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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은희천 전주대 교수 "클래식 대중화 40년…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지켜와"

젊은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 발전에 열정을 쏟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은희천 교수가 새로운 일을 앞두고 자리를 마련했던 것은 7년 전쯤의 일이다. 개인 연주 활동 뿐 아니라 실내악단 활동과 전주시향 악장으로 오랜 세월을 보낸 그는 지역 클래식 음악에 늘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오는 주역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무슨 일인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월급 주는 민간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싶다.”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래도 목적과 운영 기반은 어떻게 만든다는 것인지 궁금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다시 민간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니 반가움 보다 걱정이 앞섰던 까닭이다. 답은 명쾌했다.“의지와 뜻이 가장 큰 재산이고, 좋은 연주자를 키워내는 일과 클래식 음악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뜻을 세우면 좌고우면 하지 않는 은교수의 성품을 아는 지인들까지도 ‘가능한 일일까’ 우려가 높았다. 척박하기만한 지역 문화계의 풍토를 잘 아는 사람들일 수록 ‘무리’라고 조언했다. 2009년 4월 18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란 이름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클래식 팬들을 초대했다. 지휘는 클래식 대중화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온 금난새 감독. 테너 김남두와 메조소프라노 김정화, 바이올리니스트 전강호가 협연한 무대에 관객들은 환호했고, 지역 문화계는 격려를 보냈다. 은교수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월급 주는 민간오케스트라의 첫 걸음이었다. 그 후 6년, 그의 꿈과 희망은 채워지고 있을까. 전주대 은희천 교수(65)를 다시 만났다. 대학 연구실에서 만난 은교수는 온통 은색인 머리카락이 무색할 정도로 열정과 도전 의지가 여전히 뜨거웠다. 어떤 힘이 이 은발의 연주자를 늘 새로운 도전으로 몰고 가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꿈꾸고 실천하며 살아가지 않나요. 사람마다 다를 뿐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닐 겁니다. 내게는 그 일이 클래식음악을 향한 일인 것이죠.”내년 초 정년퇴임을 맞는 그는 올해 추스르고 실천해야 할 일이 많다. 가뜩이나 정해진 스케줄로 하루가 빠듯한 그는 덕분에 마음이 더 급해진다고 했다. 돌아보면 그동안 쏟았던 열정이 허허로울 정도로 보람보다 아쉬움이 크게 와 닿지만 지역 클래식 음악 발전에 작은 기반이라도 마련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은 그의 말처럼 희미하지 않다. 흔적은 뚜렷하고 오래된 시간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벌써 은퇴하신다니 세월이 참 빠르군요. 늘 청년이신 것 같았는데요. “시간강사로 출강하기 시작한 것이 75년부터이니 40년, 전임강사가 된 것이 83년이니 33년이나 되었어요.(웃음)”-지역의 대표적 실내악단인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도 교수님이 만드셨죠. “글로리아는 제 젊은 시절의 열정과 꿈이 고스란히 놓여있는 연주단입니다. 후배 제자들과 마음을 한데 모아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연주 활동을 했어요. 지금은 무대에 함께 서지 않지만 애정과 관심이 깊습니다.”-글로리아는 30여년 역사로도 그렇고 활동으로도 지역 클래식 음악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전주라는 곳이 클래식 연주 활동을 의욕적으로 해나가기에는 열악한 환경인데 글로리아는 흔들리지 않고 한 길로 달려온 단체예요. 25주년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했었는데 지방 실내악단으로는 시도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죠. 그때 객석이 2000석이나 되었는데 거의 차서 모두들 놀라워했어요. 생각해보니 그런 시간들이 다 기쁨이고 보람이군요.”-글로리아를 만들었을 때도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요. “글로리아를 81년에 창단했는데 그때 군산대 전북대 전주대에 출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공하는 아이들이 실내악을 공부할 기회가 없더라고요. 현악 앙상블을 공부시켜야겠다 싶어서 제자들 중심으로 연습을 시켰는데 그것이 토대가 되어 실내악단을 만들게 됐죠. 처음에는 우리 집 아파트에서 접이의자 놓고 연습을 했어요. 나중에 노송성당 교육관을 빌려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 이름을 글로리아로 붙이게 됐습니다.” -전주시향 악장으로 활동하시면서는 초창기 연주단체의 체계를 잡아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환경이 참 열악했죠. “그때 광주시향에서 1년 동안 악장대행을 맡고 있었는데 전주시향에서 불렀어요. 와서 보니 연주활동만 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많더군요. 그래도 관립이니 서서히 체계를 잡을 수 있게 되었죠. 전주시향 악장으로 20여년 활동했는데 우여곡절과 부침이 많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살아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교수님 활동에는 어김없이 70년대부터 이어온 지역의 클래식 음악 운동이 앞세워집니다. “70년대부터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운영했었거든요. 패기만만한 시절이었죠. 겁도 없고. 처음에는 전공자들이 거의 없어 음악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자고 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됐죠.”-그때가 전주 클래식 음악 저변확대의 싹을 틔운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끌었지 않습니까. “74년으로 기억하는데 군대 제대하고 돌아와서 바로 고전음악회감상회를 만들었거든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일주일에 한번 모임을 가졌죠. 가톨릭 센터 사무실을 빌려 썼는데 처음에는 회비를 받다가 나중에 대관료 없이 공짜로 사용하게 해주었어요. 성실함을 높이 샀죠.(웃음) 모임 횟수가 900회를 훨씬 넘었으니 역사가 꽤 깁니다.”-지금은 활동 하지 않나요.“감상회는 중단되었어요. 고전음악감상회가 아니어도 좋은 음악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오디오가 나오고 방송국의 FM음악 방송이 자리를 잡게 되니 회원들의 충성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추억이 많을 것 같습니다.“생각해보면 회원들의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때만 해도 오디오가 귀한 시절이어서 매주 감상회가 있을 때면 회원이 집에 있는 오디오를 자전거에 싣고 와서 들었어요. 그러니 그 집에서는 좋아할 리가 없었겠죠. 나중에 별표 전축이 나왔을 때 오디오를 처음 마련했어요.”-그런 열정이 있어 지역에 클래식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겁니다. 전주시향을 그만두고, 글로리아도 연주를 중단하셨는데 왜 다시 민간오케스트라를 창단했는지 궁금했습니다.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 지역 출신 연주자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환경이 마음을 움직이게 했어요. 그때 전주시향이 8년 동안 단원을 한명도 뽑지 않았을 때거든요. 해마다 예산이 증액되어야 현실적인 운영이 가능한데 예산이 움직이지 않으니 기존 단원들의 인건비를 그것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인것이죠. 젊은 연주자들은 갈 자리가 없으니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그런 악순환이 지속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이러다 쓸 만한 연주자를 다 뺏기겠더라고요. 예술은 재능 있는 인력이 있어야 꽃을 피웁니다. 그래야 대학도 유지되고 교향악단의 수준도 향상될 수 있죠. 도시의 문화적 격도 따라서 높아지게 되고요.”-주위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나요. “용기를 주는 분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안 될 일이라고 했죠. 아마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편에서는 개인적인 목적이 따로 있는 것으로 오해도 했어요. 그래도 하고 싶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의 약속은 지켜졌습니까.“클나무 전신이 전북아트필하모닉오케스트라인데 그때는 월급이 없었어요. 클나무로 이름을 붙여 창단하면서 기본 월급과 연주수당을 주었죠. 사회적 기업이 되고 자치단체의 일자리창출 지원을 받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어요. 올해 사회적기업의 지원이 끝나게 된다니 걱정이 크죠. 연주활동만으로 그 수준을 지키기 어렵거든요.”-음악감독으로 여전히 활동하십니까. “지난해 초에 그만두고 독립시켰습니다. 오케스트라 스스로 연주회를 기획하면서 운영해나가는 체제로 바꾸었죠. 걱정했는데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클나무 연습을 위해 건물도 새로 지었죠. “제 오래된 꿈이었어요. 오케스트라 연습실과 공연장, 실내악 연주실, 음악에 관한 책과 음반 등을 파는 가게 등 한곳에서 음악에 관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꼭 마련하고 싶었거든요. 아직은 능력이 없어서 역부족 이예요. 큰 부담을 안게 되긴 했지만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큰 꿈을 하나 이룬 셈이죠.”-작년에 그만두셨어도 5년 동안 클나무를 운영해오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클나무 활동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내는 일도 어려운 일이고요. 객석을 채우는 일도 큰 숙제여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죠. ‘하나임오케스트라’인데 취미로 연주활동을 하면서 그들 스스로 관객도 되어주는 선순환의 환경을 위한 것이었어요. 내부적으로 크고 작은 부침이 있긴 하지만 그동안 다섯 차례의 정기연주회를 가졌고 지속적인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래식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정기적인 음악 감상회도 운영하고 있고요.”-클나무 창단 연주 지휘를 금난새 감독이 맡았었는데 인연이 있었습니까. “창단연주를 앞두고 찾아가 처음 만났어요. ‘전주에 클나무오케스트라를 만들었는데 금선생이 지휘를 맡아주면 잘 풀려갈 것 같다’고 했죠. 금난새 선생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대중화에 상징적인 존재여서 클나무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가는데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객석을 채우는데도 아주 효과적인 선택이었어요. 기대만큼 성과가 있었습니다.(웃음)”-교류는 지속되고 있습니까. 클나무에 대한 기대는 어떤가요. “높이 평가해주십니다. 작년에 오셨을 때는 ‘클나무 오케스트라는 이제 큰 나무 오케스트라다. 만약 이런 단체가 서울에 있었다면 훨씬 대단한 단체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격려하셨어요. 저와 뜻을 모아 민간오케스트라 활성화를 위한 전국오케스트라협의회도 만들었죠. 각 지역의 민간 오케스트라 12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창립할 때는 문광부의 지원도 이끌어내면서 민간오케스트라 발전을 좀 더 적극적으로 이어가고 싶었는데 기대만큼 활동이 따라주지는 못합니다.”-클나무 연주무대는 늘 새롭고 활기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대중과 만나려는 기획이 신선하더군요.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죠. 국악은 물론이고 대중가수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공과가 다 있는 것 같아요.”-아무래도 민간오케스트라의 존속을 위해서는 기업의 후원이 필요한데 상황이 어떻습니까.“지역 환경도 척박한데다 클래식음악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낮아서 기업 참여는 거의 기대하지 못합니다. 기업 메세나는 우리에게 멀기만 한 이야기죠. 사실 기업의 참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거든요. 작게라도 기업은 협찬하고, 오케스트라는 예술 활동을 제공하는 그런 관계가 확산되면 좋겠어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활동을 꾸려오셨으니 대단한 성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년 은퇴 이후 다시 새롭게 준비하시고 있는 일이 있습니까. “좋은 연주자를 찾아낼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클래식음악 대중화도 함께 이뤄갈 수 있는 일이죠. 스즈키 메소드 교육인데 바이올린을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 하게 하는 문화를 확산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통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학원 같은 형식으로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통념으로는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음악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클래식 음악을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겠지요. “예술의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클래식 음악은 인간의 감성을 깨워줍니다. 수백 년전의 작곡가가 만든 음악을 지금 이 시대에 들으면서 감동하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장르라는 것이 증명되죠. 클래식 음악은 감정의 모든 표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기쁨을 얻는데에만 주목하는 것 같아요. 기쁨 뿐 아니라 슬픔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공유할 수 있는 아이들은 커서도 좋은 인격을 갖게 됩니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자주 들려주면 감성교육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일상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죠.”은 교수의 대화는 직설적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화법으로 때로는 속내를 다 드러내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순수함이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해진다. 그만의 미덕이기도 하다.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어 클래식 음악을 일상 속에 확산시키고, 실내악단을 창단해 연주자들의 역량을 키우고, 전주시향을 일구고, 민간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지역 클래식 음악의 텃밭을 일구어온 그의 음악 인생은 그가 쏟아온 열정 만큼 화려하진 않으나 살아 숨 쉬는 생생함과 예술적 품격으로 빛이 난다. 무엇보다도 지역 음악 현장에서 스스로 도전하고 부딪쳤던 40여년, 한결같았던 세월의 힘이 안겨준 결과다.● 은희천 교수는 한번 뜻 세우면 실행하는 '클래식 전도사'은희천 교수는 광주가 고향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직장을 전주로 옮기면서 전주 사람이 됐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일찍 클래식 음악을 만날 수 있었다. 클래식과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시립교향악단의 광주연주회를 갔을 때였는데 그 음악이 마음에 아주 깊게 남았다. 중학교 때부터 브라스밴드 활동을 하면서 취미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전주고 입시에 떨어지고 신흥고에 들어가면서 길이 바뀌었다. 아버지도 연주자가 되겠다는 뜻을 꺾진 않았지만 기대를 못 따라 주는 아들에게 실망해 대학 입시원서를 쳐다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었다. 연세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동료들과 토론하는 공부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전주에 내려와 보니 전공자도 거의 없는데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클래식 대중화를 위한 노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74년쯤 클래식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아 고전음악감상회를 만들었다. ‘가리방’ 등사기로 해설집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이 모임은 7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전주에 클래식 음악을 확산시키는 통로가 됐다. 이듬해부터 지역의 각 대학 음악과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교육자가 되니 제자들이 가야할 길이 보였다. 글로리아스트링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번 뜻을 세우면 실행하고야마는 품성으로 그는 늘 음악 현장의 중심에서 날선(?) 활동을 이어왔다. 전주대 전임강사로 임용된 것이 83년. 그는 학교에서는 좋은 교육자가 되고 싶었고, 연주자로서는 좋은 무대를 많이 열어 클래식 대중화를 이끌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그에게는 ‘클래식 음악 전도사’라는 별칭이 붙는다. 광주시향 악장 대행을 거쳐 전주시향 악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했으며 스스로의 단련을 위해 개인 연주회를 활발하게 열어왔다. 2009년에는 민간오케스트라 클나무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월급 주는 오케스트라’를 표방한 이 오케스트라는 5년 동안 그의 열정을 바탕으로 무리 없이 운영되어 왔으며 지난해 그로부터 독립한 후로도 고군분투, 지역의 척박한 문화 환경을 딛고 패기 있게 항해하고 있다. 내년 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스즈키 메소드 바이올린 교육 현장에 나서는 일이다. 사회적 통념으로는 자존심과 권위를 버려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좋은 연주자을 발견할 수 있고 클래식 음악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으로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좋은 연주자로 키워내는 ‘꿈의 오케스트라’ 사업을 제안하고 이끌어온 그는 어릴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가까이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어린이 교육에 마음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 기획
  • 김은정
  • 2015.03.13 23:02

군산출신 문철상 신협중앙회 회장 "고객만족 1위·자산 100조·조합원 1000만명 시대 열겠다"

국내 독보적인 비영리 서민금융기관 신협이 창립 55주년을 맞아 자산 60조원 시대를 열며 제2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군산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문철상 신협중앙회장은 보통의 청년기를 보내면서 ‘젊은 날의 고뇌’에 빠진다. 그러던 중 정신적 지도자였던 천주교 한 신부의 제안으로 신협 연수원 교육을 받은 이후 격변하는 세상을 밝히고자 신협 전도사로 활동했고 그 결과 32년 뒤 조합원 출신 최초의 신협중앙회장 자리에 올랐다. 제2의 신협 르네상스를 선포한 문철상 회장은 전북출신 최초 중앙회장으로 오는 2020년까지 상호금융권 고객만족도 1위, 자산 100조원, 조합원 1000만명의 목표를 천명했다. 하지만 세계 금융시장의 둔화 및 조합원들의 사고 변화 등 문 회장이 넘어야 할 파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신협의 무한 성장 가능성을 일깨우기 위해 금융소외계층을 돕는 국내 최초의 기부협동조합인 신협사회공헌재단을 설립한 문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지난 2014년 3월2일 신협중앙회 최초의 조합원 출신이자 전북 출신 최초의 회장 자리에 오른 문철상 회장은 임기동안 경영의 4가지 핵심가치인 ‘가치추구’, ‘감동지향’, ‘건전경영’, ‘상생발전’을 조직전반으로 확산하고 창의적 혁신과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제공해 ‘신 금융공동체’를 만드는 데 총력을 쏟을 계획이다.신협은 그간 조합합병, 신규지점 개설, 차세대 전산망 구축 등을 통한 생산성·경쟁력 강화에 박차를 기했으며, 지난해 결산 결과 2000억원에 육박하는 당기순이익을 실현했고, 13년 연속 흑자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연체비율도 사상 첫 3%대에 진입했으며, 올 해는 조합의 질적성장과 건전한 경영 강화의 해로 설정, 알차고 내실있는 신협에 초점을 뒀다. 또한 자영업자와 저신용 근로자 및 서민을 위한 햇살론을 비롯한 서민지원대출을 지속적으로 취급해 서민금융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계획이며, 국민들로부터 작지만 알찬 금융으로서 신뢰받고 사랑받는 대표 조합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계획이다.특히 올해는 신협 55주년을 맞는 해로 경제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 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는 신협의 금융공동체운동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 제작 등 신협이 서민의 금융 동반자로서 사회적 역할을 더욱 확산시키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전북 최초 신협 회장 자리에 오르게 된 소감은.“고향인 전북에는 신협운동에 헌신해 온 선구자가 많습니다. 1959년 농민들을 위해 치즈를 만든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와 김재덕 주교, 전철환 전 한국은행 총재 등이 오늘날의 신협을 만든 1세대 지도자들입니다. 이제 제가 중앙회장으로 그런 토양과 문화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향기로운 협동의 꽃을 피울때라 생각합니다.”-단순 금융기관을 넘어 인간중심, 조합원 중심의 철학을 고수하게 된 배경은.“설립 이래 55년간 신협은 문턱 높은 일반 금융기관의 혜택에서 소외된 서민과 영세상인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따듯한 이웃이 돼 왔습니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듯 1998년 IMF 때에도 타금융기관 돈을 갚지 못한 조합원들이 신협 돈 만큼은 갚아 주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신협의 성공적 발전 핵심 요소는.“서로 신뢰할 수 있는 조합원도 협동조합 성공의 핵심요소입니다. 전주대건신협은 전주전동성당 신자들이, 진안군청신협은 진안군 공무원이, 전주 개인택시신협은 택시기사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시중은행과 차별화된 특화금융을 꼽는다면.“담보와 신용으로 결정짓던 대출 관행을 깨고 올 4월1일부터 자활의지가 강한 노숙자 등 극빈층을 대상으로 ‘삶의 희망 자금’을 지원합니다. 제1기 대상은 33명으로 전국 33개 우수 신협이 추천한 사람들입니다. 중점은 신용이나 담보가 아닌 자활의지로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졸업하면 다시 2기 자활대상자를 뽑습니다. 예를 들면 자활의지가 강한 노숙자에게 리어커 등을 마련할 수 있는 자금 300만원을 지원한 뒤 지속적인 컨설팅을 통해 각 지역의 해당 조합과 연계, 이들이 대상자의 물품을 사고 지원하는 방법으로 이들이 자립할 때 까지 지원 사이클은 계속됩니다. 계획대로라면 이들은 6개월 내 원금을 상환하는 것은 물론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됩니다.”● 문철상 신협 회장은 조합원 출신 첫 수장…'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자' 실천문철상 회장은 1982년 군산 둔율동 성당 안복진 요셉 신부로부터 신협운동을 해보자는 얘기를 듣고 당시 군산의 최대 기업인 경성고무를 그만두고 신협에 몸담게 됐다. 경성고무에서는 대졸초임 12만원의 봉급을 받았지만 신협에 와서는 8만원으로 줄었다. 이후 ‘가난한 이웃과 더불어 잘살자’는 신협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고 지금까지 32년간 ‘어두운 곳에 햇살 같은 신협’을 목표로 신협 르네상스 운동을 벌여오고 있다.문 회장은 1951년 생으로 1990년 전주대 경영학 석사, 2002년 군산대건신협 상임이사장, 2004년 전북 신협협의회 회장, 2009년 신협중앙회 이사, 2011년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 2011년 군산대 경영학박사과정을 밟았으며, 2014년 3월부터 현재까지 신협 중앙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국내 첫 기부협동조합 '신협사회공헌재단' 출범신협중앙회는 지난 1월29일 국내 최초의 기부협동조합인 신협사회공헌재단 출범 기념식 및 현판식을 가졌다.신협사회공헌재단은 사회적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된다. 신협중앙회 및 전국 920개 신협 임직원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특히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 아닌 순수한 신협 임직원 자체가 기부하는 사회공헌사업만으로 이뤄진 협동조합은 국내 최초의 사례다.신협사회공헌재단은 어둡고 그늘진 곳에 햇살 같은 신협의 역할을 실천하고자 하는 580만 신협인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재단을 통해 금융소외계층이 삶의 희망을 일깨울 수 있도록 단순 기부를 넘어 ‘자활’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빈곤의 악순환’을 끊는데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이강모
  • 2015.03.09 23:02

영농법인 선농(주) 김삼곤 총괄이사 "사계절 관광객 모을 수 있는 '농업체험 시스템' 구축할 것"

정읍시 신태인면 천단오주길에 가면 사시사철 은빛 물결이 일렁인다. 배추와 무, 고추 등이 주로 생산되던 이곳에 20년 전부터 조금씩 늘어난 비닐하우스가 마을 전체를 뒤덮었다. 천단마을 일대에서 시작된 하우스는 인근 연정리와 오주리 쪽으로 퍼져 나가는 양상이다.이 거대한 비닐하우스 물결은 유기농 포도를 생산하는 비가림시설이다. 비닐하우스 사이에 해썹 인증 포도 가공시설도 있다. 관광객이 하룻밤 묵어갈 수 있는 펜션도 몇 동 들어섰다. 마을 입구에 커다랗게 세워진 천단유기농포도생산단지 간판 옆에는 지난해 정읍유기농체험센터가 준공됐다. 몇 년 전부터 농촌에 불어닥친 6차산업 바람이 이곳을 또 한 번 변신시키고 있다.영농법인 선농(주)가 전라북도와 정읍시의 지원을 받아 2012년부터 시작한 정읍 푸른웰팜 조성사업 이 한창이다. 이 사업을 통해 천단마을은 관광객들이 유기농포도는 물론 레드향, 체리 농장에서 영농가공 체험을 하고 하룻밤 묵으며 힐링할 수 있는 시설로 탈바꿈하고 있다. 농민과 도시민이 윈윈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포도 위주의 작목도 레드향 등 현대인들의 미각에 맞는 과수작목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올 연말부터 레드향과 한라봉 등이 본격 생산되면 제주도로 가는 관광객의 발길을 이곳으로 이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나들목이 10분 이내에 있고, KTX 정읍역도 근거리에 위치해 있는 등 사통팔달 교통 여건도 좋다. 천단마을의 6차산업을 총괄하고 있는 선농(주) 김삼곤 총괄이사(63)를 인터뷰했다.-천단 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토박이신가요.아니예요. 경기도 평택에서 시설원예 농사를 짓다가 1984년에 이곳으로 이사해 정착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평생 농사를 지었는데, 이곳에 온지도 벌써 31년이 됐네요.-개인적으로는 어떤 농사를 짓고 있습니까.이곳으로 이사와서는 양채류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낭패를 봤어요. 1990년대 중반에 우루과이라운드를 대비한다며 정부와 자치단체가 유리온실사업을 거창하게 벌였는데, 장수군 농가들이 유리온실 사업을 반납했어요. 그걸 정읍시가 가져와서는 저에게 권했어요. 다른 지역은 장관 빽으로도 못따는 사업인데, 당신은 그냥 준다는 데도 못하겠느냐고 해서 결국 자의반 타의반 하게 됐죠. 9억3000만원어치 네덜란드 구근을 들여다 유리온실에 심었어요. 전북무역을 통해 미국과 일본에 백합을 두 번 수출했는 데 그만 IMF가 터졌어요. 완전 거지가 됐어요. 참담했죠.-당시 정부가 유리온실 사업을 밀어붙였지만,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타격이 컸는데 어떻게 재기할 수 있었습니까.우연찮게 폐유리 가공공장을 운영하게 됐는데, 밤잠 안자고 일인 다역을 하다보니 적자를 흑자로 돌릴 수 있었어요. 이를 기반으로 다시 농사도 짓게 됐죠. 지금은 포도, 레드향, 체리, 패션푸르츠 4가지 과일을 모두 생산하고 있습니다. 농사 규모가 2만평인데 레드향 4,500평, 포도 3,000평, 고사리 1,000평, 패션푸르츠 1,000평, 체리 5,000평, 연 2,000평, 고추 1,500평 등 다품종을 합니다. 주식으로 따지면 분산투자 개념이지요.-천단마을은 어떤 곳입니까.제가 1984년에 정착했을 때만해도 채소농사가 주류를 이뤘습니다. 유기농 농사도 불모지였고요. 하지만 지금은 대한민국 유기농포도 1번지를 자부합니다. 실제로 국내 최초 과수 분야 유기농 인증 1호 마을이거든요. 현재는 대부분이 포도를 생산해요. 천단마을 33 농가가 9만평에서 포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요즘 작목 전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 농가에서 체리를 6,000평 심었고, 레드향은 다섯 농가에서 9,000평, 패션푸르츠도 다섯 농가가 뛰어들었는데 3,300평 규모입니다. 물론 모든 농가의 과일은 유기농 방식으로 생산됩니다.-명성에 걸맞게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천단마을은 몇 년 전 전라북도의 농식품 6차산업화 사업 대상지로 선정됐습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유기농포도 생산으로 유명하다보니 당국의 관심과 지원을 받게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천단마을에 신태인유기농포도영농조합법인과 농업회사법인 (주)아리울이 소재해 있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아리울은 무항생제 돈육 생산자입니다. 또 천단마을에는 과거에 신태인 소도읍가꾸기사업 일환으로 조성된 유기농포도체험센터와 숙박시설 등이 있었거든요.이를 바탕으로 뜻있는 분들이 선농(주) 이라는 법인을 만들어 2013년도 농식품 6차산업화 사업에 응모했고, 사업자로 선정됐습니다. 도비와 시비, 자부담 등 총 35억원이 투입돼 정읍유기농체험센터와 숙박시설 등이 세워졌습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이고,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어떤 것들을 준비하고 있습니까.이 사업은 기간이 정해져 있는 보조금사업이기 때문에 일단 지난해 8월 건물은 준공됐어요. 하지만 사업의 성공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더라구요. 함께 일할 농민들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고, 농민들도 관심이 부족한 상태였어요. 사실 농민들은 유기농포도 열심히 생산해서 완판할 만큼 잘하고 있거든요.하지만 6차산업에 초점을 맞추면 포도 하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많은 농가들이 사업에 참여해 소비자 요구에 걸맞는 다양한 작목을 생산하는 것이 기본적인 경쟁력이죠. 그래서 제가 이 사업에 발을 들여놓은 후 시작한 것이, 농가들을 설득해서 사업에 참여시키고, 또 작목을 다양화하는 것이었습니다.-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죠.천단마을은 유기농포도로 유명한 곳이에요. 선농(주)는 유기농포도와 무항생제 돈육을 합쳐서 6차산업화 사업을 계획했습니다. 할 수는 있죠. 그러나 이런 사업구조로는 미래가 불투명한 것은 물론 당장 사업을 꾸려나가기 조차 어렵습니다. 포도는 여름에 약 2개월간만 생산될 뿐입니다. 게다가 천단의 유기농포도는 백화점과 생협을 통해 완판되고 있어요. 돈육을 덧붙였지만, 영농 및 가공 체험 관광객을 사계절 유치할 수 있는 사업 구조는 아닌 것이죠. 저는 사계절 모두 도심 관광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영농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이 사업의 선결 과제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농민의 참여와 경쟁력 있는 작목 도입이 관건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달랑 포도 하나 가지고 이 거대한 사업을 끌고 가서는 안되잖아요. 포도가 생산되는 여름 2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10개월을 뭔가로 채워야죠. 손님들이 계속 방문할 수 있는 만족할 영농 체험거리를 만들어야 했어요. 그래서 제가 선농에 발을 들여놓은 후 사계절 농업 체험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6개월간은 레드향, 레드향골드 등 오렌지 계통을 생산하고, 체리는 6-7월에 생산합니다. 포도는 여름에 주로 생산하고, 패션푸르츠는 연중 생산합니다. 이곳에서는 맛있는 과일이 연중 생산되는 것이죠. 포도 위주의 천단마을에 이 생산 시스템이 완전 구축되면 도시민 등 외부 관광객들이 연중 천단마을을 찾아 맛 좋은 유기농 과일을 접할 수 있고, 애초 6차산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포도농사를 안정적으로 짓고 있는 일반 농가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도전인데, 포도나무 뽑아버리고 레드향이나 체리를 심을 용기가 나겠습니까.과거에 포도는 여름철에 맛볼 수 있는 계절과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계절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과일이 됐습니다. 게다가 포도는 비가 많이 오면 썩고, 수확해 놓았는데 팔리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자칫하면 까치나 참새가 다 쪼아버리기도 합니다. 위험을 줄여줄 안정적 작목이 필요합니다. 이제 포도만 짓는 농사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죠.그래서 제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제 포도농장 7000평 가운데 4000평에 심어진 포도나무를 모두 캐내고 레드향을 심었습니다. 주식으로 보면 농사에도 분산투자가 필요합니다.-레드향, 레드향 골드는 감귤류로서 제주도나 일본 등 따뜻한 지역에서 생산되는 과일인데 이곳에서 생산이 가능합니까. 또 추운 겨울철에 비닐하우스에서 생산하려면 유류비용 등 생산비도 많이 들어갈 것 같은데요.감귤류는 이제 더 이상 제주에서만 생산되는 과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몇 년에 걸쳐 조사하고 실험재배를 했습니다. 제주도가 아닌 이곳 천단에서 레드향, 한라봉 모두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재배할 수 있습니다. 제주도농업기술센터 관계자들이 제 농장을 수차례 방문했는데 모두 놀라서 돌아갔습니다. 하우스안에서 자라는 이곳 한라봉은 4월20일 무렵 개화하지만, 제주도 한라봉은 5월 중순에 개화합니다. 결국 천단마을 한라봉 수확이 제주도보다 30-40일 가량 빠르게 됩니다. 또한 이곳 과일 당도가 13브릭스에 달해 제주도 한라봉보다 월등합니다. 화산토에서 생산되는 제주도 과일보다 황토에서 유기농으로 생산되는 이곳 과일의 경쟁력이 훨씬 좋은 것이죠. 비닐하우스라서 겨울철 연료비 걱정을 하는데, 기술이 좋아졌어요. 3겹 하우스이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하우스 안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큰 추위가 없었던 지난 겨울의 경우 연료비가 거의 들지 않았습니다.-그래서 농가들이 움직이던가요.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상당수 농가가 작목 전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패션푸르츠의 경우 지난해 한 농가가 심었는데, 올해는 다섯 농가가 참여합니다. 체리, 레드향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포도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죠.-레드향, 레드향 골드, 패션푸르츠, 체리는 과일로서 어떤 특징,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지난해부터 사람들을 만나면 눈을 감게 한 뒤 오렌지와 레드향 맛을 보도록 해 보았는데, 레드향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들 작목의 평당 소득은 포도에 비해 5-7배에 달합니다. 그동안 귤, 한라봉, 천혜향은 제주도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년 겨울부터 천단마을에서 레드향과 레드향 골드가 생산되면 서울 관광객들이 제주도가 아닌 이곳 천단마을로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호남고속철 정읍역은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 거리에 불과합니다.최근 체리는 사상 최대 수입물량을 기록했습니다. 소비자 기호가 변하고 있어요. 당도가 18-24브릭스가 나오거든요. 패션푸르츠는 겉이 보라색이고 조그만 계란형 과일이데, 속에는 올챙이 알같은 씨앗이 잔뜩 들어 있습니다. 숟가락으로 떠 먹거나 갈아서 주스로 먹죠. 지난해부터 수입됐는데 백화점과 마트에서 물건이 없어 팔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포도와 더불어 천단마을의 경쟁력을 높여줄 과일로서 손색이 없다고 봅니다.-가공과 영농 체험 시설, 숙박시설 등이 계획대로 갖춰졌고, 김 이사께서 지적한 문제점들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농산물 판매는 어떤 식으로 할 계획인가요.체험객 유치, 인터넷 판매, 기존 포도 판매처(생협, 풀무원, 현대백화점) 등 다양한 마케팅을 해 나갈 계획입니다. 필요하다면 아이스크림 등으로 가공 할 계획도 있습니다. 천단마을에는 과일 선별장과 해썹 인증 가공장이 시설돼 있거든요. 가공용 귤은 다루코라는 종자가 있는데, 안토시아닌이 다량 함유돼 있어요. 요즘 눈에 좋은 안토시아닌이 함유된 블루베리가 인기인 것 처럼 다루코 주스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체험객은 어느 정도 내방하고 있습니까.지난 1월에 300명 정도 왔는데 지난해에 비해 최근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지난해 준공된 체험시설에서 아이스크림과 소시지 만들기 체험을 하고, 영농체험 하우스 안에서는 레드향과 한라봉 따기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연말에 레드향이 본격 생산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봅니다. 모두 8개 객실(25평)이 준비돼 있는데 주말에 70% 점유율을 보이고 있습니다.-천단마을은 유명 관광 여건을 갖춘 곳이 아니만 농민들이 차별화된 영농을 하면서 경쟁력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솔직히 6차산업으로서 천단마을 사업은 현재로선 걸음마 단계예요. 너무 서두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읍시와 선농, 그리고 천단마을 주민들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에 성공을 확신합니다.이 동네가 소비자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유기농 마을이기 때문에 힐링캠프라고 생각해요.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휴양시설로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제가 농장 옆에 있는 연 방죽을 메워서 분수공원을 만드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 때문이예요. 아이들이 여름에는 분수공원에서 물장구 치고, 겨울에는 썰매나 스케이트를 탈 수 있도록 만들면 사계절 사람들의 웃음 꽃이 만발한 천단마을이 될 것입니다. ● 김삼곤 총괄이사는 6차 산업 열정 대단한 '유기농 전도사'부안군 백산면 거룡리 용출 마을이 고향인 김 이사는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를 따라 평택에 가서 살았다. 가정 형편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늦게 다닌 그는 방송통신대를 졸업할 만큼 배움에 대한 열정이 많은 농부다.1984년 처음 천단마을에 정착, 양상추와 브로콜리 등 양채류 농사를 지었다. 평택에서 배운 유기농사를 지역 농민들에게 보급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1986년 어느날 갑자기 지역신문 기자가 불쑥 찾아왔다. 유기농법을 취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무허가 비료를 만들어 판매한다는 제보가 들어와 취재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가 유기농에 사용하는 효소 봉지를 농민들에게 보급하는 것을 본 어느 농약사 주인이 무허가라며 신문사에 제보한 것이다. 덕분에 그의 유기농 활동은 기사화됐고, 방송사에서도 다뤘다. 그는 1987년 전국 유기농협회 정읍지회를 전국에서 4번째로 만들었다. 천단마을을 비롯해 정읍지역의 많은 유기농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다.김삼곤 이사는 요즘 천단마을 6차산업의 효과를 어떻게 하면 극대화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다고 한다.서울 사람들이 천단마을 체험관광을 오겠다고 하면, 전용차량을 이용해 KTX정읍역으로 모시러 가는 체계를 갖출 생각이다. 서울 사람들이 레드향 체험하겠다고 하면 정읍역 가서 모셔와 체험시키고, 과일 바구니가 무거우면 택배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비자는 30% 정도 싸게 살 수 있으니 좋고, 천단마을은 과일 선별비와 상하차비 등 중간비용을 들이지 않아 이익이다. 게다가 한라봉과 레드향 등 감귤류를 제주도보다 1개월 일찍 생산할 수 있다.그동안 제주도 감귤 여행을 하던 도시민들이 발길을 돌려 천단마을을 찾게 되면, 전북지역의 관광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 기획
  • 김재호
  • 2015.03.06 23:02

[익산시 KTX 역세권 종합개발] 호남고속철 개통 코앞…준비는 '게걸음'

민선 6기가 출범한 뒤 정신없는 반년이 지나면서 첫 새해를 맞았다. 새로운 출범의 혼란을 뒤로하고 이제는 다양한 지역발전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자치단체장의 공약을 비롯한 시급한 현안들에 초점을 맞춰 계획을 수립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정작 주민들에게 필요한 전략에는 소홀할 수도 있다. 특히 4년의 짧은 임기동안 큰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추진을 준비중인 자치단체도 보인다. 세심하게 추진해야 할 지역전략과 반드시 필요한 현안, 중장기적 안목에서 출발해야 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발전방안 등을 도내 각 시군별로 격주로 진단한다.호남고속철도가 개통 한달앞으로 다가왔지만 여기에 대비한 대응은 지금도 준비중이다. 고속철도 공사가 10년 넘게 걸렸으니까 10년 넘게 준비만 했다는 초라한 성적표이기도 하다.무엇보다 이전에 준비했다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준비에 들어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어떻게 대응해 지역발전으로 이어갈 것인지 뚜렷한 계획이 없다.고속철도가 개통되면, 고속철도가 익산에 서면 자연스레 지역발전으로 이어질까. 일각에선 아무런 준비없이 개통되는 고속철도는 호남의 3대 도시인 익산이라는 명성을 깨뜨릴 위험도 있다고까지 경고한다.△지금껏 뭐했나.익산시는 민선 6기 박경철호가 출범하면서 KTX역세권종합기본계획수립 용역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1월께 시작된 이 용역은 올해 말쯤 결과물을 내놓을 예정이다.호남고속철도가 4월 개통하게 되기 때문에 호남고속철도가 쌩쌩 달리고 상황에서 그 여파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는 뒤늦은 계획이다.익산시는 이 기본계획 용역을 통해 역세권 주변 개발방안의 윤곽을 잡겠다는 계획이다. 서울과 1시간, 전국 반나절 생활권이 됐을 때 익산역 주변은 어떻게 개발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익산시는 앞서 지난 2010년 국토해양부 시범사업에 응모한 후 2011년 10월 개발계획 수립용역을 추진해 2013년 2월 용역결과를 도출해 냈었다.이 결과를 토대로 KTX익산역과 대중교통이 연계된 환승시설에 2200억원을 투입해 저탄소 녹색성장을 선도하는 교통중심도시로의 거듭나겠다고 발표했었다.구체적으로 고속시외버스가 들어서는 환승시설과 컨벤션센터와 호텔, 백화점 등 상업시설을 갖춘 복합환승센터를 조성하겠다고 했지만 민선 6기 들어 전면 수정됐다.수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다.△희비 엇갈린 타지역 사례고속철도를 둘러싼 지역발전과 경제후퇴를 가져온 사례들은 국내에서도 쉽지 찾을 수 있다.부산은 KTX개통으로 관광객 유입과 비즈니스 분야에서 재미를 보고 있다. 부산은 고속철도 개통에 앞서 지역이 가진 관광분야에 집중 투자하는 등 관광객 유치 전략을 펴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고속철 개통은 교통수단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서울에서 부산을 찾는 관광객은 40%가 항공을 이용했지만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58%의 관광객이 KTX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항공과 버스업계는 울상을 지었다.부산과 달리 고속철도 개통을 미리 준비하지 않은 지역은 상권 붕괴는 물론 극심한 빨대 효과를 경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대구는 KTX개통 5년 후 설문조사에서 수도권에서 의료와 교육, 쇼핑, 문화예술을 이용했다는 응답률이 80%선까지 치솟았다.유통과 의료, 문화예술 분야는 짧아진 시간대로 쉽게 이용할 기회가 마련되는 현상으로 이어지며 역세권 주변 상권은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이처럼 고속철도 개통을 미리 준비한 자치단체는 발전의 기회로 삼는 반면 준비가 부족한 지역은 고속철도 개통으로 큰 피해를 보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중장기적 계획 수립해야하루 반나절 생활권으로 접어들게 하는 고속철도 개통은 단순히 방문객들을 위한 교통수단을 뛰어 넘는다.예컨대 서울에서 근거리 대학을 선택할 경우에 가장 먼저 지하철 개통 여부를 따지는 것과 유사하다.수도권에선 지하철이 지나는 곳을 위주로 대학을 선택했다면 앞으로는 좀 더 폭넓게 고속철이 서는 곳까지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반나절 생활권이란 결국 얼마든지 통학이나 통근,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특히 익산시가 고속철도 개통에 대비해 용역에 돌입한 대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발길을 끌어들이는 유인책이다.앞서 부산은 관광에서 재미를 봤지만 대구는 수도권과 경쟁이 필요한 쇼핑과 교육, 의료, 문화예술로 맞서 80%이상의 지역민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빨대현상이라는 시행착오를 경험했다.지역의 특성을 살린 경쟁력을 갖추진 못하면 결국 고속철도의 개통은 약이 아닌 독이 될 것이란 지적이다.내달 고속철이 개통되고 연말에서야 고속철 대응전략이 마련되는 뒤늦은 역세권 개발에 속도감 있는 추진은 물론 지역의 차별화 된 전략을 마련하는 초석을 올해에는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박경철 시장 '역세권 개발 구상' - "다양한 상권 형성 지역 경제 활성화"고속철도 300km시대에 맞춰 익산의 미래를 조망하는 역세권 종합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익산의 도시 재생은 물론 구도심 활성화, 익산 전역의 도시발전 전략을 담은 향후 100년 앞의 익산시를 담아 낼 계획입니다.박경철 익산시장은 취임 이후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온 KTX역세권 개발을 속도감보다는 충실한 설계에 무게를 두고 있다.이미 역세권 주변의 복합환승센터와 역세권개발 기본계획이 수립되었지만 단순히 땅을 뒤엎고 쇼핑몰이나 백화점을 짓는 단순한 경쟁력을 뛰어넘는 익산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내겠다는 계획이다.그는 취임이후 이런 구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기본계획용역을 지난해 11월 발주해 분기별 중간조사결과를 보고받는 등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특히 열악한 지역 재정을 고려, 정부의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한 정부의 지원도 이끌어 낼 계획이다.이런 계획대로라면 올 11월 용역결과가 나오고 2016년 상반기부터는 도시재생 전략계획과 활성화계획을 수립해 2017년부터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박 시장은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장항선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철도가 교차하는 철도인프라를 구축하게 됐다며 역세권개발을 통해 다양한 상권이 형성되어 지역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제2의 도약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원도심과 낙후된 역세권 활성화와 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역세권 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이를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익산을 신한류 거점도시로 도약시켜 가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김진만
  • 2015.03.03 23:02

취임 1주년 한국전기안전공사 이상권 사장 "전기화재 비율 내년까지 15%대로 끌어 내리겠다"

한국전기안전공사 이상권 사장이 취임 1년을 맞았다. 지난해 전북혁신도시로 본사를 이전한 한국전기안전공사는 올해 본사 이전 첫 해를 맞아 본연의 업무 외에도 지역인재 일자리 창출 등 전북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하고 있다. 검사를 거쳐 변호사, 국회의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이 사장은 자신만의 뚜렷한 인생관과 가치관, 경영철학으로 한국전기안전공사의 제2창사 기틀 마련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사장으로부터 취임 이후 걸어온 발자취와 향후 청사진 등에 대해 들어봤다.-취임 1주년을 맞은 소회와 그동안의 성과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지난해 2월 취임했는데 첫 해부터 공사 창립 40주년 맞아 서울시대를 마감하고 본사가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등 공사 안팎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취임과 함께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처럼 전국 60개 사업소를 모두 돌며 직원들과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한편 현장 중심의 인력 재배치와 조직 개편 등을 통해 제 2창사를 위한 새로운 기반 구축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경영평가 등급 향상, 감사원 자체 감사활동 평가 ‘준정부기관 1위’, 공직기관 대상 ‘종합청렴도 평가 2등급’ 달성 등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평가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대외적으로도 한국전기문화대상, 미래혁신경영대상,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등을 잇따라 수상했습니다. 또한 여성가족부로부터 ‘가족친화 우수기관’으로 선정됐으며 국제전기안전연맹(FISUEL) 포럼을 유치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습니다.”-경영철학과 임기 내 목표는 무엇인지요.“제가 취임사 통해 가장 먼저 강조한 것은 우리 공사의 기본업무 혁신입니다. 이를 위해 혁신, 신뢰, 소통에 기반한 ‘본(本) 경영’을 선언했습니다. 본 경영의 핵심은 혁신이며 혁신의 가장 큰 목표는 전기화재와 감전사고를 예방하고 줄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공사를 비롯한 범정부 차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전체 화재사고 중 전기화재 사고 점유율은 수년간 20% 대를 맴돌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전기화재 점유율을 낮추는 것이 임기 내 가장 큰 목표이며 2016년까지 15%대로 끌어내리는 것이 선결 과제입니다.”-올해 추진해나갈 역점 사업을 꼽으신다면. “혁신도시 이전 후 첫 번째 맞는 새해인 만큼 ‘기본과 원칙’이 뿌리내리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첫째, 국민안전처 신설 등 새롭게 변화한 환경에 대비해 공사 기반을 강화하고 관계법령 개선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둘째, ‘정부 3.0’ 국정과제 이행과 관련, 후속대책 마련에 역점을 둬 각종 규제 해소와 비정상적 관행 개선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특히, ‘전기화재 감축 종합대책’을 기반으로 소방본부 등 관계기관과 협업, 정밀화재 감식 역량을 높이고 화재조사 근거법령을 제도적으로 강화해 나갈 방침입니다. 셋째, 공공기관 정상화 위한 조직문화 혁신에 힘쓰겠습니다.”-연초 정부가 발표한 2단계 공공기관 정상화 종합대책과 관련 대응책은 마련하셨는지요.“2단계 공공기관 정상화 대책은 △성과연봉제 대상 직원의 확대 △기관의 핵심 업무를 축으로 한 기능 재편 △성과와 연계된 인사·조직 운영 △인재채용과 지역경제에 대한 사회적 책임 강화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1단계 정상화 대책이 방만경영 해소와 부채 감축에 방점을 두었다면 2단계 대책은 기관 내, 기관 간 중복된 기능을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우리 공사는 새해 시작과 함께 ‘생산성 10% 향상’을 목표로 조직과 업무 시스템 개선 등에 관한 추진계획안을 이미 정부에 제출하고 국민안전과 에너지복지 사각지대 해소 위한 노력에 적극 나설 방침입니다.”-지역경제 활성화와 창조경제 발전을 위한 복안이 있으시다면.“전북혁신도시 이전은 우리 공사에 있어 단순히 지리적 이전을 뜻하는 ‘전북시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대로부터 한걸음 더 나아가는 새로운 ‘혁신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지역사회에 새 기반을 마련한 만큼 지역경제 활성화와 창조경제 발전을 위해 중장기적으로 전북을 미래 ‘전기안전 R&D 산업 중심’으로 육성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지역 산·학·연이 함께하는 ‘실증단지 조성’을 검토 중이며 공사 특허기술을 전북지역 기업에 우선 이전하고 제품의 공동개발을 추진하겠습니다. 특히 지역인재 채용 및 일자리 확충과 관련, 전북도와 지난해 9월 지역연계사업 MOU를 체결하고 신입직원 채용시 지역인재 채용비율을 15%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실제 지난해 하반기 신입사원 공개채용 결과 전체 합격자 중 16.5%가 전북 출신으로 애초 목표치를 상회했습니다. 새해 신규사업으로 추진할 ‘콜 센터’ 운영본부도 이곳 전북에 개설해 상담요원(약 20명) 전원을 지역민으로 충원하는 등 지속적이고도 다양한 일자리 창출 방안을 강구 중입니다. 아울러, 지역인재 육성 차원에서 도내 대학이나 공업계 고교와 연계, 현장실습 교육 등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들도 마련해나갈 계획입니다.”-사내 소통경영을 위한 노력도 주목받고 있는데요.“사장이 해야 할 일은 직원들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것입니다. 평소 본사 직원들에게도 “사장실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줄 것”을 주문했으며 혁신도시 이전을 계기로 신명나는 일터 조성을 위해 가족초청 한마음 행사, 직원 여가활동 지원 프로그램 운영, 동아리 활동 지원 강화, 직원자녀 복무 군부대 위문 등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해 노사 소통과 신뢰감 제고에 힘쓰고 있습니다.”-국제전기안전연맹(FISUEL) 포럼을 유치해 오는 11월 서울에서 개최한다는데 어떤 의미가 있는 행사인가요.“지난해 10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열린 국제전기안전연맹 포럼에서 우리나라가 2015년도 포럼 개최지로 결정됐습니다. 국제전기안전연맹은 세계 각국의 전기안전 대표 기관들이 모여 만든 기구로 지난 2002년에 설립돼 현재 영국·프랑스·일본 등 26개국 43개 회원사가 가입했으며 전기안전의 국제표준과 규정의 개정, 전기안전 검증모델 도입, 회원사 간 기술정보 교류 등이 주요 활동내용입니다. 우리 공사는 지난 2004년 연맹 정회원으로 처음 가입했으며 그동안 회원국들과의 지속적인 교류협력을 통해 전기안전 분야에서 국제적 위상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지난해 ‘아시아 워킹그룹 리더국’으로 선정됐습니다. 이미 2008년도에 서울에서 연맹 총회를 주최한 경험이 있는데다 이번에 포럼까지 유치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전기안전 기술력과 리더십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상권 사장은- 법조인·국회의원 출신 친화력·추진력 탁월해한국전기안전공사 이상권 사장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홍성고등학교와 건국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청주지방검찰청 부장검사(1999년~2000년), 인천지방검찰청 부장검사(2000년~2001년)를 역임한 뒤 변호사사무소를 개업(2001년~2011년)한 법조인 출신이다.이 사장은 대학 2학년때 어릴적 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3학년때 사법시험 1차를 무난하게 합격했지만 가장으로서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책임감에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취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내의 설득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법시험에 몰두해 2차 시험도 한 번에 통과하며 법조인으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검사복을 벗고 변호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이 사장은 제3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안상수 시장후보의 법률지원단장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입문한 뒤 안 시장의 후임으로 인천 계양구 당협위원장을 맡아 국회의원의 꿈을 키웠다. 그 결과 제18대 국회의원(지식경제위원회)에 당선됐고 이후 한국전기안전공사 사장으로 임명돼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한번 몰두하면 끝을 보는 성격을 가진 이 사장은 친화력과 추진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임기 내 현재 공급자 중심인 전기 관련 법령을 전기 수용자의 권리와 전기안전의무 준수를 명시한 전기안전 법령 정비를 통해 전기화재 감소를 최대 목표로 삼고 있다.한편 이 사장은 그동안 검찰업무 유공으로 법무부장관 표창, 공명선거관리 유공으로 대통령표창,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의정활동분야), 경영대상 ‘미래혁신경영대상’등을 수상했으며 자전에세이 ‘쥐뿔도 없는 자존심 덩어리’를 출간한 바 있다.

  • 기획
  • 강현규
  • 2015.03.02 23:02

남부시장 청년몰 볶음밥 음식 '더 플라잉팬' 김은홍 대표 "편안하고 맛있는 요리 개발…즐기는 음식문화 나누고 싶어"

일본 젊은이들을 분석한 책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 화제다.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이 책을 펴낼 때의 나이는 26세. 자신의 세대를 스스로 분석한 보고서인 셈이다. 이 책은 절망적인 일본사회에서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주목했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그들이 더 이상 희망적인 미래를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일본 젊은이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그저 끝나지 않는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미래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우울하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처한 현실이 한국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다.전주 남부시장 한쪽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청년몰의 젊은이들은 그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부시장 청년몰 볶음밥 전문 음식점 더 플라잉팬 김은홍 대표를 만났다. 날아다니는 프라이팬을 상상하며 들어선 그의 식당은 예상대로 비좁았다. 꽉 차게 앉아도 겨우 아홉 명이 어깨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고개만 들어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은홍씨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았다.시장 옥상에 청년장사꾼들을 불러 모은 것은 2012년 문화관광부의 문전성시 프로젝트였다. 그는 이 공모에 서른아홉 살, 턱걸이 청년으로 응모해 점포를 얻었다. 늘 꿈꾸어오던 자신만의 요리를 만들어 나눌 수 있는 첫 공간. 한식당과 중식당을 거쳐 식품회사의 제품 개발까지 밑바닥부터 실전을 쌓아온 그에게 더없이 행복한 일상이 찾아왔다. 함께 문을 연 11개 점포 청년 장사꾼들과 뜻을 도모하며 그는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6개월 남짓 지나면서 청년몰은 생기를 얻기 시작했다. 젊은 디자이너와 문화기획자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샘솟는 공방들, 카페와 화원, 작은 가게의 문이 바빠졌다. 그의 식당은 그 중에서도 잘나가는 가게로 꼽혔다.가게 인테리어와 주방 기자재를 갖추는데 350만원이 들었어요. 중고 재료를 사다 모든 작업을 제 손으로 했거든요. 주방 기자재도 가능한 중고를 사거나 얻었죠. 그러다보니 초기 투자비용이 엄청 낮아지더라고요.창업 자금 350만원으로 만든 그의 가게는 그동안 다녀간 손님들이 남겨놓은 흔적으로 아주 재밌는 공간이 됐다. 꽤 이름난 캘리그라퍼의 손글씨체며 웃음이 절로 나오게 하는 은홍씨가 직접 써놓은 가게 운영 지침까지 크고 작은 메모지가 빼곡히 들어차있는 식당 안은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 맛도 있지만 재미를 주는 음식을 개발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공간에도 그대로 스며있는 덕분이다. 그와의 인터뷰도 공간만큼이나 발랄하고 즐거웠다.-가게 안이 복잡하면서도 재미있군요. 사장님 아이디어인가요.한두 명 손님들이 남기고 간 메모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니 자연스럽게 이런 공간이 만들어졌어요. 고마운 일이죠. 저도 가끔씩 읽어보면 재미있고요.-이곳에 들어온 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햇수로 4년차, 만 3년 되어갑니다. 문광부 문전성시 두 번째 공모로 들어왔어요. 청년몰이 입소문 나면서 경쟁률이 꽤 높았는데 다행히 들어오게 되었죠. 사실 제게는 기회가 딱 한번 밖에 없었거든요. 나이가 청년으로는 턱걸이여서. 그러니 꼭 되어야만 했어요.(웃음)-심사를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요.아이템 덕을 본 것 같아요. PT 설명으로 심사를 받았는데 제 아이템이 다른 사람들과 중복되지 않고 좀 특별했거든요. 저는 그동안 앞으로 만들 요리를 위해 개발해놓은 레시피도 적지 않았고, 창업을 언젠가는 꼭 할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준비된 장사꾼이었군요. 전공은 요리와 거리가 있지 않나요.디자인을 전공했으니 전혀 다른 길이죠. 그런데 요리는 사실 오래전부터 제가 가장 잘하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일이 재미는 있었지만 내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죠.-음식점 창업이 꿈이었습니까.좀 멀리 내다본 꿈은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이에요. 제가 만든 요리 레시피를 바탕으로 한 프랜차이즈죠. 많은 사람들이 즐겁고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요리를 만들고 싶거든요. 식당은 그 과정이겠죠.-음식 프랜차이즈는 아무래도 인스턴트식품의 성격이 강하니 건강한 먹거리와는 대별되는데, 왜 프랜차이즈인지 궁금하군요.프랜차이즈도 얼마든지 건강한 먹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거든요. 건강한 재료를 쓰면 해결되는 부분이 있고요. 일단 문제가 되는 것은 보관을 위한 방식인데, 유통기간을 짧게 하거나 멸균 방식을 고민하면 충분히 해결 방법은 있다고 봐요.-그런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익산에서 식품회사를 다닐 때 우리나라 통조림 제조 초창기에 참여했던 부장님과 일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레시피 개발이 주 업무였지만 품질 관리도 중요해서 부장님으로부터 배우고 미생물 실험도 할 수 있어야겠다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 공부했습니다. 헤썹(HACCP)은 식품 제조과정에서 위해요소를 분석하고 사전에 예방적인 관리로 식품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안전관리시스템을 말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이어서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했고요.-이 식당에서 프랜차이즈 꿈이 영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메뉴를 보니 요리 방식이 특별한 것 같습니다. 맛도 특별하겠군요.일종의 퓨전 음식인데 음식 맛과 방식은 여기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들이죠.-레시피 개발은 어떻게 합니까.제가 요리 전공자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어서 가능하면 많은 음식을 맛보는 일, 책을 통해 보고 상상하는 일이 제 공부의 전부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만의 특별한 방식은 사진을 보고 그 음식을 상상하는 일이예요. 무슨 맛이 날까, 색깔은 왜 이럴까 상상하면서 재료를 파악하고 제가 만들어보죠. 저도 맛을 보지만 손님들이나 주위 사람들의 시식 소감을 들어 성공적이다 싶으면 레시피로 개발해놓습니다.-결국은 요리를 개발하는 것도 치열한 자기 연구와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시만의 철학을 음식에 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물론이죠. 저는 맛도 중요하지만 재미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어요. 음식에 즐거움을 담아내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음식 철학인데 사실 그것이 쉽지 않거든요. 맛과 모양은 물론 재료와 그릇까지도 다 조화를 이뤄야 가능한 일이겠죠.-누군가가 맛있게 재미있게 먹는 것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요리하는 사람으로서는 꽤 즐거운 일이겠습니다. 본격적인 요리 공부는 어떻습니까.외국의 전통 있는 요리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좋겠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다른 음식을 맛보는 것이 가장 큰 공부지요. 먹어보면 그 맛을 상상하면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거든요.-실전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군요. 레시피를 만들 때는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합니까.특별한 계층만 먹게 되는 값비싼 요리보다는 서민들이 편하고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요리로 개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대중들을 위한 요리라면 아주 보편적인 맛이어야 할 텐데 그렇다보면 특별함은 그만큼 반감되는 것 아닐까요.음식은 주관적 기준으로 평가 받습니다. 사람들마다 취향이 다르니까요. 저는 음식은 선입견 없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정관념을 갖고 대하면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은 익숙하지 않으면 다 맛이 없다고 느끼거든요. 그런 틀을 깨고 싶어요. 여기서도 새로운 음식을 내놓을 때면 손님들에게 설명을 자세하게 해줍니다. 방식과 재료까지.-화제를 좀 바꾸어보죠. 그동안 경력을 돌아보면 식품 쪽이 아니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어느 일이든 최선을 다하고 또 스스로 영역을 확장해가는 자세가 돋보이던데요.어떤 일이라도 열심히 잘해낼 자신은 있어요. 두렵지 않거든요. 그런데 내 식당을 갖고 하다 보니 이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도 고맙고 단골이 생겨 그분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쁨도 큽니다. 이 길이 정말 내 길이었구나 다시 확신하게 된 것이죠.-그렇다면 지금 하시는 이 일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그 답은 좀 고민이 되는군요. 좀 멀리 내다보면 아무래도 확신을 갖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거든요.-위험요소라면 어떤 것인가요.구체적으로는 청년몰이 처한 상황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출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큰 폭의 변화가 있어요. 이곳이 아무래도 한옥마을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데, 식당의 경우는 한옥마을 길거리 음식 후유증을 단단히 받고 있거든요. 저희 뿐 아니라 구도심 음식점 매출에도 영향이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시작된 남부시장 야시장도 청년몰과는 막혀 있어 주말 매출에 영향이 있어요. 사실은 요즈음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건축물로서의 문제도 있지 않나요.이 곳이 워낙 오래된 건물인데다 합법화된 공간이 아니니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어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아요. 전통시장 대부분이 안고 있는 문제일겁니다.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관광특구 지정을 받는 것이죠. 그런데 관광특구 지정은 일정한 유동인구를 확보해야 하고 갖추어야 할 조건이 까다로워서 어려운 일이더라고요.-청년몰에 입점한 가게는 몇 개나 됩니까.서른 두개가 문을 열고 있는데 가게가 비면 수시로 새 주인이 들어옵니다.-청년몰이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들고나는 가게가 있습니까.잘되어서 나가는 친구들도 있지만 공동체문화에 적응 하지 못해 나가는 경우도 있고, 의욕이나 호기심만으로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죠. 어느 일이나 절실함과 치열함이 있어야 밀고 나가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조금 다른 이야기인데요. 나이로 청년을 가르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청년몰이 창업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3년이나 5년 정도 운영 연한을 정하고 이곳에서의 경험과 자생력을 기반으로 다른 곳에서 창업 할 수 있도록 하는 순환구조를 갖게 하는 것이죠. 물론 그런 경우 특별한 지원책이 있어야겠죠.저도 처음에는 그런 방식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5년 정도 일하고 나가면 다른 친구들이 와서 일하는 구조죠. 그런데 사실 해보니 이곳에서는 경험을 쌓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여건이에요. 다른 곳에서 창업 할 수 있는 자력을 마련하는 일은 꿈도 못 꾸죠. 그만큼 수익이 나지 않으니까요.-현실적으로 그런 한계가 있겠군요. 그런데 자치단체 같은 곳에서 좀 더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고 또 이곳을 거친 사람들의 창업을 지원해주는 정책을 마련한다면 어느 정도는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그런 대책이 마련된다면 좋은 정책이 될 것 같습니다.-시장은 일상성이 생명일겁니다. 그런데 청년몰은 관광객들에게는 인기가 있지만 전주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아오는 공간이 되기에는 아직 한계가 큰 것 같아요.그것이 가장 큰 고민입니다. 우선은 시민들의 공간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관광객들이 들러 가는 곳으로만 자리 잡다 보면 시장으로서의 자생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겠죠.-자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물론이죠. 다양한 기획을 구상하고 있는데 지난해에도 청년몰 식당들이 중심이 되어 푸드 페스타를 열었어요. 반응이 좋았죠. 올해도 전주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환경도 새롭게 바꾸고 먹거리의 질도 높이고 길거리 음식과 차별화해서 단골을 확보할 수 있는 방식을 열심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좀 더 새로운 청년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남부시장 청년몰은 어쨌든 들고나는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쳤다. 덕분에 청년 장사꾼들의 꿈과 의지가 쉽게 꺾일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러나 일상성이 시장의 생명력이라면 청년몰도 전주 시민들이 찾아오는 일상 공간이 되어야만 한다. 그만큼 갈 길이 멀다.인터뷰 말미, 그는 남부시장 청년몰의 미래는 전통시장의 미래와 함께 있어야 옳다. 청년들의 꿈이 살아있어야 전통시장의 꿈도 산다고 말했다. 청년몰과 전통시장을 한 몸으로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은홍 대표는 광고식품회사 거치며 실전 경험한 준비된 장사꾼김은홍 대표는 전주에서 나고 자랐다. 올해 마흔 한 살. 서울에서 1년 남짓, 익산에서 5년 남짓 직장생활 한 것 말고는 전주를 떠난 적이 없다. 한 때는 그래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갔지만 경제적 가치보다는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그는 공부에는 별다른 취미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해 미술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자식 교육에 완고한 아버지가 무서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마음 졸이며 중고등학교 6년을 다녔다. 성적이 한참 뒤처지는데도 경제학과나 무역학과에 들어가기 원하시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대학 입학 원서를 냈다. 예상대로(?) 낙방했다. 대학 대신 디자인 학원 같은 곳에서 실력을 쌓아 취업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담임선생님이 전문대 입학을 권했다. 미술공부를 정식으로 해본 적 없던 그는 1주일 속성으로 학원에 다니며 정밀묘사를 공부해 디자인과를 지원했다. 실기시험에서 주어진 과제는 빨래집게. 고작 우유팩만 다섯 번 그려본 경험으로 입시에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군대를 갔는데 마지막 휴가를 나오니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복학을 했지만 2학기를 코앞에 두고 그만두었다. 광고회사에 들어가 온갖 일을 다 하며 버텼다. 복학해 간신히 졸업장을 받았다. 광고회사 일도 그런대로 할만 했지만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대신 만든 음식을 입맛 까다로운 식구들이 타박하지 않고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덕분이다. 일식과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첫 직장은 전주의 한정식 식당이었다. 6개월 일하다 서울에 일자리가 생기자 주저 없이 올라갔다. 프랜차이즈 중국 음식점이었다. 업무는 매장 관리였지만 중식 요리도 눈여겨 배워두었다. 결혼을 앞두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 다시 전주로 내려왔다. 마땅한 직장이 없어 택배회사에 들어갔다. 몸도 고단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시기였다. 결혼하고 익산에 있는 식품회사로 직장을 옮겼다.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레시피를 대중화하는 일을 꿈꾸어왔던 그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업무는 물류를 다루는 지게차 담당이었지만 디자인 전공을 살려 회사 로고도 바꾸고 엑셀을 익혀 자료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면서 제품개발에도 참여했다. 사업을 확장하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면서 거래처였던 프랜차이즈 식품업체로 옮겨야했다. 그즈음 전주 남부시장의 청년몰 공고가 났다. 나이 제한으로는 턱걸이여서 마지막 기회였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볶음밥 전문점 더플라잉팬을 창업했다.햇수로 4년차. 그는 3평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든 볶음밥으로 손님을 만난다. 가게는 단골이 늘고 입소문이 나면서 청년몰 안에서도 제법 잘나가는 식당으로 꼽힌다. 큰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몇 년은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건강하고 재밌는 음식을 담아내는 프랜차이즈 사업이 여전히 그의 열정을 부추긴다. 휴일인 월요일에도 가게로 나와 레시피 개발에 시간을 쏟는 것도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다.

  • 기획
  • 김은정
  • 2015.02.27 23:02

전북신용보증재단 김용무 이사장 "소기업·소상공인 보증 늘리고 '희망의 사다리' 역할 약속"

전북지역 소상공인들의 금융정책을 지원하는 전북신용보증재단의 제7대 수장으로 김용무 이사장이 취임한지 2개월째로 접어들고 있다. 한국은행 및 통계청 통계자료에서 알 수 있듯이 도내 상공인들의 폐업이 지속되고 있는 한편 창업도 지속되고 있다. 그만큼 전북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전북 경제의 열악함 속 경제 부흥을 꿈꾸는 도민들의 열망과 성원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가운데 금융업 종사 경력은 물론 대내외적 활동을 통한 중앙정부 접근성 및 지역 내 산학연, 정관계를 아울러 마당발로 불리는 김용무 이사장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가뜩이나 열악한 도내 상공업 사정을 감안할 때 전북신용재단이 넘어야 할 파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 이사장을 만나 향후 전북신용보증재단이 나아갈 운영 계획과 올해 상공인을 위한 특성화 사업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취임 소감과 함께 현 전북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말씀해 주시죠.“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을 느낍니다. IMF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계층 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어 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을 통한 서민경제안정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사회안전망 확충이 필요합니다. 저는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서민 금융회사와 경제적·사회적 취약계층의 삶의 질을 높여주기 위한 사회복지분야에 종사해 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담보력이 부족한 지역 내 소기업·소상공인 등의 채무를 보증함으로써 자금융통을 원활하게 해 상공인의 복리를 증진시키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이자 경제적 취약계층인 서민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만큼 사회생활에서 얻어진 많은 경험과 지역사회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해를 바탕으로 도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앞으로의 업무추진 방향과 임기 내 포부가 있으시다면.“신용보증제도는 공신력 있는 신용보증기관이 중소기업에게 부족한 신용력을 보완해줌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금융격차를 해소시켜 나감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한 소외된 중소기업에게 금융회사에 대한 접근성 및 가용성을 제공해 자금배분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는 중앙 중심의 신용보증제도에서 소외된 지역 소기업에 대한 지역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행 금융권에서 소외 받기 쉬운 무등록·무점포를 운영 중인 한계 저신용자들에게도 선제적으로 보증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제 임기동안 우리 재단에 대한 도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도내 소기업, 소상공인에게 지역밀착형 금융서비스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특히 규모가 영세한 고객들에게 튼튼하고 믿음직한 ‘희망의 사다리’를 놓아드리도록 약속드리겠습니다.-업무파악을 해본 결과 미진하거나 칭찬할 점이 있다고 판단된 부분이 있으신지요.“우선 그동안 고생하셨던 모든 임직원들의 노고를 칭찬해 드리고 싶습니다. 업무현황을 파악해본 결과 2014년 말 현재 재단 기본 재산으로 1259억원을 조성했고, 도내 소상공인들에게 총 1조 1600억원의 신용보증을 지원하는 실적을 이루어 낸 점과 재단 설립 초기의 카드대란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도내 소기업·소상공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체계를 갖춘 점에 대해 칭찬하고 싶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그간 자금지원에만 특정해 신용보증업무에 집중하다보니 궁극적으로 고객들의 성공을 돕고 경영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금융서비스를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점일 것입니다. 앞으로는 자금지원에만 그치지 않고 자금지원을 받은 기업에 대한 경영지도, 금융정보제공 등 기업과 소통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유·무형의 서비스 지원계획을 추진해 기업을 안정화시키는데 일조 하겠습니다.”-소상공인 주력 정책금융기관으로서 올해 주력 사업이 있다면.“올해는 도내 소기업·소상공인들이 손쉽게 정책금융을 이용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는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차별 없는 보증수혜의 제공과 분배, 다자계층이 만족하는 보증모델링사업, 사회경제적 선순환을 위한 기업 활성화 지원, 청년·시니어창업과 일자리창출 등에 성과를 낼 수 있는 혁신적인 보증공급 정책을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우선 보증공급을 도내 시군별로 안배해 지역편중 없이 안정적으로 보증공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증할당제’를 시행하고, 원격지 소재 업체의 보증편의 간소화를 위한 ‘무방문 보증시스템’을 구축해 보증처리기간을 7일에서 5일로 단축하는 신개념 보증 TWO-TRACK 모델 운용, 성실실패자에 대한 재도전기회 부여 확대 등을 추진할 것입니다.“-전북신보의 최근 실적과 올해 목표는.“저희 재단에서는 최근 3년간 매년 평균 1만1430건에 1744억원의 보증을 공급해 왔습니다. 올해는 최근 3년간 평균 실적의 약 120%, 전년 목표인 1800억의 약 117%인 총 1만3000건에 2100억원의 보증을 공급하는 내실 있는 목표를 수립했습니다. 아울러 전북도 출연기관으로서 민선 6기의 주요 경제정책의 시행성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여러 노력을 함께하기 위해 농산어촌 제조업 분야에 200억원, 관광 및 예술체육업종에 250억원, 탄소산업 분야 300억원, 창업 및 경영안정 지원에 800억원, 원료 및 원자재 구입 등에 400억원을 지원하는 계획도 수립해 추진 중에 있습니다.”-도내 소기업, 소상공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우리 도내 소기업, 소상공인들이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도의 경제적 기반과 환경이 타 시도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됩니다. 어렵고 힘들 때지만 움츠리지 말고 자신감과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앞으로 나가 전라북도 경제성장의 중심으로 우뚝 서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전북신보도 미력하나마 도내 소기업·소상공인 여러분을 위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고객 여러분에게 희망의 사다리를 반드시 놓아드리겠습니다.”● 김용무 이사장은 정치 경제 의료 등 두루 거친 실력파, 마당발 인맥 눈길김용무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생각의 마술사’로 불린다. 경제, 정치, 사회, 의료 등 사회 전반적 업무를 두루 거친 실력파인 김 이사장은 사물과 현상을 본대로가 아닌 생각하고 만져보는데서 시작한다. 가령 대형사건이 발생해 많은 인명을 앗아가는 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할 때 그는 먼저 사고 원인보다는 사고를 당한 유가족의 마음에서 사건에 접근한다. 통상적으로 일반인들은 사고의 규모와 피해상황을 먼저 생각하며, 유가족의 아픔에 대한 생각은 그 이후다.이 같은 김 이사장의 접근 방식이 소상공인을 주로 하는 신용보증업무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기대가 높다.무조건적으로 신용과 담보, 매출규모만을 보고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닌 그 업체가 가진 기술과 미래성을 먼저 판단하고 그 이후 조건을 맞춰가는 ‘보듬는’ 지원정책을 벌여 나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김 이사장은 전주 출신으로 전주고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전주상호저축은행 상임감사, 전주시립 안골노인복지회관 관장, 전주시립갱생원 원장, 사회복지법인 인산복지재단 기획실장, 전라북도 도립 마음사랑병원 행정부장, 전주기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5.02.24 23:02

새정치민주연합 유성엽 전북도당위원장 "전북의 정치적 위상 강화…지역발전 큰 틀 마련 노력"

새정치민주연합 유성엽 의원(정읍)은 한 달여 전인 지난달 20일 경선을 통해 전북도당위원장을 맡게 됐다. 경선 과정에서 그는 ‘전북의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많은 당원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전북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갖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의 화합과 도정과의 협력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유성엽 위원장으로부터 전북 발전을 위한 구상과 앞으로의 활동계획, 그리고 한달 남짓 동안의 이야기 등을 들어본다.-도당위원장 선거가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격렬하게 치러졌습니다. 일부에서는 당의 화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이 화합해야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떠한 선거든지 치열하지 않은 선거는 없습니다. 누구나 당선되려고 출마하는 것이고, 또 당선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선거가 끝나면 다시 평상심을 되찾아야 하고 그래야만 다시 기회가 생기고 또 미래가 있다고 봅니다. 특히 당내 경선의 경우에는 다시 한몸이 되고 전북 발전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 입장이 되는 거죠. 11명 국회의원이 결코 많은 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도 아닙니다.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쫓는다면 화합하지 않을 명분이 없습니다. 전북의 정치적 위상 제고와 전북 발전이라는 큰 틀을 위해 도내 모든 정치권이 하나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거는 격렬했지만, 권리당원의 투표율은 26.8%로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권리당원조차 이처럼 선거에 무심했다는 것은 당원들이 스스로를 당의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당원들에게 당을 돌려드리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실 것인지 말씀해주세요. “사실 선거때만 찾는 당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권리당원이 우리 전북에 계시고, 우리 전북의 권리당원이 정치행사에 적극 참여하면 당 대표도 만들어 낼 수 있고, 나아가 대통령 후보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결국 정권교체의 가장 주요한 역할과 권능이 우리 전북의 권리당원에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 주인의식을 먼저 고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의 주인이 당대표나 최고위원, 국회의원이 아니라 당원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선 제도적으로 중앙당의 권한과 권능을 대폭 시도당으로 이양하고, 시도당은 다시 지역위원회로 위임해야 합니다. 분권을 강고하게 다져서 뿌리가 튼튼한 정당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새정치민주연합의 주요한 의사결정 과정에 권리당원의 참여방법을 다양하게 마련하고자 합니다. 아웃바운드 방식의 전당원 투표제나 인바운드 방식의 여론조사 참여방식 등 당원이 보다 쉽고 편리하게 의사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도입하겠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중추인 전북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문재인 대표가 당선된 이후의 인선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앞으로 중앙당과의 관계에서 전북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달하고 전북의 몫을 챙길지 말씀해주세요.“전국에서 가장 많은 권리당원이 있는 우리 전북이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인선의 문제에 있어서 지도부가 적소에 적재를 배치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단순히 인선이 끝나고 전북이 배제되었다는 볼멘소리만 늘어 놓을 일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누가 적임자임을 당당히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북권 공항건설이나 새만금 신항만 설계변경 등 지역현안에 있어서도 일관된 도민의 목소리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의견조차 조율되지 못한다면 결코 중앙에서 관심 갖는 의제화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정치권과 도가 긴밀히 협력하고 현안에 대해서 일관된 목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제는 보다 솔직하고 분명하고 화끈하게 전북의 몫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지역에서 최고위원회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현장 최고위원회는 당이 국민들에게 다가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누리당도 이미 하고 있고요. 전북에서 새정연 최고위원회의가 열린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현안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그동안 여의도에서 아귀다툼만 하던 지리멸렬한 야당의 이미지를 벗어나 현장과 국민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야당상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수권 대안정당으로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전북을 비롯한 호남에서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압도적인 신뢰와 지지를 재건하는 것이 정권교체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당장 ‘한·중 FTA’로 타격을 입게 될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중 FTA’ 시대를 맞아 전북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대중국 시장을 겨냥한 공항과 신항만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명분이 주어졌습니다. 요즘 연일 중국 관광객을 위한 컨텐츠 부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문화와 생명이 살아 숨쉬는 전북이야 말로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강력한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도당위원장은 지역 정치의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북에서 새정연의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당원수도 많고, 그만큼 역할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이지요. 고시출신으로 관료와 정치를 두루 거친 경험과 경륜을 전북발전을 위해 어떻게 발휘할 것인지 구상을 말씀해주시지요. “저는 요즘 세대교체라는 표현보다 세력교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요즘은 지방자치의 경험과 경륜이 있는 지도자들이 부각되는 흐름입니다. 기존에 중앙정치권에서만 활동하던 분들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었다면 이제는 풀뿌리 지방자치부터 꾸준히 성장해 온 사람들이 당과 정치권에서 주역을 맡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내무부에서 시작해 17년간의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민선3기 정읍시장에 당선되었습니다. 또 시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마침내 도당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현장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또 나름대로의 대안도 고민해 봤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전북이 처한 현실 그리고 도민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여겨서 전북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이땅에서 낳고 자란 후손에 자랑스러운 전북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행정과 당이 서로 손잡고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송하진 지사와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전북도와 협력관계를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말씀해주시지요.“송하진 지사님과는 특별히 껄끄러운 관계가 아닙니다. 당과 도정은 협업을 통해 전북발전이라는 대의를 달성해 나가야 하는 공존의 관계입니다. 당장 25일에도 국회의원과 도지사가 만나 지역현안을 논의하는 도정협의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꼭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소통하면서 전북발전을 위해 고민해 나가겠습니다” -KTX 문제를 겪으면서 전북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주어 다소 아쉽지만 무난하게 매듭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민의 입장에서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의원들이 좀더 단결된 모습으로 강력하게 대응했더라면 하는 바람이 그것입니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안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수 있고, 지방분권이나 지역균형발전 등 지역의 단합된 목소리를 내야 할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강력한 당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실 계획인지 말씀해주세요.“KTX 문제가 불거졌을 때, 도내 의원들과 긴밀히 공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국토교통부 장관을 면담할 때 김관영 의원과 함께 했고, 특히 국회 국토교통위 소속의 강동원 김윤덕 의원은 상임위에서 관계당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제가 광주시당위원장, 전남도당위원장 등과 함께 청와대 경제수석을 만났고요. 도내 의원들간에 유기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서 다소 미흡하지만 무난하게 매듭지을 수 있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전라선 증편의 문제에 있어서도 손발을 맞춰 도민들께서 기대하시는 수준으로 이끌어 내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큰 현안에 대해서 11명 국회의원이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사안에 따라서 전략적으로 접근해서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끌어내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 기획
  • 이성원
  • 2015.02.23 23:02

전북 출신 정갑영 연세대 총장 "지방대학, 독특한 장점 살려 경쟁력 키워야"

전북 출신 정갑영 연세대총장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일컬어진다.오늘날 수많은 대학이 학생수 감소와 재정난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연세대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내는 물론 외국 대학들로부터도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1학년 입학생 전원을 인천 송도에 있는 기숙사에서 1년동안 생활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은 국내 어느 대학도 시도하지 못했던 과감한 혁신이었는데, 이게 대성공을 거두면서 국내는 물론 외국의 학생들이 줄지어 연세대로 몰려들고 있다.전북 출신 정갑영 연세대총장을 만나 오늘날 대학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향후 지역사회에서 대학이 갈 방향을 들어봤다.-대학총장 부임 이후 달라진 모습과 지금까지 총장으로 재임하시면서 느낀 소감이 궁금합니다.제가 취임하던 2012년은 대선을 앞두고 반값등록금과 입학제도 등 대학정책과 관련된 논란이 격화됐고, 사립대학들은 자율성과 정체성 위기를 겪던 때 였습니다. 특히 연세대의 경우 인천 송도 경제자유구역내 18만평의 간척지위에 신설 중이던 국제캠퍼스가 자칫하면 독이 든 성배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컸던게 사실입니다. 저는 이 국제캠퍼스가 영미권 명문대학들이 채택하고 있는 주거대학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어서 성공하리라 확신했는데 결과적으로 최고의 대박을 터뜨리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아시아 대학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죠. 지난해 연세대는 THE(Times Higher Education) 평가에서 역사상 첫 80위권의 저명한 대학으로 선정됐고, 무려 103개국 학생들이 입학하는 곳으로 성장했습니다.-인천 송도에 운영중인 국제캠퍼스 기숙사에 왜 1학년 전원이 1년동안 머무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예일대나 옥스퍼드대 등 중세유럽의 전통을 이어받은 영미권의 유수 대학들은 기숙사 단위의 컬리지에 더 큰 소속감을 갖습니다. 우리나라 서원도 유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가 있어서 밤낮없이 학문을 연구하고, 스승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인품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은 단순히 취업을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에 불과한 경우가 많고 지식전달 기능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송도캠퍼스를 마련해서 기숙사 대학을 실현했습니다. 서울 신촌캠퍼스가 약 30만평 가량되는데, 송도는 32만평이나 됩니다. 국제캠퍼스에는 약 5500명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생활공간과 첨단 교육시설이 갖춰져 있어 연세대 신입생 전원이 지성은 물론 강한 체력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문화예술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며 전인적인 인격체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꿈에 불과했지만, 국내 대학 중 맨 먼저 도전해서 성공하자 다른 대학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사고 있습니다.-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한마디로 노력은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볼까요. 양을 지키기위해 매일 사자나 곰과 싸우면서 갈고닦은 실력이 없었다면, 엘라 골짜기에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릴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기로에서 혼신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매일 스스로 연마하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저 역시 첫번째 대학입시에서 실패했던 경험, 대학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장래가 불투명한 연구소로 이직했던 일, 아는 사람 한 명없는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각종 고비와 기로에서 좌절하거나 안전한 선택만 했더라면 저는 지금과 많이 달라진 삶을 살았겠죠. 도전과 실패,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학생이나 학부모 모두 지방을 떠나려하고, 전국 지방대학은 앞다퉈서 수도권과 가까운 곳으로 진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지방의 발전과 지역대학의 발전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유수의 대학에 뒤지지 않는 지방대학들이 많았으나 경제체제가 서울중심, 대기업 중심으로 옮겨지면서 우수 학생들도 지방대학을 외면하고 수도권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국내 경제규모를 고려하면 세계 100대 대학이 10개는 있어야 하는데 국내 종합대학 중 세계 100대 대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곳은 서울대 정도밖에 없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기업들이 더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정부는 지역대학 중 경쟁력 있는 곳이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집중해야 합니다. 지방대학을 육성한다고 화단에 물 주듯이 모든 대학에 공평하게 지원하면 효과가 없습니다. 지방대학 역시 독특한 장점을 살려 경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정부재정지원 평가에 따라 교육중심-연구중심-산학협력 중심을 시계추처럼 오갈 것이 아니라 자기 대학의 특성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의 색깔이 분명한 독특한 커리큘럼으로 승부해야 지역대학이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우한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지도와 지원이 필요하겠죠.● 정갑영 총장은 연세대 전북인 첫 총장, 삶도 대학경영도 '도전'3선의 최규성 국회의원(김제-완주)은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제가 배출한 사람 중 가장 성공한 사람 한명을 꼽는다면 정갑영 연세대 총장이라고 할수 있다고 말했다.130년의 연세대 역사상 전북 출신 첫 총장인 정갑영 총장(64)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지난해말 감사원은 혁신을 이끌어갈 감사혁신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정갑영 연세대 총장을 선임했다. 감사혁신위원회는 혁신과제를 발굴제안하고 감사혁신 기본계획 및 실행계획을 최종 심의의결해 감사원장에게 건의하는 등 실질적으로 감사원 혁신을 주도하게 된다. 수많은 대학총장 중 한 명에 불과할 텐데 왜 정갑영 연세대 총장은 주목 받는 것일까.호남 인맥이 취약한 연세대에서 정 총장은 일반의 예상을 깨고 첫 호남출신 총장이 됐다.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고,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편안한 삶이 보장됐던 한국은행에 취직이 됐지만, 2년만에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전국에서 5명을 선발하는 경제학 분야 국비장학생에 뽑혔고, 곧바로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코넬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35세의 나이에 교수가 된 그는 경제학자로서 만족했으나, 2004년 교무처장에 발탁되면서 교육행정가로서 빼어난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2006년부터 강원도 원주캠퍼스 부총장을 맡은 그는 CEO로서의 자질을 맘껏 발휘했다. 그가 책임진 원주캠퍼스는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재단 이사회에서 선출해 전체 교직원들이 동의투표를 하는 총장 선출과정에서 정갑영 총장후보는 무려 87%의 득표력을 보였다. 연세대 역사상 총장 신임 투표로서는 최고의 득표율이었다.고교시절 그는 문예반으로 활동했다. 전주고 동창인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을 만난 것도 바로 그 때였다. 쉽게 되리라 생각했던 연세대 시험에 떨어진 그는 재수를 해서 연세대에 들어갔다. 아내와 딸 셋도 모두 연세대 출신인데, 그것 하나만 봐도 가족들의 학교사랑을 짐작할만하다.

  • 기획
  • 위병기
  • 2015.02.16 23:02

[(47)김제 농산무역(주)] 까다로운 일본 시장 공략…'파프리카 한류' 이끌어

파프리카(paprika)의 대일(對日) 수출을 통해 총매출 280억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 김제시 순동 645-5번지 소재 농산무역(주)(대표 조기심).파프리카 재배 시설채소 영농조합법인의 공동출자로 지난 1999년 설립된 생산자단체인 농산무역(주)은 현재 파프리카 영농법인 19개소(농가 95호, 시설온실 40㏊ 및 토마토 영농법인 3개소(농가 15호, 시설온실 3.3㏊), 기타 채소(양배추 등) 농가 20호로 구성 돼 있으며, 자본금은 40억원이다.농산무역(주) 조기심 대표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 돌재팬전국 체인망을 통해 한국산 파프리카를 일본 안방에 공수하고 있는 수출 주역이다. 조그마한(?) 농산물 수출업체인 농산무역(주)은 현재 직원이 약 100여명에 이르고 인건비만 연간 25억여원에 달하는 속이 꽉찬 중소기업으로, 젊은이들이 입사 하고 싶어 하는 회사로 정평이 나 있다.△선별장(APC)시설 장비유통 현황= 규모 및 설비로 건물 6083㎡(저온선별포장장 4169㎡, 저온저장고 1091㎡, 기타 823㎡)가 있고, 취급물량은 연간 7000톤이다.수출은 연간 3000톤(공동대표브랜드 휘모리사용)으로 주수출국은 일본(이온 자스코 등 대형 양판점)이고, 내수는 홈플러스 및 롯데마트 등 대형유통업체와 백화점에 연중 공급 하고 있다.△조직 특성= 생산의 규모화유통 전문화를 통한 경쟁력 확보를 위해 파프리카 수출농가(영농조합법인) 공동출자 설립된 생산자 단체로, 주주 전원 시설재배농가(영농법인)들로 구성 돼 있다.재배-상품화-유통-판매 후 관리까지 일괄 관리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공동 마케팅을 실시하며, 생산이력관리 및 품질관리를 위한 ERP, 바코드 시스템을 운영한다.GAP시행 및 천적 활용 등을 통한 농산물 안정성의 확보 및 생산이력을 관리하고, 생산기반 확대 및 유통시설 확충 등으로 연중 공급체제를 구축 하고 있다.△농산물 관련 사업 및 일본 진출 동기= 의류사업을 하던 조기심 대표가 농산물 관련 사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1994년. 당시 노지재배를 통해 수박농사를 짓고 있던 남동생이 정부 권장에 따라 유리온실을 통해 시설재배를 시작했다. 시설재배 사업비만 14억 정도가 들어갔으나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토마토, 오이밖에 재배할 것이 없는 당시 상황에서 시설재배는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없는 현실이고 농가들도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어 토마토와 오이는 이미 시장에 과잉 공급 되고 있었다.상황이 이러하자 새로운 시장을 모색하던 조 대표 동생은 파프리카 재배를 통해 돌파구를 찾고자 했지만 조 대표 생각은 달랐다.의류사업 관계로 일본을 자주 왕래했던 조 대표는 일본 파프리카 시장도 이제 겨우 네덜란드산 파프리카가 자리를 잡으려 하는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 동생을 만류했지만 동생은 다른 대안이 없지 않느냐며 파프리카 재배를 밀어부쳤다.하는 수 없이 동생의 파프리카 사업을 돕기로 했지만 조 대표의 우려대로 파프리카의 국내 시장은 형성 되지 않아 매주 생산된 10톤 이상의 파프리카를 처치할 수 없어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에 봉착했다. 이에 조 대표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매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자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어려운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농산물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중국 농산물을 대하는 것 처럼 저질품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 한국산 농산물을 구매하려 하지 않았다.조 대표는 일본인들이 깨끗하고 정교한 제품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춰 좋은 품질의 상품을 깔끔한 포장에 넣어 판매 하면 일본인들도 구매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끈질긴 노력끝에 농산무역(주) 파프리카는 드디어 일본수출을 시작하게 된다.일본 수출을 시작했으나 한국 파프리카가 아무리 A등급을 받더라도 일본 수출업체가 B등급으로 측정하여 수입업자에게 공급 하는 불합리성 때문에 제 값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 대표는 일본 수입업자에게 직접 찾아가 직거래 방식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조 대표도 공급을 중단하는 결단을 내렸다.이후 조 대표의 진실성 및 한국산 파프리카의 우수성을 알고 있던 일본의 다른 업체에서 연락이 와 조 대표의 희망대로 직거래를 하게 되며 한국산 파프리카의 대일 수출이 활기를 띄게 된다.△ 생산자들이 주주인 전형적인 마케팅 조직= 농산무역(주)은 파프리카 생산을 기반으로 한 영농법인과 시설 온실 농가들이 공동 출자한 마케팅 전문회사이다.처음 출발할 때 자본금은 4억8000만원으로 각 농가들이 소유 하고 있는 평수에 따라 출자했다.전남북, 경남 등 4개 도(道) 24개의 영농법인이 참여 하고 있으며, 참여 농가수는 120여 농가에 재배온실 면적은 13만여평에 달한다. 농산무역(주)이 결성된 것은 국내 경기가 가장 침체됐던 IMF시절. 시설농가들이 사실상 도산위기에 놓이게 된 시점으로, 대부분 화훼농사를 짓던 농가들이 국내 경기가 악화되면서 침체의 늪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반면 수출시장은 점점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었다. 때마침 돌재팬에서 2억엔(당시 25억원 정도)의 자금 지원의사를 밝히며 수출해줄 것을 제안, 조 대표는 생산농가들을 조직화 하기 시작했다.조 대표는 돌재팬에서 지원 받은 자금을 담보 없이 농가들에게 24억원씩 지원, 농가들이 파프리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했으며, 수출액의 일부를 떼어내 빚을 갚도록 했다.조기심 대표는 회사의 모든 경영을 투명하게 하다보니 농가들의 신뢰가 쌓이고 결속력이 다져지더라면서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참여 농가 및 직원들이 똘똘뭉쳐 더 전진하는 회사를 만들어 가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조기심 대표 "시설농 모두가 주인의식, 중국시장도 곧 선점할 것 "저는 나는 못해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혼자는 어려워도 여러명이 힘을 합칠 때 못할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도 참여농가 모두가 주인이기 때문에 모두 다 주인 의식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어 경쟁력을 갖고 있지요파프리카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조기심 농산무역(주)대표는 여느 남성 못지 않은 당당함과 자신감, 에너지가 넘치는 여성 CEO이다.파프리카의 대일본 수출을 일궈낸 조 대표는 아직도 욕심이 차질 않는다고 얘기 한다. 조 대표의 다음 목표는 대중국 수출이다.조 대표는중국도 가파른 산업경제 성장으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 도시로 떠나 고급농산물을 생산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면서중국 전체 인구 중 잘 사는 사람 비율이 10%정도로 볼 때 약 1억2000명이 넘기 때문에 일본과 같은 또하나의 시장이 생기는 셈이다. 이 점을 빨리 인식하여 투자 등을 통해 중국시장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고 말했다.여성 CEO라는 특이점일지 몰라도 회사의 청결상태 또한 큰 자랑거리다. 회사 내부가 왠만한 식당 뺨칠 정도로 깨끗하고 온기가 넘쳐난다. 회사 내부로 들어가면 일단 따뜻한 온기가 방문객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조 대표는 현재도 직원들에 대한 복지가 나쁘진 않지만 내년에는 직원들의 복지(장학제도, 후생복지)문제를 더 늘릴 계획이다면서직원들의 이직율이 거의(5% 미만) 없어 회사가 완전히 가족같은 분위기다고 소개했다.그는이제는 농산물 관련 사업도 마케팅을 달리해야 한다. 우리 회사는 3년째 대기업의 경영 컨설팅을 받고 있다. 타산업 분야의 마케팅을 알아야 농산물 분야도 앞서가는 산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CEO는 투명한 경영과 도덕성을 갖고 회사 경영에 임해야 조직원 및 관련 사람들이 신뢰하고 따른다고 경영 노하우를 밝혔다. 〈끝〉

  • 기획
  • 최대우
  • 2015.02.10 23:02

전북도체육회 최형원 신임 사무처장 "현장 소통으로 전북체육 혁신·재도약 이룰 터"

2015년 새해 들어 전북체육계에 대한 혁신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지난해 10월 제95회 전국체육대회에서 전북도가 전국 14위라는 불명예에 따른 반작용이다. 이 성적은 지난 2005년 14위 이후 최악이자 2013년 9위보다 무려 5단계가 내려간 것이다.송하진 지사가 전국체전이 끝나기 무섭게 도민들에게 송구함을 전하면서 ‘전북체육 혁신과 재도약’을 강하게 주문한 것만 봐도 그 충격을 알 수 있다.대회 이후 사실상 전북체육의 사령탑인 도체육회 사무처장이 물러났고 사무처장 직무대행 체제가 이어져오다 올 1월 19일 도체육회 최형원 총무부장이 승진해 사무처장을 맡았다.도체육회 최형원 신임 사무처장은 취임 일성으로 ‘현장 소통의 리더십을 통한 혁신’을 강조했다.그를 만나 위상이 추락한 전북체육의 재도약 방안을 들어봤다.-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전북 체육계도 변화의 시대를 피할 수 없게 됐다.“전북체육은 두 가지 큰 변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북체육에 대한 높아진 기대감이고 둘째는 엘리트체육 환경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입니다. 현재의 전북체육은 체육 인프라 기반 취약과 체육 팀(선수) 육성 기피 등으로 학교체육과 성인체육 부문의 경기력이 전국 하위권입니다. 이는 도민들의 자긍심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현대사회가 과거에 비해 대중들의 직접적인 체육활동이 확대되는 반면 국가와 개인의 경제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엘리트선수들의 종목 간 불균형과 선수층 축소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작년 전국체전 성적 추락에 따라 전북체육, 특히 엘리트체육의 환골탈태가 요구되고 있는데 혁신 방안을 소개한다면.“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합니다. 저는 취임 일성으로 고객중심의 ‘현장 소통의 리더십’을 실천해 도민 행복 실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전북체육 혁신을 위해 먼저 시대의 변화에 맞는 시스템 개편을 통해서 우수선수 육성 체계 개선과 구성원 즉, 사무처 조직을 개편했습니다. 또한 집행부 임원 구성도 보다 젊고 유능한 체육전문가를 발탁하는 인적쇄신을 단행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경기력 향상을 위한 외부 전문가를 각종 소위원회에 위촉하여 자문과 협조를 구할 계획입니다. 당장 성적을 위해서 단기 처방식의 우수선수 영입보다는 중장기적으로 꿈나무를 육성해 전북체육의 대들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학교체육 육성에 지원과 투자를 할 계획입니다.”-경기력 향상을 위한 성과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들었는데.“경기 종목별 득점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도를 평가해 훈련비 등을 차등지급 하는 목표 득점제화, 지도자 수당을 2등급에서 4등급으로 나눠 지급하겠습니다. 또 전국(동계)체전 성적에 비례한 경기단체 전무이사 성과급 지급, 3년 평균 100점미만 득점 종목의 전국체전 출전 금지 예고제도 실시합니다.”-전북체육 활성화를 위해 가장 시급하다고 여기는 것은.“전북체육 발전을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관심과 지원이 절대적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체육영재도 지역의 인재입니다. 시군이 학교 팀(선수) 지원 조례를 제정해서 그 지역 주민들의 체육에 관심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교육청도 학생선수 육성에 대응투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지역 특화종목을 집중 육성하고 이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도 거두게 될 것입니다. ” -체육의 뿌리가 되는 학교체육 활성화 방안을 소개한다면.“선수육성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합니다. 인기 종목에는 몰리고 취약 종목은 선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변이 열악한 비인기종목과 취약종목에 선수가 육성될 수 있도록 지도자를 지원하고 우리 지역 전략종목과 다메달 종목에 집중투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도내 실업팀 지도자, 선수 230명을 비시즌기간을 이용 종목별로 학생 선수 훈련장에 파견해 재능기부를 통한 개인별 맞춤형 지도로 경기력 향상을 유도하겠습니다. 특히 학교체육이 중심인 도교육청과 협력해 전북학생종합체육대회를 등록선수와 학교스포츠클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와 1, 2부로 나누어 개최해 우수선수를 발굴할 예정입니다. 이어 도민체육대회에 학생부 종목을 확대, 학교체육 활성화를 유도하겠습니다.”-도내 실업팀 부족도 큰 문제인데.“실업팀 창단을 위해서는 우선 팀 육성이 안된 지방자치단체인 정읍시에서 씨름, 진안군은 역도, 장수군은 승마, 궁도, 탁구 종목 등을 올 상반기 중에 창단하도록 하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기업의 실업팀은 혁신도시에 입주한 농촌진흥청, 기금운용본부, 전기안전공사와 근무인원이 1,000여명 이상인 세아베스틸, OCI, 동우(참프레) 등에 팀 창단을 요청하고 중소기업에게는 선수 개인취업이나 컨소시엄 형태의 팀 창단을 유도할 계획입니다.”-체육발전을 위한 기관·단체간 소통과 협력 방안은“도교육청, 체육회, 경기단체간 체육진흥 실무 협의를 위한 유기적 협력체제 구축이 절실합니다. 먼저 유관기관 실무 협의회를 분기별로 정례화할 계획입니다. 여기에다 경기유형별 지도자 워크숍 개최와 대학·실업팀 지도자 간담회도 수시로 열어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에서의 경기력 향상 방안에 지혜를 모으겠습니다.”-새해 도체육회의 또다른 중점 추진 사업계획이 있다면.“오는 2018년 제99회 전국체육대회가 전북에서 개최됩니다. 이에 대한 경기력 향상 대책도 중요하지만 각종 경기장 신축과 개·보수가 중요합니다. 도와 시·군을 방문해 협조를 요청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각종 국비 공모사업과 스포츠용품 스폰서 계약, 수익사업에도 역점을 둘 생각입니다. 특히 스포츠현장에서 발생되고 있는 금품수수, 경기운영의 불공정성, 특기자 입시비리, 구타, 폭행 등 비리 척결과 인권 향상을 위한 선수·지도자 세미나와 강습회를 상시 개최하고 도내 생활체육회와 장애인체육회를 포함한 체육 3단체가 소통, 협력하도록 합동 워크숍과 등반대회도 논의해 나갈 예정입니다.”● 최형원 사무처장은- 실무·이론 준비된 전문가 체육회 공채 출신 첫 발탁도체육회 최형원 17대 사무처장 인선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2014년 6·4지방선거에 따른 송하진 도지사 체제가 시작되면서 도 산하기관과 출연기관장의 인적쇄신이 예고된 가운데 도체육회 사무처장의 교체여부도 관심사였다. 특히 작년 10월 전국체전 성적 추락은 사무처장 교체로 무게 추를 이동시켰고 이에 따른 하마평이 무성했다. 김대진 사무처장이 11월 중순 자진사퇴하자 전북도는 곧바로 신임 사무처장을 선임하려다가 최형원 총무부장을 사무처장 직무대행으로 두고 연말까지 숨고르기를 했다.이를 전후해 사무처장 후보군들의 인사 로비전이 전개됐고 송하진 도지사는 이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도체육회 회장이자 사무처장 임명권을 가진 송 지사는 로비가 펼쳐지기 이전에 이미 후보군들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는 후문이다. 로비를 하면 할수록 도지사의 눈밖에 나게 됐다는 얘기도 들렸다.송 지사가 마음속으로 낙점한 이는 바로 도체육회 최형원 총무부장. 도체육회 공채 1기로 입사한 최 부장은 27년간 묵묵히 전북체육에 헌신한 인물로 전북대 박사 과정을 마치는 등 실무와 이론에서 가장 적합하고 준비된 인물이었다는 게 훗날 송 지사의 설명이다. 최 부장이 인사 로비를 하지 않고 사무처장 직무대행으로서 전북체육 혁신방안 마련에 골몰했던 점도 오히려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최근 사석에서 송 지사가 최 처장에게 “저 친구는 처장을 시켜줘도 내게 감사 인사도 오지 않은 친구”라고 농담을 했을 정도다.결국 도체육회 사무처장을 놓고 선거캠프 인사 낙하산설, 도청 간부 파견설, 특정인 내정설 등이 난무했지만 이는 모두 사실무근이었고 뜻밖에 내부 승진이 이루어진 것이다. 도체육회 사무처장 내부 승진 소식이 전해지자 도내 체육계 인사들은 물론 각계에서 ‘제대로 된 발탁’이라는 목소리가 그래서 나왔다.1962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순창고와 전북대를 졸업한 최 처장은 1988년 도체육회 공채 1기로 입사해 운영과장, 훈련과장, 관리과장, 총무과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체육행정의 직무환경과 조직문화. 임파워먼트 및 조직헌신도의 관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체육회, 중앙경기단체, 시도체육회 주요 인사들과 인맥이 두텁고 스포츠 마케팅 활성화에 관심이 많다.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체육행정 전문가로서 체육인들의 신망이 두터워 체육계의 소통과 화합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족으로는 전주예수병원에 근무하는 부인 이성희씨와 두 딸이 있다.

  • 기획
  • 김성중
  • 2015.02.09 23:02

완주로컬푸드 안대성 대표 "철저한 준비, 행정과 주민의 신뢰가 사업 성공 이끌어"

최근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완주로컬푸드는 6차산업의 모델을 제시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2012년 출범한 지 2년여만에 사업장이 3개(완주 용진농협 로컬푸드 제외)로 늘었고, 매출액은 200억 원에 육박한다. 지역 농민과 도심 소비자를 절묘하게 연결시킨 시스템과 노력의 결과다.지난 달 29일 완주군 구이면 모악산 입구에 자리잡은 완주로컬푸드 모악점에서 안대성 대표를 인터뷰, 6차산업의 성공 조건을 들어보았다.-안 대표는 완주와 어떻게 인연을 맺었습니까.저는 경기도 수원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광고대행사를 다녔습니다. 열심히 했고, 승진도 해서 국장으로 일했어요. 2005년 무렵이었어요. 광고대행사 일하며 사는 것에 회의감이 들 무렵이었는데, 장수군에 귀농해 살던 대학 선배가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어요. 광고대행사에서 갈고 닦은 기획, 마케팅 등 저의 재능이 농촌에서 필요하다고 하더라구요. 2005년 말에 내려왔는데, 최근 소양 문화마을 집을 사서 이사했습니다.-로컬푸드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요.제가 완주에 내려와서 처음부터 로컬푸드 일을 한 것이 아니예요. 저를 이곳으로 부른 선배는 2003년에 장수군으로 귀농했어요. 그 선배는 농업농촌 활성화를 위해 일하던 또 다른 선배를 장수에서 만났고, 그들이 장재영 장수군수 초선 시절부터 함께했죠. 제가 제안받았을 당시는 장수 거점산지유통센터(APC)가 문을 열 무렵이었어요. 유통 마케팅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췄으면서 나름대로 농업농촌에 대한 가치관이 남다른 사람을 찾던 중 기업 마케팅 홍보 전략 등을 기획해서 실행할 수 있는 저를 부른 것이죠. 그리고 2006년 12월에 선배들이 농촌문제 전문 컨설팅 회사인 지역파트너를 설립했는데, 이곳에 들어가 진안군 귀농지원사업 등 농업농촌 관련 용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완주와 인연을 맺은 것이죠.-그러면 완주군과 일을 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저희 지역파트너와 완주군이 연결된 게 2007년 여름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완주군수가 농촌을 어떻게 하면 활기 넘치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 것 같고, 담당 공무원은 당시 농업농촌활력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장수군을 방문해 농정기획단, 지역순환농업 등 성공 사례 벤치마킹에 나섰던 모양입니다. 그 때 장수군 담당자가 그런 일이라면 지역파트너를 찾아가 보라고 저희를 소개했던 것이죠.-실제로 완주군 담당 공무원이 지역파트너를 찾았군요.장수군에서 지역파트너의 전문성을 인정해 줬기 때문이죠. 지역파트너는 곧바로 완주군수에게 지역농업농촌 활력화 방안과 관련한 브리핑을 했어요. 그 자리에서 지역파트너는 몇가지를 제안했는데요, 농정기획단을 만들자, 마을만들기사업을 하자, 농촌 노인 맞춤형 복지를 하자 등입니다. 예를 들어 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농촌 복지의 경우 보일러 등 기술자와 영양급식전문가, 침 놓을 줄 아는 사람 등을 확보해 가가호호 방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농촌 노인 맞춤형 복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봤어요. 저희는 장수와 진안 일을 해 본 경험을 토대로 완주군에 제안한 것이고, 판단은 완주군 몫이었습니다.-완주군에서 조건없이 받아들였습니까.저희가 브리핑한 다음날 완주군은 지역파트너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이겠다고 했어요. 완주군 농업농촌활력사업 용역을 지역파트너가 맡게 된 것이죠. 완주군은 그 해 가을에 민원봉사과에 민원기동반을 만들었어요. 또 저희가 제안한 농정기획단도 만들기로 했습니다. 또 완주군에서 실무를 맡아 진행할 전문가 추천을 요청, 지역파트너 전문가 한 사람이 2008년 3월에 완주군에 계약직으로 채용됐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정책이 완주군 농업농촌 발전 약속프로젝트예요. 골자는 지역농업순환시스템 구축, 소농 고령농 유통 대책으로 로컬푸드 구축, 농가부채문제 해결, 마을회사 만들기, 생산적복지 차원에서 두레농장 만들기 등 5가지 입니다.-진통은 없었는가요.논란이 있었지만 2008년 하반기에 예산을 확보하였고, 비교적 차질없이 진행된 것 같습니다. 2009년 말에 희망제작소와 MOU를 체결했고, 2010년에 약속프로젝트를 민간차원에서 진행할 수 있는, 행정과 민간의 중간조직인 지역경제순환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지역경제순환센터에 마을회사 육성센터, 로컬푸드 지원센터, 커뮤니티 지원센터, 도농순환센터, 공감문화센터 등 5개 기간조직이 만들어졌고, 거기에 민간인 전문 계약직이 채용됐습니다. 저는 마을회사 육성센터 팀장으로 합류했습니다. 이 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완주군에도 정규 행정조직인 농촌활력과가 신설됐고, 마을회사육성계와 로컬푸드계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2010년 일입니다.-마을회사육성센터에서 일했는데, 어떻게 로컬푸드 사업 대표이사를 맡게 됐습니까.마을회사육성센터에서 10개월 정도 일하다가 나와서 2011년에는 링크라는 컨설팅회사를 세워 전라북도 향토산업마을, 완주군 거점농업가공사업 등을 컨설팅했어요. 그러던 중 완주군이 농업회사를 만들어 로컬푸드를 총괄할 책임자로 저를 불러주었습니다. 당시 전라북도 6차산업에 완주군의 해피스테이션이 선정됐고, 저는 2012년 1월부터 농업회사 법인 준비단을 맡아 일했습니다. 6월에는 대표이사로 취임했습니다.-안 대표는 이 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2007년 완주와 인연을 맺고 일하면서 지역 사정에 정통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완주군 로컬푸드 사업 성공 요인은 뭐라고 보십니까.철저한 준비, 행정과 주민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준비단을 만들어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주로 무슨 일을 했습니까.로컬푸드가 타지역에서 쉽게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 정책 대상이 되는 주민들을 재조직하지 않고 로컬푸드 사업을 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 행정단위에 주민들이 살고 있지만 그 분들은 조직화 돼 있지 않거든요. 저희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찾아 다니며 홍보하고 교육도 했습니다. 제가 대표이사 취임하기 6개월 전인 2012년 1월부터 준비단을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저를 중심으로 한 4명이 완주군 마을회관 전체를 다 찾아 다녔어요. 로컬푸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농가를 재조직하는 것이 준비단의 핵심 임무였거든요. 완주군 마을회사 100개가 소재한 마을을 제외한 347개 마을을 다 돌아다녔습니다. 연로하신 여러분이 직접 매장까지 나올 필요도 없고, 농사만 잘 지어 깨끗하게 다듬고 포장해서 마을회관 앞에까지만 가져다 놓으면 저희가 찾아가서 제품을 실어가고, 매장에서 판매한 뒤 대금을 1주일에 한번씩 각자 통장으로 넣어준다고 설명 했죠.-노인분들이 쉽게 수긍하던가요.열심히 설명하고 다니는데 어느날 면장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사기꾼이 돌아다니며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는 거예요. 할머니들이 저희들 얘기를 들어보고선 저 사람들 말대로만 하면 참 좋겠지만, 과연 이게 될 일이냐 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에는 없던 일이잖아요. 다행히 제 명함을 드리고 다녔기 때문에 곧 오해가 풀렸지만, 모든 주민이 저희 설명을 믿지는 않았죠.-그래도 지금은 많은 분들이 로컬푸드 매장에 물건을 보내고 있잖아요.처음 저희 설명을 들은 할머니들 상당수는 나 낼 모래면 하늘나라 갈텐데 돈 필요없어라거나 나 농사 안지어하시며 시큰둥했어요. 실제로 시골 곳간에는 참깨며 호박 등 수십가지 농산물이 쌓여 있지만, 소량이기 때문에 판매할 생각을 하지 않잖아요. 또 자식들이 찾아오면 싸 주고, 친척들 보내주고 해야 잖아요. 그런데 로컬푸드매장이 가동되면서 할머니들 반응이 달라졌어요. 로컬푸드 매장에 참깨, 메주가루 등을 팔아 돈을 번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놀다가 통장을 꺼내 보이며 자랑한 거예요. 나 저번에 로컬에 거시기 냈더니 통장으로 20만원 들어왔어 하는 식이죠. 시골 할머니들에게 20만원이면 큰 돈이잖아요. 다른 할머니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고 참여하시더라구요.-로컬푸드 직매장에 굉장히 다양한 제품이 진열돼 있는데, 몇가지나 됩니까.연중 500여 품목이 돼야 일상적인 시장보기가 가능합니다. 현재 농산물 300, 가공품 150, 축산물 50 품목이 진열되고 있습니다. 조합원이 1120명 정도 되는데, 농산물을 진열하는 분들은 기존의 농사방법을 바꾸고 있어요. 단일 품목을 대량 생산하는 농가가 로컬푸드 매장에 물건을 진열하면 해당 농가는 일부 품목만 팔고, 로컬푸드 매장은 다양한 품목을 진열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는 기획생산 체제를 갖추는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가들이 팔릴 만큼 계산해서 농사를 짓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죠. 소비자 밥상의 먹거리를 기획해서 생산해야 예측 가능한 농업이 됩니다.-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전 준비, 기획생산 체제 구축 등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2차 산업인 가공 쪽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습니까.로컬푸드 직매장에서 신선 농산물을 판매하지만, 매장에 농산물 가공품이 없으면 운영이 어렵습니다. 완주는 처음부터 마을만들기라는 단위 프로젝트만 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마을만들기, 로컬푸드, 두레농장을 통합적으로 진행했습니다. 마을만들기 사업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지역 농산물 판매와 맞닿아 있고, 농산물을 제대로 많이 판매하려면 가공해서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이걸 동시다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로컬푸드와 마을기업 가공품을 연계해 진행하고 있습니다.-떡메마을, 학동마을 등 농산물을 가공하는 마을기업에서 생산한 제품을 로컬푸드 직매장에서 판매하는 시스템이군요.저희는 농산물 가공을 기업이 아니라 농민이 스스로 하는 시스템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농산물 가공으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도 농민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농민이 가공의 주체가 돼야죠. 농민이 가공업체에게 원료만 제공하다보면 정작 농민 호주머니는 덜 두둑해지잖아요. 완주군 마을회사 정책이 농민가공을 촉진할 수 있는 여건과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각자 마을의 농업 여건을 활용한 가공 공장을 소규모로 짓게 한 것이죠. 이 마을은 콩농사 많이 짓고, 두부 잘 만드는 할머니가 있으니까 두부, 청국장을 만듭시다 하는 식이죠. 여기 로컬푸드 직매장에 나와 있는 가공품들이 그렇게 마을에서 생산된 제품들입니다. 2011년도에 고산에 들어선 거점농민가공센터 1호와 지금 구이면에 짓고 있는 거점농민가공센터 2호도 그런 시설입니다. 완주군 농민이라면 누구나 소정의 교육을 받은 뒤 자신이 생산한 원료를 가지고 거점가공센터에 가서 농산물을 가공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제조허가를 획득할 수 있게 군 차원에서 시스템을 만든 겁니다. 농민이 밭에서 생산한 깻잎 40장을 한묶음으로 포장해 판매하면 1,000원을 받는데, 깻잎 장아찌를 만들어 내놓으면 한봉지에 3,000-4,000원 받을 수 있습니다. 엄청난 차이죠. 현재 완주로컬푸드 매장 진열 상품 중 장아찌, 청국장 등 140가지 가공품이 그렇게 생산된 것들입니다. 저희 매장에 대기업 제품은 없습니다.-완주로컬푸드는 모악점 2층에 농가레스토랑도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반 음식점과 어떤 차별점이 있는가요.완주산 식재료만 가지고 조리한 음식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레스토랑에는 해산물을 이용한 음식이 없습니다. 커피도 없습니다. 대신 생강차, 돼지감자차 등을 마련했습니다. 완주산 식재료만 사용한다는 신뢰성 때문에 고객이 찾아 주시는 것 같습니다.-음식은 누가 만듭니까.농가레스토랑이기 때문에 기본 컨셉이 농촌 전통밥상입니다. 그래서 완주에서 30년, 40년 살아온 주부, 할머니들이 주방에서 일합니다. 화학조미료 쓰지 않고 천연조미료만 사용하죠. 예를 들어 물엿 대신 조청을 쓰는 겁니다. 저희는 가장 건강한 식단을 추구하고, 그래서인지 여기만 오시면 마음껏 드신다는 손님들도 계십니다. 혈압, 당뇨환자분들 중에서 매일 오시는 분도 있고요.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완주로컬푸드가 성공하면서 전국에서 벤치마킹하는 등 관심이 높습니다. 타시군 관계자들에게 조언 한 말씀하신다면.완주는 로컬푸드직매장 단일프로젝트로 성공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합니다. 중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다양한 지역 농정을 어떻게 재편, 지역농업을 활성화시킬 것인가 하는 과제 중의 하나가 로컬푸드이고, 또 그 중 하나가 직매장일 뿐입니다. 6차산업도 하나의 단일프로젝트로 접근하면 실패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지역농정을 통합적으로 재조정, 정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단기중기장기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농정 차원에서 수립했을 때 6차산업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농정을 통합적으로 재점검, 사업 방향이 정해졌다면 로컬푸드를 먼저 시작할 수도 있고, 마을만들기를 먼저 시작할 수도 있고, 협동조합을 먼저 할 수 있을 겁니다. 많은 지자체가 로컬푸드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어려운 농업농촌문제 실타래를 푸는 첫 번째가 로컬푸드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완주 로컬푸드는 조합원 1120명 출자, 협동조합 전환 운영완주군에서 처음 문을 연 로컬푸드 직매장은 2012년 4월27일 문을 연 용진점이다. 완주군은 용진점이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전주시 효자동 옛 동사무소 건물을 임대, 그해 10월 30일 효자점을 개점했다. 여세를 몰아 2013년 10월27일에 모악산 입구에 모악점을 열었다.모두가 성공적이었다. 이들 3개 로컬푸드 직매장 시절의 완주 로컬푸드는 완주군과 용진농협 등 9개 지역농협과 지역축협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한 제3섹터형 농업회사법인이었다. 그러던 중 협동조합형으로 전환 필요성이 제기됐다. 주주총회를 통해 협동조합 전환이 결정됐고, 출자금도 모두 돌려주었다. 새롭게 농가 등 1,040명이 출자, 7억 원의 자본금이 모아졌다. 2014년 1월20일 협동조합기본법에 의한 완주로컬푸드가 창립됐다. 완주로컬푸드와 용진로컬푸드도 이제는 협력관계일 뿐이지 별도의 법인체다. 완주로컬푸드는 효자점과 모악점, 그리고 2013년 1월29일 전주시 하가지구에 자리잡은 하가점 등 3개 직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조합원도 1,120명으로 늘었다. 생산농가들은 다양한 품목을 출하한다. 1개 농가의 연평균 출하품목수는 40-50개다. 많게는 150 품목을 내는 농가도 있다.출하 농민의 70% 이상이 60대 이상 조합원이다. 이창영씨(67세)의 경우 지난달에 30여 품목을 팔아 84만 원을 벌었다. 그가 낸 품목은 감자 3개, 냉이 3개, 도라지 3개, 강낭콩 1개, 돼지감자 33개 얼갈이배추 9 봉다리 등 다양하다. 노지 생산이 많은 지난해 10월 이씨는 160만 원어치를 팔았다.로컬푸드제품은 농가가 직접 진열한다. 당일 팔리지 않고 남으면 수거도 직접 한다. 판매액의 10%는 수수료로 뗀다. 원거리 농가의 제품은 3대의 순회수거차량이 수거한다. 이 수수료는 3%다. 1일 고객이 모악점 700명, 효자 1500명, 하가점 650명 정도다.

  • 기획
  • 김재호
  • 2015.02.05 23:02

[(46) (주)태평주가] 진안서 빚은 '진심 홍삼주'…세계 명품술 반열에 오르다

국내 유일 홍삼한방특구로 지정된 곳이자 전국 최초 홍삼명인이 있는 진안군은 홍삼의 고장답게 다양한 홍삼 관련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그 명성을 인정받는 진심홍삼주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살펴본다.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제2 농공단지에 기반을 둔 (주)태평주가(대표 이영춘)는 2014년에 영국 국제주류 품평회에서 은상을 수상했다.영국 품평회 수상으로 진심 홍삼주는 샌프란시스코 주류품평회(SWSC) 동상, 벨기에 몽드셀렉션 금상, 영국 국제주류품평회(IWSC) 은상 등 세계 3대 주류품평회에서 모두 입상해 명실공히 세계적인 명주 반열에 오르게 됐다.진심 홍삼주는 국내에서도 2011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최우수상, 2012년 장려상, 2013년 최우수상, 2014년 우수상을 수상해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진심 홍삼주는 진안고원에서 생산된 6년근 홍삼과 수삼으로 빚은 증류주로 진안홍삼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데 일조하고 있다.대기업이 전통주 시장에 뛰어들어 소규모 영세업체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에서 태평주가를 설립한 이영춘(53) 대표는 30대부터 술과 인연을 맺었다.30대에 시작한 직장이 우리나라 대표 전통주 이강주를 만드는 회사였다. 술 공장을 다니면서도 50살 이전에 창업을 해보자는 꿈을 갖고 살았다. 그래서 2010년 48살의 나이에 과감히 꿈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이다.그래서 찾은 곳이 진안군이다. 인삼으로 술을 만들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고, 또 이강주에서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마케팅에 대해 많이 고민을 했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인삼주를 선택하게 된 것은 고려인삼이 해외에서 유명한데도 인삼주가 없기 때문에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특히 화학소주가 대부분인 소주시장에서 홍삼을 원료로 한 증류소주는 충분히 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태평주가는 다른 전통주와 달리 내수보다 수출에 주력하면서 빛을 보고 있다. 전라남북도의 전통주 공장이 전국의 25%를 차지하고 있지만,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수시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열 경쟁에 휩싸이게 되고, 내수가 주춤거리면 경영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주)태평주가는 가장 이상적인 매출로 내수와 수출을 각각 50%씩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매출 대비 수출 50%를 달성이 처음에는 힘든 과정이겠지만 성과를 달성하고 나면 경영이 수월해지고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주)태평주가는 중국, 홍콩, 베트남, 대만, 호주 등에 12만불 수출을 성공했다. 현재 수출이 됐거나 수출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오고가는 곳은 중국과 일본, 미국, 베트남, 대만, 홍콩, 필리핀 등이다. 특히 금년에는 미국시장에서 진출할 수 있도록 수출관련 승인 등을 받아놓았고 러시아 수출에 관해서도 바이어들과도 접촉하고 있다. 해외시장 개척과 바이어 상담을 위해 지난 3년간 외국출장을 20번 다녀왔다.외국인을 가장 많이 접촉할 수 있는 면세점에도 입점을 완료했다. 인천과 김포,김해공항과 제주 서귀포, 부산서면, 잠실면세점에 입점해 있다. 면세점 전통주 중에서 매출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태국시장 공략도 차질없이 진행중이다. 현재 현대백화점, 롯데마트에 납품하고 있으며, 농심메가마트 등에도 납품하고 있다. 수출과 더불어 내수시장에서의 판매도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많은 소비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방안으로 대형마트를 공략하고 있다.또한 4개의 제조관련 특허를 등록하였고, 홍삼 오미자주와 53% 홍삼증류주제조방법 등 2개의 특허가 출원중에 있으며, 4개의 상표등록과 해외출원1건, 2개의 디자인등록 등 지식재산(IP)부문에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태평주가의 꿈은 전북에서 생산되는 전통주로 세계시장으로 당당히 나가 지역의 경제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것이다. 그 꿈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태평주가의 미래가 기대된다.● 전통주 외길인생 이영춘 대표 "홍삼 소주 성공 가능성 자신, 받은 사랑 지역에 보답할 것"가장 오래까지 소비자들이 꾸준히 찾을 술은 소주와 맥주라고 생각합니다.이영춘 대표는약주와 탁주, 막걸리 등은 입맛과 정책 등에 따라 기복이 있을 수 있다며맥주는 시설비 등이 너무 많이 들어가 만들기에 역량이 부족해 소주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특히 소주는 많은 양을 먹는 술이 아니기 때문에 프리미엄급으로 만들면 충분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고 한다.이 대표는소주를 만들기로 결심을 한 후 원료를 고민하다 홍삼을 생각해 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대표는홍삼은 전통주 시장에서 마지막 남은 원료다.며홍삼소주가 충분히 프리미엄급의 소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다.고 강조했다.이 대표는전통주가 가장 호황을 누린 시기는 2002년이었다며그러나 전통주업체들이 현실에 안주하다 보니 매출이 점점 떨어져 현재는 당시의 20%선도 유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그는최근 전통주 시장이 침체되고 있는 것은 소비층을 다양화하지 못한 잘못이 가장 크다며그동안 전통주는 젊은층을 위한 마케팅에 소홀해 전통주를 먹을 소비자들이 없어졌다.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기호에 맞는 술맛은 물론, 병 디자인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앞으로 태평주가는 금년 제2의 도약을 위한 생산설비 증설을 완료하고 쌀과 홍삼을 원료로한 홍삼증류주 53% 생산에 나섰다.한국에서 가장 고급이고 돗수가 높은 증류주를 만들어 중국 및 러시아 등 해외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2014년 한해동안 연구하고 분석하여 시제품까지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이 대표는진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우리술을 만들고 이를 통해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 기획
  • 김태인
  • 2015.02.03 23:02

창설 60주년·부대 이전 1년 최창규 제 35보병사단장 <br />"명문대학 '군대' 임실의 지역적 가치 높이겠다"

전북의 향토방위를 책임지는 육군 제35보병사단 간부와 장병들은 2015년, 아주 의미있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사단이 창설된 후 올해로 꼭 60주년을 맞았고, 58년간의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부대를 임실지역으로 이전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새로운 변화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대원들은 오는 4월로 예정된 사단 창설 60주년 기념행사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특히 최창규 사단장은 군대를 대한민국 4대 명문대학이라고 강조하면서, 장병들을 훌륭한 민주시민으로 길러내겠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지난달 30일 임실에 자리잡은 육군 35사단을 찾아 최창규 사단장에게 사단 창설 60주년 및 부대 이전 1년의 소회와 향토사단으로서의 역할, 달라진 병영문화 등 군대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35사단이 반세기 넘는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임실로 이전한 지 1년이 됐습니다. 또 올해로 부대 창설 60주년을 맞았는데 소회와 함께 부대 이전에 따른 변화를 말씀해 주신다면.임실로 부대를 옮긴 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시설과 환경이 좋아지면서 지난해 단 한건의 인명사고도 없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해 부대 표창을 4개씩이나 받았는데 이 또한 여건이 좋아지면서 부대원들이 전투훈련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부대 이전 초기에 임실지역 일부 주민들의 반발도 있었습니다. 지역사회 주민들과 소통화합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를 소개한다면.향토사단이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당연한 역할입니다. 우선 부대 이전사업으로 인해 삶터를 잃고 떠나야 했던 주민들을 부대로 초청해서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드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또 지역 농산물 사주기와 농촌 일손돕기, 전통시장 장보기, 임실종합운동장에서의 신병수료식 등을 통해 주민들과 유대관계도 강화했습니다. 무엇보다 임실군의 가치를 높이는데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임실에는 35사단과 함께 군 단위 지역에서는 찾기 힘든 국립호국원이 있습니다. 호국정신을 계승, 충절의 고장으로서의 지역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부대 이전으로 임실지역 경제에 끼친 파급효과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우선 2000여명의 인구 유입 효과를 들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른 지방 재정수입 증대와 함께 장병군인가족의 소비지출 등에서 경제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또 1년에 20차례 열리는 신병수료식을 지역에 기여하기 위해 부대가 아닌 임실공설운동장에서 축제분위기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한 달에 2번씩은 간부들의 점심식사를 임실읍 내 식당에서 해결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단 이전과 함께 최신 시설을 갖추면서 장병들의 병영생활에 달라진 점도 많을텐데요.병영생활관이 침상형에서 침대형으로 바뀌었고, 체력단련실과 독서실사이버 지식정보방 등을 갖춰 장병들이 보다 활기찬 병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또 군악대는 물론 14개 시군 순회공연을 할 만큼 댄스와 탈춤태권무 등 동아리 활동도 활발합니다. 조만간 동아리 경연대회를 실시해서 우수 동아리를 선발, 이번 설에 전주한옥마을에서 길거리 공연을 열 계획입니다. 설 명절에 전주한옥마을을 찾는 전국의 관광객들에게 우리 장병들의 끼를 보여줄 생각입니다.- 올해 사단 창설 60주년을 맞았습니다. 60주년 기념행사를 소개해 주신다면.우선 부대정신 선양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35사단은 정유재란 때 전주성을 지킨 충경공 이정란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려 부대명을 충경부대로 정했지만,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조형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올해 부대 내에 이정란 장군의 동상을 건립, 호국정신을 기릴 계획입니다. 또 전북지역 14개 시군을 담당하는 각 연대와 대대도 고장을 수호한 역사적 위인을 부대 이름으로 정한 만큼, 여기에 맞는 부대정신 찾기 사업을 펼칠 것입니다. 또 사단 창설기념일이 있는 4월에는 35사단에서 근무한 전북도민 초청행사와 병영체험, 민관군 화합축제 한마당 행사 등을 열어 도민들에게 한발 더 다가갈 계획입니다.- 최고의 명문대학, 군대를 육성하겠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면.요즘 우리 사회와 가정에 어른이 없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군대에서는 선임병과 간부가 어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가정과 학교사회에서 부족했던 인성교육을 군대에서 해보자는 취지에서 명문대학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군대에서 희생과 봉사협동정신을 가르쳐 훌륭한 민주시민을 양성하자는 취지입니다. 이같은 뜻에서 매일 저녁 한 시간씩 장병들에게 책을 읽도록 했고, 사회 봉사활동도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또 사단장은 총장, 연대장대대장은 단과대학 학장, 초급 간부는 교수, 장병들은 명문대 학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군복무에 임하도록 교육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향토사단장으로서 전북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강원도에서 태어났지만 저는 이제 전북도민입니다. 재직 기간 전북 발전을 위한 역할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35사단 용사들의 40%가 전북도민입니다. 향토사단에서 군 생활을 하고 다시 전북도민이 될 젊은이들에게 더 따뜻한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직업군인인 간부들과 달리 사심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용사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최창규 제35보병사단장은] 장병들과 소통 '작전 전문가'육군 제35보병사단 장병들은 모두 사단장인 최창규 소장(54)이 일일이 나눠준 명함을 갖고 있다.명함에는 낮이나 밤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조국에 아무 사심없이 헌신하는 여러분을 존경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장병들은 존경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 스스로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사단장이 건넨 특별한 명함이다.지난해 4월 육군 35보병사단의 제35대 사단장으로 취임한 최창규 소장은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1982년 3사 19기로 임관했다. 제7포병여단장과 육군본부 정보작전 1차장 등을 역임, 작전 분야 전문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사단장 취임과 함께 최강의 향토사단 전북의 방패 최고의 명문대학 군대(軍隊)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최 사단장은 지역민에게 신뢰받는 최강의 향토사단 육성에 노력하는 동시에, 국가관 함양과 인성교육 등을 통해 장병들을 훌륭한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육군 제35보병사단은] 1955년 창설 전주에서 58년 향토 방위지역 발전 이바지육군 제35보병사단은 1955년 4월 20일 강원도 화천에서 창설돼 같은 해 6월 5일 전주시로 이동했다. 전주시 송천동에 자리잡은 35사단은 이후 전북의 향토방위를 책임지는 부대로 도민들과 함께해왔다.그리고 지난해 1월 2일에는 부대를 임실군으로 이전, 58년 전주시대를 마감하고 미래 100년 임실시대를 여는 지휘소 개소식을 거행했다. 새로 터를 잡은 임실 부지는 이전 부지보다 7배나 넓은 735만㎡에 이르고, 현대화된 병영시설과 교육훈련시설로 전투형 군대 육성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갖췄다.부대 이전 1년을 맞은 올해는 사단 창설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35사단은 창설 이후 지리산 개발사업과 호남고속도로 건설사업 등에 대규모 병력 및 장비를 지원, 국가발전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1968년에는 신병교육대대를 창설하여 정예 신병을 양성하고 있다. 또 1980년대에는 포병대대와 병참선 경비대대, 방위병 기동중대 등을 창설했고 전투경찰로부터 해안경계작전을 인수하기도 했다. 이처럼 향토방위와 국가안보지역발전에 노력해 온 35사단은 숱한 부대표창을 통해 그 업적과 위상을 확인했다.특히 지난해에는 통합방위태세 확립 최우수 부대로 선정돼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또 충무훈련 유공 국방부장관 표창, 전투준비태세 지상작전 우수부대 및 대침투 정보활동 우수부대 합참의장 표창까지 받아 부러움을 샀다.

  • 기획
  • 김종표
  • 2015.02.02 23:02

원불교 대종경 목판화 작업 판화가 이철수 "경전은 훌륭한 인생 지침서…우리 삶에 의심들때 존재 일깨워"

전주에서 제천까지 3시간 가까운 동안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리는데도 길은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거나 요동쳤다. 덕분에 길을 돌고 돌아 빠르게 갈 길을 주춤대며 돌아가야 했다. 판화가 이철수씨(61)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80년대의 폭압적인 사회를 저항의 언어로 고발해온 그는 90년대를 거치면서 자기 성찰의 사유하는 힘을 일상과 자연을 향한 깊은 통찰로 담아내는 우리 시대의 판화가로 우뚝 섰다. 그의 판화는 시대를 직시하면서도 맑은 글과 그림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깨어나게 했다. 그만큼 성찰의 시간은 그의 일상이 됐고, 사유는 깊었다.3년 동안 바깥세상과 거의 결별하고 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불교 대종경(大宗經)을 목판화로 옮겨내는 대대적인 작업이었다. 불교 경전과 성서 등 종교의 경계를 가르지 않고 우리 시대에 필요로 하는 지혜를 판화에 담아온 그동안의 작업 연상에서 보면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경전의 모든 내용을 판화로 옮겨내는 과정은 그의 생애에 특별한 대장정이 아닐까 싶었다.원불교 100년 사업으로 건네진 대종경 목판화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했다. 경전을 읽고 또 읽는 동안 세상에 전할 이야기는 자꾸 늘어났다. 300개의 목판 밑그림이 그려졌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그 중 200개의 목판을 새기는 일이다.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주옥같은 가르침을 새기는 작업이다.그의 경전 읽기는 대화의 과정이다. 덕분에 목판화의 작업 역시 경전의 글귀에 그림과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선문답 같은 이철수식 독특한 형식은 이 연작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경전에 대한 새삼스러운(?) 눈뜸에 그는 큰 인연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기쁨은 온전히 그의 목판화에 담겨 오는 가을이면 대중들을 만나게 된다. 대중들에게도 큰 행복이다.그는 인터뷰 내내 목판 새기는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대화를 하면서도 목판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저기 쌓여있는 것이 대종경 작품인가요. 엄청나군요.200점정도 되는데 쌓아 놓으니 더 그렇게 보이는가 봐요. 완성된 것이 100여점 되는데, 다른 것들도 아주 손을 안댄 것은 아니어서 전체 작업 양으로 보면 70퍼센트 정도는 끝난 셈이에요.-대종경 자체가 워낙 방대한 분량이니 그렇겠습니다. 담긴 내용을 다 새기는 것은 아니겠죠.물론이죠. 어차피 모든 것을 다 새길 수는 없으니까요. 내용을 읽으면서 메모를 했다가 그 중에 필요한 글을 다시 가리죠. 밑그림을 그린 것이 300여점 되는데 그 중 200점 정도를 새길 계획입니다.-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올해가 원불교 개교 100년이어서 기념사업으로 5년 전 쯤 제안을 받았어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것은 3년 전인데, 그동안 경전을 열심히 읽는 일을 거듭하고 밑그림을 만들었어요. 올해 10월에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마음이 바쁩니다. 애초에는 100점정도 예상했는데 그 정도로는 내용을 압축하기 힘들었어요. 아쉬움에 더하다 보니 300점이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네요.-그만큼 세상에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다는 것이겠죠.처음 이 작업을 제안 받았을 때는 망설였어요. 60대를 앞두고 이 작업에 바치게 될 시간이 2년이 될지 3년이 될지 모르는데 이 시기를 이 일하는 데만 써도 좋을지 고민이 되더군요. 중국 선승들의 선문집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종경을 두 번 정독 하면서 원불교 대종경과 다시 인연이 이어지게 된 것을 아주 다행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만큼 좋은 경전이었죠.-다시 만났다고 하셨는데, 무슨 이야기인가요.20대에 원불교 경전을 읽은 적이 있어요. 아내가 원불교 신도였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때는 지금만큼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면서는 아주 새삼스럽게 참 좋은 경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이 심부름을 마음을 다해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잡았을까요.기본적으로 쉬운데다 지극히 생활적인 내용이에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습니다. 요즈음 시대를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에 관해 의심을 갖기 십상이고, 잘 살고 있는지에 관해서 고민을 하게도 되죠. 그러면 뭔가 가르침을 찾아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어르신들이나 지혜로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찾아가 들으려고도 하는데 많은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내 이야기로 실감 있게 느껴지기는 어렵거든요. 들을 때는 솔깃해도 돌아서면 잊게 되거나 그 가르침으로 살아가는 일은 더구나 어렵죠. 그래서 때로는 지혜로운 언어조차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 경전은 생생한 생활법문들로 가득차 있어서 시간적으로는 백년 혹은 수십 년 세월을 겹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는 법문으로 얼마든지 읽힐 수 있겠다는 것이죠.-허황하지 않은 지혜가 담겨 있다는 말씀이군요. 원래 선불교에 관심이 많으셨죠.그동안 그림을 통해 불교적인 지혜를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려고 애를 많이 써왔죠. 그런데 여기 정말 새로운 보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원불교에 마음을 둔 분들에게는 아주 반가운 이야기겠습니다.그동안 불교적 지혜를 빌려 쓸 때도 그랬고, 원불교 경전으로 작업 하면서도 마찬가지인데, 어떤 특정한 종교를 선전하겠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다만 어느 지혜든 우리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 가져다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죠. 혹시 종교에 관해서 불신을 갖고 있거나 특정 신앙을 가지고 있어 거부감을 갖게 되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는 꼭 해드리고 싶어요.-이렇게 온전히 이 작업에만 매달려 있으면 바깥세상이 궁금하지 않은가요.집에 앉아 있어도 저절로 다 알게 되는 것이 세상일인데요. 걱정 없어요.(웃음)-지난해에는 작업에만 전념하시기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그렇고.세상에 성을 낼 일이 너무 많아 힘들었죠. 그런데 끝이 날 일이 아닌 것 같네요.-어떻게 보내셨습니까.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명에 관한 생각을 새삼스럽게 좀 더 되뇌거나 고민을 더 하거나 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존재에 대한 생각도 깊어졌고요. 남은 과제가 많잖아요. 슬픔과 분노가 커질수록 세상을 바꿔내야 할 과제는 과제대로 차근차근 해결해가는 자세가 필요할 것 같아요. 남은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정직하게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경전 읽기가 그래서 더 특별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작품마다 대종경에 담긴 글과 선생님의 해석이 붙여있군요.거의 그렇죠. 아주 예외적으로 덧붙일 말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 제 나름의 해석이 놓여 있습니다.-경전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모든 책읽기가 결국은 대화가 아닐까요. 경전 같은 책 읽기는 더 그렇죠. 단순한 정보를 전달 받는 차원이라면 경전이라고 하기 어렵지 않겠어요.-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은 읽기일까요.경전 속의 이야기가 깨달음을 얻은 분의 이야기이거나 혹은 이야기가 있는 예화이거나 그것을 잘 읽어낸 독자는 그 말씀을 바깥 어느 지혜로운 분의 말씀으로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가장 훌륭한 경전 읽기가 되겠지요.-작품이 세상에 나왔을 때 어떤 역할을 기대하십니까.경전에 담긴 내용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대종사께서 내세운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 같은 표어는 정말 놀라운 표현인데, 당시 파리 박람회나 도쿄박람회를 보면 산업사회가 보여줄 수 있었던 물질의 확장이나 확대가 굉장했죠.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환경을 공유할 수 있었겠지만 100년 지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물질의 개벽만큼 실감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산업사회가 보여준 물질의 변화를 보고 개벽이라는 표현을 내놓을 만큼 그 변화를 아주 깊이 이해하거나 통찰한 점은 정말 놀라워요. 정신을 개벽하자는 말씀은 물질의 급격한 변화, 상상할 수 없는 형태나 내용의 변화가 몰려오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 사회와 인류 전체의 화두로 삼아도 좋을만한 큰 화두예요.-그동안 불교 뿐 아니라 성서 작업도 많이 하셨죠.부분적으로 했었죠. 이 일이 끝나면 중국 선승의 선문집과 성서 연작 작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도 종교적 경계를 가리지 않고 작업 해오긴 했는데 이제는 그런 연작 작업을 통해서 그 안의 가르침이 어쩌면 같은 경지의 것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확인해보고 싶어요.-목판 작업을 옆에서 보니 노동량이 만만치 않습니다. 200점 연작을 하는 일이 힘들진 않습니까.이런 분량의 연작은 저도 처음이에요. 특히 이 작업처럼 글씨가 많으면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수밖에 없죠. 그러나 다른 경우는 비교적 단순한 형태의 작업이 많습니다. 기운을 소진하는 일이 예술인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더러는 창작의 어려움을 말하지만 밥벌이로 하는 일도 힘이 드는 일이죠. 훨씬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도 많고요. 우리처럼 이미 허명도 조금은 생기고 이런 저런 기회가 생긴 사람들의 일은 보상을 충분히 받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처음 판화 작업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일품회화처럼 그저 한 두 사람 손으로 넘어가면 끝나는 방식 자체가 도대체 민주적이지도 않고 공공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는 시대적 상황도 그랬고 무한히 찍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가치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래서 밑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조금 더 정교하게 가다듬는 수묵으로도 할 이야기는 대략 전해지는 것일 텐데 그것을 또 새겨서 찍는 번거로운 작업을 하게 되었죠. 지나고 보니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여러 사람의 손에 갈 수 있다는 공유의 가치에 마음이 있었던 것이죠.-지금은 어떻습니까.새기는 작업을 하다보면 붓으로 그린 것과 목판으로 새겨서 찍는 것과는 또 좀 더 다른 결이 있습니다. 판각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전물 같은 매개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판화의 미학적인 요소가 있죠. 요즈음은 과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던 기능을 출판이나 SNS 등 다양하고 기능적으로 변한 전달매체들이 대신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예술이라는 희미한 가치를 통해 판화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려고 하는 차원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이번 작업은 그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인가요.책을 만들어 내거나 전시를 하는 것도 좀 더 많은 대중과 만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원본이 얼마나 감동 있고 설득력이 있나 하는 것, 혹은 얼마나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는가하는 과제일겁니다. 제가 해야 할 일도 그 일을 잘해내는 것일 텐데 감동도 아름다움도 공감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판화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헛발질을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10년 넘게 해 오신 나뭇잎 편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고 정신을 깨우는 통로가 된다고들 합니다. 그런 글쓰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가요.여러 통로가 있겠지만 제가 즐기는 중국 선승들의 선문집류 읽기로부터 얻는 깨달음이 큽니다. 그 글은 대개 볼 것도 느낄 것도 가질 것도 많은 세상에서 최소한만을 가지고 겨우 배를 채우고 겨우 몸을 가리고 겨우 누울 다리를 만들어서 때로는 자기 먹을 것을 위해 밭을 일구는 최소한의 일을 하면서 삶을 온통 묵묵히 앉아 있는 일로 보내는 공부하는 사람들, 다른 곳에 한 눈 파는 일을 최소화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길어 올린 이야기거든요.-이야기를 듣다보니 원불교 경전 뿐 아니라 모든 경전이 가진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느껴집니다.경전은 아주 좋은 인생의 지침서 같아요. 존재에 관한 고민이 있거나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이렇게 흘러가도 좋을까하는 의심이 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를 한번 돌아보게 하는 매개로서도 원불교 경전은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모든 경전이 다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런 경전들을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어요.마치 정갈한 강의를 듣는 것처럼 인터뷰는 특별했다. 어수선한 시절,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그의 표현처럼 오리무중이다. 게다가 삶이 고단해질수록 일상은 부유한다.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천착한 화가는 답을 얻었을까 궁금했다. 오래전 내놓은 작품 중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는 글귀가 있어요. 그 앞에 원래는 마음을 열고 들으면이 있었죠. 사는 것이 좀 힘들긴 하지만 마음을 열면 긍정적인 힘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음을 열자고 애쓰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다 외면하고 있으니 삶이 고단할 수밖에 없지요.다시 정신을 깨우고 마음을 일으켜 세워줄 그의 목판화가 기다려진다. 예술의 기능이 유난히 새삼스럽다.● 이철수 씨는 시대의 아픔 깎는 판화가80년대 저항의 언어로 소통판화가 이철수 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려서부터 책읽고 글쓰고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지만 결국 화가를 택했다. 80년대, 시대는 엄혹했고 암울했다. 시대의 벽을 걷어내고 싶었다. 덕분에 이십대와 삼십대를 광장의 화가로 뜨겁게 살았다. 시위와 집회가 있는 현장에는 어김없이 메시지 강한 그의 판화가 함께 있었다. 폭압적인 사회를 향한 저항과 분노의 언어는 거리로 나선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힘이 됐다.빈민운동을 하던 허병섭 목사의 동월교회에서 아내 이여경씨를 만났다. 서로에게 참 좋은 반려자가 되었다. 20대부터 좋은 스승과 선배들과 교유했다. 그중에서도 70년대 후반에 만난 이현주 목사, 장일순 전우익 권정생 선생은 그의 삶과 예술을 변화시킨 인생의 스승들이다.81년 첫 개인전을 비롯해 몇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판화가로 섰다. 89년에는 독일과 스위스를 순회하며 전시를 했다. 동구권 공산주의가 몰락하던 즈음이었다. 전시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술의 본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성찰의 시간이 길어졌다. 1년 반 넘도록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림의 변화가 시작됐다. 자기 성찰과 생명의 본질에 대한 관심이 화폭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림과 글이 잘 조화된 이철수식 판화가 대중들을 만나기 시작했다.종교적인 화두, 자연과 생명의 언어를 담은 그의 그림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달래는 따뜻한 위로를 건네거나 황폐해진 현대인들의 마음을 새롭게 일깨웠다.간결하면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의 그림과 선가의 언어 방식을 끌어들인 글쓰기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열광시키고 끌어들였다. 광장의 걸개그림으로 생명을 얻었던 그의 그림은 이철수식 판화로 독창적인 경지를 구축했다. 낮은 목소리로 존재의 경이를 이야기하고 삶의 긍정을 말하는 그의 그림은 그만의 새로운 형식으로 전통적 회화를 현대적 판화로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80년대 후반 충북 제천으로 이사한 그는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판화가로서 대중들과의 소통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주위의 도움으로 운영하고 있는 그의 홈페이지에는 8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등록해 날마다 보내오는 그의 그림 엽서 나뭇잎 편지를 받아보는 즐거움을 나눈다.디지털 문화를 멀리하면서도 대중들과의 소통을 위해 기꺼이 인터넷 작업을 받아들인 그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 저녁 그림을 그려 홈페이지에 올려놓는다. 10년 넘게 해오는 작업이다. 최근 3년 동안은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대종사의 언행록인 대종경(大宗經)을 목판화로 새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2011년 목판화 작업 30년을 맞아 펴낸 나무에 새긴 마음을 비롯, 판화산문집과 판화집, 엽서 산문집 등 20여권의 책을 펴냈다.

  • 기획
  • 김은정
  • 2015.01.29 23:02

[(45)정읍수산 그린청해] 수산물 가공공장 전북 첫 '해썹' 적용업소…시장 확대 박차

전라북도에서 수산물 가공공장으로는 최초로 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HACCP) 적용업소 지정을 받은 정읍시 북면 소재정읍수산 그린청해(대표 이기만)가 발빠르게 시장을 넓혀가며 업계의 주목을 받고있다.특히정읍수산 그린청해는 가장 위생적인 가공시설에서 사람들의 식생활에 빠지지 않는 수산물을 가공하여 15개 차별화된 제품을 내놓아 소비자들의 인기가 높다.정읍수산 그린청해는 창립을 하다보니 가장 신선한 수산물 유통망을 확충했고 수산물의 특성을 알고 있어 1년여에 불과하지만 수산물 가공업계에서 빠르게 신장하는 강소기업이다. 총 15억원(국비3억, 시비 3억, 자부담 9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1월 공장 2동(660㎡)을 준공하고 3월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지만 수산물 업계 노하우는 어느 회사보다 높다.이기만(65) 대표가 정읍샘고을시장에서 38년여동안 수산물 도소매업을 운영하면서 유통및 가공등에 대한 노하우를 축적해 놓았기 때문이다.이 대표는 청년시절부터 수산물 도소매기 때문에 남들은 일을 쉬는 나이에 3년전부터 전국을 돌며 시장조사를 거쳐 창업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이어 회사 창업과정에서 익산 소재 이리수산(데표 유광종)의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수산물 가공시설 운용등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직원들이 벤치마킹하여 빠르게 자리잡을수 있었다는 것이다.정읍수산 그린청해는 HACCP 인증과 첨단 위생가공시설및 수산물 직구입을 통한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다. 2개동의 공장은 입구부터 위생시설을 구비하고 직원들도 소독장비를 갖추어야 가공장으로 들어갈수 있다. 외부에서 소비자나 업계관계자들이 견학을 오면 공장 내부에는 들어갈수 없고 전경창문을 통해 가공과정을 볼수 있다.가공작업은 공장으로 들어가는 직원들이 작업복과 앞치마, 장갑등을 소독장에서 꺼내 입고 전면 소독을 거친후 시작된다.철저한 위생 생활화를 실천하기 때문에 칼과 도마도 소독장에 비치하여 사용한다. 수산물은 자동세척작업대 ~ 활복기~ 골절기~세절기~탈피기~냉염수기~금속검출기~진공포장기를 거친다. 특히 마지막 포장전에 금속검출기를 거치기 때문에 가공식품의 안전성도 확보했다.이곳에서 생산되는 가공품목은 명태, 갈치, 꽁치,삼치,고등어, 조기, 임연수어, 가자미, 대구, 오징어, 바지락, 홍합등이다. 모두 조림과 탕, 전, 구이, 튀김, 찜용으로 사용할수 있도록 1kg, 2kg, 5kg, 10kg 포장으로 나오며 가격대도 1kg에 5000원 ~ 1만원대로 저렴하다.첨단 위생가공시설에서 안전하게 생산한 가공품은 소비자가 개봉후 세척하지 않아도 바로 조리해서 먹을수 있다.이에따라 2014년 6월 광주지방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부터 냉동수산식품(어류와 연체류)에 대해 위해요소중점관리(HACCP)적용업소로 지정됐다.또 올해들어 1월23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로부터 학교급식전자조달시스템 등록 승인을 득하며 수산식품전문업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신제품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는데 조만간 인삼 저염고등어 제품으로 특허상품 출원을 앞두고 있다. 인삼 저염고등어는 자반고등어를 인삼과 감초에 넣어서 숙성시킨 제품이다.정읍수산 그린청해는 공장내 냉동및 냉장시설(175㎡)을 갖추고 직배를 위한 냉동탑차 3대를 운용하며 전북도내 권역은 직배하고 온라인을 통해 전국으로 판매되고 있다. 현재 하림 정읍공장, 전북과학대학교, 신태인 굽네치킨, 정우산업, 유성산업, 정읍1공단의 팜스코등에 납품되고 있다.최근에는 저염참굴비, 저염고등어, 암꽃게등을 가공한 선물세트가 설 명절을 앞두고 주문이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기만 대표 "수산물 도소매 38년 경험 축적, 산지 직접구입 통해 가격 낮춰"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즐겨 찾을수 있도록 차별화된 품질과 제품의 브랜드화에 나서고 있습니다수산물 업계 전문가로 손꼽히는 정읍수산 그린청해이기만 대표는회사 창업 1년여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직은 영업수익이 크게 나오지는 않고 있다며그러나 최고의 안전하고 위생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점차 납품처가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이 대표는 또 38년의 수산물 도소매 경험을 토대로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고 산지 직접 구입으로 제품 가격을 저렴하게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이어 지역내 업체들도 지역 생산품을 써주어야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경쟁력을 갖출수 있는 만큼 자체 급식시설을 갖춘 관내 회사및 공장, 병원등에서도 적극 동참해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 기획
  • 임장훈
  • 2015.01.29 23:02

취임 한달 김경기 LH 전북본부장 "현안사업 차질없이 추진, 지역발전·일자리 창출 앞장"

LH 전북본부 김경기 본부장이 취임한지 한달을 맞고 있다. 고향이 전주인 김 본부장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도내에서 졸업한 토박이로 지난 2005년부터 2006년까지 2년동안 전북본부에서 근무하기도 해 도내 정서와 지역현안에 대해 역대 어느 본부장보다 잘알고 있어 도민들의 기대감이 크다. 전북본부장으로 취임하기 전부터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는 김 본부장으로 부터 향후 청사진 등에 대해 들어봤다.-10년만에 전북본부장으로 금의환향하셨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본부장이 되기 전 전북본부에서 근무했을 때는 맡은 일만 하면 됐는데 본부장은 LH 전북본부의 얼굴이라 지자체와 유관기관을 대하는데 일정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커졌습니다. 또한 전북본부의 역할과 경영 정상화를 위한 큰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 자리라 책임감이 한층 무거워졌습니다.”-2015년도 LH 전북본부의 주요 사업계획은 무엇인지요.“LH는 2015년도에도 전년과 비슷한 2300억원 규모의 사업비를 전라북도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현재 조성공사 진행 중인 전주만성지구 외에 신규로 전주효천지구에 조성공사를 착공할 예정이며 무주택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익산인화지구에 행복주택 612호 건설을 추진할 계획입니다. 또한 지난해말 기공식을 개최한 국가식품클러스터는 농림축산식품부와 합동으로 기업설명회를 개최하는 등 지속적인 투자 분위기를 조성해 지난해말 공급시행한 39필지, 34만㎡의 산업용지 분양에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이외에도 부안봉덕3지구 공공분양아파트 554세대와 혁신도시 A10블록 국민임대아파트 690세대가 2월에 입주하며 혁신도시 A9블록 국민임대아파트 552세대도 오는 8월에 입주가 예정돼 있습니다.”-전북혁신도시 준공을 앞두고 있는데 향후 전망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인구 3만명 수용을 목표로 한 전북혁신도시는 올 상반기에 2단계 사업(농진청 등 684만7000㎡)을 준공합니다. 전북혁신도시는 공공기관의 지방이전을 촉매로 혁신성과 역동성을 갖춘 특성화된 도시를 건설해 지역 발전의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추진되었고 농촌진흥청 등 농업생명 공공기관과 국민연금공단 등 지식서비스 공공기관이 이전하고 있습니다. 2단계 사업준공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전 공공기관 직원과 전주시, 완주군의 적정인구 수용을 통한 자족성을 갖춘 쾌적한 도시로 거듭날 것입니다. LH공사가 전북을 대표하는 혁신도시를 성공적으로 건설함으로써 지역발전을 선도하고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지난해말 법원, 검찰청과 법조타운부지 매매계약을 체결했는데 전주만성지구 개발현황은 어떤지요.“전북혁신도시와 인접한 전주만성지구는 황방산과 기지제를 연계하는 친수 녹지축을 구축하고 기지제 주변의 수변공원 조성으로 친수공간이 조성될 계획입니다. 또한 평면적 개발을 지양하고 sky-line을 고려한 복합단지를 개발해 입체적인 도시 이미지를 제고할 계획입니다. 이에 더하여 법원 및 검찰청의 사법행정기능과 그와 연계된 상업·업무기능, 생활편익시설과 연계된 쾌적한 주거기능이 조화된 복합도시가 조성될 전망이며 또한 전주아트폴리스 구축과 연계해 매력적인 도시지역이 창출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향후 혁신도시와 만성지구가 개발되면 총 인구 4만5000명이 거주하게 되며 법원·검찰청 이전에 따른 관련 업무기능이 이전돼 전주시의 신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지난해말 대통령의 국가식품클러스터 기공식 참석에 이어 최근 김무성 대표도 국가식품클러스터 개발 현장에 다녀갔는데 국가식품클러스터 추진배경과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무엇인가요. “국정과제로 추진 중인 국가식품클러스터산업단지 조성사업은 지난해 11월말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국내외 내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공적으로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국가식품클러스터 산업단지는 급성장하는 글로벌 식품시장에 대응하기 위해 식품기업·연구소·연관산업체 등이 집적된 클러스터를 조성해 동북아 식품시장의 허브로 육성하기 위한 국가 정책사업입니다. 국가식품클러스터는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는 농업분야 국책R&D기관과 네트워크를 구축해 농·식품산업의 광역적 클러스터 구축 및 상승효과 창출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한 지역경제 기여 뿐 아니라 FTA로 위기에 빠진 농업의 견인차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국가식품클러스터가 조성되면 150여개 식품기업이 입주해 농어업 소득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게 되고 고용유발은 2만3235명, 생산유발효과는 4조3304억원으로 전망됩니다.”-완주삼봉지구 사업 추진에 애로사항이 많은데 향후 계획은 무엇인지요.“완주삼봉지구는 완주군 삼례읍 수계리 일원(91만5000㎡ 규모)에 주택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인데 현재 보상이 완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경기침체와 수요부족으로 착공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애초 완주군청 이전을 전제로 사업계획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당장 대체수요를 발굴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상황입니다. LH는 지난해 하반기에 완주삼봉지구를 공공주택지구로 전환 추진하는 등 수요 발굴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해 왔으며 금년에는 개발계획 및 실시계획 변경을 통해 공사착공 일정이 가시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방침입니다.”-군산신역세권지구의 경우 지난해 대행개발방식으로 조성공사 착공을 했는데 사업지구내 택지는 언제 공급하는지요. “군산신역세권지구는 군산시 내흥동 일원(107만9000㎡ 규모)에 군산역 주변 역세권 형성과 상업·업무·행정 등 복합기능을 부여한 주택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입니다. 수요부족으로 착공이 지연되다가 지난해 1단계 구간(34만㎡)을 우선 착공하였습니다. 금년에는 1단계 구간내 공동주택용지를 공급할 예정이며 분양 결과와 배후단지 성숙도 등 주변 택지 및 주택수요를 고려해 상업용지 공급과 2단계 구간에 대한 추가 착공시기 등을 결정할 계획입니다.”● 김경기 본부장은 부서 두루 '27년 LH맨', 사업 추진 리더십 강력김경기 본부장은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공고, 원광대를 졸업한 뒤 지난 1988년 LH에 입사한 이래 27년간 근무하면서 전북지역본부와 본사 토지은행기획처, 하남사업본부 등 주요 부서를 두루 거친 베테랑이다.또한 평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성품을 지녀 직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지만 각종 사업을 추진할 때에는 카리스마와 더불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김 본부장은 10년전 전북본부에서 근무할 때 추진했던 완주삼봉지구 등 지역개발사업이 아직까지 착공도 못하고 있는 점을 아쉬워해 올해에는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효천·만성지구를 비롯해 군산신역세권 등의 사업을 정상화 시켜 전북경제 활성화와 도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피력해 귀추가 주목된다.

  • 기획
  • 강현규
  • 2015.01.26 23:02

[(44) (주)익산철망] 용접철망·펜스 전문생산…영업사원 없는 신뢰 경영

용접철망, 펜스 등 남자들도 힘들 것 같은 (주)익산철망의 제품생산을 여성 CEO가 맡고 있다. 부드러운 외모에 조용한 말투와 달리 철망회사를 이끈지 벌써 10년째가 됐다.한번 찾은 고객이 수년이 지나서도 잊지 않고 다시 찾게 만드는 익산철망의 가장 큰 장점은 신뢰에 있다. 규정에 정해진 서비스기간이 지나도 언제나 달려가 하자보수를 해주는 꾸준한 고객관리 탓에 한번 맺은 인연의 끈은 쉽게 갈라지지 않는다. 영업사원 없이 고객이 고객을 소개하는 신뢰의 기업, 익산철망은 누구에게나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통한다.△철망회사 10년젊음을 석재사업과 함께했던 익산철망 김오덕 사장은 중국석이 밀려들어 오면서 사양사업이 되어버린 석재업을 접고, 곧장 철망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익산철망을 설립했다.그렇게 설립된 익산철망이 지금의 익산시 웅포면에 자리잡은 지 10년째를 맞았다. 철망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붙잡고 사업을 시작한지 벌써 그렇게 됐다.처음엔 이사와 상무, 부장, 과장 등 여러 기술력을 가진 분들이 함께 했다. 그러나 이렇게 높은 기술력에 비해 생산돼 납품되는 제품은 극히 적었다. 사업이 시작되자마자 험난한 경험을 겪게 됐고, 기술력을 가진 임원들도 하나둘 떠나갔다.실망할 겨를도 없이 오로지 사업체를 일으켜야한다는 생각에 김 대표는 사업방식에 변화를 줬다. 기술을 직접 배워 기계도 만지고 생산 현장에도 직접 뛰어들었다.주문이 오면 현장에 나가 직접 설치하는 일까지 김 대표가 함께 했다. 여성으로서 쉽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가기 시작했다.△꾸준한 성장세익산철망에서 생산되는 제품종류는 디자인에 따라 달라진다. 쉽게 셀 수 없을 만큼 생산제품이 다양하다.모든 공사의 핵심인 레미콘 타설에 앞서 균열방지차원에서 깔게 되는 철망과 공사가 끝난 뒤 마지막 작업인 울타리까지 이곳에서 생산된다.용접철망과 펜스가 주 생산품이지만 최근에는 친환경 울타리 생산량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집을 지을 때 담장을 만들지 않고 멋있는 울타리를 설치하는 추세에 따라 친환경 울타리는 다양한 디자인을 담는다.이처럼 일반 가정에서부터 도시 조경에 이르기까지 펜스 사용이 증가하면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지난해 익산시가 선정한 우수중소기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고객이 영업사원제품을 만들어 팔아야 하지만 이곳에는 영업사원이 없다. 소비자들이 직접 찾거나 조달청을 통해 구입해본 고객들이 대부분이다.특히 영업사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재구매율이 거의 100%에 근접하고 있다고 한다. 고객이 고객을 소개하며 한번 이용해본 고객들이 이곳의 영업사원 역할을 하고 있다.고객을 감동시키는 게 아닌 고객이 감동을 주는 그런 기업이 바로 익산철망이다.고객이 고객을 소개하는 익산철망의 비결은 바로 신뢰다. 납품된 제품이 제대로 인지, 설치된 제품에 이상이 없는지를 수시로 확인하고 체크하며 고객과 신뢰를 쌓았다. 계약서에 명시된 하자보수 기간은 의미없는 숫자에 불과하고, 수년이 지나서도 하자보수가 가능한 익산철망의 전략이 바로 영업사원이 없이도 운영할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다.△고객층 다양화 전략건설경기와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철망사업은 지난 2011년께 상당히 바빴다. 10명도 안되는 직원들이 매출 15억원을 올려 1인당 1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그러나 건설경기가 침체되면서 이후 철망사업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지역경기까지 악화되면서 올해에는 그 돌파구 찾기가 김 대표의 새해 과제다.숫한 어려움과 위기를 넘어선 경험을 가진 김 대표의 현재 계획은 어려울수록 투자를 아끼지 않겠다는 것에서 시작되고 있다.우선 전문 디자인을 개발하고, 신제품도 더욱 많이 내놓을 계획이다. 소비자들의 선택의 폭을 넓혀 고객층을 다양화하겠다는 전략이다.특히 이미 납품된 업체와 제품이 설치된 현장을 찾아 꼼꼼한 사후관리에도 나설 방침이다.● 김오덕 대표 "제품 다양화, 소비자 선택폭 넓혀 경쟁력 키울 것"우리 회사는 영업사원이 없어요. 영업이 가장 어려운데 영업사원 없이 이렇게 잘 운영하고 있어요.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화의 시작이었지만 영업사원이 없는 이유는 시간이 흐르며 이해되기 시작했다.남자들도 힘들어 그만두고 나가는 그런 철망회사를 이끄는 여성 기업인 김오덕 대표에게는 말에서 나오는 신뢰가 아닌 몸소 실천하는 기업인의 바른 모습으로 가득했다.생산현장부터 제품 설치작업까지 김 대표의 손 하나면 가능한 익산철망은 그렇게 10년을 이어왔다.김 대표는 기술자들이 잠깐 들러서 기계 봐주고 몇 십만 원씩 받아가는게 아까워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익혔다며 배우고 보니 정말 간단했고, 그렇게 생산부터 설치까지 모두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그렇게 잘 만든 제품은 소비자들이 찾게 만드는 홍보나 영업을 통해 판매되어야 하지만 이곳에는 홍보나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이 없다.한번 써본 구매자가 재구매하는 경향이 높고, 사용해 본 고객이 다른 고객을 데리고 오는 그런 영업이 익산철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김 대표는 우리 제품을 구입해 본 분들이 다른 분을 모시고 오고, 그렇게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많아 너무 감사하다며 앞으로 여유가 생기면 그런 분들을 포함해 많은 분들에게 베푸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이어 앞으로도 제품의 다양화를 위한 연구진 보강과 디자인 전문가 영입 등 소비자 선택의 폭을 넓혀 경쟁력을 키워가겠다면서 경기침체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고 더욱 열심히 고객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강조했다.

  • 기획
  • 김진만
  • 2015.01.22 23:02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 엉겅퀴 국내 첫 재배 성공·건강식품화로 100억 매출 꿈

건강기능식품이 주목받으면서 약초류 재배 농가도 늘고 있다. 최근 주류를 이루는 것은 산수유, 홍화씨, 오가피, 헛개나무, 다시마, 청국장, 석류, 천마, 흑마늘, 민들레, 꾸지뽕, 울금, 돼지감자 등이다. 최근에는 산야에 자생하는 가시엉겅퀴가 간과 혈행 개선에 좋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30년 넘게 약초재배와 가공 사업을 하면서 최근 가시엉겅퀴 건강식품화에 성공한 임실생약 심재석 대표이사를 지난 9일 만나 약초재배의 6차 산업화 가능성을 들어보았다. 심 대표는 지난 2005년 정부가 선정한 신지식농업인이다. 그의 사무실에는 각종 특허와 표창장, 위촉장이 수두룩하게 걸려 있었다.-공장과 사무실을 둘러보니 심 대표께서 걸어온 길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약초 농사는 어떤 계기로 짓게 됐는가요.전주농고를 졸업한 후 곧바로 집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기계공장에서 실습생으로 3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는데, 제 인생을 걸만한 직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약초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니고 수박이며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을 지었죠. 하지만 이상하게도 번번이 실패했어요. 그러던 중 약초 농사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어요. -기업체 취직을 않고 농사를 선택했다면, 부모님 농사 규모가 꽤 됐던 모양이군요.아니예요. 아주 가난한 편에 속했습니다. 전답은 논 600평, 뽕밭 300평이 전부였어요. 다행히 학교 졸업 후 1년 정도 됐을 때 어머니가 탄 쌀계 자금으로 마련한 황무지 6000평으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했는데, 농사는 잘 됐는가요.누구나 성공을 하려고 시작하죠. 당시 저의 경우는 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어요. 농업의 성공요인이 토지, 자본, 기술인데 당시 저에게는 황무지밖에 없었어요. 수박 참외 생강 담배 등 다양한 농작물을 심었는데 다 망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심재석이가 하는 일은 다 망한다는 말이 들렸어요.-어떻게 돌파구를 찾았습니까.그 때 떠오른 생각이 농산물은 생물 그대로 판매하면 부가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것을 찾았어요. 그 때 약초가 제게 왔어요. -주변에 약초 농사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요.당시 저는 4-H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 어느날 장수에 사는 4-H 선배가 율무 농사를 권했어요. 율무는 토질이 좋은 땅에서는 웃자라는 문제가 있는데, 우리 땅이 황무지잖아요. 이제 막 개간한 땅에 율무농사가 제격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당장에 시작했어요. 그 때가 1981년이예요. 율무 종자를 가져다가 개간한 밭 6000평 중에서 절반인 3000평에 심었는데 농사가 잘됐어요. 그렇게 약초농사에 입문했습니다.-작물마다 알맞은 토질이 있군요. 약초농사를 계속 확대했습니까.그래요. 율무를 생산하니까 약초상들이 생지황을 권했어요. 생지황을 생산하면 구매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듬해에는 율무와 생지황을 함께 재배했죠. 생지황은 율무와 달리 굉장히 까다로운 작목이었어요. 거름도 많이 줘야 하거든요. 이 때부터 약초 관련 서적도 뒤져가며 공부하며 지식을 습득했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전문가 대접을 받았어요. 당시 오수에는 약초농사 유경험자가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약초, 약초 재배법에 대해 문의하는 상황이었고, 내친김에 오수면 소재지에 5평짜리 오수생약사업소라는 사무실를 냈습니다. 1982년 일이었습니다. 약초농사 초보 시절이기 때문에 시행착오도 있었구요.-율무와 생지황은 어떻게 해서 팔았습니까.생지황 농사를 지어 생것으로 팔면 이익이 별로 안나는데, 껍질을 벗긴 뒤 말려서 팔면 이익이 훨씬 많았어요. 그래서 오수생약사업소 한켠에 2평 짜리 건조실을 만들고 건지황을 생산했습니다. 저로서는 가공 판매의 시초였습니다. 가공사업이 좋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습니다. 발상의 전환이었죠.-그러면 율무와 생지황 생산 판매에 전념했는가요.아닙니다. 당시 임실 북부지역에서 독활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저도 독활 재배에 나섰습니다. 제 농사를 지으면서 주변 농가에서 재배한 약초를 수매, 전주에 있는 건재한약방 등에 납품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농가에서 약초를 수매 하고, 약재상에 공급하고, 수금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창피했어요.-아니, 뭐가 창피했습니까.전주지역 건재한약방에 100만 원어치 약재를 납품하면 수금하는데 무려 6개월이 걸렸어요. 건재한약방에 돈 받으러 가면 주인이 손님들 진료 본다며 1시간 넘게 기다리게 해놓고 찔끔 5만원, 10만원 주는 거예요. 동냥 주듯이. 너무 창피했죠. 야, 이거 안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광주로 뛰었어요. 광주는 200만 원 수금하는데 3개월 걸렸어요. 조금 지나니까 경쟁이 치열해지고 제값을 못받는 상황도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대구로 진출했어요. 블루오션을 찾아 도망가는 전략이예요. 당시 독활, 생지황, 건지황, 방풍, 우술 등 다양한 약재들을 취급했습니다. 마침 1988년 88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저는 5일에 한 번씩 대구를 갔습니다. 제가 대구에 공급한 약재는 부산, 서울, 영천 등지로 공급됐어요. 88고속도로 최고 수혜자는 저였습니다. 대구는 500만원을 2개월에 수금할 만큼 수금 여건도 좋았습니다.-약초 경기가 아주 좋던 때였군요.그렇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모든 경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한약재 가격이 최고였거든요. 모든 한약재는 생산해서 내놓으면 잘 팔렸어요. 국민들이 한의원을 많이 찾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저는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심 대표가 독활을 생산해 대구까지 진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을 두고 우연의 일치였다라고 말하는 데는 뼈아픈 뒷얘기가 있었다.그는 1984년도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느날 오수 농약사에 들렀더니, 주인이 수박농사를 권했다. 약초농사를 잘 짓고 있던 때였고, 몇 년 전에 수박농사를 실패한 경험이 떠올라 싫다고 했다. 그런데 농약사 주인이 제시하는 조건이 귀를 홀렸다. 농약사측에서 외상으로 자재를 지원하고, 수박 기술자를 지원하는 대신 심 대표는 수박농사 지을 땅과 인건비를 대면 됐다. 수익금은 나눠 가지면 된다. 심 대표는 자기 밭 6000평과 빌린 밭 3000평을 합해 모두 9000평에 수박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가뭄이 드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1억에 달하는 엄청난 손해를 봤다. 재산을 다 팔아도 갚을 수 없는 손해였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다.-엄청난 손해를 봤는데 어떻게 재기했습니까.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심재석이 망했다는 것을 알고, 아무도 빚을 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맞았습니다. 수박농사로 망한 이듬해 제가 농어민후계자 자금 500만 원을 타게 된 것이죠.올곧게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융자금이었다. 농협은 빚이 많은 심대표에게 보증인 세 명을 세우라고 요구했다. 절망했지만 친구 아버지 세 분이 보증을 서 주었다. 심 대표는 그 중 한 분의 말씀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너를 보고 도장 찍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만 늬 눈을 보고 찍어 주겠다.-그 때 독활을 심었습니까.그래요. 1986년에 독활을 심었습니다. 독활은 심은지 23년만에 수확하는데, 절묘하게도 제가 독활을 수확하던 무렵부터 가격이 크게 올랐어요. 이 때 빚을 상당히 갚고 숨통을 틀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합니다.-심 대표가 당시에 공급한 독활은 어느 정도 규모였는가요.당시 전국 독활 생산량의 70%를 임실에서 생산했는데, 임실 생산량의 35%-40%를 제가 건조 가공 생산했습니다. 전국 생산량의 25% 정도를 제가 생산한 것이죠. 그러면서 제가 독활 전문가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수확한 독활을 잘 다듬은 다음에 껍질을 벗겨 건조해서 절단, 건재한약방에 출하했는데요, 서울과 경상도에서 1등급 대우를 받았습니다. 전국에서 제 얼굴은 몰라도 심재석이라는 이름은 알 정도였습니다.-그렇게 약초 사업을 잘 해 나갔는데 왜 건강기능식품쪽으로 전환했는가요.1990년 무렵까지 약초는 돈 버는 농사였어요. 그러다보니 약초 공급 과잉이 초래됐어요. 독활 한가지만 가지고는 안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작약을 선택했습니다. 1992년 임실군에 작약전문재배단지를 유치했고, 임실 농민들이 작약을 많이 심었죠. 저도 임대 농장에 3만평을 심었어요. 그 때 제 약초농사는 독활 등 6만평에 달했어요. 하지만 실패했어요. 1996년에 작약을 생산할 무렵인데 수입 개방을 틈타 중국 한약재가 많이 들어왔고, 가격이 요동쳤거든요. 약초 농사에 위기가 닥친 것이죠. 그래서 바꿨습니다. 2000년에 한약생산시설을 모두 없애버리고 건강식품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건강식품으로 전환한 뒤 농장과 공장은 어떻게 변했습니까.소비자들에게 건강식품으로 친숙한 쑥에 주목했습니다. 농장에 쑥을 심고, 인진쑥 엑기스를 만들어 판매했습니다. 또 다슬기 엑기스를 생산했어요. 사람들이 간 건강에 좋다며 다슬기 먹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죠. 저는 평소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요.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죠. 옆과 뒤, 그리고 속에 뭐가 있지? 그것을 알려면 연구를 해야 해요. 그래서 원광대에 다슬기 성분 의뢰를 했어요. 술 마신 사람들이 간과 위에 좋다며 다슬기를 즐겨 먹는데 왜 그런지 규명해 달라고 했지요. 다슬기에 아스파라긴산이라는 핵산이 많은데, 간이 섬유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결과를 받았죠. 특허 출원하고 논문발표하고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우리회사 장수 제품이 2가지 있는데, 인진쑥엑기스와 다슬기엑기스입니다.-쑥과 다슬기, 산수유, 돼지감자 등 수많은 건강식품을 생산해 왔는데, 요즘은 가시엉겅퀴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가시엉겅퀴 상품은 어떤 계기로 개발하게됐습니까.저는 그동안 약초 분야에서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농촌진흥청 특작부 명예연구관으로 활동하고, 아젠다 연구과제 심의위원으로도 활동하고 했어요. 농업인 중에서는 꼭대기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약초, 건강기능식품 전문가인 제가 정작 심재석이라는 이름을 걸고 개발한 히트상품이 없더라구요. 남들이 무주 천마 개발해 히트치니까 따라서 천마제품 만들었고, 의성에서 흑마늘 만든 것을 보고 흑마늘 만들어 팔았어요. 그렇게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것이 창피했어요. 내가 죽기 전에 이름을 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꾸준히 준비해 왔습니다.-엉겅퀴 효능은 어떻게 알았습니까.엉겅퀴가 몸에 좋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주목하지 못했죠.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매년 가을이면 엉겅퀴를 캐서 감주 등을 만들었어요. 겨우내 아버지가 드실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러면 지게질 많이 하시는 아버지가 이듬해에는 허리나 어깨 아프다는 말씀을 덜 하셨어요. 그 때 어머니 말씀이 엉겅퀴 한 가마니면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운다고 하셨는데, 옛날부터 엉겅퀴는 관절염이나 허리 아픈데 효험이 있다고 전해왔다고 해요. 그 생각이 떠올라 엉겅퀴 사업화를 계획한 것이죠. -엉겅퀴는 인공재배가 매우 어렵다고 들었습니다만.저는 2007년부터 엉겅퀴를 연구했습니다. 산야에서 채종, 발아실험도 많이 했어요. 농사 경험이 많은데도 잘 안됐어요. 대한민국에서 어느 누구도 엉겅퀴 재배를 하지 않았고, 당연히 재배방법이 없었거든요. 시행착오가 무지하게 많았지만, 지금은 멸종위기 엉겅퀴를 국내 최초로 재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연구 과정, 효능은.엉겅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재배기술과 엉겅퀴 효능을 규명하는 작업을 함께 진행해 왔는데, 저의 엉겅퀴 연구가 농촌진흥청과 지식경제부의 국가연구과제에 선정됐기 때문에 그 지원금으로 모든 것을 원활히 할 수 있었지요. 야생 종자 발아율이 5%도 안되기 때문에 직파, 멀칭, 포트육묘이식 등 다양한 재배를 하며 연구했습니다. 그동안 전북대 식품영양학과, 의학전문대학원, 수의과대학, 전주대 대체의학과 등과 함께 효능 연구, 제품 개발 등을 진행했습니다. 엉겅퀴가 혈전을 없애고, 간 기능을 개선하며 관절염과 요통에 탁월하다는 등 7개 논문이 학회지에 발표됐습니다. 엉겅퀴 엑시스와 차, 파스, 크림 등 제품이 5개 정도 됩니다.-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엉겅퀴로 1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싶습니다. 또 꽃이 예쁜 엉겅퀴 농장을 대단위 체험 관광농원으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엉겅퀴 농장은 꽃이 피는 56월에 너무 아름답습니다. 체험 관광농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임실은 산림이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임실에 300만 평 정도의 엉겅퀴 농장을 조성하면, 임실 목장과 치즈 등 유가공산업 등과 연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관심을 갖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심재석 대표는 약초농사 야심찬 도전, 가공판매 사업수완 뛰어나심재석 대표는 전주농고를 졸업한 뒤 농촌 고향마을에서 4-H활동을 하며 약초 농사로 성공을 거뒀다. 일찌감치 농작물 생산에 그치지 않고 가공판매에 눈을 떴다.1980년대 독활을 재배해 큰 성공을 거뒀고, 1990년대 중국산 수입 약초가 범람하자 건강기능식품으로 사업을 전환하는 사업 수완을 보였다.요즘 심 대표는 엉겅퀴에 빠져 있다. 고교 졸업 후 황무지를 개간해 만든 6000평의 농장 등 1만 5000평에 엉겅퀴를 재배하고, 이웃 주민 계약 재배 면적도 1만 5000평에 달한다. 간과 혈관 건강에 좋다고 규명된 엉겅퀴가 현대인들의 100세 시대를 여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심 대표는 농촌에서 길을 찾고자 하는 신념을 굽히지 않고 지난 30년을 달려왔다.그는 사업은 퍼즐 맞추기라고 했다. 퍼즐이 제대로 맞춰지면 성공이지만, 조금만 어긋나도 실패하듯 사업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가 율무와 생지황, 독활을 재배할 때는 퍼즐이 잘 맞았지만, 작약을 재배했을 때는 퍼즐이 어긋났다.이번 엉겅퀴 재배 및 제품화는 심 대표의 야심찬 퍼즐 맞추기 도전이다. 재배방법을 체계화하고, 성분과 효능을 규명해 제품까지 내놓았으니, 이번 퍼즐 맞추기도 일단 성공적이다.그의 도전은 계속된다. 꽃이 아름다운 엉겅퀴 농원에서 임실 최고의 엉겅퀴 축제를 열어 해마다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작년에 오수면과 지사면 일대 산 10만여평에 엉겅퀴를 뿌려봤는데 실패했다. 그만큼 예민한 것이 엉겅퀴 재배다. 햇빛 잘 들고, 땅심도 좋은 적지를 선정해 다시 도전할 것이다.

  • 기획
  • 김재호
  • 2015.01.20 23:02

취임 2개월 김동수 전북생물산업진흥원장 "풍부한 생물자원 활용, 국책사업 적극 발굴할 것"

세계적 발효 공학 박사로 명성이 높은 김동수 전북생물산업진흥원장이 취임 2개월을 맞았다.농업이 단순한 1차 산업에 그치지 않고 첨단과학기술 및 의료분야와의 융복합을 통해 미래 산업으로 떠오른 가운데 풍부한 생물자원을 활용한 고부가가치 창출의 식품연구가 전북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전북생물산업진흥원은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와 연계한 식품 허브도시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전북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오로지 검증받은 실력으로 전북생물산업진흥원을 이끌게 된 김동수 원장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지역연고가 없어 불편한 점도 있지만 개척과 성과를 중시하는 그의 추진력과 그간의 연구 활동이 식품 허브도시 전북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향후 운영방침과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전북생물산업진흥원이 어떤 일을 하는 기관인지 소개해 주시죠.전북생물산업진흥원은 기업 보육지원을 위한 창업보육센터를 비롯해 식품 품질안전 지원을 위한 식품분석센터, 식품용기 및 포장디자인 지원을 위한 디자인마케팅센터, 우수건강기능식품제조기준(GMP) 시설인 바이오식품 산업화센터 등 우수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지역 자원을 활용한 고부가 제품개발, 기업 애로지원 및 기술지도 등 기술지원, 전문인력양성, 마케팅 등 R&D, 생산, 가공, 마케팅까지 원스톱(One-Stop) 지원 체계를 구축해 선도적 국책사업 기획발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관련 기관과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확대하고, 전북 농생명식품산업 현안들에 대한 정보 및 의견교환, 토론 등을 통해 신규 사업 발굴에 주력하고 있습니다.-전북생물산업진흥원 설립을 전후해 전북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전북은 보람 찾는 농민, 제 값 받는 농업, 사람 찾는 농촌이라는 삼락농정에 중점을 두고 농생명과 관광, 탄소산업에 주력을 두고 있습니다. 그간 전북은 농촌진흥청, 김제 민간육종단지,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등 농생명 산업 기반 구축에 중점을 두고 추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전북 도정과 연계한 지역특화산업 육성을 위한 공동 협력사업 등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는 기반과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죠. 지금까지 진흥원은 지역 농생명식품산업 육성을 위해 산업기획, 연구개발, 기업지원, 인력양성 등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농생명식품산업을 전북의 미래 성장산업으로 발전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핵심 역량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올해 진흥원의 주력 사업에 대한 추진 방향은.선도적 국책사업 발굴에 중점을 두고 전북 핵심 현안사업들에 대한 산학연 전문가 정보 교류 및 포럼 등을 통해 지역 내 공감대 형성 및 사업 타당성을 확보해 국책 사업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특히 전북의 풍부한 생물자원을 활용해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기능성 소재화 및 상용화 기반 확보가 중요할 것으로 판단되며 농업인, 기업 등 고객이 체감할 수 있도록 성과 창출을 위해 사업과 내부 역량을 강화할 계획입니다. 또한 농진청 등 농생명식품 관련 혁신기관 간 연계를 통해 지역 산업에 파급될 수 있는 성공적인 비지니스 모델을 발굴, 농생명 혁신기관의 정보 및 기술 교류 강화와 공동협력사업 발굴 등 진흥원이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계획입니다.-농생명식품산업 육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농생명식품산업 혁신기관 간 유기적인 협력체제 구축이 필요합니다. 관련 혁신 기관들 간의 시너지 창출을 위해서는 정보, 기술 교류와 공동협력사업 발굴을 통한 산학연 상호간의 교류 협력이 활발히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죠. 민간육종연구단지, 농촌진흥청 등 농생명 혁신기관 이전, 국가식품클러스터 조성 등 종자에서 생산, 가공, 수출에 이르는 컨트롤타워가 필요합니다. 이에 맞춰 혁신기관의 우수한 연구 성과가 지역내 산업에 파급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며, 향후 실리콘밸리처럼 기술-인재-산업이 연계되는 산업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계획 수립과 추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임기 동안의 포부와 중점 추진 전략이 있으신지요.크게 꼽는다면 원장 재임기간 동안 5대 실천전략에 역점을 두고 운영할 방침입니다. 첫째, 진흥원 재정자립도 향상이며, 둘째 기업 유치 및 창업보육 역량 강화, 셋째 도내 중소기업 R&DB(Business) 지원 강화, 넷째 내부 역량 및 소통 강화, 다섯째 혁신기관과의 연계성 강화입니다. 이를 통해 식품생명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생산자와 기업인 모두가 행복한 三樂(삼락) 農政(농정) 구현에 앞장서는 동시에 농수축산물의 생산과 가공, 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국가식품클러스터, 민간육종단지를 비롯한 농진청, 식품연 등 농생명식품산업 관련 인프라 기반 간 시너지 창출을 통해 전북이 대한민국 농생명 허브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일조하겠다고 약속드립니다. 또한 농업과 식품산업의 연계 강화를 통해 지역 내 소득 증대와 산업 육성에 기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는 종합적인 지원 시스템을 보유한 식품생물 산업 육성 지원 전문기관으로 식품생물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하시거나 관심이 있으시면 언제든 저희 진흥원으로 문의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모든 과정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전북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식품생물산업 육성 발전시키기 위한 견인차 역할을 더욱 충실히 수행할 것을 저희 생물산업진흥원연구진과 함께 약속드립니다.● 김동수 원장은 논문 100여편특허출원 30건농식품분야 '실력파'경남 창원 출신인 김동수(61) 전북생물산업진흥원장은 지난해 11월18일 취임했다.부산수산대학교를 졸업한 뒤 한양대학교에서 이학박사(발효공학)를 수료한 김 원장은 다시 일본 동경수산대학에 입학해 발효공학을 전공했으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최고 전략과정을 수료했다.김 원장은 1998년 한국식품연구원 연구원으로 입사해 연구부장, 기회조정실장, 선임본부장을 지낸 뒤 2007년 한국식품연구원 원장 자리에 까지 올랐다. 이후 임기를 마친 뒤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했다.이와는 별도로 한국 FAO협회 부회장, 농림수산식품부 및 식품의약품안전청 정책자문위원, 농민신문사 논설위원, (사)한국식품기술사협회 회장, (사)한국수산과학회 회장직을 겸임수행한 바 있는 등 농업과 식품분야에서 폭넓은 활동으로 중앙부처 고위직 인사들과 친분이 깊다.김 원장은 그간 천연자원을 이용한 가공기술 개발 및 항고혈압 특성 등 100여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냉동 분쇄장치의 개발 및 활동기술 등 30여건을 특허출원하기도 했다.이 같은 활동을 검증하듯 그는 농림부장관으로부터 대한민국농업과학기술상, 국무총리상, 제11회 농림수산식품과학기술 최고대상 산업포장도 수여받았다.김 원장은 생물산업진흥원은 차별화, R&DB, 창업보육, 역량강화에 집중해 전북의 농업 생산자, 농식품 기업 등 관련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가며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밝혔다.

  • 기획
  • 이강모
  • 2015.01.1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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