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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인 경제 및 사업, 쇼핑도시 오사카(大阪)와 수많은 문화유적과 다양한 관광자원을 갖고 있는 교토(京都)와의 도시경쟁력을 극복하기 위해 나라(奈良)시가 선택한 것은 고대 도읍지라는 것. 일본의 정신문화의 출발이라는 타이틀로 접근하면서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문화자원을 최대한 근대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특히 나라현에서는 헤이조(平城) 천도 1300년이 되는 2010년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이를 위해 헤이조쿄(平城宮)와 다이고쿠텐(大極殿)을 복원해 과거의 유물을 현재에 조명하고 미래 문화산업의 동력으로 삼는 데 매진하고 있다.▲ 황권으로 형성된 불교문화나라(奈良)는 710년 일본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래 784년 교토 부근의 나가오카 궁(長岡宮)으로 도읍이 옮겨질 때까지 고대 일본의 중심지 역할을 한 도시이다. 수도를 나라로 옮긴 사람은 겐메이(元明) 천황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본떠 만든 헤이조쿄(平城宮)을 거처로 삼았다.이 때를 흔히 나라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일본은 천황과 황족에게 모든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중앙집권적 국가체계를 이룩했다.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융성한 문화를 덴표(天平)문화라고 하며, 도다이지(東大寺), 고후쿠지(興福寺) 등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만한 거대한 불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강력한 불교세력과 결탁한 귀족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간무(桓武) 천황은 교토로 천도하면서 큰 절의 교토 이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나라는 교토에 수도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종교적 색채가 강한 도시로 탈바꿈되었다.▲ 나라시대 헤이죠쿄(平城京) 복원헤이조쿄 유적은 면적 120ha, 동서 1.3㎞, 남북 1㎞에 달하는 거대한 궁이다. 궁궐유적지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어서 일본의 특별사적지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유적지는 1951년 유적지 인근에 설립된 나라문화재연구소의 헤이조쿄 유적조사부에서 발굴조사를 전담해오고 있다. 발굴조사가 마무리된 지역은 당시의 건축공법을 사용해 복원공사를 진행했다.대표적인 복원 건축물은 헤이조쿄 북쪽에 자리 잡은 스자쿠몬(朱雀門). 이 주작문은 유구(遺構)를 그대로 놓아두고 그 위를 1m 정도 흙으로 덮은 뒤 건물을 세운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유는 세월이 지나 새로 지어진 건축물은 사라지더라도 원래 건축물이 있던 자리는 남겨두기 위해서란다.이곳의 또 다른 복원 건축물은 헤이죠쿄 동쪽에 있는 도인 테이엔(東院 庭園). 이 정원 역시 주작문 복원과 마찬가지로 정원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다시 묻었고, 그 위에 연못과 건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새로 복원된 정원은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 설계 원형을 그대로 복원했다. 따라서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잠시나마 덴표시대의 귀족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한편 헤이죠쿄 유적지 내에는 국가행사 및 외국사절단을 맞이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던 다이고쿠덴(大極殿)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 다이고쿠텐은 천도 1300주년 기념식이 진행될 2010년 4월 24일 이전에 복원을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시민에게 돌려주는 정비·복원사업헤이죠쿄 유적지 복원사업은 그 목적이 신선하다. 유적지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을 복원하여 과거 영광을 재현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결국 시민에게 되돌려 주기 위한 사업이라는 것. 그래서인지 나라현 지역주민들도 복원사업에 적극적이다.원래 이 유적지는 경작지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하지만 개인적 이익보다는 대의적 차원의 이익을 위해 국가에게 무상으로 양도한 것이다.이러한 내용은 현재 국내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추진 중인 유적지 정비·복원사업에 던지는 시사점이 크다. 그간 정비·복원 초기 단계에서는 지역주민의 의사가 배제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적지 않은 희생은 물론 지역주민과 마찰을 일으켜 중간에 중단되거나 철회되는 사태가 발생되기도 했다. 결국 유적지 정비·복원사업은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문화유적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시민들의 고통해결 없이는 세계인에게 내놓을 수 있는 역사 문화도시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따라서 지자체에서는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해 역사성과 진정성이라는 실익을 챙겨야 하며, 더불어 시민과 공유하는 시스템 정립도 필요하다.지역주민 역시 유적지정비·복원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며, 때로는 과감한 희생도 필요하다.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대한 관심에서 미래에 투자하는 관심이 절실한 때이다.▲ 역사성이 담긴 전주의 복원사업한 장소에 부여된 특정의 기능과 의미가 시대를 관통하여 지속될 때 이를 그 장소의 역사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라현의 헤이죠쿄 유적지 정비·복원이 이러한 맥락에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헤이죠쿄의 역사성을 찾고, 이를 토대로 역사복원을 시도하여 궁극적으로는 시민을 위한 국영공원화 하는 것. 이를 위해 현(縣)·시(市)·민(民)이 합심해 복원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고 있다. 관에서는 시민을 위한 공간조성이라는 복원에 대한 명확한 원칙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철저한 검증을 통한 복원을 꿈꾸고 있다. 이에 지역주민은 스스로 정비·복원사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유적지 보존에 앞장서고 있다.현재 전주시에서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성 4대문 복원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수많은 논의 절차를 거쳤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란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간에 성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잘못된 복원은 전라감영과 전주부성 4대문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역사의 단절을 가져올 뿐이다.단순히 조선시대 감영 건축물을 재현해 놓았다고 해서 감영자체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까지 복원된 것이 아니다. 역사문화적 기억에서 가치를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으로 전주다움을 만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헤이죠쿄 복원사업처럼 미래지향적인 복원 방향도 생각해 볼 일이다. /일본 나라=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
전주천은 전주 동남쪽 20㎞ 지점 노령산맥 분수령인 임실군 관촌면 슬치에서 발원하고 있다. 완주군 상관면을 거쳐 전주의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시가지를 관통하며 흐른다.인류가 강을 끼고 문명을 발전해왔듯 전주시의 취락형성도 전주천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다리는 하천 양쪽 통행을 목적으로 가설된다. 전주천의 다리도 당초 목교(木橋)나 섶다리 형태였다. 전주천 최초의 콘크리트 다리는 1929년 가설된 전주교(현 싸전다리)와 완산교였다. 이 두다리는 1936년 전주천을 넘쳐 전주시내를 덮친 대홍수에 완산교는 유실되고 전주교만 살아남았다.이 두 다리외에 1900년대 초까지 중요한 구실을 했던 다리가 남천교(南川橋)다. 현재 전주시 교동에서 남원에 가기 위해선 꼭 건너야 했던 다리였다. 1753년 홍수로 유실된 것을 1790년 다시 가설했다고 기록됐다.남천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만큼 아름다운 석교(石橋)였다. 5칸의 홍예(紅霓) 즉 다섯개의 무지개형 아치로 가설돼 주민들은 '안경다리'라고 불렀다. 또 다리위에는 남쪽하늘을 우러러 보는 석각(石刻)의 용두(龍頭)를 세웠다. 다리 전면에 있는 승암산(僧巖山)이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부중에 화재가 자주 일어났는데 이를 예방하기 위한 '액막이'로 설치한 것이다. (이봉섭著 '전북백년')남천교는 이후 여러차례 홍수를 견디지 못하고 유실된뒤 조선조말 평교형태로 가설됐으나 계속되는 물난리로 다시 도괴됐다. 1957년 콘크리트 교량으로 가설될 때 까지는 다리가 없었다. 이 다리도 안전 위험판정을 받아 지난해 새로운 다리 가설공사에 들어갔다.전주천 교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던 남천교가 어제 개통식을 갖고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다. 총 12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옛 오룡홍교 형식을 살린 형태로 지어졌으며, 다리위에 길이 27.5m, 폭 4.8m, 높이 6.5m 규모의 한옥누각을 올려 전통미를 한껏 살렸다. 새로 가설된 남천교가 전주 한옥지구와 연결된 새로운 명물로 사랑받길 기대한다./박인환 주필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익산이 공주·부여·경주와 함께 고도(古都)로 지정되면서 부터. 하지만 올 1월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 등 700여점의 사리장엄이 출토되면서 학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게 됐다.이와 함께 익산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구체화됐다. 특히 그동안 고도와 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사유권 침해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이었던 일부 지역 주민들이 사리장엄 출토로 백제 왕도로서 익산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되면서 세계유산 등재 여론이 확산됐다.최근 문화재청이 익산역사유적지구를 비롯 총 7개에 대한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신청서를 외교통상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보내겠다고 밝히면서 세계유산 등재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은 잠정목록에 오른 뒤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만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는 특별한 하자가 없으면 이름을 올리는 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익산역사유적지구는 세계유산 등재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1962년 제정 이후 단일법제 체제를 유지한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 보호에 관한 사항 전반을 관장한다. 정부 조직 중 문화재청은 이 법률을 존립 기반으로 삼는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관련 업무가 폭증함에 따라 문화재보호법이 3개 법률로 쪼개진다. 문화재청은 24일 발표한 '2010년도 업무추진계획'을 통해 현행 문화재보호법이 "1962년 제정 이후 34회에 걸친 개정으로 입법체계가 복잡ㆍ난해해진 데다, 보호대상 문화재가 대폭 증대하는 등 행정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이를 3개 법률로 나누기로 했다"면서 이를 위한 "'문화재보호법 전부 개정법률(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상태"라고 말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문화재보호법'(104개 조문)과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7장 38조문), 그리고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7장 62조문)로 분할되며, 그에 따라 문화재청은 각 법률에 대한 하위법령 제정 등의 후속조치에 착수한다. 개정 문화재보호법에서는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기초조사 제도 도입과 화재 및 재난ㆍ도난 예방 등의 시책수립에 관한 규정, 국외소재 문화재보호 및 환수 정책 추진 규정 등을 담게 된다. 또,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은 문화재 보존조치에 따른 해당 토지의 매입근거를 신설하고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등록제도 도입 등의 내용을 포함하며, 문화재 수리 등에 관한 법률에서는 문화재수리 의무감리제도를 규정하게 된다. 문화재청은 또한 "문화재 관련 각종 영상 및 사진자료 통합해 관리하고, 문화재 현장의 체계적 기록화 작업을 통해 기록유산 및 영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에는 헤리티지 채널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에서 생산하는 콘텐츠 중에서 고화질 영상물은 지역케이블방송 채널이나 기존 프로그램 채널(아리랑, KTV 등 PP)을 통해 내년 상반기에 방영하기 시작하며, 인터넷 포맷 영상물은 네이버 등의 국내 포털과 YouTube, My Space 등의 글로벌 영상네트워크를 통해 배포하기로 했다.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및 보존강화를 위해 내년 7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회의에서 '한국의 역사마을(양동ㆍ하회마을)'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도록 하며, 익산 역사유적지구와 대곡천 암각화군을 비롯한 9건은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한다. 일성록에 대한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는 3월에 제출되며, '가곡'과 '대목장' 등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대표목록에 추가등재를 추진한다.
불국사 다보탑이 해체 수리에 들어간 지 1년만에 수리를 마쳤다. 훼손이 심했던 2층 사각난간과 팔각난간, 상륜부에 대한 수리가 이뤄졌다. 탑을 일부 해체한 다음 방수처리를 하고, 균열이 일어난 부위는 접착ㆍ강화처리를 했다. 탑 내부에서 발견된 콘크리트가 빗물을 스며들게 한다는 판단으로 콘크리트를 제거했다. 다보탑은 1925년 전면 해체수리가 이뤄지고 1972년에도 2층 하부 사각난간과 상륜부를 보수했으나 풍화 등으로 인해 내부로 빗물이 침투하고 균열현상이 일어나 36년만에 수술대에 올랐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석탑보수정비사업단은 29일 오후 2시 경주 불국사 현장에서 다보탑 수리 완료 보고회를 개최하고 다보탑을 공개한다.
서울성곽의 내부 지역인 사대문 안은 경주처럼 고도(古都)라는 관점에서 문화재 보존을 염두에 둔 개발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위원회는 지난 18일 매장문화재 분과(위원장 지건길) 소속 전 위원과 사적ㆍ건조물ㆍ세계유산의 3개 분과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고, 사대문 안 문화재보존 문제에 대해 제반 현안을 논의한 결과 "사대문 안은 고도"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회의를 주재한 지건길 위원장이 24일 말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사대문 안의 건축행위에 필요한 문화재 조사와 보존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이 문제를 전담할 '소위원회'를 별도로 두기로 했다. 지 위원장은 "같은 사대문 안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종로구는 부족하나마 전문가 입회 조사나 사전발굴조사가 이뤄지는 데 반해, 중구 지역은 이런 문화재 조사 절차도 없이 대규모 공사가 진행 중"이라면서 "이런 주먹구구식 문화재 행정을 지양해, 어떤 원칙이나 가이드라인을 확실히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사대문 안 모든 건축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전 문화재조사를 의무화하는 방안 등을 앞으로 구성될 소위에서 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소위원회에는 여러 분야 전문가가 고루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의는 서울시 신청사 부지와 인근 청진동 피맛골 등지의 건설현장에서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지고, 그 보존 문제가 심각히 대두함에 따라 지건길 위원장 요청으로 마련됐다. 한편, 이날 문화재위 회의는 서울시 신청사 건설 구간 중 조선시대 관공서 터와 무기류가 다량으로 발굴된 지역만큼은 보존 방침이 확정될 때까지는 어떠한 공사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울시 신청사는 발굴 전문가 입회 아래 공사를 진행하다가 일부 구간에서 유적과 유물이 발견돼 이 지역에 대해서는 본격 발굴조사가 진행됐으며, 그에 따라 이곳은 공사가 중단됐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그 유적을 (서울시가) 훼손하거나 없앨 생각은 없으며, 신청사 지하에 조성될 서울역사갤러리 공간에 그대로 보존할 계획을 강구 중"이라면서 "다만, 일단은 (유적을) 다른 곳에 이전했다가 다시 옮겨와야 한다"고 말했다.
손과정(648?~703?)의 자는 건례(虔禮)이며 부양(富陽 절강성) 사람이다. 그에 관한 전기는 보이지 않고 여러 서론에 단편으로 언급되어 있어 그 대략만을 추정할 수 있다. 40세에 벼슬하여 우위주조참군과 솔부록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까지 이르렀으나 참언으로 물러나 빈곤하게 살다가 낙양 식업리(植業里)의 객사에서 죽었다. 진자앙(陳子昻)이 묘지를 썼다.고전을 좋아하고 문학적 명성도 있었으나 특히 초서를 잘 썼다. 이왕(二王)을 배워 임모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는데, 당대의 서론가 장회관(張懷瓘)은 「서단」에서 손과정의 글씨를 신(神)·묘(妙)·능(能) 3품 가운데 능품에 배열하고 "儁拔剛斷 尙異好奇"라고 평하였다. 이왕의 글씨를 배워 힘이 넘치는 남성적인 글씨를 구사하였으며, 글씨에 기이한 풍도가 깃들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왕소종(王紹宗)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의 글씨는 지나치게 느리게 써서 느슨한 폐단이 있었고, 손과정은 늘 급하게 써서 버리곤 하였다. 이에 왕소종의 너그러움(寬)과 손과정의 사나움(猛)을 중화하면 좋을 것이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 가운데 특히 '少功用有天材'라고 평한 구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손과정이 천재성을 보이며 힘써 연습하지 않아도 금새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일반적으로 공부에서 천재설과 장인설을 일컫는데, 대부분의 경우 장인설을 높이 평가한다. 천재가 쉽게 일가를 이루는 것보다 평범한 사람이 오랫동안 공부하여 마침내 깨달은 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보다 드라마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장회관의 말대로 손과정은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정작 손과정은 자신의 천재성을 꾸준한 노력과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발현했다고 토로하고 있다. 이렇게 결실을 맺은 「서보」는 그의 문재과 필재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서품이다.손과정이 직접 글을 지어 초서로 쓴 「서보」는 초서에 관한 의견을 진술한 것으로 시작한다. 변려문의 형식으로 작성된 글은 왕희지를 전형으로 삼고, 위진 이래의 능서가들을 품제하면서 서예술의 가치 및 학서이념을 논하였다. 특히 창작론으로 제시한 오합오괴(五合五乖)는 매우 유명하여 일찍이 추사 김정희도 작품으로 써서 남긴 바 있으며, 이외에도 집사용전(執使用轉), 삼시삼변(三時三變)의 설을 통하여 작가와 운필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서보」의 글씨에 대하여 당대에는 천편일률적이라서 변화가 적고 운필이 너무 빠른 단점이 있다고 폄하하고 있으나, 북송 이후에는 초서의 전범으로 존중되었다. 예컨대 미불은 당대의 초서 중 이왕의 법을 회득(會得)했다는 점에서는 손과정을 앞서는 자가 없다고 추켜세웠다. 이후 왕희지의 「십칠첩(十七帖)」과 더불어 초서 학습의 지남서로 지칭되었다. 지면 관계상 앞서 언급한 오합오괴 중에 오합(五合)만을 여기에 소개한다."늘 기쁜 마음으로 여유를 가지고 힘씀이 '一合'이요, 민감한 감수성으로 두루 아는 것이 '二合'이요, 좋은 날씨에 원기가 풍부한 것이 '三合'이요, 종이와 먹이 서로 발하는 것이 '四合'이요, 우연히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五合'이다." (一時而書, 有乖有合, 合則流媚, 乖則彫疏. 略言其由, 各有其五. 神怡務閑, 一合也; 感惠徇知, 二合也; 時和氣潤, 三合也; 紙墨相發, 四合也; 偶然欲書, 五合也.)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고양 행주성당과 강릉 임당동성당 등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근대 종교 건축물과 일제강점기 민간회사 사택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등록문화재로 예고했다고 21일 밝혔다. 행주성당은 1909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에 세웠다가 1928년 인근에 옮겨 지으면서 기존 자재를 대부분 재사용했고 1949년에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도 보존돼 있다. 특히 건물의 목조 뼈대는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있어 성공회 강화성당(사적 제424호)과 함께 대표적인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된다. 1955년에 지은 강릉 임당동성당은 뾰족한 종탑과 지붕장식 등 고딕성당의 건축기법을 정교하고 세련되게 구사한 건물이다. 이들 성당과 함께 등록문화재로 예고된 동해 동부(구 삼척개발) 사택 및 합숙소는 1937년에 지어진 단층 목조 건축물로 기혼자 숙소와 미혼자 숙소 등 모두 4동으로 구성됐다. 내부 복도형 서양식에 온돌을 사용한 절충형 양식으로 한국 근대 주거사의 중요한 자료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가장 큰 고민은 사적 공간을 어떻게 하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입니다. 사적지 관리나 보조 정도였다면, 굳이 전문학예직을 소장으로 뽑을 필요가 없었겠죠."지난 4월 강원감영 사적지 관리소장으로 임명된 이진형 소장은 "강원감영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학예직 소장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현재 강원감영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은 다례·예절교육 등 시민단체와 연계한 프로그램 정도. 일제시대 감영 관련 유리 원판 사진들을 상설전시하기도 하고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하고는 있지만, 차별성이 없다고 분석했다."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감영에 대한 역사교실 프로그램입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강원감영문화제'의 축제 전담 법인인 감영문화제위원회와 감영문화학교를 만들자는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직 예산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시에서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소장은 "2차 복원을 앞두고 콘텐츠 개발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강원감영과 관련된 기록들은 많이 남아있는 편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소스를 찾고 스토리텔링 과정을 거쳐 일반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예를 들어 감영에서 검시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감영 CSI'나 감영의 교육 프로그램을 패스하면 '선비자격증'을 주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며 "현재 관찰사를 비롯해 강원감영과 관련된 인물도 정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그는 "감영이 있는 도시간, 혹은 감영 전문연구자들의 교류도 필요한 것 같다"며 곧 전주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원주 역시 역사도시입니다. 감영이 500년 동안 존재했던 조선시대 지방정치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5소경 중 유일하게 한강이북지역에 있었던 역사도시입니다. 시민들도 이러한 역사에 대해 의식이 있었지만, 감영을 빼앗기면서 사라지게 된 것 같습니다."1990년대부터 연세대 근대한국학연구소를 통해 원주학을 제창해 온 오영교 연세대 인문예술대학 사학전공 교수(연세대 원주박물관 관장). 그는 "원주지역에서는 과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회복하기 위한 작업이 바로 강원감영 복원"이라고 말했다."역사적 건물 복원의 대부분이 정자 하나 짓고 정려각 하나 지어주는 고건축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수준이지만, 강원감영을 단지 건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단순한 건물 복원은 고양이 놀이터나 취객들의 배설구가 될 뿐이지요. "그는 "시청 이전이나 신도시 형성 등으로 원주가 서쪽으로 발전하고 있고 현재 감영 자리도 슬럼화가 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래도 감영 복원의 의미는 크다"며 "원주 토박이가 30% 밖에 안되고 도시가 황폐화되면서 떠나는 사람이 늘고있는 상황에서 강원감영이 원주의 구심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문화정책은 한 번 삐끗하거나 감정에 의해 하다보면 그 후유증이 큽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이지만 강원체신청에 생각없이 감영 부지를 내어준 사례가 대표적이죠. 강원감영 역시 허허벌판에 짓자는 소리도 나오고 있지만, 유물이나 유적은 현장에 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오교수는 "복원 규모는 합의가 필요하지만 역사학자로서는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한다"며 "강원감영은 역사적·건축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지역민들의 당시 자존심과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전라감영의 위상을 생각했을 때 상징적으로 몇 개의 공간만을 복원하는 것은 너무 가볍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상징공간을 형상화하는 것도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형상화를 잘못하면 추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지 못하고 일반인들에게 추상적으로만 느끼게 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거든요."하지만 그는 "전주는 문화를 활용하는 힘이 대단한 것 같다"며 "전라감영이 어떤 형태로 복원되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역사학자와 도시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역할이 다른 것처럼 작업 진행 단계에 맞춰 전문가들이 적절한 시점에서 투입돼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강원감영은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2번지 일대다. 부지면적은 총 9608㎡. 선화당과 포정루, 청운당, 내삼문, 중삼문, 행각 등 대구 경상감영에 비해 비교적 많은 건물이 남아있고 복원돼 있지만, 이는 전체의 20분의 1 정도다. 강원감영은 국가사적 439호로 지정되면서 시민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다. 문화재 복원 형태로 다른 시설 설치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강원감영 복원사업은 1995년 9월 강원감영 기본계획을 수립, 1997년도 국비 보조사업으로 책정돼 이듬해까지 선화당 창호 및 기와 보수공사가 실시됐다. 2000년 2월에는 강원감영지 발굴작업을 실시, 2001년 1단계 복원공사를 발주했다. 2004년 청운당 복원공사를 착공했으며, 2005년에는 1단계 복원공사를 완료했다. 2006년과 2007년 옛 후원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우체국 건물을 이전하고 연못자리, 봉래각, 관풍루 등을 복원하는 2단계 복원사업을 계획했다. 2007년까지 강원감영 복원에 투입된 비용은 총 158억8000만원. 국비 68억원, 도비 82억2000만원, 시비 8억6000만원이다.강원감영 복원은 그러나 단순히 수치로만 이해할 수 없다. 감영 복원과 그에 얽힌 원주 시민들의 바람을 읽으려면 춘천과 갈등 관계에 놓여있는 원주의 복잡한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영동-영서간, 춘천-원주간에 소지역주의가 남아있다'는 칼럼이 등장하고, 직장 내 순환근무에 있어서도 원주 사람들이 춘천을 기피하는 것이 현실. 지역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원주와 춘천의 경쟁 관계는 강원감영 이전과 관련돼 있다고 말한다.원주시 도심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강원감영은 고정형 관아로 1395년(태조 4년) 설치됐다. 특히 선화당은 우리나라 감영 건축물 중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건물. 그러나 1895년 감영은 춘천으로 이전했다. 일제시대부터 인적·물적 자원들이 춘천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현재 원주는 군사도시에 머물고 있다. 강원감영 맞은편 번화가의 중앙로가 여전히 'B도로'로 불리는 것도 이 곳이 군사도로였기 때문. 따라서 강원감영 복원은 과거 상처로 인한 원주 시민들의 피해의식을 위로하고 자긍심을 되찾는 역사적 과업이다.문제는 국가사적지 지정 이후 주변 지역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주시에서는 문화재 현상변경허용기준안을 만들고 있지만, 중앙로 일대 건물 신축 공사가 시작되기만 하면 감영과 관련 흔적들이 대거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하층을 포기하고 대신 건물 층수를 올리는 방안 등 언젠가 있을 수 있는 사적지로서의 원형복원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강원감영 관람료는 따로 없지만, 사실 받을 여건도 조성돼 있지 않다. 시민들을 위한 사적공원이라면 쉴 수 있는 의자나 고즈넉한 풍경이 있어야 하는데 그늘 하나가 없다. 소방시설 때문에 공간 구획도 제대로 돼있지 않으며, 감영 뒷문은 철문으로 돼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감영 방문객은 1년 동안 3만2000명~3만8000명 정도에 이른다. 주로 고건축이나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로, 가족 단위 방문객이나 단체 관광객들은 별 의미없이 다녀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에는 외국인의 방문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일가의 유물이 공개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17일 오후 국립고궁박물관 회의실에서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를 공개했다. 이 유물은 영친왕비가 일본에 거주할 때 소장하다 1957년부터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됐고 1991년 한일 정상회담 합의로 환수돼 궁중유물전시관(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관리하다 최근 유물 333점이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지정됐다. 영친왕 일가가 1922년 순종황제를 알현할 때 입었던 복식류와 각종 장식물과 장신구들로 조선왕실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왕이 의례시에 착용한 곤룡포(袞龍袍), 익선관(翼善冠), 옥대(玉帶) 등과 평상복인 저고리, 바지, 두루마기, 마고자 등이 있으며 왕비의 대례복인 적의(翟衣), 중단(中單.적의 안에 입었던 두루마기), 금직 당의(錦職 唐衣.저고리 위에 입는 예복), 왕자의 자룡포(紫龍袍), 두루마기, 바지 등이 있다. 의장품(衣裝品.의복을 장식하는 물건)은 왕의 익선관과 탕건(宕巾), 망건(網巾), 행전(行纏), 목화(木靴)등과 왕비의 가체, 족두리, 옥대, 당혜(唐鞋.가죽신) 등이 있다. 왕자의 것으로는 옥대, 타래버선과 향낭(香囊.향을 담은 주머니) 등이 있다. 장신구류는 왕비의 것이 대부분인데 용잠(龍簪.비녀머리를 용의 형상으로 만든 비녀)과 봉잠(鳳簪.봉황의 형태로 만든 비녀), 각종 비취잠, 매화잠, 떨잠 등의 비녀류, 마노 등으로 만들어진 가락지 등이 있다. 이들 유물 가운데 곤룡포와 적의, 자룡포는 왕과 왕비, 왕자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며 한 가족의 것이어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내년에 특별전을 개최해 영친왕 일가의 유물을 일반에도 공개할 예정이다.
완주 삼례는 역참(驛站)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역마(驛馬)의 주둔지였고 이를 위해 존재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국가의 공문서나 공공물자의 운송을 위해 설치된 역참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중국은 BC 1000년무렵 역전(驛傳)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 문헌(삼국사기)에는 신라 소지왕때(687년)'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라는 기록이 보인다.하지만 이 제도가 체계화된 것은 고려 때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22역도(驛道) 525역이라는 방대한 조직이 완성된 것으로 나와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이를 계승 보완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크게 흐트러졌다가 다시 정비했다.경국대전이나 증보문헌비고에는 전국의 도로망을 '9대로(大路)'로 나누고 간선과 지선, 노선번호, 이수(里數) 등을 명기하고 있다.호남지역은 9개 간선도로망중 제6로인 통영대로(서울-통영)와 제7로인 삼남대로(서울-제주)가 지나는데 삼례역이 분기역이다. 즉 서울-수원-천안-공주-여산을 거친 역로는 삼례에 이르러 전주-오수-남원-함양-진주-통영으로 가는 길과 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제주로 가는 길로 갈리었다.따라서 전라도 및 경상도 일부와 관련된 조정의 명령이나 보고, 군사적 통신은 반드시 삼례를 거쳐 오갔다. 새로 부임하는 전라감사나 관찰사도 이곳을 지나야 했고, 부근에서 출도하는 암행어사도 이곳의 말과 역리(驛吏)를 징발했다.증보문헌비고에는 삼례역에 971명의 역원(오수역 1440명)이 있었고 호남읍지(1793년)에는 869명의 역원과 말 15필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각 역에는 관둔전(官屯田)과 공수전(公須田)이 지급되었다. 1895년까지 이 일대에는 200여개의 마방(馬房)이 즐비하였다. 또 삼례역은 전주의 앵곡(이서) 반석(동서학동), 임실 임피 여산 함열 태인 정읍 고부 부안 김제 등 12개 역을 거느리고 있었다.이처럼 교통의 요충지다 보니 동학혁명 당시 2차례에 걸쳐 전국적인 봉기가 가능했다.마침 완주군과 (사)우리땅걷기가 세미나를 열어 삼례에 '옛길 박물관'을 건립하자고 제안했다. 좋은 아이디어나, 무엇을 어떻게 담을지 콘텐츠부터 생각하는게 어떨까 싶다./조상진 논설위원
우세남은 자가 백시(伯施)이며 여요(余姚 절강성) 사람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형 세기(世基)와 함께 고야왕(顧野王)에게 10여 년 간 공부하며 간혹 열흘동안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을 정도로 전념하였다. 수대에 비서랑·기거사인이 되었고, 당대에는 태종의 신임을 얻어 홍문관학사·비서감에 임명되었다. 홍문관학사 시절에 구양순과 함께 서법을 교수하였는데 그보다는 한 살이 아래였다. 외모가 매우 유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으나, 마음은 항상 정열에 불타 올바른 의론을 전개하였다. 양제(煬帝)는 그러한 면을 못마땅히 여겨 그를 등용하지 않았으나 당태종은 정반대였다. 당태종은 우세남을 서예고문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물됨을 사랑하여 우세남의 다섯 가지 뛰어난 점으로 덕행·충직·박학·문사·서간을 꼽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명군이 명사를 알아보는 법이다.'구당서' '우세남전'에는 당태종의 총애가 잘 나타나 있다. 당태종이 우세남을 홍문관학사로 임명하고 당대의 명사 방현령(房玄齡)과 더불어 문한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하루는 「열녀전」을 써서 병풍으로 만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 책이 없어 우세남이 속으로 외워 썼는데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었다. 태종은 그의 박식함을 중히 여겨 바쁜 정무에 틈이 날 때마다 우세남을 불러 담론하며 경사(經史)를 함께 보았고, 때로는 군신들에게 우세남을 본받으라고 교시하였다. 그가 81세로 세상을 떠나자 "우세남은 나에게 한 몸과도 같았으니, 습유(拾遺)하여 빠진 것을 보충하고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로 이 시대의 명신이자 인륜의 준적(準的)으로서, 내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는 반드시 얼굴을 들이대고 간하였다. 이제 그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니 그 애통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하고 탄식하였다. 세상을 떠난 후 칙명에 의하여 그의 초상이 능연각(凌煙閣)에 그려졌다. 저술로 「북당서초」가 있는데 이것이 전존하는 최초의 유서(類書)이다. 서예이론으로 「서지술(書旨述)」, 「필수론(筆髓論)」 등이 있다.우세남이 일찍이 지영 스님에게 사사하여 서명을 날리며, 홍문관에서 구양순과 함께 해서를 교수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구양순과 우세남을 비교하여 "우(虞)는 안으로 강유(剛柔)를 머금고, 구(歐)는 밖으로 근골(筋骨)을 드러냈다. 군자는 재주를 감추는 법이니, 우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하였다. 안에 엄중함을 간직하여 밖으로 표출된 뛰어난 그의 인품은 해서의 걸작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에도 잘 나타나 있다. 온화하며 높은 기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지금까지 소개한 초당삼대가 구양순·저수량·우세남 등으로 대표되는 초당의 해서는 힘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진나라 사람들의 행·초서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움과 미완의 감각은 이미 희박해졌다. 그것은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합리주의 정신이 이와 같은 부동(不動)의 균제미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진나라와 당나라가 공통적으로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지만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는 균형(均衡)의 조형이고, 후자는 균제(均齊)의 조형이라 말할 수 있다. 초당의 해서는 완성된 균제미에 그 특색이 있다. 이것은 그 당시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국가성 내지 공공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것이다. /이은혁(사단법인 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해 살펴볼 수 있는 국내 사례는 대구의 경상감영, 원주의 강원감영, 공주의 충청감영 정도다. 그러나 충청감영의 경우 1994년 기존의 감영터를 학교 부지로 활용하고 도심부 외각에 이전복원하면서 감영의 공간구조와는 차이가 생기게 됐다. 선화당과 동헌을 활용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국악 교육을 실시하는 등 시민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이전복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정통성 문제에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충청감영을 원래 감영부지였던 곳에 다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계속적으로 제기되고는 있지만, 실현가능성은 낮다.따라서 공원으로 정비해 '도심 속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경상감영과 국가사적지로 지정해 '문화재 복원 형태'를 띄고 있는 강원감영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대구 경상감영을 찾아간 지난 11월 13일에는 경상감영 관광자원화 사업 일환으로 징청각에 대한 유구 조사가 실시되고 있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상감영 복원 사업은 벽체 없이 기둥만 남아있던 선화당과 징청각의 벽체와 창호를 복원하는 것.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의 주도로 징청각의 기단이 확인된 상태였다.경상감영 선화당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대구지역 전문가들은 "용이 임금을 상징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순종이 경부선 철도를 만들었을 때 경상감영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해석했다.1601년 대구로 이전한 경상감영(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21번지 일대)은 각각 지방유형문화재 1호와 2호로 지정된 선화당과 징청각이 남아있다.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선화당은 1730년 두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나 순조 7년(1807)에 재건됐다. 선화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징청각은 감사 처소로 쓰였던 곳으로 역시 1730년 두차례의 화재가 있었지만 정조 13년(1789)에 재건됐다. 선화당 뒤 왼편에 위치하고 있는 징청각은 감영 건물이 남아있는 강원감영이나 충청감영에도 없으며 경상감영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다.경상감영의 대지면적은 총 1만4800여㎡. 선화당은 184㎡, 징청각은 254㎡다. 경상감영터는 원래 경북도청사로 활용됐지만 1966년 도청사가 이전하고 난 후 1970년 중앙공원으로 조성됐다. 이후 1997년 아예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경상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여론 형성이 잘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감영 건물이 있는 공원을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면서도 정작 시민들은 감영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이나 경상감사 도임순력 행차 등이 경상감영에서 재연되기도 하지만, 그 때 뿐 공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노년층이었다. 감영 주변에는 환갑 지난 마담이 아직도 한복을 입고 손님을 맞는 다방이나 일본식 정종을 파는 술집 등 노인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한 장소들이 많았다. 감영을 관리하는 대구 중구청은 소비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경제효과를 누리고 싶어하지만,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감영을 공원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 문제도 있다. 행정적으로 문화재 관리와 공원 관리, 즉 두군데의 관리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두가지 법이 적용된다는 의미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아 결국 현상유지밖에 안되고 있었다.결과적으로 경상감영 복원은 시민단체의 요구와 정치인의 공약 사업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향토사학자와 교수, 언론인 등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다.대구광역시 이진현 학예연구사는 "결국은 예산문제였고, 문화재를 복원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문화관광 명소로 육성하겠다는 '경상감영 관광자원화사업'을 통해 국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광자원화사업은 대구근대역사관 조성과 함께 진행되는 것으로, 감영 복원 보다는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됐던 대구산업은행 건물을 대구근대역사관으로 바꾸는 사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이 학예연구사는 "왜세 수탈의 현장에 대구 정체성을 담을 수 있냐는 부정적 의견도 있지만, 대구의 많은 근대문화유산을 총괄할 만한 구심점이 필요했다"고 덧붙였다.경상감영 복원은 실질적으로는 복원이 아니라 보수 개념의 제한적 복원이었다. 일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완전복원이라는 오해도 받고 있지만, 장기과제일 뿐 세부적으로 계획된 것은 없다. 대구광역시 역시 완전복원이라는 표현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실제로 경상감영을 완전복원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부지인 병무청이 돌연 이전하겠다는 의사를 바꾸면서 감영터 확보는 더욱 어려워 졌다.그러나 경상감영과 관련된 자료 수집만큼은 철저하게 하고 있다. 1998년 「경상감영 사백년사」를 발간하면서 경상감영 관련 자료가 1차적으로 정리됐으며, 이후 2004년 조선시대 경상감사의 부임 과정과 연중 활동 내역을 담은 「영영일기(嶺營日記)」와 경상감사가 조정에 올려보낸 각종 공문서의 내역을 담은 「영영장계등록(嶺營狀啓謄錄)」을 국역했다. 경상북도에서 발간한 「경상감영의 종합적 연구」에는 감영 관련 자료 283건의 목록 및 해제가 수록됐으며, 2008년 「경상감영공원비석 자료집」이 별도로 발간됐다.경상감영 복원과 관련해서는 경상감영이 최초로 설치됐던 상주도 관심이 많다. 도시가 낙후되면서 경상감영을 통해 오래된 도시로서의 역사성을 내세우고 이를 도시 발전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 '상주 경상감영 테마파크 조성' 사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욕심 같아서는 좀더 많은 건물을 복원하고 싶지만, 자칫 영화 세트장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규모나 방법 등 복원 자체는 여러가지 방향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활용방안이니까요."「경상감영 사백년사」 발간에 참여하는 등 10년 전부터 경상감영 복원을 주장해 온 조영화 대경대학 건축리모델링과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조교수는 "전국적으로 감영 복원 붐이 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경제적으로 여유로워 지면서 외국 문화와 비교했을 때 우리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에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대구는 오래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전통건축물이 없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는데 현대 건축물 말고는 대구 역사를 보여줄 만한 게 없다는 여론이 일면서 기회가 잘 맞아떨어진 거죠. 경상감영 복원을 통해 감영의 흔적이라도 남겨 역사적 의미를 찾자는 겁니다."조교수는 "전주는 풍남문과 객사, 한옥마을 등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전주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데 전라감영이나 4대문 복원을 무리해서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든다"며 "전주가 너무 옛날 도시화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경상감영은 부지 확보도 안돼있고 자료도 많지 않은 편이라 기록을 토대로 한 건물 복원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라감영은 복원 규모와 관련해 여러 의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도시 역사성을 생각해 봤을 때 전부 복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역사의 맥락성을 무시하기 보다는 공간의 상징적 의미를 살려 중요한 건물만을 복원하는 방법을 권하고 싶어요."조교수는 옛 전북도청사에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며 "도시에는 근대 역사도 필요한 만큼, 옛 도청 일부분을 남겨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또 "강원감영은 그나마 낫지만 이전복원한 충청감영은 크게 감흥이 없다"며 "건물만 달랑 있어서는 공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1980년대 중반 전주향교와 관련된 논문을 쓰기도 했던 조교수는 "전주향교는 권위나 배치방식, 건축적 의미가 큰 데도 불구하고 그 위상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김정배)은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의 문화상징'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한국사상을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고 박일훈 국립국악원장과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각각 무형문화와 유형문화에 대해 발표한다. 이 참 한국관광공사 사장과 조희문 한국영화진흥위원장은 각각 관광과 한류를 주제로 발표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영문책자 '21 Icons of Korean Culture'(한국의 문화상징 21가지) 발간을 기념하고 한국문화 이미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이번 심포지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춘향전'과 '상춘곡' 등 전북을 대표하는 고전 문학의 소재를 문화상품화 해 세계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됐다.지난 12일 오후 2시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열린'한국문화세계화전략심포지엄'에서 최종열 전주대 교수는 발제 '한국문화 상품화 통한 세계화 전략'을 통해 "익산의 '서동요'와 남원의 '춘향전' 에 담겨진 로맨스를 통해 사랑의 시장을 만들어 이를 세계화하자"며 "특히 익산은 보석산업클러스터를 주축으로 사랑을 테마로 한 영화 시장, 화장품 시장 등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최 교수는 전주대 산학협력단이 만든 애니메이션 정극인 '상춘곡'을 예로 들면서 '단표누항(소박한 시골 생활)'을 각종 체험으로 상품화하고, 식기류인 방자유기와 칠기도 개발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군산의 대표 근대문화유산인 옛 군산세관 청사(전북도 기념물 제87호)를 근대문화교육의 장으로 만들어 한국문화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김미경 나주시청 문화관광과 담당자는 발제 '스토리텔링을 통한 문화관광'을 통해 "옛 군산세관 청사가 벨기산 붉은 벽돌과 뾰족탑을 세운 지붕 등 유럽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곡식과 군수물자를 일본으로 보내는 창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를 초점에 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담당자는 "군산에 살았던 일본인 포목상 히로쓰가 지었던 히로쓰 가옥은 일본인 관광객 숙소로 활용하고, 째보 선창 일대를 주막거리로 만들어 향수를 주는 공간으로 만들자"고도 했다.전북대 국제문화교류연구소(소장 진상범)와 전북대 차세대컨버전스정보서비스 기술연구센터(소장 김용성)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은 '한국문화 정체성의 세계화(제1분과)', '한국음식의 세계화(제2분과)', '한국관광의 세계화(제3분과)'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호랑이와 인간은 서로 삶의 터전을 존중한 덕분에 평화관계를 유지했으나 조선시대 들어 호랑이 사냥이 빈번해지면서 호환(虎患)이 급증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런 학설은 2010년 경인(庚寅)년 호랑이해를 앞두고 한반도 역사 속에서 인간과 호랑이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논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이틀 앞둔 13일 제시됐다. 서울대 수의대 이항 교수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김동진 교수는 오는 15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이 대회를 앞두고 우리 조상과 호랑이의 관계 변천사를 규명하는 논문을 발표한 것. 먼저, 이 교수는 "고려 이전까지 한반도의 인간과 호랑이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고 소개했다. 삼국과 고려 사회의 주류 사상은 짐승일지라도 까닭없는 살생을 삼가는 불교였기에 인간과 호랑이가 서로 영역을 존중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김동진 교수도 "실제 고려시대 지식인인 김부식과 이규보 등은 맹수를 쫓아내는 데는 찬성했지만, 적극적인 포획과 살상을 장려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와 이 교수의 발표문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호랑이가 물러나게 되고, 사람이 떠나면 그곳에 호랑이가 와서 살게 되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14세기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유학자들은 맹수인 호랑이를 포획하고 죽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람과 호랑이의 평화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급변했다. 조선인들은 농업중시 정책에 따라 대대적인 농지 개간을 추진하면서 호랑이의 주된 서식지였던 저습지가 수전(水田)으로 개발된 탓에 호환(虎患)이 크게 늘었다. 조선이 호랑이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군사조직인 착호군(捉虎軍)을 편성하는 등 체계적인 포호정책을 펼치면서 한반도의 호랑이는 급격히 줄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으로 명맥이 끊겼다. 호랑이를 만난 백성의 행동도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조선 이전의 한반도인이 호랑이의 공격을 받으면 일행 중 한 명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거나 희생당한 가족의 복수도 포기하는 등 호환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조선 백성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호환에 맞섰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 13년(1379년) 경상도 안동에서 남편을 물고 달아나는 호랑이를 아내가 목궁(木弓)으로 때려 쫓았고, 세종 2년(1398년)에는 역시 안동에서 호랑이에게 물린 남편을 아내와 두 딸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가 살려낸 기록이 있다. 단종 1년(1441년) 함길도에서는 학생신분이었던 신경례가 보여준 모습은 훨씬 극적인 사례다. 신경례는 아내 내은덕과 함께 읍성으로 가던 길에 호랑이를 만났고, 호랑이는 상대적으로 쉬운 먹잇감인 아내를 물려 했다. 이에 신경례는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잡고 쓰러뜨리고서 발로 얼굴을 차고 배에 올라타 몸싸움을 벌였고 결국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를 죽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신경례 부부와 마을 사람들의 행동은 상당한 군사적 준비와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라고 설명했다. 이항 교수는 "우리는 지금 호랑이를 민족문화의 상징이자 생태계의 최고조절자로서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자연유산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지만, 조선과 일본강점기의 호랑이는 말 그대로 해수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조선의 포호정책이나 일제의 해수구제 정책을 반성은 할 수 있어도 일방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도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되살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다"라고 덧붙였다.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외규장각 유물을 반환하라며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인 문화연대는 지난 4일 파리 행정법원에서 열린 심리에서 "프랑스 정부가 약탈임은 인정했다"고 9일 주장했다. 문화연대는 "심리에 참석한 프랑스측의 정부 대변인(Public Reporter)이 기존에 법원에 제출한 서면을 그대로 읽으면서 '불행한 약탈'"이라고 표현했지만 지금은 프랑스 소유이니 반환은 안 된다는 설명을 제시한 것으로 전했다. 문화연대 황평우 문화유산위원장은 "이 소송을 맡아 진행해온 김중호 변호사로부터 최근 소송 상황 등을 보고받았다"며 "외규장각 의궤를 발굴, 목록화해 반환운동을 촉발시키고 현재는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 입원 중인 박병선 여사도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황 위원장은 "정확한 판결일은 알 수 없지만 6개월이내에 판결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문화연대는 2007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해 약탈 물건을 정부 재산으로 편입하는 프랑스의 관련 법령이 잘못됐다는 이 소송을 제기했으나 그동안 답보 상태를 보이다가 지난 4일 처음이자 마지막인 심리가 열렸다. 문화연대는 "이 소송에서 승리하면 의회 승인을 거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받을 수 있게 된다"며 "만일 패소한다면 이번 소송 때 처럼 시민 모금을 통해 소송 비용을 조달하고 항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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