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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19)황정견(黃庭堅)의 '송풍각시권(松風閣詩卷)'

황정견(1045~1105)은 북송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자는 노직(魯直), 호는 부옹·산곡이며 홍주 분녕(洪州分寧 : 江西修水) 사람이다. 소동파의 제자인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아 강서시파(江西詩派)의 개창자가 되었다. 서예는 동파와 함께 안진경 이래의 혁신적인 서풍을 배웠으나 황정견은 동파보다 진일보하여 초월절진한 일기(逸氣)를 나타낸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글씨를 공부한 지 20년이 넘도록 속기를 면하지 못하다가 소씨 형제(蘇舜元·蘇舜欽)의 글씨를 보고 겨우 고인의 필의를 얻었으며, 그 후 당대의 장욱(張旭), 회소(懷素), 고한(高閑) 등의 묵적을 보고 비로소 필법의 오묘함을 깨달았다고 회고하였다.일설에 황산곡은 평소 관찰력이 뛰어났는데 일찍이 사공이 노를 젓는 것을 보고 이것을 용필에 적용하여 독특한 서풍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행서에서 노를 젓는 저항력과 비례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배의 형상이 용필의 긴삽(緊澁)함으로 환치되어 더딘 듯하면서도 좌우로 시원하게 뻗은 필획과 곧은 수획으로 나타났다. 서예용어로는 이것을 장별·장날(長捺)·현침(懸針)이라 하는데 그 형상이 마치 노를 저으며 나아가는 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른바 역수행주(逆水行舟)의 모습이다. 이러한 독특한 필의는 그의 행서작 '화기시(花氣詩)' '송풍각시권' '황주한식시권발(黃州寒食詩卷跋' '범방전(范旁傳)' 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공부면에서 소동파가 신의(新意)를 강조하며 고인에게서 일탈할 것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황산곡은 고인의 필법을 체득하여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황 모두 운(韻)을 중시하고 탈속을 강조한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이러한 사고는 자외(字外) 공부로 이어져 학문수양으로 발전하였으며, 학문수양 없이 단지 그 점획만을 얻은 글씨를 경계하였다.'송풍각시권'은 유배에 처한 황산곡이 숭녕(崇寧) 원년(1102) 호북성 악성현 번산(樊山)의 아름다운 산수를 보고 소나무 숲 속에 있는 누각을 송풍각(松風閣)이라 명명한 뒤 직접 지어 쓴 자작시이다. 58세 때의 작품으로 그의 말기작에 해당한다. 모두 21구의 칠언고시로서 유배지의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하며 유배의 속박에서 벗어나 벗들과 마음대로 종유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무창(武昌)의 아름다운 풍광을 읊던 황산곡은 문득 스승 소동파가 황주로 귀양을 갔다가 사면되어 돌아오는 길에 상주(常州)에서 객사했던 일을 떠올린다. 동파 역시 황주의 귀양시절에 이 곳 무창에 자주 들렀기 때문이다. 장뢰는 밥을 먹다가 소동파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새끼를 꼬아 머리에 두른 채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 친구가 죽기 전에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미약한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아무리 탄식한들 세상이 갑자기 변할 리 없으니 처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넘실거리는 파도소리를 베개삼아 낮잠을 즐기고, 눈을 뜨자 이양빙이 전서로 쓴 누정의 편액이 교룡처럼 얽혀 있는 것이 들어온다. 마지막 구절에서 "어느 때나 속박에서 벗어나 친구들과 자유롭게 뱃놀이를 하며 두루 돌아볼까"라고 한 것을 보면, 결코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자유세계를 꿈꾸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산곡의 간절한 마음과 그가 체득한 필묘(筆妙)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수작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1.20 23:02

학술적 연구 토대 역사복원 이뤄져야

전라감영 복원문제가 지지부진한 것은 예산 미확보 이외에도 토대가 되어줄 관련 연구 부족과 시민 공감대 형성 실패가 원인으로 지적됐다.지난 11일 전주한옥마을 봄에서 열린 전북일보 <도시, 역사를 부르다-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길을 찾다> 집담회에서 전문가들은 "전라감영과 관련된 가장 기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완영일록」 번역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또 참석자들은 "전라감영 복원이 일부 지식인 또는 관련자들의 문제로만 머물고 있다"며 "시민적 관심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완영일록(完營日錄)」은 서유구(1764∼1845)가 1833년 4월 10일부터 1834년 12월 30일까지 전라도 관찰사로 수행한 제반 업무를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문헌. 지방 행정의 제반 사안들이 종합적으로 정리된 데다 개인적인 감정과 사적인 차원의 논리 진술을 배제하고 사실 중심으로 요약하고 관련 문건을 제시하는 방식이어서 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유용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경상감영이 있는 대구시가 대구감영 400주년을 기념하며 「경상감영사백년사」와 「경상감사도임순역행차의 복원가장」을 발간하고, 충청감영을 복원한 공주시가 조선시대 감영 문화와 자원활용에 대한 학술대회는 열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감영이 있는 도시 중 유독 전주만이 감영일지를 번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련 학술대회도 지난해 전주역사박물관과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공동으로 마련한 학술대회가 유일했다"며 "복원 문제는 가장 크게 떠들면서 정작 기초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감영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없다"고 말했다.전라감영 복원 논의에서 시민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도 나왔다.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은 "전라감영 복원은 지나치게 문화적·역사적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느껴진다"며 "시민들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원소장은 "동학은 밑에서부터 시작해 특별법까지 제정하지 않았냐"며 "감동이 없는 역사는 복원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전라감영 복원은 전라감영이 왜 소중한 지에 대한 시민적 합의가 바탕이 돼야 한다"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라감영 서까래 올리기, 스토리텔링 대회 등 홍보행사를 기획하거나 선화당 복원 모금 운동 등을 통해 관심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19 23:02

전주 '호남제일문' 문화재 등록 추진

호남의 대표관문인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의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전주시는 오는 22일 시 문화유산심의위원회를 열고 호남제일문과 자만동 금표에 대한 문화재 등록여부 등을 심의할 예정이다.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시내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는 호남제일문은 전주는 물론 호남지역의 관문.지난 1977년 첫 설치된 후 1994년 도로 확장공사와 함께 현재의 시설물로 새로 만들어졌다.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의 호남제일문은 전국에서 가장 큰 일주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일주문은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는 일반 가옥과는 달리 기둥이 한 줄로 된 것을 말한다.팔작겹처마의 전통한옥 지붕양식을 갖추었으며,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선용 선생이 썼다.여기에 육교기능까지 겸비했으며, 풍수학적으로 허술한 북쪽을 보완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것도 흥미를 유발한다.자만동 금표(禁標)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자만동(현 전주시 교동 이목대)의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지석.높이 62cm, 폭 31cm, 두께 15cm의 화강암에 글이 새겨졌으며, 별다른 보존대책 없이 방치되면서 훼손우려가 높다.이들 시설물은 시 문화유산심위를 거쳐 도 문화유산심의위원회를 통과하면 도지정 문화재로 등록된다.시 관계자는 "우리지역 문화자산을 소중하게 관리하기 위한 취지다"며 "전주의 과거에 대한 자존심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 문화재·학술
  • 구대식
  • 2010.01.19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⑨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전망과 과제

<< 올해를 전라감영 복원의 원년으로 삼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전북일보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기획한 <도시, 역사를 부르다-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길을 찾다>를 마치며 마련한 집담회에서 전문가들은 "복원 규모와 범위, 성격 등이 여전히 논쟁이 되고는 있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자"며 "어떤 결론이 나오든 반드시 복원해야만 하는 전라감영의 핵심건물 선화당과 관련된 것이라도 먼저 사업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이날 집담회에는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 김남규 전주시의회 의원(문화경제위원장), 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전라북도·전주시 문화재위원), 이종민 전북대 교수(전라감영 전주4대문 복원 통합추진위원회 부위원장), 조법종 우석대 교수(전주시 문화재 위원)가 참여했다. 사회는 이번 기획의 전문가로 참여한 이종민 교수가 맡았다. >>▲ 이종민=전북일보 <도시, 역사를 부르다> 기획에 참여하며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한 시사점을 얻기 위해 일본 취재에도 동행했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오랫동안 다양한 논의가 진행돼 오고 있는데, 예산 확보가 난망하다 보니 논의도 자꾸 겉도는 것 같다. 하지만 예산 확보만을 기다리며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개인적으로는 전라감영이 복원되면 전주시와 전라북도에 엄청난 의미가 될텐데, 너무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이번 논의를 위해 우선 복원의 의미와 목적, 성격 등 원론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조법종=<도시, 역사를 부르다>에서도 이야기했듯, 전라감영 복원은 조선 500년 전라도 수구의 상징성을 살린다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자 목표다. 감영 복원은 단순하지만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전주가 가지고 있던 역사적 위상을 공간적으로 회복하자는 것이다.전라감영의 원형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복원에 가까운 재현을 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 이동희=역사성 문제도 있지만, 전라감영 복원은 구도심 활성화라는 중요한 과제도 안고 있다. 역사성과 구도심 활성화라는 두가지 목적을 같이 달성해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방향 잡기가 어려운 것 같다.▲ 김남규=1996년부터 전라감영 논의가 시작된 지 14년이 경과됐다.최근 익산이 미륵사지와 왕궁리 오층석탑, 제석사지 등 백제문화로 부상하고 있는데, 익산은 백제문화로 전주는 조선문화로 집중해 나가면 어떨까. 특히 올해는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이 되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뜻깊은 해 아닌가. 전라감영 복원은 전라북도 문화재 복원 및 관리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 나갈 필요가 있다.▲ 조법종=목표를 구체화하면 감영 복원의 성격도 나올 것이다. 익산이 역사유적지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전라감영과 경기전, 향교, 객사, 풍남문 등 조선의 원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전주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라감영이 어느 정도 공간성과 원형성을 회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언기=역사적으로 전라감영이 전주 정신을 살리는 측면에서 필요하다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전주시는 전라감영의 현존하는 유일한 건축물인 동헌을 전주로 옮겨오는 등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규모나 시기, 예산, 주체 등에 있어서는 전주시와 전라북도 통합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자료를 검토하는 단계에 있지만, 앞으로 쟁점별로 하나씩 집중적으로 논의해 가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종민=일본에 다녀오면서 복원의 또다른 의미를 되짚고 싶었다. 복원이 단순히 과거를 되살리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가나자와성 복원과 관련해서 일본 현지에서 만난 오오바 요시미 가나자와학원대학 교수는 "백년 후 국보를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대 최고 수준의 대목술 기술이 접목돼 만들어졌을 전라감영도 복원 후 일정한 결을 안게된다면 충분히 국보화될 수 있겠다 싶었다.▲ 원도연=전라감영 문제는 과거 역사적인 상황을 그대로 복원해 100년 뒤 문화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의미가 있되 미래에서도 가치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전라감영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과 상황, 그것들이 꼭 전라감영 사이트에서만 재현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판을 크게 볼 필요가 있다. 전라감영은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였으면 좋겠다. 그 기능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문화적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이종민=가나자와성은 복원을 통해 460년 동안 소수인들이 독점했던 공간을 시민들에게 공원으로 돌려준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전라감영에도 그런 의미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영에서 했던 문화예술의 생산적 측면을 재현한다면 문화창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한옥마을과 풍남문, 남부시장을 연계시켜 길게 본다면 구도심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가장 큰 걸림돌은 구도심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순식간에 자동차 수백대, 수만대를 판매하는 수익을 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문화가 느리고 더디게 수익을 창출해 낸다.전주한옥마을도 초창기에는 주민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지금은 한해 2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을 끌어모을 만큼 성장했다. 전라감영과 구도심 활성화도 장기적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김남규=역사성을 복원하는 데 있어 일본을 비롯해 해외사례를 들여다 보면 깊은 곳에는 구도심 문제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라감영 자리에 위치해 있던 전북도청이 이전하면서 중앙동과 경원동 등 그 일대 구도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 진 것이 사실이다. 전라감영 복원과 구도심 문제는 현대도시에서 역사건조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좋은 화두인 것 같다.▲ 조법종=만약 도청이나 교육청이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서부 신시가지로 옮겨가지 않았다면 구도심이 이처럼 급격하게 쇠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구도심 공동화 현상은 행정기관들에게 큰 책임이 있으며, 그것을 전라감영 문제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종민=(복원규모에 있어)완전복원이냐 부분복원이냐, (추진주체에 있어)전주시냐 전라북도냐, 아직 정해진 것은 없다. 전라북도와 전주시가 공동으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추진위에서는 시장이나 도지사의 의지, 자치단체의 예산 확보 정도를 궁금해 하지만 반대로 추진위에서 이와 관련된 것들을 적극적으로 주문할 수 있어야 한다.▲ 조법종=무엇보다 이제는 논의 구도를 정의할 단계가 됐다. 더이상 공회전시키지 말고, 나중에 변형이나 수정이 되더라도 일단 방향을 잡고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정해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지역에서도 역사성 회복을 지역 정체성 확립의 핵심적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원도연=논의가 오래돼 온 만큼 정리할 시점은 됐다고 생각한다. 사업주체를 관으로 보는 관점들이 있는데,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라감영 복원은 시민적 합의가 중요하다.또한 완전복원과 부분복원에 관한 문제도 그렇다. 물론, 큰 그림을 정해져야 세부적인 전략이 나오고 마스터플랜에 대한 총괄적인 합의를 하고 시작하는 것이 안정적이기는 하겠지만 우선 기초적인 합의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시작하자. 그래야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조법종=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전라감영 일대의 현재 건물들을 전부 헐어본다던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했을 때의 모습을 그려본다던가, 절충안으로 상징적 복원만 했을 때의 모습을 그려본다던가, 어떠한 구체적인 것이 보여질 때 일도 진척될 수 있다.▲ 김남규=전라감영에 대한 건축적 고찰과 함께 소프트 프로그램을 복원해 나가야 한다. 감영이 행정적·문화적으로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출방(印出房), 지소(紙所), 선자청(扇子廳) 등 한지 및 인쇄출판 도시로서 전주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은 꼭 복원했으면 좋겠다.▲ 원도연=전라감영은 감영 중의 감영이다. 따라서 전라감영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감영과 관련된 모든 것을 담아내는 감영문화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할 것이다.▲ 이동희=우리가 전라감영을 복원해 나가는 데 있어 우선적이고 필수적으로 해야할 일들이 있다. 복원 문제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지만 정작 그를 위한 기초적인 작업, 감영에 대한 이론적 연구들은 거의 없었다. 감영이 있는 도시 중 유독 전주만이 「완영일록」의 번역이 안돼있다. 복원 범위만 논할 것이 아니라 전라감영과 관련된 기초적인 토대 연구를 해야 한다.▲ 조법종=역사학자들의 책무이기는 하지만, 막상 하려고 보면 지역 인력이나 연구자들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다. 했다 하더라도 개별적이지 종합적으로 안돼있다. 전라감영 복원이 현안인 지자체 입장에서는 이러한 기본 자료 구축 작업이라도 했었어야 했다.▲ 이종민=선화당은 전라감영의 핵심 건물이다. 그런데 지난번 발굴에서 감영과 관련된 유구가 나오지 않았다. 장소를 잘못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는데, 제대로 된 발굴이라도 해보자. 자꾸 국비에 의존하지 말고 우선 시나 도의 예산으로 선화당 터라도 먼저 찾아놓자. 그 성과를 인정받는다면 국비를 받는 것도 훨씬 수월할 것이다.▲ 조법종=사실 선화당은 석축을 3단 정도를 깔고 건물을 올렸기 때문에 하부구조가 남을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이전 발굴조사에서 3m 정도 땅을 파니 후백제 유구가 나왔다. 하지만 발굴 범위는 좀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동희=선화당은 50년대 초까지 있었고, 전라감영의 유일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나무는 아직도 남아있다. 그런데 전주 시민들 중 선화당과 관련된 것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과연 없을까 싶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전라감영에 대한 기억을 수집해 보면 어떨까. 그런 자료들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이 시민 설득에 매우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원도연=건물 자체를 짓는 물리적인 공간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전라감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발굴할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들이 전라감영을 둘러싼 모든 기록을 번역해 내놓는다면 인문학은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낼 것이다. 「완영일록」 번역과 함께 시민들이 참여하는 스토리텔링 대회 등을 열어보자.▲ 고언기=지금도 시민들 중에는 전라감영 복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옥마을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처럼, 전라감영 복원도 시민들의 의견 집결이 필요하다.규모와 관련해서는 현재 상황에서 여러가지를 고려해 봤을 때 실질적인 복원 개념 보다는 재현 개념이 낫지 않을까 싶다. 또 전라감영 일대가 슬럼화돼 가고 있는 만큼, 시에서는 경제적 효과와 묶어서 고민하고자 한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19 23:02

43.4㎝ 최대 비파형동검 출토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 중 크기 최대인 길이 43.4㎝짜리 동검이 전남 여수시 월내동 상촌 지석묘(고인돌) 유적에서 발굴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동북아지석묘연구소(소장 이영문)는 여수 국가산업단지(GS칼텍스공장) 확장부지에 위치한 적량동 상적 및 월내동 상촌 일대 지석묘 유적 5곳을 조사한 이 동검과 함께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길이 35.7㎝짜리 다른 비파형동검을 발굴했다고 18일 말했다. 이들 두 동검은 기원전 10∼9세기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으로 분류되는 월내동 상촌ⅡㆍⅢ 지석묘에서 각각 발견됐다. 발견 당시 동검은 두 조각 또는 세 조각으로 의도적으로 파손한 채 매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한반도에서 비파형 동검은 대부분 조각 형태로 출토되며 완형은 부여 송국리 석관묘와 여수 적량동 7호 지석묘 출토 2점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상촌Ⅲ 유적 116호 지석묘 출토 비파형동검은 세 조각으로 파손돼 부장됐지만 완형 복원이 가능하고 지금까지 가장 크다고 알려졌으며 상주(또는 성주) 출토품으로 전하는 것(42㎝)보다 1.4㎝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두 조각이 포개진 상태로 발견된 상촌Ⅱ 유적 18호 석실 출토 비파형동검은 그동안 발굴된 것 중 가장 질이 우수하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평가된다. 상적ㆍ상촌 유적에서는 지석묘 및 주변 석실 231기와 주거지 16기 등 총 247기의 유구(遺構)가 드러났고 완형 석검(돌칼) 6점, 돌도끼 11점 등이 출토됐다. 이들 유적은 무덤군 약간 높은 곳에 묘역을 상징하는 바둑판식(기반식) 초대형 지석묘와 지석묘 축조 및 제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시대 전기 주거지가 위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반도 청동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청동기 유물인 비파형동검은 악기인 비파와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며 중국 동북(東北)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까닭에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라고도 한다. 식민지시대에는 만주식동검이라 하기도 했으며, 중국학계에서는 모양에 주목해 곡인(曲刃)청동단검이라는 말을 쓴다. 이영문 소장은 "이번 출토품을 포함해 남한 청동기문화의 중심지인 여수반도 일대에서 그동안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16점에 달한다"며 "비파형동검이 주로 출토되는 중국의 랴요닝(遼寧)성 못지않은 집중도를 보여주는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1.19 23:02

조선왕실 명품도서 도록 출간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은 장서각이 소장한 조선왕실 도서 가운데 사료적 가치와 예술성이 높은 자료 126종을 소개한 도록 '장서각 명품선'(그라픽네트 펴냄)을 출간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 의궤와 '동의보감' 완질본 등을 비롯해 '입학도설(入學圖說)', '월중도(越中圖)' 등 보물 20여종도 수록했다. 엄선된 자료는 대부분 책이며 최근 보물로 지정된 영조, 정조 등 역대 왕들의 어필(御筆)을 비롯해 고문서와 그림도 포함됐다.'탄생과 교육', '국정과 외교', '행사와 의례', '문예와 교양' 4가지 주제로 구성해 왕실 구성원의 출생과 교육, 국왕의 통치자료, 왕실의 행사와 국가 의례, 문학과 예술, 교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망라했다. 영문을 함께 적었고 쉬운 해설을 곁들여 관련 연구자뿐만 아니라 해외 한국학 관련 학자와 일반 대중도 쉽게 볼 수 있도록 했다. '문치주의와 기록유산'(이성무), '조선왕실의 문화'(이성미) 등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들의 논문 2편도 실었다.도록을 기획ㆍ편집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연구원은 "500년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왕실 도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장서각 도서의 정수를 담은 자료를 우선적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319쪽. 4만5천원.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1.14 23:02

[전시] 한지로 만든 태권도복·생리대…한스타일의 진화

경기전 명품 달력, 미륵사지 사리장엄 장신구, 한지 태권도복….전북의 문화콘텐츠가 새 옷을 입고 고품격 문화상품으로 거듭났다.전라북도는 지난해 문화콘텐츠의 생활화·산업화를 목표로 '전통문화·한스타일 상품개발 공모'를 통해 업체를 선정, 이들이 개발한 명품으로 전북을 알리기 위해 '전통문화·한스타일 문화상품전'을 열고 있다.선정된 업체는 컨티뉴(대표 김병철), 전주기접놀이보존회(대표 임양원), 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익산지부(대표 김운기), 남원 지리산한지(대표 김동훈), 부안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대표 이정미).컨티뉴는 올해 태조 이성계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맞아 장중한 건축미와 전주 정신이 깃든 경기전 명품 작품집과 달력을 내놓았다.사진작가 정주하 백제예술대학 교수가 지난 2년간 정전(정자각)의 전 모습과 좌우 행채 전관을 동시에 촬영,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풍패지향(豊沛之鄕)'의 면모와 태조 이성계 본향의 고풍스러움을 담았다. 부드러운 질감과 독특한 향이 스며 있는 프린트용 전주 한지를 개발해 격조를 더했다.컨티뉴 김병철 대표는 "경기전이야 말로 조선왕조를 태동시킨 곳이며, 전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라며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까닭에 그 의미가 더욱 큰 것 같다"고 말했다.이어 김 대표는 "경기전을 상품화하는 것은 경기전에 대한 진중함과 존경심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며 "전주의 소중한 문화유산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보급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명품 작품집과 달력에 실린 작품 중 일부는 오는 10월 가나자와에서 사진전을 가질 예정.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 익산지부는 지난해 출토된 미륵사지 사리장엄구에 활용된 문양을 넣은 책갈피, 목걸이, 인주함 등을 선보이고 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세련된 문양이 새겨져 익산만의 유일한 문화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전주기접놀이보존회는 전통 민속소품을 만들어볼 수 있도록 지난해부터 모악산 장자마을 아래 체험장과 계룡리민속공방을 만들어 운영해오고 있다. 한지고깔과 기망(대형 깃발 들고 이동할 때 필요한 보조 소품), 전통문양을 새긴 깃발 등 다양한 기념품들이 전시되고 있다.경인상사는 한지사 태권도복을 선보였다. 친환경 소재를 활용해 원적외선을 방출하고, 향균성, 소취성(냄새제거) 등이 뛰어난 명품·품세용·경기용 태권도복이 소개됐다.남원 지리산한지는 피부 자극이 없고, 냄새가 없는 데다, 땀 흡수력이 좋은 한지사를 개발해 'Buy 전북 상품(2009)' 인증, 특허 출원도 네 개나 받았다. 한지사로 만든 생리대, 기저귀를 비롯해 마스크 팩, 자외선 차단 마스크 등을 내놓았다.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는 뽕잎 강정과 오디 강정, 홍삼엿, 참기름 등을 통해 믿을 수 있는 우리 먹거리를 소개했다. 전시는 18일까지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계속된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1.13 23:02

"전주 정신이 담긴 경기전, 국내외에 알려야죠"

"경기전을 문화상품으로 연결시키려는 고민은 6년 전에 시작됐습니다. 경기전이야 말로 조선왕조를 태동시킨 곳이며, 전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올해가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기념하기도 해 그 의미가 컸던 것 같습니다."'전통문화·한스타일 문화상품전'에 경기전 명품 작품집과 달력을 내놓은 컨티뉴 김병철 대표는 "경기전을 상품화하는 것은 경기전에 대한 진중함과 존경심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며 "전주의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보급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지난 6년간 사비를 들여 작업해오면서 시행착오도 많았다. 하지만 고급스러운 문화상품으로 내놓기 위해 고감도가 높은 프린트용 한지까지 개발했을 만큼 완성도를 더했다.김 대표는 "정주하 백제예술대 교수를 만난 게 큰 행운이었다"며 "경기전의 600년 숨결과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대형 카메라와 중형 카메라로 디테일까지 세심하게 신경쓴 교수님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덧붙였다.명품 작품집과 달력에 실린 작품 중 일부는 오는 10월 가나자와에서 사진전을 가질 예정.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1.13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18)소식(蘇軾)의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소식(蘇軾,1037-1101)은 북송시대 사람으로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미주(眉州:사천성) 사람이다. 문장에 뛰어나 아버지 순(洵)과 동생 철(轍)과 더불어 삼소(三蘇)로 불린다. 「고문진보」에는 아버지 소순이 두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車'자가 들어가는 식(軾)과 철(轍)을 택하여 지은 연유를 밝힌 '명이자설(名二子說)'이 보인다. 거기에 따르면, '軾'은 수레의 앞턱 가로나무로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손잡이인데 이처럼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轍'은 수레가 지나간 바퀴자국을 의미하므로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택하였다고 한다. 이름에 걸맞게 이들은 모두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그 중에서도 소동파는 특히 유명하여, 문장에서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서예에서는 북송 4대가의 일인으로 손꼽힌다.동생 소철이 회고하기를 "형은 어려서부터 글씨를 좋아했는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진(晉)나라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나라 제가들과는 방불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후학인 황정견(산곡)은 "소식이 젊어서 날마다 난정서를 공부했지만 중년 이후로는 안진경을 배워 뛰어난 곳은 이북해(李北海:李邕)에게도 뒤지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명대의 동기창은 소식의 글씨에 언필(偃筆)이 많다고 병폐를 지적하였으나, 동파 스스로는 "내 글씨가 비록 아름답지 않지만 나 자신의 신의(新意)로써 표현하고 고인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이 하나의 흔쾌함이다."라고 하고, 또 "내 글씨는 본래 뜻을 따라 써서 본래 법이 없다."라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는 송대에 유행하던 상의(尙意)의 서예정신을 스스로 대변한 것이다.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정쟁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당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과 대립하며 구법(舊法)을 지지하였으나 패하여 지방관으로 좌천되고, 원풍 2년(1079)에는 하옥되기도 하였다. 이로부터 고난의 길을 걸으며 전국 각지를 떠돌다가, 휘종(徽宗)이 즉위하자 사면되어 귀환하다 상주(常州:강소성)에서 객사하였다.여기에 소개하는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 역시 함풍 3년 황주(黃州)의 폄적지에서 한식을 보내는 소회를 적은 것이다. 첫 구에 '自我來黃州, 已過三寒食' 운운한 것으로 보아 황주로 귀양온 지 3년(1082년, 46세)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소동파가 폄적지에서의 생활을 오언율시 두 수로 지어 쓴 것이다. 억양된 감정이 파죽지세를 보이며 현침(懸針)으로 표출되어 표일한 느낌을 주며, 장단과 태세의 착란과 절주가 풍부하다. 황산곡은 이 시권에 발문을 덧붙였는데 "시험 삼아 동파로 하여금 다시 써보게 한다면 필시 이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폄적지에서 쓸쓸하게 한식을 맞는 자신의 심경을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상의(尙意) 서풍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소동파는 유명한 「적벽부(赤壁賦)」의 말미에서 배반낭자(杯盤狼藉)라는 말을 했지만 평소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고 전해지며, 우리 고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소식이 시문이 크게 유행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파가 평소 신의(新意)와 무법(無法)을 강조하며 "아름답게 쓰려고 의도하지 않았는데 아름다워졌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10.01.13 23:02

국내 最古 철제 찰갑편 영종도서 출토

한나라 때 유통된 동전인 오수전(五銖錢) 17점을 꿴 동전 꾸러미가 발견된 인천 영종도 운북 복합레저단지 조성사업 예정 부지에서 국내(북한 제외)에서 가장 오래된 철제 갑옷의 찰갑(札甲ㆍ갑옷비늘)이 출토됐다. 아울러 이곳에서는 슴베(자루)는 쇠, 촉은 청동으로 제작한 화살촉인 철경동촉(鐵莖銅鏃)이 19점이나 수습됐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은 레저단지 조성업체인 리포인천개발㈜ 의뢰로 영종도 북동쪽 해안가와 인접한 운북동 일대를 조사한 결과 기원전후 무렵의 초기 삼국시대 주거지 2기와 성격 미상의 수혈(竪穴. 구덩이) 9기를 확인했다고 11일 밝혔다. 이 중 훼손이 심각한 2호 주거지에서는 끈으로 꿴 오수전 17점과 함께 화살촉 9점이 출토됐으며, 평면 장타원형인 1호 주거지(장축 572㎝, 단축 249㎝, 깊이 38㎝)에서는 찰갑편을 비롯한 철기류와 화살촉 11점이 출토됐다고 발굴단은 덧붙였다. 이 중 철제 비늘갑옷인 찰갑(札甲)은 출토 숫자가 1점에 불과하지만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찰갑 중 가장 오랜 시기에 속하는 유물로 한반도에서 찰갑이 언제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발굴단은 말했다. 이번 유적이 형성된 시기를 연구원은 "빠르면 기원전 1세기, 늦게는 기원후 1세기대"라고 판단했다. 지금까지 백제 유적으로는 몽촌토성에서 뼈로 만든 찰갑이 발견됐으며, 신라나 가야의 경우에는 찰갑보다는 판갑(板甲)이 주로 발견됐지만 모두 그 제작 시기가 3세기 말, 또는 4세기대 이후에 속한다. 쇠 찰갑은 북한이나 만주지역에서도 이처럼 빠른 시대에 속한 것은 발견된 사례가 매우 드물며 "최근 중국 지린성 압록강 유역에서 기원전 1세기 혹은 기원전후 무렵 쇠 찰갑을 발굴한 사례가 중국에서 보고된 적이 있을 뿐"이라고 대전대 이한상 교수가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1.12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최대한 원형 복원해 도시 공원화 추진"

가나자와시가 진행하고 있는 '가나자와성 원정비 사업'은 가나자와성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 공원화해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것이다.마루야마 이시카와현 공원녹지과장은 "가나자와성은 이시카와 현민에게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역사적 문화유산으로 특별명승지 켄로쿠엔과 함께 현은 물론 가나자와시의 상징적인 공간"이라며 "현민의 귀중한 공유 재산인 가나자와성 공원을 도심부의 새로운 활력소로 만드는 도시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마루야마 과장은 "역사 건축물의 복원에 있어서도 지나간 옛 성곽의 분위기와 역사를 느끼게 하는 공원으로 정비하려고 한다"며 "구체적인 정비에 있어서는 전문가와 현민 대표 등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가나자와성은 1583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성에 입성한 후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1602년 천둥과 번개로 천수각이 소실됐지만, 천수각은 재건되지 않고 혼마루에 산카이야구라와 혼마루고텐이 건축됐다.이후 가나자와성은 1631년, 1759년, 1881년 등 세 번의 큰 화재로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하며 성 구조가 변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성의 중심이 혼마루에서 '1000장의 타타미가 깔린 어전'으로 불려질 만큼 장대한 건물이 있었던 니노마루로 옮겨졌다.1949년에는 가나자와대학이 설립돼 캠퍼스로 이용돼 왔지만, 1978년 이전을 결정하고 1995년까지 가나자와시 교외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1991년 '가나자와대학 철거지 등 이용간담회' 등을 통해 1993년 3월 '공원화와 문화적인 시설 이용을 기본으로 한다'는 큰 틀이 결정됐다. 1996년 1월 도시 공원으로 이용하는 도시계획을 결정, 같은 해 3월 가나자와 중심부에 28.5㏊(동경돔의 6배 이상 넓이) 공원이 탄생했다.가나자와성 건물들은 1999년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01년 히시야구라, 고줏켄나가야, 하시즈메몬쓰즈키야구라 등이 복원됐다. 다행히 옛 지도나 사진 등의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전통적인 목조축조공법을 기본으로 1809년 모습으로 복원됐다. 건축기준법에 따라 콘크리트의 기초 보강, 기둥을 굵게 하는 보강공사, 내화보드 및 스프링쿨러 설치 등도 이뤄졌다.니노마루에서 가장 높은 3층의 망루인 히시야구라는 둔각 100도, 예각 80도의 건물로 기둥이 전부 마름모형인 것이 특징이다. 니노마루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천수각이 없는 가나자와성의 상징적 건물이다. 하시스메몬쓰즈키야구라는 니노마루 정문의 하시즈메몬 입구에 딸린 3층의 망루로, 산노마루에서 전투가 발생했을 때 지휘소였다.히시야구라와 하시즈메몬쓰즈키야구라를 연결하는 벽면에 이어 지어진 2층 건물 고줏켄나가야는 무기창고였다. 산노마루측과 니노마루측의 창문 배치가 다른 것이 특징. 이는 전쟁시에 잘 보이지 않는 사각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산노마루측은 1·2층 창을 상하 교대로 배치했으며 니노마루측은 1·2층 창을 상하 같은 위치에 배치했다. 건물은 그 자체가 전시물로서, 컴퓨터 그래픽 영상, 발굴조사 출토품, 각종 모형 등을 전시해 내부 구조를 잘 알 수 있도록 고안됐다.성이 폐쇄된 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 가나자와성은 건물의 반 이상을 잃었지만, 지난날의 유적은 매장문화재로 남아있다. 성터를 상징하는 돌담과 굴, 여러번 재건된 건축물의 흔적, 기와와 도자기 등 가나자와성의 변천사는 물론 각 시설의 기능과 구조, 당시의 기술력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1.12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⑧해외 사례-(3)일본 가나자와

전통과 현대가 만나 화려한 문화의 꽃을 피우고 있는 일본 가나자와도 항상 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실마리를 챙겨주는 것은 분명하다. 전주의 자매도시답게 비슷한 고민을 앞서 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전라감영 복원문제를 등짐삼아 짊어지고 다시 찾은 일본의 전통문화도시 가나자와에서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그 해결의 원칙과 방향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 찾았을 때에는 복원된 가나자와성(金澤城)의 규모에 압도되어 후백제 전주성도 복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막연한 생각만 했었다. 이번에 좀 더 구체적인 물음을 가지고 찾았을 때에도 하얀 눈으로 온통 뒤덮인 놀라운 풍광에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그것은 눈이 아니다. 납으로 만든 기와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 것이다. 그런데 4년 전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뭔가 신비로운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몇몇 건물이 보강되고 해자(垓字)에 세월의 켜가 쌓이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오바 요시미 선생(가나자와학원대학 교수·이시카와현 비주얼 디자인협회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전통은 창조다!'. 이 분의 지론이다. 그래서 복원보다는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에 더 큰 비중을 둔다. 그렇게 보였다. '직인대학'이나 '시민예술촌' 그리고 지금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21세기 미술관'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의 기획물들이다. 가나자와 하면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거리 '히가시 차야가이'나 무사 저택 등 많은 역사 유적들이 있는데도 화려한 금박공예나 고급 브랜드의 기모노 등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런 철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그런 그분이 복원의 의미를 묻자 '백년 후의 국보를 만드는 일이다!' 하는 것이다. 그랬다. 1996년부터 복원을 시작한 가나자와성은 벌써부터 당당한 국가적 보물의 '아우라'를 내품고 있었다!복원은 단순히 끊긴 역사를 잇거나 볼거리 하나 만들어 가는 일이 아니다. 이 시대의 예지를 모아 다음 세대 국보가 될 만큼 소중한 문화적 유산을 남기는 일이다. 경제살리기나 지역활성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전통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이 지속적으로 기대며 살아갈 수 있는,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같은 전통 하나를 우뚝 세워가는 일이다. 고대 로마 유적이 현재 이탈리아인들을 먹여 살리듯. 그런 의미에서 '복원은 창조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고 제멋대로 '상상의 정비'나 '상상의 복원'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가나자와성도 철저하게 고증된 것만 복원정비하고 있다. 사실로 확인될 때까지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세계문화유산을 꿈꾸고 있는 마당에 허투루 대강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며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일 뿐이다.그 예산규모만 해도 그 진정성은 확인할 수 있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제 1차 복원에 쓰인 경비가 252억엔, 토지매입비 112억엔을 뺀 순수 복원정비경비만 140억엔, 우리 돈으로 1700억원. 이 예산의 전부를 가나자와가 속해 있는 이시카와현에서 부담했다. 2006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진행될 2차 복원 예산도 50억엔(600억원). 그런데 이제부터는 역사문화의 복원에 나선 국가가 예산의 절반을 보조한다는 것이다.또 하나, 오오바 선생이 강조한 가나자와성 복원의 의미는 그 밀폐의 공간을 주민들에게 열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1546년 가나자와미도가 창건된 이래 이 성은 성주들만을 위한 금단의 영역이었다. 명치시대에 병부성, 육군성이 들어서면서도 역시 출입금지의 땅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뒤 가나자와대학이 들어서면서 일부에게 해금이 되었지만 여전히 일반인들의 발걸음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96년 복원을 시작하는 동시에 공원으로 재정비하면서 비로소 주민들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가나자와시민을 넘어 전 세계인들에게 개방된 것이다. 실로 450년 만의 일이다.50칸 집이라는 의미의 고주켄나가야를 이용하여 각종 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며 성 안과 밖의 광장에서는 대형 음악회 등 시민들을 위한 문화행사들이 다채롭게 꾸려지고 있다. 복원을 통해 공원으로 거듭나면서 성 앞쪽의 일본 3대 명원(名園)의 하나인 켄로쿠엔과 더불어 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인구 46만의 가나자와시에는 연간 7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당당히 서게 된 것이다.더 중요한 것은 이 유형의 건축물 복원을 통해 무형의 일본 전통목조공법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명치이후 목조성곽으로는 일본 최대의 규모로 알려진 고주켄나가야 등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둥과 대들보를 짜 맞춰 거대한 뼈대를 이루는, 일본 최고의 전통 대목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 내부를 잠깐만 둘러보아도 그 정교한 '짜맞춤공법'을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 전통목조공법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해 건물 곳곳에 벽 투시공간을 마련하여 내부구조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배려를 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수요가 사라지면 기술도 사라지게 마련. 이런 대규모 목조 건축의 복원을 통해 최고의 목조공법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통해 '직인대학' 등의 활성화에도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니 이를 두고 일석이조라 하는 것인가?복원은 단순히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미래로의 당찬 전진의 발걸음이다. 왜곡의 역사를 떨치고 스러져가는 전통문화를 되살리는 일이다. '백년 후의 국보'를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유형의 건축물을 남긴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 무형의 국보급 공법, 그 미학까지 후세에게 오롯이 전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전라감영의 복원도 그 당당한 '아우라'까지 되살리는, 그런 진정성이 결여된 채 시늉만 내는 것이라면 아직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본 가나자와=이종민 기획 참여 전문가(전북대 교수·전라감영 전주4대문 복원 통합추진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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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1.12 23:02

고전문집 1억6천만자 인터넷으로 본다

통일신라 시대의 최치원부터 구한말의 최익현까지 우리나라 주요 인물의 문집을 엄선한 '한국문집총간' 정편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이 10년 만에 끝났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은 최근 '한국문집총간' 정편 663종 350책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끝내고 이달 말 웹서비스를 시작한다고 10일 밝혔다. 속편 150책 가운데 17책도 고전번역원 한국고전DB 사이트(http://db.itkc.or.kr)에서 함께 볼 수 있다. 2000년부터 시작된 디지털화 작업에는 10년이 걸렸으며 예산은 55억원이 들었다. 글자 수는 무려 1억6천만자나 된다.통일신라시대의 '계원필경'(최치원)부터 고려시대의 '동국이상국집'(이규보), '익재난고'(이제현), '목은집'(이색), '포은집'(정몽주), 조선시대의 '삼봉집'(정도전), '화담집'(서경덕), '퇴계집'(이황), '율곡전서'(이이), '백사집'(이항복), 성호전집'(이익), '연암집'(박지원) 등 662명의 문집을 시대순으로 총망라했다. 인생의 정서적 감흥을 노래한 시부류(詩賦類), 생활실용문인 서독류(書牘類), 정사에 관한 의견서인 주소류(奏疏類), 사물과 사건에 대한 의견을 모은 잡저류(雜著類)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모여 있다. 이미 인터넷 서비스 중인 289책에 더해 이번에 작업을 마친 것은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 구한말 매천 황현의 '매천집' 등 조선후기의 문집 61책이다. 고전번역원 백한기 고전자료센터 팀장은 "조선후기의 자료에 대한 연구자들의 요구가 많았는데 앞으로 한국학 연구가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문집총간은 1985년 정부의 '고전국역사업활성화방안'에 따라 시작된 우리나라 최대의 고전적(古典籍) 정리사업의 결과물로, 지난 2005년 정편이 완간된 데 이어 속편 150책 가운데 현재까지 70책이 간행됐으며 2012년 정편과 속편을 포함해 1천270종 500책으로 완간될 예정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한국문집총간' 데이터베이스 구축 성과를 알리는 보고회를 27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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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1.1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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