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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이종의 조화, 연결의 미학…예술이어서 가능했다

지난 축제의 스케치 영상과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저리다. 수많은 아티스트와 관객, 스태프들의 표정에서 우리가 이때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을 나누고 있었는지 절절해진다. 스태프들이 고난의 행군을 할수록 축제는 섬세해진다. 그런데도 축제 속에 있고, 축제가 좋다. 고난보다 큰 보람과 환희, 카타르시스를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축제의 보람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좀 더 벅찬 우리라는 공유와 공감의 전이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코로나 19에 대한 소리축제의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개별공연과 사업을 위한 협의와 결론의 과정, 그 이후 계약에 대한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고심이 깊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해외 교류, 소통과 협업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럴수록 축제가 걸어온 소중한 교류사업의 성과들이 알알이 빛나 가슴에 박힌다. 우리라는 공유와 공감이 퍼져가던 뜨거웠던 그 순간들. 다시, 지성의 연대와 이종(異種)의 조화를 생각하며, 소리축제의 아주 특별했던 LINK(이음)의 순간들을 떠올려본다. △ 2014~2017 폴란드와 소리축제, 소팽과 아리랑의 낭만적 만남 존재 자체로 폴란드의 상징인 위대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쇼팽, 한국인의 정서가 몇 소절의 음절로 압축된 아리랑. 두 나라의 음악적 상징을 앞세운 한-폴 프로젝트 쇼팽&아리랑. 폴란드 유명 뮤직 페스티벌 바르샤바 크로스컬쳐 페스티벌 예술감독이자 전통음악과 고음악에 심취한 마리아가 두 나라 간 협업을 제안했을 당시만 해도, 이 사업이 이렇게 긴 시간과 여운으로 이어질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장장 4년 동안 지역 예술가와 폴란드 예술가가 한국-폴란드 양국을 오가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생산해냈다. 아리랑을 바탕으로 한 한국인의 정서, 그리고 쇼팽의 음악을 폴란드 고악기로 재현하는 등 특별한 음악실험을 하는 폴란드 고악기 연주자들과의 만남은 고요하면서도 격정적인 두 나라 간 음악적 교집합을 발견하며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이 팀은 이듬해 폴란드 크라쿠프 크로스로드 페스티벌 무대에 초청받아 폴란드 관객들에게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이후 2년 동안은 폴란드와 한국을 오가며 양국의 궁중무용 팀의 협업이 진행됐고,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도 서로의 음악과 춤이 교차하며 특별한 에너지를 만들어냈다. 상시적인 예술 인프라를 보유하지 못한 축제 조직에서 4년 간 해외기관과 교류를 추진해 새로운 프로젝트를 생산해냈던 것은 전국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양 기관의 열정과 신뢰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폴란드의 쇼팽과 우리의 아리랑, 이 위대하고도 낭만적인 만남이 다시 한 번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 2015 한-캐 프로젝트 이종(異種)의 미학, 레이첼 트렘블레이&김보라 훤칠한 메조 소프라노 레이첼과 아담한 소리꾼 김보라의 캐미도 잊을 수 없다. 레이첼 트렘블레이는 2014년 세계적인 성악대회인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 성악가대회에서 최초로 소리축제상(Sori Choice Artist)을 수상한 음악가이다. 소리축제와 세계성악가대회가 협업을 맺고 이듬해 소리축제 무대에서 주목받는 젊은 소리꾼 김보라와 콜라보 무대를 선사했다. 당초 오송제 편백나무숲에 계획되었던 무대는 쉴새 없이 쏟아지는 비로 급히 명인홀로 옮겨졌다. 그때만큼 비가 야속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상쇄라도 하듯, 명인홀은 두 사람의 호흡 속에서 꽉 찬 아우라와 감동으로 가득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관통하는 듯, 김보라의 단단하게 다져진 깊이있는 소리와 레이첼의 무게감 있고 미려한 목소리가 어느 순간 균형을 맞추었다. 아름답다는 말이 터져 나오던 잊지 못할 무대였다. △ 대만과의 길고도 끈끈한 협업젊은 전통 음악가들의 고민을 담다 대만과의 협업은 매우 끈끈하고 우정 어린 시간들을 이어왔다. 소리축제와 대만의 국립가오슝아트센터가 지난 2018년 협약을 맺으며 양국 아티스트들의 활발한 교류가 시작됐다. 물론 대만과는 지난 2015년부터 대만 국립전통예술중심과 꾸준히 교류사업을 이어왔고, 이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대규모 예술극장인 가오슝아트센터와도 연을 맺었다. 소리축제의 대표적인 경쟁 프로그램인 소리 프론티어의 수상자들이 한국전통의 뉴 웨이브를 선보이며 대만의 젊은 아티스트들과 만났다. 대만의 실험적인 젊은 전통 음악가들이 소리축제를 찾아 파격적이고 새로운 음악적 조류를 선보이며 갈채를 받았다. 이 두 나라의 교류가 유난히 벅차고 아름다웠던 것은, 양국 젊은 전통음악가들이 비슷한 고민과 새로운 도전 앞에 흥분과 설렘, 기대와 비전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음악적 완성도와 성취보다 더 값진 발견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수교 30주년 사업, 외교적 성과로 연결 올해는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맺은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올해 소리축제 해외 프로그램은러시아 포커스가 가장 비중 있게 준비되고 있다. 지난해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페테르부르크 콘체르트라는 예술기관 관계자들이 소리축제를 방문해 MOU를 맺고 올해부터 양국을 오가는 다양한 예술인 교류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특히 올해는 한-러수교 30주년을 맞는 해로 소리축제를 찾는 러시아 팀들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러시아 민속음악이 중심이 됐다. 지난해 10월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주관하는 코리아 페스티벌에 소리축제 최근 화제작인 판소리-플라멩코 프로젝트가 초청 받아 무대에 서면서 한-러 수교 교류사업은 페테르부르크 콘체르트와 총영사관 양 축을 파트너로 삼아 사업의 윤곽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소리축제의 예술적 교류사업이 외교적으로도 확장되며 양국 우호협력의 끈끈한 촉매로서 주목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소리축제는 작게는 올해 축제 교류를 위한 러시아팀 초청업무부터 페테르부르크 콘체르트 교류사업, 외교부 교류업무까지 다양한 사업들이 잇따르면서 많은 가시적 성과들을 기대하고 있다. 한-러 수교 사업으로 소리축제의 국제적 위상, 국내외 신뢰도, 예술인들을 위한 공익적 기여 등에서 한 발짝 진일보한 국면을 맞게 되리라 내다보고 있다. 아직 좌절이나 절망을 논하기 이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희망의 메시지로 서로를 독려해야 하는 시간임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는 다시 이어질 것이다. 소리축제에서 배운 아주 귀한 교훈 하나가 있다면, 음악을 통한 평등이라는 가치다. 동서고금, 남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음악을 마주하는 이의 토양과 배경, 마음의 결로 음악의 通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통하였느나, 하지 못하였느냐는 오로지 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마음이 가 닿는 곳에, 다름과 거리가 대수이겠는가. 오늘 다시 이 귀한 이종의 조화, 연결의 미덕을 예술을 통해 잊지 않는, 되새기는 하루가 되었으며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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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7 16:15

[참여&소통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코로나 이후 산학교육의 변화

지난 2020년 1월,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확진자를 줄이기 위해 재택근무를 권장하는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출근을 했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요즘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버스나 택시에 승차할 수 없을 정도로 마스크 착용 의무화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또한 확산되었다. 유아부터 청소년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미지의 바이러스로부터 자식을 차단하기 위해 검색과 정보수집에 열을 올려야 했다. 워킹맘들은 눈치껏 퇴근하거나 심지어는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기불황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사례도 있었다. △코로나 기세 속 산학교육 현장에서 느낀 모두의 당혹스러움 코로나 이후 대학교 산학교육 현장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순차적으로 등교하는 대학생들은 혹시라도 코로나19에 감염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예민해졌고, 교수님들 또한 현장실습이나 캡스톤디자인을 비롯한 산학교육 교과목에서 최대한 학생들을 코로나19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방안을 마련하느라 수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온라인강의와 비대면 프로젝트를 통한 산학교육에 대하여 교수님들 대부분의 생각은 일치했다. 혹시라도 갑자기 퍼질지도 모르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비에 가급적 비대면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일치했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 본부의 강력한 권고로 사람들이 수명 모이는 세미나나 간담회는 지양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인문사회계열 교원 대상 캡스톤디자인 간담회를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다행히 병무청에서 시행하는 온라인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어 온라인으로 간담회를 진행하는 방법은 어렵진 않았다. 온라인 간담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정보 전달이기 때문에 필자는 카드뉴스 형태로 간담회 자료를 만들어 온라인 간담회에 참석한 교수님들을 대상으로 공유했고, 다행히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역연계형 캡스톤디자인이라는 팀프로젝트성 산학교육을 원활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기존과 다른 진행방식에 약간의 시행착오 또한 있었지만 말이다. △가능한 비대면으로 최대의 성과를 전북의 한 사립대학교 A학과는 이론 수업을 먼저 끝내고 팀프로젝트로 캡스톤디자인을 시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문화콘텐츠 기획에 대한 이론을 배우고 지역사회 기관과 연계하여 지역사회 문화관광이나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것이다. 팀원들끼리 서로 모여 진행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에도 학생들의 아이디어는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서동축제 기간 동안의 교통 불편 해소 아이디어 설문 및 분석, 익산 지역을 대표할 관광상품 개발, 익산의 인물 혹은 캐릭터를 활용한 교통카드/카드엽서 제작, 익산 역사문화 코스프레 경연대회 제안서 기획, 익산의 맛을 소개하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현에 옮길 계획이다. 최대한 비대면으로 진행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작품 제작 혹은 아이디어 제안서로 지역사회 유관기관에서 아이디어의 현실성과 창의성을 평가받는 방식으로도 진행될 예정이다. 이 사립대학교에서 이번 1학기에 발굴한 학생들의 아이디어와 시제품만 총 20여개. 비대면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기에 미숙할 수도 있지만 청춘의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낼 만도 하다. △우리의 핸드폰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네 코로나19가 휩쓰는 요즘 우리의 핸드폰은 아침 아홉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산학교육 실무자들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궁금하다는데 내일 연락하라고 하기에도 거시기허고잉 야, 너도냐. 나는 그냥 내 폰은 나의 것이 아니여, 만인의 것이여 서로 지역연계형 캡스톤디자인이나 프로젝트를 위해 회의 중인데 궁금하다면 대답해주는 게 인지상정. 특히, 이렇게 코로나가 사회를 들었다 놨다 하는 요즘 잠에 들기 직전까지는 모두들 최대하나 답변을 바로 보내주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지역연계형 산학교육은 어떻게 바뀔까? 코로나19가 몰고 온 광풍 속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선제적 대응방안 마련은 이미 화두에 올랐다. 상당수의 대학 축제나 행사는 비대면온라인으로 진행하며, 각종 간담회나 세미나, 발대식, 콜로퀴엄 등의 행사도 유튜브 실시간 라이브 방송으로 대체한다. 학계에서는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 온라인과 대면수업을 병행하는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 혼합수업)의 지속 또한 예상했다. 현장실습과 캡스톤디자인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산학교육 또한 블렌디드 러닝으로 차차 변화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교육부 차원의 포스트코로나19 시대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보의 격차가 교육의 격차로 벌어지지 않도록, 교육기관과 학생, 교원 모두에게 부담되지 않는 규정과 지침 마련 또한 절실하다. /이희수 원광대학교 LINC+사업단 지역선도센터 담당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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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6 16:18

[뚜벅뚜벅 전북여행] 무주의 자연을 만날 수 있는 향로산 “패러글라이딩과 캠핑도 해볼 수 있는 여행지”

사회적 거리가 지속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보다는 한적한 곳을 찾게 됩니다. 저에게 이날의 무주는 날이 맑고 청명하지는 않았지만 걷기에는 괜찮은 날이었습니다. 무주에도 풍광이 좋은 산들이 즐비한데 향로산 역시 그런 곳입니다. 향로산에는 지난 2017년 9월에 문을 연 향로산 자연휴양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망대에 오르면 무주읍의 전경과 금강의 물줄기가 굽이치는 내도리 일대와 적상산, 양수발전소 상부댐 등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무주 향로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은 호젓하게 가볼 수 있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충분히 거리를 두고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녹색 향기를 맡기 위해 찾아왔었습니다. 갑갑했던 일상을 탁 털어낼 수 있는 시원한 전망과 시설도 좋고 산책로 등을 잘 갖추어둔 곳입니다. 워낙 호젓한 데다 좀 외롭다고 느낄 정도로 숙소와 숙소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가족이나 연인들이 조용하게 하룻밤을 보내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아주 느린 속도로라도 일상생활로의 복귀가 시작됐을 때 가장 적합한 여행지는 휴양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숙소 이용은 아니더라도 잘 가꿔진 한적한 숲에서 거리를 지켜가며 산책을 하는 건 건강 면에서 좋습니다. 생활 방역이라던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지 않은 가족들과의 여행이라면 캠핑도 괜찮아 보입니다. 요즘에는 해외 입국자와의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향로산은 무주에서 패러글라이딩해볼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진 곳이다. 전망대로 가는 길목에서 향로봉으로 가는 길과 활공장으로 갈 수 있는데 넓지는 않지만, 패러글라이딩을 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두었습니다. 열심히 걸어서 위쪽으로 올라가 봅니다. 말 그대로 호젓한 길입니다. 요즘에는 의로운 이익에 대해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만 일상을 하던 대로 유지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의로운 이익이라고합니다.. 의로운 이익이란 모든 사람이 더불어 나누고 잘 사는 방식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패러글라이딩의 활공장으로 사용되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만 내려가도 가파릅니다. 앞에는 아무런 안전시설이 없는 곳입니다. 달리다가 바람을 힘으로 날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듯이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주군 2020 경자년(庚子年) 해맞이 행사가 힘찬 도약 무한한 번영 무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월 1일 무주읍 향로산 제1 전망대에서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불과 4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동굴을 콘셉트로 한 시설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곳에 자리한 숙소는 이런 콘셉트로 만들어진 곳이 많아서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합니다. 향로산 자연휴양림은 산림문화와 휴양, 체험, 교육 등의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조성되었는데 269ha 규모에 세미나 시설과 회의실이 있는 숙박시설, 방문자센터, 쉼터, 주차장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또 체험시설, 모험시설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 땅의 무풍과 백제땅 주계를 합병하면서 두 고을 이름의 첫 자를 따 무주라 부르고 있는 힐링공간인 향로산 자연휴양림은 다른 곳보다도 시설도 좋지만 덜 알려진 곳이어서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볼 수 있습니다. /글사진=박서영(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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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2 16:3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9. 한반도를 관통한 국도 1호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란 길에 관한 유명한 말이 있다. 이는 로마의 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구로, 도로 건설에 능했던 로마인들은 그 기술을 바탕으로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가는 길을 완성했다. 로마인들의 욕망을 실은 그 길은 군대가 이동하고 물자의 교역과 문화를 전하는 통로였다. 그러한 길의 역할은 인류가 있는 어느 곳이라도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 지역에도 또렷한 땅의 역사로 남아있다. 그 중, 목포에서 정읍을 지나 전주, 익산, 천안, 서울,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한반도를 관통하는 국도 1호선은 수많은 흔적을 품고 길 위에 사연을 더하고 있는 도로이다. 고대 부족 간의 교류로 형성되기 시작한 길은 삼국시대부터 도로로 정비되고 역이 설치되었으며, 통일신라 때는 경주였다가 고려시대에는 개성으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도로망이 형성되었고 통일문화의 꽃을 피웠다. 조선시기에는 한양인 서울을 중심으로 역로가 만들어져 운영되어 발전하였다. 지금의 국도 1호선의 노선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령으로 신작로를 놓은 것을 근간으로 하는데, 당시 신작로는 경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과거 삼남대로인 삼남길의 노선을 대부분 이어받은 것이었다. 삼남대로는 삼남 지방을 가는 큰길로 한양을 중심으로 남쪽에 있는 삼남지방인 충청도전라도경상도를 총칭하고 삼남대로는 구체적인 길의 명칭이라기보다 이 지방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삼남대로라는 명칭의 사용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삼남이라 자주 등장하고 조선 중기 이후 문집, 지방 군현 지도 등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명칭으로 보인다. 그중, 국도 1호선의 근원이 된 삼남대로의 흔적은 1770년 신경준이 기술한 『도로고』상의 6대로 중 제5로인 제주로에 해당하고, 1861년 제작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상의 10대로 중 제8로인 해남로에 해당한다. 그 일부 구간이 현재 남한의 국도 1호선 노선과 동일하여 충남 천안 이북 구간은 조선의 주요 대로와 비슷하지만, 이남 구간은 일제의 수탈과 식민 통치 목적에 따라 일부 변형되었다. 일제강점기 러일전쟁을 앞두고 있던 일제는 비밀리에 밀정을 파견하여, 국내의 간선도로를 조사했고, 러일전쟁 후 한반도 지배권을 장악하자 본격적인 수탈을 위해 항만도로정비,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는 등 기반시설 확충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는 당시 일본인 거점과 수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를 연결하는 경로를 찾는 작업을 진행하여, 목포와 군산의 개항장을 거점으로 내륙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노선을 선정했다. 전북에서는 군산항을 거점으로 만경강의 평야지대를 관통하여 전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전주는 조선시대부터 행정중심지이자 물자의 집산지로 평야지대의 종점이라는 지형적 조건도 있어서 지목되었고 전남에서는 목포항에서 영산강 유역의 곡창지대를 연결하는 노선을 택했다. 일제는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도로를 정비하며 3번(경성-목포)과 2번(경성-신의주)으로 부르며 신작로를 조성하여 서울 이북은 만주 침략의 이동통로로 호남의 구간은 수탈의 통로로 사용했으며, 국도 1호선의 근간이 된다. 광복 후 정부수립과 6.25 전쟁을 치른 후 분단되어 신의주까지 이어지던 길은 파주 임진각에서 멈추었고, 1963년 일본이 건설한 신작로를 중심으로 노선을 지정했는데 지금의 국도 1호선은 당시에는 신작로의 노선을 따라 3번인 경성목포선이었다. 이후 1971년 일반국도 노선지정령에 따라 오늘날의 국도 1호선의 명칭이 확정된다. 국도 1호선은 한반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여 지역의 정체성을 품고 있어 길에 자리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정취가 다채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하멜이 제주에서 표류하여 한양으로 압송되던 길이기도 했지만, 선조들이 큰 꿈을 품고 한양으로 가던 길이기도 했다. 그중 한양을 오가려면 반드시 거쳐 지나가던 정읍의 과교천(목제천) 위에 놓인 나무다리는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가 그 다리를 건너면 합격을 한다는 삼남길 내 행운의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또한 그 길은 동학농민혁명군이 꿈을 꾸며 지나던 길이었다. 한편 이 길은 많은 이들이 유배지로 귀양을 가던 슬픔의 길이기도 했다. 정약용, 송시열, 김정희 등이 이 길을 통해 유배된 인물들이다. 왕족인 이방간이 유배를 와 자리 잡은 곳을 향해 세 번의 예를 갖추었다는 데서 삼례의 지명이 유래가 되었다 하며, 그 삼례의 만경강가에 자리한 정자인 비비정은 송시열이 비비정기를 써주며 그 의미를 지역에 새겨놓았지만, 이후 송시열은 유배를 가다 그 길이 이어지는 곳인 정읍의 한 길목에서 사약을 받고 명을 달리했다. 풍류를 즐긴 선조들의 흔적과 민초들의 고단한 흔적까지 고스란히 깃든 길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안타깝게 사라진 것들도 많다. 마을에서 깻다리, 목다리, 과교로 불린 나무다리는 콘크리트가 대신 자리한 채 전설로만 남아있고, 인근 피향정에서 아름답게 연꽃을 피어내던 두 연못 중 상연지는 일제가 신작로를 내며 메워져 사라진 상태이다. 하지만, 그 길 깊은 진흙 안에는 피어나길 꿈꾸는 연의 씨앗과 어려운 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행운을 건네줄 전설이 잠자고 있다. 게다가 멈춰버린 신의주까지의 국도 1호선의 노선도 남북관계가 호전되면 온전하게 이어지는 꿈을 꾸게 한다. 과거 누군가에게 길은 욕망을 내달리게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전과는 다른 일상의 길을 나서는 지금은 오래된 길에 남겨진 선조들의 흔적이 힐링의 길이 되고 나아가 지역의 자산이 되어 모두의 힘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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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1 16:37

[문화&공감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서점의 이유, 지역의 이유3

코로나 시대의 수개월은 우리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살고 있는지 맹렬하게 깨우쳐준 시간이었다. 끝없는 세상에서 드넓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균과 맞닥뜨리고 전에 없던 현실세계를 살게 됐다. 세상은 인간이 아니라 균이 지배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어보며. 그러므로 지구는 얼마나 좁은 방인가. 까똑-. 저녁 6시 단톡방 알림이 울렸다. 오늘 근무자인 A의 책방일지다. 7명이 돌아가며 하루씩 근무하는 우리 책방은 수요일을 제외한 매일 1인 책방지기 모드로 운영된다. 그래서 책방 퇴근 전후 간단하게라도 단톡방에 올라오는 책방 일지는 일종의 인수인계이자 중요한 알림판이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1. 청소현황: 책방바닥 및 화장실 2. 다녀가신 분: 옆집 이모, 성악가 B씨, 사진가 C씨. 3. 개선사항: 오늘 날씨 쪄죽는 줄 알았음. 에어컨 꼭 켜기. 4. 판매도서명: 없음. 5. 매출: 0원. 코로나 시대를 사는 요즘 책방 일지의 매출 항목은 텅 비어있을 때가 많다. 자영업은 늘 어렵고 책방은 매일 어렵다지만 지난해 이맘때쯤과 비교해보면 고개를 들기 힘든 수준이다. 이런 날엔 단톡방도 조용조용하다. 다른 책방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으니 앓는 것도 사치인 걸 안다. 그저 조금씩 현실을 바꿔나갈 수밖에. 그러나 착한 악마들은 늘 가까이서 속삭인다. 그러니까 누가 돈 안 되는 거 하래? 좋아서 하는 건데 어쩌겠어. 책방도 그냥 자영업이잖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교묘하게 속는 기분이 든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에 일일이 왈가왈부하기 고달파진다. 그러면서도 본다. 재난지원금으로 책을 사려고 책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의 응원을, 몇 달 만에 어렵게 열린 시 쓰기 모임인 걸 알고 찾아왔다며 간식을 펼쳐놓는 단골 주민들의 애정을. 코로나 시대의 각자도생 나날 속에서도 우리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낯선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계속 느낀다. 그것이 때ㅤㄸㅒㅤ로 책방과 서가 속에 있다고 믿는다. △재난지원금으로 책 사러 온 손님 재난지원금을 책방에서 사용한 손님이 남긴 방명록. 바람 부는 5월 어느 날 30대 손님 두 명이 책방에 왔다. 한 명은 주문한 책을 찾으러 왔고 한 명은 책을 고르러 왔다. 재난지원금 첫 소비를 책에 쓰고 싶다는 손님 말에 가만히 웃기만 했다. 책방의 작은 서가를 둘러보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이상한 기쁨은 무엇인가 새삼 신비로웠다. 아끼셔야죠. 제 가방에 담아갈게요. 손니들이 고른 책을 각각 종이봉투에 담으려하자 모두 손사래를 친다. 카드를 긁으니 휴대폰에서 딩동 소리가 들린다. 와, 재난지원금 썼다고 문자 왔어요, 완전 신기해! 우리는 서로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도 처음 재난지원금을 썼고, 책방도 재난지원금 첫 손님을 받았다. 이것도 기념인데 한 마디 써주세요. 책방 카운터에 놓인 방명록을 내밀었다. 길이길이 남을 또렷한 글씨가 마음에 들어왔다. 재난지원금 1호 사용자 다녀갑니다 △3개월 만에 열린 시 쓰기 모임의 반가움 이게 정말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저녁 7시 책방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겨우 초면을 벗어난 이들이 둥글게 모여 앉았다. 낯선 듯 익숙하게 인사하고, 누군가 가져온 커피와 간식을 먹는다. 오늘은 원두커피에 김밥과 꽈베기가 책상 위에 놓였다. 이때 책방에서 준비한 시인의 시가 프린트물로 김밥 옆에 놓인다. 책방지기의 간단한 설명 이후 한 사람씩 소리내어 시를 읽는다. 이 모임의 이름은 시 읽고 100행 시 쓰기다. 시인의 시를 읽고 그 시인의 느낌을 한번 걸쳐 100줄이 되어도 좋은, 막힘없는 무언가를 써보는 것이다. 2019년 10월 처음 시작해 코로나로 3개월을 쉬고 지난 5월 다시 시작한 이 모임엔 매번 7명 쯤 모인다. 나이도 동네도 직업도 다양하다. 이 모임의 보이지 않는 원칙이 있다면, 자신의 글을 검열하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그저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벼운 옷을 걸치는 느낌으로 자유롭게 쓰는 것이다. 모두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으로 연필 써내려가는 소리를 들려줄 때 약간 소름이 돋는다. 가르치는 사람 없고 가르침 원하는 사람 없는 느슨한 시(詩) 모임. 이 헐렁한 예술적 연대가 종종 신비롭다. 저녁에 모여 앉기 어려운 전주 성매매 집결지 선미촌 작은 책방에서 시를 읽고 쓰는 일. 3개월 만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퍽 반가웠다. △그럼에도 아직은 최근 전주책방 10곳이 모여 전주책방네트워크를 결성한 이후 책방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모이고 더 할 일이 많아졌다. 네트워크가 추진할 일들과 전주시 도서관과의 협업을 포함해 함께 논의해야할 사안들, 각자 처리해야할 책방 일까지. 두런두런 치열하게 얘기하다보면 어느덧 밤이다. 어려운 날들 속에서도 함께 모인 힘이 단단해지길 바라며.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책방토닥토닥 김선경 대표는 최근 소상공인지원금 60만원과 재난지원금 40만원 덕분에 조금 숨통을 텄다고 말한다. 책방 운영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매일이 재난 상황이라며 씁쓸해하면서도 한 권이라도 사러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까봐 자리를 뜨지 못하는 상황을 미워하지 않는다. 전북대 대학가에서 책방을 운영하다 전주 중앙동 전라감영 복원지 옆으로 자리를 옮겨 2년째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에이커북스토어 이명규 대표는 책방에서 유일하게 온라인에서도 책을 판다. 온라인 판로가 있어 그럭저럭 운영된다지만 한 명 인건비도 나오기 힘든 실정이다. 뻔한 질문이지만 그럼에도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두 번 오는 손님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한번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 번 오고, 또 오고 계속 오는 분들 덕분이란다. 모든 책방이 그렇지만 이곳에 오기 위해 전주에 왔어요라고 말하는 손님들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아직은 코로나 시대, 동네책방의 풍경은 단단하게 또는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임주아 시인물결서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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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0 16:19

[참여&소통 2020 시민기자가 뛴다] “민식이법 과연 만능일까”

민식이법이 2020. 3. 25. 시행되면서 해당 법 조항에 대한 찬반여론이 뜨겁던 2020. 5. 21. 전주시 덕진구 반월동의 한 스쿨존에서 2세 남아가 불법 유턴을 하는 차에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전라북도 내 첫 민식이법 적용 사례가 될 것인지, 적용된다면 어떠한 형량이 나올 것인지 관심이 쏠린다. 뜨거운 감자 민식이법에 대해 알아본다. 흔히들 민식이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민식이법이라는 법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을 가르키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치사상의 가중처벌) 자동차(원동기장치자전거를 포함한다)의 운전자가 도로교통법 제12조 제3항에 따른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같은 조 제1항에 따른 조치를 준수하고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를 위반하여 어린이(13세 미만인 사람을 말한다. 이하 같다)에게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제3조의 제1항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한다. 1. 어린이를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어린이를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1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즉, 운전자가 어린이 보호구역내에서 ① 시속 30키로 이상으로 과속을 해서 사고가 발생한 경우 ② 시속 30키로 미만의 속도였지만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를 위반한 경우 ③ 시속 30키로 이상으로 과속을 하면서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도 위반한 경우에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이 적용된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은 과실범 처벌 규정임에도 고의범 처벌 규정과 형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다. 우리나라 형법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을 하는 고의범과 그렇지 아니하는 과실범을 구별하고 처벌의 강도도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고의범과 과실범은 분명히 다른 점이 존재하지 때문에 구별 짓고 처벌의 강도도 과실범이 고의범에 비하면 훨씬 약하다. 대표적 고의범인 형법상 살인죄 중 사람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형법 제252조의 촉탁, 승낙에 의한 살인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람을 살해하겠다는 고의를 가지고 살인을 한 자의 형량은 1년 이상 10년 이하인 반면에 과실범인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은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의 형량은 3년 이상 30년(형의 가중이 없는 경우)이라는 것은 형의 형평에 크게 어긋나는 형식이다.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가 너무 추상적이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에는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가 구성요건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법률시행령 어디에도 규정된 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행위가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에 해당하는지는 그동안 판례에서 판단되어 온 안전의무를 바탕으로 판사가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형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위반될 여지가 있다. 명확성의 원칙이란 형법은 범죄의 구성요건과 형사제재에 관한 규정을 법관의 자의적 해석이 허용되지 않도록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안전의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동안 판례에서 쌓여온 것이 있다 하더라도 법률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아니하면 법관의 자의가 작용될 수 있고 이러한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인해 우리의 자유와 안전이 침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및 사법부 김민식 군의 사망으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13가 신설되었고 당시 운전자의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김민식군의 부모여론으로 위와 같은 고의범보다 형이 강력한 과실범 조항이 탄생하게 되었다. 국회는 차후 위 법률 개정을 통해 어린이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운전하여야 할 의무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고 고의범과의 형의 형평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법부는 법 개정 이전까지는 사건의 사실관계피해자의 과실 여부 등을 명확히 파악하여 법관의 자의적 판단이 들어가지 아니한 적정한 판단을 하여야 한다. -운전자 및 지자체 자동차는 형법상 위험한 물건에 해당되는 만큼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흉기이다. 이러한 흉기를 운전하는 만큼 운전자는 운전에 매우 큰 주의의무가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사람보다 차가 먼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지나갈 때 횡단보도 중간에 보행자가 지나가더라도 차가 횡단보도 일시 정지 선에 멈추기는커녕 쌩하고 지나간다. 간혹 횡단보도 앞 일시 정지 선에 정지하는 차가 있다 하더라도 뒤차는 앞차를 향해 왜 급정지를 했냐는 식으로 경적을 울리기도 한다. 횡단보도에 보행자가 있든 없든 일단 한번 정지하고 출발하거나 서행하며 지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김민식군 사망사고와 이번 전주 2세 남아 사고의 공통점은 어린이 보호구역내 사고라는 점도 있지만 주위에 불법 주정차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지자체는 불법 주정차 집중 단속을 통해 불법 주정차를 근절하여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주위에 공영주차장 시설을 늘려나가야 한다. 또한 이번 전주 2세 남아 사고 이후 불법 유턴 차량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설치하였는데 차후에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 아닌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 및 부모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좌우를 살피고 손을 들고 건너는 것을 배운 이후 횡단보도를 건널 때 그대로 실행한다. 유치원초등학교에서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정 내에서 부모가 횡단보도 신호 지키기, 자동차 사이를 갑자기 뛰어나가지 않기 등 교통 규칙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마무리하며 한 생명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남을 아쉬워하며 시민들이 명복을 빌어주고 있다. 다시는 우리 전라북도에 이런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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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9 16:14

[뚜벅뚜벅 전북여행] 추억속 그곳 완주 광두소마을 “이제는 추억으로 사라질 마을을 카메라로 찰칵!”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에는 이제는 몇 남지 않은 가구 수의 작은 마을이 존재합니다. 운주면에서 대둔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 사이를 마주하고 있는 이 작은 마을은 자그마하지만, 이제는 곧 그 모습마저 사라져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곳이기도 하답니다.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천등산 자락 아래에 자리한 광두소 마을은 최근 저수량 650만 톤 규모의 댐이 들어설 예정으로 그로 인한 댐 공사가 한창인데요. 본격적으로 댐 공사에 들어간 기간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이 댐의 건설로 운주면 장선리등 57.1ha 가 수몰되고 29가구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광두소 마을의 옥계교가 놓인 시기도 그리 오래되진 않았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태어나 자라며 늘 광두소 마을을 지나가던 그때의 추억으로는 낮은 개울 사이 다리가 그저 유일한 통로였는데 어느덧 옥계교라는 멋진 이름을 딴 튼튼하고 높은 다리가 새로 들어서 있기도 했습니다. 옥계교를 지나 광두소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산세 아래 자리 잡은 작은 절과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푸릇한 기운이 가득한 봄이 이곳에도 찾아왔는데요, 오랜만에 혼자 이곳 광두소 마을을 거닐며 꺼낸 필름카메라는 광두소 마을의 분위기를 더없이 잘 담아내 주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이른 아침 한적한 동네로 이어지는 마을 입구는 농민들의 땀방울이 가득한 농작물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내며 새싹을 피워내고 있었습니다. 이미 몇 가구 남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이어서인지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좋기도 했답니다. 이미 대다수 가구는 이곳을 떠나기도 해서 이곳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들은 얼마 남지 않으셨다고 해요. 길게 축 늘어선 전깃줄과 삐뚤삐뚤 낮게 내려앉은 지붕 ... 이제는 볼 수 없는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들어진 돌 담벼락에 굳게 닫힌 녹슨 대문은 어린시절 할머니 집에서나 만나 볼 수 있는 풍경 그 모습 그대로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오래되었고 낡은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그러기에 더욱 친숙하고 정겨운 우리 내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철이면 여기저기 집 마당 주변으로 피어나는 꽃들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답니다. 이 소박한 풍경이 주는 행복함들이 유난히 반가웠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침 햇살 아래 산새가 지저귀는 이곳에서 조용히 필름카메라 하나에 찰칵하는 셔터음만이 맴도는 마을.... 소박한 작은 동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오래된 추억들을 다시금 회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 이곳 광두소 마을로 떠난다는 이야기에 이젠 오랜 내 모교 <운주초등학교, 운주중학교>의 교가에 나오는 `옥계천 맑은 물~`은 이 댐이 들어서면 영영 사라질 거라고 아쉬움을 표하셨습니다. 옥계교의 이름은 아마도 이 대둔산에서부터 흘러내려 오는 옥계천에 물길을 따라 지어진 게 아니었을까요? 옥계천 맑은 물 사이로 유일한 길이였던 이 낮은 길은 어린 시절에도 늘 물이 많이 불어나는 여름이 되면 이곳을 건너지 못했던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제는 새로 옥계교가 들어서면서 이 낮은 길목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말씀대로 이 추억이 가득한 옥계천은 아마도 오랜 기억 속으로 사라질 테고 유일하게 남을 이 사진 한 장으로 기억이 될 거란 생각이 문뜩 들기도 했습니다. 아직 완공이 언제 될지 모를 정도로 그 속도가 더디게 진행이 되어가고는 있지만 언젠가 들어설 이 댐으로 인해 이 작은 광두소 마을은 추억으로만 그리워하고 추억으로만 불리울 수 있는 마을이 되겠죠? 떠나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만큼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 후에 내가 태어나 자랐던 이곳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이라도 있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선택했던 이번 필름 사진여행을 광두소 마을로 선택해야만 했던 이유 ... 내 마을 내 고향을 오래도록 기억해 낼 수 있는 이사진 하나라도 남겨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거대한 댐이 들어서면 많은 농민에게 농업용수가 조금 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어서 좋긴 하겠지만, 추억하며 찾아갈 수 있는 내 고향이 없다는 건 어쩌면 또 다른 이들에겐 슬픈 일일 겁니다. 추억 속으로 언젠가 사라질 광두소 마을이지만 이렇게나마 이곳을 찾아 거닐며 이곳의 모습을 남겨본 하루 ... 작은 필름카메라 하나로 온전히 모든 걸 다 기록할 순 없었지만, 더 친근하고 가슴 깊이 와 닿을 수 있는 이 작은 마을의 느낌은 잘 담겼길 바라봅니다. /글사진 = 노은주(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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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0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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