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0 18:15 (Mon)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문화로 놀이짱' 안연정 대표 "새활용 대중화·고급화에 앞장, 삶 속의 선순환 구조 자리매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홍대에서는 가게가 자주 바뀌면서 실내장식도 급변하죠. 처음엔 문화 공간 기획에 관심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버린 가구나 목재가 아까워 고치고 다듬다 보니 멋진 가구들이 하나둘씩 생겨났죠."'문화로 놀이짱' 안연정 대표(36)는 "길로(路)와 마당 장(場), 그리고 중의적인 의미를 한 번에 담아서 '문화로놀이짱'이란 이름을 만들었다"며"문화와 놀이로 자신의 삶을 즐겁게 만들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문화로 놀이짱은 2004년에 설립 버려지고 매립소각되는 목재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서울시 우수 사회적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한 '문화로놀이짱'이 주목받는 이유는 폐목재를 단순환 활용에 그치지 않고 상상력을 더해 목재의 스토리가 담긴 가구와 소품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안연정 대표는 "국내에서 버려지는 폐목재는 연간 약 200만 톤으로, 서울시에서만 1년에 약 16만 톤 이상의 폐목재가 버려진다"며"하지만 대부분 매립되거나 소각돼 재활용은 3%가 채 안 된다"고 말했다. 안 대표가 꼽는 버려진 목재에 대한 매력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료비 절감이나 환경보호의 그것에 머무르지 않는다.그는"새 가구에서 나오는 유해 물질이 공기 중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려면 수년이 걸린다"며"이미 사용된 가구 재료를 사용하면 유해 물질이 없는 그야말로 친환경 소재"라고 설명했다. "업사이클링 왜 해야 하느냐고요?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사는 삶의 문화를 디자인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 업사이클링에 대한 안 대표의 생각은 생태 보호 그 이상이다.안 대표는 "업사이클은 기존 생산과 소비에 머무르는 단순한 구조를 지속할 수 있는 삶의 문화를 만드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며"궁극적으로 만드는 문화 활성화를 통해 소비중심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라이프 스타일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업사이클 제품을 이해하는 소비자가 많아지는 것 그게 제 바람이죠. 업사이클링 상품이 구입하고 싶은 작품으로 이해될 때 지속 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질 테니까요."실제 안 대표는 삶 속에서 업사이클이 선순환 구조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다각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공공공방인 명랑에너지발전소와 수리 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또 공적인 영역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이나 아이템을 만드는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소비자와 소통이 원활해지긴 위해서는 소비자의 요구를 상품에 담아내는 것이 절대적이라는 그.안 대표는 "오는 9월엔 업사이클 가구를 대중화와 고급화를 시도한 상품을 정식 런칭할 계획"이라며"많은 사람이 업사이클링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삶 속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윤나네
  • 2013.08.22 23:02

[23. 경력단절 여성 재취업] "전업주부, 일하고 싶으면 고민 말고 직업상담부터"

출산육아 등으로 직장을 그만 둔 경력단절 여성을 대상으로 한 CJ그룹의 리턴쉽 프로그램에서 150명 채용에 2530명이 지원하는 성과를 냈다. 이는 경력단절 여성의 취업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반증한다. 더구나 수도권에 비해 산업활동이 활발하지 못한 전북지역에서 재취업에 나선 주부들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경력단절 여성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본다.△전업주부 재취업 '산넘어 산'전주시 평화동에 사는 김정옥씨(39)는 대학 졸업 후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다 결혼하면서 퇴직했다. 전업주부로 살아가던 김씨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불경기가 계속되면서 남편의 사업도 많이 힘들어졌고 아이들 학원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창업을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집 가까이에 건강식품가게를 차렸다. 가게는 그런대로 수입을 올렸지만 아이들이 문제였다. 아이들을 방과후교실에 보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가게 문을 닫는 탓에 저녁시간만 되면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남편이 아이들 밥을 챙겨주고 공부도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정작 남편도 아내가 없는 빈자리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 방과후교실을 빠지면서 가게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당연히 영업에도 지장을 받았죠. 아이들 때문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1년 정도 운영하다 가게를 접었습니다" 다행히 인수 조건이 좋아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투자한 시간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었다. 김씨는 현재 어린이집 보조교사로 오전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수입은 적어 아쉽지만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 퇴근하는 만큼 마음만은 편안하다. "지금 보육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 온라인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정식으로 보육교사가 되면 가게를 할 때처럼 저녁시간까지 무리하지 않아 수월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또 어린이집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내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소득입니다"△재취업위해 기관상담 바람직김씨처럼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전업주부들은 선뜻 구직현장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전주시 인후동에 사는 이혜정씨(51)는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후 컴퓨터 앞에 앉는다. 김씨가 접속하는 곳은 취업사이트이다. 작은 아이가 고교에 들어가면서 노후준비를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뭔가를 해보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직장을 찾기 어려웠다. 친구 동생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파트타임 일을 얻었지만 육체적 고달픔에 비해 손에 들어오는 돈은 보잘 것이 없었다.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경우 대부분 주변사람들의 경험을 귀담아 듣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주부의 경쟁력을 살릴 수 있는 다양한 업종에 눈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기관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한다. 전화를 하거나 방문을 하면 1대1 맞춤형 직업상담을 지원한다. 직업을 찾고 싶은 여성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는 역할을 해준다.장민영씨(40)는 기관의 도움으로 취업에 성공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고, 노후를 생각하니 어떻게든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에 전북여성일자리센터를 방문했던 장씨는 구직신청서를 작성하고 상담을 받으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무직 경력이었지만 회계부분에 자신이 없어 전산사무회계양성교육과정을 수료한 뒤 원하는 직장에 취업했다."실력을 키워도 나이는 줄일 수 없었는지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을 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북여성일자리센터 취업설계사가 지속적인 격려해주고 동행 면접까지 해줘서 마침내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취미로 시작했던 일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창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오태순씨(46)는 전북여성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웃거리다가 '엄마손쿠키'에 수강 신청했다. "오븐에서 구워지는 쿠키를 보니 마냥 신기했어요. 직접 만든 쿠키나 샌드위치를 주변사람과 나누는 기쁨 또한 컸지요. 마침 비어있는 가게를 소개받았는데 배운 기술을 활용해서 직접 카페를 운영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지요"본격적으로 시장조사를 하고, 기자재와 가구들을 들여오며 운영계획을 세웠다. 밤새 레시피를 고민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내 일을 한다는 기쁨에 들떴다. 창업 8개월째에 접어든 오씨는 아직은 큰 수익이 나지 않지만 정직하게 땀을 흘리다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전주시 효자동 원룸촌에 위치한 장씨의 카페는 단골손님들이 주를 이룬다. 7평이라는 소박한 공간이지만 커피향이 나고 갓 구운 빵 냄새로 가득한 카페를 예쁘게 꾸며가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덧붙인다.△협동조합 운영도 고려해봐야1인 창업을 하기가 부담스럽다면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5명 이상이면 협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어 초기 자본 부담이 적다. 전일제 일자리보다 시간조정이 쉬워 아이를 키우며 능력을 펼치고 싶은 여성들에게 일자리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협동조합이다.지난달 전북여성일자리센터에서는 '아나콩떡협동조합' 창립식이 있었다. 퓨전떡반프로그램을 이수한 30~40대 여성 5명이 700만원씩을 종잣돈으로 보태 협동조합을 시작했다. 방지현 대표이사는 젊은 감각으로 전통과 퓨전을 넘나드는 떡을 만들어 완주군 로컬푸드에 납품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방 대표이사는 "요즘 떡 케익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제과소 케익보다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면서 "고객의 눈을 끌 수 있는 화려한 장식으로 판매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출산과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재취업 도전을 흔히 인생 2막에 빗댄다. 출산전 쌓아온 경력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분야에 도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혼여성들은 일과 가정을 양립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고액연봉보다는 스스로 업무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시간제 근무를 희망한다. 정부는 '고용률 70% 달성'을 주요 국정과제로 설정했다. 출산 및 육아 과정에서 많은 여성의 경력이 단절된 상황을 감안하면 시간제 근무로 고용률을 높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괜찮은 일자리로 여성 고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존에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시간제 근무는 단순한 노동시장 유연화 차원이 아니라 가사와 근로를 병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이 금 주 (주부)

  • 기획
  • 기고
  • 2013.08.20 23:02

김보금 전북여성일자리센터장 "집단상담 프로그램 통해 취업에 대한 자신감 높여"

"30~50대 여성들은 누구나 취업을 원하지만 잠재된 능력을 모르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업체 인사담당자를 만나면 우리 지역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채용하면 일을 잘 해내겠다는 열정이 부족하다고 말하지요" 지난해 1월 부임한 김보금 전북여성일자리센터장은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상품을 어떻게 육성해 사회에 내보낼 것인가를 고민한다. 주부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일자리에 도전하는 과정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려주고 싶다고 말한다. 김 센터장은 9개 시·군 거점센터를 찾아다니며 지역별 산업과 연계해 수요조사를 하고 산업체 인사담당자들을 만나 경력단절여성 채용의 중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한다. 구직여성이 전북여성일자리센터를 방문하면 일대일 상담 및 집단 상담을 통해 취업솔루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1주일 과정으로 20시간 진행되는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높인다. 또한 자기이해 및 진로탐색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재취업 계획을 수립한다. 수료 후에는 취업연계 지원을 해주고, 하고자 하는 일자리를 찾게 되면 그에 맞는 직업훈련이 제공된다. 직업훈련을 마치면 스스로 구직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거나, 상담사의 잡매칭 서비스를 제공해 경력단절여성이 취업에 불이익을 겪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김 센터장은 "일을 하고 싶으면 고민하지 말고 전북여성일자리센터로 찾아와달라"면서 "일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여성들의 잠자고 있는 열정을 꺼내어 제2의 인생을 꿈꿀 수 있도록 돕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전북여성일자리센터 1577-3813·1899-3813)이금주(주부)

  • 기획
  • 기고
  • 2013.08.20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남원 '헌혈왕' 정정호씨

남원에서 수화통역사로 근무 중인 정정호씨(43)는 '헌혈맨'으로 통한다. 지난 7월초에 남원시가 발표한 '남원 기네스'에 최다 헌혈자로 등재되기도 했다.그의 헌혈 인생은 1987년 고등학교 2학년 당시 학교로 찾아온 헌혈버스에 우연히 오르면서 시작돼 2013년 8월초 현재까지 26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184회에 걸쳐 헌혈을 실시한 정 씨는 혈액을 필요로하는 수혈자 및 가족을 위해 앞으로도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각오다.그런 그도 헌혈에 대한 첫 경험을 묻자 웃음부터 보였다. "수업을 빠질 수 있고 빵과 음료수가 탐이 났어요. 어떤 목적의식이나 희생정신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어요." 철없던 시절에 시작된 헌혈이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변한 때는 1992년 봄이다. 국내 헌혈로 충당하지 못해 혈액을 수입해야 한다는 언론 기사를 접하고 부터다. 이후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 게시판에 혈액을 구한다는 광고를 접한 뒤 여러 학우들과 함께 헌혈을 실시했고, 수혈을 받은 학우가 1년 뒤 건강하게 학교에 복귀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 필요성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때부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헌혈버스를 보면 무작정 올라 전혈(적혈구, 백혈구, 혈장, 혈소판 등 혈액의 모든 성분) 헌혈을 실시했다. 그러다가 전주 헌혈의집에서 전혈은 2개월, 성분(혈소판, 혈장) 헌혈은 2주에 한번이 적당하다는 것을 파악하게 됐다. 그는 짧아진 헌혈 주기로 2000년 10월에 헌혈 유공장 은장, 2001년에는 금장을 받았다. 대한적십자사는 헌혈 횟수 30회 이상에게는 은장을, 50회 이상인 사람에게는 금장을 수여한다. 그는 "한때 헌혈 횟수에 집착해 수혈자에게 필요한 헌혈 보다 자기만족 및 보여주기에 급급했었다. 헌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헌혈하는 사람들 다모여라'라는 카페에 가입해 활동하게 됐다"면서 "헌혈자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헌혈 문진표에 나와 있는 배제사유에 해당된다면 수혈자를 생각해 본인 스스로가 헌혈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그는 또 헌혈 1주일 전부터 술자리를 자제하거나 감기에 걸리지 않게 개인위생에 신경을 쓰는 등 건강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재 남원지역에는 헌혈을 실시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 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정 씨는 "전주에서 출퇴근을 할 때에는 헌혈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남원에서는 헌혈 버스가 온다거나 별도로 시간을 마련해서 전주를 찾아야 하는 등 제약이 뒤따르고 있다"면서 남원에도 헌혈의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기도 했다.

  • 기획
  • 홍성오
  • 2013.08.20 23:02

[부안수협 '뽕잎 고등어'] 뽕잎으로 웰빙 식탁문화·지역경제 이끈다

새 정부가 최우선 국정운영 전략으로 '창조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 즉 창의력으로 각종 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안수협은 이같은 창조경제 원리를 일찌감치 적용해 소득증대 및 일자리 창출로 지역경제를 견인하고 있다. 실례로 부안군이 '입는 뽕에서 먹는 뽕'으로 전환해 전국 뽕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부안수협은 뽕을 접목한 가공식품을 개발생산판매하면서 매년 무서운 속도로 매출 증대를 꾀하고 있다. 대표적인 가공식품이 바로 '뽕잎고등어'이다. 뽕잎고등어는 부안 지역특화산업 작물인 뽕잎을 DHA 성분이 풍부해 뇌세포성장과 노화방지에 탁월한 등푸른 생선의 대명사인 고등어와 접목한 아이템이다.△수산물 출하와 수급 조절부안군 행안면 제1공단에 위치한 부안수협(조합장 김진태) 종합가공공장은 육지에서 바다를 개발하는 애향기업이다. 부안수협은 지난 2008년 12월 수산물 처리저장가공으로 수산물의 출하와 수급을 조절하고 물가안정 및 어업인 소득증대에 기여하고자 부안농공단지 내에 수산물종합가공공장을 착공했다. 총 50여억원의 사업비를 투자해 냉동냉장 및 제빙가공시설을 완비해 수산물 가공시설의 전진기지의 초석을 다졌다. 부안수협 가공종합공장은 부안관내 유휴노동 인력 활용으로 고용창출 및 지역경제에도 이바지하고 있으며 특히 부안군 특화사업 홍보 및 브랜드 가치 상승효과에도 기여하고 있다.△상품마다 특색있는 차별화부안수협의 대표 브랜드는 뽕잎고등어로 이미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뽕잎고등어는 부안의 특화산업인 뽕잎을 이용해 생선의 비린내를 없애는 방법에 착안해 개발된 상품이다. 등푸른 생선의 대명사인 고등어 가운데 가장 육질이 탄탄한 겨울철 참고등어만을 선별해 우리 몸에 좋은 뽕잎으로 얼간해 짜지 않고 비린내가 없으며 머리 및 내장을 제거해 누구나 손쉽게 조리할 수 있는 웰빙식품으로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은 상품이다. 이와 함께 뽕잎맛김은 천혜의 푸른 바다 부안에서 생산된 김과 청정지역에서 채취한 뽕잎 분말로 구워 그 맛과 향이 톡득하며 지친 현대인들을 위해 바다향을 듬뿍 담은 상품이다. 이 외에도 100% 국내산 수산물을 1차가공해 명절 제수용품을 겸비한 참조기, 민어, 참돔, 병어, 대구, 갑오징어 등으로 구성된 수산물 종합선물세터는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으로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이다. △올해는 50억원 매출 목표부안수협은 지난해 뽕잎고등어 판매를 통해 4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올해의 경우 50억원 매출을 목표로 임직원들 모두가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이처럼 뽕잎고등어가 국내 유명브랜드로 자리를 잡기까지 생산과정에서의 남다른 고집이 경쟁력을 확보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변산반도 일대에서 생산한 뽕잎을 건조하고 뽕잎엑기스를 추출한 후 천일염을 혼합, 적외선 살균처리한 뒤 내장을 깨끗하게 제거한 국내산 가을고등어를 절인다. 이후 냉풍 건조와 급속 동결, 진공포장 등 과정을 거쳐 소비자들에게 배송된다.특히 뽕잎에서 뽑아낸 엑기스는 철분과 칼슘, 아미노산 등 다양한 성분의 농축액으로 고등어의 비린내를 제거해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다.△뽕산업과 연계망 형성이러한 뽕잎고등어 제조방법은 2006년 특허(제10-0661710호) 출원했다. 이후 부안군 특산품 인증(제2009-5호), 바이전북상품(제60호) 인증 등 상품의 우수성을 거듭 확인하며 급성장했다. 또한 지난 2011년도에는 식약청으로부터 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업체로 지정받아 더더욱 위생적이고 안전한 고품질 수산물을 생산공급 중이다.뽕잎고등어에 이어 개발판매 중인 뽕잎 맛김이 식탁의 새로운 최강자에 도전장을 내민 상태다. 부안수협의 힘찬 도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뽕잎고등어와 뽕잎맛김의 성공 노하우를 토대로 뽕잎참조기뽕잎민어 등 뽕 관련 가공식품을 개발해 농어가 소득증대는 물론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를 이끄는 신성장 식품산업을 선도하겠다는 남다른 각오를 불사르고 있다.△설 명절 앞두고 주문 폭주등푸른 생선의 대명사인 고등어를 지역 특화산업과 연계해 개발한 부안수협 뽕잎고등어가 설명절을 앞두고 주문 폭주로 인해 생산라인을 풀가동하며 연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부안수협의 수산물 세트는 뽕잎고등어 1만원대에서 2만원대까지 저렴하고, 명품 수산물의 경우 10만원대까지 폭넓게 갖추고 있다. 모든 상품의 택배비는 무료이며 주문 시에는 부안수협 홈페이지(www.buansuhyup.co.kr)에 접속하거나 부안수협종합가공공장(063-584-3101~3)에 주문하면 된다.△저렴한 가격에 실속 제품한달여 남은 올 추석의 경우 어느 해보다 품격있고 저렴한 수산물 선물세트의 인기가 예상된다. 이를 증명하듯 벌써부터 추석명절 선물세트 예약주문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부안수협 박동수 종합가공 공장장은 "최근 몇년 동안 주문폭주로 인해 주문량은 제때 공급하지 못한 적이 있다"며 "올 추석명절은 물량 공급에 최선을 다해 부안수협 뽕잎고등어를 찾는 고객의 불편이 없도록 모든 직원이 밤낮으로 힘을 모아 생산에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양병대
  • 2013.08.20 23:02

박태석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은

박태석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은 전북과의 인연이 매우 깊다.본인 스스로도 인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고 할 만큼 전북과의 인연이 끈끈하다.부안이 고향인 박 본부장은 부안농고와 농협대학을 거쳐 전북대대학원을 졸업했다.또한 지난 1987년 농협에 입사해 초임 발령지인 용인군지부에서 3년여 근무한 이후 1991년 전북지역으로 전입해 2012년 중앙본부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 전북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기에 고향인 전북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박 본부장은 전북본부 및 군산시지부 등 도내에서만 20여년 근무하며 전라북도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생각했고 전북에 대한 애향심을 키웠다고 말한다.실제 박 본부장은 취임후 "제 생애 가장 힘찬 불꽃을 피워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내 고향 전북과 농협은행 전북본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의지에 찬 향후 청사진을 밝힌 바 있다. 박 본부장은 남다른 고향 사랑외에도 업무능력 및 대인관계 등에서도 대내외적으로 그 인정을 받고 있다. 지역 정서상 인사 등에서 소외되기 일쑤였던 전북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할 만큼 탁월한 업무능력 등을 인정받아 농협중앙본부의 요직인 PB마케팅부장과 리테일고객부장 등을 역임한 것이다. 또한 기획력과 추진력 등 업무능력 외에도 친화적인 성품으로 부하직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맏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 기획
  • 강현규
  • 2013.08.19 23:02

취임 두달 맞은 박태석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

부안 출신 박태석 NH농협은행 전북본부장이 1년여만에 금의환향해 취임한지 벌써 두달 가까이를 맞고 있다. 그동안 바쁜 일정을 보내며 농협은행에 대한 도내의 바람과 기대, 우려의 목소리를 청취한 박 본부장은 NH농협은행으로 분리되면서 농협은행을 농촌과 별개로 생각하는 오해가 싹트기 시작했고, 또 농협은행 조직에는 치열함이 베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박 본부장은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농협은행 전북본부를 고객을 지향하는 최상의 서비스조직, 최고의 성과를 내는 생산적이고 활동적인 조직으로 리모델링하기 위해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 본부장으로부터 향후 청사진 등에 대해 들어본다.-농협은행이 다른 은행과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NH농협은행은 전국의 농축협을 회원으로 하는 중앙회가 100%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NH농협금융지주의 자회사로서 형식적으로는 중앙회와 법인이 분리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단일 법인체로 볼 수 있습니다. 2012년 농협은행은 명칭사용료로 4103억원, 배당금으로 3080억원을 농협중앙회에 지급하였습니다. 농협중앙회는 각 계열사의 배당금 등을 받아 지역농협에 6057억원을 출자배당하였고 전북의 경우 461억원이 농협에 출자배당되었습니다. 농협의 배당 성향 및 내용은 시중은행과는 확연하게 차별화 됩니다. BIG4 또는 BIG3로 분류되는 시중 은행들의 외국인 주주비율은 평균 63%(정부 대주주인 곳 제외)에 육박하고 단순 배당액을 주주비율로 계산한 금액이 약5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됩니다. 2012년 수익이 전년에 비해 현격하게 감소한 점을 감안하면 매년 최소 5200억~1조원 정도가 국외로 유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양새는 정도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지 지방은행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순수 민족자본으로 구성된 농협은행의 수익은 국부의 유출 없이 지역사회에 다양한 모습으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시중은행과 크게 차별화 되고 있습니다."-전북본부의 올해 경영목표 및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전장에서 장수는 승패로 말하고 BANKER는 실적으로 말합니다. 건전경영을 통한 장기적인 성장기반 조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겠습니다. 외형과 단순 서비스 경쟁에만 몰두하기 보다는 건실한 성장과 철저한 리스크 관리로 지속성장의 토대를 다져 나가야겠습니다. 고객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위한 인적, 물적 인프라를 구축해 차별화되고 선진화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절세 및 재테크, 노후설계에 도움을 드릴 수 있는 행복금융 세미나를 지역별로 개최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담보력이 부족한 농업인의 영농자금 지원을 위해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기금의 보증지원을 적극 추진해 많은 농업인들이 저리로 자금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각종 FTA협상 등 농업관련 보호 장벽이 낮아짐에 따라 농업의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부분에는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지도록 관심을 가지겠습니다. 이와 함께 2013년 하반기를 중소기업 금융지원 확대를 위한 '기업금융 전심전력의 해'로 선언하고 중소기업여신 '3000억원 순증'을 목표로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특히 우수 중소기업 및 농수산업체는 채움중소기업론, 채움제조업론, 기술형창업중소기업론 등을 적극 추진하고 중소기업의 보증료 중 중소기업부담 0.5%를 제외한 부분을 농협은행에서 부담하는 중소기업보증료지원대출을 비롯한 중소기업 우대상품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서민들의 자금조달을 돕기 위하여 새희망홀씨 대출 등 서민금융도 100억원 이상 지원할 계획이며, 대부업체 혹은 캐피탈에서 지원받은 고금리 대출을 대환하기 위한 바꿔드림론, 고금리로 사용한 학자금 등의 부담을 경감시켜주기 위하여 '대학생청년 고금리 전환대출'을 통해 서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고 함께 성장하는 서민금융의 기반을 다져가겠습니다."-그동안 농협은행 전북본부의 사회공헌 사업 내용 및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요?"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NH농협은행은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수익의 지역사회 환원 및 지역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해 나가고 있습니다. NH농협은행은 수익의 대부분을 농업인 실익과 소외계층 지원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실제 2013년 5월 13일 발표된 은행연합회의 조사결과 2012년 1277억원을 소외계층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출로 사용해 사회공헌활동 1위 은행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농협은행을 포함한 금융권 순이익이 급감한 가운데 농협은행만 1000억원이 넘는 사회공헌비를 지출하여 공익우선은행으로서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로써 농협은행은 은행연합회에서 첫 보고서를 발간한 2006년부터 줄곧 사회공헌 1위 은행 자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도내에서도 올 상반기중에 연인원 300여명의 직원들이 농촌일손돕기 활동 전개, 무료급식소지원, 불우이웃돕기, 복지시설 방문 및 위로, 지역문화축제 홍보 및 지원, 환경정화 등 다양한 사회 공헌활동을 펼쳐 왔습니다. 특히 농협은행은 지난해 전국의 소외계층, 초중고등학생, 학부모 등을 대상으로 교육기부 활동인 '행복채움금융'을 통해 꾸준히 사회공헌활동을 펼쳐 교과부로부터 '제1회 대한민국 교육기부대상'수상 및 '교육기부 인증기관'으로 선정된 바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농협은행 전북본부도 직업체험교실, 진로체험의 날 행사, 일일교사지원, 찾아가는 금융교실 등의 '행복채움금융'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김제시와 익산시에서 지역민의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위한 농촌뮤지컬 '사운드오브뮤직'을 개최하였고, 전라북도와 협력해 도내 10개 시군에서 '푸른음악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NH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지역이 필요로 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전북도민과 함께하는 향토은행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으며 앞으로도 선도적이고 창조적인 지역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사회 저변으로 확대시키고 정착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습니다."-농협은행이 지역인재 발굴 및 육성을 위해 노력하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지금 사회적으로 청년실업 문제 해소가 가장 큰 이슈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농협은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 주로 전국단위로 직원을 채용해 왔으나 2012부터는 NH농협은행 출범 이후 지역인재 육성과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고자 전북도내 출신을 대상으로 68명을 정규직으로, 56명을 계약직으로 신규 채용하였습니다. 2013년에도 15명의 정규직 직원과 36명의 계약직 직원을 채용하였으며, 9~10월경 정규직 채용계획이 추가로 있습니다. 또 퇴직자 재 채용 프로그램을 통해서 13명을 채용, 고령층 일자리 창출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NH농협은행에 대한 지역인재들의 관심도를 제고하고 기업을 알리기 위하여 9차례에 걸쳐 전북대, 전주대 등에서 채용설명회를 개최하였고 전북대 등 대학과 산학협력 현장실습협약을 통하여 농협에서 일정기간동안 직장체험을 하고 소정의 학점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지역 인재들의 취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농협은행 전북본부는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청년실업 해소 및 지역인재 육성에 앞장서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 기획
  • 강현규
  • 2013.08.19 23:02

8. 황산대첩과 빨치산 전투

해발 1915m,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 지리산은 아름답고 신령스럽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에 핏빛 현대사가 자리잡고 있다.지리산 일대는 남해안에 상륙해 북진하는 왜적을 저지하기 위한 중요 전략적 방어선이었다. 남원 운봉의 팔량치, 진안의 웅치,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 전남 구례의 석주관은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으로서 왜구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때부터 주요 왜적 저지선이었다. 예부터 한반도를 침범한 왜적의 주요 북상로가 지리산의 동서 지역이었던 탓이다. 남해안에 상륙한 왜적의 한 갈래는 경남 진주에서 산청, 함양, 운봉, 남원, 전주로 북진했다. 또 한 갈래는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줄기를 타고 구례, 남원을 거쳐 북상했다. 또 6.25전쟁을 전후하여 6년여 동안 군경에 저항하다 숨진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 그리고 믿었던 아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의 억울함이 스며있는 암울했던 현대사의 현장이다.△황산대첩고려 말에 지리산 북동쪽에서 벌어진 황산대첩은 지리산 일대에 주둔, 약탈과 살생을 일삼던 왜구를 통쾌하게 섬멸한 전투였다. 고려 말기인 1380년(우왕 6년) 8월, 왜구가 500여척의 선박을 이끌고 진포(군산과 서천 앞바다. 금강)를 통해 침입, 백성을 살해하고 물자를 약탈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당시 최무선이 제조한 화약을 사용한 대포로 공격, 왜선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수많은 왜구들은 불에 타거나 금강에 빠져 죽었고, 천행으로 살아난 패잔병들은 선단이 불타 본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갈길 잃은 왜구들은 충청, 전라, 경상도 등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약탈하고 살생했다. 지리산 아래 함양에 집결한 왜구의 약탈이 악랄했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순찰사로 임명, 운봉 황산(해발 697m) 일원에서 왜구를 섬멸했다. 당시 이성계군이 왜장 아지발도를 쓰러뜨리며 무찌른 왜구의 피가 운봉 남천에 가득 흘렀고, 왜구의 피로 물든 '피바위가' 남천 하상에 남아 당시의 격전상을 전하고 있다. 이성계는 승전 다음해인 1381년 황산을 찾아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다. 또 조선은 1577년(선조 10년) 운봉읍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워 전승을 기렸다. 하지만 일제는 이 암벽과 비를 폭파하고 정으로 쪼아 글자를 식별할 수 없게 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해방 후 정부는 대첩비를 다시 세우고, 폭파된 비석 파편을 모아 '파비각'을 세워 역사를 바로 세웠다. 남원시 운봉읍 양재우씨는 "올해 28회째인 '황산대첩축제'를 매년 열어 600년 전 황산대첩의 쾌거를 기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석주관칠의사묘정유재란 당시 왜병 수만 명이 경남 하동 방면에서 북진해 오자 전남 구례지방의 선비 왕득인(王得仁)과 그 아들 왕의성 등이 의병을 모아 석주관에서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1598년 왕의성을 제외한 모든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 때 전투에서 의병들이 수많은 왜적을 무찔렀는데, 냇물이 피로 물들었다. 지리산 피아골은 이 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1805년(순조5) 조정은 당시 전사한 7인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을 추증했고, 1946년 지방인사들이 칠의각(七義閣)과 영모정(永慕亭)을 세워 그 장렬한 뜻을 추념하고 있다.석주관 전투가 치열했던 정유재란 때 지리산 반대편인 경남 함양 황석산에서도 민관이 왜적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부녀자들까지 결사 항전하고 나선 황석산성 전투에서 7000여명의 아군은 7만 5000여명에 달하는 왜군을 맞아 5일간 결사 항전하다가 끝내 장렬하게 전사했다. 아군보다 10배가 많은 정규군을 이끌고 황석산성을 공격한 왜군의 피해가 사망 3만 4000여명, 부상 1만 4000여명에 달했으니, 사실상 아군의 승리였다. 남원성과 진주성 전투의 비극 등 지리산 자락은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이 오롯이 깃들어 있다. △빨치산 전투지리산은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의 패잔병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사라진 역사 현장이다. 토벌에 나선 군경들이 빨치산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빨치산과 토벌대 사이에서 고통을 당하던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군에 의해 몰살되기도 한 비극의 땅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과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산청함양사건기념비' 남원시 '지리산 뱀사골탐방안내소- 빨치산과 토벌부대 전시관' 등이 당시의 비극을 대변한다. 지리산에서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을 한 세력은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여수순천반란사건 패잔병들이다. 이들은 반란부대장인 김지회와 홍순석이 1949년 4월 사살되면서 대부분 토벌됐다. 하지만 일부는 여전히 지리산에서 숨어 지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하산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이 1950년 9월15일 인천에 상륙한 후 미처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과 인민위원회 지지자들이 지리산으로 피신,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면서 '신빨치'들의 활동이 시작됐다. 당시 월북하던 중 공산당으로부터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명령받은 이현상이 남부군을 조직, 지리산에서 활동하면서 빨치산 활동은 극에 달했다.그러나 1950년 10월, 백선엽이 이끄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토끼몰이 토벌에 나서는 등 군과 경찰이 수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 작전을 펼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급격하게 괴멸됐다. 1952년 1월17일 대성골 전투에서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직속 81사단과 92사단, 그리고 경남도당 57사단의 절반가량이 사상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빨치산 우두머리인 박종하, 박영발(전남도당위원장), 방준표(전북도당위원장), 김선우(전남도당 유격대장), 남도부(하준수), 이현상(남부군 총사령관) 등 우두머리들이 사살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됐다. 1954년 남도부와 김선우, 이현상 등 거물급이 검거사살되면서 지리산 빨치산은 완전 괴멸했다. 1955년 4월1일 국군은 지리산 입산통제를 해제, 지리산 빨치산 사태는 종결됐다. 해방 후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 그 혼란 속에서 벌어진 지리산 빨치산 전투는 민족의 가슴에 커다란 대못을 박았다. 군경은 빨치산 토벌을 내세워 양민까지 집단 학살했다. 남원시 대강면 강석마을을 비롯, 경남 함양산청과 거창 등 지리산 둘레 마을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만이 당시 죽임을 당한 주민, 그리고 유족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13.08.16 23:02

최공호 교수 "공예가 살아나려면 전통의 올바른 성찰과 이웃의 일상 보듬어야"

최공호 교수는 전남 영암이 고향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드는 일에 취미가 있었지만 특별한(?) 고민 없이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목공예를 전공으로 택했으나 실기에 전념하면서 공예의 정체성이 궁금했다. 그러나 문제의식에 대한 답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 그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공예사를 선택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홍대박물관과 마사박물관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예의 정체성과 그 가치를 살려내는 일은 그의 연구 중심에 일관되게 놓여있다. 논리와 주장 또한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천착하는 연상에 있는데 지역이 언제나 그의 삶과 철학 중심에 있는 것은 그래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공예가 제자리를 찾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의 가치에 주목하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강조한다. 공예가 살아나려면 전통의 올바른 성찰과 낮은 자세로 내 이웃의 일상을 보듬어 안으려는 태도를 지녀야하고, 이러한 조건이 곧 공예의 가치 있는 지역성을 만든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맡아 학회 50주년을 사업을 진행하면서 현대공예의 성찰을 큰 주제로 앞세워 내부로부터 적지 않은 원성을 사야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 공예가 본질적 역할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적 관점을 여전히 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이태리에서 활동하면서 역량을 주목받았던 일본 디자이너 시로타니 코우세이씨를 아트디렉터로 초빙, 부여의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발견하고 접목시켜내는 '부여프로젝트'로 주목을 모으기도 했다.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현대에 되살려내는 일을 가장 큰 과제로 삼아 각 지역의 공예를 주목하고 있는 그는 지역성을 "서울에서 멀어서 불편한 곳이 아니고, 그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새로운 중심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한 곳"이라고 정의한다. 본분을 다하는 일을 삶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만큼 좋은 연구 논문을 쓰는 일과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일, 그리고 공예의 현재에 어떤 형태로든지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일상적 계획으로 삼고 있는 최 교수는 전주와 전북의 공예문화를 특히 주목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3.08.15 23:02

지역공예 살리기 나선 미술사가 최공호 교수

지난해 연말, 우연히 들르게 된 '2013 한국공예트렌드 페어'에서 글을 읽었다. 얄팍한 브로슈어에 실린 '지역성의 가치, 지역의 미래'를 주제로 한 글이었다. '모던이 폐기한 지역과 지역성'을 주목하면서 지역을 서로 다른 가치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그 글의 논리는 부드러웠으나 힘이 있었다. "지역은 지도상의 변방이 아니라 잠재적인 가치의 중심이다.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이곳, 내 무늬 결이나 파동과 같은 에너지의 발신지다. 연못 어디든 돌이 덜어진 곳에서 물결이 퍼져나가면 돌을 던지는 순간, 내가 선 곳은 새로운 중심이 된다. 문제는 내가 지금 돌을 떨구는 일이다."지역을 앞세운 대부분 글들의 '그렇고 그런' 빤한 주장이나 논리 대신 고개 끄덕이게 하고 마음을 울리는 글의 미덕은 필자의 주장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했다.미술사가 최공호 교수(56한국전통문화대)를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산업화를 앞세우는 문화의 시대에 지역성과 공예를 짝지워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앞장서온 그의 실천적 삶의 풍경도 그렇지만, 산업화의 물량적 공세와 획일화된 일상 문화에 이미 익숙해진 시대에 그가 주장하는 전통공예의 부활은 과연 가능성이 있을까 궁금했다. 지역이 변방을 넘어 다름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지역의 고유한 가치를 만드는 일을 주목하면서 무엇보다도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를 수렴하는 일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교수와의 인터뷰는 염천(炎天), 그야말로 온 땅이 끓어오르는 듯 한 여름 한낮, 부여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 연구실에서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 사방이 책장으로 둘러싸인 그의 연구실은 나뭇결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큰 탁자와 쓰임새를 발휘하는 아름다운 공예품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놓여있다. 모두가 곁에 두고 사용하는 일상용품들이다. "공예는 실천이 중요합니다. 일상문화에서 쓰이지 않는 공예는 살아남기 어렵죠. 공예의 본질이 쓰임새에 있는데 그 역할을 포기하면 본질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 아니겠어요. 현대 공예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최교수에게 듣는 지역성과 공예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책상위에서 쌓여진 이론적 주장이 아니라 전통 공예의 수많은 장인들을 현장에서 만나면서 공예의 가치와 지역성의 의미를 온전히 체득해온 결실인 덕분이었을 것이다. -지난해 한국공예 트렌드페어의 주제가 '지역 공예의 재발견'이더군요. 울림이 컸습니다. 오랫동안 전통공예와 지역성을 주목해오셨죠. "20년 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입니다. 전통공예를 통해 지역성의 가치를 찾는 일을 주장해왔지요. 아직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잃어버린 가치들에 눈을 돌리는 시대적 변화를 보면서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전시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전통공예를 마을단위로 계승하고 발전시켜가는 '자생적 공방'이었습니다. 일본 몇몇 도시의 예가 소개되어 있더군요. 지역성과 공예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의 모델이 혹시 이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다르지 않겠죠. 지역의 전통공예 장인들을 통해 그 가치를 발견하고 현대에 이어내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게 하는 좋은 방식입니다. 제가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학생들과 함께 진행했던 부여프로젝트의 궁극적 목표도 거기 있었으니까요."-우리나라 전통공예, 지역공예는 이미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전통의 맥이 단절된 지 오래여서 그것의 부활을 기대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현실은 그렇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부여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의 몇 마을을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가장 부러운 것은 우리 전통공예의 기반은 다 무너졌는데 일본은 하부구조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배경에는 자기 취향과 표현을 아주 구체적으로 발현하는 일본인들의 일상문화가 있을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전통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관점이죠. 전통을 산업화의 발목을 잡는 존재쯤으로 여겨온 우리와는 많이 다르죠."-우리 사회의 경우는 전통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너무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의 지역 공예의 가치를 살리는 일은 어떻습니까."지역공예를 살리기 위해 꽤 오래전부터 디자인과 지역 장인의 협업을 지향해왔습니다. 근래에는 그런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니 바람직한 일이죠. 디자이너와 지역 장인의 협업은 장점이 많습니다. 지역 장인들은 고유하고 숙련된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이 갖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를 갖고 있죠. 대신 동시대 감각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숙련된 기술은 있으나 시대를 읽는 감각이 부족하니 디자이너들과 협업이 이루어지면 우성 결합의 결실이 만들어질 수 있게 되는 것이죠."-그러한 협업형태의 작업에서 부작용은 없을까요. "당초 그런 우려가 있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통공예에서 협업은 사람과 사람의 결합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느냐가 중요하죠. 재능만의 결합이 아니라 좋은 사람의 결합이어야 합니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장인들이 앞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청소를 하고 치워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디자인을 던져주고 제작에만 장인들의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그런 경우, 십중팔구 공예장인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당초의 목표인 공예 대중화도 길을 잃게 됩니다. 허위적인 예술가 의식을 좆아가는 통로밖에 되지 않죠. 공예는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쓰이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전통장인들과 디자이너들이 결합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구요."-문화의 시대에서도 산업화가 화두입니다. 전통공예의 박제화도 이런 논리로부터 비롯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 전통의 어플리케이션이라고 하면 산업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매우 단순한 논리고 다소 폭력적인 개념입니다. 전통 공예는 수공예적인 과정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산업화를 앞세워 공예의 과정을 기계화해버리면 그것은 이미 공예품이 아닌 기계제품이죠. 그 경계선을 나누는 전통공예의 고유성이 바로 수공예인데, 이 수공예를 포기할 수 없다면 대량생산이나 산업화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죠. 산업화는 속도와 규모, 효율을 내세우는 현대의 버전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고 있잖아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가치를 아쉬워하면서 그 그늘에서 상처 받은 것을 치유하자고 난리를 치는 시대가 왔지 않습니까. 이 시대적 흐름을 주목해야하는 것이죠."-이 시대가 수공예적 가치를 필요로 한다는 말씀이군요. "느림과 아날로그적인 따뜻한 가치가 곧 수공예적인 가치잖아요. 그런 가치야말로 현대인들이 다시 찾고 싶어 하는 것 아닌가요. 기계의 차가운 가치로 충족시킬 부분은 충분히 수용을 하고 허용하되, 병행해서 우리 삶에 밀착되는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차가운 가치를 배격하고 따뜻한 가치를 지향해가도 될 만한 시대가 되었다고 봅니다."-지역 공예의 활로와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이 좋은 기회랄 수 있겠군요."물론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도 그렇고 이제는 그래도 먹고 살만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한줄기 남아 있는 전통 공예, 지역의 고유한 공예의 맥 조차 산업화로 몰고 가면 말이 안되지요. 공예의 산업화는 애당초 성립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앞뒤 맞지 않는 목표죠."-앞서 일본의 공예를 이야기 하셨는데, 실제로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겠죠. "일본 뿐 아니라 세계 각 나라마다 전통공예로 지역을 성장시킨 예가 얼마든지 많습니다. 일본 벳부의 경우도 그 중 하나인데, 거기서는 '반농반도'(半農半陶)의 가치를 이야기합니다. 도자기를 생산하는 마을의 경우, 그 마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양을 스스로 조절을 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장인이 여럿 있는 마을이라 하더라도 수요는 한정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서로 욕심을 내어 생산을 늘려 경쟁을 하다보면 재고가 쌓이고 그렇다보면 빚이 되고, 좌절하게 되고, 결국은 역량을 상실하게 되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일 년에 필요한 도자기 수요를 측정해 그것보다 상회하는 생산능력을 다른 부분으로 활용합니다. 절반의 역량을 농사짓는 일로 쓰는 것인데, 생태적 농사를 지으면서 그 가치를 도자기로 담아 그릇으로 공유하고 소통하면서 삶의 전체를 유기적인 양태로 이어가는 것이죠. 얼마나 바람직한 일입니까. 공예의 살길은 바로 이런 철학적 기반에 있습니다."-수요에 맞게 생산하는 도자기 이야기를 들으니 공예는 결국 쓰임의 실천이 있어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분명해지는군요. "그것이 핵심이지요. 공예는 실천입니다. 쓰임새가 있어야 공급이 이루어지죠. 공예와 연관된 사람들부터 일상에서 공예의 활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쓰지 않으면 공예의 본질적 역할이 없어지는 것이고, 그렇다보면 공예는 살길을 찾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현실은 공예의 본질을 잃은 지 오래여서 일상생활에서 우리 전통공예가 자리 잡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동안 현대공예에 대해 주장해온 것이 있습니다. 공예가 삶으로부터 일탈해서 엉뚱하게 위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지요. 예를 들면 금속공예를 보죠. 숟가락을 만드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금속공예가 대부분이 주얼리를 만들죠. 그것도 '아티스트'로서 만드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전통적으로 금속공예 영역에서 사용의 빈도수가 많은 것이 뭘까요. 수저와 젓가락입니다. 어떤 물건보다도 중요하죠. 그런데 이 소중한 물건을 정작 공예가들은 만들지 않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작가의 허위의식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술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이죠. 본질을 잃어버린 공예는 가치를 이미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공예라는 것이 오히려 작가들이 터부시하고, 예술성과 이런 쓰임새와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문제가 많군요. "공예품은 쓰임의 역할이 있을 때 부가적 가치가 만들어집니다. 만약 어떤 공예품이 후대에 발견되었다고 해보죠. 누군가 소장했었다는 것과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읽어낼 수 있는 용도를 함께 가진 것의 가치는 다르죠. 작가가 만들고 세월이 완성해주는 것이 공예품입니다. 금방 만들어서 가치가 발휘되는 것은 예술품이죠. 공예품은 세월을 두고 묵혀서 쓰고 대물림 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예가들의 인식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전업작가가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은 거의 없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늘 위기에 처해있죠. 공예는 좀 다릅니다. 본질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파인 아트를 하는 예술가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서 달라지요. 공예가나 디자이너들은 삶과 접점을 이루어 삶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여하는 바가 크고 바람직합니다."-공예와 지역성의 가치를 강조해오셨는데 그것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공예가 제 자리를 찾고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지역성의 가치에 주목해야 합니다. 필연적인 과제지요. 공예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지역성을 어떻게 접목시켜야하는가는 그래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른 지역에 없는 이 지역 고유한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특성을 연동해 자기 색깔을 찾아 나갈 때 지역 공예의 고유성을 찾게 되고 가치를 갖게 됩니다. 제가 진행했던 부여프로젝트도 바로 그런 작업의 연상이지요."-전라북도나 전주의 공예는 어떻습니까.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은 문화적 저력이 있습니다. 특히 공예의 저력은 압도적으로 우월합니다. 전국을 비교해도 장점이 많은 지역입니다. 지자체 단위에서 지역 공예 분야를 문화재로 가장 많이 지정한 곳도 전북일겁니다. 전주는 특히 장인들이 몰려있는데 그런 사례는 드뭅니다. 물론 지정 과정에서 부정적 측면을 겪기도 했겠지만 그들에게 공통의 목표를 주고 동기부여를 해 밀고 가는 리더십이 있다면 굉장히 바람직한 환경입니다. 중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장인들을 돕고 이끌고 보듬어 지역의 고유한 어떤 것들을 지켜가는 것이겠죠. 전주와 전북은 공예의 향기를 가장 진하게 아름답게 피울 수 있는 지역입니다. 가능성이 그만큼 많은 지역이죠. 그래서 부럽기도 합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3.08.15 23:02

11. 줄포초 - 만석꾼 김경중 일가, 부안지역 최초 근대 교육기관 설립

△ 학교가 걸어온 길부안 줄포초등학교(교장 최성운)는 1909년 김기중, 김경중 형제 등 지방유지들이 설립한 사립영신학교를 모태로 한다.학교는 1911년 사립줄포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1915년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로 인가를 받았다.1924년부터는 6년제로 운영됐으며, 1934년에는 부설 진서간이학교가 개교했다. 1938년 교육령개정에 따라 줄포동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줄포동공립국민학교로 개명했다.초대교장으로는 인촌 김성수의 친부인 김경중이 부임했다. 호남의 만석꾼 부자였던 김경중 일가는 부안지역 첫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의 설립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했다.한 때 포구가 들어서, 만물이 모이고 흩어지는 집산지 역할을 톡톡히 했던 줄포지역은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리면서 학생수가 크게 늘었다.많을 때는 전교생이 2000여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 여파로 수당초등학교, 난신초등학교, 대동분교 등이 분리돼 설립됐다. 하지만 1960년대 중심지가 곰소항으로 이동하면서 지역경제 침체로 1990년대 들어 수당초, 대동분교, 난신초가 차례로 통폐합됐다.줄포초는 2009년 개교 100주년 행사를 열고, 본관 앞에 기념비를 세워 학교의 역사를 기렸다. 이 때부터 동문들은 매년 8월 15일 '동문의 날'행사를 통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또한 이들의 후배사랑은 각별하기로 유명하다. 총동창회(회장 문찬기)는 매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재학생 10명에게 10~3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고, 지난해 전주 홍지서림 양계영 대표는 부친인 양동호(36회) 씨의 남다른 모교사랑을 기리기 위해 도서 312권(300만원 상당)을 기증하기도 했다.청와대 관리관을 지낸 박천형(42회)도 매년 200만원의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다.한편 올해 97회 졸업식을 연 줄포초가 배출한 졸업생은 현재까지 모두 1만460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줄포초는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한국문학계의 거장 미당 서정주(13회)는 한 때 영화를 구가하다 쇠락의 길을 걸었던 줄포와 궤를 같이하는 일생을 보냈다.그는 10세 무렵 고창 질마재에서 줄포로 옮겨와,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인근 변산반도, 줄포만 갯벌, 내소사 등지에서 시적 영감을 길렀다.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면서, 문인의 길로 들어선 그는 같은 해 오장환, 김달진, 김동리 등 동료 문인들과 '시인부락'의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참여했다.미당은 원죄의 몸부림인 첫 시집 '화사'를 시작으로 마지막 노마드적 상상력의 세계를 노래한 '떠돌이의 시'에 이르기까지, 부단한 변화를 통한 자기 세계의 심화와 확장을 이룩한 한국 현대 시문학계의 거성이다.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그의 시 언어는 민족어의 유려함과 표현력을 한껏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하지만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거나 조선인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글을 발표하면서 대표적 친일문학인이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대한민국 헌정사에 빛나는 신규식(7회) 34대 국회의원과 박용기(20회) 10대 국회의원은 지역발전에 공로가 컸다.신규식은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북 부안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한 뒤 자유당에 입당해 4대 때도 당선했다. 군농회, 도정업 등을 하다 무소속으로 3대 전북도의회에 입성한 박용기는 10대 국회(고창부안, 무소속)에 당선돼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줄포초 출신은 체육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송만덕(44회) 전 배구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1980년대부터 2000년초반까지 한양대 감독과 현대캐피탈 감독 등을 역임하며 남자배구의 최고 사령탑으로 활약했다.하종화, 윤종일 쌍두마차를 앞세워 1991년 대학팀으로서 사상 처음으로 성인배구를 제패했으며 유니버시아드 대표팀 감독, 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감독을 지냈고 대한배구협회 강화위원장, 대학배구연맹 전무이사 등을 역임했다.'빠떼루 아저씨'로 유명한 김영준(45회) 경기대 교수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레슬링 경기 해설에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빠떼루 줘야함돠'를 외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이와 함께 국병렬(29회) 전 전북일보 편집위원, 신진하(31회) 전 진안김제군수, 최창진(34회) 전 한양대 교수, 백진기(43회) 전 전북일보 국장, 김양균(51회) 전북공무원교육원장, 이정구(60회) 변호사, 문정신(81회) 목포지청 검사 등이 학교를 빛냈다.이와 함께 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과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10세 무렵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길 때까지 줄포초를 다녔다.△ 도약을 위한 노력줄포초는 '배우는 즐거움과 가르치는 행복이 싹 트는 교육'을 표방하고 있다.융합적 사고력과 문제해결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삼고, 연 4회 이상 프로젝트 기반 융합인재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과학과목을 기본으로 다른 교과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개발 적용하고 있다.역점사업인 예술과 인성을 아우른 '행복마음 싹 틔우기'교육 실천을 위한 기악합주 교실, 수요 동요교실, 한지 공예교실을 운영하고 있다.한지공예 실습을 위해 인근 폐교를 활용한 한지만들기 체험을 계획하고 있다.또한 글쓰기독서교육에도 힘써 지난해 각종 글짓기 대회에서 124명의 재학생이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한 글쓰기 교실과 도서 100권 읽기 등이 이 같은 성과를 일궈낸 일등공신이다.최성운 교장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 등 교육공동체가 함께 발전하는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다"며 "학생에게는 꿈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교사는 가르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최명국
  • 2013.08.14 23:02

[22. 노년기 평생학습] 끝없는 배움의 길…공부하는 노인은 젊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지식의 유용기간도 짧아지고 있는데, 앞으로 13년 후면 우리나라 노인인구는 1000만명 시대를 맞는다. 노인의 경륜과 경험만으로 사회 변화와 소통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생학습은 형식목적비용 부담의 여부와 상관없이 개인의 생애에 걸쳐 이뤄지는 다양한 학습 또는 교육훈련이다. 평생학습은 사회변화와 세대간 가치갈등, 생활패턴의 차이 등을 극복적응하고, 노인세대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하면서 질 높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계속적인 삶의 영양과 동력을 충전하는 일 없이 30대 이전에 학교교육을 통해서 이뤄졌던 인생 초반기 학습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살아갈 지속 가능한 생존능력과 적응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년기 평생학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굳어지거나 오그라지는 하나의 유기체가 환경과 소통하면서 삶의 의미와 가치 영역을 넓혀가고 새롭게 창출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우는 노인은 젊다'는 말은 과장이나 상징이 아니라 증명 가능한 생태학적 사실이다. 국가와 사회는 노년 세대들이 인생의 기쁨을 느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지원해야 한다.△자발적 평생학습프로그램 아쉬워 2011년 평생학습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평생학습참여율은 32.4%로 지속적으로 증가되는 추세지만, 아직도 OECD평균인 40.8%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또한 평생학습은 대개 개인의 의지나 개인의 경제적 부담에만 의존하는 형국이다. 개인 1인이 부담하고 있는 평생학습 교육비는 연 75만원으로, 성인학습자의 평생학습참여 장애요인으로 조사됐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조사한 2012년 국가 평생교육통계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평생교육기관 수는 3768개로, 2011년에 비해 4.9%(177개) 증가했다. 인구 10만 명 당 기관수는 서울이 13.8개로 가장 많고, 전북은 6.2개로 전국 10위로 나타났다. 전북의 평생교육기관 수는 111개로 전국 10위, 프로그램 수는 3931개로 전국 13위, 학습자 수는 10만381명으로 전국 14위로 집계됐다. 전북의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과 시군 평생교육센터의 평생교육프로그램 주제를 살펴보면 대부분 생애 단계와 노인특성이 반영되지 않고, 노인 학습자가 주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새롭게 배우는 학습경험을 제공하는 평생학습프로그램과 연구는 찾기 힘든 상태다. △일부는 스스로 개척 최근옥씨(74전주시 효자동)는 올해 방송통신대 국어국문과 3학년에 편입학 했다. 작가이자 여행가인 그는 은퇴 후 대학 중국어과를 졸업했으면서도 "새로운 학문과 정보를 소홀히 하면 미래사회에 적응할 수 없고 창조적인 사고도 나오지 않는다"고 입학 동기를 말했다. 대학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하고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한 육상집씨(73전주시 삼천동)는 "학교 졸업은 있어도 학습 은퇴는 없다"면서 효율적인 영어교육과 생활영어에 대한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영어교육방법과 외래어 지도자료를 발간, 보급하고 있다. 모든 세대에 평생학습은 필요하다. 평생학습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의 전 과정에 걸쳐서 이뤄지는 학교 밖의 학습활동이기 때문이다. 위 사례처럼 노인들이 평생학습사회(lifelong learning socity)의 일원으로 자아실현에 몰입하는 것은 길어진 노년기와 격변하는 사회변화에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보람찬 모습이기도 하다. △개선 대책은 노인세대의 평생교육을 활성화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국가나 자치단체의 평생교육 예산 증액이 필수적이다. 현재 교육부 예산의 0.04%인 평생교육예산을 비롯해 자치단체의 평생교육예산을 대폭 증액해야 한다. 평생학습참여율과 GDP는 상관관계가 있는 만큼, 평생교육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가 같이 고민하고 지원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 노인 평생교육시설을 대폭 확충활용해야 한다. 노인이면 누구나 어디서나 평생 학습에 지속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경로당을 평생교육 장소로 활용하는 방안도 강구해 볼 필요가 있다. 노인들의 경험과 경륜, 학교의 교육 전문성을 평생교육에 접목하여 모든 학교와 노인의 상생 체제를 마련하는 일도 필요하다. 셋째, 노인평생교육에 대한 확고한 철학에 기반을 둔 생애단계별 노인 평생교육프로그램을 만들고 보급해야 한다. 새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어르신을 위한 학습', 모든 세대에게 노년학에 관한 지식과 태도를 가르치는 '어르신에 대한 학습', 고귀한 경륜과 지혜를 환원하는 '어르신에 의한 학습'이 생산적목표지향적, 맞춤형 학습으로 추진돼야 한다.넷째, 노인 스스로 배우고자 하는 의지와 함께 배울 수 있는 여유를 마련하고, 배움에 대한 스스럼없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노년기의 평생학습은 학습-소득-봉사-여가-자아실현 등이 연속적 통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제3의 인생을 재설계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할 때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 기획
  • 기고
  • 2013.08.13 23:02

전주시 평생학습 '금빛풍물동아리' 각종 행사 흥 북돋우는 봉사활동

연분홍 백일홍 꽃잎을 흔들고 살며시 흘러나온 장고가락에 아침 햇살이 걸음을 멈췄다. 전주 금암노인복지관 기악수련실.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들이 장고를 보듬고 풍물학습에 푹 빠졌다. "우리는 흥 속에서 하루를 시작해서 소리와 어울려 즐기고 있습니다." 장고채를 든 '금빛풍물동아리' 홍성욱 회장(77·전주시 금암동)은 만면에 희색이 가득했다. 이 풍물동아리가 첫발을 내디딘 것은 2001년 3월. 30여 명의 회원으로 판을 짠 이 동아리는 현재 50명(남 22명·여 28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는 전주시 평생학습동아리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마음속에만 품고 지냈던 풍물활동의 꿈을 이제야 펼치게 되었다고 회원들의 소감을 홍 회장이 대변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시절, 집안 살림하랴 아이들 교육시키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젊음을 불사르고 이제 노후의 여유와 낭만 앞에서 장고채를 흔드는 손놀림이 너무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이 동아리는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방학도 없이 오전 9시 반부터 2시간 동안 풍물학습을 한다. 마당놀이 첫째 마당에서 셋째 마당까지, 우도 사물놀이가 주 교육과정이다. 이영종 지도강사(74·전주시 금암동)가 영남농악과 삼도 사물놀이를 통합해서 창작한 '금빛사물놀이'가 특색이다.이 지도강사는 "풍물은 공연자나 관객 모두의 흥을 북돋우는 건강유지의 공통처방약"이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풍물학습 활동에 참여하는 아흔 살 최고령인 김백현씨와 권건강(67)·사윤례씨(65) 부부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또 '끼가 있어야 한다'면서 거기에 열정과 반복학습이 뒷받침돼야 예술성 높은 풍물이 뜬다고 덧붙였다. 이 동아리는 창단 이래 어버이날, 연등행사 등 지자체와 민간단체에서 주관하는 행사에서 200여 회의 공연을 통해 학습나눔 활동을 했고, 매년 정월에 벌인 걸립 활동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학습한 내용을 활용하여 공연 봉사활동을 하면서 관객의 박수를 받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창립 당시부터 총무를 맡았던 한병근씨가 귀띔했다. 서양열 관장은 "풍물은 어르신들이 신나게 어울리고 웃으며 즐길 수 있어 인기가 높다"면서 "앞으로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과 주민 통합을 위해서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신정모(전북실버뉴스레터 편집장)

  • 기획
  • 기고
  • 2013.08.13 23:02

[우리고장 명인명물] 정읍시 홍보전도사 김수웅 "신문, 보고 버릴게 하나도 없죠"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2010년부터 정읍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김수웅(69)씨는 매일 발간되는 신문을 스크랩하며 매일 정읍을 홍보하는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정읍시 수성동 정읍시청뒤에 위치한 김씨의 자택 신문방에는 지난 40여년 간 스크랩한 자료들이 벽면에 가득한 가운데 1m자와 커트칼, A4용지가 책상위에 가지런하게 놓여있었다.김씨는 "인터넷 시대에 정신나간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지만 자료 찾기와 읽기 편하고 정리한 자료를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어 좋다"고 스크랩하는 이유를 밝혔다.김씨가 신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1973년 도교육청 공보실에 근무하면서 부터다.정읍농고(51회)와 전주교대를 졸업(67년)하고 정읍 입암초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당시 전우태 정읍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청 시청각담당(영사기와 환등기 등 활용 교육)에 임명되어 교육청 각종 행사 사진을 찍고 자료를 언론에 배포하는 업무를 담당하다 73년에 전북도 교육청 공보실로 발령되었다."정읍농고 70주년 행사에 전북도교육청 설인수 교육감이 참석했었는데 내가 사진을 찍으며 행사장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지 정읍교육청에 지시하여 전북도교육청으로 불러올렸습니다".전북도 교육청 공보실에 근무하며 중앙일보 주최 경호(목포 ~서울)역전마라톤대회를 비롯한 교육감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사진을 찍었던 김씨는 행사 없는 날에는 사무실에서 중앙지와 전북도내 일간지를 보면서 스크랩을 하기 시작했다.도교육청 근무 3년만에 다시 정읍군 일선 초등학교로 부임한 김씨는 신문 스크랩을 지속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모토를 갖고 남들보다 많이 알아야겠다는 각오로 신문을 읽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교사로서 포괄적 지식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설명했다.신문 스크랩은 종이절약을 위해 A4용지 이면지를 주로 활용하는데 사설을 비롯해 정치, 교육, 종교, 문화, 관광, 청소년 등 각 분야별로 분류한다. 또 미담기사는 주로 인물기사 위주로 수집하고 각 지방자치단체별로 홍보하는 기획기사도 분류하여 모았다.이처럼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단어를 조합하는 퍼즐퀴즈(99칸)를 만들어 정읍신문과 전북일보에 수년간 게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 자료들이 일부분 없어져 아쉬움도 많다. "신문 스크랩 자료들이 이사를 다니면서 몇 차례 버려지기도 했고 집에 신문이 쌓여있는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긴 집사람이 내가 없을 때 몰래 고물상을 불러 팔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지금도 정읍시청에서 내놓은 신문을 가져가고 어디든 신문이 모아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2007년 정년 퇴직한 김씨는 정읍지역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행사의 사진을 찍고 전북도내 일간 신문 스크랩을 지속하면서 자료를 활용해 정읍을 홍보하는 블로그 운영을 추가로 시작했다.그가 운영하는 '참 아름다운 정읍의 면면을' 이라는 블로그는 7년차를 맞아 현재 매일 300~500여명이 고정 방문한다. 이를 토대로 3년전 정읍시가 발족한 정읍시 블로그기자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한 개면에 정읍시정 소식을 비롯해 경찰서, 문화, 박물관, 동학 관련 소식 등 16개 꼭지를 배치하고 '내장산' 노래를 BG로 깔아 보기 좋게 만드는데 매일 오후8시부터 새벽2시까지 블로그를 정리한다.김씨는 "돈으로 따질수 없지만 정읍을 홍보하며 가치를 올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스스로 하는 일이기에 힘 닿는데까지 지속하여 정읍시가 미래 지향적으로 가는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기획
  • 임장훈
  • 2013.08.13 23:02

(주)인플러스 김영진 사장 "좋은 제품 경쟁력 확보, 전국 제일기업 되겠다"

"저희 인플러스는 맞춤가구를 생산해 전국에 걸쳐 납품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유일의 KS표시인증 및 단체표준제품인증 업체로, 좋은 품질과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양질의 제품생산을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김영진 사장은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도전하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그의 도전정신, 자신감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오늘의 (주)인플러스를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저희 인플러스는 인력 수급 등 열악한 조건에서도 전 사원이 혼연일체가 돼 어려움을 극복해 왔으며, 우리의 브랜드를 전국에 알려 보겠다는 일념으로, 중소기업의 열악한 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김 사장의 쉼없는 노력의 결실은 많은 상들로 나타났다. 2007년 중소기업 및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전북중소기업청장상, 2008년 중소기업 및 협동조합 발전 기여한 공로로 받은 중소기업청장상, 2010년 전북 기업의 날 모범기업 선정, 2012년 지역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전북중소기업청장상 등이 그것이다.김 사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아직 회사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지만 매년 취약계층 5가구를 선정해 주방가구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10년 넘게 '어린이재단 혼자먹는 밥상'에 후원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관내 고등학교에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지속적으로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김 사장은 "좋은 환경에서 생산한 좋은 제품으로 경쟁력을 확보해, 전국 제일의 기업으로 거듭 나겠으며, 더욱 노력하는 겸손한 기업인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
  • 김성규
  • 2013.08.13 23:02

[고창 가구회사 (주)인플러스] 끊임없는 기술 연구개발…차별화된 가구 생산

고창군 아산면 농공단지에 소재하고 있는 (주)인플러스(대표이사 송미연사장 김영진)는 자연주의 고품격 가구를 지향하는 가구 생산기업이다.김영진 사장 부부가 가구산업의 불모지인 고창군에 터를 잡은 지도 어언 15년이 됐다. 오늘도 공장의 재단 톱날은 각 현장에 납품 설치될 주방가구(싱크대), 신발장, 붙박이장의 재단을 위해 삼복더위도 잊은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주)인플러스는 1997년 모양산업으로 출발해 2001년 법인으로 전환했으며, 2005년 (주)인플러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전국 유일의 주방가구 성능인증 업체로 KS표시인증 및 우수단체표준표시인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LH(한국토지주택공사), SH(서울개발공사) 등에 납품 자격을 갖추고 있다.(주)인플러스가 오늘이 있기까지는 여느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과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송미연 대표와 김영진 사장은 지난 1997년 현재 위치에 주방가구를 생산하는 모양산업을 창업 했다. 경험부족과 숙련된 기술자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많은 난관에 부디쳤으나, 김영진 사장은 좌절하지 않고 전국의 가구업체를 일주일에 3~4일씩 쫓아 다니며 어렵게 습득한 기술을 직원들에게 전수했다. 2년 여의 인고의 시간이었다. (주)인플러스는 이러한 노력을 거쳐 2001년 드디어 대량생산이 가능한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 모양산업(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최신설비로 생산을 시작한지 1년 만에 태풍 루사가 공장을 덮쳐, 생산한 제품과 설비 등이 파손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건물 및 설비 피해는 복구하면 되었지만, 제품 파손과 납기지연 등으로 거래처가 끊기는 등 회사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김영진 사장은 좌절하지 않고 백방으로 회사를 구할 길을 찾았다. 인증 및 기술개발만이 살길임을 확신해 KS인증 및 단체표준 인증을 획득하기 위해 전문 인력을 영입하고 회사의 시스템화에 박차를 가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03년과 2004년에 KS표시인증 및 단체표준표시인증을 획득하게 됐다. 이를 토대로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당사의 생산품을 납품하게 되었으며, 2004년부터 전국 LH아파트 건설공사에 당사의 주방가구 및 신발장, 반침가구를 납품해 오고 있다. 자리를 잡아가던 공장이 뜻하지 않은 두번째 시련에 직면하게 됐다. 2006년 도장공장이 전기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전소되는 사고가 발생해, 다음날 건설사에 납품할 970세대분의 도장문짝이 모두 불에 타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린 참혹한 현장에서, 김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이 납품기일을 맞추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했다. 다행히 경인지역에 있는 협력업체의 도움으로 불타버린 문짝을 재 제작해 납기 지연없이 납품을 마칠 수 있었다.김영진 사장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눈에 선해 눈물이 난다.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때가 제일 가슴아팠다"고 회상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들을 이겨내고, 우수한 품질로 승부를 하다보니 계약물량이 조금씩 늘었다. 2009년에 10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으며, 2013년 현재 계약물량이 100억을 넘으면서 올 한해 150억 원의 매출이 무난할 것으로 전망된다.(주)인플러스는 10년이 넘도록 성실하게 근무하는 장기 근속자가 많아 작업의 효율성이 매우 뛰어나며, 임직원의 선진국 견학 및 품질향상 교육 등 의식 변화를 통해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또한 연구개발팀에서는 질석 생산라인을 갖추고 방음, 방습뿐만 아니라 불연성이 강한 질석을 가구 및 실내건축 자재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중에 있다. 연구개발팀은 2007년 중소기업청으로 부터 주방가구에 대한 성능인증을 획득했으며, 2008년에는 INNO-BIZ 확인을 받았다. 2011년에는 ISO 9001을 획득하고, 2012년에는 드디어 친환경 목재 보드 및 이의 제조방법에 대해 특허청으로부터 특허를 획득했다.올 4월에는 친환경 목재보드를 이용한 주방가구(싱크대) 및 수납가구에 대해 각각 기술개발 인증인 성능인증을 획득, 우리나라 가구업종에서는 유일하게 KS인증, 우수단체인증, 성능인증을 모두 보유한 업체가 됐다. 전라북도가 기술개발제품(성능인증)을 토대로 지역 업체를 우선 구매대상으로 선정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하고 있는 가운데, 전북개발공사와 많은 관공서에서 우선구매제도를 통해 (주)인플러스와 여러건의 수의계약을 체결했다.해를 거듭할 수록 놀라운 성장을 멈추지 않는 (주)인플러스의 내년 목표는 200억 매출 달성이다. 김영진 사장이 이끄는 (주)인플러스의 내년 목표달성과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해 본다.

  • 기획
  • 김성규
  • 2013.08.13 23:02

전북혁신도시에 둥지 튼 임채호 지방행정연수원장

안전행정부 소속 지방행정연수원이 35년간의 수원시대를 마감하고 이달 1일 완주군 이서면 전북혁신도시에서 업무를 시작, 새로운 전북시대를 열었다. 지난 1965년 서울시 쌍문동에서 문을 연 후 수원을 거쳐 전북으로 이전한 지방행정연수원은 지역 핵심인재를 양성해 온 지방공무원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특히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12개 공공기관 중 가장 먼저 둥지를 틀어 지역사회의 관심도 뜨겁다. 지난 9일 새로운 터전에서 본격적인 교육 일정을 준비하고 있는 임채호 원장을 만나 소감과 기관 운영 방향을 들어보았다. 임 원장은 이날 주민등록을 관사가 있는 전주시로 옮겨 전북도민이 됐다.-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12개 공공기관 중 가장 먼저 이전작업을 마치고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방행정연수원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 주신다면."연수원에서는 전국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은 물론, 자치단체장·지방의원 등 선출직 공무원, 지방공기업 임직원, 그리고 몽골·인도네시아·아프가니스탄 등 외국 공무원들에게 국내 최고 수준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연수원은 지난 1965년 서울시 쌍문동에서 개원한 후 1978년 수원시 파장동에 청사를 신축 이전했고, 최근 전북혁신도시에 새롭게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말씀하신 것처럼 지난 35년간의 수원시대를 마감하고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습니다. 새롭게 전북시대를 맞았는데 소감은."기관 이전을 준비하면서 몇 차례 들렀는데 우선 전주·완주가 참 살기좋은 도시라고 느꼈습니다. 지역 주민과 자치단체장들의 따뜻한 환대도 무척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비빔밥을 비롯한 한국 대표음식과 한옥마을·전통문화 등 앞으로 발전시킬 유·무형의 자산이 많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지난 4월 취임한 후 연수원 이전 사업을 진두지휘하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을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연수원 운영계획과 비전을 말씀해 주시죠."연수원 전북 이전에 맞춰 '개방과 협력으로 신뢰받는 창의적 지방자치 리더 양성'이라는 비전을 재정립했습니다. 개방과 협력을 통해 투명한 정부, 국민 눈높이에 맞는 행정 서비스를 구현하는 공무원 양성이 우리 연수원의 핵심 목표입니다. 전주시·완주군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주민들도 개방과 협력의 주요 대상입니다. 연수원은 교육기관인 만큼 지방자치 리더 양성이라는 본질적인 분야에서 지역에 기여하는 게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자치의 본질은 지역의 자산과 특성을 지역발전으로 연계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비빔밥과 판소리 등 전북지역의 다양한 유·무형 자산을 활용, 지역발전으로 연계시킨 지방자치 모델을 교과과정으로 개발·편성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 효과를 능가하는 지역사회 기여 방안이 될 것으로 봅니다."-12일부터 전북혁신도시에서 연수생 교육이 시작됩니다. 연간 전북을 찾게 될 교육생 규모는."지난해의 경우 7900여명이 연수원을 방문, 집합교육을 받았습니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13만6000여명에 달하는 규모로 휴일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547명이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또 100여명에 이르는 직원을 포함하면 매일 약 650명이 연수원에 상주한 것입니다. 전국 각지의 고위공직자와 핵심 인재들이 모여든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과는 물론 지역홍보 효과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연수원이 지방으로 옮겨오면서 우수 강사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연수원 이전으로 강사 모시기가 어려워진 게 사실입니다. 현실적으로 인적 자원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이동 시간 문제로 출강이 어려운 분들이 있어서 대체강사를 확보했습니다. 그나마 본인의 의지가 있어도 막상 당일 사정이 생기면 출강이 어려울 수도 있는 만큼 신경이 쓰이는 부분입니다. 결국 여건상 지역 내 인적 자원을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연수원 운영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교육수준이 요구되는 만큼 강사선정심의위원회에서 연수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우수 강사진을 엄격하게 심사·선정할 계획입니다."-혁신도시 이전 기관들이 각 기관의 특성을 살려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지역연계사업에 속속 동참하고 있습니다. 연수원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요."우선 연수원의 한시계약직 공무원 2명과 청사관리 위탁용역 64명 중 54명, 그리고 구내식당 종사자 10명 모두를 전북도민으로 고용했습니다. 또 신청사 물품과 통근버스 관련 임차용역·통신 등 총 2억1000만원 상당의 계약을 지역업체와 체결했고,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발주하는 물품·용역 등 주요 계약건에 대해 지역업체를 적극 활용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구내식당 식자재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우수한 농산물이 공급될 수 있도록 운영업체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지난 2011년부터 완주군 이서면 지역 몇몇 결손가정과 자매결연을 통해 사랑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연수생들이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혁신도시의 정주여건이 아직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연수생들의 편의를 위해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분야를 꼽는다면."교육기관인 만큼 연수생들이 숙소에서 정시에 연수원에 도착할 수 있는 교통여건이 가장 중요합니다. 연수원 차원에서 TF팀을 구성, 그동안 교통과 주거여건·시설지원 등 각 분야에서 전북도·전주시 등 자치단체와 함께 대책을 세워왔습니다. 그 결과 버스노선 신설과 신설도로 안내표지판 설치 등 다방면에서 개선이 이뤄졌습니다만 실제 교육이 진행되면서 이 같은 대책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살피고 있습니다. 이밖에 교육생 숙소와 편의시설 확충 필요성도 있지만 전북혁신도시가 조성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차차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연수원에 근무하는 100여명의 직원들이 생활터전을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옮기면서 어려움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직원들의 반응은."지방행정연수원은 안전행정부 소속 기관으로 직원들이 통상 1∼2년 정도 근무하면 부서를 옮긴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게다가 직원들 중 젊은층과 여직원·맞벌이 부부가 많아 가족 전체가 이사를 하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직원 상당수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이유입니다. 전북 이전을 앞두고 직원들이 여러가지를 우려했지만 막상 와서보니 생활여건 등에서 걱정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전북혁신도시 첫 이전기관인 만큼 지역사회의 관심이 높습니다. 끝으로 전북도민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시죠."관심을 갖고 환대해 주신 지역주민과 기관·단체장 여러분들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연수원이 전북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데 도민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북 발전에 기여하는 기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연수원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전북도민의 일원으로서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기획
  • 김종표
  • 2013.08.12 23:02

7. 유교·기독교 유적 - 천왕봉처럼 솟은 기상 실천한 '남명학파' 산실

지리산권에서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수많은 종교가 성행과 쇠퇴를 반복했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성행했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성행했다. 조선 건국 직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지리산권 곳곳에 지방관들에 의해 향교가 세워져 유교 경전을 비롯한 선현들의 글이 체계적으로 전수됐다. 그런가 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이 지리산에 휴양촌을 만들어 심신을 다졌다. 이처럼 지리산은 시대를 초월해 모든 종교를 포용해왔다. 특히 유교문화는 지리산권에서 불교문화 못지않게 크게 성행했다. 남원, 구례, 함양, 산청, 하동 등 5개 시군에 향교와 서원 등의 유적이 무려 63개소에 달한다. 15세기 말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 16세기 중엽 남원의 안처순, 함양의 노진, 산청의 조식 등이 대표적 인물. 이중 남명 조식은 실천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를 만들어 지리산 일대와 경상우도 지역, 그리고 순천 남원까지 수많은 문인을 배출했다. 또 1920년대 남장로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휴양을 위해 세워진 휴양촌도 56동의 건물이 들어설 만큼 성행했다.△남명 조식 혼 깃든 산천재덕천서원덕천강 너머로 우뚝 솟은 지리산 천왕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천재(山天齋).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 위치한 산천재는 남명 조식(1501~1572)이 61세 때 이주해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하기 전부터 열 번이 넘게 지리산을 유람했고, 12번째 유람을 마친 뒤 '유두류록'을 지을 만큼 지리산 사랑은 남달랐다. 또 그는 '천왕봉이 하늘 가까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사랑해서라네(兄愛天王近帝居)'라는 시구를 통해서도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처럼 지리산은 남명에게 우뚝한 기상과 기절의 표상을 보여줬고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며 '남명학파'의 사상을 다져갔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은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성향과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 정신을 여느 학파보다 더 두드러지게 추구한 경향을 보였다. 이는 남명이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나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전공을 거둔 것이 증명한다. 산, 사람, 사상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지리산과 남명 및 남명학파에서 전형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고 계승하기 위해 지리산 동쪽 자락에 건립한 덕천서원은 지리산과 남명학파가 함께 이뤄낸 문화경관의 집결체다. 덕천서원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 지리산에 맺히고 다시 낙남정맥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다. 하징의 문집인 '창주집(滄州集)'에는 '물이 감아 돌아나가는 것은 먼 듯, 가운 듯 그윽해 서원이 들어서기에 천혜의 조건을 이뤘고 무엇 하나 더할 필요가 없다'고 평할 정도로 명당 자리에 들어선 것. 남명을 추모하고 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워진 덕천서원은 1575년 최영경 하응도 윤근수 등의 문인들이 결의해 창건됐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중건되었다가 1870년 서원 철령에 의해 다시 헐어졌고 다시 1926년 준공됐다. 덕천서원은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상정에 향사를 올리고 8월 18일에는 남명제를 개최한다. 덕천서원의 향사는 지금도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거행되고 있으며 향사를 통해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외국 선교사에게도 매력적 휴양지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장로회 소속 개신교 선교사들은 과로와 열악한 환경으로 죽거나 건강이 악화되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은 휴양시설을 건립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이들이 선택한 곳은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지리산이었다.1922년부터 노고단 일대에 일부 건물을 짓고 1923년에는 동경제국대학과 교섭해 본격적으로 건축에 나섰다. 1931년에는 건물 32동에 이용자 149명 규모의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춘 휴양촌으로 발전했고 왕시리봉 인근으로까지 발전해 그 규모는 건물 56동에 달했다. 이후 일제와 갈등을 빚은 선교사들이 1940년 한국을 떠난 뒤 휴양촌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노고단 인근의 유적은 대부분 소실됐지만 왕시리봉 인근에 있는 유적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 유적이 불교나 유교에 비해 숫자나 규모면에서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문화적 가치는 충분하다. 국내 유일의 산중 개신교 유적인 이곳은 단순한 휴양시설의 역할만 했던 것은 아니다.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 전쟁 등 개신교의 수난과 성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기획
  • 김정엽
  • 2013.08.09 23:02

덕천서원서 만난 조식 14대손 조종명씨 "남명 선생은 조선시대 진보적 지식인"

"남명 조식 선생은 조선시대 이기론이 주를 이루던 시절 실천을 강조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습니다."남명 조식의 14대손인 조종명씨(73·산청군 문화관광 해설사). 남명의 혼이 깃든 덕천서원에서 만난 그에게서 선비의 강직함과 곧은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말년에 지리산을 찾아 자신의 사상을 다졌던 남명의 모습 그대로였다."16세기 기호학파(율곡학파), 강우학파(남명학파), 강좌학파(퇴계학파) 등 3개의 학파가 조선의 주류였습니다. 그러다 인조 반정 때 남명학파가 몰락한 뒤 정조에 이르러서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바른 소리를 하고 나아가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남명학파는 시대의 변화상에 따라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행동과 실천을 중시한 만큼 역사적 순간에 남명학파와 관련된 인물이 많았고 최근에는 '경상대 남명학 연구소'와 '서울대 남명학회' 등에서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또 '산천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이 오는 9월 준공을 앞두고 있어 남명과 관련된 연구의 폭은 더욱 늘어나게 된다. "진주 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이 남명학과 연관성이 깊다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 몇몇의 학자들은 조선 후기 실학의 단초를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남명의 저술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불의를 참지 못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는 등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자랑해왔다. 그리고 이런 정신은 선비들뿐만 아니라 당시 산천재를 중심으로 한 산청지역의 일반 백성들에까지 영향을 미쳐 역사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양명학 노장학 불교 등 모든 사상에 유연한 태도로 접근한 남명의 철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는 지리산과 결합된 남명의 철학이 현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3.08.09 23:02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