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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함께 책을 읽고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진다. 단순한 이 말은 생물의 진화, 문화의 진화, 정치의 진화, 개인의 진화(성숙) 등 모든 다양한 경우에 다 맞는다. 그것이 용기인 이유는 두려움을 떨쳐내면서 편안함을 박차고 길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하고 변화하는 일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키우고 강화하는 일로도 가능하지만, 그보다 더 많게는 아직 갖고 있지 않는 것으로 옮겨 가면서 일어난다. 모든 진화는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탐험을 떠나는 용기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은 알 수 없어서 항상 불안하고 무섭고 이상하다. 거기는 두려운 곳이다. 경험과 이해를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면 두려움을 뒤집어쓰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여 모든 진화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로만 일어난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을 좀 풀어서 옮기면 이렇다. 하나의 씨앗을 커다란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재주도 아니고 영감도 아니다. 오직 용기이다. 진화하고자 하면, 용기를 내야한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진화할 수 없다. 갖고 있는 것을 자신의 정처(定處)로 정하고, 마치 선정(禪定)에 들듯이 거기에 편안해 하고 거기에서 따뜻함을 느끼고 또 그것을 자신만의 진리의 텃밭으로 삼는 한 그것 다음이나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도 닿기 힘들다. 장자는 이것을 정해진 마음(成心)에 갇힌 형국으로 묘사한다. 이런 저런 일들 모두가 이 정해진 마음으로 즉시 해석되고 평가되니 이제 깊이 생각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얼마나 간편한가. 그저 정해진 마음에 맞는지의 여부에 따라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만 두드리면 된다. 그래서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 빠진다. 진화는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의 몫이다. 감정과 감각은 숙고를 불편해할 정도로 즉각적이고 직접적이며 재빠르다. 사유에는 시간과 수고가 들어간다. 당연히 게으른 자는 감각으로 기울고, 부지런 한 자는 감각과 감정을 극복하는 지적인 태도로 사유할 줄 안다. 감각에 빠져서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다음으로 건너가는 과감한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용기란 지적인 태도로 분류된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를 지적 인내로 표현한 말은 이치에 맞다. 정해진 마음을 갖고 그것을 진리로 삼는 일만큼 자신을 멈춰 서게 하는 것은 없다. 지혜란 다른 말로 하면 멈추지 않기이다. 이것을 강조한 것으로 <반야심경>보다 더 선명한 것이 있을까. 바로 바라밀다이다. 목적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다. 그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만 있다. 지혜는 바로 건너가기 자체이다. 건너가기라는 동명사가 지혜이다. 지혜로운 자는 어디에 마음을 두거나 멈추지 않는다. 정해진 마음을 가지면 스스로는 우뚝 서는 느낌이 드니 그것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하늘을 찌른다. 문제는 정해진 마음을 갖는 순간 곰곰이 생각하는 능력이 점점 사라지고 반성 없이 즉각적으로 등장하는 감각만 커진다는 사실이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지식의 영역에서는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지식 수입자로만 산다. 지식의 생산이 바로 문명의 생산력이다. 지식 생산자의 대열에 끼지 못하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높이에 이를 수 없다. 지식을 수용하는 위치에 빠져 있으면 삶은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산자가 된다. 자유, 독립, 풍요는 다 수입자가 아니라 생산자가 누리는 일이다. 정치적인 성향이 베인 환경에서 그것은 프레임 씌우기로 나타난다. 프레임 씌우기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는 서로 안다. 그러면서도 프레임 씌우기를 계속하는 것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어떤 수고도 들일 필요가 없는데다가 매우 선명하기 때문이다. 종북 좌빨, 보수 꼴통, 토착 왜구, 좌좀 등등은 스스로도 곰곰이 생각하기 싫고 상대에 대해 생각도 해주기 싫다는 의사표시이다. 이런 태도는 매우 간명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끊기 힘들다. 끊기 힘들면 시원한 것에 만족하다가 숙고하는 정련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개인의 성숙이나 사회의 진화에는 분명한 필요조건이 있다.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다. 정치적 의사 표시를 프레임 씌우기에만 의존한달지, 지식의 생산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진화의 길은 멀고도 멀 수밖에 없다. 정해진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깨달음에 이르거나 진화의 동력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진화(성숙), 사회의 진화, 정치의 진화에 모두 해당되는 말이다. 무위(無爲), 무념(無念), 무아(無我), 정관(靜觀) 등등의 특별한 태도들은 모두 정해진 마음을 약하게 하려는 것들이다. 진화를 궁극으로 밀고 나아가는 모든 가르침에는 이 정해진 마음을 해소하는 절차를 항상 가장 앞에 둔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자들은 그 가르침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회개이다. 정해진 마음과 결별해야 예수의 가르침을 받을 바구니가 준비된다. 회개 없이 예수의 신도가 될 수 없다. 부처의 음성을 마음에 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참회이다. 참회 없이 부처의 음성을 담으려 들면 안 된다. 참회의 과정을 건너뛰고 해탈을 꿈꿀 수 없다. 회개 없이 천국을 꿈꾸거나 참회 없이 해탈을 꿈꾸는 일은 진화를 포기한 채 함부로 사는 막무가내의 인생으로 이끈다. 해탈이나 참회에는 다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이 포함된다. 그런데 정해진 마음과의 결별은 경험한 적도 없고 이해되지 않는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이것도 감각이 아니라 곰곰이 생각하는 사유의 활동이다. 감각적 활동이 아니라 지적인 활동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인내이며 용기이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장자는 정해진 마음과 결별하는 용기를 자기 살해(吾喪我)로까지 표현하는 것이다. 장자에게서도 자기 살해 없이 소요유(逍遙遊)의 자유는 없다. 소요유에 이르게 하는 자기 살해, 해탈에 이르게 하는 참회, 천국으로 인도하는 회개가 모두 지적인 태도이며 용기이다. 개인이나 사회의 진화를 꿈꾸는 자들은 먼저 정해진 마음을 기준으로 써서 감각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가벼운 태도를 줄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지적인 태도를 함양해야 한다. 지적인 태도를 함양하지 않고는 어떤 종류의 진화에도 관여할 수 없다. 한 조각의 인식도 내놓지 못하면서 그저 별 의미도 없이 강하기만 한 의견을 내뱉는 허탈한 삶을 산다. 지적인 태도는 여러 가지가 뭉쳐서 만들어지지만, 대표적인 두 가지는 바로 지식을 증가시키는 일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는 내공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내공이고 용기를 발휘하는 것도 다 내공이다. 겸손도 내공이고 화해도 다 내공이다. 지식의 생산도 내공이고 양보도 내공이다. 우리의 모든 진화에는 지식과 내공이 결부된다. 일은 간단하다. 나와 사회의 진화를 도모한다면, 이제 이 두 가지를 모두 닦는 수밖에 없다. 지식과 내공이 잘 닦이면 우리는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진화를 이룰 수 있다. 그렇다면, 지식과 내공을 동시에 잘 닦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독서다. 책을 읽어야 한다. 펼친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이나 읽으려고 산 책을 정말로 읽는 일은 다 인내를 요구한다. 인격적인 단련이다. 지적인 수고를 하는 일이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nard)는 독서를 마법의 양탄자에 비유한다. 독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직 경험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어떤 곳으로 데려다 주는 마법을 부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직 지식 생산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심한 분열상을 겪고 있는 것은 진화의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독서를 그런 진화가 가능할 정도의 양까지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5년 UN조사결과 한국인의 독서량은 192개 국가 중 166위이다. 이것도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양인데, 해가 갈수록 독서량은 늘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었다. 문체부가 시행한 2019년 국민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성인은 연간 독서량이 6.1권에 불과하다. 독서를 하지 않으니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고, 지적인 훈련이 되지 않으니 사회에는 인식의 교환보다는 반성되지 않은 의견들만 난무하고, 정치는 진영과 프레임 씌우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식은 생산의 시도가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과 사회의 진화를 꿈꾼다면, 우선 독서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들끼리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높이를 넘어서려면 최소한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읽어야 한다. 이런 꿈을 꿔본다. 새 말 새 몸짓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우선 책을 읽는다. 사단법인 새말새몸짓과 함께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는 일부터 시작해보자. 독서라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다음 단계로 건너가자. 진화는 용기로 빚어지며, 용기는 지적 인내이다. 지적 인내는 독서로 제일 잘 길러진다. 책읽기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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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5 20:43

양복규 동암법인 이사장 "자만하지 않고 잘 될수록 수신제가 잘 해야"

지난 20일 전주 동아당한약방. 양복규 동암법인 이사장(82)이 3평정도 될까한 작은 자신의 진료실 안에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책상을 어루만졌다. 닳고 해진 책상을 바꾸셔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돈이 있어야 바꾸지하면서 너스레를 떨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난 5월 15일은 전북의 명문 사학인 동암법인의 시초인 동암고등학교가 설립된지 40년이 되는 날이었다. 또 20일은 설립자인 양복규 이사장이 장애인과 배우지 못한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순창에서 전주에 발을 들인지 6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 책상은 자신이 전주에 와 정식으로 약방을 개업한 이후 지금까지 함께 해왔다고 한다. 그에게는 새 책상보다 이 헌 책상이 더 값진 책상이었다. 인터뷰 내내 느낀 점은 인생의 고난이 오히려 현재의 그를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반갑습니다. 순창에서 전주로 오신오것이 오늘이 꼭 60년 되는 날이라고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흘 뒤에 인가 아침 일찍 전주행 시외버스를 탔었죠. 40년 전 현재 이 시각이 전주 터미널 도착 시간이겠네요. -왜 전주였습니까. 한약업이 발달했기 때문이었나요. 서울은 너무 멀었고, 번화하기도 한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이자, 순창에서 서울보다 가까웠고 당시 전주와 대구가 약령시가 있는 등 한약업이 융성할 때였습니다. -한약학을 유명한 임용락 선생님께 배우셨는데, 왜 배우게 되셨는지요, 불편한 몸으로 힘드셨겠습니다. 딱히 당시 집안이 어렵기도 했고 불편한 몸으로 농사일이나 남의 집 일을 했겠습니까. 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독학으로 13살까지 사서오경을 다 읽었습니다. 17살 때에는 야학으로 서당훈장까지 했었죠. 그럴 때 마침 우리 마을에 임 선생님께서 계셨고 그 분 제자로 들어가 배우게 됐습니다. 불편한 몸이지만 한마을이어서 가능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업고 가시기도 하고, 스스로 팔로 땅을 짚고 가기도 했습니다. 한문을 미리 익혔기에 한의학은 쉽고 재미있게 배울수 있었습니다. -전주에 오셔서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금암광장 근처에서 무허가 약방을 3년을 하다 풍남문 옆으로 허가받은 원장 이름을 빌린 대리약방을 하게 됐습니다. 전라북도 한약사 면접시험을 봤는데 업혀들어오는 저를 보고 필기에 합격한 저를 당장 나가라고 불합격 시켰죠. 요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나 경기도 한약사 시험을 보게됐는데, 당시 경기도청 공무원인 홍 과장(면접관)이 면접을 보게 해줬고 합격을 했습니다. 경기도 연천군에서 한약사를 좀 하다가 그 홍 과장에게 말해 전북도로 전출을 왔고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동암법인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돈을 모으면 건물을 사고 싶다거나, 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건설붐이었는데, 건설회사를 설립해 더 큰 돈을 벌 기회를 생각하거나 정치진출으로 생각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왜 학교 설립이셨습니까. 가장 큰 것은 제대로된 배움을 받지 못한 한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애초에는 동암고보다 먼저 특수학교를 설립하려 했어요. 저같이 장애인들이 배울수 있는 학교였죠. 그러나 주위에서 일반학교를 짓고, 장애학생들을 초빙해서 장학생으로 가르치는 것도 설립하게 됐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인촌 김성수등 당시 학교 설립자들은 사회에서 칭송하는 경향이 강했다. 현재는 그런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서당방 하나만 빌려줘도 대대손손 존경받고 그랬었는데 최근에는 사학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만 부각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 뿐입니다. -동암고등학교를 설립할 때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돈은 적고 의욕만 앞섰습니다. 그래도 쌀 한말 빌리거나, 벽돌하나 빌리지 않고 자력으로 다했습니다. 제가 동암법인까지 이루기위해 7평부터 3000평까지 조금씩 조금씩 94차례에 걸쳐 땅을 매입했지요. 약방에서 당시 함께 일을 하던 현 하도열 동암고 행정실장이 저를 자전거에 뒤에 태우고 남문에서 용머리 고개를 넘어 동암고등학교 건설현장까지 왕복 10Km가 넘는 거리를 거의 매일 오갔었지요. 하 실장도 고생많았지요 -요즘은 하루 일과가 어떠십니까.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예전 고 서정상 전북일보 회장님의 요청으로 전북일보에 연재한 고사를 통해 현재에 맞는 글들을 썼었는데, 책으로 모으니까 7권 정도 됩디다. 격일로 연재했었는데, 고역이었죠(웃음). 아침은 학교, 복지관, 재활원, 차돌학교, 일주일에 한번씩 둘러보고, 그다음엔 약방에 출근해서. 진료하고, 저녁엔 친구들을 만나 막걸리, 소주도 마시고 그러고 있지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힘은 없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습니다. -어렸을 때 아프지 않으시고 지체장애가 안됐었다면, 오늘의 양 이사장님이 있었을까요. 아마 머슴으로 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때그때 일하고 쌀 받고, 머슴살이를 하고 일년의 품삯을 받는 촌부가 됐을 겁니다. 아무 일도 못하는 내가 할수 있는 것은 공부 밖에 없었지요.그런 고난이 오늘의 저를 만든것이 아닐까 합니다. -전주에 오신지 60주년, 동암고 개교 40년인데 이사장님으로서 동암법인 동문들, 도민들에게 한말씀해주십시오. 세상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발달 되다보니까 좀 자만을 한 이들이 많습니다. 잘 될수록 자기가 수신제가를 잘하고 자만에 넘쳐서 방종하는 분들이 적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렵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지성으로 자기가 조심하면서 대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항상 매사에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저희 동암법인 많이 아껴주십시오. ●양복규 이사장과 동암법인 양복규 이사장은 1급지체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사학법인 이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인생역경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로 꼽힌다. 그는 1938년 순창 동계면 관전리 산골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정환경은 11개월 만에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3형제를 품앗이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그런 상황이니 집은 여유롭지 못했다. 말그대로 풀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양 이사장이 다설 살 되던 해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게 됐다. 가정형편이나 당시 생활상으로 볼때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한것은 당연지사였다. 어려운 가정환경에 속 식솔걱정에 주위사람들이 양 이사장을 산속에 버려버리라고 했다고도 한다. 어려운 어린시절을 보내던 양 이사장은 한의학계 거장이자 한국전쟁 후 동계면에 머물고 있던 임용락 선생으로부터 한약공부를 하게 된다. 이후 그후 1961년 전주로 쌀 2말과 2만환(화폐개혁 전, 환산하면 당시 2000원, 현재 200만원 정도)만 들고 전주로 나와 동아당한약방을 열었다. 실력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몰려들어 양손으로 진맥을 집고 환자를 볼 정도였고, 대통령 진료까지 하는 등 한의사로는 국내에서 알아주는 이가 됐다. 이후 1980년 5월 15일 양 이사장은 전주에 자신의 호를 딴 동암고등학교(인문, 남 30학급)를 설립하게 된다. 1988년에는 전북장애인 복지관을 수탁해 개관하고 1990년 동암재활원을 설립했으며, 장애학생들을 위한 동암재활 초중고등학교도 설립했는데, 이후 동암법인은 전북지역 대표 사학재단으로 자리 잡았다. 장애인의 대부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양 이사장은 1967년 한약업사에 합격한 이후 전주시정책자문위원, 전북도 정책 자문위원, 전북도교육청 행정쇄신위원, 대한한약협회 대의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전북대학교 명예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현재 중화민국 국립의학연구소 고문, 전북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자문위원장, 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전주시민의 장과 허준의학상, 한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호암상, 전북사회복지 대상, 자랑스러운 전북인상, 전북대학교 시민상, 국민훈장목련장 등 다수의 상과 훈장을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건강편람>(1976), <건강철학>(1987) , 전북일보에 연재한 글들을 7편으로 엮은 <굴뚝속에 호롱불>(1999), <건강요람(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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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세종
  • 2020.05.24 17:12

[뚜벅뚜벅 전북여행] 남원의 매력 : "스토리와 전북의 맛까지 사로잡는 여행"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고전적인 이야기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심청이와 춘향이가 생각이 납니다. 둘 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였고 그 결과 해피엔딩으로 결실을 본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이야기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스토리의 주인공은 단언컨대 성춘향입니다. 저 건너편에는 광한루가 자리하고 있는 남원 시내고 요천을 건너 이곳에는 춘향 테마파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전북 남관광단지입니다. 해가 막 저편으로 떨어진 남원 시내의 야경은 이런 모습입니다. 이곳은 지리산국립공원과 춘향테마파크로 가는 갈림길입니다. 남원을 대표하는 전통시장으로 용남시장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도 재난지원금을 결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시내 중심지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고, 상인들로 구성된 번영회의 시장 살리기 운동을 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구매를 추천할만한 것은 바로 전북의 맛이 있습니다. 전라북도는 특히 맛이 있는 음식점들이 즐비한 곳이 많은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시장의 반찬들은 확실히 맛이 남다릅니다. 남원 하면 추어탕이 가장 먼저 생각나지만, 무엇보다도 전라북도의 맛을 담아낸 김치들을 추천할 만 합니다. 막 담은 총각김치의 맛도 좋은 고춧가루를 쓴 덕분인지 몰라도 그 생생한 맛과 어우러짐이 좋았습니다. 지금의 남원시는 전주와 함께 조선시대 전라좌도의 대읍이었던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와 운봉현(雲峯縣)이 1914년 통폐합되어 성장한 농촌형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 누각은 춘향전의 무대로 유명한 광한루(廣寒樓:보물 제281호)로 조선시대 초기의 이름난 정승 황희가 세운 누대로, 본래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으나, 후에 전라도 관찰사 정인지가 광한루로 고쳐 부르는 건물입니다. 광한루가 자리한 이곳에는 오작교영주각춘향사 등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호남 제일루라고 현판을 걸어놓을 정도로 그 위세가 남다른 건물입니다. 광한루의 전후면에는 호남 제일루(湖南第一樓)계관(桂觀)광한루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새로 마련한 남쪽 정문 문루에는 청허부(淸虛府)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성춘향이 실제 이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춘향의 모습이 있는 춘향사는 춘향전으로 광한루가 유명해지자 1931년에 세운 춘향의 사당입니다. 은하수(銀河水)를 상징하는 연못가에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광한루와 지상(地上)의 낙원인 삼신산(三神山)이 함께 어울려 있는 아득한 우주관(宇宙觀)을 표현한 한국 제일의 누원(樓苑)이라는 광한루원을 보았다면 잠시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이야기에 빠져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 넘의 수청이 무엇인지 오늘날에도 허락되지 않은 수청을 들게 했다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월권을 행사하며 얻지 못한 마음을 억지로 얻으려는 변사또와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원급제하여 돌아온 이몽룡은 상대적인 캐릭터입니다. 춘향전은 남원 고을의 퇴기 월매의 딸인 춘향과 이 사또의 아들 몽룡은 단옷날 광한루에서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사랑하는 여자를 우아하게 살게 하려고 과거 급제 후 만나길 약속합니다. 남원 고을에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변학도는 춘향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수청을 받으려고 하지만 춘향을 수청을 거절하기에 하옥시켜버립니다. 계속 말을 듣지 않자 춘향을 처형하려는 순간 급제한 몽룡이 암행어사로 출두한다는 내용입니다. /글사진 = 박서영(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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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2 11:21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78. 김삼의당이 남긴 조선판 부부의 세계

부부는 생각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고 뒤집히고 깨지기도 해.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극중 지선우로 연기한 김희애의 대사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파격적인 불륜이야기라면, 우리 고장에는 조선 시기 하늘이 맺어준 부부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남원의 한동네에서 같은 날에 태어나 진안에 잠든 김삼의당 부부가 그 특별한 사랑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여류문인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1823)은 본관은 김해이고 하립(1769~1830)의 부인이다. 여성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본명은 알려지지 않고 김 부인이라 불리며 남편이 『시경』에서 차용하여 지어준 삼의당이란 당호로만 전해져 오고 있다. 어린 시절 삼의당은 한글로 된 『소학』을 스스로 읽고 제자백가를 터득하여 문학에도 남다른 실력을 지녔다. 어릴 때부터 성인의 책을 읽어 성인이 가르친 예를 안다고 했으며, 열세 살의 내 얼굴은 꽃과 같고 / 열다섯 살엔 말이 차분해졌네 / 내칙은 이모에게 배우고 / 치장하는 법은 어머니에게 배웠네란 시구를 남겨 몰락한 양반가였지만 예법을 터득하며 가정교육을 잘 받았음을 표현했다. 삼의당은 연산군 무오사화에 화를 당한 김일손의 후손이며, 하립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후손으로 남원 교룡산 기슭에 자리한 서봉촌(지금의 유천마을)에 태어나 같은 마을에 살다 부부가 되었다. 그 기이한 인연에 대하여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태어났으니, 기축년(1769) 10월 13일이었다. 같은 고을 같은 동네에서 살았으니 남원 서봉방 한 마을이었다. 병오년(1786) 봄에 혼례를 올리고 남편과 아내가 되었으니 하늘에서 정해준 배필이며 고금에 거의 없던 일이다는 기록을 남겼다. 삼의당이 남긴 글들은 사후 110여 년이 지난 뒤인 1933년에야 『삼의당고(三宜堂稿)』로 발행되었다. 남원과 진안에서의 생활사가 오롯이 담긴 글은 총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시가 260여 수이고, 편지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록 6편이 실려 있어 조선 여성으로서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겼다. 기녀들이 주를 이루었던 조선의 여류문인의 작품과 달리 그의 특별함은 평범한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것과 남편과 주고받은 시가 많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혼례식을 올린 첫날밤부터 특별한 마음을 시로 주고받는다. 먼저 하립이 천생연분을 만나 좋다는 마음을 전하며 아내의 도리를 다하라고 운을 던지자, 삼의당도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좋다면서 집안의 화목함이 당신 손에 달렸다고 화답한다. 이로부터 부부는 일상을 시로 주고받는 시우(詩友)가 되었으며, 시문에 남다른 하립의 부모와 형제들도 삼의당을 인정하고 격려한 덕에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되었다. 삼의당은 몰락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하립의 과거 급제를 평생 꿈으로 삼고 뒷바라지를 했지만, 하립은 낙방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가세가 더욱 기울어지자 하립의 부모 형제들과 함께 1801년에 남원을 떠나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했다. 진안에 와서는 샘물 달고 땅 비옥한 작은 시내 남쪽 / 좋은 곳 단장하여 초가집 지었네... 사는 곳은 땅을 가려야 지혜롭다하고 / 앉으면 꼭 책을 읽어야 스스로 편안해한다네라는 시구와 가난한 농촌 양반가의 일상과 풍습 그리고 지금처럼 전염병이 돌았을 때 심정 등을 남겼다. 또한, 하립과 부모의 봉양을 위해 장신구와 머리카락을 팔아 여비와 찬거리를 마련한 일들도 기록했지만, 가족을 진심으로 위하고 남편을 그리워하며 애태운 심정을 주로 담았다. 그러나, 하립은 42세에 이르러서야 예비시험 격인 향시에 합격하지만, 안타깝게도 본 시험인 회시에 낙방했다. 기나긴 세월 생이별을 자처했던 삼의당은 허망했지만, 낙방하고 돌아온 하립을 위해 한양에는 훌륭한 인재가 많다지요라며 다독이고 품어준다. 인생 말년에 시서 읽으며 천성을 즐기노라 / 어찌 구구하게 하고 싶은 것을 구하리오 / 이 한 몸 편하게 거처하니 신선이 따로 없네라는 하립의 시구에 삼의당은 서울에서 십 년 동안 분주했던 나그네 오늘은 초당에 신선처럼 앉아 있네라 차운하며 마음을 내려놓고 그간 인고의 세월을 위로했다. 비록 남편이 과거급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결같이 남편을 믿고 지지한 삼의당은 하립과 함께 진안에 잠들었으며, 고향 남원에는 그녀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요즈음 방송가는 불륜이야기가 대세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은 자극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삼의당 부부와 같은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천생배필을 만나 부부로 지낸 삼의당의 글과 사연은 믿기 힘든 이야기가 난무하는 세상에 보석같이 빛나는 삶의 기록이며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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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1 18:26

[문화&공감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축제와 환경, 코로나19가 보여준 새로운 이면

모든 일에는 이면이 있다. 인생은 거친 고행 길을 걷는 것과 같으나, 그 길에 이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없는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사색과 철학은 그 과정에서 파생한다고 믿는다. 보이는 것 외에 다른 면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삶을 탐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또 코로나 19 이야기다. 코로나 19가 단순히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역병이라는 평가는 단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면을 보아야 한다. 짧은 지혜를 보태자면, 삶의 진실은 대부분 이면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탐색해 우리 삶과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날카롭고도 뜨거운 자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코로나 19로 전 세계 대기질 개선통렬한 자성의 기회로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 코로나 19가 아니겠느냐고. 참으로 통렬하다. 실제로 유럽과 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국의 대기질이 코로나 19 기간에 크게 개선됐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19보다 대기오염으로 죽어가게 될 사람들이 더 많다는 기사도 봤다.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새로운 바이러스는 결국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점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무분별한 개발로 야생동물 서식지를 인간들이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인간이 만든 재앙인 셈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산화탄소나 미세먼지 감소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전망이 많다. 다시 코로나 이후엔 경제손실을 막기 위해 더 많이 더 자주 공장을 돌리고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훼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뼈아프게도 이 기후문제의 심각성을 거론하는데 있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플라스틱에 담겨온 배달음식을 먹고, 일회용품을 쓰면서 느끼는 죄책감은 오래 가지도 않고, 실천으로 지속되기도 어렵다. 전 인류의 공통적 인식과 광범위한 세계적 참여, 제도적 뒷받침 등이 개인의 노력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축제에도 환경에 대한 보다 동시다발적공격적 메시지 필요 환경에 대한 전 인류의 관심을 환기하고,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축제를 통해 드러내 더 많은 국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을까. 보다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보다 설득력 있게 말이다. 물론 에코 페스티벌(환경 축제)이나 환경예술제 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내 축제 중에는 플레이그린 페스티벌이나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 에코페스트 인 서울 등이 눈에 띄는 환경친화적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의 경우 업사이클링 축제 장식을 활용하거나 포토존, 축제 조형물을 활용해 저탄소 생활실천 메시지를 재미와 참여라는 요소를 더해 운영하고 있다. 또 주요 공연장이나 먹거리 장터 중심으로 제법 규모가 큰 클린존을 설치하고, 생분해성 비닐봉투를 나눠줘 쓰레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에코페스트 인 서울은 텀블러 등을 대여해주고 세척까지 해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기도 하고, 어린이를 위한 그린 놀이터, 친환경 체험 등을 다양하게 운영한다. 해외 축제는 국내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보인다. 일본의 그린비트페스티벌은 업사이클링 전시와 기념품을 판매하고, 먹는 식기 아이템을 도입해 일회용품 사용을 감소시켰다. 이 먹는 식기와 젓가락은 일본을 넘어 해외 축제까지 납품하는 등 주목을 받고 있다. 축제에서의 환경친화적 노력은 축제 운영의 일부라고 할 수 있지만, 축제 자체의 테마와 주제를 환경에 초점을 맞춘 페스티벌도 있다. 영국의 아주 오래된 축제인 글라스톤베리는 가장 공격적인 범세계적 환경단체 그린피스 등과 협업, 해마다 다른 테마로 환경 관련 섹션을 준비해 보여주고 있다. 작게는 스테인리스 스틸 컵을 사용하면서 한화로 약 8천원의 보증금을 내면 반납할 때 반환해주고, 반환되지 않은 금액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역시 영국의 우드 음악페스티벌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전거로 축제 현장을 방문할 경우 친환경 기념품이나 음료를 제공하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물론 전주세계소리축제도 지난해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에코페스티벌을 표방하고 생분해 제품과 재미를 부각한 분리수거 클린존, 업사이클링 쉼터 및 키즈존 등을 운영했다. 그 덕분에 소리축제에 대한 평가가 좀 더 후해졌고,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는 축제로서 위상도 높아졌다. 우리가 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계 다양한 축제를 평가하고 있는 평론가들이 에코 페스티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평가의 기준 가운데 주요 포인트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축제들이 좀 더 환경 감수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다. △시진핑이 악마라고 부른 코로나이면을 보는 지혜를 이렇게나마 각자의 방식과 노력으로 국내외 축제에서 환경에 대한 메시지와 보존노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찻잔 속의 태풍 같은 느낌이다. 소리축제 역시 환경에 대한 고민을 더 깊고 폭넓게 가져야 한다. 좀 더 적극적이고 좀 더 광범위한 적용이 필요하다. 전 세계 주요 축제 커뮤니티를 조직해 일거에 동시다발적으로 한 해 축제의 주제와 메시지, 운영방식을 대대적으로 친환경적으로 전환하는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직접 반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의 산발적이고 부분적인 노력들이 좀 더 파급력을 갖고, 세계인의 의식 변화에 도움을 주지는 않을까. 축제는 축제에서, 그리고 각자의 일터와 분야에서 영향력과 파급을 확대해 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에 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구환경과 기후변화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전 인류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코로나 19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지만, 동시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경쟁과 개발에 열을 올려 온 우리에게 큰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환경에 대한 전 인류의 절박한 관심과 변화에의 촉구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툰베리를 위시로 여러 나라 10대들이 수업을 제치고 거리로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고교생들 역시 이 시위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서 눈물이 난다. 이제 우리 기성세대들이 좀 더 가난해지고 좀 더 불편해지더라도 삶의 방식과 양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지구가 살고, 아이들이 산다. 중국의 시진핑이 악마라고 부른 코로나의 역설은, 반드시 인류의 반성을 통해 이면을 보는 지혜와 탐색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김회경 전주세계소리축제 대외협력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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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0 17:42

[참여&소통 2020 시민기자가 뛴다] 지역 민주화 운동사 재조명해야

곧 계엄군이 올 거야, 형은 괜찮으니 어서 집에 들어가!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을 앞에 두고 고등학생인 이 군은 집에 가야 했다. 형, 누나들과 함께 이 자리에 남겠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소리치는 대학생 형의 말이 이 군의 발을 집으로 돌리게 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총소리와 군홧발로 짓밟는 소리, 비명과 신음소리가 도청 광장을 뒤덮었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온통 범벅이 되었지만 이 군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이불 안에서 숨을 죽여 울었다. 시신안치소로 쓰이던 상무관에 누워있던 이들과 시위하던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광경이 여전히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생생히 재생 중이다. 1980년 5월,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이 군은 2020년 장년이 되었다. 이제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들어선 옛 전남도청을 지나며 이영진(가명)씨가 말했다. 그때에는 계속 광주 시내 여기저기에서 시위가 있었지,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광장에 하나둘 모였고 아침이슬을 불렀어요. 지나가던 이들도 그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면 사복 차림의 경찰이나 군인들이 그들을 구타하고 시위가 진압되면 다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부하던 이들은 계속 공부를 하고, 어딘가로 가던 이들은 그들의 목적지로 걸어갔어, 지금도 그때의 모든 일들이 어제처럼 생생해요. 1980년 5월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포함 전국으로 확대했다. 김제 출신의 전북대학교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는 전라남북도 대학 연합체인 호남대학총연합회의 연락 책임자였다. 1980년 5월 17일 그날 밤 이 열사는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동료학생 1백여 명과 함께 비상계엄 철폐 및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건물에 진입한 7공수 부대원들에게 쫓겨 옥상으로 올라갔다. 5월 18일 새벽, 그는 온몸이 멍들고 피투성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검찰은 이세종 열사의 사인을 학생회관 추락사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주검을 검안했던 전북대병원 이동근 교수는 당시 이씨의 주검에는 검안서상의 손상 외에도 가슴과 등, 옆구리 등에도 타박상이 있었으며 골절의 양상도 모두 복합골절이었다라며, 집단 구타 없이 단순 추락만으로는 그런 상처가 생길 수 없다라고 추락 전 계엄군의 집단 폭행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의 동료들이 1985년 5월 18일에 모교인 전북대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웠으나 당시 당국의 탄압으로 두달만에 시신이 안치된 생가로 이전해야만 했다. 그의 추모비는 1989년이 되어서야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며, 1995년 이세종 열사는 모교 전북대학교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1980년 5월 21일, 원광대학교 한의대 본과 2학년생 임균수 열사는 전남도청에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휴교령이 내려진 5월 17일에 예정된 봉사활동을 취소하고 집이 있는 광주로 간 것이다. 한의대 재학 시절에도 임 열사는 민주화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지닌 청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날 계엄군이 오후 2시를 기해 후퇴할 터였다. 시위에 함께 해 온 모든 이들이 전남도청 앞에 나왔고 오후 2시가 되자 시민들을 대상으로 실탄사격이 가해졌다. 총상으로 인해 임균수 열사는 이날 22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전두환 정권이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시위 중인 광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헬기 기총소사 등을 이용해 학살(제노사이드)을 자행한 그날, 그때이다. 영원한 청년으로 남은 아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임균수 열사의 부친 임병대 씨는 아들 몫의 보상금과 사재를 털어 무등경산 장학금을 설립해 1987년부터 매년 100만 원씩 장학금을 기탁해오고 있다. 조선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를 지내고 퇴임한 임씨는 장학회를 큰아들에게 승계해 아들의 뜻을 이어갈 계획이며, 장학금은 아들의 모교인 순창북중(순창고)와 원광대 한의대 본과 2학년생을 위해 쓰이고 있다. 1987년 세워진 임균수 열사 추모비는 현재 원광대학교 공과대학 옆 잔디광장에 있으며, 임 열사는 1997년 5월 국립 518민주묘지 제1묘역 47번에 안장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발생하자 4월 19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북에서도 신흥중고교, 영생고교,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의 데모와 함께 임금을 두고 노동자들의 쟁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1980년대 전북대학교와 원광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민주화 투쟁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민주화 투쟁에서 여대생들의 역할 또한 지대했다. 그들은 시위를 주도하거나 데모가 있을 때마다 밥을 짓는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5년 9월 13일에는 전북대와 원광대, 군산대, 우석대 4개 대학 연합 주최로 민중민주화운동탄압 성토대회가 있었다. 1980년대에는 노태우 민정당 후보 전부 유세 저지 투쟁이 있었으며, 전두환 구속 투쟁과 함께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원광대학교 숭산 박길진 총장을 비롯한 교수들도 학생들의 말이 맞다며 어깨띠를 매고 학생들과 함께 시위현장에 있었다. 이 시기 익산에서 열리는 시위와 관련해 전단지 등의 인쇄를 상당수 맡아 한 곳이 바로 원불교 총부에 인접해있는 원광사이다. 6.10 민주항쟁시기에는 창인동성당에서 원광대학교 총학생회와 원광대민주화발전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농성이 있었다. 대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아파트부녀회에서 밥과 찌개를 끓여 가져오기도 했다. 1980년 5월 민주항쟁과 관련해 당시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의 명령에 의해 시위하던 시민들을 대상으로 헬기기총소사가 있었다는 증언이 사실로 확인되었지만, 그 배후에 북한군이 있다는 주장 또한 여전하다. 이를 최초 주장한 지만원 씨에 이어 우리공화당 이주천 최고위원은 2008년 5월 포커스전북21에 출연해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제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었다. 현재 전북 지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료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정리한 구술자료와 보고서 등이 있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운동 또한 산재해있다. 임균수 열사의 친구이자 당시 학생운동을 함께 한 익산시 소재 함께가는 한의원 강익현 원장은 전라북도의 알려지지 않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자료를 발굴해 그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 현대사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말처럼 전북의 알려지지 않은 1960년대~1990년대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실이 보다 종합적으로, 많은 도민들이 접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전북의 현대사가 정립되기를 기대해본다. /이희수 원광대학교 LINC+사업단 지역선도센터 담당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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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9 18:48

[뚜벅뚜벅 전북여행] 연초록 나뭇잎이 넘실대는 내소사 전나무 숲길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알록달록 화려한 꽃도 아름답지만 산천을 뒤덮은 연둣빛 신록이 더 아름다워 꽃보다는 숲을 찾게 됩니다.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운동도 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마음 치료도 되니 일거양득이겠죠? 오늘 소개할 곳은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된 내소사 전나무 숲길입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작은 가게들을 지나면 일주문과 마주합니다. 일주문에서부터 600m 정도 전나무 숲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이 길을 걷지도 않았는데 마스크 속에 감춰진 콧속으로 싱그러운 자연의 향이 느껴집니다. 문화재 구역 입장료를 내고 갑니다. 어른 3000원 , 청소년 1500원, 어린이 500원 입장료 면제 대상자 : 만 6세 미만, 만65세 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및 배우자 부안군민 조계종 신도 (관련 신분증 제시 ) 저녁 시간 방문해 기울어진 저녁 햇살이 숲 사이로 스며듭니다. 한낮에 와도 전혀 덥지 않은 나무 그늘이지만 저녁 햇살은 피할 수 없네요. 그러나 이 햇살이 반가운 요즘입니다. 전나무 숲길은 내소사를 가기 위해서는 누구든 걸어가야 합니다. 600m 가량 조성된 이 전나무 숲길은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함께 나누고 싶은 숲길로 선정되어 아름다운 공존상(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아름다운 길을 가족들과 함께 걸어봅니다. 모든 것이 소생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 내소사입니다. 700여 그루의 곧은 전나무가 울창한 터널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연둣빛 잎이 초록으로 변해가는 요즘 그 속을 걸다 보면 저절로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게 됩니다. 온몸 구석구석에 맑은 공기가 스밀 수 있게 숨쉬기를 열심히 해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곧게 잘 30-40m도 넘게 자란 전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동안 구부정하게 휴대전화를 보느라 지친 목에 피로를 풀어줍니다. 이곳에 전나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곳곳에 활엽수가 자라고 있고 연둣빛 단풍잎도 자라면서 더욱 아름다운 오월의 색을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대장금 등 드라마 촬영지였다는 안내문도 볼 수 있습니다. 전나무 숲길이 끝나고 짧은 단풍나무 터널을 지날 때쯤 내소사의 사천왕문에 도착합니다. 단풍나무 터널을 보니 가을에도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을에 가봐야 할 곳으로 기록해 둬야겠습니다. 능가산 관음봉 아래 자리 잡은 천년고찰 내소사로 들어가 볼까요? 사천왕문을 통과해 들어서면 오래된 고찰답게 고목이 반깁니다. 능가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어 엄마의 품에 있는듯한 편안한 느낌이 드는 건 저만은 아니었겠죠?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된 천 년 고찰입니다. 부처님오신날은 지났지만 5월 30일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이 진행될 예정이기에 곳곳에 연등을 볼 수 있습니다. 큰 고목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귀여운 작은 연등에 소원이 가득 적힌 채 달려있네요. 이곳에 적힌 소원들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기원해봅니다. 내소사에서 대웅보전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겠죠? 석가 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불화로는 영산후불탱화, 지장탱화 및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보전에 들어가면 위에 뒤쪽에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을 꼭 보고 오길 추천합니다. 관음보살의 눈을 보면서 좌 우로 왔다 갔다 해보면 관음보살 눈동자가 내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저도 삼배하고 나오려는데 보살님의 추천으로 보고 나왔는데 못 보고 나왔다면 아쉬울 뻔했습니다. 대웅보전 실내는 사진촬영이 불가하니 참고하세요. 그리고 내소사 대웅보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꽃 문살입니다.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꽃잎 문살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늦은 오후에 찾아 오래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대로 몸과 마음의 힐링을 하고 가는 듯합니다. 아직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 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래도 이 풍경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피톤치드 가득한 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천천히 걸으며 오월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요? /글사진 = 김보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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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9 11:19

[에디터가 만난 전북인물] "세계가 한복을 입게 하라" 외치는 한복 전도사 황이슬 손짱(주) 대표

한복은 우리 고유의 의복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백제 유물에서 한복을 찾아볼 수 있어 역사성 측면에서도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복의 비중은 국내 전체 옷 시장의 1%에도 못 미친다. 명절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장롱 속에 잠잔다. 이런 잠자는 한복을 깨우는 데 온몸을 던지고 있는 이가 한복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인 황이슬 손짱(주) 대표(32)다. 그는 일상적으로 한복을 입고 세계가 한복을 입는 날을 꿈꾸는 한복 전도사다. <나는 한복입고 홍대 간다>는 자서전적 책을 내면서 주목을 받았고, 한복입고 증명사진 찍기서부터 졸업식청소외식 등 한복 입고 1000가지 행동하기를 제안하며 직접 찍은 사진을 올려 젊은층을 한복으로 끌어들였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전주역 앞에 위치한 회사 사무실과 매장을 찾았을 때 라이브 쇼핑 방송(그립)이 진행되고 있었다. 매주 두 차례 진행하는 쇼핑 방송에서 한복과 한복 사업에 대한 열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한복의 특성상 신데렐라로 떠오른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젊은 나이에 단기간 급성장을 이뤘다. 오늘의 손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배경이라면. 한복 대중화의 걸림돌을 소비자와의 접근성에 있다고 보았다. 한복 생산자의 72%가 1인 업체가, 종사자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다. 판매유통방식의 변화 흐름을 따르는데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다. 젊은층이 좋아하는 방식,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등 온라인 판매 방식에 일찍부터 눈을 돌렸다. 소비자들의 반응을 살피며 제품 제작에 반영했다. 여기에 주얼리나 잡화 등이 주로 이용하는 백화점 팝업 입점, 크라우딩 펀딩 등에도 과감히 도전했다. -황 대표가 만드는 한복 제품부터 판매까지 톡톡 튄다. 특히 한복의 일상화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주 매장과 서울 홍대 매장 두 곳의 오프라인 매장을 두고 있으나 주력은 온라인 판매다. 디자인만 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캠페인성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스럽고 쉽게 한복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한복을 어떻게 소비할 수 있는지 인터넷과 영상, 사진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복 일상화의 스피커 역할을 하고 싶다. 한복 업계의 아이콘이 되는 게 꿈이다. -지금까지 수백 종류의 한복을 만들었는데, 스테디셀러가 있다면. 내가 입고 있는 셔츠 개념으로 만든 흰색 저고리다. 장식 무늬 없이 기본을 잘 지킨 작품이다. 2016년 출품 이후 1000장 정도 팔렸다. 한복이 전체 옷 시장의 1%도 안 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일반 옷으로 보면 10만장 팔린 셈이다. 배이지 색에 하얀 동전을 붙인 두루마리 재킷도 꾸준히 찾는 제품이다. -최고의 제품을 꼽는다면. 올 초 출품한 여행용 한복인 나오 저고리, 나오 바지가 히트를 쳤다. 여행할 때 활동성이 보장되고, 인생샷으로 부를 만큼 사진으로도 예쁘게 나오는 것에 착안했다. 내구성, 숨은 주머니 등을 만들어 크라우딩 펀딩에 부쳐 1억3000만원 어치가 판매됐다. 이 옷 때문에 한복에 입문하게 됐다는 마니아도 생겼다. 올해 다시 한 번 크라우딩 펀딩에 나설 계획이다. -여기까지 오는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고비라면. 전통과 현대를 이어준다는 신념으로 한복을 만들었으나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옷은 옷으로 봐주면 좋을 텐데 어떤 틀에 넣고 재단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 한복 입는 사람을 북한 여자 같다고 한 줄로 혹평도 한다. 한복의 생활화를 위해 누군가 시도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독려하고 응원해주면 좋겠다. -말이 나온 김에 어디까지를 한복으로 봐야 하는지, 황 대표의 의견을 듣고 싶다. 전통한복은 기본적으로 깃과 고름, 동전 세 가지다. 그렇다면 고름이 없거나, 소재를 양장지로 쓰면 한복이라고 할 수 없는가. 조선 후기 때 한복지로 만들어진 옷만이 한복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틀에 넣지 말고 크게 봤으면 좋겠다. 모양과 길이가 바뀌어도 비대칭을 특징으로 삼는 한복적 요소가 담기면 넓은 의미의 한복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반팔 한복, 미니스커트 한복이 있어야 젊은층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한복이라고 하기 뭐하면 모던한복, 현대한복, 21세기 한복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전통도시 전주와 한복은 막연하지만 잘 어울릴 것 같다. 전주에서 한복 관련 행사도 개최하고 있고, 한복 차림으로 한옥마을을 거니는 관광객도 낯설지 않다. 다른 도시와 비교할 때 전주에서 한복 문화가 잘 발달됐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사업 초창기에는 지역적 특성을 사업 강점으로 여기지 못했다. 원단 구입의 편리성이나 물류비용 때문에 서울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주 기반이라는 점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전주에서 만드는 한복이라면 한복 잘할 거라는 게 소비자의 믿음이다. 한복진흥센터 미팅에 가보면 전주의 위상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복입기를 선도하는 도시로 손꼽히고, 업계 인지도도 높다. - `세계가 한복 입게 하라`를 모토로 삼았다. 자신감과 당당함이 묻어난다. 여기에 황 대표의 꿈과 희망이 담긴 것 같다. 실제 가능하다고 보는가. 세계화에 앞서 산업화, 일상화가 우선이다. 미국에서 들어온 청바지가 처음 노동자들의 옷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옷이 됐다. 옷은 양식이다. 한복도 옷이다. 청바지가 세계적인 옷이 됐는데, 한복이라고 그러지 못하란 법이 있나. -실제 여러 세계시장을 노크했는데 반응이 어땠나. 온라인커머스뿐 아니라 밀라노파리뉴욕 등 세계적인 패션 본고장에서 열린 패션쇼와 페어 등에 우리가 만든 한복을 출품해보았다. 이런 패션 전문 페어에 출품하는 것 자체부터 높은 벽을 경험했다. 또 그들이 좋아하는 옷과 우리가 좋아하는 한복이 다르고, 밀라노와 파리의 선호도도 달랐다. 유니크 하다는 반응은 많았지만 정작 판매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현재의 한복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그 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 지금도 고민 중이다.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집중하는 일이라면 한복 유니폼 개발과 보급이다. 학생 교복을 비롯해 여행 가이드, 문화관광 해설사, 한식당 종사자, 한의사 등 전통 관련 직종에서 유니폼처럼 입을 경우 한복 대중화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또 현재 준비 중인 한복 운동복 등 한복 홈웨어도 한복의 일상화에 일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 농반 진반으로 앞으로 한복으로 우주를 정복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복이라는 이름이 주는 , 옭아매는 시선이 깨졌으면 좋겠다. 5000만명 중 1%라도 한복 마니아가 있어야지 않겠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공부하면서 소통하겠다. ● 손짱(주)는 창업 10여년 만에 일상 한복으로 국내 한복업계 톱3로 성장 황이슬 대표는 어려서부터 한복과 친숙했다. 전주 남부시장에서 포목점과 이불커튼점을 하던 부모님 곁에서 자연스럽게 한복을 접했다. 어머니는 한복을 짓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가 한복을 사업으로 시작한 것은 대학(전북대 산림자원과)에 진학한 직후인 20세 때다. 손으로 만든 여러 수공예품을 만들어 온라인 판매를 시작한 후 가장 인기가 높았던 수제 한복으로 특화시켰다. 현 회사 이름 또한 수공예품 중 최고라는 의미로 당시 사용했던손짱 온라인에서 나왔다. 매력적이고 문화적 가치를 담은 한복이 더 널리 입는 옷이 되길 바라면서 자신의 나이 때에 맞는 젊은 한복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한복 미니스커트도 만들고 소재에 변화도 줬다. 사업 시작 후 5년 쯤 지나면서 유사품이 많아져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중적인 옷이 되려면 일상 한복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길을 쫓아 지금의 손짱으로 서게 했다. 현재 손짱에서 근무하는 직원은 9명. 생산을 총괄하는 공장장, 상품 매니저, 쇼핑몰 호스트, 사진 촬영, 인스타그램 관리자, 매장 판매 매니저 등으로 구성됐다. 국내 한복 업체가 가족끼리 운영하는 영세 업체가 많은 실정에서 연간 매출액 12억원 대로 국내 한복업계 톱3에 들 정도의 규모다.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한복업계 총아로 우뚝 선 것이다. 이 회사가 지금까지 런칭한 한복 제품이 1500종에 이르며, 현재 600종이 업로드 돼 있다. 상품 생산은 본인 소유의 설비에서 프로젝트별 객공(임시로 고용한 직공)을 사용한다. 제품별 양이 많지 않아 외주로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전부 황 대표의 몫이다. 한 시즌에 많게는 200개도 만든다. 이리 많은 종류의 상품을 디자인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변형으로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코로나19로 외출과 여행 자제 분위기 속에 영향을 받고 있으나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진가를 발휘해온 황 대표가 꿈인 한복의 대중화와 세계화의 새로운 돌파구를 어떻게 열어젖힐 지 주목된다. /김원용 사회문화교육체육 에디터

  • 기획
  • 김원용
  • 2020.05.18 17:24

주영생 전북동부보훈지청장 “유공자의 희생·헌신, 모든 국민이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

주영생 전북동부보훈지청장(55)은 취임 후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 등의 헌신을 지역민에게 알리는데 분주한 나날을 보내왔다. 특히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해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위해 국민들이 함께 추모기억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주 지청장을 만나 다양한 도내 보훈 서비스 내용을 들어봤다. -지난해 9월 25일 지청장 부임하셨습니다. 소외가 어떠신가요. 제 고향이 무주입니다. 국가보훈처 임용 이후 처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무척 기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만큼 더욱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어깨도 무거워졌습니다. 전북은 의병 활동의 본거지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며 차일혁 경무관소병민 중령 등 호국영웅과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 518의 첫 희생자인 이세종 열사 등 민주화운동 주역들의 고장입니다. 부임해 9개월여 동안 지청장으로서 전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사업을 추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조금이나마 보훈 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보람된 사업들을 창출하도록 더욱 매진하고 있습니다. -전북동부보훈지청의 관할은 어느지역인가요. 전북동부보훈지청은 국가보훈처 소속기관으로 국가유공자와 유가족의 영예로움 삶을 위해 보상금 지급, 의료 및 복지서비스를 지원하는 기관입니다. 독립유공자의 훈격, 전사순직 및 상이 정도 등에 따라 보상금을 차등 지급하고 또 이분들을 위해 아파트 특별공급, 대부지원, 위탁병원 등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훈대상자의 고령화에 따라 직접 찾아가는 재가 복지서비스, 국가유공자 사망 시 국립묘지 안장 등 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부지청은 도내 14개 시군 가운데 전주, 남원, 완주, 무주, 진안, 장수, 임실, 순창 등 8개 시군을 관할하고 있고 나머지 6개 시군은 익산에 위치한 서부보훈지청에서 관할하고 있으며 저희 관할 보훈 가족은 1만 6392가구, 서부보훈지청은 1만 5433가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부임 후 추진한 전북지역 보훈 가족을 위한 사업들을 설명해 주십시오. 지난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한 해 동안 지난 100년의 역사를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추진했습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역시 특색 있는 많은 사업을 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전주 풍남문을 출발해 경기전을 지나 향교까지 행렬하며 31만세 운동을 재현한 독립의 횃불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전주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전통문화와 접목해 전북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한 독립 영웅 창작판소리 제작 및 공연을 했고 세 번째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범국민적 예우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가유공자의 자긍심 제고를 위한 스토리가 있는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 드리기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지역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00분의 업적을 전북 문인들의 글로 펴낸 전라북도 독립운동가 열전 책자발간 등 여러 사업을 통해 도민들과 함께 우리 선열들이 일궈왔던 역사를 공유하고 기억하는 의미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과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추진하는 사업을 설명해 주십시오. 올해는 청산리봉오동전투 100주년, 625전쟁 70주년,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을 국민과 함께 기억추모할 수 있는 국민참여형 기념사업을 추진해 국민통합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계기 행사가 취소축소되고 있지만 다양한 대체 사업을 통해 도민들이 역사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게 준비 중입니다. 그중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이 땅에 민주화를 꽃피우기 위해 힘쓰시다 옥고를 치르신 전주시 소재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두 분께 민주유공자 명패를 직접 달아드렸습니다. 6월에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 되어 나라를 지켜낸 호국정신을 되새기며 국민들의 마음을 모아 코로나19도 극복할 수 있도록 ON-OFF 라인을 결합한 다양한 행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온라인 홍보물을 이용한 유치원생과 함께하는 보훈 문화 체험 ZONE 운영 및 지역축제와 함께하는 나라 사랑 큰나무 체험관 운영,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나라 사랑 플래시몹 및 나라 사랑 그래피티 아트 등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추진중인 다른 사업을 설명해주십시오. 전북동부보훈지청은 적극 행정 실현을 위해 미등록 참전유공자 발굴과 우리 고장 미포상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간호장교 등 여군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했으나 현재까지 국가유공자로 등록하지 못한 분들에게 참전유공자의 권리를 찾아주는 적극 행정 추진으로 국가를 위한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와 지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국가보훈대상자의 근접 진료 서비스 강화를 위해 의원급 위주의 위탁병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보훈병원이 없는 지역의 보훈대상자의 의료지원 확대를 위해 민간병원을 위탁병원으로 지정하여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는데 현재 순창지역의 위탁병원 추가지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에 이어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추진하는데, 올해에는 월남참전유공자 등 국가유공자 2900여 분께 달아드릴 예정입니다.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보훈(報勳)은 사전적 의미로 공훈에 보답함입니다. 풀어 쓰면 자신의 몸을 던져 부모형제와 이웃 그리고 조국을 지키고 빛낸 분들의 영광을 국민의 이름으로 더욱 높이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국민과 함께하는 균형 있는 기념사업 추진과 국민 눈높이에 맞는 보훈심사체계 개편, 보훈 가족의 고령화에 따른 의료요양서비스 개선 등 보훈 패러다임 혁신을 통한 국가책임을 강화해 국민과 보훈 가족이 공감할 수 있는 확실한 변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전북동부보훈지청에서는 국민통합에 기여해 국민과 보훈가족이 신뢰할 수 있는 보훈을 실천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이에 도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 주영생 전북동부보훈지청 지청장은 1965년생인 주 지청장은 무주군에서 태어나 1985년 7월 1일 국가보훈처 9급 공채로 업무를 시작했다. 가장 기본적인 민원업무에서부터 출발한 그는 다양한 국가보훈직을 수행, 대전지방보훈청, 국립대전현충원, 국립서울현충원, 국가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 등을 두루 걸친 보훈 행정 전문가다. 특히 그의 다양한 업무 경험과 보훈 행정 경력 덕분에 업무 전반을 빠르게 파악, 이를 직원들과 소통, 공유하며 함께 만드는 보훈이라는 모토로 전북동부보훈지청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평가다. 주 지청장 부임 이후 도내 많은 국가유공자들이 발굴되는 등 적극 행정을 펼쳐가고 있다.

  • 기획
  • 엄승현
  • 2020.05.17 16:53

[소곤소곤 전북일상] <익산 골목을 걷다, 여산> “역사, 문학, 종교 유적지를 따라 여산을 걷다”

익산시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이루어진 도시입니다. 그런 이유로 옛 이리시 지역은 도시 특성이 있는 반면에 14개 읍면은 농촌 특성을 보입니다. 골목 풍경 역시 다를 수밖에 없는데요. 각 지역의 골목을 돌아보며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여산면(礪山面)은 다양한 역사 문화 유적들이 있는 특징을 가진 곳입니다. 여산(礪山)의 역사, 문화, 종교 유적지를 따라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았습니다. 여산면(礪山面)은 익산의 동북부에 있는 지역입니다. 호남고속도로 익산 IC 인근에 있는 여산휴게소를 생각하면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행선 여산휴게소 뒤편이 여산면(礪山面)입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여산을 갈 때 시내버스를 이용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여산의 중심에는 버스터미널이 있습니다. 버스터미널에 내리면 가장 특별한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언덕에 늘어선 커다란 느티나무 군락입니다. 어림잡아도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입니다. 면 소재지에 이렇게 오래된 나무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느티나무 언덕을 지나면 파출소입니다. 파출소를 끼고 왼쪽 골목으로 오르면 여산면 행정복지센터가 나오고 그 맞은편에 여산 동헌 건물이 있습니다. 동헌 안에 들어가면 보아야 할 것 3가지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된 느티나무입니다. 수령이 600년 정도로 추정되는데요. 조선시대 태종 ~ 세종 대 여산 동헌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심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조선시대 여산군의 관아로 사용했던 여산 동헌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건축 시기는 조선시대 말기로 보고 있는데요. 벽과 방은 최근에 일부 개조하여 본모습을 잃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답니다. 특히 추녀와 대청마루에서 한식 목조건물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출입문 근처에 세워놓은 비석입니다. 그중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비석이 척화비(斥和碑)입니다. 일렬로 늘어선 여산 부사들의 선정비 앞에 세워진 척화비는 흥성대원군 이하응의 명령으로 조선 각 지역에 세운 것입니다. 비석에는 洋夷侵犯非戰則 和主和賣國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의미입니다. 여산 동헌 바로 아래에는 백지사지(白紙死址)가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절터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곳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을 당했던 곳입니다.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여러 번 붙여 질식사시키는 방법으로 형을 집행했는데요. 이를 백지사(白紙死) 또는 도모지사(途貌紙死)라고 합니다. 마침 백지사지 울타리에는 인동초꽃이 붉게 피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겨울을 나는 인동초는 여러 차례의 고통스러운 박해를 견디고 우뚝 선 천주교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백지사지를 나와 오른쪽 골목길을 따라 여산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골목길을 향해 큰 꽃 한 송이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덩굴식물인 큰꽃의아리(클레마티스)입니다. 꽃이 워낙 커서 한 송이만으로도 골목을 환하게 밝혀줍니다. 골목은 여산 성당으로 이어집니다. 오래된 성당 건물의 특징은 붉은 벽돌입니다. 전주 전동성당이 그렇고 익산 나바위성당 또한 붉은 벽돌 건물입니다. 나바위성당에서 분리되어 1958년에 세운 여산 성당 건물도 그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60년이 지난 건물답게 외관에서 지나온 시간이 느껴집니다. 성당을 돌아보면서 여산 순교성지 설명문을 보았습니다. 설명문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수장형을 당한 배다리는 물의 순교지이고, 참수형을 당한 숲정이는 불의 순교지, 백지사형을 당한 백지사터는 바람의 순교지라 부릅니다. 여산 성당을 나와 다음에 찾아간 곳은 불의 순교지로 부르는 숲정이 성지입니다.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붉은색 철쭉꽃이 떨어져 길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박해 당시 이곳에서는 신자들이 참수형을 당했는데 떨어진 꽃잎을 보면서 순교자들을 떠올렸습니다. 숲정이 성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입니다. 성지로 들어서면 피에타상과 마주합니다. 피에타상은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조각한 작품을 말하는데요. 이 피에타 상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숲정이 성지를 나와 다시 소재지 방향으로 걸었습니다. 버스터미널 가기 전 오른쪽에 있는 여산 전통 시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장날이 아니라 시장은 텅 비어 있습니다. 이곳은 5일 장날에 와야 볼 것이 있겠습니다. 여산의 유명한 짜장면도 먹을 수 있고요. 장날(1일, 6일)에 맞춰 다시 한 번 찾아보고 싶은 곳입니다. 시장을 빠져나와 여산교(礪山橋)로 가는데 다리 입구에 여산양조장 건물이 보입니다. 건물은 새로 지어 산뜻해 보이지만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막걸리 생산 공장입니다. 한때는 술 시장을 주도했던 막걸리가 소주와 맥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쇠퇴하면서 대부분의 양조장이 문을 닫았지만 여산양조장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산을 방문한다면 50년 전통 막걸리 맛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여산양조장을 지나면 길가에 여산교 유물이 보관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다리를 만들면서 옛것을 남겨두었습니다. 흔히 새로운 공사를 하면서 옛것들을 없애면서 역사 흔적이 지워지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여산교 유물을 보면서 흐뭇해졌습니다. 여산교는 배다리라고 불렀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이 수장형을 당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여산교(배다리)를 물의 순교지라고 부른답니다. 여산교 입구에서 왼쪽 제방길을 따라가면 남원사(南原寺)가 나옵니다. 제방길 가로수는 이팝나무입니다. 마침 하얀색 꽃이 풍성하게 피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는 이팝나무꽃입니다. 나무 아래에는 금계국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금계국꽃이 필 즈음에는 제방에 노란색 물결이 일렁일 것입니다. 남원사로 들어서는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입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행사를 제때 하지 못하고 윤사월 초파일(5월 30일)에 하는 것으로 일정이 조정되었답니다. 이 시기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울긋불긋한 등으로 마당을 가득 채웠습니다. 남원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8호인 미륵전이 있는데요. 미륵전 안에는 고려 중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불상이 있습니다. 여산 향교는 남원사에서 약 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화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왼쪽에 교동마을이 나옵니다. 지역마다 교동마을이 있는데요.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마을 입구에 홍살문이 있어 향교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산 향교는 약간 경사진 지형에 있으면서 전학후묘(前學後廟,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대성전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여산 향교를 보고 가람생가를 찾아 나섰습니다. 가람생가는 향교에서 남서쪽 약 2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있습니다. 가람생가에 가면 가장 먼저 탱자나무를 보게 됩니다. 탱자나무는 일반적으로 관목으로 키우는데 이곳에 있는 탱자나무는 정원수로 가꾸면서 수형이 멋진 교목으로 자랐습니다.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탱자나무입니다. 집 구조도 꼼꼼히 둘러보았습니다. 초가집이지만 품위가 있는 집입니다. 아담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은 고택입니다. 생가 바로 옆에 있는 가람문학관에 가면 가람의 생애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침 문인화전이 열리고 있어 덤으로 작품 구경도 할 수 있었습니다. 가람 생가를 마지막으로 여산 골목길 답사를 마쳤습니다. 여산은 익산의 조그만 면 단위 지역이지만 골목골목마다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는 곳입니다. 특히 역사,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있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는 여산 5일 장날(1일, 6일)에 찾아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글사진 = 김왕중(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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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1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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