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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⑬저수량의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당대종의 치세기인 정관(貞觀) 연간에 걸출한 서예가로서 또 한 사람 저수량을 들 수 있다. 저수량(596~658)은 절강 항주 전당(錢塘) 사람이며 자가 등선(登善)이다. 당태종과 고종조에 벼슬하여 고위직에 올랐으나, 만년에 고종이 무측천에게 양위하려는 것을 반대하다 노여움을 사 좌천되어 애주(愛州)에서 보내다 사망하였다. 일전에 소개한 구양순, 우세남과 더불어 초당삼대가로 불린다.정관 19년(645) 1월 7일, 삼장법사 현장(602~654)은 17년에 이르는 인도유학을 마치고 경론(經論) 657부를 꾸려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한문 번역에 착수하여 익년 7월 인도와 서역에 대한 견문록을 완성하는 한편, 우선 75부 1335권을 번역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당태종은 국가적 사업으로 그를 후원하고 있었는데 현장의 요청에 따라 정관 22년(648) 8월 직접 '삼장성교서'를 찬하고, 동시에 황태자가 서기(序記)를 지어 저수량에게 건네주었다.바로 그해, 황태자는 생모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추선하기 위하여 장안의 진창방(晉昌坊)에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창건하였다. 영휘 3년(652)에 새겨 안치할 것을 희망했으나 그 다음해 탑의 최상층에 두 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탑은 붕괴되어 버렸고, 측천무후가 장안에 있을 때(701~704) 새로 7층 전탑(塼塔)을 세우고, 1층 남면 입구 동쪽벽에 서비(序碑)를, 그리고 서쪽 벽에 서기비(序記碑)를 넣었다. '안탑성교서'란 이 두 비를 포함해서 호칭하는 말이다.'안탑성교서'는 영휘 4년(653) 저수량의 나이 58세 때의 글씨이다. 같은 모양으로 제작된 두 개의 비석에는 팔분으로 '大唐三藏聖敎之序' 8자가 우에서 좌로 2행에 걸쳐 쓰여 있고, 전액 '大唐三藏聖敎序記' 8자는 좌에서 우로 2행으로 배치되었다. 본문의 글씨 역시 이와 같은 방향으로 쓰여 있어 대칭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비석을 세울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序碑는 21행에 매행 42자로 전 821자인데 불교의 전래와 현장법사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序記碑는 20행에 매행 40자로 전 642자이며 아버지 태종의 이해와 현장이 행한 사업의 의의를 서술하고 있다. 이 글씨는 살이 빠지고 골기가 강한 획을 구사하고 있으며, 태세와 강약의 변화가 많다.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이 절제미를 강조하여 전형화된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면,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는 결구에서 공간의 운용이 뛰어나 경쾌하고 맑은 풍운(風韻)을 자아낸다. 저수량의 해서비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진 것이므로 자신의 독자적인 서법을 완성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초당삼대가는 왕희지 이래로 전해져 온 필법을 해서로 전형화한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글씨는 비록 소해이지만 이미 체세가 확립되어 법칙화 되어 있으며, 결구의 전형성을 잘 보여준다. 저수량의 '안탑성교서'는 내용면에서는 회인이 집자한 '집자성교서'와 같은 류이며, 형식면에서는 구양순과는 차별되는 또는 당대 서법의 한 전형성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안탑성교서'보다 1년 전에 쓰여진 '방현령비'가 있고, 20년 전에 쓰여진 '이궐불감비'가 용문석굴 벽면에 자리해 있다. 모두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으나 정관 12년에는 당태종을 명을 받고 내부에 수집된 왕희지의 글씨를 감정하여 '우군서목(右軍書目)'을 작성하고, '난정서'를 탑모한 것을 보더라도 그의 서법과 초당삼대가가 왕희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한국서예문화연구원 이사장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2.09 23:02

"전통 판소리가 지닌 한계, 창극·창작판소리로 보완"

창극과 창작판소리가 전통 판소리가 지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판소리 운동으로 주목받았다.한국유네스코연맹 전북협회(회장 윤석길)가 주최한 '판소리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선정 6주년 기념세미나'가 8일 오후 3시30분 전주관광호텔에서 개최됐다.'판소리 공연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발표한 손태도 서울시 문화재 전문위원은 "공연예술은 어떤 식으로든 당대 시대정신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삶과 그와 관련된 예술 세계를 가지고 있는 전통 판소리는 그 자체만으로는 오늘날의 예술로는 한계가 있다"며 전통 판소리의 음악적 성과를 잇고 발전시킬 수 있는 근대적 공연물로서 창극과 창작판소리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손 위원은 그러나 "이러한 판소리 운동이 전통 판소리의 연장선상에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창작 판소리의 경우 재담 소리나 재담극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창극과 관련해서는 시대 정신과 연결될 수 있는 내용으로 창극 대본을 쓸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다.류수열 전주대 교수 역시 "판소리가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현대인의 감정을 담아내는 예술 양식으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며 "원형은 원형대로 유지하면서도 이를 새롭게 변형시려는 노력이 동시에 시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판소리 성음의 개념과 실제'를 주제로 발표한 전인삼 전남대 교수는 판소리 용어들이 주로 창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정리되다 보니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교수는 "판소리 용어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게 정리돼 있지 않다 보니 판소리 연구에 혼선을 초래하고 연구성과를 도출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며 판소리 용어 정립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9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③전라감영 복원의 쟁점

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고민은 감영 복원 규모와 옛 도청사 건물 활용, 사업비 확보 문제다.특히 감영 복원 규모는 전라감영 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건물의 복원규모를 결정 짓는 것으로 전라감영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입장과 복원방식이 제기되고 있다.중요한 것은 전라감영이 단순히 건물 복원에 국한되어서는 안되며 원형 복원이든 부분 복원이든, 감영터 완전 복원이든 축소 복원이든, 현재와 미래를 담아내는 도심재생의 전략이 도입돼야 한다는 것이다.전라감영 복원은 매우 조심스러운 문제다. 문화재 복원이 자칫 잘못하면 개발 제한 문제로 주변 지역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잘못 됐을 때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라감영 공간적 복원범위와 건물 규모전라감영 복원에 있어 가장 큰 논쟁은 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역사적 건물의 복원규모다.역사적 건물 복원과 관련해서는 원형 복원과 상징적 부분 복원으로 나눌 수 있다. 원형 복원의 경우 대개 역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전주문화가 한국문화를 대표할 수 있도록 최대한 원형을 살릴 수 있도록 복원하자는 것이다. 고고학적 발굴과 자료조사 등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라감영을 문화재적 가치를 가진 역사적 고건축물로 복원할 때 관광자원으로서도 완전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주장이다.부분 복원은 전라감영의 핵심시설을 상징적으로 복원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문화시설을 배치해 주변과 연계하는 상업적 목표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대개 감영복원으로 인해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변 상가 주민들의 입장이다. 이 경우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 안채인 내아(內衙), 감영 입구인 포정루(布政樓) 등이 복원해야 할 감영 핵심시설로 거론되고 있지만, 선자청(扇子廳)이나 지소(紙所), 인출방(印出房) 등 전라감영의 특징적인 공간이자 전주의 정체성이 담긴 공간들은 살려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복원의 공간적 범위와 관련한 논의는 전라감영터 완전 복원과 옛 도청사 부지 복원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그러나 전라감영터 완전 복원은 역사적 사실규명이 어렵고 엄청난 사업비가 필요, 실현 가능성이 낮다. 옛 도청사 부지 복원은 현재 부지를 확보한 상태라 재정부담이 최소화되고 단기간내 사업추진이 가능하다. 그러나 옛 도청사만을 복원 부지로 삼을 경우 주요시설의 규모있는 복원이 불가능해 역사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옛 도청사 건물의 활용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옛 도청사 건물의 존치 여부도 중요한 논의 대상이다. 전라감영 복원을 위해 무작정 건물을 헐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 특히 옛 도청사는 행정구역이 개편되고 감영이 해체된 이후에도 전라북도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전라감영의 맥을 잇고 있다. 건물 역시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존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옛 도청사 건물 활용에 대한 고민이 요구되고 있다.구체적으로는 가치가 높은 건물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도청사 건물과 의회 건물은 존치, 증축한 건물과 경찰청 건물을 철거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최근에는 근대문화유산이나 산업유산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일면서 옛 도청사 건물을 리모델링 후 도서관이나 미술관, 호텔 등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호응을 얻고 있다.하지만 전라감영 복원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전체건물을 철거, 전라감영 복원규모가 확대되기를 바라고 있다.▲ 복원 사업비 확보지난 10월 전주시가 '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비' 100억원과 '전주성 4대문 복원사업비' 28억원 등 총 128억원을 내년 예산으로 지원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했지만,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에 따르면 전주시는 내년부터 오는 2021년까지 총 748억원을 투입하고, '4대문 복원사업'에도 내년부터 2020년까지 총 1800억원을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국비 확보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대규모 사업인 만큼 시는 국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국가 사적지로 지정될 경우 사업비 확보는 용이하지만, 전라감영 부지에서 객관적인 유구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국가사적지 지정은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8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전라감영의 의미

전라감영은 조선시대의 전라도, 즉 전북과 전남, 제주도를 통괄했던 지방통치기구다. 전라감영 복원은 호남제일성으로서 전주의 이러한 역사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은 "전주가 지금은 왜소해 졌지만, 조선시대 제주도까지를 포함한 호남 일원을 전주에서 다스렸다는 것은 곧 당대 전주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근대 관민협치의 역사공간으로서도 전라감영을 주목했다. 조교수는 "전주는 한국역사상 최초로 관과 민이 함께 논의해서 지역을 다스리는 관민협치의 민주적 정치경험을 이뤄낸 역사적 도시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 동학농민혁명 집강소 통치"라며 "그 공간인 전라감영이 회복돼 그 현장에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관장 역시 "동학농민군은 각 군현에 집강소를 두고 이를 통괄하는 대도소를 감영과 객사에 두어 개혁을 전개했다"며 "세상을 한바탕 바꾸고 외세를 물리쳐 민족자존을 지키려고 했던 우리 민족과 전라도의 위대한 역사였던 동학혁명의 중심이 바로 전라감영이었다"고 덧붙였다.전라감영 복원은 전주 전통문화도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관장은 "전라감영에는 전주가 자랑하는 한지를 뜨던 지소와 책을 찍어내는 인출방, 부채를 제작하는 선자청이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주대사습놀이에 등장하는 통인청이 선화당 옆쪽에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교수는 "결론적으로 전라감영은 전통교육·학술문화·음식문화·판소리예술문화·전주한지와 부채문화의 중심으로, 전라감영의 복원과 활용을 통해 전주문화를 재현하고 계승해야 한다"며 "전라감영 복원은 역사와 문화의 복원이란 측면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전라감영 복원을 통해 조선시대 지방통치기구인 감영의 모습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전라감영의 경우 현존하는 건물은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건물을 재현해 냈을 때 경상·충청·강원감영 등과 관련지어 감영의 전면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다. 또 경상·충청감영 등의 소재지가 중간에 이전된 것과 다르게 전라감영은 감영제가 실시되고 해체될 때까지 타 지역으로의 이전없이 전주에만 있었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8 23:02

"내년 문예진흥기금…이렇게 준비하세요"

전라북도가 2010년도 문화예술단체 지원사업(문예진흥기금 지원사업, 무대공연작품제작 지원사업, 푸른음악회)과 관련해 9일 오후 3시 도청 대회의실에서 설명회를 개최한다.2010년에는 문화예술단체 지원사업이 총 3차로 나눠 진행된다. 1차 공모(10일~내년 1월 8일 신청접수)는 문예진흥기금 20억원, 무대공연작품제작 8억원, 푸른음악회 1억원. 지원분야는 예술창작역량강화, 신진예술가지원, 생활문화예술활동, 찾아가는문화활동(푸른음악회), 장애인·소수자 문화활동지원, 문화예술교육체험, 문화예술기반구축, 사이버문화활동, 문화예술교류활동, 문화예술자료조사연구, 전통문화자료보존발굴, 예술가구술생애사기록, 계기성 프로그램지원사업, 예술전용공간지원, 무대공연작품제작 등으로 나뉜다.2차 공모(10일~24일 신청접수)는 지역특성화사업(공연예술집중육성사업 및 수도권전시지원사업)에 4억4천만원, 3차 공모(2010년 2월 중순경 신청접수)는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에 2억원, 레지던스 프로그램 지원사업에 3억원이 지원된다.그동안 지원되던 우수기획 다년간 지원사업(공연예술집중육성사업, 지역소재창작물집중육성사업)은 기타 사업과의 중복 및 신청 저조로 중단됐으며, 무대공연작품제작지원사업은 서류심의만으로 사업대상을 선정하게 됐다. 또한 예산집행의 투명성을 위해 보조금 교부신청시 자부담액을 보조금 관리전용통장에 입금한 후 사본을 제출해야 한다.신청접수는 전북도청 문화예술과 방문 또는 우편으로 가능하다. 문의 063) 280-4844, 4846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8 23:02

파리 북부 폐광 지대에 루브르 분관

프랑스 북부의 폐광 지대에 루브르 박물관 분관이 들어선다. 프레데릭 미테랑 문화장관과 루브르 박물관 관계자들은 4일 북부 폐광 지대의 중심도시인 랑스에서 루브르 분관 착공식을 가졌다. 허름한 집들이 일렬로 나란히 늘어선 탄광 지대의 언덕배기에 들어설 이 건물은 유리와 알루미늄으로 외장한 늘씬한 모습으로 설계됐다. 이곳을 찾는 관람객들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유리벽을 통해 바깥의 정원과 숲, 산과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 분관에서는 이집트 유물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이슬람 예술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루브르 소장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분관이 항구적으로 소장하게 되는 유물은 없으며 모든 전시품은 파리의 루브르 본관에서 대여해 순회전시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1억5천만유로를 들여 2012년 개관할 예정인 루브르 랑스 분관은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피폐해진 이곳 경제에도 활력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스페인의 빌바오에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도시 전체가 부흥하게 된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해변과 가깝고 바스크족의 독특한 음식 문화가 자리잡은 빌바오와 달리 랑스는 관광객들을 잡아끌만한 다른 요인들이 없어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랑스는 1차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됐던 곳이며, 2차대전 때에는 나치 독일에 점령된 후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아있던 탄광마저도 1986년 문을 닫은 이 곳의 실업률은 14% 정도로 프랑스 평균 9.5%보다 크게 높은 편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7 23:02

"한스타일진흥원 재정 자립 위한 수익 예산 계획 필요"

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5대 핵심사업 중 하나인 한스타일진흥원을 건립하려면 건립사업비 외에도 운영비의 국비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4일 오후 4시 최명희문학관에서 '한스타일진흥원과 한지산업진흥원의 운영 방안'을 주제로 연 천년전주문화포럼에서 김인순 전주시정발전연구원은 "한스타일진흥원 운영비가 정부로부터 지원되지 않는다면, 전국의 한스타일 네트워크를 마련하고, R&D를 기반으로 한 연구기관으로 운영되기가 어렵다"며 "운영비 확보를 위한 중·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김 연구원은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의 인가를 얻은 비영리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전북도와 전주시가 지원조례제정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영비를 확보하는 방안도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오영택 전주대 교수는 "한지산업진흥원이 한스타일진흥원 산하 기구가 되기 전까지 운영비 확보를 위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며 "전주시가 한지산업진흥원을 전주문화재단 산하 기구로 검토하기 보다 한지산업진흥원을 센터화해 그 명칭을 유지하면서 한스타일진흥원 산하로 들어가는 방식이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오 교수는 "한지산업진흥원이 내년 운영비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법인화해 민간수탁으로 조직을 재정립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5년간 운영비 확보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고언기 전주시 전통문화국장은 "한지산업진흥원이 전주문화재단 산하 기구로 가는 것에 대해 검토중이지만, 결정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12.07 23:02

대영박물관, 한국어로 작품 해설

"이것은 기원전 1500년 경에 사망한 여성의 미이라 가면입니다. 즉, 이것은 3,500년 전의 것입니다."(삿제후티의 미이라 가면)세계에서 매년 6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는 대영박물관에서 멀티미디어 기기를 이용해 이처럼 유명 전시품의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대한항공은 1일 오전 8시30분(현지 시각) 런던 대영박물관 인라이튼먼트 갤러리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닐 맥그리거 대영박물관장, 한승수 전 총리, 유의상 주영 한국대사관 공사, 원용기 주영 한국문화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어 작품 안내 서비스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식과 시연행사를 열었다. 이로써 지난해 2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시작으로 6월 러시아 에르미타주박물관에 이어 대영박물관까지 세계 3대 박물관에서 대한항공 측의 지원으로 한국어 작품 해설이 이뤄지게 됐다. 해설은 주요 전시 작품 220개에 대해 이뤄지며 해설 원문은 박물관 학술팀이, 음성 녹음은 성우 7명이 각각 맡았다. 조양호 회장은 인사말에서 "인류가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함께 즐기고 감동을 공유함으로써 소통과 교류를 더욱 촉진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전세계에 걸쳐 문화 예술 후원 활동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며 "국민들도 세계 3대 박물관의 작품을 한국어로 감상하며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다른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후원을 요청하면 적극 검토해 한국 관광객들이 세계 문화 예술을 한국어로 쉽고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그동안 구형 오디오 안내 기기를 이용해 영어, 스페인어, 일본어 등 3개 언어로만 안내 서비스가 이뤄졌으나 이날부터 한국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 청각 장애인을 위한 수화 등 8개 언어가 추가됐다. 1753년 설립된 대영박물관에는 이집트 파라오 석상, 파르테논 신전 조각상, 로제타석, 투탕카멘과 같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소장돼 있으며 지난 1997년 한국관도 문을 열었다. 맥그리거 박물관장은 한국관 확장 계획을 묻는 질문에 "향후 몇 년 간 전시품을 향상시킬 계획"이라며 "또 한국 문화 축제나 강연, 음악공연 등 박물관에서 할 수 있는 이벤트를 늘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관은 전시공간이 한정돼 있고 방문객이 많이 찾고 전시품의 질도 우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간 확대 보다는 문화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가족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을 찾은 김준성 씨는 "다른 나라에 가면 문화를 이해하고 체험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는데 여기 와보니 한국어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멀티미디어 기기가 갖춰져 있어 상당히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3 23:02

전주 한옥마을 지붕, 기와 공사 잘못됐다

전주 한옥마을 기와가 균형을 잃고 있다.한옥마을의 기와가 옛날 기와보다 무거워 기와 사이가 벌어지고 추녀와 서까래가 처져 곡선미를 잃는 데다 한옥의 수명이 짧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지난달 전주시의 전주전통문화센터 관리 자문 요청으로 한옥마을을 방문한 이근복 번와장(59·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은 "한옥마을의 위상에 걸맞지 않게 기와공사가 돼 있다"며 "현재 사용되는 기와는 단단하지만 옛날 기와보다 50% 이상 무겁기 때문에 이를 얹다 보면, 서까래가 쳐지고, 한옥이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이같은 문제점은 기와를 잇는 번와 와공 자격증 소유자가 전국적으로 5000여명 가까이 되지만, 공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데서 비롯된다. 한옥마을 뿐만 아니라 경복궁 근정전(국보 223호)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고주(高柱·높은 기둥)가 4개나 부러졌고, 경회루(국보 224호)의 추녀가 3개나 부러진 것도 기와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건물이 균형을 잃게 돼서다.그는 "기와가 무거워졌다면 기둥에 부담이 가는 만큼 보강공사가 필요하지만, 같은 공법으로 공사하는 게 문제"라며 "건물에 따라 상황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10년 내 보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이 번와장은 "한해 문화재수리기능자가 수십 명씩 배출되지만, 한 평짜리 공간을 만들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며"자격증은 있어도 기술이나 현장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공사를 맡으면 앞으로도 날림 공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또한 그는 한옥마을은 전라도 기와의 곡선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게 아쉽다고 덧붙였다. 이 번와장은 "지자체마다 똑같은 한옥을 짓고 있지만, 지역별 특성을 살려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며 "전라도의 경우 서까래 끝이 들어가도록 해 곡선미를 드러내는 게 특징이지만, 한옥마을은 그게 없어 아쉽다"고 했다.장대수 전주시청 한스타일 담당자는 "대개 한옥을 지을 때 번와 와공 자격증 소유자의 조언을 통해 토기와(흙으로 구운 기와)를 쓰고, 30~40년이 지나면 교체 공사 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 시멘트기와를 쓰도록 하는 것으로 안다"며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기와의 균형을 찾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이화정
  • 2009.12.03 23:02

"한양 500년 심장에 파일 박은 느낌"

옛 청사 바로 뒤편 서울시 신청사 건설 현장은 두 구역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한 곳은 기초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다른 한 곳은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눈대중으로 그 면적 대비를 보면 전자가 9할, 후자가 1할 정도를 차지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발굴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예정지 중 9%라고 말했다. 하지만 발굴 현장에도 일정한 간격으로 대형 철제 H-빔이 곳곳에 박혀 있다. 나아가 이들 빔은 필연적으로 발굴현장에 노출된 유적을 군데군데 이미 파괴했다. 통상 고고학 발굴현장은 발굴조사가 완료되기까지는 어떠한 새로운 건축행위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왜 유독 서울시 신청사 건설현장만큼은 H-빔이 박혀 있을까? 1일 오전 발굴현장에서 발굴조사단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이 개최한 발굴지도위원회에 참가한 서울시와 발굴단 관계자들의 전언으로 쉽사리 그 의문은 풀린다. 애초에 신청사 예정 부지는 발굴이 예정돼 있지 않았다. 발굴조사 없이 바로 공사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이 일대 지하는 이전에 있던 건물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문화재청에서는 입회 조사를 명령했다. 이는 고고학 발굴 전문가가 공사 현장에 상주하면서 혹시 모를 유적이나 유물이 확인될 때는 즉시 공사를 중지하고, 발굴조사를 벌이게끔 하는 제도다. 이렇게 해서 입회 조사를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맡게 됐다. 이에 의해 서울시는 우선 신청사 건설 예정지 곳곳에 H-빔을 박고서 터파기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왕도 500년이 남긴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완전히 망가지고 사라진 줄 알았던 조선왕조 500년 수도 한양은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난 6월, 유물과 유적이 확인된 곳을 중심으로 공사는 중지되고 본격 발굴로 들어갔다. 그 성과는 놀라웠다. 조선초기 이래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건물 유적은 물론이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귀중한 유물이 쏟아진 것이다. 특히 불랑기자포와 승자총통을 비롯한 조선 중기 때 무기류는 그 전체가 당장 보물로 지정돼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중한 성과로 기록됐다. 이날 공개된 발굴현장과 출토 유물들을 둘러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자 지도위원인 지건길 문화재위원회 매장분과 위원장이 당장 목소리를 높였다. 지 위원장은 특히 발굴현장 곳곳에 박힌 H-빔들을 지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뿐만 아니라 (서울시가 대형 재개발 공사를 추진하는) 동대문운동장이니 청진지구 현장을 둘러볼 때마다 한양 500년의 역사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기 파일(H-빔)을 박아 놓은 것이 한양 500년, 아니 600년 심장을 박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 지 위원장은 현장에 배석한 서울시 관계자들을 향해 "현장 유구(遺構)를 어떻게 할지는 문화재위원회가 최종 결정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현장에 그대로 유구를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마침 서울시도 (발굴현장에) 서울역사를 전시하는 시설을 세운다고 하니, 그 취지에 맞춰 발굴현장을 보존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지금처럼 발굴 완료 뒤 공사 진행이라는 식으로 서울 사대문 안 개발을 추진하다가는 한양 500년 역사의 상당 부분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 지 위원장은 "서울은 비단 500년 조선 도읍일 뿐만 아니라 백제 500년 도읍이기 때문에 천년 고도(古都)라는 점에서 경주와 다를 바가 없다"고 강조했다. 같은 지도위원이자 문화재위원인 건축학 전공 김동욱 경기대 교수는 유적의 이전 복원을 제안하긴 했지만, 문화재위 매장분과 위원장이 현장 보존 방침을 공식 천명함에 따라 서울시의 서울시 신청사 건립 계획은 적어도 이번 발굴현장에 대해서만큼은 일정 부분 수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문화재청은 조만간 문화재위원회를 소집해 이 유적에 대한 처리 방침을 확정할 계획이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2 23:02

[이은혁의 글씨로 만나는 옛 글] ⑫왕서(王書)를 집자한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

'흥복사단비(興福寺斷碑)'는 본래 서안성(西安城) 안의 흥복사(興福寺)에 세워져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망실되었다가, 명나라 만력(1573-1620) 말년에 남쪽의 공호(空濠)를 준설하다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반부의 약 93×126cm의 잔비 밖에 없었다. 출토 후 얼마 되지 않아 공자묘(孔子廟)로 이치되었으나, 지금은 서안의 비림(碑林) 제2실에 열치되어 있다. 비문은 35행, 행내의 자수는 22~25자, 전문 약 730자를 새기고 양측에는 화려한 당초문양과 선인기승(仙人騎乘)의 서수(瑞獸)를 선각(線刻)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비주(碑主)의 매장에 가까운 개원(開元) 9년(721)으로 추정된다. 비두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명은 확실하지 않다. 십 수종의 별칭 중에는 '吳文'을 덧씌운 호칭이 많았다. 그 이유는 청대의 금석학자인 옹방강이 비문의 첫부분을 판독하면서 '惟大將軍吳公諱文'이라 석문을 달았는데, 이는 '惟大將軍矣. 公諱文'의 '矣' 상부를 'ㅁ'로 잘못 본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밝혀진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흥복사단비'라고 칭한다.비문의 제2행에 '(…) 大雅, 集晉右軍將軍王羲之行書勒上'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 역시 '집자성교서'와 같은 집왕서비(集王書碑)의 하나이다. '집자성교서'(672)보다 50년 뒤에 조성되었는데, 이 사이에 오광벽(吳光璧)이 집자한 '건복사 삼문송성비(建福寺三門頌成碑)'(717), 행돈(行敦)이 집자한 '회소율사비(懷素律師碑)'(718)가 있다. 이처럼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는 집자성교서 이후 원대에 걸쳐 20종 정도가 금석서에 열거되어 있다. 집서자인 흥복사의 대아(大雅)와 그 집서(集書)의 사정에 대해서는 일체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필자의 생각에 대아(大雅)는 그 자체만으로 이름이 될 수 없고 이름 뒤에 붙여 고상함을 나타내는 말이므로, 이 두 글자 앞에 흥복사에 거주하며 집서를 담당했던 스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이 비를 가장 먼저 거론한 명나라 조함은 왕희지의 진적에서 직접 집자한 것이 아니라 '집자성교서'에서 모집(摹集)한 것이라고 보았다.그 서품에 대해서는 '집자성교서'와 우열을 다투고 있으나 훼예는 서로 반반이다. 청대의 학자 고상선(郭尙先)은 "'집자성교서'는 천고의 걸작이지만 글자와 글자가 지나치게 붙어 자유로움을 해치고 있는 것이 결점이며, 이 비는 행을 세움에 융통성이 있어 고목(古穆)한 정취를 갖추고 있는 것이 장점이다."라고 평하였다. 또한 '집자성교서'가 왕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는 인정하면서, 요컨대 당인(唐人)으로서 회인(懷仁) 자신의 해석이 들어간 서법이라고 말한 것은 탁견이다. 일본의 西林昭一는 '집자성교서'는 원래의 글자를 비교적 충실하게 본뜨고자 유의하고 있으나, '흥복사단비'는 집자에서 진인(晉人)의 여유 있는 풍운(風韻)과 폭 전체의 기맥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하였다.당태종의 왕희지에 대한 열정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는 왕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당대의 초당삼대가는 왕서에 대한 치밀한 해석력으로 해서의 전형을 확립하고, 나아가 왕희지 진적을 통한 집자가 처음으로 행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집자성교서'와 더불어 '흥복사단비'는 진적에서 느낄 수 없는 굳건한 필력과 골기를 체득할 수 있는 집자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 문화재·학술
  • 전북일보
  • 2009.12.02 23:02

태조 어진 '국보' 승격 추진한다

내년에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는 태조어진을 현재 '보물(제 931호)'에서 '국보(國寶)'로 승격시키는 작업이 추진된다. 국보는 최상급 유물에 지정되는 것이어서 태조어진, 나아가 경기전, 전주시의 위상을 크게 강화시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전주시는 내년도 태조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사업으로 기념행사와 학술행사를 추진하는 가운데 기념사업의 하나로 태조어진의 국보 승격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30일 밝혔다.태조어진의 국보 승격이 추진되는 것은 민족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국보 이상의 대접을 받을만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으로 전해졌다.경기전의 태조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어진이다. 애초 전주 경기전과 영흥, 경주, 평양, 함흥 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현재 경기전 태조어진만 남아있기 때문.특히 조선시대 25대 임금 중 어진이 3점(태조, 영조, 철종)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중 철종은 3분의 1쯤 불에 탔기 때문에 제대로 남은 것은 2점 밖에 없다는 것에서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다.여기에 태조어진은 조선초의 어진 제작 방법 등을 담고 있어, 미술사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또 어진을 봉안할 어진박물관이 들어설 경기전은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지방의 진전이며, 태조어진이 봉안됐던 경기전 정정이 지난해 11월에 보물로 지정된 것을 감안, 태조어진의 국보 승격에 설득력을 더한다.앞으로 태조어진이 국보로 승격되면 우선 태조어진의 가치 상승이 예상된다. 국보(國寶)는 우리나라에서 건축물이나 유물 등의 유형 문화재 가운데에 중요한 가치를 가져 보물로 지정될 만한 문화재 중 인류 문화적으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 희귀한 것 등에 한해 지정된다.나아가 어진을 봉안할 경기전 건물은 물론, 태조어진과 경기전을 보유한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시의 위상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태조어진은 지난 1410년(태종 10년) 경주에 모신 태조어진을 모사, 경기전에 봉안해왔다. 하지만 지난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 개관기념 전시에서 훼손사실이 알려지면서 지난해 10월23일 환원될때까지 전주에 돌아오지 못했다.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환원운동이 벌어졌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걱정하는 남다른 지역사회의 의식 또한 태조어진을 국보로 지정할만한 자격이라는 게 관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은 "태조어진의 국보 지정은 전주시가 조선왕실의 정신적 본향으로서의 의미를 대내외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받는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전통문화도시로서의 전주의 위상 역시 격상될 것"이라고 말했다.

  • 문화재·학술
  • 구대식
  • 2009.12.01 23:02

서울시 신청사 부지서 조선시대 무기 무더기

서울시가 새로운 시청 청사 건물을 계획 중인 중구 태평로 1가 31번지 일대 옛 서울시청 북편에서 보물급으로 평가되는 임진왜란 이전 각종 무기류가 무더기로 출토됐다. 나아가 발굴조사 결과 신청사 부지 일대는 조선시대에 각종 무기류를 제작하던 관청인 군기시(軍器寺) 관련 건물이 있던 곳임이 확실해진 데다, 조선전기 이래 후기를 거쳐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유적이 밀집한 곳으로 드러남으로써 신청사 건립 계획 자체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은 지난 6월11일 이후 신청사 부지 5천919㎡를 발굴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호안석축(護岸石築. 물가에 돌로 쌓은 벽) 1기와 건물지 21동, 담장 9기, 우물 2기를 비롯해 근현대에 이르는 각종 유구(遺構) 44기를 확인했다고 30일 말했다. 이 중에서도 15세기 이래 사용한 조선시대 건물지인 1ㆍ2ㆍ12호에서는 '가정(嘉靖) 계해(癸亥) 지통(地筒) 중(重) 75근(七十五斤) 8량(八兩) 장(匠) 김석년(金石年)'이라는 명문이 적힌 대포 일종인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를 비롯해 승자총통 다수, 화살촉이 유별나게 커서 '대장군전촉'이라 일컫는 대형 화살촉 등의 무기류가 대량으로 출토됐다. 이 중 불랑기자포는 출토지가 확실한 최초의 유물이며 그 명문을 통해 제작연대가 1563년(명종 18)이며, 그 외에도 그 무게(75근8량)와 제작자(김석년)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발견으로 평가된다. 이 유물은 확실한 출토지는 모른 채 1982년 9월11일 서울 강서구 목동 칼산 지하철매립 작업장으로 어딘가에서 옮겨온 흙더미에서 발견됐고, 현재는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불랑기자포 3점(보물 861호)과 제작 연대가 똑같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요한다. 불랑기자포는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 발사시키는 화기로 15세기에 포루투갈을 포함한 서구제국에서 제작돼 1517년 무렵 중국 광동 지역에 서역상선을 통해 동양에 전래됐다. '불랑기'가 어떤 말에서 유래했는지는 불확실하며, 서양 사람 이름에 흔한 '프랑크'(Frank)를 옮긴 표기라는 말도 있다. 발굴조사단은 이런 무기류는 "민가에서 소장할 수 없으며, 조사지역 건물지와 군기시의 관련성을 볼 때 군기시 본건물 외곽의 부속 건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서울시 신청사 부지를 비롯해 주변 청진지구 등지에서 최근 추진되는 각종 대규모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짐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4대문안 재건축 방향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문화재위원은 "이런 식으로 재건축을 남발하다가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가 고층건물에 파괴, 매몰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팽배하다"면서 "서울시 신청사 부지에 대해서도 유적과 유물의 성격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에 그 보존 여부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은 "신청사 부지 중 91%가량은 경성부청사를 포함한 여러 시설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지반이 훼손된 상태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은 지층이 훼손되지 않은 나머지 9% 부지에서 나온 것"이라면서 "발굴조사를 마무리하고 유구를 이전하고서 전체 지하층 골조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라는 서울시 관계자의 말과는 정면 배치된다. 이 문화재위원은 "그건 서울시의 바람일 뿐이며, 그 유적과 유물 처리에 대해서는 어떤 방향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2.01 23:02

[전라감영과 4대문복원] 도시문화 관점서 접근해야

오랫동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논란만 계속되고 있는 전라감영의 위치는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4가 1번지 일대, 옛 전북도청 자리다. 전라감영터 전체규모는 5만3395㎡(약1만6150평). 현재로서는 옛 도청사 자리와 맞은 편 완산경찰서는 물론, 웨딩거리를 지나 객사까지라고 할 수 있다.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지난 9월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전주 4대문 복원사업을 더해 '전라감영 복원과 전주 4대문 복원사업 추진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최근 전주시가 정부에 요청한 '전라감영지 역사공간 조성사업비'(100억)와 '전주성 4대문 복원사업비'(28억원)가 내년도 국가예산 편성 과정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으면서 당장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전주시는 국비 지원 없이는 사업 추진이 불가능한 만큼 반드시 국비를 확보하겠다고 밝혔다.전라감영 복원사업은 단순히 고건축의 복원에 그치지 않는다. 전라감영 활용문제가 전라감영의 역사성과 구도심 활성화라는 문제를 같이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라감영 복원 배경전라감영 복원 문제는 1951년 전라감영의 정청이었던 선화당이 화재로 소실된 지 40여 년만인 1996년 처음으로 제기됐다.전라감영을 복원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04년, 서부 신시가지로의 도청사 이전을 앞두고 부터였다. 그러나 어떻게 복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2005년 도청사 이전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그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전라감영 복원은 도청사 이전으로 전라감영 복원의 필요성과 구도심 활성화의 필요성이 동시에 부각된 것으로, 전북과 전주로서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고 근대화 과정에서 100여년 간 전북행정의 중심이었던 감영 복원을 통해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상징성을 부여할 수 있는 의미있는 사업이다. 또한 구도심 활성화를 유도하고 주변 한옥마을과 연계해 관광을 활성화시킨다는 보다 현실적인 기대도 포함돼 있다.원도연 전북발전연구원 지역발전정책연구소장은 전라감영지가 전주의 전통성과 현대문화를 대표하는 '한옥마을-경기전-풍남문'과 '객사-영화의거리'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점을 주목, 전라감영의 공간적 의미를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원소장은 "전라감영을 감영 자체의 관점이 아니라 도시문화라는 관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라감영 복원에 대한 기존 연구2004년 전문가와 공무원이 참여한 '전라감영 복원 추진 간담회'를 시작으로 전라감영 복원 의견을 수렴하는 간담회와 심포지엄, 토론회 등 크고 작은 자리들이 이어져 왔다. 일부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시각으로 전라감영을 완전복원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부분복원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다.이 과정에서 감영 복원과 함께 중요하게 대두된 것이 바로 옛 도청사 건물의 가치다. 옛 도청사 건물이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만큼 철거가 아닌, 보존과 재건에 대한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학술용역도 추진됐다. 2004년 전북발전연구원의 '도청사 이전에 따른 구도심 활성화 방안'은 전라감영 복원의 기본방향을 장기적으로는 전주시가 진행 중인 전통문화중심도시 육성에 맞춰 전주의 역사적 전통성을 확립하는 방안과 단기적으로는 구도심 활성화라는 이중적인 측면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감영 대표 건물을 복원하는 1단계를 거쳐 도청사 주변 사유지를 대상으로 감영 건물을 복원하는 3단계까지 결과적으로는 부분복원에서 시작해 완전복원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2005년 10월부터 2007년 4월까지는 전라감영지 시굴 및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감영지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친 유구가 확인됐지만 감영의 주요 건물로 50년대까지 남아있던 선화당의 위치를 확인할 만한 결정적인 유구는 없었다. 전문가들은 도청 조성 당시 콘크리트 지하구조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거나 교란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원광대 지역개발연구소가 진행한 '전라감영복원 기본계획 학술용역'(2006∼2007)은 도청 이전으로 감영 복원 및 장소 재활용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감영을 주변과 연계(객사-전라감영지-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한옥마을)해 구도심 활성화를 유도하는 종합적 감영 복원 계획을 내놨다. '도심 속의 역사공원'을 컨셉으로 감영복원의 공간적 범위는 축소복원(1만6117㎡)과 완전복원(5만3395㎡)의 중간 형태인 절충안(2만9520㎡)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용역은 복원의 범위가 감사의 영역만으로 한정돼 전라감영이 가지는 군사 및 문화적 기능 등 역사성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2008년 6월에는 전주역사박물관과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 '전라감영의 원형과 활용'이 개최됐다. 경상감영과 강원감영 등 감영이 있는 다른 지역에서 감영에 대한 연구서들을 발빠르게 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라감영은 역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게 사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고들은 「전라감영연구」로 묶여 감영 복원 사업에 있어 전라감영을 이해하는 기본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추진위원회 결성고고·고건축·도시계획·역사·향토사 등 학계 전문가 및 언론인, 주민대표 등으로 전라북도와 전주시가 함께 구성한 '전라감영 복원과 전주 4대문 복원사업 추진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는 그 의미가 크다.전라감영 부지 소유권은 전라북도가 가지고 있으며, 복원 사업에 대해서는 전주시가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 무엇보다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공감대는 형성된 상태지만, 복원 범위나 규모 등 구체적인 로드맵에 있어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어 추진위의 역할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추진위는 전라감영 복원과 관련 쟁점사항에 대해 최종 합의점을 마련하게 되며, 전주 4대문 복원 문제의 시기와 규모, 사업비 등 기본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추진위원장은 채병선 전북대 교수. 이종민(전북대 교수)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이용완(전 도의원) 부위원장을 비롯해 홍승재(원광대 교수) 최완규(원광대 교수) 홍성덕(전주대 교수) 이재운(전주대 교수) 이양재(원광대 교수) 김재식(전북대 교수) 원도연(전북발전연구원 지역정책개발연구소장) 임동찬(시의원) 장성화(전북발전연구원 지역개발팀 연구위원) 남해경(전북대 교수) 윤덕향(전북대 교수) 조법종(우석대 교수) 송석기(군산대 교수) 김은정(전북일보 편집국장) 김명성(KBS전주방송 기자) 박영근(전주중앙로 상가연합회장) 이흥재(전주정보영상진흥원장) 송재복(사이버시정발전연구원) 안기현(전 KT지점장) 이재균씨(전 시의원)가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추진위는 전라감영과 4대문 복원 방안이 확정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되며, 임기는 2년이다.

  • 문화재·학술
  • 도휘정
  • 2009.12.01 23:02

진보적 문화이론지 '문화/과학' 60호 발간

1992년 여름 '과학적 문화론'을 내걸고 창간호를 낸 계간 문화이론지 '문화/과학'이 통권 60호(2009년 겨울호)를 12월 1일 발간한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각각 발행인과 편집인을 맡고 여러 진보적 지식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문화/과학'은 '비판적 문화연구', '문화사회', '코뮌주의', '생태문화네트워크', '학문 통섭' 등 다양한 이론적ㆍ실천적 의제를 제기해왔다. 지식인 사회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언어', '욕망', '육체', '공간' 등의 화두를 제기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구조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대중의 심리구조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문화/과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국내 이론지로는 드물게 '장수'하고 있다. 최근 40호를 낸 '진보평론'이 비교적 오래됐지만 1980년대에 처음 나온 '현실과 과학', '노동해방문학' 등과 '문화/과학'과 비슷한 시기에 창간한 '이론'은 20호의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문화/과학'은 통권 60호 발간을 기념해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을 주제로 12월 1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주최 측은 "신자유주의 위기를 맞아 사회적 배제와 파괴행위가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이 더 나은 삶을 꾸리려면 혁명적 태도가 필요하다"면서 "우리에게는 당위의 수준을 넘어서는 즐거운 혁명이 필요하고, 그런 혁명은 우리 스스로 새로운 주체로 설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즐거운 과학기술의 달콤한 유혹'을, 이동연,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각각 ''문화적 다중'의 출현과 대안문화행동',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교육적 실험'이라는 발제문을 발표한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회상과 혁명'을, 박영균 서울시립대 교수는 '구성과 연대의 정치학'을 발표한다.

  • 문화재·학술
  • 연합
  • 2009.11.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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