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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외규장각 도서 '17년 난제' 해결되나

정부가 내달 중 외교문서를 통해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의 '영구대여'를 공식 요청하기로 함에 따라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새로운 전기를 맞을 전망이다. 1993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상호교류와 대여'의 원칙에 합의한 이후 17년만에 구체적인 해법도출이 시도되는 셈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영구대여 방식이 운용의 묘를 살릴 경우 공공재산의 소유권 이전 및 영구 임대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 자국 국내법의 개정 없이도 실현 가능하다는 점에서 프랑스 측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난 2007년 프랑스의 등가등량(等價等量.동등한 가치와 무게) 교환원칙 폐기 방침을 밝힌 이후 장기임대-교환전시 방안에 대한 구두협상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가 우리 정부의 공식 입장을 문서로 요청했다는 점에서 이번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물론 프랑스의 국내법을 개정해서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 최상의 방안이지만 협상 상대의 입장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 "프랑스 국내법이 허용하는 기간인 4년마다 임대를 갱신할 경우 법 개정 없이 사실상 영구대여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아직 미지수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프랑스 내부 여건을 감안할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외규장각 도서를 넘길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프랑스는 과거에도 우리 정부가 외규장각 도서 대신 기탁하겠다고 제안한 고도서의 가치가 낮다며 등가 도서 기탁을 주장하며 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바 있다. 정부가 등가등량 교환원칙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측이 외규장각 도서 대여의 대가로 새로운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부 당국자는 "프랑스가 영구대여 방식에 합의할 경우 우리 문화재를 프랑스 현지에서 전시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며 "이는 양국 대통령이 합의한 상호교류와 대여의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도 만족할 만한 방안을 찾고 있다는 얘기다. 이 밖에 정부가 추진하는 방안이 프랑스의 입장을 고려한 현실적인 해법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문화유산의 소유권을 가져오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 병인양요 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며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는 문화연대의 한 관계자는 "설사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온다 해도 점유권만 인정되는 것이므로 소유권을 찾는 소송을 끝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베르나르 쿠슈네르 프랑스 외교장관이 다음 달 중 방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한.프랑스 외교장관회담을 여는 방안이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이번 회담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2.22 23:02

[전시] 국립전주박물관 '조선의 궁궐과 경기전' 사진전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전 조선왕조 궁궐과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 본래 모습을 담은 미공개 유리건판 사진이 처음으로 선보인다.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이 올해 20주년을 맞아 특별전인'조선의 궁궐과 경기전 - 유리건판 사진전'을 열고, 조선 궁궐 관련 사진 90여 점을 전시한다. 유리건판은 감광제를 유리판에 바른 뒤 건조시킨 확대 사진으로 유리원판이라고도 불린다.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1909년부터 1945년까지 촬영한 조선총독부에서 찍은 궁궐 사진 3만8000여 장 가운데 추린 것으로 지난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 최초 공개에 이은 두번째로 소개되는 자리다.일제 강점기에 궁궐 밖으로 옮겨지거나 팔려나간 전각(殿閣)은 수없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조선왕조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의 경우 일제 치하에서 철거되거나 옮겨 지은 건물은 356동(4648칸)에 이른다. 경희궁(慶熙宮) 역시 몇몇 회랑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이 철거됐으며, 또 다른 전각 가운데 민간에 팔려 음식점, 살림집, 사찰, 기생집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전한다. 궁궐은 훼손되는데 그친 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를 찬미하는데 악용되기도 했다.이번 전시는 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덕수궁 (德壽宮) 등 5대 궁궐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촬영된 사진은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궁궐이 철거되고 훼손된 모습을 담고 있어 궁궐 복원과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경복궁 일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운 뒤 촬영한 사진이 대표적.조선왕실의 본향인 전주를 재조명하기 위한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단(肇慶壇)의 모습도 공개된다. 특히 올해 는 태조어진 봉안 600주년을 맞는 해로 경기전 정전(正殿),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의 모습과 경기전 내 조경묘(肇慶廟) 전경도 만날 수 있다.또한, 지난 2008년 화재로 사라진 숭례문 사진 2점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과 보존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자리가 될 듯하다.이재정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번에 공개되는 사진은 일제에 의한 파괴와 왜곡의 기록까지 역사적 고증을 위한 가장 정확한 사료"라며 "우리 궁궐의 진정한 건축적 아름다움을 알게 하는 가장 훌륭한 전달자"라고 평가했다. 전시는 23일부터 4월25일까지 계속된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2.22 23:02

전주 3대 문화관 민간위탁해야

전주 3대문화관(완판본·소리·부채문화관)이 전주 한옥마을의 정체성을 살릴 곳으로 거듭나려면, 전문가에게 민간위탁하되 이들을 관리·감독할 수 있는 장치를 따로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지난 17일 공간 봄에서 '3대문화관의 올바른 운영 및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열린 '제85회 마당 수요포럼'에서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시의 운영 방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지만, 복합적인 요인을 검토할 때 어떤 수탁자가 되더라도 그 운영에 관한 엄격한 평가와 감독이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전문가가 맡게 될 경우 현실을 도외시하고 또 다른 연구소로 전락할 우려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 이해관계에 따라 문화관의 방향이 변질될 수도 있다"며 "하지만 정통한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박제된 박물관 하나를 더 만드는 것 밖엔 안된다"고 강조했다.소리문화관이 일반 소리 체험을 할 수 있는 곳과 차별화된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려면 판소리 전용극장이 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왕기석 명창은 소리문화관을 대청마루가 무대의 중심이 되는 판소리 전용극장화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며,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판소리 배움터를 만들어 교육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심인택 우석대 교수도 소리문화관이 고품격 판소리 전용 극장이 돼야 한다며 유명한 외부인들을 초청하는 공연 보다는 소리문화관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간판 프로그램을 만들고, 무료 공연은 벗어나야 한다고 덧붙였다.안준영 목판서화체험관 관장은 앞으로 완판본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시가 의욕적으로 완판본을 확보하기 위한 예산 마련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변주승 전주대 교수는 완판본을 전공한 이 지역의 인재가 완판본문화관에 취업하고 싶고, 취업할 수 있는 곳이 돼야 한다며 공급자 보다는 수요자가 중심되는 고품격 체험 프로그램 마련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2.19 23:02

[전시] 결혼 직전 영친왕비 친필일기 공개

"미혼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신년이다. 왠지 모르게 즐거운 마음도 들고 또 아쉬운 마음도 든다." 마사코(1901~1989)는 약혼자인 영친왕 이은(李垠.1897~1970)과의 결혼을 앞둔 1919년 신년인 1월1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사흘 앞으로 다가온 같은 달 21일(화)자 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보인다. "오후 1시, …비보(悲報), 생각하지 못한 비보가 내 귀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경성에 계시는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께서 뇌일혈로 오전 1시35분에 발병해 오전 7시50분에 중태에 빠지셨다는 보고였다. 아아, 지금까지의 기쁨은 이내 슬픔으로 변했다." 이 사건으로 결혼식은 이듬해로 연기됐다. 하지만 이런 곡절을 거쳐 1919년 마지막날이 왔다. 내년 4월이면 연기된 결혼식을 올린다. 12월31일을 맞아 훗날의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는 이렇게 일기에 썼다.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즐거운 추억은 오직 전하께서 오셨을 때의 기억이다. 이것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상이다. 이것은 올해가 아니면 맛볼 수 없었다.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두 번, 세 번, 몇 번이라도 거듭해 가야 할 즐거움이다." 결혼을 준비하는 신부의 흥분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처럼 영친왕비가 1919년 1월1일부터 같은 해 12월31일까지 총 136일간 쓴 일기를 포함해 영친왕가(英親王家) 관련 희귀 자료 700여 점이 공개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8일 박물관에서 영친왕비 친필일기 1첩을 비롯해 편지 39통, 엽서 121매, 사진 514매와 기타 영친왕의 수첩, 다큐멘터리 필름 등을 기증받았다고 밝히면서, 그 중 일부 유물을 공개했다. 이들 유물은 2008년 12월 재일교포 하정웅(河正雄)씨가 주일본 한국대사관에 기증한 것들로 이후 문화재청은 이를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연구했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환수유물 중 영친왕비 일기에는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로서 설레는 감정과 약혼자 영친왕에 대한 연민, 결혼식을 나흘 앞두고 발생한 고종황제의 승하와 그에 따른 결혼 연기, 영친왕의 고국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등의 내용이 사실적으로 기록됐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이 친필일기가 유출된 경위는 확실치 않지만, 고궁박물관 정계옥 유물과학과장은 "이방자 여사 자서전을 보면, (자서전 출간을 위해) 일기를 인쇄소로 보냈는데 분실됐다는 내용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런 사정으로 나간 것이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영친왕가 편지 39통은 국문ㆍ국한문ㆍ일문 등으로 작성됐다. 이중 순종황제 비인 순정효황후가 영친왕 부부에게 안부를 물은 친필 한글편지는 특히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그 외 편지에는 1960년대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환국과 관련한 입국절차 등을 논의한 편지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이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등을 엿볼 수 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또한, 친지에거 온 안부 편지와 일본거주 조선왕실 사람들의 경제적 지원요청 편지 등도 포함됐다. 엽서 121매는 영친왕비 가족에게서 받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조선왕실의 덕혜옹주와 의친왕 아들인 이건ㆍ이우 및 부인들의 안부 문안 엽서 등으로 구성된다. 사진 자료 중에는 1909년 이토히로부미가 순종을 모시고 서북순행(西北巡行)하는 사진 63매를 비롯해 덕수궁 석조전과 정관헌 내부 등 궁궐을 배경으로 하는 사진, 그 당시 영친왕비의 주변 인물 사진 등이 포함됐다. 이중 순행할 때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걸린 사진과 덕수궁 석조전 내부에서 촬영된 사진은 역사적 현장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출생 및 성장, 결혼, 결혼 후의 한국방문과 유럽여행, 영친왕의 사망 후 영친왕비의 사회활동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8㎜영화 '흐르는 세월'도 공개됐다. 1978년 제작한 상영시간 20분짜리 이 필름은 영친왕이 이토 히로부미와 노는 장면을 비롯해 기존에 알려진 자료를 포함해 영친왕의 장례식 등의 장면을 "개인 소장을 위해 집안에서 편집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정계옥 과장은 덧붙였다. 나아가 이 필름에 보이는 1922년 순종황제 알현 때 착용한 복장은 200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265호로 일괄 지정된 것이다. 이 외에도 영친왕이 휴대한 포켓용 수첩도 환수유물에 포함됐다. 고궁박물관은 이들 환수유물에 대한 도록을 발간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2.19 23:02

조선왕조실록 복본 206권 내달 선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을 전주의 전통한지에 그대로 본뜬 복본(複本)이 내달 선보인다. 전주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추진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의 1차 사업을 내달 20일께 마무리 짓고 복본 206책(권)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라고 17일 밝혔다. 복본화사업은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 내 전주사고(全州史庫)에 보관됐던 태조에서 명종까지의 조선왕조실록 614책, 5만3천102면(쪽)의 원본(原本)과 똑같은 부본(副本)을 전주한지로 만드는 작업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록문화유산으로, 복본화가 시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시작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1차 사업은 이 가운데 태조에서 세종까지의 206책, 1만5천558쪽을 복본화하는 것으로, 현재 150책 분량이 완성됐으며 나머지 56책도 마무리단계에 있다. 복본화는 6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복제하고 나서 전통한지에 인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쓰인 한지는 조선시대와 같은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뒤 인쇄용지로 일부 가공된 것이며, 인쇄는 한지 전문 인쇄업체인 미래영상의 첨단 '덧씌움' 기술이 적용됐다. 전주시는 다음 달에 1차 사업이 끝나면 곧바로 2차 사업에 들어가 남은 408책을 복본화한다. 지난 2년여간의 노하우가 쌓여 연말이면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복본은 애초 조선왕조실록이 있었던 경기전 내 전주사고에 보관돼 교육용으로 쓰일 예정이다. 오길중 한지담당은 "전주한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한지를 산업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세계적인 기록물의 복본화도 시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2.18 23:02

'독도는 한국땅'..19세기 일본 지도 공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 1905년 이전에도 독도를 영유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부정하는 일본 지도가 여러 장 발견됐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17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일본에서 입수한 여러 장의 일본 지도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가 입수한 '대일본전도(大日本全圖)'는 일본 육군참모국이 1877년 제작한 것으로 일본의 영토 전체를 자세하게 나타냈지만 독도는 제외했다. 또 1899년 일본 육지측량부는 당시 나온 모든 일본 지도를 참고하고 새롭게 측량해 20만분의 1 크기의 지도를 만들었지만, 구역 일람표에는 독도가 나오지 않는다. 호사카 교수는 "이 지도를 보면 1905년 이전에도 독도를 영유했다고 하는 일본 정부의 주장은 허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호사카 교수가 공개한 '관허대일본사신전도(官許大日本四神全圖)'는 지도제작자 하시모토 교큐란사이가 1868년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제작한 것으로 한국의 동해안을 따라 '조선해(朝鮮海)', 일본 본토의 서측에는 '일본서해(日本西海)'로 표기했다. 그는 일본에서 '일본해'라는 명칭이 정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동해 해역의 명칭을 병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호사카 교수 소장 지도와 재단이 지난해 구입한 동해ㆍ독도 관련 지도 등 40점을 다음달 2~9일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하는 '동해ㆍ독도 고지도 전시회'에서 선보인다. 이 가운데 10점은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된다. 영국의 지리학자 존 세넥스가 1721년 제작한 인도ㆍ중국 지도와 1744년 영국 지도학자 에마뉴엘 보웬이 만든 지도에는 '동해(EASTERN SEA)'라는 표기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의 왕실지리학자 질 로베르 드 보곤디는 1750년 '일본왕국도'에서 한국 연안은 '한국해(MER DE COREE)'로 일본 연안은 '일본해(MER DU JAPON)'로 함께 표기했다. 프랑스 왕실지리학자 당빌이 1737년 제작한 '조선왕국전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중국어 발음으로 표시돼 있다.신길수 동북아역사재단 국제표기명칭대사는 "서양 고지도에 '동해(Eastern Sea)'라고 나오는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한반도의 동쪽이란 뜻을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개념"이라면서 "'동해(Eastern Sea)'라고 표기하다 한국을 인식하면서 '한국해(Sea of Korea)'를 사용했다. 이후 '일본해(Sea of Japan)' 명칭도 나타났다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해'라는 이름이 세계적으로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날 간담회에서 고지도 전시회 외에도 올해의 여러 주요 사업을 소개했다. 재단은 일본의 한국강제병합 100년을 재조명하기 위해 8월 24~26일에는 이태진(서울대), 와다 하루키(도쿄대) 등 한국과 일본, 중국 등지의 연구자를 초청해 '1910년 한국강제병합, 그 역사와 과제'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한다. 7월에는 병합 과정의 불법성을 규명하기 위한 조약자료집도 발간한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6월에는 한국전쟁이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피는 국제학술회의를 연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2.18 23:02

[도약! 2010전북문화] ⑩국립전주박물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이 전북과 전주의 역사성과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전시를 준비한다. 올해는 태조 어진 봉안 6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국립전주박물관은 특별전 '조선의 궁궐과 경기전'과 20주년 기념전'조선왕조와 전주'를 통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귀한 유물을 내놓는다.'조선의 궁궐과 경기전'은 일제 강점기 미공개 유리건판 사진인 경기전과 조경단을 비롯해 궁궐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09~1945년에 촬영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미공개 유리건판 사진 중 일부로 지난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도 이와 같은 전시를 열었다.'조선왕조와 전주' 역시 조선왕실의 본향인 전주를 재조명하는 전시다. '전주의 DNA'라고 볼 수 있는 태조어진을 비롯해 이성계의 발원 사리구 등 150여 점을 선보여 조선시대의 뿌리찾기를 시도한다.조선후기 3대 명필 중 하나인 창암 이삼만 탄생 240주년을 기념한 '창암 이삼만전'도 창암의 재조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창암 선생이 서예의 전수를 위해 출간한 교재 「화동서법」과 그 의미에 초점을 맞춘 전시. '창암체'를 개발해 추사에 비견될 정도로 심오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으나, 지방작가로만 대접 받았던 그의 서예사적 위치를 재평가하는 자리다.'전북의 역사문물전'은 올해 백제와 가야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는 장수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전시다. 장수 호덕리 가야 토기, 영락 12주년 왕지 등 가야의 흔적이 많이 남은 유물 150여 점이 한자리에 모두어진다.박물관이 새롭게 소장하게 된 유물을 소개하는 '신수 문화재전'도 열 예정. 조성왕실의 왕과 왕위계승·궁궐·회화·도자기 등을 소재로 한 토요명사특강과 조선왕실과 전주사고, 조선왕실과 태조어진 등을 주제로 다룬 국제 심포지엄도 10월 중에 열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2.18 23:02

[도약! 2010전북문화] "전북역사의 복원, 더욱 힘 쏟겠다"

"어떤 해도 쉽게 쉽게 넘어가는 해는 없었어요. 더더욱 올해는 국립전주박물관 20주년과 태조어진 봉안 600주년과도 맞물려 있어 기념비적인 사업을 해보고픈 욕심이 많았습니다. 조선왕실과 전주라는 지역성을 살리는 전시와 이와 관련된 국제적인 심포지엄도 마련합니다."김영원 국립전주박물관 관장(56)은 올해도 녹록치 않은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벽두부터 문화체험관 체험학습실을 개편하느라 진을 뺐던 그는 올해는 특별전 '조선의 궁궐과 경기전'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조경단이 일제시대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시게 되면 놀라게 되실 겁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호평 받았던 전시를 여기로 끌고 왔어요. 이런 귀한 전시에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단 생각 듭니다."지난해 백제에 가려진 마한의 역사를 재조명한 '마한, 숨쉬는 기록전'도 전국적,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전시였다. 하지만 김 관장은 "도민들의 반응은 무심했다"고 했다.그는 이어 "전주는 조선왕실이나 백제의 역사만 집중하는듯 보인다"며 "백제 보다 먼저 문명을 이루고, 찬란한 예술을 꽃피웠던 마한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앙에서 바라보는 위상에 비해 지역에서의 위치나 정서는 상대적으로 정체돼 있는 것 같다"며 이와 같은 다양한 기획 전시에 시민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한 홍보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전시라 하더라도 시민들이 찾지 않고, 공감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김 관장은 "박물관의 노력 뿐만 아니라 전주시나 전라북도의 관심도 필요하다"며 "전북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더욱 힘을 쏟겠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10.02.18 23:02

일제강점기 '구마모토 농장' 베일 벗는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 최대 규모의 농장이었던 '구마모토 농장(현 군산 간호대)'이 베일을 벗는다. 군산 간호대(총장 김순자)가 쌀 수탈의 상징적 존재였던 구마모토 농장의 운영 실태를 살필 수 있는 결산서류 및 영업보고서 등 75점을 최근 군산시에 기증하면서다.군산 간호대가 기증한 결산서류 및 영업보고서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농장 운영방식과 회계방법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수탈된 소출량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다. 또 당시 토지대장과 건물등기부 등본, 지적도, 재산목록, 신탁재산 인계서, 개량 경영관계 서류, 시험지 성적일람 등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일본의 대지주였던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1930-1940년 군산 개정에 설치한 농장을 중심으로 1개 부(당시 '군산시')와 5군('김제'.'정읍' 등), 26개 면을 관장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당시 1200여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대지를 소유하며 3000여 가구의 소작농을 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이러한 농지 관리와 쌀 수출을 도맡았던 구마모토 농장이 있었던 자리는 현재 군산 간호대의 부지로 사용되고 있다.이번에 기증된 75점에는 쌍천 이영춘 박사의 붓글씨, 일본식 옷장, 고서화, 사각 장식대, 중국의 당ㆍ송시대의 책자 40여권 등도 포함돼 있다. 이영춘 박사는 1935년 4월 구마모토 농장 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고서 10년 5개월 동안 소작인 21만여 명을 진료해 '한국판 슈바이처'로 불렸다군산시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군산 간호대가 기증한 유물 중에는 근대사 및 경제사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포함돼 있다"면서 "특히 일제시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였던 구마모토 농장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군산시는 기증자의 뜻에 따라 구마모토 농장과 관련된 자료는 시립박물관으로, 이영춘 박사와 관련된 자료는 이영춘 전시관으로 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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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성오
  • 2010.02.17 23:02

백제시대 목제품서 일본산 다수 확인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에서 발굴된 목제품에 수종(樹種)이 일본 열도에서만 자생하는 삼나무가 다수 사용된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이런 사실은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과 국립부여박물관 보존과학실이 부여 지역 백제시대 유적들인 능산리와 쌍북리, 그리고 궁남지 출토 목제품 16건 70점 중 53점에 대한 수종을 최근 분석한 결과 밝혀졌다. 분석 결과 이들 목제품 수종은 소나무류ㆍ상수리나무류ㆍ느티나무류ㆍ밤나무속ㆍ뽕나무속ㆍ버드나무류ㆍ비자나무ㆍ주목ㆍ삼나무ㆍ굴피나무ㆍ대추나무속ㆍ전나무속의 12가지로 나타났으며, 이중 일본 특산 수종인 삼나무는 전체 16%인 9점인 것으로 분석됐다. 삼나무로 제작한 목제품은 칼 모양인 것도 있으며, 그 외 기능을 짐작하기 어려운 다른 가공 제품도 포함됐다. 삼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일본 특산 수종으로 가공과 공작이 쉬워 일본에서는 건축용재를 비롯해 기구, 가구, 선박 등 그 이용범위가 넓으며 이런 삼나무 목제품이 검출된 데서 당시 백제와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존과학팀은 설명했다. 나아가 역시 일본 특산일 가능성이 있는 주목과 주목속으로 제작한 가공목제류 1점도 확인됐다. 주목은 중국과 일본의 혼카이도ㆍ혼슈ㆍ시코쿠ㆍ큐수 등지에 분포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북쪽 추운 곳에서 자란다. 이밖에 주목과 비자나무속, 전나무속으로 만든 목제품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나무가) 자라는 곳이 한정되어 있어 나라간 교류가 있었거나 삼나무와 함께 일본에서 들여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존과학팀은 덧붙였다. 백제시대 목제류 출토 유물 중 무령왕릉 관재(棺材)가 일본 특산 금송(金松)으로 드러났는가 하면, 무령왕비 두침(頭枕.나무베개)은 일본 특산일 가능성이 큰 주목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궁남지 출토 목간 1점 또한 일본 특산 삼나무가 원료인 것으로 판명됐다. 이같은 분석 결과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지인 '박물관 보존과학' 2009년 12월호(통권 10집)에 수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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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2.17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23)문징명(文徵明)의 행서시권(行書詩卷)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은 명대의 서화가로서 초명이 벽(壁) 또는 벽(璧)이었으며, 자는 징명(徵明)이었으나 후에 징중(徵仲)으로 고쳤다. 호는 형산(衡山)이며, 장주(長洲 : 蘇州) 사람이다. 온주지부(溫州知府) 아버지 문림(文林)의 주선에 의하여 시문을 오관(吳寬), 그림을 심주(沈周), 글씨를 이응정(李應禎)에게 배웠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아버지의 친구로서 당시 뛰어난 명사였다. 이후 징명은 절차탁마하여 축윤명(祝允明), 당인(唐寅), 서정경(徐楨卿)과 더불어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로 일컬어졌다. 처음에는 관로에 뜻을 두고 26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아홉 번이나 낙제함으로써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 한때 시서화에 뛰어나 한림대조(翰林待詔)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3년 만에 사직, 귀향하여 9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야의 인물로 활동하며 소주예원을 주도하였다.징명의 중자(中子)인 문가(文嘉)의 「선군행략(先君行略)」에 의하면, "아버지는 젊었을 때 글씨를 잘 못썼다. 그러나 힘써 배우며 송 원시대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아 절차탁마하여 필의를 깨달았고, 이후에는 진·당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았다. 소해는 왕희지의 황정경(黃庭經)과 악의론(樂毅論)을 따랐으며, 예서는 종요(鍾繇)를 모법으로 삼아 일세에 독보적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년에 이르러 승두체에 뛰어났으며, 심주(沈周)를 모방하여 황정견 풍의 대서를 잘 썼다. 시문집으로 「보전집(甫田集)」이 있으며, 「정운관첩(停雲館帖)」에 그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의 장자 문팽(文彭)은 가학을 이어받아 각 서체에 두루 능하여 아버지와 비교될 정도였으며, 특히 전각의 비조로 이름이 높다. 북송대 소순, 소식, 소철의 소씨(蘇氏) 삼부자가 출현하여 문단을 풍미한 것처럼 명대의 문징명, 문팽, 문가의 문씨(文氏) 삼부자가 출현하여 서화각으로 일세를 풍미한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문징명의 작품 중에서 76세 때 행초서로 쓴 「천자문」이 일품이다. 「명산장(名山藏)」 권95에 의하면, 그가 소주부학(蘇州府學)의 학생신분이었을 때 매일 천자문을 열 번씩 임사하며 글씨를 연마하였고, 이후에도 각 서체로 천자문을 계속 쓰며 서법을 수련하였다고 한다. 집자성교서와 지영의 천자문의 필법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유려한 행초서로 좋은 서학자료이다.여기에 소개하는 행서시권은 권미의 관기에 '丁巳春三月卄日徵明書'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정(嘉靖) 36년(1557) 징명의 나이 88세 때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미수(米壽)의 글씨라지만 그 기개와 골기가 결코 쇠하지 않고 여전히 굳건한 필력을 구사하고 있는 징명의 만년 수작이다. 필의는 황정견과 심주의 서풍을 따르고 있지만 황풍이 강하며, 뛰어난 필력과 결구을 구사하고 있어 송대 이래 황산곡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그 내용은 이전에 호구(虎丘)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완상하며 읊었던 칠언율시 4수이다. 그 필치와 내용이 흡사 황정견의 송풍각 시권을 보는 듯하며, 같은 글자도 빈출하여 좋은 대비를 이룬다. 송풍각 시권과 이 행서 시권을 번갈아 임서해보면 그 취의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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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2.17 23:02

고전 번역으로 학문 지형 바꾼다

"개인 문집 등 일반고전은 연간 20책 정도 번역하고 있는데 이를 연간 120책으로 늘린다는 것은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번역물이 나오면 관련 분야의 연구가 확산되고 대중적 활용이 많이 늘어날 것입니다."한문희 한국고전번역원 기획사업팀장은 번역원이 100년 이상 걸릴 주요 한문고전의 번역을 30년 안에 마무리하겠다며 최근 공고한 '권역별 거점연구소 협동번역사업'에 대해 15일 이같이 평가했다. 고전 번역은 고단한 작업이다. 본격적인 번역에 앞서 원문의 오류를 바로잡아 정본을 확정하고, 끊어 읽기가 없는 한문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도록 마침표를 찍거나 인명, 지명 등을 기호로 표시하는 작업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개인 문집이나 철학, 역사, 과학서 등 일반고전은 연간 20책을 번역하는 수준인데 3천700여책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라 이대로라면 100년이 훨씬 넘게 걸린다. ◆ 거점 연구소 20곳, 연간 120책 번역고전번역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이기 위해 고전번역원은 이제까지 자체적으로 해온 번역을 전국 각 지역에서 선정한 번역 거점 연구소에 맡겨 장기 계획으로 번역을 추진한다는 구상이다. 이 사업에서 전국은 수도권, 중부권(강원,충청), 영남권, 호남권(제주 포함)의 4개 권역으로 나눈다. 올해는 21억원을 들여 전국에서 중형 연구소 6곳과 소형 연구소 4곳을 선정해 번역서 48책을 펴낼 계획이며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2012년부터는 20개 거점 연구소에서 140명의 고전 번역 인력을 확보해 연간 120책을 번역할 계획이다. 이같은 추세라면 미번역 일반고전은 30년 정도면 번역이 끝나게 된다. 거점 연구소별로 4~7명의 연구인력이 번역을 전담하게 된다. 필요할 때 지역의 원로 한학자에게 자문을 하거나 대학 고전 관련 학과와 연계할 수도 있다. 유학자 등이 남긴 개인 문집이 주 번역대상인데 문집을 쓴 인물의 출신 지역 연구소에서 번역을 담당하게 된다. 고전번역원은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 전국적으로 고전 번역 인력층을 탄탄하게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대중적 고전 활용 대폭 늘 것한문희 팀장은 번역물이 학술 연구와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1971년 시작해 1993년에야 번역이 끝난 '조선왕조실록'의 예를 들었다. 그는 "실록에는 500년간의 천문기상 정보가 정확하게 기록돼 있는데 실록이 번역되자 천문ㆍ기상 연구 결과물이 대폭 늘어났다"고 말했다. 또 '허준', '대장금', '왕의 남자' 등 실록에 짤막하게 언급된 인물에서 모티브를 얻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도 쏟아져 나왔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인 문집은 실록보다 더 대단하다.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면서 "문집을 원문으로 보는 사람들은 전문 연구자로 극히 제한돼 있는데 번역이 되면 연구 성과도 늘어나고 문화계 종사자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기생 출신 거상으로 흉년에 사재를 내놓아 제주도 백성을 구한 김만덕에 대해 실록에는 3줄 정도로 짧게 적혀있지만 어느 선비는 자신의 문집에 금강산에서 만덕을 본 사실을 남기고 있어 더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소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고전번역원은 번역이 끝날 때마다 평가와 검증 작업을 거쳐 책을 출간한다. 또 책 출간 이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일반인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신승운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장은 고전번역원의 사업안에 대해 "기존 번역 인력의 수준을 높이고 새로운 인력을 기르는 계기가 될 것"이라면서 "예산이 끊기거나 하면 사업이 예정대로 안 될 수도 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예산을 일부 부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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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합
  • 2010.02.16 23:02

[도약! 2010전북문화] ⑧전주전통문화센터

전주전통문화센터(관장 김민영)가 '1문화재 1지킴이' 호남권 활동을 관할하게 됐다.'1문화재 1지킴이'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꾸고 지켜나가기 위한 문화재 보호 자원봉사활동. 개인·가족·기업·단체 단위로 참여할 수 있다. 현재 전북에서는 전주문화재지킴이 시민운동21과 익산가정사랑학교, 남원문화재지킴이 등이 활동하고 있다. 전통문화센터는 27일 오후 2시 '1문화재 1지킴이' 행사를 연다. 문화재 지킴이 뿐만 아니라 각 시·군 문화재 담당 공무원 등 200여명을 초청해 '1문화재 1지킴이' 활동을 홍보하고 문화재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전라북도·전주시와 함께 3월 아·태무형문화유산전당 기공식에 맞춰 개최하는 '아·태 무형문화축제'도 센터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행사다. 이번 축제에서 센터는 국내 무형문화재 초청공연을 기획하고 세계무형문화유산 사진전을 전주로 유치할 계획이다.전통문화센터 대표 프로그램인 '해설이 있는 판소리'는 야외 진행 등으로 변화를 시도한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단오제 등에서 전통혼례신행길놀이와 수문장교대의식 등을 펼쳐 지역축제와 연계하는 노력도 이어갈 예정이다. 전국대학생마당놀이축제와 무형문화재 초청공연 등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 행사도 계속된다.전통음식관 한벽루는 4월쯤 메뉴를 정비한다. 음식관을 활성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주의 대표적인 향토음식과 계절음식을 개발하고 음식관 고문도 위촉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2.16 23:02

[도약! 2010전북문화] "공익성 강화 공연행사 확대"

"지역사회와 시민들 속에 전통문화센터가 분명하게 설 수 있는 해로 만들겠습니다. 센터를 맡고 있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을 단순히 외부 기관으로만 보는 시각들도 있지만, 공익성 있는 공연과 행사를 확대하면서 문화재단 산하의 공공기관으로서 이미지를 높여가겠습니다."김민영 전주전통문화센터 관장은 "올해 역점 추진과제들을 '찾아가는 전통문화사업'과 '함께하는 전통문화사업', '감동을 주는 전통문화사업'으로 나누었다"며 "기존 사업의 공익성을 강화하고 전주시와의 파트너십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2013년에 아·태무형문화유산전당이 완공되면 한옥마을 일대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3월에 열리는 '아·태 무형문화축제'가 전당 건립을 알리는 의미있는 자리인 만큼 센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자 합니다."김관장은 "'아·태 무형문화축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만큼 올해 새로운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라며 "'오감만족 비빔판'이나 '소리마을을 지켜라' 등 그동안 센터가 자체적으로 제작해 온 공연에 대한 마케팅을 강화하겠다"고 설명했다."문화재청이 주관하던 '1문화재 1지킴이' 활동을 지난해 하반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맡게 되면서 센터가 호남권 관할 센터가 됐습니다. '1문화재 1지킴이' 행사 등을 통해 전통문화에 대한 의식과 애정을 높여나가겠습니다."김관장은 "지난해 센터가 진행한 걷기 행사는 코스에 한옥마을 둘레길 안내표지판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며 "올해는 '한옥마을 자전거여행'와 한옥마을 주민들을 위한 잔치 등을 새롭게 시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2.16 23:02

고전번역원 "한문고전 번역 30년안에 끝장"

지금의 번역 추세대로라면 100년 이상이 걸린다는 한국의 한문고전을 한 세대 안에 끝낸다?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이 약 4천 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미번역 한문고전(주로 문집)을 30년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청사진을 들고나왔다. 11일 번역원이 발표한 고전번역 프로젝트에 의하면, 이를 위해 지금까지는 주로 수도권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치중된 고전 번역을 앞으로는 전국 각 지역의 번역 거점 연구소를 선정해 지역 원로 한학자와 고전 관련 학과 등과 연계해 번역하는 '권역별 거점 연구소 협동번역사업'을 시작한다. 이 사업에서 전국은 수도권, 중부권(강원,충청), 영남권, 호남권(제주 포함)의 4개 권역으로 나눈다. 1차 연도인 올해는 21억원을 들여 전국에서 중형 연구소 6곳과 소형 연구소 4곳을 선정해 번역서 48책을 펴낼 계획이다. 예산과 지원 규모 또한 점차 늘려 2012년에는 20개 거점 연구소에서 140명의 고전 번역 인력을 확보해 연간 120책의 번역 성과를 내게 된다. 원전 정리가 이뤄진 '한국문집총간'(정편)에 수록된 개인 문집 가운데 아직 번역되지 않은 문집 312종을 중심으로 번역을 우선 추진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문집에다 승정원일기나 일성록 등 국고 문헌(국가기록물)까지 더한다 해도 주요한 한국의 한문고전은 30년 안에 다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 번역원 측 설명이다. 번역원은 나아가 이런 사업 역량 강화를 위해 '고전강독 클러스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지도교수와 학생들의 고전강독 모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번역원은 다음 달 초까지 이번 사업 신청을 받아 심사를 거쳐 4월 초에 대상 연구소를 확정할 예정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10.02.12 23:02

[사람] 홍춘수 한지장 기능보유자,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닥나무 껍질처럼 거칠어진 손. 어려서부터 해온 일이라 다른 일은 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전통한지를 지켜가는 자부심이 있다.11일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에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로 승격된 홍춘수씨(68·임실군 청웅면 구고리). 닥나무 껍질에서 한 장의 한지를 만들어 내기까지 백번의 손길이 필요해 '백지'라고도 불리는 전통한지를 그는 아버지 고 홍순성씨의 뒤를 이어 45년째 전통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완주에서 태어난 홍씨는 열두살 때 처음 종이 뜨는 일을 접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전주시 서서학동의 종이 공장에서 일을 배우면서 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일은 생업이 됐고, 이제는 큰사위 노정훈씨가 홍씨 뒤를 이으면서 가업이 됐다.홍씨가 처음 전통한지를 만들 때만 해도 일상 생활에서 한지가 널리 쓰일 때였다. 홍씨는 1963년 임실군 청웅면에 청웅한지를 설립, 본격적으로 한지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색깔과 두께, 질감을 각기 달리한 맞춤형 한지를 만들어 팔았으며, 반응도 좋았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공장은 활기를 띠었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기계로 만든 한지가 등장하고 중국산·일본산 종이가 들어오면서 전통한지 산업이 쇄락하기 시작했다.하지만, 한지는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가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공 재료나 화학 약품을 섞어 사용하거나 기계를 대지 않았다. 오히려 천연 재료를 활용해 한지를 다양화하는 데 몰두했다. 황토를 반죽에 섞어 만든 벽지용 '황토지'와 단풍잎이나 김을 무늬로 끼워넣은 '단풍지'나 '김종이' 등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1998년에는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및 노동부 기능전승자에 선정됐으며, 2006년 전북도지정 무형문화재가 됐다.문화재청은 "홍춘수씨는 특히 전통한지 제조 기술을 전승, 우수한 종이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돼 한지장 기능 보유자로 인정하게 됐다"며 "한지장의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이 그동안 어려운 여건에서도 오랜 기간 전승활동에 전념해 온 전승자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은 물론, 전승환경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2.12 23:02

슬기, 의젓함, 익살…우리 민화속 호랑이 모습은

나는 "저런 호랭이나 물어갈 놈"이란 욕을 예사로 들으며 자랐다."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거나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또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등 호랑이와 관련된 속담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였다. 그러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야 이 사람아" 하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우리는 호랑이와 늘 함께한 시절이 있었다.우리나라는 국토의 대부분이 산이고, 그 산에는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그 산에는 호랑이가 아주 많이 살고 있어서 '호랑이의 나라'라 하기도 했단다. 우리 조상들에게는 산 속에서나 동네에서 만나는 맹수 중의 맹수가 바로 호랑이였다. 이런 호랑이가 사람이나 가축을 잡아먹기 때문에 퇴치해야 할 포악한 맹수로서 호환을 당하기도 했다.이렇게 무서운 호랑이를 우리는 노하지 않도록 산을 지키는 산신으로 정성껏 모셨다. 그래서 산신각(山神閣)에는 소나무 밑에 수염이 하얀 산신이 있고 그 옆에 호랑이가 누워있는 그림이 모셔져 있다. 호랑이가 산신으로, 또 산신이 호랑이로 그려지기도 했다.호랑이에 대한 이런 두려움이 오히려 그 무서움을 역으로 이용해 사람의 편에 서서 삿된 악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존재로 여기게 되기도 했다. 또한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야기를 통해 친근함과 정겨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담뱃대를 문 호랑이에게 토끼가 불을 붙여주는 그림에서는 익살스럽고 귀여운 모습으로 해학의 극치를 보기도 했다.민화에는 일반 서민들의 정서와 심성이 담겨있다. 소박한 익살과 건강한 풍자와 해학이 그 속에 담겨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사납고 무서운 존재일 지라도, 그걸 두려움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유머와 여유를 가지고 새롭게 대하는 시각을 우리 조상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 지혜로움의 시각적 표현이 민화이다.호랑이 민화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주제는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이다. 벽사를 염원하여 호랑이를 삼재 부적으로 그려 문지방 위나 벽에 붙여두기도 했다. 또 지금도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집의 솟을 대문에 호랑이 호(虎)자와 용(龍)자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축삼재(虎逐三災), 용수오복(龍輸五福) 즉 호랑이는 풍(風), 수(水), 화(火) 세 가지 재앙 즉 삼재를 물리쳐 주고, 용은 오복을 가져다준다는 표현에서 앞 글자만 따서 붙여놓은 것이다.민화 중에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 '까치 호랑이'이다.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 그려져 쉽게 "까치 호랑이 그림"이라 부르는데, 호랑이와 까치 모두 상서로운 존재이므로 함께 배치함으로써 길상(吉祥)의 의미를 더하게 하는 표현이다.까치 호랑이 그림은 보통 까치 한두 마리가 소나무에 앉아 아래에 있는 호랑이에게 무슨 얘기인가를 전하고 있는 것 같고, 호랑이는 그 까치를 쳐다보고 있거나 앞을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부터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과 함께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뜻으로, 호랑이는 문채의 화려함으로 길상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이 둘을 함께 그린 것은 생활 속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염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또 까치 호랑이 민화는 본래 새해를 맞이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표현한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희보(喜報)라는 의미의 길상적 표현으로 까치와 표범을 그렸다. 그것은 표범의 한자 발음과 까치의 상징성 때문이다. 중국어에서 표범의 표(豹) 발음이 보답한다는 뜻의 보(報)와 발음이 같다고 한다. 그래서 표범이 보(報)를 뜻하고, 까치는 옛날부터 상서로움과 기쁨을 전해 주어 희작(喜鵲)으로 불렀다. 그래서 한 화면에 표범과 까치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즐거움으로 보답한다.'는 희보(喜報)라는 길상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표범보다 호랑이를 그린 경우가 더 많다. 호랑이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동물로 설화나 옛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은혜를 베풀면 반드시 그 이상의 보답을 한다는 영물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역사만큼 오랫동안 우리와 애환을 함께 해왔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지녔던 정서나 생각이 호랑이를 통해서 투영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호랑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서와 생각을 읽을 수도 있다. 호랑이는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맹수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를 악에서 지켜주는 벽사의 존재이기도 했다.이런 호랑이에 대한 관념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것이 호랑이 그림이다. 누가 그렸는지도 알 수 없는 호랑이가 그려진 민화를 통해 우리 조상들의 염원과 소망이 무엇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고, 그들의 정서를 읽어 낼 수 있다.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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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10.02.12 23:02

"문화예술분야 특수성 고려해줘야"

사회적기업이 문화예술분야에서도 일자리 창출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정작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유료관객 확보가 어려운 현실이나 작품 한 편을 위해 단원들이 장기간 호흡을 맞춰야 하는 문화예술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해 줘야 한다는 것.10일 오후 전북도청 중회의실에서 열린 전라북도 정책토론회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에 날개를 날다'에 참석한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인건비만 지원받아 작품을 만들고 지원금의 20%, 사업계획의 50%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며 "특히 지역에서 공연예술로 수익을 낸다는 것은 아직은 어렵다"고 토로했다.또한 사회적기업을 통해 지원할 수 있는 인력이 기존 단원들이 아닌, 신규 인력이란 점에 대한 불만도 컸다.이도현 극단 작은소동 대표는 "문화예술분야에서 한 작품을 올리려면 단원들간의 호흡이 굉장히 중요한데, 짧은 시간 신규 단원들을 확보해 공연을 올린다면 아무래도 작품의 완성도면에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걸 전문예술법인 푸른문화 정책실장은 "문화예술분야에서 단체 운영이 가족이나 동료의 개념에서 이뤄져 왔다면, 새로 합류하게 되는 인력들은 직장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기존 인력과 새로운 인력이 신뢰를 구축하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라고 덧붙였다.푸른문화는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운영되다 지난해 사회적기업으로 승인받는 데 실패했다. 장 실장은 "사회적기업은 운영 개념에서 경영 개념으로의 전환"이라며 "문화예술단체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단초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는 사회적기업이 날개가 될 수 있지만, 한계와 과제는 분명이 있다"고 말했다. 장 실장은 특히 지원이 종료된 후와 지속적으로 발전이 가능한 사업 모델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서성원 사회적기업지원 전북연구센터 사무국장은 "사회적기업은 비영리조직과 영리기업의 중간형태로,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영업활동을 통해 수익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서 국장은 "예비 사회적기업 일자리창출사업은 사회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수익성 등이 부족해 시장에서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는 문화, 복지, 환경 등의 분야에서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라며 "사회적 목적 실현과 수익창출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현재 전라북도 문화예술분야의 사회적기업은 이음(대표 김병수) 하나 뿐. 그러나 이음의 경우 공연 이외에도 농촌컨설팅 등을 겸하고 있어 순수 문화예술분야로는 볼 수 없다. 지난해 전라북도에서는 6개 단체가 문화예술분야 예비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돼 사업을 진행하고 있거나 완료했으며, 현재 전통예술원 모악을 비롯해 7개 단체가 전라북도 예비 사회적기업 추가 발굴 대상으로 선정됐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10.02.11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22)조맹부의 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

흔히 중국정치를 일치일란의 순환론적 역사로 귀결하는데, 서예도 이와 비슷하여 전통과 혁신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순환하였다. 왕희지에 의해 완성된 서예의 전형이 이후 남북으로 분화되며 새로운 서예미를 추구하다가 초당의 삼대가에 의해 새로운 전형주의가 확립되었다. 구양순을 비롯한 초당의 서가들이 추구한 전형주의는 당 중기 안진경의 출현으로 혁신적인 서풍으로 선회하였고, 이는 북송 사대가에게 계승되었다. 북송 사대가는 신의(新意)의 창출을 기치로 내걸고 각기 개성적인 필치를 보이며 서예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원대에 들어서면서 송왕조 출신의 조맹부가 출현하여 복고주의를 주장함으로써 다시 왕희지의 전형이 부활되었다. 이러한 순환론적 역사는 시대를 인식하는 선각자들의 우환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자(朱子)가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천운의 순환을 운운한 것과 청말민국초의 대학자 양계초(梁啓超)가 청대의 학술을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불교사상에 빗대어 순환론 즉 사조(思潮)를 설명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조맹부(1254~1322)는 자가 자앙(子昻)이며, 호는 송설(松雪)이다. 송태조의 아들 진왕 조덕방(秦王趙德芳)의 후예였는데, 송이 멸망한 후 정거부(程距夫)의 추천으로 원왕조에 출사하여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한림원학사 승지(承旨)에까지 영달하였으나 출처진퇴에 대해서는 눈총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서화에 대한 천부적인 소양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가 표방한 복고주의는 중국 서예사를 돌려놓을 만큼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의 복고주의는 송의 귀족문화와 부합하여 큰 동력을 얻어 몽고족이 지배한 원왕조에서 꽃을 피웠다. 그의 서는 삼변(三變)으로 논해지는데 왕희지의 서풍을 추구한 송 고종의 서를 배운 것, 1310년 독고장노(獨孤長老)로부터 정무난정(定武蘭亭)을 얻고 왕희지의 고법을 추구한 것, 그리고 말년에 당의 서가 이옹과 유공권의 필법을 가미한 것이 그것이다. 필력이 굳세고 신채를 발하였다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용숙(庸熟)하고 평판(平板) 같다는 혹평도 있다. 서평을 토대로 그의 글씨를 검토해보면 전형주의에 의거하여 그 형태적인 면에서 완정함을 보이지만 변화가 부족한 점을 지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북송사대가의 신선함과 호탕함에 견주어 본다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으나, 그의 전형적인 서는 시대적 미감을 전형으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의식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형의 부흥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조맹부의 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은 그가 얻은 정무난정본에 대한 발문으로 복고주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학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필법이고 둘째는 자형이다. 필법이 정밀하지 못하면 비록 잘 썼다할지라도 눈에 거슬리며, 자형이 묘하지 않으면 비록 익숙하게 썼다할지라도 생경하다. 학서에서 이것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서를 말할 수 있다." "서법은 용필(用筆)을 최상으로 삼으며 결자(結字) 역시 치밀해야 한다. 결자는 시대마다 다르지만 용필은 천고에 바뀌지 않는다."훗날 명대의 동기창(董其昌)은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다고 자부하였지만 조맹부의 소해(小楷)는 결코 넘볼 수 없는 재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고려 말 충선왕의 만권당(萬卷堂) 교유에 조맹부가 관련되어 있으며, 송설체의 수용은 조선조 서예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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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2.1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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