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정호, 풍경을 읽다] 4. 고향을 품은 사람들
옥정호가 품고 있는 마을은 임실군 운암면과 강진면, 신평면, 신덕면, 정읍시 산내면 등 5개 면(面)의 24개 리(里). 1928년 준공된 운암제와 1965년 완공된 섬진강 다목적댐, 그리고 최근의 섬진강댐 정상화사업까지 세 차례에 걸쳐 물속에 잠긴 곳들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이주를 해야 했다. 운암제 축조 당시의 수몰민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임실군 상운암에 거주하는 96세의 김교만 옹도 일제시대의 이주 기억은 하지 못했다. 수몰민에 대한 피해 대책이 마련된 것은 섬진강댐이 축조되면서 부터다. 당시 고향을 떠났던 수몰민들은 이주대책이 허술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조선전업이 농지 헐값에 매수섬진강댐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40년 일제강점기이지만 이후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으로 공사가 두 차례 중단됐다가 1961년 재개해 1965년 12월 완공됐다. 당시 임실군과 정읍군의 2개 군, 5개 면, 24개 리 1455㏊가 수몰됐으며, 2786세대 1만9851명의 수몰민이 발생했다. 임실군지역이 1910세대 1만4352명으로 70%를 차지했다.수몰지역의 토지는 1945년 해방 전에 조선전업이 대부분 매수했다. 한국수자원공사 자료에 따르면 한일은행과 기업은행에서 토지를 감정해 최저가격으로 매수했는데, 당시 매수는 강제성을 띠었다.또한 수차례의 공사 중단과 공사 기간만 20년을 넘기면서 수몰민들이 농지를 지속적으로 점유하고 경작했다.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댐 건설이 다시 본격화되면서 보상대책이 마련됐는데, 이미 매수당한 농지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았으며 지상물 등에 대한 보상만 이뤄졌다. 기록에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수몰민에게 지급된 보상비가 3억7890만5988원으로 세대 당 평균 13만6003원이다.△ 이주권 팔고 옥정호주변에 둥지섬진강댐 수몰민에 대한 본격적인 이주대책이 마련된 것은 주민들의 투쟁과 시위에 따른 것이었다. 김교만 옹이 옥정호 수몰민들의 피해대책 활동을 기록한 〈망백일기〉에 따르면 공사현장을 점거하고 이주대책을 촉구하자 1965년 4월 동진강 수리 간척사업 준공 후 관리방안을 마련하고, 거주하고 있는 집이 수몰선내에 위치한 1576세대에게 이주정착예정지지정서(이주권, 농지분배권)를 나눠주도록 했다. 동진강 수리 간척사업은 계화도 간척사업이다. 간척사업은 1967년 12월 시작됐는데 섬진강댐은 1965년부터 담수가 시작되면서 시차가 발생했다. 간척사업은 1977년 12월말에야 준공됐다.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김일호이장은 1977년부터 계화도 이주가 시작됐는데, 농지도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고, 염기가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며 다시 임실이나 정읍으로 돌아간 수몰민이 많았다고 전했다.△ 동진폐유지 반월 폐염전에도 이주계화도 간척지가 섬진강댐 수몰민의 대규모 이주정착지로 조성됐지만 칠보발전소에서 계화도 인근의 청호저수지(부안군 하서면)까지 연결되는 도수로 설치로 용도가 폐지되는 정읍과 부안지역 등 4개 군 40곳의 폐유지 256㏊도 수몰민 265세대에 분배했다. 경기도 반월(안산시) 폐염전에도 120세대를 이주시켰지만 경기지역의 이주민과의 갈등, 이주시점과 공사기간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되돌아온 주민이 많았다고 전한다.댐 준공과 이주지 조성 등의 시간차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생계난 등으로 수몰민의 상당수는 농지분배권을 헐값에 넘기고 옥정호 주변으로 돌아왔다. 특히 운암면 쌍운리 상운마을에 100여 세대가 집단 거주했는데, 이들이 정착한 토지는 폐천부지로 국가소유다. 50여 년 동안 무허가 땅에 집을 짓고, 농토를 일궈온 것이다.● [계화도 간척지는] 섬진강댐 수몰민 이주지로 착공방조제 쌓아 농경지 2741ha 조성계화도 간척지 조성사업도 일제강점기인 1944년 조선농지개발영단에 의해 착공됐지만 섬진강댐처럼 공사가 중단됐다가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해 재개됐다. 섬진강댐 축조에 따른 수몰민 이주와 정착을 위해서다. 섬이었던 계화도와 육지인 부안군 동진면을 2개의 방조제로 연결해 육지로 만든 것이다. 제1방조제(9254m)가 1966년에, 제2방조제(3556m)가 1968년 완공되었다. 이후 방조제 안쪽 하서면에 동진강으로 흐르게 한 섬진강물을 가둬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 청호저수지(晴湖貯水池)를 만들었고, 간척지 농사를 위한 도수로 등을 놓아 쌀 생산지로 변모시켰다. 계화도 농지는 도수로만 가르고 있을 뿐 장방형의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있다. 이주민을 위한 마을도 조성했는데, 당시에는 주택 246동을 신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계화도 간척지 입구에는 간척사업 내용을 기록한 기념탑과 전망대가 있다.방조제 축조로 계화리 의복리 창북리 등이 생겼고, 간석지(干潟地)가 2741ha에 이르는 광활한 농경지로 바뀌었다. 계화도 간척지는 완공 당시 광복 후에 조성된 최대의 간척지로 식량 증산기지로 역할했다.계화도의 경지면적은 3212ha인데, 논이 3198ha로 압도적이다. 호당 경지면적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다. 계화간척지에서 생산되는 쌀은 계화미(界火米)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계화도 간척지는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바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내륙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