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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겸(1829~1884)의 자는 익보(益甫)였으나 후에 휘숙으로 고쳤으며, 호는 냉군(冷君), 철삼(鐵三), 매암(梅庵), 무민(無悶) 등이 있다. 본래 소흥(紹興) 회계사람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점차 가세가 기울었고, 30세를 전후하여 장발적의 대란이 미치자 고향을 떠나 온주(溫州)와 서안(瑞安), 복주(福州) 등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부인을 잃었는데 그때부터 자신을 비암 또는 사비옹(思悲翁)이라 호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에는 북경으로 올라가 세 차례나 회시를 치렀으나 낙방, 동치 11년(1871) 강서성에 초빙되어 강서통지(江西通志) 편집에 종사하면서부터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남성현(南城縣) 지현(知縣)으로 재직하다 병사하였다.글씨는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으나 후에 북비를 공부하였고 예서는 등석여를 사사하였다고 한다. 그 역시 비학파의 영향으로 북비를 탐구하고 은주시대 금문을 연구하여 「육조별자기(六朝別字記)」를 저술하고 「환우방비록」을 보충하는 등 금석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림은 진도부와 이선을 사숙하였는데 화훼에서 발군하여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조지겸의 서품을 보면 한눈에 북비의 영향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고법을 답습하지 않고 독특한 개성으로 새로운 서예세계를 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장맹룡비(張猛龍碑), 가사백비(賈思伯碑), 정문공비(鄭文公碑), 용문조상기(龍門造像記) 등의 북비에서 필력을 얻어 여러 서체에 적용하였다. 특히 정도소의 글씨를 매우 숭상하여 "北碑書無過熒鄭僖伯"이라 하였다.비학적 입장에서 살펴보면, 북비를 탐구하여 서법에 적용한 이로 앞서 소개한 등석여와 금농(金農), 서삼경(徐三庚)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북비에서 득력하였지만 그 표현양상은 제각기 다르다. 등석여는 전서와 예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금농은 양주팔괴의 한 사람으로 예서를 평필처럼 써서 칠서(漆書)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로 개성적인 필치를 선보였다. 조지겸은 등석여의 서를 배웠으나 북비를 탐구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필법을 표출하였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전서와 예서에서 역필을 강조하지 않고 순필로 들어가 필획의 절주를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그로 인하여 북비에서 엿보이는 팔분의 특징이 해서에서도 적용되어 나타나며 독특한 풍격을 이룬다. 전서에서도 횡획을 순필로 시작하여 율동의 미를 강조하는 한편, 수획에서는 교봉(絞鋒)에 의한 탄력 있는 필획을 구사하며 강하고 예리하게 수필(收筆)함으로써 우아함을 드러내 보였다. 이를 대비시켜 본다면, 역필을 강조한 등석여의 투박함과 자태의 운치를 추구한 서삼경의 섬세함을 다 아우른 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전각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는데 전서의 개성적인 특징은 곧 전각에서 다시 재현된다.진진렴(陳振濂)은 하소기의 해서와 행초서가 위삼안칠(魏三顔七)이라면 조지겸은 위칠안삼(魏七顔三)이라고 평하였는데 흥미롭다. 이로서 조지겸의 해서와 행초서를 일언이폐지하여 안저위면(顔底魏面)이라 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만청의 개성적인 서화가들을 비교하여 등석여의 혼후(渾厚), 이병수(伊秉綬)의 웅장(雄壯), 하소기의 고졸(古拙)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조지겸은 이들과 다른 또 하나의 파를 만들어 자성일가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서학계에 휘몰아쳤던 비학의 영향권에서 뚜렷하게 독자적 행보를 보인 여러 서가들의 특징을 잡아내는 것도 좋은 공부라 생각한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하소기(1799-1873)의 자는 자정(子貞), 호는 동주(東洲) 원수이며, 호남성 도주(道州) 사람이다. 집 앞에 동주산이 있어 이를 취하여 호로 삼았고, 한나라의 명궁 이광(李廣) 장군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었다는 고사를 취하여 활을 당기듯 팔뚝을 들고 써야 한다는 현비직필(懸臂直筆)의 집필법을 주장하며 스스로를 원비옹(猿臂翁) 또는 축약하여 원수라고 지칭하였다. 호부상서 하릉한(何凌漢)의 장자로 소업(昭業)과는 쌍둥이였다. 평생 대련작품을 많이 남겨 서련성수(書聯聖手)라는 칭찬을 받았다.20대 후반기에 포세신(包世臣) 장백생(蔣伯生) 등과 교유하며 금석연구에 열중, 마침내 장흑녀묘지(張黑女墓誌) 구탁본과 설직(薛稷)의 신행선사비(信行禪師碑) 송탁본을 수중에 넣었다. 37세에 호남의 향시의 합격하고 익년에 북경의 회시에 급제하여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에 편입되어 3년 간 연수하였는데 그 때 완원(阮元)의 교습을 받았다. 향시의 시험관이었던 오영광(吳榮光)과 완원은 모두 비학자들로서 하소기의 서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소기는 두 선사를 통하여 금석학의 세례를 받고 비탁본을 널리 수집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동주초당금석발(東洲草堂金石跋)」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수장했던 명품으로는 한의 장천비(張遷碑), 북위의 장흑녀묘지, 당 설직의 신행선사비, 이옹의 법화사비(法華寺碑), 안진경의 이원정비(李元靖碑)를 비롯하여 삼고와 마고선단기, 송 소식의 금강경 등이었다. 하소기는 천하의 보배였던 장흑녀묘지 탁본의 발문에서 "매번 임서할 때마다 반드시 회완(回腕)으로 팔뚝을 높이 쳐들고 몸의 힘이 붓에 통하도록 글씨를 썼는데 반도 못 가서 옷이 땀으로 흥건했다."고 회고하며 현완법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서력에 관해서는 법화사비 발문에서 밝힌 것처럼, 40년 가까이 안진경과 이옹의 서법에 경도되었다가 중년 이후에는 북비로 눈을 돌리고, 만년에는 한비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밝혔다. 이는 당시 유행한 비학의 영향이다. 기본적으로 완원의 남북서파론과 북비남첩론을 계승하며 북파의 연원을 좇아 서법을 탐구하였다. 이로 인하여 하소기의 서는 안진경의 쟁좌위고와 장천비 및 석문송의 필의가 강하게 풍긴다.여기에 소개하는 「임장천비」는 말 그대로 한나라의 팔분 중에서 양강지미(陽剛之美)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장천비 탁본을 입수하여 임서한 것이다. 청대 후반기로 갈수록 금석학과 비학의 흥행과 맞물려 고비에서 서의 법을 찾으려는 경향이 농후해졌는데 하소기도 이에 다름 아니었다. 하소기는 임서의 말미에 같은 글씨체로 "壬戌七月十九六十通竟"이라 기년을 밝히고, 그 밑에 소자로 4행에 걸쳐 "平齋仁弟苦索拙書適臨此本竟則以寄之發三千里外一笑歎也何紹基記於長沙化龍池寓"라고 낙관하였다. 임술년은 동치(同治) 원년 즉 1862년에 해당하며 하소기의 나이 64세 때이다. '六十通竟'은 60번째 전임하였다는 말로 이해되며, 한편 그가 고법의 탐구에 얼마나 치력하였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천비만 모두 100통을 임서했다고 한다. 당시 하소기는 서예적 명성이 있어 그의 글씨를 구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낙관에 보이는 평재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장천비를 임서한 후 자신의 글씨를 애타게 찾는 삼천리 밖의 평재에게 보낸 뒤 기분 좋게 너털웃음을 짓는 하소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호남성 장사(長沙)의 화룡지(化龍池)는 하소기가 관직에서 물러나 함풍(咸豊) 11년(1861)부터 거처하던 성남서원(城南書院)이 있는 곳이다. 청대 비학의 학풍을 계승하여 동경의 석묵이 모두 나의 스승(東京石墨皆吾師)이라고 외쳤던 하소기는 분명 자립문호(自立門戶)와 자성일가(自成一家)의 꿈을 이룬 걸출한 서가였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청나라 건륭·가경시대에 활동한 비학파 서예가 중에 등석여(1743~1805)가 있다. 본명은 염(琰)이며 자는 석여(石如)였으나 인종의 휘가 옹염이었으므로 피휘하여 자를 이름자로 사용하고, 다시 자를 완백(頑伯)이라 하였다. 환공산 출신으로 '환'자를 파자하여 완백산인(完白山人)이라 호하였다. 글씨는 물론 전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등파(鄧派)의 시조로 지칭된다.수많은 필적 중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전서로 쓴 백씨초당기(白氏草堂記)가 있고, 고전(古篆)을 섞어 쓴 음부경(陰符經), 예서작 오도손시평(敖陶孫詩評) 등이 있다. 초기의 전서작들은 당나라 이양빙의 필적을 배워 그의 필의가 담긴 완정한 결자와 원숙한 용필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전서작들은 비교적 후기의 작품으로 비학(碑學)을 토대로 연찬한 등석여만의 개성미가 돋보인다. 예서작 역시 초기에는 한비 중 조전비의 필의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나, 후기의 예서는 전서의 자형이 가미된 특유의 형태에 고졸미가 배가되었다.공부와 관련하여 서법에 능숙한 사람이 변화의 묘와 고졸한 필의를 위하여 일견 잠심할 필요가 있으나, 초학자의 경우 등석여의 서품으로 입문을 삼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서의 법은 이미 전형으로 정평이 난 고전적인 자료를 통하여 터득하는 것이 순서이고, 그것을 토대로 서의 예술적 발양을 꿈꾸고자 할 경우 등석여의 경우는 하나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청대에 유행한 비학파들이 고비(古碑)를 통하여 법을 발견하려 했던 이유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등석여가 당의 이양빙을 모범으로 삼아 진력하다가 태산의 각석과 고전에 눈을 돌린 까닭을 상기해야 한다. 그의 서품을 일별하면 전서에 대한 편력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비학파 서가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시기의 추사가 학서의 문경을 제시하며 소원(溯源)을 강조한 것도 같은 경우이다. 일언이폐지하여 학서의 경우에는 전형적인 고전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고, 창작의 경우에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자학적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서는 단순히 필묵을 통하여 문자를 서사하는 수준을 넘어 학문과 예술의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등석여가 학서 시절에 고전을 학습하면서 그 일환으로 「설문해자」를 수사(手寫)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몇 글자를 자전에서 집자하여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서의 근원인 문자학적 구조를 밝혀냄으로써 자유로운 자형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자형의 변화만을 위하여 벽자(僻字)만을 골라 써서 「중용」에서 이른바 색은행괴(索隱行怪)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로 오랫동안 착실하게 천착하며 본질과 근원에 다가서는 독실한 공부가 필요하다. 등석여의 경우는 그 좋은 예이다.등석여와 통감했던 포세신은 「예주쌍즙(藝舟雙楫)」을 저술하여 그의 이론을 계승하는 한편 그를 칭앙하였고, 오양지(吳讓之), 양기손(楊沂孫), 조지겸(趙之謙) 등 전서와 전각에 두각을 나타냈던 청조 후기 서예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청대의 고증학과 비학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진 추사가 그의 아들 등전밀(鄧傳密)과 교류한 사실로 미루어 등석여의 비학 서법이 추사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추측케 한다. 등석여의 전예에서 예술성을 따지기에 앞서 청대 비학의 학문적 결정을 엿볼 수 있으니, 그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태조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이 문화재청으로부터 두번이나 반려되면서 전주시의 준비가 치밀하지 못하고 안이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지난 10일 오후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참석위원 12명 중 4명이 전주시가 낸 구본 발굴을 위한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허가'에 찬성했으나 5명이 반대하고 3명이 기권해 부결됐다. (관련기사 본보 3월 11일자 1면)문화재청은 "태조 어진 구본 발굴과 관련해 이례적으로 표결까지 갔지만, 문화재 보존관리에 저해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부결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학자적 욕심에서 발굴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지만, 자칫 보물찾기식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며 "문화재 보존 차원의 큰 틀에서는 발굴 보다는 현 상태 유지가 지배적 시각"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어진 구본 발굴이 두번이나 반려되면서 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2007년에는 어진을 불에 태워 묻었다는 설과 물에 씻어 묻었다는 설이 존재하면서 구본 존재 여부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반려됐었다. 이번에는 「어진이모도감청의궤」를 통해 '어진을 물에 씻은 다음 잘 접은 뒤 백자항아리에 넣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들이 이같은 결과를 내리면서 지역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사적분과위원회 회의에서 찬성한 것으로 알려진 한 위원은 "지역의 여론은 익히 알고 있고 개인적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발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의견이 대세였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반대 의사를 밝힌 다른 의원은 "결과는 부결로 나왔지만 이 역시 좋은 뜻에서 지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본이 알려지면서 도굴 위험이 높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그렇게 따지면 경기전은 어떻게 지킬 것이냐. 익산 쌍릉도 있는데 궁금하니까 파보자, 그런 건 아니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위원은 "의미적으로 귀하게 해놓았으니까 현 상태로 지켜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발굴작업을 하고서도 구본이 나오지 않을 경우 떠안게 될 부담감과 책임감도 위원들에게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조선왕조실록」이나 「어진이모도감청의궤」 등 역사 기록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내외 시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미 도굴됐을 경우 국가 문화재 관리 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등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한 전문가는 "시에서 구본 발굴에 대한 의지가 컸다면 위원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하는 작업도 했었어야 했다"며 "특히 조선시대 전공 학자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면, 제출 자료나 연구에 대한 보완 등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에 대해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문화재청과 우리 지역을 비롯한 학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구본 발굴 재추진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충남도는 부여군 규암면 합정리 백제문화단지 내 백제역사문화관이 13일 낮 12시5분께 입장객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14일 밝혔다. 100만번째 입장객은 자녀와 함께 백제역사문화관을 찾은 이명배(36)씨로, 이씨는 국보 287호인 백제금동대향로 모형과 오는 9월 17일 개장하는 백제문화단지 1년 무료입장권을 선물로 받았다. 박국진 백제문화권관리사업소 소장은 "백제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백제역사문화관을 찾는 관광객도 크게 늘고 있다"며 "관광객들이 더 편하고 효율적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시설 보강과 함께 다양한 기획 이벤트 개최를 추진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2006년 3월 16일 문을 연 백제역사문화관은 지하 1층ㆍ지상 2층, 건물면적 8천796㎡ 규모로, ▲한성시대와 웅진시대, 사비시대 등 백제의 역사(제1전시실) ▲백제인의 생활상(제2전시실) ▲백제인의 사후세계 등 장례문화(제3전시실) ▲백제문화 교류기(제4전시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전주는 성문이 4개 있고 성곽 위에는 소포루가 8개 있다. 인가는 성내및 성외 동남면 삼방에 연담하여 호수는 약 2000여 호이다. 감영은 남문내에 있고, 그 동쪽에는 호남포정사라는 관청과 그 동북에는 완산부가 있다. 객사는 '풍패관'이라 칭하고, 관청 건물로는 선화당 내아 관풍각 군관청 포도군관청 등 40여 개가 있다."1888년에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펴낸 '조선지리지'에 나오는 전주에 관한 기록이다(일제식민시대 구술실록/ 전주문화재단). 당시 동서남북 4개의 문에는 큰 종이 걸려 있었다. 아침 6시와 밤 10시에 종을 울리고 문을 개폐해 교통을 통제했다.전주에 언제부터 이러한 성곽이 있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 말엽인 1389년 관찰사 최유경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훨씬 전에 구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전주부성은 정유재란때 크게 파괴되어 1734년 관찰사 조현명이 새롭게 수축했다. 1767년 다시 대화재로 남문과 서문을 비롯 관아와 민가 수천호가 소실되자 관찰사 홍낙인이 중건했다. 이때 4대문은 완동문(完東門), 풍남문(豊南門), 패서문(沛西門), 공북문(拱北門)이라 불렀다.전주부성은 1894년 동학혁명 때도 2차례에 걸쳐 수난을 당했다. 동학군에 의해 점령된 전주성을 향해 관군은 완산칠봉 등에서 독일제 크루프포 등을 쏘아댔다. 이로 인해 7000-8000호에 이르던 전주는 거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성곽도 일부 파괴되었다.파괴되기 전, 전주 성곽은 전주우체국 부근을 중심으로 반경 500m의 다소 원형에 가까운 지역을 둘러싸고 있었다(全州府史·1942년). 동문은 현재의 동문사거리, 서문은 다가동파출소 앞, 북문은 현 오거리(북문승강장)에 있었다.천년고도 전주를 지키던 전주부성은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1907-1908년 남문에서 서문과 북문까지, 1911년 이후 남문에서 동문을 거쳐 북문까지 헐어졌다. 결국 풍남문 하나만 덩그라니 남게된 것이다.며칠 전 전주출신 정동영 신건 장세환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복원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별 실속없이 끝났다. 정치적 수사보다 유구조사와 예산확보가 먼저일 것이다./조상진 논설위원
속보= 올해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아 추진되어온 태조 어진의 구본 발굴작업이 또 다시 무산됐다.<관련기사 본보 3월2일자 1면 보도>문화재청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10일 오후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열린 태조 어진 구본 발굴에 대한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건과 관련, 표결에 부쳤으나 참석위원 12명 중 찬성 4명, 반대 5명, 기권 3명으로 부결됐다.태조 어진의 구본 발굴작업 신청이 부결된 것은 지난 2007년에 이어 두번째다.사적분과위원회의 반대 위원들은 이날 '구본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경기전 일대를 신성시해야한다'는 것과 '구본의 존재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발굴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찬성 위원이 "유물이 발굴되면 역사적 가치가 크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의사표명을 하지 않은 3명의 위원들이 나오면서 부결됐다.시는 이에 앞서 전주의 정체성 확립과 전통문화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진을 발굴, 그 역사성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로 경기전 북편 뒤뜰(600여㎡)을 대상으로 문화재 현상 변경 허가를 신청했다.
명말청초에 강직한 성품으로 개성을 드러내 보인 서화가 중에 부산이 있다. 부산(傅山, 1607~1684)은 자가 청주(靑主)이며 호는 주의도인(朱衣道人), 노얼선(老蘖禪) 등이 있으며 양곡(陽谷:山西)인이다. 「청사고」의 전기에 의하면, 여섯 살 때 황정(黃精)을 먹고 곡식을 하지 않다가 건강을 되찾고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강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명나라가 망하자 고염무 등 유민들과 명조 회복운동을 벌이다가 순치(順治) 11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끝가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식인 회유책으로 박학홍사과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 이후에는 황관(黃冠)에 붉은 옷을 입고 토굴에서 기거하며 노모를 봉양하였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삼베 옷 하나만을 걸치고 스스로 '민(民)'이라고 칭하였으며, 죽어서도 황관과 붉은 옷으로 염을 하였다고 한다.그는 서화에 뛰어났는데 서론으로 제기한 사녕사무론(四寧四毋論)이 특히 유명하다. 원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書寧拙毋巧;寧醜毋媚;寧支離毋輕滑;寧眞率毋安排." (글씨는 차라리 고졸할지언정 교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추할지언정 연미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지리할지언정 가벼이 미끄러지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진솔할지언정 안배하지 말아야 한다.)그 내용이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지만 부산이 추구하고 있는 서예적 경계가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부산은 당시 사람들이 앞다투어 조맹부와 동기창의 연미한 글씨를 연마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불만을 가졌다. 이렇듯 강력한 부정적 서예관이 제기되게 된 배경에는 그의 학서 이력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은 20세 때 조맹부의 필적을 얻고 그것을 임서하며 공부하였는데, 조맹부는 송왕실 출신이면서 원나라에 출사한 사람으로 '心術壞而手隨之'(심술이 삐뚤어졌는데 손이 그것을 따라갔다)라고 혹평하였다. 서품이 곧 인품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조맹부는 더 이상 학습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당대의 충신 안진경의 글씨를 배우고 위진 및 당송원의 제가들의 서체를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각 체에 능하였지만 특장을 보인 것은 소해(小楷)와 초서이다. 그 중에서도 연면초(連綿草)는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즉흥적으로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흔히 행초서를 무법유체(無法有體)라고 일컫는데 명말청초에 이러한 연면초와 광초가 유행한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왕탁의 자유분방한 행초서와 부산의 행초서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일면 상통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왕탁이 말못할 복잡다단한 심정을 울굴한 글씨로 표현했다면, 부산은 시대에 동화되는 명조의 문화현상을 분개하며 사녕사무론을 외치며 굽힘 없는 활달한 기개를 연면초로 펼쳐 보였다. 그가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자칭하며 작품에 '大笑下士'라고 서명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거리낌없는 기개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시대 말기적 상황에서 절개를 강조하며 사람됨을 중시했던 명언 "作字先作人, 人奇字自古."는 그의 서품을 이해하는 키워드이다. 글씨보다 사람을 우선시할 때 비로소 글씨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승화되어 마치 격조 있는 사람을 대하듯 서품을 대한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람이 바로 부산이다. 뒤엉킨 듯 보이지만 맑게 이어지는 연면초에서 명말 유민의 불굴의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사단법인 김해향토문화재연구소(소장 박재민)는 가야 고도인 김해에서 출토된 유물 중 유일한 국보(제275호)인 '기마인물형 토기'의 귀환운동을 벌인다고 9일 밝혔다.이 연구소는 5년전에도 이 토기의 김해 귀환을 위해 주민 1만여 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지만 이후 구체적인 귀환운동을 벌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된 바 있다.연구소는 최근 이사회를 통해 이 토기의 귀환운동 필요성에 공감하고 시민 1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연구소는 오는 10일부터 김해시청을 출발해 17개 읍ㆍ면을 직접 순회하면서 서명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연구소는 다음달 28일부터 시작되는 제34회 김해 가야문화축제 기간에도 지역 주민들은 물론 뜻있는 국민들의 서명을 함께 받기로 했다. 이 유물은 1980년대 초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에서 도굴된 것을 문화재 수집가인 故 이양선 박사(1999년 별세)가 어렵게 구해 1993년 다른 유물로 함께 경주김해박물관에 기증했다. 강성구 이사는 "이 박사께서 유물을 기증할 당시에는 국립김해박물관이 건립되기 전으로 이 토기가 경주박물관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한다"며 "10만명 서명을 받아 문화재청장에게 직접 김해 귀환을 건의하고 이 박사의 유족과도 협의해 귀환을 간곡히 호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3년 1월15일 국보로 지정된 이 토기는 높이 23.7㎝, 폭 14.7㎝, 밑지름 9.2㎝의 크지 않는 토기로 가야의 말갖춤(마구)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현재 김해시 청사는 물론 시내 주요 거리 곳곳에 시를 대표하는 모형 상징물로 설치돼 있다.
전북의 민속예술이 정리된다.전북도립국악원(원장 이선형) 학예연구실이 「전북의 민속예술 50년」을 발간한다.그동안 '한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했던 전북 대표 작품을 대상으로 철저한 현장조사를 통해 그 원형을 기록할 예정.'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로 시작한 '한국민속예술축제'는 전통민속예술 발굴·전승을 위해 각 시·도별로 우수 민속예술을 1∼2작품씩 출품해 겨뤄왔지만, 더이상 발굴가능한 민속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이름을 바꿨다. 조만간 경연형태의 시상 제도도 없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한국민속예술축제' 50년 역사 중 전북은 48년 동안 57개 작품을 출품했다. 이 중 「전북의 민속예술 50년」에는 중복출품한 작품을 제외하고 총 45개 작품(민속놀이 19개, 민요 13개, 농악 8개, 민속무용 5개)이 실린다.현재 박용재 학예연구실장이 남원·임실·순창지역을, 서경숙 연구사가 전주·완주·김제·정읍지역을, 김무철 연구원이 익산·무주·진안지역을, 김정태 연구원이 고창·군산·부안지역을 현장조사 중이다. 박 학예연구실장은 "현전하는 도내 민속예술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조사된 민속예술을 국악원의 작품 소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포함돼 있다"며 "대회 출품을 위해 연출됐던 부분은 제외하고 원형대로 기록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조사대상으로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리농악과 임실필봉농악, 위도띄뱃놀이 이외에도 임실 기와밟기, 말천방농요, 고창 어르마타령 등 해당지역에만 알려져 있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목들이 포함됐다. 현재 현장조사가 진행 중이며, 책은 10월 중 발간될 예정이다.
명말청초의 서예가 왕탁(1592~1652)은 자가 각사(覺斯), 호는 치암(痴庵)·숭초(嵩樵)이며, 하남성 맹진(孟津) 출신이기 때문에 왕맹진(王孟津)이라 불렸다. 명나라 천계(天啓) 2년에 진사로 급제하여 남경예부상서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를 지냈으나, 청이 남경(南京)을 점령하자 항복하여 순치(順治) 연간에 예부상서를 제수받고 「명사(明史)」 편찬시 부총재를 맡았다. 이로 인하여 원의 조맹부처럼 실절(失節)했다는 비난이 뒤따랐는데 그것을 의식했는지 남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명말청초에 동기창의 서풍이 흥기하여 유행하였고, 청초에 강희제가 그것을 혹애함으로써 일세를 풍미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뒤를 이어 왕탁이 출현하여 '書不宗晉, 終入野道'의 서예론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일변하였다. 명말이라는 시대적 전환기에서 기존의 가치관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과 새로운 가치에 대한 역설이 동시에 드러나는 발언이다. 조맹부의 복고주의가 제창된 이래 진의 왕희지를 중심으로 한 형사에 치중하다가 명말에 이르러서는 왕서를 존중하면서도 그 정신적인 면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그러한 신개념의 서예론은 진을 종주로 삼지 않고 마침내 야도(野道)로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전에 유려한 면모를 보이던 서풍은 일변하여 보다 본질적이고 숨김없는 야성적 글씨로 전이되었고, 이로써 서가들의 개성적인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법(法)의 차원에서 예(藝)의 차원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더불어 청초에 문자학과 금석학이라는 학적 기풍이 흥기함에 따라 서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전개양상을 보였다.명말청초의 개성적인 서법가로 꼽히는 왕탁 역시 신필왕탁(神筆王鐸), 오백년래무차군(五百年來無此君)이라는 후세의 명예로운 칭호가 있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행초서 중에서도 특히 초서에 뛰어났다. 행초서 대부분이 자유분방한 결구와 장법을 토대로 구속됨이 없는 운필과 구성을 이루어낸다. 이로써 청대에 분기한 비학과 첩학을 한 곳에서 용해시킨 인물로 평가되며, 일기가성의 소쇄한 운필은 거침없는 기세로 장관을 연출한다. 뿐만 아니라 석묵(惜墨)하지 않고 임리한 묵훈(墨暈)을 이루어 일필휘지의 과감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임산지(林散之)는 왕탁의 이러한 면을 "自唐懷素後第一人"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법칙적인 면모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농후함을 일깨우는 평어로 왕탁의 서예사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왕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한 「사고전서(四庫全書)」 이신전(貳臣傳)에 보인다.여기에 소개하는 '자작오율'은 말 그대로 자신이 지은 오언율시를 흥을 실어 쓴 것이다. 임리한 발묵과 얽매임이 없는 자유분방한 운필이 묵훈을 이루고, 기이한 결구와 공간분할이 신기(新奇)를 자아낸다. 방원(方圓)이 곡절하고 억양돈좌하며 전변하는 필획에서 그의 복잡한 정감과 분개, 비애 등 다층적인 심미적 가치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서품을 보노라면 문득 그가 "萬事不如杯在手"(만사가 손에 든 잔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이미지캡션> 王鐸, 自作五律 (39세작)
태조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아 태조어진 구본 발굴 작업이 본격화된다.1일 전주시에 따르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의 세초(어진을 만들고서 낡은 어진을 없애는 일) 과정을 확인하고, 세초와 관련된 각종 유물을 발굴하기 위해 최근 문화재청에 국가지정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을 했다.이번 태조어진과 관련된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 신청은 지난 2007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제기한 것.현상변경은 문화재의 보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문화재의 정비나 주변 지역의 발굴·매립할 때 신청하며, 허가가 나오면 발굴 작업이 시작된다.시는 현상변경 대상을 태조어진 구본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경기전 북편 뒤뜰(600여㎡)로 한정했다. 이곳은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고종 9년(1872년)에 낡고 오래된 태조 어진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 묻었다고 적혀있는 지점이다.시는 "올해는 태조어진이 모셔진 경기전의 창건 600주년을 맞는 해"라면서"발굴작업이 이뤄지면 조선시대에 어진을 어떻게 교체해 처리했고, 교체된 구본을 어떻게 보존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요성을 설명했다.이에 앞서 문화재청은 지난 2007년 '구본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반려했었다.전문가들은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 태조 어진의 구본과 이를 담은 백자 항아리, 백자 항아리를 보호하는 석함 등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세초와 매안 등 각종 의례에서 사용한 유물과 기록물 등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시 관계자는 "다방면으로 구본이 묻혀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문화재청의 허가 가능성이 크다"며 "이를 통해 전통문화도시 전주시를 폭넓게 완성해나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기전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 구본(御眞 舊本) 발굴은 태조 어진의 원형을 찾는 작업이자 조선 왕조의 본향으로서 전주 역사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이다. (본보 2009년 2월 23일 1면·5면)특히 전주가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을 기념하여 태조 어진을 전주에 봉안한 지 600주년이 되는 올해가 적기로, 이를 발굴해 올 가을 개관하는 유물전시관에 보관한다면 전주의 역사문화자원을 확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발굴 과정이 전국적인 이슈가 되면서 전주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무엇보다 전문가들은 귀중한 유물이 땅 속에서 더 훼손되기 전에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본보가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년, 원본을 찾자'를 기획·보도하면서 구본 발굴 작업을 포함,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년 기념 사업 준비를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구본 발굴을 추진하려다가 중단했던 전주시가 소극적으로 대응했기 때문. 전문가들은 "땅 속에 묻힌 지 138년이 지난 지금, 더 늦기 전에 구본을 발굴해 이에 대한 보존처리와 연구를 집중적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했다.구본 발굴이 지속적으로 논의되면서 도굴의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다. 전주시는 2007년 8월 문화재청에 경기전 본전 후원 600㎡를 대상으로 매장유물 발굴을 위한 현상변경허가 신청을 냈지만,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 심의결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현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며 이를 반려한 바 있다.경기전에 어진 구본이 묻혀있을 것이라는 역사적 근거는 충분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9년(1872년) 기사에 따르면, '경기전의 구본은 신본을 모신 후에 세초하여 본 전각의 북쪽 섬돌 가에 매안(埋安)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태조 어진을 모사한 행사의 기록이란 점에서 의의가 큰 「어진이모도감청의궤」에도 '어진 구본은 1872년 9월 27일에 세초하여 백자항에 넣어 본전 북계상에 매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일성록」 고종 9년 10월 7일 기사에도 '신본을 먼저 봉안하고, 고안제를 한 후에 구본은 돌돌 말아서 봉안하는데 세초하고, 또한 본전의 북쪽계단에 매안하는데, 박석으로 둘러 이를 쌓았다'고 적혀있다. 폐쇄공간인 경기전 본원 후원 등을 대상으로 지질탐색을 벌여 4곳에 매장 의심물체가 감지됐다는 결과도 이미 확보하고 있다.현재까지 논란이 되는 것은 구본을 어떻게 묻었냐에 대한 해석. 비단에 그려진 그림 자국을 물로 씻어냈을 것이라는 주장과 태워서 그 재를 묻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둘 다 백자항아리에 넣어 경기전에 묻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물에 씻어 묻었든 불에 태워서 묻었든 어진 구본을 담은 백자항아리가 발굴만 된다면야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라며 어진 매안과 관련된 중요 유물이나 관련 기록물 등이 나올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이럴 경우 조선시대 어진의 세초와 매안의 전체 과정을 처음으로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진 구본을 담을 정도면 명품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내비쳤다. 설사 구본이 나오지 않더라도 역사적 기록을 확인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구본 발굴은 태조 어진과 전주의 정체성을 밝혀내는 일"이라며 "올해 어진 봉안 600주년의 의미를 살려 반드시 구본 발굴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보물로 지정예고된 개운사 불상의 복장유물, 이달 보물로 지정된 운람사 불상 복장유물과 광흥사 동종 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 불교중앙박물관(관장 범하스님)은 다음달 2일 '2010년 상설전'을 개막해 보물 9건을 포함한 59건 125점의 성보문화재를 8월22일까지 전시한다고 28일 말했다. 3개 전시실에서는 각각 주제를 달리해 전시를 꾸민다. 1전시실에서는 '부처님의 일생과 전법(傳法)'을 주제로 화엄사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화엄석경'(보물 1040호), 조선초기 문화재 '백지묵서묘법연화경'(보물 278호) 등 5건 38점이 전시된다.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와 전법을 종이에 쓰거나(사경), 목판, 금속활자 등으로 표현한 법보(法寶)가 소개된다. 2전시실은 다양한 형태의 불교미술품으로 구성된다. 불상 안에 공양하는 복장유물이 중심이다. 이달 보물로 새로 지정된 '운람사 초조본 불설가섭부불반열반경' 및 기타 복장유물이 보물 지정 후 최초로 공개된다. 석가모니 부처가 가장 신임한 제자 마하가섭이 열반에 든 석가모 니를 찾아간 내용을 이야기하는 경전으로 '마하가섭경'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시 이달 보물로 지정된 광흥사 동종(보물 1천645호)도 공개된다. 보물로 지정예고된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및 복장 전적도 2전시실에서 소개된다. 3전시실은 남양주 수종사의 목조 불상과 금동불상들, 사리장엄구 등과 화엄사와 신원사의 사리장엄구를 전시한다.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대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 소송을 프랑스 국내에서 제기 중인 문화연대는 프랑스 행정법원에 항소를 제기했다고 25일 말했다.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유산위원장은 이날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법률 대리인인 김중호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갖고 "어제(24일) 항소장을 접수했다"면서 "외규장각 고문서는 약탈된 것이 명백한 이상, 그 완전한 반환을 위해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끝까지 싸우겠다"고 덧붙였다. 김중호 변호사는 1심에서 패소한 데 대해 "우리가 패소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성과도 냈다"면서 "무엇보다 프랑스 정부에서 외규장각 고문서를 취득한 과정이 '약탈'임을 사실상 인정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김 변호사는 "소송에서 가장 쉽게 이기는 방법이 원고 자격을 무효화하는 것인데, 이번 소송에서 프랑스 정부 또한 문화연대는 소송 자격이 없다는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으나, 프랑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김 변호사는 "1866년 외규장각 고문서 탈취 당시 이들 고문서는 조선왕조 소유였으며, 대한민국은 이 조선왕조의 합법적 계승자이므로 당연히 대한민국 재산"이라면서 이런 약탈 고문서를 "프랑스가 자기네 국유재산으로 일방적으로 편입한 것은 원천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약탈 문화재 또한 인종학살이나 전범 등의 반인류적ㆍ반인권적 범죄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시효를 적용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프랑스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외규장각 고문서는 문화재 반환과 관련한 각종 국제협약이 체결되기 전에 프랑스가 취득한 것으로 지금은 프랑스 국유재산이므로 반환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김 변호사는 "세계인권선언의 모태가 된 프랑스인권선언이 1789년에 나왔다고 해서 그때부터 인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실제 이 인권선언은 '이미 존재하는 인권'을 재천명한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약탈 문화재 반환 또한 이에 대한 국제협약이 병인양요 이후에 생겼다고 해서 우리가 외규장각 고문서를 돌려받을 수 없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황평우 위원장은 우리 정부 일각에서 제기되는 외규장각 고문서의 '등가교환'을 통한 영구임대방식, 즉, 이들 고문서를 프랑스 정부가 영구 대여하는 형식으로 한국에 반환하는 대신, 그에 버금가는 다른 한국 문화재를 프랑스에 대여해 전시하는 방식을 반대한다고 덧붙였다. 황 위원장은 "등가교환이나 영구임대는 점유권만 우리가 갖는 데 불과하다"면서 "우리는 완전한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말했다.
태조 어진이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말한다. 전주에 있는 경기전은 유서깊은 곳으로써 조선왕조 실록과 태조 어진이 모셔져 있었던 곳이다.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행사가 10월에 치루어진다.오늘의 태조 어진이 지금까지 보존될수 있었던 데에는 깊은 사연이 숨어있다.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한반도에 엄청난 상처를 안겨주었다 ,이런 국난에 전주 경기전에 있었던 조선왕조 실록과 태조 어진의 안전에 위험이 닥쳤다.조선왕조 실록은 전주 경기전을 비롯하여 서울의 춘추관과 충청도 청주, 경상도 성주 실록각에 각각 분치(分置)되었는데 전주만 제외하고 나머지 3곳의 실록이 모두 전란(戰亂)중에 불타버렸다. 왜군이 웅치재를 넘어 전주에 당도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기전 참봉 오히길은 실록과 태조 어진을 봉안(奉安)할 뜻있는 인물을 찾던중 태인의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선비가 자진해서 나섰다.참봉 오희길과 두 선비는 여려 사람들을 대동해서 실록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으로 옮기고 9일후에는 태조 어진을 내장산 은적암(隱寂庵)옮겼다고 한다. 실록과 어진은 조선의 국보(國寶)였기에 전란 중에도 조정(朝廷)은 이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않고 그 행방에 관심을 가졌다. 조정은 좌랑(佐郞) 신흠(申欽)을 내장산 현지에 파견하여 실록과 어진의 안전을 확인케 했다.이렇게 옮겨진 실록과 어진은 다른곳으로 이전되기까지 약 1년간을 머물게 되는데 이때도 안의 손홍록 두 선비는 이의 안전을 위해서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둘이서 감시를 했다고 한다. 그후 왕명(王命)에 따라 어진은 충청도 아산 객사으로 옮기게 되었고 실록은 해주목(海州牧 )으로 옮겼다고 한다.얼마후 정유재란이 터지자 안의, 손홍록은 다시 분발하여 아산에 있는 어진을 강화부를 거쳐 청천강을 지나 안주(安州) 객사에 옮겼다고 한다.이때 해주목에 있던 실록도 옮겨져 와 어진과 5년만에 재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후로 다시 심산유곡인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으로 옮겼다. 태조 어진만 광해군 때 경기전의 중건(重建)과 함께 봉안되었다. 태조 어진은 그냥 지켜진것이 아니었다./장세균 논설위원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서울시 은평구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독립신문류를 오는 25일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23일 밝혔다. 문화재로 등록되는 태극기 등은 진관사 내 칠성각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 중앙에 지름 32cm의 태극문양, 건ㆍ곤ㆍ감ㆍ리 4괘가 갖춰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양식과 동일하나 현재의 태극기와는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서 귀중한 자료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독립신문류는 태극기에 싸인 채로 발견되었는데 '신대한(新大韓)' 3점, '독립신문(獨立新聞)'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 등 5종 20점으로 발간일자가 1919년 6월부터 12월 사이다.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극기와 관련된 내용을 게재해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으며 이 중 '자유신종보'는 그간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자료로 파악됐다. 지난해 5월 경내 칠성각 건물을 수리하다가 이 자료들을 발견한 진관사 측은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백초월(1878-1951)스님이 진관사에 머무를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이 자료들을 건네 받았다가 칠성각에 숨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5일부터 다음 달 14일까지 진관사 태극기와 독립신문류를 전시한다.
충남 서산시의 대표적 사적지인 해미읍성에서 조선시대 화폐인 상평통보를 복원한 엽전이 현금 대신 통용된다. 23일 서산시에 따르면 오는 28일 정월 대보름부터 해미읍성을 찾는 관광객들은 성내 환전소에서 1냥에 1천원인 상평통보 엽전을 환전해 장터 등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서산시가 조선시대 군영으로 사적 116호인 해미읍성의 관광 활성화 차원에서 성내 장터 등에서 상평통보 사용을 의무화기로 방침을 정한 데 따른 것. 시는 정월 대보름부터 시범 운영을 시작하기로 하고 서울의 엽전 및 기념품 제조업체에 의뢰해 상평통보 1만냥을 제작했다. 엽전 1개에 1냥인 상평통보는 1개당 제작비가 650원 가량 들었다. 시는 성내에 환전소를 설치하고 장터와 국궁체험장, 승마체험장 등 성내 모든 경제활동에 엽전 사용을 유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시는 읍성내에 전통 주막과 옹기 등 전통그릇 판매장, 한복과 삼베보자기 등 전통의복 판매장 등 옛 저잣거리를 조성, 조선시대 육의전이나 난전과 같은 분위기를 재현할 계획이다. 시 관계자는 "관광객들이 엽전을 이용해 주막에서 음식값을 내거나 물건을 구입하면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며 "기념품으로 소장하기 위해 엽전을 가져가는 관광객들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명대의 서화가 동기창(1555~1636)은 자가 현재(玄宰)이며 호는 사백(思白)·향광거사(香光居士) 등이 있다. 화정(華亭 : 지금의 上海松江) 사람으로 만력 17년(1589)에 진사로 급제하여 남경(南京) 예부상서를 지냈으나 위충현(魏忠賢)의 화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사직하였다. 시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실기를 겸비한 서화가로서 이론와 감상에도 이름이 높아 후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이로 인하여 훗날 '藝林百世之師'라고 불렸지만, 동기창은 평소 얽매임이 없이 서화를 탐닉하며 정무를 게을리하다가 탄핵을 당하기도 하고, 고향에서는 고리대금으로 폭리를 취하여 서화수집에 힘쓰다 저택이 습격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완물상지의 전형적인 예이다.자신이 술회한 학서이력을 보면, 17세 때 안진경의 「다보탑비」에서 출발하여 우세남을 배우고, 종요와 왕희지로 거슬러 올라가 공부하는 소원(溯源)의 방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감상가로 널리 알려진 항원변의 집에서 역대 진적을 목도하고 금릉(金陵)에서 왕희지의 진적 관노첩(官奴帖)을 본 뒤 진적이 아니면 신수를 깨달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림은 동원(董源)으로부터 출발하여 송원 제가들의 장점을 두루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화론 연구는 남파와 북파의 이론적 체계를 세운 것으로 유명하며 흔히 일컫는 남종화와 북종화라는 용어 역시 그의 화론 체계에 의한 것이다. 이는 훗날 추사 김정희의 스승 완원(阮元)이 제기한 남북서파론에도 영향을 주었다.동기창은 왕희지의 글씨를 종주로 삼았으나 단지 형사를 취하지 않고 신수를 파악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점은 전대의 조맹부와 그 계통들이 왕서의 형사를 추구한 것과 대조적이며, 스스로를 조맹부와 견주어 말하곤 하였다. 그는 창신을 추구하며 중시했던 솔의(率意)와 평담천진을 강조했던 송대 미불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편으로는 선종에 조예가 깊어 선리(禪理)에 의한 깨달음도 있었다. 그의 서화와 이론이 후세에 높이 평가되는 것도 이러한 깊이 때문일 것이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그의 글씨를 혹애하자 당시 신하들이 모두 동기창의 글씨를 모방했다고 한다. 서화수필집으로 유명한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이 있으며 저서로 「용대집(容臺集)」이 전한다. 「화선실수필」을 통해서 간단히 그의 서예관을 살펴보면, 왕희지의 자세(字勢)는 사기반정(似奇反正) 즉 기이한 듯하지만 오히려 바르다고 평한 것, 그리고 서도(書道)는 다만 교묘(巧妙) 두 글자에 있다고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여기에 소개하는 '빈풍도시권'은 그 끝에 '天啓元年秋九月董其昌書'라는 관기가 있으므로 1621년 동기창의 나이 67세 때에 쓰여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동기창은 이때 다시 조정에 출사하여 궁중에 소장되어 있던 조맹부의 빈풍도를 직접 보았는데 그 느낌을 시로 지어 쓴 것이다. 구름문양이 있는 종이에 다른 행초시권보다 비교적 큰 글씨로 쓰여졌으며 유려한 행초서의 면모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모두 26구의 칠언고시로 횡서하였고 章皇, 宸章, 聖道 등의 단어가 나올 때는 행을 바꾸어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 「시경」의 빈풍은 일반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빈풍도는 이를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동기창의 시권에 詩中盡繪農桑事, 田家作苦非一狀 등의 구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을 누차 조맹부와 비교한 동기창은 아마 조맹부의 빈풍도를 보고 그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전 세계 국보급 기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마련된다. 국가기록원은 6월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프랑스와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의 기록유산 100여점을 선보이는 '2010 국제기록문화전시회'를 개최한다고 21일 밝혔다. 전시회에는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경', 백설공주 등이 수록된 '그림형제 동화', 음악교과서에 실려 있는 '자장가',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마그나 카르타' 등 평소 접하기 어려운 기록물들이 전시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 조선왕조 의궤 등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의 기록유산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 전시물들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상징성과 대표성이 있는 원본이나 복제본 등으로 구성되고, 관람객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종교와 동화, 음악 등 주제별로 분리 전시된다. 전시장에서는 고서 만들기, 탁본 뜨기, 국새 찍기 등 다채로운 체험 행사도 열린다. 입장료는 무료이고, 방문객은 사전에 전시회 홈페이지(http://www.iace.or.kr)를 통해 전시 현황을 알아볼 수 있다. 전시회와 연계해 기록관리 분야 국제기구인 국제기록관리협의회(ICA)와 동아시아기록관리협의회(EASTICA)의 집행이사회가 열리고, 국내외 기록관련 전문가 400여명이 참가하는 세미나도 마련된다. 박상덕 국가기록원장은 "이번 전시회는 세계 최초로 열리는 지구촌 기록문화 축제"라며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록문화를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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