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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로 알아보는 당뇨병

Q. 당뇨병이 완치 가능한가요?A. 당뇨병은 완치 가능한 질환입니다. 당뇨병 초기에 비만인 당뇨병 환자에서 적절한 운동과 식사요법을 통해 당뇨병이 없어지고 지속적인 생활 습관을 유지함으로써 당뇨병이 없는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다만 췌장의 기능이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아직 완치되는 방법이 없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곧 방법이 나타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Q. 당뇨병이 있으면 수술을 받지 못하나요?A. 당뇨병이 수술에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혈당조절을 먹는 약으로 하는 경우 수술 받을 때만 인슐린으로 바꿔서 혈당 조절을 하고 다시 경구약으로 바꿔서 혈당조절을 하면 됩니다. 장기간 혈당조절이 안 된 경우라도 적극적 혈당조절을 통해 준비를 하고 수술을 받으면 됩니다. Q. 인슐린 치료를 받는 것은 당뇨병의 마지막 단계인가요?A.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슐린 치료를 받는 것은 다른 경구약과 마찬가지로 혈당조절을 하는 방법가운데 하나입니다. 경구약을 사용할 수 없는 임신이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 또는 당뇨병 초기에 혈당이 아주 높은 경우 등에도 일시적으로 인슐린을 사용하고 중지하는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Q. 당뇨병에 좋다는 것들이 많은 데 효과가 있나요?A. 당뇨병에 좋다는 음식이나 방법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 중에는 미약하나마 효과가 있는 것도 있지만 오히려 혈당을 더 올리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OO즙이 좋다고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환자도 있는데 대부분의 즙은 혈당관리에 방해가 되고 오히려 혈당을 올립니다. 또한 미약한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들인 돈에 비해 효과가 적을 뿐 더러 장기간 복용했을 때 안전성의 문제가 더 커지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 기획
  • 강정원
  • 2011.11.14 23:02

23. 당뇨병

최근에 돼지의 췌도세포를 당뇨병에 걸린 원숭이에게 이식해서 당뇨병을 완치 시킨 결과를 갖고 사람에게 임상시험을 하겠다는 보도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당뇨병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당뇨병이 사람들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고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0년도 되지 않는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당뇨병이 갑자기 증가하고 또 그 합병증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되었을까? 당뇨병의 급격한 증가는 경제적 발전과 그 기조를 같이해서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당뇨병환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2009년 국제 당뇨병 연맹 자료에 따르면 당뇨병 유병률은 9%로 환자 수만 329만2400명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수의 환자들이 당뇨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당뇨병에 대한 지식이 높지 않고 잘못된 상식으로 당뇨병 관리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전북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박태선 교수는 당은 우리 몸속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므로 우리 몸의 어디에서나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어 혈당관리가 곧 합병증의 예방이라며 적게 먹고 운동을 많이 하는 옛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가족력이 있거나 비만인 경우에는 40대 이후에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하고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당뇨병이란?말 그대로 소변에 당이 나와서 생긴 병이라는 뜻이다. 왜 소변으로 당이 나오게 될까? 우리가 먹은 음식을 몸에서 이용하려면 당으로 바뀌어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당이 이 세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슐린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슐린을 만드는 췌장에 이상이 있어 인슐린을 만들지 못하거나(제1형 당뇨병) 만들더라도 인슐린의 양이 부족하거나 저항성이 있는 경우(제2형 당뇨병)에 우리가 먹은 당이 소변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우리가 먹은 음식의 당분이 소변으로 빠져나올 때 물이 같이 빠져 나오게 되므로 소변이 많아지게 되고 목이 말라 물을 더 많이 먹게 되는 증상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또 먹은 당분이 몸에 이용되지 못하고 빠져 나오면서 몸무게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 혈당조절 방법몸속으로 들어간 당분이 소변으로 빠져 나오지 않게 하려면 단 음식을 적게 먹거나, 운동을 해서 당을 낮춰 줘야 한다. 당이 높아지면 더 많은 인슐린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부족한 인슐린을 더 많이 만들도록 췌장을 자극하거나 모자라는 인슐린을 몸속에 넣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뇨병 초기에는 약을 먼저 사용하는 방법보다는 운동요법과 식사요법으로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을 바꿔주고 생활요법으로 혈당이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약물요법을 하게 된다. 혈당을 조절하는 약물도 많은 종류가 있다. 당뇨병이 발생하는 원인도 사람마다 다 똑같지 않으므로 원인에 따라 적합한 약물을 선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먹는 약을 부러워할 필요 없이 자기에게 맞는 약을 선택하면 된다. 약을 잘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잘 조절되고 있는 지 주기적인 검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 당뇨병의 합병증당뇨병이 무서운 것은 합병증의 발생 때문이다. 당은 우리 몸속의 모든 곳을 돌아다니므로 우리 몸의 어디에서나 합병증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혈당관리가 곧 합병증의 예방이다. 당뇨병의 합병증이 잘 나타나는 부위는 눈, 콩팥, 발, 심장, 뇌, 신경, 혈관 등이다. 이러한 합병증이 발생하면 당뇨병 관리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도 삶의 질이 나빠지게 되어 가족과 사회 구성원 모두 괴로움을 받게 된다. 따라서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도록 혈당을 잘 조절하고 또 합병증 발생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적어도 1년에 한 번씩 합병증에 대한 검사를 꼭 해야 한다. △ 당뇨병의 예방모든 만성질환과 마찬가지로 당뇨병도 역시 생활습관병이다. 경제성장이 일어나면서 식생활이 풍부해진 반면 운동량은 자동차의 이용으로 급격히 감소해 비만이 증가하고 더불어 당뇨병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적게 먹고 운동을 많이 하는 옛날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법이다. 특히 가족력이 있거나 비만인 경우에는 40대 이후에 살이 찌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꾸준한 운동을 통해 몸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움말=전북대병원 박태선 교수

  • 기획
  • 강정원
  • 2011.11.14 23:02

뇌졸중의 증상 및 진단

뇌졸중은 예고없이 찾아오면서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다. 일단 발생하면 영구적인 신경학적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고, 심할 경우 생명까지 잃을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뇌졸중은 초기 증상 및 진단 등을 통해 사전에 예방하는것이 가장 중요하다.△진단 및 증상뇌졸중은 갑자기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생기는 병으로 증상이 갑자기 나타난다는게 특징이다. 증상이 수 일 또는 수 주간에 걸쳐 서서히 악화된다면 상대적으로 뇌졸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뇌의 각 영역마다 기능이 달라 증상은 뇌졸중으로 인한 손상부위의 위치와 크기에 따라 다양하다.대표적 5대 증상으로는 △갑자기 한쪽 팔다리 힘이 빠져 움직이기가 어렵거나, 저리고 감각이 없어진다 △한쪽 눈 또는 양쪽 눈 모두가 갑자기 흐리게 보이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발음이 어둔해지거나, 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머리가 갑자기 아주 심하게 아프다 △갑자기 어지럽거나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린다.이러한 증상이 있다고 하여 모두 뇌졸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일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타나게 되면 즉시 가까운 병원을 찾아 반드시 전문의사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특히 뇌동맥류 파열은 가장 흔한 질환의 하나로, 갑자기 심한 두통에 뇌졸중인지 모르고 진통제만 복용했다가 재출혈돼 사망할수 있다.유일한 치료 방법은 수술이나 시술뿐이다. △일과성 뇌허혈 발작이란뇌졸중 의심 증상이 수 분 에서 수 십분 가량 있다가 저절로 사라진 경우를 ‘일과성 뇌허혈 발작’이라고 한다. 이것은 겉으로는 다 나은 것처럼 보여도 검사를 해보면 이미 뇌졸중이 와 있기도 하며, 조만간 심각한 뇌경색이 올 수 있다는 경고 신호(일과성 허혈발작 경험자의 1/3에서 뇌경색 발생)다.△뇌졸중 환자 발생 시 대처 방법가장 중요한 대처방법은 최단시간 내에 뇌졸중에 대한 적정 진료가 가능한 전문병원으로 환자를 옮기는 것이다. 택시나 자가용보다 119 구급차를 이용하는게 좋은데 응급센터에 더 빨리 도착할수 있고, 병원으로 가는 동안 구급차 내에서 적절한 응급조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황금시간’이란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뇌경색의 전조증상이 생긴 후부터 3시간까지를 ‘황금시간’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뇌졸중 환자의 1분 1초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3시간 이내에 전문병원에 도착하여 혈전용해제 치료나 응급수술을 받게 되면 뇌졸중이 발생하기 전과 같은 정상 수준이나 장애를 거의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까지 호전될 수도 있다. 조사에 의하면 증상발생 후 3시간 이내에 응급센터에 도착하는 경우는 49%에 불과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잘못 알려진 민간요법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쳐 후유증이 남는 경우가 많은데 뇌졸중 발생 시부터 병원에 도착하기까지의 경과된 시간이 회복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므로 가능한 빨리 응급센터로 가야 한다. △구급차 도착전의 응급처치우선 환자를 평평한 바닥에 편안하게 눕힌 다음 입 속에 호흡을 방해하는 이물질이 있는지 확인하며, 구토를 했거나 틀니가 있는 경우 제거해 주고 환자의 몸을 죄고 있는 넥타이나 벨트 등은 즉시 풀어 공기의 흐름을 원활히 해줘야 한다. 베개나 포갠 수건을 환자의 어깨 밑에 받쳐 주면 환자의 머리가 뒤로 젖혀져 기도가 충분히 확보돼 숨쉬기가 더 편해진다.그러나 바늘로 손을 따는 행위,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뺨을 때리거나 심하게 흔들어 깨우려 하는 것은 오히려 순간적으로 혈압을 상승시켜 환자의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절대 삼가해야 한다. 또한 쓰러진 환자에게 물이나 약을 억지로 먹이는것도 질식의 위험이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강 성 돈(원광대병원 신경외과 교수)

  • 기획
  • 엄철호
  • 2011.11.14 23:02

22. 전주에 ‘귀명창’ 많은 이유

2011년 10월, 전주 국악방송(FM 95. 3MHz)이 전주 한옥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전국에서 다섯번째 개국이지만, 서울을 제외하고는 프로그램 자체 제작이 가능한 가장 큰 규모. 박준영 국악방송 사장은 귀명창이 많기로 소문난 전주는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악의 수도라고 했다. 판소리 격언에 귀명창 있고 명창 있다고 했다. 소리를 제대로 음미하고 소리꾼 경지의 높고 낮음을 가늠해내는 귀가 걸출한 명창을 낳는 법. 소리를 듣고 추임새 넣어가며 장단 맞추는 고수의 귀의 힘이 명창의 입의 힘보다 크다. 판소리는 등장인물과 다양한 상황을 실감나게 펼쳐내는 소리꾼의 재주, 여기에 화답하여 동화되는 관객이 일체감을 이룰 때 진정한 예술성에 다다를 수 있다. 전주에 유독 귀명창이 많아 판소리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하는 판소리그래도 귀명창이 많으니까 전주오면 소리헐 맛이 나.일흔을 훌쩍 넘긴 노장 송순섭 명창은 전주 공연의 의미를 여기서 찾았다. 이처럼 소리꾼들은 전주에서 소리하는 것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론 두려워한다. 귀명창이 전주에 많아 소리를 할 때는 추임새로 흥을 돋구어 소리꾼이 소리할 맛을 느끼게 하고 소리를 한 다음에는 소리꾼의 소리가 어떠했는지를 평가하여 소리꾼의 실력을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전주에는 귀명창이 많은 것일까.조선시대 숙종(17세기말) 때 만들어진 판소리는 전라도 언어로 표현된 전라도 음악이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넓은 호남평야를 바탕으로 하여 먹고 살기가 다른 지방에 비해 휠씬 좋았던 지역이었다. 전주는 바로 이러한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전주는 동부산간지역과 서부평야지역이 맞닿는 곳이다.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물산이 모이고 재물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것은 전주만의 문화를 창출하게 만들었다. 결국 소리꾼들은 전주로 모여들었고 소리를 들어줄 사람도 전주에 있었다. 잘 헌다는 기본. 이럴 때 박수를 치는 것이여 라는 추임새는 물론 어린 여성 명창이 무대에 서면 소리 잘하네. 얼굴도 이쁘고. 결혼은 했는 여기저기서 추임새가 쏟아진다. 전주는 고수에게도, 관객에게도, 명창의 완창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만드는 추임새 경연장. 이것이 전주에 귀명창이 많은 첫 번째 이유이다.△ 전주대사습, 전주에 뿌리 내리다조선 숙종대 시작된 마상궁술대회가 고종대에 이르러 대사습놀이로 이어졌다. 고종 2년(1864) 흥선대원군은 단오절에 관의 주관으로 판소리 경창대회를 열도록 하고 장원한 명창을 궁궐에 불러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주대사습놀이는 1905년까지 37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전라감사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으며, 관중들의 박수갈채로 장원이 결정됐다. 전주대사습의 관객은 이른바 귀명창이 많아 이미 이름이 알려진 소리꾼들조차도 전주대사습에 서는 것이 긴장되는 일이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여길 정도의 권위를 지녔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됐던 전주대사습놀이는 1975년에 부활되었는데, 판소리뿐만 아니라 한국음악의 전분야로 확대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년 열리고 있어 전국을 대표하는 국악인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국악인 등용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최근 여러 지역에서 경연대회가 열리고 있어 그 위상이 위협받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심사의 공정성 문제와 관객 수가 줄어드는 등 위기에 봉착해 있다. 최동현 군산대 교수는 전주대사습놀이의 위기는 주최자인 지자체와 방송사에 의존하면서 소리꾼들 스스로가 심사위원에 참여하면서 그 권위만을 행사한 데서 빚어진 사태라며 소리꾼들 스스로가 대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일반 귀명창을 배출해낸 전북도립국악원2003년 11월은 판소리가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전북도가 전북도립국악원을 건립해 소리문화의 중심을 표방한 당위성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판소리는 모름지기 한국전통음악의 자존심으로서 보존전승해 발전시켜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그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도립국악원은 판소리의 고장 = 전주임을 드높인,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명창들이 버티고 있는 곳이다. 1985년 이래 수많은 명창들이 배출됐으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 진행되면서 수많은 귀명창들을 양성해내고 있다. 현재 주야간에 판소리반과 고수반이 설강돼 있다. 그렇게 거쳐간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쑥대머리 한 대목을 멋들어지게 부른다. 바로 이것이 전주에 귀명창이 많은 세 번째 이유일 것이다. 어느 누가 초등학생의 입에서 엇머리라는 판소리 장단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겠는가? 전주에 사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자산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이병규 문화전문 시민기자(동학 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14 23:02

‘귀명창’ 이원복씨, “초등학교 때 판소리 흥미, 늦게나마 더 배우고 싶어”

‘귀명창’. 단순한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소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지식을 바탕으로 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이를 뜻한다. 김제 갑부집에서 태어난 이원복(73·전주 삼천동)씨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판소리 다섯 바탕 레코드를 듣고, 이제는 세상에 없는 명창들의 무대를 보고 자란 귀명창이다.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하는 데는 소질이 적다”는 그는 “골방에서 ‘춘향??레코드를 막 울면서 듣고 살았다”고 했다. 교사를 하다가 자영업을 하면서 판소리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 15년 전 전북도립국악원을 찾았다. 당시 이일주 명창이 은퇴 직전 강습을 했던 차에 이들의 소리를 쫓아 판소리를 공부하기 보다는 재미있게 듣는 법을 깨우쳤다. 신재효 선생의 ‘광대???판소리 해설의 정석. 사설이 정확한지, 발음은 명확한지, 소리에 깊이가 있는지, 너름새는 어떻게 하는지, 장단은 잘 맞추는지 등을 신경써가며 듣노라면 재미가 배가된다.“이전엔 판소리 완창 무대를 즐겨 찾았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 CD로 듣곤 하는데, 오래 들어서인지 귀가 열리는 느낌이에요. 전라도 쪽은 박동진씨가 참 대단했어요. 고향이 전주가 아닌데, 전주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했지요. 자기 소리를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이라고. 언제 어디서라도 소리를 술술 풀어냈습니다. 그 양반의 재담을 듣고 있으면, 속이 다 후련해졌어요.”그는 “아들 따라 미국에 갔다가 접었던 판소리를 공부를 뒤늦게나마 더 해보고 싶다”고 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14 23:02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찾아라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 초등학교 선생을 하며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꿈에도 선생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졸업한 모교의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교사가 한 학교에서 5년 이상을 근무하지 못하기 때문에 덕치초등학교에서 5년 있다가 우리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이웃 초등학교에 가서 1년을 있다가 얼른 덕치 초등학교로 다시 와서 5년을 있다가 5년이 되면 이웃에 있는 다른 학교에 가서 1년을 있다가 얼른 덕치초등학교로 와서 5년을 지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며 선생을 하다가 여섯 번째로 덕치초등학교로 와서 선생을 그만두었다.나는 선생이 되어서야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내 인생의 시작은 스물 둘이었다. 나는 헌책을 지게로 사다가 읽었다. 홀로 문학 공부를 한지 13년 만에 시인이 되었다. 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책을 사서 읽다보니 생각이 너무 많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내가 시를 쓰고 있어서 나도 놀랐다. 나는 정말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일찍 선생이 되었기 때문에 선생 이외의 것이 되겠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다. ‘무엇이 되어 어디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늘 중요했다. 나는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대학 갈 생각을 안했다. 대학을 가면 초등학교 선생 외에 다른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나는 지금이 좋다. 이따금 사람들이 “아이들이 그립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아니요. 나는 지금이 좋아요.” 나는 지금 강연하고, 글을 쓰고, 책도 읽고, 그림을 보며, 영화랑 놀면서 내 맘대로 산다. 강연도, 글을 쓰는 것도 내가 하기 싫으면 절대 안한다. 나는 지금도 무엇이 되고 싶은 게 없다. 사람들이 나를 ‘섬진강 지킴이’라고 한다. 나는 펄펄 뛴다. 내가 무엇을 지킬수 있단 말인가. 어떤 이는 나더러 환경운동을 한다고 한다. 나는 또 펄펄 뛴다. 나는 근본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아니다. 나는 나를 고집하거나 절대 무엇을 주장하거나 그 누구의 삶도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에게 그럴 힘을 주었는가. 누가 저들더러 그러라고 했는가. 나는 내 삶을 내가 산다. 수능이 끝났다. 냉정하라. 이제 선택하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골라라. 좋아 해야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한다. 그러면 사회에 나가 내 몫이 생긴다. 늦고 더디고 지금 당장 힘들더라도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찾아라.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평생하며 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느냐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덫’이 될 수도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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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화정
  • 2011.11.14 23:02

 이환주 시장은

이환주 남원시장은 1960년 남원시 주천면에서 태어났으며 3살때 전주로 이사해 전주 완산초등학교와 전라중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한양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술고시에 합격해 1985년 내부무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공직에 합격하자 아버지께서 ‘녹을 먹는 사람은 백성의 말을 들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이후 1986년 전라북도로 발령받아 도로, 하천, 도시계획 업무 등을 열정적으로 추진했으며 탁월한 업무 능력을 발휘하며 ‘신한국창조유공’대통령표창 등을 받았다. 1995년에는 남원시 관광건설국장으로 부임해 당시로서는 생소하고 신기한 음악분수대를 남원관광지에 설치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전주시 도시개발국장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도시개발법에 따른 서부신시가지 개발과 전국 유일의 도시한옥인 전주한옥마을을 조성했다.이후 전북도청으로 옮겨 핵심보직인 기획관에 기술직 최초로 발탁됐으며 도지사 비서실장과 전략산업국장, 상해 통상사무소 통상본부장,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등을 역임했다.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통찰력에 언변까지 갖춰 ‘신언서판’을 두루 갖춘 몇 안 되는 공무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 개발본부장 재직 시절에 태양광 전지의 핵심소재생산 기업인 OCI의 10조원 투자를 이끌어낸 것도 이런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 기획
  • 기타
  • 2011.11.10 23:02

“일자리창출 지역경제 활성화 살기좋은 남원만들기에 온힘”

지난 10. 26일 남원시장 재선거에서 이환주 시장이 당선됐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남원시민의 열망이 젊은 행정가 출신의 이 시장의 당선을 이끌었다는 평가다. 제7대 남원시장인 이 시장은 선거운동에 지친 심신을 추스릴 틈도 없이 산적한 시정 현황 파악에 몰두하고 있다. 시장실은 휴일은 물론 밤늦게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재선거로 당선된 이 시장의 잔여 임기는 2년 8개월로 짧다. 이 기간에 남원시정을 어떻게 이끌어 시민의 기대에 부응할 것인지 이 시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봤다.△제7대 남원시장으로 취임해 열흘여가 지났다. 소감은? 시정 현안 파악하느라 정신없이 보내고 있다. 남원시장으로 취임해 기쁘기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선거운동하면서 시민의 소리를 많이 들었다. 남원을 새롭게 바꿔 잘 살게 해달라는 시민의 기대에 꼭 부응하겠다. 시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초심으로 돌아가서 더욱 낮은 자세로 열심히 일하겠다. 이제 각 부서별 업무보고를 받았다. 남원시의 큰 현안은 거의 파악했지만 풀어 나가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시 발전을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지역경제가 매우 어려운데, 경제 활성화 방안은? 선거운동하면서 어렵고 힘든 삶의 현장을 확인했다. 침체에 빠진 남원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아들, 딸들이 남원에서 공부하고 남원서 직장을 다닐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 남원의 미래를 이끌어 갈 친환경 코메스틱 클러스터 조성을 검토하겠다. 또 복합물류단지 기반 구축, 소상공인 지원 등과 함께 기업유치단 운영으로 신 성장동력사업을 적극 발굴해 지역경제의 기틀을 다지겠다. △시장 개방이 확대되고 고령화가 가속화되면서 농촌의 미래가 어둡다. 농촌문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남원은 도·농 복합도시이다. 농촌의 미래가 남원의 미래다. FTA체결 등 국제농업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또 농촌의 고령화와 인력 부족이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다. 미래의 잘 사는 남원농업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실을 잘 진단해야 하며 농업정보도 매우 중요하다. 농산품 가격동향, 농산물 유통, 농외소득 등 체계적인 맞춤 서비스를 할 수 있는 기관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우리 남원지형이 운봉 고랭지와 산동, 주천, 보절 등의 중산간부, 송동, 금지, 대강 등의 평야부로 구분돼 지역별 특성에 따라 전략품목이 필요하다고 본다. 또 지역별 특성이 다르다 보니까 남원 농산물의 브랜드는 너무 많은 반면 지역을 대표할 상징성 있는 전략품목은 없는 실정이다. 통합 단일브랜화가 절실하지 않나 생각한다. 이래야만 비용절감과 우리 남원농산물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는 멀리보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체계적인 맞춤서비스를 통해서 농촌에 활력을 불어 넣겠다. △퇴보하는 남원의 문화관광 산업의 발전방안은? 남원은 수준 높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더불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청정 자연환경이 있다. 이러한 훌륭한 문화와 자연이 있음에도 그동안 우리 남원의 관광산업은 춘향 하나로만 생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시대적 변화에 적극 대응해 나가야 한다. 산재된 수준 높은 문화유산에 대해 역사적 의미, 가치 등을 체계적으로 재정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조명하고 관광상품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충, 효, 예의 관광자원을 주제별로 계열화해 관광수요에 대응해야 한다. 지리산권역과 시내권역 관광자원을 연계해서 관광객이 남원에 체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나가야 한다. △남원도 65세 이상이 20%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이다. 구상하고 있는 노인복지 정책은?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우리 남원은 도농 복합형 도시 특성상 많은 어르신들이 농사 등 단순 일을 해왔다. 이러한 단순한 일을 해오다 고령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일자리를 잃으면 특별한 기술이나 경제력이 없어 다른 일을 시작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수급자로 지정되지 않아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일단은 노인일자리를 개발·확대하는 것이 절실하다. 노인에 맞는 맞춤형 일자리 발굴에 관심을 기울이겠다. 특히 사각지대에 있는 저소득 노인층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겠다. △각종 공약과 구상을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남원시 조직을 이에 맞게 개편할 필요가 있을텐데, 개편 방안과 함께 공무원 인사원칙을 설명해 달라. 일 잘할 수 있는 효율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공무원 개인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정성 확보를 위해 상급자의 의견수렴, 공무원 상하 간의 다면평가를 강화하고 시민과 유관 기관, 단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 일 잘하는 사람이 승진하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인사시스템을 운영해 나가겠다. 공약사항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임기가 2년8개월여로 너무 짧다고 생각한다. 기간이 짧은 만큼 조직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이에 시 행정조직은 전면개편보다는 몇 개의 T/F팀의 신설 등 소폭 재구성을 생각하고 있다. △시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남원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 화합이 중요하다. 갈등과 반목은 털어버리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함께 해야 한다.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일어설 수 없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양식 있는 시민이 존중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 시민도, 지역경제도, 시정도 모두 건강해야 한다. 그동안 저의 행정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열정을 고향발전을 위해 바치겠다. 남원시에서 사는 것이 자랑스럽도록 신명나는 시책을 추진해 나가겠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개인적인 인기를 떠나 진정으로 고향발전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겠다. 그래서 건강하고 행복한 남원을 만들어 나가겠다. 시민여러분의 뜨거운 애정을 부탁드린다.

  • 기획
  • 신기철
  • 2011.11.10 23:02

디지털 방송 전환 이렇게 준비하세요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 아날로그 방송 종료, 디지털 전환’. 최근 TV를 보다보면 안내자막으로 종종 나오는 문구다. 궁금해진다! “아날로그 TV와 디지털 TV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왜 디지털 TV로 바꿔야 하나? 우리집 TV도 디지털로 바꿔야 하나? 료방송(케이블방송, 위성, IPTV)을 보고 있는데, 디지털 상품으로 바꿔야 하나?” 대답은 호남지역미디어센터 지역순회 무료강좌에서 찾을 수 있다. 호남지역의 4개 미디어센터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왜 디지털 TV로 바꿔야 하나요? 일상 속 미디어 길라잡이’ 대중강연이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익산과 전주에서 잇따라 열린다. 강연에는 디지털전환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DTV KOREA와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사 공동 저자인 백미숙(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교수, 임종수(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강사로 참여해 디지털 방송과 일상 속 미디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펼칠 예정이다. 이번 대중강연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 디지털방송전환 등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에 대한 이해를 돕고, 시청자로서 소비자로서 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점검해 보고자 마련되었다. △강좌 1: 우리집 TV, 바꿔야 하나요? 현재 TV방송은 아날로그방송와과 디지털방송을 동시에 송출하고 있어, 어떤 TV에서든 볼 수 있다. 하지만, 2012년 12월 31일 새벽 4시가 되면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더 이상 아날로그 TV방송을 송출하지 않고 디지털TV방송만 송출한다. 따라서 디지털방송을 보기위해선 준비가 필요하다. 이 강좌는 디지털전환과 관련한 다양한 홍보와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 DTV KOREA에서 진행한다. 이번 강연에서는 △아날로그 TV와 디지털 TV 차이 △디지털방송 추진배경 △디지털방송의 수신방법 △디지털 TV 구매 비용 보조지원 등 시청자들이 디지털방송 전환에 대비해야 할 내용들에 대해 소개하고, 필요한 정보를 질의응답을 통해 풀어줄 예정이다. 11월 8일에는 전주MBC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9일에는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에서 각각 오후 7시에 진행된다.△강좌 2: 텔레비전 똑똑하게 보기최근에 방송프로그램에 대한 심의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시대 사회문화적 맥락과 가치를 반영하는 인기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진단 그리고 심의와 규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방송과 통신의 융합 시대에 유료 서비스 시장에서의 시청자 권리에 대해 짚어 볼 예정이다. 강연은 백미숙(서울대 기초교육원, 전 방송통신심의위원)교수가 진행하며, 11월 9일 전주시민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된다.△ 강좌 3: 텔레비전을 소개합니다 우리들 삶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일상화된 미디어인 텔레비전. 흑백텔레비전에서 최근의 디지털 텔레비전까지의 변화과정은 단순히 기술의 진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이나 정치 상황, 문화적 맥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강좌에서는 텔레비전이 일상에 도입되어 어떻게 발전을 했고 변했는지에 대한 역사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에피소드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11월 10일 오후 7시 익산 공공영상미디어센터에서 열리며, 강의진행은 임종수(세종대 신문방송학과)교수가 맡는다.호남지역미디어센터 지역순회 대중강연을 기획한 익산 공공영상미디어센터 홍교훈 교육팀장은 “이번 강좌는 디지털방송전환이라는 큰 변화의 시점에서 일상적으로 익숙하게 접해 온 텔레비전의 사회적·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고, 지역민의 디지털 전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마련했다”며 “이를 통해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시청자로서 소비자로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이다”고 말했다.이번강좌는 무료로 진행되면 별도의 수강신청 없이 당일 방문하면 된다. 자세한 문의는 해당 지역 미디어센터로 하면 된다.

  • 기획
  • 김성중
  • 2011.11.08 23:02

● 성남훈 작가는

성남훈은 연극배우 출신이다. 진안에서 태어난 그는 미술을 좋아했지만 공무원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전주상고를 나와 전주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과 공부에는 워낙 취미가 없었고 대학극단 ‘볏단’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소질을 발견했다. 스스로 경영학과 대신 ‘동아리과’ 출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학과생활에 불성실했던 그는 졸업 후 전주의 극단 황토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걸걸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극단 생활에 불만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존재감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때 만난 것이 사진이다. 무작정 유학을 생각해냈으나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같은 극단에서 활동했던 후배들이 프랑스에 유학중이어서 그도 프랑스를 택했다.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집에서 짓던 인삼농사가 딱 그 해에 목돈을 낼 수 있어 강행했다. 89년이었다. 6개월간은 어학코스를 밟았고, 이듬해에 프랑스 파리 사진대학 ‘이타르 포토(Icart Photo)’에 들어갔다. 재학 중이던 92년에 ‘루마니아 집시’로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의 ‘르 살롱’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르 살롱’ 수상은 사진의 방향과 길을 결정지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 같은 상업사진을 병행했었지만 수상 이후로 상업사진은 담을 쌓았다. 졸업한 이듬해인 94년에는 다큐멘터리 집단인 사진에이전시 ‘라포’ 소속 사진가가 됐다. 99년에는 인도네시아 민주화 과정을 취재한 사진으로 ‘월드프레스포토(WPP)’에서 수상했으며 2009년, 같은 공모전에서 두 번째 수상했다. 프랑스로 건너간 초기에는 존재감에 대한 물음이 가슴을 짓눌러‘내가 과연 사진을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인??고민하며 갈등을 겪었다. 패배의식과 콤플렉스가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라포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자신감을 찾았다. 카메라 렌즈로 세상과 마주하면서 의식도 변했다. 치열했던 한국사회의 80년대, 사회적 상황을 외면하고 비켜 다닌 죄책감이 컸다. 근래 작업은 그 빚에 대한 치열한 화답이다. 그는 얼마 전 남원 인월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서울과 남원을 오가며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새로운 일을 구상 중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그는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소통의 장으로서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고 있다. 사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의식을 깨우친 그의 작업이 주목되는 이유다.

  • 기획
  • 김은정
  • 2011.11.08 23:02

“가치관 안에서 이념상 추구…사회적 책무 지켜나갈 것”

아직도 생생하다. 피난길의 한 소녀가 금세라도 눈물 터뜨릴 것 같은 까만 눈망울로 응시하던 그 사진을 보았을 때의 감동이. 그 밑에 작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성남훈. 90년대 중반, 그 이름은 낯설기 만한 세계의 분쟁 지역 난민들을 담아낸 흑백 사진들로 한국의 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지금 성남훈(48)씨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이면서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도사진’(wpp)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세계보도사진은 56년 역사를 가진 포토저널리즘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1년에 한번 세계의 보도사진 기자들과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은 이 의미 있는 상의 수상자 반열에 오르기 위해 나선다. 성남훈은 이미 99년에 일상뉴스 부문에서 수상했고, 지난 2009년 다시 인물사진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번 수상작은 중국의 간쯔현 아추가르 불교학교에서 배우고 수도하는 비구니를 찍은 사진이다.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통해 역사의 이면에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주목해온 그가 <연화지정(蓮花之井)>이란 주제로 작업한 연작의 결실이다. 그는 다시 ‘환경’을 주제로 우리 삶의 공간과 의식의 저변을 훑기 시작했다. 이미 적지 않는 작품들이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니 다큐 사진가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는 격동의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마음 빚을 갚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말 그는 전주의 시민단체가 요청한 강연에 기꺼이 달려왔다. 이어지는 프로젝트 참여로 바쁜 일상이지만 ‘진안 촌놈’을 고향에서 불러준 것만도 영광이라며 활짝 웃었다. -여전히 전사 같은 차림이시군요.(웃음) 90년대 초반 ‘루마니아 난민’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봤습니다. 그 후로도 매체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유민의 땅‘이란 프로젝트의 연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요. 그 작업을 꽤 오랫동안 해오셨지요.“90년부터 2005년까지 했으니까 15년 작업입니다. 일단 마무리 했지만 끝났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로 신음하는 현장이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으니까요.”-사진집으로도 나온 ‘유민의 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프랑스에서 사진 공부를 하던 90년대 초반, 파리 근교에서 루마니아 난민들을 만났습니다. 파리에서 제가 살고 있던 랭스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밤에 기차 창밖으로 매우 생경한 풍경을 보게 되었어요. 호기심에 이끌려 그들을 찾아갔지요. 80년대 말 루마니아의 사회주의가 붕괴된 이후 파리로 온 난민들이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내몰려 집시가 되어 떠도는 그들은 고단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저에게는 큰 충격이자 감동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의 어떤 동질감 같은 것도 있었지요.”-세계의 분쟁 지역에 눈을 돌린 것도 그때부터인가요.“그렇습니다.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국가 간 민족 간 분쟁과 그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의 고통에 눈을 뜨게 되었어요.‘유민’이라는 화두가 제 가슴에 들어온 겁니다.”-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그 뒤 운 좋게 사진에이전시인 ‘라포(Rapho)’에 들어가면서 저의 관점과 의식이 더 확장될 수 있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라포’이야기가 나왔으니 성공기가 궁금한데요.‘라포’는 ‘파리의 키스’로 널리 알려진 로베르 두아노 같은 세계적 사진가들이 속해 있는 유럽의 대표적인 사진에이전시인데 입성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사진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라포’에 들어가는 일이 큰 꿈이었죠. 마침 제가 다녔던 ‘이카르 포토’에는 라포 회원들이 강의를 나왔었는데, 제 작업을 눈여겨 보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원이 정해져 있어 일단 자리 나기가 어려웠는데 로베르 두아노가 작고하면서 자리가 났어요. 그때 마침 저는 한국에 들어와 전시했던 루마니아 난민들과 소록도, 또 다른 이민자 이야기 등 3개 주제의 작업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라포 회원들이 권해서 포트폴리오를 냈는데 줄곧 제 작업에 냉랭하기만 했던 라포 디렉터가 그 포트폴리오를 보더니 ‘내일 니 문서를 설명할 수 있는 실력 있는 통역자와 함께 오라’고 하더군요. 사인을 해야 한다며. 라포의 회원이 된 겁니다.”-그때 심경이 어떻셨나요. “정말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이제 가고 싶은 곳, 찍고 싶은 것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희열감에 얼마나 벅차던지. 사인을 하고나서는 파리 시내까지 걸어오는 30분 내내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바로 달라졌어요. 딱 6개월 잘되더군요. 선배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꿈같은 시간이 지나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경기도 안 좋아져서 사진 판매도 저조하고. 다시 갈등에 빠지게 되었지요.”-일종의 돌출구가 필요하셨겠습니다. 그때쯤 한국에 들어오시지 않았나요. “그때 큰 실험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두 개의 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역이었죠.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머무는 시간을 늘렸습니다. 그러다가 97년쯤 결혼을 하려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라포에서 연락이 왔어요. 아시아가 심상치 않으니 아예 그쪽에 남아 아시아권을 맡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던 셈입니다.”-남들은 한 번도 잡기 어려운 기회를 여러 번 잡으셨군요. 오늘이 있기까지 극적인 상황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연극배우에서 사진가로 길을 바꾸었던 것도 그렇고요. “연극도 열심히 했었습니다. 진안 촌놈이 어찌어찌하다가 경영학과를 들어갔는데 영 흥미가 없었어요. 예술에 대한 갈망은 크고. 그러다가 대학 극단을 들어갔는데 숨통이 트이더군요. 졸업 후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기성 극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사진을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요.”-국내에서도 사진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았습니까. “일단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을 극복하고 싶었어요. 대한민국에서는 나이 열아홉살이면 인생의 50%가 결정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어느 지역 출신에 어느 대학이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죠. 더구나 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보면 자신감이 없었어요. 존재감도 없는 것 같고. 나란 존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늘 고민했습니다. 연극하는 선배들과 협업 하면서 자아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학연 지연으로 엮어지는 한국사회의 견고한 구조 안에서는 성장의 한계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시 작품 이야기를 좀 해보죠. 유민의 땅 이후에 새로 잡은 주제가 궁금합니다. “유민의 땅을 끝내는 시점에서 뒤돌아보니 벅찬 부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열정과 의욕이 앞서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오더군요. 저의 담론이 개인적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아니었었나 싶어요. 그러면서도 감사한 일은 개인적으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더 밀착해서 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관련된 것들이죠. 2006년부터 시작했는데, 가능하면 이 작업은 개인적으로 성취해나가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집단의 화두로 풀어나가는 작업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환경문제는 갈수록 예측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은 기록의 역할이 더 큰 것 아닐까 싶습니다.“바로 그 점입니다. 사실 핵 같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자연 재앙과 같은 것들은 전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환경 문제는 단순히 찍어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 인문학적 관점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떤 담론으로 전개해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공동의 과제로 삼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지금까지 찍어온 사진들을 보면 시대적 역사의 기록이나 사회적 발언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데, 다큐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개인의 철학이나 가치관이 맞닿아 있어야 가능한 작업 아니겠습니까. “제게는 시대적 빚이 있습니다. 제가 81학번인데요.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습니까. 그런데 저는 극단에서 활동하면서도 사회참여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거든요. 기성극단에 들어가서도 사회변혁운동으로부터 벗어나있었죠. 연극 한다는 핑계로 잘 비켜 다녔던 셈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카메라의 렌즈를 세상에 대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어요. 유학생활을 시작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동유럽이 무너지면서 격동의 시대를 맞게 되었고요. 카메라를 메고 보니 이제는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내 나라에서 먼저 껴안았어야 할 사회적 책무가 더 뜨겁게 와 닿았습니다. 세계 도처의 분쟁지역을 찾아 나선 것도 이런 마음의 빚이 강하게 작용했을 겁니다.”-그런데 분쟁지역에서 담아온 사진들을 보면 전쟁의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그 처절하고 치열한 상처의 흔적 보다 소외와 차별 같은 휴머니즘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와 닿습니다.“그럴 겁니다. 제 경우는 루마니아 집시들을 만나면서 사진의 시각적인 것을 익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보는 인문적 사회적 관점을 키울 수 있었거든요. 역사의 전면이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주목하게 하는 그런 의식이 싹튼 겁니다. 그래서인지 전쟁터에서도 저는 그 사회 안에서 다시 소외받는 계층과 여성, 어린아이들을 주목하게 되더군요.”-치열하고 처절한 분쟁지역의 난민들을 찾아다녔던 지금까지의 작업이 한국과 아시아권으로 옮겨온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 역시 정치적 사회적 치열한 현장이 시시각각 도처에서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의 작업이 궁금합니다.“실제로 틀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에서의 작업 역시 지금까지 견지해온 제 가치관과 철학의 틀 안에서 발현될 것이고 그 바탕은 휴머니즘에 있습니다. 사회적 욕망과 개인적 욕망이 부딪치는 경계의 풍경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일전에 광화문에서 있었던 어떤 종교집단의 행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그런 풍경이지만 그런 행위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가져올 것인지는 알죠. 사고의 폭력성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지, 한 사회의 발전을 거꾸로 돌려놓는지를 많은 사람들이 인식 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제 사진이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노숙자나 도시의 개발 현장의 풍경들을 담는 작업도 같은 연상에 있겠지요.“물론입니다. 한국사회가 소비사회로 들어가면서 그 안의 강력한 구조 안에서 우리는 편리라는 형태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만 자본 같은 거대한 권력에 묶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거대 권력이 행사하는 암묵적 폭력을 담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문제니까요.”-그동안의 작품 활동만으로도 이미 정치적 사회적 변혁 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한국사회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사회적 책무로 받아들여도 좋을까요. “가끔씩 제 작업을 놓고 혹시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들여다 보게 됩니다. 고백하건대 지금은 오히려 이념에 많이 빠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가치의 기준도 달라지니까요. 내 가치관과 철학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이념상으로도 추구하는 그런 작업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사회적 책무라면 더 흔들림 없이 해나가야죠.”

  • 기획
  • 김은정
  • 2011.11.08 23:02

경북 문경 농산물 가공시설

경북 문경시는 1994년 큰 전환점을 맞았다. 무연탄석회석철 등 각종 지하자원이 풍부해 광업이 주력산업이었으나 점차 내리막 길을 걷더니 마지막 광산이었던 은성광업소가 문을 닫았다. 사양산업인 광업을 접고 지역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했던 문경시는 관광에 눈을 돌리고 관광에서 가장 중요한먹을거리에 주목했다. 문경을 대표할 특산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상당기간 논의 끝에 오미자사과표고버섯약돌돼지산채 5가지를 육성키로 결정했다. 이들 특산물을 어떻게 해야 농민들의 소득이 높아질지 농민들에게 물었다. 1차 산물로 시장에 내놓으면 농가에게 돌아오는 몫은 이전과 같아 가공으로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조사됐다. 지역의 농산물로 지역민의 소득을 높이는 로컬푸드의 영역에서 문경의 농산물 가공사업은 농가가 원하는 일을 하다보니까 저절로실용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1996년 5가지 특산물을 발굴한 문경시는 가공기술 개발에 힘썼고 2001년에 문경 흥덕동 농업기술센터에 농산물가공지원센터를 준공했다.1만1511㎡의 부지에 795.2㎡의 시설과 105대의 기계를 갖춘 가공지원센터는 식품학 석사급 연구원 2명과 생활지도사 2명, 지원 5명 등 9명의 인력이 운영했다. 경북대 교수 11명을 자문교수로 위촉해 연구하고 한식세계화연구단경북디자인센터농정연구센터 등과 농식품개발 특성화사업 협약을 체결하고 음식 레시피포장마케팅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표고버섯 30여가지, 2003년 오미자 96가지, 2007년 사과 105가지, 2008년 산채 10가지 등 210여가지의 가공기술을 표준화, 규격화했고 상당수 가공기술은 상품화됐다. 이같이 개발된 가공기술을 배우길 원하는 농가들을 위해 1년간 창업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창업보육에 활용되는 과일가공 주스플랜트오미자 가공플랜트분말플랜트 등 3종류의 생산플랜트는 식품제조가공업으로 등록했다.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는 가공업 등록을 통해 농민들은 기술을 배워 직접 만든 제품을 판매까지 할 수 있다.지역농산물을 활용한 가공제품은 표고버섯오미자사과산채 4품목에서 120점이 개발됐고 농가에 54건의 기술이 이전됐으며 18건이 상품화돼 국내에서 활발하게 판매되고 있다.오미자 추출액 제조방법오미자추출물 육포 제조방법 등 3건은 특허를 받았고 특허출원 12건, 상표등록 60점으로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고 있다.농민들이 혼자 힘으로 제품개발부터 포장, 등록까지 마치려면 3~5년의 기간이 소요되지만 문경 농산물 가공지원센터의 시설과 연구진, 자문교수의 도움을 받으면 1개월에 가능하다.이 때문에 창업 입주교육을 받기 위해 문경지역 300여농가가 신청했으나 지금까지 자격을 갖춘 엄선된 사과 22농가 등 31농가만이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사과 농가의 자격은 친환경인증을 받고 1년과정의 친환경사과대학을 수료해야 하며 입주조건을 지켜야만 한다. 입주조건을 살펴보면 원료로 쓰이는 사과의 경우 친환경인증사과만을 쓰고 병부패 등이 없이 손패율이 10%를 넘지 않아야 하며 당도가 13% 이상이어야 한다.해마다 10월에 열리는 문경사과축제와 함께 문경의 대표적 공동브랜드 농식품으로 개발된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즙은 다른 성분은 전혀 들어있지 않고 문경사과 원액 100%이다.120㎖, 100㎖ 용량 2가지가 생산되며 1포에는 각각 사과 1개씩이 통째로 들어간다. 일주일에 2번 문경지역 학교급식에도 공급된다. 올해 연간 10억원의 매출이 예상되고 힐링효과까지 인정되고 있어 앞으로는 폭발적인 매출증가가 전망되고 있다. 전국적인 오미자 유행의 출발지가 된 문경은 국내 생산량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오미자청오미자술오미자퓨레오미자쨈오미자요구르트 등 다양한 가공기술이 개발돼 있다.문경 오미자는 2007년 지역혁신박람회 대통령상을 받았고 20082009년에는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친환경농산물 부문 대상을 받았다. 특히 문경 오미자를 홍보하는 인쇄물은 영어중국어일본어는 물론 아랍어까지 만들어져 있어 아랍의 바이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백두대간에 위치한 문경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개발된 산채비빔밥은 문경출신 대한민국 조리명장 박병학 교수의 컨설팅으로 맛을 표준화, 호평을 받고 있으며 방짜유기를 사용해 품격을 높였다.문경시농업기술센터 소득개발과 농산물가공계 김미자 생활지도사(42)는 가공센터의 시설과 교육프로그램 개발, 직접적인 가공제품 생산 등 기반이 다져지기까지 10년이 걸렸다면서 이제는 본격적으로 농민과 지역의 소득을 높여줄 마케팅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 기획
  • 백기곤
  • 2011.11.08 23:02

문경시농업기술센터 김미자 생활지도사

문경에 관광 왔다가 비빔밥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 비빔밥을 먹기 위해 문경에 왔다 관광까지 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문경시 농업기술센터 소득개발과 농산물가공계 김미자 생활지도사(42)는 96년부터 문경의 농산물가공 업무를 맡아 눈부신 성과를 일궈낸 주역이다.김 지도사는 관광객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판매액을 늘리기 위해 농산물가공에 주력했다. 지역특산물의 소비를 촉진시키고 농민들은 부가가치를 높여 소득이 향상되는 효과도 크다면서 플랜트 시설을 법적 기준에 맞춰 일반 공장처럼 가공업 등록하고 영업신고를 마치는 등 시장논리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농민들은 농기센터의 시설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어보고 판매에 나서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패율을 최소화한다. 농가들의 의지와 자본에 농기센터는 기술과 사업경험을 보태주고 있다며 소비자들의 건강을 고려하면서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제품, 지역의 농산물을 이용한 지역농민의 소득을 높이는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관광객들이 산채비빔밥을 먹고 보약 잘 먹었다고 말씀하실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는 그는 산채비빔밥과 백설공주가 사랑한 문경사과즙은 건강식품으로 대구의 대형병원등에서 임상실험중으로 곧 효능이 입증될 것이라고 자랑했다.농산물가공에 대한 지원을 인정받아 각지에서 문경으로 귀농을 오고, 귀농을 포기하고 도시로 가려던 사람도 다시한번 문경에서 농업과 가공산업에 도전하기도 한다고 자부심을 밝히는 김 지도사는 문경사과, 문경오미자, 문경산채비빔밥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 기획
  • 백기곤
  • 2011.11.08 23:02

21. 종교건축

익산으로 향하는 10월의 풍경은 노랗다. 추수를 끝낸 들녘은 짧게 머리 자른 까까머리 중학생을 닮은 듯하고, 황등 돌산의 깎인 절벽은 늦가을의 햇살을 머금고 누렇다. 익산 두둥교회, 두동편백마을, 나바위성당과 산책로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이 가득한 채 10월의 익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종교를 떠나 빼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교회와 성당은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 원시적인 방법으로 길을 찾다익산을 출발하면서 이제는 보편적인 길 찾기의 수단이 된 내비게이션을 끄고 두동편백마을을 찾기로 했다. 익산 시민이지만 초행길인 두동편백마을을 도움 없이 찾기로 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들면 잘못 드는 대로, 길을 모르면 길가에 차를 멈추고 동네주민들의 길 안내로 찾기로 했다. 최첨단 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여행법을 택한 것은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두동교회에 대한 경외감도 한 몫 했고, 편백나무 숲을 거닐 수 있다는 원시적인 기대감도 한 몫 했다.함열을 지나 성당 쪽으로 향하면서 잠시 길을 잃었다. 저 멀리 한가로운 오후를 맞이하는 우체국이 보여 잠시 길을 묻는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반가움으로 손수 도로까지 나와서 길안내를 하는 우체국 직원의 손끝에 정겨움이 가득하다. 기계적인 내비게이션보다 정겨움이 물씬 묻어나는 사투리에 짧은 여행길이 즐겁다. 우체국 직원의 손끝을 따라 1~2분 정도, 두동편백마을 이정표가 보이고 저 멀리서 낮은 담장 위로 그려진 벽화가 어서 오라 손짓한다.△ 두동마을, 느리게 걷다마을 초입에 내려 10월의 햇살을 온몸으로 맞는다. 두동교회로 향하는 발걸음이 설렌다. 오랫동안 간직된 옛 건물에 대한 궁금증과 ㄱ자 구조를 지닌 옛 교회의 풍경이 나를 과거로 돌려줄 것 같은 착각과 기대감. 정보화센터를 돌자 오래된 교회종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탑에 설치된 교회 종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맑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 종은 우리교회 두 번째 종이에요. 갑자기 들려온 말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자 두동교회 목사님께서 짧은 안내를 해주신다. 일제침략전쟁 때, 첫 번째 종을 수탈당하고 그 이후에 만들었다는 두 번째 종. 옛 종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옛 풍경을 살려 새로 목탑을 만들고 걸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된 건물에 조화롭게 세워진 종이 두동교회의 오랜 역사처럼 낡아있었다.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385-1번지에 있는 두동교회(전북도 문화재자료 제179호)는 1923년 해리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됐다. 초기 기독교 전파 과정에서 남녀유별의 관습이 남아 있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ㄱ자 구조의 실내를 천천히 구경하고 창틀과 오래된 풍금의 나이테를 가늠해봤다. 남북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남자석이고 동서축은 여자석이다. 남자 석이나 여자 석이 33㎡(10평)정도 크기가 똑같다. 설교자는 남자 여자 석을 모두 볼 수 있었지만, 예배당 안의 남녀 신도들은 서로 보지 못하였다. 남녀 석 공간 크기가 같게 한 것이나 강단이 남녀 석 가운데 향하게 배치한 것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두동교회 ㄱ자 구조의 예배당은 남녀를 구분하면서도 남녀평등을 추구한 묘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 구조는 두동교회와 김제 금산교회 등 두 곳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두동교회를 뒤로 하고 마을을 돌아 생태탐방로라 이름 붙여진 편백나무 숲으로 향한다. 편백나무 숲, 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따라 걷는다. 편백나무의 향이 99173m(3만 평) 길을 따라 먼저 마중 나온 듯 온몸을 감싸 안는다. 수령 30년 이상 된 나무들로 조성된 편백나무 숲. 편백나무의 곧은 줄기가 숲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숲으로 다가갈수록 편백나무 특유의 향이 강해져 온몸 곳곳에 향이 밸 듯하다. 편백나무 숲으로 걸어 들어가며 얇은 외투를 벗는다. 안내자분의 귀띔에 의하면 오전 9시와 11시 사이 삼림욕을 하기에는 최적의 시간대란다. 이 시간대에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발생양이 최고조에 이르러 몸속 병원균은 물론 해충, 곰팡이 등을 없애준다. 또한 항암효과, 심폐기능 강화, 말초혈관 단련 그리고 피부 소독 및 호흡기 강화에 큰 도움을 준다.△ 고딕양식 갖춘 한옥 성당 국내 유일두동교회가 있는 성당면과 맞닿아 있는 망성면 화산리의 나바위 성당(국가지정문화재 제318호)은 한옥 성당으로 유명하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이다. 성당이 있는 주변에 너른 바위들이 많아서 나바위라 이름 붙여진 것으로 전한다. 기와지붕이 겹으로 쌓여있고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팔각형 유리 창문까지 있다. 예배당 바깥쪽 양 옆으로 우리나라 고궁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회랑까지 있다. 본당은 고딕양식의 차갑고 웅장한 이미지와 한옥이 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동시에 가졌다. 이런 양식의 성당 건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성당 주변은 산책하기 좋다. 본당 건물 뒤쪽 언덕으로 산책로가 갖춰져 있다. 산책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의 메시지를 담은 십자가의 길이 있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올라가 던 순간을 담은 열네 개의 부조가 세워져 있다. 단풍이 빨갛게 말라가는 풍경 속에 고난의 예수를 조형적으로 담은 부조는 비록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인적이 드무니 숲길을 홀로 거닐다 보면 믿음이 없더라도 적잖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언덕 정상에는 김대건 신부 기념비가 있다.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첫 발을 디딘 곳이 지금의 성당이 있는 자리다. 그는 이후 1년 만에 순교한다. 기념비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타고 왔던 돛단배와 같은 높이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아주 웅장하다. 망금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금강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기 오르면 금강과 황산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이화정
  • 2011.11.07 23:02

가을 비 오는 날

농촌에 가을비 오면 정말 할 일이 없다. 봄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모종 할일이 많다. 여름비를 맞으면서도 모내기를 한다. 소꼴을 벤다. 그러나 가을비 오면 할 일이 없다. 이렇게 가을비가 오다 말다 하는 날 할 일은 딱 두 가지, 마을에 있는 샘물을 품어 미꾸라지를 잡는 일과 산골 다랑이 빈 논으로 가제를 잡으러 가는 일이었다. 마을마다 공동 우물이 두서 너 개씩 있었다. 먹는 우물도 있고, 허드레 물로 쓰는 우물도 있었다. 세수를 하거나, 체소를 씻거나 하는 공동 우물이 우리 동네에는 두 군데 있었다. 가을이 되면 텃논에 살던 미꾸라지들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이 샘으로 모여들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가을 비 부슬거리는 날을 잡아 미꾸라지를 잡았다. 우물물을 품어 미꾸라지도 잡고 그동안 우물물을 사용하며 이렇게 저렇게 쌓인 우물속의 돌멩이나 쓰레기들을 치웠다. 도랑치고 가제 잡는 식이었다. 우물속의 미꾸라지는 크기도 했고, 또 많기도 해서 새로 나온 시래기를 넣고 추어탕을 끊이면 동네잔치가 되었다. 가을 비 오는 날 딱 안성맞춤인 동네 작은 잔치요 축제였다. 커다란 샘 물 물구멍 속에서 물을 따라 누런 미꾸라지들은 꾸물꾸물 기어 나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어른들이 그렇게 샘을 품어 미꾸라지를 잡는 동안 우리들은 주전자를 들고 깊은 산골 빈 논으로 가제를 잡으러 갔다. 아니 주우러 갔다. 비가 오면 산골 빈 논다랑이에 물이 고이기 마련이다. 산골 다랑이 논들은 뒷 논두렁에 작은 도랑들을 만들어 놓았다. 도랑 물 속에는 바위들도 많고 가제들이 살만한 작은 물구멍들이 많았다. 비가 오면 가제들이 자기들이 살던 구멍을 나와 논바닥으로 기어다녔다. 정말 많기도 했다. 빈 논으로 나온 가제들을 다슬기를 줍듯 그냥 주워 담으면 되었다. 잠깐이면 금새 주전자가 그득하였다. 어쩔 때는 커다란 남생이들이 엉금엄금 기어 다니기도 했다. 가제를 잡아다가 애호박을 넣고 지져 놓으면, 푸른색 애호박과 붉게 익은 가제는 정말 색깔이 기막히게 어울렸다. 먹지 않고 보기만 해도 그 빛깔의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났다.가제와 미꾸라지는 샘이나 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태계의 주인공들이다. 작은 우물 속에도 반듯이 가제들이 살았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샘에서 사는 가제를 잡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가제가 샘의 물구멍이 막히지 않게 늘 뚫어 주기 때문이었다. 자연의 생태와 순환을 돕던 것들이 사라지고 깊숙이 숨어버렸다. 마을이 심심하다. 본지 편집위원

  • 기획
  • 이화정
  • 2011.11.07 23:02

예고 없이 찾아오는 뇌졸중

뇌졸중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뇌손상이 오고 그에 따른 신체장애가 나타나는 질환이다.뇌혈관이 막혀 뇌조직이 혈액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는 뇌경색과 뇌혈관이 터져 뇌손상이 나타나는 뇌출혈로 크게 나뉜다.예고 없이 찾아오는 뇌졸중은 심한 경우 생명을 잃을 수 있으며, 반신마비·언어장애 등의 장애가 남는다.따라서 뇌졸중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잘 알려져 있다. △뇌경색이란뇌경색은 뇌혈관이 막혀 뇌에 포도당과 산소를 공급하는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다.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혈전성 뇌경색(뇌혈전증)-동맥경화로 인해 큰 뇌혈관이 막히는 경우로, 수도관에 녹이 스는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색전성 뇌경색-심장이나 경동맥에서 생긴 혈전(피떡)이 떨어져 나가 혈류를 타고 떠돌다가 뇌혈관을 막는 경우로, 부정맥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열공성 뇌경색-작은 뇌혈관이 막히는 경우로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예후가 좋다.△뇌출혈이란뇌출혈은 뇌혈관이 터져 뇌손상이 나타나는 상태다.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 뇌출혈은 △뇌내출혈-뇌혈관이 터져서 피가 뇌 안에 고이면서 뇌가 손상되는 경우로, 대부분 고혈압을 관리하지 않아서 발생한다. △거미막밑출혈(지주막하출혈)-뇌동맥류(큰 동맥이 갈라지는 부위가 약해져서 꽈리모양으로 부풀어 오른 상태)가 터지면서 뇌의 거미막 아래에 피가 고이는 경우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발생하는 뇌동정맥기형, 모야모야병이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한다.△국내 뇌졸중 환자2005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의하면 19세 이상 성인의 뇌졸중 평생 유병률은 인구 1,000명당 15.9명으로 약 58만 명이 뇌졸중 환자다.연령별로는 인구 1,000명당 40대 6.5명, 50대 24.3명, 60대 58.0명이며, 70세 이상에서는 67.5명으로 50대 이후 유병률이 급격히 증가한다. 대략 5분에 한 명꼴로 뇌졸중이 발생하고, 약 20분에 한 명씩 사망한다. 고령화 추세에따라 2004년 약 10만 건이었던 발생건수는 2030년 약 35만 건으로 증가가 예상된다.△한 해 사망자 수통계청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동안 총 246,942명(하루 평균 677명)이 사망했다.이 중 뇌혈관 질환(뇌졸중)으로 인한 사망자가 25,838명(하루 평균 71명)으로 암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으며, 전체 사망 자의 10.5%를 차지했다.암 사망자는 다양한 부위에 생긴 모든 암으로 인한 사망자를 합산한 결과임을 고려할 때, 단일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및 사망률은 뇌졸중이 단연 1위다. △뇌졸중 위험인자뇌졸중으로 인한 장애와 사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뇌졸중을 일으키는 위험인자들에 대한 예방과 적절한 관리가 필요하다. 위험인자는 크게 교정이 불가능한 위험인자(고령, 남성, 뇌졸중 가족력, 뇌졸중 과거력)와 교정이 가능한 위험인자(흡연, 고혈압, 당뇨병, 심방세동, 고지혈증, 비만, 운동 및 신체활동 부족, 영양 불균형, 과도한 음주, 스트레스 등)가 있다.△뇌졸중 예방뇌졸중은 발생하면 영구적인 신경학적 장애를 갖고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고 치명률이 높은 질환이다.특히 뇌졸중은 갑자기 발생하지만 그 원인을 살펴보면 결코 갑자기 생기는 질환이 아니라 수년에 걸쳐서 서서히 뇌혈관에 문제가 쌓이다가 결국 폭발하는 질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뇌혈관에 손상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인자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조절한다면 뇌졸중을 얼마든지 예방할 수 있다.평소 건강한 생활습관(금연, 절주, 고른 음식 섭취, 운동,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고,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의 위험인자가 있는 경우 꾸준한 치료가 요구된다. 조 광 호(원광대병원 신경과, 뇌혈관센터장)

  • 기획
  • 엄철호
  • 2011.11.07 23:02

Q&A로 알아보는 역류성 식도염

Q. 속 쓰림이 식사와 관계가 있나요?A. 물론 관계 있습니다. 보통은 식사(어떤 식사를 했는지가 중요하지만)후에 바로 나타나지만 식후 30분이나 1시간 후에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위 점막의 손상정도에 따라서 시차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공복 중에 속 쓰림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Q. 속 쓰림이 있을 때 도움이 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A. 우선 급한 대로 우유가 있습니다. 조금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우유를 약간 따뜻하게 데여 드시면(뜨거우면 오히려 해로울 수 있음) 좋습니다. 또 두부를 드시는 것도 약간의 도움이 됩니다. 평상시에도 약간 싱겁게 드시거나 깔깔한 음식보다는 담백한 음식을 드시는 것이 예방적 측면에서도 도움이 됩니다.Q. 역류성식도염은 잘 치료가 안 된다고 하는데 정말 어려운가요?A. 치료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위장질환의 특징이 치료가 쉽지 않고 치료가 되더라도 재발이 쉽습니다. 하루에 세 번 식사로 계속적인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음식문화정서상 짜고 맵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다보니 증상들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Q. 역류성식도염 치료 방법 중 발효한약 사용과 일반한약 사용하는데 차이가 많나요?A. 일단 색과 맛에서 차이가 납니다. 일반한약은 주로 검정색에 가깝지만 발효한약은 약간 노란색에 가깝습니다. 일반한약은 맛이 좀 쓴데 비해 발효한약은 약간 시큼합니다. 이는 일반한약을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발효시키기 때문에 시큼한 맛이 납니다. 하지만 역류성식도염을 치료하는데 탁월합니다.

  • 기획
  • 강정원
  • 2011.11.07 23:02

22. 역류성 식도염

불규칙한 식생활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심한 속 쓰림과 명치 부위의 타는 듯 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기름에 튀긴 음식이나 커피를 먹은 후에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지고 쓰라리게 된다. 증상은 식후뿐만 아니라 점차 이른 아침이나 밤에도 나타난다. 통증지속시간도 처음에는 수 분에 불과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길어져 수개월 후에는 수 십 분까지 늘어난다. 이럴 경우 위산이 위에서 식도로 거꾸로 흐르는 역류성식도염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역류성식도염은 만성적인 질환으로 치료를 중단하면 재발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역류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한 증상을 효과적으로 없애주고 합병증을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법이다. 특히 하부식도염이 동반되는 경우에는 소화성궤양보다 예후가 좋지 않으므로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게 전문의들의 설명이다.우석대학교 부속한방병원 오경태 의료원장은 위산이 식도로 역류하는 현상이 지속되면 역류성 식도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합병증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위산이 식도를 지나 기도까지 넘어가면 만성 기침이 생기거나 목이 쉴 수 있고, 후두염, 천식 등이 유발되기도 하므로 치료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역류성 식도염역류성 식도염은 위액이 식도부위로 역류해 식도정맥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담적(痰積)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담적은 담음과 식적이라는 말이며 잘못된 식습관과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 주위의 조직들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증상으로 위장외벽이 딱딱해지기 때문에 위장운동을 더욱 방해해 기능성소화불량, 위염, 위궤양, 위암과 같은 소화기 질환을 초래한다. 음식을 삼킬 때 잘 내려가지 않고 명치나 가슴 중앙 부위가 쓰리고 화끈거리며 목에 이물감이 생겨서 잔기침을 자주하게 된다. 위염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이유 없는 잔기침 때문에 감기나 천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원인식후에 위정체 증후군 및 위산 과다분비 상태로 위안의 내용물이 증가된 경우나 눕거나 구부린 상태에서 위안의 내용물이 위 식도연결부위에 있는 경우에 음식물이 역류될 수 있다. 또는 비만, 임신 등으로 위압이 증가된 경우에도 역류의 가능성이 있다. 또 신경성 위염과 같이 위내시경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속 쓰림이 발생할 수 있다. 위식도 점막이 손상된 경우 속 쓰림이 발생할 수 있다.△증상 역류성 식도염의 증상은 △신물이 올라옴 △가슴이 쓰림 △가슴이 타는 듯 한 느낌 △가슴이 조이고 화끈거림 △가슴이 두근거림 △가슴이 쥐어짜는 듯, 콕콕 찌르는 듯 등 표현하지 못하게 불편함 △목에 뭔가 걸려 있는 듯 한 느낌 △잔기침을 자주함 △가래가 걸린 듯 해 뱉어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음 △음식을 삼킬 때 잘 안내려가고 목이나 가슴에서 걸리는 듯 한 느낌 등이다. △치료 제산제의 복용은 더 심한 악순환을 초래한다. 위산이 식도로 역류되는 원인은 위장 운동의 저하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담적을 제거해 위장운동을 정상화시켜 근본적인 위산의 역류를 방지한다. 손상된 식도점막을 회복시킬 수 있는 탕약(발효한약 효미음 병행)을 복용, 빠른 시간 안에 통증을 제거한다. 식도점막 완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4~6주 정도(상태나 정도에 따라서 약간 길어질 수도 있음)의 치료기관이 필요하다.또 속 쓰림이 발병한 지 3개월 이내인 경우에는 한달 정도 치료하면 완치될 수 있다. 발병한 지 수년이 경과돼 병이 오래된 경우에는 3개월 이상의 치료가 필요하다. 복진(腹診)을 통해 담적이 제거되는 정도에 따라서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다. △생활요법과식은 금물이며 탄산음료를 피하고 지방이 많은 음식, 밀가루음식, 커피, 초콜릿, 술, 오렌지주스 등의 음식을 피한다. 비만의 경우 체중을 줄이고 쪼그려 앉지 말고 식사 후 바로 눕지 않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속 쓰림 증상이 있을 때는 산도가 강한 음식, 맵고 짠 자극성이 있는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스트레스에 의해 더욱 심해질 수 있어 가급적 마음을 편히 할 수 있도록 하고 늦은 수면 시간은 점막 회복에 좋지 않기 때문에 수면시간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도움말=우석대 한방병원 오경태 의료원장

  • 기획
  • 강정원
  • 2011.11.07 23:02

송기태 회장은

1941년 전주시 풍남동 송갑섭씨의 5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동성 송기태 회장은 지금까지 풍남동 한 곳에서 한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그야말로 전주 토박이중에 토박이다. 해방직후 전주 풍남초등학교를 거쳐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한 송 회장은 더욱 큰 꿈을 이루고자 서울로 유학해 경동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문화방송(MBC)에 입사했다.학창시절 송 회장의 학업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고 특히, 중학교 시절에는 전라북도 테니스 대표선수로 활약할 만큼 체력관리 및 운동에도 남다른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하지만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건강 악화로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지난 1973년 고향 전주에 내려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경영 일선에 나서며 기업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후 송 회장은 왕성한 기업 활동과 더불어 다양한 사회활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매진했다. 특히 지난 2000년 2월 전주상공회의소 제17대 회장 취임후 2004년에는 전북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에 선출돼 중앙과 지역을 오가며 국내외 경영환경 변화와 우리 지역 기업들이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질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또한 선친 때부터 이어온 불우이웃돕기와 소년소녀가장 장학금 지급, 전북대학교 발전기금, 풍남제전위원회 발전기금 등의 각종 기금 쾌척 등 기업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충실히 수행할 뿐 아니라 지역 현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졌을 때는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험한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고 헤쳐 왔다. 송 회장의 이력은 대단히 화려하다.88서울올림픽 당시 전북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고 전주상공회의소 17∼19대 회장을 비롯해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 8∼11기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해왔다.이러한 공로로 송 회장은 1987년 국민훈장 목련장, 전라북도 애향도민의 장, 1993년 전주시민의 장, 200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특히 평생 한번 받기도 힘든 국민훈장을 두번이나 수여받았으며 김영삼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3대의 대통령에게 훈장과 임명장을 받는 등 지역 발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았다.

  • 기획
  • 강현규
  • 2011.11.03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