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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⑭ 포크, 전라감영의 신비롭고 위엄있는 문화에 최대의 경외심을 표하다.

△포크, 기묘한 전라감영 기생들의 북춤에 매료되다. 전라감영에서 포크가 경험한 대표적인 문화적 행사는 ‘춤추는 소녀인 기생들의 ’북춤‘이었다. 포크가 경험한 전라감영의 공식 환영행사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선화당의 커다란 대청으로 연결된 방문이 열리고 키가 큰 6명의 토속 악단(3현6각)이 툇마루에 자리 잡은 모습이 보였다. 이어 어마어마한 가채를 머리 위에 올린 화려한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 둘이 들어왔다. 한 명이 두 개의 나무패(박)로 손뼉을 치듯 소리를 내자 네 명의 소녀가 어여쁘게 차려입고 열을 지어 뒤편에서 천천히 들어왔다. 각각 10인치(25cm) 높이에 적어도 18인치(46cm) 넓이의 머리카락 뭉치를 머리위에 쌓아올려 그 무게 때문에 고개를 똑바로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명은 녹색 치마를, 한 명은 어두운, 다른 한 명은 연한 푸른색 치마를 입었다. 치마는 길고 풍성했으며 뒤로 질질 끌렸다. 그리고 치맛단을 팔 아래 몸통까지 바짝 올려 묶었다. 치마 위로는 노란색 비단 겉옷을 입었다.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다. 빨강, 파랑, 녹색, 노랑, 그리고 하얀색의 띠로 이루어진 곧고 넓은 소매가 달렸다. 길고 축 늘어진 노리개와 두꺼운 붉은 끈들로 몸을 두르고 있었다. 소녀들은 무척 어렸다. 16-17세가 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몹시 창백한 얼굴에 그다지 예쁘지는 않았다. 악단이 기묘한 음악을 시작하자 뻣뻣하게 팔을 내민 채 천천히 미끄러지며 몸을 돌리는 동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루 한가운데에는 노랑, 파랑, 그리고 하얀색 비단 띠로 장식된 커다란 북이 놓였다. 그 주변으로 무용수가 움직였다. 얼마간 한 줄로 움직이다가 다시 짝을 이뤄 마주보다가 등을 졌다. 그러더니 사각형으로 움직였다. 빨간 술이 달린 북채 네 쌍이 바닥에 줄지어 놓였다. 얼마 후, 소녀들이 줄을 이뤄 북채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자세를 바꾸다가 손에 주워들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북 앞에 도달했고 다시 느린 동작으로 북 주변을 움직였다. 그러더니 곧 함께 북을 치기 시작했다. 매우 천천히 미끄러지는 듯한 무용수의 춤 동작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 춤 사진에 대한 위스콘신 대학 밀워키 도서관 자료 설명에는 “South Korea, dancers performing tongyong drum dance (victory dance): 한국의 통영북춤(승전무)을 추는 무용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포크는 ”자신을 감화시키기 위한 북춤(drum dance for my edification)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궁중잔치 때 춤추었던 대표적인 춤인 ‘무고(舞鼓)’의 내용으로 외방 관아에서도 관련 기녀들이 교류되어 연주한 북춤이다. 지방에서 행해진 것 중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통영의 승전무가 대표적으로 부각되어 위스콘신 대학 설명에서 통영 승전무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확히는 조선후기 의궤(儀軌)에 기록된 ‘무고(舞鼓)’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조선후기 전국 지방관아 소속 교방에서 연행되던 대표적인 춤의 내용으로 ‘전라감영 무고’로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 춤에 대해 포크는 “가장 동양적이고 원초적”이란 표현으로 자신이 느낀 기묘한 신비감을 표현하였다. △전주 한정식의 원류 전라감영 음식과 술상을 받다. 한편, 공연이 끝나고 포크가 유리원판 사진을 찍은 후 음식을 가득 쌓은 두 개의 상이 들어와 식사가 진행되었다, 이 상은 1상에 10명이 먹을 만큼 많은 음식이 배열되어 있었고 예전에 큰 잔치때 상에 수둑히 쌓았던 당과더미 등으로 가득한 상차림이 특징이었다. 이 내용은 송영애교수(전주대)가 연구한 ‘전라감영 외국 손님 접대 상차림’에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별도의 술상이 마련되어 앞서 춤을 추었던 기생 중 한명이 대표로 술을 권하고 나머지 기생과 함께 길게 소리높여 ‘권주가’를 불렀다. 포크가 통역을 통해 그 내용을 그대로 적었는 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대의 황제[한 무제]는 아침 이슬을 모아서 마시고 장수를 누렸습니다. 이는 술이 아니라 불로주입니다. 마음을 다해 마시고 천세를 누리소서.” 이 내용은 <청구영언>이나 <가곡원류> 등에 전하는 십이가사 ‘권주가’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필자가 확인한 전주에서 불린 권주가와 가장 유사한 내용인 부산지역에 전승된 권주가는 다음과 같다. “잡수시오 이 술 한잔 한무제 이슬받은 이 술 한잔 천만년 잡수시오 잡수시오 술이 아니라 승로반(承露盤:이슬 받는 그릇)의 것이오니 잡수시면 장수하오니라”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술상을 치우자 기생 한 명이 문간으로 나서더니 다른 소녀들과 함께 길고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다 잡쉈소(Ta-chap-susso)!” 외침소리는 관아의 남자들이 합창으로 받아 전해졌다. 포크는 이 모든 것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즉, 1884년 11월 10일-12일 2박 3일간의 전라감영 도시 전주를 방문해 다양한 경험을 한 포크의 한마디 인상은 ‘경외심’이었다. 그가 전라감영에서 보고 접하고 느낀 수 많은 상황들은 그에게 “신비로운 동양적 전제국가의 문화적 위엄에 경외심을 갖게하는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내가 앉은 곳에서 보는 광경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장면보다도 더 동양적이고 원초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기묘하게 흥겨운 춤을 추는 소녀들, 우뚝한 기단 위의 관아건물(선화당), 용, 호랑이, 커다란 북, 붉은색 기둥, 창과 무기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채 이리저리 움직이는 무리들, 문 옆에 초록색 옷을 입고 일렬로 선 소년들 - 이 모두가 모여 내가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 하나의 멋진 장관을 만들었다.“ 포크는 전라감영 전체 공간에서 풍겨 나오는 위엄과 아우라, 그리고 동양적 신비로운 의복과 색감, 형언키 어려운 음식과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음악과 춤 그리고 각종 의전 등에 흠뻑 빠져 자신이 경험한 아시아의 대표국가 중국이나 일본 어디에서도 이 같은 경험을 할 수 없었음을 극찬하였다. 이러한 전라감영관련 기록은 포크가 이전, 이후 타 지역을 조사하며 남긴 기록들과는 엄청난 질적 내용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조선 각 지역에 대한 객관적 기록을 남기며 여러 부정적 내용도 그대로 기록한 사례들과 비교할 때 전라감영에 대한 감동적인 느낌을 그대로 남긴 기록은 전라감영을 복원하고 새롭게 재창조하자는 현재 우리의 목표와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학 학장

  • 기획
  • 기고
  • 2023.09.18 16:35

윤여봉 경진원장 "경진원 신뢰 회복...실질적 지원에 '앞장'"

코로나19 이후 3고 현상(고물가·금리·환율)까지 덮치면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중소기업·소상공인. 이러한 중차대한 시기에 제14대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장으로 삼성 출신의 윤여봉(58) 원장이 지난달 31일 취임했다. 윤 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이하 경진원) 자체적으로 '기업 속 프로젝트'를 기획해 추진 중이다. 매주 도내 14개 시·군에 위치한 중소기업 등을 직접 방문하고 기업 애로 해소를 위한 지원방안을 모색하는 등 기업과 스킨십을 강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중소기업·소상공인이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지원사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다. 취임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업무 파악뿐만 아니라 지역 중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윤 원장. 본보는 윤 원장을 만나 취임사를 통해 강조한 기관 쇄신과 경영 투명화, 전북에서 경진원의 역할, 앞으로의 계획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취임 축하드립니다. 소감과 포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경기불황이 심각한 오늘날, 지역경제의 중추 기관인 경진원장으로 취임하게 돼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도전과 경험을 할 수 있게 돼 감사하기도 합니다. 경진원은 현장에서 경제 정책을 집행하는 수행기관인 만큼 현장에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늦장 부리지 않는 '스피드 경영'과 모든 상황의 변수까지도 생각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시나리오 경영'으로 경진원을 이끌겠습니다." 취임하시기 전부터 계속해서 전북 경제상황을 파악하셨을 것 같은데요. "전북은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고 농도의 전통이 강했던 만큼 투자 인프라, 네트워크 등 산업 여건이 아주 취약합니다. 지역내총생산(GRDP)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2010년대 충북, 전북을 비교해 보면 충북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전북은 느리게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GRDP는 충북은 70조에 육박했지만 전북은 55조입니다. 안타깝게도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전국에서 전북은 1인당 GRDP·하위권에 해당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도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인지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진원도 그 뜻에 동의하고 함께 할 계획입니다." 취임사 통해 기관 쇄신·경영 투명화를 강조하셨는데요. "경진원은 제1대 본부장(원장) 취임 이후 22년 동안 지역 중소기업·소상공인의 베스트 파트너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제는 돌아볼 때입니다. 정말로 경진원이 실질적인 지원사업을 해 왔는지, 효과 없는 지원사업을 추진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묻고 진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소상공인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원사업을 추진하자, 더 나은 기관을 만들자는 의미입니다. 과감하게 개선할 것은 개선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받아들이고 경진원의 비전, 미션, ESG 경영 운영 등을 토대로 전략 방향을 정하고 과제를 수립해 세부적인 실천 계획을 세우겠다는 입장입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먼저 두 달 내에 내부 조직 진단에 나선다고요. "대내외적으로 저희 경진원의 쇄신과 혁신 요구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경영 투명화를 토대로 신뢰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노력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는 조직의 피로도가 따르는데 직원들 역시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경진원은 최근 중장기 발전 TF를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TF를 통해 조직원이 스스로 경진원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진단해 기관의 발전 방향을 도출할 것입니다. 두 달 내로 결과물을 홈페이지와 대회를 통해 제시할 예정입니다. 경진원의 새로운 미션·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도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소상공인이 3고 현상으로 어려움이 많은 만큼 경진원의 역할이 정말 막중할 것 같은데요. "경진원은 넓은 사업 스펙트럼을 가진 곳입니다. 경제 위기 때마다 전라북도와 함께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위기 극복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중소기업·소상공인이 탄력적으로 적응·대처할 수 있도록 경제 안전망 역할을 하겠습니다. 중소기업을 위해서는 가장 애로사항이 많은 '수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수출통상닥터 멘토단을 구성해 중소기업과 일대일로 매칭할 생각입니다. 또 코로나19 어려워지면서 기술·인력·자금 지원 등이 필요한 소상공인들을 위해서 소상공인 창업 펀드 조성 등에 앞장서겠습니다." 재임 기간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정책이 있다면요. "민선 8기 도정에 발맞춰 전라북도·전북도의회와 소통하며 사업을 운영해 나가려고 합니다. 특히 다들 전북특별자치도의 출범을 앞두고 미래 유망사업의 대규모 투자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경진원도 함께 발맞추려고 합니다. 미래 성장산업 기술 지원을 위한 기술 펀드, 소상공인 창업 지원을 위한 창업 펀드 조성 등에 힘쓰겠습니다. 펀드를 통해 투자를 활성화하고 역동적인 창업 생태계를 구축해 도내 중소기업·소상공인이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습니다." 앞으로 경진원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건가요. "내년 1월을 Big January, 말 그대로 또 다른 출발이라고 생각하고 12월에는 경진원 조직 구성원 팀별로 끊임없이 사업을 제안하는 사업 제안 경진대회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우수한 사업에는 상도 주고 해당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경진원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이렇듯 일은 저와 직원들, 조직 구성원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적 중심의 공정한 평가를 통해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고 직원 역량 강화 등을 통해 전문성을 강화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장 중심의 사업 운영을 통해 중소기업·소상공인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지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 중소기업·소상공인 분들에게 한 마디만 한다면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베스트 파트너의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진원'입니다. 경진원의 문지방이 닳도록 많은 중소기업·소상공인부터 도민분들까지 문을 두드려 주시고 찾아 주셨으면 합니다. 잘하고 있는지 감시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투명하고 선진적인 경영 체계를 마련해 중소기업·소상공인분들께는 실질적인 지원을, 도민분들께는 신뢰를 주는 경진원이 되겠습니다. 경진원이 하는 일에 대해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따끔한 질책을 해 주시고, 잘했을 때는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윤여봉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장은 전주 출신으로 전주 해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윤 원장은 30여 년간 삼성물산·삼성전자에서 UAE·사우디 법인장, 중동 총괄 마케팅팀장, 무선사업부 중동본부장 등을 지내 김관영 전북도지사가 주력하는 기업 유치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최초 무슬림 무역관장으로 중동지역에서 얻은 풍부한 근무 경험과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 기획
  • 박현우
  • 2023.09.17 17:16

[지난 주 '핫클릭' : 9. 10~ 15] 오늘 점심 '원조' 전주콩나물국밥 어때?

△9월 10일~ 9월 15일 누가 하늘을 깨물었나. 새벽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소슬히도 흩뿌린 9월 둘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유대성 전주왱이콩나물국밥전문점 대표의 칼럼 '전주콩나물국밥의 원조는요'를 가장 많이 클릭했다. 전주콩나물국밥 원조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멀리서 찾은 여행객에게, 유 대표는 "전주시내에 콩나물국밥집들은 다 자부심을 가지고 개성있고 정직하게 국밥을 만들고 있거든요"라며 꿋꿋이 한 길을 걸어왔을 여럿 콩나물국밥집을 향한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전주의 맛'에 대한 유 대표의 식견이 예사롭지 않고, '낮추니 높아지는' 기품이 있는 글이 맛있다. 유 대표는 전북일보 새벽메아리 2023년 하반기 필진. 두 번째는 송승욱 기자의 '지역 곳곳 빛의 향연’ 익산 야간관광 시대 활짝’이다. 이 기사는 익산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페스타, 익산서동축제 등 가을밤을 빛으로 수놓는 '야간관광'을 소개했다. 이어 '힙한 거리축제로 익산 영등상권 들썩'도 인기를 끌었다. 이 기사는 지난 2일 'EDM 페스티벌'에 이어 8~9일 이틀간 열린 '다다영등 얼맥축제'에 1만 7000여 명이 방문, 거리축제가 연이어 성공하면서 상권 제2의 부흥에 시동을 걸었다고 진단했다. 익산시의 'MZ 감성 상권 활성화' 전략이 주효했다는 평가. 이밖에 송승욱 기자의 '집 안에 꼽등이 출몰, 익산 불편 사례 급증', 이종호 기자의 '50주만에 멈춘 전북 아파트 가격 하락세', 이환규 기자의 '군산말랭이 마을, 문화·예술로 관광객과 소통하다'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9.16 13:44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기적의 건강법, 맨발 걷기 열풍

비 내리는 점심시간,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잠시 주춤했다. 이때였다. 우산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맨발로 걷는 선생님들 모습이 신기한지 아이들이 하나둘 씩 모여들었다. 운동장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발을 벗고 뛰어 들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우산 위에서 톡톡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이들에게 발바닥이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말랑거리는 흙 느낌이 좋다고 했다. 아이들은 노래까지 부르며 즐거워했다.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이렇게 우리 학교 아이들이 처음으로 맨발로 걷는 체험을 했고 교사들은 건강을 위한 ‘맨발 걷기’ 운동에 입문했다. 비가 그치면서 다시 찾아온 삼복더위에 점심시간의 맨발 걷기가 잠시 보류된 채 여름방학이 되었다. 교직원 세 명이 여름방학에도 각자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매일 ‘맨발 걷기’ 운동을 하기로 결의를 다졌다. 드디어 개학을 맞이했다. 얼굴선이 예뻐지고 피부가 맑아지고 광채가 나며 살이 빠지고 발에서는 무좀이 없어지는 등 사람마다 각각 놀라운 효과가 확인됐다. 개학과 함께 한 명이 더 합세하여 맨발 걷는 멤버가 네 명으로 늘었다. 퇴근 후에 각자 집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날마다 걷고 있다. 가까운 주위 사람들이 건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맨발 걷기에 대하여 좀 더 관심이 커졌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발바닥에는 수많은 말초 신경이 모여있고 우리 몸의 장기와 관련되어 있다. 맨발로 걷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다. 돈이 들지 않는다. 어떠한 부작용도 없다. 신을 벗고 흙길을 걸으면 된다. 저녁 식사 후 운동장에 가면 맨발로 걷는 행렬이 둥글게 띠를 이루고 있다. 맨발로 걸었을 뿐인데 건강이 좋아지고 난치병까지 치유되는 기적 덕분에 점점 걷는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맨발 걷기 대중화는 ‘맨발 걷기 전도사’로 불리우는 ‘맨발걷기국민운동본부’ 박동창 회장이 중심에 있다. 그는 1952년 경남 함양 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경제학 박사이다. 그가 폴란드에서 은행장을 하며 건강이 심각하게 안 좋아지던 2001년 어느 날이었다. 한국 방송에서 간암으로 한 달밖에 못 산다던 사람이 맨발 걷기를 하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례를 접했다. 박 회장은 바로 실행에 옮겼다. 몇 달간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했는데 맨발 걷기 첫날에 꿀잠을 잤다. 2시간 정도 맨발 걷기를 했을 뿐인데 결과가 놀라웠다. 이렇게 5년을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이 좋아진 것을 직접 체험하고 ‘맨발 걷기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감기에 걸리지 않고 불면증, 어지러움증이 없어지고 100이 넘던 간 수치는 28로 정상이 됐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2006년 폴란드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며 맨발 걷기를 대국민 운동으로 보급하기로 결심했다. 귀국하자마자 출간한 박 회장의 <맨발로 걷는 즐거움>이라는 책을 냈다. 그리고 박 회장은 2016년부터 서울 강남의 대모산에 ‘맨발걷기숲길힐링스쿨’을 개설,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다함께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맨발 걷기가 나를 살렸다> 책을 보면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완쾌된 50명의 생생한 사례와, 맨발 걷기에 숨어 있는 건강의 비밀이 기술되어 있다. 첫째, 자연의 지압 이론으로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분포된 온몸의 장기들과 상응한 지압 점을 자극함으로써 혈액순환이 잘 되면서 면역체계가 강화된다. 둘째, 접지 이론으로 활성산소를 중화시키며 혈액의 점성이 묽어 지고 혈류 속도가 빨라져 혈액이 깨끗해 진다. 셋째, 발바닥 아치의 스프링 작용, 혈액 펌핑 작용, 발가락의 꺽쇠 작용으로 무릎, 고관절, 척추의 통증을 자연스럽게 없애준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초로 맨발 걷기 활성화에 관한 입법이 마련된 지역이 있다. 바로 전북 전주시이다. 2023년 2월 15일 전주시의회는 김원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맨발걷기 활성화 지원에 관한 조례’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남원에서도 6월에 남원시의회 김영태 의원이 ‘맨발걷기 활성화 지원에 관한 조례’를 발의, 정례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런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어 고무적이다. 완주군 소양면에 거주하는 김모씨는 7월 17일부터 맨발로 걷고 있다. 쾌변과 숙면의 효과는 첫날부터 경험했다. 뱃살이 빠지고 몸이 따뜻해지며 전반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앞으로도 열심히 맨발로 걷겠다고 했다. 전주시에 거주하는 이모씨는 심장 수술을 한 상태로, 여름부터 1시간씩 맨발로 걷고 있다. 차갑던 손발이 따뜻해지고 높았던 혈압이 내려가면서 고혈압약을 줄였다며 기뻐했다. 연세가 80대인 우리 부모님도 며칠 전부터 맨발 걷기를 하고 계신다. 날마다 통화하면서 응원 중이다. 전북에 맨발 걷기 좋은 명소가 많다. 순창 강천산 맨발 산책로, 익산 배산공원, 군산 청암산 둘레길, 장수 장안산 계곡, 남원 향기원, 고창 선운사가 대표적이다. 취재차 직접 탐방하며 맨발로 걸었다.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되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지키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건강을 되찾기 위하여 오늘부터 단단하게 신고 있는 신발을 벗고 흙길로 나가길 추천한다. 하송 시인, 교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9.13 15:18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1) 남원 일대 후백제 문화유산 가치

“전쟁은 누가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남을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영국의 철학자이면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런드 러셀이 남긴 말이다. 과거 인간의 존엄마저 위협하는 전쟁 앞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이기는 쪽 편에 서야 했다. 그래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백제와 통일신라가 첨예하게 맞붙으면서 국경 지역은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원 일대도 마찬가지였다. 견훤은 통일신라 말 혼란기에 전주를 도읍으로 백제 계승을 기치로 후백제를 세웠다. 901년 후백제는 남원을 점령하면서 신라 세력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지만 혼란은 불가피했다. 천년사찰이자 호국사찰인 남원 실상사는 후백제 통치 시기 대내외적으로 혼란을 피할 길이 없었다. 당시 난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원 실상사에는 후백제 문화유산이 현존하고 있다. 가을을 재촉하는 9월에 불교미술에 관한 연구를 해온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과 함께 전주에서 남원으로 발길을 옮겨 실상사로 향했다. 먼저 그와 함께 찾아간 곳은 실상사에 자리한 편운화상탑이다. 이른 아침에 방문한 실상사는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였다.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실상사 내에는 지난해 12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승격된 편운화상탑이 자리하고 있다. 편운화상탑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91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운화상탑은 네 개의 돌로 이뤄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82cm다. 탑 표면에는 ‘실상사 창건조인 홍척화상의 제자로 안봉사를 창건한 편운화상의 부도,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운다’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편운화상에 대한 공양과 추모의 의미가 반영된 조형물로 명문에는 후백제 연호인 정개가 새겨져 있다. 이로써 후백제의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 실장은 “편운화상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로 형태이다”며 “당시 주류를 이루던 팔각형태와 달리 원형으로 조성돼 통상적인 승탑은 물론 다른 석조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901년 후백제의 대야성 침공 이후 신라 왕실과 후백제 사이에서 혼돈에 빠진 실상사 내 세력들은 대응 전략 가운데 하나로 편운화상탑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혼란스러웠던 시기 실상사 내에는 기존 친 신라 세력에 맞선 후백제 세력이 후백제의 지원을 희망하며 편운화상탑을 조성했고 명문에 후백제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런데 905년 수철화상탑의 조성 때와 달리 5년 뒤 조성된 편운화상탑은 기교면에서 떨어진다고 학계는 판단한다. 이는 실상사 내 친 신라 세력이 수철화상탑을 조성할 당시에는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편운화상탑 조성 당시에는 실상사가 후백제 시기 정권과 결탁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후백제 정권에게 실상사는 이미 친 신라 세력으로 낙인찍혀 지리산 권역의 중심 사찰로 화엄사를 택했고 이러한 배경을 감안하면 편운화상탑 조성 당시에는 후백제 정권의 변변한 후원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진 실장은 “편운화상탑은 후백제 정권이 실상사를 통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라 후백제 왕실의 지원이 필요했던 실상사 내 친 후백제 세력의 몸부림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후삼국 시기 실상사에서 볼 수 있는 친 신라 세력과 친 후백제 세력 간 대립 구도에서 조성된 후백제 문화유산은 비단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운봉고원 전체로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점이 바로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이다. 지리산 정상 부근인 정령치 바래봉 부근에 조성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찾아가보니 총 12기의 불상을 이루고 있는데 3구는 비교적 잘 나타나있지만 나머지 9구는 마모가 심한 편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존상은 마애여래입상으로 높이가 4m 가량인데 전체 불상 중 중심 격으로 추정된다. 진 실장은 “대체적으로 마모가 심해보이지만 명문에는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월의 연호인 천보가 새겨져있다”고 설명했다. 명문에 쓰인 ‘천보 10년’을 토대로 하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조성 시기는 917년에서 923년 사이로 보여진다. 이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운봉고원의 친 후백제 세력이 920년을 전후해 조성한 것으로 학계는 판단한다. 진 실장은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에는 후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월의 연호가 새겨져있다”며 “하지만 불상 양식의 왜곡과 형식의 변형을 봤을 때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과 마찬가지로 후백제 왕실이나 호족의 후원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의 완벽하지 않은 비례와 왜곡된 세부 표현 등을 감안하면 조형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을 단순히 모방했던 비숙련 장인들이 참여한 것으로 진 실장은 판단했다. 이번 여정에 함께한 일행은 후삼국 시기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과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에서 현존하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단순히 남원 일대에 남아 있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후삼국이 힘을 겨루던 혼란스러웠던 시기의 후백제 문화유산이 조성된 배경과 당시의 정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실상사 편운화상탑은 그 형태의 독창성으로 주목되나 그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하지만 후백제 연호가 새겨진 유일한 자료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도 전북의 소중한 후백제 역사 자료로 그 가치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향후 후백제 역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선 현재까지 남아 있는 후백제 문화유산을 제대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때이다.

  • 기획
  • 김영호
  • 2023.09.12 16:15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⑨ 지역성의 가치로 살려내는 거리의 역사

민간주도 도시재생사업의 모범 <개항로 프로젝트> 예술적 실험 공간으로 주목받는 폐공장의 변신<코스모40>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후 원산과 인천의 항구를 잇달아 열었다. 불평등조약의 산물로 이루어진 이른바 강제 개항이었다. 인천은 일본의 조선 진출과 주권 침략의 음모를 실현하기 위한 도시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문화가 밀려 들어오는 이국적인 장소이자 새로운 것에 대한 희망이 교차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개항기와 근대를 거치며 새로운 문물이 들고 나는 창구로 근대의 여명을 밝힌 인천의 성장은 역동적이다. 본격적인 성장은 1960년대와 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이루어졌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투자가 집중되어 각종 기간시설과 편의시설이 확충됐다. 각종 산업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4대 도시로 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1981년에는 인구 100만 명을 돌파하면서 직할시로 승격했고, 1995년에는 인천광역시로 확장되며 승격됐다. 이후 개발과 성장을 지속해온 인천의 오늘은 외형적으로(?) 화려하다. 항만 상업 도시를 기반으로 농공업과 수산, 문화와 관광, 물류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도시. 그러나 인천 역시 오래된 도시로서 오랫동안 안고 있는 과제가 있다. 도시 확장으로 쇠퇴한 원도심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기능을 잃은 공간에 새로운 역할을 불어넣다 <개항로 프로젝트 > 인천의 원도심인 중구 개항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힙’한 문화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곳 역시 도시가 확장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거리에 남은 것은 사람의 온기를 잃어버린 공간들. 개항로는 곧 ‘과거’를 품은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인천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도시로 변화하고 있다. 원도심의 부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뭉친 덕분이다. 이 중심에는 민간이 주도하는 도시재생 사업 ‘개항로 프로젝트(대표 이창길)’가 있다. 2018년 시작된 개항로 프로젝트는 원도심 재생의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인천 중구 구도심을 중심으로 제 기능을 잃은 건축물에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해 거리를 재편하는 프로젝트다. 개항로 프로젝트가 주목한 공간은 인천항과 맞닿은 신포동 입구에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이르는 1km 남짓한 2차선 거리다. 영화관과 병원, 회사 등 건축적으로도 가치 있는 근대 건축물과 항구도시로 한 시절 번성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곳이다. 개항로를 살리는 주체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지역 브랜드를 만들어내고 있는 10여 명 기획자와 원도심을 지켜온 오래된 가게들. 개항로 부활을 꿈꾸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새로운 기능을 갖게 된 공간은 20여 곳에 이른다. 프로젝트 첫 공간은 오래된 이비인후과를 복고풍 콘셉트로 개조한 카페 '브라운 핸즈'. 이후 다양한 성격의 가게와 공간이 뒤를 이어 문을 열었다. 옛집을 무조건 부수지 않고 건축물의 개성을 살리고 특별한 기능을 더한 곳들이다. 한 조명회사가 조명 인테리어를 콘셉트로 오래전 문을 닫은 산부인과를 개조해 만든 카페 '라이트 하우스', 방치되어 있던 창고를 개조해 만든 갤러리 '잇다 스페이스', 볼품없는 건물을 작은 잡화 백화점으로 탄생시킨 ‘개항백화’, 일제시대 때 지어진 튼튼한 벽돌 건물을 고치고 개항로의 기억을 품은 소품을 더해 문을 연 ‘개항로 통닭’ 등 근대 건축물의 가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공간의 변신은 흥미롭다. 덕분에 개항로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 새로운 공간과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래된 가게들이 어우러져 특별한 풍경을 갖게 됐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2021년, 오래된 가게를 지켜온 어른들과 함께 ‘개항로 맥주’를 만들어 출시했다. 지역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는 이 맥주는 협업의 결실이다. 개항로 프로젝트는 새로운 것에만 열광하지 않고 도시를 지켜온 오래된 가게들과 협력하면서 상생의 길을 찾아간다. 도시재생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주는 사례다. 지역주민 예술가와 연대하는 폐공장의 변신 <코스모 40> 인천에는 뜨거운 관심을 받는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공간 성격을 하나로 규정하거나 한계를 두지 않고 다양한 예술적 실험과 다양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의 탐색과 시도를 껴안은 공간 <코스모40>이다. 공간의 전신은 화학 공장.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던 코스모 화학의 대규모 공장 단지에 있던 건물 한 동이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당초 이곳에는 45동이나 되는 거대한 공장이 있었다. 2016년 공장이 울산으로 이전하면서 2만 평이 넘는 대규모 단지에 있던 공장들은 빠르게 철거되기 시작했다. 40동도 철거 대상이었으나 공간의 맥락을 지키고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지역 주민의 제안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주민참여와 지역재생의 의미를 담아 특별한 공간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폐공장의 재생은 낯설지 않다. 복합문화공간, 미술관과 공연장, 혹은 상업적 성격을 앞세운 대형카페 등 방치됐던 대규모 공장을 활용해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시킨 예는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코스모40>은 좀 더 특별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외형적으로 돋보이는 독특한 구조다. <코스모40>은 원래의 건물을 보수하면서 최소한의 증축을 했다. 완전히 분리된 듯하면서도 연속된 하나의 고리 모양으로 삽입된 신관은 옛 공장 공간의 새로운 활용도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한다. 특이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개조된 <코스모40>'은 '인천시 건축상 대상',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다. 공장의 기초 구조물과 기계들을 최대한 남겨 놓은 내부도 새로운 건축적 요소와 결합해 시간의 중첩이 자아내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공간이 됐다. 이러한 특성으로 <코스모40>은 예술적 실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어디서도 품을 수 없는 날카롭고 날이 서 있는 작업을 담아내는 공간,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주목하는 공간이 <코스코 40>이다. 지역 주민들과의 탄탄한 연대도 돋보인다.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바자회 팝업스토어 등을 통해 주민 참여를 끊임없이 이끌어낸다. 방치됐던 건축물이 가져올 지역사회의 변화가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김은정 선임기자, 박현우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09.12 13:55

[도시의 시간, 성장동력을 만들다] ⑧ 공동체의 힘이 만들어내는 개항도시의 부활

공동체의 힘이 만들어내는 개항도시의 부활 목포 원도심 <꿈바다협동조합>과 <건맥 1897 협동조합> 목포는 1897년 개항한 도시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 개항했으나 빠르게 성장해 우리나라 3대 항으로 자리 잡았다. 항구가 번성하면서 목포의 성장은 지속됐다. 그 영향으로 1990년대까지 인구가 늘어났으나 연근해 어업이 위축되고 목포의 경제를 이끌었던 조선업이 쇠락하면서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도시들이 그러하듯 목포 역시 신도심이 개발되자 중심 상권이 붕괴되고 사람들이 떠나간 원도심은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개항이 만들어낸 근대도시 목포는 지금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빈 곳이 늘어나 황폐해진 거리, 시간이 멈춘 원도심에 그 꿈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덕분이다. 2010년대 중반, 정부의 지원정책으로 기반을 닦기 시작한 원도심 도시재생이 이어낸 결실이다. 새로운 힘도 더해졌다. 2020년 문화체육부가 선정한 관광거점도시에 선정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목포시는 관광거점도시로 선정된 직후 주요 관광·취약지를 정비하고 관광도시로서의 환경을 가꾸는 일에 힘써왔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관광객 수는 크게 늘지 않았고 관광의 형태도 당일치기 여행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목포의 원도심과 근대문화유산 공간들이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목포의 원도심 부활을 이끄는 중심에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마을기업과 협동조합이 있다. 전국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꿈바다협동조합>과 <건맥 1897 협동조합>이다. 골목, 공간과 공간을 이어 마을 호텔이 되다 <꿈바다협동조합> <꿈바다 협동조합>은 원도심에서 게스트 하우스, 식당, 카페 등을 운영하는 주민들이 참여하는 협동조합이면서 마을기업이다. 서로 다른 공간을 갖고 있지만, 원도심을 일으키는 일에 뜻을 모은 이들의 목표는 각각의 공간을 하나로 이어 수평적 마을호텔을 만드는 것. '꿈꾸는 바다꼴목'이라 이름 붙인 이 마을 호텔에는 게스트하우스 10곳, 식당·카페 등 6곳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꿈바다 협동조합이 뜻을 모은 것은 2019년. 이들은 원도심의 도시재생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내외의 다양한 사례를 배우며 주민이 주도하고 협력적으로 운영하는 마을사업 모델을 주목했다. 원도심을 아우르는 마을호텔 '꿈꾸는 바다꼴목'은 관광객이 특색 있는 숙소와 음식 등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와 환경을 제공한다. 몇 걸음만 가면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을 목포의 특별한 정취를 느끼면서 걸을 수 있다는 것도 '꿈꾸는 바다꼴목'이 주는 선물이다. 지역에 있는 작가들과 협력해 1897 개항문화거리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책을 출간하고 옛 건축물 드로잉 엽서, 소책자 등을 제작해 판매도 한다. 관광객들은 조합이 운영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목포의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목포역 근처에 문을 연 오프라인 플랫폼 '라운지 꿈'에서는 관광 정보와 함께 체크인하기 전 짐을 맡길 수도 있다.꿈바다 협동조합 방은희 이사는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쉐프가 되고 호텔리어가 되는 순간을 꿈꿨다“며 ”숙박부터 음식, 차, 술도 마시면서 목포의 지역에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여행 상품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꿈바다 협동조합이 골목(거리)으로 이어지는 '마을호텔'을 만들게 된 특별한 이유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골목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 돼서 함께 상생했을 때 의미 있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다. 실제로 마을호텔의 수익은 각각의 공간 수입에 그치지 않고 마을과 주민들이 성장하는 발판으로 쓰인다. 지역과 관광객이 상생할 방안을 함께 고민하며 다양한 방법을 찾아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사실 이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목포의 원도심 도시재생 구역에서 운영되는 게스트하우스는 외국인 관광객의 투숙만 허용되는 도시민박업이다. 현행법상 도시 안에서의 숙박업은 상업지역에서만 운영할 수 있지만, 외국인도시민박업은 주거지에서도 '외국인'에 한해 운영할 수 있다.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모두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도시민박업이다. 조합이 출범하고 곧바로 터진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조합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다 마을기업은 내국인 숙박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행히 2021년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에 선정됐다. 온·오프라인 플랫폼 구축 등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국인도 숙박할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추진했다. 자치단체와 협의하면서 정부의 관련 부처를 설득하며 길을 찾았으나 과제는 해결하지 못한 상황. 그래서 아직 갈 길이 멀다. ”건어물거리, 축제 열고 마을펍 열어 살렸죠“ <건맥 1897 협동조합> 목포시 만호동에는 중심을 관통하는 오래된 거리가 있다. 도소매, 중계, 경매 등 종사자들이 모인 이 거리는 목포항을 거친 건해산물이 들고 나는 유통 중심이었다. 1958년, 이 거리를 중심으로 건해산물 조합이 만들어졌다. 전국 최초였다. 거리는 80년대까지도 번성했으나 어업이 위축되고 항구가 쇠락하면서 사람도 떠나고 상점도 크게 줄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거리로 쇠퇴했다. 원도심의 재생과 함께 거리를 되살리기 위해 상인들이 나섰다. 상인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연 맥주축제가 시작이었다. 축제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자 건어물 거리에 있는 상가들은 아예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건맥 1897 협동조합>이다. 조합은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통로로 마을펍을 열었다. 거리의 상권 활성화를 위해 만든 이 공간은 오래된 여관 건물을 무상으로 임차해 개조했다. 처음에는 1층에 ‘1897건맥펍’을 열고 운영하다 2∼3층에 숙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건맥스테이'까지 열었다. 마을펍은 자주·자립·자치적인 운영을 통해 목포 건어물 자원을 지역 상품화하고 ‘1897 건맥펍’을 지역특화 브랜드로 만들어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골목상권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을펍에서는 건어물과 맥주를 판매하는데 처음에는 오징어, 쥐포 등 건어물 중심 메뉴가 전부였지만, 손님이 많아지자 전문가의 자문까지 얻어 지역특화형 안주를 개발했다. 건새우를 갈아 양념을 치킨에 뿌린 ‘새우통닭’이나 해산물을 듬뿍 섞은 ‘바다 피자’ 등 지역을 담아 만든 안주는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다. 조합은 마을펍에 이어 거리를 살리는 새로운 사업을 추진했다. 2019년 가을 첫 문을 연 건맥축제 '토야호(土夜好)'다. 만 원을 내면 무한으로 생맥주를 ‘리필’해 주는 이 축제는 첫해부터 관심을 모았다. 젊은 세대를 건어물 거리로 끌어들이려는 전략도 성공했다. 적은 예산으로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조합원들과 지역주민들이 협력해 축제를 이끌었다. 예산의 한계에도 300명 정도가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정착한 ‘토야호’는 1년에 15주,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데 지금은 목포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어 관광객들을 부른다. 건맥축제 '토야호'도 처음에는 확신을 얻지 못하는 축제였다. ‘과연 사람들이 올까?’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걱정이 많았지만, 축제는 성공했고 자리를 잡았다. 그 바탕에는 주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축제의 방식을 고민해온 조합의 노력이 있었다. 대부분의 축제는 비가 오면 취소되지만 ‘토야호’는 비 오는 날에도 축제를 열었다. 비가 오면 상인들은 점포의 창고를 열어 손님을 맞고 손님들은 파라솔까지 챙겨와 축제를 즐겼다. 유명한 가수가 서는 축제의 공연무대를 아마추어 예술인들이 재능기부로 채우고 주민들은 자원봉사로 힘을 보탰다. ‘토야호’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2020년을 제외하고 30회 넘게 열렸다. 누적 방문객은 2만 1,000명. 조합은 2억 5,000만 원이 넘는 경제 효과를 얻었다고 소개했다. 건맥 1897 협동조합 정우영 이사는 "우리는 상품을 줄 때도 케이블카·요트 이용권 등 다시 목포를 올 수밖에 없도록 행사를 기획한다”며 “토야호를 즐기기 위해 하루 더 자고 간다는 관광객을 만났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목포 만호동 건해산물거리의 부활을 이끄는 중심에는 <건맥 1897 협동조합>의 건강한 힘이 있다. 그들 공동체의 의지가 가져올 앞으로의 변화가 더 기대된다. / 김은정 선임기자, 박현우 기자

  • 기획
  • 김은정
  • 2023.09.12 13:55

[한국전쟁 정전 70년] 전쟁 후 남은 사람들의 비극, ‘빨치산’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민족의 비극은 계속되었다. ‘빨치산’은 한국전쟁의 부산물이자 분단된 남북 민족분열의 비극을 표출하는 상징이다. 빨치산은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으며 노동자나 농민 등 비정규 군인들로 무장된 유격대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전국의 산지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특히 호남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 인민군들이 지리산의 험준한 사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고 한국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 1월부터 4월까지 전남에서 한국군의 게릴라 대규모 토벌작전(3기)에 사살된 빨치산은 6921명에 달하고 603명이 생포됐다. 지리산에서 빨치산을 진압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 경찰, 민간인은 7287명에 달한다. ◇ 한국전쟁은 끝났지만 귀순하지 못한 빨치산=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호남 지역에 남아있던 북한군은 퇴각하지 못한 채 지리산 인근에 입산해 빨치산이 됐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호남·영남·충청 지역에 있던 인민군 및 당 요원들은 퇴로가 차단된 채 남한에 남겨진 이들이었다. 빨치산은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북한군 패잔병, 유격대원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후방에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패잔병들은 중앙당으로부터 ‘인민군이 다시 남하할 때를 대비해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벌이라’는 지시를 받고 군·경의 눈을 피해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서 끝까지 저항을 한 것이다. 특히 관공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1950년 10월 이후 군경합동작전이 전개됐고 백야전 전투사령부가 창설돼 빨치산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병력 이외에도 경찰병력도 많이 동원됐다. 1950년 12월 16일에는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들은 빨치산 진압작전을 위해 지리산 중심의 주요 고지를 포위·수색하고 근거지를 공격했다. 군경의 주요 시설을 경계·방어하면서 첩보활동을 펼쳤다. 군경은 빨치산 진압과 더불어 귀순 유도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군인과 경찰은 지리산 인근에 ‘삐라’(전단지)를 대량으로 배포해 빨치산의 귀순 유도를 했지만 빨치산들은 귀순보다는 저항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빨치산은 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와 그 산하 6개 지구대를 창설해 끝까지 저항했다. 6개 지구는 무등산 광주지구, 담양 추월산 가마골 노령지구, 구례·광양 백운지구, 화순 모후산 지구, 장흥 유치지구, 영광·함평 불갑산 지구 등이었다. ◇ 빨치산의 근거지, 화순 백아산 전투=빨치산 세가 가장 강했던 곳은 전남도당 본부가 있던 화순 일대로, 이곳에서는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까지 1년 6개월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은 인민군 점령기에 광주에 설치됐던 당 본부를 화순군 백아산 기슭에 있는 북면 용곡리 용촌마을로 옮겼다.  백아산은 해발 810m로 산비탈이 가파른데다 고지가 여러 곳이라 한 곳을 점령당해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쉽고, 화순 모후산, 곡성 통명산 등으로 이동하기에도 용이했다.  또한 화순은 화순 탄광 노동자들로 조직된 좌익 세력이 강했으며, 1946년 화순 탄광 노동자 봉기 이후 미 군정의 검거를 피해 많은 좌익 인사들이 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빨치산은 지리산 곳곳에 거점을 두고 군·경 보급로 차단, 식량 약탈, 경찰서·지서 습격, 통신망 절단, 무기약탈 등을 일삼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부터 국군 11사단을 내려보내 이른바 ‘백아산 소탕전’을 벌였다.  이 때 국군은 ‘성벽을 굳게 하고, 들에 있는 것을 말끔히 치운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백아산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소개(疏開·폭격 등에 대비해 대피시키는 것)하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화순군 이서면 21개 마을, 북면 24개 마을, 담양군 남면 대덕면 5개 마을 등 모두 50개 마을이 소각됐다.  4월이 되자 11사단을 대신해 8사단이 호남으로 내려왔고, 예하 부대와 전투 경찰대, 청년 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 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 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류 세력 소탕 작전에 나섰다.  전투가 길어지자 1951년 11월에서 1952년 2월 사이에는 미군 폭격기를 동원해 국제적으로 사용이 금지된 네이팜탄(소이탄)을 투하해 백아산 일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은 폭격기 1대를 추락시킬 정도로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많은 병력을 잃고 약화됐다.  백아산 일대에는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된 이후에도 잔존 빨치산의 활동이 이어졌으나, 1954년 2~3월 백야전 사령부의 토벌 작전으로 부대장·위원장 등 남은 지휘관마저 대거 잃은 끝에 1955년 3월 섬멸된다. ◇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빨치산과 교전이 치열했던 화순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많았다.  낮에는 국군이 마을을 불태우거나 주민들을 ‘빨치산에게 부역했다’며 살해하고, 밤에는 빨치산에게 우익 인사의 가족이라거나 ‘협조하지 않는다’는 등 이유로 살해당했다. 당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였다.  이와 관련한 진실 규명은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출범한 뒤에야 윤곽이 드러났다.  제1기 진화위 조사에 따르면 1950년 8월부터 1952년 4월까지 화순군 9개 읍·면에서 빨치산에 의해 111명이 희생된 사실이 확인됐다. 진화위는 화순에서 추가로 31명의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자행됐다. 제1기 진화위는 1950년 10월부터 1951년 3월까지 화순·담양·장성·영광·함평 등지에서 291명의 주민이 국군 제11사단 20연대 1·2·3대대, 9연대 2대대에 의해 ‘빨치산’ 혹은 ‘부역자’라는 혐의로 사살되거나 연행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이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희생자 수는 화순이 사살 56명, 행방불명 5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히 진화위는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던 중 빨치산에게 협력했다고 의심되는 주민들을 무차별 사살해 작전 상의 위험을 제거하고 빨치산 토벌의 전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구사해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화순 백아산에서는 6·25 전사자 유해 발굴도 이어지고 있다.  육군 제31보병사단은 지난 3~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2000㎡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실시했다.  앞서 31사단은 지난해 4월 화순군 백아산 일대 총 3600㎡에서 유해 발굴 작전을 벌인 끝에 6·25 전사자 유해 한 구와 탄피 등 군용품을 발굴했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 인터뷰 “이념 관계없이 빨치산 학술적 연구 필요…국가차원 피해자 진상규명 이뤄져야”  “늦게 오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하지요. 아직까지 한국전쟁 당시 피해자들의 5%밖에 밝혀지지 않았어요. 국군, 빨치산을 막론하고 국가 차원에서 피해자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합니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장은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과 군·경의 충돌이 격했던 당시 피해에 대한 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박 소장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지리산 빨치산 등을 연구해 온 역사연구가다.  박 소장은 빨치산은 결국 남·북의 정치적인 이득에 따라 파생된 단체라고 설명했다. 1948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남한 단독 선거와 단독 정부 노선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해 제주4·3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이 10·19 여순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빨치산 활동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박 소장은 특히 호남 지역에서 국군과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지정학적으로 호남은 평야 지대라 농경지가 많고, 그만큼 소작농이 많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국군으로부터 가족이 살해당한 피해자, 빨치산의 요구에 못 이겨 입산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빨치산의 구체적인 전투과정과 피해 상황 등을 밝힐 연구는 유독 미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에 만연한 ‘레드 트라우마’ 때문에 공산당과 관련된 역사적 연구를 하려는 사람도 없고, 그와 관련된 논문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증언을 해 줄 피해자들은 마을 이웃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도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점, 가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한 탓에 당시 상황을 설명할 이가 남아있지 않은 점 등을 꼽았다.  그 날의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견벽청야’ 작전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립된 삶을 산 탓에 피해 사실을 알릴 방법을 알 방도가 더욱 없다고 밝혔다.  박 소장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학살의 주축은 아이러니하게도 ‘국군’이었다. 대략 국군이 20명을 살해하면 빨치산에 의해서는 1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국군이 수적으로 압도적일뿐 아니라 작전지역 일대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작전을 썼고, 좌익 부역자 색출 등을 명분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비무장·무저항 상태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했다는 진술이 잇따르고 있기도 하다.  박 소장은 “빨치산과의 전투는 그 자체로 이념으로 갈라선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보여주는 아픔이다”며 “대한민국에서 빨치산을 연구한다고 하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마련이지만, 이념에 관계없이 까칠한 역사를 정리하려는 학술적 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광주일보=유연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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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1 15:35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스마트폰이 이 교육을 망친 주범?

이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요즘은 인공지능 기업인 오픈에이아이(OpenAI)에서 개발한 대화형 언어 모델 쳇Gpt 까지 추가되어 획기적이다. 최근에는 구글 바드, 뤼튼 등이 나와 검색은 물론 대화로 각종 정보를 얻고, 문서를 스캔하여 편집하고, 논문 작성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스마트폰은 일상생활에 많은 편의를 제공하지만, 역기능도 존재한다. 전문가들은 문제점으로 사생활 침해와 보안 문제를 꼽는다. 위치기반서비스(LBS)는 주위에 있는 건물과 개인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어 법적 문제까지 대두된다. 또한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노안이 빨리 올 수 있다고 안과 전문의들은 경고한다. ‘스마트폰 사용 중독 현상도 전 세대에 걸쳐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이런 스마트폰이 ‘교육과 교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교육현장의 목소리는 어떨까. 전북지역 한 초등학교 A교장은 “스마트폰은 청소년들의 정보 접근성, 창의적 문제 해결, 사회적 연결 등을 촉진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은 틀림없지만,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사용은 학습 저하, 사회적 스킬 약화, 유해 콘텐츠 노출 등의 교육적 정서적으로 나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러 문제를 스마트폰으로 쉽게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장학관 B씨는 “스마트폰 사용 정도는 학업성취도와 연관이 깊어, 많이 사용할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집중적인 스마트폰 사용은 부정적인 행동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교육계 원로 C씨는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운동부족이 될 수도 있고, 성인용 동영상을 보는 것은 정서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한다. 안과 전문의들은 “스마트폰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노안이 빨리 올 수 있다.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경고와 함께 조언을 했다. 스마트폰 중독은 일상생활, 학업, 사회적 관계 등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사용은 생활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명절이나 행사에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대화는 없고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연인들은 커피숍에 마주 앉아서도 타인과 문자를 주고받거나 동영상을 보며 혼자서 키득대기도 한다. 이쯤 되면 가족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다. 또한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나 도서관처럼 정숙해야 하는 장소에서도 벨 소리가 울려 옆 사람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고 큰소리로 통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운전 중에 전화를 주고받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경우도 있다. 지난 7월 18일 서울 서이초등학교 여교사가 교내 교·보재 준비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충격적이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가 학부모의 괴롭힘이었다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고인의 학급 학생이 연필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의 이마를 긋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학부모가 고인의 휴대전화로 수십 통의 전화를 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결국 스마트폰이 여교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수업 중에도 동영상을 보거나, 선생님의 발언이나 행동을 촬영해 SNS에 올리고, 여교사 치마 속을 찍어 친구들과 공유하는 등의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성희롱이 되어 선생님과 학생 간의 신뢰와 존중감을 상실시킨다. 전주시 덕진동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인 D교사는 “스마트폰이 교육과 교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의 의식 개선과 학생들의 스마트폰 관리가 필요하다. 학부모들은 담임교사나 학교 측에 항의성 전화나 불만 요소를 말할 때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비대면이라고 해서 마구잡이식 전화는 삼가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다른 초등학교 교사 E씨는 “학부모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자나 카톡을 보낸다. 악성 민원을 견딜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업무용 휴대폰을 따로 사용한다”고 했다. 덧붙여 “교사가 학생들의 스마트폰 관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방법은 등교하면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일정한 장소에 보관했다가 하교 시에 돌려주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이렇게 하면 등교 중에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교육 활동에 집중할 수 있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F교사는 “요즘 교육부에서 교사들에게 휴대폰 압수권을 주겠다고 하는데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압수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휴대폰 보관권만이라도 줘야 한다”고 한마디 거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육부가 지난 8월 17일 2학기부터 학교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에 대해 교사가 휴대전화를 압수하거나 교실 밖으로 내보내는 등의 조처를 할 수 있게 하고 교사는 퇴근 후나 직무 범위를 벗어난 내용의 학부모 상담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고시안을 발표했다. 스마트폰은 문명의 기기임이 틀림없지만, 결국 스마트폰이 교육을 망치고 교권을 추락시킨 주범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그때 아이들의 장래는 밝고,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망친 교육은 회복이 되고 추락한 교권을 제자리에 설 수 있다. 정성수 시인, 향촌문학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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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6 15:21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⑬ 포크 사진을 통해 전라감영 선화당 기물을 복원하다.

△포크 사진에 나타난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기물들 포크가 찍은 현존 2장의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 사진을 통해 관련 기물 복원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였다. 첫 번째 전라감사가 찍힌 사진을 통해서는 지난 기고(2023.8.22.)에서 설명한 전라감영 선화당 용호병풍과 감사가 앉은 의자복원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전주 기생의 북춤’ 사진에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정보가 나타났다. 사진에 나타난 내용들은 왼쪽 위에서부터 보면 ①선화당 주련문 ② 창틀 ③실내 목재 칸막이 ④중간 기둥 현판 ⑤ 삼지창형태 기물[둑纛]과 기치대 ⑥왼쪽 기둥 하단 종이싸개(주근도지) ⑦바닥 돗자리(지의) ⑧ 중앙의 큰 북 ⑨ 바닥 오른쪽 안식 등이 확인되었다. 한편 포크의 조사기록에는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에 대해 사진찍듯이 묘사한 설명이 있는 데 사진 내용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선화당]은 찬란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길이가 50피트[15m]나 되는 중심 구간은 전면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고, 깔끔하게 돗자리[지의]가 깔려 있으며, 천장 나무들은 밝은 색상의 미세한 패턴으로 화려하게 장식[단청]되어 있다. 중앙에는 뒷벽에 기대어 두 개의 커다란 병풍이 나란히 서 있었고, 오른쪽은 훌륭한 용, 왼쪽은 사납게 날뛰는 큰 호랑이를, 둘 다 아주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앞에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중국양식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앞에는 더 두꺼운 방석과 감사가 몸을 기대는 자세로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좌대 받침[안식]이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가로 세로 4피트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 등이 걸려 있었다. 한 쪽 구석에는 삼지창같은 무기와 장대[둑纛]들이 있는 기치대가 있었다.”포크 기록에는 선화당 건물 외양이 기본적으로 기둥에는 붉은 칠이 칠해져 있고 처마 아래 창방과 평방 및 공포에는 화려한 단청이 그려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향후 선화당 등 건물단청의 기본 정보로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진의 바닥 돗자리[지의]와 좌대와 안식, 삼지창[둑기]과 기치대 등이 언급되었고 사진에 보이지 않는 ‘천장의 가로 세로 4피트(120cm) 크기의 커다란 네모난 종이등’이 언급되었다. △조선 국왕이 전라감사에게 군사권을 위임한 상징, 둑기(纛旗) 복원 필자는 전라감영복원재창조위원회 부위원장으로서 앞서 병풍복원과 함께 기물 고증을 진행하여 조선왕실 기물 전문가인 장경희교수(한서대)에게 연구를 부탁해 관련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진행된 가장 주목되는 복원품이 사진 ⑤인 ‘둑기’였다. ‘둑’은 감사를 상징하는 기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소꼬리나 꿩의 깃털로 장식한 큰 깃발인 ‘독(纛둑 독)’을 ‘둑’이라고 읽는다. 이는 고대 중국에서 장례에 사용되던 깃발[纛]에서 기원하여 한 대(漢代)에는 군사용 기로 사용되었다. 특히, 왕이 지방 군사령관인 관찰사에게 군대 통솔권을 위임해준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긴 장대에 장식을 달아 깃발을 만든 것이다. ‘둑’은 고려시대이래 군통수권자를 상징하여 군영에 둑을 설치하고 둑 주변에서 군령을 집행하거나, 군대의 출병에 앞서 둑제사를 거행하여 군대를 통솔하는 상징으로서 활용했다. 이 전통이 조선에도 계승되었는 데 이와 관련하여 서울의 ‘뚝섬’ 명칭이 바로 이곳이 태조이래 왕이 직접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기 때문에 둑섬에서 뚝섬이 된 유래에서 잘 알 수 있다. 이같은 둑기가 전라감영 선화당 사진에서 확인되어 각 지방 군통수권자인 관찰사에게 이같은 둑기가 하사되었고 이를 집무실인 선화당에 비치하였음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둑제(纛祭)를 지낼 때 사용하는 병기로서의 둑이고, 또 하나는 종묘나 문묘에서 무무(武舞)를 출 때 악기로서 사용하는 둑이다. 그리고 조선 전기에 병기에 해당되는 둑은 나무로 창처럼 생긴 자루를 만들고, 창 아래쪽에 말꼬리털로 만든 상모를 둥글게 꽂은 형태이다. 조선후기 의궤를 비롯한 문헌에 그려진 둑은 자루 끝의 창의 형태가 단창에서 삼지창의 형태로 변화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따라서 전라감영 선화당에서 발견된 둑은 이 같은 조선 전 후기 양식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 후기 기물이 함께 비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둑을 복원하는 데 있어 다행히 삼지창 형태의 국립민속박물관 소장의 둑 유물을 참고하고 단창은 <악학궤범> 그림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그리고 창날 밑에 술이 내려져 있는 데 붉은색 홍둑과 검은색 흑둑 2종류로 나뉘어져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악학궤범> 등 자료에 나타난 색이 모두 홍둑으로 되어 있어 일단 홍독(紅纛)으로 재현하였다. 그런데 최근 AI기술로 흑백사진의 음영값 등을 고려해 원래 컬러 색을 복원해주는 프로그램을 통해 ‘전주 기생들의 북춤사진’을 복원해 보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2020년 필자가 진행한 색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복원된 사진에서 오른 쪽 둑기 색이 삼지창 ‘홍독(紅纛)’과 단창 ‘흑독(黑纛)’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향후 붉은 색 ‘단창 홍둑’을 검은 색 ‘흑둑’으로 수정해야 한다. 또 포크가 언급한 전라감사 및 기생들의 옷 색도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나 향후 AI컬러 복원을 통해 사진속 인물들의 복장 재현에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 △선화당 주련문의 복원 한편, ‘북춤사진’에서는 기둥마다 ‘주련문’ 들이 보이고 있다. 주련(柱聯)은 시구나 문장을 종이·판자에 새겨 기둥에 걸어 두는 것으로 건물의 격을 높이는 장식물이다. 경계와 교훈, 건물 자체의 정체성 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전라감영 선화당의 주련문은 전라도 최고 통치공간 선화당의 위격을 높여주는 가장 중요한 문화자원이다. 그런데 그동안 선화당 주련문의 실체는 알 수 없었고 단지 ‘북춤사진’에 나타난 일부 흔적으로 그 내용을 추정할 뿐이었다. 그런데 2020년 10월 전주역사박물관(당시 관장 이동희)에서 조선말 채경묵이 엮은 <풍패집록>에서 ‘선화당 주련’이 소개되었고 최근 국역 출간(이동희 등,<국역 풍패집록>2023)되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즉, 사진 속 정중앙의 글귀가 “염경장주춘의(艶景長住春意): 아름다운 경치는 봄기운 오래 머물게 하네”라고 하여 전주 천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것으로 보이는 글귀가 이번에 찾은 <풍패집록> 주련문과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향후 전라감영 선화당 내부의 주근도지, 지의, 사각 한지 등, 안식 등의 기물과 주련문 등을 복원하는 추가 작업이 요청된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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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9:45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20)백제 계승의 상징, 후백제의 불상과 석탑

892년 무진주에서 자립한 견훤은 900년 전주로 천도한다. 그에 앞서 견훤은 ‘백제가 나라를 금마산에서 창건하여 600여 년이 되었는데,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으니 내가 도읍을 전주에 정해 의자왕의 오랜 울분을 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고 일갈한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를 단행한 배경은 완산주 민중들의 호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견훤이 의자왕의 울분을 풀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망국(亡國)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歸巢意識)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무진주에서 자립하였으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던 견훤은 비로소 완산주의 주민들에 의해 각성했다고 할 수 있겠다. 백제 계승을 공언한 것이다. 국호도 ‘백제’로 정한다. 그런 만큼, 백제를 연상시키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완주 봉림사지(鳳林寺址) 삼존불과 익산 왕궁리(王宮里) 오층석탑이다. 완주 봉림사지 보살상. △후백제 교통로에 만든 백제 계승 상징물, 완주 봉림사지 삼존불 완주 봉림사지는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발굴조사로 다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나말여초 즉 후백제 때부터 조선에 이르는 기와·청자·분청사기·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이곳에는 삼존불, 오층석탑, 석등 등이 있었는데, 봉림사지 석탑과 석등은 일제강점기에 군산의 시마타니[島谷] 농장으로 옮겨졌고, 석조삼존불은 1960년대에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가운데,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은 대좌와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는 본존불과 좌·우협시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본존불은 전체적으로 아담하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어 통일신라 후기 석불의 영향이 강하다. 안동지역 특정 불상의 형식도 보인다. 그것보다 주목되는 것은 광배(光背)다. 광배는 9세기 통일신라 불상 광배와 같은 형태와 구성을 보이기는 하지만 백제 불상인 익산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 광배의 화불(化佛)과 유사한 고식(古式)의 화불을 조각하였다. 본존불 좌우에 있는 보살상도 9세기 후반 불상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같은 6세기 후반 보살상의 천의와 같은 X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이로써 봉림사지 석조삼존불에 백제 불상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완주 봉림사지는 전주의 북동쪽인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서 대둔산 쪽으로 2.4km 정도에 떨어진 완주 지역경제순환센터(구 삼기초등학교) 뒤편 인봉산 남쪽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곳 앞으로는 전주에서 대둔산을 거쳐 금산으로 가는 국도가 있다. 이 길은 후백제 때에도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이 길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 백제를 침공할 때 활용되었던 추풍령로(秋風嶺路)와 연결되어, 견훤의 출생지인 문경(聞慶)까지 연결된다. 즉 왕도 전주에서 후백제의 주요 전장인 경북 북부지역으로 가는 북방로(北方路)의 중요 거점에 조성된 사찰이 바로 봉림사였다. 그곳에 백제 불상의 특정 요소를 연상시키는 삼존불은 900년 전주로 천도할 때 견훤이 밝힌 백제 계승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백제 계승 완수의 기념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900년 전주로 수도를 옮긴 견훤은 첫 번째 군사 행동으로 901년 대야성을 공격한다. 대야성은 7세기 전반 백제와 신라 사이에 여러 차례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군은 드디어 642년에 대야성을 함락한다. 그런데, 당시의 대야성 성주는 후에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때 김춘추의 사위와 딸은 자결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추진한다.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은 642년 사건에 대한 보복 전쟁 성격이 짙다. 백제사에서 642년의 대야성은 백제 멸망의 시발점이었다. 이를 알고 있던 견훤은 의자왕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대야성을 지목하고, 천도 직후 최초의 군사 행동으로 그곳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901년 공략은 물론 916년의 제2차 공격도 실패한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920년 견훤은 대야성을 함락한다. 비로소 이때 의자왕은 원한을 풀 수 있게 된 것이다. 「갈양사(葛陽寺) 혜거국사비(惠居國師碑)」에 따르면, 920년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한 직후 922년 후백제는 ‘미륵사 개탑’을 거행한다. ‘미륵사 개탑’과 같은 국가적 의식을 견훤이 백제의 개국지로 지목한 금마산에서 국가적 의식을 거행했던 것은 후백제가 백제의 계승을 완수했음을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920년 대야성 함락과 뒤이은 922년의 미륵사 개탑으로 의자왕의 원한을 풀겠다는 900년의 약속을 지킨 견훤은 익산을 중심으로 백제의 부활을 알리는 다양한 기념사업을 펼친다. 후백제 정권은 미륵사와 제석사 등 백제 때 만들어진 절들을 보수하는 한편, 백제의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탑, 즉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웠다. 왕궁리 석탑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지만, 백제 때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로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얇고 넓으며 처마가 만나는 곳이 살짝 들려 있는 지붕돌은 영락없이 대표적인 백제 석탑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단부의 구성과 결구 수법이 9세기 후반 문경과 상주 일대 단층 기단 석탑과 같아 백제 때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9세기 말~10세기 초에 제작된 금동불이 기단에 봉안되었다는 점은 이 석탑이 후백제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백제는 백제 때의 석탑 기술을 복원하지는 못하였지만, 백제의 옛 왕궁터에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특징들이 최대한 드러난 왕궁리 오층석탑을 세움으로써, 자신이 백제의 진정한 계승자이자 이제 백제가 부활했음을 대내외에 공표하고자 했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고려 석탑과 불상에 영향을 끼친 후백제 불교미술 936년 백제 계승자로서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하였던 후백제의 꿈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흔히 ‘백제계’로 일컬어지는 백제 복고양식(復古樣式) 석탑은 물론 석불이 조성되었다. 백제 석불의 영향이 강한 고려 석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태안 마애불,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등 백제 때 불상을 연상시키는 남원 지당리 석불입상이다. 백제 석탑과 외형이 비슷한 것들을 꼽자면, 익산과 가까운 군산 죽산리의 삼층석탑과 김제 귀신사 삼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공주 계룡산 청량사지(靑凉寺址) 오층석탑 등이 있다. 이러한 석탑은 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부재(部材)의 수가 많고 탑신에 비해 낮은 단층 기단이라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귀기둥[隅柱]과 탱주(撑柱)에 목조건축물의 전형적인 형식인 ‘민흘림 수법’과 ‘안 쏠림 현상’이 적용된 점이나 옥개석은 넓고 얇으며 4장 혹은 8장으로 구성된 점 또한 같다. 앞서 열거한 대표적인 백제 복고양식 석탑이 세워진 곳은 백제의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수도, 지방 거점도시, 지방사원이 있던 곳이다. 부여, 공주, 익산은 백제의 왕도였다. 은선리 삼층석탑은 백제의 중방(中方)이었던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과 인접한 곳에 있다. 성북리 오층석탑 인근에서는 백제의 기와 가마터와 절터[개복사지(開福寺址)]가 확인된 바 있다.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끝낸 고려는 불교로 사회를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런 만큼 많은 불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불사는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이 그 불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성향이나 역사적 경험과 인식이 석탑과 불상 등 불교미술품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었다. 고려시대 옛 백제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왜 백제 석탑을 연상시키는 석탑을 만들고 만들었을까. 백제 멸망 이후 신라에 예속된 백제의 옛터에 살던 사람들은 스스로 백제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신라에 대한 반감으로 비칠 우려가 있는 백제를 연상시키는 불상이나 석탑을 조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차츰 백제에 대한 연고 의식이 사그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제 계승을 내세우며 등장한 후백제는 그들에게 백제에 대한 귀소의식을 다시금 샘솟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고려가 들어선 이후에도 후백제가 그러했듯 백제 석탑을 모델로 지극정성 탑을 쌓고 또 쌓았을 것이다. /진정환 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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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05 15:26

[뉴스와 인물] 개원 10주년 맞은 안형순 국립무형유산원장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무형유산의 전당인 국립무형유산원이 올해 개원 10주년을 맞았다. 무형유산은 세대를 이어가며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전주시에 위치한 국립무형유산원은 인류의 무형유산을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승하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초의 무형유산 복합행정기관이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가고 절기상 처서가 지났다. 이제 국립무형유산원의 정원을 거닐면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해마다 계절의 옷을 갈아입은 국립무형유산원의 안형순(59) 원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와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국립무형유산원의 건물이 굉장히 웅장해 보입니다. 기념비를 보니 10년 전에 완공됐네요. “국립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을 계기로 2013년에 설립됐습니다. 무형유산의 체험 및 교육, 이수자 심사, 무형유산 아카이브 등 많은 사업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들을 위해 개방한 책마루 도서관과 전시관, 공연장 등이 조성돼 있으며 인문학 강좌들도 해마다 개최하고 있습니다. 무형유산 디지털체험관은 어린이뿐 아니라 일반 성인도 만족도가 높습니다. 2026년 9월에는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을 개원하고 2028년에는 전주에 어린이무형유산전당을 설립할 것입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10년 동안 이뤄낸 성과를 듣고 싶습니다. “무형유산의 전승체계를 확립할 수 있도록 조사, 연구, 기록 등을 해왔으며 국민 누구나 쉽게 무형유산을 향유할 수 있도록 고품질의 공연, 전시, 교육, 행사 등을 운영해 국민의 일상이 되는 무형유산이 되도록 해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 무형유산의 가치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 문화강국의 자긍심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형유산의 외연 확대뿐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무형유산의 전형을 지켜나가는 것도 중요한 만큼 우리 무형유산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다른 나라들과의 갈등 사이에서 이를 조정하기 위한 세계무형문화유산포럼, 국외 무형유산 기관 및 재외동포 교류협력 사업, 해외에서 진행되는 K-무형유산 페스티벌 등 우리 무형유산의 다양한 홍보 및 교류를 해왔습니다.” -개원 10주년을 맞아 국립무형유산원에서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습니다. “1일부터 기존 무형유산대전과 국제무형유산영상축제를 통합한 ‘2023 무형유산축전’을 새롭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막식은 국립무형유산원이 있기까지 많은 공헌을 해주신 유공자분들께 문화재청장 표창을 수여하고 무형유산 전승에 공헌한 240여 명의 보유자·단체에게 대통령 명의의 증서를 직접 전달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울러 초청공연과 미디어 파사드, 영화를 상영하고 개막공연으로 지역민과 즐길 수 있도록 야외무대에서 전통연희 판놀음도 진행했습니다. ‘한국전통줄다리기 한마당 축제’와 유네스코 보호협약 20주년을 기념하는 ‘세계무형문화유산포럼’도 개최했습니다.” -요즘 대세인 K-컬처와 더불어 K-무형유산을 알리기 위해 국립무형유산원이 준비하는 것이 있나요. “한국문화는 K-POP, K-드라마를 비롯해 한국어, 한복, 한식 등 세계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국립무형유산원에서는 한국의 전통성 및 전통문화의 가치를 공연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고 무형문화재 전승자에게 한류 확산에 동참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K-무형유산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독일의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26일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도 진행할 예정입니다.” -무형유산을 지속적으로 전승 발전시킬 수 있도록 향후 풀어야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무형유산은 외부 환경의 변화와 대중의 관심에 큰 영향을 받다 보니 현재와 미래세대에 온전하게 전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렵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생활여건의 변화로 대중성과 사회적 수요 부족에 따라 전승에 어려움을 겪는 종목은 전승 취약 종목으로 선정해 온전한 전승활동이 이뤄지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우리 무형유산 중 바디장, 배첩장, 전통장, 줄타기 등과 같이 몇몇 종목들은 전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보호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20세기 무형유산은 보존가치가 큰 무형유산을 지정하고 보존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는 우리의 무형유산이 현대인의 생활 속에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생명력을 갖고 다음 세대에 전승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문화재청에서 대변인 등으로 근무하셨는데 원장으로 임기를 수행하시면서 전주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는 시점에 임기를 시작해 무척 걱정이 많았습니다. 비대면 활동이 많아지면서 현장을 바탕으로 하는 조사, 전시, 교육, 공연 등이 위축돼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올해 코로나19 위기 단계가 조정됨에 따라 개원 10주년 행사를 지역민과 보내게 돼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올해 내부적으로 많은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해입니다. 원장으로서 어깨가 무겁고 고민이 많습니다. 지역에서 많은 분들이 응원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혼자가 아니라 느끼고 직원들과 무형유산 발전에 더욱 이바지하겠습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전주에 터전을 잡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요. “아쉬운 점이 그것입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전주에 있는지 모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좀 더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민과 함께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올해 버스 승강장 광고도 하고 지역 거점 관광안내소에 리플릿도 비치했습니다. 주민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홍보 방법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지역민이 제일 많이 찾아주실 때에는 공연이나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입니다. 4월부터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무형유산 민속 놀이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10월에는 시설 관람 투어도 계획 중입니다.” -끝으로 전북도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형유산은 우리의 의식주임과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제일 많이 지켜지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전북도민들이 무형유산을 사랑하고 국립무형유산원에 많은 애정을 가져주시고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 부탁드립니다. 앞으로도 10년 동안의 성과를 발판 삼아 살아있는 문화재인 무형유산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국민 여러분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안형순 원장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광주 진흥고와 전남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안 원장은 1993년 문화재청 7급 공채로 시작해 2022년 국립무형유산원 원장으로 일반직 고위공무원에 올랐다. 주요 경력으로는 문화재청 대변인과 근대문화재과장, 정책총괄과장, 운영지원과장, 문화재보존국장 등을 차례로 역임한 문화유산 행정전문가다. 문화재청 기획조정관을 지내다 원장에 취임한 이후 평소 겸손하고 소탈한 인품으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으며 지방자치단체 및 유관기관과의 상생과 협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 기획
  • 김영호
  • 2023.09.03 17:29

[지난 주 '핫클릭' : 8. 27~9. 1] 전주감나무골 재개발 착공 '눈앞'

△8월 27일~ 9월 1일 8월 마지막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 방문자들은 이종호 기자의 '전주감나무골 시공비 인상 갈등 매듭...본격착공위한 마지막 관문 통과'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기사는 전주 서신동 감나무골 주택 재개발 관련 조합과 시공사가 공사비를 3.3㎡ 당 579만 5000원으로 합의하면서, 본격적인 착공을 위한 관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공사비 협상이 마무리됨에 따라 오는 11월 착공에 이어 내년 1월 조합원 세대를 제외한 1300여 세대를 일반분양할 예정이다. 두 번째는 이준서 기자의 '탕후루에 거리 내어준 전주 한옥마을'이다. 이 기사는 최근 전주 한옥마을 내에 '탕후루' 등 외국음식을 판매하는 점포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이미지에 타격을 주고있다는 점을 짚었다. 세 번째로 관심을 끈 기사는 백세종 기자의 '[KCC, 연고지 부산 이전] 전주시 "깊은 유감⋯시민과 팬들께 사과"'다. 프로농구 KCC가 연고지를 전주에서 부산으로 변경 신청하고, KBL이 지난 30일 이를 승인하자 전주시가 곧바로 입장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어처구니없는 처사". 이밖에 송승욱 기자의 ''익산 디스코팡팡 신규 오픈?’ 학부모 우려 증폭', 이환규 기자의 '전북 유일 하늘길 군산~제주 노선 빠르면 내달 9일 재개', '폐우체통 손질하고 그림 그렸더니⋯전국 명소 됐다', 김태경 기자의 '전주 대한방직 옛 부지 개발 시작되나'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9.02 13:44

독자권익위원회 85차 정기회의 제안, 이렇게 반영했습니다

지난 6월 28일 열린 제11기 전북일보 독자권익위원회 제85차 정기회의에서 독자위원님들은 새만금 SOC 등 지역경제 관련 이슈에 대한 보도를 주문했습니다. 전북일보는 독자권익위원회의 다양한 제언을 반영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역경제 관련 이슈 보도 전북일보는 새만금의 이차전지 특화단지 지정을 계기로 새만금의 기반시설 부족에 대해 점검했습니다. 이차전지 특화단지 지정으로 새만금에 총 9조원에 달하는 이차전지 기업 투자가 전망되지만 기업 유치 뒷면에 숨은 기반시설 부족이 언제나 새만금 활성화에 발목을 잡는 요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새만금 이차전지 특화단지, 기반시설 구축 과제’를 통해 3회에 걸쳐 새만금에서 이차전지 산업을 미래 신성장산업으로 이끌고 가기 위한 전력문제, 임대용지 부족, 신항만 기반시설 재정사업 전환 등의 문제점에 대해 짚었습니다.(7월 24일 1면, 25일∙26일 각 2면) 최근 몇 년새 쌀값 하락으로 곡창지대 ‘농도’ 전북의 지역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내 농가에서는 정부가 쌀 수급 안정대안으로 내세운 ‘가루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루쌀’이 쌀 수급과 가격 안정의 돌파구가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가루쌀, 쌀값 추락 돌파구 될까’라는 주제로 도내 일반쌀 재배현황과 가루쌀 시대의 기대와 과제 등을 3회에 걸쳐 모색했습니다.(7월 3일∙4일자 각 2면, 5일자 6면) △시의성 이슈 심층보도 전북일보는 시의성 있는 핫 이슈를 선정해 심층보도하고 있습니다. 8월 첫주와 둘째주에 새만금과 전국에서 분산되어 열린 잼버리는 숱한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여야는 ‘잼버리 책임론'을 두고 시시비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번 잼버리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살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야 했습니다. 전북일보는 잼버리 기간동안 객관적 시각으로 새만금 잼버리를 바라보며 문제점을 보도했으며, ‘잼버리 결산’을 통해 잼버리 유치 전후 과정부터 대회 진행 과정, 향후 후폭풍 순으로 3회에 걸쳐 핵심 쟁점을 살펴보고 대회 파행의 원인과 진위를 파악해 보도했습니다.(8월 14일자 1면, 16일∙17일자 각 2면) 특히 잼버리 대회 파행으로 그 불똥이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으로 번졌습니다. 이는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관점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새만금 국제공항 착공 가로막는 논리의 허구성’을 주제로 2회에 걸쳐 새만금 국제공항 사업을 재조명했습니다.(8월 21일자 1면, 22일자 2면) 코로나19 이후 서민의 교통수단인 시외버스가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갈수록 인건비와 유류비는 오르는데, 승객은 줄어드는 상황입니다. 업체의 경영난은 고질병이 됐고 운송수입만으로는 운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도민의 발' 인 대중교통과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업계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한 실정입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도민의 발, 위기의 시외버스’라는 주제로 도내 시외버스 구간 중 승객이 적은 노선을 직접 타보며 기사와 승객들의 목소리, 시외버스업계의 경영 현황, 제언 등을 3회 보도했습니다.(7월 21일∙24일∙25일자 각 4면) 전북일보는 도내 시․군지역의 핫 이슈에도 관심을 갖고 심층보도하고 있습니다. 무주읍내는 정리되지 못한 도로환경과 주차난 해소를 위한 개선책 마련을 촉구하는 주민 목소리가 큽니다. 무주군 등의 적극적인 관심과 조치가 절실한 실정입니다. 또한 일부 주민의 배려심 없는 운전 습관을 비롯한 미성숙한 운전자 의식구조를 깨뜨려 도로교통 질서를 확립하자는 주민 자성의 의견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에 전북일보는 ‘무주읍 도로교통 환경 이대로 괜찮나’를 2회에 걸쳐 무주읍내 교통체계 등의 문제점과 대안 등에 대해 짚어봤습니다.(7월 10일∙11일자 각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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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3.08.30 18:29

완주 관광이 시작되는 곳, 삼례

완주군 삼례읍은 철도와 도로가 나기 전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해남과 통영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이 만나는 곳이 바로 삼례였다.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가 통신기관인 역참이 자리했고, 만경강 상류에 자리해 곡식도 풍부했다. '호남은 삼례로 통한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풍요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표적이 됐다. 일제는 삼례에 역을 짓고, 양곡창고를 세웠다. 양곡창고는 농민들에게 빼앗은 쌀들로 빼곡했다. 일제의 수탈과 전라선 복선화로 삼례역도 옮겨가면서 삼례읍은 점차 옛 명성을 잃어갔다. 그러나 최근 삼례가 꿈틀거리고 있다. 문화와 예술로 조금씩 세상에 얼굴을 내밀던 삼례읍은 최근 ITX 정차와 테마형 관광열차 유치까지 더해지며 완주 관광의 시작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완주의 관광은 삼례로 통한다 9월 1일부터 삼례역에 ITX-새마을호가 1일 2회(상행 1, 하행 1) 정차된다. 여수~익산을 운행하는 ITX-새마을호는 왕복 2회 운영 중으로 그동안 삼례역에는 정차하지 않았다. ITX 정차는 KTX 정차를 이끌기 위한 첫걸음이다. 유희태 군수는 취임직후부터 삼례읍이 교통거점 역할을 수행해 완주 관광이 시작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왔다. 유 군수가 삼례읍이 교통거점지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우석대 후문을 중심으로 주차장을 조성해 추진한 것이 ITX 삼례역 정차를 이끈 원동력이 됐다. 현재 완주군은 1000대의 주차가 가능한 공간을 확보했다. 코레일에서도 KTX 정차를 위해서는 주차장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차장은 철도 이용객의 편의 제공을 위한 필수요건이기도 하지만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동안 군은 삼례역 KTX 정차를 위해 KTX가 정차하는 김제시를 방문하고, 한국철도공사 전북본부에 KTX 정차를 재차 건의하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또한, 유 군수는 전북을 방문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삼례역 KTX, SRT 정차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군은 에코레일, 국악와인열차, 농뚜레일, 임시관광열차 등 테마형 관광열차를 유치해 삼례역 정차를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전거로 만경강길을 즐기는 에코레일의 삼례역 정차를 확정짓기도 했다. 특히, 운곡지구와 삼봉지구의 대규모 주거단지의 입주 시작과 함께 인구가 늘고 지역경제도 활기를 뜨면서 교통수요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여기에 완주의 첫 국가산단인 수소특화국가산단까지 조성되면 교통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삼례읍에 KTX 정차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KTX 정차가 확정되면 삼례읍은 교통거점지역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 깃든 명소에 즐길 거리 가득, 끝없는 삼례의 매력 유 군수 취임 이후 삼례읍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삼례 관광 활성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그 첫 번째가 삼례문화예술촌 활성화다. 십 수년째 방치됐던 삼례문화예술촌 앞마당의 수십 톤의 폐기물은 말끔히 정리됐고, 대형 트럭의 불법 주차 논란도 해소됐다. 새만금 신시도광장을 지키던 김종원 작가의 작품 12점이 삼례문화예술촌에 새로 자리 잡기도 했다. 지난 7월부터 시작해 9월까지 이어지는 야간 플리마켓 ‘삼례夜놀자’는 큰 구경거리다. 매주 금, 토요일 삼례문화예술촌 마당에서 진행되는 플리마켓은 푸드트럭, 시원한 맥주존, 버스킹 공연과 야간 돗자리 영화를 상영하며 삼례의 밤을 보석처럼 밝히고 있다. 올해 봄에는 전국 보부상 마켓이 열려 1만 명이 넘는 전국의 관광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인기에 힘입어 삼례문화예술촌은 9월 9일과 10일 2일간 전국 보부상 마켓을 다시 한 번 연다. 90개의 전국 유명 보부상 셀러들이 직접 참여해 품질 좋은 제철 먹거리와 식품, 의류, 생활소품, 잡화 등 각 지역의 먹거리와 수제품들을 판매한다. 우석대학교에 추진되고 있는 문화역사전망대는 완주군의 랜드마크로 떠오를 전망이다. 완주 문화역사전망대는 만경강과 호남평야 등 국내 최고의 비경을 한눈에 조망가능하다. 우석대 본관 23층과 옥상을 활용하는 것으로 만경강과 호남평야, 전북권역 조망이 가능한 야외 루프탑 가든 형식으로 조성될 예정이다. 내부에는 호남평야와 전북권역 조망이 가능한 스카이라운지에서 문화역사 전시와 각종 행사,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게시설을 만드는 ‘완주 문화역사 복합전시관’을 조성하게 된다. 무대와 계단형·평면형 좌석, 카페 등이 들어서며 8개의 조망창을 통해 만경강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100년 역사를 품고 있는 삼례역에는 새로운 문화공간 ‘쉬어가삼[례:]’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삼례역과 완주 의병의 역사 콘텐츠 전시와 독서, 여행정보 안내, 공유인터넷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여행자 쉼터다. 쉬어가삼[례:]는 의병, 역참, 여행자쉼터 3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바닥에 있는 화살표를 따라 가다 보면 나라를 지킨 완주의 의병과 역참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다. 여행자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마련된 여행자 쉼터는 누구나 편안하게 쉼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다.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컬러풀한 빈백과 이색적인 테이블 등 공간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다. 유희태 완주군수 “삼례읍은 관광허브가 될 것” 유희태 완주군수는 삼례읍을 활성화해 옛 명성인 “호남은 삼례로 통한다”는 말을 다시금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주말이나 새벽시간 짬이 날 때면 삼례읍을 수시로 찾아 기존 정책을 점검하고 향후 방향을 구상할 정도로 애정이 깊다. "삼례역 KTX 정차를 이끌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삼례읍을 관광으로 활성화 하는 것입니다. KTX 정차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주차장도 있지만, 이용객이 많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유 군수가 현재 적극적으로 테마형 관광열차 유치를 추진하는 것도 그 일환이다. 유 군수는 “뛰어난 자연경관을 가진 비비정을 포함해 삼례문화예술촌 활성, 쉬어가삼[례:], 우석대에 조성될 완주 문화역사 복합전시관까지 완성되면 삼례 관광의 삼각벨트가 이뤄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며 “관광의 혁신을 일으켜 삼례에 첫 발을 내딛은 관광객들이 완주의 전역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 기획
  • 김원용
  • 2023.08.30 18:25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동물원 속 방치되는 동물…그들의 미래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히 마른 사자 '바람이'의 사진이 공개되면서 동물복지 논란을 일으켰던 경남 김해시 부경동물원이 지난 12일, 드디어 운영을 중단했다. 당시 부경동물원에 갇혀 있던 바람이는 사람나이로는 100살이 넘는 나이로 삐쩍 마른 채 낡고 열악한 시설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이를 본 많은 시민의 비판이 부경동물원과 김해시청에 쇄도했고 바람이는 충북 청주시가 운영하는 청주동물원으로 이원 됐다. 그러나 여전히 부경동물원에 남아 있는 동물들은 몇 달 전의 바람이처럼 좁은 면적, 콘크리트 바닥, 감옥형 전시시설에서 굶주리고 있다. 사자와 코끼리, 고래 등 야생 동물은 좁은 시설 안에 가둬지는 것만으로도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지난 2016년에 발표된 '수의학행동' 국제학술지에 의하면, 동물원에 사는 사자는 야생 사자와 달리 번식, 사회적 관계 등 생활이 비정상적이며 늘 안절부절 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 같은 원인으로 야생 사자는 대개 하루에 약 20~21시간을 휴식하지만, 동물원 사자는 평균 10~15시간에 못 미치게 수면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 서식지 평균 넓이가 80~100k㎡로 매우 좁은 것도 그 원인에 한몫한다고 서술했다. 동물들의 더 나은 환경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먹이, 사료 섭취 외에도 대형 야생 동물 보호 시설과 동물의 습성을 고려한 사육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 이에 미국동물원 수족관협회에서는 동물복지를 바탕으로 멸종위기종의 보전을 위해 동물원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는 동물원에 미국 동물원 협회(AZA) 인증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AZA 인증을 획득한 국내 동물원은 용인 에버랜드와 서울동물원 단 두 곳이 전부였다. 지난 2020년 환경부 집계 기준, 국내 동물원이 총 114곳, 동물 5513종 4만8911마리가 서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매우 낮은 수치다. △동물원 내 동물보호 문제 발생 시 벌칙 조항 미비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동물들이 죽어갈 때까지 이 문제를 왜 해결할 수 없었을까? 현행법상에 따르면 동물원은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운영된다. 즉, 시설의 소재지와 전문인력, 보유 개체수 등의 일정한 기준치의 조건을 갖추면 지자체장이 동물원을 운영할 수 있는 등록증을 발급한다. 그러나 서식 환경에 대한 기준이나, 벌칙 조항은 존재하지 않아 우리에 갇힌 동물이 아사 직전까지 내몰려도 과태료나 개선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정상적인 절차와 허가를 받은 시설이기에 시설 소유자나 관리자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오는 12월부터 동물원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난해 12월 '동물원 및 수족관의 관리에 관한 법률'(동물원 수족관 법)과 '야생 동물 보호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야생생물법) 등이 개정됐다. 이 개정안은 오는 12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기존 동물원 등록제를 허가제로 전환하고 종별 사육기준을 별도로 마련해 동물원의 환경을 더욱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종별 사육기준이나 방사장 규모는 추후 구체화 될 예정이며 사자와 호랑이 등 맹수는 야외 방사장이 있는 동물원에서만 사육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동물원 운영자가 동물보호법을 위반해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았다면 동물원 허가를 내주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기존 사업자에게는 방사장 부지확보 등을 위해 약 5년간의 유예기간이 주어져 해당 문제가 당장 개선되기란 어렵다. 다만 해당 유예기간에는 기존 사업자에게 전문 검사관 제도를 시행해 사육 환경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검사관 제도란 기존 시설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 될 시 동물원에 직접 방문해 동물의 건강 상태와 사육을 점검할 수 있는 것이다. △방치된 동물, 사유재산으로 구조할 방법 적어 일각에서는 개정된 법이 시행될 시 운영난을 겪는 동물원이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동물들을 방치할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현행법상 동물은 '사유재산'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앞서 언급된 '바람이'와 같은 동물이 나오더라도 소유주가 동물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구조할 방법이 없다. 현재 부경동물원 역시 여러 동물보호단체가 남겨진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동물을 직접적으로 구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 산하 공공기관이 적극적으로 동물 구조에 나서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민간 단체가 동물 구조 및 보호를 주도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정부 기관, 환경 단체가 협력해 방치 동물을 구조한다. '미국 어류 및 야생 동물 관리국' 미국 내무부 산하 기관은 멸종위기종의 관리와 보존, 미국 국립 야생동물 보호소와 시스템의 구축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이들은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와 협약을 체결해 해달과 바다거북 등의 멸종위기 동물을 구조하고, 야생으로 안전히 돌려보낼 수 있을 때까지 보호하고 있다. 또, 캐나다에서도 지난 2019년 캐나다 퀘벡의 한 동물원이 동물 학대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사자, 곰, 호랑이, 캥거루, 늑대 등을 포함한 200여 마리의 동물을 몰수했다. 이후 해당 동물들은 북미 지역의 동물보호단체들이 운영하는 야생 동물 보호소로 이동됐다.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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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30 18:08

[전북일보 제11기 독자권익위 제86차 정기회의] “새만금, 잼버리 문제 냉정하게 본질적 접근 필요”

전북일보 제11기 독자권익위원회 제86차 정기회의가 30일 오전 11시 전북일보 3층 편집국장실에서 열렸다. 이날 회의에는 임성진 위원장(전주대 행정학과 교수)을 비롯한 윤석(전북건설협회 운영위원)·이재규(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위원 등 제11기 독자권익위원과 전북일보 강인석 편집국장이 참석했다. 독자권익위원들은 이날 정기회의에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 이후 처한 전북의 현실에 대해 냉철하고 본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언하면서 다가오는 총선에 있어 지역 민심을 대변할 수 있는 기사의 필요성 등을 주문했다. 이날 제시된 독자권익위원들의 다양한 의견과 제안을 정리한다. △임성진 위원장=항상 저희 독자위원들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해 준 전북일보에 감사드린다. 특히 기획보도 등 기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사가 많았던 것 같아 그에 대한 격려 말씀도 드리고 싶다. 잼버리 문제 등을 논의하는 데 있어 문제의 본질은 전북도와 윤석열 정부와의 싸움이 아닌데 전북에서 잼버리를 개최했다는 이유로 전면에 떠밀려 온 상황이다. 언론에서도 냉정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예산도 그렇고 지금 전북도민들에게 굉장히 심각한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전북에서 다수 지지를 받는 더불어민주당이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같고 전북도만 진화에 나서고 있는 것 같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방자치를 폐지 또는 축소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부당하게 전북에 책임을 씌우고 예산을 삭감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비판해야 하겠지만 문제의 본질과 지방자치 측면에서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후쿠시마 방류 문제에 대해서는 전북일보가 심층적으로 다뤄 좋았다. 다만 지난 7월 4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일본 정부의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에 대해 국제 안전기준에 부합한다고 평가했을 때부터 선제적으로 집중 보도가 됐으면 어떨까 한다. 사건이 불거졌을 때 보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문제를 예견하는 보도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각 언론에서 기후변화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세션을 전북일보에서도 다뤘으면 좋겠다. 올해 폭염으로 취약계층이 힘들었는데 사회적으로 이슈가 덜 됐던 면이 있다. 사회적 취약계층이 지구 온난화에 더욱 힘들 수 있는 만큼 그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내년 총선이 7개월 남은 상황에서도 선거구 획정 관련 지적 보도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다만 최근 위성 정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제기된 만큼 이를 막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는 보도가 필요해 보인다. △윤석 위원=잼버리 후폭풍 관련 보도의 일환으로 잼버리 행사와 새만금 SOC 상관성에 대한 분석 보도가 있었는데 이해하기 쉽게 작성돼 매우 좋게 봤다. 당시 보도에서 국토부 용역 보고서 인용을 했는데 이를 이미지화했으면 독자에게 더욱 와닿는 기사가 되었을 것 같다. 또한 용역 관계자 또는 용역을 담당했던 부처와의 인터뷰나 멘트가 기사에 있었으면 더욱 생동감 있는 기사가 됐을 것 같다. 새만금 사태에 대해 전북 정치권이 나몰라라 하는 것을 지적하는 기사가 있었다. 국회의원이 제대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은 항상 나오는 이야기인 만큼 이에 대한 접근 방법을 다르게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새만금과 관련한 국회의원들의 반응, 발언 등을 표로 계량화해 비교하면 어떨까 한다. 그렇게 되면 국회의원 입장에서도 경각심을 가질 수 있고 독자도 어떤 국회의원이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새만금은 전북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 지역 사람들이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이다. 지지부진한 사업에 돈을 들이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전북인 목소리를 담아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실적으로 현 정부가 강조했던 새만금 내 이차전지 기업 유치 등이 있었던 만큼 이들 기업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한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SOC(사회간접자본)가 없으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번 국가예산을 살펴보면 SOC 예산이 대폭 삭감되거나 반영되지 않았다. 새만금에 투자할 이차전지 관련 기업들이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터뷰를 해보면 어떨까 한다. 기업 입장에서 투자 철회 등의 목소리가 나오면 현 정부에도 강한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재규 위원=일반인의 경우 기사를 길게 읽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독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픽토그램이나 인포그램 등을 활용해 지역별 SOC가 어떻게 분배되고 지역별 편차가 어떻게 되는지를 독자가 한 눈게 보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또 기사뿐만 아니라 카드 뉴스 등으로 이를 제작해 외부에 인용될 수 있게 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한다. 공항과 관련해서는 지금 광역권 중 유일한 공항 부재 지역이고 또 여타 연계되는 공항이 아니더라도 광역권 교통수단이 지극히 미흡한 부분을 좀 촘촘하게 대비시켜서 보여주는 작업이 있었으면 한다. 두 번째는 잼버리 문제가 현재는 전국 보도에서 밀리면서 전북이 고립되는 모양새가 된 것 같다. 민주당은 뒤에 있고 전북도만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고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계속해서 던지면서 특히 민주당의 경우 이 이슈에 대해 온도 차이가 매우 큰 데 민주당 중앙당과 전북도당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적하는 보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잼버리 이슈로 새만금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방조제를 허물어야 한다는 새만금 초기화론부터 해수 유통을 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견들을 공론화 장을 만들어 합의점을 높여보는 시도가 있었으면 한다.

  • 기획
  • 엄승현
  • 2023.08.30 17:42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화유산으로 본 후백제] (19)후백제 견훤의 불교 사상-미륵신앙과 선종

견훤이 미륵신앙과 언제, 어떻게 관련을 맺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서남해 지역에서 신라에 대항하여 자립을 선언한 것이 바로 농민 반란이 일어난 889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과 한 달만에 5천 여 명이라는 대규모의 집단을 형성하였는데 대부분이 농민이었음에 눈길이 간다. 견훤이 농민의 호응을 받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상적으로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견훤이 자립을 선언할 무렵 그곳에는 진표의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옛 백제 지역의 농민들은 진표의 미륵신앙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고 백제 부흥운동을 외치며 일어난 견훤에게 크게 호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견훤은 진표의 미륵신앙을 이용해 반신라적인 성향을 가진 농민들을 불러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표의 미륵신앙의 특징은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곧바로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윤회전생하여 다시 인간세계에 태어나서라도, 이 지상에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진표의 반신라적인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소망을 견훤이 나름대로 실현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견훤은 미륵불이 하생하는 용화세계의 구현을 내세움으로써 반신라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던 서남부 지역의 농민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모은 견훤은 서남해 지역에서 광주로 옮겼고, 광주 호족세력과 결합을 통해 그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다. 그 결과 견훤은 호족세력과 연결된 농민들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었고 진표의 미륵신앙의 근거지였던 금산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견훤이 금산사를 중창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던 것은 후백제를 건국한 초기에 미륵신앙을 주된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후백제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고 생각된다. 견훤이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한 것은 900년의 일이었다. 전주로 천도한 이후에도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렇지만 김제의 금산사보다는 익산의 미륵사에 더 관심을 두었다. 그가 익산에 더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익산 지역의 미륵신앙은 무왕의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염두에 두면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을 추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좀 더 설명하면 진표의 미륵신앙은 농민층이 주된 계층이었으나,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미륵신앙은 군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이후 그가 스스로 왕을 내세운 것이 바로 이 시기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성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진표의 미륵신앙이 불만층의 농민을 대변하는 것이었다면 익산 미륵사에서 개탑 의식은 군주로서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견훤의 미륵신앙에 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김제의 금산사를 중심으로 하였던 미륵신앙을 익산의 미륵사를 통하여 새롭게 흡수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견훤은 국가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이후 미륵신앙만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불교계에서 유행하는 선종에 대해서도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다고 그가 하루 아침에 선종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일찍부터 선종에 관하여 일정한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견훤이 태어나기 전에 그곳에는 선종 승려인 혜소선사와 무염선사(800∼888)가 연이어 활동하였고 그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두 선승은 모두 당에 유학하였으며 신라 왕실로부터 상주에 머물면서 그곳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주문받았다. 이와 같이 견훤이 태어난 상주는 일찍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인연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도헌선사(824∼882)가 개창한 희양산문도 견훤이 태어난 곳이었다. 그가 상주를 떠나 중앙군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교종보다는 선종 불교와의 친연성이 더 하였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견훤이 광주 서남해 지역에서 활동하였을 때 당시 전라도 지역에서 유명하던 선종산문은 체징에 의해 개창된 가지산문의 보림사, 혜철 선사에 의해 개창되었던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이다. 비록 산문의 개산조는 이미 열반에 들고 없었지만 그들의 제자들이 왕실과 연결되어 산문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견훤은 옥룡사의 도선국사(827∼898)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선은 풍수지리에 밝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견훤은 그를 지원하면서 반대급부로 풍수지리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세우는데 사상적 이념으로 삼았다고 보아진다. 무진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실상산문과도 연결하였다.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오월과의 수교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실상산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10년 이전 편운화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견훤이 의도하였던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워 즉위하자 태안사를 주도하던 윤다선사가 왕건에게 갔다. 그러자 견훤은 당에서 귀국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선종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재편을 서둘렀다. 견훤이 경보를 우대한 것은 성주산문과 굴산문을 포섭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는 경보가 두 곳의 선종 산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그의 세력권 아래에 들어온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은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선종 불교와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남원 실상사(사적 309호-홈페이지) 견훤과 경보 선사 통진대사 경보는 견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선승이다. 그는 속성이 김씨이고, 구림(현재 영암) 출신이다. 10세 무렵에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아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의 허락을 얻어 부인사(夫仁寺)로 출가했다. 그곳에서 화엄을 공부하다가 선종으로 눈을 돌려 백계산 옥룡사의 도선국사를 찾아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무렵에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도선국사의 허락을 받아 여러 곳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성주산의 무염대사와 굴산문의 범일선사를 찾아 깨우침을 더하였다. 두 선지식을 방문한 것은 선종불교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만남을 통해 중국 유학을 결심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24세 무렵에 중국 유학을 떠나 무주(撫州)의 소산광인화상으로부터 조동종을 전수받았다. 광인화상은 그에게 법을 전하면서 “불법이 동쪽으로 전해질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불법을 구하는 자로서 더불어 도를 말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동쪽에서 온 사람중에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자는 오직 그대 뿐이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실력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인화상을 떠나 강서의 노선화상을 배알하고 또 마음의 법을 전해받았다. 그리고서는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깨우친 바를 실행하다가 53세의 나이로 귀국하였다. 중국에 유학가서 머문 기간이 무려 3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신라 출신의 선승들이 당에 머문 기간과 비교해 보면 많은 시간을 중국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921년 전주 임피현으로 귀국하자 견훤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리고 견훤이 마련한 남복선원을 물리치고 스승인 도선국사가 지냈던 광양의 옥룡사에서 머물렀다. 그는 견훤의 뜻을 이해하고 국사가 되었으며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서로 연결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 가운데 후백제가 고려에 의해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936년에 왕건의 초청으로 개경으로 향했다. 그러므로 견훤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그 기간은 대략 15년 정도였다. 개경으로 간 대사는 왕건 및 그의 아들인 혜종과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그리고 정종 2년(947)에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조범환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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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29 16:07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 삼③삼③하네!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된 무주반딧불축제가 여전히 특별한 건 ‘반딧불이’ 덕분이다. 살아있는 환경지표곤충 반딧불이를 앞세워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기 위한 온힘을 쏟고 있기 때문. 덧붙여 올해는 개념축제를 지향한다. ‘지킬 건 지키고, 즐길 건 즐긴다’는 마인드로 준비한 삼③삼③한 축제.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의 매력 속에 빠져볼까? △'지킬 건 지킨다' 3無 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답게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친절, 위생, 서비스, 그리고 고객편의를 기반으로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일회용품 없는 축제, 안전사고 없는 축제 등 '3무(無) 축제'로 거듭난다. 1.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를 만들어 산골영화제의 착한가격 이슈가 반짝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줄 방침이다. 이를 위해 무주군은 푸드 코트 입점 업체와 사전에 음식종류를 비롯한 양에 맞는 적정 가격을 협의한 상태로 모든 음식은 착한가격을 고수한다는 방침이다. 그렇다고 “양이 적겠지”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 이번 무주반딧불축제에 오시면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저렴하고 푸짐하게 드실 수 있다. 2. 일회용품 없는 축제! 기후와 생태환경의 변화가 인류생존을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고 실천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무주반딧불축제 역시 ‘일회용품 없는 축제’로 걸음을 맞출 계획. 환경축제에 걸맞은 실천을 해보이겠다는 것. 일회용품 없는 축제‘는 친환경 다회용기 사용으로 완성시킨다. 행사장 내 ‘푸드 코트’와 ‘천원국수 코너’에서는 무조건 다회용기! 여기에 텀블러를 준비해오는 관람객들의 센스가 만나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겠다. 3. 안전사고 없는 축제! 무주반딧불축제의 모든 시작과 끝은 ‘안전’이다. 아무리 유익하고 재미가 있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단 것. 무주반딧불축제 역시 ‘안전사고 없는 축제’에 사활을 걸었다. 분야별 안전관리 계획을 수립해 사전 점검과 리허설까지 모두 마쳤으며 이를 기반으로 주요 행사·명소의 동선 별 안전을 확보했다. 덧붙여 관람객과 시설물, 먹거리, 그리고 코로나19 방역에 대한 안전관리 기준을 강화해 만일의 상황에 철저를 기할 방침이다. △'즐길 건 즐긴다' 3有 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의 정체성은 충분히 지키고 온종일 흥미진진 재미있는 축제라는 명성을 쌓기 위해 낮에도 밤에도 친환경 '3유(有) 축제'를 선보인다. 1. 낮에 즐기는 축제!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젊고 역동적인 축제를 지향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MZ세대들이 참여하는 ‘전국 청소년 치어리딩 페스티벌’과 ‘전국 청소년 「끼」 페스티벌’을 신설하고 9월 5일은 ‘키즈데이’로 정해 집중한다. 또 ‘NEW 물벼락 페스티벌’ 등 기존에 흥행했던 인기 프로그램들을 부활시켜 관람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계획. 여기에 다채로운 버스킹 공연과 각 읍·면 전통놀이가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줄 전망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 묘향산사고본을 적상산사고까지 이안하던 행렬을 재연한 행사는 9월 9일 단 한 번, 볼 수 있다. 2. 친환경 실천하는 축제! ‘반딧불이 신비탐사’와 ‘가족과 함께하는 1박2일 생태탐험’, ‘반디별 소풍’, 그리고 ‘국제 반딧불이 심포지엄’은 환경축제로서 무주반딧불축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다. 천연기념물이자 환경지표곤충인 반딧불이를 소재로 풀어내는 ‘반디이야기’인 셈. 자연을 배경으로 지구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반딧불이의 속삭임에 다같이 귀 기울여보자. 축제장에 마련된 ‘반딧불이 주제관’에서는 날씨와 밤낮에 관계없이 살아있는 반딧불이와 만날 수 있다. 3. 밤이 아름다운 축제! 무주반딧불축제를 즐기기엔 역시나 밤이 제격. 캄캄한 밤을 빛나게 할 ‘무주 안성낙화놀이(전라북도 무형문화재)’와 ‘반디 드론라이팅 쇼’, ‘디지털 불꽃놀이’, ‘별빛다리(미디어 파사드)’가 관람객들을 손짓한다. 게다가 전에 없던 ‘열기구 체험’까지 있으니 가슴 설렐 일. 열기구를 타고 하늘을 오르는 환희와 무주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밀려오는 감동을 한 번에 만끽할 수 있다. 꼭 타지 않더라도 온화한 불을 품고 두둥실 떠올라 밤하늘을 수놓은 열기구를 바라보는 재미도 그만이다. 황인홍 무주군수 "‘무주다움’ 토대 자연과 인간 공존하는 축제" 황인홍 군수는 "'자연특별시 무주로의 힐링 여행'을 주제로 가을의 초입에 9일간 개최되는 제27회 무주반딧불축제는 ‘무주다움’을 토대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축제라는 차별화된 전략과 만족도 높은 프로그램, 그리고 대내·외를 아우르는 전 방위적 홍보까지 심혈을 기울였다"고 강조했다. 이어 "무엇보다 바가지요금 없는 축제, 일회용품 없는 축제, 안전사고 없는 축제 등 ‘3무(無) 축제’로 만들기로 한 만큼 동참하시는 즐거움, 누리는 기쁨이 있을 것"이라면서 "꼭 오셔서 전라북도 대표축제, 대한민국 대표 환경축제의 면모를 확인해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송열 무주반딧불축제제전위원회 위원장 "세대별 맞춤형 볼거리, 즐길거리 강화" 유송열 위원장은 "올해 축제는 코로나19 위기 단계 하향으로 마스크를 벗고 개최가 되는 만큼 지난해 방문객 19만여 명 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오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문객 여러분이 안전하게 무주반딧불축제를 즐기실 수 있도록 준비했다"며 "9월 4일은 ‘태권도 데이’, 5일은 ‘키즈 데이’, 6일은 ‘청소년 데이’, 8일은 ‘트롯 데이’로 정해 주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방문객이 뜸한 평일 프로그램을 강화했다"고 밝혔다. 그는 "세대별 맞춤형 볼거리, 즐길거리를 강화한 만큼 골라 보는 재미도 느껴보시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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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효종
  • 2023.08.29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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