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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종합개발계획 조정 본격화

새만금 개발 밑그림인 종합개발계획(MP) 조정 작업이 이달 내에 관련용역에 들어가는 등 본격화될 계획이어서 주목된다.13일 새만금개발청에 따르면 새만금MP의 보완용역을 가능한 이달 이내에 발주하기 위해 용역서에 대한 일상 감사와 보완서 작성 등 관련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새만금 MP변경과 관련, 새만금개발청은 우선 이번 주 발주 목표로, 늦어도 한 달 이내에 용역 발주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새만금개발청은 이에 앞서 새만금MP 보완 용역비로 올해 3억2000만원을 확보했으며, 용역기관으로 국토연구원을 결정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완용역은 통상적으로 250일 정도가 소요돼, 새만금사업은 내년 하반기부터 사업성을 보완한 밑그림에 따라 개발사업이 진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개발청은 새만금MP와 관련해 △부지 매립 우선 추진 △유사사업 조정 △기반시설 우선 투자 등 사업성을 제고하는 방향에서 조정해나갈 것으로 전해졌다.이를 위해 새만금사업의 조기 가시화 및 투자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사업 부지를 우선 매립 한 뒤, 향후 개발하는 분리 개발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그동안 새만금사업은 '장기 계획사업 및 대규모 해상매립사업'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수익이 나오지 않는다는 지적과 함께 보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돼왔다.도 관계자는 "새만금개발청이 첫 업무로 MP 조정작업을 준비하고 있다"며 "보다 발빠르게 조정작업이 진행되도록 적극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구대식
  • 2013.10.14 23:02

전통정원의 재해석 ⑤ 벤치마킹-영양 서석지

경북 영양은 영남은 물론 한국에서도 오지로 꼽힌다. 영양과 더불어 인근의 봉화, 청송을 묶어 'BYC'라는 별칭이 있다. 그만큼 이들 3개 군(郡)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은둔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자리잡은 서석지도 그런 은둔의 미학을 닮은 전통정원이다.처음 이곳을 찾은 방문객이라면 '과연 이곳이 조선의 3대 민간정원이 맞을까'하는 의구심을 앞세우곤 한다.하지만 서석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정갈하고 기품있는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은둔과 여유의 진경을 간직한 공간이라는 설명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서석지는 전국의 이름난 전통정원에 비하면 규모가 작다. 1530㎡의 공간이 전부다. 하지만 작은 돌 하나에도 성리학과 인본주의의 이상을 담아내며 '바로 이곳이 진정한 유가의 정원'임을 숨기지 않는다. 서석지는 1613년(광해군 5년)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1577~1650년)이 조성한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석문 선생은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하면서 학문 정진하기 위해 연못(池塘)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 36세때다. 석문은 퇴계 이황-서애 유성룡-우복 정경세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삼전(三傳)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서석지는 경정(敬亭)을 비롯해 사우단(四友壇), 한가지 뜻을 받드는 서재라는 뜻의 주일재(主一齋), 연당(蓮塘) 등으로 이뤄져 있다. 무엇보다 여느 전통정원과 달리 서석지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전국의 이름있는 민간정원이 주변 자연과의 동화에 많은 고민을 품고 있다면, 서석지는 자연과 정원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연못의 동북쪽에 있는 주인의 거처인 주일재의 경우 연못이 아닌 사우단을 바라보게 배치했고, 강학공간인 경정은 연못 전체를 내려다 본다. 대문 옆으로는 큰 은행나무를 심어 많은 인재들이 나올 것을 기원했다. 정명론(正名論)에 의한 인본주의에 천착했던 석문 선생의 학문적 포부가 고스란히 배어있는 셈이다.대문을 열면 왼편 서단에 경정이 자리하고 있다. 경정은 넓은 6칸 대청과 방 2개로 되어 있는 큰 정자이다. 대청마루에 걸린 편액이 이곳의 세월과 연륜을 대변한다. 경(敬)은 단순한 공경의 뜻이 아니라 퇴계학파에서 가장 중시하는 사상개념이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주변 것들에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경이다. 서석지의 핵심은 단연 가로 13.4m, 세로 11.2m 크기의 연당이다. 평지에 연못을 파서 물을 끌어들이고 돌을 배치해 연을 심었다. 못을 파면서 땅속에서 많은 바위들이 나왔고, 석문 선생은 이 바위들에게 맹자와 중용 등에서 따온 이름들을 붙이며 생명을 불어넣었다. 수륜석, 어상석, 관란석, 화예석, 상운석, 봉운석, 난가암, 통진교, 분수석, 와룡암, 탁영석, 기평석, 선유석, 쇄설강희절암 등이다.서석(瑞石)이란 이름도 '이 연못을 팔때 땅 속에서 상서로운 모양의 돌이 나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신발을 벗고 경정마루에 올라본다. 난간에 기대니 한점의 바람이 스쳐간다. 사방은 적막하고 연못은 잠잠했다.석문 선생의 인생관과 욕망이 은밀하게 읽혀진다. '서석지는 완상만 하는 정원이 아닌, 읽고 사색하는 정원'이라는 설명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서석지는 급한 마음에 둘러보기는 어려운 곳이다. 마음의 눈으로 한참을 들여다 보면, 정신문화와 풍류문화의 진면목이 서서히 보인다.서석지를 통해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되새길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정원에는 스토리와 철학이 담겨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해준다. 서석지는 그런 곳이다.● 신라의 옛 정원, 경주 동궁월지- 가장자리 굴곡 넣어 좁은 연못 크게 본 지혜월성의 북동쪽에 인접한 신라의 옛 정원인 동궁(왕세자가 거처하는 궁궐)과 월지는 신라문화의 정수이자, 신라왕궁의 별궁터이다신라 문무왕 때 조성된 이곳은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됐고,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931년,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삼국사기에는 '674년(문무왕 14년)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기르고 진금이수(珍禽異獸)를 양육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곳은 동서 200m남북 180m의 구형(鉤形)으로,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배치됐다.지난 1974년부터 준설공사와 고고학적 조사가 이어지면서 주목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특히 신라가 망한 뒤 폐허가 되자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드는 못'이라는 이름의 안압지(雁鴨池)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11년부터는 더이상 안압지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월지의 가장 큰 특징은 가장자리에 굴곡을 넣으며 어느 곳에서도 전체를 한번에 볼 수 없게 한 것. 좁은 연못을 크게 보이도록 한 신라인의 지혜가 읽혀진다. 동궁과 월지는 화려한 야간 조명시설을 앞세워 야간명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경주의 랜드마크인 이곳은 언제나 방문객으로 북적인다. 경주시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데다, 유동인구가 많은 탓에 이곳에서 여유로움과 고즈넉한 정경을 만나기는 힘들다. 성공한 관광지와 제대로 된 전통정원의 한계와 차이를 절감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정진우
  • 2013.10.14 23:02

도시, 문화로 경제페달 밟다 - 2. 인천아트플랫폼

누가 인천을 문화의 불모지라 했나.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이 문화적 전초지기였음을 방증하는 사례다. 본래 인천항은 1883년 개항 이후 근대문물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사의 출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 일대가 일본과 청나라, 서구의 조계지였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후반부터 이곳에 부두창고와 무역해운업체 사옥이 속속 들어섰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산업화의 성장기를 거쳐 시간의 더깨가 더해졌다. 그러나 탈산업화 바람이 불면서 인천항 주변의 구도심이 쇠락해갔다. 흉물스런 폐공장들을 탈바꿈해준 것은 인천아트플랫폼을 통한 도심 재생 프로젝트 덕분이다.△ 옛 것과 새 것의 공존 인천아트플랫폼은 1999년부터 시작된 장기 프로젝트였다. 당시 레지던스 개념조차 생소할 무렵 예술가들이 시에 문화공간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행정을 끈질기게 설득한 주역은 건축가 황순우였다. 그는 1999년 지역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정책 제안을 받아 지구 단위 계획, 문화공간 건립 등 설계 이전부터 프로젝트 전반을 주도했다. 지역 문화계가 "그에게 빚진 것이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그느 건물을 최대한 보존해 각각의 연륜으로 예술가들을 맞도록 신경썼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첫 단추는 인천시가 2003년 근대 건축물 복원에 착수하면서부터다. 1886년에 세워진 일본우선회사 사옥을 비롯해 대한통운 창고대진상사삼우인쇄소 등 모두 13채의 적벽돌 건물을 복원리모델링증축 등을 해 옛 모습을 최대한 살린 것. 총 223억원을 들인 면적 5600㎡엔 다양한 형태의 전시장공연장예술교육관이 마련됐다.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2050㎡ 스튜디오공방 20곳과 해외작가큐레이터를 위한 게스트 하우스 9곳도 꾸몄다. 외벽을 유지한 채 내부 공간을 현대적으로 개조하거나 옛 벽돌벽에 대비되는 유리 건물의 건축, 건물 간 동선 유도를 위한 브릿지 설치 등은 옛 것과 새 것의 겸허한 공존이다. 그럼에도 아트플랫폼에는 19세기 말 인천에 진출했던 일본은행 지점 건물 세 채가 남아 있어 인천의 위용을 상징하고 있다. 이 일대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19세기 말 우리나라 근대문물의 유입 창구였던 인천의 영화를 되새겨 봄직하다. △ 미술공연문학 등 다방면 레지던스 두각인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인천아트플랫폼은 레지던스를 중심으로 중심으로 미술공연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연구자들이 창작활동에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문화 인큐베이터'다. 초창기 국제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국내에 정착하지 못할 때 인천시가 동아시아 문화허브도시를 주창하며 해외 아티스트들을 적극 끌어들였다. 군수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중국 베이징 '798 예술구'의 축소판 같다.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이곳 작업실에서 생활하며 작업을 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전시와 공연이 이어진다. 현재 40여 명의 국내외 입주 작가들이 3개월~1년 단위로 레지던스가 치러진다. 입주작가와 지역 어린이, 청소년이 함께하는 예술교육 프로그램도 수반된다. 이승미 인천아트플랫폼 관장은 "앞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스트리트 뮤지엄으로 확대할 예정"이라면서 "과거의 역사를 보존하되 현재를 재해석하는 작업의 연장선"이라고 했다. △ 차이나타운 묶은 관광 벨트 활기 아트플랫폼과 인근에 위치한 차이나타운을 묶은 관광벨트가 인기다. 일단 아트플랫폼 옆에 위치한 한중문화관은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 사회상 등을 전시물과 영상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문화전시관, 칭다오항저우다롄 등 인천시와 우호교류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8개 도시의 특산품 등을 볼 수 있는 우호도시홍보관, 중국 유명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기획전시실 등을 갖추고 있다.여기서 자유공원 쪽으로 더 올라가면 차이나타운이 있다. 100년 이상 역사를 자랑하는 맛집으로 소문난 중국음식점 '공화춘'(共和春)'은 관광객들로 바글바글하다. 인천중구청이 65억원을 들여 인천시 등록문화재인 건물을 변신시킨 '짜장면 박물관'도 있다. 이곳에서는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어져 오고 있는 짜장면 이야기, 그와 얽힌 여러 사회문화상을 유물과 모형 등으로 보여준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 모습도 재현해 놓았다. 결국 아트플랫폼은 근대 건축물이 잘 보존된 특성을 살려 인근 구도심까지 재탄생시킨 성공적인 도심 재생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다.

  • 기획
  • 이화정
  • 2013.10.11 23:02

작가와 시민간의 소통 도심재생 성공 뒷받침

이승미 인천아트플랫폼 관장(52)은 "도심재생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로 축포를 터뜨리기엔 이른 감이 있다"고 했다. 작가들과 시민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델 구축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천은 개항장을 배경으로 한 문화적 토양이 잘 갖춰진 편. 그는 "인천아트플랫폼이 도시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최대한 살려 문화적으로 재활용하자는 시민들의 뜻과 인천시의 의지가 합쳐진 것처럼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공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골격을 짜고, 근대 건물을 최대한 보존하는 과정을 고민하면서 시민들 스스로가 이 공간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한 경우입니다. 가시적인 성과 보다도 그런 공감대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죠." 이 관장은 "자치단체가 로드맵과 목적의식 없이 섣불리 시작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라면서도 "전문가에게 조직을 맡겨 책임있게 운영하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인천아트플랫폼이 국제 레지던스로 거듭나려면 지역 이기주의연고주의는 극복해야 할 과제. 이 관장은 "레지던스가 국내외 작가와 교류가 원활히 이뤄지려면 지역에 갇혀서는 안 된다"면서 "아트플랫폼의 '지역 할당제'에도 불구하고 지역 문화계는 여전히 갈증을 느끼고 있어 접점을 찾는 게 쉽지 않다"고도 했다.

  • 기획
  • 기고
  • 2013.10.11 23:02

판소리, 유네스코가 인정한 독창적 음악

세계의 모든 나라는 자신들만이 갖고 있는 전통음악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 가부키가 있다면 중국에는 경극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판소리가 있다. 판소리는 특수성, 독창성, 우수성을 인정받아 2003년 11월에 유네스코로부터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록됐다. 판소리는 '판'과 '소리'가 결합된 말로 '판'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말하고 '소리'는 노래를 상징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말한다. 한 판이 꾸려지고 나면 고수의 북 장단에 따라 소리꾼 한 명이 창(소리), 아니리(말), 발림(몸짓)을 섞어 가며 긴 이야기를 한다. 소리꾼은 혼자서 모든 역할을 다 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의 음역대 변화가 뛰어나야하고 다양해야 한다. 또 고수는 소리꾼의 소리에 따라 여러 가지 변화를 맞추고 추임새도 넣어야 하는데 이는 상당한 순발력을 요구한다. 단순한 무대 구성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몇 시간 동안 혼자서 모든 역할을 해야 하는 힘든 1인 오페라이기도 하다. 이처럼 판소리의 독창성은 전 세계 다양한 음악 무대에서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상당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판소리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무당들의 노래로부터 나왔다는 무가(巫歌)기원설, 고려~조선말까지 궁중 연례행사 때부터 광대들의 노력으로 발전되었다는 광대소학지희설(廣大笑謔之戱設) 등 여러 학설이 있지만, 전라도 지방의 서사무가(敍事巫歌)가 그 기원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배경지가 바로 남원 운봉 비전마을에 있는 국악의 성지다.이러한 판소리의 기원 자체가 서민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보니,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취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서민들의 일상 언어와 걸쭉한 욕설도 사설에 들어오고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그들의 불만이 판소리에 반영됐다.

  • 기획
  • 기고
  • 2013.10.11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 13. 국악의 성지 남원 운봉

힘차고 거셌다. 계곡을 휘감은 굉음이 빠져나갈 자리는 하늘 밖에 없었다. 권삼득 명창이 소리를 가다듬었던 곳으로 알려진 구룡폭포 이야기다. 완주 출생인 권 명창은 집안에서 쫓겨나 콩 서 말을 짊어지고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들어와 한바탕 소리 공부를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동편제의 거장이라 불리는 숱한 명창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지천에 울리는 물소리를 뚫고 득음을 한 명창들이 많아서일까. 동편제 창법의 특성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듯 정중웅건(鄭重雄健)한 우조(羽調)의 특성을 갖고 있어 힘차고 거세다. 또 발성이 무거운 데다 소리의 꼬리를 짧고 분명히 끊어주며 리듬 또한 단조롭고 담백하다.동편제의 고향 남원시 운봉읍 일대는 국악의 성지다. 이곳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인 데다가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풍요롭고 살기 좋았다. 특히 운봉 읍내와 장교리는 2000년에 가까운 오랜 마을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자연경관이 좋은데다 풍요로우며 사람들이 많이 찾다 보니 삶이 윤택했다. 자연히 판소리와 같은 풍류음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에 더해 운봉지역 주변 지리산 내에는 정령치 인근의 선유폭포, 구룡폭포, 옥계동 등과 같이 소리 공부하기 좋은 곳이 많아 명창들이 배출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운봉 비전마을에서는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이자 가왕이라 불린 송흥록과 인간 문화재였던 박초월 명창이 태어났다. 송흥록의 소리는 아우이자 자신의 고수였던 송광록-송우룡-송만갑으로 이어졌다. 이들로부터 동편제라는 창법이 나왔고 운봉읍은 동편제의 원고장이 됐다.이후 김정문, 이화중선, 장재백, 박초월, 배설향, 강도근, 안숙선, 강정숙, 전인삼, 이난초 등 명창과 대금 명인 강백천, 가야금병창 명인 강순영오갑순강정렬 등 수많은 국악인들이 배출됐다. 이들은 지리산 북부자락의 운봉 및 남원을 국악의 고장으로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운봉에는 국악의 성지가 조성돼 전시체험관, 국악, 한마당, 납골묘, 사당, 독공장, 야생화 단지 등이 만들어졌다. 지난 2008년에는 옥보고의 묘역 등이 설치돼 운봉 출신 국악인들을 기리며 국악의 계승 발전을 위해 후진들을 양성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악의 성지가 들어선 곳은 사실 그 역사가 더 깊다. 신라 경덕왕 시대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이곳에 자리 잡고 50년 동안 가야금 기법(금법琴法)을 닦은 뒤 상원곡, 중원곡, 하원곡 등 새로운 거문고 가락 30곡을 지어 널리 전파했다. 통일신라 육두품 출신인 옥보고는 금도(琴道)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해줌으로써 신라에 거문고의 전통을 뿌리내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김정엽기자 colorgogum@△동편제란?판소리는 창법에 따라 유파를 달리한다. 판소리의 유파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구분된다. 가왕이라 불린 송흥록의 법제를 기준 삼아 운봉구례순창흥덕 등 주로 섬진강 동쪽 지역에서 흥행했던 창법을 동편제라 한다. 박유전의 법제를 표준으로 광주보성 등 섬진강 서쪽을 서편제, 경기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불렸던 염계달모흥갑의 법제가 중고제다. 남원에서는 춘향가, 흥보가 등 우리나라의 귀중한 고전소설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배경으로 판소리 동편제가 시작됐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3.10.11 23:02

업사이클링, 새로운 경제 가치를 만들다 ⑥ 솔메이트삭스·프라이탁에 가보니

스트릿 패션이나 스타들의 공항패션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상품. 패셔니스타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솔메이트 삭스는 고급 양말로 변신했고, 스위스 재활용 가방브랜드 프라이탁은 세계 유일의 명품가방으로 판매되고 있다. 솔메이트 삭스는 헌 옷에서 실을 뽑아내 만들었고, 프라이탁은 폐품천막이 재활용됐다.이들의 공통점은 수작업과 희소성 그리고 내구성을 강점으로 내세워 고가에 팔려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럭셔리 브랜드 강점과 다를 바 없는 차별화 전략은 이미 패션피플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새활용(up-cycle업사이클)된 고가의 상품들 어떻게 재활용(recycling)의 티를 벗어던졌을까? 그들의 제작 과정을 살펴봤다.솔메이트삭스 - 티셔츠 등서 재활용된 실로 양말 생산, 입소문으로 성장 세계 10억켤레 수출프라이탁 - 가방은 방수천막 어깨끈은 안전벨트, 본사 건물도 버려진 컨테이너로 건축△짝짝이 양말 솔메이트 삭스 이렇게 만든답니다.환경을 생각하는 컨셉으로 이미 유럽과 일본 등 해외에서 큰 사랑을 받아온 솔메이트 삭스는 실제 양말에 사용된 실이 버려진 티셔츠 등에서 재활용된 코튼을 사용하고 있다.단단한 니트소재의 독특한 섬유조직으로 따뜻하면서도 통기성이 높아 아웃도어 뿐만 아니라 패션 아이템으로 인기가 높다. 형형색색, 핸드메이드 방식으로 만든 제품이다. 창립자 마리안느 워카린은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부터 배운 솜씨로 연간 100개 정도의 양말을 취미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가족 사업으로 성장했다. 미국 버몬트에 있는 본사에서는 5명의 직원이 디자인부터 세계 각국의 바이어 미팅까지 전 과정의 모든 것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규모는 단촐하다. 세계 각국에 10억 켤레가 넘게 수출되면서 현재는 손뜨개 실력과 비슷한 실력을 뽐낼수 있는 니팅 기계가 작업을 하고 있다.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달라지는 부분은 옷감을 확보하는 방법. 옷감은 헌 옷에서 실을 분리하는 스페인의 회사에서 들여온다. 이중 솔메이트 삭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활용되는 실이 안전한지에 대한 검사다. 사용되는 실 전체는 현재 미국의 Made in Green, Oeko-Tex에 의해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재활용 면에서 실을 뽑아내는 만큼 색은 다양하지 않지만 디자인을 다양화해 지루할 수 있는 요소를 없앴다. 같은 디자인은 하나도 없을 정도다. 또 상품의 이름제작에도 특별히 신경을 쓴다고 귀뜸했다'코스모스(cosmos)', '튤립(tulip)', '드래곤플라이(dragonfly)', '허니비(honeybee)' 등 색상매치에 있어 영감을 받았던 꽃과 벌레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홍보를 활발하게 하지도 않는 이 기업은 오로지 소비자의 입소문에 의해 성장했다. 홈페이지나 팸플릿에서 등장하는 모델들 역시 모두 가족과 친척 이웃이다. 솔메이트삭스의 보관 창고나 본사 건물이 오래된 건물을 사용해 업사이클링의 가치를 건물에서부터 보여주고 있다. 특히 솔메이트 삭스는 정성스럽게 선물 포장을 해주는 것으로 자연친화적인 패션브랜드를 완성한다. △트럭용 방수 천막 가방 브랜드 '프라이탁' 어떻게 만들어질까?트럭을 덮는 폐천막을 뜯어 가공한 뒤 만들어지는 프라이탁 가방. 1993년 그래픽 디자이너 형제인 마르쿠스 프라이탁과 다니엘 프라이탁은 낡은 아파트에서 우연히 보게 된 먼지가 수북히 쌓인 폐천막에서 영감을 얻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낡은 트럭을 덮고 있는 방수포였다.트럭 방수포를 재단해 가방을 만들고 어깨끈으로 자동차 안전띠를 이용했다. 올이 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전거 바퀴의 내부 튜브를 가방 덮개 모서리에 부착했다. 먼저 가방 제작을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트럭의 광고와 덮개 표지를 분리한다. 오래된 방수포 표면의 타폴린(Tarpaulin)을 분리해야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 특히 트럭의 폐천막을 뜯어 가공하는 과정에서 철저한 세척이 가장 우선시된다.또 원색을 제외하고는 폐 방수 천막의 무늬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상품들은 모두 한정판으로 제작된다. 제작에 앞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디자인팀, 마케팅, 판매, 생산, 경영지원 등 모든 부서가 한 곳에 모여 서로 대화하는 과정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디자이너가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총회의를 거친다. 결과가 나오면 샘플제작과 검증 단계에 들어간다. 다양한 시제품을 만들어 PT하고, 대량생산 여부를 결정한 뒤 출시한다.철저한 디자인 및 품질분석이 강점인 프라이탁은 제품과 브랜드를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에 초점을 맞추고 판매한다. 제작 제품과 어울리는 아이템 탐색, 조합이 잘되는 아이템을 철저히 분석한다.특히 판매원 교육에 신경을 쓴다. 최소 3일은 공장으로 출근, 방수포를 자르고 세척하는 일을 한다. 다음은 회계와 판매영업팀을 만나 방수포에 대한 지식부터 품질관리까지 제작 전체 과정을 참여케 하는 등 매뉴얼을 몸소 체득하게 한다. 비가 오면 대부분 가방 내부에 있던 내용물이 젖어버리기 때문에 방수와 내구성이 튼튼한 가방을 찾는 세계인들은 이 독특한 가방에 매력을 느낀다. 프라이탁은 연간 30만여 개를 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본사 건물도 업사이클링의 명성에 걸맞게 버려진 컨테이너(17박스)를 한데 모아 지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윤나네
  • 2013.10.10 23:02

16. 신흥중·고 - 호남 최초 근대교육…전북 기독교 선교 이끈 '맏형 학교'

전주 신흥중과 신흥고 졸업생들에게 '당신이 꼽는 모교의 자산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봤다.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답변은 인성교육이다. 기독교 신앙을 근간에 둔 예배, 채플 수업 등을 통한 인성교육이 개교 113년 학교의 저력을 대변해줄 수 있다는 것. 신흥고 김영기 교장과 조재승 교감은 물론 신흥중 소병은 교장과 김동수 교감도 학교폭력, 왕따, 학습부진 등과 같은 부적응 학생이 다른 학교에 비교해 적은 수준이라고 자신했다.△호남최초 근대교육 요람 '신흥학교'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호남 지역 최초로 근대교육을 시작한 학교, 전북의 기독교 선교를 이끈 '맏형' 학교, 항일민족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학교 등 113주년이란 역사만큼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해왔다.신흥학교의 첫 삽은 1900년 9월 미국남장로교회 선교회가 떴다. 이것이 호남 지역 최초의 근대교육 시발점이다. 선교사 이눌서(William Reynolds)가 자신의 집에서 학생들을 차곡차곡 배출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졸업생 2만1142명(2월 기준)에 이른다.개교 이래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는 건학이념은 지금도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온다. 일제 식민주의에 나라의 안위를 염려한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 319 운동과 1930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을 통해 전주의 항일민족운동 불씨를 당겼다. 1937년 다가공원에 있는 일본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해방 때까지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 625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참전했고, 1980년 신군부의 강압에 맞선 527 시위는 고교생이 벌인 전국 최초의 시도였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00년은 신흥인들을 하나로 모은 해였다. 총동문회가 힘을 모아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를 연 것을 계기로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동문회 활동이 탄력을 받았다. 그 해 31 운동 기념탑을 건립했고, 동문들로부터 20억원을 모아 100주년 기념관 겸 기숙사를 짓게 됐다. △종교정치교육계 인재 배출신흥고 인맥은 짱짱하기로 유명하다. 종교계를 비롯해 정계, 재계, 교육계 등 폭넓게 포진해 있다. 해방 전 초대 서울시장을 지낸 김형민(10회), 반일 저항시인 김해강(22회), 조선대 총장을 지낸 박철웅(30회), 거창고를 설립한 전영창(37회), 차병원을 만든 차경섭 등이 눈에 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애정과 존경을 담은 건학 이념은 세계적인 민중신학자로 평가받은 서남동 목사, 국제종교문제연구소를 연 탁명환 등의 배출로 이어졌다. 국내 최초 하버드 졸업생이 된 하경덕은 연희전문대 교수로 재직하다 흥사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으며, 815 광복 뒤 코리아타임즈와 서울신문 창간에 주춧돌을 세웠다. 재경동문회를 활성화시킨 장두원 전 KBS 전주총국장, 홍성주 전 전북은행장, 송계일 전 전북대 교수는 신흥고 58회 동기. 신일균 신경외과원장(59회)은 1982년 동문회를 조직한 산증인이다. 김수곤 전 전북대 총장과 전주군산시장을 거쳐 행정부지사를 지낸 김인식, 전 안디옥교회 목사를 지낸 이동휘 목사(56회), 오세영 서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 정옥동 중국 연변대학부설복지병원 이사장(60회)도 이곳 출신이다. 최인 CBS 상무, 임채청 동아일보 상무, 송호성 전주MBC 특임국장, 한제욱 전북일보 이사, 김정기 KBS 전주방송총국 PD도 76회 동기로 언론계 파워인맥이다. 정계는 신흥고 출신이 접수한 지역이 수두룩하다. 민주당 대표를 지낸 정세균 국회의원(69회)을 필두로 김생기 정읍시장(66회), 이환주 남원시장(79회), 도의원 노석만(69회), 전주시의원 박병술(72회)김남규(77회)송성환(88회), 김제시의원 온주현(68회), 장수군의원 김홍기(66회), 부안군의원 장공현(67회)오세웅(68회), 진안군의원 김현철(85회)까지 화려하다.재계는 70회 동기인 오공균 (사)한국선급 회장, 이중길 전 KCC 사장이 중심이다. 전일환 전 전주대 부총장(64회)과 은희천 전주대 교수(68회), 이철량 전북대 교수(70회), 이태영 전북대 박물관장(74회), 이용승 서해대 총장과 황금택 서울대 교수(75회), 김동문 완산교회 담임목사(77회), 강신재 한국탄소융합기술원장(78회)이 신흥 인맥을 잇고 있다. 변호사 이종기(86회) 김수태(92회) 조하영(77회) 등은 법조계 신흥인이다.강세인 신흥고에 비해 신흥중은 약세다. 서거석 전북대 총장을 비롯해 유성엽 국회의원, 진성준 국회의원 등을 들 수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3.10.09 23:02

[29. 다문화가정이 쓰러진다] 부부 갈등 덮어두지 말고 적극 드러내야

정부 부처의 '제2차 다문화가족 정책기본계획'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결혼 이민자, 한국인 배우자 및 자녀의 연령이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으로도 결혼이민자의 연령이 상승, 20대에서 30대로 변화되고, 40대 이상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2012년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2009년에 비해 국내 거주기간이 5년 미만인 이민자의 비중이 상당부분 감소한 반면에 5년 이상 국내에 체류한 이민자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이민자들의 한국 거주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한국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초기 정착자들에 비해 5년~10년 이상의 장기거주자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자녀 양육의 어려움을 더 크게 호소를 했고, 가족 간의 갈등도 커져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문화가족의 갈등은 이혼과 별거 등으로 이어지면서 가족의 해체를 증가시키고 있다. 다문화 가족 갈등 치유를 위한 대안 마련이 절실한 때다. △다문화 가족 이혼 지속적 증가세, 원인은?다문화 가족의 이혼율은 하락세와 증가세가 해마다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큰 차이 없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전라북도 결혼이민자의 이혼율은 2004년에 64건에 불과했던 이혼 건수가 2008년에는 357건으로 크게 증가했다. 이후 2009년 333건으로 하락하는 듯하다가 2011년 397건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2012년도에는 341건으로 2008년 보다 이혼 건수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의 하락세와 증가세가 해마다 바꿔가며 나타나고 있어서 2012년도 이혼건수 하락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뚜렷한 현상은 전국의 이혼율 증가와 동일하게 맞물려서 이혼하는 이민자의 수는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2012년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의하면 결혼이민자의 이혼별거에 대한 사유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혼별거의 이유로 성격차이가 48.1%였고, 경제적 무능력이 20.7%로 나타났다. 그리고 남편의 한국인 가족과의 갈등도 7%로 나타났다. 학대와 폭력, 음주와 도박 등도 이혼사유로 적지 않게 나타났다. 반면, 한국인 배우자인 남편 등이 느끼고 있는 결혼이민자와의 이혼별거 이유는 결혼이민자가 느끼는 것과 조금 다르다. 결혼이민자의 가출로 인해 이혼별거를 한다는 응답이 32.8%로 가장 높았고, 성격차이가 30.9%,로 나타났다.△다문화 가족 문제는 언어소통 부족이 원인가족 간의 갈등과 부부싸움은 다문화가족에게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내국인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경우에도 성격차이로 인해 고부간의 갈등,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다문화가족이나 비다문화가정이나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갈등은 상호간의 양보와 수용 그리고 무조건적인 용납 없이는 그 치유와 회복이 어렵다. 그런데 다문화가족의 경우 부부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요한 이유가 성격차이 등에만 있지 않다. 언어소통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것이 주요한 부부간의 싸움의 원인으로 나타났다. 또 다문화가족 부부는 문화적인 가치관 등에 의해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언어소통과 문화적인 차이 등은 다문화가족의 갈등을 증가시키고 해체까지 이르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다문화가족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는 비다문화가족이 겪고 있는 일반적인 성격차이 등의 극복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과제이고, 상대방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혼자의 힘으로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상담과 교육 등이 병행되어야 한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교육 적극 참여로 갈등 치유해야다문화가족지원센터 등에서는 다문화가족의 소통을 위해 통역자를 통한 부부갈등 상담과 아버지 교육, 부부관계 개선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프로그램은 다문화가족의 소통과 갈등 극복과 가정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교육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가족관계 프로그램에 다문화가족들은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다. 가족 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이것을 적극적으로 치유하려하기 보다는 그냥 덮어두거나 숨기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에서 온 쩐티탐(가명)씨는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여러 해 동안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남편은 쩐티탐씨가 다니는 직장에까지 전화를 하며 괴롭히자 어쩔 수 없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폭력피해 등 극심한 피해가 아니더라도 부부간의 다양한 갈등의 문제들은 드러내고 치유하려는 시도보다 덮어두고 쌓아놓는 현상들이 다문화가족 내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 삶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성경에서는 '부부의 인연은 인간이 스스로 끊어서는 안된다'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부부관계 중요성을 여러 고전을 통해 이미 수차례 얘기하고 있지만, 인간의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변호적이며 타자에 책임전가하려는 경향성은 지금까지도 한계와 숙제로 남고 있다. 다문화가족의 해체방지를 위해서는 당사자 뿐만이 아닌, 우리 주변의 여러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당사자인 다문화가족은 스스로 적극적인 소통을 위한 자기 노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먼 타국에서 건너와서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한 결혼 초창기의 감사와 기쁨의 마음을 간직하여 가정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홍성란 亞이주여성센터 사무국장 "부부싸움은 모두 상처 양보가 최고의 치료제"-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의하면 남성들이 이주여성과의 결혼생활에서 이혼을 결정하는 주요 이유가 여성의 가출이라고 하고 있는데요. 이주여성들이 가출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이주여성이 가출을 할 때엔 뭔가 가슴에 사무치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남편과 갈등이 벌어지는 그 장소를 일단 피하고 싶은 심정이 강할 것입니다. 가출은 그 충돌의 현장으로부터 피하려는 하나의 몸부림입니다. 보통 부부간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되면 여성에게는 친정이 안식처이고 피난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이 친정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부부문제가 발생하면 멀리 비행기를 타고 친정에 갔다가 올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이주여성은 가출을 통해 친정을 대신하려는 위로처를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이죠. -남성들이 가출에 대해 상당히 큰 비중으로 생각하는 것은 왜 그렇까요?△가출을 하게 되면 일단 남성이 불편해집니다. 손수 밥도 해 먹어야하고, 빨래도 해야 합니다. 자녀가 있을 경우 애들을 돌봐줘야 하고 기타 잡다한 일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남성의 경우 여성의 가출이 삶이 여러 부분에서 불편함을 가져오기 때문에 여성에 대한 분노가 더 가중될 수가 있습니다. 낮에 직장 일에 지쳐 집에 돌아온 남성은 여성이 없는 환경에서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증폭됩니다. 남성들에게 이주여성의 가출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문화가족 서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갈등의 원인은 '누가 선제 공격을 했는가'와 '정도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주여성은 대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적지 않은 연령대의 남성들과 혼인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결혼 초보자로서 낯선 언어와 문화, 낯선 남자와 그 가족들로 인해 여러 혼란을 겪습니다. 남성의 경우에도 동일할 수 있습니다. 갈등에서 상처받는 자는 쌍방 모두입니다. 양자는 상호간에 양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는 어떠한 단단함도 녹일 수 있는 힘이고 치유의 약입니다. 문제가 발생되면 해 넘어가기 전에 먼저 용서를 구한다면 문제는 손쉬워집니다. 이지훈(전주다문화가족지원센터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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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08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이기수·김희선씨 부부 "표고로 2남4녀 키웠어요"

순창의 67%를 차지하는 산림지역에서 나는 임산물로 연간 1억원의 고소득을 올리는 농업인이 있다.구림면 월정리 오정자 마을에 살고 있는 이기수(68), 김희선(60)씨 부부는 산림소득분야의 선구자로서, 표고버섯과 영지버섯, 밤을 판매한 소득으로 2남 4녀를 거뜬히 키워냈다.구림이 고향인 이기수씨를 따라 시집오면서부터 농사를 시작한 김희선씨는 남편과 함께 37년간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처음에는 논농사로 시작했지만 산에서 나는 밤을 판매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임업분야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2000년에 임업후계자로 선정된 이기수씨 부부는 소득이 높다는 영지버섯을 키우기 시작해 표고버섯까지 같이 하면서 13년째 이어오고 있다.특히 이들 부부는 서울 등 전국에 직거래를 10년째 확보하고 있어 판로로 인한 어려움 없이 이들이 생산한 버섯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처음에 시작한 직거래가 상품이 좋다보니 주위사람들에게 입소문으로 전해지면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고 이씨 부부는 전했다.이씨 부부는 또 "우리는 판로를 확보하게 되고, 도시민들은 믿을 수 있는 친환경 상품을 유통과정 없이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게 되니 상호 윈윈한다"고 말했다.총 660㎡ 8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버섯을 키우고 있는 이들 부부는 하루종일 함께 일하면서도 항상 즐겁다.이들 부부는"버섯을 키워 애들 대학까지 가르치고, 3명은 결혼까지 시켰으며, 미혼인 자녀 3명도 다들 열심히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표고버섯은 지금부터 내년 3월까지가 수확철이니 날마다 비닐하우스를 나와 버섯을 살핀다.버섯에게도 사랑을 주고 관심과 보살핌이 있어야 쑥쑥 자란다. 버섯에 대해서라면 13년 경력이 있어 웬만한 전문가보다 더 잘 알고 있다.그래서인지 이웃주민들이 버섯에 대해 문의하러 오고, 또 현장견학도 오면서 배우곤 한다.평소에 말이 없는 이씨지만 버섯에 관한한 열변을 토하면서, 버섯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또 이들 부부는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특히 김희선씨는 구림면 적십자사와 구림면 새마을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웃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기수씨는 회원으로 활동하지는 않지만, 행사가 있을때마다 묵묵히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한다. "꿈이요? 꿈이 있다면 계속 버섯이 잘 돼 편안하게 살면서 남은 자녀들 잘 결혼시키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죠"계속 아내의 말을 듣고만 있던 이기수씨가 내린 결론이다.묵묵한 남편, 활기찬 아내그야말로 천생 찰떡궁합인 이들 부부는 농촌에서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롤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표고버섯은 항암 다당체 물질인 '레티난'이 함유되어 있어 콜레스테롤을 낮춰 주고 암을 예방하는 효능이 있어 고소득에 좋은 작물이다. 또 혈압을 낮추는 작용도 하기 때문에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예방에도 효과적이어서 표고버섯을 이용한 의약품이 개발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순창=ing6531

  • 기획
  • 임남근
  • 2013.10.08 23:02

전통정원의 재해석 ④ 벤치마킹 - 창덕궁 후원

100여년 전만 해도 창덕궁과 창경궁은 외부와 단절된 신성한 공간이었다. 왕족이 아니면 숨소리 조차 넘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만큼 창덕궁과 창경궁은 왕과 왕족을 위한,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특별하고 유일한 문화유산들을 에두르고 있다. 여기에 세월의 숙명같은 더께까지 내려앉았다. 이렇게 궁궐은 영기어린 민족의 자산으로 자리매김했다. 궁궐정원의 진수로 불리는 창덕궁 후원과 창경궁 정원을 지면으로 만나본다.숨이 막힌다. 과연 이곳이 속세인지 잠시 망설여진다. 창덕궁 구중심처에 자리잡은 후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한폭의 산수화에 빠져들게 된다.후원은 조선 궁궐 정원의 고갱이다. 한 나라의 대표 문화는 지배층의 문화이고, 그 시대 그 민족의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는 다름아닌 궁궐문화라는 점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후원은 조선시대 지배층이 품고 있던 건축적 이상이 구현된 공간이라는 데 이의를 달지 못한다.창덕궁은 조선의 이궁(離宮)이다.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정궁이었다면, 창덕궁은 태종에 의해 별궁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또 창덕궁은 자로 잰듯한 비례와 질서를 앞세운 경복궁과 달리 건물들이 좌우대칭 일직선상에 배치되지 않으면서 '산세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는 비정형적 조형미'를 추구한다. 경복궁이 사무적이고 권위적인 느낌이 큰 반면 창덕궁은 여유로움과 편안함이 배여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선의 국왕들은 경복궁 보다는 창덕궁에서 머물렀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 창경궁, 창덕궁이 모두 불탔을 때에도 가장 먼저 재건된 궁궐이 창덕궁이었다.창덕궁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후원도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 창덕궁의 미덕을 깨트리지 않는다.부용지와 주합루, 애련지와 연경당, 존덕지와 반도지, 옥류천 등이 들어선 후원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국 최고의 정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후원은 숨겨진 정원이라 해서 비원(秘苑)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정원이라 해서 금원(禁苑)으로도 불렸다. 이렇듯 후원은 나랏일로 분주한 조선 군주들의 전용 휴식처이자, 왕을 위한 정원이었다.후원으로 향하는 경계를 넘어서면 부용지를 기준으로 남쪽에는 부용정, 동쪽에는 영화당, 북쪽에 위치한 주합루를 만난다.부용지는 사각형 연못인 부용정과 그 가운데에 원형의 섬으로 구성돼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리가 읽혀진다.'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을 의미하는 주합루는 1층의 왕실도서관인 규장각과 2층의 열람실 겸 전망 좋은 마루로 구성된 복층구조이다.주합루의 직선상에는 등용문이자, 임금과 신하를 상징하는 어수문이 있다. 영화당 앞마당에서 과거시험을 통과한 인재들은 등용문인 어수문을 거쳐 주합류와 규장각을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고 한다.발길을 돌려 춘당대를 거쳐 효명세자가 독서를 즐겼다는 의두합을 지나면 상대적으로 소박한 애련지에 이른다. 애련지를 둘러본 뒤 연경당, 관람지, 관람정, 존덕지, 존덕정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옥류천이 나온다. 인조 때 조성된 옥류천은 후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다. 임금과 신하들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문을 짓는 유상곡수연이 행해졌다고 한다.후원에서는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질 것인가'를 천착한 한국 전통정원의 기본원리를 체득할 수 있다. 상서로우면서도 사색과 위압감이 느껴지는 공간, 다름아닌 창덕궁 후원이다.● '힐링 공간' 창경궁 정원- 권위 감춘 채 여유위안 가득창덕궁 후원이 왕실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창경궁의 후원은 크고작은 정치적 행사를 위한 개방적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 성종 14년(1483년)에는 대왕대비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등을 모시기 위해 증축한 뒤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꿨다. 숙종이 장희빈을 처형하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궁중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또 일제강점기에 놀이공간인 창경원으로 격하됐던 역사의 상흔을 간직한 탓에 아직도 '창경원=유희공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뒤로 하고도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건물이 적은 탓에 권위적인 느낌이 덜한 대신 여유와 위안을 전해준다. 창경궁의 나무그늘을 걷고 있다보면 '아, 좋다'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창경궁의 후원은 현재 춘당지가 있는 북쪽이다. 현재는 창경궁에서 옛 전통정원을 감상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통명전 지원, 낙선재 후원, 춘당지 등이 꼽힌다.낙선재의 경우 세자세자빈후궁들이 거처했다는 역사적 배경을 앞세워 주변 경관요소들이 뛰어나다. 영춘전 맞은편 언덕 아래에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장희빈과 인현황후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통명전을 지나서 수림이 우거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꽤 넓은 면적을 가진 큰 연못과 작은 연못으로 이루어진 춘당지를 만나게 된다.유장한 역사의 생채기가 서려있는 창경궁 정원, 이제는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에게 여유와 휴식을 전해주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 기획
  • 정진우
  • 2013.10.07 23:02

취임 한 달 맞는 김영 전북도 정무부지사

김영 전북도 정무부지사가 오는 11일 취임 한 달을 맞는다. 지역에서 20년 넘게 변호사로 활동해오다 도정을 수행하게 된 김 부지사는 분야별 업무파악과 함께 중앙과 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김 부지사는 취임 일성으로 "전북 발전의 마중물이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뛰고, 또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역실정에 밝고 전북발전에 대한 애착과 의욕도 누구보다 강해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지난 5일, 휴일도 잊은 채 공식행사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출근한 김 부지사를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어보았다.-취임하신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먼저 정무부지사로 도정에 임한 소감을 말씀해 주신다면."우선 정무부지사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지사님과 도민들께 감사드립니다. 취임 이후 중앙 정치권과 지역 사회단체, 그리고 도내 곳곳을 찾아 주민들과 대화하면서 도정에 거는 도민들의 기대가 정말 크다는 점을 새삼 느꼈습니다. 지역이 낙후됐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더 무거워졌습니다. 부지사로서 지역발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뛸 생각입니다."-지역발전을 위해 뛰고 또 뛰겠다고 하셨습니다. 낙후된 전북 발전을 위해 가장 필요한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우선 지역에 대한 도민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확산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하고, 그 바탕에 경제 분야의 해결책이 뒷받침돼야 할 것으로 봅니다. 지역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기업유치와 더불어 우선 전북의 성장동력인 새만금사업이 제대로 추진돼야 합니다. 지역경제 분야에서 경쟁력이 향상되면 도민들이 생활에 여유를 갖게 되고 스포츠와 문화 분야에도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또 이제는 새만금사업을 이어나갈 제2의 전북 성장동력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만금사업처럼 대규모 국가예산을 투입, 전북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성장동력 프로젝트를 발굴해서 적극 육성해야 합니다."-지난 2003년 새만금 소송에서 전북도 공동변호인단으로 참여하신 만큼 지역 현안인 새만금사업에 남다른 관심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공적인 새만금 개발을 위해 정부와 전북도가 풀어야 할 과제를 꼽는다면."새만금 소송 당시, 환경단체에서 주장한 재앙보다도 사업 중단이 더 큰 재앙이라고 생각해서 소송에 참여, 전북도 공동변호인단의 실무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소송 과정을 백서로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성공적인 새만금 개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최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을 정해서 조기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내부개발 사업이 전체적으로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1차적으로 동서2축·남북2축 내부 간선도로 건설 등 SOC(사회간접자본) 구축을 서두르고 선도사업을 정해서 집중 개발하는 방안이 효과적일 것입니다. 전후방 산업에 파급효과가 큰 분야를 찾아서 선도사업으로 추진할 필요성이 있습니다."-정부와 국회 등 중앙 정치권과의 가교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요."일단 개인적으로 중앙정치권과의 연결고리가 부족하다는 점이 저의 큰 단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단점을 알고 있는 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극복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 인간관계나 친화력이 부족하지는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 노력한다면 중앙정치권과의 가교 역할도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제 민선5기 단체장의 임기가 9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민선5기를 마무리하면서 역점을 두고 추진해야 할 도정 현안은."먼저 새만금 내부개발 사업이 차질없이 추진돼야 하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전북 이전을 위한 후속조치에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따르고 있는 내년 국가예산 확보에 총력을 기울일 계획입니다. 당장 국가예산 확보를 위한 현실적인 전략으로는 국회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에 전북 의원이 반드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정무부지사로서 김완주 지사의 3선 여부와 상관없이 제 임기는 내년 6월 말까지로 정해졌다고 보고, 민선5기 도정이 제대로 마무리 될 수 있도록 지사님을 보좌하는 데 주력할 생각입니다."-정무부지사직을 수락하면서 개인적으로 생각한 포부나 각오가 있으셨을텐데요."사실 부지사라는 자리는 어떤 일을 선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닙니다. 부지사의 역할은 우선 귀를 열고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도정에 적극 반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지 않은 임기지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만족할 것입니다. 정무부지사는 때로 궂은 일도 해야 하고 열심히 일해도 겉으로 성과를 나타낼 수는 없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점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눈에 보이는 성과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즐겁게 해낼 생각입니다. 우선 도민들과 소통하면서 각 단체에도 격의 없이 찾아가 진솔한 이야기를 듣을 계획입니다. 집무실은 항상 열어놓고 낮은 자세로 도민들을 찾아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 도정에 적극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더불어 지역 인재양성과 함께 지역의 우수 인력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일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데도 관심을 쏟을 계획입니다."-역대 정무부지사들이 정치권 진출에 관심을 둔 게 사실입니다. 향후 개인적인 행보에도 지역사회의 관심이 많습니다."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현재로서는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 최근의 행보를 놓고 '정치적 야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습니다만 적극적으로 해명 하지는 않았습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공익소송과 지역갈등 해결 등의 분야에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생각에 전북지방변호사회 회장에 뜻을 뒀고, 회장이 되면서 우연한 계기에 전북대 총동창회장까지 맡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어 정무부지사로 발탁되면서 정치에 입문할 뜻이 있다는 소문이 주변에서 더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해 본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합니다. 물론 향후에 순수하게 제의가 들어오고 또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전북대 총동창회장이나 정무부지사직을 발판으로 해서 정계를 기웃거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무부지사로서의 역할이 일종의 정치라면 주어진 기간 즐겁고 재미있게, 또 제대로 일해 볼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정무부지사로 도정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도민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보다 낮은 자세로 도민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김영 정무부지사는- 23년 변호사로 활동, 인맥 탄탄 친화력도김영(55) 전북도 정무부지사는 완주군 봉동읍 출신으로 전라고와 전북대 법대를 졸업하고 제30회 사법시험에 합격, 법조계에 들어섰다. 전주에서 '법무법인 백제' 대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지난해 11월 전북지방변호사회 제30대 회장에 당선됐으며, 올 4월 말에는 전북대 제35대 총동창회장에 선출됐다. 지난달 11일 정무부지사 취임과 함께 전북지방변호사회 회장직은 사임했다.지난 1991년부터 23년 동안 변호사로 활동해오다 이제 막 새로운 길에 들어섰지만 전북 도정에 간접적으로 참여한 경험도 적지 않다. 지난 2003년 환경단체에서 제기한 새만금 소송 당시 전북도 공동변호인단의 소송 실무위원장을 맡았고, 8년 동안 전북도 행정심판위원으로 활동했다.또 전주경실련 공동대표와 전북겨레하나 공동대표 등을 맡아 사회단체 활동에도 적극 참여, 지역실정에 누구보다 밝다. 김완주 지사는 김 부지사를 발탁한 배경에 대해 "지역실정에 밝고 도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면서 다양한 경륜을 갖춰 정무부지사 역할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변호사로서 공익소송과 지역갈등 현안 해결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소신에서 전북지방변호사회 회장에 나섰을 만큼 지역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소탈한 성격으로 친화력이 뛰어나며, 법조계 등 주변에서 신망이 두텁고 지역사회 인맥도 탄탄하다.

  • 기획
  • 김종표
  • 2013.10.07 23:02

도시, 문화로 경제페달 밟다 - 1. 서울 문래예술촌

전국 자치단체가 예술촌 건립에 팔소매를 걷어 붙이고 있다. 전국의 도시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공공디자인 열풍이 주춤하면서 예술촌이 도시재생(구도심 활성화)의 새로운 '카드'로 제시되는 분위기다. 자치단체가 너도나도 도시에 예술을 입히는 이유는 시민들이 그 지역의 활기를 되찾도록 하는 촉매제라는 인식을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지자체 경제 활성화'를 주제로 한 공동기획취재 일환으로 본보는 앞으로 5차례에 걸쳐 국내외 사례를 통해 도시 재생의 돌파구로 지목되는 시민예술촌을 살펴본다. 편집자주△낮엔 철공소, 밤엔 작업실서울 문래동은 '두 얼굴'을 지녔다. 이제는 쇠락한 철공소 등이 밀집한 이곳은 낮엔 용접공의 불꽃이 튀고 쇠 두드리는 소음으로 뜨겁지만, 저녁엔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야행성 예술가들이 창작 열기로 채워진다. 기껏해야 3층 정도인 상가 건물 곳곳엔 철강, 스테인리스강, 용접, 파이프 등의 간판을 단 소규모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낯선 관광객들이 이곳에 들어와 예술을 만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예술촌이 시작되는 광명수산 삼거리 입구부터 철재상가 거리를 거닐다 보면 곳곳에 2~3층에 수줍게 얼굴을 내민 간판이 만날 수 있다.문래동은 과거 '대한민국 철강재 판매 1번지'였다. 1960년대 산업화 영향으로 영등포 일대에 공장들이 몰리면서 철강단지 등이 형성됐다가 1990년대부터 공장들이 빠져나가 사양길을 걷고 있다. 녹물로 벌겋게 물든 골목에 듬성듬성 공간이 생기자 예술가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였다. 저렴한 임대료와 편리한 교통은 소음을 참는 이유가 됐다. 서울시는 자연스레 몰려든 예술가 집단을 지원하기 위해 2010년 '문래예술공장'을 열었다. 철재공장 부지를 매입해 지하 1층~지상 4층, 연면적 2820㎡ 에 대형작업실, 다목적 발표장, 카페형 갤러리, 세미나실, 레지던스 공간 등을 마련한 것. 다른 서울시창작공간들이 시각예술에 집중하는 반면, 문래예술공장은 소리나 미디어, 퍼포먼스 등 낯선 장르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하고 있다. 시멘트 블록으로 된 낡은 골목의 벽에 그려진 벽화, 공장을 실험적 예술공간으로 변신시키려는 움직임, 문래동의 공장과 예술가의 작업실을 탐방하는 '문래동 투어' 등은 문래동의 변신이 안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시민과 소통하는 축제로젊은 예술가들로 인해 침체 일로를 걷던 이 지역 분위기가 활기를 되찾았다. 처음 눈인사만 나눴던 철공소 직원들이 이곳에서 공연과 전시를 관람하고, 행사 후에는 예술가들과 함께 삼겹살 파티를 열기도 했다. 대문이나 옥상에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 달라는 민원도 생기고, 덕분에 예술가들은 철재 등 재료를 공짜로 제공받곤 한다. 예술가들은 정기적인 반상회도 갖고, 공동 블로그도 운영하고, 예술 프로젝트도 함께 준비한다.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은 2007년 6월에 거리축제인 '경계 없는 예술프로젝트 : 문래동'을 열었고, 10월 연합축제인 '물레아트페스티벌'로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축제로 판을 키웠다. 매년 10월에 열던 페스티벌은 올해 8월로 옮겨 간객(間客)을 주제로 한 기획전, 물레페스티벌의 판을 처음 연 '춤추는 공장'의 융합 공연, 국내외 예술가들을 초청한 워크숍 등으로 속을 꽉 채웠다. 해를 거듭할수록 페스티벌에 관한 주변의 관심과 기대가 높다. 그래서 문래동은 여전히 젊은 작가들이 선호하는 동네다. 지난 3월 입주한 30대 커플이 운영 중인 '재미공작소'는 음료를 주문하면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빌려주는 대안 문화공간이다. 예술가들의 입소문으로 출판기념회, 개인전, 공연, 창작워크숍까지 자유롭게 진행되는 것. 인디 공연과 유화 강좌, 시 창작 강좌 등으로 달력이 꽉꽉 채워지고 있다.후발주자에 가까운 갤러리 카페 '솜씨'(Cotton Seed)도 문래동 작가들의 사랑방이다. 비영리 갤러리인 이곳은 판매금액을 100% 회원들 뜻에 따라 기부한다.△ 재개발로 예술촌 사라질까 걱정 하지만 문래동 예술촌의 미래는 아직 불투명하다. 지난해 시내 준공업지역에 최대 80%까지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도록 서울시 조례가 개정됐고, 인근 주민들과 개발업자들은 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희망하고 있다. 철거가 시작되면 영세 공장은 물론 예술가들 역시 문래동을 떠나게 된다. 문래동 예술촌을 터전으로 하는 공연과 전시가 일시적 퍼포먼스가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다행스럽게도 서울시는 재개발을 앞둔 문래동에 대해 현 모습을 보존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진행하면서 옛 모습 일부를 의무적으로 보존하는 '흔적 남기기' 프로젝트 일환이다. 예술가들은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곳을 창조지구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면서 "문래동은 군수공장에서 예술촌으로 변신한 중국 베이징의 다산쯔처럼 서울의 새로운 문화명소로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문래동의 실험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동호 커뮤니타스 대표 "지역 이야기 담는 마을 만들기 돼야"전국 자치단체가 추진하는 마을 만들기 사업의 성적표는 몇 점이나 될까.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지자체 경제 활성화'를 주제로 한 공동기획취재에 초청된 신동호 커뮤니타스 대표는 "개발을 우선하는 행정이 개성을 잃은 마을만 찍어내고 있다"고 진단했다. 걸림돌은 행정 편의주의다.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진 주민들의 역량을 강화해 실행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한 기회비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고 제가 얻은 깨달음은 딱 하나였습니다. 지역적 서사를 구축하는 힘이 바로 정의라는 겁니다. 하지만 현재의 도시 계획은 개발 이익을 둘러싼 주민 간 갈등을 무마시키고 지역의 서사를 배제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그는 대구 수성구 만촌12동 마을 특성화 사업이 모범 사례로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마을의 정체성, 지역성, 특수성을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본래 만촌동은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마을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네이밍 공모전을 했죠. 그 결과 '해피타운 만촌'으로 결정됐습니다. 만촌의 지향과 의미를 토대로 여유와 전통에 기반한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요."이후 이미지텔링을 통한 마을의 특성화 사업이 시작됐다. 공공디자인 전문가와 주민들이 합심해 마을 팻말가구조형물 등을 만들고 마을을 디자인하게 된 것. 그는 "결국 주민들의 참여가 없는 화려한 이벤트와 프로그램 대신 삐걱거리더라도 주민들에게 의사결정권을 돌려주고 충분히 논의해야 마을 만들기 사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했다.

  • 기획
  • 이화정
  • 2013.10.04 23:02

지리산을 세계복합유산으로 ⑫ 현대문학 속 지리산

현대문학 속에서 지리산은 아름다움 보다는 비극적 충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화합과 동질보다는 이념적 갈등과 비극이 지리산 계곡 곳곳에 남아 있는 탓이다. 인간다운 삶을 갈구했던 사람들의 핏빛 절규가 동백꽃처럼, 진달래꽃처럼, 단풍처럼 빨갛게 타오르다 결국 맥없이 스러져간 역사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소재로 한 모든 문학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은둔과 수행, 전쟁, 투쟁의 질곡이 뒤범벅된 지리산 문학작품들은 '한'의 소산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하여 이병주의 '지리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 소설류는 대부분 일제시대와 해방, 6.25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빚어졌던 민족의 한과 비극을 다루고 있다.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고 했다.옛날 지리산을 무려 17회나 탐승한 남명 조식 선생은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긴'지리산을 '무릉도원'이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조식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임란을 겪었다면, 지리산이 무릉도원으로 보였을까. 박경리는 소설 '토지'의 서문에서 "악양 평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넘볼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이 아름답고 광활하며 비옥한 땅이다."라고 호평했다. 하지만 정작 지리산에 대해서는 "지리산이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적 현장이라면 악양은 풍요를 약속한 땅이다."라고 적었다. 박경리의 지적처럼 현대문학에서 지리산은 한과 눈물과 핏빛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다. 탄압받는 민중, 힘없는 민중, 억울한 죄인, 세상에 실망한 지식인, 이념적 궁지에 몰린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 무릉도원을 꿈꾸며 절규하던 공간이다.지리산 남쪽 악양 평야는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과 생명의 젖줄 섬진강 사이에 있는 널찍한 '무딤이 들판'이다. 악양 평야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자리잡은 평사리에서 최참판 일가가 조선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무렵까지 겪는 애증을 그린 대하소설 토지는 서희와 길상, 조준구 등 다양한 부류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삶의 조건과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조정래의 지리산은 섬짓하다. 산도 붉고 사람도 붉은 곳으로 유명한 지리산 피아골은 조정래에게 더 이상 아름다운 골짜기가 아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마지막 편에서 피아골의 붉은 경치를 이렇게 해석했다. "골짜기마다 단풍이 흐드러지고 자지러지지 않은 데가 없었지만 피아골은 특히나 유별났다. 〈중략〉그러나 피아골의 단풍이 그리도 핏빛으로 고운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고 했다. 먼 옛날로부터 그 골짜기에서 죽어간 원혼이 그렇게 피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떠도는 말은, 연곡사 아래서부터 섬진강 어름까지 물줄기를 따라가며 양쪽 비탈에 일구어 낸 다랑이논 마저 바깥세상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굶어죽은 원혼들이 그렇게 환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정래의 지적처럼 약한 자 민초들의 한 서린 피눈물은 지리산 주변 800리 자락을 타고 천년 만년 흘러내리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생존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리무중 지리산 속을 진군해 가다 어느 날 벌어진 전투에서 총탄에 사라져간 젊은 영혼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가슴을 짓누르며 분노케 한다.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소백산을 따라 남진하던 중 군경과의 교전 및 전염병으로 600여명이 사망, 사기가 크게 저하된 부하들을 향해 "북으로 가는 길만이 살 길이 아니다. 남진하여 지리산까지 가면 그곳에서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며 독려한다. "남부군은 다시 행동을 일으켜 둔철산을 넘어 서진의 길을 시작했다. 경호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섰을 때이다. 앞서 걷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더니 뒤를 돌아보고 감격어린 소리로 외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중략〉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남부군은 드디어 그 긴 여로를 겪어 목적한 곳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수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신비로운 웅봉(雄峰)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략〉박태영으로서도 감회가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썼던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이 된 감정으로 넋을 읽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이병주. 지리산)어느 전투에서 빨치산의 총탄에 쓰러진 풋내기 경찰의 품에서 획득한 수첩에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인가"라고 적은 빨치산 홍행기도 곧 토벌대의 총탄에 사살되고 마는 비극의 현장 지리산의 단풍은 조정래의 해석처럼 핏빛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빨치산과 토벌대의 쫓고 쫓기는 살육전 속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민초들이 있었다. 경남 거창과 산청, 함양, 전북 남원, 구례, 함양 등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던 국군이 양민을 대거 학살했다.경남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시비에서 군산 출신의 시인 문효치는 이렇게 읊고 있다. "님 앞에 서 있기가 부끄럽습니다퍼부어오는 총탄이 우리의 양심을 사살할 때그 양심의 갈래 끝에서 산화된 님이시여〈중략〉이제 저 붉은 낙조의 순간처럼더 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운 꿈만 꾸소서아픈 기억에 떨고 있는 이 땅을 지켜 주소서"(문효치. 저 하늘의 별이 되신 님이시여)또 시인 이원규는 '지리산 멧돼지'에서 순종을 고집하다 결국 죽어간 지리산 빨치산들의 운명을 이렇게 노래한다.〈중략〉"반종의 멧돼지처럼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 보지만순도 백의 혁명은 죽음 뿐이라는 것을순결한 야인을 꿈꾸지만 그는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이원규. 지리산 멧돼지)지리산 문학이 모두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수필가 백남오는 '겨울밤 세석에서'란 수필에서 겨울밤 세석평전에 깃든 태고의 신비를 바라보는 감동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세석은 하얀 눈을 덮어 쓴 채로 바람의 폭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중략) 문제는 달빛입니다. 그 천지개벽 같은 혼돈의 현장을 말릴 생각도 않은 채, 달빛은 교교하고도 무심하게, 바람의 횡포를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달빛까지 함께 어우러진 세계, 이것이 천상인지, 지옥인지 그것을 분별할 능력이 제게는 아무래도 없습니다.'

  • 기획
  • 김재호
  • 2013.10.04 23:02

안영길 중국 하얼빈 한국음식점 '순풍' 사장

두 번 한국을 떠났다. IMF가 터졌던 98년이 첫 번째고, 한국에 돌아왔다 야반도주(?)하다시피 다시 떠나야 했던 2003년이 두 번째다. 10년이 지난 지금, 중국 하얼빈에는 한국 요리로 이름난 음식점이 있다. 원래 이름은 '순풍(順風)'이지만 한국짜장면으로 이름난 덕분에 아예 '한국짜장면'이 가게 이름이 되다시피 한 음식점이다.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짜장면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곳, 엄지손가락 높이 치켜올려 세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맛으로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곳. 이 음식점 주인은 한국사람 안영길 사장(57), 두 번의 도전 끝에 하얼빈에서 '한국짜장면' 신화를 써낸 주인공이다. 그의 성공담은 낯설지 않다. 온갖 고난에도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극복해 끝내 성공한 사람들의 인생스토리가 우리 주위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사장의 성공담은 좀 다른 면이 있다. 고난의 강도나 시련의 깊이 때문이 아니다. 마음먹은 일은 실천하고야 마는 도전정신은 그렇다하더라도, 멀리 내다보는 일에만 마음 맡기지 않고 '오늘'에 더 충실하고, 늘 '내 주위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쏟는 삶의 태도가 그의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었다면 어떤가. '전혀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삶의 태도만으로도 역경에 처한 자신을 온전히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석을 하루 앞둔 연휴, 고향을 찾은 그를 전북대 안 카페에서 만났다. 8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 동안 전북대 앞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했던 그에게 전북대와 인근의 풍경은 각별한 의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공했으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야 했던 이 공간은 추억이 되었지만, 언제나 그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바탕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바쁜 일정에서도 그는 여유로워보였다. 고단한 일상을 짐작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그의 삶, 뒤편을 더 궁금하게 했다. -일정이 바쁘시더군요. 내일 중국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긴 시간 나와 있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국에 나온 김에 중국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있는 북경에 잠깐 들러 하얼빈으로 갑니다. 애들이 학교 다니느라 북경에 가 있는 5년 동안 한 번도 못 갔거든요."-중국은 언제 가셨습니까. "2003년 4월이니까 10년이 조금 넘었군요. 그보다 앞서 98년에도 중국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일이 풀리지 않아 1년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지요. 전북대 인근에 다시 음식점을 열었는데, 장사가 잘 안되었어요. 4년 동안 고생하다 빚을 지고 부끄럽지만 거의 야반도주하듯이 중국으로 떠났습니다."-실패의 경험이 있는 곳에 다시 돌아가 도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다시 하얼빈에 갔을 때 바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어요. 아이들 교육이 제일 큰 문제였는데, 그 당시에는 한 달 동안 있어보면서 애들이 잘 적응할 수 있다 싶으면 우리 부부는 한국에 다시 들어올 요량이었습니다. 우선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내가 먼저 한국에 들어간 뒤의 상황을 보니 중국에 애들만 남겨놓는 것만큼 나쁜 선택이 없더군요. 제가 남았죠. 그때부터 2005년 9월 식당을 열기까지 오로지 애들 교육에만 전념했습니다."-전업주부 일을 하신 셈이군요.(웃음)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나요. "두 번째 간 것이 4월이었는데, 그곳 학교는 9월에 학기가 시작하니 애들이 집에 있어야 했어요. 애들이 넷이나 되니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죠. 한국에서 아내가 남의 식당일 해주고 보낸 돈이 전부였는데, 그래서 돈을 벌 요량으로 대련에 가서'보따리 무역'도 잠시 해보았어요. 기대만큼 벌이가 안 되더군요. 대련은 살기 좋은 도시였지만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고 할일은 마땅치 않았어요. 그래서 지인이 추천해준 진황도로 갔는데 우선 작은 도시인데다 인천에서 직항 뱃길이 열린다고 하고,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죠. 1년 쯤 살았습니다."-한국 사람이 있어야 외로움도 나누고 할 것 같은데 오히려 없는 곳을 선호하셨군요. "한국 사람과 교류하면 아무래도 그것이 편하니까 중국 적응하는 시간이 늦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깐 다니러 간 것이 아니고 살려고 간 곳인데……. 하얼빈에서도 아이들이 한국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가능하면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해 교민사회와 떨어져 있었던 덕분이었죠."-기대한 만큼 중국 사회에 적응은 빨리 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아직 중국말이 서툴 때였지만 많은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만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호의적이고 아주 친절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요."우선 내 자신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늘 인식했습니다. 중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은 배타적이지 않아요. 경계를 하지 않죠. 그런데 주위 사람들을 보면 중국과 중국인들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더군요."-많은 사람들이 낯선 나라에 가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쉽게 해결하신 것 같습니다."외국에 가서 살게 되었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나라 문화에 적응하려고 하는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예의가 없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오히려 폄하하는 듯 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국이 잠시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보이는 것만이 중국의 모든 것이 아니거든요."-식당이 길지 않은 시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짜장면 이야기 해보죠. "87년에 중국음식점을 열었으니까 25년이나 되었군요. 처음 2년은 철가방 배달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주방에 들어가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죠. 어깨너머로 배웠지만 수많은 요리책과 자료들을 보고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만드는 것이 성공 비결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원칙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음식점을 열기 전에는 대학에서 학과 조교로 일하셨다면서요. 어떻게 삶을 한꺼번에 바꾸셨는지 궁금합니다. "당초부터 학문과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석사과정까지 마쳤지만 그 이상의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당시 개인적인 상황도 힘들었고, 그래서 마음을 접었지요. 별 갈등 없이 중국음식점을 학교 앞에 열었습니다."-왜 꼭 식당이었습니까. "돈을 벌고 싶었어요. 몸이 성하니 배달이라도 할 수 있겠다 싶었고, 학교 인근에서 가장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음식점은 해볼만하다고 생각 했죠."-그 음식점이 이 일대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여러 번 갔었거든요.(웃음)"장사가 아주 잘되었죠. 짧은 시간에 돈을 벌어 인근에 건물을 살 정도였으니까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랄 수 있지요."-그런데 왜 빈손이 되어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까. "다른 일에 마음을 팔았어요. 욕심을 낸 것이죠. 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넘어 사채에 제 2금융권까지 활용하면서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돌파구가 필요했지요. 첫 번째 중국행도 그랬고, 다시 돌아와 4년 동안 버티다가 두 번째 떠날 때는 더 절박한 상황이었어요."-그래도 '순풍'이라는 음식점을 열고 8년 만에 하얼빈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짜장면' 식당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때의 실패가 오늘을 있게 한 바탕이 된 셈이군요. "그런 셈인데,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습니다."-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언제였습니까."가족이 떨어져 살았던 5년 여 동안이에요.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져 3년 동안 얼굴을 못보고 지내기도 했지요. 개인적으로는 아내가 2005년 9월에 식당 문을 열면서 잠시 다녀간 적이 있는데, 개업을 앞두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요. 아내에게 미안함이 컸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싸한 아픔이 몰려오더군요."-그런 아픔이 더 의지를 강하게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경제적 빈곤도 벗어나야 했지만 가장 절박한 것은 가족이 함께 사는 일이었으니까요. 지금도 가족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때와는 동기가 전혀 다르죠."(웃음) -듣기로는 식당의 매출이 놀랍던데요.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요."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요. 처음 하얼빈에 식당을 열었을 때 하루에 한국 돈으로 10만원 매출이었다면 지금은 수십 배 늘었어요. 처음에는 주방장과 두 명 직원까지 네 명이었는데 지금은 주방만 25명, 서빙 관리 등 모두 합하면 50명 직원입니다. 연 매출이 40억 원이 넘습니다."-기업이군요. 그렇게 성공하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면서요."메뉴에서부터 쓰린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몇 가지 한국음식을 정해놓고 이중에서 골라라는 방식이었죠. 그런데 중국인들이 오면 다른 메뉴를 찾는 거예요. 고집을 꺾지 않다가 결국은 내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한국 손님들은 많이 왔지만 그들이 다른 손님을 데리고 오는 파급효과는 적거든요. 중국인들이 많아야 고객이 늘지 않겠어요."-짜장면 말고 다른 특별한 메뉴도 필요했나요. "전체 매출의 가장 큰 부분을 짜장면이 차지하지만 지금은 고추장삽겹살이 인기 있습니다. 한국음식을 중국인들의 입맛과 문화적 특성을 고려해 개발한 것이죠.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니 재미도 있고, 또 찾아오는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내놓을 수 있으니 보람도 있고요." -'한국짜장면'을 중국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한 비결이 궁금하군요. "짜장면은 중국식 작장면과는 전혀 다릅니다. 재료도 만드는 방식도 다르지요. 한국식 짜장면은 고소하고 단맛, 그리고 쫄깃한 면발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곳 재료만으로는 그 맛을 내기 어렵더라고요. 온갖 재료를 다 동원해서 그 맛을 살려낸 것이 주효했죠.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요."-중국인 직원들과는 신뢰가 중요할텐데요. "저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낯선 나라에서는 더 그렇죠. 한 가족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50명 직원들을 모두 내 가족같이 생각해야 그들도 주인의식으로 일할 수 있게 되죠. 입장을 바꾸어, 저 한국인 사장이 돈만 벌 목적으로 식당을 운영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 신뢰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온전히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외롭긴 했지만 그 대가는 큰 선물이 되었죠. 우리 직원들은 저에게 '한국사장'이라고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사장님'이죠. 저를 거의 교주로 대합니다.(웃음)"-친 가족처럼 대해주신 덕분이겠군요.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돈을 벌기 위해 중국 진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우선은 그곳 주민이 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한발만 딛고 돈 벌어 가겠다는 생각으로는 십중팔구 실패합니다. 저는 중국인이 되기 위해 언어를 열심히 익혔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배우겠다는 자세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것을 직원들과 손님들이 먼저 알아주었습니다. 우선 언어부터 익히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남의 나라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당연히 어려웠지만 지루함과 기쁨과 보람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바탕으로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뢰를 쌓는 일이죠. 중국은 법치국가라기보다는 이치국가로서의 특성이 강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해결되는 일들이 많죠. 법과 규정이 엄격한 사회는 그것에 적응하면 되지만, 사람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회는 소통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날, 그는 하얀 셔츠에 검정바지를 입고 나왔다. 식당에서도 이 옷을 입고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지 끝은 다 닳아 헤져있고 구두는 금세 터질 것처럼 낡았다. 눈길을 의식했는지 안 사장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이 바지 하나로 사니 빨리 낡는다"고 말했다. 짐작하기 어려운 검약의 일상이 드러나 보였다. 사실 그는 중국인 종업원들을 1년에 두 번 가족과 함께 초청한다. 경비만도 수천만 원이 드는 이 일을 안사장은 '가족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내가 더 행복한 기쁜 선물'이라고 했다. 궁금했던 그의 성공비결, 그 답을 따로 묻지 않아도 됐다.■ 우여곡절 중국 이민…한국식 짜장면으로 성공신화 1956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열 세살때 농사를 지었던 아버지가 전주시청의 말단직 공무원이 되어 전주로 이사했다. 중고등학교시절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 고2때는 상록수가 되겠다며 울릉도까지 가출을 감행한 경험도 있다. 다시 돌아와 복학하는 바람에 전주고 1년 후배들이 그의 동기가 됐다. 서울대 미대를 지원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특별한 목표 없이 전북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문에는 뜻이 없었으나 대학 2학년 때 스승의 권유로 연구실에 있게 되면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대학원(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으나 아무래도 학문은 길이 아니라는 생각에 개인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창한 미래보다는 현실 속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987년 2월, 전북대 정문 근처에 열었던 중화요리집 '사천성'이었다. 성실함으로 무장(?)한 그의 사업은 기대 이상으로 번창해 10년만에 건물주가 되었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 아파트개발지구의 상가부지에 눈을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은행대출을 받아 건물을 매입한지 한 달이 채 안 돼 IMF가 터졌다. 그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였다. 그 뒤 두 번의 중국 이민에 도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하얼빈의 이름난 식당 사장이 됐다. 한국식 짜장면과 새롭게 개발한 한국식 요리로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덕분이었다. 그의 이민사는 길지 않지만 그 안을 펼쳐보면 중국이민사의 교과서가 될 만하다. 그는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인들과 소통하며 중국인들의 문화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들의 일상을 존중하며 스스로 중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쉽지 않았을 그 과정 덕분에 중국의 지인들에게 그는 '신뢰할 수 있는 한국사람'이 될 수 있었다. 동토의 도시 하얼빈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는 곧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함께 일해준 중국인 종업원들의 인생을 바꾸어주진 못하지만 최소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반을 준비해주는 일'이다. 얻은 만큼 돌려주는 일, 주위사람을 배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일, 멀리보지 말고 내 앞과 주위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일상의 철학으로 지켜온 그에게는 '꼭 지켜내야만' 하는 목표다.

  • 기획
  • 김은정
  • 2013.10.03 23:02

[지역아동센터의 변화] 교과서엔 없는 문화체험 '방과후가 즐겁다'

지역아동센터는 보호자와 지역사회를 연계하면서 아동이 건전하게 육성될 수 있도록 아동을 보호하고 교육하며, 건전한 놀이와 오락을 제공하는 등 종합적인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동복지 이용시설이다. 현재 전북지역에는 286개 센터에서 7400여명의 아동이, 전주에는 64개소로 1000여 명의 아동이 생활하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시설장의 교육철학에 따라 운영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최근에는 대부분 아동에게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면서 아동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지역아동센터들이 생겨나 주목을 끌고 있다. 차별화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 지역아동센터를 취재했다.△부모님 퇴근할 때까지 지역아동센터에서 공부해요전주시 효자동에 사는 이미숙씨(49)는 맞벌이 부부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2학년인 늦둥이 딸 지현이가 혼자 집에 있다는 생각에 퇴근시간만 되면 마음이 다급해졌다. 큰딸은 타지에서 대학에 다니고, 고등학생인 아들은 밤 10시가 넘어야 귀가하므로 학교 방과후교실을 마치고 5시경 돌아와 혼자 있는 지현이 저녁을 챙겨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여유가 생겼다. 지인의 추천으로 다니게 된 지역아동센터에서 저녁을 먹고 7시까지 놀다가 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역아동센터는 방과후 아동에 대한 적극적 대책 마련을 위해 2003년 아동복지법에 의해 기존 공부방 위주의 방과후교육이 아동복지시설로 법제화되면서 빈민계층에 국한된 공부방이 아니라 지역중심의 보편적 아동서비스로 확대되었다. 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 걱정인 맞벌이부부들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고 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 운영으로 아동에게 교육뿐 아니라 복지, 의료, 문화 등 종합적인 복지서비스를 지원해주고 있다.△지역아동센터에서 일본어는 물론 합창, 요리까지 배운다전주시 인후동에 위치한 새움지역아동센터는 거점기관으로 아동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다. 일본어, 합창, 하모니카, 바둑, 안전교육, 요리 프로그램들이 아동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고 있다. 센터에 들어서니 중앙벽면에 가족캠프를 다녀온 후 만든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여름방학마다 가족사랑 캠프를 진행하는데 지난해에는 제주도를, 올해는 서울역사탐방을 다녀왔다.장화정 사회복지사는 "물론 교사의 입장에서는 더 귀찮은 과정이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아동들이 주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아이들을 믿어주는 만큼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고, 보람과 긍지를 가질 수 있다고 좋다"고 설명했다.△영어민 영어수업에 원예치료 프로그램 받으며 실력 쑥쑥 전주시 평화동에 위치한 꽃밭정이지역아동센터는 다른 센터보다 공간이 넓어 야외놀이를 많이 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일주일에 3번 정도는 야외로 나가 배드민턴 축구 피구 등의 운동을 즐긴다. 특색사업으로 원예치료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센터 입구에 심어진 예쁜 꽃도 아이들이 활동한 결과물이다. 올해는 주변 공터에 고구마 옥수수도 심었다. 신철호 사회복지사는"우리 센터는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며"성장기에 있는 아동들이라 먹는 것에는 재정을 아끼지 않는 편이어서, 센터에서 김치도 직접 담그고, MSG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난타, 한문수업 자체적 프로그램 운영으로 문화체험 기회 줘요전주시 삼천동에 위치한 소망지역아동센터는 2년간 진입평가를 받은 후 올해부터 운영비 지원을 받게 됐다. 난타, 그림, 한문수업, 바둑 등 자체적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주변 지역아동센터와 연합활동으로 아동들에게 다양한 문화체험 기회를 주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주변 지역아동센터와 함께 전북대 봉사동아리가 주최하는 레이보우 브릿지 행사에 참여했다. 애니메이션영화를 보고 물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었다. 삼성장학재단이 후원하는 농사체험으로 상반기에는 옥수수를 재배하여 수확했고, 하반기에는 배추를 심는 활동도 진행한다. KT 아이티써포터즈팀이 강사를 지원해주어 8회차에 걸쳐 미술수업도 진행했다. 전북푸른운동본부에서 지원하는 숲 체험도 매달 1번씩 이루어지고 있다.그러나 개인이 운영하는 센터의 경우 재정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원되는 복지수준의 운영비는 종사자 인건비와 프로그램 진행비, 각종 공과금과 시설 운영비로 지출하는데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한상호 시설장은"아동에 대한 서비스는 많이 요구되지만 예산이 적어 많은 지역 아동센터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했다. ● 조정현 전북지원단장 "학력위주 교육은 그만, 아이들과 행복 나눠요"- "지역아동센터전북지원단은 양적으로 증가한 지역아동센터가 아동복지를 위한 전문기관으로 자리매김하도록 지역아동센터 이용아동과 종사자를 지원하는 기관입니다." 지역아동센터전북지원 조정현 단장은 지역아동센터가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아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가정과 사회, 국가와 협력하여 지원하고 돌보는 1차적 지역보호망이자 또 하나의 가정이라고 소개했다.아동이 행복한 사회를 위한 공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행정재정적 지원을 보완할 필요도 있다는 게 조 단장의 생각이다. 조 단장은 지역아동센터 관계자들은 지역아동센터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낮으므로 다른 아동복지시설에 준한 운영이 가능하도록 자치단체가 재정적 범위 내에서 추가적인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다른 아동복지시설에 비교할 때 직원의 인건비가 지나치게 낮기 때문에'아동지도수당'과 같은 장려금 지급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고. 조 단장은 "종사자의 질이 지역아동센터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지역아동센터의 시설장, 생활복지사, 아동복지교사 등 근무자에 대한 교육훈련의 기회를 늘리고, 교육의 내용을 전문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시설장은 기관운영과 자원개발에 대한 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생활복지사와 아동복지교사에 대해서는 아동에게 학습지도, 상담, 사례관리, 문제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도기법 등에 대한 보수교육을 보다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지역아동센터는 아이들이 함께 꿈꾸며, 함께 나눌 수 있는 건강한 희망놀이터입니다. 아동이 올곧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신경을 써야지요. 아이들이 행복해야 지역사회가 행복해집니다. 아이들의 평화로움이 지역사회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 솟아나기를 희망합니다."조 단장은 현재 지역아동센터의 운영지원 및 프로그램지원을 통해 표준화된 지역아동센터의 모형을 제시하고, 지역사회 욕구조사와 연계사업을 통해 지역사회 내 아동복지서비스의 지원체계를 확보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지나치게 학력 위주의 교육에 불편해하는 조 단장은 "현재 살아가는 삶의 주체가 현재의 삶에 행복해야 하는데 우리는 아동들에게 공부만을 강요 하고 있다"며 "아동들이 현재의 삶에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어 "지역사회가 아동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면 좋겠다"며 "불우이웃돕기나 장학금 전달 차원에서 연말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봉사해주면서 아동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기를 당부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이금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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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0.01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임실 작은별 영화관

농촌인 임실에서 영화상영이 중단된지 30여년만에 재개될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특히 규모는 작지만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개봉작을 전국과 동시에 상영한다는 계획이어서 영화마니아들의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지난해 2월부터 추진된 영화관은 임실군민회관 지하에 설치된 수영장을 개축, 사업비 9억3000만원을 들여 이달초에 완공됐다.'작은별영화관'으로 명명된 이곳에는 17억2000만원을 따로 들여 게임장과 공연장, 휴게실 등 다목적실도 갖춰 주민복지시설로 거듭났다.다목적 문화공간 조성을 바탕으로 군민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삶의 질 향상을 기여키 위해 개설된 영화관은 전북도와 전북은행도 사업비를 투자했다.지난 10일 관내 유명인사를 초청해'스파이'를 첫 상영작으로 시험을 마친 작은별영화관은 1관의 경우 37석에 이어 2관은 53석으로 마련됐다.이와 함께 14일부터는 매일 오후 4시와 7시 2회에 걸쳐'가디언즈'와'광해'가 상영됐고 24일부터는 가족영화'로렉스'와'토탈리콜'이 무료로 운영중에 있다.작은별영화관의 정식 개장일은 10월 5일부터 본격 상영에 들어가고 개봉작으로는 1관에서 모자간의 끈끈한 정을 담아낸 유아인김혜숙 주연의'깡철이'가 선보인다.또 2관에서는 딸이 성폭행을 당한 상황에서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그려낸 설경구엄지원 주연의'소원'이 상영될 예정이다.상영시간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고 1일 5~6회에 걸쳐 밤 11시까지 운영되며 팝콘과 각종 음료 등을 판매하는 매점도 설치됐다.영화관 이정현 매니저는"대부분의 영화들은 서울 등 대도시와 동시에 상영할 계획"이라며"군민들에 사랑받는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임실에 영화관이 들어섬에 따라 그동안 전주 등지에서 영화를 즐겨야했던 주민들에는 시간적, 경제적 혜택을 톡톡히 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이곳에서는 2D와 3D 영화의 상영도 가능하고 입장료도 각각 5000원과 8000원으로 책정, 도시보다 비교적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이를 통해 그동안 가족단위로 전주에서 영화를 관람했던 주민들은 식사와 교통비 등 최소 10만원이 소비됐으나 이곳에서는 절반의 비용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여진다.특히 오고 가는 시간과 영화를 보기위해 대기했던 시간도 대폭 단축될 것으로 보여 주민 이용율도 점차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작은별영화관은 (주)글로벌미디어테크 영화전문업체가 임실군으로부터 위탁운영권을 체결, 관리를 맡는 것으로 알려졌다.신현택 군수대행은"영화관 개설로 군민에 대한 문화복지 혜택이 늘어났다"며"사랑받는 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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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우
  • 2013.10.01 23:02

17년만에 봉황대기 우승 이끈 석수철 군산상고 감독

'역전의 명수'가 부활했다. 추석연휴를 사흘 앞둔 지난달 15일 서울 목동구장에서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지난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군산상고의 우승 소식은 14년의 세월을 넘어 실로 오랜만에 들려온 낭보였으며 17년만에 다시 품은 봉황기였다. 특히 장단 21안타를 몰아치며 20대4의 대승을 거둔 '제41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 소식에 군산시민들은 역전의 명수 부활을 이야기했다. '역전의 명수' 부활 한가운데에 군산상고 출신으로 성균관대를 거쳐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약했던 석수철(41) 감독이 있었다. 침체에 빠져있던 군산상고 야구부 감독으로 지난 2011년 12월 부임해 1년 반 만에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며 '역전의 명수' 신화를 부활시킨 석수철 감독을 만났다.-이번 대회 우승요인과 최대 고비는."우승요인으로 결론부터 말한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훈련이었습니다. 막상 감독으로 와보니 가능성 있는 재목감들도 있었지만, 기본부터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인사에서부터 기합 소리까지 제멋대로였고, 그동안 주위에서 응석을 받아준 탓인지 패기도 근성도 없어 보였습니다. 야구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역전의 명수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와 군산상고 야구 선수로 지녀야 할 명예, 자부심, 끈기, 근성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습니다. 훈련을 시키다 보면 밤 11시가 훌쩍 넘어버리곤 했습니다. 사실 올해보다는 내년도 성적을 목표로 선수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기본기부터 훈련시켰는데 잘 따라 와 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선수들이 힘들어 할때면 수시로 단체로 영화보러 가고 스파게티나 돈까스 등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동기를 부여해 주려 노력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여름 지난 학기 초 완공된 인조잔디와 조명시설 덕도 톡톡히 봤습니다. 특히 이번 대회 예선전을 유치한 군산시와 문태환 군산시야구협회장, 나창기 호원대 감독님, 박성현 총동문회장과 진창엽 교장선생님, 학부모, 시민 모두가 합작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이번 대회 예선이 16강전까지 군산과 청주에서 나뉘어 치러지면서 안방에서 경기를 치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예선에서 탈락하면 낯을 들 수도 없는 만큼, 승리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무거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8강에 올라 서울 목동야구장으로 가자고 했는데, 막상 8강에 오르니 고교 최고의 원투펀치를 자랑하는 동산고와의 경기였습니다. 현명(투수·3학년)이가 동산고에 완봉승을 거두면서부터 우승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준결승에서 초반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실수를 연발하며 5회까지 뒤지던 순간이 최대 고비였습니다. 역전 이후 상승세를 놓치지 않고 결승까지 이어간 것을 보면, 선수들에게 역전의 명수 자격을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감독님의 야구 인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군산 비행장 앞 옥봉초등학교를 다녔는데 3남 1녀 중 막내였던 제게 처음 야구공을 쥐어준 사람은 중학 시절까지 야구선수를 하셨던 아버지(고 석용순, 지난해 작고)였습니다. 부친께서 가능성을 보셨는지 4학년때 야구부가 있는 중앙초로 전학을 시켰는데, 당시 군산상고가 전국을 호령하던 때라 야구 인기가 엄청나 계속 테스트만 받다가 겨우 야구부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군산중에서부터 내야수로 뛰었고, 군산상고에서 제72회 전국체전 4강에 들면서 성균관대로 진학했습니다. 96년 쌍방울에 1차 지명돼 주전 3루수로 114경기에 나가 타율 2할6푼6리 3홈런 32타점을 기록하면서 그해 쌍방울이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현대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2승 이후 내리 3연패했습니다. 당시 쌍방울에는 백인호, 김성래, 한대화 등 대한민국 내야수들을 대표하는 쟁쟁한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김성근 감독은 가능성 있는 신인선수들에게 엄청난 훈련을 시켰습니다. 매일 1000개 이상의 볼을 포구해야 했고, 결국 골반 피로로 부상을 입고 이듬해 고관절 수술로 1년을 쉬었습니다. 복귀를 앞두고 있을 때 대만에 프로야구가 생긴다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 와 2억원에 계약했는데, 대만 지진으로 팀도 리그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선수로 내세울 것이 없던 터라, 남들보다 먼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1999년 성균관대에서 코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011년까지 거의 매년 우승 준우승 등 성적을 거두면서 대부분 프로선수로 구성된 야구월드컵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됐습니다. 야구가 인생이고, 야구 밖에 몰라 야구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야구만 가르치라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쌍방울 시절 대학 강사로 있던 집사람(서은주·40)을 만났습니다.집사람과 아들 주영(9), 딸 유연(3)이가 있는 전주 집에 한 달에 한두번 가면 매번 딸에게 원성만 듣죠."-군산상고 야구 부활을 위한 방안이 있다면."모교에서 감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30대 초반부터 있었습니다. 막상 와서 보니 선수수급 상황이 최악이었습니다. 전임 이동석 감독님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선수를 끌어 모아 2010년 봉황기 준우승을 했던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우선 유망 선수들의 역외 유출을 막아보자며 도내 초·중학교 감독들과 만남을 계속 가졌습니다. 감독들도 적극 협조해 주셔서 지난해 도내 선수로 15명, 올해 20명이 왔습니다. 3학년 선수들의 진로도 진학의 주요 요소가 되는 만큼, 올해 9명 중 2명은 프로, 7명은 대학진학을 확정지었습니다. 일단 군산상고 야구선수가 된 순간부터 아이들에게 이제부터 개인 신분이 아닌 군산을 대표하는 공인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습니다.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도 동기부여가 중요한데, 이번 우승으로 버스에 우승 플래카드를 달고 톨게이트부터 경찰 호위를 받은데 이어 시가지에서 카퍼레이드도 하는 등 이기는 야구를 해야 하는 이유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경기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배짱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기는 법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전통으로 이어지게 되죠. 올해 가을 마무리 훈련과 내년도 신입생들과 함께 하는 동계훈련을 소화하고 나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특히 내년 3학년이 되는 이윤후, 김재호, 이우서, 김경철 선수 등은 큰 재목으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주제넘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수들에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운동장 문제는 해결됐지만, 역사와 전통에 비한다면 변변한 선수단 버스조차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또 기숙사 문제와 실력은 있지만 환경이 어려운 선수들이 마음놓고 운동할 수 있도록 장학재단 설립 등에 대해서도 주위의 뜻있는 분들과 계속 상의해 나갈 생각입니다."● 군산상고 야구부는- 68년 창단 18차례 정상 호남 고교야구 대명사1968년 창단한 군산상고 야구는 '역전의 명수'로 불린다. 군산상고는 현재까지 전국대회 우승 18회, 준우승 10회, 3위 10회 등을 차지한 호남 고교야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군산상고가 역전의 명수로 불리게 된 것은 창단 4년째인 1972년 7월 19일 '제26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부터이다. 당시 국내 최강이었던 부산고와 결승전에서 맞붙은 군산상고는 1대4로 끌려가며 9회말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있었다.승부가 부산고 쪽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군산상고 선수들은 기적같은 역전극을 연출한다. 4대4로 동점을 만들더니, 2아웃 주자 2루 상황에서 기적같은 역전타를 터뜨리며 5대4로 승부를 뒤집어 버렸다. 당시 언론들은 '야구사상 일찍이 보기 드문 기사회생의 산표본'이라고 기록하며, 군산상고를 '역전의 명수'로 부르기 시작했다.이후 군산상고는 특유의 끈기와 두둑한 배짱을 지닌 팀으로 성장하며, 숱한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했다. '역전의 명수'라는 수식어를 앞에 달고 70~80년대 전국무대를 호령하며 군산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돼 버렸다.하지만 시대를 풍미하던 군산상고는 1999년 황금사자기 우승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10년 가까이 감독만 수차례 바뀌는 등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군산상고 야구는 지난 2010년 봉황대기 준우승을 계기로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인조잔디 운동장을 조성해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마침내 올해 초 운동장 정비가 마무리되면서 제대로 훈련을 소화한 역전의 명수들은 다시 전국 정상에 우뚝서는 저력을 발휘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3.10.01 23:02

전통정원의 재해석 ③ 벤치마킹-순천정원박람회

2013순천국제정원박람회에 투입된 예산은 약 2500억원에 달한다. 주박람회장 조성에 1064억원, 국제습지센터 건립에 443억원, 수목원 조성에도 211억원을 들였다. 예산의 상당부분을 순천시가 마련했고, 국비도 469억원이 투입됐다. 순천시의 한해 예산이 8000억원 규모라는 점을 감안하면 순천시가 순천국제정원박람회에 쏟는 애정과 관심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다.지난 4월 20일 '지구의 정원, 순천만(Garden of the Earth)'을 주제로 내걸고 발을 뗀 순천국제정원박람회는 최근까지 3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리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생태박람회'를 오브제 삼아 전국에서 손꼽히는 생태관광도시로 발돋움하려는 순천시의 의지는, 덕진공원 전통정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전주시에게도 적지않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다음달 20일까지 184일의 대장정이 이어지고 있는 순천국제정원박람회는 순천시 풍덕동오천동 일대 111만2000㎡의 부지에 습지센터, 수목원, 세계정원, 습지 등을 품에 안은 채 인파를 맞고 있다. 주박람회장의 경우 세계정원, 테마정원, 참여정원 등으로 구성됐다. 세계적 정원디자이너인 찰스 쟁스가 설계한 순천호수정원과 영국 첼시플라워쇼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황지해씨의 '갯지렁이 다니는 길' 등이 이채롭다.또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세계정원 11곳, 테마정원 11곳 등 23개국 83개의 각양각색 정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열심히 다리품을 판다면 동양과 서양의 정원, 각국의 전통정원 등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무엇보다 박람회장내 서문쪽에 자리잡은 한국정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궁궐의 정원, 군자의 정원, 소망의 정원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한국정원의 경우 경복궁 교태전의 아미산 화계, 창덕궁 후원의 부용지부용정, 담양 소쇄원의 광풍각, 영양 서석지의 경정 등을 재현하는 데 주력했다.또 한국정원 인근의 수목원전망지에서는 한국정원과 박람회장을 조망할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들을 순천만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하지만 이같은 기대는 다소의 실망으로 바뀐다는 점에 상당수 관람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수백년의 시간이 빚어낸 한국 대표 전통정원들이 휴식과 위안을 선사하는 반면 급조된 한국정원 조영물에서는 감흥을 찾을 수 없다. 곳곳에서 시멘트로 덧칠한 국적불명의 조영물도 눈에 띄었다.세계정원에서도 실망감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다만 실내정원에서는 창의력과 친환경소재를 앞세운 다채로운 조경예술을 접할 수 있었다.순천국제정원박람회는 '자연이 일구고 사람이 가꾼 생명의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생명의 공간에 얼마나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었는가는 미지수로 남을 듯 싶다.박람회장을 둘러볼 수록 '만들었다'는 주최측의 자부심에 공감하기 보다는, '왜 어떻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신상섭 우석대 조경도시디자인학과 교수 "전주 한브랜드사업 마지막 과제 북부권 도시재생과도 일맥상통" △가장 한국적인 도시 낙토(樂土) 전주조선 영조때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전주부는 감사가 머무는 곳이다. 동편에 위봉산성이 있고, 조금 북쪽에 기린봉이 자리한다. 여기에서 한 맥이 나와 부의 서북편에서 건지산이 되었는데건지산의 한 맥이 서쪽으로 가다가 덕지(德池덕진연못)가 되었고만마동 물을 거슬러 받아 지리가 아름다우니 참으로 살 만한 곳이다."역사적으로 볼 때 건지산을 배후로 하는 덕진연못은 북서 계절풍에 취약한 전주부 북서 기맥의 허함을 보완하려는 풍수적 경관짜임이 작용되었다. 이에 더하여 소나무를 심어 솔내(松川)와 숲정이를 구축한 선조들의 지혜는 옛 전주의 미기후 조절을 위한 환경 개선이며 낙토경영 전략이었고, 역사경관 해석의 주요 근거가 된다.즉, 건지산과 덕진연못 일대의 유'무형 경관 자산은 전통시대 사회, 문화적 역량이 결집된 현실세계의 낙원(樂園)이었고, 인간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며, 문화적 자긍심을 촉발하는 환경소통(environmental communication)의 장(場)이었다.△전주 북부권 전통경관 되살리기오늘날 덕진공원과 건지산 일대 권역은 개발압력 증대에 따른 난개발(도로 확포장대규모 공공시설 및 건물군), 고층 건물군에 의한 스카이라인 파괴, 노후 건물의 슬럼화 현상, 인식부족에서 파생된 낭만과 풍경미 상실 등으로 도시환경의 '건전성과 지속성'이라는 절대가치가 도전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팔경의 하나인 덕진연못 명소경관과 건지산 동산 숲을 중심으로 조경단, 전북대학교 캠퍼스, 동물원과 체련공원, 어린이회관과 소리문화의 전당, 승마장, 오송제 등 다양한 도시휴양 및 교육문화체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선조들의 문화적 풍퓨성과 자연 친화성을 바탕으로 가꾸어진 역사경관, 그리고 현대적 도시 어메니티(쾌적성amenity) 시설의 상호 보완적 네트워킹 전략으로 전통정원 조성이라고 하는 명제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갖는다. 즉, 광역적 개념의 전통을 주제로 한 테마정원 조성은 전주의 북부권 도시재생 전략과도 맥을 같이하는 당위성을 갖는다 하겠다.△'한브랜드'의 또 다른 가능성 전주시는 그동안 '한브랜드'사업을 관광마케팅 전략으로 지속성 있게 수행하여 한옥마을과 같은 대표적 명소경관을 견인하였다. 이 전략에 포함되지 않은 유일한 테마가 전통정원 가꾸기 사업과 같은 역사경관 되살리기 영역이 아닐까 한다. 올 벽두부터 전주시는 문화관광 도시재생 전략과 연계하여 덕진공원 일대의 자연 특성을 살리고 역사성을 연계하여, 환경 친화적인 전통정원 벨트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덕진공원 일대를 전통정원 조성의 최적부지라는 판단아래 전통체험 및 테마가 연계된 품격있는 도시 만들기 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도시의 격(格)과 매력의 향상이라는 부가가치를 살리고 전주의 정체성 향상은 물론 한국적인 문화경관 찾기, 그리고 도시의 건전성과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람직한 전략이라 하겠다. 오늘날, 힐링과 친환경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되는 상황인식 속에서 공동체의 건강과 환경적 지속성을 중시하는 LOHAS(lifestyles of health and sustain-ability) 시대사조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개발이라는 우월적 사고의 틀을 깨고 도시녹화, 도시정원, 도시공원 등 녹색환경복지 정책이 도시전략의 중심에 서있으며, 녹색성장과 그린 마케팅 같은 건전한 사회적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덕진공원과 건지산 일대 역사경관 권역의 교란된 토지이용에 대한 설득력있는 조명과 이해를 바탕으로 문화와 생태 교감의 산물이자 교과서로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전통문화정원 벨트화 사업이 녹색성장 개념 속에서 조속히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정진우
  • 2013.09.30 23:02

페이퍼코리아 이전 어디까지 왔나

서해안의 1번지 군산에 동부권 시대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군산시는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상대적으로 낙후돼 있던 동부권에 1조 3000억원가량이 투자되는 동부권 개발사업 청사진을 지난달 발표했다. 동군산 철탑 지중화, 신역세권 택지개발, 페이퍼코리아 이전, 군장산단 연안도로, 익산~대야 복선전철, 동부권 도서관 건립, 동부권 노인종합복지관 등이 그것이다.야심찬 동부권 개발 청사진의 배경에는 개발의 핵심이면서도 민간부문으로 최대 난제로 꼽혀 왔던 페이퍼코리아 이전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이전 논의 3년여 동안 갑론을박을 벌여오다 마침내 실행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페이퍼코리아 이전문제를 진단해 본다.△공론화 과정 이전논의지난 1943년 2월 군산시 조촌동 2번지 50만여㎡의 부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쇄용지 생산공장이 들어섰다.북선제지로 출발해 고려제지, 세대제지, 세풍 등을 거쳐 2003년 페이퍼코리아로 회사명이 바뀌며 현재까지 70년 세월 종이를 생산하며 군산 지역경제의 한축을 맡아 온 향토기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도심 팽창으로 인한 인근 아파트 단지 등 주거지역 조성으로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악취 등 환경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동부권 발전의 저해요소로까지 눈총받는 처지가 됐다.급기야 페이퍼코리아 이전 문제는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시장 출마자들의 공약으로 채택되는 등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2011년 2월 시는 페이퍼코리아와 조촌동 공장 이전과 기존 부지를 합리적으로 개발하는 '페이퍼코리아 공장이전 및 공장부지 개발사업'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으며, 대상 사업부지가 대규모이고 민간공장인 관계로 일부에서 공장 이전과 기존 부지 개발에 대한 공신력 확보에 대한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이 같은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해 7월 시와 회사, 시의회, 주민대표, 시민단체, 도시계획전문가 등 18인으로 구성된 '페이퍼코리아 이전 추진위원회(위원장 채경석)'가 구성돼 자문에 나서는 등 본격적인 이전계획 수립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이전 당사자인 페이퍼코리아는 주주 및 채권단의 동의를 구해야 이전이 가능하고, 특히 2000여억원으로 추산되는 이전비용 마련마저 막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전을 요구하는 주민탄원서가 접수되는 등 이전압박이 심화되고 현 위치에서의 생산활동 지장과 기존 신문용지 생산 사업구조에서 친환경용지와 산업용지로 사업구조 다변화를 명분으로 이전을 결심하게 됐다.△기존부지 개발방식 결정페이퍼코리아는 이전 비용을 기존 부지 개발 이익금으로 충당하는 방안을 수립했다.2011년 10월 현재 공장용지 59만6000여㎡의 부지를 상업 및 주거용지로 개발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한 공장 이전 및 개발 계획에 대한 자체 용역결과를 내놓았다.당시 페이퍼코리아는 공장이전 소식이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등 민감한 사안인 만큼, 추진위원들에게 용역안이 확정된 상태가 아니고 개발계획과 사업성, 분양가 등이 향후 영업기밀이 될 수도 있다며 제공 자료와 회의록 등에 대한 대외비 및 비공개를 요구하는 등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위원들은 용역안에 대해 준공업지역의 주거상업용지 변경 타당성 여부를 따지고 기반시설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내놓았다.특히 토지이용계획상 상업준주거용지가 과다하다고 지적하고, 내부에서 주변지역으로 연결되는 간선도로의 필요성과 상업지역을 건축물 용도를 검토해 선정해줄 것을 주문하는 등 기존 부지 개발안을 놓고 한차례 홍역을 치렀다.이와 함께 공장이전 담보 문제가 또 다른 주요 핵심 사안으로 떠오르며 이전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면서, 이전 약속 이행을 위한 안전장치가 법률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이전논의는 공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페이퍼코리아는 합리적 이전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제8회 추진위원회를 통해 최종 개발안으로 제시했으며, 이전 담보안으로 도시계획 용도변경에 따른 개발이익 신탁안을 내놓았다. 신탁안은 이전이행 담보를 위해 신탁사를 통해 토지매각자금의 타 용도 사용을 제한하고, 공장이전 재원으로만 사용하도록 하고, 군산시를 우선수익자로 정해 기한 내 공장이전을 하지 않을 경우 강제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고강도 방안이었다. 이와 함께 페이퍼 코리아는 이전부지 물색에 나섰다.△사업 추진 탄력'공은 군산시로'지난 7월 공장 이전부지로 원하던 비응도동 군산2국가산업단지 내 옛 중부발전부지9만5868㎡에 대해 페이퍼코리아는 이달 초 부지대금 132억원을 지불하고 등기 이전을 마쳤다. 동시에 이전 부지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폐수처리 문제도 일일 3만톤 처리용량의 국가산단 폐수처리장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면서 해결됐다. 이어 현 공장부지 용도 변경과 공장이전에 따른 사업계획 등의 내용이 담긴 '도시계획입안 주민제안서'를 지난 9일 군산시에 제출하면서 본격적인 행정절차에 돌입했다.시는 현재 제안서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며, 타당성이 인정되면 주민의견 청취를 위한 공람공고를 거쳐 환경, 교통, 재해, 국유재산 관리 등 관계기관 협의 후 군산시도시계획위원회의 자문을 받게 된다. 이후 전북도에 결정 신청을 하게 되며, 도는 관련기관 협의와 도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쳐 결정고시하게 된다.하지만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이 지난 7월 16일 개정 공포돼 지구단위계획 결정권자가 내년 1월 17일부터 현행 전북도지사에서 군산시장으로 변경됐다. 이 때문에 현 페이퍼공장 부지에 대한 지구단위계획 결정권자가 군산시장으로 이양될 가능성이 높아 현 공장부지에 대한 도시관리계획 결정권은 군산시로 넘어올 확률이 높다. 이 경우 6개월여의 기간 단축과 이전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과 판단기준 등에 지역 입장이 충분히 고려될 수 있는 등 긍정적인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이지만, 시의 부담은 커질 것으로 보인다.△향후 이전 계획과 과제페이퍼코리아 공장이전 비용은 토지비용 132억원, 이전비용 2280원 등 약 2412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페이퍼코리아는 이전비용을 준공업지역인 기존 공장부지 59만 6000여㎡의 용도변경에 따른 가치상승분과 주택개발사업에 따른 사업이익 등으로 충당할 방침이다. 현 공장부지가 주거 및 상업지역으로 용도가 바뀔 경우 가치상승분 787억원, 주택개발사업(6957세대)에 따른 사업이익 1169원, 자체 차입 456억원 등이다. 페이퍼코리아는 1단계로 현재 나대지 상태인 서측(동군산병원 쪽) 25만7000여㎡를 내년 4월부터 2017년 4월까지 공동주택용지, 상업용지, 기반시설용지 등으로 개발 분양하고 공장이전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1단계 부지는 전체 부지의 43%에 해당되며 50~55%가 공동주택 부지, 약 10%가 상업용지, 35~40%가 기반시설용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이어 나머지 57%에 해당하는 33만9000㎡는 2017년 12월부터 2단계로 개발해 2020년 9월 마무리할 예정이다.페이퍼코리아 측은 산업단지로 입주절차를 완료한 만큼, 앞으로 개발사업 인허가 등 이전 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페이퍼코리아 측의 이전부지 매입과 개발부지 신탁안 제시 등에 이어, 페이퍼코리아 이전을 위한 행정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업추진이 요구되고 있다.시 관계자는 "회사와 시, 주민 모두에게 이전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이전을 담보하는 문제는 답을 정해 놓고 갈수 없는 것이다"며 "모두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 만큼,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양해각서 정신과 상호 신뢰적 자세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채경석 이전 추진위원장 "환경문제 해결 전망 동부권 개발도 탄력"페이퍼코리아 이전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지난 2011년, 당시 일부에서는 개인기업의 이전비용 마련에 관이 나서고 있다며 특혜시비를 제기했다.이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주민대표 협의체가 구성이 요구되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도시계획, 법률, 회계 등 전문가까지 포함시킨 '페이퍼코리아 이전 추진위원회'가 그해 7월 출범했다.출범 시부터 회장직을 수행해 온 채경석(군산시의원) 회장은 "이전 이야기가 나오면서 일부에서 특혜시비가 있었지만 이전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같은 시비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주민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며 "페이퍼코리아 이전은 회사만의 문제가 아닌 환경문제와 동부권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시민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했다.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이전 필요성을 몸소 체험해 온 채 회장은 "주민들이 소음과 악취 등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는 상황과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종합행정기관인 군산시가 나선 것은 잘한 일이었다"며 "회사도 실효성있는 운영을 위해 이전을 계획했지만 이를 주민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나서 자문하고 중재해 주는 역할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특히 "주위에서 이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말했지만, 현재까지 9차례 위원회를 개최해 각종 개발안과 담보안에 대해 자문해 온 결과 각종 난제를 극복하고 협의안을 도출해 냈다"며 "지난 8월 주민제안서 제출을 앞두고 자문할 때에는 그동안의 경과 보고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채 회장은 "추진위원회는 공장 이전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존속돼야 한다"며 "향후에도 시가 염려하는 부분에 대해 회사 측에서 방안을 제시토록 유도하고, 회사 측도 행정의 미온적인 태도에 섭섭함을 느낄 경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자문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고 강조했다. 위원회 활동이 의정 활동만큼이나 보람있었다는 채 회장은 "처음 생각보다 사업추진이 잘되고 있으며, 마무리도 잘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시의 추진의지도 강한만큼 시민들도 신뢰를 가지고 지켜 봐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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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일권
  • 2013.09.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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