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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습(大私習)은 소리 광대들이 스스로 익히고 연마함으로써 기예를 향상시킨다는 뜻이다. 광대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하고 청중들 한테 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때부터 저절로 명창이 됐다. 명창이란 어떤 특정인이나 기관이 칭호를 내린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정된 명예였다.당대의 내노라하는 광대들은 전주대사습에 참가해 마음껏 기량을 선보이는 것을 최고로 쳤고 그 영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건 전주가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판소리의 고장'이기 때문이다대사습놀이가 열리는 날은 전주부성의 축제일이다. 초청된 광대들은 최고의 기량이 발휘될 수 있도록 기호에 맞는 음식을 대접받았고 심지어는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문 구멍까지 막아줄 정도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고 전주대습사(史)는 적고 있다. 한마디로 대사습놀이는 조선시대 명창들의 등용문이었던 것이다.전주대사습놀이는 영조(1724∼1776)때 관아의 아전들이 광대를 초청하여 판소리를 듣고 놀던 동짓날 잔치에서 시작됐다. 그 뒤 일제에 의해 중단됐으나 1974년 전주의 뜻있는 인사들이 추진위원회를 결성, 부활시켰다. 1975년 첫 대회에서 오정숙 명창을 배출한 뒤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이일주 최난수 조통달 김일구 등이 모두 대사습을 통해 당대 제일의 명창으로 발돋움했다.전주대사습놀이는 이런 역사성과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전주대사습보존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장원선발과 심사위원 선정의 잡음, 방만한 예산운영 등이 도마에 올랐다. 몇몇 사람이 배타적인 운영을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회를 생중계하던 MBC도 발을 뺐다.쇠락의 시기에 여성 국악인인 홍성덕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이사장(65)이 전주대사습보존회 이사장에 선출됐다. 보존회는 이사장 개인의 것도 아니고 국악인들만의 것도 아니다. 도민들의 것이자 대한민국의 것이다.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홍 이사장은 눈물을 터뜨렸다. 그의 눈물이 개인적인 한풀이 눈물이어서는 곤란하다. 역사적인 책임의식에서 발로한 눈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선언처럼 대한민국 최고의 대회로 만들기 위해선 전주대사습보존회의 자기객관화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이경재 논설위원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사회적기업 200개 육성, 일자리 1000개 창출을 실현시키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노동부와 MOU를 체결, 문화예술분야의 사회적기업 창출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했다.사회적기업이 문화예술분야의 일자리 창출 대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전라북도가 문화예술 사회적 기업에 대한 활로 모색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한다. 10일 오후 2시 도청 중회의실.이날 토론회에서는 사회적 기업의 사례발표와 추진절차 및 지원효과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 서성원 사회적기업지원 전북연구센터 사무국장이 '사회적기업 육성법과 육성정책'을, 장걸 전문예술법인 푸른문화 정책실장이 '문화예술분야 사회적기업 접근'을, 김병수 사회적기업 이음 대표가 '사회적기업 가치혁신의 길'을 발표한다.도 문화예술과 예술진흥계 소현성씨는 "전라북도 역시 문화예술분야 사회적기업 육성을 위해 이번 정책토론회를 시작으로 인큐베이팅과 컨설팅 기능 등 다양한 행정적 지원을 해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의 '한 지붕 두 수장'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이다. 7일 문화예술계에 따르면 자신에 대한 해임처분 집행정지 결정을 법원에서 받아내 예술위에 복귀한 김정헌(64) 위원장이 재직 중인 대학에 제출한 휴직 신청서가 지난 5일 처리됐다. 김 위원장은 예술위에 복귀하면서 위원장에 대해서는 겸직을 못하게 한 예술위 규정에 따라 지난달 25일 공주대에 휴직을 신청했다. 결국, 휴직 처리로 김 위원장은 위원장을 맡을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게 됐다. 게다가, 문화체육관광부가 해임 처분 효력정지 결정에 대해 서울 고등법원에 항고했지만 이 역시 빠른 판결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법원이 인사철이어서 평소보다는 항고 판결이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기가 올해 9월까지인 김 위원장은 문화부가 문화예술진흥기금 운용 규정 등 위반을 이유로 2008년 12월 자신을 해임하자 바로 소송을 제기, 법정 공방을 벌여왔으며 김 위원장의 해임 뒤 예술위에서는 작년 2월 임명된 오광수(72) 위원장이 근무해왔다. 한편, 예술위는 8일 오후 4시 이번 사태에 의한 혼란을 수습하고자 전체회의를 열 예정이며 이날 회의에는 오 위원장과 김 위원장이 함께 참석한다.
서울시는 숭례문 방화 사건 이후 2년간 시내 주요 문화재에 상시 경비 시스템을 모두 구축했다고 7일 밝혔다. 서울시는 2008년 2월10일 숭례문 화재 이후 '문화재 종합 안전관리 대책'을 수립해 주요 건축물 문화재 127곳을 중점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그동안 104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주요 건축 문화재 23곳에 경비인력 113명을 배치해 3교대 24시간 감시체제를 구축했다. 서울시는 경비 근무 체제를 강화하고자 이달 중으로 29명의 감시 인력을 추가로 투입할 계획이다. 또 문화재 79곳에는 CC(폐쇄회로)TV와 적외선 감지기를 설치하고 51곳에는 화재감지기를 다는 등 원격 안전관리 시스템을 만들었다. 흥인지문과 문묘, 사직단 정문, 대원각사비 등 60개의 목조 문화재에는 불이 났을 때 확산을 늦추는 방염제가 뿌려졌다. 특히 흥인지문에는 9명의 경비인력을 배치하고 방범펜스와 CCTV, 불꽃감지기, 하론 소화기, 자동경보기 등을 집중적으로 설치했다고 서울시는 밝혔다. 서울시는 올해에는 환구단과 광희문, 약현성당 등에 화재감지기와 소화전 등을 설치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흥인지문 등 62개소의 재난 대비용 설계도를 제작해 자치구와 소방서 등에 비치했다. 서울시는 유사시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문화재의 이력과 기본 현황, 보수 이력과 도면 등의 정보를 모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충세 서울시 문화재과장은 "제2의 숭례문 화재 사고를 막고자 종합적인 목조문화재 안전 대책을 마련해 차질 없이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도 소방서 등 관련 기관과 협조체제를 갖춰 재난대응 능력을 높이겠다"라고 말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한국 문화유산의 약탈자로도 악명이 높다. 이런 그가 총리대신에 발탁되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초상화 1점을 기증했다. 일본인 화가 가노 쓰네요부(狩野常信. 1636~1713)가 그린 '조태억(趙泰億. 1675~1728) 초상'이 그것이다. 나중에 좌의정까지 역임하는 조태억은 1710년 대사성에 오르고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을 다녀왔는데 이때 그의 초상을 가노가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초상화 108점 중에는 이를 포함해 기증받은 20건이 포함돼 있다. 최근 '조선시대 초상화Ⅲ'을 발간함으로써 지난 2007년 이후 3년간 계속한 소장 한국 초상화 정리작업을 끝낸 박물관은 내친김에 이들 초상화가 박물관에 들어오게 된 내력 또한 유물카드를 통해 정리해 보았다. 이들 유물카드에는 구입의 경우, 가격까지 적어놓았다. 그랬더니 가장 먼저 소장하게 된 초상화는 제실박물관에서 1909년 구입한 '이하응 초상'으로 드러났으며, 가장 싼 값에 구입한 초상화는 김홍도와 이명기가 합작해 그린 '서직수 초상'으로 나타났다. 유물카드에 의하면 서직수 초상은 1916년 1원을 주고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1913년 구입한 중국인물상인 제갈무후도를 280원에 구입한 점을 비교하면, 굉장히 싼 값에 입수한 셈이다. 박물관은 한국 초상화 정리작업의 완결편인 이번 '조선시대 초상화Ⅲ'를 통해 1774년(영조 50)에 시행한 공무원 특별 채용시험인 등준시(登俊試)에서 무과시험에 합격한 18명의 초상화를 묶은 화첩을 공개했다. 이 화첩은 처음으로 전모가 공개되는 데다, 문신에 비해 무신 초상화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자못 의의가 크다. 나아가 이번 자료집에는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 고위직 공무원에게 가입 자격이 주어지는 '기로소' 회원들의 초상화집인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 보물 929호)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과 같은 자료도 원색 도판으로 수록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3년 연속 전주시 민간위탁 문화시설 운영평가에서 우수시설로 선정된 전주역사박물관(관장 이동희). '전주의 역사·문화로 특화된 지역사박물관 정립'이 역사박물관의 운영목표다.올해 역시 전시를 비롯한 제반 프로그램을 전주 역사와 문화로 집중한다. 특히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을 맞아 이와 관련한 학술대회 '조선왕조와 전주', 전주학 총서 '경기전과 조선왕실 제례', 기획전시 '자료로 보는 경기전' 등을 진행한다. '조선왕조와 전주'는 조선왕조의 근간인 전주의 위상과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대회며, '자료로 보는 경기전'은 경기전 관련 문서 및 사진자료 전시다.전주학 연구 일환으로 전주학 연구지원사업인 '전주학 콜로키움'도 새롭게 시작한다. 전주지역 연구자들의 소그룹 토론모임 활동을 지원, 전주학 연구의 발전을 꾀하는 것으로 전 학문 분야에서 5개 팀을 선정해 200만원씩 지원할 계획이다.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전시도 마련된다. 안중근 서거 100년을 기념하며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안중근 순국 100주년 특별전'을 열며,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전북지역의 농장수탈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조선경제 수탈 자료전'도 준비했다.박물관 유물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도 이뤄진다. 약 1만여점의 소장유물을 대상으로 유물분류체계를 새롭게 확립하고, 유물사진촬영과 유물카드도 작성한다.그동안 없었던 박물관 가이드 북을 발간하고 상설전시실 전시활동지도 제작할 예정이다. 박물관 취약 관람객층이라고 할 수 있는 청소년층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학교 단체관람객을 위한 상설 체험프로그램 '나도야 간다! 전주역사박물관 나들이'를 기획했다. 박물관학교, 청소년 사군자 교실, 수험생 특별행사 등 청소년 대상 이외에도 초등교사 팸투어, 전주학 시민 강좌 등 관람객과 가까이 만나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연중 이어진다.
미불(1051-1107)은 북송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초명이 불이었으며, 자는 원장(元章), 호는 녹문거사(鹿門居士)·양양만사(襄陽漫仕)·해악외사(海岳外史) 등이 있다. 오나라 양양(襄陽·호북성) 사람으로 어머니가 선인(宣仁)황후를 모셔 그 은혜로 비서성교서랑이 되었고, 후에 태상박사(太常博士), 지무위군(知無爲軍)을 거쳐 서화학박사가 되었을 때 휘종을 대면했는데 아들(米友仁)이 그린 '초산청효도(楚山淸曉圖)'를 바쳤다. 이로써 어부(御府)의 서화를 감식하고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도 발탁되었다. 이 때문에 그를 미남궁(米南宮)이라 부르기도 한다.왕희지의 왕략첩(王略帖), 사안의 팔월오일첩(八月五日帖), 왕헌지의 십이월첩(十二月帖)을 소장하여 자신의 서재 이름을 보진재(寶晉齋)라고 명명하였고, 그것들을 임모하면 진적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묵산수에서는 독자적인 기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송사」의 전기에는 미불의 기이한 벽이 소개되어 있다. 당나라 사람들이 입는 관복을 입어 특이하였고 말이 유창하여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위주(無爲州)에 근무할 때 그 지역에 큰 돌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다. 미불이 그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 돌은 내 절을 받을만하다!" 하고 곧바로 의관을 갖추어 절하고는 그 돌을 형이라고 불렀다. 기괴함이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다. 이러한 기벽으로 인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미전(米顚)이라 불렀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으나, 임금의 명을 받들어 황정경(黃庭經)을 모방하여 소해천자문(周興嗣千字韻語)을 쓰는가 하면, 선화전(宣話殿)에 들어가 소장된 작품들을 열람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저서로 삼사(三史) 즉 「서사(書史)」, 「화사(畵史)」, 「연사(硯史)」와 「보장대방록(寶章待訪錄)」이 있으며, 제발집 「해악명언(海岳名言)」이 있다.미불의 촉소첩은 1088년 9월에 호주(湖州)의 지주(知州)였던 임희(林希)의 초청을 받고 그의 청에 따라 자작시를 행서로 쓴 것이다. 미불의 나이 38세 때 작품으로 정연하고 유려한 진대의 행서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촉소첩의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주의 지주 임희는 경력(慶曆) 4년(1044)에 촉의 동천(東川)에서 생산된 비단을 구하여 두루마리로 꾸며 놓고, 명필에게 글씨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 명사들을 초청하여 비단권을 자랑하던 임희는 희녕(熙寧) 8년(1075)에 진릉(晉陵)의 호완부(胡完夫)를 초청하여 비단을 보여주며 제식(題識)을 받았고, 원우(元祐) 3년(1088) 9월에는 미불을 초청하여 마침내 원하던 글씨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미불의 자작시 '의고(擬古)'를 비롯하여 오언시와 칠언시가 각각 4수가 쓰여 있다. 현재 첩의 앞에는 청나라 고종의 「米?書蜀素帖」 6자가 있고, 첩 뒤에는 호완부를 비롯하여 동기창, 심주, 축윤명, 고종의, 왕형, 동힐 등의 발문이 있다. 그 중에서 명나라 동기창은 "마치 사자가 코끼리를 잡으려고 전력 질주하는 것 같다"고 평하고 "이전에 촉소첩 모본을 얻어 희홍당첩에 새겨 넣었는데 갑진년(1604) 5월에 오정(吳廷)에게 진적을 양도받았다"고 소장내력을 소개하였다. 동기창의 글씨가 미불과 흡사한 하나의 이유를 여기에서 발견한다. 횡획의 기필이 수필보다 무겁게 되어 있으며 결구가 좌측으로 기운 모습은 미불 행서의 특징이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대한제국기에 세운 서양식 궁궐 건축인 덕수궁 석조전을 복원하는 공사 과정에서 건립 당시 이 건축물의 모습이 드러남으로써 원래 형태대로 복원하는 길을 열게 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최근 석조전 건립 당시의 실별 규모와 벽체, 아치형 문, 벽난로와 연기 통로 등의 위치와 형태 등을 확인했다고 2일 말했다. 서양식 근대건축물인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해 1909년 완공했으며 퇴위한 고종황제의 처소와 집무실로 사용됐다. 이후 이왕가미술관,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쓰이면서 내부 구조가 많이 변형됐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은 올해 일본 궁내청(宮內廳) 도서관인 쇼로부(書陵部)가 소장한 한국고서 중 국내 반환조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661책인 것으로 나타났다. 서지학자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1일 "당시 조사 결과 쇼로부가 소장한 한국고서는 총 639종 4천678책으로 집계됐으며, 그중 반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661책임을 확인했다"며 "이를 최근 문화재청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쇼로부 소장 한국 관련 자료 현황을 조사해 2001년 간행한 보고서인 '일본 궁내청 쇼로부 한국본 목록'을 토대로 이같이 분석했다. 박 원장에 따르면 이들 661책은 거기에 찍힌 소장처 도장에 따라 ▲조선총독부 기증인(조선총독부가 기증했다는 도장이 찍힌 도서) 79종 269책 ▲경연인(經筵印. 경연이라는 도장이 찍힌 도서) 3종 17책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 제실도서관 직인이 찍힌 도서) 38종 375책의 세 가지로 세분된다. 박 원장은 "이들 도서는 조선왕실에서 소장했던 도서가 명백하고, 나아가 그 대부분이 식민지 치하에서 조선총독부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을 것임이 확실하므로 반환대상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 김홍동 국제교류과장은 "(이들 쇼로부 소장 도서 반환과 관련한) 정부 차원의 어떠한 입장이 정해진 것은 없다"면서도 "현재로서는 관계 부처 실무자들이 이들 도서 중 어떤 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있다면 그 대상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올해 경술국치 100년 주년을 맞아 쇼로부 소장 한국도서의 반환이 추진될지 주목된다. 쇼로부는 일본 황실의 보록(譜錄), 실록(實錄), 도서(圖書), 공문서(公文書),능묘(陵墓) 등의 업무를 관리하는 궁내청 부설 도서관으로, 메이지(明治) 17년(1884)에는 즈쇼료(圖書寮)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으며, 쇼와(昭和) 24년(1949)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200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에는 많은 한국 관련 자료를 소장했으며, 그중 한국 금석문 탁본집은 대체로 다이쇼(大正) 시대(1912~1924)에 제작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특히 크다. 나아가 이곳에 소장된 한국 고서는 거의 전부가 국내에서는 희귀할 뿐만 아니라 전집을 갖췄다는 점에서 서지학은 물론 역사ㆍ지리ㆍ문화ㆍ외교ㆍ금석학ㆍ서예 등 각 방면 연구에서 기초자료 역할을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곳 소장 한국 전적 중 163종 852책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에 따른 문화재 반환 협정에 따라 국내로 돌아왔다. 현재 남아있는 한국본 4천678책은 판본(활자)별로는 ▲동활자 123종 ▲철활자 7종 ▲신연활자본 7종 ▲목활자 37종 ▲목판본 209종 ▲필사본 54종 ▲의궤 79종 ▲탁본 110종 ▲지도 2종 ▲사진첩 8종 ▲영인본 3종이다.
전북 전주시에 있는 경기전의 창건 600돌을 맞아 이곳에 봉안된 태조 어진의 구본을 발굴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조선시대 어진의 세초(어진을 만들고서 낡은 어진을 없애는 일) 과정을 확인하고 세초와 관련된 각종 유물도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지적이다. 29일 전북지역 학계와 전주시 등에 따르면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태조 어진의 구본을 경기전에 묻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은 '고종 9년(1872년)에 태조 어진을 이모(남의 글씨나 그림을 본떠 쓰거나 그리는 것)한 뒤 낡고 오래된 어진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며 구본의 세초 과정과 매안(埋安) 장소 등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고 있어 발굴작업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발굴하면 조선시대 어진의 세초와 매안의 전체 과정을 처음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 어진의 세초와 매안에 대한 기록 자체는 더러 있지만, 실제 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발굴된 예는 현재까지 없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먼저 백자 항아리와 그 안에 있는 태조 어진의 구본, 백자 항아리를 보호하는 석함 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기에 세초와 매안을 하며 지낸 각종 의례에서 사용한 유물이나 관련 기록물 등이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주시가 3년 전에 발굴을 시도하며 관심을 산 적이 있어 더 이상 발굴을 미루다가는 자칫 도굴꾼의 표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우석대학교 사회교육학과 조법종 교수는 "어진을 어떻게 교체해 처리했고, 교체된 구본을 어떻게 보존했는지 등 세초와 매안에 대한 전체 과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발굴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교수는 "특히 올해는 경기전 창건 600주년인 만큼 이에 맞춰 발굴한다면 의미가 더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주역사박물관 이동희 관장도 "구본을 담은 항아리나 석함 등은 지금껏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만큼 그 자체로 대단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이라면서 "도굴 우려도 없지 않은 만큼 발굴작업을 늦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주시 고언기 전통문화국장은 "학계와 전문가의 의견은 충분히 일리가 있어 보인다"면서 "문화재청과 협의해 될 수 있으면 올해 안에 발굴 절차를 밟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로 들어서려면 두번 한옥으로 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첫번째는 전주IC 톨 게이트에 세워진 일주문이요, 다음은 전주시내 초입에 서 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다. 모두 한옥 지붕을 이고 있어 낯선 이들에게 이곳이 전통문화와 관련해 "뭔가 범상치 않은 고장이구나"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먼저 톨 게이트의 일주문. 이 문은 한국도로공사가 2002년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CBS 전북방송 자리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세운 것이다. 당초에는 한옥이 아니었으나 전통문화중심도시를 지향하는 전주시의 요청에 의해 다시 설계를 했다.'전주'라는 현판은 민체(民體)를 개발해 한글 서예의 대중화를 꾀해 온 원광대 여태명 교수가 썼으며 서각(書刻)은 조각가 김종연씨가 맡았다.다음은 여의동 대로를 지키고 있는 호남제일문. 이 문은 1977년 당시 4차선 도로에 건립돼 전주의 랜드 마크 구실을 톡톡히 했다. 1991년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체전때 도로 확장공사로 헐렸다가 1994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워졌다. 당시만 해도 인근이 훵 했으나 월드컵 경기장이 들어서 짜임새를 갖췄다. 팔작 겹치마의 전통한옥 지붕 양식이며 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로 전국에서 가장 크다.호남제일문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전주에 전라감영이 있어, 조선시대 이래 전남·북과 제주도를 통할하는 중심지였기 때문. 풍남문이 전주제일성(全州第一城)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란 의미도 담겨있다.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성용이 썼다. 강암은 효산 이광열에 이어 석전 황욱과 함께 전북서예계의 양대 산맥을 이뤘다.호남제일문은 육교 기능까지 겸하고 있어 자동차가 밀려오는 도로를 내려다 보는 맛이 남다르다. 또한 풍수적으로 '북(北)이 허해 부(富)가 드물다'하여 지세상 허술한 북쪽을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것도 흥미롭다.그러나 이들 건물은 한옥 외관의 재료와 형태만을 모사(模寫)하였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전주시는 호남제일문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한다고 한다. 역사가 너무 일천해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 전주가 글자 그대로 호남의 수부(首府)로 부활했으면 좋겠다./조상진 논설위원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확정됐다.전라북도는 "지난해 6월 문화재청 세계유산분과 문화재위원회에서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대상으로 선정된 이후, 이번에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최종통과돼 유네스코 홈페이지에 영문으로 정식게재됐다"고 26일 밝혔다.세계유산 잠정목록은 세계유산이 되기 위한 예비목록으로, 최소 1년 전에 잠정목록으로 등재된 유산만이 세계유산으로 지정받을 수 있다.익산역사유적지구는 익산시 금마면·왕궁면·삼기면·낭산면·웅포면 일원. 웅포면 입점리 금강하구 일원의 입점리 권역과 금마 왕궁면 일원의 왕궁·미륵사지 권역으로, 세계유산으로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다.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쌍릉, 미륵산성 등 고대 도성이 갖추고 있는 네가지 요건인 궁성, 사찰, 왕릉, 산성 유적을 충족시키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륵사지석탑에서 백제 사리장엄이 출토되면서 한국 고대사를 새로 쓰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분묘들과 관아 유적, 연동리 석불좌상, 태봉사 삼존석불, 제석사지 등 고도로서 많은 문화유적들을 보유하며 역사발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영문판 뉴스레터 발간, 한·중·일 국제심포지움 개최 등을 통해 익산역사유적지구의 가치를 알려온 전라북도는 보다 치밀한 전략과 장기적인 연구를 통해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병인양요 때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며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는 최근 파리 행정법원이 소송을 기각한데 대해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26일 밝혔다. 문화연대는 이날 서울 서대문구 합동 주한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주 중 프랑스 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문화연대는 기자회견에서 "프랑스 법원은 과거 제국주의 약탈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그들의 선조와 다름없는 제국주의 행태를 보여줬다"면서 "시민의 이름으로 약탈 문화재를 찾아오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1만명이 1만원을 내는 소송지원단을 구성해 소송비용을 마련하겠다"면서 "정부의 외교적 협상과는 별개로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한국 정부는 외규장각 도서의 소유권을 프랑스가 갖고 한국은 이를 영구임대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설사 외규장각 도서가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아온다 해도 점유권만 인정되는 것이므로 소유권을 찾는 소송을 끝까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연대는 프랑스에서 소송을 계속하는 한편 우리 법정에 프랑스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 프랑스 대사를 세워 심판을 받도록 국내에서도 다음달께 별도의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설명했다. 문화연대는 중국 등 자국의 문화재를 약탈당한 여러 나라의 단체들과 민간 차원의 국제연대를 해 반환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특히 10만유로(약 1억6천만원)의 항소 비용 마련을 위해 시민 소송지원단을 모집하고 외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해외 약탈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를 열 예정이다. 또 반환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콘서트를 개최하고 거리캠페인을 벌일 계획도 있다.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하던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해 총 5천여권의 서적이 있었지만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해 서적 340여권을 약탈하고 나머지를 불태웠다. 문화연대는 2007년 2월 프랑스 파리 행정법원에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프랑스 법원은 지난해 말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국가재산이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주역(周易)」 태인본으로 추정되는 문서가 김해정 우석대 명예교수에 의해 발견됐다. 태인본은 민간에서 판매용으로 인쇄한 책인 방각본(坊刻本) 중 전국적으로 가장 먼저 태인에서 만들어진 문서.김 교수는 완판본에 관한 책을 조사하던 중 '주역'이라는 제목을 가진 문고판 10책이 발견됐다며 주역 본문만 있고, 서문, 발문, 판권지가 없는 상태라 지배문서(책의 앞·뒤 표지 속에 들어있는 재활용한 폐지)로 확인한 상태라고 말했다. 책이 오래 되어서 판권지나 출판일자를 가늠할 수 없을 때엔 그 표지 속에 숨어있는 지배문서를 찾아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무슨 책의 폐지였는가를 조사해 그 원문의 출처를 밝혔던 것.김 교수는 주역에 1794년 태인 현감으로 부임했던 조항진씨의 호가 기록에 남아있는 점을 볼 때 이는 태인본이며, 그의 활동 연대를 봐도 병진년이 1796년임을 알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 「주역」 태인본으로 추정되는 이 문고판은 본래 한 질(12책 24권). 그러나 3~4책은 찾지 못했다. 책의 크기는 목판본으로 14.5cm x 20cm으로 1책 분량은 116쪽이다. 한자로 된 원문은 큰 글자는 한 줄, 그에 대한 주(註)는 두 줄로 쓰여져 있다.김 교수는"이로써 태인에서 칠서(七書)가 간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 같아 흐뭇하다"며 "칠서의 나머지인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시전(詩傳)」, 「서전(書傳)」 등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그러나 이를 「주역(周易)」 태인본으로 단언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이를 「주역」 태인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며 "1700년대 후반 판매용으로 대중화된 문고판이 나왔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어 언제, 어디에서 찍었다는 기록이 없는 데다 나머지 칠서도 발견된 바가 없고, 주역이 200여 년이 흘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문서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보아 「주역」 태인본이라고 확정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이 문고판이 실제 「주역」 태인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앞으로 학계를 통해 충분히 검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북대학교 박물관(관장 김승옥)이 '전북 문화유산의 신발견'을 열고 전북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낸다.2월 5일과 8일, 9일 세차례 진행되는 이번 강의는 2010년 박물관대학 개설 전에 마련된 단기과정 문화특강. 지난해 전북지역에서 발굴·조사된 문화유산 중 새로운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한다.'전북 문화유산의 신발견' 첫 강의는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 등에서 새롭게 조사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백제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의 성과 및 당시 문화상에 대해 살펴본다. 강사는 김용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김종만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실장이 강사로 나서는 두번째 강의는 고창에서 발굴조사된 최초의 백제 장군 도장과 완벽한 형태로 발견된 금동신발 등 지난해 전북지역에서 출토된 백제 관련 주요 고고유물들을 통해 백제 중앙과 지방의 문화상에 대해 알아본다.세번째 강의는 홍성덕 전주대 교수와 함께 전북지역에서 새롭게 확인된 주요 고문서를 중심으로 당시 생활사를 살펴본다. 기록의 본향인 전북의 생활상과 기록문화를 밀도있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이번 특강은 무료로, 2월 3일까지 선착순 50명을 모집한다. 문의 063) 270-3488
황정견(산곡)이 북송대의 서단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재주에 탐구정신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일전에 소개한 바와 같이 그의 서력은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일개의 예술가가 평지돌출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지만 단지 고전의 섭렵과 배움만으로는 심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진지한 배움은 반드시 끝없는 의문을 동반한다. 그것이 학(學)이고 문(問)이다. 북송대 서가들에게서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이러한 학문적 태도에 있다. 소동파는 물론 황산곡에게도 풍부한 학적 유산이 전한다. 다음에 다루게 될 미불(米?) 역시 서화에 대한 감식안은 물론 뛰어난 사적 안목이 자리한다.황산곡의 서품을 일별해 보면 그 폭이 다른 서가에 비해 넓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심상(心象)을 필사하는 태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송풍각이나 범방전과 같은 비교적 단정한 해행과 이백억구유시권이나 제상좌첩과 같은 초서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이는 황산곡의 두 면모를 보는 것이지만 달리 서예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분명 이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성격을 띤다. 이왕(二王)과 손과정의 서보에서 느껴지는 초서가 전형적인 것이라면 황산곡의 초서 작품은 보편적인 전형성보다 특수적인 개성이 두드러진다.여기에 소개하는 황산곡의 '이백억구유시권'은 초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첩의 앞부분에 80여자가 빠져 있고 기년이 없으나 대략 1094년의 작으로 추정한다. 서품을 조망하며 필획을 따라가다 보면 행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사전(使轉)과 파격적 구성이 난무하듯 펼쳐지고, 점과 획의 대비가 강렬하게 나타난다. 지면의 곳곳에 점을 찍어놓은 듯한 점자식 구성은 연면하는 선율에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설에 회소의 초서 필법에 가깝다고 평해지지만 황산곡만의 특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압도하며, 멀리 안진경의 혁신성을 계승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만은 분명하다. 임서할 때는 집필과 운필에서 최대한 힘을 빼고 느긋하게 절주를 느끼면서 써야만 종횡무진 횡일하는 자태를 구사할 수 있다.황산곡은 스스로 지금까지 쓴 것이 필봉이 너무 드러나 좋지 않았으나, 소성(紹聖) 원년(1094)에 황룡산에 있으면서 문득 초서삼매를 얻었다고 회고하였다. 초서의 전형보다는 초서삼매을 얻었다는 말에서 예술가적 기질이 엿보인다. 왕세정은 황정견의 초서를 평하여 당대의 승려로서 광초(狂草)로 유명했던 회소(懷素)를 모방하고 있으나 글자의 자태가 여유로워 초서로서의 법도가 다소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형의 측면에서 논한 것일 뿐 예술적 측면에서 본다면 결코 폄하될 수 없는 산곡만의 매력이 내재하고 있다. 서품에서 느껴지는 절주와 기개 그리고 탁월한 조형미가 시대를 대표하기에 충분하다. 이 첩의 뒤에 원나라 장탁(張鐸)과 명나라 심주(沈周)의 발문이 있으며, 뒤에 청나라 내부에 소장되었으나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傅儀)가 일본에 팔아 넘겨 현재 일본 교토 등정유린관(藤井有?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은혁(한국서예문화연구회 이사장)
서울역사박물관은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친필이 담긴 '석봉한호해서첩'이 최근 보물로 지정됐다고 25일 밝혔다. 한석봉이란 호칭과 여러 일화로 친숙한 한호는 추사 김정희와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필로 꼽히는 인물이다. 석봉한호해서첩은 한호가 평소 절친했던 간이당 최립의 시문 21편을 단정한 해서로 필사한 글씨첩으로, 가로 27.2㎝, 세로 36.3㎝ 크기의 상ㆍ하권 2첩으로 구성돼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지난 4일 문화재청이 보물 제1078-3호로 지정했다. 이 글씨첩은 보존상태가 깨끗하고 필사 분량이 많으며 끝에 명필 엄한붕의 아들 엄계응이 1803년에 쓴 발문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박물관은 설명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계자는 "한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필이지만 유명세에 비해 친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며 "석봉한호해서첩은 한호의 독특한 서풍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전주시 교동에 세워진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를 박물관으로 이전하고 원래 위치에는 복제본을 두는 자만동금표 이전 및 보호 계획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에 맞춰 진행되고 있는 태조 어진 국보 승격 사업은 미술사적 가치 등 전문가 연구를 보완, 국보 지정까지 걸리는 시간과 일정을 고려해 치밀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다.지난 22일 전주전통문화센터 다향에서 열린 '2010년 제1차 전주시 문화유산심의위원회'에서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자만동금표는 보기에는 작지만 조선왕조 발상지로서 상징적인 유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며 "일반인이 관리하고 있는 만큼 협의를 통해 기존 박물관으로 옮기고 향후 어진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고 말했다.자만동금표는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자만동에 벌목이나 개장, 개석 등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아 설치한 표지석. 높이 70cm, 폭 23cm, 두께 12cm, 쑥색의 화강암으로 19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전북도지정 기념물인 동고산성의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추진과 관련해서는 전주성으로 명칭을 조정한 후에 승격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조법종 우석대 교수는 "이미 동고산성에서 전주성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발견된 만큼 정확한 명칭을 되찾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주승 전주대 교수는 전주성으로 바꿀 경우 현재 복원을 추진 중인 전주부성과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10월에 열리는 '태조 어진 경기전 봉안 60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서는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장이 또다시 제기됐다. 조교수는 "매안된 어진 구본 발굴 사업을 600주년에 걸맞는 기념행사로 추진해 국가적 관심을 일으켜야 한다"며 "상징성 뿐만 아니라 땅 속에 묻힌 구본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구본이 나오지 않더라도 어진 매안과 관련된 중요 유물이 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내비쳤다.변교수는 "전통 제사문화가 급속하게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경기전 삭망제(朔望祭)를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또 전문가들은 현재 정전에 전시된 모사본 이외에도 어진박물관에 전시될 모사본이 하나 더 필요하다며 어진 모사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10월 개관예정인 어진박물관 운영을 위해서는 전문 관리부서인 박물관관리팀이 구성돼 학예직 2명을 포함한 6명이 보강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조교수는 "어진박물관을 전주역사박물관 분원 등의 형식으로 운영한다면 어진박물관과 역사박물관 모두 학예연구 면에서 보완이 되는 시너지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전주시 자만동(滋滿洞)은 지금 교동으로, 한옥마을 인근 높은 곳에 자리잡은 동네를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면 승암산(중바위) 자락을 따라 한벽루 이목대 오목대를 잇는 능선 밑으로 형성된, 향교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의 고가(古歌)에서 따왔다고 한다. 예전엔 나무가 꽤 울창했던 모양이다. 한벽당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흘러 옥류동(玉流洞)이라 부르기도 했다.이곳 산의 이름은 발산(鉢山)이다. 중바위에서 탁발하러 오는 스님의 바리때(鉢盂)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바리때는 스님이나 부처님의 밥그릇으로, 이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는 것이다.또 이씨 왕조가 일어난 산이라 하여 발이산(發李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태어나 산성별감과 다투고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20여년을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이목대에는 고종황제가 1900년 써서 내린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祉)라는 친필 비석이 세워져 있다.오목대는 이성계가 남원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한, 소위 황산대첩을 거둔 후 들러 종친들을 모아놓고 크게 잔치를 베푼 곳이다. 이 자리에서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름으로써 왕조창업의 뜻을 드러냈다. 이를 기리고 황혼녘 왕조를 지키고자 고종은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古皇帝駐畢遺祉)라는 비문을 남겼다.이처럼 자만동은 조선 건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당이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최담이 말년에 이곳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조선의 명필 이삼만과 조선 중기의 풍운아 정여립(?)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또 일제 초기 옥류동 최학자로 유명했던 최병심도 이곳 출신이다.때 마침 조선왕조 직계의 생활터에 대한 출입금지를 알리는 자만동금표(滋滿洞禁標)가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표지석은 높이 62㎝, 폭 31㎝로 1900년 오목대비 이목대비 조경단비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금표는 해당지역의 벌목이나 개장, 채석 등을 금하는 경계석이다.조선왕조의 뿌리가 전주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문화 콘텐츠가 아닐까 싶다.
"전통문화하면 으레 정체돼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지요. 하지만 한글을 목판에 새기고 찍어냈던 인쇄 문화는 지식과 정보를 전해주기 위한 것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민중들의 열려있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판이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최초의 매체였던 것이지요."19일 전주한방문화센터에서 열린 '천년전주사랑모임 화요강좌'에 강사로 나선 안준영 전주목판서화체험관 대표(53). '전주에 핀 목판 문화유산 완판본'을 주제로 이야기한 안대표는 "완판본은 한글을 꽃 피우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런 점에서 완판본의 고장 전주와 한글의 관계는 밀접하다"며 "한글을 전주 한스타일 사업에 포함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은 고대소설을 통해 전국에 한글을 널리 보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역시 천년을 가는 뛰어난 전주 한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런 점에서 전주 한지는 우리 기록문화유산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완판본의 예술성과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소리도 발달할 수 있었고요."완판본(完板本)은 조선 후기 전주에서 간행된 목판본의 고대소설을 통틀어 이르는 말. 그는 "완판본 중 '구운몽' '조웅전' '별춘향전' '심청전'을 제자들과 복원했다"며 "완판본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많고 향토색도 짙지만 한문화가 담겨있다"고 강조했다.안대표는 전국 국어교사 직무연수를 완판본과 연결시켜 전주로 유치하고, 완판본의 글꼴을 데이터베이스화해 한글 글꼴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제안했다."30년 이상 나무에 글자 하나 하나를 새기며 이렇게 소중한 문화유산을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고인쇄 문화를 토대로 창작 판화까지 하고 있습니다. 작가로서 대접받으며 창작만 하면 쉽겠지만, 대가 끊긴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용비어천가'를 전주에서 복각하며 2008년부터 전주와 인연을 맺게 된 안대표는 스스로를 "목판을 만들고 복원하는 사람이며 영호남에서 같이 활동하고 있는 자칭 문화활동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문화야말로 혼자 할 수 없다"며 "전주 시민들의 관심으로 시민의 힘으로 완판본이 복원되고 발전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해 있는 전주목판서화체험관에는 안씨가 복원한 고목판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반야심경', 한글문화유산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등이 전시돼 있으며, 고인쇄·목판화를 비롯해 목판화 엽서 만들기, 옛 책 만들기 등도 체험해 볼 수 있다.한편 천년전주사랑모임 화요강좌는 올해 한글, 한식, 한복, 한지, 한옥, 한국음악 등 한스타일과 관련된 강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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