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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명산, 회문산의 속살] ⑧문화예술로 녹아든 회문산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무겁게 짊어졌던 회문산은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형상화 됐을까. 회문산의 역사적 무게에 비해 문화예술적 성취는 전체적으로 크지 않다. 그럼에도 회문산을 무대 삼거나 소재로 한 문예창작 활동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빨치산 활동을 기록한 이태의 수기 <남부군>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회문산을 조명하기 위한 지역 작가들의 문예 활동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빨치산에 가담했던 이태(1922~1997)가 저술한 수기 형식의 <남부군>은 회문산을 일약 빨치산 활동의 중심무대로 올려놓았다. 1988년 <남부군>이 발간됐을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병주와 조정래가 각각 장편소설 <지리산> <태백산맥>을 통해 빨치산 문학의 길을 열었다면, <남부군>은 작가의 직접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은 저자가 빨치산에 입문한 회문산에서부터 지리산에서 체포될 때까지 기록이다. 서울에서 합동통신 기자로 활동하던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는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로 흡수돼 전주지사에서 근무하게 된 것이 빨치산 입문 계기였다. 1950년 9월 연합군이 군산에 상륙하면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사령부를 따라 그 대원이 되어 회문산으로 들어가게 됐다. 회문산 독수리부대를 거쳐 이현상의 남부군에 편입돼 17개월간 체험을 기록한 것이 바로 <남부군>이다. 저자와 빨치산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 <남부군>이 생생하게 전한다. "구림천 골짜기 거너너 저편에 봉리는 7백미터대의 장군 회문연봉, 그리고 어느 골짜기엔가 사령부가 있을 시퍼런 산덩이는 마치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믿음직하게 보였다. 섬진강가로부터 급경사를 이루며 솟아 오른 회문봉의 나무 없는 정상은 옛 얘기에 나오는 고성처럼 장엄하고 신비로웠다. 거기서 말안장처럼 한 번 숙었다 다시 솟은 장군봉은 거대한 바윗덩이를 잇고 있어 투구바위로 불렀다. 회문산괴를 이루는 이 두 봉우리는 이듬해 3월 사령부가 소백산맥으로 이동할 때까지 언제나 우리들의 마음의 메카였다. 어떤 위기를 당했을 때도 아득히 그 봉우리들이 바라보이면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든든했다" 회문산 무대는 국군의 집중 진압작전에 따라 덕유산까지 1개월에 걸쳐 이동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 투쟁과 체포될 때까지 과정을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이태의 <남부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태 본인의 빨치산 활동이 17개월에 불과하고 하급 간부로서 정보를 접하는 데 한계가 있어 일면만을 다루거나 잘못된 기술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서 <남부군>은 이태의 풍부한 화술로 묘사된 개인사의 정리일 뿐 당시 빨치산의 집단적 삶과 의식을 객관화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곁들여진다. 그럼에도 이 책은 회문산 빨치산 활동을 이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 작품으로, 회문산의 빨치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이태는 1952년 생포된 후 사상 전향하였고, 이후 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민추협과 YS의 민주산악회 간부를 지냈으며, 회문산을 몇 차례 다녀간 것으로 전해진다. 영화 '남부군' 포스터. 회문산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된 데는 영화 남부군이 큰 몫을 담당했다. 이태의 <남부군>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부군은 1990년 개봉 당시 서울에서만 37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는 대체로 원작을 충실히 따랐으나 개봉 당시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금기시됐던 빨치산 소재라는 이유로 종북논란도 제기됐으나 이후 오히려 반공물 성격이 짙다는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87년 6월 항쟁 이후 변화된 사회환경을 수용하고 시대적 담론을 반영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빨치산의 치정관계를 다뤘던 영화 <피아골>(1955)마저도 고뇌하는 빨치산을 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친공영화로 매도됐던 걸 감안하면 큰 변화며,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태백산맥이 나올 수 있었던 밑거름도 됐다. 이 영화로 정지영 감독이 청룡영화제 감독상을 받았고, 안성기최민수최진실은 각 남우주연상남우조연상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여러 후일담을 남겼다. 제작기간이 3년으로, 원작자의 빨치산 활동 기간이었던 1년 7개월보다 길었고, 동원된 엑스트라가 연인원 3만명에 달했다. 주연이었던 안성기가 89년 한 해 꼬박 이 영화를 촬영하느라 그 해 출연 작품을 내지 못했으며, 극중 역할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27일간 머리를 감지 않았다고 한다. 최진실과 임창정(고교 1년)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했다. 영화 촬영지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지린산포항 보경사 등 전국에 걸쳐 있다. 주인공 이태가 활약했던 회문산에서 촬영한 장면은 주요 전투 장면과 철수 장면이다. 또 회문산 입구 안정 마을 앞 치천에서 빨치산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 등이 촬영됐다. 아지트를 배경으로 한 빨치산 활동상은 고창 선운산 정상과 용문굴 일대에서 촬영됐고, 이현상의 남부군 빨치산 500명이 목욕하는 장면 촬영지는 장수읍 덕산리에 있는 덕산계곡이었다. 구절초공원으로 가는 길인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 능다리(만경대 다리)에서는 경찰과 전투 중 총상을 당한 이태를 박민자(최진실)가 치료해주던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이곳은 영화 타짜와 드라마 전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회문산 로케이션 촬영때 영화 제작진과 주요 배우 등 약 30~40여 명이 순창읍에 숙소를 정하고 1주일 정도 숙식을 했으며, 당시 지역에선 영화배우 이야기가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김영 시인 회문산부터 지리산까지 이태와 함께 빨치산 활동을 함께 한 순창 출신의 김영 시인(1929~1995, 본명 김웅)은 <남부군>에 실명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영화 남부군에서 최민수가 그의 역할을 맡았다. 이태가 남원수용소에서 6개월만에 풀려난 것과 달리 김영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20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복역 중 폐결핵으로 12년 9개월만에야 가석방으로 출소했을 만큼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순창농고를 졸업하면서 시집을 내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은 1988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한 후 그 해 첫 시집 <깃발 없이 가자>를 출간했다. 그는 또 자전 수기 <총과 백합꽃>(1988년) <빨치산 철창수첩>(1990년)에 이어 서간집 <두 하늘에 띄우는 그림>(1991년) 등을 잇따라 내놓으며 자신의 삶과 시대적 아픔을 절절하게 토해냈다. 그의 삶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이에 앞서 <신동아>(1965년 12월호, 논픽션 우수작)에 게재된벽과 인간을 통해서다. 고향 순창으로 내려와 쓴 어느 전향자의 수기라는 부제를 단 이 논픽션은 그가 어떻게 빨치산에 들어가게 됐으며 그 후 포로수용소와 형무소 생활이 어떠했는지 일기체 형식으로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처음 기독교사회주의에 가까운 생각을 품고 있었으며 원거리에서 코뮤니즘을 경험했으나 차츰 환멸을 느껴 오래 방랑과 고민 끝에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코뮤니즘을 청산하고 전향하게 됐다. 그가 빨치산에 들어가게 된 것은 연세대에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순창으로 내려왔을 때 열성 남로당원 친구와 붉은 완장을 찬 여친 영향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12년 감옥살이 후에 남은 것은 폐병과 심장병과 위궤양 뿐이나, 만신창이 몸으로 생존경쟁의 광장으로 나선다. 제로. 아무것도 없는 영에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지금 아무런 이력서도 없고 증명서도 없다. 도민증도 없고 당원증도 없다 보호자도 없고 집도 없다. 어디로갈까. 쿼바디스. 이제야 나의 구원자는 내가 되리라. 목숨보다 소중한 자유의 선물을 헛되게 해선 안된다.(1964년 12월19일자 일기) <빨치산 철창수첩>에서 그의 역사적 인식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책 서문에서 (빨치산) 비극의 역사가 그대로 망각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고 저술 배경을 설명했다. 또 책 발간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도 묶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내는 것은 더없이 아프고 쓰린 일이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또다른 비극을 방지하는 일이자 살아남은 자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장교철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은 순창이 낳은 천재로까지 일컬어졌던 김영 시인은 분단이 준 처절하게 함몰되고 희생된 시인이다며, 김영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김원용
  • 2021.11.01 16:57

[뉴스와 인물] “한옥마을에 제2의 국악방송을 세우고 싶어”

유영대(65남원사진) 국악방송 사장은 전주 한옥마을에 제2의 국악방송을 세우고 싶다고 했다. 한옥마을에 관광객들이 국악을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국악방송의 새로운 센터를 세워 한옥마을의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전주는 국악의 성지이고, 물적인적 인프라가 갖춰져 있기에 충분히 (성공)가능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올 9월 1일자로 국악방송 사장에 임명된 이후, 창립 20주년을 맞은 국악방송의 미래 비전을 가다듬느라 바쁜 와중임에도 전주를 특별히 언급했다. 단순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악 분야에서 전주가 갖고 있는 중요성 때문이었다. 본보와의 인터뷰 도중에 그에게는 전화가 쉴새없이 걸려왔다. 예산 확보를 위한 국회 차원의 대응, 프로그램 개편과 공연 기획 등에 대한 문의로, 그에 일일이 대응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좁은 의미의 국악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음악이라는 큰 범주로 확장해 세계화의 물결에 대응하겠다며 새로운 20년의 비전을 제시한 그를 서울 마포구 상암동 국악방송 본사 사장실에 만났다. - 교수에서 방송국 사장으로 변신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적잖게 고민했죠. 그러나 조직을 관리해 본 경험이 있어 자신이 있었습니다. 특히 국악과는 오랜 인연이 있는터라 나름 계획이 있었습니다. - 본 전공은 국문학인데, 국악과의 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조부께서 고 임방울 명창을 집으로 초대해 후원할 정도로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고, 제 자신도 어렸을 때 남원에서 창극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그게 나의 토양입니다. 전주 우석대 재직 시절에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유치를 위해 국악과 교수들과 함게 공연했고, 서울로 올라와선 국립창극단 예술감독도 맡았습니다. 특히 당시 청이와 춘향를 올렸는데, 국내 대표 방송프로그램 제작사인 박스 미디어에서 지금껏 본 창극중 최고라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MB정부 땐 유인촌 장관으로부터 다시 한번 감독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 국악방송TV 활성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적지 않습니다. 향후 계획은. 인력과 예산이 너무 부족합니다. 현재는 최악의 상황이죠. 그래서 국악방송 시청자들이 도중에 채널을 절대 돌리지 않고, 직원들이 중도에 퇴직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게 제 기본 목표입니다. 먼저, 방송은 11월 1일부터 프로그램을 개편하는 것을 시작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바꿔나갈 것입니다. TV의 완성도도 높일 것이고요. 오디션 프로는 이미 여러 방송국에서 시작한 터라 내년으로 연기했는데, 내년에 최고 퀄리티의 오디션을 선보일 것입니다. 방송 진행은 국악인만을 고집하지 말라며 열어놨습니다. 대중가수가 진행하는 국악방송을 밤 10시부터 2시간 생방송으로 할 예정입니다. 또 취침 전 시간에는 국악은 50%만 하고, 나머지는 탱고 등 다양한 장르를 방송하라고 했죠. 우리가 하는 도전을 지켜봐 주세요. - 최고의 오디션 프로를 만들 복안은 있는지. 현장에선 실력은 최고이지만, 스승의 만류로 방송에 나오지 못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여타 방송국에 비해 국악방송이 갖는 경쟁력은 무엇인지. 물량 등의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콘텐츠는 너무 좋습니다. 문제는 콘텐츠를 어떻게 포장하느냐인데, 잘만 해놓으면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대는 방송국이 아닙니다. 세계화입니다. 그래서 슬로건로고도 바꾸라 했습니다. 앞으로는 K-MUSIC으로 쓸 계획입니다. K팝처럼 K브랜드로 가는 것이죠. - 세계 시장을 무대로 삼겠다고 했는데, 가능성은 어느정도 입니까. 가능성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통성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국악 밖에 없습니다. K팝이나 K컬쳐가 있으나, 자칫하면 다 무너져 버립니다. 그런데 국악이라는 베이스가 탄탄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한류는 국악에 있죠. 외국인들은 우리의 민요나 판소리를 들으면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감동합니다. - 외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 정도가 아닌지. 호기심은 10분 정도면 충족됩니다. 그런데 4시간을 앉아서 듣는다는 것은 호기심 차원을 넘어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감흥된다는 것이죠. 파리에 가면 퓨전처럼 가는 아이들은 큰 인기를 얻지 못하지만, 안숙선 선생이 가서 완창을 하면 숨도 안 쉬고 다 지켜봅니다. 세계 시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 좋은 작품 못지 않게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중요할 것 같은데.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시절에 주한미군을 초대해 공연한 적 있는데, 모두들 황홀해 했습니다. 공연 후 평가를 보내와서 월 1회 미8군에 가서 창극단 공연을 했습니다. 그 때 느낀 게 외국인들과 커뮤니케이션하는게 쉽다는 것이었죠. 그들이 훨씬 감수성이 예민하고, 우리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의 국악을 모릅니다. - 최근 방송국 오디션 프로에서 소리꾼들이 K-팝과 크로스오버(특정 장르에 다른 장르 요소를 합친 음악)한 곡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두가지 입장입니다. 정통국악 고수론자의 입장에 보면 냉소적이지만, 국악방송 사장 입장에서는 아주 바람직합니다. 자꾸 저렇게 돼야 합니다. 그런다고 판소리가 훼손되지 않죠. 오히려 원형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위와 같은 형태가 나온 이유가 있습니까. 2000년대 초반에 제가 시도했던 것인데, (국악이) 어떻게든 박제화되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이 표출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새로운 형태가 또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진화하는 것이죠. - 전주는 대사습놀이 등 판소리 중심지였는데, 최근엔 예전 같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주 한옥마을에 제2의 국악방송을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서울 본사 처럼 국악방송의 새로운 본부로 말이죠. 현재의 위치보다 좀 더 큰 극장을 인수해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공개 생방송하고, 관광객들이 모두 들어와서 배우고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할 생각입니다. 자치단체에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준다면 훨씬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제2의 국악방송을 굳이 전주에 세우려는 이유는 무엇인지. 전주는 국악의 성지같은 곳입니다. 특히 전주는 인적물적으로 충분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국악을 관람할 수 있는 관람객도 이미 훈련돼 있죠. 한옥마을에 들어서게 되면 한옥마을은 더욱 살아날 것입니다. 전주의 랜드마크가 한옥마을이라면, 한옥마을의 랜드마크는 국악방송이 될 것입니다. - 국악방송이 2001년 개국 때 서울 본사와 남원의 중계소로 시작했는데, 그 이유가 있습니까. 남원이 민속 음악의 본 고향이기에 당연한 것이죠. 그 만큼 남원이 중요하다는 의미죠. 남원을 살려야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한 때 기회가 있었는데, 그 것을 살리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합니다. - 그 기회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남원에 국립민속국악원을 유치할 때 기획했던 게 북한과의 교류였습니다. 북한은 민족 가극 춘향전이 있고, 우리는 창극 춘향전이 있기에 남북교류하자고 했죠. 그 때가 1993년으로, 당시 키를 쥐고 있었던 고 윤이상 선생을 만나러 베를린을 갔죠. 계획안을 들은 윤이상 선생은 이후 김일성을 만나 제안을 했고, 김 주석은 한다고 했죠. 그런데 그 해 김 주석이 사망하는 바람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그 때 그 계획이 성사됐으면 남원이 세계적으로 클 수 있었죠. 1956년 전북 남원 보절면 출생. 남원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상경, 서울 배문고-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졸업 후 1985년 우석대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0년간 전주에서 활동하다 1995년 고려대로 옮겼다. 올 8월 정년 퇴임 후 국악방송 사장에 임명됐다. 임기는 국립국악원장으로 옮긴 전임자의 잔여 임기인 내년 9월 1일까지다. 국문학자보다 판소리 전문가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과 국립중앙극장 창극단 예술감독, 판소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2006~2012년) 시절, 총괄했던 공연 청을 비롯해 창극 산불춘향 등의 작품은 지금까지 많은 국악인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그 같은 공로로 이데일리 문화대상 국악대상을 비롯해 다수의 국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사 논문을 심청전 연구로 썼던 그는 이후 국악과 연을 본격적으로 이어간 그는 전주MBC에서 10여년간 판소리 기행을 진행한데 이어 KBS FM-판소리 기행(3년간)과 국악방송 유영대의 판소리 여행(12년간)을 진행했다. 국악방송은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고 박재윤 초대 국립민속국악원장을 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며 나의 스승이시다고 했다. 실용응용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지난 2000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원에 문화콘텐츠 과정을 개설하기도 했다.

  • 기획
  • 김준호
  • 2021.10.31 17:04

일본의 귀 · 코무덤, 한국에 이전 주장은 생각해 볼 일

정유재란 때 왜병의 잔학상 보여줘 왜인(倭人)들 자손만대(子孫萬代)까지 두고 봐야 일본, 처리 못해 크게 골치 앓아 일본 교토(京都)에 가면 귀무덤(코무덤)이 있다. 그 귀무덤(耳塚), 코무덤(鼻塚)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1597년, 이른바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들이 그들 군사들의 무공을 확인하고, 또 개인 자신의 무공을 자랑하기 위해 그 증거물로 우리 조선인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저희들 본국에 보낸 것을 땅속에 묻은 무덤인 것이다. 그것을 귀무덤 또는 코무덤이라고 부른다. 당시 왜적들은 조선에서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이고, 생 사람의 코와 귀까지 베어 저희들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 독전관(督戰官)을 통해 보냈던 것이다. 그 때 우리 나라에는 귀와 코를 잘린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는 기록이 있다. 생사람의 귀와 코를 자르다니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다. 이는 세계 전쟁사상(戰爭史上)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왜군의 만행이었다. 이에 대한 일본인 학자의 기록을 보면, 1597년 경장전역(慶長戰役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조선 침공의 선봉장이기도 했던 기쓰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이 사람의 경우는 요시카와라 하지 않음)라는 자가 이 해 2월 17일 도요토미가 파견한 독전관에게 금시 베어 온 조선인의 코 358개를 바치고 수령증을 받고 득의에 찬 모습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이 해 9월에서 10월초까지의 사이에 조선인의 코를 무려 1만 8350개를 바쳤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도처에서 학살, 방화, 약탈 등을 일삼았는데 특히 조선인만 보면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그리고 머리 대신 귀를 자르다가 다시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보냈던 것이다. 이를 풍신수길은 교오토의 방광사(方廣寺) 서쪽에 귀코무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잔인무도한 짓인가. 이는 일본 도쿄(東京) 히토쓰바시(一橋)대학의 나가하라 케이지(永原慶二) 교수가 그의 저서 일본사(日本史)에서 밝힌 것이다. 그런데 얼마전 남원의 몇몇 인사들이 일본에 있는 귀무덤코무덤을 만인(萬人義塚)옆에 옮기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또 전북대 의대 박모교수도 우리나라에 모두 가져와야 한다고 중앙의 모 일간지에 투고한바 있었다. 애국심에서 나온 말이다. 참으로 일리가 있고, 이해가 가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이 귀무덤코무덤은 과거 일본인들의 잔인무도함을 보여준 역사적 증거물이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나라에 가져오다니 그것은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필자의 생각은 우리나라에 가져오는 것은 절대로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것인가. 그 귀무덤코무덤은 현재의 위치에서 옮긴다거나, 또는 우리나라에 가져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아직도 지난날의 죄악을 뉘우칠 줄 모르는 일본인들이 앞으로 백년이고 천년이고 그들의 후손들까지 그것을 직접 보고 저희들 조상들이 저지른 잔악상과 죄악상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적(史蹟)은 원래 있었던 그 자리에 그것도 원형(原型)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현재 일본에는 쿄토(京都)외에도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1만 8350명의 귀코무덤과 3천명이 넘는 귀코무담이 오카야마(岡山)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모두가 민족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국 사람이라면 눈물 없이는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기막힌 역사적인 무덤인 것이다. 오늘날 그쪽 일본인들은 그 귀코무덤을 어떻게 처치를 못해서 큰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21세기의 광명천지에 그 못되고 잔인했던 코귀무덤이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민족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한국에서 만일 가져오겠다고 한다. 얼싸 좋다하고 춤도 출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섣불리 코귀무덤 이전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좀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20여년전의 일이지만 1997년 1월, 부산의 박모라는 중이 일본에서 귀코무덤의 일부를 옮겨 왔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리 됐는지는 잘 모르나 현재 우리 고장 부안(扶安)의 호벌치(胡伐峙)에 있다고 들었다. 설사 어떻게 돼서 이 코귀무덤을 옮겨오게 될 경우가 되면, 그것은 국가에서 외교적, 법적으로 잘 따져서 이전 해와야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에 나설만한 입장이 못되는 한사람의 종교인이 그같은 짓을 했다는 것은 당돌하기 그지없는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에 있는 귀코무덤의 이전문제에 대해서는 섣부르게 생각하지 말고 깊이깊이 잘 생각해야 할 줄 믿는 바이다. 1954년 연합신문 기자로 출발해 전북일보에서 편집국장주필 등을 지내며 언론인으로서 현장을 누볐다. 1980년대 초 어려운 학생을 위해 전북 최초로 전북애향장학재단을 설립해 인재양성 요람으로 육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과 독립유공자 588인의 이름을 새긴 현장비를 건립하는 데 앞장섰으며 전북향토문화연구회를 16년동안 이끌다 지난 2019년 명예회장이 됐다. 2015년 한국서원협회 결성 회장직을 맡아 한국서원이 2019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는데 기여했으며 정읍 무성서원 원장을 16년째 맡고 있다.

  • 기획
  • 기고
  • 2021.10.26 18:18

[지방자치 부활 30년, 전북 지방자치 발자취와 미래] ⑤분권선도지역 통해 바라본 지방자치

올해로 지방자치 부활 30년을 맞은 대한민국과 전라북도. 지난 30년간 민주주의 토양 아래 뿌리를 내린 지방자치는 올해 새로운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2월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내년 시행을 앞두면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더욱 신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내년 시행될 지방자치법은 제주특별자치도를 통해 15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국 유일의 특별자치도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리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내년에 시행할 지방자치법의 많은 부분을 이미 시행 중이다. 지방 자치분권 선도 모델로 꼽히는 이유다. 전북은 새만금 등 향후 특별자치지역으로서의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전북일보는 변화하는, 그리고 변화할 지방자치의 모습을 앞서 확인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를 찾았다. 지방자치 부활 30년, 그리고 제주의 특별자치도 15년의 모습을 통해 전북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 등을 짚어봤다. 제주도는 지방 자치분권의 선도 모델로 꼽힌다. 전국 유일의 특별자치도로 고도의 자치권을 누린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제주특별법)으로 중앙의 권한이 대폭 이양되면서다. 출범 이래 4660건에 이르는 중앙의 권한이 넘어오면서 도의 자치 행정입법권 범위가 다른 광역단체보다 확대됐다. 지난 2006년 제주특별법 시행에 따라 7개 특별지방행정기관이 이관되고 자치경찰제가 도입된 가운데 중앙권한 이양에 따른 제주도 조례들도 정비됐다. 특히 제주시서귀포시북제주군남제주군 등 4개 시군이 폐지되고, 행정시인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거느린 단일 광역자치단체로 탄생했다. 시장군수와 시군의회 의원선거가 없어졌으며, 대신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정수는 지역구의원 29명, 비례대표의원 7명, 교육의원 5명을 포함해 41명으로 제7대 도의회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이양받은 특례를 활용해 자치분권 분야에서 행정기구의 설치와 지방공무원 정수 등 제주 특성에 맞는 조직 설계 및 운영이 가능해졌다. 공무원 정원은 2006년 5169명에서 6164명으로 늘었고, 개방형 직위도 확대됐다. 전국 최초로 감사직렬이 신설되고, 감사위원회의 법적 독립성도 강화됐다. 교육자치 분야에서는 영어교육도시가 조성되고, 차별적인 교육과정 편성을 통한 제주형 자율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생활 질서 등 지역 특성에 맞는 치안 서비스 제공을 위한 자차경찰제가 전국 최초로 도입됐다. 제주지방국토관리청 등 7개 특별지방행정기관이 이관돼 지역 특성에 맞는 사업발굴과 대 주민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는 게 제주도의 평가다. 특별자치도 출범 이전과 이후 제주는 양적질적 확대가 이뤄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각종 수치를 비교해보면 이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주지역 인구는 특별자치도가 출범한 2006년 56만 1695명에서 2020년 69만 7578명으로 24.2% 증가했다. 예산 규모(본예산)도 같은 기간 2조 5972억 원에서 6조 2362억 원으로 2.4배가 증가했다. 재정자립도도 29.9%에서 32.6%로 2.7%p 높아졌고, 지방세 징수액도 4337억 원에서 1조 6018억 원으로 3.7배가 올랐다. 특히 외국인 직접투자는 1억 500만 불에서 47억 5300만 불로 45.3배가 뛰어올랐다. 노인 일자리도 2064명에서 1만 2130명으로 5.9배 증가했고, 장애인 일자리 수도 431명에서 1087명으로 2.5배 늘었다. 다만, 인구와 관광객의 증가로 인해 1일 생활 쓰레기 발생량은 2006년 984t에서 2020년 1173t으로 늘었다. 제주는 특별자치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지만, 제주의 지방자치 전문가들은 그 성장이 도민들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전반적인 도민 삶의 질 향상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특히 풀뿌리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더욱 약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도민들에게 직접적인 체감이 느껴지기 위해서는 개개인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만, 지난 15년간 늘어난 교통량과 쓰레기, 주택난 등이 악화하면서 개인에게는 부정적인 인식이 높아졌다. 그러다 보니 특별자치도에 대한 효능과 인지도 또한 오히려 낮아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히, 특별자치도를 추진하면서 분권권한 이양이 많이 돼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늬만 권한 이양이라는 목소리도 나오는 실정이다. 지난 15년동안 제주는 4660여건의 권한을 가져왔지만, 이 권한들이 도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활용되었는지 의문의 시각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교훈 삼아 전북도 차원의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좌남수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 지방자치 부활 30년과 제주특별자치도 15년을 맞아 좌남수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에게 그동안의 성과와 향후 개선점을 물었다. 좌 의장은 지난 15년 동안 제주의 인구는 25% 증가했고, 예산 규모 2.4배, 지역 총생산 2.3배, 관광 조수익 3.7배, 외국인 직접투자 45.3배 등이 증가하며 큰 변화를 가져왔고, 관광객 또한 연 500만 명에서 1600만 명을 기록하기도 했다면서 이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4660여 건의 권한도 가져와서 대한민국 자치분권 발전의 이끄는 큰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한다고 밝혔다. 고도의 자치분권 보장을 위해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으로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해 분권의 선도 모델 역할을 해왔다는 자부심이다. 다만, 권한만큼의 재정적 뒷받침이 이뤄지지 않아 도민 삶의 질 향상이 눈에 띄게 이뤄지지 않은 점은 한계로 꼽았다. 그러면서도 제주의 경험이 지방자치법 전면개정의 밑거름이 되었고, 자치경찰제 전국 확대로 이어지고 있는 만큼 분권선도 지역으로 그동안의 한계를 보완하고 성과를 공유해야 하는 책임은 막중하다고 생각한다며 제주도의회를 중심으로 지난 15년의 성과를 개선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주특별법 개정을 위한 제주특별법 전부개정 의회 T/F를 구성해 처리할 과제들을 선정해 국회에 건의하는 등 발 빠르게 대처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좌 의장은 제주특별법 전부개정을 위해 도민은 물론 전문가분들과 각계각층의 다양한 분들의 지혜를 하나로 모아서 도민주권이 높아지고, 자치분권의 실현되는 제주를 만들어가는 데 더 힘을 내겠다고 강조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천경석
  • 2021.10.25 17:12

[뉴스와 인물] 이현웅 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 “지역 경제 ‘성공파트너’ 된다”

안녕하세요 이현웅 신입 원장 인사드립니다. 신입 사원의 마음으로 초심을 잃지 않는 신입 원장이 되겠습니다. 앞으로 중소기업소상공인을 비롯한 전라북도 지역경제의 성공파트너가 되고 성공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드리는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이 되겠습니다. 전북 경제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로 평가받는 이현웅(58)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 원장이 취임한 지도 두달이 지났다. 그의 업무공간에는 항상 태블릿PC가 놓여 있다. 아이디어 메모장이나 현재 전북 경제 상황판 역할을 하는 도구로 쓴다. 전북경제통상진흥원(이하 경진원)의 제13대 원장으로 지난 8월 13일 임용장을 받고 정신 없이 바빴다는 이현웅 원장. 이 원장은 자기 자신이 전북 경제의 도구로 쓰여 코로나19로 신음하는 중소기업소상공인들의 아픔을 달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백신 개발과 접종으로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맞아 이전 보다 더 큰 변화를 준비해야 될 경진원의 수장인 그를 만나 그동안의 이야기와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 전북경제통상진흥원(이하 경진원)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경진원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중소기업의 적응을 도와 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 공공기관입니다. 한 마디로 경제정책 전문기관으로서 현장에서 발로 뛰며 전라북도에서 수립하고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것이 핵심 업무입니다. 현재 지원하고 있는 분야는 마케팅, 자금지원, 창업지원, 사회적 경제, 일자리 지원, 기업경쟁력 강화 등이 있으며,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만큼 지역경제 전반과 밀접하게 연결된 기관입니다. - 경진원장으로서 앞으로 소감과 포부는 무엇입니까. 코로나19로 인해 경제가 어렵고 힘든 시기에 이와 같은 중책을 맡게 돼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20여 년간 쌓아온 경진원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중소기업소상공인에게 든든한 힘이 되면서도, 새로운 경영환경에 걸맞는 신사업을 구상하기 위해 고민하는 중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경진원을 전북경제의 종합터미널로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전북 경제와 관련된 정보, 기술, 자금, 인력이 한곳에 모인 터미널이 되고 도내 업체들의 필요에 따라 맞춤형 지원사업을 제공할 수 있는 기관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 올해 경진원의 주요 사업 내용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경진원은 기업의 신규 창업을 돕는 인큐베이터이자, 스타기업으로의 도약을 지원하는 성장 사다리입니다. 기업의 규모업종형태별로 서로 다른 맞춤형 지원사업을 실시함으로써 창업부터 성장까지 전 과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도내 중소기업을 위한 사업으로 기술 혁신성을 지닌 우수 제조기업을 발굴하고 단계별 성장을 지원하는 돋움기업 육성사업이 있습니다. 경영안정과 창업벤처기업의 성공적인 성장을 위해 자금을 저리로 대여해주는 중소기업 육성자금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명실상부 도내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는 소상공인들을 위해선 도내 유망 업체를 발굴해 대외 홍보를 지원하는 스타소상공인 공개오디션, 전라북도 천년명가 육성사업과 같은 기회가 마련돼 있습니다. 해외 판로 개척을 위한 수출지원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인도 뉴델리에 설치된 해외통상거점센터를 바탕으로 통번역 지원, 시장조사, 바이어 발굴 등 현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입니다. 2023년까지 거점센터를 증설하고 전북의 수출동력을 더욱 확충할 계획입니다. -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기관에서도 변화가 요구되는데 이와 관련해 계획이 궁금합니다. 요즘은 명실상부한 언택트의 시대입니다. 비대면 온라인 시장이 확장됐을 뿐 아니라 유튜브틱톡과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대유행하고 있습니다. 라이브커머스와 같은 새로운 방식의 마케팅 전략이 등장했고, 메타버스 등 가상세계가 수익 창출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변화를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이는 경영환경에 따라 기업지원 기관인 경진원 역시 체질을 새롭게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온라인 마케팅 부문을 확장하고자 합니다. 라이브커머스를 통해 도내 제품을 홍보하고, 기업 소개 영상을 숏폼 플랫폼에 노출시키며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접근할 계획입니다. 2019년부터 꾸준히 추진 중인 온라인 마케팅 사업분야를 더욱 강화하고, 교육 등을 통해 도내 업체들의 비대면 경영전환을 지원하면서 전북 기업들이 포스트 코로나 환경에 적응해 지속적으로 매출을 제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경진원에서 주력하는 지역공헌 활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청년 취업난이 가중하는 만큼, 경진원은 꾸준히 체험형 청년인턴 제도를 운영하면서 도내 청년들에게 일경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라북도일자리종합센터를 통해 취업 관련 역량강화 특강을 꾸준히 운영하는 중입니다. 이로써 취업난을 해소하고, 전북지역의 고질적 문제인 청년인구 유출을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해마다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기획하고 임직원들의 참여를 독려하며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입니다. 해마다 2회 이상 기관 차원의 헌혈행사를 통해 코로나19로 부족해진 혈액 수급을 극복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으며, 명절마다 지역 내 보육원양로원을 찾아 뵙고 이웃 간의 정을 나누는 중입니다. - 마지막으로 전북도민과 전북일보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코로나19가 장장 2년째 이어짐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 규칙과 마스크 착용이 어느새 우리의 일상이 됐습니다. 모두들 적응한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답답함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침체된 경제상황에서 경영을 계속해야만 하는 중소기업소상공인 여러분께서 가장 많은 어려움을 겪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류 콘텐츠의 대유행과 수출성적의 고공행진으로 인해 지역경제 성장에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우리 경진원은 이러한 기회를 부지런히 포착하고 전북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민 여러분들께서도 경진원의 행보에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출근길 마다 60년대생 신입 원장이지만 요즘 경진원에 입사한 90년대생 MZ세대 신입 사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입 사원처럼 열심히 뛰겠다는 각오를 항상 다지고 있습니다. 남원 출신으로 전북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이 원장은 1993년 행정고시(3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행시를 합격한 뒤 중앙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음에도 고향인 전북을 택해 지역에서 공직을 처음 시작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전주시 산업과장과 덕진구청장을 거친 이 원장은 전북도 투자유치국장과 도민안전실장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이뿐만 아니라 대통령소속국민대통합위원회, 안전행정부, 총리실 등을 거치며 중앙에서도 공직생활을 했었다. 지난 2018년 지방선거(2018년)를 앞두고 명예퇴직한 뒤 정치인으로 변신해 화제를 모았다. 한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경진원의 전임 원장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사직함에 따라 공모를 거쳐 최근 선임됐다. 이 원장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를 준수하고자 경진원 임직원들과는 화상회의 플랫폼을 이용한 회의로 업무를 시작했다며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지역 산업과 경제 현장을 찾아 다니며 25년간 쌓아 올린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경험과 지혜를 발휘해 경진원을 지역 경제 중추기관으로 한단계 성장시키겠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 원장은 도내 중소기업소상공인이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적인 어려움을 현장에서 체계적으로 해소해나가도록 뒷받침하겠다며 전북 경제의 새로운 성장 발판과 위기 상황의 돌파구를 경진원이 모색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김영호
  • 2021.10.24 17:1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05)완주 동상에서 홍시 먹고 뱉은 말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 가을날 정취가 듬뿍 담긴 시집의 제목이다. 이 멋진 제목의 시집은 오지나 다름없어 산속의 섬마을이라 불리는 완주군 동상면 주민들의 시를 엮은 것으로, 그들이 시인이 된 사연은 특별하다. 삶이 녹록지 않았던 산골 마을에서 별다른 존재감 없이 살아온 동상면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시집은 탈속한 듯 깨끗한 심성과 꾸밀 줄 모르는 감성과 도저한 애향심 위에 우리에게 친숙한 농경 언어나 토착 정서의 때때옷을 입혀놓은 시편 하나하나가 사뭇 감동적인 독후감을 안겨 준다.는 윤흥길 작가의 추천사를 훈장처럼 달고 있다. 그 시심이 든 동상면은 척박한 산골이지만, 고종 임금에게 진상한 감으로 고종시라 불리는 씨 없는 감과 동상곶감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이즈음의 마을 어귀는 고운 감이 나무에 꽃처럼 달려있고, 곶감 말리는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동상면은 완주군 3읍 10면의 하나이다. 본래 고산군 지역으로 고산 읍내 동쪽에 자리하여 동상이라 이름 붙었고, 1914년 대아리, 수만리, 사봉리, 신월리 4개 리로 개편되었다. 마을의 자리가 초승달 모양과 같다 하여 이름 붙은 신월리는 옛날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가 있어 이름 붙은 용연과 장군대좌혈의 명당이 있다는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검태가 있다. 사봉리는 마을 뒷산의 이름 사봉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봉은 이 산이 옆 마을 검태 뒷산의 장군대좌혈 명당자리 장군의 말이 먹이를 먹는 것과 같은 형상이라 붙은 이름이다. 이 마을 위에는 옛날 먹을 만들던 곳이 있어 마을 앞 시내가 먹물과 같아 유래된 묵계가 있다. 수만리는 조선 중엽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이 마을을 지나가다 이곳은 장차 물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 한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대아리는 일제강점기에 저수지를 막기 위하여 마을을 옮겨 새로 붙인 이름이다. 원래 큰 골짜기라큰골이라는 이름의 대실이었으나 대실마을은 대아 저수지 속에 잠겨 있다. 옛 지명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설화 속에는 그 땅에서 희노애락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동상면은 만경강의 첫물을 내는 밤샘을 품은 곳으로, 샘물이 땅을 적시며 굽이굽이 흘러 평야 지대의 젖줄이 되어 풍요로움을 건넸지만, 물을 대는 농수로를 내기 위해 대아저수지를 만들면서 큰 물골이 정든 고향을 수장시켜 버린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을 겪고 게다가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이 산속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의 거점이 되면서 산골 마을 동상면은 여러 굴곡을 겪었다. 그렇다 보니 척박한 마을에서 모든 일을 겪은 어르신들은 홍시같이 말간 웃음을 지으며 추억에 잠기지만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응어리를 달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산골 마을 오지사람이라 불리던 동상면 사람들이 시인이 되었다니 윤흥길 작가가 감탄하며 시집의 서평을 써 줄만 하다. 시집이 나오기까지에는 박병윤(전 동상면장, 1969년생)의 역할이 중요했다. 동상면 수만리 단지마을 출신의 박병윤은 고향에서 유년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가뭄이 들어 대아저수지에 잠겨 있던 마을이 모습을 나타내면 신바람 나게 달려가 비밀장소에서 개구지게 놀던 그였다. 그 시절의 추억은 훗날 면장이 되어 찾아온 박병윤에게 지역의 이야기를 엮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과 마을에서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 그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집을 내겠다며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일은 쉽지 않았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시를 쓰기는 힘들었다. 글로 옮기지 못해 구술 형식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어르신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작년 8월부터 7개월 동안의 휴일에는 이야기를 찾아 17개의 마을 구석구석을 누비고 채록해야 했다. 5살 어린이에서 100세 어르신까지 함께 울다 웃으며 마을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어 둔 보석 같은 사연을 캐내 132편의 시로 엮어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는 감물 촉촉이 들인 시집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내가 무슨 시를 낸다 혀~라며 손사래를 쳤던 동네 어르신들은 면장이라는 직책보다는 같은 마을 최순덕(1933년생)의 살가운 넷째 아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백성례 할머니와 박병윤 전 동상면장. 다섯 살의 박채언 어린이는 안아달라고 월월거리는 강아지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내가 백 살잉께...라며 시어를 튼 백성례(1921년생) 할머니는 도려낸 땡감 자국같이 닳고 닳은 구구절절한 한평생의 사연을 풀어냈다. 아들 유경태는 체기처럼 얹힌 한 / 삭히고 또 삭이면서 살아오신 어머니. 언제나 맑고 고운 마음만 / 홍시감 씨처럼 / 톡톡 뱉어내시는 울어머니라는 시를 썼다. 암것도 바랄 게 없고 / 그냥그냥 웃고 살지 / 아들딸 걱정할까 아플 것도 걱정이여라는 말이 시가 된 시집을 받아든 백성례 할머니는 속에 쌓아놓은 응어리가 동장군 풀리듯 풀려나간 것 같소. 살아온 이야기 다 풀어내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라며 홍시같이 말갛게 웃었다. 전국 8대 오지로 꼽혔던 산골 마을은 이야기 구슬이 꿰어지며 시인마을로 거듭났다. 가을이 무르익는 시기 『홍시 먹고 뱉은 말이 시가 되다』는 시집을 들고 홍시가 어우러진 시인마을 언저리에서 정겨운 미소를 건네는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

  • 기획
  • 기고
  • 2021.10.20 16:48

[전국체전서 전북을 빛낸 별들] (상)전북체고 레슬링 저력 보여준 김경태 · 도형 형제

국내 종합 경기대회인 102회 전국체육대회가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경북 일원에서 열린 이번 전국체전은 코로나19 여파로 대학일반부는 치러지지 않고 고등부 경기만 치러져 아쉬움을 남겼지만 전북 선수단은 선전을 펼쳐 금메달 19개와 은메달 18개, 동메달 26개 등 총 63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올렸다. 승패를 떠나 전북 대표로 대회에 출전한 461명의 모든 선수들이 주인공이지만 이 가운데 눈길을 끈 선수들이 있다. 바로 레슬링 김경태도형 형제와 육상 단거리 2관왕에 오른 문해진 군이다. 미래 국가대표가 될 이들의 활약상을 2차례에 걸쳐 조명한다.(편집자주) 전북체육고등학교(교장 박재중)에 재학중인 김경태도형 형제가 이번 전국체전에서 일을 냈다. 금메달 사냥은 형인 김경태(3년)가 먼저 시작했다. 그레코로만형 67kg급에 출전한 김 군은 승승장구하며 결승전에 진출했고, 접전 끝에 최정상에 올랐다. 기세를 몰아 김 군은 자유형 70kg급에 출전해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레코로만형과 자유형 이른바 양형 모두를 석권한 것은 지난 2003년 이후 18년 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인 김도형(1년)도 자유형 53kg급에서 폴승을 거두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도형 군은 첫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형의 뒤를 이어나갔고, 이들 형제는 금메달 3개를 전북 선수단에 안겨줬다. 경태 군은 체육교사의 권유로 중학교1학년때 레슬링에 입문했고 피나는 노력으로 2년 후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경태 군은 기복없이 좋은 경기를 펼쳐나갔고, 전국체전에 앞서 열린 올해 각종 대회에서도 금메달과 은메달을 차지하는 등 줄곧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전국체전에 출전하기 전 5일 연속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꿈을 꿨다는 경태 군은 꿈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경태 군은 고등학생으로의 마지막 전국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기쁘다며 대학에 진학해서도 더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해 세계선수권대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대회 등을 우승한 레슬링 국가대표 류한수 선배처럼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겠다고 말했다. 매트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형의 모습이 멋져 레슬링을 시작했다는 동생 도형 군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른바 기대주이다. 이를 증명하듯 자신의 첫 전국체전에서 쟁쟁한 23학년 선수들을 따돌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도형 군은 2022년, 2023년 전국체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전북체고, 전북 레슬링의 위상을 드높이겠다며 형의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더욱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전국체전에서 전북체고 레슬링부는 금메달 4개와 은메달 4개 등 총 8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이는 이준진 감독과 김정환김신규 지도자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김정환 지도자는 선수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학교와 전북교육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기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며 전북 레슬링이 전국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기획
  • 백세종
  • 2021.10.19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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