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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BYC 4) 기업 철학으로서 '교육' - 농촌 학교 '명문 사학' 만들어 글로벌 인재 양성

"어릴 적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 못함이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한을 풀기위해 사학 설립을 꿈꿔왔죠."국내 내의 산업의 대들보이자 선구자인 BYC의 사훈은 '교육과 열정 그리고 사랑과 이해'다.사랑과 이해가 우선시 되는 가족애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로 조직을 구성, 사회적 유익을 위한 노력들의 효과가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특히 21세기 글로벌 비즈니스시대에 맞게 올바른 인맥유지, 즉 형과 아우같이, 오랜 친구같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가족 같은 직원들이 'BYC 맨'을 양성하고 있다.BYC 맨들은 상호간의 친목을 높임으로서 '사회적 가족(social family)'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의 기업철학에는 항상 '사학'이 있다.BYC 한영대 회장은 1985년 3월16일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산 76-12번지 소재 평택동중학교와 평택동고등학교의 학교법인 안세학원을 인수해 학교법인을 한영학원으로 명의변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1984년 말 한 회장은 신뢰할 수 있는 지인으로부터 학교법인 안세학원이 학교 발전을 위해 교육 사업에 뜻이 있는 사업가에게 학교재단을 양도할 뜻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정명여자상업고등학교 설립을 계기로 기업 이윤을 교육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던 한 회장은 즉시 이 학교법인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 현실을 파악하기에 이르렀다.조사 결과 안세학원은 재단에 어려움이 있을 뿐 재단이 운영하는 중고등학교는 1966년 설립된 학교로 중학생 890명과 고등학생 1400명이 재학 중으로 질적 양적으로 모두 충실한 것으로 판단됐다.이에 한 회장은 이 학교에 본격적 재정 투자를 할 경우 서울 등 대도시의 명문 중고등학교를 능가하는 지방 명문학교로 육성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특히 한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학생 대부분이 평택군 소재 농촌 청소년들이라는 점이었다.소년기를 가난한 농촌에서 성장한 한 회장은 농촌 사람들과 농촌 청소년에 대한 애정이 남달리 깊었고 이와 같은 농촌에 대한 향수와 남다른 애정은 청소년들의 교육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바뀌었다.이에 한 회장은 안세학원 재단을 학교법인 한영학원으로 법인변경수속을 마치고 학교명도 신한중학교와 신한고등학교로 개명했다.한 회장은 또 이사장 취임과 동시에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재학생과 대학진학 학생에 대한 장학금으로 7억원을 출연하고 학교 시설을 대폭 증설하는 등 모두 49억원의 출자계획을 수립해 집행에 들어갔다.이 출자계획에 의해 한 회장은 대형 강당, 체육관의 신축과 함께 20여개 교실의 증축 및 환경미화로 교육환경을 개선시켰다.또 컴퓨터와 천체망원경, 각종 악기 등 첨단 교육자재를 대량 구입해 교육의 내실을 기할 수 있는 여건을 단시간에 완비하는 쾌거를 이뤄냈다.게다가 학교에 축구부와 밴드부를 창단,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재원을 집행, 학생들의 면학의욕과 애교심을 높이고 학교의 이미지를 일신 시켰다.현재 신한 중고등학교는 중학교 1108명, 고등학교 123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학교규모는 대지 5만4983㎡, 중학교 교실 21실, 고등학교 21실, 과학교구 총 380종 3663점을 갖추고 있다.이는 1985년 재단 인수 당시와 비교할 때 양적 질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뤘으며, 학생들의 정서순화를 위해 사슴장, 조류장을 설치하고 학교 주면과 학교 내의 수목관리를 통해 학교공원화 추진도 성공시켰다.이와 같이 쾌적하고 내실 있는 교육환경을 갖추는 한편 전인교육을 통한 국가의 역량을 육성하고 명문 사학으로서 대학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교장선생 이하 전체 교사들의 학생 지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이 학교 졸업생의 대학진학 실적은 70%에 이르고 있다.이상과 같이 신한 중고등학교는 한 회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10년 만에 제반 교육시설의 신설 및 확장이 이뤄졌으며, 한 회장은 지금도 지속적인 투자와 교육여건 강화를 통해 국내 상위 명문 고등학교로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 기획
  • 이강모
  • 2012.09.06 23:02

신경민 의원은

1953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나왔다.유년과 소년시절을 즐겁게 보낸 고향 전주를 아끼고 자랑스러워한다.어린 시절 그는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전북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신현근씨) 덕분에 많은 책을 읽었다.문학전집류부터 <조선총독부> 같은 정치물까지 집에 있는 책은 가리지 않고 읽었지만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의 말로는 특별히 잘하는 것 없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정직하고 바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성적은 중 상정도 유지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달라졌다.서울대에 가고 싶었지만 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겠다고 깨달은 후 밤새워 공부하기 시작한 결과였다.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에는 전체 10등 권에 들었다.국어 사회 영어는 상위권이었으나 수학과 과학 성적이 형편없어 서울대 사회학과를 선택했다.독재의 엄혹한 7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거리로 나가지 않고 공부에 열중했다.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지적세례에 흠뻑 빠졌다.적극적인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독재가 얼마나 국가를 피폐하게 하고 인간을 파멸로 내모는지를 직시하면서 독재를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혁명이란 단어는 그때 그의 가슴을 울렸던 단어다.군대에 다녀와 취직할 곳을 찾다가 몇 년씩 공부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언론사에 응시했다.1981년 엠비시 기자가 됐다.기자로 지내면서도 진보니 보수니 하는 이념의 갈래는 고민하지 않았다.권력과 기득권과의 싸움을 원칙으로 삼았을 뿐이다.1986년부터 크고 작은 뉴스 앵커로 활동했으며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고, 법조와 외교 분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2008년 3월부터 엠비시 9시 뉴스 앵커를 맡아 클로징 멘트의 의미와 가치를 시청자들에게 안겼지만 그 때문에 온갖 압력과 핍박, 수모를 당했다.그래도 버텨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은퇴이후 민주당 프러포즈를 받아 입당했으며 대변인을 거쳐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텃밭인 영등포지역에 출마, 적지 않은 표차이로 이겨 국회의원이 됐다.독서량이 큰 자산인 그는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마음을 움직인 책으로 꼽는다.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것을 알게 해준 이 책을 통해 그는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특별히 좋아하는 운동도 없고, 골프도 하지 않는다.음주가무와도 거리가 멀다.그래서 기자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그래도 꼭 노래를 불러야 할 때는 송창식 노래를 부른다.앵커시절 클로징 멘트도 그랬지만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모든 글은 직접 쓴다.특별히 글에 염격해서 의원실 참모들을 긴장하게 한다.

  • 기획
  • 김은정
  • 2012.09.04 23:02

민주통합당 신경민 국회의원 "언론, 지배 권력과 싸우면서 원칙과 독립 지켜야"

"회사 결정에 따라서 저는 오늘자로 물러납니다. 지난 1년여, 제가 지닌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힘은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서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과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희망을 품은 내일이 언젠가 올 것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 멘트를 여기서 클로징 하겠습니다."다소 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고 싶었다. 할 말은 많이 남았는데 더 이상 할 말을 못하게 되었던 사람. MBC의 간판기자이자 앵커였던 민주당 신경민의원(59)이다. 그가 남긴 마지막 클로징 멘트는 2009년 4월 13일 밤 문화방송 아홉시 뉴스로 그를 만났던 시청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국사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또 한명의 '폴리널리스트'가 됐다. 사실 그는 30여년 방송기자 생활동안 여러 번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선거철이 되면 고향 지역구와 서울을 막론하고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때마다 "정치는 체질에 맞지 않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벽을 쌓았다. 그의 변신이 어찌 보면 '배반'이고 '모순'으로 보이는 이유다. 방송계 선후배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방송기자, 가장 신뢰받는 앵커로 꼽혔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8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 그의 이름은 인터넷 상에서 뜨거웠던 이슈의 중심에 놓여있다. 덕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체질에 맞지 않다'는 정치권에 들어가야 했던 이유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래서 만났다. 태풍 볼라덴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다음날이었다. 국회에서 그를 만나기로 한 날,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도로 옆 태풍 지나간 자리에 놓인 사물과 풍경은 더 뚜렷하게 보였다. 기자 신경민 아닌 국회의원 신경민 역시 태풍처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여서인지 세상을 더 진지하고 신중하게 분석했으며, 단호하고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그의 변신이 단순한 입신양명의 '배신'이 아니라 그 자체로 '희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어지러운 시절에 '희망'을, 그것도 정치판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막 기자회견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분주해보입니다. "오늘 한꺼번에 일이 쏟아지네요. 기자회견도 그렇지만 오늘 국회의원 재산공개가 있었어요. 지난 연말에 했고, 5월 30일에 신고한 것인데, 불과 5개월 만에 제 재산이 18억이나 늘었어요. 그것 때문에 언론사에서 취재들을 하느라고. 뉴스가 될 만하죠."-18억 원이면 천문학적인 숫자인데요. 그것도 5개월 만 에라면 주목받을 수밖에 없겠어요. "저도 당황스러운 일이예요. 사실 제가 재산이 좀 여유롭습니다. 아파트와 주식이 있어요. 처가가 '우성사료'인데 상장회사여서 장인이 여러 해 전에 자손들에게 주식을 나눠주셨죠. 제 처와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나눠주셔서 제 재산의 주요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식이 지난해 말부터 갑자기 뛰기 시작했어요." -혹시 신의원님 영향이 아닐까요.(웃음) "그렇지 않아도 알아보니까 소위 '작전세력'이 붙었답니다. 그런데 그 작전 세력의 정보가 아주 잘못된 것이에요. 제가 안철수 원장과 친하다는 것이 이유라는데 저는 안원장과 일면식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안원장이 뉴스에 등장할 때마다 뛴답니다. 잘못된 정보라고 알려졌는데도 '안철수 주식'으로 분류되었다니 황당한 일이죠." -오늘 기자회견은 어떤 내용인가요. "지역방송에 관한 겁니다. 지역방송은 매우 어렵고 현안도 많습니다. 물론 경제적 어려움이나 악화되어가는 환경은 언론계의 총체적 과제지만, 우선은 법적으로라도 대안을 마련해보자는 것이 취지입니다. 이제 한국방송광고공사가 해체되고 미디어랩으로 광고가 넘어가면 지역방송사들이 안게 될 어려움은 더 커집니다. 본사와 지역사와의 관계가 매우 건강하지 못한 관계로 갈 가능성이 크죠. 지역민방의 경우는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는데, 지방사에 가해지는 과도한 압력은 십중팔구 부당하고, 불법적 수준까지도 갈 겁니다." -지역방송사들의 독립성 자율성을 지켜낼 수 있는 장치가 되겠군요. 그런데 언론의 현안이라는 것이 방송뿐이 아니라 총체적인 난국이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한국사회는 각 분야 간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모두 나뉘어 있죠. 지역 문제는 오히려 더 심각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수도권 중심의 구조 때문에 지역이 낙후되어가는 상황은 심화되고 있지요. 이 문제는 한국사회 전반의 구조적 문제겠지만 그 대안을 찾는데는 무엇보다도 언론의 역할이 중요합니다."-벌써 해낼 일들을 다 정리해놓으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듣다보니 정치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던 말씀이 빈말이었던 것처럼 들리는군요.(웃음) "지금도 맞지 않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저같이 정치에 전혀 맞지 않고 정치를 잘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정치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한국사회의 체질을 드러내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 -'할 수밖에 없는'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2008년엔가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보니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밝히셨더군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정치인이 되셨거든요. 그렇다면 그 후의 2-3년이란 시간이 신의원님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 일 텐데 그 배경은 결국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현실일 수도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싶었습니다. "생각을 바꾼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2009년 4월 뉴스앵커 자리에서 쫓겨난 이후 삶의 환경입니다. 앵커를 그만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뉴스 클로징 멘트 논란 때문이죠. 당시에는 사사건건 엄청난 간섭과 압력을 받았습니다. 앵커는 보도의 한복판에서 언론인의 기본적인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에요. 앵커니까 중립적으로 진행이나 잘하라고 한다면 상식에 반하는 것이죠. 만약 제가 정부 편을 드는 멘트를 했어도 그런 압력과 시비가 있었을까요."(그가 2008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의 앵커 생활동안 받았던 핍박과 압력의 흔적을 묶어낸 책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에는 우리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 특히 방송 권력을 장악하는 구조적 모순의 실상이 낱낱이 고발되어 있다.)-당시 앵커 역할을 두고 뜨거운 논란이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앵커의 역할에 대해서는 같은 생각이시죠. "물론입니다. 당시도 제가 옳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80년대부터 크고 작은 코너의 앵커를 맡았었어요. 그때부터의 멘트를 따라가 보더라도 역대 모든 정권과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살아있는 현재의 권력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댔었습니다."-그럼 그때의 핍박이 정치 쪽으로 이끌었습니까. "그 영향도 있지만 앵커를 그만둔 이후의 경험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앵커에서 물러난 이후 방송은 단 1초도 못했어요. 회사를 법률적으로 그만둔 것이 2011년 9월이니까 2년 5개월 정도될텐데, 그때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사실 30여년 기자생활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말년에 제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핍박과 압력은 정치권으로부터도 당했지만, 회사내부에서 가해지는 수모가 훨씬 더 치욕적이고 고통스러웠어요. 잘 지냈던 선후배들이 등을 돌렸죠.(그는 이 대목에서 그답지 않게 '비수를 꽂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만큼 그에게는 깊은 상처였다.)"-정치권 제안은 사실 여러 번 받았고 그때마다 거절하셨던 것으로 아는데요. "물론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엠비시 파업이 절정으로 가고 있을 때였죠. 이렇게 무너진 방송환경을 바로 잡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지도자로부터 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기본상식과 기본자질을 갖춘 지도자가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구체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현실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언론의 탈정치화입니다. 특히 공영방송의 탈정치화가 핵심인데, 그것이 정치적인 독립성과 각 분야, 지방자치와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비교적 공영방송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 나라들을 보면 시민사회와 지방자치가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토대위에서 자유를 구가하면서 정치권, 특히 지배 권력과 싸우면서 언론의 원칙과 독립을 지켜가죠. 그런데 우리는 그런 토대가 아예 없습니다."-단단한 결기까지 느껴지는데요. "엠비정부가 가르쳐준 귀중한 가르침(?)의 효과일겁니다. 저는(신의원은 '우리는'이라는 표현으로 다시 고쳐 말했다) 그 가르침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현행 법률안에서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또 형식적 법 절차를 지키면서도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죠. 이런 부조리를 바로 잡으려면 폴리널리스트라고 욕을 먹더라도 먹물 든 사람으로서, 언론에 31년 복무한 자로서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방송기자로 살아오신 31년 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고난은 시절마다 있지 않았을까요. "이보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겠죠. 그러나 그때는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9년 4월에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은퇴할 날자는 2011년 9월로 정해져있는데 내 눈앞에서 방송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내 일생도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죠. 그 절망감과 무력감은 뭐라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언론계의 많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로 신의원님을 꼽습니다. 시청자들은 앵커 신경민의 덕목으로 신뢰를 꼽습니다. 방송기자로서 지켜온 가치관이 궁금합니다."저는 방송을 잘하는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지적을 많이 받는데, 힘이 없다거나 말이 느리다거나 이야기를 어렵게 한다거나 방송기자로서는 단점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방송에서는 외모가 중요한데 저는 적어도 얼굴로 먹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선은 취재에 공을 많이 들였지요. 팩트를 확인하고 선정하는 기준, 그것을 어떻게 나열하고 어떤 단어를 사용할지를 놓고 연구했습니다. 오랜 시간 여러 통로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태도와 습관은 지금 의회 활동을 하는데 에도 도움이 됩니다. 아마 동료들이나 시청자들이 저를 좋게 봐주신다면 그것이 원동력일겁니다."-많은 부문에서 활동하셨는데 여기서도 '체질'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분야가 가장 잘 맞았습니까. "워싱턴 특파원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워싱턴이라는 도시로서의 배경과 잘 어울렸던 것 같기도 하구요.(웃음) 88년에 1년 동안 공부한 곳이기도 하고, 정부초청 등으로 여러 번 왕래도 했었고, 기자로서의 전공도 외교와 법조여서 워싱턴이라는 도시와 미국이라는 나라의 토픽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교적 영어도 능숙한 편이어서 특파원으로서 역할을 비교적 잘했다고 생각하죠.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중요한지, 영향을 얼마나 어떻게 미치는지,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청자들에게 열심히 설명했던 시절이었습니다."-오랜 기자생활동안 특종이나 기억날만한 뉴스도 적지 않을 텐데요."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 정부가 미군 철수하겠다며 우리를 협박했던 일입니다. 그때 우리정부는 이해도 잘못했고 대응도 잘못했는데, 그 기사를 쓰고 정부 관계자로부터 협박을 받았어요. 회사 내부에서도 압력이 심했죠. 제가 보고한 정보를 모두 부인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저는 '더블체크' 했거든요. 확신을 갖고 쓴 것이죠. 사실이 아니면 징계 대상이었죠. 정부와 당의 고위관계자가 저를 찾아 와서 '국익'을 생각하지 않는 기자라고 비난하더군요. 국익은 저도 많이 생각하죠. 다만 당시 이 기사를 쓰는 것이 저는 국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기자들이 확인한 기사라면 쓰는 것이 국익입니다. 통킹 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 )만해도 그 당시에 썼더라면 베트남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죠. 무엇이 국익이냐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언론은 쓰는 것이 국익입니다." -대선이 앞에 와있습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이끌 수 있는 인물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수권능력이 아닐까요. 국가의 현안은 계속 정리를 해나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 이미 도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것을 과연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겠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일겁니다. 국민들은 리더 뿐 아니라 리더 주변 인물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그런 그룹이 안보이죠." -리더의 자격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함께 갈 그룹이 더 중요하다고 보시는군요. "그렇죠. 최근의 경험만으로도 국민들은 리더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면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충분히 체득했다고 봅니다. 이번 선거는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9.04 23:02

한우 사육기반 '전국 최고'…민관 협력 'FTA 파고' 넘는다

정읍지역은 전국 2위 규모의 축산세를 형성하며 지역경제에 축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한-미한-EU FTA 발효로 인한 타격도 도내에서 가장 크게 받을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축산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략 마련은 정읍시와 축산농가들의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올해들어 전북도의 한-미 FTA에 따른 전북도내 농산물 생산감소 예상액 분석에 따르면 축산 생산감소액이 정읍이 138억2000만 원으로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 한우 농가가 몰려 있어 축산 125억3000만원(쇠고기 50억 원돼지고기 46억8000만 원닭고기 22억7000만원)어치의 생산물이 줄어들것으로 분석되고 있다.또 한-EU FTA 발효에 따라서도 정읍지역 축산생산액은 36억6000만원(돼지고기 17억7000만 원)이 감소될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이에따라 정읍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한우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새로운 유통 체계 구축, 조사료 생산기반 확대, 축산농가 전문교육 활성화, 관광업과 연계한 먹거리 개발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유통체계의 새로운 구축정읍시는 지난해말 지역생산 한우의 유통활성화를 통한 브랜드 파워 증대를 위해 완주군 봉동읍 소재 (주)신화를 한우 전문 유통업체로 선정했다.(주)신화는 정읍생산 한우 유통시 등급에 따라 농가 장려금을 지급하고(1++은 지방도 9번 20만원, 지방도 8번 15만원, 1+은 10만원) 지역내 농(축)협을 통한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출하 농가의 보호에도 만전을 기하기로 했다.올해 2월2일에는 정읍생산 한우 전문유통 참여주체(정읍시, 순정축협, 단풍미인한우영농조합법인, 전북한우협동조합, 전국한우협회정읍시지부, 산외한우마을상가번영회, (주)신화)와 정읍생산한우의 전문유통을 위한 참여주체 협약식을 체결했다. 전국적으로 품질을 인정 받는 정읍한우의 유통 방식이 문전거래나 상장경매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한우 가격의 불확실성이나 생체감량, 운반비 증가등 사육농가의 불이익이 발생되고 있기 때문에 농가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통 및 판매를 전환하는 것이다.특히 협약주체의 대표자와 실무자로 구성된 정읍한우유통협의회를 구성했다.또 전문유통업체와 관내 농축협과의 대금결제와 출하업무 추진 협약을 통해 한우농가들이 전문유통업체를 이용 한우 출하가 개시될수 있도록 하고 있다.△ 조사료 생산기반 확대축산 농가들의 사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사료 생산을 대폭 확대한다.사료값 폭등과 소 값 폭락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는 한우농가 지원을 위해 현재 60%에 그치고 있는 조사료 자급률을 연내에 90%까지 끌어 올려 생산비를 낮춘다는 방침이다. 시는 올해 전년대비 25%가 늘어난 25만톤의 조사료 생산을 목표로 조사료 재배면적을 지난해 3025ha보다 32% 늘어난 4000ha로 확대했다. 이는 전북도 전체 조사료 면적의 15 %에 해당된다. 또 조사료 연결체 장비, 제조운반비 사업, 경종농가 생산 장려금, 조사료 부존자원 재배 및 활용, 조사료 배합급여기 지원 확대(2011년 10대 2012년 15대) 등 총 5개사업에 134억원을 집중 투입한다. 특히 시책사업으로 지역내 유휴 농지를 전수 조사한 후 이를 활용한 조사료 생산에 나선다. 지역에서 생산된 조사료, 볏짚 등 관외 유출 방지시스템을 구축, 유통업자들의 반출을 최대한 억제해 지역사육농가에 공급될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다.조사료 생산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 시기별로 조사료 경영체, 농가, 법인조합 등을 대상으로 조사료정책, 조사료 이용 우수사례 등을 소개하는 연시대회도 개최한다. 조사료 생산성이 높은 대규모 집단화된 우량농지를 조사하여 농림수산식품부에 조사료 생산단지(500ha) 특구지정을 신청할 계획이다. △ 정읍 한우대학 운영정읍 한우의 명품화를 위해 축산인들을 대상으로 이론과 기술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한다.지난해 10월25일부터 시작된 정읍한우대학은 전국에서 축산분야 최고의 강사진을 초빙하여 한우고급육생산관리와 사양관리, 질병관리 등 선진축산 이론과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올해부터는 교양과목을 추가로 편성, 운영해 축산인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고 기술과 경쟁력을 갖춘 축산 브랜드를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한우 활용 먹거리 개발정읍 매운갈비찜등 관광음식 4종을 개발, 특허를 출원하고 이를 상품화해 정읍만의 특색있고 차별화된 음식으로 만들어 관광객의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복안이다.정읍 매운갈비찜은 정읍에서 생산된 한우갈비와 스태미너 식품인 낙지가 조화된 갈비찜으로 정읍한우의 탁월한 맛이 일품이다.이외에도 정읍시가 개발한 관광음식은'복분자불고기''내장산 영양버섯해물 가마솥밥''산채전'등으로 지역에서 생산된 농축산물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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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장훈
  • 2012.09.04 23:02

김생기 정읍시장 "市政 역량 집중 명품 한우 육성"

"FTA 파고를 넘기위한 축산업 발전전략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실천하기 위해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가는데 노력하겠습니다."김생기 정읍시장은 "전국 최고의 한우 사육기반을 가지고 있는 정읍의 한우산업이 생산에서 유통까지 아우르는 전국 최고의 한우산업으로 발전할수 있도록 시정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또 "민선5기들어 새롭게 구축한 유통망은 사육농가의 한우 출하를 쉽게하고 높은 가격 보장과 1+이상의 고품질 한우에 대한 유통 장려금을 받아 소득 증대 효과가 기대된다"고 밝혔다.김시장은 이어 "조사료 생산단지 확대를 통해 경종농가 소득효과 92억원, 조사료 배합사료 생산비 절감효과 210억원 등 총 300여억원의 수입사료 대체 효과가 있을 것이다"고 기대감을 표출했다."억대 농업인 양성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김시장은 "축산업에서도 한우암소육종연구회등를 대상으로'육성우 사양관리와 한우개량방법'에 대해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김시장은 "구제역과 사료 값 상승, 소 값 하락으로 축산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축산전문가로 자부심을 갖고 명품한우 육성에 노력해 줄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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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장훈
  • 2012.09.04 23:02

19. 전주시근로복지관 위탁 논란 "수익·지출조차 파악 안돼…운영·감독 총체적 부실"

전주시근로자종합복지관의 부실한 관리감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메이데이 스포츠 사우나가 영업을 하고 있는 전주시근로자종합복지관은 전주시가 중화산동에 2005년 건립한 시설로, 개관 이래 한국노총 전주완주지부에 무상으로 인계돼 3년 단위로 위탁 운영되어왔다. 2004년 제정된 전주시근로자종합복지관 설치 및 운영 조례에 따르면 근로자종합복지관은 근로자의 건전한 문화욕구 충족을 위한 교양교육사업 및 직업능력 향상을 위한 직업안정 및 고용촉진사업, 근로자의 여가선용과 생활편익 증진을 위한 사업, 그리고 시장이 근로자의 복지향상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업을 펼친다고 명시되어 있다.△2008년 협약서 '연 1회 정기검사' 사라져근로자종합복지관에 대한 관리감독의 책임을 맡고 있는 전주시는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가 정보공개청구한 해당 복지관의 사업계획서 및 결산서, 정기검사결과보고서, 운영협의회 회의록 등 자료요청에 대해서 "해당 자료가 없다"거나 "특이사항이 없다"는 말로 운영 실태에 대한 조사에 협조하지 않다가 언론 보도 후에 "요청한 자료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거나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며 "새로 찾아낸 자료와 유사한 자료 등 운영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를 보완해서 제공 하겠다"고 밝혔다.게다가 한국노총 전주완주지부는 조례를 어기고 2005년부터 최근까지 제3자에게 1억5000만 원의 신용보증금을 받고 사우나 등 운영일체를 맡겨왔고, 전주시는 최근까지 이러한 사실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전북일보 8월 30일자 보도)전주시근로자종합복지관 설치 및 운영 조례 제7조 2항에 따르면 '수탁자는 복지관 시설을 제3자에게 매매양여교환 또는 권리의 설정을 할 수 없고, 시장의 승인 없이 복지관의 위탁관리운영에 따른 어떠한 권리도 양도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전주시와 한국노총 전주완주지부가 체결한 협약서에도 다시 한 번 밝혀져 있다. 전주시와 근로자종합복지관이 2005년 체결한 위탁관리 운영협약서에 따르면 시는 연 1회 이상 복지관의 운영 전반에 관한 정기검사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2008년에 체결한 협약서에서는 정기검사와 관련된 규정이 없어지면서 시가 반드시 시행해야 할 정기적인 관리감독 사항은 근로자종합복지관이 제출하는 사업계획서 승인만이 남게 됐다. 2010년에도 각종 공공요금을 체납했다가 부실 경영에 대한 문제제기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는 근로자종합복지관이 협약서 상에서는 여전히 운영과 관련된 별도의 정기점검을 받고 있도록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시 "독립채산제, 숨기려 하면 알아내기 힘들어"전주시로부터 다른 종류의 위탁사업을 운영 중인 A복지관 B씨에 따르면 "일반적인 위탁사업의 경우 매년 있는 지도점검을 비롯해 해마다 민간위탁경영평가를 꼼꼼하게 받게 되고, 3년에 한 번은 일주일 동안 집중 감사를 통해 철저한 점검을 받게 된다"며 "이런 검사가 수탁기관에게 주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위탁사업기관에서 일하는 C씨는 "실제로 수탁기관이 바뀌는 일이 드물지 않기 때문에 정기검사나 감사를 무덤덤하게 받기는 힘들다"면서 "회계 부분이 가장 중요하지만 경쟁이 있을 경우 실적과 성과도 중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하지만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의 민생사업국 이창엽 국장은 "지난 7월 정보공개청구를 접수해서 공개결정을 받았으나 시가 내놓은 자료는 메이데이 스포츠 사우나의 세금신고를 위한 재무상태표에 불과해서 근로자종합복지관의 수익과 지출조차 파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며 "시의 답변을 들어보니, 사업계획서나 결산서가 있는지, 정기검사를 했는지, 심지어는 운영협의회가 구성이 되기는 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정도로 관리감독이 부실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면서 "근로자종합복지관의 총체적인 부실 운영에 대한 책임은 전주시에 있으며 이와 같은 직무유기에 대한 관리책임을 묻는 한편 즉각 감사를 실시해서 사실관계를 명백히 밝혀야한다"고 덧붙였다.이에 대해 전주시 관계자는 "운영협의회가 구성되고 회의를 가졌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근로자종합복지관은 따로 운영비를 지급하지 않는 독립채산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밝히지 않거나 숨기려 하면 우리가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힘들다"며 사실상 제대로 된 지도점검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제3자에 대한 재위탁이라는 조례위반 사안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지도점검은 없었다. 이 관계자는 "새로 선출된 집행부가 인수위원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면서 "이전에도 복지관에 들러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센터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한국노총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지 보증금 등의 거래관계를 가진 제3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지난 5월 23일에 새로 선출된 한국노총 전주완주지부의 최한식 사무국장은 "이제 막 의장이 교체 선출된 새 집행부로서는 전 집행부에서 근로자종합복지관을 어떻게 운영해왔는지 아직 제대로 파악도 못한 처지"라며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운영과 관련된 내용은 자신도 잘 모르니 전임 의장이나 전주시에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최 사무국장은 "특별히 혜택을 받거나 망하게 한 것도 없고, 경영에 별다른 문제도 없는데 잘 해보려고 하는 현 집행부가 난감한 처지"라며 "모든 문제가 선거 때문에 생긴 갈등의 후유증이라고 본다"고 말했다.박우성 NGO시민기자(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투명사회국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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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3 23:02

전주시, 자료공개 미비 이유는?

전주시의 전주시근로자종합복지관에 대한 관리감독 부실 논란과 관련, 전주시 윤재신 지역경제과장으로부터 직접 의견을 들었다. 윤재신 과장은 이번 인터뷰를 통해 "시민단체 정보공개청구가 늦어진 이유는 청구내용을 해석하는데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시민단체의 정보공개청구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정보를 감추거나 제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청구내용을 해석하는데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해 달라. 연도별 사업계획서는 오래되어서 찾을 수가 없었고 별다른 변경 내용이 없이 이전 해의 내용을 반복하는 수준이었다. 정기검사결과 보고서라는 것도 별도로 확보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수탁심사자료에 보면 내용이 다 나와 있다. 그것이 없이 어떻게 심사를 했겠나.-정보공개가 결정되었으니 수탁심사자료라도 공개해야 하는 것 아닌지.△수탁심사자료에 실려 있는 것은 3년 결과보고와 3년 사업계획서 및 예산이라서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자료는 한국노총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근로자종합복지관 결산서는 왜 제공하지 않았나.△그렇지 않아도 오늘 한국노총에서 자료를 보완하는 회계자료를 다 보내왔다. (출력된 회계장부를 보여주며) 보다시피 내역이 일일이 나와 있는 회계장부로 엄청나게 많은 양이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일일이 들여다보겠느냐. 세무사가 잘 정리한 손익계산서를 보낸 것일 뿐이다. -근로자종합복지관에 대한 정기점검은 시행하는가.△모든 위탁사업체는 해마다 경영진단평가를 받도록 되어있다. 근로자종합복지관도 당연히 시행하고 있고 2011년부터는 외부인사가 아닌 우리 과가 자체적으로 구성한 인사로 경영진단평가를 하고 있다.-정기점검 보고서는 어디 있나.△오래된 것은 찾을 수가 없고 최근 내용은 수탁심사자료에 다 나와있다. 수탁심사자료는 요청이 들어오면 확인할 수 있도록 제공하겠다.-운영협의회는 구성이 되었나.△규정대로 협의회가 구성되고 운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전 회의록은 오래돼서 찾지를 못했다. 다만 2009년, 2010년 3회에 걸쳐 간담회를 가졌다는 기록은 찾았지만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제3자에 대한 재위탁은 조례 위반인데, 사업권 회수 가능성은.△새 집행부가 선출된 뒤 6월에 간담회를 가졌었다. 앞으로 지도점검을 잘 해서 문제를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다. 새 집행부가 열정을 가지고 잘 하려고 하는 만큼, 잘 해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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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9.03 23:02

부안농악 계승자 이상백씨 "전통문화 꽃 피울 때까지 굿쟁이 역할"

민족의 혼을 담아 우리의 문화가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23년째 연습을 거듭하고 있는 부안의 굿쟁이가 있다."나 자신을 감시하며 떳떳하자!"는 소신 아래 "예술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자세로 하루에도 7~8시간씩 꽹과리와 함께 악을 탄다. 그가 바로 라금추(75·전북무형문화재 제7호) 명인의 전수자로 부안 농악의 맥을 잇고 있는 이상백(47·천지인 대표)씨다.사람들은 흔히 그를 실력 있는 '굿쟁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의 손이 현란하게 쇠(꽹과리) 위에서 춤을 출 때면 어느새 보는 이들의 어깨를 들썩들썩하게 만든다. 왜소한 몸에서 엄청난 에너지도 품어져 나온다.이 씨는 중학생 시절부터 레드제플린과 지미페이지처럼 밴드를 하고 싶어 기타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이후 코미디언 남성남 선생과 인연을 맺고 프로덕션에서 일하게 됐으나 제대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우석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게 된다.이후 그는 대학 동아리에서 농악과의 첫 인연을 맺게 된다. 신입생들을 위한 동아리 탐방 당시 풍물동아리 '청산'에서 선배의 권유로 '땅 도땅 도내 땅이다 조선 땅도 내땅이다'를 치고 난 뒤 어릴 적 밴드를 하고 싶어 했던 열정이 용솟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 꽹과리를 접한 뒤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열정이 종일 나를 붙들어 맸다" 며 "그 단순한 가락을 매일 매일 치며 난 자연스럽게 풍물굿에 빠져 들었고 그 해 1학기가 끝날 무렵 청산의 상쇠가 됐고 중앙동아리 '차돌패'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고잽이 최호라는 친구와의 만남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그런 그가 이제는 농악의 전문인으로 부안에서 활동 중이다. 대표를 맡고 있는 풍물단체인 '천지인'과 함께 부안 농악의 전통성을 잇고 있다. 천지인에는 지난 23년간의 열정도 담겨져 있다. 특히 이상백 풍물굿 20주년 기념공연에서는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씨와 함께 풀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대학 내 풍물 동아리를 이끌던 그가 전문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또 그의 손을 거친 후배들도 수많다. 그 후배들은 부안뿐 아니라 전주와 고창, 순천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후배가 아닌 제자라고 해야 걸맞겠다.그가 똑 부러지게 한마디를 던진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판'만 깔아지면 된다"고.이 씨는 "진실된 모습을 담고 있는 풍물을 알려나가겠다. 내 스스로에 대한 교육의 끝도 없다. 하지만 쉼 없는 노력으로 부안은 물론 민족의 혼을 담아 우리의 문화가 꽃을 피워 나가는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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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병대
  • 2012.08.30 23:02

107. BYC 3) 세계인의 속옷으로 - 내의 수출 1호 기업…78개국서 품질 우수성 인정

국내 내의 산업의 대들보를 꼽는다면 당연히 해외 수출 선구자인 BYC가 지목된다. 우리나라 내의 수출 1호 기업인데다 국가 경제 부흥에 이바지한 대표적 기업이기 때문이다.한국 내의업계의 선두주자인 BYC의 역사는 한국 내의 산업의 역사와 함께한다. 1946년 한영대 회장이 창업한 이래 57년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발전 시켜왔으며 오로지 의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수출만이 살 길"정부 정책 부응BYC는 국내 내의 업계 선두주자는 물론이거니와 일찍이 해외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BYC로 세계 70여 국가에 우리나라 자체 브랜드인 BYC 의류를 수출하고 있다. 1960대 당시 정부는 국내 기업들에게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수출을 권유했다. 외화 획득을 위해서였고 BYC 한영대 회장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것이 기업가'라고 생각했다.BYC의 첫 수출 상대국은 일본이었다.1963년 일본의 미쓰비시는 우리나라 메리야스 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비교 분석한 결과 한흥(현재 BYC)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미쓰비시는 BYC를 대상으로 일본으로의 수출을 권장하는 의사타진을 해왔다. 그러나 한 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한 회장 본인 스스로 자신들이 만든 제품 품질이 만족할만한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출했을 경우 일본 소비자들로부터 한국 제품이 형편없다는 평을 들을 우려가 컸고 이는 곧 나라망신으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훤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전화위복으로 일본 미쓰비시는 이러한 한 회장의 태도에 오히려 신뢰감을 높였고 미쓰비시는 이듬해 다시 자사의 기술자가 직접 한흥의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수거해 면밀 검사를 벌였다.검사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전 공정이 '아주 우수'하고 일본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그 결과를 들은 한 회장은 만족해했고 그 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미쓰비시는 다시 BYC에 수출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했고, 한 회장은 즉시 수출계약을 체결했다.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내의 산업의 첫 수출이며, 이후 수출은 일본을 넘어 동남아, 유럽 시장 등을 대상으로 수출량은 매년 증가했다.실제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 1976년에는 무역의 날에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에는 7300만 달러를 수출해 5000만 달러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특히 일본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0만 달러를 돌파했으며, 그때의 일본 미쓰비시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미쓰비시 바이어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 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다.1960년 대 중반 품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나라에서 수출 요구가 쇄도했고 수출국만 78개국에 이렀다. 이게 바로 오늘날 '세계 속의 명품 브랜드 BYC'다.△ 경제 발전 이바지 다양한 수상오랜 세월 우직하게 한우물만 파서 국내외에서 성가를 높이고 있는 BYC는 국내 기업분석 기관들의 조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초우량기업의 전형이다. BYC는 외화 가득률이 높은 섬유 업종 특성 상 창업 이래 세계 각국에 수출, 국가 경제에 이바지 한 바가 크다.이를 인정하듯 BYC는 2000년12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해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2003년 한국기업 이미지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되고 있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은바 있다. 세계 70여개 국에 수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 받고있는 BYC,신세대 감각파들을 위한 고품격 패션내의 스콜피오, 신세대 여성을 위한 화운데이션 란제리 르송, 브라,슬립,거들,나이트웨어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또 세련된 여성용 화운데이션 란제리 아미에, 모시처럼 까실까실한 촉감이 나고 시원해 남·여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름용 제품인 모시메리,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켜주는 특수 삼중직으로 가볍고 추운겨울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겨울내의 에어메리, 땀냄새를 없애주는 내의 데오니아, 흡수속건내의 에어로쉬를 생산하고 있다. 또한 잠바, 스웨터, 가디간, 바지 등 편안한 캐주얼 웨어인 BYC외의 및 양말, 타올, 지갑, 벨트 등 BYC양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내의, 외의류 등 온가족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BYC는 21세기세계 최고의 의류종합회사로의 도약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30 23:02

BYC 수출 싱크탱크 진홍집 무역부 부장 "어려워진 섬유업, 새 돌파구 찾아 온힘"

"하향 산업으로 분류된 섬유업계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요. 특히 우리 업종은 이윤이 박해 달러 벌기가 힘들죠,"BYC 본사 무역부에 근무하는 수출 싱크탱크 진홍집 부장의 고민이다.인건비가 너무 올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저비용 노동인력이 풍부한 후진국으로 섬유업계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진 부장은 "정부가 수출을 권장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이라 여겼던 저희는 열심히 일했죠"라며 "많을 때는 수출국이 78개국에 이렀지만 이제는 어려워졌고 저희도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과거 찬란했던 BYC 수출 역사 뒤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고난도 있었다. 진 부장은 "우리가 처음 일본에 수출을 한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달려들었어요. 한 번은 대농이 일본 수출창구를 대행하겠다면서 많은 하청업자들에게 설비를 갖추게 했다"며 "하지만 처음부터 잘 할 수도 없고 여기저기 하청을 맡기다 보니 품질도 천차만별"이었다는 게 진부장의 설명이다.진 부장은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에 BYC 제품은 품질이 좋았는 데 왜 갑자기 이렇게 엉망이 됐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며 "결국 나쁜 소문으로 우리까지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고 이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이어 진 부장은 "'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를 내걸고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겨 넣은 당시 일은 마케팅의 전설로도 불리고 있다"며 "지금은 '세계 제1의 BYC'라는 21세기 버전과 함께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BYC를 입을 수 있도록 힘차게 달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30 23:02

"새만금특별법 연내 통과 총력"

민주통합당 소속 도내 국회의원들과 전북도가 새만금특별법(이하 새특법)의 연내 통과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원내 과반수 이상 의원이 법안 발의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고, 포럼 형식의 공청회를 통해 새특법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기로 했다.민주당 전북도당(위원장 이춘석)과 전북도는 28일 오전 7시30분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당정 정책협의회에서 새만금특별법 개정(안)의 주요 골자와 이 법안의 연내 국회 통과전략에 의견을 통일했다.민주당 소속 10명의 의원 가운데 9명의 의원(김춘진 의원은 해외연수로 불참)과 김완주 지사를 비롯한 도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정책협의회에서 당정은 새만금특별법 개정안에 △새만금사업 개발전담기구로 중앙행정기관 형태의 '청'설치 △새만금사업특별회계 설치 및 개발전담기구의 특별회계 운용 △새만금사업지역 매립용지 조성원가 인하를 위한 기반시설 국비지원 확대 등을 포함시키기로 했다.또 새특법의 연내 국회 통과를 위해 △9월 초 의원 입법 발의 △원내 과반수(150명) 이상 의원의 공동 발의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당론 채택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더불어 새특법 개정안의 필요성을 알리고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위해 9월과 10월중 2차례에 걸쳐 새특법 포럼을 열기로 했다. 포럼은 김관영 의원(군산)이 주관하고 민주당 전북도당과 전북도의 공동 주최로 열린다.이춘석 도당위원장과 김완주 지사는 정책협의회를 마친 뒤 가진 간담회에서 "새특법의 연내 국회 통과를 위해 전북도와 도내 국회의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총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기획
  • 강인석
  • 2012.08.29 23:02

"새만금 노출부지에 내년 예산 국비 50%이상 지원"

새만금 방조제 준공 후 드러난 유휴지를 활용하는 방안이 본격 추진될 전망이다.28일 새만금경제청에 따르면 국무총리실 소속 새만금사업추진기획단은 27일 회의를 갖고 새만금관광단지 투자유치 여건 조성을 위해 새만금지역 노출부지를 활용하는 '새만금알리기 사업'에 대해 긍정 평가하고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국무총리실은 이날 내년 예산에 국비 50% 이상을 반영하는 한편 사업진행에 필요한 제반사항에 대해서는 농어촌공사와 관련기관을 통한 지원을 약속했다.새만금관광단지 개발은 그동안 새만금관광 기본계획이 미뤄진데다 투자유치 실적마저 전무한 것으로 지적되면서 주무부서인 문화관광부의 책임론이 제기됐었다. 새만금알리기 사업은 관광단지(9.9㎢) 개발에 대한 관심제고 및 투자여건 개선 등을 목적으로 전북도와 새만금경제청 등이 부안군 하서면 새만금 1호방조제 인근 관광단지 공유수면 노출부지와 매립지를 활용하는 구상.이중 새만금경제청은 △전국 모터사이클 경기대회 △전국 지구력 승마대회 △새만금 영화촬영지 명소화 사업 등을 계획하고 있다.전국 지구력 승마대회는 전국승마연합회가 매년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개최하는 대회로, 지난 2007년 경북 영천을 시작으로 충남 부여와 전남 신안 등에서 열렸다. 현재 내년 9월 개최 목표로 한국마사회 및 농림수산식품부와 협의가 진행되고 있다.새만금 영화촬영지 명소화 사업은 세계 최장의 방조제와 간척지 등 새만금지역의 명소를 영화 촬영지로 활용하는 계획으로, 변산반도 국립공원과 고군산군도, 새만금 방조제 및 신시도~야미도 구간의 메가리조트 조성 부지 등이 영화촬영지로 꼽히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쟁영화 '마이웨이'가 새만금지역에서 촬영됐다. 새만금경제청은 (사)전주영상위원회군산시부안군 등과 영화촬영 유치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새만금경제청은 "승마대회나 영화촬영지 명소화 사업 등은 새만금 개발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사업으로, 관광단지에 조성되는 골프장 등과 연계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함께 농어촌공사의 새만금방조제를 활용한 관광테마 공간조성을 비롯해 새만금 생태탐방로 조성, 2023년 세계젬버리대회 유치 등 다양한 관광객 및 투자유치 전략이 추진되고 있다.

  • 기획
  • 김준호
  • 2012.08.29 23:02

7. 스위스 대표 유통기업 협동조합 '미그로' - 품질 좋은 지역 생산품, 값 비싸도 소비자들 선호

스위스의 대표적인 소매점, 즉 마트는 협동조합인 미그로(Migro)와 쿱(Coop)이다. 대기업 계열사의 대형마트보다는 동네 곳곳에 중소규모의 미그로나 쿱이 소비의 중심이다. 8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 중 미그로와 쿱 조합원이 각각 250만 명, 200만 명이다. 프랑스계인 카르푸(carrefour)가 스위스 진출을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쿱이 매장을 인수하면서 철수했다. 이는 지역 물품과 품질을 우선으로 하는 소비생활이 주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이달 20일 오전 8시30분께 스위스 취리히 중앙역 근처 쿱 매장에는 수 십명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신선한 과일에서 주방용기, 조리식품, 세제 등의 공산품이 쿱의 상표를 달고 판매되고 있었다. 쿱매장 밖 리마트(Limmart)강 건너'M'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는 미그로 매장도 마찬가지다. 이 곳은 커피전문점과 같은 작은 카페도 있었다. 미그로는 약국, 주유소도 등도 운영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외주업체에 맡기기 보다는 직접 제조를 통해 판매하며 소비자에게 믿음을 주고 있었다.△ 개인기업에서 국민의 기업으로스위스의 대표적인 유통기업인 미그로는 10개의 협동조합으로 이뤄져 있으며, 스위스 전역에 약 600개 매장을 운영한다. 지난해 29조 원(약 248억 스위스프랑)이 넘는 매출을 올렸다. 유럽재정 위기와 인플레이션으로 순수익률은 2009년과 2010년 3.4%에서 지난해 2.7%로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스위스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미그로의 자국 내 시장점유율은 식품부문이 2007년 25%에서 2008년 28.6%까지 올라갔으나 지난해 26.7%로 다소 떨어졌다. 비식품부문은 2007년 12.4%에서 지난해 13.1%로 최근 5년간 다소 늘었다. 미그로 전체 그룹은 2007년 18.3%에서 2008년 20.6%까지 올랐지만 지난해 다소 떨어진 19.9%로 집계됐다. 직원은 유럽발 경기침체 속에서도 50개 기업에서 지난 2010년 8만3616명에서 지난해 8만6393명으로 3.3%가 늘었다. 미그로는 원래 고트리프 두트바일러라는 사람의 1인 소유 회사였다. 그는 세계 2차 대전 때 사업이 망하고 브라질까지 가서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다. 귀국 후 트럭 장사를 시작했다. 그는 설탕, 커피, 파스타, 소금, 코코넛 오일 등 6개 품목을 싣고 다니며 1925년 미그로를 설립했다. 미그로는 프랑스어 demi(절반)와 gros(도매)를 합친 말이다. 도매와 소매 중간이라는 의미였다. 당시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일반 상점보다 40% 저렴하게 판매하면서 대중적인 소매점으로 거듭났다. 자식이 없던 두트바일러는 미그로를 보다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 소비자가 사용하면서 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1941년 미그로를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 당시 10스위스프랑을 내면 조합원이 될 수 있었다. 7만5000명이 참여했다.그는 협동조합 전환 후에도 1인이 지배하지 않는 체계를 마련했다. 일반 조합원, 지역 조합, 연합회 3단계로 이뤄진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었다. 사업 방향은 조합원이 뽑은 대의원이 의사를 결정토록했다. 또한 7인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도 주요한 의결권을 행사한다. 일반 유통기업이지만 회사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이 협동조합이다. △ 담배와 술 팔지 않는 미그로미그로 매장에서는 술과 담배를 팔지 않는다. 1920년대 노동자들이 술과 담배에 돈을 쓰는 모습을 본 창업자가 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자회사인 백화점 글로버스(globus)나 미그로보다 저렴한 매장인 데너(denner)에서는 판매한다. 데너는 공산품 위주로 신선 식품의 품질은 다소 떨어진다.더욱이 미그로는 다국적 기업제품보다는 자국산 제품을 우선 공급한다. 취리히 림마트 거리(Limmatstrasse)에 있는 본사 매장 내 생수, 음료수, 과자, 화장품 등 미그로가 만들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 대형마트의 PB(Private Brand, 유통업자 상표) 상품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 외주를 주지만 미그로는 품질을 맞추기 위해 직접 제조에 나선다. 농산물은 각 지역 미그로 물류센터에 모아져 가까운 매장부터 먼저 배분된다. 근교에서 재배하는 품목과 그 지역 소비자가 원하는 품목 위주로 판매한다. 정육은 농민이 도살장으로 가축을 보내면 협동조합이 받아서 미그로에 출하하는 방식이다.이들은 이익(profit)을 환원(turn over)이라 부른다. 연 매출의 0.5%를 사회에 환원한다. 교육, 예술, 레저 등의 분야로 지역 사회에 지원한다. 일종의 학원(club school)을 운영해 일반 학원보다 1/3~1/4 가량 저렴한 가격으로 외국어, 운동,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공원을 조성하기도 한다. 1년여 전에 스위스로 건너온 후 일주일에 서너번 미그로를 찾는다는 이종실 씨(42여스위스 제네바 거주)는 "이웃도 미그로를 이용한다. 미그로는 보편적인 동네 상점이다. 중장년층의 선호도가 높다"면서 "미그로는 미국의 월마트나 코스트코처럼 창고형 마트가 아니다. 싼 가격은 아니지만 양파, 감자 등 식품의 품질은 으뜸이다"고 들려주었다. 그는 이어 "자신이 필요한 양질의 물건을 구입하는 게 스위스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비 모습이다. 싸다고 무조건 사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하지만 프랑스계와 독일계가 많은 곳에서는 저가형 소매점인 카르푸와 알디(ALDI) 매장을 선호한다. 국경 인근에 사는 이들은 국경을 넘어 장을 보기도 한다. B생수의 경우 미그로에서는 6병 들이 1개가 5.6유로지만 카르푸에서는 2.3유로로 판매되기도 했다. 지난해 여름 미그로가 생필품의 가격을 내려야한다는 여론에 밀려 여러 품목에 걸쳐 약 30% 이상 할인을 하기도 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29 23:02

얀 하츠 미그로 기업개발 부사장 "신뢰·고품질로 승부…조합원들 자부심 대단"

"미그로는 생산자와 오랫동안 거래한 신뢰가 쌓였기 때문에 중간 과정에서 다른 대기업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소비자는 양질의 제품을 적정한 가격에 구입하고 조합원은 미그로 조합원이라는 자부심을 지닙니다." 스위스 취리히 림마트 거리(Limmat-strasse) 미그로 본사에서 만난 얀 하츠(Jann J. Hatz) 기업개발 부사장(Leiter Corporate Development, 45)은 미그로가 자국 소매시장의 중심이 된 이유로 "스위스는 외제가 들어오기 어려운 나라다. 쿼터나 관세를 높게 하는 한편 국민도 자국산을 우선으로 쓰는 풍토가 정착됐다"며 "우리는 국내 시장에서 최대한 상품을 조달하고 질 좋은 생산품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하츠 씨는 "미그로는 조합원과의 신뢰를 중요시한다. 미그로 이용자들은 미그로 매거진이라는 주간 신문을 통해 상품 정보와 쿠폰을 제공받는다"면서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차이는 투표권과 로열티 프로그램이라는 적립 카드다. 조합원이 되면 1년에 한 번 임원을 뽑을 수 있다. 대가는 초콜릿 1개지만 그 자체가 자부심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시장 점유율이 낮아지는 것은 미그로의 고민이다. 하츠 씨는 "후발주자인 쿱과 독일 슈퍼마켓 체인기업으로 저가공세를 펴는 알디(ALDI)가 경쟁업체로 떠올랐다"면서 "환율로 인해 스위스 내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라 국경 가까이에 있는 소비자는 물가가 저렴한 곳으로 장을 보기도 한다. 또한 10개 협동조합을 줄일지 늘일지 규모 조정도 과제다"고 전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29 23:02

박문기 선생은

평생 고향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박문기 선생은 이름 앞에 여러 타이틀이 붙는다. 재야 사학자요, 한글학자요, 친환경 농업인이 그것이다. 1948년 정읍시 입암면 신면리 진등마을에서 박봉선씨와 최영단 여사의 7남매 증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때 징용으로 한 팔을 잃었고 어머니는 경북 군위군에서 보천교를 신앙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그는 고향에서 대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공민학교를 3개월 가량 다닌 게 학력의 전부다. 아버지를 대신해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밤이면 동네 유학자들을 찾아가 한학을 배웠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으로 웬만한 도서관 하나쯤은 가득찰 만큼의 독서를 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한창 공부할 때는 방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무르팍에 꾸덕살이 백히도록' 책을 읽은 것이다. 물론 책은 한문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다 그는 아무리 어렵고 긴 내용의 책이라도 두세번만 읽으면 그대로 외울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한자라는 문자 속에 박힌 세상의 이치가 그를 끝없이 매료시켰다. 또 근원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탐구심은 민족의 뿌리인 상고사(上古史)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그렇게 혼자 공부해서 세상에 내놓은 책이 1987년에 나온 맥이(貊耳)를 비롯 대동이(大東夷), 본주(本主), 숟가락, 한자는 우리 글이다, 정음(正音)선생 등 12권이다. 그리고 지금 12권으로 된 정음천자문을 집필 중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신화와 전설로만 알려졌던 동이족의 수천년 역사를 논문과 소설로 재현해 냈다. 삼황오제 시대의 중국 은(殷)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며, 순(舜)임금과 공자가 동이족의 후예임도 밝히고 있다. 또 주류 역사학계가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의 2000년 역사를 몽땅 떼어내 버렸다고 비판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을 아직 사학계는 이단으로 보고 있다. 또 '한자가 원래 우리 글이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얼핏 보면 황당무계한 주장인듯 보이지만 그는 낱낱이 그 근거를 제시한다.그러면서도 그는 평생 손에서 농사일을 놓지 않았다. 현재 논 4만 평과 밭 6000평을 농약없이 경작하고 있다. 우리의 고유종인 다마금(多摩錦)쌀도 연변에서 처음 들여왔다. 1995년 경작지의 토양을 검사한 결과 전국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이 증명돼 국립농산물검사소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2002년엔 일본 동경방송에서 나와 3개월 동안 심층취재해 보도했다. 지금은 한국농업대학교의 현장교수로 위촉돼 있다.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어머니 최영단 여사다. 최 여사는 1960년대와 70년대 말, 쳐다보기만 해도 낫는다는 신유(神癒)의 신통력으로 유명했다. 전국에서 하루 수천명이 몰려 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간이역인 천원역에 특급열차가 섰고 인근 논밭이 주차장으로 변했다. 광주은행에서 직원을 상주케 할 정도였다. 그는 한때 동이학교를 짓고 민족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부인과 사이에 3남2녀가 있다. 큰 아들은 연세대 행정학과에 붙었으나 농업대학으로 돌려, 농사를 짓고 있다.

  • 기획
  • 조상진
  • 2012.08.28 23:02

박문기 농부 사학자 "한자(漢字)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

"한자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다." "중국의 은(殷)나라는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만든 나라다." 이 같은 주장은 허무맹랑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근거도 조목조목 댄다. 중국의 경전이며 역사서 등을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학계의 정설을 뒤집는 이러한 주장이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했다. 더구나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있는 농사꾼이라는 게 더욱 놀랍다. 그가 정읍 입암의 재야 사학자요, 한글학자인 박문기(朴文基) 선생이다. 그는 스스로를 농초(聾樵귀머거리 나무꾼)라 부른다. 또 전통방식으로 농사를 짓다보니 친환경 농업인으로도 꽤 알려져 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 그의 집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들려주시죠."농사짓고 지내죠. 오전에도 논에 가서 일하고 왔어요. 글은 주로 겨울에 씁니다."- 올해 농사는 잘 됐습니까? "아직까지는 작황이 좋아요. 논농사는 지을만 해요. 우렁이가 제초를 하니까 힘들지 않는데, 밭농사가 제초하는 게 없어서 힘들어요. 또 아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올해는 폭염과 가뭄, 폭우까지 겹쳐서 병충해가 심할 것 같은데요?"병해충도 사람하고 똑 같아요. 화학비료를 많이 하고 그러면 벼(작물)가 연해요. 연하니까 병해충도 새끼들이 먹고 살기 좋게끔 연한데다 알을 까요. 그런데 화학비료 안하고 유기질 비료해서 키워 놓으면 아주 싸나움이 쫙쫙 흐르고 뻣뻣해서 그 땅에는 절대 알을 안까요. 그러니까 벌레 같은 것 걱정 안해도 돼요. " - 우선 선생님이 주장하는 '한자(漢字)는 중국문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 문자다'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은 의아해 할수 밖에 없는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원래 우리는 한자(漢字)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았어요. 조선왕조실록에 10여 번 나올 뿐 승정원일기나 일성록에는 단 한번도 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우리말에 한(漢)이라는 글자는 인명이나 지명에 쓰일 때는 하늘의 은하수를 상징하기도 했지만 대개 지극히 미천한 남자를 일컫는 말로 쓰였거든요. 예를 들면 백정은 도한이(屠漢伊), 소금 굽는 자를 염한이(鹽漢伊)라 했어요. 또 조선시대 소를 밀도살하면 크게 처벌 받았어요. 그래서 관청에 끌고 가 허가를 받는데'漢'이라는 낙인을 찍어 줬어요. 우리는 지금도 행실이 나빠 마땅히 죽어야 할 놈에게 漢자를 쓰거든요. 괴한(怪漢), 치한(癡漢), 악한(惡漢), 색한(色漢)이 다 그런 말이죠. 이로 미루어 우리 조상들이 우리 문자를 한자(漢字)라는 이름으로 일컬었을 리가 없죠. 한자라는 말은 조선총독부가 우리 정음(正音)을 교란시키고 국격을 낮추기 위해 상투적으로 내세웠던 말이고 급기야는 조선어한문폐지령까지 내린 일이 있었으니까요. 이후 박정희의 우민화 정책도 한 몫을 했죠."- 그것이 꼭 한자가 우리 글이라는 근거가 되기는 약하지 않은가요?"중국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가 있었어요. 책을 불 태우고 선비를 묻어 죽인거죠. 그 이전 주(周)나라 때도 문자가 있었어요. 더 나아가 은(殷)나라때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갑골문이나 청동기 명문 등에 증명이 되었어요. 이 은나라가 단군의 후예였다는 사실도 명백히 증명되었어요. 다시 말해 문자가 없는 주(周) 진(秦) 한(漢) 등 화하족(華夏族)의 나라가 다 우리 옛 조선에서 이어진 은나라 문자를 그대로 가져다 썼던 거예요."- 또 한자는 중국 문화나 인성제자(因聲制字)원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시는데요?"한자는 중국 역사나 문화, 중국 관습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요. 모두 우리 문화와 관련이 있어요. 양국간에 같은 문자어의 발음을 비교해 보면 중국어는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인성제자의 원리에 전혀 맞지 않아요. 소리라는 게 열리는 소리가 있으면 닫히는 소리가 있어야 하고, 또 펴나가는 소리가 있으면 걷어 들이는 소리가 있어야 하죠. 개발수폐(開發收閉)가 맞아야 해요. 가령 감옥(監獄)은 우리 말로 '감옥'하면 가두는 느낌이 드는데 중국은 '잰유이'하거든요. 이것은 나가는 소리지 가두는 소리가 아니죠. 수갑(手匣)도 우리는 채우는 느낌인데, 중국말로'써우'하면 풀어주는 소리예요. 글자는 하나인데 두 소리, 세 소리로 발음하는 것은 정음이 아니라 변음(變音)이죠." - 훈민정음 서문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등의 해석도 한글학자들과 달리하시는데요? 학자들은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서'라고 해석하는데"별스럽게 해도 세종대왕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가르쳐야 해요. 그것을 거꾸로 가르쳐선 안되거든요. 이것은 '우리나라 문자말의 음절(발음)이 중국에서는 달라 문자로서는 서로 시원하게 통하지 아니할세라'라고 해야 맞아요. 이호중국(異乎中國)에서 이(異)는 우리를 주체로 한 것이지 중국을 주체로 한 것이 아니에요. 또 호(乎)는 '-에서'라고 해야 옳아요. 훈민정음에 분명히 '중국에 달아'라고 했잖아요. 중국과 다르다고 하면 완전히 반대로 되어버리죠. 한글학자들의 주장이 맞으려면 여문자(與文字)도 기문자(其文字)로 해야 해요."(박 선생은 어제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과 해례본을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풀이를 해줬다. 다양하게 쓰이는 용례며 용비어천가 등의 예도 들었다.) - 이 같은 주장에 대해 한글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하거나, 항의를 받은 적이 없습니까?"제가 교육부와 문광부에 '교과서를 바꿔야 한다'는 글을 올렸어요. 그런데 반응이 없어요. 세종대왕 말씀대로 가르쳐야 해요. 학자들이 세종대왕을 갈보로 만들고 우리를 완전히 사생아로 만들면 되겠어요"- 한글전용에 반대하고, 또 우리 말 우리 글이 세계 공통이 되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 온다고 주장하시는데 너무 국수주의적인 것 아닙니까? "우리 말글 즉 언문(諺文)과 우리 글말 즉 문언(文言)은 다 천지자연의 법칙에 따른 정음으로 되어 있어요. 만일 저승이나 극락에 공통어가 있다면 거기에는 아마 우리 말이 공통어가 되지 않겠나, 저는 확신을 해요."- 선생님은 우리 민족을 독특하게 맥이(貊耳)족이라 하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맥(貊)은 우리 조상들이 신수(神獸)로 숭상했던 쇠를 먹고 사는 짐승이고, 다른 민족이 우리를 맥족(貊族)이라 했어요. 후한서(後漢書) 구려전(句麗傳)에 보면 맥이(貊耳)는 고구려의 처음 국명이죠. 환인 복희 신농 치우 소호 단군 대련 대순 천을이 모두 우리 맥족의 조상이고, 순 임금이나 공자 또한 맥족의 후예죠."- 선생님은 상고사를 깊게 연구해 새로운 주장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 중국의 은(商 또는 殷)나라를 단군조선에서 파생한 우리 민족(東夷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십니다. 근거는?"서전(書傳)이나 맹자(孟子) 등에 다 나와 있는 얘기에요. 맹자에는 '순(舜)임금은 제풍(諸馮)에서 출생했으니 동이인이다(舜生於諸馮 東夷之人也)'고 되어 있어요. 순이 태어날 때 단군임검이 왕위에 오른지 17년 되는 해였어요."- 이번 런던올림픽은 통쾌했습니다. 특히 양궁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선수들이 휩쓸고 있습니다. 동이(東夷)의 이(夷)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오랑캐 이로 해석하는데 반해 선생님은 大 + 弓, 즉 큰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해석합니다. 지금은 이것이 대세인 듯합니다만."자치통감에 나와 있는 얘기에요. 활은 옛 효자 대정씨(大庭氏)로 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대정씨는 바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원시조상이었어요. 지금으로 부터 약 5000여 전 일이죠. 그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법이 없었고 백모(白茅)로 싸서 들판에 내다 버렸어요. 그런데 대정씨는 부모님의 시신이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을 차마 볼수 없어서 나뭇가지를 잘라 줄을 매고 싸릿대로 살을 먹여 짐승을 쫓았어요. 그래서 살에 활을 먹인 형상인 조(弔)를 쓰죠."- 선생님은 상나라의 예를 들어 철기시대가 청동기시대 보다 앞섰다며 정설은 뒤집고 있는데요?"근래 출토된 은나라 시대의 청동기 유물만 보고 청동기시대가 철기시대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청동기는 원료 채취가 힘들고, 배합의 비율이 정확해야 하는 등 고도의 합금술이 있어야 해요. 반면 철기는 불만 사용할 줄 알면 쉽게 제작할 수 있어요. 두 금속의 강도만 단순 비교해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억측이예요."- 쌀과 숟가락 문화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을 하셨던데요."쌀이란 본시 벼알의 껍질을 까놓은 것을 일컫는 말이죠. 하지만 밥을 해서 수저로 먹을 수 있는 곡류에만 '쌀'이란 이름을 붙였어요. 보리쌀 서속쌀 기장쌀 수수쌀 녹쌀(메밀) 등이 그렇죠. 제가 생각하기에 쌀은 씨알(氏斡)의 합성어가 아닌가 해요. 여기서 씨(氏)는 남자가 서서 손으로 자신의 양근(陽根)을 잡고 있는 형상이요, 알(斡)은 둥글다 돌아온다는 뜻이니까요. 우리는 씨알로 밥을 해서 숟가락으로 먹어 왔어요. 또 예전부터 숟가락을 쓰는 민족은 우리 밖에 없어요. 중국과 일본은 젓가락 문화고 서양은 칼과 창으로 먹잖아요, 그런데 숟가락을 형상하는 문자는 비(匕) 자인데 匕는 북두칠성 문양과 여자의 아랫동네를 형상하여 만든 것이에요. 우리의 숟가락 문화는 8000년에 이르고 숟가락은 쌀농사와 관계가 깊은 거죠.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사람의 기운과 정신이 다 쌀에 따라 변화하여 나온다고 했어요. 기운 기(氣)자와 정신 정(精)자에 다 쌀 미(米)가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숟가락 문화가 위기에 빠져 걱정이에요."- 친환경 농사를 짓게 된 동기는?"한평생 신명세계를 사시다 가신 어머니께서 선천적으로 화학조미료는 물론 농약을 사용한 곡식이나 채소를 일체 못드셨어요. 어쩌다 그걸 드시면 잇몸이 새까맣게 붓고 잇몸에서 피고름이 나오는 고통을 겪었어요. 그러셨기 때문에 김을 매고 벌레를 잡아내는 옛날 방식 그대로 했어요. 요즘에야 유기농산물이니 친환경 농산물이니 하지만 옛날에는 그런 용어조차 없었어요. 당시는 농약 한번만 치면 될 걸 안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미련하고 답답한 노릇이었죠. 헌데 지금은 높은 가격을 받고 환경농업의 선구자로 인정을 받고 있어요.(웃음)"- 풍장(風場)굿으로 병해충을 퇴치한다고 하는데 효과가 있습니까?"굿의 묘한 것을 설명하기가 힘든데요. 사람도 그 소리를 들으면 어깨가 우쭐거리고 다리가 껑충거려지잖아요. 확실히 식물도 그런 느낌이 있는 모양에요. 가령 전봇대 밑에 벼는 여물이 안들어요. 잠을 자야 하는데 못자니까요. 요즘 첨단치료법이 향기와 소리라고 하죠. 볏대 대궁이같이 밀폐된 공간에 있는 병해충은 내장이 파열해 버려요. 누에가 천둥소리가 심하면 집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것과 같아요."- 선생님은 서양 사람들을 개의 자손이라거나 개(방우)에 비유하고 낮게 보는 듯합니다만."그것을 문자로 한번 보죠.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미국을 지배하는 세력이 있어요. 유태인이죠. 유태(猶太)라는 글자를 쓰면 개에 우두머리 추(酋)자여서 개의 우두머리 아니에요. 그리고 수입 소고기, 수입곡류 이런 것이 곡(哭)소리 나는 거예요. 사람의 입 둘이 개(犬)한테 얹혀요. 세계 곡물 회사들이 다 유태인 것 아녜요. 광우병은 동류(同類)를 먹였기 때문에 생긴거구요."- 자녀교육이 독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이유는 뭡니까?"우리는 아이들 학교 가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았어요. 저도 학교 안 다니고, 집 사람도 학교 안 다니고, 그래도 불편한 게 없어요. 요즘 교육정책이 효율성과 경쟁력을 강조하는데 첫째로 사람이 돼야 해요. 인성교육부터 해야지요. 사람되는 교육은 문자를 제대로 가르치는 게 사람되는 거예요. 요즘 부모들은 자식을 땀 흘리지 않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불한당(不汗黨)이나 건달(乾達)로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해요."

  • 기획
  • 조상진
  • 2012.08.28 23:02

(유)아리울수산 박금옥 대표 "사라져 가는 향토음식, 명품 만들터"

"5년 전 간암으로 임종을 눈앞에 둔 시아주버님이 어린 시절 드셨던 박대묵을 찾았지만 쉽사리 파는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항 인근 선창가에서 수소문해 겨우 찾았지만 상태가 악화돼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군산의 향토 특산품인 박대의 맛을 되찾기 위해 평생 살림만 하던 박금옥(59) 씨는 시아주버님의 임종을 계기로 사라져 가는 향토음식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수산물 가공산업에 뛰어들었다.생의 마지막 순간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음식만이라도 고향 사람들이 제대로 맛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조선사업을 하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가내수공업 수준의 박대묵 공장을 차렸지만 판로 확보에 실패해 사업을 접었고 말았다.단순한 식품 사업을 넘어 지역의 특색과 추억이 공존하는 향토음식의 필요성을 역설해 오던 박 대표에게 지난해 지인으로부터 수산물가공 공모 사업에 신청해 보라는 권유가 들어왔다.그는 안동 고등어, 강경 젓갈 등과 같이 군산 박대를 지역을 대표하는 수산물로 성장시켜 보자는 생각으로 공모사업에 뛰어들어 마침내 지난 5월 박대 가공공장을 완공했다.박금옥 사장은 황금박대 홍보를 위해 여수엑스포, 김천시 직거래 장터 등 전국을 누볐으며, 지난 16일부터 나흘동안 열린 COEX 식품박람회 한가위 명절선물 상품전 및 시식회 등을 통해 한가위 명절 상품으로 '황금박대'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박 사장은"평생 살아온 것보다 지난 1년 동안 더 많은 것을 배운 것 같다"며 "사업에 뛰어든 만큼, '황금빅대'를 지역차원의 상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브랜드로 키워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수산물 가공공장의 생명은 청결이라는 신념으로 박 사장은 공장에 제일 먼저 출근해 매일같이 공장을 손수 닦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20년째 군산경로식당 등에서 봉사활동을 해 온 그는 이 시간이 도움만 받고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감사와 제품을 구입해 주는 얼굴 모르는 전국의 고객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을 가다듬는 시간이다.그는 "전국에서 어떻게 알고 전화 주문이 오는지 너무 감사하다"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15명의 직원들과 함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옆에서 사업을 돕고 있는 막내아들 나성국(25) 씨도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박대 가공산업은 단순한 식품산업을 넘어 군산의 음식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갈 수 있는 향토산업이다"며 "다음 세대까지 고향의 맛을 이어나갈 수 있는 지역 특화 향토 식품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일권
  • 2012.08.28 23:02

금강유역환경회의 염우 집행위원장 "실질적인 수질개선 위해 상류 주민지원 확대해야"

"국가가 법으로 상수원보호구역에 특별대책지역까지 지정하고 4대강 특별법까지 만들어 엄격하게 관리해도 수질개선이 쉽지 않습니다" 염우 금강유역환경회의 집행위원장은 "용담호의 자율관리가 자칫 수도법에서 규정한 상수원 관리규정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2001년 금강수계수질개선 및 주민지원에 관한법률 제정의 산파였던 염우 위원장은 "같은 금강 수계이고 광역상수원인데 대청댐은 보호구역에 특별대책 지역으로 관리와 규제를 받고 용담호는 주민자율관리를 한다면 보호구역 주민들의 해제 요구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염 위원장은 "다양한 비점오염원 저감, 수변 개발요구 억제, 가축분뇨처리, 생활하수 처리 등 국가 예산 지원과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는 주민자율관리는 허울 좋은 구호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그는 최근 수계 기금과 댐 운영 수익을 상수원 유역 주민에게 좀 더 많이 배분할 수 있도록 하는 법률 개정운동을 추진 중이다. 개발제한으로 인한 재산권 피해, 댐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여전한 상류 주민의 권익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주민참여 수질개선과 개발 제한 강화 측면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우선 금강 수계 물이용부담금 중 18.6%에 불과한 상류지역 주민지원사업비 비율을 50% 이상 높이자고 제안했다. 수계기금의 50%가 하류지역의 하수관거나 하수처리장 사업비로 쓰는 것은 법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 그는 또한 댐 주변지원법을 개정해 각각 6%와 20%인 전기 판매대금과 용수판매대금의 주민지원사업비 비율을 대폭 올려야 한다고 밝혔다. 길게는 국토해양부와 수자원공사가 가지고 있는 물 권리(수리권· 댐사용권·댐이익금)를 광역자치단체로 이양하거나 유역 광역지자체간 물관리 기구나 법인으로 이양하는 것도 검토해야 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이정현 NGO시민

  • 기획
  • 정진우
  • 2012.08.27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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