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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태생으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1943-1960)의 생가가 복원됐다.남원시는 26일 김 열사의 생가 터인 금지면 옹정리에 김 열사의 생가를 복원했다고 밝혔다.복원된 생가는 978㎡ 부지에 건축면적 147㎡ 규모의 한옥 형태 본채와 사랑채, 헛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마당의 장독대와 우물 등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됐다. 인근에는 방문객을 위해 1121㎡ 규모의 주차장도 만들어졌다.남원시는 김 열사가 숨진 뒤 그동안 생가가 여러 차례 개조돼 원형이 달라진 데다 최근에는 빈 집으로 방치되면서 많이 낡아 작년부터 복원작업을 해왔다.남원시는 생가 복원이 마무리됨에 따라 인근의 김 열사 묘역 등을 포함한 3만2천132㎡에 추모공원을 만들 계획이다.또 김 열사의 삶을 그린 45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도 만들어 이달 말께 공개하기로 했다.남원시 관계자는 "김 열사 기념관에 보관된 생가 사진과 마을 주민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해 원형을 최대한 살렸다"며 "생가는 그의 숭고한 민주정신을 기리는 산 교육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라북도가 조례 제정과 센터 운영으로 다문화가족 지원 기반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예산부족으로 활성화 및 지속적인 활동조건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전북민예총(회장 신형식)이 주최한 '2009 문화정책 전국대토론회'에서 김선태 전주효자문화의집 관장은 "전북지역에서 다문화가족에 대한 관심은 인권 및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열악한 조건에서도 활동이 지속되고 있다"며 "지방정부 차원에서 항구적인 다문화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등 지역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문화에 대한 현실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관장은 "전북도의 국제협력과와 문화예술교육사업, 지원조례 따라 구성된 '전라북도다문화가족지원협의체' 등이 유기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이날 참석자들은 다문화사회나 다문화정책에 관한 담론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관련 연구소나 사업을 목적으로 한 실행 조직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지만, 이런 움직임이 올바른 방향성과 해법을 가지고 대응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데 공감했다. 신형식 전북민예총 회장은 "우리는 그동안 단일민족·단일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아 왔지만 최근 사회가 다양화되고 다문화되면서 소수자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우리 문화의 폭을 넓히고 깊이를 깊게 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도록 대토론회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26일 전주한옥마을 학인당에서 열린 문화정책 대토론회는 '문화적 다양성의 실천과 문화예술지원정책' '다문화사회와 문화적 다양성' '지역문화를 통한 지역공동체 형성 방안' '지역문화 예술프로그램 우수사례' 등 총 4개 분과로 나눠 진행됐다.특히 1분과 '문화적 다양성의 실천과 문화예술지원정책'에서는 현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이명박 정부의 문화정책·문화행정은 무늬만 문화지 실제로는 맹목적인 경제개발주의의 성격을 내재하고 있다"며 "국가 문화정책이 가장 우선해야 할 사회적 공공성, 공공영역은 방기한 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고급문화, 상업문화, 주류문화 등에 대한 맹목적인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손동혁 인천민예총 부회장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지역문화정책을 수립하거나 실행하는 단계에서 지역의 의견을 묻거나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현 정부 문화정책의 새로운 목표인 '지역문화의 특성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는 결국 지역의 문화적 자원을 팔릴만한 상품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김제 벽골제(碧骨提·사적 제111호)는 농업용 저수지다. 현존하는 저수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벽골제는 제천의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일찍부터 한반도에 쌀 재배가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1975년 발굴조사 결과 330년(백제 비류왕 27년)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됐다. 당시 수문 5개와 총 제방길이 3.3㎞, 만수면적 37㎢(112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낡은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신털뫼라는 언덕이 생겼다고 할 정도다.여러 차례 개축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관리가 되지않아 주변 농민들이 헐어서 경작지로 사용해 왔다. 일제때인 1925년에는 동진농지개량조합이 제방 한 가운데로 수로를 내는 바람에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지금은 제방과 남쪽 끝 수문인 경장거와 북쪽 끝 수문인 장생거, 그리고 중앙수문 자리에 돌기둥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저수지 내부는 논으로 변했다.벽골제는 평지를 막아 진흙을 다져 쌓은 제방이다. 여기에 쓰인 축조방식은 판축기법과 부엽토공법이다. 부엽토공법은 글자 그대로 기초부분에'나뭇잎이나 풀을 까는 방식'이다. 중국(안풍당 유적)에서 기원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물이 흐르는 곳에 제방이나 성벽을 쌓을 때 적용하는 아주 과학적인 기법이다.이 기법은 일본의 고대 댐식 저수지인 오사까의 사야마이케(狹山池)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616년 무렵 바닥에 진흙을 깔고 그 위에 나뭇잎을 다져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다.일본은 이 사야마 저수지를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으로 명소로 만들어 자랑하고 있다. 특히 이 저수지 옆에 일본의 세계적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박물관은 일본의 수리관개시설과 토목기술을 소개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건물 양쪽 3층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떡 자르듯 전시한 제방단면(높이 15.4m, 폭 62m)은 관람객을 압도한다.마침 김제시와 일본 사야마시가 이 두 저수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함께 등재하기로 합의했다. 양국이 하나의 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공동등재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고 한다.고대 동아시아 수리시설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자산에,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한다./조상진 논설위원
국내에 남아있는 한글 성서본 가운데 간행시기가 가장 빠른 책이 발견됐다. 한성대 인문과학연구원장인 강순애 교수는 "간행년도가 청나라 연호인 광서 8년(1882년)으로 적힌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를 최근 인사동 고서점에서 입수했다"면서 "국내에는 1883년본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발견한 책은 간행 시기가 더 빠르다"고 26일 밝혔다.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셔'는 영국인 존 로스(1842~1915) 목사가 이응찬, 이성하 등과 함께 중국 심양에서 1882년과 1883년에 발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한글성서본으로 국내에는 숭실대에 1883년본만 남아 있다. 1882년본은 영국 대영성서공회 도서관과 미국성서공회가 소장하고 있다.당시 기록에 따르면 심양의 문광서원에서 1882년 5월에 3천부를 인쇄하고 1883년 10월에 300부를 간행했다. 강 교수는 이번에 발견된 책은 표기법으로 볼 때 1882년의 초간본과 1883년본 사이에 간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초간본에는 '하느님'이라고 표기하다 1883년본에는 '하나님'으로 바뀌었는데, 이번 발굴본은 '하나님'이라고 나와있으며 모음 '아래아(ㆍ)' 사용이 많다"며 "이로 미뤄 이번 발굴본은 1882년본과 1883년본 사이 과도기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본문 뒷면은 백지가 아니라 관청의 서식을 모은 '간독요취(簡牘要聚)'가 필사돼 있다. 강 교수는 "외국 종교서적 유입이 금지된 상황에서 관리의 눈을 피하려고 '간독요취'가 필사된 면으로 장정(裝幀)해 밀반입했다가 복음 선교를 위해 성경이 인쇄된 부분으로 재장정한 것"이라면서 "어느 지역에서건 초기 복음의 역사는 고되고 슬픈데 이 책을 국내에 들여오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폐지 속에 장정하지 않는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하는 방식도 이용됐다고 그는 덧붙였다.본문은 모두 39쪽이며 40쪽은 단어를 해설했다. 책은 목판활자로 인쇄했으며 크기는 가로 14.3㎝, 세로 23.6㎝로 가로, 세로 각각 0.5㎝ 이하의 작은 글자가 사용됐다. 식자층이 아니라 일반대중을 염두에 두고 어려운 한자어보다 순 한글을 쓰고 문어체보다 구어체로 번역했다. 문장은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존경을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 예수, 키리스토(그리스도), 쥬(주) 등의 단어 뒤에 글씨를 띄어 썼다. 강 교수는 "근대 기독교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이 자료는 국내에서 발굴된 최고(最古)의 한글성서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평가했다. 로스 목사는 스코틀랜드성서공회와 영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인 번역자 십여 명의 도움으로 1882년부터 1889년까지 9종의 성서를 발간했다. 강 교수는 한글성서 발굴본에 대해 연구한 성과를 27일 한성대 미래관에서 열리는 '한성대 인문과학연구원 제10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다.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대문인 광화문(光化門)이 고종시대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 모습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144년 만에 다시 상량(上粱)을 한다. 2006년 이후 광화문의 원위치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문화재청은 27일 오후 4시 현장에서 상량식을 갖고 제 모습을 찾기 위한 막바지 작업에 들어간다. 상량식은 목조 건축에서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리는 가장 중요한 의식이다. 이날 상량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보존회가 상량문 봉안(奉安) 의식을 거행하고 문화재 전문가 및 관련단체, 공사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다. 상량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大木匠) 기능보유자 신응수씨를 비롯한 많은 전통 건축 장인이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는 등의 목조 가구재 조립을 마친 다음에 이뤄진다. 상량문은 서예가인 김양동 계명대 서예과 석좌교수가 글씨를 썼다. 문화재청은 이날이 144년 전인 1865년, 고종이 광화문을 중건(重建)하면서 상량한 뜻깊은 날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복원은 2006년 12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을 시작으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인 구 광화문 철거, 원위치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 가림막 설치,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해 큰 돌로 만든 성벽) 축조 등의 과정을 거쳤다. 상량이 끝난 뒤에는 추녀와 서까래 설치, 지붕 기와 잇기, 단청 등을 거쳐 내년 10월 광화문 복원은 대단원을 고할 예정이다. 현판은 1900년대 초 사진을 근거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디지털 복원기술로 원형 복원한다.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경복궁의 정문으로 지어져, 세종 때 광화문이라는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됐으나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됐다. 그 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에 중건(重建)됐으며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함에 따라 1926년 해체돼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고, 한국전쟁 때에 목조부가 소실되고 석축부만 남게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68년 광화문은 그의 한글 친필 현판을 달고 중건됐지만, 당시 중앙청(中央廳)으로 사용하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 축에 맞춰 건립되면서 원래 위치에서 옮겨지고 더구나 목조건축이 아니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옛 총독부 청사가 철거됨에 따라, 이후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 목조건축으로 다시금 중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복원을 시작했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한국측 위원장 조광)는 28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제5회 한·일 합동 전체회의를 연다고 26일 밝혔다. 회의에서 양측은 2007년 6월 출범해 2년6개월 동안 진행해온 제2기 위원회의 공동 연구 내용을 점검하고 최종보고서의 가제본을 교환하는 한편 '일본 역사교과서 쟁점 주제 개설서' '한일 역사교과 교육과정 비교연구서' 등의 발간에 합의할 예정이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는 오후 5시30분 양국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전체회의 결과와 그간의 연구활동 상황, 향후 일정 등을 설명한다. 2002년 3월부터 2005년 5월까지 활동한 1기에 이어 양국 정상의 합의로 2007년 6월 일본 도쿄에서 출범한 이번 2기 위원회의 운영기간은 올해 연말까지다. 위원회는 양국 정부 차원의 공동 연구기관으로, 교과서 문제 및 한·일 관계사와 관련한 쟁점을 함께 연구해 인식을 같이한 부분에 대해서는 양국 교과서 편수 과정에 참고하도록 노력하기로 한 바 있다. 2기 위원회는 ▲고대사(고대 한일관계 성립, 고대 왕권의 성장과 한일관계 등) ▲중근세사(14~15세기 동아시아 해역세계와 한일관계, 동아시아 세계와 임진왜란 등) ▲근현대사(한일 근대국민국가 수립과정과 한일관계,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과 일본의 사회변동 등) 등 3개 분과와 교과서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해왔다.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이 유적지는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 유적지. 최근 일본이 죽막동 유적지와 비슷한 오키노시마 제사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등재하기 위한 물밑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현재 도지정문화재인 죽막동 유적지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25일 전북을 방문한 세계동아시아고고학회 사라 넬슨 회장과 함께 죽막동 유적지를 돌아본 임효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심사위원(서울대 고고학과 명예교수)은 "일본이 오키노시마 유적지를 내년 1월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등재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만큼 이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죽막동 유적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위원은 "일본은 오키노시마를 1958년부터 발굴해 작은 파편까지 세세하게 추려 8만 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발굴해 놓은 상태"라며 "죽막동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은 746점(파편을 담은 100박스 포함)으로 전체 유적지의 10분의 1이 발굴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이들과 동행한 윤덕향 전북대 교수는 "죽막동 유적지를 부안의 띠뱃놀이, 적벽강, 채석강과 연결시키면 복합유산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사라 넬슨 회장은 "죽막동 유적지는 동아시아 교류를 연구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장소"라며 "죽막동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려면 교육성, 보존성, 접근성을 갖춰야 하는 만큼 고고학자들이 이곳의 가치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오키노시마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죽막동에서 출토된 제사용품과 비슷한 것이 많다. 이는 서해를 중심으로 백제시대부터 일본의 해상교통의 전진기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이 매년 해외 석학을 초청해 지구촌의 당면 문제를 논의하고 우리 시대를 조망하는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이 다음 달 2~3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5회째를 맞는 이번 포럼의 기조강연자로는 2003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 변호사와 미국 철학자 리처드 번스타인이 초청됐다. 에바디 변호사는 이란 최초의 여성판사 출신으로 변호사,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며 여성과 어린이, 정치적 망명자들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데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번스타인 교수는 미국 실용주의와 비판이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뉴욕에 있는 뉴스쿨(The New School)에 재직하고 있다. 포럼은 '글로벌 현상으로서의 다문화 사회'를 주제로 '문명간의 대화', '차이와 차별', '아시아전통과 새로운 인간', '문화다양성, 상호존중, 화해', '디지털 윤리' 5개 분야로 나눠 진행하며 미국, 독일, 인도 등 7개국 학자 12명이 참가한다. 기조강연자로 나서는 에바디 변호사는 인권, 특히 여성과 아동의 권리가 이슬람 문화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또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권리와 민주적 가치는 현대 서구사회의 산물이라기보다 페르시아 왕조에서 현대에 이르는 이란과 이슬람의 역사에서 존중돼온 것으로 인류가 공유할 가치라고 설명한다. 번스타인 교수는 기조강연에서 냉전은 끝났지만 르완다, 보스니아 등지에서 집단 학살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9.11 테러 이후 만연한 '우리-타자(他者)' 이분법의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 지성의 의무라고 말한다. 발표자 가운데 에드워드 장 미국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미국 내 한국인들을 조명하면서 다문화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비백인계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한인 사회의 관심이 국내정치와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미국내 한인 정치세력화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쌈 티비 독일 튀빙겐대 교수는 세계가 개인의 인권, 민주주의, 다원주의, 관용 등의 원칙에 동의할 때 합리적 토론을 거쳐 가치관과 담론을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최정무 미국 얼바인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해결 방식, 특히 종군 위안부와 친일파 문제 해결 방식을 우간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과거사 해결 사례와 비교한다. 아린담 차크라바티 미국 하와이대 교수는 인도의 고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비폭력, 모든 삶에 대한 존중, 평등과 공정 등 삶의 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번스타인 교수는 포럼에 앞서 30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경기 성남시에 있는 한중연 한국학대학원 강의실에서 프래그머티즘 전통의 거인인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의 철학을 주제로 강좌를 연다. 포럼 운영위원장인 이상훈 한중연 한국문화교류센터장은 "다문화 사회의 도전 속에 인류가 어떻게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세계적 석학들의 진지한 견해를 들어보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연은 지난해까지 성남에서 포럼을 개최해오다 올해는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참가할 수 있도록 서울 도심에서 행사를 연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도입을 추진 중인 저작권 공정이용 제도와 관련, 제도의 실질적인 보장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해완 성균관대 교수는 25일 용산구 동자동 저작권교육원에서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위원회, 한국저작권법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제1회 저작권 포럼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이처럼 주장했다. 이 교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공정이용 제도의 도입은 저작물의 이용 활성화에도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공정이용 제도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서는 권리자와 이용자 단체 등이 참여해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이용 제도는 UCC(손수제작물) 처럼 저작권자의 이익을 크게 침해하지 않으면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정부는 저작권법 개정 등을 통해 이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와 관련, 토론자로 나선 윤종수 판사(논산지법 지원장)는 "공정이용 제도의 도입을 통해 패러디와 같은 행위들을 포섭하기 쉬운 장점이 있을 수도 있다"며 "하지만 현재의 입법안은 해석상 오히려 현재의 제한 조항보다 더 엄격하게 운영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김병일 한양대 교수는 일반조항 형태의 공정이용 제도보다는 일정한 범위 내에서 공정이용을 포괄적으로 허용하되,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것을 명시적으로 열거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저작권 포럼은 저작권 권리자와 이용자의 상생 및 균형을 모색하려는 문화부의 '신(新) 저작권 구상'에 의해 합리적인 정책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9월 전문가들로 구성, 발족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동 고분군 중 15호분에서 귀고리를 찬 1천500년 전 가야계 여성 인골을 발굴했다고 언론을 통해 공개한 것은 2007년 12월20일이다. 이 15호분은 도굴로 인해 유물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무덤 주인공과 함께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장자 4구의 인골이 발견됐다. 연구소는 바로 이 순장자 인골을 잘만 연구하면 그 인체까지 복원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만큼 일부 인골은 보존상태가 좋았고, 더구나 국내외에서 인골을 활용한 인체 복원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에서는 2005년 이집트의 파라오인 투탕카멘 미라를 토대로 그 얼굴을 복원했으며,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에서는 뼈대는 사라진 대신, 피부는 잘 남은 미라인 '보그 보디'(bog body 습지미라)를 복원한 사례도 몇 번 있었다. '가야사람 복원연구'는 이렇게 해서 문화재청 책임운영기관 연구과제로 선정되어 2008년 7월에 닻을 올렸다. 올해 10월까지 계속된 이번 프로젝트는 가야문화재연구소 주관 아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이 협동연구 형태로 참여하고, 가톨릭의과대학 가톨릭응용해부연구소와 충청문화재연구원 한국고고과학연구소가 공동연구자로 합류했다. 이 중 출토 인골에 대한 유전학ㆍ생화학적 연구는 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수행했으며, 인체복원 연구는 한승호 교수가 이끄는 가톨릭의대 팀이 맡았다. 가톨릭의대팀이 참여하게 된 것은 2001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얼굴을 복원한 경험이 계기가 됐다. 이를 통해 순장자 4명 중 유일하게 귀고리를 찬 채 발견된 인골은 여성이며, 더구나 성장판이 채 닫히지 않은 상태 등을 고려할 때 16세 혹은 16.5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더불어 이 여성은 출산 경험이 없으며, 종아리와 정강이뼈, 그리고 치아 분석을 통해 "반복적인 사용과 앞니로 무언가를 자르는 작업을 했다"는 흔적을 발견했다. 전신적 질환과 빈혈이 있었으며, 충치도 확인됐다. 이를 토대로 이 여성은 무릎을 꿇는 일을 많이 한 시녀이거나 노비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왔다. 다만, 금귀고리를 한 점으로 보아 노비보다는 시녀에 무게가 실렸다. 복제한 뼈로 인체를 조립해 보니 신장은 151.5㎝로 나왔으며, 인체를 복원한 뒤 신장은 153.3㎝였다. 복원 과정은 우선 셀아트라는 기관에서 촬영한 컴퓨터 단층 촬영 자료를 이용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108개의 복제뼈를 제작하고 이를 가톨릭의대팀이 조립했다. 이어 B.H 인체조형 조형연구소 김병하 소장이 얼굴을 복원하고 근육과 피부 조직을 표현했으며, 피부를 마감했다. 전신상은 실리콘을 재료로 활용했다.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에서는 머리 형태를 자문했으며, 임정연 한복에서는 가야시대 의복 수선을 담당했다. 25일 가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한 1천500년 전 가야 여성, 즉, 가야 복식을 걸치고, 머리는 가운데 가르마를 탔으며, 오른손은 악수하듯이 앞으로 내밀고, 왼쪽 한 곳에만 금귀고리를 찬 모습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강순형 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발굴 당시에 이 여성의 귀걸이가 한쪽만 남게 된 사연에 대해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전제하면서 "시신을 묻는 사람이 다른 쪽 귀걸이는 슬쩍했을 수도 있다"는 기발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제 이 가야 여성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까 하는 과정이 남았다. 강순형 소장은 "무덤 지명을 따서 '송현'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창녕 땅이 옛날 가야시대에는 비화 가야 땅이었으므로, '비화'라는 이름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한국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동북부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지역이 한반도와 고고학적으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이죠."사라 넬슨 세계동아시아고고학회장(미국 덴버대 교수)가 25일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김영원)의 '마한-숨쉬는 기록'展을 찾았다. 그는 세계 고고학계에서 한국 전문가. 한국과의 인연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한강 유역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로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어 2005년엔 8000년 전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유적을 배경으로 한 소설 「영혼의 새」를 써서 호평을 받았다.그는 "반만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이들의 신비로움에 반했다"며 "금방이라도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튀어나와 음식과 토기를 만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이번 방문은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개로 이뤄진 것. 넬슨 회장은 충주 금룡동에서 발굴된 뚜껑 항아리를 비롯해 구슬, 토기 등을 둘러보면서 "국보감이네"라고 연발하며 감탄했다. 특히 마한의 유물을 직접 확인한 그는 "마한의 유물이 고구려와 신라와도 구분되지만, 토기와 색깔 등을 볼 때 백제와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강조했다."마한특별전은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그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는 뚜렷했지만, 마한은 희미했거든요. 마한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조명하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이번 방문을 계기로 한국의 유적에 관한 마한의 역사와 이후 둘러본 고대 제사 터인 부안 죽막동 유적지도 자신의 저서이자 미국 대학 교재인 「Gender in Archaeology」 개정판에 담을 계획."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지는 일본의 오키노시마 보다 규모도 크고, 대단히 잘 보존된 공간입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는 1992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유적을 세계고고학 사전에 등재시킨 주인공이다. 1996년 하와이 세계동아시아고고학대회에서 일본·중국고고학의 일부로 들어가 있는 한국고고학을 독립 분과로 만들기도 했다.그가 펴낸 책은 「The Archaeology of Korea」(한국의 고고학) 을 비롯해 한국의 선사시대와 관련된 연구 논문만 수십 편에 이른다. 그는 이런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존 에반스 교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경남 진주에 조선시대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있었다면 울산에는 명기(名妓) 전화앵(900-1100년 사이 생존 추정)이 있었다. 역사서와 구전을 통해 기록되고 있는 한국 최초의 기생으로 추정되고 있는 울산의 이름난 기생 전화앵의 묘에 대한 발굴과 묘역 보존 성역화 사업이 함께 추진된다. 울산시 울주문화원(원장 변양섭)은 23일 오전 11시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 산 57번지 일원에 전화앵의 묘로 추정되는 곳에서 변 원장, 서우규 울주군의회 의장 등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라명기 전화앵 묘 발굴 고유제(告由祭. 중대한 일을 치르고 나서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 전화앵은 신라가 멸망할 당시의 기생으로, 새로 들어선 나라인 고려에까지 널리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춤과 노래가 뛰어난 예기(藝妓)였다. 그는 신라 멸망 후 망국의 한을 품고 절개를 지켜 추앙을 받아왔다고 소개돼 있다. 이날 고유제는 전화앵으로 묘로 알려진 이곳을 발굴, 전화앵의 유물을 찾기 위해 기원하는 의식으로 진행됐다. 1996년 처음 발견된 전화앵 묘는 1530년(중종 25년) 이행, 홍언필이 완성한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고적조 열박령편에 '열박령은 경주 남쪽 30리에 있고 동도(東都.경주)의 기녀 전화앵이 묻힌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울주문화원은 고유제를 지낸 뒤 곧바로 울산발전연구원 측과 함께 묘에 대한 발굴에 들어갔다. 이날부터 시작된 발굴은 일주일 이내에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변양섭 울주문화원장은 "전화앵 묘 발굴에서 유물이 나오면 묘역 보존을 위한 성역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말했다. 전화앵 묘 주변에 120만여㎡ 규모의 활천일반산업단지를 조성 중인 울산의 개발업체인 티에스산업개발㈜(회장 이성우)도 이번 사업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울산지역의 대표적인 문화단체인 울산학춤보존회는 올해로 8년째 추모제를 열고 있다.
<<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과거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현실이 답답하고 힘겨울 수록 사람들은 좋았던 시절 행복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특히 사회적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무한경쟁에서 지친 사람들과 파편화된 사회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향수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역사사용설명서」(공존)의 저자 세계적인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에 의하면 역사를 불러오는 행위는 현재의 불안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고자 할 때, 혹은 현재의 가치관이 흔들릴 때, 복잡하고 다변화된 현대사회에 대한 불안으로 사람들은 과거로 회귀한다.개개인이 모여 정치·경제·사회적인 활동 무대가 되는 도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가 분명히 존재한다.도시들은 나름의 꿈을 가지고 도시의 역사를 되살려낸다. 어떤 도시는 그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어 다시 도시를 유지하기 위함이고, 어떤 도시는 현재의 삶 속에 과거를 불러다 놓는 것에서 나아가 경제적으로 도시 재생의 효과를 기대하기도 하다.그동안 개발이란 명목 아래 도시의 기억을 지워왔다면, 이제는 다시 기억을 되살려야할 때. 지금 전 세계의 도시는 도시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 전국적으로 붐 일어난 역사 복원전라도 일원을 총괄하는 관아로 전주에 설치됐던 전라감영. 조선시대 전라도는 오늘날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를 포함하는 곳으로 전라감영이 가진 역사적 위상과 정치사적 의미를 되찾아 전라감영의 땅 전북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자고 말한다.현재 전라북도와 전주시는 전라감영과 전주부성 4대문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이와 관련 지난 4월 한국언론재단 광주사무소가 진행한 문화디플로마 과정에서 만난 박희윤 일본 주식회사 모리빌딩 기획부장은 "개인적으로는 새만금 보다는 전라감영에 더 많은 관심이 간다"며 "감영의 상징적인 부분만을 재현하는 부분 복원을 통한 현대적 활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라감영 자리인 옛 전북도청사가 이전한 전라감영터가 전주라는 도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만을 복원하고 나머지는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복합시설로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전라감영 복원이 역사성을 보존하면서도 도시를 살리는 전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그밖에도 국가사적지로 지정, 문화재복원 형태를 띄고 있는 강원감영은 현재 1단계 복원사업을 완료했으며, 경상감영은 경상감영공원으로 정비해 도심 속 시민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충청감영은 1994년 기존 감영터가 아닌, 새로운 지역에 복원해 이전 복원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감영 복원 이외에도 전국에서는 역사 복원 붐이 일고 있다. 이미 경기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2018년까지 완전 복원한다고 밝혔으며,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프랑스의 오르세미술관처럼 옛 서울역사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살려 세계적인 문화명소를 육성하기 위한 '구 서울역사 원형복원 및 문화공간화 사업' 기공식이 지난달 진행됐다.세계적으로도 과거의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한 새로운 박물관들이 해마다 문을 열고 있으며, 많은 국가와 자치단체가 과거를 기념하기 위해 특별 주무 부처를 두고 복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태평양전쟁 때 파손된 일본 도쿄역 복원은 530억엔의 막대한 예산만큼이나 관심을 모으고 있다. 1914년에 건립된 일본에서 몇 안되는 빨간벽돌 건물인 도쿄역은 2012년 3월까지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일본의 도시 복원 사례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사람의 기억에 의존할 수도 있고 눈에 보이는 역사유적을 재현함으로써 역사를 기억하게 할 수도 있지만, 최근 들어 복원과 재현이 힘을 얻고 있다. 전자의 경우 관련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됐을 때 공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1400여년의 오사카 역사를 정리해 놓은 오사카역사박물관이 역사를 기억시키는 방법은 신선하다.2001년 13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개관한 오사카역사박물관의 건물터는 고대 궁궐 유적인 나니와 궁터의 일부. 설계 때부터 궁궐유적 파괴 논란이 일었고 그 결과 건물이 들어설 궁터에 초석을 박지 않고 둘레에 특제 금속 파일을 박아 유적을 그대로 지하에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전시관을 관람하는 방식은 박물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지 못한 관람객들에게 더 충격적이다. 7층부터 10층까지가 전시관인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 한층씩 관람하며 내려오는 형식. 오사카역사박물관 10층에서 상영되는 영상물을 보는 관람객들에게는 더 깜짝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다. 영상물이 상영되던 벽면이 개방창으로 변하며 나라시대의 나니와 궁터가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세계적인 야외 오페라 축제 '베로나 오페라축제'는 A.D. 1세기경에 만들어진 아레나 원형경기장은 오페라 공연장으로 활용한다. 일본 요코하마에 남아있는 미쓰비시가 운영하던 조선소 도크는 때로는 공연장으로 때로는 비어가든으로 변신하며 문화적 충격을 준다.▲ 관련 전문가들의 시선그러나 역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붐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조영화 대경대학 건축리모델링과 교수(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는 "감영이 없는 도시는 관아를 복원하려고 할 정도로 감영이나 읍성 복원 붐이 일고 있다"며 "현재의 역사를 무시하고 과거의 것만 자꾸 끌어들이는 것은 아닌가라는 걱정과 함께 복원을 위해 또다른 오늘의 역사를 없앤다는 게 씁쓸한 느낌마저 든다"고 말했다.지난 13일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열린 서울대 역사연구소 제3차 국내 학술대회 '복원과 재현-역사와 현재의 대면'에서 배영수 서울대 역사연구소장은 "요즘 전국 각처에서 유물·유적 복원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이들 사업은 흔히 관광 상품화를 목적으로 경제성과 행정적 편의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며 "유물·유적의 복원은 역사의 현재적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복원 정책, 복원의 방법론, 복원을 둘러싼 역사 인식론의 문제까지 역사학계가 검토해야 할 학술적 과제를 제기한다"고 밝혔다.역사 복원을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이 있다면 자칫 화석화된 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 잘못 복원된 역사는 현 세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역사를 복원하는 도시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대목이다.
발굴조사는 기록되지 않은 '선조의 삶'을 밝혀내는 것. 옛 도시의 풍경이 다양하게 간직되어온 곳도 있는 반면 대부분은 그 흔적만 남아있는 곳이 많다. 그러한 흔적을 찾는 과정이 발굴조사. 이를 통해 땅속에 묻힌 옛 모습들은 윤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온전한 모습이라기보다는 파편의 형태로 나타날 뿐. 이러한 파편 조각들을 모아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과정은 길고 지루한 시간을 필요하다. 마한·백제문화 도시 익산도 잊혀졌다가 다시 찾아진 도시 중 하나이다. 이제 익산은 긴 호흡으로 세계문화유산 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마한의 도읍지, 익산익산지역의 백제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마한이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난을 피해 마한으로 피난했다는 기록을 통해 북방의 선진문화인 철기문화를 익산에 전래하여 익산에 문화적인 충격을 주었다는 것.「동국통감」 마한조에 나와있는 '고조선이 위만에게 침탈을 당하고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달아나 금마군(金馬郡)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했다'라는 구절을 살펴볼 때, 그 때보다 훨씬 후세의 지명이긴 하지만 금마군임을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대 역사서 「제왕운기」 「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준왕이 정착한 지역을 지금의 익산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금마가 준왕 도래 이전부터 고대 부족국가로서 굉장히 번창했던 국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준왕이 번창한 금마에 도읍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는 것이다.여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발굴조사. 익산 영등동 유적, 익산 간촌리, 율촌리 등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대체로 백제 무덤과는 차별성이 있는 마한의 무덤으로 밝혀져 아마도 마한세력의 성장이라든지, 마한문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문화의 고도(古都), 익산흔히 그렇듯이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으레 공주나 부여를 관련지어 언급하곤 한다. 이에 반하여 익산은 불과 30여 년 전 197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 지역이 한때 수도였다는 역사 사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미륵산 남쪽 자락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석탑 1기와 여기저기 흩어진 석재, 그리고 두 기의 당간지주조차도 옛날 어느 때인가 제법 큰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일 거라고 추정하기만 할 뿐, 이를 도읍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려는 견해도 거의 없었다.그러나 30여년이 지난 2004년 '고도보존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이제는 익산지역을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그리고 백제의 수도인 공주·부여와 더불어 옛 수도로서 특별히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고도(古都)'로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와서는 학술심포지엄을 주최하여 미륵사지와 왕궁리, 제석사지 등 익산지역에 산재돼 있는 백제사 관련 역사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 최근 미륵사지석탑에서는 국보급 유물들이 발굴되어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를 밝혀주었고, 유리구슬 및 은제과대장식, 귀걸이 등은 백제시대 금속류 가공수법을 알 수 있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그러나 발견된 유물을 공개하면서 '서동요 허구론'이 급부상함으로써 익산의 정체성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미륵사는 중앙과 동서의 세 가람이 합쳐진 형태의 아주 큰 사찰이다. 경주 황룡사지 보다 넓다. 한꺼번에 짓지 않고 20~30년에 걸쳐 지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번에 유물이 발굴된 곳은 서탑인데 서쪽 가람은 백제 귀족의 딸인 후대 왕후가 짓고 중원은 선대 왕후인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가설도 가능하다. 이번 발굴조사는 미륵사 창건연대에 관한 삼국유사의 정확성을 입증했다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도시로서 익산익산지역의 유적지인 마룡지, 오금산, 쌍릉, 백제왕궁터, 왕궁리 5층석탑, 제석사지, 미륵사지와 미륵사지석탑, 당간지주, 익산토성, 미륵산성, 도토성, 낭산산성 등은 별개의 독립된 유적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에 묶여져 있다. 또한 유적의 보존상태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백제 왕궁터나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지하에서 유적의 하부구조가 노출되어 유적의 배치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물이 수습되어 백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배움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익산지역은 이제 보여지는 도시가 아니라 읽어내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한 도시의 궁극적인 발전기획이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재의 조건 속에서 결정된다면 그 도시의 기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담겨야 한다. 좋은 본보기가 경주이다. 신라의 도시 경주는 2035년까지 장기플랜을 세워 신라왕경 재현으로 2000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면서 세계 속에 우뚝 서는 역사문화관광도시를 지향하고 있다.익산에 산재되어 있는 마한·백제문화유산은 역사교육적 관광매력을 가지면서도 우리 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다양한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한 '역사문화도시는 이렇게 만든다'라는 기획이 필요한 때다. 구체적으로는 산재돼 있는 유적지를 하나로 묶어 관광매력을 높이는 방안, 문화유산 해설체계를 마련하여 전달력을 높이는 방안, 축제 프로그램과 콘텐츠를 구상하는 전략, 지속가능성을 배경으로 관광의 매력을 유지하고 지속화하기 위한 관리 방안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준비과정들을 통해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도 결정될 것으로 생각한다. /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 왕궁리 유적 - 익산 천도설 뒷받침'왕궁리성지'라고도 불리는 왕궁리 유적은 마한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발굴조사한 결과, 이 유적은 적어도 세 시기(백제 후기∼통일신라 후기)를 지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석탑 동쪽으로 30m 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기와 가마 2기를 발견했다. 특히 탑을 에워싼 주변의 구릉지를 중심으로 직사각형 모양의 평지성으로 생각되는 성곽 유물을 찾았다. 이 지역 안에 있는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과 절터의 배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 발견되어, 백제 후기의 익산 천도설이나 별도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떠오르고 있다.■ 제석사지 - 수도 옮기려 세운 절백제 무왕이 수도를 왕궁평으로 옮기려고 지은 궁궐 근처에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중심 불상으로 모신 절이 있던 자리이다. 기록에 의하면 무왕 40년(639)에 벼락으로 절이 모조리 불에 탔을 때 탑 아래 넣어 두었던 동판에 새긴 금강반야경과 불사리만은 보존되어 다시 절을 지은 후 보관하였다고 한다. 탑터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됨으로써 절의 이름이 밝혀졌다. 주목되는 점은 1965년 백제 무왕의 궁터라고 전하는 왕궁평 성안의 석탑에서 발견한 유물과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쌍릉 - 무왕-선화공주 묘 추정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약간의 크기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6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 할 수 있었다.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점리고분 - 5세기께 조성익산시 입점리 칠목재 구릉 중턱에 있는 백제 무덤들로, 1986년에 마을의 한 고등학생이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 등을 발견·신고하여 알게 되었다. 긴급발굴을 하여 8기의 무덤을 확인하였는데, 1호를 제외하고는 파손이 심하다.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류·금동모자와 금귀고리, 유리구슬 등의 장신구류·말갖춤(마구)·철기들로서 백제 중요 유물이 수습되었다. 유물들로 보아 5세기경 만들어진 무덤으로 보이며, 금동제 관모는 일본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여, 당시 백제에서 일본으로의 문화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최우중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와 정림사지 5층석탑(국보 9호) 등 백제의 문화유산을 이미지화한 수상(水上) 공연물 '사비미르'가 내년 9∼10월 충남 공주와 부여에서 동시에 열리는 '2010 세계 대백제전' 기간 선보일 2개의 수상 미디어아트쇼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22일 2010 세계 대백제전 조직위원회(위원장 최석원)에 따르면 '2010 세계 대백제전' 기간 부여 백마강 낙화암 주변에서 공연할 수상 미디어아트쇼 공모에 응모한 6개 작품을 심사해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대서사극 '사비미르'(총감독 윤정섭)를 공연작으로 선정했다. 공주 금강 고마나루에서 펼쳐질 또 다른 수상 공연물은 이번 주 심사를 거쳐 선정될 예정이다. '사비미르'는 백제금동대향로와 정림사지 5층석탑 등 문화의 힘으로 난국을 극복하고 화려하게 부활하는 '강한 백제'를 연극 및 노래, 춤 등 다양한 공연요소와 미디어아트를 결합해 그려내는 작품으로, '700년 대백제의 꿈'이란 대백제전 주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았다. 윤정섭 총감독은 "관람객들에게 드라마와 스펙터클한 쇼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느낌을 주도록 최첨단 영상기법을 총동원하겠다"라고 말했다. 대백제전은 내년 9월 18일부터 10월 17일까지 공주시 금강 고마나루 및 공산성, 부여군 백제역사재현단지 및 백마강 낙화암 일대에서 열리며, 조직위원회 주관 21개, 공주시 주관 35개, 부여군 주관 37개 등 모두 93개 프로그램이 선보인다.
국제문화산업교류재단(이사장 김영훈 대성그룹 회장ㆍ사진)은 26일 오후 1시 코엑스 그랜드볼룸 104호에서 '글로벌 문화산업의 흐름과 미래'라는 주제로 2009 글로벌 문화산업 포럼을 개최한다. 방송(드라마), 음악, 경제한류 등 국내외 문화산업 전문가를 초청해 의견을 교환하고, 특히 중남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는 TV 연속극 '텔레노벨라'의 성공요인과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음악 시장의 현주소, 한류 개념이 적용된 경제 분야 성공사례 등에 대한 강연을 진행한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은 19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내 아시아출판정보문화센터에서 '제4회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Paju Bookcity Forum 2009)'을 열고 미래 출판산업의 발전방안을 모색했다. 20일까지 이틀동안 '책의 진화와 디지털 출판의 미래'를 주제로 열리는 포럼에는 국내 및 해외 출판 전문가 30여명이 참가해 디지털 출판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출판 환경의 변화와 발전방안 등을 논의한다. 포럼 첫날에는 제임스 데이터 하와이대학 미래학연구소장 겸 정치사회학과 교수가 '디지털 시대와 출판의 미래'란 주제로 디지털 시대의 철학적 의미와 출판이 가야 할 미래를 성찰하는 기조강연을 했다. 이어 미국의 출판 관련 잡지인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기획기사 편집장인 앤드루 앨버니스, 일본 문화통신 편집장인 호시노 와타루, 장기영 한국전자출판협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각국의 디지털 출판 사례를 중심으로 디지털 출판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이튿날에는 우에무라 야시오 일본서적출판협회 이사와 이중호 북센 디지털사업본부장, 케이트 엘섬 호주 퀸즐랜드 작가센터 대표 등이 연사로 나서 디지털도서관을 포함한 출판시장의 지속적인 발전 방안과 전자책 서비스의 새로운 비즈니스 확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토론한다.
분명히 오프라인 백과사전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위키피디아'로 대표되는 전자사전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자사전이 어느 날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은 아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콘텐츠 구축 없이 전자사전만 홀로 존재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백과사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신광섭)이 기획하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편찬사업은 그 전형이라 할 만하다. 이 대백과사전 편찬사업은 현재 계획대로라면 오는 2023년에 완성을 고한다. 이 사업은 2006년에 전 5권으로 완간한 '한국세시풍속사전'을 필두로 최근 그 첫 성과물로 '무속신앙편'을 낸 '한국민속신앙사전'을 거쳐, '한국민속문학사전'ㆍ'한국일생의례사전'ㆍ'한국의식주생활사전'ㆍ'한국민속예술사전'ㆍ'한국생업기술사전'을 지나 '한국민속사회사전'에서 대망의 마침표를 찍는다. 민속박물관은 이만한 민속학 사전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전례가 없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 대백과사전이 최대 강점으로 내세우는 무기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온라인과 결합한 백과사전이라는 점이다. 이미 발간된 사전은 물론이고 향후에 잇따를 사전 또한 제아무리 내용이 방대하다고 해도, 그것이 담을 수 있는 콘텐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특히 동영상이나 음원 자료는 수록할 수가 없다. 이는 온라인 시대에 오프라인 출판물이 안고 가야 할 숙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이런 결함을 온라인과의 결합으로 제거했다. 예컨대 '한국세시풍속사전'에도 표제항목으로 들어갔고, 이번 '한국민속신앙사전' 중 맨 먼저 나온 '무속신앙편'에도 한자리를 차지한 '동해안별신굿'만 해도, 오프라인 사전에서는 관련 사진이라고 해 봐야 기껏 서너 장만 수록할 수 있었지만, 온라인(http://folkency.nfm.go.kr)으로 들어가면 사정은 딴판이다. 이 항목에는 관련 사진만 무려 5천144장이 제공되고, 굿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4편이 서비스된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굿 공연에서 채록한 음원은 1편을 청취할 수 있다. 동영상만 해도 원판과 축소판 두 가지가 있어, "동해안별신굿으로 논문이나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이 원판 동영상을 참고해도 요긴할 것"이라고 민속박물관 천진기 민속연구과장은 말했다. 지금은 이렇게 구축 완료한 대백과사전은 박물관을 통해 서비스되지만, 조만간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한 대국민 서비스도 개시할 예정이다. 나아가 '한국세시풍속사전' 전 5권을 1권으로 압축한 영문판 사전도 준비 중이다. 신광섭 관장은 "우리가 시도하는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세계 백과사전 편찬사에서도 획기를 이루는 사업이라고 자부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이 2005년 8ㆍ15 광복절에 개관한 이래 4년여 만에 처음으로 연중 관람객 100만명을 돌파한다. 고궁박물관은 16일 현재 올해 누적 관람객은 99만3천162명이며, 하루평균 관람객이 2천500명임을 고려할 때 19일이나 20일에는 관람객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18일 밝혔다. 100만 번째 관람객을 포함해 그 전후 관람객 3명에게는 기념품과 고궁박물관 도록 등을 증정한다. 이달 16일까지의 관람객수는 작년 같은 기간(58만8천653명)보다 68.7%가 증가한 수치다. 고궁박물관은 "왕실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사연구 및 국민과 함께하기 위한 전시ㆍ교육 활동에 힘입어 관람객이 대폭 늘어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고궁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옮겨가면서 빈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기존 덕수궁유물전시관을 확대 개편하는 형태로 2005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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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피 "우리 음악은 거친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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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는 탤런트 이진우-이응경
한국구상조각가 고 야린 배형식 선생을 추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