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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수 K-water 전북지역본부장 "홍수·가뭄·수질 과학적 관리 '물 복지' 실현 최선"

지난달 26일 취임한 고양수 한국수자원공사(K-water) 전북지역본부장(55)이 2014년 새 비전 제시와 함께 힘찬 도약을 선포했다. 깨끗하고 안전한 ‘웰빙 물’을 꿈꾸는 도민의 열망과 성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물로 더 행복한 세상을, 물로 더 건강한 심신을 만들자’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도 사람의 초석이 되는 K-water의 고정적 용수확보,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그리는 내실화, 용수관련 불편사항 최소화를 위한 안정적 운영 등 K-water가 넘어야 할 파고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익산이 고향인 고 본부장의 각오도 남다르다. 고 본부장의 전북 근무는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1985년 공채 8기 평사원으로 공직에 입문해 전북 물을 책임지는 수장으로 돌아온 그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고향인 전북의 수장으로 돌아왔는데 소감과 신년설계가 있다면“먼저 도민 여러분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고 뜻하는 일들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익산이 고향이지만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는 전주에서 다녔습니다. 1985년 K-water에 입사해 2009년 부안댐 단장으로 1년 간 근무한데 이어 전북에서 두 번째 근무입니다. 부안댐 단장으로 있을 때 부안군과 함께 ‘님의 뽕’ 1회 축제를 시작했는데 벌써 5회째 성황리에 지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올해는 K-water 전북본부장으로서 새만금 지역을 포함한 도내 전역에서 가뭄·홍수·수질 등의 물 문제가 없도록 전북 물 복지를 실현해 나가겠습니다.”-K-water 전북본부의 2013년 자체 평가를 해본다면 어떠신지요“도내 고산·산성·동화 등 3개 정수장이 세계 최고 수준(5-Star)의 수질 등급평가를 받았고 ‘3년 연속 수질분석능력 국제인증’이라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지난해 7월 대성정수장 급수구역 광역수돗물 공급을 시작으로 올해는 전주 전역에 100% 용담댐 물을 공급하고 있고, 도내에서 유일하게 지방상수도 수탁관리를 하고 있는 정읍시는 50%의 유수율을 지난해 말 80.7%까기 끌어올리는 획기적 성과를 거뒀습니다. 도내 3개 다목적댐 주변지역 지원사업비로 64억 원을 책정, 총 332건의 주민소득 및 생활지원사업 등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전통시장 이용 기관 1위는 물론, 도민과의 소통을 인정받아 언론홍보 최우수 본부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도약의 한 해였다고 봅니다.”-올 해 물 관리 패러다임 변혁의 명제는 무엇인가요“K-water는 67년 창립 이래 물 관련 재해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정적 수요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물 배분 갈등 및 노후시설 안정화, 해외사업 리스크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또 공기업 방만 경영과 과다 부채가 사회적 논란이 되면서 비상경영체제 전환에 이어 올 해 혁신의지를 담은 ‘SMART 신 경영’을 선포했습니다. SMART 신 경영은 먼저 지역간 이기주의 극복과 유관기관과의 협력을 통한 통합관리 실현, 소외·도서지역 등 취약지역에 대한 광역상수도 공급을 통한 안전한 삶의 구현, 소통과 사회공헌을 통한 고객 눈높이 경영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3년은 제2의 창업에 임한다는 각오로 경영진, 임원진, 직원 모두가 합심해 새로운 세기를 열어가는 초석을 만들겠습니다.”-2014년 주요 업무계획은 어떻게 수립하셨는지요“새해는 글로벌 물 전문 기업으로서 전진하기 위한 칸막이를 없애고 열린 마음으로 당면한 도전과 역경을 극복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올 해는 세계 수준의 수질분석 역량 확보를 위한 국제인증을 추진하고 ‘Smart Water Grid’ 기반의 과학적 물관리, 수도시설 적기개량에 총력을 기울여 물 복지 실현에 앞장설 계획입니다. 무엇보다도 전북 현안인 새만금 개발과 관련해서도 모든 역량과 힘을 집중시킬 방침입니다. 새만금개발사업 용수공급 기본구상을 토대로 전주권광역상수도 시설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생활용수를 공급하고 지난해 7월 착공한 기존 금강광역관로 노후관 갱생공사를 마무리지어 2017년부터 공업용수를 공급할 계획입니다. 특히 새만금 조기 개발로 2016년 이전에 발생할 공업용수 수요에 대비해 고산정수장 생활용수를 공업용수로 대체 공급할 수 있도록 비상연계 관로를 설치해 사전 문제점을 예방하겠습니다.”-도민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전북본부는 일상생활에 필수불가결한 물을 깨끗하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신뢰를 기반으로 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 이행할 수 있도록 많은 충고 부탁드립니다. 특히 청정에너지 생산 확대 및 저탄소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기후 및 환경변화에 선도적으로 앞장 설 방침으로 도민 여러분의 많은 조언 뼈 깊게 새겨듣겠습니다. 수자원, 용수 공급이라는 기본업무를 넘어 도민과 소통하고 지역과 상생하며 ‘물로 더 행복한 전라북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민 여러분의 지속적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고양수 본부장은 가뭄 관련 박사 학위…'실무 분야 명장' 평가고양수 K-water 신임 전북본부장은 익산 출신으로 전주초등학교와 전주동중, 전라고등학교를 거쳐 전북대학교 공대 토목공학 석·박사를 거친 토종 전북인이다.고 본부장은 1985년 1월 공채 8기로 수자원공사에 입사한 이래 본사 조사기획처 조사기획팀장, 해외사업처 사업개발팀장, 부안댐·소양강댐 단장, 수자원개발처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실무 분야 명장’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그는 특히 용수공급을 고려한 가뭄감시 및 기상학적 가뭄전망을 논문으로 발표해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물 분야 실무 전문가로 통하고 있으며, 토목 및 수자원개발 특급 기술자격을 취득한 기술자다.더욱이 활동영역을 전북으로 국한하지 않고 수자원학회 평의원·강원지회부회장, 토목학회 평의원·대전충남지회부회장, 한국대댐회 이사, 강원·대전충남 하천위원회 위원, K-water 처장단 회장, 전북대총동창회 부회장 등 다양한 대외활동가로 유명하다.고 본부장의 폭넓은 활동을 반영하듯 국무총리 표창을 시작으로 건설교통부, K-wate 사장, 수자원·토목 학회장, 석탑산업훈장 등 수상 실적도 다양하다.고 본부장은 “지금까지 근무 이래 가장 기억에 남는 부문이 있다면 뽕을 특성화시킨 부안 제1회 ‘님의 뽕’ 축제”라며 “당시 이 행사를 같이 추진하면서 축제 이름을 두고 논란이 많았지만 임팩트가 강하다는 점에서 이 명칭을 사용, 지금은 널리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고향인 전북 수장으로 온 만큼 새만금 개발에 열정을 갖고 물 부족으로 인한 개발사업 차질이 없도록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며 “수시로 14개 시군과 취수와 정수, 관로, 배수지 문제 등에 대한 연락을 취해 물에 따른 사고 위험을 최소화 시켜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4.01.20 23:02

[3. 익산 (유)영광테크] 창업 2년만에 부도… 10년 노력 끝 차부품 우수 기술력 확보

누구나 꿈꾸는 창업. 그렇지만 성공이라는 두 글자까지 다가가는 창업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자동차 부품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유)영광테크 유재구 대표(57)도 가족과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창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곧장 IMF를 만나 부도를 겪으면서 실패를 맛본 장본인이다. 실패를 겪은 40대에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다며 끼니걱정을 하면서도 종업원들의 밀린 임금은 끝까지 잊지 않고 책임진 그가 지금은 2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안정된 기업인이 됐다.좌절과 목표를 바꿀 수 없다며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지금은 12종류의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인이 됐지만 그의 목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한다.너무 영세한 기업인이라며 인터뷰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창업을 앞둔 이들에게 목표와 꿈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하고 나선 그의 오래된 인생수첩을 들여다본다.△영광테크는공냉식 기화기라 불리는 이른바 다이캐스팅 생산전문회사인 영광테크는 2008년 창업된 5년차에 불과한 중소기업이다.익산 1공단의 어귀를 지나 자그마한 간판 하나가 전부인 탓에 외지인들이 이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간판을 따라 들어간 공장 규모는 예상보다 훨씬 큰 1만㎡가 넘는 규모였다.마당 한 가운데가 주차장과 여유공간으로 사용되면서 빡빡하게 공장들이 밀집한 주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초라할 정도로 자그마한 사무실은 드라이버와 망치, 플라이어, 전기테이프 등 연장들로 가득했다.이곳은 사장이나 사무직, 생산직이 별도로 구분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선 관리자가 생산에 뛰어들고 사장은 배달사원이 되기도 한다.모두 책임감을 가진 정예사원들로 구성된 영광테크에선 하루가 너무도 짧게 지나가는 공간이라고 한다.모두가 주인의식으로 가득한 영광테크는 그래서 가족경영, 가족기업이라는 평가속에 인근 자동차 업계로부터 많은 일감을 차지한다.이 때문에 다이캐스팅으로 시작한 영광테크는 최근에는 자동차 시트관련 부품까지 생산하는 등 12가지의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좌절과 맞바꿀 수 없는 목표유 대표는 지금의 영광테크 설립에 한참을 앞선 1997년 창업했다가 2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실패한 쓰디쓴 경험을 가지고 있다.원광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뒤 무역회사에 다니며 자동차 부품 무역을 담당하다가 자동차 부품과 긴 인연을 맺었다.회사를 그만둔 뒤 자동차 부품을 직접 생산해 무역 전공을 살려보겠다며 창업에 뛰어들었을 때가 30대 후반이었다. 40이 되어서 부도를 겪은 유 대표는 사실 실패라는 단어가 그리 낯설지 않았을 터다.무역업에 종사하다가 아무 기술 없이 자동차 부품업에 뛰어들었던 게 첫째 이유이고 자본력 없이 가족들에게 기대어 쉽게 창업했던 게 두 번째 이유였다고 한다. 세 번째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의지가 덜했고, 함께하던 직원들도 이런 회사를 믿고 의지하거나 주인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란게 네 번째 이유였다.그의 수첩에는 이런 이유들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이 빼곡히 적혀 있고, 이 수첩은 지금도 유 대표가 종종 들여다보며 목표를 다시금 세우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부도라는 커다란 좌절 속에서 유대표는 당시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보다 밀린 직원들의 임금을 해결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더욱 가슴 아팠다.그래서인지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년여에 걸쳐 밀린 임금을 모두 해결했다. 그때부터 유 대표는 재도약이라는 제대로 된 목표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됐다.이후 본격적으로 자동차 부품생산업체에 관리직으로 입사해 기술을 익히며 관리에도 노하우를 쌓았다. 그렇게 10년이 되어서야 다시 창업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고 지금의 영광테크가 설립된 것이다.△목표는 변하지만 작아지지 않는다영광테크가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서 처음 투자자였던 처남이 대표이사가 됐고 유 대표는 경영 2선으로 물러났다. 이후 유 대표는 삼진종합상사라는 다른 사업장을 책임지고 있다. 그러면서 영광테크의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연구능력 향상과 기술개발에 나섰다. 연구능력 향상과 기술개발은 유 대표가 처음 좌절을 맛본 뒤 가장 필요성을 느낀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유 대표는 꾸준한 기술개발에 나섰고 단품 제품 생산에 머물던 영광테크는 12가지의 부품을 생산하는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유 대표의 다음 목표는 지금의 단순 생산라인에 머물지 않고 프레스 성형부터 완제품에 이르는 생산라인 구축이다.지금 생산되는 제품이 자동차와 오토바이, 대형 건설 장비에 사용되는 한 제품의 다양성도 이뤄내겠다는 목표도 가지고 있다.40대 초반 부도이후 재창업이 목표였다면 지금은 완벽한 생산라인 구축이 목표가 되는 등 목표는 상황에 따라 변화되고 있지만 작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발전가능성이 높은 대목이라고 유 대표는 젊은 예비 창업인들에게 조언했다.● 유재구 대표 "목표 있으면 재도약 가능, 기본 갖춰 과감한 도전을"쉽게 창업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하는 창업인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창업의 목표를 세우고 도전에 나선 창업인들이 한번 좌절했다고 목표를 영영 버리는 일이 적어지길 바랍니다.자동차 부품생산업체인 영광테크를 이끌고 있는 유재구 대표는 실패라는 말을 너무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로 통한다.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 기업인은 아니지만 그의 열정과 희망, 목표는 그 이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지금은 이렇지만 몇 해 전에는 정말 볼품 없었죠. 아무도 다시 일어나거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고 했지만 그들이 틀렸습니다. 실패를 맛 본 사람들은 오히려 창업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실패라는 어려움을 이겨낸 유 대표의 자동차는 10년을 훌쩍 넘었다. 지금은 좋은 자동차를 살 형편이 되지만 절대 과소비하지 않는다. 몸에 밴 습관이 그렇고 절대 불필요한 것에 소비하지 않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다.실패를 경험한 뒤 조금은 소심해짐을 느끼며 이를 딛고 일어서기까지 분수에 넘치거나 과소비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올곧은 성격을 인정받아서인지 지역의 대기업에서 그에게 납품을 도맡기면서 자동차 부품생산업체에 이어 유 대표의 전공을 살려 무역용품을 취급하는 수입업체까지 운영하고 있다.유 대표는 창업인이나 기업의 경쟁력은 당연히 기술력이고, 같은 물품을 다른 곳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라며 기본이 갖춰졌다면 과감히 도전하고, 실패했더라도 좌절보다는 경험을 통한 재도약의 목표를 버리지 않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고 예비 창업인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 기획
  • 김진만
  • 2014.01.16 23:02

[3. 용도 다양한 활성탄소] 원전 오염수 정화·바다 기름띠 걷어내는 데 활용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인한 오염수 유출 때 일본에서는 오염수의 정화를 위해 활성탄소를 이용했다. 지난 2007년 우리나라 태안 앞바다 원유 유출 사건 때에도 상당한 양의 활성탄소가 바다에 뿌려졌으며, 2010년 미국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건에도 활성탄소가 사용됐다. 활성탄소는 원유를 흡수해서 뭉치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원유제거에 매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지난 2003년 이라크 전쟁 당시나 북한 생화학 테러 위협이 있었던 2005년에는 활성탄소를 이용한 방독면과 보호의, 개인정수장치 등에 대한 시장수요가 폭발했었다.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국내 주요 기업인 GS칼텍스, OCI, 애경유화, 비나텍 등이 활성탄소를 이용한 에너지저장장치의 시장진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활성탄소의 구조활성탄소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여러 가지에 쓰일 수 있는가?우리나라에서는 예전부터 된장이나 간장을 담을 때 숯 등을 사용해 왔다. 활성탄소의 일종인 숯이 흡습 작용이나 액상오염물에 대한 탈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려져 왔다. 이러한 작용에 관한 과학적 검토는 1773년 Scheele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현재 활성탄소에 대한 연구는 탄소과학의 주요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활성탄소로 대표되는 다공질 탄소는 그 내부의 기공구조 특성으로 인해 실생활 전반 (공기청정기, 정수기, 방독면, 혈액필터, 각종 배터리 등)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활성탄소는 다양한 형상(분말상, 입상, 섬유상 등)으로 제조될 수 있으며, 그 형상에 따라 흡착특성(물리화학적인 고체-기체 결합)이나 에너지저장특성, 기계적 강도 등이 서로 다르다. 입상 및 파쇄상은 주로 수질정화용으로, 조립상과 섬유상은 대기정화 및 고도정화용으로 활용되며, 고순도의 활성탄소 분말은 에너지저장용 전극재료로 사용된다.활성탄소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일반 상하수도 정화용 활성탄소의 가격은 ㎏당 약 2000원~3000원 수준이며, 방독면용 활성탄소는 1만원~2만원으로 10배 가량 비싸다. 또 에너지 저장용 활성탄소는 5만원~20만원으로 상하수도용에 비하면 100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다. 현재 국내 활성탄소 시장은 연간 약 1조원이며,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에너지저장 분야의 시장이 확대되면서 매년 8% 이상 시장규모가 커지고 있다.활성탄소를 이용한 산업적 응용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수질 및 대기환경 개선을 위한 필터소재이며, 둘째는 에너지저장용량 증대를 위한 배터리용 전극재료이다. △수질환경 분야액상에서 활성탄소의 이용은 제당공업의 탈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도 많은 분야에서 탈색을 주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탈색 이외의 효과를 동시에 얻는 경우가 많다. 활성탄은 탈색/탈취, 수중 유기물 제거, 방향족 탄화수소계 제거, 무기오염물질 제거, 탈이온을 통한 해수담수화 등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상하수도 정화목적의 활성탄 사용은 가장 중요한 응용이라 할 수 있다. 상수도에 처음으로 활성탄을 사용한 것은 1925년 체코의 아들라에서다. 그러나 초기에는 활성탄소의 기공구조에 대한 이해가 낮아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방독면 기술이 쌓이면서 수처리 부분에서도 급진적인 기술개발이 동반되었다. 미국에서는 1927년 시카고에서 수중 염소제거에 활성탄소가 적용되었으며, 이를 시작으로 미국 전 지역으로 사용이 확대되었다. 유럽에서도 탈취 목적으로 상수도 정화용 활성탄이 보급되었다.우리나라에서도 가정용 수도의 잔류염소를 제거하기 위한 소형 정수기나 대형공장 정수장치의 전처리, 그리고 이온교환장치 등에 활성탄을 사용해왔다.현재는 많은 나라가 수질환경을 보전하고 물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가정에서 나오는 하수를 1, 2차 처리한 후 하천에 방류하기 전에 활성탄소로 추가처리 한다. 게다가 활성탄은 크롬, 구리, 니켈 등 다양한 중금속의 제거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어 산업폐수의 처리에도 널리 사용된다. △대기환경 분야활성탄소는 기공이 잘 발달되어 있어 흡착능력 및 흡착속도가 우수하고, 비표면적과 미세기공의 크기 및 구조를 그 사용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 대기환경 개선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한 화학물질을 첨착시켜 물리흡착과 동시에 미량의 유해가스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필터로도 사용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우수한 물성에도 불구하고 필터 내에 부착된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이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증식될 경우 2차 오염을 유발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이 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활성탄소의 표면에 항균기능성을 가지는 은, 구리, 니켈과 같은 금속을 분자분리 방식으로 도포하여 항균기능을 갖추게 한다. 흔히 말하는 은 나노 기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너지저장분야 응용21세기 들어 에너지의 효과적인 저장 및 이용은 환경과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다. 특히,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의 부족으로 에너지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수입하여 사용하고 있어 에너지 저장 및 이용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 기술의 개발이 반드시 필요하다. 게다가 환경친화적 신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요구와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에 따라 휴대용 고밀도?고출력 에너지 저장 시스템의 개발은 21세기 선진국의 필수 개발기술로 인식된다.수소연료전지는 슈퍼커패시터와 함께 무공해 전력 공급장치라는 점에서 차세대 청정에너지 발전 시스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연료전지와 슈퍼커패시터의 핵심 전극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활성탄소다. 독특한 기공구조로 인해 많은 양의 에너지를 내부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슈퍼커패시터 제조 때 활성탄소가 차지하는 가격비율은 40%에 달하며, 모바일 전원의 핵심인 리튬이온전지의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줄 수 있다. 즉, 출력밀도를 높이고 리튬이온전지의 수명을 크게 늘릴 수 있다.이 때문에 최근 개발되고 있는 전기자동차에서는 리튬전지와 슈퍼커퍼패시터를 하이브리드화하여 적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슈퍼커패시터와 관련하여 비나텍(주), 네스캠(주), 코칩(주), LS 엠트론 등이 활성탄소 전극소재를 기반으로 하는 에너지저장소자를 제조하고 있다. 한편 수소연료전지의 경우 백금이 담지된 활성탄소를 주요 전극소재로 사용한다. 수소연료전지는 수소 및 산소를 직접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활성탄소와 같이 기공이 잘 발달된 전극소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연료전지의 시장이 뚜렷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지만 촉매가격 문제를 해결하면, 향후 거치형 및 모바일형 에너지 저장장치로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할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하고 있다.△탄소융합기술원은한국탄소융합기술원에서는 2009년부터 다양한 응용분야를 가지는 다공성 탄소재료, 즉 활성탄소의 개발을 진행해 왔다. 슈퍼커패시터 메이커인 비나텍, 하드카본 메이커인 애경유화, 그리고 활성탄소 메이커인 OCI 및 GS칼텍스와의 협력을 통해 국내 활성탄소 분야에서 기술적 네트워크를 공고히 하고 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또한 활성탄소 관련 학계와도 꾸준한 업무 협력을 통해 폭넓은 전문가풀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부분은 고가의 에너지저장용 활성탄소를 저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술개발이다. 특히 슈퍼커패시터 분야에서 미국 맥스웰사보다 기술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관련 기업들과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 기획
  • 이성원
  • 2014.01.15 23:02

[(3) 남원서 농민군 이끈 김홍기와 후손들] 동학 정신, 독립운동으로 계승·실천한 '뜨거운 핏줄'

모난 돌이 정 맞았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그랬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조선 왕실의 눈에 모난 돌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열강 사이에 끼어 통치력을 상실한 조선 왕실을 대신해 척왜척양(斥倭斥洋)을 기치로 봉기했다. 1894년 무장에서 기병한 농민군은 그해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잠시나마 그들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었다. 조선 왕실도 모난 돌의 반란에 잠시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끝내 일본군을 동원해 모난 돌을 진압했다. 모난 돌의 수난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침묵과 복종을 강요했다. 참다못한 이들의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퍼졌다. 다시 모난 돌들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것처럼 독립투사들을 잔인하게 걷어냈다. 이런 가운데서도 모난 돌이 되지 않기 위해 일본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 많았다. 해방이 되면서는 정부의 의견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모난 돌이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유신에 반대하면 정을 맞았다. 하지만 모난 돌의 생명력은 강했다. 정을 맞고 다시 숨죽이며 살기를 반복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모난 돌들이 등장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만큼이나 뜨거운 피를 가지고 억압에 맞서왔다. 1894년 남원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김홍기(金洪基) 대접주와 그의 후손(김종환-김학연-김동규)들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홍기 대접주의 증손인 김동규씨(70)가 구전과 사료 등을 통해 기억하는 동학과,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친 자료를 토대로 김홍기 일가의 삶을 재구성해봤다.△전라 좌도 동학혁명 이끈 김홍기김홍기(金洪基) 대접주의 자는 경홍(慶洪), 본관은 순천으로, 1856년 10월 9일 남원군 둔덕면 탑동(현 임실군 오수면 탑동)에서 태어났다.그는 1889년 10월 27일 장인인 최봉성으로부터 도를 받아 천도교에 입교, 전라 좌도(임실진안장수무주용담순창남원구례곡성옥과)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포교로 입교한 호수는 5000에 이르렀다고 한다(50~100호 1개 접다수 접을 관리하는 직책이 대접주) 당시 김홍기는 김영원(31운동 주동자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한영태(천도교 임실교구장, 31운동 주동자로 수감 중 옥중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 최승우(천도교 임실교구장, 남원 방아치 전투에 참여), 최유하, 최동필 등 6명과 의형제를 맺고 남원 지역에서 동학 포교에 전력을 다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임실의 최승우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하고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하에 동원령이 전달되었는데, 최승우는 즉시 남원에 거주하고 있던 매부 김홍기에게 연락해 임실과 남원이 합동해 기포했다. 또 그해 3월 백산봉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홍기는 최승우와 함께 임실에 무혈입성하여 민정을 다스렸고,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유태홍, 황내문, 이기동 등과 함께 남원에서 기포한 후, 곡성순창옥과구례장수진안용담 등을 석권했다. 김개남 장군의 남원 입성 이후, 그는 집강소를 통해 남원지역을 통치하고, 남원대회 때 여러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김개남이 북상한 후인 1894년 11월, 김홍기는 남원 토박이 동학교도인 황내문, 이규순, 이사명 등과 방아치에서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이때 민보군 이성흠에게 체포된 김홍기는 1895년 2월 14일 남원 장터에서 생을 마감했다. △끝나지 않은 동학혁명김홍기의 죽음은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시 16세였던 그의 큰 아들 김종문은 아버지의 옥살이를 지근거리에서 살폈다. 김종문은 엄동설한에도 아버지가 처형되기 전까지 노숙을 하며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역적으로 지목된 이의 아들에게 아무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먹을 것을 주고 숙박을 제공하고 싶어도 서슬파란 탄압 앞에 그리 할 용기를 낼 사람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결국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김종문은 3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김홍기의 집안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봄이면 광문을 열어 어려운 사람들과 먹을 것을 나눴다고 한다. 당시 조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남은 가족들은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보다 당장 생존의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희망은 있었다. 김홍기의 작은 아들 김종환(1891~1959)은 당시 3살이었다. 그는 어머니 등 유족들을 통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학에 동자만 꺼내도 잡혀가던 시절 그는 숨죽이며 미래를 준비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그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임실, 오수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받아 장성, 구례, 순천까지 전달했다. 들불처럼 퍼진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그는 28살 되던 해 집을 나서 6년이 훌쩍 지나서야 집이 아닌 남원 닭뫼마을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전주, 정읍, 김제 등을 전전하며 장돌뱅이로 위장하며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독립유공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하거나 수감 기록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그의 독립운동 활약상은 남원 지역 향토사학자들과 여러 사료들이 증명하고 있다. 동학의 정신은 김종환의 아들 김학연(1915~1974)이 그대로 이어 받았다. 그는 일본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행정서기 자리를 거부했다. 또 감시를 피해 남원에서 야학을 운영하며 조선인들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줬다. △동학의 정신 현대사회로 계승돼야삶이 말이 아니었다. 김동규씨는 지나온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동학혁명과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일가는 피폐한 삶을 살았다. 숨죽여 살며 제대로 된 학업을 잇지 못한 채 현대사에서 점점 배제돼갔다. 그에게는 당장 먹고 살 길이 없었다. 선조들의 동학정신을 계승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당시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 하지만 군대를 제대하고 그에게 닥친 현실은 가난이었다. 그의 아버지(김학연)의 몸이 약했기 때문에 동생 7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게 그의 의무였다. 그렇게 동학혁명의 정신은 삶의 무게 앞에 무릎을 꿇는 듯 했다. 하지만 김동규씨에게는 희망이 있다. 멸족 위기에 몰렸던 증조부 김홍기의 후손은 현재 66명까지 늘어났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들에게 집안의 역사를 들려줬다. 그는 선조들에 비해 한 게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꿋꿋이 살아남아 동학의 정신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김동규씨는 내가 한 것은 후손을 늘린 것뿐이다. 66명 동학의 후예들이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올곧고 바르게 살면 내 역할은 다한 것이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정엽
  • 2014.01.15 23:02

심덕섭 전북도 행정부지사 "새만금 이을 미래 전북발전 비전 수립·추진하겠다"

심덕섭 전북도 행정부지사의 발걸음이 연초부터 분주하다. 지난달 2일 취임과 함께 국회를 오가며 국가예산 확보에 땀을 흘렸고, 새해 들어서는 김완주 지사를 보좌하면서 지역의 새로운 비전과 추진 전략을 만들어 가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6일에는 도정 운영방향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4대 비전사업 등 전북도가 올해 새롭게 표방한 도정 핵심정책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완주 지사가 3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행정공백 없이 도정을 원활하게 연계하는 것도 심 부지사의 몫이 됐다.도청 집무실에서 심 부지사를 만나 새해 지역 현안사업 추진 방향과 포부를 들어봤다.- 어느덧 취임 한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첫 근무인데 먼저 소감은.“부지사로 취임하면서 기대되는 부분과 함께 약간은 두려운 측면도 있었습니다. 공직에 입문한 지 26년이 됐지만 지방행정 분야 업무는 처음이어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또 지사님의 지역발전 어젠다를 제대로 뒷받침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과 책임감이 컸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줬고,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 고향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또 보람도 클 것이라는 점에서 걱정을 떨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지역 현안사업을 차근차근 들여다보셨을텐데, 올해 중점을 두고 추진할 분야를 꼽는다면.“올해는 농생명 수도 건설과 한문화 창조 거점도시 조성, 중추도시권 중심의 권역별 발전전략 추진, 연기금 특화금융도시 조성 비전을 구체화 할 계획입니다. 또 그동안 추진해온 새만금과 성장동력산업, 그리고 동부권 발전 시책도 발굴·추진할 생각입니다. 사실 일부에서는 새만금 사업 외에 미래 지역발전을 이끌 큰 그림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새만금 사업은 지난해 새만금개발청 설립과 함께 이제 명실상부한 국가사업이 된 만큼 새로운 지역발전 비전을 수립해서 실현해야 합니다. 특히 농생명 수도 조성 청사진은 도민들이 공감하고 있고 지역 여건도 좋아 실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됩니다.”- 지난해 새만금개발청이 출범하면서 새만금 조기 개발에 대한 도민들의 기대가 높습니다. 안정적인 새만금 사업 추진을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하거나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새만금 사업은 지난 20년 동안 지지부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새만금개발청 설립을 계기로 사업에 탄력을 받을 시점입니다. 다행히 최근 투자유치에 큰 성과가 있었지만 안정적인 내부개발을 위해서는 공영개발 방식을 도입해야 합니다. 새만금 내부개발 초기 단계에서, 특히 명품복합도시의 경우 LH와 같은 공기업이 선도적으로 사업을 끌고나갈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례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다만, 공기업의 과도한 부채 문제가 새만금 투자와 개발에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역 낙후·소외에 대한 도민들의 상실감이 여전합니다.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도민들의 기대와 요구도 많은데 전북의 경쟁력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지.“우선 농생명산업을 들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 입주가 시작된 전북혁신도시에 농촌진흥청을 비롯한 농업 관련 연구기관이 집적되고,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와 김제 민간육종연구단지가 들어서면 농생명과학 분야에서 국내·외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동부권의 경우 관광자원이 풍부하지만 아직은 상품화가 미흡한 실정입니다. 동부권의 다양한 관광자원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하고 마케팅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 중앙부처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인맥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역 현안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중앙과의 소통도 중요한데요.“부지사는 직원들과 도지사 사이에서 막힌 부분을 뚫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사의 도정 방향을 직원들에게 전달하고, 또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전하면서 대내·외적인 소통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또 지역에서 해결하지 못한 특정 현안사업에 대해서는 중앙과의 통로 역할도 중요합니다. 다행히 중앙부처 실·국장들과 개인적 친분이 있어서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취임 일성으로 지역 현안사업과 함께 일자리 창출, 민생경제 살리기에 역량을 쏟겠다고 하셨는데.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일자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도정 차원에서 기회를 제공하고 또 만들어줘야 합니다. 우선 기업 투자유치와 각종 시책을 통해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고,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여성·장애인들을 배려해서 누구나 행복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또 시간선택제 근로에 대해서는 비정규직 양산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는데 정규직 일자리를 나누는 차원입니다.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늘리지 못하는 부분은 서로 일자리를 나눠서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도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난해 전북도정에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새만금사업을 전담하는 새만금개발청이 신설됐고, 도레이와 솔베이 등 내로라 하는 기업에서 새만금 투자를 확정했습니다. 또 유턴기업들도 상당수가 익산으로 들어와서 도민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올해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더 큰 사업들을 추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도민이 원하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겠습니다. 특히 전북이 낙후되고 소외돼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상태에서 그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고 있는 농생명 분야와 새만금·관광자원 등을 잘 활용해서 지역의 희망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패배의식을 떨치고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를 갖는 도민들의 의식변화도 요구됩니다.”●심덕섭 행정부지사는 조직관리 분야 권위, 고향에서는 첫 근무심덕섭(51) 전북도 행정부지사는 고창군 무장면 출신으로 고창고와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영국 버밍엄대에서 박사 학위(개발행정학)를 받았다.서울대 대학원 재학 중이던 지난 1986년 제30회 행정고시에 합격, 이듬해 공직에 입문했으며 주 캐나다 대사관 공사와 국가기록원 기록정책부장을 거쳐 안전행정부 정보화기획관·조직정책관·전자정부국장을 역임했다. 주로 중앙부처와 해외에서 공직생활을 했고, 고향에서의 근무는 이번이 처음이다. 심 부지사는 특히 안전행정부 조직기획과장과 조직정책관을 거치면서 정원 및 조직관리 분야의 권위자로 이름을 알렸다. 실제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총괄서기관으로 조직개편 업무를 맡았고, 안전행정부 조직정책관으로 근무하면서 박근혜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현 정부의 조직개편 실무작업을 총괄했다. 또 지난 2007년 외교부 핵심 직책인 기획심의관에 타 부처 공직자로는 처음으로 발탁돼 그동안 외교관들이 스스로 처리하지 못했던 조직·인력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수십명에 달하는 무보직 대사 문제 해결과 고위공무원단 편입, 인력증원을 통한 조직 역량 강화 등이 그의 공적으로 꼽힌다.중앙부처에 근무하면서도 고향에 애착을 갖고 지역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 2012년 ‘고창군민의 장’(애향장)을 수상했으며, 대통령 표창과 홍조근정훈장도 받았다.평소 등산을 즐긴다는 심 부지사는 온화한 성품에 합리적이고 꼼꼼한 일처리로 조직 내에서 신망이 두텁다.

  • 기획
  • 김종표
  • 2014.01.14 23:02

판소리꾼 성대 연구하는 홍기환 전북대 의전원 교수

방송사마다 서바이벌 오디션(survival audition) 프로그램이 대세다. 노래와 춤이 가세하더니 최근에는 디자인까지 그 영역도 다양해졌다. 서바이벌 오디션프로그램은 이제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아이콘이 된 듯하다. 다양한 오디션 프로그램 중에서도 가장 큰 인기는 역시 가수를 뽑는 프로그램이다. 방송사의 케이팝(K-pop) 오디션을 보았다. 출연자들의 재능과 끼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어찌됐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누구는 뽑히고 누구는 탈락한다. 자연히 심사위원들의 심사평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데, 심사위원 개인별 특성에 따라 쏟아내는 평이 또한 흥미롭다. 어떤 심사평은 유행어로 발전해공기반 소리반과 같은 용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명징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호흡으로 자연스럽게 내는 소리를 뜻한단다. 그런 소리를 갖고 있다고 칭찬을 받는 출연자는 드문 것을 보니 그렇게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부터 우리민족은 노래를 저렇게 잘했을까 궁금해졌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에게는 판소리와 같은 독창적인 노래가 있다. 판소리는 거칠고 쉰 듯 한 탁성의 결정체다. 맑고 깨끗한 소리를 중시하는 서양의 오페라 가수들이 지향하는 소리와 비교해보면 정 반대의 소리다. 그런데도 오페라를 일상에서 즐기는 유럽인들 중에는 이 탁하기 만한 판소리에 열광하는 관중이 적지 않다.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와 특성이 주목받는 이유다. 판소리꾼의 성대를 연구해온 전북대 의학전문대학원 이비인후과학교실 홍기환교수(58)를 만났다. 국내음성 질환의 명의(名醫)로 이름을 알린 홍 교수는 90년대 초반부터 소리꾼의 성대를 연구하기 시작해 20여 년 동안 판소리 성대의 비밀을 임상적으로 추적, 소리꾼들이 성대를 지키면서도 판소리를 잘 구사할 수 있는 수술법을 개발해냈다. 이 분야 최초의 연구이고 가장 돋보이는 성과다. 득음의 반열에 이른 명창부터 이제 소리를 배우는 신인들까지 뒤를 이어 홍교수를 찾는 이유는 하나다. 의학적인 잣대로만이 아니라 소리꾼들의 특성을 살리는 치료법으로 목소리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소리꾼들은 그의 치료법 덕분에 건강한 소리를 오래까지 유지하며 무대에 서고 있다. 우리 판소리의 건재를 그가 일구고 있는 셈이다. 그의 연구실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는 강의와도 같았다. 국악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에 놀랐고, 판소리와 소리꾼들에 대한 애정에 감동했다. 홍교수는 이 치료법의 스승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환자들이라고 말했다. 판소리의 가치를 지키려는 그의 열정이 답을 찾게 했을 것이다. -많이 바쁘시더군요. 치료할 환자가 그렇게 많습니까. 우선은 수술이 많아요. 갈수록 성대질환이 많아지니까요. 갑상선암과 후두암을 주로 수술하는데, 정해진 일정대로 생활하다보면 연구실에 제대로 앉아있을 시간이 없어요.-성대질환이 늘고 있다면 원인이 있을 텐데요.소리에 변화가 온다는 것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그렇다보니 목소리를 사용하는 빈도가 늘어나겠죠. 목소리를 사용하고 소리를 낼 때 긴장하는 것도 성대질환의 원인이 됩니다. 현대사회의 병폐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죠.-판소리꾼의 성대 치료법을 개발하셨는데 어떻게 이 분야를 연구하시게 되었습니까. 계기가 있었어요. 전공의 시절, 일본에서 후두음성을 공부하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목소리를 연구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활발한 활동을 하던 명창이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성대질환이었죠. 의학적 지식으로는 당연히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성대는 부드러워졌는데, 소리가 안 나오는 상태가 된 것이지요. 수술만 서너 번 했던 것 같은데, 성대는 손을 댈수록 굳는 것이어서 목소리는 더 안 좋아지는 악순환이 지속됐습니다. 이 치료법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성대질환은 치료됐는데 소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면 판소리꾼으로서는 치명적인 상황이었겠군요. 환자의 성대에 혹이 튀어나와 있으니 의학적으로는 수술이 정답이었어요. 과학적 개념으로 음성을 분석하면 혹을 떼어내면 소리가 좋아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거든요. 그 뒤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어 다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에는 혹을 떼지 않고 계속 굳어지는 성대를 조금이라도 이완시켜주는 치료를 했습니다. 그때 판소리로 생긴 성대질환은 서양의학적 지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그럼 소리꾼 환자들의 성대질환은 수술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셨나요. 결론은 그렇게 되었죠. 이런 경우 애를 먹었는데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 다르듯이, 질환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인식을 갖게 되니, 답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예를 들어 종교음악이 뿌리인 서양음악은 깨끗한 소리가 울려 퍼져야 좋은 소리가 되지만 판소리는 그 기저가 민중들의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이잖아요. 서양음악은 깨끗한 울림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이지만 판소리는 약간 탁하고 곰삭은 소리, 습해야 좋은 소리라고 합니다.-성대에 생기는 혹이 그런 좋은 소리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들은 득음을 하기 위해 피를 토하면서까지 성대를 훈련시킵니다. 고운 미성을 버리고 거친 소리를 얻기 위해 성대에 두툼한 근육을 만드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성대에 상처가 생기고 그것이 혹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말하자면 일반인들의 혹은 떼어야 할 질환이지만, 소리꾼들의 혹은 고행의 흔적이어서 오히려 그 혹을 잘 조절하면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대 수술은 아무리 예리한 칼로 한다해도 상처가 남기 마련인데 상처가 남으면 성대는 뻣뻣해지거든요. 말랑말랑한 유연성은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원칙적으로 판소리꾼은 수술을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수술을 꼭 해야만 할 경우 수술을 하고나서도 적절한 탁음을 유지시키면서 성대를 떨리게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결국은 음악적인 소리의 질을 지켜주는 치료법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확신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목에 관한 의학적 지식은 학회를 통해 얻을 수 있지만 판소리 성대와 같은 것은 의학적 정보와 지식이 전무했어요. 결국 임상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사실 의사들의 가장 큰 스승은 환자거든요.-임상실험은 역시 판소리꾼들이 대상이었을텐데요.판소리에 관한 음질 연구와 판소리를 하는 환자가 가진 성대의 특성을 연구했어요. 판소리꾼의 음성을 분석해 그들이 갖고 있는 성대의 특성에 따른 소리를 분류했지요. 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30여명이 연구를 도와주었습니다.-창극단원들로서는 단순히 임상을 돕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성대 특성을 가리는 기회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그래서 귀찮아하지 않고 좋아했어요.(웃음) 내시경 찍고 목소리를 녹음해 분석해 어느 소리가 잘나는지 분류했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치료법도 얻었지만, 우리 소리에 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고 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양과학의 지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동양적인 정서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주 의미 있는 연구였어요.-일반인들에게는 질환인데, 소리꾼들에게는 일종의 훈장(?) 같은 것이군요. 저는 용어도 달리 사용합니다. 의학적인 용어로는 성대결절 성대용종 성대낭종 등으로 분류되는데, 소리꾼들의 성대질환을 저는 병명으로 쓰지 말고 성대 비후증(성대가 커졌다는 뜻)으로 부르자고 합니다. 판소리꾼들이 스스로 내가 병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소리를 낼 때도 위축되어 자연스럽고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환자들에게 성대 비후증은 소리를 자꾸 하면 좀 더 두꺼워지고, 쉬면 얇아지는 것이니 잘 조절하면서 공부하라고 일러줍니다.-이제 판소리 성대 연구는 마무리 된 셈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직도 과제가 남아 있고,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소리 음질이나 성대 변화, 소리의 분석 등은 서양 의학 장비를 통해서 마무리 되었지만 판소리 발성법에 대한 분석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지난해부터 시작했는데 일반적인 서양발성법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아내는 작업이에요. 이를테면 소리꾼들이 소리를 낼 때, 역시 서양 음악가들처럼 같은 복식호흡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근본적으로는 다릅니다. 판소리는 단전호흡이라해서 같은 복식호흡인데도 더 깊은 내공이 필요해요. 이것을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찾기죠.-판소리 발성법이 그렇게 좀 더 과학적으로 분석되면 스승의 경험에 의존한 도제식 교육으로 소리를 공부해온 젊은 세대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옛 명창들은 소리를 낼 때 하늘에 띄우라거나 얼굴에 소리를 내라는 등의 표현을 썼거든요. 그것이 결국은 릴렉스 하라는 것이고 복식호흡을 하라는 의미거든요. 발성법을 통해 소리를 내는 방식과 호흡법을 알려줄 수 있는 의학적 자문이 가능해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목소리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공한 분야가 이비인후과고 그중에서도 목 분야가 전공인데, 이비인후과의 모든 것이 목소리와 연관되어 있으니 관심을 갖게 된 것이고 우리 지역 특성상 판소리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판소리를 좀 더 깊게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 일상은 암환자 수술이에요.-갑상선암도 그렇고 후두암도 그렇고 늘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요. 갑상선암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후두암의 가장 큰 원인은 흡연입니다. 후두암은 패턴이 비슷해요. 목소리가 변하고 3주 이상 증상이 계속되면 무조건 병원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후두암은 다행히 같은 암이라도 다른 암에 비해 예후가 좋습니다. 증상이 먼저 나타나거든요. 조기암으로 오는 것인데, 그 정도는 방사선 치료도 하지 않고 레이저로 처치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변하지만 무리 없이 회복도 가능합니다. -후두암이 진전되어 목소리를 잃은 환자들을 위한 재활훈련도 일찍 시작하셨지요. 후두 전체를 떼어내면 말을 못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관지에 구멍(누공)을 뚫어서 목소리 재활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을 식도발성이라고 하는데, 지난 1991년에 전북대 의과대학에 식도발성교실을 열었습니다. 당시 서울 대한적십자사에서 수술 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실을 처음 만들어 재활을 시켰는데, 호남지역에서는 우리 대학이 처음 만들었어요. 지금은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목소리를 찾는 성공률은 60% 정도 되죠.-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인데, 전문가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지나요. 교육을 받고 목소리를 찾은 환자들이 다시 새로운 환자들에게 교육을 해주는 방식입니다. 1991년에 동경대 음이비인후과 음성언어연구소에서 공부했는데, 당시 대학 안에 아시아식도발성센터가 있었어요. 아시아 전역에서 후두암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초빙해 교육을 시키고 다시 돌아가 발성법을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했습니다.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센터가 발간한 식도 발성법 책이 있었는데 그것을 우선 번역해 우리 환자들에게 읽게 하고, 환자 두 명을 보내 동경대에서 식도발성 교육을 받게 했어요. 그 분들이 돌아와 식도발성교실 교육을 시작했죠. 재활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일종의 동호인 모임입니다.-목소리가 중요해진 시대입니다. 매체의 발전이 그런 시대를 몰고 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요. 사회적인 목소리와 생리적인 목소리가 있겠죠. 생리적인 목소리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를 매혹적으로 유혹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의 경우 남성의 목소리는 저음, 여성은 고음에 비성이 섞인 소리를 말합니다. 콧소리 내는 여자 연예인들이 있지요. 그런 소리예요.(웃음) 한때 미국 영화배우인 험프리보가트의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를 따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험프리보가트 신드롬이란 말이 생기기도 했었죠. 사회적인 목소리는 개인적인 활동의 영역, 이를테면 직업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타고난 소리를 억지로 교정하는 것보다는 건강한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심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홍기환 교수는 세계 첫 '타액선질환 수술법' 개발, 명의로 주목홍기환교수는 전주 토박이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꽤 공부를 잘했다. 신흥고를 졸업, 교사를 꿈꾸었지만, 진학하고 싶은 대학의 사범대에는 못 미치는 성적이어서 전주에 주저앉았다. 감히(?)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지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북대 의대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의지대로라면 내과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밀려서 이비인후과로 갔다. 당시 전북대 이비인후과는 초창기의 열악한 환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지만 의지를 갖고 공부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한 선배의 이비인후과의 가능성을 향한 응원이 힘이 됐다. 이비인후과 두경부 분야는 우리나라 전체로도 미개척 분야였지만, 두경부 암 치료의 기반을 다진 전주예수병원의 의료진과 시설이 그의 연구 작업에 자극을 주었다. 이비인후과에 들어온 후로 그의 관심은 목과 목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만큼 연구에 집중했지만 경험이 많지 않아 늘 자신의 치료법에 의문이 들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다못해 가장 흔한 편도 수술을 하면서도 그런 의문감과 열등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확신을 갖고 싶어 일찌감치 유학을 떠났다. 1991년 동경대 연구생활과 미국 UCLA의 유학생활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80년대 중반 전공의 시절, 판소리꾼의 성대 치료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후 판소리 성대에 관한 연구는 그에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판소리 발성법 연구 성과도 판소리 계승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가 개발한 적지 않은 수술법은 대부분 화제를 몰고 왔다. 세계최초로 개발한 타액선질환 수술법이나 성대마비 환자들의 정상목소리를 찾게 하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APM 갑상연골성형술도 그중 하나다. 1998년 한 일간지에서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명의로 선정된 이후 이비인후과 명의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활동 덕분에 전북대 이비인후과는 두경부암의 메카로 꼽힌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환자들에게 소리를 찾아주는 식도발성교실도 그가 이룬 결실이다. 지역의 환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의사로서 사회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온 그는 스스로 그 정도까지는 해냈다고 평가한다. 대한음성언어의학회장을 지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4.01.09 23:02

[2. 존스미디어(주)] 독보적 코팅기술, 디지털 프린팅 소재 분야 '히든 챔피언'

백화점이나 지하철, 각종 의류 매장, 지하철 역 등에서 대형 배경조명 광고에 사용되는 고해상도 실사 출력 필름(backlit film)을 주로 생산해 온 존스미디어(주).군산 오식도동에 둥지를 튼 존스미디어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디지털 출력 잉크젯과 각종 미디어를 이용한 디지털 프린팅 출력 소재 생산을 시작으로 각종 인테리어 소재와 고기능성 필름 분야로 영역을 넓히며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인간중심 창조적 경영 원칙존스미디어는 지난 2011년 법인을 설립해 이듬해까지 45억원을 투자해 생산기반 구축을 마친 신생 기업이다.하지만 독보적인 기술력을 앞세워 지난해 목표 70억원을 훌쩍 뛰어넘는 85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코팅기술을 기반으로 한 첨단 디지털 소재 분야의 강자로 떠올랐다.창업 초기 합성지, 패트지, 인화지 등을 구매한 후 정밀 코팅해 각종 디지털 기기로 출력할 수 있는 소재를 생산해 온 기존 사업 분야를 응용해 지난해부터 디지털 글라스와 대리석과 장식용 돌 등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인테리어 소재도 생산하고 있다.또 유리에 덧댈 수 있는 안전필름인 윈도우 그래픽 필름을 개발해 자체 디자인 한 디지털글라스 윈도우시리즈 민트를 생산하고 있으며, 한지 벽지를 자유자재로 디자인해 가며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패턴의 디지털 벽지들을 생산하고 있다.존스미디어 사옥에 들어서면 자사 생산 소재를 이용한 다양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마치 작품 전시회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전시돼 있다.인간중심과 기술중심, 창조적 경영을 원칙으로 직원 12명으로 출발한 존스미디어는 제품 홍보에 시각적 감각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디자인실을 갖추고 제품은 물론, 포장지에서부터 각종 비품에 이르기까지 직접 디자인하고 있다.이를 위해 전문 디자이너 3명을 고용하는 등 지난해 중견기업 수준으로 고용 인원을 33명으로 늘렸으며,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는 올해는 20명을 추가 고용할 계획이다.△창업 이듬해 닥친 위기창업 1년여만인 2012년 8월 당시 공장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던 존스미디어는 하룻밤 새 400여㎜의 폭우가 쏟아지며 공장 전체가 물에 잠기는 수해를 입었다.이제 막 걸음마 단계이던 회사는 누가 봐도 회복 불능 상태였다.하지만 수해 피해는 직원들을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 채 물러설 수는 없다는 오기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고, 전 직원이 밤낮없이 일주일만에 복구해 내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이를 통해 가능성을 발견한 송종률 대표는 자가 공장을 마련하기로 하고 중소기업 지원 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자금을 지원받아 오식도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평소 한 분야를 좁고 깊게 파기 위해서는 사람이 곧 경쟁력이 될 수 밖에 없다며 인간중심 경영을 강조해 온 송 대표에게 이때부터 직원들은 동반자가 돼 이듬해 존스미디어를 정상궤도에 올려 놓았다.직원들은 첨단 소재를 생산하는 회사인 만큼, 조그마한 티끌 하나라도 품질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자체 관리 항목까지 만들었다.△디지털 소재 분야 글로벌 히든챔피언 목표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는 회사, 즉 세계적인 히든챔피언을 목표로 하고 있는 존스미디어는 지난해 수출시장과 내수시장 매출 비율이 5대5를 기록했다.올해는 지난해보다 3배 가까운 250억원 매출을 목표로 수출과 내수 비율을 7대3으로 설정하는 등 글로벌 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으로 80억원을 추가 투자하기로 군산시와 MOU를 체결했다.이 분야에서 매출 3000억원 규모이면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분석으로 2017년 3000억원 매출과 경상이익 10%를 목표로 지난해부터 5개년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정밀코팅분야에서 기술이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개발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마인드로 자체 미디어 실험실과 UV실험실 등을 갖추고 지난해 매출액의 3.5%를 R&D에 투자했으며, 올해부터 5%로 끌어올릴 계획이다.연간 생산량도 500억원 규모로 늘리기 위해 회사 규모를 현재 12호기를 갖춘 2970㎡ 규모의 제1공장에 추가로 34호기를 갖춘 2970㎡규모의 제2공장 확장 공사를 진행 중으로 오는 3월이면 완공돼 제품 생산을 배가하게 된다. 또 물류와 연구자재 보관 등을 위해 인근 9900㎡ 규모의 기존 공장 건물 매입 계약이 성사돼 올해 총 1만6500㎡ 규모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본격적인 시장 공략에 나선다.또 내년까지 BLU반사필름을 양산하고 해외영업망 구축을 완료하는 등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할 계획이다.이어 2017년까지 각종 인테리어 소재와 고기능성 필름 생산에 이어 TV모니터 코팅 필름, 전도성 코팅 필름 등 전자소재 분야에도 진출하는 등 정밀코팅 산업 분야에서 첨단제품으로 글로벌 히든챔피언 등극을 목표로 하고 있다.이를 위해 지난해 잉크젯 미디어 출력소재 93%, 인테리어 소재 7%였던 생산품목 비율도 올해부터는 잉크젯 출력소재 63%, 인테리어 소재 14%, 전자소재 23%로 재구성하고, 매년 전자소재 생산비율을 3% 이상씩 늘려 2017년 30% 중반대로 늘려나갈 예정이다.● 송종률 대표이사는 출력 소재업계 현장 경험 18년 축적 '학사고시로 대학 마친 '독학의 달인'디지털 출력 소재 업계에서 존스미디어 송종률(40) 대표의 기술력은 타사에서 자문을 구해오는 등 독보적인 존재로 통한다.지난 18년 동안 아나로그 용지에서부터 디지털 페이퍼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출력 소재의 변천을 직접 체험하며 전문성을 확보해 왔다.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독학으로 경영회계학을 전공해 학사고시로 대학과정까지 마친 송 대표는 제지회사와 인연을 맺으면서 각종 코팅용지에 흥미를 갖게 됐다.궁금하면 끝까지 파보는 성격의 송 대표는 처음에는 이론을 혼자 공부하며 떠듬떠듬 알아가기 시작했지만 현장 경험이 날로 쌓이며 점점 첨단소재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 마침내 경영학도에서 R&D분야로 진출하게 됐다.그는 디자인이 마케팅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깨닫고 디자인은 곧 가치이다는 신념으로 디자인 역량을 강화해 마케팅 전반에 배치하는 등 디자인으로 상품의 이미지를 극대화 하고 있다.헤르만 지몬의 저서 히든챔피언을 회사 경영의 교과서로 삼고있는 송종률 대표는 무조건 규모가 큰 회사보다는 자신만의 전문분야에서 히든챔피언으로 성과를 이룬 강소기업들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며 이들 기업의 전략과 노하우를 익히고 배우는 풍토가 조성되고,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 낚시법을 가르쳐 주는 식의 인프라가 구성될 수 있도록 투자와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2016년 주식시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는 송 대표는 도레이사 같은 세계적 첨단소재 기업이 새만금에 투자하기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로, 새만금이 철구조물 플랜트 위주에서 내용이 알찬 소재 산업단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며 새만금에 들어오는 도레이 시스템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분야라 연관성은 없지만, 추후 베이스 필름 생산기반이 증설된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4.01.09 23:02

신성장동력 탄소 ② 탄소섬유 복합재 적용 전기자동차

탄소섬유는 1880년에 에디슨이 대나무 섬유를 탄화하여 전구의 필라멘트에 사용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무려 100여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후 1959년에 미국의 유니언 카바이드(Union Carbide)사가 레이온(Rayon)으로부터 초기 탄소섬유를 개발했고, 1964년에는 일본과 영국에서 연속상(continuous phase) 탄소섬유 개발에 성공하였다. 탄소섬유가 산업적으로 이용된 것은 1971년에 일본의 도레이(Toray)사가 폴리 아크릴 섬유(Polyacrylonitrile, PAN)로부터 고강도, 고탄성 구조용 재료에 적합한 탄소섬유 양산에 성공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주로 항공기나 스포츠카, 스포츠 레저 용품 등 소량 고부가가치 제품에만 적용되고 있다. 초고강도 수퍼소재로서의 장점이 있지만, 대량생산의 한계가 있고 가격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양산기술의 발달과 수요 확장하지만, 최근 들어 탄소섬유 양산 기술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가격이 낮아지면서 탄소섬유의 시장이 날로 확장되고 있는 추세다. 항공기 산업 분야 이외에도 일반 승용차나 건축재, 풍력발전기, IT 기기 등으로 사용처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 환경오염이 없는 청정에너지인 풍력발전의 경우, 1기당 발전량이 5MW급으로 높아지면서 블레이드(바람개비 날개)의 길이만도 약 50m에 이르기 때문에 기존의 유리섬유 복합재 대신에 훨씬 가볍고 튼튼한 탄소섬유 복합재를 적용하고 있다.독일탄소섬유협회는 2012년 기준으로 4만2000t이었던 전 세계 탄소섬유 수요량이 오는 2020년에는 13만t으로 급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탄소섬유와 항공기항공사 운영 원가 분석에서 항공유(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30%대에 이른다. 따라서 비행기가 경량화 되면 그만큼 연비가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실을 수 있어서 경제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항공사들은 연비 향상을 위해 기존의 알루미늄 대신에 탄소섬유 복합소재로 몸체를 대체하고 있다. 보잉 B787의 경우, 항공기 동체와 날개의 50% 가량이 탄소섬유 복합소재로 만들어진다. 에어버스도 탄소섬유 복합소재 비중을 25%로 높인 A380을 생산하고 있다.△탄소섬유와 자동차탄소섬유의 시장 잠재력이 가장 큰 분야 중 하나는 자동차 산업이다.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대기환경 오염에 대한 우려가 높은 중국에서 먼저 나섰다. 집중적인 예산투자와 연구개발로 신에너지 자동차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1회 충전으로 200km이상 달릴 수 있는 전기자동차에 대해서는 차량가격의 50%, 150km까지 달릴 수 있는 전기자동차에 대해서는 30%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1회 충전으로 더 멀리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동차의 무게를 줄이는 일이다. 그런데 차체에 탄소섬유 복합소재를 사용하면 전체 무게를 약 30% 정도 가볍게 만들 수 있다. 앞으로 탄소섬유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실, 탄소섬유복합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동차산업에 활용돼왔다. 포드(Ford)사는 1978년에 도어 패널, 추진축, 후드에 탄소섬유복합재를 적용했다. 그 뒤로 페라리(Ferrari) Enzo, 람보르기니(Lamborghini), 포르쉐(Prosche), 폭스바겐, 벤츠, 렉서스, 도요타, BMW 등에서도 탄소섬유복합재를 적용한 다양한 모델들을 출시하고 있다. 특히 람보르기니는 아벤타도르 LP700-4에 자체적으로 개발한 최신 탄소섬유복합재 싱글 셀 모노코크 바디(Single Cell Monocoke Body)를 최초로 적용하여, 차체의 무게는 혁신적으로 줄이고 강성 및 안정성은 극대화 했다. △람보르기니의 싱글 셀 모노코크싱글 셀 모노코크 바디는 F1 경주용의 차체 제작에 사용되는 방식으로서, 강철이나 알루미늄 등을 접합해서 차대와 차체를 결합시키는 기존의 모노코크 셀과는 달리 접합 과정이 없는 하나의 단일 셀로 제작된다. 아벤타도르에 적용된 싱글 셀 모노코크 바디의 무게는 147.5kg에 불과하며, 단일 셀 모노코크이기 때문에 차체 비틀림 강성은 3만5000Nm/deg. 수준으로 매우 견고하다.△BMW의 웨트 카본(Wet Carbon) 전기자동차인 BMW i3에 적용되는 탄소섬유복합재는 기존의 F1 머신의 모노코크 바디 등에 적용되는 탄소섬유 및 수지 적측-고온고압 가마에서 굽기-가공 방식의 드라이 카본(Dry carbon) 공정과는 달리 웨트 카본(Wet Carbon)이라고 불리는 공법이다. 액상수지를 고온금형에 채우면 순식간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양산이 가능하다. 웨트카본 공정에 의한 BMW i3의 바디섹션은 강철에 비해 무게가 약 50% 가벼워 전기자동차에 추가로 필요한 배터리팩의 중량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즉, BMW i3의 중량은 배터리팩을 포함하고도 1195kg으로, 기존 내연기관 승용차의 평균 중량 약 1500kg에 비해 훨씬 가볍다.△앞으로의 전망람보르기니의 아벤타도르와 같은 수퍼카는 아직도 먼 나라 이야기로만 들린다. 그러나 탄소섬유복합재가 자동차 산업에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지는 탄소섬유 양산을 위한 자동화기술과 생산속도, 외관의 아름다움, 유지보수 비용 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은 생산 공정 그 자체에 해답이 있다. 생산공정을 살펴보면, 먼저 섬세하게 직조된 탄소섬유 프리프레그를 재단하든 정확한 사이즈로 자르고, 여기에 부분적으로 액화된 파우더를 적용해 부분별로 예비성형체를 만든다. 부분별로 만들어진 이 예비성형체들을 고온 및 액상수지 사출이 가능한 대형 금형에 넣고, 액상수지를 주입한 후 가열하면 짧은 시간 내에 경화되면서 작은 부분의 예비성형체들이 접합되어 큰 바디 부품으로 완성된다. 특히, 사이드 프레임은 9개의 작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충돌 등에 의한 차량 수리 때에 해당 부분만 교환할 수 있기 때문에 차량의 유지보수 비용 측면에서도 매우 유리하다. 게다가 이러한 생산과정은 로봇을 활용한 자동화 시스템으로 되어 기존 탄소섬유복합재의 적용 한계도 극복되었다.앞으로 10년이 지나면 탄소섬유가 가장 많이 적용될 분야는 자동차 산업이다. 자동차의 연비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경량화가 필수다. 현재 탄소섬유의 가격은 철강에 비해 6배쯤 비싸지만 2030년쯤 되면 2배 정도로 낮아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탄소섬유를 적용하는 사업도 크게 성장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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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원
  • 2014.01.08 23:02

갑오년 미완의 혁명, 세상을 깨우다 ② 무명의 동학농민군, 그리고 후손

올해가 갑오년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60년이 두 번, 30년이 네 번 지났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면 네 세대가 지나간 셈이다. 그저 먼 역사속의 일이라고 여길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되살아온다.△무명의 사상자 30만명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이 혹자는 300만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죽거나 다친 사람이 30만이라고 한다. 당시 인구를 대략 1000만으로 추산해 보면 이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동학농민혁명 하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을 떠올린다. 물론 이들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역할이 컸고, 이들이 있었기에 조직적인 활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아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농민군들이 있었다. 이들은 과연 어떤 이들이었을까? 2004년 3월 5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이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여기서 유족들로부터 신청을 받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을 등록하여 국가차원의 명예회복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들의 삶과 죽음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밝혀졌다. △최후 순간까지 대를 이으려 했던 부정(父情)필자가 심사담당관으로 참여하면서 가장 안타깝고 가슴 아팠던 것이 최후의 순간에 가족을 생각했던 동학농민군들의 선택이었다. 사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또 다른 선택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남겨진 가족,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나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남겨진 가족을 위해 마지막 순간에 직접 생을 포기하는 눈물겨운 사례가 많았다. 전라도 강진의 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 나섰다. 형 대신 자기가 처형당하겠다고 하였다. 장손인 형이 살아남아야 하며 자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는 형 대신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강씨 집안 족보에 죽은 동생 이름 밑에는 더 이상 후손이 기록되지 못하였다. 지금은 충청도지만 당시 전라도에 속했던 금산에 사는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나섰다. 아버지는 아들이 3대 독자이므로 자신을 대신 잡아가라고 하였다. 결국 아버지가 대신 죽고 아들은 살아남았다. 만약 그때 그의 아버지가 대신 죽지 않았다면 그 후손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겨진 후손들은 그 아버지의 마음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충청도 태안의 가 아무개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 이제 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의 손가락 하나 잘라 주고 갔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것으로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었다. 결국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집 밖에서 나는 바람소리에도 문밖을 서성였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였다. △목불인견의 처형 순간동학농민군들의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 처참했다.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른바 분살(焚殺)이라는 형태로 처형되었다. 논가에 말뚝을 세우고 농민군에게 유지기(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삿갓과 비슷함)를 씌운 다음, 말뚝에 묶고 말뚝 아래에는 볏단을 놓고 불을 질러 처형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형방식은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횡횡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충청도 태안에서는 동학농민군을 처형하는데 작두가 이용되었다. 토성산에서 수많은 농민군들이 작두로 처형되어 그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1894년 조선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한 경상도 예천에서는 동학농민군들이 체포되어 생매장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살아 남은 자들의 몸부림살아남은 사람들은 시신만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야했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자 책무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에 관여할 수는 없어도 그 시신을 통해 후손들에게 지나간 시간을 일깨워주는 것이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충청도 옥천의 강 아무개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귀신당 계곡에서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귀신당 계곡으로 가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여 둘러메고 와서 묘를 썼다고 한다. 강씨의 아내는 체구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전라도 함평의 전 아무개는 나주지역 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그의 아내는 수백구의 시신 중에 귀에 이상이 있는 남편의 시신을 찾아 수습하여 머리에 이고 왔다고 한다. 또 전라도 장흥의 이 아무개는 장흥지역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후손들은 시신을 찾지 못하자 밥그릇을 넣고 가묘를 만들고 집을 나간 날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전라도 무안의 박 아무개는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무안 현경에 피신해 있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신고하여 일본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된 후 시신을 찾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한 구덩이에서 불에 타 죽었기 때문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으나 평소에 팔에 끼고 다니던 토시를 보고 찾아 매장하였다고 한다.△피신, 그 후의 삶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겨우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많은 농민군들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충청도 농민군들은 천안 광덕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기도 했다. 전라도 임실남원지역의 농민군들은 순창 회문산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그밖에 집으로 돌아온 농민군들은 이사를 가거나 갖은 고초를 당하며 살았다. 동학농민군이었다는 게 죄인이었으며 멍에였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동학농민군을 보는 사회의 시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학농민군들은 계속 감시의 대상이었다. 동학농민군들은 그들의 삶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 분연히 일어섰다. 적어도 후손들에게 바꾸어진 삶의 틀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후손들은 일제강점기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굴레로 고통 받았다. 삶은 피폐해졌고 삶의 기반은 이미 무너져버렸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그러한 양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번 무너진 기반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학농민군들, 그리고 부모와 형제를 잃고 고난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온 후손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이 갖는 의무이기도 하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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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8 23:02

26. 고창초 - 군 단위 학급수 전국 최다…'농촌학교의 희망' 우뚝

전북의 농촌학교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한창 일할 젊은 세대들이 농촌을 떠나고 70~80대 노인들만 남았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농촌 위기의 중심에는 고령화에 따른 농촌 공동화가 자리잡고 있다. 고창초등학교(교장 유병회)는 이 위기의 중심에서 유일하게 비껴나 있다. 개교 101주년을 맞은 고창초는 46학급 1179명으로 전국 군 단위 초등학교 중 거의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유병회 교장은 김용택 시인의 촌아 울지마를 소개하면서 사람들이/다들 도시로/이사를 가니까/촌은 쓸쓸하다/그러면 촌은 운다/촌아 울지마라는 내용을 사람들이/다들 농촌으로/돌아오니까/촌은 외롭지 않다/그러면 촌은 행복하다/촌이 웃는다로 바꾸고 싶다고 했다. 고창초의 희망은 이 시에 응축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 군 단위 최다 학급수 고창 학부모들의 교육열은 유별나기로 소문났다. 이 일대 서당은 근대 초등교육을 이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왔다. 초대 김도의 훈장이 이끈 스무재서당은 고창은 물론 전남 영광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전북문화재 29호로 지정된 도산서당(서뜸서당)은 고창초와 통폐합된 도산초 개교를 도와 일부 수업을 대신했다. 그럼에도 고창초 졸업생들은 일본의 황국식민화 정책의 영향으로 우리말 사용 금지와 창씨개명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졸업생 오종문씨(36회)는 여섯 살에 처음 학교 갔을 때 일본어 이름을 쓰도록 해 친구 이름 외우기가 무척 힘들었다면서 일본 군가를 부르며 두 줄로 맞춰 등교했고,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신사 참배하는 건 특히 괴로웠다고 전했다. 학생수만 놓고 볼 때 고창초 전성기는 1960년대다. 1960년 전교생이 무려 2863명이나 됐다. 1960년 월산분교를 고창동국민학교로 분리시켰고, 1961년 고창남국민학교를 신설했던 것도 고창초 역할이 컸다. 졸업생 류택주씨(37회)는 1949년 화재로 교실이 무너지면서 돌과 흙을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유리창도 없는 교실에서 흙바닥에 헌 가마니를 깔고 교과서도 부족한 상황에서 몽당연필로 공부하던 생각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창초가 학생수 감축이란 농촌학교의 아픔을 아예 겪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80년 38개 학급에서 1994년 32개 학급으로 학생수가 급감한 반면 이후 2004년 51개 학급으로 정점을 찍었다. 귀촌귀향단지인 월곡택지가 구축되고 내고향 학교 보내기 운동이 확대되면서 학생수가 급증했다고 보는 분석도 있지만, 유병회 교장은 도시로 나와 아파트에서 살면서 출퇴근하며 농사짓는 게 보편화됐다면서 학부모들이 더 큰 학교로 보내고자 하는 열망이 반영된 것 아니겠느냐고 다르게 분석했다. △ 총동문회 없었어도 분야별 파워인맥 자랑2010년이 되어서야 총동문회가 결성된 고창초는 그럼에도 정계에서 파워인맥을 자랑해왔다. 조병채 총동문회 회장(37회)은 그런 시각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 아니겠느냐고 했다. 워낙 학생수가 많다 보니 지도자가 더 배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해석. 실제로 정계 외에도 행정계교육계 등 두각을 보인 인재들이 배출 돼 드러난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설명이다.총동문회가 파악한 정계 졸업생은 무려 6명. 국회의원 뱃지를 단 유 진(2회), 홍순희(5회)에 이어 배상기 도의회 의장(18회)이 바통을 넘겨 받았다. 국회의원을 지냈던 임종인(54회)과 현역 국회의원인 홍영표(55회) 안규백(56회)도 고창초에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주역들이다. 전북교육감을 맡았던 염규윤(31회)을 필두로 전남대병원장을 지낸 장인원(26회)과 조선대 부총장을 했던 조병엽(34회)은 교육계 인사로 꼽힌다. 행정언론 쪽도 두터운 인맥을 자랑한다. 김경태 전 관세청장(36회), 조강환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39회), 정학수 전 농림부차관(52회), 졸업연도를 확인할 수 없는 진진영 전 조달청장은 두각을 보인 선후배다. 지난해 고창백년사 출간을 이끈 박우정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 집행위원장(44회)은 동기회 활동이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 선배의 자녀들이 학교의 행사를 위해 선뜻 기부하는 경우를 보면서 모교사랑, 동문사랑이 고향사랑이고 지역사랑임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 창의력 인성 교육 방점유 교장이 생각하는 창의력이란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힘이다. 다양한 체험을 통해 창의력이 발휘된다고 본 유 교장의 철학으로 학생들은 음악무용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을 휩쓰는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33회 전북교육감배 태권도대회에서 학년체급별 1~2위 등, 제16회 전북교육감배 수영대회에서 1위(100m) 등, 제6회 전북교육감기 에어로빅 체조대회 힙합단체 1위 등 분야별 수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고창초의 특별함은 전북에서 유일하게 자기수업분석실이 있다는 데 있다. 자기수업분석실이란 수업을 녹화해 관찰분석이 가능한 시스템이다. 그 결과 교사학생들과 수업을 개선하기 위한 의견을 교환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분위기가 정착 되면서 수준높은 공교육을 제공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유 교장은 학교 오는 것이 즐겁고 다니고픈 학교가 되려면 질 높은 수업을 통해 배움과 성장이 일어나야 한다면서 학부모에게 참여와 소통의 길을 열어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도록 하는 게 관건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서산대사의 싯구를 인용한 유 교장은 앞으로도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옳은 길을 향해 걸어가는 교육이 될 수 있도록 관심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 기획
  • 이화정
  • 2014.01.07 23:02

임실 이전 육군 35사단 정한기 사단장

전북 향토사단인 육군 35사단이 58년간의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임실시대를 열었다. 전북도민들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하며 전북을 지켜온 육군 35사단은 전주에 주둔하면서 전북의 각종 지역개발사업에 참여했고, 재난피해 복구 등 대민지원에 나섰으며, 지역경제발전에도 기여해왔다. 완벽한 해안경계작전 등을 통해 도민들의 삶의 터전과 행복을 위해 ‘전라북도의 방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갑오년 새해부터 임실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육군 35사단 정한기 사단장(소장)을 만나 부대이전 경과와 의미, 경제적 효과,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35사단의 역사, 과거를 남기고 임실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동안 향토사단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35사단은 지난 58년 동안 200만 전북도민들과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한 ‘동반자’이며, ‘전라북도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다해왔습니다. 먼저 완벽한 해안경계작전을 통해 101차례에 걸친 대간첩작전을 펼쳤으며, 617명의 밀입국자를 검거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또 각종 재난에 따른 피해복구 등 대민지원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지난 2012년 태풍 ‘볼라벤’ 피해 때 현역 및 예비군 5600여명이 낙과 줍기, 벼 세우기, 비닐하우스 복구 작업 등을 펼쳤으며, 2011년 구제역이 발생했을 때에는 연인원 600여명을 지원했습니다. 2010년 정읍 폭설, 2008년 조류독감, 1993년 부안 위도 훼리호 침몰 사건, 1987년 폭우 등 피해복구 대민지원 실시했습니다. 지난해 7월에는 민·관·군·경 통합훈련인 화랑훈련을 우수하게 평가받아 최우수 부대로 선정되는 등 민·관·군·경 통합방위태세 확립에도 앞장섰습니다.”-우리나라에서 사단급 부대 이전은 1994년 50사단이 대구 달서구 용산동에서 북구 학정동으로 이전한 뒤 20년 만에 처음입니다. 35사단 이전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습니까.“사단사령부는 도청소재지에 있어야하지만 전주시의 북부권 개발과 임실군의 지역경제 활성화, 나아가 전라북도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35사단 장병들도 임실로 이전한 것을 58년간의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임실에서 새롭게 도약하는 좋은 계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 이전한 지역은 전주시 송천동에 비해 부지가 다섯 배가 넓고, 현대화된 병영시설과 훈련장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대이전은 장병들이 이전보다 편안하게 생활하는 가운데 훈련에 전념할 수 있어 전투형 강군 육성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좋은 시설을 잘 운용해 최적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러나 아직 항공대 이전 문제가 남아있습니다.“항공대 이전 문제가 잘 마무리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주 북부권 개발이 성공적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항공대 이전은 필수입니다. 입장차이가 클수록 소통이 필요합니다. 전북지역 전체의 대승적인 마인드를 갖고, 전주와 임실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봅니다.”-부대가 이전하면서 임실지역에 발생되는 경제적 효과가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35사단의 임실이전은 임실군이 인구 3만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단 간부들과 군인가족들이 주민등록지를 임실로 옮김에 따라 주민세와 지방세 등 임실군의 재정수입 증가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부대 병사와 훈련병을 면회 오는 분들이 연간 6만5000여명으로 예상되며, 이분들이 소비하는 것과 군인가족이 물품을 구입하는 것, 그리고 부대에서 예산으로 지출하는 것들을 더하면 연간 600억원가량으로 추정돼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니다.”-앞으로 임실군민과의 화합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면.“사단은 우선적으로 임실군민과의 화합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예정입니다. 지난 12월 19일에 임실지역 각계 대표자 140여명을 부대로 초청해 ‘부대이전 설명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달 25일에는 임실군민회관에서 임실군민과 부대 장병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대이전 축하 민·군 화합 콘서트’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부대 간부들이 한 달에 한두 번 임실읍내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할 계획이며, 명절 전 임실 전통시장 장보기 행사, 신병수료행사 때 ‘임실특산품 판매코너’를 마련해 임실특산물을 홍보할 예정입니다. 이밖에 부대를 임실주민들에게 개방해사단과 지역주민이 이웃사촌처럼 친하게 지내며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로 발전해 가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1983년 임관해 30여년 동안 군 생활을 하셨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첫 번째는 대령 시절 육군본부에 근무하면서 예산을 절감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1년 동안 150억원의 예산을 절감했습니다. 두 번째는 북한의 연평도 도발 사건 때 야전 포병 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상포병사격을 지원했던 것입니다. 생명에 위협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지원을 해준 전역을 앞둔 병사들이 무척 자랑스러웠습니다. 마지막으로 35사단 이전입니다. 보름에 걸친 부대 이전을 했는데 아무런 사고 없이 임실로 이동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35사단의 임실 이전은 군 생활을 마무리한 뒤에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58년간 정든 전주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35사단은 58년간 60만 전주시민들과 함께 동고동락 해왔습니다. 전주시민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과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제 전주시 송천동 35사단 사령부는 우리 장병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될 것입니다. 임실에 있는 사단 역사관에 전주 송천동 시대의 아름다운 전경과 많은 시민들의 소중했던 추억을 영상으로 담아 방문객들에게 상영할 예정입니다. 비록 사단사령부가 전주에서 임실로 이전했지만, 35사단은 전라북도 방위를 책임지는 부대이기 때문에, 임무수행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35사단은 ‘전라북도의 방패’로서 항상 전주시민들은 물론 전북도민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정한기 사단장은 육사 39기 30년 군 생활 작전·군수정책 전문가정한기 육군 35사단장(53·육사 39기·소장)은 1983년 임관해 30여년 동안 군에 몸을 담고 있다.충남 공주 출신인 정 사단장은 항상 솔선수범하고 부하들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해 인간중심의 리더십을 적극 실천, 상하로부터 신망이 두터우며, 교범과 교양서적 등을 1개월에 5권 이상을 읽는 등 덕장(德將)과 지장(智將)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그는 또 58년간의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임실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35사단 사령부 이전을 꼼꼼하게 추진하는 등 기본과 원칙을 준수한 가운데 치밀한 업무추진 자세와 능력을 구비, 부여된 임무에 대해서는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작전 및 군수정책 전문가로 통한다.“지난 1994년 대구 50사단이 이전한 뒤 20년 만에 사단급 부대 이전이 이뤄져 부담이 컸다”는 정 사단장은 “참모들과 함께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 이전을 추진한 결과 보름간 이뤄진 부대 이전 당시 아무런 사고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며 감사해했다.정 사단장은 28보병사단 포병연대장, 7포병여단장, 육군 군수사령부 군수계획처장 등을 역임했다.

  • 기획
  • 강정원
  • 2014.01.06 23:02

[2014 희망전북 10대 어젠다] 갑오년 미완의 혁명, 세상을 깨우다 ① 프롤로그

전북에서 일어나 전국에 떨친,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농민항쟁이었던 동학농민혁명. 조선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혁파하려던 농민들의 거사가 올해로 2주갑(120년)을 맞았다. 한 때 동학란으로까지 폄하됐던 당시 거사는 100주년을 전후해 역사학계시민사회단체천도교 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재조명됐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 발생 110년만인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 당시 사건을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전국 곳곳에 설치됐으며, 전북을 넘어 지역별 기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가 당시 혁명을 바르게 기억하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기념사업과 기념단체의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정작 동학농민군들이 열망했던 사회와 진정성 있게 맥이 닿고 있는지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기념일 제정을 두고 지역간 첨예하게 맞서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고, 혁명의 역사적 흔적들이 대부분 지워졌으며, 유적지 또한 체계적으로 관리되지 못하는 게 오늘의 모습이다.20년 전동학농민혁명 100년 - 혁명의 들불, 그 황톳길의 역사 찾기에 나섰던 전북일보가 올 2주갑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동학농민혁명이 갖는 역사적 위상에 걸맞은 위상 찾기를 중심에 둘 계획이다. 큰 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올바르게 기려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세계사로 외연을 확대하는 길을 전문가들과 함께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연구성과동학농민혁명의 120년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수난사였다. 정치적 상황과 입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면서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청나라의 사주에 의해 농민군들이 일어났다거나, 대원군이 동학의 힘을 이용하여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고 권력투쟁 측면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동학란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혁명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 등의 다양한 명칭이 당시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리했는지 보여준다. 100주년을 계기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보편적 이름을 얻었고, 특별법과 공문서 등에도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연구자들은 지금도 각기 다른 명칭을 쓰고 있다. 1894년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연구자의 몫이기에 탓할 문제가 아니지만, 통일된 명칭을 갖지 못하는 사실 자체가 연구적 측면에서도 여전히 미완의 역사임을 반증한다.그럼에도 100주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동학농민혁명 관련 연구는 괄목할 만한 연구성과를 냈다. 학술대회학위 논문연구지 발표단행본 등으로 많은 연구 성과물이 쌓였다. 특별법이 제정된 후 174권의 단행본이 발행됐고, 관련 논문이 700여편에 이른다. 중국과 일본, 북한, 영어권에서의 연구 동향, 중국 태평천국농민전쟁독일 농민전쟁미국영국의 농민운동과 비교하는 연구들도 나왔다. 100주년 전까지 전봉준김개남손화중손병희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역할에 연구의 중심이 두어졌다면, 태안장흥 홍주상주예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 활동의 구체적 사례들이 밝혀진 것도 성과였다. 불모지 상태의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일찍이 뛰어들어 이 시대 마지막 동학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정읍의 향토사학자 고 최현식 선생의 일대기가 쓰여연구자의 연구까지 이루어졌다.그러나 2000년대 이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들은 과거 연구의 정리 쪽에 머물렀다. 실제 동학농민혁명을 본격적으로 다룬 박사학위 논문도 최근 10년간 없었으며, 새로운 문제제기로 주목을 받은 연구물도 눈에 띄지 않았다. 100주년을 전후해 당겨졌던 연구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탓이다. 연구자들의 관심을 되돌리는 게 2주갑의 과제이기도 하다.△기념사업, 기념시설100주년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 대표적인 것이 국가 차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점이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등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되면서다. 또 관련 재단이 설립돼 기념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안정적 기반도 구축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도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이를 바탕으로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사업들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전북을 중심으로 몇몇 지역에 한정됐던 관련 민간단체들이 크게 늘어 현재 27개에 이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비롯 정읍고창김제남원완주 등 전북에 9개의 민간단체가 활동 중이며, 장흥함평무안보은충북금산우금타예산태안서석상주예천고성 등지에 민간단체가 있다. 전국 조직으로 전국동학농민유족회가 결성됐으며,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천안 전씨 종중들이 중심이 된 전봉준장군기념사업회도 있다.관련 시설도 크게 늘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전국에 조성된 기념시설물은 70여곳. 조선정부와 유림 등 혁명의 반대쪽에서 건립한 시설물들을 포함해서다. 100주년 이후 기념시설물은 장성 황룡촌 기념탑대둔산 최후항전기념비고창 전봉준장군 생가완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광장고창 무장기포 역사공원보은 역사공원무장창의 포고비정읍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보은취회 기념비남원 교룡산성 은적암비손화중장군 추모비삼례봉기기념비상주동학농민군상 등 20여개다.기념공원 등 좀 더 규모 있는 사업들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활발해졌다. 홍천과 옥천보은장성 등에 기념공원이 세워졌으며, 전주남원장흥 석대들전적지광주 충남 예산태안무안 등지에서도 기념공원 혹은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그러나 이같은 기념사업과 기념시설 확충은 여전히 미흡하다. 기념사업 대부분이 행사성 위주로 흘러 혁명이 갖는 의미를 주민과 함께 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국민적 인식 확산을 위해 다양한 콘텐츠 개발을 통한 사회문화운동으로 확산시키는 게 과제다. 또 시설물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유적지 보전 등이 상대적으로 소홀하다. 유적지 발굴과 방치된 유적지 보전이 필요하며, 중요 유적지에 대한 문화재 등록 등에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과제연구자들은 동학농민혁명이 120년전에 갇힌 역사가 아닌, 21세기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읽는다. 동학농민군들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자유와 평등, 나눔과 배려 정신은 한국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갖고 있다. 반외세를 부르짖던 농민군들의 함성은 세계자유무역 질서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 되는 한국농업의 암울한 현실과도 닿아 있다. 농민군들의 꿈꾸었던 세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상인 셈이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모순 중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모순으로는 민족분단에 따른 분단의 모순인 데, 그동안 전국에서 추진된 기념사업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민족통일과 관련된 기념사업이 매우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또 전라도 지방사로 왜곡축소되어온 동학농민혁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갈 기념사업 모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은 동학농민혁명을 한국의 보편적 가치 뿐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정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중국의 태령천국농민전쟁이나 남미의 농민운동에 대한 비교 연구 등의 연구작업과 국민들의 혁명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키는 작업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특별취재팀 - 김정엽최명국권혁일 , 문병학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부장

  • 기획
  • 김원용
  • 2014.01.02 23:02

[2014 희망전북 10대 어젠다] 신성장동력 탄소 ① 전북 상징 된 탄소섬유

탄소소재는 21세기 산업의 쌀로 불린다. 자동차, 항공, 우주, 조선, 건축, 의료, 레저스포츠 등 거의 모든 부문이 탄소를 빼놓고는 미래의 발전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탄소에 대한 눈이 늦게 트인 편이다. 세계에서 6번째 탄소섬유 소비국이지만 자체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처럼 중요한 탄소섬유를 전북이 꿰차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발전과 성장도 빨라서 이제는 세계에서 3번째로 탄소섬유를 자체 생산하는 나라가 됐다. 전북의 대표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탄소산업에 대해 알아보자.△탄소 소재탄소는 자연계에 널리 존재하는 원소로 이미 오래 전부터 숯이나 먹과 같은 재료로 활용돼 왔다. 최근에는 금속, 세라믹, 고분자와 더불어 4대 첨단소재로 불리며 산업, 의료, 레저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탄소소재는 학술 및 산업분야에서 탄소섬유, 인조흑연, 카본블랙, 활성탄, 탄소나노튜브, 인조 다이아몬드 등 6가지로 분류된다. 탄화과정 및 흑연화 과정에 따라서 다양한 내부구조 변화를 보이며, 이러한 내부구조 변화에 따라서 탄소소재의 고유 특성이 달라진다. 내부구조에 따른 기계적 특성 및 열적 특성에 따라 응용분야가 다르고 산업적 가치도 달라진다. 탄소는 극한소재로서 지구상의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열에 강하고(인조흑연), 경도 등 기계적 물성이 가장 강하며(인조 다이아몬드), 비표면적이 가장 넓어 흡착특성이 가장 큰 소재(활성탄)고, 현재보다 만 배 이상 집적도가 높은 테라급 칩을 만들 수 있는 나노소재로 국방의학항공우주 및 생물학에서 많은 활용이 가능하다(탄소나노튜브, 그래핀). △탄소의 특성과 용도탄소섬유의 인장강도는 3.5~12GPA (기가 파스칼)로서 철의 인장강도 300~ 700MPa(메가파스칼)과 비교하면 10배 정도 수준이다. 또 비강도(단위중량 당 강도)와 탄성(외부 힘에 의해 변형되었다가 복원되는 성질) 수치가 스테인리스나 알루미늄에 비해 월등히 높아서 가벼우면서도 높은 기계적 물성이 요구되는 자동차, 항공, 토목, 기계, 석유산업 분야 등에서 필요로 하는 고기능성 구조물 을 만들 수 있다. 탄소섬유는 이러한 특성 이외에도 금속에 비해 진동 감쇄성이 우수해서 골프채, 로봇부품, 고속운동기계 부품 등에 효과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또한 전기 및 열 전도성이 높고, 전기 인가(power supply)때 원적외선 발열특성이 있어서 이러한 특성들을 응용한 의류와 난방기기, 전자파 차폐 및 정전기 방지 외장재 등의 제품들이 시판되고 있다.X선 감쇄율이 알루미늄의 1/7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의료 분야에서는 인체에 부담이 적도록 X선 강도를 낮추는 목적으로 탄소섬유가 적용된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탄소섬유 산업우리나라의 연간 탄소섬유 소비는 약 2700톤, 1100억원 규모로 세계에서 6번째 소비국이다. 복합재 시장까지 포함할 경우 연간 8600억 원 수준에 달한다. 탄소섬유 관련 업체는 200여개이며, 이 중 탄소섬유를 수입하여 사용하는 업체가 약 45개이고 나머지 150여개 업체는 한국카본과 SK케미칼에서 생산되는 탄소섬유 프리프레그(탄소섬유에 수지를 배합하여 바로 제품가공에 사용할 수 있는 중간재)를 사용하여 낚시대와 골프채, 건축재료, 구조재 등을 만들고 있다. 한국카본과 SK케미칼을 포함한 원사 가공업체 등에서 2013년 기준으로 연간 약 2700톤 규모의 탄소섬유 원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관련 복합재 완제품 업체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탄소섬유 수입이 연평균 15%씩 증가하고 있다.△미래의 탄소산업탄소 소재는 미래를 여는 만능키로 불릴 만큼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연비 110 km/L를 자랑하는 폭스바겐의 XL1 (풀카본 자동차), 미국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테슬러사의 전기자동차 등이 모두 탄소섬유를 이용한 제품이다. 보잉 787 및 에어버스사의 차세대 항공기인 A350도 약 70% 이상을 탄소섬유 제품으로 제조한 것이다. 또한 군수분야에서 탄소제품 기술은 한 국가의 군사력을 결정하는 핵심척도이다. 신재생에너지의 총아로 불리는 풍력발전에서도 탄소 기술을 빼놓을 수 없다. 설비용량이 예전의 750kW~ 2MW 수준에서 3MW~5MW 이상으로 커지면서 약 40m였던 블레이드 길이가 80m 정도로 길어지고 있어 탄소섬유 블레이드에 대한 연구 및 양산화 개발이 추진 중에 있다. △탄소산업의 메카 전북한국탄소융합기술원과 (주)효성이 공동 연구개발을 통하여 탄소섬유 양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전주시 팔복동에 탄소섬유공장을 세우고 지난해 6월부터 연간 2000톤 규모의 PAN계 탄소섬유를 생산하고 있다. 향후 2020년까지 1조2000억 원 규모의 탄소섬유 생산설비를 갖추고 연간 1만7000톤을 생산할 계획이다. 전북의 탄소산업이 전 세계로 성장해 나가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 될 것이다. 또한 GS칼텍스는 올해 한국탄소융합기술원에 피치계 탄소섬유 연구소를 설치할 계획이며, 연간 50톤 규모의 파일롯 공장을 짓고 있다. OCI는 군산에 70톤 규모의 석탄계 피치를 이용한 탄소섬유 파일롯 공장을 설치해 석유계 피치를 이용하는 GS칼텍스와 국내외 활성탄소섬유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중이다.전북은 이제 PAN계 탄소섬유(효성)와 석유계 피치 탄소섬유(GS칼텍스), 그리고 석탄계 피치 활성탄소섬유(OCI)에 관한 자체기술을 보유하고 생산하는 탄소섬유 선진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한편, 탄소섬유는 어떤 원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폴리아크릴로나이트릴(Polyacrylonitrile, PAN)계와 피치(Pitch)계로 나뉜다. 폴리아크릴로나이트릴계는 일본과 미국, 유럽시장을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주로 항공기와 자동차의 경량화 및 압력용기 부품, 건축 내진보강강재 등 산업용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피치계 탄소섬유는 저가의 제품으로 경제성이 높고 구조제어가 용이해 상업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탄소융합기술원한국탄소융합기술원은 2002년 개원이래, 탄소소재 원천기술 뿐만 아니라 자동차, 항공, 해양, 신재생에너지, 연료전지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실용화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탄소소재 제조/성형/가공 장비의 일률적 확보를 통해 중소기업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우수 선도기업을 육성하는 등 미래의 먹을거리 산업을 준비하기 위해 산학연 공동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탄소산업연구회를 발족하여, 산학연 네트웍을 강화하고 국내외에서 꾸준한 연구와 실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독일의 프라운호퍼 ICT 연구소, 미국 텍사스 주립대 나노연구소, 일본 니시노 연구소 등과 국제적 연구 네트웍을 견고하게 구축하고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탄소소재 기업 및 자동차 기업 및 연구소 등과 실용화 연구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 기획
  • 이성원
  • 2014.01.02 23:02

[1. (유)원진알미늄] 탁월한 기술력 알루미늄 제품 조달 국내 1위

산업 과도기인 1980년 이후부터 전북 경제를 묵묵히 이끌어온 뿌리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인프라 구축 및 물류 기지, 교통망, 소비층 부족, 선비의 고장이라는 등의 힘든 여건아래 갖은 수모와 역경을 딛고 전북의 중추적 역할을 자처, 현재까지도 제 2의 IMF 시기에 맞춰 고군분투하고 있기 때문이다.지금은 물론 각종 지원책과 우수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등의 당근이 주어지고 있지만 이는 외지기업에 비해 극히 저조한 상황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내 알루미늄 업계 부동의 1위를 지키며 전북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완주군 (유)원진알미늄을 시작으로 전북 경제를 이끌어 온 작지만 강한 뿌리 기업들을 소개해 본다.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당신을 기업 목표로 둔 (유)원진알미늄(원종진 대표65)은 대구에서 원진산업이란 사명으로 플라스틱 사출 제조공장을 운영해오다 1987년 10월 원 대표의 고향(장수)인 전북으로 회사 이전을 결정했다.대구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취급했던 원 대표는 미래 성장 금속으로 알루미늄이 각광받게 될 것을 확신, 완주군 봉동읍 용암리 완주3공단 774-1번지에 알루미늄 압출 형체(창호나 난간 등) 공장을 설립했다.당시 대구공장에서는 물류 생산에 따른 운송, 마케팅, 저장 등의 인프라가 구축돼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지만 정작 고향인 전북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도중에는 자금회전이 막혀 기업의 생사가 걸리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이를 뚫기 위해 자금 흐름이 원활한 관공서 등을 위주로 공사 수주에 나섰지만 지역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특혜 등의 루머에 시달려왔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 시도 관공서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시와 냉대였다.그러나 이 같은 시련을 이겨냈고 현재 원진알미늄이 생산하는 물품의 판매 비율은 3(전북):7(타 시도)에 이를 정도다.역외자금을 전북으로 끌어오는 전북 경제의 중추적 버팀목으로 성장, 명실 공히 전북 강소 기업으로 거듭난 것이다.△원진알미늄은(유)원진알미늄은 1981년 대구에서 시작해 1987년 전북으로 자리를 옮긴 알루미늄을 압출하는 회사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업력을 가지고 있다.열정과 의욕이 넘치는 젊은 사원들을 주축으로 탁월한 기술 능력을 보유한 기술전문가들과 조화를 이루며 2013년 매출이 300억 원을 상회, 재무상태가 검증된 탄탄한 기업이다.알루미늄을 제조가공압출성형해 완제품을 납품하고 시공AS까지 원스톱으로 제공하는 원진알미늄의 주 생산품은 그린건축물 기자재(창호), 커튼 월(CURTAIN WALL), 난간, 펜스 등이다. 또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발전장치를 개발해 각 건축물의 외부유리에 접목하고 있다.특히 유리문 개폐를 통한 환기 시스템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창호에 과학과 기술을 접목, 실내외 온도를 조절하는 기능성 그린건축물 기자재 개발에 성공, 국내 유명 건축물의 주요 자재로 사용되고 있다.원진알미늄이 개발한 그린건축물 기자재는 창호 1등급(1.0% 이하) 제품의 기술력을 초월한 0.8%를 기록, 국내 최고봉으로 꼽힐 정도다.△우리는 가족 사원복지 원진알미늄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퇴사율은 0%에 이를 정도로 사원 모두가 회사에 대한 애착이 높다.원 대표를 필두로 그의 30대 두 아들이 회사의 기획과 영업을 맡아 활동하고 있으며, 회사설립 당시인 1987년 직원 수는 10여 명에 그쳤지만 지금은 100명을 넘어서고 있다. 그만큼 사원복지가 잘 돼 있어 일하고 싶은 기업으로 꼽히는 것이다.주 5일 근무에 연차, 정기휴가는 물론이며 4대 보험 이외에 직원들 상해보험까지 가입돼 있다. 또한 신입사원 초봉이 2000만원에 이르고 있으며 여기에 인센티브제, 정기보너스, 장기근속자 포상, 우수사원 포상, 경조사비, 퇴직금이 지급되고 있다. 건강관리 지원을 위한 건강검진 비용, 금연수당도 지원하고 있다.교육 측면으로도 기숙사 운영은 기본으로 학자금 지원, 자체 구내식당 운영, 학원 등록에 따른 자기계발비, 도서구입비 지원, 사내 외국어강좌까지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여기에 업무와 관련한 자격증을 취득할 시 자격증수당이 주어지며, 가족 구성원이 많을 때 주어지는 가족수당, 사내 동호회 지원, 사내 도서관까지 개설돼 운영되고 있다. 개별 직원에게 연간 60만원을 사용할 수 있는 복지카드를 별도로 제공하고 있다.부수적으로는 회사 게시판을 설치, 직원들의 생일 및 주요 경사 일을 사진과 함께 게시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추억의 사진을 붙이는 추억의 코너 등 한가족을 느끼게 하는 따듯함이 있다.△원진알미늄의 기술력조달청이 발표한 올해 상반기 조달내역 집행 결과 전국 중소기업 물품 납품 분야에서 완주군에 소재한 원진알미늄이 5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특히 알루미늄 단일 품목으로는 5년 연속 국내 1위라는 대기록을 달성, 도내 중소제조업계 가운데서는 유일무이하다.이 같은 기록은 모두 동종업종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에서 비롯됐다. 수출유망중소기업, 이노비즈기업 선정, 인적자원우수개발 우수기관 인증, 환경표지인증 획득, 뿌리기술 전문기업 지정, 전북도 우수중소기업 선정 등 이력이 화려하다.또 2003년 KS D 6759(알루미늄 합금 압출형재) 획득을 시작으로 2007년 환경경영시스템인증(ISO 14001), KS F 3117(창세트), 2012년 특허 5건, 고효율인증서 16건 보유고효율기자재인증서 5건 획득, 2012년 알루미늄 커튼월 우수제품 지정금속제창 자가품질 보증업체 지정, 2013년 EIP생태산업단지 지정뿌리기술 전문기업 지정 등이 있다.각종 품질 우수 등록 지정을 대변하듯 원진알미늄이 받은 표창은 산업자원부 장관상을 포함해 모범기업인 대상, 지경부장관 인적자원 우수기관선정, 모범납세자상, 자랑스런 전북인 경제부분 대상, 중소기업 육성공로 국무총리상 등 모두 20여 건에 달하고 있다.기업의 가치인 사회공헌도 뛰어나다.지난 12월 지역인재 육성을 위해 (재)장수군애향교육진흥재단에 장학금 1000만원을 쾌척한 것을 비롯해 매년 각 자치단체에 장학기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매년 분기마다 하천 및 농가 등 환경정화활동, 농촌 일손돕기를 실시해왔다.올해부터는 완주군 및 장수군과 재능기부협약을 체결, 어려운 이웃들을 대상으로 창호 교체 지원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특히 2014년에는 완주군 3공단 테크노밸리에 제 2공장을 설립, 그린건축물 기자재(창호) 생산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원종진 대표는 전파사 수리공으로 출발 성실한 노력 끝 자수성가장수군 천천면의 시골마을 가난한 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유)원진알미늄 원종진 대표는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 졸업후 바로 서울로 상경해 제과점 종업원,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 중국집 배달 등을 전전하다 군에 입대했다.전역후 결혼을 해 살림을 차렸고 전주 중노송동에 전파사를 차린 뒤 고철을 줍고 라디오 등을 고치는 수리공으로 연명했다.이후 이따위로 밖에 못 고쳤냐며 기기를 부수는 고객들의 가혹한 지탄에 실망하다 소비자가 원하는 괜찮은 제품을 만들자는 생각에 다시 전자제품 생산으로 유명한 대구로 갔다.대구의 한 금속회사에 취직해 성실하게 일하며 배웠고, 임실 운암이 고향이었던 사장의 배려로 원진산업을 설립해 TV 안테나 제조에 몰입했다.운좋게 회사 창립이후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가정의 안테나들이 박살났고, 안테나가 희귀품목으로 떠오르면서 성장세를 타기 시작했다.회사설립 7년이 지난 후 원 대표는 자신을 돌봐줬던 인근 기업들의 위치가 좁아지자 과감히 대구를 버리고 고향 전북으로 회사를 이전해 오늘날 조달청이 5년 연속 1위로 선정한 알루미늄 업계의 선구자가 됐다.국가가 인정한 국내 1위 알루미늄 기술 기업이 되기까지 험난한 시련과 가혹했던 눈물이 그의 삶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 기획
  • 이강모
  • 2014.01.02 23:02

25. 익산 여산초 - 문방사우 만들던 곳에 세운 배움터…일제 항거 현장도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돌아나오길 몇 번째. 비좁은 골목길로 올라갔더니 익산 여산초등학교(교장 오진탁)가 눈에 들어왔다. 면사무소 앞으로 새로운 문이 뚫렸지만, 과거 후문은 그 일대 학생들의 가장 가까운 출입구였다.올해로 개교 101주년. 현재는 전교생 120여 명에 불과한 작은 학교가 됐지만, 자부심은 부침을 겪는 역사에도 스러지지 않는다. 여산초 안에 있는 익산 31 만세운동을 촉발시킨 헌병분견대 터, 가람 이병기 선생(1891~1968)이 작사하고 당대 유명세를 날렸던 이흥렬 선생(1909~1980)이 작곡한 여산초 교가는 과거 동문들과 현재 동문들을 잇는 온기있는 이야기다. △학문중시 전통 배경 여산초 설립여산초엔 의외의 드라마가 많다. 1906년 여산향교에 몸 담고 있던 김영진씨가 땅을 헌납해 설립한 것. 총동문회장 김장환 씨(48회)는 여산향교의 지리적 환경이 학교 설립까지 이어졌다고 전했다.여산초 뒷동네 마을엔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과거엔 닥채나무로 불림)가 참 많았어요. 임방울 명창이 불렀던 호남가를 들어보면, 여산 숯돌로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숯돌이 유명했죠. 종이벼루 등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만드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배움을 중요시할 수 밖에 없었죠. 학교가 설립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여산초 정문 주차장으로 쓰이는 헌병분견대 터에 설립한 여산독립만세기념비는 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물이다. 1919년 성난 민중들이 헌경분견대로 돌진하며 여산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건을 기리기 위한 것. 학교 옆 여산동헌(전북유형문화재 제93호)도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 전북향토지에 따르면 동헌에 현감부사 250명이 근무했었다는 기록은 과거의 위용을 보여주는 사례다.여산이 과거 호남의 첫 고을이었다는 오진탁 교장의 단언을 빌리면 여산은 전북의 관문이면서 논산이 20㎞ 내에 있는 충남권이기도 하다. 지리적문화적으로나 여산초 인근 문화콘텐츠를 엮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발굴하자는 일각의 주장은 지금껏 9607명 졸업생(2월 기준)을 배출한 여산초가 단순히 쇠락해가는 학교로만은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학교를 빛낸 인물여산초 졸업생 중 군장성 출신이 유독 많은 것은 학교 옆에 있던 육군부사관학교 덕분으로 돌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51년 육군하사관학교로 창설, 여산초의 흥망성쇠와 궤를 함께 해온 것. 그 기(氣)를 받아 이남신 전 합참의장(43회), 유해근 전 특전사령관(45회) 등이 배출됐다. 하지만 현재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는 실정이다. 정계 인사는 드물다. 익산시의회 의장을 지낸 임귀택씨(60회)가 거의 유일한 정계 인사. 재계에선 이연 전 동원탄자 회장(32회)이 통 큰 기부를 많이 해왔고,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이사 사장(60회)가 벤처기업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있으며, 교육계 인사로 유인종 전 서울시교육감(31회)이 거론된다. 당시 명석한 법조계 인사로 기대를 모았으나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았던 송삼섭 전 일진그룹 고문(48회)은 지역에서 법률 자문을 해오며 의미있는 활약을 했다.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 만들자오진탁 교장은 소통(疏通)만 되면 다 잘 굴러간다고 했다. 학력 저하 우려 등을 하는 학부모가 여산초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 교장은 나눔과 배려의 교육현장을 더 중시했다. 한부모다문화가정 등이 적지 않은 여산초로서는 학생들에게 오고 싶어하는 학교, 즐거운 학교를 만들고, 학부모들에게는 가고 싶은 학교, 행복한 교육공동체를 실현하는 게 더 근본적인 목표. 버스 2대로 학생들을 실어나르며 서양화서예태권도바이올린 등 방과후수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당초 5~6학년으로 한정했던 진로지도를 4학년까지 확대하는 등 행복한 학교 만들기에 힘써오고 있다.오 교장이 올해 역점 추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6학년 제주도 수학여행이었다. 육해공 교통수단을 다 동원해 학생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선물했다. 그랬더니 1년 내내 들뜬 분위기가 이어져서 그게 고민이라고 오 교장은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 수학여행이 뭐가 대수냐는 반응도 있겠으나, 문화적 소외지역에 속하는 이곳 아이들이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을 누그러뜨렸다는 게 교사들의 반응. 학교 안 가면 심심해서 못 살겠다는 학생들의 푸념을 듣고 싶은 게 이 학교의 고민이다.

  • 기획
  • 이화정
  • 2013.12.25 23:02

양돈업 진출 가속 하림그룹 '(주)봉동'

악취와 환경오염으로 심각한 민원을 야기하던 양돈 산업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최근에는 축산업 허가까지 까다로워지면서 국내 축산시장은 그야말로 위축을 넘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양새다.환경을 고려한 양돈시장은 자연스레 생산비용이 증가하며 수입육과의 경쟁에서 뒤떨어지며 국민적 불신까지 겹쳐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하림그룹은 이렇게 극도로 침체된 양돈 시장에 신선한 새바람이 불어 놓으며 선진 양돈 산업에 도전하고 있다.양돈 산업의 최대 문제였던 악취와 폐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들의 무악취와 폐수 무방류 시스템을 접목시킨 하이포크 봉동농장을 선보이며 국내 양돈 산업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있다.△선진 양돈 산업에 도전지난해 4월 충남 논산시 연무읍에 (주)봉동이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 하림그룹의 양돈 전문 회사인 하이포크 봉동농장은 5년여의 준비 및 시공과정을 거쳐 일반 축산농장과는 달리 악취와 폐수를 발생시키지 않으며 생산성에서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돼지농장 모델을 제시했다.이곳 농장은 7만여㎡의 부지에 11동의 돈사, 12개의 부속건물로 이뤄져 있다. 총3600두의 모돈을 사육하며 하루 40톤 가량의 분뇨가 발생하지만 전량 자원화되고 있다.봉동농장은 특히 보통의 양돈 농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를 전혀 맡을수 없는 것을 비롯해 이곳에서 발생하는 폐수는 모두 재활용되며 외부로 일절 방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국내 최초로 도입된 이곳의 양돈 농장 시스템이 내년 3월께 준공되는 익산시 낭산면의 제2봉동농장에 도입될 계획이다.△추락하는 국내 양돈 시장국내의 양돈 시장은 그야말로 위기속의 위기라고 표현될 정도다. 양돈 농가들은 악취와 방류수로 주변 민원에 몸살을 앓으며 행정당국의 과도할 정도의 단속과 돼지 가격 하락까지 삼중고를 겪으며 줄줄이 파산행 열차에 오르고 있는 실정이다.특히 돼지 가격 하락과 사료 값 인상 등으로 돼지 한 마리를 내다팔면 10만원 가량을 손해보고 있다고 하소연이다.여기에 자유무역의 거센 흐름속에 축산 강국들이 속속 국내 시장을 잠식하며 국내 양돈 농가들의 경쟁력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경쟁력은 떨어지고 악취와 폐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국내 양돈 시장에 선진국형 돌파구 도입은 가장 시급한 최대의 과제로 꼽히고 있다.이에 따라 국내 양돈시장은 환경을 생각하며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과도기에 걸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하림의 선진국형 양돈시장 진출하림그룹의 양돈 전문 회사인 하이포크 봉동농장은 5년여의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해 충남 논산에 선진국형 양돈 농가의 첫 선을 보였다.이곳 농장의 컨셉은 친환경과 최고의 생산성, 아름다운 농장이다.양돈장의 고질적인 문제인 악취와 분뇨, 폐수를 말끔히 해소해 농장외부로 내보내지 않는 무악취와 무방류, 무오염이라는 3무(三無)를 실현하고 있다.먼저 이곳의 무악취는 3단계 탈취시스템으로 가능해졌다. 이미 유럽에서 검증된 환기기술과 화학적 탈취에 이어 마지막 생물학적 필터를 통해 악취유발물질을 모두 잡아낸다.무방류는 돈사에서 발생한 모든 축산분뇨를 연결파이프를 통해 저류조에 모아 수처리 시설과 발효조를 통해 재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가능해졌다.특히 분뇨는 발효조로 보내져 일정기간 숙성을 거친 뒤 양질의 퇴비로 재탄생된다.이처럼 봉동농장은 무악취와 무방류, 무오염을 실현하고 있다.△선진국과 어깨 나란히환경오염을 벽에 넘어선 봉동농장은 대형 사육시스템을 구축해 선진국들과 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 지난해 논산에 문을 연 봉동농장에서만 모돈 3600두가 활발히 새끼돼지를 생산하고 있다.새끼돼지들은 이곳과 같은 친환경 시스템이 설치된 농장들에서 친환경으로 사육된다. 내년 3월에 익산시 낭산면에 문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이런 시설들은 점차 확대될 예정이다.특히 차단방역 시스템을 구축해 사료공급차량이 내부에 진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물론 일정한 온습도 유지 등 최적의 사육환경을 유지하고 있다.축사가 더 이상 악취가 발생하는 혐오시설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는 봉동농장은 양돈장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친환경적인 시설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아울러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 축산 강국들과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한국형 선진 모델을 실천해가고 있다.● 조영일 (주)봉동 대표 "3단계 악취차단 시스템 완벽 구축"기존의 방식으로는 세계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축산 선진국처럼 친환경적이면서 글로벌 시장과 경쟁할 수 있는 생산성을 높여야 합니다.봉동농장 조영일 대표는 양돈장이면 당연히 발생하는 악취를 잡는 기술이 선진 축산기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캐나다, 덴마크, 칠레 등 양돈선진국들의 농장을 방문해 시설과 운영방식을 견학하고 2005년부터 국내 환경에 맞도록 설계를 시작하는 등 축산 선진화 시스템 구축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갔다.조 대표는 선진 축산국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친환경과 안전한 생산성 확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20년간의 노력을 현실로 변화시키면서 구상했던 목표들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했다.아울러 3단계 악취차단을 위한 시스템이 완벽하게 구축되었고 모든 분뇨와 폐수도 일절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친환경 시스템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다면서 특히 사육에 적합한 온습도 유지와 환기시스템 등 최적의 사육환경은 국내 양돈 시장을 한단계 발전시키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지난해 4월 충남 논산의 하이포크 봉동농장을 시작으로 내년 3월 익산시 낭산면에 제2농장 준공을 앞둔 조 대표는 논산이 최첨단 양돈 농장이라면 익산시 낭산면의 제2농장은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고 평가받게 될 것이라며 낭산의 양돈 농장은 그간 혐오시설이라는 양돈 농가의 이미지를 모두 깰 수 있는 농장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진만
  • 2013.12.24 23:02

24. 순창초 - 수업혁신 다양한 실험…학생 중심 맞춤교육 명성

2008년 8월23일 순창초등학교의 100주년 기념행사. 전날부터 먹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이튿날 비가 줄곧 내렸다. 황만섭 순창초 총동문회장은 순창초는 그 많고 많은 날 중에 꼭 행사만 가면 비가 왔다는 일설(一說)이 있다고 했다. 비로 인해 행사 개최에 제약이 많았고, 100년사 출간이 무산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명문순창초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개교 105년 명문 명맥 잇는다순창초등학교(교장 최필열)는 1908년 개교 당시 순화학교로 불리웠다.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313번지 주소가 이름의 연원을 짐작하게 한다. 105년 역사가 말해주듯 순창초는 이 일대 명문이었다. 옥천초등학교와 순창중앙초등학교의 분교는 과거 순창초의 아우라를 보여준다. 지난 2월 기준 졸업생은 1만1716명. 100년 이상된 상당수 학교가 그렇듯 학교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를 찾기란 어렵다. 학교 운동장 한 켠에 있는 독서하는 소녀의 하얀 조각상을 보면서 대강 학교의 연륜을 짐작할 뿐이다. 1945년 8월15일, 그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는 나무는 학교의 자랑거리다. 총동문회 부회장 서상기씨는 교정에 해방수가 있는 곳은 순창초가 유일할 것이라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개교 100주년 행사 때 금산봉 정기받은 건아들아 영원하라는 문구를 세운 기념비는 오늘도 학생들에게 큰 꿈을 키우며 날로 변화해 가는 사람이라는 교훈을 새겨주고 있다. 최필열 교장은 순창초의 교육목표는 도덕인창조인자주인건강인 양성을 목표로 삼는다면서 자기주도적 학습력을 갖추고, 개성과 소질을 계발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자신을 가꾸는 학생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 동문회는 주춤 동문은 두각순창초는 기수별 동문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동문회의 존재감은 미약했다. 1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총동문회가 반짝 활약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기대했지만,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동문들을 규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순창초 졸업생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쪽은 정계법조계. 남매로 활약하는 여동생 전선미 국회의원(67회)과 진봉헌 변호사(58회)가 대표적이다. 순창초로 전학 간 정동영 국회의원을 포함하면 강대희김병윤 전 도의원(59회), 양영수 전 군의회의장(59회)이 정계, 김영기 변호사(48회)가 법조계 인사로 분류된다. 졸업생 중 공직자는 의외로 많은 편. 김재중 익산국토관리청 국장(39회), 제태환 정읍소방서장(51회), 김 신 전주시 문화경제국장(56회)이 현직에서 활동 중이다.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황만섭 양평한솔요양병원 이사장(48회)을 비롯해 김춘동 군산CC 회장(41회)과 제성환 거성그룹 회장(49회)은 성공한 기업가로 꼽힌다. 대한민국 예술원이 매년 시상해온 대한민국 예술원상 올해 미술 부분 수상자로 선정된 서양화가 박남재 화백(32회)은 고향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아 순창을 추억하기도 했다. △ 수업 혁신을 넘어 학교 혁신으로순창초는 지난해 혁신학교로 지정됐다. 하지만 혁신학교로 지정되기 전부터 순창초는 수업 혁신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전북교육청의 독서정책 연구학교(2004)를 비롯해 영어연구학교(2007~2009)와 다문화연구학교(2010~2012) 지정이 그 것이다.학습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과정에 초점을 맞춘 순창초는 80분 단위 블록수업, 학력 신장을 위한 디딤돌 학습 프로그램, 자기주도적 학습노트인 순창꿈 자람터 제작활용을 통해 수업을 혁신했다. 김지연 양(6년)은 혁신학교가 되면서 1블럭 수업이 끝난 뒤 30분 동안 예습과 복습을 하고도 충분히 쉴 시간이 남았다면서 자람터노트가 생겨 매일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꿈을 위해 오늘 노력한 일, 책을 읽은 간단한 독후감 등을 정리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말했다. 전임 교장들의 선견지명으로 5년 넘게 영어교육을 강화해온 결과 매년 영어의 날을 지정해 영어로 말하고 즐기는 Fun Fun한 Funglih Party 개최 등이 이어지면서 영어를 쉽고 재밌게 배우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 솔선수범해 책을 읽는 학부모독서토론동아리와 교사독서동아리 덕분에 학생들은 체계적인 독서 습관을 익히고 있다.

  • 기획
  • 이화정
  • 2013.12.18 23:02

취임 보름 맞은 김광호 전북 적십자사 회장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는 ‘사랑이 희망이 됩니다’라는 표어로 이달 10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를 적십자회비 집중 모금기간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모금활동에 나서고 있다.지난달 27일 취임한 김광호 전북지사 회장은 취임사에서 “소외된 이웃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겠다”며 “인도주의 활동역량 확충을 위한 봉사원 및 청소년 인재육성에 매진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이달 12일 취임 보름째를 맞이한 김 회장을 만나, 그동안의 소회와 앞으로의 모금 계획, 모금액 활용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오늘(12월 12일)로 취임 보름째를 맞이했다. 그동안 업무를 맡아하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그 어느때보다 나눔이 절실한 시기인데, 도움의 손길은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었습니다. 우리사회의 나눔문화를 보다 확산시켜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돌보야할 어려운 이웃들이 많음에도 경제적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소홀히 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상임위원으로 활동할 때는 예산 등 세부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일했다면, 회장이 된 지금은 큰 틀에서 계획을 짜고 실행해야하는 점에서 막중한 책임감이 듭니다.”- 취임사에서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그 구체적 실천 방안과 계획이 있다면.“기업체와 공공기관 등이 나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할 생각입니다. 이에 도움을 주는 자원봉사자와 나눔을 실행하는 기업들의 연계와 실행이 중요합니다. 기업은 재원을 조성하고, 자원봉사자들은 시간과 노력을 제공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어려운 이웃에 대한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때입니다. 많은 봉사활동을 한 것으로 아는데, 봉사에 눈을 뜬 계기가 있다면.“그동안 꾸준히 성금을 기탁해오고, 봉사도 나름대로 많이 했습니다. 저도 어린시절을 고생하며 살았기에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컸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도민들로부터 얻은 이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96부터 적십자사 상임위원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나눔과 봉사에 눈을 떴습니다.”- 적십자사의 이념과 주된 활동 방향에 대해 소개한다면.“적십자사의 기본이념은 인도주의 실현입니다. 적십자사는 인도주의 국제구호 기구로서 전쟁과 재해, 가난, 질병 등 각종 고난으로부터 인간의 생명보호와 고통경감을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북지역의 경우 4800여명의 자원봉사자와 청소년적십자단원 1만여명 등 총 1만 5000여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적십자사는 회비모금기간에 온 국민이 참여해 내는 회비와 정기 후원자들의 기부를 주요 재원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아진 성금은 국내외 이재민과 아동 등 4대 취약계층의 생계 지원·긴급구호활동 등에 쓰일 예정입니다. 또 취약계층을 위한 희망풍차사업에도 매진하고 있습니다.”- 희망풍차사업이란 무엇인지.“대한적십자사가 지난해 7월부터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활동으로서 취약계층인 아동 및 청소년, 홀로노인, 다문화가족, 북한 이주민 등과 적십자 봉사원이 결연을 맺어 기초생활, 의료·교육·주거복지 등을 제공하는 종합복지활동입니다. 현재 도내에서는 총 815세대가 희망풍차 봉사원과 결연돼 있습니다. 예산이 확보되는대로 결연세대를 확대해 나갈 계획입니다.”- 도민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면.“그동안 적십자사를 사랑해주시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도민 여러분과 자원봉사자들, 공무원 등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조금 여유있는 분들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누고, 또 뜻하지 않은 불행한 일을 당한 우리 이웃들에게는 신속한 도움을 주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언제든 나도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도민이 되어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도민들이 나눔 문화에 동참한다면, 사회가 좀 더 따뜻해질 것입니다.”● 김광호 회장은 지역서 건설회사 경영 사회공헌 활동 꾸준히김광호(71) 제30대 대한적십자사 전북지사 회장은 전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전주상공회의소 회장,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 등을 지냈다.김 회장은 지난달 7일 열린 2013년도 상임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전북지사 회장으로 추대된 바 있다.그는 1975년부터 전북지역 대표 건설회사인 (주)흥건을 경영하면서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통해 따뜻한 이웃사랑과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하는 등 일관되게 소외계층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왔다.이는 평소 ‘노블레스오블리주(귀족의 의무)’라는 신념 아래 한 평생 지역발전과 사회봉사에 힘써 왔기에 가능했다.이 같은 공로가 높은 평가를 받아, 대통령 및 법무부·건설교통부장관 표창을 다수 수상하기도 했다.그는 회장 취임 보름째를 맞아 진행된 전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다”면서 “나눔과 봉사의 손길이 예전만 못하지만, 극복하는 마음으로 모금 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내가 돋보이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줘 모두가 잘 사는 전북도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라고 덧붙였다.

  • 기획
  • 최명국
  • 2013.12.16 23:02

지구촌 사랑나눔 대표 김해성 목사

낡은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높고 경사가 심했다. 안내판도 잘 눈에 띄지 않아 멈칫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 비좁은 곳에서는 약품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외국인노동자전용병원이란 간판을 보고서야 건물을 잘못 짚은 것을 알았다. 바로 그 옆 건물 이층에 있는 지구촌사랑나눔 사무실도 비좁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의 업무실은 온갖 자료와 물품이 쌓인 사무실 안쪽에 있었다. 세평도 채 안되겠다 싶은 좁은 공간, 삼면을 둘러싼 책장과 책상, 몇 사람 앉을 의자가 전부인 그곳이 외국인 노동자의 대부 김해성 대표(53)가 일하는 공간이다. 책장 안을 들여다보니 인권과 노동 관련 책자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그의 이름 앞에도 몇 개의 별칭이 놓여있다. 모두가 노동자, 이주외국인, 중국동포와 관련된 것들이고, 30여년 한 길을 걸어온 그의 궤적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지난 10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지구사랑나눔 건물 1층 이주민 무료급식소에 불이 났다. 이 사고로 건물은 새카맣게 불타버리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 방화범은 이곳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도움 받아 지내온 중국동포였다.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을 식구처럼 따뜻하게 안아온 김 대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은 분노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사흘째 되던 날 스스로를 되돌아보니 부끄러웠다. 방화범을 용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뇌수술을 받았던 방화범은 사망했다. 김 대표는 밀렸던 병원비와 장례비, 장례까지 도맡아 치르고 그의 아들과 딸을 돌보겠다고 약속했다. 문을 닫게 된 급식소와 쉼터, 방화범을 용서하고 오히려 사랑으로 껴안은 김 대표의 나눔 정신과 실천이 알려지자 후원자들의 성금이 모여지기 시작했다. 화재현장의 복구작업이 시작되고 부상자들의 치료비 부담도 덜어졌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늘 길은 열렸다고 그는 말했다. 도시빈민과 노동자, 어느 누구도 선뜻 손길 내주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동포의 인권을 위해 30여년 세월을 고스란히 바친 지구촌사랑나눔의 대표 김해성 목사를 만났다. 고단한 길을 만나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서 문득 루쉰의 글이 떠올랐다.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 중에서-지나고 나면 짧기 만한 1년을 다시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 그가 열어온 길은 더 빛나 보였다. -정말 바쁘시군요. 어떻게 이 많은 일들을 처리하는지 궁금합니다.하루 시간으로 버겁긴 하지만 다 해야 할 일이니까요. 저는 인터뷰도 열심히 합니다. 다른 분들처럼 인터뷰 요청을 거절도 하고 사양도 하고 싶은데 이 또한 제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매체들의 인터뷰가 사실은 우리 사업을 알리는 중요한 통로가 되거든요.(웃음)-지구촌사랑나눔은 언제 문을 열었습니까.2001년도예요. 제가 80년대부터 성남에서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한국노동자들의 인권운동을 하다가 이주외국인노동자, 중국동포들의 인권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사업이 확대되었습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의 한국사회 정착을 위한 활동이 중요한 사업입니다.-30년 전이라면 한국사회의 상황이 매우 절박했을 때 아닌가요. 민주화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던.저도 80년 광주민중항쟁 세대예요. 한신대 신학과 2학년 때 광주항쟁이 터졌으니까요. 전두환 정권의 비상계엄령 아래 최루탄과 화염병이 날마다 거리를 메우는 엄혹한 시절이었죠. 광주가 집인 친구가 있었는데, 광주 항쟁이 터지자마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대열에 섰는데, 사살됐습니다. 망월동에 묻혔죠. 저도 시위 참여자로 지목되어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비겁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죄책감이 깊어졌죠. 그 죄책감이 성남으로 가 도시빈민운동을 시작하게 했습니다.-성남의 도시빈민운동은 꽤 활발했었죠. 당시 성남은 서울의 쓰레기를 버리는 변방 도시였어요. 그곳에서 도시빈민 선교운동을 하는 이해학 목사님을 만났어요. 도시빈민 선교활동을 하면서 노점상 철거민 도시빈민들을 돕는 활동을 열심히 했죠. 탄압받는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만들다 연행되어 구속되기도 했고, 경찰에 잡혀가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해고되고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가장 열악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에 들어갔죠.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위장취업이라해서 1년도 안 돼 해고당했어요.-도시빈민선교활동도 노동운동의 좋은 통로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긴 하지만 좀 더 그들 가까이에서 고난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해고된 후에는 개척교회(산자교회)를 열고 노동자 선교를 더 열심히 했죠. 노동상담소를 만들어 한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성남 지역 기독교 인권위원회도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이 일이 인권문제 노동문제 전문가로 만들었습니다.-그즈음에 외국인노동자들이나 중국동포들이 취업을 위해 한국에 쏟아져 들어왔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당시 중국동포들은 물론, 필리핀 베트남 스리랑카 등 각국에서 노동자들이 몰려 들어왔어요. 대부분 불법체류에 불법취업이었습니다. 당연히 임금을 못 받고, 산재를 당하거나 업주로부터 폭행을 당해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어요. 그즈음 우연히 지역에서 인권운동을 하던 이재명 변호사(현재 성남시장)가 산재로 큰 부상을 당한 중국동포와 16층에서 사고로 추락사한 중국동포 사건을 의뢰했어요. 보상도 제대로 받고 사망한 동포는 장례까지 잘 치러주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는 해당 기업과 숱한 갈등과 싸움이 있었죠.-보상을 받은 당사자들이나 유족들에게는 큰 힘이었겠습니다. 같은 처지의 중국동포나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희망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그런 소문은 얼마나 빨리 나는지, 금세 쫙 퍼져 문제가 생기면 김해성을 만나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어요. 그렇다보니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이 뒤를 이으니 쉴 시간이 없었어요. 각국 대사관과 관련 기관들을 찾아다니며 협박도 하고 간청도 하면서 일을 해결했습니다. 얼마나 일이 많은지 끝내 쓰러져 입원 했어요. 그것을 보고 이해학 목사께서 김해성이 살리려면 우리가 함께 해야 한다고 나서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집이 그렇게 조직되었죠.-일이 일을 몰고 온 셈이었네요. 길이 길을 여는 것처럼. 외국인노동자의 집을 열고나니 중국동포들의 항의가 들어왔어요. 우리는 한민족 한 핏줄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외국인이냐는 것이죠. 그래서 그 옆에 /를 치고 중국동포 노동자의 집을 붙였어요.(웃음) -스리랑카 대통령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코끼리 이야기는 대표님의 사랑 실천의 상징이 아닐까 싶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즐거움도 크고 국가에 기여도 했으니 보람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스리랑카 마한다 라제팍세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어요. 코끼리까지 선물로 받게 되었죠. 처음에는 황당한(?) 선물이어서 거절했는데, 마침 그때 국립동물원 코끼리가 수명을 다하면 혈통을 이을 수 없다는 뉴스를 보았어요. 그래서 다시 연락해 암수코끼리 한 쌍을 선물로 받아 동물원에 기증했죠.10여 년 전 김 대표는 경기도 광주를 다녀오는 길에 허름한 행색의 외국인 두 명이 추위에 떨며 서있는 것을 보았다. 궁금해 그냥 치지 못하고 말을 건넸는데, 취업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 온 스리랑카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고 자고 먹을 곳을 구해주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일요일이면 그의 교회에 스리랑카 노동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명절을 기념한 행사에 한 노동자가 자신의 작은 아버지를 초청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야당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노동부 장관 시절 스리랑카 노동자들의 한국진출을 도운 사람이었다. 한국을 다녀간뒤 그는 국무총리가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전 재임에도 성공한 마한다 라제팍세 스리랑카대통령이다. -가족이 된 다문화가정 삼남매와의 인연도 궁금합니다. 이제 제 아이들이 되었어요. 입양은 아니지만 친권과 양육권을 다 받았죠. 5년 전 쯤 아빠가 세 아이를 데리고 저를 찾아왔어요. 엄마가 사망했는데 장례를 못치렀다는거예요. 아이들 피부색이 까맣더군요. 엄마가 가나출신 흑인 여성이었어요. 10년 넘게 한국에서 살았지만 한국국적을 얻지 못했죠. 장례를 치루려니 절차가 복잡했어요. 가나대사관에서는 본국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하고. 백방으로 방법을 찾아도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 저는 거의 장례전문가가 다 되었었는데, 영안실에서 시신을 찾아 관에 넣고 옮겨 대사관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이튿날 대사관에서 놀랐는지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어요.-그런 경우 경비 부담은 없습니까. 크죠. 그런데 이때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모금이 많이 됐어요. 이제 잘 살면 되겠다 싶었는데 일용노동자였던 아빠가 자살을 했어요. 그것이 3년 전인데, 장례를 치루고 유족들과 논의 해보니 아이들을 맡을 사람이 없는 거예요. 제가 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죠.-그래도 얼굴색이 다르고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과 가족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컸을 것 같습니다. 아빠라고 부르게 하는 데만도 1년이 걸렸지요. 힘든 고비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소중한 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집에 갔더니 컴퓨터에 지금 우리가 어리지만 아빠 기대하시라 짠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아이들이 꿈을 갖게 된 것도 제게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큰 딸은 모델이 꿈이고, 둘째 아들은 배우가 꿈입니다. 이미 마이 리틀 히어로란 영화에 조연급 아역배우로 출연했어요. 저는 그 아이의 매니저죠.(웃음) 막내는 축구선수가 꿈인데 지난 월드컵 조별 예선 쿠웨이트 전에서 볼키즈 역할을 했어요. 학교에서는 반 회장을 맡아 제가 회장님이라고 부릅니다.-한국사회에서 다문화가정 문제는 심각합니다.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벽이 높은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20만 명이 넘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하면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촌학교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에요.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학교 이탈률은 매우 높습니다. 초등학교가 15%, 중학교 39%, 고등학교는 69%죠. 초등만 보면 그 비율이 대한민국 전체 이탈률의 220배라고 합니다. 가슴 아픈 현실이죠. 그들도 우리의 미래입니다. 작년 12월에 기획재정부장관이 국회에 다문화인 차별금지법을 제출했어요. 노동부나 법무부 여성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서 왜 그런 법안을 만들려했을까요. 그들을 대한민국의 미래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지구촌나눔사람에서 문을 연 병원은 가리봉의 기적이란 별칭이 붙어 있던데요.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는데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기 어렵습니다.모두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희도 반신반의했으니까요. 병원을 연 것은 제가 사망한 외국인노동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면서 병원에서 조금만 빨리 치료만 받을 수 있었어도 살 수 있었던 사례를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어요. 처음에는 직원 모두가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강행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전용병원이라는 이름을 걸고 문을 연지 10년이 지난 지금 병원은 건재합니다. 그것도 정부지원 없이 민간후원으로만 50만 명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어려움에 처하면 그만큼 후원의 손길도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가리봉의 기적, 외국인전용병원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래도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지구촌 사업 모두가 정부지원없이 민간 후원으로만 추진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병원도 그렇지만 학교도 민간후원으로만 운영합니다. 학생들은 학비 식비 수업준비물 교통비까지 무료입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아오면서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명제의 임상실험을 끝냈지요.(웃음)-정부도 하지 않는 일들을 대표님과 지구촌사랑나눔 식구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문제,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법적 장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치 분야에 진출하신다면 이런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 번 제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태어나도 종교인으로서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그쪽으로 간다면 30년 동안 쌓아온 인권 노동운동의 빛도 한 순간에 스러질 겁니다.-5년이나 10년 후에도 이 길 위에 서계실까요. 5년 후는 몰라도 10년 후는 좀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인생계획으로는 아프리카에 가서 에이즈 퇴치 운동을 할 생각이거든요. 아프리카의 사망자 절반이 에이즈가 원인입니다. 아프리카가 절단 날 위기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별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노동 인권운동의 모험적이고 혁명적인 방법을 그 분야에도 결합해보고 싶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놓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에이즈 퇴치운동의 불씨를 만들고 싶은 소망입니다.● 김해성 목사는 익산출신 노동인권운동 전문가실천하는 지성인 '명성'노동과 인권운동가이자 전문가인 김해성 목사(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익산시 춘포면 인수리가 고향이다. 영어교사를 지낸 그의 아버지는 교육열이 높아 자녀들을 일찍부터 서울로 유학을 보냈는데 김 목사 또한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그러나 그에게 서울은 낯설고 두렵기 만한 대상이었다. 학교에 간 첫날 아이들은 그를 놀렸다. 영문도 모르고 놀림을 당했던 그는 울기 시작했다. 담임은 반장을 불러 울음을 그치지 않는 그의 뺨을 때리게 했다. 충격적인 그 경험은 어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일찍부터 약자와 가난한자들의 억울한 일을 대하면 의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의식이 트라우마로 안긴 그때의 경험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선대부터 기독교 신앙을 대물림했던 덕분에 그는 특별히 갈등하지 않고 한신대에 들어가 종교인의 길을 걷기로 했다. 엄혹했던 군부시절, 광주항쟁을 계기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됐다. 광주항쟁으로 목숨을 바친 친구에게 마음 빛이 컸던 그는 사회의 첫발을 도시빈민운동으로 시작했다. 20대의 빛나는 청춘이 선택했던 노동과 인권의 길을 30대와 40대를 거쳐 50대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걸었다. 목사가 된 후에는 산자교회를 세웠으나 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뛰어들면서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아내 김현의 목사가 세습(?)했다. 정치외교와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있는 그의 두 딸은 시민운동으로 밖에서만 지내는 아빠 점수를 100점 만점에 8점 밖에 주지 않았지만 커서는 아버지의 길을 자랑스러워한다. 노동자들의 숱한 어려움을 해결하고 아픔을 함께 나누어온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늘 길을 개척하고 많은 사람들을 함께 걷게 한 선구자다. 지금까지 그가 이루어온 일들은 모두가 정부가 나서 해야 할 일들이다. 외국이주노동자와 중국동포의 문제가 그렇고, 다문화가정을 지원하는 사업이 그렇다. 그럼에도 그가 주도해온 모든 사업들은 최근에 이루어진 민간위탁사업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부지원 없이 오로지 민간후원으로만 일궈왔다. 한눈팔지 않고 대한민국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온 그를 한 언론사는 실천하는 지성인으로 꼽았으며 여러 신문사가 선정하는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에도 그의 이름은 여러해째 빠지지 않는다. 포스코청암봉사상을 비롯해 국민훈장 석류장 등 수많은 상이 그의 앞에 놓였지만 그 결실 모두는 나눔을 실천하는 일에 되돌려졌다. 많은 지식인과 지성인을 깨어나게 한 전태일 평전을 인생에 가장 감명 깊게 읽는 책으로 꼽는 그는 운명을 선취해 인류에 기여하는 길을 열어가는 일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믿는다.

  • 기획
  • 김은정
  • 2013.12.12 23:02

전국 첫 '선도 사회적기업' 군산 (주)농민농산

18년전 창업할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골의 작은 식품업체.한걸음 한걸음 성장을 거듭해 오던 농촌의 작은 업체는 어느새 연 매출 수십억원에 이르는 알짜기업이 됐다.군산 나포면 주곡리 (주)농민농산이 그 주인공으로 FTA 등 시장개방과 고령화양극화로 농가들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도 농심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신제품 개발로 승부해 왔다.농민농산은 소외계층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으로 단순한 이윤 창출을 넘어 우리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지렛대 역할을 하며 농촌 기업의 선도 모델의 길을 걸어왔다.△농민농산은?군 제대 후 삼성항공을 시작으로 삼성계열 회사에서 근무하던 이흥수(48)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농산물 가공산업의 매력과 잠재력에 매료돼 과감히 자리를 옮겨 30세이던 1995년 고향인 나포로 귀촌했다.한국농업유통사업단등에서 농업 유통조직의 노하우를 익힌 이 대표는 농림부 전통식품지원업체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어라를 사훈으로 농민농산을 창업해 쑥냉이된장국 원료를 비롯해 감자맛바 등 제품들을 출시했다.농민농산의 도전은 미니고구마 등 더욱 다양한 제품개발로 이어졌으며, 안정적인 유통망 확보를 위해 국내 대형 식품제조유통 업체 등과 지속적으로 접촉해 현재 전국 120여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 납품하는 등 연 매출이 40억원에 이르고 있다.또 귀농인들을 위한 표고버섯 농법 교육과 체험 진행으로 농촌 정착을 유도해 고령화된 농촌을 젊고 활기찬 농촌으로 변화시키고 있다.이흥수 대표는 1999년 군산 1호 신지식인으로 선정을 시작으로 농림부 전통가공식품 신지식인에 선정됐으며, 2004년 농림부로부터 농산물가공 산업발전유공자 산업포장을 수상하며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우는 등 농산물 가공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2000년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을 거쳐 전라북도 유망 중소기업에 선정됐으며, 2007년 8월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2008년에는 벤처기업과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인증까지 획득하면서 농산물 가공업체로서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특히 고령 농업인의 노하우와 젊은 농업인의 아이디어가 만나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면서 지난해 3월 전라북도로부터 (예비)사회적 기업에 지정됐다.지난 10월에는 전북도와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이 개최한 공개오디션을 거쳐 전국 최초 선도 사회적기업으로 최종 선정했다. 농민농산은 농민의 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은 물론, 귀농귀촌자에게 희망을 주며 고부가가치를 창출해 가며 농촌 기업의 선도모델로 자리잡고 있다.△신제품으로 승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콩, 고구마, 쌀 등을 주 원료로 사용하는 농민농산은 미니고구마를 비롯해 골드바, 감자핫바와 와플스틱, 단호박과 고구마, 치즈가 들어간 웰빙떡볶이 등의 제품을 개발 생산하고 있다.이 중 야심작은 4년여의 연구개발 끝에 2011년 제1회 농식품 가공 및 아이디어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차지한 미니고구마이다. 자연이 준 고마우이라는 브랜드로 출시되고 있는 미니고구마는 껍질을 벗길 필요 없는 영양간식으로 고구마 모양 그대로 작게 만들어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영양간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미니고구마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결토 녹록치만은 않았다. 고구마 특성 상 균질한 맛을 내기가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기계개발도 쉽지 않았다. 주변의 만류와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는 끈기로 결국 미니고구마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이렇게 탄생한 미니고구마는 식이섬유질이 풍부해 변비와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커 인기리에 판매되면서 농민농산의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마침내 국내를 넘어 지난해 11월 미국, 영국, 캐나다로 수출되기 시작했으며, 지난 7월부터는 수도권 소재 롯데백화점 4곳(본점, 분당, 평촌, 중동)에서 전시판매되고 있다. 특히 올해부터 중국에 로열티를 받고 진출했으며, 현재 일본에서 기술제휴 제의가 들어오는 등 미니고구마는 우리 고구마산업의 세계화에도 일조하고 있다. 고구마 종순에서부터 가공까지 생산과 소비처 확보는 물론, 일자리까지 창출하며 고구마 가공산업의 선도제품이 된 미니고구마가 고구마 농가의 희망으로 떠오른 것이다.△이웃과 함께하는 사회적 기업농민농산은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먹거리 나눔을 통해 이웃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착한 기업이다.국내 농산물 가공산업 발전에 한 축을 담당해 오면서도 창업 이래 이웃들과 함께 나눔을 실천해 오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농민농산은 농산물 가공산업과 함께 취약계층에게 안정적 일자리를 제공하고 귀농인들을 위한 표고버섯 농법 교육과 체험으로 농촌 정착을 유도해 고령화된 농촌을 변화시키고 있는 공로 등으로 지난 10월 전북도와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으로부터 선도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됐다.이와 함께 보건복지부 2013년도 고령자 친화기업 공모에서 7대1의 경쟁을 물리치고 고령자 친화기업으로 선정됐다.또 저소득층 창업을 돕는 행복나눔 공모사업에도 선정돼 재능기부에도 앞장서고 있다. 사업 초기 5명도 안되던 직원들이 현재 25명에 달하고 있으며, 이중 60%인 15명이 취약계층이다.농민농산은 이들이 앞으로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단순히 이윤이 목적이 아닌 사회적 기업의 가치실현과 어려운 계층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이다.이흥수 대표는 이웃과 함께 건강한 농촌을 만들고 고구마 산업 1조원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목표다고 밝혔다.● 이흥수 (주)농민농산 대표 "가공하면 식품 가치 달라져"이흥수 대표는 지난 18년 동안 쉼 없이 지역 농산물 가공산업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왔다.결국 아이디어입니다. 그동안 찌거나 구워먹어야 했던 고구마의 불편함을 구입 즉시 먹을 수 있도록 편리성을 부여한다면 고구마도 편의점에서 팔리게 됩니다그는 똑 같은 식품도 가공여부에 따라 부가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사업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가공식품 개발에 몰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특히 우리나라 고구마 생산량의 30~40%가 소비자 선호보다 크기가 커 규격 외로 분류되는 관계로,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수확하다 보니 전분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공용 고구마 생산을 확대하는 등 고구마 농가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이 대표는 현재 고구마 관련 신제품 10여가지와 함께 탈피기계 자체수분 찜 기계 등도 개발한 상태로 지난해 80톤 매입했던 고구마도 올해 1000톤 가량 매입했다며 현재 김제에 2772㎡ 규모의 전처리 공장을 지어 가동 중이며, 내년부터 이곳에서도 4490㎡ 규모의 군산 공장과 함께 완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고 말했다.특히 취약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행복을 주는 것이고 그 선두에 기업이 앞장서야 한다며 사회적 기업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등과 협력 체계가 구축된다면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는 진정한 지역 일자리 창출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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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일권
  • 2013.12.1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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