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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7)포크의 여행과 관련된 행정기록들

△호조를 발급받아 여행을 다니다. 1884년 9월과 11-12월 2차례에 걸친 조선지역 조사를 위해 포크는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1882년 12월 설치된 외국과의 외교교섭과 무역거래업무 전체를 관장하는 행정부서)’에서 발급한 국내여행증명서인 ’호조(護:보호할 호 照비출 조)‘를 발급받아 자신이 방문한 지역 최고 책임자들에게 확인을 받으며 조사여행을 진행하였다. 호조(護照)는 외국인에게 발급하는 통행증명서로서 개항 이후 외국인 통행증의 개념을 지닌 증명서였다. 호조의 발행은 주로 중국 및 일본 상인을 위해 발급되었던 것인데 포크의 호조는 미국공사관 외교관의 호조라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미가 크다. 포크는 충청-전라-경상지역 여행허가서인 호조(護照)를 각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에게 제출하고 승인을 받았다. 이를 보여주는 자료는 현재 갑신년 8월 발급된 호조와 갑신년 9월 발급된 호조 두 가지가 전하는데 갑신년 9월 발행 호조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護照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爲 給發護照事照得 美國人海軍中尉福久氏游 歷忠淸全羅慶尙道等地 合行給照護送仰沿途 各官驗照放行毋令阝且滯該員亦不得 藉端遠留致于事究切切須至護照者 右給 海軍中尉福久氏 持憑 甲申九月 初八日 限 回日繳銷 忠淸監司 朴齊寬 忠州牧使 李鎬喆 晉州牧使 金靖鎭 全羅監司 金聲根 羅州牧使 朴奎東 호조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미국인 해군중위 복구씨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지역을 다니는 것에 대한 호조를 발급함. 지나는 길의 각 관리들은 호조를 살펴보고 통행을 허가하며 (방해받아)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해당 관원은 또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머물게하여 조사를 받는 지경에 처하지 않도록 할 것. 이것을 해군중위 복구씨에게 지급하여 증빙으로 소지하게 함 갑신년 구월 초팔일 돌아오는 날을 한도로 하여 효력이 정지됨 충청감사 박제관 충주목사 이호철 진주목사 김정진 전라감사 김성근 나주목사 박규동 △포크의 여행경비 차용과 비용 반환기록 한편, 포크가 소지한 호조는 단순 여행 허가문서 기능 이외에 ‘여행경비 현지 차용허가’ 기능도 갖고 있었다. 즉, 포크는 여행에 필요한 각종 비용을 지급했는데 당시 매일 지급한 기본비용은 조사단 18명의 매끼 식사비(20-30푼), 짐 운반 말 사용료 10리 당 50-60푼, 12명 가마꾼 10리당 50푼 등으로 포크가 계획한 1일 90리를 갈 경우 매일 지급되어야 할 비용이 식사비 1620푼, 말 3마리 임대료 1,350푼, 가마꾼 12명 일당 5,400푼으로 총 8,370푼이었다. 당시 포크는 비용지급을 위해 조선화폐인 상평통보 1푼과 당오전 5푼을 지참하고 관련 비용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1푼짜리 1,000개의 무게가 3Kg 이상이란 점을 고려할 때 8,370푼의 무게는 하루 25Kg에 달하는 무게로 엄청난 무게의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 같은 과중한 무게의 경비는 한꺼번에 준비해 50여일에 가까운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이에 포크는 조사 기간 동안 경유하는 지역의 감영과 목 지역에서 관련 비용을빌려 쓰고 이후 서울 복귀 후 변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이 여행하는 도중 갑신정변(1884.12.4.-6/양력)이 발생하였고 이것이 실패한 사실을 12월 8일 경상도 상주로 가던 도중 점심 무렵에 듣게 되었다. 특히, 자신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민영익의 피습(생존여부 불명) 소식은 이후 조선의 민심이 급변한 상황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조선 남부지역에 대한 조사활동을 마치고 12월14일(양력) 서울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미국공사 후트에 의해 일주일만인 12월 21일 임시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이같은 혼란 상황 속에서도 포크는 12월 24일 갑신정변 실패 후 친청 수구파로 재구성된 조선 정부의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에게 전라감영 등에서 빌린 차용금을 반환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구한국외교문서舊韓國外交文書 [미안美案]에 남아있다. 내용은 영문과 한문으로 되어 있는 데 영문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 내륙지방 여행을 시작하기 전인 10월 28일에 폐하 외무부로부터 받은 신용장과 함께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서신을 제시한 후 아래와 같은 금액을 지급 받았습니다 충청도 공주-충청감영 10000 푼 전라도 전주-전라감영 5000 〃 전라도 나주-나주목 10000 〃 경상도 진주-진주목 20000 〃 충청도 충주-충주목 5000 〃 총액 62000 〃 각 지역의 금액과, 저에게 돈을 선불한 지방 및 지역 이름과 함께 직원이 직접 작성한 확인내용이 신용장 뒷면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신용장의 조건에 따라 돈을 제공한 각 관리에게 나는 영문으로 된 영수증을 주고 금액도 한자로 표시했습니다. 신용장을 가지고 저는 총액 62,000푼을 폐하의 외무부에 전달하고 이에 대한 영수증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이 서신을 마치면서 저는 여행하는 동안 저에게 매우 귀중한 신용장을 제공해주신 폐하의 외무아문에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당신의 뜻을 받들어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지 C. 포크 미 해군 중위 미국 해군성 조병호 외무독판 각하께 차용금액 단위를 영문에서는 ‘푼(pun)’으로 표시하였는 데 한문으로는 ‘량(兩)’으로 표기해 100푼(分)=1兩 단위 환산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포크의 조사일기에는 앞서 공주에서 받은 5푼 동전 10000푼 중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전주이남 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5푼 동전 4000개를 1푼 동전으로 바꾸고 역시 추가로 전라감영에서 5000푼을 더 요청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5푼 동전은 1883년(고종 20) 2월에 주조된 당오전(當五錢)을 말한다. 주목되는 것은 포크가 전주에서 들은 내용인 “전주 이남지역에서 5푼 동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당오전은 비록 명목 가치가 상평통보의 5배로 결정되었으나, 경기도·황해도·충청도 등 정부의 행정력이 비교적 쉽게 미칠 수 있는 지역에서만 통용되었던 상황을 반영한 사실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일년후인 1885년 전라감사 김성근이 전라우도 암행어사에 의해 비리가 지적되었는 데 그 가운데 서울로 보내는 엽전을 모두 당오전으로 바꾸어 보낸 사실 등이 문제되어 벼슬이 박탈되는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앞서 포크의 당오전 20,000푼을 1푼전으로 바꿔준 사실이 이 같은 문제와 연결되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 감안되었는 지 전라감사 김성근은 1년 뒤 이조참판에 제수되어 복귀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 기획
  • 기고
  • 2023.11.14 17:32

[뉴스와 인물] 김성준 신임 전북지방병무청장 “지역 안보공동체로서 역할 다할 것”

대한민국 헌법 제39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들의 국방 의무 실현에 도움을 주는 기관은 병무청이다. 병무청은 군에서 필요로 하는 정예자원을 적기에 충원하고 신속한 병력동원 태세 확립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전북지역에서 이 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 바로 전북지방병무청이다. 지난 1일 제45대 전북지방병무청장으로 취임한 김성준 청장(55)을 만나 전북지방병무청의 역할 등을 들어봤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전북병무청은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먼저 유서 깊은 역사 유적과 전통문화가 살아있는 전북 지역의 병무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부임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병무청은 병역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활용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병무정책을 실현해 궁극적으로 국가안보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국가기관입니다. 지방병무청은 병역판정검사, 현역병 입영, 사회복무요원 소집 및 복무관리, 전문연구·산업기능요원 편입관리, 예비군 편성 및 병력동원소집, 병역사항 공개 업무 등 병역의무 이행과정에 대한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병무청 본연의 업무만이 아닌 병무청의 병역명문가 관련 업무도 하고 있습니다.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이들의 헌신을 예우하기 위해 2004년부터 병역명문가 선양사업을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전국의 병역명문가는 2023년 현재 1만 2000여 가문에 인원수는 5만 9000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내에는 330여 가문, 1700여 명이 병역명문가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병역명문가에 대한 혜택이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전북은 어떠한가요. “병역명문가 우대사업은 국·공립, 지자체, 민간시설과 업무 협약이나 지자체 조례 제정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어 각 지방청별로 우대사업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북은 현재 도내 전 지자체가 병역명문가 예우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에 참여했습니다. 전국의 병역명문가는 전북 도내 지자체가 운영·위탁하는 기관이나 시설에서 이용료, 입장료, 주차료를 감면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올해에는 도내 장학재단인 (사)개벽장학회와 협약을 맺어 전라북도 병역명문가 직계 가족에 대해 장학생을 선발·지원했고 또한 해마다 장학생을 선발해 지원하도록 협약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전국적인 것이 아닌 전북만의 특색있는 명문가 발굴 사업도 중요할듯 합니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적인 병역명문가 예우 사업이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민에게 직접 혜택을 지원하는 사례는 우리 전북청이 최초입니다. 앞으로 지역만의 고유하고 특색있는 선양사업을 발굴해 병역을 이행한 사람의 명예와 자긍심을 높이고 실제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내실있는 사업으로 발전시킬 계획입니다.” -현재 전북청이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무엇이 있는지요. “첫 번째로 꼽고 있는 사업은 경제적 취약자에 대한 무료치료 지원 사업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도내 병역의무자에게 치료비 지원을 통해 병역이행 과정에 도움 줄 뿐 아니라 지역사회 건강 수준 향상도 기대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2016년 대자인 병원과 협약을 통해 첫해는 정신건강의학과에 한정해 지원하다가 2018년에는 전 진료과목으로 확대하기로 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108명의 병역의무자가 무료치료 혜택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민원불편 사항을 발굴·개선하는 ‘적극행정 살피소’팀 운영입니다. 이 팀은 민원 최접점 부서에서 주관하는 T/F팀으로 민원서비스 현장에서 또는 국민신문고 모니터링 과정에서 수집되는 불만·건의사항을 적극행정 추진 의제로 상정, 개선방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고객의 소리에 적극 반응해 적극행정을 실행하는 우리청 고유의 사업으로 대국민 신뢰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임기 내 어떤 사업을 역점적으로 추진하실 계획이신가요.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으로 대표되는 제4차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서비스 혁신을 이룰 계획입니다. 국민중심, 소통중심, 현장중심의 행정을 펼쳐 국민이 공감하고 신뢰받는 조직을 만들어 궁극적으로 병역이 자랑스러운 사회를 실현하는 것이 병무청의 미션이자 비전입니다. 전북지방병무청은 높아진 국민의 기대수준에 부응하기 위해 직원 모두가 각자가 담당하는 업무에서 1년에 1개 업무를 개선하는 문화를 조성, 민원불편을 해소하는 적극행정을 실행하겠습니다." -병역 의무 이행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병역을 성실히 마친 사람이 존경받고 자긍심을 갖는 사회 실현을 위해 폭과 깊이를 더한 병역명문가 선양사업을 내실화하고 병역의무자가 소비생활에 혜택을 누리도록 ‘나라사랑 가게’를 확대, 병역이행자를 응원하고 우대하는 정책이 병역의무자가 일상에서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병역의무가 사회에 진출하는 디딤돌이 되도록 맞춤특기병 지원제도를 활성화하겠습니다. 기술훈련, 군 복무, 취업을 연계해 청년기 생애주기적 차원의 병역진로설계 사업을 접목해 서비스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겠습니다.” -적극적인 업무를 위해서는 직원들의 노력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직원 복지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하실 계획인가요. “병무청은 집행기관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고객인 시민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직원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출근하고 싶은 직장, 활기차고 행복한 조직으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조직 구성원과 충분한 소통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력 재배치를 최적화해 조직 역량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유연근무를 적극 권장해 가정 친화적 직장 문화를 조성하고 개인의 취미와 여가 활동이 조직성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반복되도록 직장 내 동호회를 활성화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지역에 봉사와 기부 등 나눔 실천을 적극 전개해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징병제를 운영하고 있는 나라에서 병역의무 핵심가치는 ‘공정’입니다. 병역의무는 ‘공정’하게 부과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행정서비스는 ‘상식’에 맞게 실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지역의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관장으로서 국민의 입장에서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역지사지 관점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개선해 우리 지역의 안보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전북병무청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성준 전북지방병무청장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광주 사레지오고와 전남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지난 1995년 행정고시 38회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2019년 국방부 기획관리관과 2020년 1월 방위사업청 방위산업진흥국장, 2020년 11월 국방부 인사복지실장 등을 역임했다. 28년 6개월간 국방부에서 근무한 김 청장은 군 예산 관리부터 기획 등 다양한 군 관련 업무를 한 군 전문가다. 특히 군 분야 전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거시적인 안목을 보유하고 책임감과 탁월한 업무 추진력, 조직관리 능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 청장은 “국민들에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기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엄승현
  • 2023.11.12 17:51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⑬ 공동체의 힘

도시재생으로 얻은 결실, 주민들이 이끄는 공동체 문화 우리나라의 도시 재생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다. 정부가 주도하는 도시재생사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업의 이름과 규모가 달라졌지만, 시간은 10년 가까운 여정이다. 덕분에 광역과 기초단체를 막론하고 국가가 주도해온 도시재생사업은 공간과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다. 마무리됐거나 진행 중인 재생 사업의 성과를 가늠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도시재생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가 공통적으로 안게 된 결실이 있다. 주민 공동체의 등장(?)이다. 특히 재생 사업을 계기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주민 공동체는 사업이 끝나고도 살아남아 재생 공간의 운영 주체가 되거나 새로운 공동체 문화 환경을 열어가고 있다. 도시재생은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중요한 밑거름이다. 전국 도시들이 재생 사업에 '주민 공동체 활성화'나 '주민 역량 강화'를 앞세우는 이유다. 전북에서도 주민공동체의 역량을 돋보이는 도시재생 현장이 많다. 그중에서도 지난해 문을 연 전주시 용머리여의주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과 2019년 문을 연 중앙동 커뮤니티플랫폼 둥근숲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모으고 있는 공간이다.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 공동체의 자생력을 키우고 있는 전주의 오래된 마을과 공간을 찾았다. △완산동 용머리 여의주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 전주의 남쪽에 자리한 완산동에는 야트막한 두 개의 산이 있다. 완산과 다가산이다. 그 사이에 남북을 가로지르는 ‘용머리 고개’가 있다. 김제 쪽에서 전주 구도심으로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 고개를 안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 여의주 마을이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채 옛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해온 용머리 여의주마을의 환경이 바뀌게 된 것은 지난 2018년 국토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되면서다. 마을 중심의 도시재생 사업은 대부분 기반시설 개선이나 확충이 중심이지만 이 마을의 도시재생 사업은 달랐다. 마을 입구부터 좁은 도로와 가파른 오르막길, 비좁은 골목 골목이 이어지는 주거 중심의 지형적 특성으로 기반시설 개선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동네살리기>를 내세운 재생사업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정주 여건 개선이 되었다. 용머리 여의주마을은 도시재생 사업은 국토부의 뉴딜사업에 선정돼 2018년부터 2022년까지 4년 동안 진행됐다. 도로와 골목길을 정비하고 텃밭을 만드는 기반시설 개선사업과 함께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주민공동이용시설 건립이 중심 사업이었다. 주민공동이용시설은 2020년 6월 공사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주택을 중심으로 20여 채를 매입해 허문 자리에 2층짜리 아담한 건물과 정원을 조성하는 사업이었다. 공사 기간만 2년. 지난해 12월 용머리여의주마을 주민공동이용시설은 문을 열었다. 건물 1층에는 카페 <유기공장>과 협동조합 사무실, 장애인 표준사업장이, 사무실 공간으로 조성한 2층에는 임대 공간인 사진 스튜디오, 상담센터, 미술관, 방짜유기 전시관 등 개인 작업실과 교육장 등이 들어섰다. 건물 뒤쪽에는 원예치료 등 식물을 활용한 치유 공간과 함께 공동텃밭·치유 정원도 조성됐다. 시설의 운영과 관리는 용머리여의주마을 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이사장 최동완)이 위탁을 받았다. 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은 도시재생 사업의 시작부터 함께해온 주민협의체가 지난 2021년 9월 설립 인가를 받고 출범한 단체다. 협동조합 조합원들의 연령대는 50대부터 70대까지. 마을 주민들의 연령대가 높은 만큼 조합원들의 평균 연령도 높다. 조합원은 21명. 모두 출자한 주체지만 공간 운영과 관리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참여한다. 아직 시작 단계여서 숫자가 많지 않지만, 점차 조합원을 늘려갈 계획이다. 공간을 운영하는 재정은 2층 사무실 임대료와 공간 사용료, 그리고 1층 카페에서 얻는 수입으로 충당한다. 그래봤자 100만 원 남짓한 수입이지만 공간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인력이 필요한 일은 조합원들의 봉사로 해결하고 있는 덕분이다. 조합의 실질적인 운영을 도맡아 거의 매일 출근하는 송호숙 사무국장과 이은자 조직국장도 임금 없이 일하는 봉사자다. 웬만한 일손은 봉사로 해결하는 덕분에 작은 소득으로도 마을 주민들을 초청해 식사를 하거나 함께 즐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올해는 원예 전문가인 마을 주민이 강사가 되어 원예치료와 공예 교육, 스마트폰 활용 교육 등을 진행했다. 내년에는 주민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을 늘리고 마을 축제도 만들어볼 계획이다. 송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의 자생력을 위해서는 조합원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큰 과제가 있다고 말한다.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지금은 주민들이 생산하는 마을 상품 개발하고 카페 운영을 통해 수익을 높이는 방법을 모색 중이다. 여의주마을에는 주민공동이용시설말고도 특별한 공간이 또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으로 불리는 <옛이야기 도서관>이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설계한 이 공간은 마을의 지형적 한계를 오히려 장점으로 활용한 작고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이곳 또한 마을 주민들이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지만, 여의주 마을은 도시재생이 어떻게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지 관심을 끈다. 오래된 마을의 변화를 주목하는 이유다. △중앙동 고물자골목의 <둥근숲> 전주의 남부시장에 자리 잡은 고물자골목은 6.25 전쟁 직후 미군 부대의 구호물자와 보급품이 거래됐던 공간이다. 그러나 상권이 이동하면서 이 공간도 쇠퇴했다. 도시재생이 시작된 것은 2016년부터다. 이곳 역시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과 함께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주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방치된 공간 활용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2019년 11월 문을 연 청년 공유공간 <둥근숲>은 그 결실이었다. 고물자골목의 재생 사업에는 다른 마을과 달리 청년들의 참여가 활발했다. 남부시장 인근에서 서점이나 식당을 운영하는 청년대표부터 청년 예술가들까지 둥근숲을 거점으로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다. 고물자골목은 전주시에서 첫 번째로 도시재생 사업에 선정된 곳이다. 2016년 '전주, 전통문화 중심지의 도시재생' 사업으로 선정되자 2017년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가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재생 사업을 시작했다. 기존 사업 기간은 2020년까지였으나 1년 연장해 2021년에 마무리됐다. 문을 연 지 4년째인 둥근숲 역시 주민협의체가 중심이 되어 창립한 협동조합이 운영을 위탁받았다. 지난 2월 총회를 통해 둥근숲사회적협동조합을 맡게 된 류영관 이사장은 원도심 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의 코디네이터로 고물자골목의 재생사업을 이끌었던 활동가다. 사업이 끝나고도 이 공간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류 이사장의 열정 덕분에 둥근숲은 어려운 재정 여건에서도 청년 공유공간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다. 둥근숲은 공간을 활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가 대부분 '청년'에 맞추어져 있다. 올해는 전북형 청년마을사업에 선정돼 공간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다. 1층은 전시, 강연, 상영회, 모임 등이 가능한 실내 라운지 공간과 공유 주방이, 2층은 코워킹 스페이스, 3층은 입주사무실이 들어섰고, 옥상정원과 마당도 새롭게 꾸몄다. 둥근숲의 전신은 여관과 요양병원이다. 여관에서 요양병원으로 바뀌면서 들여놓은 엘리베이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둥근숲은 그동안 청년 예술가들의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전시와 정기적으로 청년들이 참여하는 마켓을 열어왔다. 마켓은 청년들이 기획하고 이끄는 일종의 동네 축제다. 내년에는 새롭게 들여놓은 시설을 활용해 레지던시와 서점 등 청년들이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둥근숲도 재정을 해결하는 일이 우선 과제다. 임금 없이 공간의 활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류 이사장은 재정도 해결하고 공간의 목표인 청년 커뮤니티플랫폼으로 자리잡기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조합원을 늘리는 것도 새로운 목표다. 쉽지 않지만 둥근숲을 찾아오는 청년들이 점차 늘고 있으니 조합의 규모를 키우는 것도 공간 활용을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리란 확신이 있다. 둥근숲이 주민들의 활동공간으로, 청년들이 소통하고 교류하는 플랫폼으로, 청년 예술가들의 창작 산실로 누구나가 참여하고 쉴 수 있는 숲과 같은 공간으로 자리잡는 것. 이 공간을 주목하고 있는 청년들의 바람이다. / 김은정 선임기자, 박현우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11.09 17:00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이야기로 ‘나’를 발견하고, 지역에서 특별한 ‘우리’로 성장

얼마 전 정부는 ‘제1차 지방시대 종합계획(2023~2027)’을 발표했다. 국가균형발전 5개년 계획과 지방분권 종합계획을 2004년부터 분리하여 수립했지만 올해는 최초로 통합하여 추진되었다. 그 배경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고, 지방인구의 감소가 가속화되기 때문에 지방자치분권을 강화하여 지역균형발전을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함이다. 또한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정책을 수립하면 지방정부는 정책에 맞춰 운영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성과창출에 한계가 있어 약화되어 있는 지방경제에 새로운 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역량이 저하되고 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춘 전략과 추진과제가 제시됨으로써 거시적인 정책은 현장에서 체감하기 어렵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과 현장에 있는 우리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서는 지방정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엇을 함께 해야 할 것인지 잠깐이나마 생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역사회는 ‘나’라는 개인이 모여 ‘우리’를 형성하고, 연대와 협력체계로 엮여 있다. 공동체문화는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그동안 지역사회에는 생활문화, 평생학습, 마을 만들기 등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기반이 형성되어 왔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지역에 숨겨진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완주군에서 활동하는 문화공동체인 ‘엄마의 방학’(대표 김지영)은 이름에서 풍기는 ‘엄마’라는 단어에서 감성적인 어감으로 전달되지만 명확하게 주체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방학’은 누구나 경험해봤을 기억을 상기시키며 어떤 활동으로 방학을 채워나갈지 기대감을 잔뜩 안겨준다. 엄마의 방학이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김지영씨의 일상에서 출발한다. 그녀는 삶에서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엄마라는 위치에서 육아로 바쁜 삶을 살아가며 앞만 보고 달렸던 것이다. 그러나 결혼과 육아를 통해 좋은 엄마로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에서 내적 갈등을 경험하게 되었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2018년 완주문화도시지원센터의 ‘컬처메이커 사관학교’ 과정은 김지영씨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게 해주었고 엄마의 방학은 현실화되었다. 처음 시작한 프로그램은 평소 책을 통해 만나고 싶었던 작가를 모시고 ‘언니 고민 상담소’를 운영한 것이었다. 작가의 유명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전국에서 20명의 엄마들이 모여 ‘엄마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었고, 이를 계기로 매달 책모임도 가지게 되었다. 엄마들은 책을 읽으며 하고 싶은 것들을 발견하였고, 에니어그램, 감정치유 등으로 마음을 공부하였으며 그림책과 드로잉, 쓰기 활동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작업도 함께 했다. 이제는 ‘나’로 시작했지만 ‘우리’가 되어 안전하고 안락하게 머물 수 있는 ‘사적인 공유 공간’인 ‘딩가딩가’를 운영하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딩가딩가는 엄마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들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이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공동체도 이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 내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었다. 지역사회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이 저마다 독립적인 고유색을 갖고 있지만 다른 공동체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발현시키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망이 촘촘하게 연결될수록 지역사회의 공동체문화는 삶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낸다. 엄마의 방학은 올해로 6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처음에는 “에이, 그래도 이게 될까”라는 생각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에 집중했지만 어느새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의 우수사례로 소개가 되었고, 많은 프로그램에서 참여요청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그동안 지속해왔던 마음돌봄 프로그램을 전국의 기획자와 예술가를 대상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김지영씨는 엄마의 방학 동료들이 전국의 전문가들을 앞에 두고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자신들의 재능을 뽐내는 모습을 보며 성장해가는 동료들을 지켜볼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마의 방학의 동료들은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고 역할이 확장될수록 처음에 가졌던 즐거움 대신 힘겨움도 느끼게 된다. 그래서 현재는 규모를 확장하기보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봄과 가을에 한 가지씩만 하고 있다. 다시, 처음에 던졌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되돌아보며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방학은 그렇게 ‘나’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우리’라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김지영씨는 엄마의 방학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의 이름을 찾고 싶어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는 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동료들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녀도 이제는 듣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름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동료들과 함께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즉, 이름과 역할로 불린다는 것은 오히려 경계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모두의 방학을 위해 이야기로 만나는 작업을 계획 중에 있다. 문화공동체로서 엄마의 방학은 주변에서 흔히 말하는 성과나 외연 확장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유연한 관계를 기반으로 사람에게 중심을 두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공동체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개인이 갖고 있는 활동의 동기와 공공에서 요구하는 동기가 맞닿아 있어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문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의 방학은 지역사회에서 특별한 우리로 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모두의 방학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엄마의 방학처럼 지역사회에서 움직이는 많은 공동체가 활력을 갖고, 밀도 높은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기반 조성과 충분한 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나’를 비롯해 ‘우리’를 형성하는 것은 지역에서 특별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혜경 전북문화관광재단 기획정책팀장 구혜경 전북문화관광재단 기획정책팀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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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8 15:28

[한국전쟁 정전 70년] 피란수도 부산, 무엇을 기억할까

참혹했던 한국전쟁을 극복하고, 국제 지원의 수혜를 입던 국가에서 원조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 그 중심에서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포용하고, 경제 성장의 기틀을 다졌던 부산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20세기 냉전시대의 피란수도에서 21세기 평화도시로 변신을 꿈꾸는 부산이 지켜야 할 유산은 무엇일까. ‘2030 세계박람회(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를 추진 중인 지금, 되새겨 봐야 할 정전 70년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짚어본다. ■세계유산 등재 어디까지 왔나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지난 5월 16일 국내 최초로 근대유산 분야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공식 등재된 바 있다. 지난달 17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공식 홈페이지의 잠정목록에 게재되기도 했다. 2015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해 온 부산시는 최종 등재 목표 시기를 2028년으로 잡고 있다.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세기 냉전기 최초 전쟁인 한국전쟁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 1023일 동안 임시수도 기능을 유지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특출한 증거물이다. 피란수도의 정부 유지, 피란 생활, 국제협력의 기능을 하는 9개 연속 유산으로 구성된다. 먼저 서구에 △경무대(임시수도대통령관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아미동 비석 피란주거지 3곳이 있다. 중구에도 △국립중앙관상대(옛 부산측후소) △미국대사관 겸 미국공보원(부산근현대역사관) △부산항 제1부두 3곳이 있다. 남구에 유엔묘지와 우암동 소막 피란 주거지 2곳이 있고, 부산진구에 하야리아기지(부산시민공원)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최종 등재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절차가 남아 있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우선등재목록 선정, 예비심사, 등재신청후보·등재신청대상 선정, 유네스코 현지실사 등을 거쳐야 한다. 등재 요건에 필요한 보완 연구와 개별 유산의 보존 노력, 시민과 관계 기관의 지속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일부 지자체와 주민 반대는 극복해야 할 과제다. 중구 곽해웅 광복동 주민자치위원회장은 “중구가 명색이 관광특구인데, 문화재로 인해 고도 제한 등 각종 개발에 제약이 많다”며 “중구의 실질적 발전을 위해 1부두 세계유산 등재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중구의회 강희은 의원은 “원도심 내 문화유산이 가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면서도 “1부두 부지 등은 결국 주민이 활용해야 할 시설인데, 주민 의견을 듣는 과정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부산시 김기환 문화체육국장은 “시간을 갖고 중구청, 중구 의회와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겠다. 주민 의견도 수렴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세계유산 등재에 앞서 시민들에게 피란수도 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아대 김기수 건축학과 교수는 “문화유산이 시민에게 혐오 대상이 되지 않도록 먼저 시민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며 “또 국제 심포지엄 개최 등을 통해 부산시가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행정력을 낭비하는 불상사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위기 극복 역사를 콘텐츠로 피란수도와 관련한 유형의 자산을 남기는 것과 함께 무형의 가치를 이어나갈 필요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전쟁 시기는 물론, 전후 경제 성장과 위기 극복의 중심에 부산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성과 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부산에서 그룹의 뿌리가 된 기업을 일궜다. 삼성그룹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제일제당과 LG그룹의 모체가 된 락희화학공업사가 대표적이다. 경성대 강동진 도시공학과 교수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 대표 기업들의 뿌리가 부산 서면에 있었다”며 “고려제강이 옛 공장을 ‘F1963’이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꿔 부산 시민에게 환원한 것처럼, 대기업들도 창업 당시 기업의 흔적을 연결하고 부산의 역할을 후대에 알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시기 피란수도였던 부산이 2030 월드엑스포 유치 도시로 나서기까지의 발전상은 그 자체로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부경근대사료연구소 김한근 소장은 “피란민들에게 기꺼이 방 비워주기를 했던 부산 시민의 이야기와 참전국 용사들의 안식처가 된 세계 최초의 유엔묘지 등은 다크 투어리즘(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소재가 된다”며 “피란수도 관련 프로그램과 콘텐츠 개발에 적극적으로 예산을 투입해 미래 먹거리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피란민들이 전쟁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 나간 삶의 과정이 현재를 사는 우리나 미래 세대에 시사하는 인문학적 가치도 크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차철욱 소장은 “아미동 비석마을의 경우 묘지를 삶터로 바꾸어낸 피란민들의 이야기에서 내게 주어진 환경 속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간 극복의 과정을 배울 수 있다”며 “산복도로의 독특한 경관, 피란민의 음식 같은 특이성에 주목해 이를 관광 상품화만 할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십만 명의 피란민을 품어준 부산 시민의 포용력, 역사적 아픔을 딛고 일어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향후 콘텐츠 산업의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부산연구원 오재환 부원장은 “부산 영도에서 시작하는 선자의 이야기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콘텐츠 ‘파친코’의 사례처럼 피란수도 부산의 이야기가 가진 산업적 가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예술 관련 콘텐츠 발굴, 개발 노력도 필요하다. 피란수도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인들은 광복동 일대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이 시기에 대한 연구 지원과 문화예술사적 가치에 대한 대중 홍보 필요성이 제기된다. 더마루아트 박진희 대표(미술평론가)는 “시민들은 물론 다른 지역 관계자들도 피란수도 문화예술 중심지로서의 부산에 대해 너무 몰라 안타깝다”며 “근대 미술 작가들의 삶과 작품, 다방 관련 이야기 등을 다룬 책 <살롱 드 경성>과 같은 베스트셀러가 부산에서도 나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부산일보=이자영·손희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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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6 14:27

[신팔도명물] 경북 안동한지

고택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문종이를 새로 바른다. 이 때 사용되는 한지는 빛과 공기는 통과시키지만 바람을 막아 준다. 햇살이 한지 창호지를 뚫고 방안 가득 쏟아져도 한겨울 삭풍을 막아내는 신비의 종이다. '한지'(韓紙), 천년을 간다는 세계 최고의 종이다. 조선 후기 문신 신위는 '종이는 천 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紙一千年 絹五百)는 말을 남겼다. 그만큼 한지는 제작 방법의 특성상 보존성과 내구성이 우수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신라시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비롯해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등 유물들이 천 년을 견디는 한지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다. 닥나무를 베고·찌고·삶고·말리고·벗기고·다시 삶고·두들기고·고르게 썩고·뜨고·말리는 99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100번째로 만진다해서 한지를 '백지'(百紙)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종이로 인정받고 있는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그 중심에 '안동한지'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안동한지, 질감·풍부한 색감으로 전국 최고 명성 안동시는 전주시·원주시와 함께 국내 3대 한지 생산 지역으로 자리잡고 있다.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중심에 경상북도와 안동시, 안동한지가 역할하고 있는 것. 안동을 국내 3대 한지 생산 지역으로 만들고 있는 '안동한지'는 안동시 문화재 한지장(韓紙匠) 이병섭(57) 대표가 아버지 이영걸(81·안동한지 회장) 닥종이 명인의 뒤를 이어 2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안동한지는 국내 최대 전통한지 생산업체로 자리잡고 있다. 안동한지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닥나무를 주원료로 전국 최고 품질의 한지를 생산해 내고 있다. 이 곳에는 닥나무 원료창고를 비롯해 한지 제조공장, 한지상설전시관, 한지공예관, 체험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안동한지는 외발지, 순지, 창호지, 배접지, 색한지, 공예용 염색지, 고화지, 서화지, 인테리어 벽지 등 70여종의 한지를 생산하고 있다. 전통한지는 소색(素色)이다. 쌀을 정미했을때 나오는 색이다. 안동한지에서는 소색의 전통한지뿐 아니라 닥을 분쇄 한 상태에서 염료를 넣어서 다양한 색을 입힌다. 안동한지의 색 한지는 전통염료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화려하지 않고 정감이 가는 풍부한 색감을 보여준다. 지난 2016년부터 정부 포상증서용 전통한지를 납품하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영인본 사업, 각종 문화재 복원 사업에도 사용되고 있다. 고객들의 맞춤식 한지 생산으로 유명하다. 지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행사장 도배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했을 때 안동한지에 들러 전통한지 제작 과정을 둘러보고 선물용으로 사가기도 해 유명세를 탔다. 이 밖에 안동한지는 동화사, 제2석굴암, 경주 불국사, 안동대 미술대학, 지류문화재보존 연구소, 정재문화재 보존연구소 등 문화재 보존용으로 납품되고 있다. 특히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통일신라시대 종이, 즉 서기 754년 닥나무 종이에 먹으로 쓴 국보 제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을 옛날 전통 그대로의 방법으로 2년여에 걸쳐 재현해 문화재청에 납품하기도 했다. ◆50년 한지 삶 아버지 잇는 젊은 한지장 이병섭 씨 지난 2015년 말 정부가 추진한 전통한지 재현사업 경연에 전국 11개 한지 업체가 참여해 안동한지가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품질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당시 조선시대 정조 친필 편지를 복원해 밀도·내절도·투기도 등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수백년 전 한지의 품질과 거의 유사하다는 평가를 얻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안동한지는 1988년 '풍산한지'로 시작됐다. 이영걸 명인이 고향에 한지 공장을 설립하면서부터다. 이 명인은 1970년 충북 제천에서 1928년부터 42년을 한지를 제작해 온 정수창(1913년 생)에게 제조 기술을 전수 받았다. 1973년 제천시 영천동에 '영천한지'를 설립해 초배지·지방지를 생산해오다 고향으로 옮겨 본격 한지 생산에 나선 것. 이 때부터 이병섭 한지장은 아버지에게 한지 기술을 전수받았다. 지금은 닥긁기→ 잿물 만들기→ 백닥삶기→ 세척→ 티고르기→ 고해(叩解)→ 닥풀제조→ 통물만들기 →종이뜨기 →바탕쌓기 →압착탈수→ 일광건조→ 도침 등 한지 제조 전 과정을 직접 도맡아 오고 있다. 닥을 벗겨 백닥을 완성하고, 깻단을 태워 잿물을 만들고, 잿물과 백닥을 넣어 삶고, 닥 섬유가 잘 풀어지도록 방망이질하고, 황촉규를 이용한 닥풀내기 등 일련의 과정들을 전통기술 그대로 재현, 수천년 이어오고 있는 전통한지의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해내고 있다. 정수열→ 정수창(1913년 생) →이영걸(1942년 생)로 이어진 안동한지의 맥을 잇고 있는 이병섭(1966년 생) 한지장은 전국에서 가장 젊은 전통한지 생산 기술자다. 특히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문화재학을 전공하는 등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 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전승·보존에 가장 촉망받는 인물로 정평나 있다. 이병섭 한지장은 "전통산업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 고유의 멋과 얼이 스며있는 순(純) 한지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며 "안동한지가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했다. ◆15회째 한지축제, 공자종손 '전통기술 발전·창조 기원' 올 해 10월 10일은 두 번째 맞는 '한지의 날'이었다. 안동에서는 한지 축제와 포럼, 전시회가 열려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원하고 힘을 실었다. 안동한지 풍산 한지체험관에서는 (사)안동한지문화진흥회(대표 이병섭)가 주관한 '제15회 안동한지축제'가 열렸다. 안동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고, 한지공예 경진대회를 통해 전국의 우수한 한지 공예인을 발굴, 한지공예품 판매 촉진에 기여하는 자리였다. 같은 날 '전통한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추진단'(단장 이배용)과 (사)경북불교문화원(이사장 도륜)은 제2회 한지의 날을 기념하는 학술포럼과 특별전시회를 마련했다. '한지, 천년의 숨결'을 주제로 열린 특별전시회에는 대한불교조계종 16교구 사찰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록자료와 안동대학교 소장 자료, 안동역사문화박물관 소장 자료가 공개됐다. 안동 한지축제 행사에는 콩추이장(孔垂長) 공자 79대 종손이 참석 해 "한지는 전통사회의 지식과 기술을 대표하는 하나의 결정체"라며 "안동 한지축제를 통해 전통 지식과 기술이 더욱 발전되고, 새롭게 창조되기를 희망한다"고 축하하기도 했다. 한지 인생 50년을 지낸 이영걸 명인은 "안동한지가 중국과 일본, 이태리에서 프랑스 등 세계 구석구석의 한지 애호가들이 찾고, 한지의 우수성에 매료되고 있다"며 "안동한지가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후세에 길이 보존될 수 있는 모범사례로 자리잡도록 할 것"이라 했다. 매일신문=엄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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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2 15:10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어린이들은 왜 동요를 부르지 않는가?

학교 점심시간이다. 「콜라 싫어 싫어/ 홍차 싫어 싫어 새카만 커피 오노~~ 핫쵸코 싫어 싫어/ 사이다 싫어 싫어 새하얀 우유 오 예스~ (중략) 우유 좋아~ 우유 좋아~ 우유 주세요~ 다 주세요~ 우유 좋아~ 우유가 좋아~ 세상에서 제일 좋아~」 경쾌한 노래가 학교에 울려 퍼진다. 모두 동요이다. 아이들은 신나게 운동장에서 뛰어논다. 음악을 들으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가 세파에 찌든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요즘은 트로트가 대세이다. 흘러간 노래로만 취급 받아 오던 중, 모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열띤 경연대회로 트로트 인기가 치솟으며 가요계에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그에 따라 트로트 가수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정통 성악가도, 뮤지컬 배우도, 트로트 가수로 변신하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트로트 가사 내용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나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또는 고향을 떠나 정착하지 못하는 나그네의 고통 등의 애절하고 슬픈 분위기가 많다. 또한 어른들이 꺾어진 꿈 앞에서 체념하고 한탄하고, 자학과 자기 연민의 감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미성숙한 어린이의 정서와 괴리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동요는 티 없는 동심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노래다. 동요는 순수한 동심을 담은 노랫말과 어린이의 맑은 목소리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는 동요는 선정적인 가사와 자극적인 멜로디로 이루어진 대중가요보다 어린이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주위를 보면 동요보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어린이들이 많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를 부르는 어린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가정에서 어린이들이 동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가정 또는 사회에서 동요를 부르지 않는 분위기가 크게 한 몫한다. 동요는 학교에서만 부르는 것으로 아는 경향이 있다. 선택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동요와 멀어지는 것이다. TV에서 어린이들이 트로트를 부르면서 인기를 한 몸에 받자 부모들은 너도나도 어린 자식에게 트로트를 부르게 한다. 반짝이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 아래, 형광 풍선을 흔들며 환호하는 수많은 관객의 모습에 매료되어 인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어른의 흉내를 내며 트로트를 부르는 어린이들을 방송에서 부추기고 있다. 어린이들은 자신들의 불러야 할 동요에는 관심이 없고, 언행마저 어른처럼 변해 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 미성년자 트로트 가수 오모 양이 스토킹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오모양은 전국적인 트로트 경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서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중학생인 데 짙은 화장과 현란한 복장으로 언뜻 보면 성인과 구분하기 어렵다. 성인 남성이 뚜렷한 위해를 가하지 않아서 아직은 특별히 처벌이 어렵다고 한다. 오모양은 성인 남성만 보면 공포에 떠는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서 걱정이 된다. 동요를 부르지 않으면서 자라는 아이들이 장래는 어둡기만 하다. 걷기도 전에 뛰기부터 하면 넘어진다. 어린이는 시기에 맞는 발달 단계가 있다. 어린이들에게 트로트보다 동요를 많이 가르치고 들려줘야 함은 자명하다.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이들이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동요는 모든 어린이의 초기 발달에 중요한 부분이다. 언어 발달, 음소 인식, 기억 기술, 문화적 인식 및 사회적 기술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교육적 이점을 제공한다. 동요를 부르는 것은 어린이의 청각을 자극해 두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자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동요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언어와 추상적 사고에 필요한 시냅스가 발달한다. 특히 부모와 함께 부르는 동요는 부모와 자식 간의 호흡 일치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어른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즐거움을 주고 바르게 사는 자세를 키워 주는 책무가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겪어야 할 정서를 느끼며 자라야 한다. 어린이들의 거칠어지는 언어를 바로잡고 정서를 순화하기 위해서는 동요 부르기가 좋은 치료 수단이다. 동요에 담긴 노랫말과 곡은 어린이들에게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주고 꿈과 용기를 심어주고 나아가 올바른 가치관과 바른 사고를 갖게 해주는 명약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를 통하여 트로트를 반복적으로 들으며 동요의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문인들이 있어서 고무적이다. 서울에서는 김정철 작곡가, 이준관 시인, 김미정 공연 대표가 한 마음으로 힘을 모아 올해 ‘제7회 동시와 동요의 즐거운 만남’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하고 내년 2월에 실시할 8회를 준비중이다. 전북에서는 전북아동문학회(운영위원장 김용재, 회장 조경화)에서 전북아동문학회 회원들이 작사하고 장상영 작곡가가 곡을 붙여 ‘전북아동문학회 창작동요제’를 실시하고 있다. 전북아동문학회 초대회장으로서 전북아동문학회의 산증인인 윤갑철 명예회장은 ‘어린이들이 동요를 부르며 바르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아동문학가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송 시인, 교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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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1.01 13:1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7) 후백제가 조선왕조를 낳다- 왕기(王氣) 서린 전주

전주는 후백제의 왕도(王都)이고 조선왕조의 관향(貫鄕)이다. 우리나라에서 왕도이면서 왕조의 탯줄인 곳은 전주가 유일하다. 여기서 왕도는 견훤왕이 900∼936년, 37년간 전주에 도읍을 정해 후백제를 일으킨 것을 말한다. 또 왕조는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건국해 1910년까지 518년간 유지해 온 조선왕조를 가리킨다. 그만큼 전주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천년고도다. 왕대밭에서 왕대난다는 말이 있듯 전주는 일찍부터 한 나라를 통치할 왕기(王氣)가 서려있는 곳이라 할 것이다. △ 전주는 왕도이면서 조선왕조의 뿌리였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 전북지역은 전주보다 익산 금마와 정읍 고부가 중심이었다. 고부는 백제의 5방(方) 중 중방성(고사부리성)이 자리하고 있었고 금마는 백제 말기 왕도였다. 익산 금마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망명한 곳이요, 이후 마한의 거점이자 백제 무왕이 마지막으로 천도(別都地)한 곳이다. 당시 전주는 백제의 지방 군현(郡縣) 중 하나로 완산(完山)이라 불렸다. 완산은 인근 몇 개의 현을 관할하는 군에 해당하고, 통일신라 때인 685년(신문왕 5년) 완산주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지방 통치조직을 개편했는데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총관을 보내 통치했다. 9주 중 오늘날의 전라도에는 완산주(전주)와 무진주(武珍州·광주)를 두었다. 완산주에는 남원소경(南原小京)과 10개 군, 31개 현을 속하게 했다. 완산에서 시작한 고을이 현재의 전주 도심부로 중심이 바뀌게 된 것은 757년(경덕왕 16년) 완산주의 명칭을 전주로 변경하면서 부터다. 통일신라 말에는 견훤왕이 후백제를 세움으로써 왕도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견훤왕은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출신으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안을 지키는 비장(裨將)이 되었다. 이때 신라는 진성여왕 때로, 실정(失政)과 흉년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다. 견훤왕은 889년 순천만에서 거병한 후 군사 5000명을 이끌고 892년 무진주를 점령, 자왕(自王)이라 칭했다. 그러나 나주와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들을 포섭하지 못해 해상교통로 장악에 실패했다. 그래서 부득이 전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900년에 백제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풀겠다며 완산주를 도읍으로 후백제를 건국했다. 정개(正開)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국가 수립을 대외에 선포했다. 견훤왕은 전주 인봉리 또는 물왕멀 일대에 왕궁을 짓고 동고산성, 남고산성 등 성곽 설비를 하는 한편 관부(官府)를 정비했다. 후백제의 영역은 전주를 중심으로 북으로 금강 이남, 남으로 영산강 상류 이북, 동으로 낙동강 이서지역까지 이르렀다. △후백제 견훤왕, 삼한 재통일 의지 불태워 견훤왕은 건국과 함께 중국의 오월(吳越), 후당(後唐) 등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으며 일본, 거란 등에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때 왕건은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고려를 건국했다. 본격적인 후삼국 패권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견훤왕은 먼저 신라를 징벌하기 위해 927년 경주를 공격해 고려와 가까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웠다. 이러한 공격에 왕건도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고려군을 이끌고 왔으나 공산(公山· 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에 대패했다. 견훤왕은 공산 전투 직후에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다. “나의 기약하는 바는 활을 평양문루에 걸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오(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이는 견훤왕이 대동강 이남의 삼한을 재통일하겠다는 포부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남북분단의 현실에서 보면 가슴을 뛰게 하는 대장부의 기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견훤왕은 930년 고창(古昌·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 크게 패한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아들 사이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몰락을 재촉했다. 견훤왕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큰아들 신검이 동생들과 모의하여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킨 것이다. 견훤왕은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귀순했고 결국 936년, 건국 45년만에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했다. 이때 안타까운 것은 전주서고가 모두 불탔다는 점이다. 견훤왕은 경주 침공 때 모든 서적을 전주로 옮겨왔는데 고려는 전주성과 함께 전주서고에도 불을 질렀다. 실학자 이덕무는 아정유고(雅亭遺稿)에서 이를 ‘3000년 이래 두 번의 큰 재앙(厄)’이라 애석해 했다. △고려 때 전주는 지방군현으로 위상 낮아져 후백제가 망하자 후백제의 왕도였던 전주는 고려의 지방 군현 중 하나로 위상이 낮아졌다. 고려는 전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해 군사적 거점으로 삼고 전주성을 파괴해 버렸다. 그러나 940년 군현 개편 때 다시 전주로 고쳤다. 고려시대에 유감인 것은 태조 왕건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훈요십조(訓要十條)다. 위작 시비가 없지 않으나 제8조에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사람은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대목이 이후 호남 차별의 근거 중 하나로 악용되었다. 고려 때 의미 있는 것 중 하나는 1018년(현종 9년)에 행해진 행정구역 개편이다. 이때 지방행정구역을 5도 양계로 개편했는데 전북에 해당하는 강남도와 광주·전남에 해당하는 해양도를 합쳐 지금의 전라도가 탄생한 것이다. 1000년 넘게 이 명칭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전주목(全州牧)과 나주목(羅州牧)이 행정의 중심이었다. 한편 고려는 무신정권과 몽고의 침입에다 말기에 들어 왜구의 약탈까지 겹쳐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1380년 왜구는 전함 500척을 앞세워 진포(군산) 앞바에 침입했으나 최무선이 화포를 이용해 이들을 격멸했다. 이어 이성계는 이들 잔당과 이미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 들어와 있던 왜구를 남원 황산에서 크게 물리쳤다. 이때 왜구 토벌에 앞장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는 개성으로 개선하다 자신의 본향인 전주에 들러 오목대에서 일가친척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기분이 좋아 춤을 추며 한(漢)고조 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불러 역성혁명을 암시했다. 함께 자리에 있던 정몽주는 자리를 박차고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스러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시(登萬景臺詩)로 읊었다. 곧 이어 위화도 회군을 거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했고, 전주는 풍패지향(豐沛之鄕·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서 유래)으로 조선의 뿌리가 되었다. △전주가 없으면 호남도, 국가도 없다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발산(鉢山 또는 發李山) 아래 자만동은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영흥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이안사가 어린 시절 놀았던 장군수(將軍樹)와 호운석 등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이성계는 건국 후 자신의 탯자리인 전주를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시켜 전주의 위상을 높였다. 또 성종 대에는 양성지(梁誠之)가 전국에 5경(京)을 세워 통치하는데 그 중 전주를 남경(南京)으로 삼도록 건의했다. 그러다 1589년 전주 출신 혁명가 정여립의 역모사건인 기축옥사가 일어나면서 호남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만민의 신분 평등과 재화의 공평한 분배 등 대동(大同)사상을 주장했던 정여립은 당쟁의 희생양이었으나, 이후 호남은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몰렸으나 이순신 장군과 의병 등의 활약이 돋보였다. 당시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말을 남겨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호남의 중심은 전주였으므로 전주가 없으면 호남도, 국가도 없는 셈이다. 또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은 4대 사고 중 전주사고 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황혼을 예고했다. 처음에 고부에서 일어난 혁명은 부패한 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으나 점차 확산되면서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나아가 반봉건 반외세 투쟁 성격을 띠었다. 동학농민혁명 가운데 주목할만한 점은 집강소의 설치다. 혁명군은 조선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는 비단 일시적인데 그쳤으나 농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치행정을 펼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조선왕조가 기울어가자 1899년 고종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다시 왕실의 뿌리인 전주에 주목한다. 오목대와 이목대에 각각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친필을 내려 비(碑)와 비각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영조는 왕조의 시조묘가 없는데 착안해 1771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 경내에 조경묘를 세우고 시조의 위패를 모셨다. 그리고 1899년 다시 고종은 건지산에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주이씨 시조의 묘로 정하고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하였다. 후백제는 조선을 낳고 후백제의 왕도인 전주는 1000년 이상 전라도의 중심이었다. <끝> /조상진 전북일보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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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상진
  • 2023.10.31 16:00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16) 포크가 만난 조선의 여인 –전주기생

포크는 44일동안 조선의 남부지역을 지나며 다양한 조선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가운데 첫 번째 기록이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자신을 위해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전주 기생(妓生)[Kisang]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전주를 떠나기 전날 그의 일기 마지막에는 서울과 전주에서 보고 들었던 기생들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이곳 감영에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많은 여자와 매춘부, 기생이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관아에 복무하는 존재였지만 민가에 나가는 것도 허용되었다. 서울의 궁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전라감영에 존재한 많은 여자들 가운데 매춘부와 기생을 구분하고 있는 점이다. 조선왕조실록 등 기록에 나타난 ‘기생(妓生)’의 ‘기(妓)’란 ‘여악(女樂)’ 즉, ‘여자음악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기녀를 창기(娼妓)로 불렀던 사실은 고려, 조선시대에 나오는 데 <성종실록>에서 그 역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창기(娼妓)는 본래 어전(御前)의 정재(呈才:대궐에서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와 대소의 연향(宴享:국빈을 위한 잔치)를 위하여 마련된 것인데 ...” ( 성종 9년(1478) 11월 23일) 라고 하여 결국 왕실과 국가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담당한 여성 음악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런데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배우는 단계에 있는 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생(生)’자를 붙였다. 결국 생(生)이란 배우는 자라는 의미의 생도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생은 여기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생이란 의미로 나타난 표현이 일반화된 표현으로 파악된다. 이같은 사정은 성종이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보낸 글 가운데 여기(女妓)를 양성하는 창기소(娼妓所)가 서울과 지방에 분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국가에서 경외(京外)의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 “(성종 17년 10월 27일 ) 그리고 이 같은 양성기관이 교방이었다. 전라감영 교방에는 19세기 후반 호남읍지등에 전주부 교방에 34명의 기생이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따라서 앞서 포크를 위한 북춤을 추고 권주가를 불렀던 4명의 10대 후반의 어린 소녀들은 그야말로 전문 음악인인 ‘창기’가 되기위해 전라감영 교방에서 수련을 쌓고 있던 ‘기생’들이었다. 그리고 4명의 무용수들에 앞서 등장한 2명의 나이가 들은 여인들은 이들을 ‘교육하는 창기’였음을 알 수 있다. 신윤복「혜원전신첩」中 <쌍검대무(雙劍對舞)>, 지본채색, 간송미술관. 이 그림은 1749년 신광수(申光洙)의 '樂府上寒碧堂十二曲中 三曲(악부 상 한벽 당십이곡 중 3곡)'의 ‘전주 어린 여학(女學:교방기생)들은 남장을 좋아하네. 한벽당 속에 검무가 한창이네. 全州兒女學男裝(전주아녀학남장) 寒碧堂中劒舞長(한벽당중검무장) 내용을 연상케 한다. 한편, <훈몽자회>(조선 역관이자 중국어학의 대가인 최세진이 1527년(중종 22)에 쓴 한자 학습서)에서 창(娼)을 녀계 챵, 기(妓)를 녀계 기로 설명하고 있는 데 이들 ‘녀계’가 음악과 춤을 담당한 여자들에 대한 총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녀계’의 남편들이 모두 ‘악공(樂工)이라고 기록해 이들 ’녀계‘의 성격이 전문 여성 음악인에 대한 총칭이었고 같은 음악을 하는 악공과 가정을 이룬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녀가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여성음악 전문직이었다. 그런데 포크일기를 정리해 처음 책으로 간행한 사무엘 훨리 교수는 포크의 11월 11일 전주기록에 연이어 포크가 자신의 조사일기 중 맨 마지막 부분에 [일반사항]이란 제목으로 ‘조선의 매춘부’라고 제목을 달고 별도로 기록한 다음 내용을 첨부하였다. [일반사항]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 외입쟁이(We-ip-chang-i) : iro otoko (이로 오토코 いろおとこ:色男) (정부(情夫), 호색한을 뜻하는 일본어) 은근짜(Unkuncha) : 은밀한 매춘부, 버려진 메카케(めかけ) (일본어로 첩을 의미) 더벅머리(Topongmori) : 공개된 매춘부, 하지만 메카케. 통지기(Thongjiki) : 서방질을 잘하는 계집종. 사당(Satang) : 남자의 등에 업혀 다니는 시골 여자들, 주막의 가수이자 협잡꾼이다. 큰 고을에는 없다. 색주가(Sakchuka) : 술을 파는 여자, 선술집의 협잡꾼, 집에서 몸을 파는 창녀로 보면 된다. 집에 머문다. 대개 이런 집들은 많은 수가 가까이 모여 있다. 각 집에 창녀가 한 명씩이다. 서울의 서문 밖에 많다. 기생(Kisang) : 별감 가마꾼의 첩, 승지 사령의 첩. 이들은 두 종류의 길나장이가 빌려준다. 이 남자들은 기생 외입쟁이(We-ipchangi)이다. 서울의 기생 외입쟁이는 가끔 여자들 문제로 큰 싸움을 벌인다. 그들은 대략 종로나 남대문으로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곤봉 따위로 싸우며 기생 구역을 다툰다. 이 기록은 필자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존하는 조선의 화류계 여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 가운데 가장 앞선 기록으로 파악된다. 종래 ‘조선의 화류계 여인’에 대한 가장 자세한 첫 기록은 1927년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이다. 여기서 ‘해어화(解語花)’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당나라 현종(玄宗)이 양귀비를 ‘해어화’라 지칭한 것에서 유래했는 데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한국기록에서는 연산군,광해군 기록에서 실제 특정 기생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어 ‘해어화’가 기생을 부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고 이능화가 이를 책이름에 사용하여 ‘해어화=기생’이란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이능화는 이 책에서 신라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고려를 거쳐 조선 말기까지 역대 기녀들에 관계되는 내용을 상세히 밝혔다. 책은 모두 35장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8장에서는 조선에서 기생제도를 설치한 목적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잔치에 흥을 돕기 위해서이고, 둘째, 의녀나 침비 같은 기능직을 맡기기 위해서이며, 셋째, 변방의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넷째, 지방의 관청에서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마지막 35장에 갈보종류총괄(蝎甫種類總括)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조선의 화류계 여성들에 대한 종류를 소개하였다. (갈보는 빈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계림유사(鷄林類事)’에서 ‘갈보(蝎鋪)’라고 빈대를 적은 대목이 있다. 이능화는 ‘피를 빠는 곤충’에서 갈보에 빗대어 이들 여성을 설명하였다.) 기생(일패)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지방 관아의 교방에서 가무교습을 받은 여악(女樂)으로 국가적인 행사에 참여하였다. 30여세에 관기를 은퇴하여 술집을 열거나 전업하였다. 은근짜(隱君子(이패)는 은근자(殷勤者)로도 불렸는데 남들 몰래 매춘(賣春)을 하는 부류 탑앙모리(搭仰謀利=더벅머리?, 삼패)는 잡가정도를 부르며 매춘 자체만을 업으로 삼는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삼패에 속하는 자로 사찰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각지로 돌아다니며 묘기와 몸을 파는 여사당패(女社堂牌),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色酒家)였는데 작부(酌婦)로도 표현. 이같은 이능화의 분류 내용과 설명은 현재 ‘표준국어대사전’등 대부분의 자료에 이들 내용이 거의 그대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1884년에 이미 포크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이들의 명칭과 성격을 나누어 체계적인 내용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조선의 실상을 세밀히 조사하는 군사정보원의 역할을 수행한 포크의 정보 수집내용의 양상과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포크의 소개자료에서 주목한 것은 맨앞에 언급된 외입장이와 기생과의 관계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능화가 사용한 일패, 이패, 삼패같은 등급화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최근 이능화의 이같은 조선 기생에 대한 일패, 이패, 삼패 라는 왜곡된 기생의 정의와 분류법과 설명에 대해 여악의 전통을 계승해온 전문예인인 기생을 조선인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까지도 몸을 파는 조선의 창녀 매춘부 가운데에서도 가장 하위계급의 집단인 갈보로 왜곡시켜 놓았고 존재하지도 않던 일패라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만들어냈고 당시 일반 시정에서 매음을 병행하며 잡가 정도만을 할 수 있었던 삼패를 가무를 전업으로 하던 전문 예인집단인 기생의 범주에 자의적으로 끼워넣었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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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30 15:21

[뉴스와 인물] 취임 100일 김중현 국립민속국악원장 "민속예술의 산실로 성장 시킬 것"

지난 7월 남원에 소재한 국립민속국악원 제8대 원장으로 김중현(49) 원장이 취임했다. 약 2개월간 공석 상태였던 원장직에 새롭게 취임한 김 원장은 대부분 서울에서 활동했지만, 현장 경험부터 교육·행정 업무까지 다양한 활동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도내 국악계에서는 우려와 기대의 시각이 공존한다. 취임하자마자 도내 14개 시군 국악 현장을 넘어 몽골 등 이웃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해 가치있는 문화유산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 국립민속국악원을 ‘민속예술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중현 원장을 만나 국립민속국악원이 나아갈 방향과 개선해야 할 문제점 등을 들어봤다. -취임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국립민속국악원 원장으로서 취임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통과 현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과거 장관 재임 시절 지역 간 문화 불균형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한 아쉬움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국립민속국악원은 케이컬쳐의 뿌리인 국악을 신한류·관광과 결합하여 확산하고 우수콘텐츠와 국내외 프리미엄 국악콘서트를 통해 지역 간 문화불균형을 해소 하고자 합니다. 국악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전 세계에 알리고, 국민들 모두가 자랑스러워하는 국립민속국악원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취임 100일을 앞둔 시점 그동안의 성과 등 자체평가 부탁드립니다. “국립민속국악원이 추구하는 목표와 비전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그에 따른 전략을 수립했는지 검토하는 등 조직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설정했습니다. 또 직원 및 외부 이해관계자 등 이들의 의견과 요구를 적극 수용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습니다. 실제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1대1 면담을 실시해 내부 직원들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취임 이후 추진된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이 어떤 단계에 있는지, 국립민속국악원의 비전에 어떻게 부합하는지 확인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해결방안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취임 초반 몽골과의 문화협력이 눈에 띄었는데요. 이처럼 과거 원장보다 차별점·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지요. “지난 2월 한몽문화장관 문화협력의 실질적인 추진을 위한 첫걸음 이었으며,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국립민속국악원의 문화 유산을 몽골과 공유하고, 그들의 문화를 한국에 소개함으로써 양국의 문화 교류를 더욱 활발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향후 지속적인 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몽골 정부, 몽골국립예술기관, 국립콘서바토리와 업무협약을 맺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전 원장들과 비교해 이웃 국가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문화 및 예술 분야에서 교류를 증진시키는데 주안점을 뒀습니다. 또 상호문화교류를 해왔던 과거와 달리 이웃국가 정부차원에서 공연 인적교류, 학술연구 사업 등 상호협의하고 함께 추진하는 등 단계적 발전을 염두하고 있습니다.” -공간적·시간적 한계를 초월한 명실상부한 ‘민속예술의 산실로 성장시키겠다’는 각오를 전했는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진행 중이거나 계획에 둔 프로그램은 있으신지요. “국립민속국악원의 활동을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까지 확장하여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기획하고 진행할 것입니다. 실제 남원지역을 찾는 방문객과 지역주민을 위한 명품창극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등 향후 브랜드 국악공연 개발을 통해 지역관광 상품으로서 지역 관광 수요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또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국내외 유통에 제약이 있었으나 국내는 달리는 국악공연을 통해 전국 유명 고택과 캠핑장, 명소를 직접 찾아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라 생각해, 어린이와 청소년, 중장년의 요구와 트랜드를 반영해 국악과 다양한 장르와 결합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국립민속국악원을 국악교육의 중심지로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전북 국악계가 풀어야 할 숙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전통 국악을 배우고 전수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시설이 부족한 문제가 있습니다. 또 전북의 국악과 문화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아 지역 내외에서 인지도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마지막으로 전통 국악에 대한 젊은 세대의 흥미 부족 및 참여율이 낮은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해 주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 있을까요. “전북의 국악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지역 내외에서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청소년 및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국악 및 전통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젊은 세대의 관심을 유도해야 합니다. 또 지자체 및 정부 차원에서 문화 예술을 지원하는 정책을 확대하고, 예산을 증액하여 전북의 국악계와 문화계를 보다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기 동안 어떠한 청사진을 그리고 계시는지요. 전통 국악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접목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추구해, 전통과 현대의 융합을 통해 국악의 매력을 더욱 넓은 층에 전파하고 싶습니다.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기 보다는 있는 것을 어떻게 잘 조화롭게 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전북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전통의 본향으로서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자원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전통 문화와 국악은 우리 문화 유산의 귀중한 부분입니다. 이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전통 문화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경험하며, 지역의 문화유산을 더욱 자랑스럽게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지지해주시는 도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참여가 우리의 문화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김중현 원장은 군산 출신으로 중앙대 한국음악과, 동 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를 졸업해, 한양대 음악학과 박사(음악인류학)를 졸업했다. 그는 1996년 제1회 KBS 대학국악제 대상수상(작곡)으로 문화예술계의 주목을 받은 후, 국립중앙극장 행정실장,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실 행정관, 경기도립국악단 기획실장, 중앙대 전통예술학부 겸임교수, 남서울대 실용 음악과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 기획
  • 전현아
  • 2023.10.29 17:21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⑫ 청년이 주도하는 도시재생

도시재생, 청년을 모으고 청년의 힘을 일으키다 익산청년시청과 군산의 ‘술익는 마을’ 프로젝트 20만 명. 20여 년간 전북을 떠난 청년 인구수다. 올해 8월 기준, 전라북도 인구는 176만 명. 전체 인구의 11%, 꼭 정읍과 완주를 합한 인구수다. 청년 유출은 전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 중소도시가 안고 있는 현실이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 상황을 고려한다 해도 대도시에 미치지 못하는 교육·산업 환경 때문에 지역을 떠나는 청년인구가 갈수록 늘어나는 상황은 안타깝다. 전국의 도시들을 긴장시키고 있는 지역소멸 위기도 결국은 청년들의 유출이 가장 큰 원인이다. 전북뿐만 아니라 전국의 작은(?) 도시들이 지역소멸을 막기 위한 해법으로 청년들이 떠나는 것을 막고 외지의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에 부심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도시재생이 청년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정부의 다양한 공모사업의 중심에는 청년이 있다. 덕분에 전국 각 지역에서 청년을 내세운 다양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도시재생 사업에서도 관심을 끄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 대부분은 아직 시작 단계이거나 실험 단계에 놓여 있지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오래된 도시를 살려내는 현장은 희망을 준다. 전북에도 이런 현장이 여럿 있다. 지역의 오래된 공간과 자산을 주목해 건물을 거쳐 다시 만들고 지역만의 특별한 콘텐츠를 활용해 도시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의지가 담긴 현장이다. 그중에서도 주목을 모으는 사례가 있다. 익산시가 구도심에 있는 오래된 호텔을 고쳐 청년의 취·창업을 지원하는 공간으로 탄생시킨 <익산청년시청>과 지역 콘텐츠를 개발해 브랜드로 만들기 위해 동네 청년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군산 청년기업 지방의 <영화타운과 술익는마을> 프로젝트다. △방치된 호텔의 변신, 대한민국 1호 익산 청년시청 대부분 도시들이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부심하고 있는 것은 청년 정책이다. 전라북도의 도시들도 예외가 아니다. 익산시는 그중에서도 청년인구 잡기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자치단체다.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익산시는 시정의 우선순위에 청년을 앞세웠다. 지방소멸대응기금 까지도 다른 시군과는 달리 청년을 위해 투자할 정도다. 지난해 12월, 익산에 새로운 공간이 문을 열었다. 익산청년시청이다. 전국에서 처음 시도한 덕분에 ‘대한민국 1호’란 별칭을 얻었다. 청년시청이 있는 중앙로는 익산의 구도심 중심이다. 이 일대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익산의 상권을 대표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외곽에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주민들이 떠나고, 자연스럽게 상권은 위축되면서 활기를 잃었다. 빈 곳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고 더러는 흉물로 방치됐다. 한때 성업했던 ‘하노바 호텔’도 그중 하나였다. 익산시는 구도심에 남아 있는 오래된 건물 하노바 호텔을 사들이기로 했다. 이 공간을 활용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드는 것, 그 영향으로 구도심이 활기를 찾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익산청년시청>이 탄생한 배경이다. 청년시청은 ‘청년들의 행복한 삶과 사회진입을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취업과 창업을 위한 정보를 나누고 교육이 진행되며 공간을 지원하고 놀이와 소통을 위한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문을 연 지 1년이 채 안 됐지만 익산청년시청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금까지 청년시청을 다녀간 청년은 1만 5,500여 명, 매월 1,700여 명이 이곳을 찾아 다양한 지원사업과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청년 취업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청년시청이 주도하고 있는 청년도전 지원사업에 참여한 청년 10명이 취업을 하고 ‘다이로움 취업박람회’로 청년 100명이 일자리를 찾았다. 창업공간으로도 인기를 모으면서 여러 개의 회사가 독립의 기반을 이곳에서 닦고 있다. 청년들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네트워크를 이어내는 프로그램도 활발하다. 그중에서도 추진 중인 익산 ‘청년지도’ 사업은 청년들의 창업공간과 작업공간을 점으로 이어 공간과 콘텐츠 네트워크로 활용하기 위한 것. 익산이 젊은 도시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담아내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청년시청 운영은 시가 맡고 있다. 중간 조직 없이 자치단체가 직접 운영과 관리를 맡는 형식이다. 청년시청 운영을 위해 기업일자리과의 창업지원계가 아예 사무실을 옮겨왔다. 대부분 민간 위탁이나 전문가 채용으로 운영 기반을 마련하는 것과 달리 자치단체의 직영 방식은 특별한 예다. 그래서인지 사업의 추진과 운영이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거점공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조직이 필요하다는 분석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익산의 청년 사업을 주도해온 ‘청숲’의 활동가가 임기제 공무원으로 합류해 있지만, 전문성과 지속성을 위한 조직과 운영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오정선 익산시 창업지원계장(청년시청 대표 운영자)도 "청년 단체나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며 ”그러나 청년시청의 지속적이고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조직과 인력의 전문화가 과제”라고 말했다. △청년이 다시 살리는 군산의 양조산업 군산은 일제강점기 쌀 수탈 전진기지였다. 개항 초기, 군산에 이주해온 일본인 중에는 특히 농장을 운영하는 지주들이 많았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으로 쌀 수탈량이 급증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된 일본인 지주들이 그들이다. 쌀을 가공하는 산업도 번성했다. 정미소와 양조업이다. 특히 양조업은 어느 도시보다도 번성해 군산은 양조산업 본고장으로 부상했다. 명절이나 제사 등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면 빼놓을 수 없었던 '백화수복'이 군산의 양조산업체 백화양조의 대표상품이다. 1940년대 설립된 조선양조가 모태인 백화양조는 일찌감치 국내 청주 업계를 석권했으며 국산 양주 제조로도 높은 시장 점유율을 지켜온 업체다. 그러나 1990년대 말 경영권이 바뀌면서 지금은 롯데가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군산의 양조산업 역사를 지역 콘텐츠로 주목한 청년들이 있다. 구도심 재생에 다양한 프로젝트로 참여해온 지역관리회사 ㈜지방도 그중 하나다. 양조산업에 관심을 가졌던 지방의 조권능 대표는 농업회사법인 '흑화양조'를 만들었다. 조 대표는 일찌감치 군산을 청주의 도시로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17년 영화시장을 살리기 위해 시작한 ‘영화타운 프로젝트’도 양조산업을 다시 일으켜보겠다는 생각이 바탕이었다. 영화타운에는 술집을 중심으로 빵집, 화장품 가게 등을 조성했다. 단순히 영화시장 살리기에만 주목하기보다는 영화시장을 활성화하면서 군산이 가진 콘텐츠를 엮어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대규모 단지는 아니지만, 테마파크 형식을 도입, 인근 상점과 협업하면서 마을을 군산의 색깔로 채워나가겠다는 목표였다. 도시재생으로 시작한 이 사업은 다시 새롭게 기획한 ‘술 익는 마을’ 프로젝트가 행정안전부의 청년 마을 만들기에 선정되면서 점점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 사업으로 조 대표는 영화시장에서 도보로 500여m 떨어진 곳에 '술익는마을'을 만들었다. 지금 이곳에는 양조장과 스파 공간이 조성돼 있다. 스파는 양조장에서 술 만든 후 나오는 술지게미로 입욕제 등을 만들고 직접 피로를 풀 수 있는 관광상품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진 않았지만, 영화시장과 이곳 일대에는 관광객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조 대표는 앞으로 군산의 대표 술을 만들 계획이다. 단순히 지역 술을 개발하는 것뿐 아니라 제대로 판매망을 갖출 수 있도록 마케팅 방법을 연구 중이다. 그가 기획한 프로젝트는 군산의 밤 문화(?)를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목표와 닿아 있다. "지금 군산은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근 도시에 왔다가 잠시 들렀다 가는 도시, 한번 다녀가면 두 번은 오지 않는 도시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원인이 건강한 밤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타운이나 술익는 마을이 술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고민하는 이유지요.” ‘술익는 마을’은 내년 초, 기획한 술을 출시하고 연계된 공간의 운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청년들이 몰려 오는 도시, 다시 찾고 싶은 도시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다. / 김은정 선임기자, 박현우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10.27 17:08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전동 킥보드 유감

킥보드(Kick board)는 발로 차다(Kick)와 판자(Board)의 합성어로 한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너비의 판자 위에 발을 올려놓고, 다른 발로 땅을 굴러 앞으로 나간다. 보드 밑에 앞뒤로 바퀴가 달려 있어, 굴러가는 동안 두 발을 보드 위에 올려놓았다가 속도가 떨어지면 다시 발을 내려 땅을 구른다. 보드 앞쪽에 수직으로 1m 높이의 봉이 있고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있다. 이것으로 진행 방향을 조정한다. 원래 킥보드(Kick board)는 킥스쿠터(Kick scooter) 또는 스쿠터(Scooter)로 명명했지만, 우리식 영어로 킥보드가 되었다. 요즘은 전기로 움직이는 전동(電動)킥보드(Motorized Scooter)가 나왔다. 모터가 달린 킥보드다. 전동킥보드는 10kg~20kg 사이의 경량화된 모델과 장거리와 성능을 고려한 30kg 이상의 모델이 있다. 경사를 오르는 등판력과 속력, 주행거리가 우수하고 개인 휴대가 가능하다. 현행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전동킥보드는 원동기장치자전거에 해당한다. 따라서 만 16세 이상으로 제2종 원동기장치자전거 이상의 면허가 필요하고 모터사이클용 안전모를 써야 한다. 무면허 운전자는 도로교통법 제56조 제2항 위반으로 벌금이나 구류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도 무면허로 전동킥보드를 타는 사람이 많다. 특히 1인용인 전동킥보드에 2인 또는 3인이 타는 등 아찔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지난 16일 유튜브 채널 ‘한문철TV’에 의하면 9일 오후 2시경 전주의 한 도로에서 전동킥보드에 여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4명이 도로를 역주행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뭇매를 맞았다. 특히 이들은 안전 헬멧을 착용하지 않아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며 사진까지 공개했다. 전동킥보드는 PM(개인형 이동장치)으로 인도를 주행해서는 안 된다. 인도에서 전동킥보드를 타다가 인명피해가 났을 경우, 아무 조치 없이 이동하면 도주 혐의를 받는다. 강화된 법에 원동기 면허 이상 보유자만 운행할 수 있으며, 1인용임으로 승차 정원 초과 탑승 시, 보도 또는 버스정류장 10m 이내 주정차 시 범칙금이 부과된다. 통행 방법은 자전거 도로 이용이 가능하고, 차도 가장 우측 가장자리에 붙어 통행해야 한다. 교차로에서 좌회전할 때도 자전거와 같이 직진 신호에 따라 교차로를 건너고 다시 직진 신호에 맞춰 방향을 잡는 훅 턴(Hook turn)또는 전동킥보드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한다. 덕진에 있는 전동킥보드 판매 · 수리점 사장 P씨에 의하면 “전동킥보드의 가격은 다양해서 보통 20만 원대에서 9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자전거 타기는 그렇고 오토바이 구매는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선호한다. 특히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많이 탄다” 고 한다. 공유 전동킥보드 이용은 핸드폰에 애플리케이션을 깔면 대여할 수 있다. 업체마다 대여 요금, 서비스 지역, 혜택 등이 다르다. 같은 업체일지라도 지역마다 대여 요금이 다르므로 정확한 이용 요금은 해당 업체 앱을 깔아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하다. 전동킥보드 업체는 스윙(Swing), 디어(Deer), 알파카(Alpaca), 라임(Lime), 지쿠터(Zicooter), 킥고잉(Kickgoing), 씽씽이(SingSing), 빔(Beam), 다트(Dart) 등 다양하다. 요즘 전동킥보드가 급증하면서 무면허 운전이나 무단 주차 등 불법행위가 늘고 있다. 경찰과 지자체가 단속 강화에 나서는데도 안전 불감증은 여전하다. 얼마 전 우석빌딩 사거리에서 본 단속 현장이다. 한 남성이 안전모를 쓰지 않은 채 전동킥보드를 타고 인도를 질주해 오고 있었다. 단속 경찰관이 “안전모 미착용으로 면허증을 보여주세요!”라고 말하자, 젊은이는 “면허증 집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알고 보니 무면허자였다. 그런가 하면 야구 모자를 쓰고 전동킥보드를 타다 적발된 또 다른 남성은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안전모를 꼭 써야 하느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반문하는 것이었다. 단속 경찰관에 따르면 “무면허나 안전모 미착용 시 적발이 되면 자기만 재수 없이 걸렸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전동킥보드를 인도에 무단 주차하는 행위와 길거리 아무 곳에나 주차해 보행자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한다. 전주시에서는 곳곳에 전동킥보드 주차장을 마련해 줬지만, 텅텅 비어 있다. 뿐만 아니라 주·정차 금지구역을 정하고 상시 순찰에 나서지만 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전주 시내에서 운행되고 있는 전동킥보드 개인형 이동장치(PM)는 약 3390대라고 한다. 최근 관련 사고가 증가하여 2021년부터 2023년 8월까지 전북에서 발생한 전동킥보드 사고는 108건으로 집계되었다. 이로 인해 1명이 사망하고 123명이 다쳤다는 통계다. 교통사고 절반 가까이가 무면허였고, 그중 상당수가 미성년자였다. 단속반에 의하면 안전모 미착용뿐만 아니라 음주운전, 무면허 운전에 대해서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단속할 계획이라며 “젊은이들의 이동 수단으로 자리 잡은 전동킥보드의 사고를 막을 대책과 이용자들의 안전 수칙 준수가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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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5 15:09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6)후백제 문화유산의 미래전략

후백제는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크고 엄연한 한국사의 범주임에도 36년여라는 짧은 존속기간과 기록의 부족, <삼국사기>에 견훤왕에 대한 부정적 기록 등 때문인지 현재까지 다른 시기 고대 역사보다 문헌사· 고고학 분야 등 모든 부분에 걸쳐 연구 부족과 국가 및 자치단체의 지원과 관심의 대상에서도 소외되었다. 이런 가운데 향후 후백제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한 연구 활성화와 이를 토대로 균형 잡힌 지역 발전을 도모할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2023년 1월 17일 ‘후백제역사문화권’이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9개의 문화권 중 하나로 포함 개정된 것이다.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제1조(목적)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은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문화권과 그 문화권별 문화유산을 연구ㆍ조사하고 발굴ㆍ복원하여 그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제2조(정의) 1. “역사문화권”이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형·무형 유산의 생산 및 축적을 통해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발전시켜 온 권역으로 현재 문헌 기록과 유적·유물을 통해 밝혀진 9개 권역을 말한다고 정의되었다. 후백제역사문화권은 충북, 충남, 전북, 광주, 전남, 경북지역을 중심으로 후백제 시대의 유적ㆍ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을 말한다. 후백제역사문화권 외 8개 문화권은 고구려역사문화권, 백제역사문화권, 신라역사문화권, 가야역사문화권, 마한역사문화권, 탐라역사문화권, 중원역사문화권, 예맥역사문화권이다. 2. “역사문화환경”이란 역사문화권의 생성ㆍ발전의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과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유형ㆍ무형 유산 등 역사문화권을 구성하는 일체의 요소를 말한다. 3.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이란 역사문화환경을 조사ㆍ연구ㆍ발굴ㆍ복원ㆍ보존ㆍ정비 및 육성함으로써 지역의 문화발전 및 지역경제 활성화 등 지역 발전에 기여하는 사업을 말한다. 4. “역사문화권정비구역”이란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14조에 따라 지정ㆍ고시된 지역을 말한다. 제3조(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원활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ㆍ추진하여야 한다. 또한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통하여 지역 간 연계ㆍ협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역사문화권정비사업을 실시하기 위한 행정적ㆍ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권 정비정책의 수립과 추진을 위한 제9조 ① 문화재청장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 및 특별시장ㆍ광역시장ㆍ특별자치시장ㆍ도지사ㆍ특별자치도지사와의 협의 및 위원회 심의를 거쳐 5년 단위의 역사문화권 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제9조에서 수립된 정책수행을 위한 역사문화권 보존ㆍ정비의 지원 및 기반조성에 필요한 제27조(역사문화권 연구재단의 설립 등) ①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 정비 및 역사문화환경의 조성과 관련된 각종 활동의 체계적 수행 및 연속성 보장을 위하여 역사문화권 연구재단을 둘 수 있으며, 재단의 사업과 운영에 필요한 비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출연하거나 지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업을 하기 위해 제28조 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역사문화권 연구와 문화유산의 발굴ㆍ보존 및 관리ㆍ활용 등을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다라고 되어있다. △후백제 문화유산의 현황 후삼국 시대에 고려, 신라와 경쟁하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고 기존 문화와 융합하여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발전시킨 후백제는 충북, 충남, 전북, 광주, 전남, 경북 경남지역에 관련된 유물‧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후백제 문화유산은 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고 특히 무형의 유산은 거의 조사연구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건립되어 후백제까지 이용된 유산의 경우 삼국 또는 남북국시대(통일신라) 유산으로 분류된 경우도 많을 것이다. 앞으로 조사연구를 통해 후백제 역사와 문화권의 규명과 재정립을 위해 현재까지 알려진 대표 유산을 소개한다. 후백제역사문화권 유산 현황 : 123개소, 국가지정 : 20개소, 시도지정 : 22개소, 비지정 : 81개소 △후백제 문화유산 조사연구, 정비, 활용의 미래전략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후백제역사문화권’이 포함됨으로써, 문헌 및 고고학 자료들에 의해 왕궁터, 왕릉터, 왕실 사찰 및 도성, 산성 등이 고증되거나 추정되어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후백제역사문화권의 유적‧유물을 보다 종합적으로 연구·조사 및 발굴·복원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과 지역개발 추진 시 문화재의 체계적인 발굴 및 보호를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향후 후백제 문화권 내 문화유산의 조사연구, 정비, 활용 분야별 미래전략을 큰 틀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조사연구 분야는 첫째 후백제 활동무대의 범위 재고를 위해 역사문화권 정비법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강원, 경남, 부산지역까지 확장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연구자의 저변 확대와 후백제 관련 문헌. 고고 자료의 수집과 데이터베이스화가 추진되어야 한다. 둘째 후백제 역사의 체계적인 조사연구를 위한 후백제문화권 모든 지역 ‘조사연구 종합계획’을 관련 자치단체가 참여하여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셋째 이를 체계적이고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역사문화권법에 있는 후백제역사문화권 연구재단 및 연구센터를 설립해야 한다. 정비·활용 분야 역시 첫째 후백제문화권 모든 지역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후백제문화권 정비·활용 종합계획’을 공동으로 수립하여 각 지자체의 문화유산의 특성과 주제, 주변 자치단체와 연계성. 시너지 효과를 고려하여 수립할 것을 제안한다. 정비·활용계획 수립시 문화유산과 주변 지역이 조화되는 경관적 요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둘째 전주·완주 지역은 후백제 왕도로서 관련 문화유산과 정체성을 조사 연구하여 ‘고도 보존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고도지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셋째 후백제 역사문화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알리기를 위한 연구, 상징물 조성, 선양사업 등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후백제역사문화권의 조사연구, 정비, 활용사업의 원활하고 빠른 추진을 위해 현재 7개 지역이 참여하고 있는 ‘후백제문화권 지방정부협의회’에 후백제문화권내 자치단체가 최대한 참여하도록 적극 노력하여야 한다. /노기환 전라북도청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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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5 09:52

[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

6·25전쟁 당시 가장 격전지로 꼽히는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의 전세를 뒤집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굳건하게 지킨 전투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방어선전투 가운데 가장 핵심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투다. 다부동전투는 1차 세계대전 때 파리를 위기에서 구했던 베르덩(Verdun)전투에 비유된다. 경상북도와 칠곡군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전쟁 당시 마지막 보루였던 다부동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이를 계승하기 위한 기념사업들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전투의 의미 "한 발짝이라도 더 밀리면 끝장이다.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고(故) 백선엽(1920~2020) 장군의 말이다. 북한의 공세에 밀리던 당시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낙동강과 그 상류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해 사수하기로 했다. 이 방어선을 '워커라인' 즉 '낙동강 방어선'이라고 부른다.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전쟁을 조기에 종결해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에서 전병력을 집중했던 북한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키고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지원,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전투로 평가된다. 또한 전투 중 곳곳에서 전개된 국군과 미군의 협조적 전투수행은 한미연합작전 능력 향상의 초석이 됐다.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대구방어전투·영천(永川)전투·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됐지만, 이 가운데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가 가장 핵심이다. 6·25전쟁의 '명운(命運)'을 건 결전 칠곡군 다부동(多富洞)에서 벌어진 다부동전투(戰鬪)는 전쟁의 판도를 바꾼 분기점이었다는데 의미가 깊다. 다부동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군 일부 병력이 1950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서 남침한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다. 국군이 지키지 못할 경우 대구와 부산까지 내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가 다부동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경찰을 비롯해 학도의용군, 소년병, 노무자들도 전투의 주역이 되어 함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수없이 흘린 피의 대가로 다부동전투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고, 압록강까지의 북진도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도 있게 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 프리덤 벨트 성역화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 일대에 6·25 전쟁 영웅들의 동상과 위령비가 잇따라 들어서면서 '워커라인'으로도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이 대한민국의 '호국벨트'를 넘어 전 세계 자유민주주의 진영 '프리덤 벨트'로 성역화되고 있다. 특히, 이곳에 호국 메모리얼파크 등 전쟁의 교훈을 일깨우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는 차별화된 호국보훈 인프라가 구축될 예정이다. 올해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전쟁 영웅들의 동상이 잇따라 들어섰다. 지난 7월 5일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저지선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막아낸 영웅 백선엽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세워졌다. 백 장군의 동상은 높이 4.2m, 너비 1.5m로 2분 정도 주기로 한 바퀴(360도)를 도는 회전형으로 제작됐다. '백 장군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고 수호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게 제작자의 설명이다. 동상 건립에는 성금을 포함해 5억원이 들었다. 이와 함께 높이 160㎝의 '다부동전투 지게부대원 위령비'도 세워졌다. 다부동전투 당시 총탄을 뚫고 병사들에게 탄약과 연료, 식량 등 보급품 40㎏를 지게로 져나르고 전사자와 부상병을 호송해 준 지게 부대원들을 기리는 위령비이다. 당시 군인들의 '생명줄' 역할을 했던 그들을 국군은 '지게부대'로, 미군들은 'A-frame Army'라 불렀다. 다부동전투에서만 지게부대원 2천800명가량이 희생됐다. 백남희(백선엽 장군 장녀) 여사는 "아버님은 국군 1사단을 도운 주민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계셨기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칠곡군과 함께 위령비를 마련했다"며 "아버님이 못다한 뜻을 이루고 다부동전투에서 희생된 주민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같은 달 28일에는 6·25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월턴 해리스 워커(1889~1950) 장군 흉상도 칠곡호국평화기념관에 세워졌다. 워커 장군은 6·25 당시 전 국토의 90%가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절체절명 위기에서 '워커 라인(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을 막아내고 인천상륙 작전을 가능하게 했다. 경북도는 다부동전적기념관과 일대에 호국 메모리얼 파크(가칭 UN전승기념관)를 조성할 계획이다. UN전승기념관은 현재 16개 6·25 참전국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몰자 합동추모공간을 두고, 국제적인 안보 '앵커 시설'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참전 16개국의 국가별도 독립적 공간이 마련, 참전국 인사들의 필수 방문 코스 역할을 병행하도록 조성된다. ▷낙동강방어선 승전 기념 시설 ▷전몰희생자 추모를 위한 국립현충시설 ▷후세들을 위한 역사교육의 현장시설도 갖춰질 예정이다. 또 경북도는 내년부터 백선엽 장군 기념관 증축과 다부동전투 스포츠센터, 피란 땅굴, 휴게 광장 등도 조성한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칠곡군 다부동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구국의 성지"라며 "국민들이 다부동에 와서 자유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느끼도록 호국 메모리얼 파크를 조성하겠다"고 말했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백선엽 장군, 워커 장군, 위령비 등의 건립으로 칠곡군이 명실상부한 호국도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면서 "앞으로도 호국 관련 인프라와 스토리를 모아 칠곡을 대한민국 호국의 성지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동상 보러가자" 부쩍 늘어난 관람객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백선엽 장군, 이승만·트루먼 전 대통령 동상, 지게부대원 위령비 등이 건립되면서 관람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칠곡군에 따르면 다부동전적기념관 관람객은 4월(2만4천명), 6월(3만7천명), 7월(4만6천명), 8월(5만3천명) 등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상 건립 이후 관람객들이 대구와 경북을 비롯해 서울, 경기도, 전라도, 제주도 등 전국에서 몰려들고 있다. 또한 그동안 단체 관람객 위주로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방문했지만, 요즘은 가족 단위로 많이 찾고 있다. 한편, 다부동전적기념관은 6·25 전쟁 최대 격전지이자 반격이 시작된 다부동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됐다. 부지면적 1만8천744㎡에 기념관 1동, 구국관 1동, 전적비,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등이 있는 현충 시설이다.. 김한주 영남이공대 여행·항공마스터과 교수는 "다부동전적기념관 일대가 미래 세대 안보 교육의 장이자 호국 관광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국가보훈부 등의 국가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매일신문=전병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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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23 16:01

[지난 주 '핫클릭' : 10. 15~ 20] 전주한옥마을이 위태롭다

△10월 15일~ 10월 20일 10월 셋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이준서 기자의 '[전주한옥마을이 위태롭다](3)타 지역은-다른 길 걷는 북촌과 수원화성'을 가장 많이 클릭했다. 이 기사는 전주 한옥마을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고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4차례에 걸쳐 조명한 기획기사 중 세 번째. 서울 북촌의 전통한옥촌과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의 사례를 살폈다. [전주한옥마을이 위태롭다] 기획기사의 첫 번째인 이준서 기자의 '[전주한옥마을이 위태롭다](1)실태-유원지로 전락한 한옥마을'도 방문자들의 많은 관심을 얻었다. 두 번째로는 이환규 기자의 '군산↔목포, 기차 타고 갈 수 있을까'이다. 이 기사는 군산시가 새만금군산 항만·공항과 함께 경쟁력 있는 국제·국내 교통물류 여건 조성을 위해 추진하는 '중장기 철도정책 수립' 용역을 다뤘다. 군산목포선의 경우 121㎞규모로, 군산(새만금)~부안~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를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이밖에 이준서 기자·서준혁 인턴기자의 '두 지자체 섞인 전북혁신도시 주차 대란 확연한 온도차, 불법주차 풍선효과까지', 이환규 기자의 '군산중·고 개교 100주년 기념 대규모 행사 개최', 엄철호 기자의 '익산 만경강 목천지구 파크골프장 증설 조성' 등이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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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수
  • 2023.10.21 13:44

[신팔도명물] 웰빙시대 세계인의 건강 신약(神藥)…‘진안홍삼’

마이산의 고장 진안군. 진안지역은 고원지대다. 지질학적으로 남한에서 유일하게 ‘고원’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지역이다. 평균해발 500m인 이곳은 고원지역의 기후적 특성이 나타난다. 일교차가 아주 심한 것이 그것. 이 때문에 진안에서 자란 인삼은 육질이 치밀하고 단단하다. 홍삼 제조 시 수율이 높은 이유가 된다. 면역력의 제왕식품 홍삼. 홍삼은 인삼을 수확한 후 쪄서 말린 가공품을 말한다. 색깔이 담황갈색 또는 담적갈색을 띠어서 ‘붉을 홍(紅)’자가 들어간 홍삼(紅蔘)이란 이름이 붙었다. 홍삼을 만드는 데는 전통적으로 6년근 인삼이 사용된다. 6년근으로 만드는 ‘진안홍삼’은 대체 무엇이 우수한가. 홍삼, 너는 누구냐 홍삼은 인삼을 장기 저장하기 위해 증기로 찌고, 건조하고, 숙성시킨 가공 식품이다. 홍삼의 약효가 주목받는 이유는 진세노사이드, 폴리아세틸렌, 페놀화합물, 폴리사카라이드 등 가공할 때 새롭게 생성되거나 증가하는 생리활성 성분 때문이다. 약리효과 면에서 인삼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진안홍삼의 특장점…높은 사포닌 함량 370년 전 진안 운장산에서 도를 닦던 일곱 은사가 산삼종자로 재배를 시작한 게 진안인삼이라고 전한다. 진안인삼을 원료로 만든 진안홍삼은 Rb1, Rg1, Rg3, Rf 등 유효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다. 이들 성분은 항암작용과 고혈압, 당뇨, 천식,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다. 진안홍삼은 단위 그램 당 사포닌(진세노사이드)의 함량이 확실한 비교 우위에 있다. 홍삼의 관심 폭발 효능 3가지 -효능1 : 면역력 증가 효과 2009년 후반 국내에서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릴 때 홍삼의 면역력 증가 효능이 부각되면서 그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사스, 메르스, 코로나19 시기에도 면역력 증가 효과에 힘입어 홍삼의 인기는 치솟았다. -효능2 : 아답토겐(Adaptogen) 효과 홍삼은 생체에 유해한 환경에 대해 방어능력을 증진시킨다. 또 건강하지 않은 육체에 대해 선택적 향상성(向上性)을 강화한다. 화학약품이 부분적 부작용을 수반하는 반면, 홍삼제품은 인체 전반에 복합적이며 근원적인 항진(抗進) 작용을 한다. 홍삼을 장기간 복용하거나 다량 섭취해도 무독한 이유다. -효능3 : 항피로(抗疲勞) 효과 최근 인삼 또는 홍삼의 효과 중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이 ‘항피로 작용’이다. 단기보다는 장기 투여 시 항피로 효과가 상승하고 단기 투여 시엔 다량 투여할 경우 그렇다는 사실이 K.H.Ruckert의 실험에서 밝혀졌다. 인삼이 홍삼원료 6년근으로 자라기까지 고려인삼의 형태는 부위별로 크게 뇌두, 주근, 지근, 측근, 근모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부위는 성장하면서 그 형태와 숫자가 해마다 변한다. 1년차엔 뿌리가 비대해지고 30~40개 지근이 난다. 2년차엔 보통 이식을 하게 되는데 이식 과정에서 지근이 끊겼다가 다시 나온다. 3년차엔 주근이 크고 지근의 수가 고정된다. 4년차부터는 주근이 비대해지고 지근 및 세근의 성장이 촉진돼 특유의 향이 완성된다. 홍삼으로 가공되는 6년근의 경우 뇌두 형태가 견실하고 동체는 7~10㎝, 직경 2~3㎝에 달하고, 몇 개의 지근을 가진다. 뿌리 전체의 길이는 34㎝, 무게는 40~100㎝가량이다. 7년 이상 되면 비대성장이 멈추고, 체형이 불량해지며 표피가 목질화 돼 가공할 경우 양질 홍삼이 되기 어렵다. ‘진안홍삼’ 브랜드, 품질관리 주체는 진안군수 ‘진안인삼’은 진안에서 자란 인삼을 가리키고, ‘진안홍삼’은 진안인삼으로 제조한 홍삼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표 등록이 되면서 ‘군수가 품질 인증한 제품’이라는 의미가 더해졌다. ‘진안홍삼’은 지난 2010년에, ‘진안인삼’은 지난 2016년에 지리적표시단체표장으로 등록됐다. 이후 ‘진안홍삼’은 군수품질인증제를 통해 철저히 품질이 관리된다. 진안군수가 품질을 인증하는 품목은 농축액, 추출액, 차, 절편, 정과, 분말, 환, 젤리, 사탕, 홍삼스틱, 복합형홍삼스틱 등 총 11가지다. 지금까지 품질인증을 받은 관내 업체는 70개가량, 인증 제품은 100개가량이다. 홍삼을 테마로 하는 진안홍삼축제 진안홍삼축제는 홍삼을 테마로 펼치는 유일한 축제다. 지난 2012년 벚꽃시기에 시작해 이듬해 시범 진행되다 2016년 제2기 지역축제심의위원회에서 진안의 대표축제로 자리 잡았다. 2019년 전북 최우수축제로 선정됐고 2023년 K-컬쳐 100선으로 선정됐다. 올해부터는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수삼, 건삼, 홍삼, 백삼, 태극삼 인삼은 크게 수삼과 건삼으로 나뉜다. 수삼은 밭에서 채굴한 상태의 수분 함량이 70%가량인 것, 즉 ‘말리지 전’ 인삼을 가리킨다. 4년근은 저년근, 5~6년근은 고년근이라 불린다. 수삼은 모든 인삼류의 원료가 된다. 반면, 건삼은 장기간 저장하기 위해 건조한 인삼, 즉 ‘말린’ 인삼을 가리킨다. 건삼은 다시 백삼, 태극삼, 홍삼으로 나뉜다. 홍삼은 인삼을 수증기로 완전히 쪄서 익힌 다음 건조시킨 것이고, 백삼은 껍질을 살짝 벗겨낸 4~6년근 수삼을 햇볕에 건조하거나 60℃이하 열풍 건조한 것으로 수분함량이 15%가량인 원형 유지제품이다. 태극삼은 수삼을 살짝 찐 원형유지 가공제품으로 홍삼과 백삼의 중간 형태다. 각국 삼(蔘)의 특징과 고려 인삼 사실, 삼은 우리나라 말고도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도 생산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삼은 사람모양을 하고 있어 인삼(人蔘) 또는 고려인삼(高麗人蔘)으로 불린다. 일본에서 자생한 삼은 대나무 뿌리 모양을 하고 있어 ‘죽절삼’이라 부르고, 미국 또는 캐나다에서 생산된 삼은 ‘화기삼’이라 부르며 원주형 모양을 하고 있다. 또 중국 운남성, 광서성 등 남부지방에서 생산된 삼은 ‘삼칠’이라 불리며 소형 당근 모양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삼(고려인삼)이 좋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서양삼(화기삼)이나 중국 전칠삼 등과는 종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적 여건이 우수한 생육조건, 즉 경작 위도가 삼 생육에 적합한 북위 36°~38° 사이에서 재배되기 때문이다. 고려인삼 가운데서도 진안인삼은 일교차가 심한 고원지역에서 자란다. 이 때문에 내부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며 고유의 향이 오래 간다. 홍삼산업 인프라 구축…세계 각국 진출 기초 체력 갖춘 셈 지난 2005년 홍삼특구가 된 진안지역은 2008년 홍삼한방산업클러스터로 선정됐고, 이어 홍삼산업을 위한 인프라가 속속 갖춰졌다. 홍삼한방타운, 홍삼연구소, 홍삼한방농공단지, 한약재유통시설, 홍삼스파 등이 그것. 이 같이 구축된 인프라에 힘입어 ‘진안홍삼’ 브랜드는 점점 소비자 인지도가 상승 추세에 있다. 진안홍삼은 소위 ‘잘나가는’ 홍삼 후발주자로서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한 기본기를 완전히 갖춘 셈이다. 전춘성 진안군수 "군수 품질인증제 엄격 시행…소비자 신뢰 점점 높여갈 것" 전춘성 진안군수는 “홍삼가공품에 대한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기 위해 지난 2012년부터 군수품질인증제를 도입해 유효성분 함량이 기준치를 넘는 제품에 대해서만 군수품질인증 마크 사용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그는 “매년 상·하반기 2회에 걸쳐 진안군 홍삼가공품 품질인증 신청을 받아 국내 유일의 홍삼 특성화 연구소인 진안홍삼연구소의 철저한 성분 검사뿐 아니라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제품을 인증한다”며 “소비자 신뢰를 높이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품질인증된 홍삼제품은 인증기간 동안 연 2회 수거 후 성분검사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속적인 품질향상과 고급화로 진안홍삼 브랜드를 세계적인 홍삼 브랜드로 육성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누구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데 건강 유지 수단으로 불로장생 명약인 홍삼, 특히 진안홍삼을 복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또 사포닌 함량이 가장 우수한 진안홍삼을 지인에게 권유하거나 선물한다면 주변의 건강을 챙기는 일이 될 것이라며 진안홍삼에 대한 두터운 믿음을 표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건강에 기여하는 하는 건강식품 대표 브랜드 ‘진안홍삼’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정배 홍삼한방클러스터사업단장 "면역력 증진의 대명사 이미지 구축…해외시장 개척에 힘쓸 것" “지난 2022년 초부터 3년가량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은 언제든 대유행할 수 있습니다. 홍삼이 면역력 증진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적극 알린다면 해외시장 개척이 쉬워질 것입니다.” 홍삼한방클러스터사업단(이하 사업단) 김정배 단장은 최근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는 “세계 홍삼시장은 아직 블루오션이다. 그동안 멈췄던 블루오션 진입을 위한 경주를 계속하겠다”며 “중국, 베트남, 미국 등에 지속적 진안홍삼 판매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각국 진출의 문을 계속 두드리겠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 독일과 같은 선진국이나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 등 동남아 국가는 물론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까지 진안홍삼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 단장은 “무척 고무적이다. 어쩌면 많은 나라에 진출할 수도 있다. 어디든 판매망만 확보한다면 전망은 매우 밝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에서도 진안홍삼은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선정위원회가 주관한 인삼제품 공동브랜드 부문에서 8번째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소비자 인지도가 많이 상승했다”며 “판매량 상승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희망을 피력했다.

  • 기획
  • 국승호
  • 2023.10.19 15:45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시한폭탄' 우주쓰레기, 그대로 두면 지구에 '펑!'

인공위성과 우주/픽사베이 Astronauts flying in spaceship explore galactic planets generated by AI과거와 달리 최근 밤하늘을 보면, 별은 온데간데없고 인공위성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렇게 밤하늘을 독차지해 버린 인공위성은 가끔 지구로 다시 추락하고는 한다. 언제 우리 집을 관통해 버릴지 모르는 우주쓰레기, 우주쓰레기의 위험성과 변화해 가는 사회 현상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NASA, "30년 후, 지구 우주쓰레기로 뒤덮일 것" 우주쓰레기란, 지구궤도 상에 떠다니나 이용할 수 없는 모든 인공 물체를 뜻한다. 주로 수명이 다해 작동하지 않는 인공위성과 우주 탐사선 혹은 로켓의 잔해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 더불어 위성이 부식되거나 충돌해 생긴 파편, 누출된 냉각제, 페인트 조각 등도 존재해 셀 수 없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언제 최초로 우주쓰레기가 생겼을까? 지난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면서였다. 이후 인류가 쏘아 올린 위성의 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만 약 3000대다. 현재 발사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특수 위성, 군사 위성까지 합하면 대략 7000대 이상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시점 기준으로 과학자들은 10cm 크기 이상의 우주쓰레기는 약 3만 4000개, 1mm 이상의 우주쓰레기까지 범위를 넓히면 약 1억 5000만 개로 추정한다. 이중 약 31%는 현재 가동 중이거나 퇴역한 위성이며, 38%는 기구 간 충돌로 발생한 부스러기, 17%는 분리되고 남아버린 로켓, 14%는 나사못, 부품 등 우주 연구 사업과 관련된 쓰레기다. 이 같은 현실에 미국항공우주국 NASA는 30년 후 지구는 우주쓰레기로 뒤덮여 버리고 말 것으로 추측했다. △50년간, 지구에 추락한 우주쓰레기는 약 5400t 지구 근처에 존재하는 우주쓰레기는 어떤 위험성을 가지고 있을까? 지구궤도를 비행하는 모든 물체는 약 7~10km/s 이상의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이에 인공위성의 파편이 매우 작다고 하더라도 인공위성과 충돌하는 물체에 가해지는 충격 에너지는 매우 높다. 그런 상황 속 최근 우주쓰레기가 된 우주선의 파편이 지구로 점차 추락하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러시아의 화상 탐사선 포브스-그룬트호가 태평양에, 2021년엔 중국의 우주발사체 '창정-5B호'의 잔해가 몰디브 인근 인도양에 추락했었다. 당시 창정-5B의 잔해가 한반도에 떨어질 것으로 알려져 정부가 경계경보를 발령하기도 했었다. 지난 50여 년간 대기권 진입 과정에서 연소 되지 않은 채 지상 혹은 바다에 추락한 우주쓰레기의 파편 총질량은 약 5400t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기술로는 우주쓰레기의 추락 시점과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다. 과거 우주쓰레기 추락 사례를 보면 대기권 재진입 6개월 전이라고 해도 10주 정도의 정밀도로 예측할 수밖에 없다. △최근 5년간 우주쓰레기 추락 사고 884% 증가 한국천문연구원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고장, 인공위성 파편, 임무 종료 등의 이유로 우주쓰레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최근 5년간 884%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이는 최근 민간 위성 등 인공우주 물체 발사가 늘면서 증가한 수치다. 최근 5년간 전 세계에서 발사된 인공 우주물체는 지난 2020년 1355대, 2021년 1876대, 2022년 2468대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구로 추락한 우주쓰레기 수도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20년엔 422개, 2021년엔 534개, 2022년엔 2461개로 폭증했다. 과학자들은 우주쓰레기의 추락 사례가 증가한 이유로 우주발사체 숫자가 늘어나며 지구궤도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우주 경쟁이 치열해지며 위성 발사 횟수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최근 '스페이스X' 등 민간 우주기업이 우주 인터넷망을 구축하기 위해 수천 개의 초소형 군집위성을 쏘아 올리고 있다. 한 번에 약 60개씩 발사하기도 해 위성 숫자가 많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자들, '지속 가능한 우주 활동' 주장 우주쓰레기의 위험성이 대두되자 지난 2007년 UN은 우주쓰레기를 감소시키고자 '우주쓰레기 경감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이후 우주 선진국들은 우주쓰레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주쓰레기를 직접 가져오거나, 청소 기술 개발 및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지난 1948년 미국은 최초로 우주쓰레기를 회수했다. 미국의 우주 왕복선 디스커버리호는 망가진 인공위성 팔라파 B2호에 접근해 최초로 우주쓰레기를 화물차로 가져왔다. 또, 지난 2020년부터 유럽우주국(ESA)도 로봇 팔이 달린 위성이 우주쓰레기를 포획한 후 대기권에 끌고 들어와 불태워 버리는 '클리어스페이스-1'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외에도 지난 3일, 미국 정부가 우주쓰레기를 지구궤도에 방치한 민간 기업에 처음으로 벌금을 부과했다.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자국 위성방송 통신사 디시네트워크에 '에코스타-7' 위성을 지구궤도에서 안전하게 이탈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금 약 2억 원을 부과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우주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우주 환경에 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지속 가능한 우주 활동을 이루기 위해 국제사회와 계속 협력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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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8 15:04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미래 지향으로 본 후백제] (25)   미래지향적인 후백제의 국가적 성격

△후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라는 역사 용어는, 일본인의 서술 중 “이로써 옛적의 고구려‧백제 두 나라가 부흥하여 서로 싸우는 삼국시대 재현의 양상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등에서 연유했다. 그러면 신라는 삼국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을까? 896년의 시점에서 “도적이 나라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 바지를 붉은 색으로 입어 스스로를 구분했다. 사람들이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고 일컬었는데, 주현(州縣)을 도륙하여 해를 입혔다. 서울의 서부인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고 갔다”고 했다.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난 무리들에게 경주 서부 지역까지 한번에 뚫린 것이다. 신라가 자위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905년의 시점에서는 “궁예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변경 읍락을 침탈해 죽령 동북까지 이르렀다. 왕은 땅이 날마다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는 깊이 걱정했으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여러 성주에게 명하여 나가 싸우지 말고 굳게 지키라고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왕명을 내린 대상을 ‘성주’라고 했다. 그런데 ‘성주’라는 이름 자체가 반독립 세력을 뜻한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해 정령을 집행하는 지방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왕명은 공허한 외침이요 허세나 의례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성주는 신라 왕의 통치력이 직접 미치지 못한 대상이었다. 906년 궁예의 군대는 후백제 군대를 물리치고 상주를 장악했다. 907년에는 “일선군(구미‧선산) 이남의 10여 성을 모두 진훤에게 빼앗겼다”고 하였다. 원 신라 지역에서 궁예와 진훤이 격돌한 것이다. 궁예의 영주 부석사 행차도 이루어졌다. 이 상황에서 신라 왕의 통치력이 행사되었거나 저항한 기록도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920년에 왕건이 신라3보를 거론한 것은, 신라로부터의 양위를 염두에 두었다는 징표였다. 상징성 외에는 의미없는 존재로 신라가 전락했음을 뜻한다. 그랬기에 신라는 927년 후백제군의 습격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뿐 아니라 전혀 대응하지도 못했다. 신라 왕의 통치력이 미치는 곳이 없었다는 반증이다. 경애왕이 전적으로 왕건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따라서 솥발이 버티고 있는 삼국 ‘정립(鼎立)’ 개념을 염두에 둔 ‘후삼국시대’는 적합하지 않다. 현재 한국 학계의 공식 입장은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통합에 대한 의지도 없이 단순 남북 병렬 상황을 남북국시대로 운위하기는 어렵다. 굳이 남북국시대론를 설정한다면 신라와 발해가 아니라 후백제와 고려 사이는 가능할 수 있다. 양국은 동일한 국가 영역에서 성립하여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였다. 고려 왕건은 후백제 진훤 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이것은 곧 내가 남인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었다”고 했듯이 후백제인들을 ‘남인’으로 호칭했다. 진훤 왕은 “군대는 북군보다 갑절이나 되면서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니”라고 하여, 고려군을 ‘북군’으로 일컬었다. 진훤 왕은 그러면서 “어찌 북왕北王에게 귀순해서 목숨을 보전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고려 왕을 ‘북왕’이라고 했다. 이와는 달리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일컬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를 ‘남인’‧‘북군’‧‘북왕’으로 불러 ‘남북국’의 대치를 상정할 수 있게 한다. 후백제와 고려의 대치 기간을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신라의 존재를 제시하겠지만, 진훤과 왕건이 주고받은 국서에서 공히 신라와 주周를 거론했다. 진훤은 “저의 뜻은 왕실을 높이는데 돈독하고”라고 하여 ‘존왕’ 곧 신라의 신하임을 자처하였다. 왕건은 “의리를 지켜 주周를 높임에 있어”라고 했다. 진훤과 왕건은 모두 신라를 주실(周室)에 견주었다. 익히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 춘추시대의 주실은 상징성만 있었듯이 당시 영역이 경주에 국한된 신라도 이와 동일했다. 형식상 주실이 엄존했지만 춘추시대로 일컫고 있다. 중국의 삼국시대도 엄연히 한실(漢室)이 존재했지만, 위(魏)·촉(蜀)·오(吳) 삼국의 역사로 간주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도 주周처럼 상징성만 지닌 신라를 제끼고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한 남북국시대로 설정해도 하등 부자연스럽지 않다. 현재 남한과 북한이 대치한 시대를 훗날 남북국시대로 설정한다고 해도 전혀 억지스러운 일은 아니다. 신라와 발해는 상대를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동질성도 분명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순히 남북으로 대치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북국시대를 운위할 수는 없다. 주지하듯이 ‘남북국시대론’은 본시 하나였던 정치체가 분열되었지만, 결국 통합을 위한 과도기로 인식한데서 등장한 용어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는 본시 하나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는 하나로 통합되지도 않았다. 고려에 의한 신라 통합과, 제3자인 거란에 멸망한 발해 유민의 흡수였다. 그 어느 하나도 남북국시대 용어에 부합하지 않았다. △미래를 지향한 국가, 지연과 혈연을 뛰어넘다 후삼국시대, 아니 남북국시대를 선도했던 후백제는, 신라 군인 출신을 수반으로 하고, 백제 유민들을 기층으로 한 국가였다. 6두품 출신들의 가세와 더불어, 다양한 세력이 정권에 참여하였다. 주민 통합과 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권 주도층의 범위는 경주 중심에서 전국으로 확장되었다. 소수 진골 귀족 중심의 폐쇄적 사회에서, 많은 이들에게 기회와 참여 폭이 넓은 사회로 넘어가게 하였다. 진훤의 참모들 가운데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전환기에 최치원‧최언위와 더불어, 이른바 3최崔로 일컫는 최씨 성을 가진 최고의 인텔리켄챠 가운데 하나인 최승우가 있다. 즉 “소위 1대 3최가 금방(金牓)에 이름을 걸고 돌아왔으니, 최치원이요, 최인연이요, 최승우라고 한다”고 했던 그 인물이다. 이 중 최승우는 공산 대승 직후 왕건에게 보낼 격서(檄書)를 작성한 당대 최고 문사였다. 최승우의 격서는 웅문(雄文)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신라가 기울어 가는 890년(진성여왕 4)에 당唐에 유학 가서 893년에 시랑 양섭(楊涉)의 문하에서 3년만에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서문을 쓴 <호본집(餬本集)>이라는 4‧6병려체 문장의 문집 5권을 남겼다. 『동사강목』에는 “최승우가 당으로부터 돌아오니 나라가 이미 어지러워졌으므로 드디어 진훤에게 의탁하여 ···”라는 글귀가 보인다. 최승우는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주군으로 진훤을 택한 것이다. 선종산문(禪宗山門)들과 더불어 사상계도 경주를 벗어나 재편되는 양상을 띄었다. 그럼에 따라 획일적인 의식과 통제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침울하고도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다양성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포착된다. 창의성과 더불어, 활기 넘친 약동하는 사회 면면이 후백제가 선도한 시대 기풍으로 평가되어진다. 아자개에 의한 농민 봉기와 진훤의 거병으로 인해 노쇠한 사회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활기찬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역주의를 뛰어넘고, 전통적인 폐쇄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회와 참여의 폭이 넓어진 사회로 넘어가게 한 시대가 ‘후삼국시대’였다.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이를 선도한 국가가 후백제였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고대사, 아니 한국사에서 후백제사가 지닌 위상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남북국시대’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분기점으로서 과거제 시행 후백제는, 실질적인 ‘남북국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20여 년 후인 958년(광종 9)에 과거제를 통해 중세로 넘어가는 교량 역을 했다. 과거제 시행으로써, 그 전까지 이어져 왔던 전통적인 지배세력의 권력 계승은 차단되었다. 혈연과 지연을 청산한 능력 본위의 시대로 한 걸음 다가선 것이다. 후백제는 승려들에 대한 과거(科擧)인 선불장(選佛場)을 시행하였다. 미륵사 개탑 30주년 기념으로 922년 선불장을 개최한 것이다. 후백제 선불장은 훗날 고려 승과와 상통하고 있다. 후백제 승과 시행은, 승려 선발 과거제를 넘어 인재 등용과 관련한 국가 조직 전반의 체계화를 뜻한다. 진훤 왕 주도의 과거제 실시를 상정할 수 있다. 최승우와 같은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유학파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제의 한 분과인 승과(선불장)만 별시(別試)로 치러졌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골품체제를 타파하고 기회 균등을 부여한 것이다. 이 점은 우리 모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시대를 선도했던 진훤 왕과 후백제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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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7 13:14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⑮포크가 만난 전라관찰사, 김성근

1884년 11월 10일 전주에 도착한 포크는 전라감영을 방문해 당시 50세였던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을 만났다. 김성근은 안동 김씨로 헌종1년(1835) 한성(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철종 12년(1861)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9년(1872) 성균관 대사성(정3품 성균관 전임 관원) · 좌승지(정3품 승정원=비서실, 호조담당)를 역임하였다. 1874년 이조참의(판서(장관)-참판(차관) 다음의 정3품 관직(차관보)를 맡았고, 1879년부터 예조 참판(종2품, 차관급) · 호조 참판 · 한성부 부윤(종2품 시장)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1883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서재필의 외숙(外叔)으로 서재필박사가 어린시절 한양 김성근 집에서 지냈다. 전라감사 김성근은 부임 후 흉년으로 피해가 큰 백성에 대해 휼전을 부과하고 신역을 탕감하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수재나 화재 발생시 구휼조치를 시행하였고, 특히 나주 등 10개 고을의 진결(묵힌 토지)에서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폐단을 해결하는 데 힘썼다. 또 1884년 초에 발생한 가리포민란을 조사하여 흉년에 탐관오리의 탐학이 더해지면서 민란이 발생하자 가담자와 부정관리 모두 법규대로 처리해고 하는 등 지방관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데 힘쓴 것으로 평가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임기가 만료되어 1884년 12월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고, 1885년 2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그런데 1885년 전라도 좌,우도암행어사 모두 김성근의 전라도 관찰사 재직시 규례위반과 공금 유용 혐의로 징계를 올려 의금부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결과 어사의 규탄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임금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복직되어 공조, 형조, 이조, 예조 등의 판서직을 두루 거쳤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5월24일 예조판서로서 조경묘와 경기전 어진 배봉문제로 전주에 왔었다. 1903년 탁지부(재정부) 대신을 거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후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김성근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관련 행적이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김성근의 말년 행적은 전형적인 조선지배세력 중 일제에 투탁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보여준 사실을 보여주었다. 1913년 다나까 세이고우(田中正剛)가 편찬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에서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풍채가 훌륭함, 높고 귀한 관직을 두루 지냈으되 청렴함으로 스스로를 지켰고 필법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나이가 현재 팔순인데도 여전히 완력이 웅건한 까닭에 높은 명성이 일세에 뚜렷이 드러난다고 평하였듯이 서예에 뛰어난 면모를 보여 <근역서화징>에 글씨가 전한다. 1919년 사망하였다. △전라감사 김성근, 자신의 환생관련 이야기를 포크와 나누다. 1884년 11월 11일 전라감영에서 다시 만난 전라감사 김성근은 포크와 다양한 주제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출생과 관련되어 전주의 승려가 환생하여 자신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포크에게 전했다. ”꽤 많은 대화가 이어졌고 점점 동양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그는 얼마 전, 전라도의 어느 산속 동굴에서 발견된 50년 된 종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 거기에는 “나는 불교 승려 ○○이다”라는 글에 이어 50년 전 날짜가 쓰여 있었고 이어서 “나는 (그 날짜)에 태어나서 전라도의 감사가 됐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다”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쓰인 날짜가 그의 계산에 따르면 자신의 생일 해당 월과 일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말했다. ... 그는 오래되어 노랗게 변한 종이를 내어놓았다. 그리고 나를 위해 번역해 주었다. 그는 이런 일이 불교적인 환생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미국)에도 이런 일이 있는지 등, 내 생각을 물었다.“ 이 내용은 매우 독특한 기록으로 포크의 기록과는 별개로 당시에도 이미 불교 환생담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었다. 즉, 앞서 소개한 <조선신사보감(朝鮮紳士寶鑑)> 1913년에서 김성근에 대한 내용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김성근)씨는 출생전에 전주군 원암산 원등암(遠燈菴)(현 완주군 소양면 청량산 '원등사') 석함속에 보관된 글 가운데 원등암의 승려 해봉(海峯)은 이름이 성찬(聲贊)인데 모년 모월일에 한성의 재상 김모로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김성근)씨는 호를 해(海)자를 사용하였고 이름에는 성(聲)자를 사용하였으니 기약치 않았으나 서로 부합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왕수인(王守仁)고사와 비교해 말한다. (氏出生前 全州郡猿岩山遠燈菴石盒中 有藏書曰本菴僧號海峯名聲贊某年月日書 後身爲漢城宰相金某云 氏號海字 名聲字 不期相符 世人以此比王守仁故事) 이 내용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서예가로서 활동한 김성근의 독특한 환생담을 일본인들도 흥미로와하며 기록한 것이다. 이 내용이 남겨질 정도로 이미 당시에도 많이 회자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유사사례로 소개한 왕수인(王守仁)고사는 중국 명대(明代) 대표적 철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양명학을 정립한 왕양명의 환생담이다. 즉, 왕양명이 제자들과 함께 중국 절강성의 진강(鎮江) 금산사(金山寺)를 방문하였다가 50년전에 돌아가신 스님이 자신으로 환생하였다는 게송(偈頌;스님이 돌아가시며 남긴 글귀) 기록을 발견한 사례와 김성근의 환생담 내용이 같다는 말이다. 전라감사 김성근이 포크에게 보여준 50년전 종이 기록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암산에 원등암(遠燈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이곳에 해봉이라는 주지가 있었다. 해봉 스님이 1834년 입적하면서 원등암 석굴에 조그만 석함을 두면서 “이 석함은 전라 감사로 부임하는 사람만이 열 수 있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들은 전라감사 김성근(金聲根)이 원등암을 찾아 석함에서 7언 4구절로 된 한시가 적혀 있는 서한봉투를 얻었는 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원암산의 붉은 해가 서울 도성에 떨어져 재상의 몸을 받게 되었으니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스님이지만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이 되도다 (遠岩山上 日輪月 影墮都城 作宰身 甲午以前 海奉僧 甲午以後 金聲根) 도광 14년(1834) 갑오 5월 15일 해동 사문 해봉 성찬이 원등암 16 굴 중에 향피고 묻어두다. 이후로 해봉스님의 이름을 따고 선비 정신을 기리는 뜻을 담아 호를 해사(海士)라 했으며. 많은 절을 찾아 다니며 부산 금정산 범어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구 팔공산 범어사 등 수많은 사찰의 편액의 글씨를 남겼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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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10.16 15:34

대한적십자사 김철수 회장 "전북도민 자부심 고취시키고픈 마음"

“국민과 밀접하게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새로운 적십자’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대한적십자사 김철수 회장(79·김제·사진). 지난 8월 17일 취임한 김 회장이 대한적십자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적십자사의 지속가능한 공공의료 기반 확충, 혈액사업 활성화와 함께 조직문화 변화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취임 직후 본사 신입 사원부터 본부장급 직원들을 일일이 만나 새로운 일하는 방식과 태도, 조직문화 등을 주문하며 변화를 이끌고 있다. 또 이달 4일에는 그의 핵심 사업중 하나인 헌혈 캠페인을 고향인 전북에서 첫 번째로 개최하는 등 자신의 구상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있다. 매일 새벽 3시에 기상,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돌아본 후 오전 8시에 적십자사로 출근하는 등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는 그를 서울 중구 대한적십자사 서울사무소 회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회장직을 맡게 됐다’는 그를 만나 향후 운영 구상과 비전을 들어봤다. - 취임 2개월을 맞고 있는데,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문은. “코로나19로 기부·헌혈·봉사 등 인도주의 활동이 축소된 부분이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을 정상적으로 회복하려 합니다. 또 적십자의 낡은 규정이나 지침이 없는지 살피면서 그동안 잘하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변화하는 사회와 인도적 환경에 발맞출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적십자 미래발전위원회’를 발족할 예정입니다. 위원회에는 학계·재계·시민단체, 전·현직 적십자 임직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해 외부에서 바라보는 적십자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새로운 발전 방안을 찾으려 합니다. 특히 △지속가능한 공공의료 기반 확충 △혈액사업 활성화 △조직문화 변화 △남북 인도주의 현안에 대한 해결방안 모색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 취임사에서도 ‘경쟁력 있고 미래지향적인 조직으로 변화’를 강조했습니다. “적십자는 다양한 일을 해온 만큼 정말 다양한 구성원들이 적십자 사업에 참여하고 있죠. 미래 지향적인 조직으로의 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내부 공감대 형성입니다. 이를 위해 가급적 더 현장을 찾아가 구성원들과 소통하려고 합니다. 본사에 갓 입사한 1-2년차 신입 사원부터 본부장급 직원들까지 일일이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애로사항을 경청했습니다. 공감하는 조직문화와 더불어 일하는 방식과 태도도 변화해야 합니다. 솔선수범하고 먼저 달려가는 능동적이고 열려있는 자세를 갖고 뛰겠습니다. 공직윤리에 대한 국민의 기대가 높아지는 만큼 청렴한 조직문화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기관장과 고위직 직원이 정기적으로 ‘부패방지시책 협의회’를 열어 조직의 부패 취약 분야를 자체적으로 점검하고 개선하며 다양한 청렴 시책을 발굴해 전개하는 등 부정부패 예방에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 고령화·저출산 등으로 헌혈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국의 대학교를 비롯한 기업, 공단, 단체를 찾아서 헌혈을 요청해 전국적인 헌혈 붐이 일어날 수 있도록 헌혈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달 4일 전북도청에서 ‘전라북도 도민 헌혈의 날’ 선포식을 가졌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10월 25일까지 헌혈 릴레이를 진행하는 등 전국으로 확대할 나갈 예정입니다. 또 다회헌혈자 포상 확대 및 실질적인 혜택이 부여될 수 있도록 정부, 자치단체 등과 협의하고, 헌혈자 사기 진작을 위한 문화행사와 모임 등을 확대해 헌혈자 분들이 존경받고, 예우받는 헌혈문화가 형성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헌혈의 집이 미설치된 지역을 중심으로 신규 헌혈의 집을 확충해 헌혈 장소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헌혈의 집 시설 개선과 노후버스 교체사업을 통해 보다 쾌적한 헌혈 환경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의사와 간호사 등 현장의 적정 의료 인력 확보에도 주력할 예정입니다.” - 전북에서 헌혈 릴레이를 시작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가슴이 따뜻한 전북도민들과 전국에서 최초로 대규모 헌혈 릴레이를 시작해 헌혈문화를 확산하고 전북도민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픈 마음이었습니다. 올 여름 개최됐던 ’새만금 잼버리’ 파행 운영으로 전북도민들의 상실감이 무척 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겨진 자존심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전국에) 도민들의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김관영 전북도지사에게 요청했는데, 김 지사가 흔쾌히 수용하면서 성사됐습니다. 전북도의 헌혈 캠페인을 시작으로 저출산·고령화로 어려움을 겪는 혈액수급에 도움이 되고 헌혈문화가 확산되길 바랍니다.” - ‘적십자회비 지로용지’ 발송 대상이 최근 5년간 적십자 회비 후원 실적이 있는 가구로 한정되면서 신규 모금 회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적십자사가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적십자사는 국민들께서 참여해주시는 회비로 인도주의 사업을 수행에 쓰고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시대변화에 맞춰 인도주의 활동을 위한 안정적인 재원 마련을 위해 중장기 모금전략을 수립하여 모금 시스템 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적십자회비 모금을 후원회비 중심으로 확대하고, 회원들에 대한 예우 관리 또한 강화할 것입니다. 나아가 시대변화에 발맞춰 국민 여러분이 기부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모바일 전자고지, 온라인 모금 플랫폼 활용 등을 통한 디지털 모금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내년 회비 897억, 2027년에는 1000억 달성을 목표로 인도주의 활동을 위한 재원 마련에 힘쓸 계획입니다. 저 또한 취임 후 1억 원을 기부하고 영업사원처럼 적십자 모금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 - 인도주의 활동 외에 기후위기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요즈음 화두가 기후위기입니다. 대한적십자사가 재난구호 전문기관이라 현장구호와 대응활동을 잘하고 있지만, 내부 구성원에 의한 체계적인 활동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파악했죠. 회장으로 취임해 출근한 첫 날 본사 ‘ESG(환경·사회·지배구조)위원회’를 발족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을 위해 우리 직원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했습니다. 당장 저부터 일회용품 안 쓰고 전기 아껴쓰기,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등 소소한 것부터 실천하고 있습니다.” - 운영하고 계신 양지병원은 서울 서남부권 대표 병원으로 자리 잡았는데, 개인 의원을 종합병원으로 성장시킨 비결은. “질병 치료는 환자 마음 치료가 우선입니다. 물리적 진료와 처방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환자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며 병 치료를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가치와 철학으로 병원을 설립, 운영해 왔습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병원 환경 경쟁 구도가 심화되고 의료 환경과 의료서비스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상황에서도 정도를 걷는 자세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이 필요했고, 그것을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병원이 아닌 가장 ‘좋은 병원’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인데, 병원 가치 철학인 ‘따뜻한 마음, 앞선 의학’을 실천할 좋은 의사를 발굴하고 젊은 의사들이 성장하도록 병원 진료환경을 잘 정비했고, 마음껏 의술을 펼칠 수 있게 양적·질적 의료지원 프로그램을 펼친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서울권 중소병원 중 가장 우수한 의료진과 의료역량을 보유하게 된 것도 지난 50년 가까이 환자 경험 및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해 진료센터 중심의 의료역량과 치료시스템 최적화, 적극적으로 질병치료 해법을 찾기 위한 연구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 의사로서 갖고 있는 좌우명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환자를 대하는 따뜻한 마음이 없는 의사는 명의가 아니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평범한 의사는 그저 병을 치료하고 질병 치료를 위해 연구하는 자세를 추구하지만 명의는 환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환자 아픔을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사람을 존중하는 기본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 아픔을 공감하고 어느 곳에 있어도 환자와 소통하며 환자가 병을 이겨낼 수 있게 용기를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의사입니다.” - 오랜 기간 현장에서 활동해온 의료인 입장에서, 지방 의료위기를 어떻게 보시는지. “산부인과, 응급의료 등 지방에 꼭 필요한 필수의료분야의 병원과 의사가 부족하고 환자들은 장거리 원정 진료를 다녀야 하는 상황입니다. 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이 의료계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지만,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어 해법이 쉽지 않습니다. 2022년 건강보험통계에 따르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서울이 3.47명인데, 충남은 1.53명 경북은 1.39명으로 지역별 의료인 편중이 심각합니다. 지역 내 질 높은 필수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서는 의료인력 확충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지역 의대 신설, 공공의대 신설은 지역 공공의사 확보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실화 우려가 있습니다. 따라서 기존 지방 의과대학을 활용, 의약분업 이전 수준의 입학정원으로 조정하며 해당 인력이 필수의료의로 유입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지방의 의료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국가와 지방정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합니다. 의료기관과 의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지방은 필수 의료서비스 제공도 힘든 처지입니다. 지역 의료기관 협력체계 구축을 위해 경쟁 구도를 줄이는 방안과 각 종별 의료기관 역할 분담을 명확하게 하고, 중소병원이 지역 필수의료를 담당하도록 정책적·재정적 지원과 배려가 절실합니다. 특히 필수의료 구체적 계획을 마련할 때 의료기관과 경쟁이 아닌 지역 내 의료기관의 역할 제고와 의료자원의 효율적 배분, 협력체계로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고민하고 계신 대안은 있는지. “의사 수 부족의 관점이 아닌 의료인력 재배치를 통한 솔루션도 검토해야합니다. 현재 은퇴한 시니어 의사가 대략 6500명가량인데, 이들을 공공의료기관과 매칭하면 인력 부족 현상을 일부 커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지방 의료대란의 개선 방향은 장기적 목표와 단기적 목표를 설정, 장기적 부문은 정부 주도의 정책과 제도 개선으로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고, 우선 달성해야 할 단기 목표들은 현장 의료진 목소리를 최대한 방영해 적용 가능한 기본 실행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최근 소아청소년과 진료 대란과 오픈런, 응급의료 붕괴 이슈는 출생률 저하와 소아청소년과 병원 폐업 사태, 전공의 지원율 하락, 응급실 과밀화 현상 등을 원인으로 분석하지만 이들 필수의료 해법을 풀기 위해 정부와 보건당국은 지역 의료 강화를 위해 과학적 근거 기반을 세우고 적정 의사 인력 확충 등 관련 가이드라인을 하루 빨리 설정해야 합니다. 또한 지방 의료인력 양성 지원시스템 확대로 의사 양성 소요 비용을 미국, 일본, 독일 등과 같이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우수 지역 의료인 양성을 국가가 직접 챙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근무 의료진 확충과 지원 시스템 강화를 고려해 이들이 마음 편히 근무할 수 있는 정서적 환경도 중요합니다. 인센티브를 늘려주고, 쾌적한 업무환경 개선과 형평성 등 여러 논의를 거쳐야 할 사항이지만 지역 전공의들의 주거 제공과 병역혜택을 부여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김철수는... 1944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으며, 3살 때 익산으로 이주해 초(이리초)·중(·이리 동중)·고(이리고)를 익산에서 다녔다. 김 회장의 누이는 익산에 거주하고 있다. 전남대 의대(내과) 졸업 후 서울대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연세대에서 행정학 석사와 단국대 복지행정학 박사, 경희대 법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의료 및 복지행정 분야 전문가로도 불린다. 석·박사 과정 중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석이 없을 정도로 열성적이었으며, ‘사람 사는 게 복지’라는 생각에 복지행정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1976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김철수 내과로 의료활동을 시작해 1980년에는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을 개원하고, 올해엔 의료법인 효천의료재단으로 출범했다. 개원 47년째인 양지병원은 현재 의사 120명 포함 총 1130명의 직원을 보유한 중견병원으로 성장했다. 장남인 김상일 병원장이 지난 2020년 3월 코로나19 시기에 세계 최초로 ‘워크스루 선별진료소’를 개발해 화제가 됐다. 특허청 요청으로 ‘K-워크스루’ 기술로 특허를 받기도 했으며, 워크스루 선별진료소는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전 세계 주요 외신에 보도될 만큼 코로나 방역에 큰 공헌을 했다. 그 공로로 코로나19 대응 유공 부문 대통령 표창, 2020서울특별시 안전상 등을 수상했으며, 2021년에는 국제병원연맹이 주관한 ‘IHF AWARDS 2021’에서 국내 의료기관 중 유일하게 수상했다. 진료활동 외에 소외된 이웃과 지역주민을 위한 의료봉사, 저소득 환자 치료비 지원사업, 장학금 지원사업 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쳤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목련장, JW중외 박애상, 일동의료법인 사회공헌 봉사대상을 수상했으며, 대한병원협회 회장, 대한에이즈예방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대한병원협회 명예회장,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장을 맡아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현재도 5개의 신문을 구독하고 있으며, 인터넷 등을 통해 각종 사회 현안 및 이슈를 접하고 있다. 자녀들에게는 섬김의 리더십과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은 중용을 강조한다.

  • 기획
  • 김준호
  • 2023.10.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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