렸는지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어요. 기분은 나빴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에요. 괜히 거짓말을 할 뻔 했거든요. 친구들은 내가 작년까지 무료 급식을 받는 아이라는 걸 알고 있어요. 올해부터 모든 학생이 무료 급식을 받는데도 그 꼬리표는 여전해요. 그래서 나 같은 아이는 선물도 못 받을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방학 잘 보내."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면서 방학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해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등지고 걸었어요. 평소에는 방과 후 공부방으로 갔지만 오늘은 거기도 쉬어요. 내 옆을 지나가는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여행, 스키장 이야기를 하느라 잔뜩 신이 나 있어요.매서운 바람에 끌려 집에 도착했을 땐 대문이 덜컹거리며 춤을 췄어요. 난 문을 붙잡고 집안을 살폈어요. 밖에서 쓸려 들어온 낙엽이 부엌을 더 지저분하게 해 놓았어요. 하여튼 아빤 못 말려요. 문도 제대로 닫지 않고 나가다니. 그래도 며칠 동안 집에서 술만 드셨는데 오늘은 일거리가 생겼나 봐요. 가방을 내려놓고 밥상을 덮은 신문지를 들췄어요. 말라빠진 김치가 다에요. 기운이 더 쭉 빠져요. 그냥 이불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였어요."소정아!"옆집에 사는 민지 목소리예요."나랑 복지관 갈래? 오늘 맛있는 것도 주고 게임도 하고 선물도 준다는데."'선물?' 그곳은 평소에도 가난한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해 밥을 줄 때가 많아요. 오늘처럼 특별한 날은 선물까지 줘요. 하지만 난 한 번도 복지관에 간 적이 없어요. 눈칫밥은 학교만으로도 충분해요. 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불쌍하게 보는 눈빛도 싫고요. "혼자 가."혼자 가라는 말에 민지 입이 뾰족 나왔어요. 민지가 복지관에 왜 가려고 하는지 알아요. 네 살짜리 동생이 있는 민지는 급식으로 나온 젤리나 샌드위치도 먹지 않고 갖다 주는 언니예요. 지난 번 유라 생일 때는 동생 준다고 남은 통닭까지 싸 갔어요. "가자~아."발을 동동 구르며 애처롭게 날 바라보는 민지 눈빛에 내 마음이 흔들려요. 아무래도 눈 딱 감고 가줘야 할 것 같아요. 바람은 더 차가워졌어요. "선물이 뭘까? 혹시 지난번처럼 색연필이나 노트일까?"".""통장아줌마가 그러는데 엄청나게 돈 많은 부자가 복지관에 돈을 기부했대. 그럼 선물도 어마 어마할거야. 그치!""응!"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나도 어떤 선물을 줄지 살짝 기대 돼요. 복지관 입구에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트리가 있어요. 벽에는 색색의 꼬마전구들이 앞 다투어 반짝였어요. 추워서 빨개졌던 볼이 이상하게 화끈거렸어요.복지관 안은 갓 태어난 병아리들처럼 시끄러워요. 우린 자원봉사자들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어요. 내 건너편에 앉은 남자 아이는 탁자 위에 있는 과자를 몰래 주머니에 넣고 있어요.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어요.게임을 하고 마술쇼도 봤어요.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깜깜해져가요. 아빠가 집에 일찍 온다면 큰일이에요. 아빠와 나만 아는 장소에 있어야 할 열쇠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거든요. 마음이 급해졌어요. 그런데 선물 추첨은 계속 미루기만 해요. 우리를 위해 춤을 보여 준다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더 시간이 길어졌어요. "민지야, 나 먼저 갈게.""왜? 선물 받고 가야지.""아빠가 왔을지도 몰라."민지가 눈을 흘겨요. 쌓여 있는 선물상자들이 마음을 붙잡았지만 아빠 때문에 어쩌지 못해요. 민지도 더는 말리지 않아요. 덜덜 떨며 날 기다릴 아빠 생각에 집으로 한달음에 뛰어갔어요. 굳게 잠겨 있어야 할 현관문이 열려 있어요. 다행히 아빠한테도 열쇠가 있었나 봐요. 턱까지 차오른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태연한척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어요. 술 냄새와 발 냄새가 코를 찔러요."아휴."나도 모르게 한 숨이 나왔어요. "아빠, 아빠. 일어나봐.""어, 어. 우리 딸. 내 ─."아빠는 잠꼬대를 하며 팔을 쭉 뻗더니 다시 굼벵이처럼 몸을 웅크려요. 발냄새라도 해결해야 될 것 같아 양말을 벗겼어요. 그런데 오른발 엄지발톱이 퉁퉁 부은 채로 피딱지가 말라붙어 있어요. 어딘가에 부딪혀 멍까지 든 발톱은 보라색 매니큐어를 바른 것 같아요. 없는 소독약 대신 끓인 물을 수건에 묻혀 발을 닦았어요. 차갑던 아빠 발이 조금 따뜻해졌어요. 발가락에 굳은 피딱지도 말끔해졌어요. 그 자리에 친구한테 받은 알록달록한 반창고를 붙였어요."아빠, 좀 조심해. 나 없으면 어떻게 살 거야?"꼭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와요. 베개를 베어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지만 금방 걷어차고 말아요. 밥도 못 먹었는지 배가 홀쭉해요. 나도 불을 끄고 누웠어요. 쉽게 잠이 오지 않아요. 아빠 코고는 소리 때문인지 선물도 못 받고 뛰어 온 것 때문인지 모르겠어요. '민지는 어떤 선물을 받았을까?'민지가 원했던 선물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민지네도 우리 집과 사는 건 다를 게 없거든요. 하지만 민지에겐 엄마가 있어요.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준다면 타임머신이면 좋겠어요.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날로 돌아가서 일 나가는 엄마 치맛자락을 끝까지 놓지 않을 거예요. 뺑소니 교통사고로 엄마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아빠는 술을 많이 마셔요. 그 후로 아빠도 엄마처럼 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그 걱정에 아빠가 너무 늦을 땐 한밤중에 골목 입구까지 나가곤 했어요. 몸을 뒤척이는 아빠 때문에 자꾸 잠이 달아나요. 다시 아빠 다리를 가지런히 모아주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 주었어요. 창밖으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나타냈어요. 달은 가로등처럼 방을 밝혀요. 그 빛에 아빠 얼굴에 미소가 보여요. 나도 따라 웃어봤어요.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아빠 곁으로 몸을 바짝 붙였어요. 조금 전보다 훨씬 따듯해졌어요. 큼큼!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또각또각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도 들려요. 부엌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것이 보여요.엄마! 벌떡 일어나려는데 자꾸만 눈이 감겨요. 얼마나 잤을까요? 밝아진 쪽창이 아침이 온 걸 알렸어요. 둥글게 말고 잤던 내 몸이 쭉 펴졌고 그 위로 얇은 이불이 엄마 품 속처럼 포근하게 날 덮어 줬어요. 바닥에 온기도 가득해요. 아빠가 누웠던 자리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어요. 아빠 대신 둥근 밥상이 놓여 있어요. 흰 종이로 덮인 밥상에서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와 밥 냄새가 솔솔 풍겨요. 꿈속에서 맡은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뱃속이 요란스러워요. 이불을 걷어 내고 밥상 앞에 앉았어요. 상 위에 곱게 접은 쪽지가 놓여 있어요. '밥 맛있게 먹고 있어. 일하고 금방 올게! 아빠가'쪽지를 다시 곱게 접어 가슴에 품었어요. 아빠가 빨리 오면 좋겠어요. 오늘은 진짜 선물을 받은 메리 크리스마스거든요.

  • 기획
  • 김원용
  • 2012.01.02 23:02

4조 2000억 넘는 지불준비금 확보

새마을금고는 은행보다 14년 앞선 1983년부터 새마을금고법으로 예금자보호준비금을 설치 운영하면서 예금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구축하고 있다.새마을금고가 해산 등으로 회원의 예적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 새마을금고법에 따라 조성된 예금자보호준비금(6600억원)으로 예금자들에게 1인당 5000만원까지(원리금 포함) 예적금 및 공제금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외에도 새마을금고는 지불준비금제도라는 또 하나의 안전장치가 있다.일선 새마을금고에서 새마을금고중앙회에 상환준비금으로 예치한 4조 2000억원이 넘는 지불준비금을 확보하고 있어 어떠한 경우에도 예금자가 예적금을 찾을 수 있다.금융기관이 파산할 경우 1인당 5000만원까지 보호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시중은행과 동일하다.다만 보호하는 곳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일반 시중은행과 저축은행 등은 예금보험공사에서 예금자 보호를 한다.그러나 새마을금고는 각각 관련 법률에 따른 자체 기금에 의해 보호해준다.새마을금고 예금은 새마을금고법 제72조 등에 따라 비상시엔 국가 차입금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근거도 마련돼 있다.또한 새마을금고는 각각 영업점이 독립적인 금융기관이기 때문에 예금보호 한도도 영업점별로 각각 적용 받을 수 있다.실제 새마을금고는 그동안 3만 2000여개에 달하는 새마을금고를 오늘날 1454개로 자율적으로 구조 조정하는 과정에서 예적금을 돌려받지 못한 회원이 단 한 명도 없다.새마을금고가 지급하지 못한 1조 5000여억원의 예적금을 예금자보호준비금 등에서 중앙회가 대신해 고객들에게 지급한 바 있고, 특히 구조 조정시 자율합병과 건전자산에 대한 이웃 금고로의 예적금 이관을 통해 전액을 보장해주고 있는 것.특히 지난 10월초 새마을금고는 예금자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일부 언론의 오보와 김석동 금융위원장의 실언이 있었을 때 새마을금고중앙회는 혹시 있을지 모를 회원들의 자금 인출 요구에 대비해 4조5000억원의 현금을 확보, 전국 새마을금고 회원들에게 신뢰를 준 바 있다.이와 관련 전북지역 새마을금고는 오보로 인한 일시적인 어려움을 신속히 극복하면서 전년말 3조2249억원이던 자산을 11월말 현재 3조3668억원으로 늘리며 회원들의 신뢰를 재확인했다.

  • 기획
  • 강현규
  • 2011.12.29 23:02

순창중학교'고추장 밴드' "세계적인 K팝 아이돌 될래요"

근 한국 K팝의 열기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특히 국내 아이돌 가수들의 인기 수위는 상상을 초월 할 정도의 높은 주가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한국 음악에 대한 열기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돌 가수를 꿈꾸며 하루하루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워가는 순창의 아이돌이 있다.순창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임치현(보컬·기타), 고동혁(세컨드기타), 변찬웅(베이스), 제한규(드럼) 등 4명의 중학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노래와 연주를 함께하는 4인조로 구성된 보컬 밴드다.이들이 활동하는 밴드 이름은 순창을 전 세계적인 유명지역으로 알려지게 한 바로 고추장을 직접 표현한 '고추장 밴드'가 이들 아이돌 밴드의 이름이다.4명의 친구들이 중학교 1학년 당시 처음 만났고 그냥 밴드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밴드를 구성하게 됐다. 이들이 처음 밴드를 시작 할 당시 학교에는 마땅히 연습 할 공간하나가 없어 틈틈이 음악실에 모여 다른 학생들의 눈치를 보면서 연습을 해왔다. 이후 학교에서 밴드음악에 대한 이들의 꿈을 키워주기 위해 방과후 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전문 기악강사를 초빙해 지도함으로서 이들의 밴드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띄게 됐다.현재는 학교에서 이들이 다른 학생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연주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빈 창고를 개조해 방음시설을 갖춘 연습실을 마련해주기까지 했다.비록 이 연습실 공간이 넓고 냉난방이 완비된 공간은 아니지만 이들은 이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하며 밴드에 대한 열정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다.심지어 이들은 다른 학생들이 쉬고 있는 점심식사 시간에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연습실에 모여 연주 연습을 하는가 하면 휴일에는 아예 친구 집에 모여 시간 가는지도 모르고 연습에 열중이다.그래서인지 이들이 밴드를 시작한지가 불과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자만 연주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했다.지난 8월에는 공중파 방송인 KBS 세상사는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 이들이 연습하는 모습과 공연 장면이 소개되기도 했다.이들은 특히 지난 10월에는 전주 삼성문화회관에서 열린 '전라북도 청소년 락 페스티벌'에 참가해 도시지역의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또한 이들은 지난 16일 '순창 청소년 한마음 축제'에서는 성인밴드들의 실력을 능가 할 정도의 멋진 기량을 보이며 이날 축제 분위기를 한껏 뜨겁게 달궜다.20일 취재진이 학교를 찾아간 이날도 역시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져 추운 날씨 속에서도 '고추장 밴드'의 연주 연습은 계속되고 있었다.추위로 인해 밴드 4명 모두의 코끝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가에서는 입김이 피어오르는 것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흥겨움에 취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곳 방학인데 연습을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에 모두가 말을 맞추기나 한 듯 "친구 집에 모여서 계속 해야죠"라고 일제히 입을 모았다.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보컬을 맡고 있는 임치현 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치는 시간이 너무 즐겁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연습해 밴드에 대한 꿈을 끼워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드럼을 맡고 있는 제한규 학생은 "처음에는 그냥 친구들이 좋고 음악이 좋아서 밴드를 시작했다"며 "앞으로도 많은 경연에 참여해 기량을 보이고 싶다"고 말했다.또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는 변찬웅 학생은 "친형의 영향을 받아 처음 기타를 배웠다"며 "무대에 올라가 공연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세컨드 기타를 맡고 있는 고동혁 학생은 "전자기타를 처음 본 순간 너무 멋있어 보여 기타를 시작했다"며 "예전에는 부모님이 밴드 활동에 반대가 심했지만 지금은 이해해 주는 것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K팝 아이돌을 꿈꾸는 이들 '고추장 밴드'의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 질 것이며 지금은 한갓 시골학교의 초라한 밴드에 불구하지만 주위에서 관심을 갖고 성원하고 꿈을 키워준다면 미래의 K팝의 중심으로 다가서는 기량으로 발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임남근
  • 2011.12.28 23:02

"자기계발·소통의 장 마련 특기·적성·인성교육 도모"

"학교의 예산상의 어려움으로 현재 '고추장 밴드'가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밴드 활동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있어 더욱 발전 할 것으로 기대한다"순창중학교 '고추장 밴드'의 지도를 담당하고 있는 양미숙 교사는 "밴드 활동 등은 전북도 중학교 교육의 방향에서도 강조하듯이 소질 계발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통한 남을 배려하는 품성을 기르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양 교사는 특히 "밴드부 활동 등은 현재 우리학생들이 학습 능력 신장과 함께 자기계발의 시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친구들과 소통하며 어우러지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롤 모델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그는 또 "학교에서는 다양한 특기·적성 교육을 내실화해 개성과 창의성을 신장시키고 평생학습사회에 대응하는 소질과 적성을 기른다는 목표를 가지고 학교경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자신의 소신을 덧 붙였다.이와 함께 양 교사는 "무대위에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아이들의 '흥'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신명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같다"며 "중학교 때의 경험을 통해 세계적으로 환호 받는 락그룹 밴드가 되어 K-팝을 전 세계에 알 릴 그런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기획
  • 기타
  • 2011.12.28 23:02

신정일 대표는…어릴 적부터 책벌레..48평 아파트 책으로 빼곡

그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사람보다 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거실 3면이 책으로 가득했다. 서재는 물론이고 주방, 자녀들 방까지 48평 아파트가 온통 책으로 꽉 차 있었다. 1만 몇천권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66평 아파트에 사는 까닭을 3만권이 넘는 책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벌레였다. 정규 학력으로는 초등학교(중고는 검정고시) 다닌 게 전부였고 집안은 가난했다. 사업에 실패한 부친은 나중엔 술과 도박에 쪄들었고 모친은 옷장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느라 중소도시를 떠돌았다. 할머니 밑에서 성장한 그에게 책은 유일한 낙이었다. 외로움을 혼자 즐기는 법을 책을 통해 일찍부터 터득한 셈이다. 그는 "어린 날을 회상하면 온통 슬픔 뿐이지만 책을 읽을 때만은 행복했다."고 어느 책에선가 썼다. 그 시절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황금기,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자양분을 제공한 시기였다. 어릴 적 그의 별명은 '미리박사'였다. 교과서를 나눠주면 이틀만에 섭렵했다. 다른 아이들은 아는 게 많았던 그를 '미리박사'라고 불렀다. 월급을 타 본 것은 군대 있을 때 한 번뿐이다. 이등병 월급 690원, 병장 때 2400원을 받았다. 690원을 받으면 당시 200원 짜리 삼중당 문고 3권을 사고 90원은 라면 같은 걸 샀다. 군대를 제대한 뒤 제주도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삶이 힘들었을 때 제주항이 바라보이는 사라봉에서 몇 번이나 뛰어내릴 생각을 하기도 했다.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면서 민주화운동의 길을 걸었고 광주항쟁과 동학혁명, 우리의 대동사상에 관심을 갖고 정여립 모반사건의 진실을 추적해 책으로 출간했다. 한국의 10대강 도보답사를 기획, 금강에서 압록강까지 답사를 마쳤고 우리나라의 옛길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오른 산이 400여개에 이른다. 직업 한번 가져본 적이 없지만 그한테는 수많은 직업 형용사가 따라 붙는다. 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 독립저술가, 문화운동가, 향토사학자, 우리땅 걷기 전도사, 걷기 도사, 길 전문가 등등. 그는 왜 그토록 끝없이 걷는 걸까. 그의 삶의 화두는 길과 강, 책이었다. 세상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택한 방법은 책과 함께 느리게 우리나라의 산천을 걷는 일뿐이었다. 길 위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배웠다. 경험만큼 좋은 스승은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산천을 유람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인간은 경험한 것만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명제다. 그도 이젠 쉰일곱이다. 앞으로도 이 두가지를 빼놓고는 그의 여생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진안 백운면이 고향이다. 얼굴은 텁텁한 인상이라 두주불사형 막걸리 타입이지만 주량은 고작 소주 두잔이다. 부인 오현신 여사(51)와 2남1녀를 두었다. 84년 연애결혼했다. 둘째 아들은 한국전통문화고를 나와 한국교원대 미술교육과 4학년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천을 답사했고 졸업 후에는 우리나라의 옛길을 그림으로 표현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저서로 '신정일의 신 택리지' '느리게 걷는 사람' '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 '똑바로 살아라'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섬진강 따라 걷기' '풍류' '낙동강' '영산강'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금강' '섬진강'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가슴 설레는 걷기여행' '신정일의 암자 가는 길' '동해 바닷가 길을 가다' '우리 역사 속의 천재들' 등이 있다.

  • 기획
  • 기타
  • 2011.12.27 23:02

"산천을 걷는다는 건,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모임' 신정일(57) 대표. 마이너리티,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인생. 스승이 없이 따로 살아온 그는 '길'과 '책'에서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이고 책이었다. 유홍준이 문화유산 답사의 개척자라면 신정일 대표는 도보답사의 선구자다. 그는 길을 '찾고, 걷고, 잇고'의 '쓰리 고' 인생을 살고 있다.지난 5월 '신 택리지' 9권을 완간했다. 발품을 팔아 쓴 역작이다. 지금까지 그가 쓴 책이 59권에 이른다. 차도 없이 버스를 타거나 발길 닿는 대로 걸어다니면서 천착한 성과물이다. 그는 왜 산천을 떠도는 걸까. 그 많은 책을 저술한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전주시 진북동 그의 아파트에서 만났다. 말은 달변이고 내용은 현란했다.-날씨가 추워졌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강연, 행사도 있고 우리땅 걷기 모임 답사 등이 있어 여전히 바빠요."-문화사학자, 도보여행가, 우리땅걷기 전도사, 길 전문가 등 여러 표현이 따라 붙습니다. 어떤 게 마음에 드나요."김지하 시인은 '삼남 일대를 걸어다니는 민족민중 사상가'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강, 길의 철학자'로 부르더군요. 저는 문화사학자라는 말이 가장 좋아요. "-왜 걷는 겁니까. '걷기 철학' 같은 게 있다면."사르트르가 말하기를 '인간은 걸을 수 있을 만큼만 존재한다' 했는데 걷는다는 것은 삶의 근간이죠.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걷기를 통해 세상을 만나고 나를 만나기 때문에 걷는 거죠. 산천을 걷는다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아요."-맨 처음 걷기를 시작한 동기가 궁금합니다."화엄사에서 두달간 머물 때 처음 걷기를 시작했지요.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가출 끝에 출가했는데 스님이 '너는 절에서 지낼 놈이 아니다'며 내보냈습니다. 본격적으로 걷기를 시작한 것은 1985년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 역사문화 현장을 답사할 때부터였고요."-지금까지 걸으신 걸 다 합산하면 얼마나 될까요."아마 수십만 km는 될 겁니다. 낙동강 답사 때 하루 64km를 걸은 적이 있는데 하루에 걸은 거리로는 최장 거리지요."-자가용은 없나요. 운전하실 줄은."차는 없어요. 운전면허증은 1991년에 취득했는데 한번도 써먹지 못 했어요."-불편하지 않나요."강연이나 답사 때 여러권의 책을 갖고 버스에 오릅니다. 산책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산천도 구경할 수 있어 좋아요. 불편하지 않습니다."-'길 만들기' 사업을 맨 처음 전북도에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시작한 걸로 아는데요."변산 마실길을 제안해서 김완주 도지사랑 같이 걸었는데 그 때뿐이에요. 내변산을 한바퀴 도는 마실길(100km)은 1년이면 되는데 지금까지 안 돼 있어요. 제가 제안해서 2008년 만들어진 소백산자락 마실길(200km)은 문체부가 생태탐방로 1위로 선정했습니다."-걷기 열풍이 불면서 길을 만들고 새로난 길에 연중 사람이 몰립니다. 환경 훼손을 우려하는 지적도 있습니다만."능선이 아니기 때문에 훼손이 심각한 건 아닙니다. 다만 쓰레기 처리 같은 것은 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가져야겠죠. 외지인들이 찾아오면 소득과 관광효과도 있기 때문에 공익요원이나 별도 인력을 운영할 필요는 있습니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고요." -지난 5월 '신 택리지' 9권을 펴냈고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라는 책도 쓰셨습니다. 산하를 주유하면서 이중환, 김정호 선생과 교감했을 법 한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김정호는 후원자가 있었지만 이중환은 역모죄로 몰려 국문을 다섯 차례나 받았고 유배당해 떠돌았습니다. 고난과 절망을 딛고 큰 일을 해낸 뛰어난 분들입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요. 그 분들을 생각하면서 국토를 답사했고 새롭게 글로 남기기 위한 다짐을 하곤 했습니다."-'대한민국에서 살기좋은 곳 33' '꿈 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등 발품을 팔아 쓴 글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추천하신다면"봄에는 무주 부남에서 읍내 용포리까지의 금강길, 그리고 섬진강 길도 좋습니다. 전주에서는 건지산에서 전주천까지 이어지는 건지산길이 좋아요. 4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편백숲만 얘기하던데 단풍나무 숲이 너무 좋아요." -다작(多作)을 하시는데 지금까지 저술한 책은 몇권이나 됩니까."김지하 시인은 '글 쓰는 것도 때가 있다. 잘 써질 때가 있고, 아무리 쓰고 싶어도 쓰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글이 써질 때 막 써라'고 하셨는데 맞는 말 같아요. 쓰다 보니 쉰 아홉권이나 됐어요. "-가장 최근에 쓴 것은 어떤 책입니까."'가치 있게 나이 드는 연습'이란 책인데 이달에 나왔습니다. 독서, 걷기, 사색이 나에게 주는 즐거움이라는 부제가 붙은 에세이입니다. '허균과 형제들'이란 책은 이달 20일까지 원고를 넘기기로 했는데 잘 써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어요." -'한(恨)이 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한이 쌓여 있길래 이렇게 많은 글을 쓰시는 겁니까."자기 전공분야에 대해서는 누구나 한권 정도 책을 쓸 수 있고 출판기념회도 할 수 있어요. 두권째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지요. 하지만 세권 이상은 한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봐요. 나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취직 한 번 못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호기심이 많았고 시대정신을 잘 읽어낸 것도 글 쓰는 데 도움이 됐어요."-책이나 대화에서 세계적인 문호,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들의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인용하시는 능력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머리가 좋은 겁니까 아니면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 겁니까. "외톨이였던 어릴 적 책 읽는 게 유일한 행복이었어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때 설레는 마음으로 연애하듯 책을 읽었습니다. 아마 2~3만권은 읽었을 겁니다. 저자는 책에서 주안점을 두기 마련인데 그것을 꿰뚫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를 천재라고 하는 사람도 있던데 IQ 검사를 한 적도 없고 우등상 한 번 탄 적이 없어요."-매번 길을 떠나고 책을 내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산다는 것은 떠도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 것이라고 해요. 머무르면 안되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 '광풍'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주인공인 매월당 김시습이 떠돌아다니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매료됐어요. 지금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걸 보면 어린 날 처음으로 접한 책의 영향이 크다는 걸 느껴요."-답사나 글쓰기 말고 다른 취미는 없나요."가난했지만 취미는 고상했어요. 고전음악 듣기를 좋아합니다."-산천을 답사하는 전문가로서 우리나라 산천에 대한 관(觀)이나 느낌을 말한다면 어떤 것입니까.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데 모습을 갖추지 않으면 어떻게 정신이 나오겠습니까. 산천을 답사하다 보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껴요." -어려운 가정환경, 일천한 정규 학력, 가출과 출가, 자살유혹 등 불운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지금의 신정일을 있게 한 건 무엇일까요."고시를 준비했다면 잘 됐을 것이라고 농을 던지기도 하지만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글 쓰는 것만 고민해 왔지요. 흐트러지지 말자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며 살자고 끊임없이 다짐해 왔어요."-그동안 취직한 적이 없고 월급 타 본 적이 없는데 생활은 어떻게 해오신 겁니까. "강연이나 글쓰기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됐고 집사람이 교직에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지금은 명퇴했지만."-많은 책을 저술하셨는데 인세(印稅)도 상당하겠군요."많지는 않고 먹고 살 정도입니다. 직장인 수입 정도예요." -1981년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에 끌려간 적도 있던데 무슨 일 때문이었나요."전북대 앞에서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카페를 운영했을 때인데 운동권 학생들이 드나들었고 불온서적을 탐독했다는 이유를 들어 간첩단 사건으로 엮였어요. '김대중이 한테 돈을 얼마 받았느냐', '북한을 몇 번 갔다 왔느냐' 대라며 발가벗겨진 채 고문을 당했습니다."-이름이 당초 춘석(春錫)이었는데 '맵고 바르게 한 길을 가라'는 뜻으로 이름을 스스로 신정일(辛正一)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어느 스님이 '그 이름 걸머지고 사느라 힘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열여섯살 때 지어 후에 호적에 올렸는데 이름 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달리 살 방법도 없고.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해도 괜찮겠습니까. "내 인생은 아웃사이더예요."-과거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인생으로 평가되길 원하십니까."그러나요? 열심히 산 인생으로 기억되도록 노력하렵니다. '길의 날'을 제안해 성사됐고 길 축제도 만들었습니다. 길을 좋아했기 때문에 객사(客死)하면 더 없는 행복이지요."-작년 6월에 펴낸 '느리게 걷는 사람'은 열아홉살까지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후의 인생이야기가 또 재미있을 것 같은데 연작 계획은 없나요."그런 요청을 많이 듣습니다. 준비하고 있어요."-구상하고 있는 답사나 저술 계획이 있다면."내가 좋아했던 '김시습 평전'을 쓰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급적 감성을 일깨우는 책을 쓰고 싶어요. 부산 해운대에서 동해바닷길 1400km를 걸어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해파랑길'을 만들었는데 북한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생전에 밟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벅차 오르겠습니까."신정일 대표는 이 길을 조성해 줄 것을 문체부에 제안했고 문체부는 2010년 9월 이 길을 '해파랑길'로 선정해 발표했다. 신씨는 나아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을 지나 러시아 해변을 돈 뒤 스웨덴, 스페인,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까지 이어지는 세계 최장거리 도보 답사코스를 문체부에 제안했다. -산천 주유, 길 답사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생의 길은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것인데 공동체 마을을 만들 계획입니다. 살아 숨쉬는 새로운 문화, 민속촌이나 마을만들기와는 전혀 다른 새 패러다임의 공동체 문화를 구상하고 있어요. 제주도와 육지에 한 곳씩을 선정해 모든 문화체험을 원스톱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곧 발기인을 모집해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 기획
  • 기타
  • 2011.12.27 23:02

세상이 다 내 책이다

나는 일찍 자고 3시쯤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면 제일 먼저 신문을 본다. 나는 세 개의 종이신문을 본다. 지역신문 하나와 서울에서 나오는 신문 두 개를 본다. 우리 지역이슈나 각 지역 중점 사업과 지자체장들의 행동 범위를 체크한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두 개의 신문들을 사설까지 챙겨 읽는다. 칼럼이나 시론은 중요해서 거의 다 읽고 인터뷰 기사를 중요하게 챙겨 읽는다. 세 개의 신문을 다 읽고 나면 인터넷으로 들어가 중앙지들과 부산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검색해서 헤드라인 기사와 칼럼, 사설을 챙기고 인터뷰 기사와 정치면을 반드시 읽는다. 연예면도 챙기고, 모 신문에 연재되는 시를 찾아 읽는다. 그리고 인터넷 신문 중에서 두 개의 신문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한 시간이 넘게 지난다. 인터뷰 기사 중에서 나는 오래 전부터 안철수 윤여준 김종인씨의 인터뷰를 꼭 찾아 읽었다. 인터넷 신문을 찾아 읽고, 네이버에 들어가 오늘의 철학, 그림, 사진, 문학, 인물 등 연재되는 기사들을 읽는다. 이렇게 신문을 읽다 보면 두 시간은 족히 넘게 걸린다. 균형 감각이 있는 칼럼이나 인터뷰 기사들은 다운을 받아 시 한편과 함께 아들·딸에게 보낸다. 토요일이면 신문들의 섹션을 찾아 인터뷰 기사나 칼럼을 찾아 읽는다. 중국에 대한 기획기사나 인도에 대한 경제 기사들을 탐독한다. 교육에 대한 기획기사들도 꼭 챙긴다. 현실을 놓치면 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사람들은 헛소리를 하거나 헛짓을 한다. 시대정신은 시대속에서 태어난다. 현실에 대한 인식은 피와 살과 뼈대가 된다. 이렇게 신문과 함께 아침을 산 지가 몇 십 년이다. 나의 공부는 신문이다. 신문은 그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종합 분석 해놓은 살아 있는 지식의 보고다. 펄펄 살아 있는 신문 속의 현실은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과 같이 싱그럽다. 그게 쌓이면 보약이 된다. 큰 힘이 되어 현실에 충실하고 땅을 굳게 딛게 된다. 흔들리지 않은 현실에 대한 인식 위에 학문이든 정치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 폐쇄적이고, 독단적이고, 지역에 갇히게 된다. 우물 밖을 모르는 개구리가 된다. 그렇게 새벽을 보내다 보면 9시가 된다. 운동을 하고 강연을 간다. 강연일수는 학교 출근일과 거의 같다. 전국 곳곳의 지자체와 초중고, 대학, 도서관, 공무원들과 선생님들의 강연, 기업 강의를 간다. 그 곳들이 내 공부의 살벌한 현실이고 긴장된 현장이다. 세상이 다 내 책이다. 본지 편집위원

  • 기획
  • 이화정
  • 2011.12.26 23:02

국악계 '작은 거인' 익산국악원장 임 화 영 명창 "제자 양성 주력… 스승 은혜에 보답"

어르신들이 모이는 행사장이면 빠지지 않는 우리 소리와 어깨춤. 멋들어진 춤 실력이나 어려운 가사를 몰라도 들려오는 우리 소리에 손과 어깨를 리듬에 맞춰 흔들면 모두가 실력 있는 전통춤의 댄서가 된다. 특히 이런 모습이 자주 연출되는 익산지역에는 50년이 넘는 익산국악원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1953년 이리국악원으로 출범해 우여곡절을 거치며 익산국악원으로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곳에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시원한 목청의 우리 소리와 가야금, 북소리를 들을 수 있다. 꺼져가는 등불을 다시 환히 밝혀가고 있는 '작은 체구의 국악 거인' 익산국악원장 임화영 명창(50)을 만났다.-국악과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나요?△익산에서 태어나 군산으로 이사 간 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동네 공터와 천막을 치고 공연을 하는 유랑극단을 보게 된 때부터인 듯합니다. 당시 창극위주의 공연에서 장화홍련, 호동왕자, 사도세자 등을 선보였는데 사도세자가 갇혀있는 장면을 보며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당시가 생생합니다. 3년정도 저희 집에 머물던 소리꾼의 북소리와 장구소리도 국악과 연을 맺게 한 인연들이었던 것 같습니다.-임 명창은 초졸(초등학교 졸업)대학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어려서부터 국악에 웃고 울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지 못해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2남7녀 중 7째인 저는 언니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 더욱 어려워 진 가정형편에 중학교 진학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몇날며칠을 울다 지쳐 잠이 들며 부모님께 투정을 부렸고, 그렇게 아픈 상처가 마음속에 몽우리 졌습니다. 어린나이에 고무신공장에서, 가정부로, 가발공장으로, 남들의 학창시절을 저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20살에 친구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익산으로 이사와 시장통을 지나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인근의 최란수 국악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운명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명창 반열에 오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셨나요?△처음 최란수 국악원에 다니며 학원비가 없어 두 달 만에 그만뒀습니다. 그 후 온몸이 아파 병원을 연연하다가 다시 한 번 국악원에 가보라는 남편의 권유에 씻은 듯 나았습니다.이 후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고인이 되신 성운선 선생님을 만나게 됐고, 민요와 토막소리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성 선생님은 다시 이일주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고, 당시 가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결혼반지와 목걸이 팔찌 등 모은 것을 모두 팔아 91년 드디어 전주로 본격 공부를 하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늦깎이로 시작하면서 가진 모든 열정을 불태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공부했고, 익산국악원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공석이 된 익산국악원 판소리 선생이 되면서 공부하는 선생이 되기로 마음먹기도 했습니다.95년부터 심청가 완창과 97년 흥부가 완창발표를 하면서 주부가 아닌 소리꾼으로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97년 적벽가 완창,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이수자로 지정받았지만 명창 반열에 오르기 위한 필수인 대통령상이 빠졌었습니다.2001년부터 대통령상에 도전장을 수없이 내밀었지만 본선진출에서 고배를 마신 뒤, 2005년 최우수상까지 가능했습니다. 마지막이라며 도전한 2007년 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문에서 꿈꿔온 대통령상을 거머쥐게 됐습니다.-국악가족으로도 유명합니다.△국악과 저의 인연은 가족으로 확대된 셈입니다. 남동생 임청현 고수는 전북도립국악원 교수로 제직하고 있고, 장남 송세운은 남원국립민속국악원 창극단원으로 활동하며 소리꾼이자 고수 두 부문에서 장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전북대 국악과에서 거문고를 전공한 둘째 송세엽은 익산국악원 거문고 강사로 활동하며, 경비 절감을 위해 무급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친조카 임세미도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제2의 인생을 살고계신 지금은 만족하십니까?△이 모든 일이 꿈만 같다고 할까요. 정말 수없이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부족하지만 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받은 만큼은 안 되겠지만 가진 모든 것을 후배들을 위해 쏟아내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인지 4번의 전북교육감상과 전북도지사 상 등 9번의 지도자상이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특히 누구보다 가난을 겪어봤기에 주변을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익산국악원장으로 1년여가 지났습니다. 앞으로 계획은?△우선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익산을 넘어 전국에 국악이 널리 퍼졌으면 하는 거죠. 특히 실력 있는 국악인들이 어려운 생활고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없도록 하고 싶은 소망입니다.익산국악원장으로 익산지역에도 국악과 관련된 많은 일들이 꾸준히 전개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 기획
  • 김진만
  • 2011.12.2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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