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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표가 전하는 '영업 노하우'…"먼저 자존심 버려야 고객마음 알 수 있죠"

"자동차 영업은 단순 판매'를 뛰어 넘어 믿음을 판매하는 사랑의 세일즈라고 봅니다."1989년 쌍용차 판매사원으로 입사해 2000년 쌍용차 전주영업소 소장, 2012년 현재 쌍용차 8개 본부 호남협의회장을 맡고 있는 박동렬 대표의 지론이다.박 대표는 먼저 "세상 모든 재화 유통의 기본은 영업으로, 특별한 노하우나 왕도가 필요하지 않고 다만 기본에 충실하면 된다"며 "자동차는 내 가족에게 판다는 심정으로 이윤을 생각하고 팔기 보다는 가슴으로 판매해야 한다"고 말했다.내 가족이 탈 차량처럼 안전, 가격, 서비스 등 모두를 충족시킨 다는 마음으로 차량을 선택시켜야 한다는 것."자존심을 버릴 때 비로소 고객의 마음을 알 수 있다"는 박 대표가 꼽은 피하고 싶은 고객 첫 번째는 '자동차 성능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가격을 깎으려는 고객' 이다.두 번째는 이상도 없는 차량을 마치 이상이 있는 것처럼 허위 포장해 수개월에 한 번씩 차량을 바꾸려는 고객이다.박 대표는 이 같은 고객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되도록 차량 판매를 금지하고 있다.박 대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009년 이라고 한다. 당시 1년 동안의 판매 실적은 10여대에 그쳤다.당시 쌍용차는 파업 중이었고 파업이 장기화되다보니 차량 출고가 안됐다는 것. 차를 원하는 고객은 있지만 차가 없어 팔고 싶어도 못 판 상황으로 일선 영업점들은 사실상 '개점 휴업'으로 대표가 당시 입은 피해 금액만 2억여원에 달했을 정도다.하지만 당시 상황이 힘들었어도 전주중앙영업소를 떠난 직원이 없을 정도로 박 대표의 인력 관리는 뛰어나다.박 대표는 "보통 사람 1명이 가지고 있는 친분은 250명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실제 내가 친분을 맺은 한 기업 영업부 차장은 회사에서 사용하는 영업용 차량 20대를 모두 내게서 구입한 바 있는 등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고 말했다.그는 이어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운 지금은 직업에 대한 눈높이를 높게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또한 내가 가장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직업에 초점을 맞추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27 23:02

박동렬 쌍용차 전주중앙영업소 대표 "고객에게 믿음 주었더니 판매왕 명성 따라오네요"

최근 경제 불황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 기업들의 인력채용이 줄어가고 있다. 여기에 구직자들도 안정적 정년이 보장된 대기업 취업을 선호, 이직률이 높은 영업직 직원을 뽑기란 '하늘의 별따기'로 불린다. 이에 자동차 영업계의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는 쌍용자동차 전주중앙영업소 박동렬(50) 대표를 만나 '그가 살아온 삶'과 '영업의 노하우', 그리고 '앞으로의 목표' 등에 대해 들어봤다.△성공이 있기까지 수많은 '시련'23년 동안 한결같이 자동차 판매 영업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쌍용차 전주중앙영업소 박동렬 대표는 임실군 운암면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이후 전주로 나와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전북대학교 국문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중학교 때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아왔던 박 대표는 중소기업에 취직한지 2년만인 1989년 쌍용차로 이직했고 현재 '판매 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업계에서 영업의 신으로 불리고 있다.현재의 그가 있기까지는 눈물과 사랑, 그리고 자신만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있다.누군가가 영업의 기법이나 테크닉을 알려준 것도 아니고 불우했던 유년시절 가족의 소중함과 친구간의 우정 등 곤궁한 시절을 눈물로 그린 '가슴속 지도'가 유효하게 작용했다.또 영광의 장막 뒤에 가려진 진짜 '삶'에는 수많은 눈물겨운 좌절과 실패가 있고. 땀으로 얼룩진 고달픈 세월이 쌓여있다.23년간 겪어온 이 모진 삶속에는 같이 했던 동료, 상사, 부하직원, 경쟁사 직원 등 좌절을 극복하지 못하고 포기한 '인생'들이 셀 수 없을 정도다.그는 현재 쌍용차 전국 8개 본부 가운데 전북과 광주전남을 총괄하는 호남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올 상반기도 전국 154개 대리점 가운데 '전국 우수영업소'로 선정된 바 있다.그는 말한다. '자존심을 버릴 용기가 있을 때 진정한 사회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그만의 '비결' 그리고 '철칙'그는 1989년 쌍용차 영업직에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23년 동안 평균 매 년 50대 이상의 자동차를 팔아온 업계의 '신화'적 존재다.이런 그의 영업 철학은 '한결같은 사람이 되자'로 아주 단순하다.그는 이직률이 심각할 정도로 심한 자동차 판매 업계와는 달리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오고 있다.차를 산 사람이 불시의 사고를 겪거나 갑작스런 서비스가 필요할 경우 보통 차량을 판매한 사람을 찾게 되는데 이직률이 심하다보니 판매자가 바뀐 경우가 태반으로 그의 경우 고객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것.그는 또 처음 핸드폰을 구매했을 당시인 1993년부터 지금까지 번호를 변경하지 않고 한 번호를 쓰고 있다. 고객에 대한 '보험'이자 '신뢰'다.그가 보유하고 있는 고객 전화번호만 2500개가 넘으며, 그는 이들에게 정기적으로 재난 및 날씨 등에 대한 문자 서비스를 시행해오고 있다.가끔 20년 전 차량을 사갔던 고객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박 대표는 영업소를 끌어가는 방침이자 신조로 '나의 세븐(SEVEN) 미러'를 설정,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직원들과 함께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나는 직장을 사랑한다. 나는 이 분야 최고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를 제창한다.이처럼 그의 영업 노하우는 '변하지 않는 원칙'을 토대로 고객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제공, 고객이 또 다른 고객을 소개하는 연결고리를 이어가고 있다.△판매 차량의 사고, 감정의 교차자동차 영업 사원에게 차량 사고는 늘 접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갑작스런 고객의 죽음'을 접하기도 한다.박 대표는 지난 2000년 초 차량을 판매한 뒤 한 달 이후 차량의 서비스 상태를 점검하는 '해피 콜'을 실시했다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었다.고객 부인으로부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된 것. 마치 내가 차를 팔지 않았더라면 고객이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자괴감과 수년간 신뢰를 바탕으로 만나온 고객 사망의 슬픔이 교차, 일을 그만둘 지 심각하게 고민했었다.때론 교통사고는 아니지만 고객의 부도설과 함께 자살소식을 겪는 그로서는 매일 아침 지방신문을 보고 사건 사고 소식을 접할 정도다.그러나 이 같은 슬픔 뒤에는 또 다른 '희열'과 '뿌듯함'도 있다.그가 아는 한 고객은 처음 조그만 구멍가게(음식업)에서 출발, 1990년 중반 당시 코란도 밴을 사갔었는데 매년 사업이 조금씩 발전, 계속된 차량 바꿈을 통해 지금은 중형차를 구매해 타고 다닌다.이 같은 고객들은 자동차를 판매한 박 대표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자, 희망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27 23:02

고창 중요무형문화재 김종대씨 "전통 나침반 '윤도'… 맥 이어야죠"

고창군 성내면 낙산리에 '윤도장 김종대 전수관'이 있다. 그 곳에는 오직 전통을 계승하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살아온 중요무형문화재 110호 윤도장 김종대씨(79)가 살고 있다. "조상이 물려준 일을 내가 이어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내 아들이 기꺼이 이어받고 있으니 고맙고 기쁠 뿐입니다. 대물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행복이지요"김종대씨는 300여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윤도의 제작기술 보유자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작업으로 만드는 전통나침반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조부 김권삼과 백부 김정의에 이어 아들 김희수(50)에게 전수, 4대째 윤도 제작 기법을 가업으로 잇고 있는 장인이다.어렸을때 부터 손재주가 많았던 김씨는 어깨너머로 백부의 기술을 익혔지만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협에 다니고 있을때 조카의 재능을 눈여겨 보아 왔던 백부가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연으로 11년 다니던 농협을 그만두고 지금까지 56년 동안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윤도의 원리는 중국에서 이미 한대에 실용화 되어 점을 치는 기구로 사용되었다. 풍수가의 전유물이었던 윤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뱃사람들이 방향을 보는데 이용하기도 하고 묘자리를 보는 지관의 필수품이며, 일반인들에게도 유용하게 쓰이는 생활과학 도구로 자리잡았다.윤도는 대개 크기로 종류가 나뉘어 진다. 윤도에 그어진 원이 만들어낸 한 칸을 '층'이라고 부르는데 1층부터 24층까지 그 쓰임이나 내용에 따라 종류가 구별된다. 윤도의 소재는 200년이 넘은 대추나무다. 잘라진 채로 물속에 1~2년, 다시 은근한 곳에 3년 정도 놔둔 후에야 칼을 댈 수 있다. "50~60년대에는 꽤 인기가 있어 한꺼번에 100여 개씩 주문이 밀릴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해 기계로 찍어내는 나침반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나마 수요가 거의 없읍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힘든 일을 하려고 하지 않잖아요. 내가 죽으면 이게 끝이 날까 염려 되어 큰 아들(희수)을 설득해 전수 장학생을 시키고, 이수자를 만들어 지금 조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김종대 어르신은 "오직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윤도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을 1996년 낙향시켜 전수자로 삼았을 때가 가장 고민스러웠고 힘든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윤도의 맥을 잇기 위한 그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부는 1996년에야 김종대씨를 윤도장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때부터 매월 130만원의 전승금(전수자 교수비)을 국가로 부터 지원받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돈이 되지 않는 윤도를 만들며, 맥을 이어가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살아오신 김종대 어르신이 지금보다 더 낳은 여건에서 윤도의 맥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기획
  • 김성규
  • 2012.08.23 23:02

6. 강원도 원주 '협동사회네트워크' 가보니 - 끊임없는 '협동 실험'…'한국의 몬드라곤' 명성

국내 협동조합 운동의 으뜸으로 꼽히는 강원도 원주. 인구는 32만 명이지만 '원주협동사회네트워크(이하 원주네트워크)'에 소속된 조합원은 3만5000여명(중복 조합원 복수집계)이다. 농업가공유통, 소비자, 공동 육아, 교육, 신용, 의료 등이 협동조합으로 이뤄진다. 사회구호활동으로 협동조합의 초석을 다진 이들은 무위당 장일순(1928~1994)과 그를 따르는 운동가, 그리고 지학순 주교(1921~1993)다. 원주는 우리나라 그 어느 곳보다 협동조합이 익숙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해 '한국의 몬드라곤'으로도 불린다. 스페인 몬드라곤은 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내전으로 피폐화된 작은 마을에서 시작, 현재는 총 자산이 54조 원이 넘는다. 지난 9일 찾은 원주네트워크에서는 한국의 몬드라곤이 과분한 평가라고 하지만 삶에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을 만들려는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목적은 확실, 보조금은 금물원주시 평원동 '만남의 집'은 특별한 식당이다. 곰탕, 된장찌개, 삼겹살 등으로 메뉴는 평범하지만 국내 1호 노인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기 때문이다. 원주노인생활협동조합은 고령사회에 대비해 고령자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2006년 만들어졌다. 사업의 다양화를 꾀하던 중 2010년 직영식당을 열었다. 경상비를 제외한 수익은 모두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데 쓴다.노인생협은 설립 당시 적용할 법이 마땅치 않아 소비자생활협동조합으로 출발했고, 2008년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 조합원은 약 1400명, 출자금은 4400만 원 규모다. 이중 1만 원 가량을 출자한 조합원은 1200여명이다. 깨끗한 학교(초등학교 청소), 크린콜(무단 쓰레기 처리), 대형폐기물, 소독방역(보건소, 학교 등), 보험사업부(생명, 자동차, 상조) 등 11개 사업을 펼친다. 4대 보험과 함께 근로계약을 맺은 조합원은 106명이다.노인생협 박태진 이사장(70)은 "조합은 목적이 중요하다. 노인 스스로 일을 찾으며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목적이 확실해야 한다. 더불어 젊은층의 일자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면서 "우리는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 행정이 필요한 일을 찾아 사업을 제안하고 수의계약도 활용한다. 크린콜 사업단은 뒷골목에 쌓인 쓰레기를 치워 깨끗한 원주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박 이사장은 이어 "조합원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사업을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협동조합 실험 왕성한 원주원주네트워크에는 현재 19개 단체에 46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1972년 원주밝음신협을 시작으로 지난 2010년 친환경생태건축과 저소득층 집수리, 환경생태 교육을 하는 노나메기(주)에 이르기까지 신협(1곳), 소비자생협(6개), 교육(2개), 공동체 운동기관(3개), 농민 생산자 단체(2개) 등이 활동하고 있다. 이 같은 원주의 협동조합 운동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에 지학순 초대 교구장이 부임하면서 장일순 선생과 만난다. 1968년에는 가톨릭센터에 협동조합 강좌를 개설하고 이듬해 진광중학교에 협동교육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협동조합 운동이 실시됐다. 협동조합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72년 남한강 대홍수다. 이들은 당시 서독으로부터 들어온 구호자금 3억6000만 원을 운용하기 위해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결성하고, 마을단위로 식량지원과 농토 복구, 농민 소득원을 개발했다. 같은 해 원주네트워크의 맏형격인 밝음신협을 설립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와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원주는 시련을 맞는다. 정부의 저곡가와 농약으로 인한 증산정책, 탄광촌 폐쇄 등으로 친환경 농업의 축소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심화돼 인적기반이 붕괴됐다. 1982년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모자들의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 이후 1985년에 들어서 현재의 한살림생협인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서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 기반이 다져졌다. 도시와 농촌의 협력 연대를 통한 새로운 협동조합 운동 방식이 도입됐다. 또 외환위기 이후 2002년 의료생협을 만드는 과정에서 젊은 실무자를 중심으로 협동조합 운동에 대한 논의가 다시금 활발히 이뤄졌다. 공무모임에서 대안사회의 실현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원주네트워크의 전신인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가 창립됐다.원주에서도 협동조합의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다. 사업 창출과 이용률 제고 등이 고민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목적과 절실함이 부족한 협동조합은 문제 해결 방식과 조직 구성 등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활동이 뜸한 편이다. 원주네트워크에 소속된 기관과 단체들은 지난해 3월 생명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경제 조직 협약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상호 부조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각 부문별 공동사업을 강화하고 협동기금을 설립할 계획이다. 교육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하고, 조합원회원의 참여를 높이는 방안을 찾고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22 23:02

"협동조합을 이해하는 사람 길러야"

"협동조합은 많은 매출과 잉여금이 성공의 기준이 아닙니다. 공통의 문제를 지닌 사람이 자발적으로 모여 조직을 구성하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기준을 둬야 합니다. 원주도 오래되고 여러 사업을 하지만 불완전합니다. 다만 원주는 그런 시도를 활발히 할 뿐입니다."원주네트워크 김선기 사무국장(39)은 협동조합에 대한 환상은 금물이라고 강조했다. 인적자원을 육성하고 기존과 신규 협동조합의 연계로 생태계를 조성하는 한편 조합원의 참여율 제고가 협동조합이 지속되는 조건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협동조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을 꼽았다. 김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을 이해하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기존 경제체제는 경쟁만을 강조했다. 공동민주 결사체인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된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에서는 지역별 편차가 크다"고 진단했다.그는 이어 "우리나라는 삶의 모든 부분이 시장에 잠식됐다. 사업적으로 협동조합의 성장 토양이 갖춰있지 않고 인적물적 토대가 열악하다"고 면서 "협동조합기본법에서 협동조합에 법인격을 부여했지만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로는 한계가 있다. 관련 부처와의 협력과 다른 법률의 추가적인 개정작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22 23:02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 "'나는 담뱃대 왕'…전통 문화재 관심 더 가져야"

담뱃대는 한자어로 연죽(煙竹)이다. 백동(白銅)은 구리 합금의 일종인데 니켈이 들어가 흰 빛을 띤다. 검은 빛을 띠는 것은 오동(烏銅)이다. 백동연죽(白銅煙竹)은 동(銅)에 금, 은, 아연 등을 합금 처리해 전통적인 수공 기법으로 만든 담뱃대이다. 남원의 담뱃대는 예부터 전국에서 명성이 제일 높았다. 남원에서 전통적으로 제작돼 왔던 담뱃대가 오동상감(烏銅象嵌) 송학죽이다. 죽전(竹田) 황영보(黃永保80) 선생이 그 기능보유자다. 지난 93년 무형문화재 65호로 지정됐다. 그가 살고 있는 남원시 왕정동 강정몰 마을에서는 70여 가구중 50여 가구가 담뱃대를 제작하며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번성했지만 이젠 전국적으로도 담뱃대를 제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그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는 대대로 담뱃대를 만든 집안 출신이다. 3대째다. 그의 할아버지 황찬서(黃贊西) 선생은 1991년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다. 담뱃대를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다. 광복 67주년을 맞은 지난 15일 백동연죽장 황영보 선생을 찾았다. 과거에 언론에도 가끔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뜸한 터였다. 남원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백동연죽전수관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전수관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이름에 걸맞는, 그럴듯한 공간을 상상했는데 실망스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백동연죽 전수조교인 그의 아들 기조(51)씨가 4대째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인터뷰 자리에 배석해 얘기를 거들어 주었다.-요즘도 백동연죽 제작을 활발히 하십니까."옛날에는 어려운 것은 내가 하고 쉬운 건 전수조교(아들)한테 맡겼는데 거꾸로 됐어. 이젠 나이가 들어 쉬운 건 내가 하고 어려운 건 아들이 해."-말씀이 약간 어눌하시군요."8년전 풍을 맞았어. 식사하다 쓰러졌는데 말 하는 게 자연스럽지가 않아. 다른 데는 이상이 없고"-지금도 전시회 등은 꾸준히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지난 4월과 5월에 기획행사를 열었고 연 네차례 복지관을 찾아 '찾아가는 전시회'도 열고 있어."-맨 처음 담뱃대를 만들게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열다섯살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권유해서 했지."-당시 기술 전수는 어떻게 하셨습니까."아버지 어깨 너머로 배우기도 했고 나중엔 기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일을 잘못 할 때는 (나한테)공구를 던지기도 했지. 한 우물을 파면 성공해. 지금도 자식들한테는 한 우물을 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아버지가 무서운 분이셨나 봅니다."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지.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아버지로 불렸어." -그동안 돈 좀 벌었습니까."당시엔 담뱃대가 없어서 못 팔았지. 625 무렵 다른 사람이 만든 건 1500원씩이었는데 내가 만든 건 2500원씩 받았어. 내 제품이 최고였지. 돈도 벌었어. 한 45억 벌었는데 이젠 다 자식들한테 나누어줬어. 내가 가진 것은 1000만원도 안돼."-나이 들면 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들 하던데 왜 일찌감치 나누어 주셨습니까."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갖고 있으면 뭐해."-만드신 담뱃대를 당시엔 어떤 경로를 통해 팔았나요."나는 만들고 각시(아내)가 내다 팔았지.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매처에 팔았어. 팔아 오라고 일 많이 시켰어. 여자 몸으로 참으로 고생 많이 했지."-무형문화재가 되셨는데 타고난 소질이 있었던가 봐요."매년 무슨 무슨 대회에서 수상하다 보니 기록이 쌓이고 한 우물을 파게 된 거지. 임실의 추오판 선생이 기능 보유자였는데 아들까지 작고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조명을 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거지."-지금 만드시는 백동연죽은 얼마에 팔리나요."대왕죽(상품)은 600만원, 송학죽은 500만원, 민죽은 100만원씩 하지." 민죽이란 아무런 문양 없이 백동으로만 만든 일반 담뱃대다. 서민이 주로 이용하던 저렴한 것이었다. 부산 마산 안성 울산 광주 등 담뱃대를 만드는 곳이 여럿이었지만 전라도 지역에서는 남원이 그 중심이었다. 민죽은 3일이면 만들 수 있지만 송학죽은 일주일, 대왕죽은 보름이 걸릴 정도로 금속 세공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담뱃대가 지체와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이자 사치품이기도 했다. 60년대 궐련이 나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굉장히 비싼데 수요는 좀 있습니까."거의 없어. 문화재청이 인간문화재 지원 차원에서 몇개씩 구입하는 정도야."-백동연죽의 핵심 기술은 무엇입니까."백동은 계속 두드리면 깨져버리기 때문에 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면서 두드려야 해. 수만번 손길이 가야 하는 것이라 고생이 많아. 67일 걸려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핵심 기술은 수 놓는 것이야. 솔잎매화학용 등의 문양을 새길 때 오동상감기법으로 수를 놓는데 이 기술이 어려워."황영보 선생은 오동(烏銅)의 배합법이 특이하고 설대(담뱃대의 몸통 부분)를 끼워넣는 배토리 부분에 봉황과 솔잎, 매화, 학 등의 문양을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는 기술이 뛰어나다. 연죽은 민 담뱃대와 오동상감 담뱃대로 나뉘는데 오동상감 연죽은 불 인두로 소나무와 학 등의 낙화(烙畵)를 넣어 만든 제품이다. 이 전통적 연죽 제작 기능이 원형 그대로 4대째 전수되고 있다. 그의 아들인 전수조교한테 물었다.-담뱃대가 이미 사양길이고 팔리지 않는 제품을 만드는 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뭔가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맞습니다. 행안부에서 명품 담뱃대를 생산하기 위해 디자인 개발에 들어가 있습니다. 성공할려면 휴대용으로 소지할 수 있어야 하고 멋스러움이 있어야 해요. 이런 제품이 올해 생산되고 내년부터 홍보에 들어갈 겁니다."-외국인에게는 담뱃대와 갓, 호랑이민화가 한국을 상징하는 3대 전통공예품인데 저렴한 비용의 선물용 담뱃대가 개발된다면 수요가 있지 않을까요."다양한 형태의 모델이 개발중에 있어요. 2030㎝ 길이의 휴대용 담뱃대에다 한약재나 향신료를 넣어 들이 마실 수 있도록 고안된 것도 있어요. 건강이 좋지 않는 분들이 담뱃대로 한약 성분을 흡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연구개발 중에 있습니다."-일반인들이 기술을 전수받으려 하는 경우는 없나요."없어요. 체험활동은 합니다만."-오늘이 광복절이기도 하고 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 얘기로 화제를 돌려볼까요. 황 선생님의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할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담뱃대를 제작하면서도 태극기를 갖고 다니셨어. 담뱃대 판 돈을 가방에 넣어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에게 전해 주기도 했지." -일본 순사 총탄에 순절하셨는데 어떤 운동을 하시다 변을 당하셨나요."기미 독립만세운동의 해였어. 4월4일이 남원장인데 이날 임실 순창 곡성 등에서 10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어. 독립만세 함성이 들끓자 일본 헌병대와 수비대가 감당을 못하고 무차별 총을 쏘아댔지. 다섯명이 현장에서 사망을 했어. 할아버지는 사격을 하던 왜경 수비대에 달려들어 총을 빼앗으려 격투를 하다 옆에 있던 수비대 총탄에 맞았어. 전주에 있는 자혜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지만 입원 9일만에 숨을 거두었어. 당시 할아버지 나이 47세였고 장례는 동민장(洞民葬)으로 치러졌어." -항일정신이 투철한 분이셨는가 봐요."남원에도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일본인들은 터를 잡기만 하면 잘 사는데 우리 주민들은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을 항상 못마땅해 하셨다고 해. 과감하게 항일투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일본상품 불매운동, 일본인 돈 안 꾸어쓰기, 세금 안내기 운동, 일본인에게 땅 안팔기 운동 등을 벌였어. 일본인에겐 눈엣가시여서 헌병대에 고발당하기도 하고 두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구금되기도 했어." -70여년 동안 쇠를 두드리며 외길 인생을 사셨는데 후회하지는 않습니까."후회는 없어. 그런데 밥벌이가 안돼. 인간문화재라고 해서 다른 일은 못하게 하고 밥벌이는 안되고. 이것이 문제지 다른 건 없어."-스스로를 한마디로 표현하신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담뱃대 왕'이야. 우리나라에서 최고 아름다운 댐뱃대를 만들었으니까."-아들이 기능을 전수하고 있는데 만족하십니까."공무원 하면 월 몇백만원씩 버는데 쥐꼬리만한 돈으로 잘 이어갈까 걱정스러워. 계속 할지 모르겠어."-백동연죽전시관이 이렇게 비좁고 초라한 줄 몰랐습니다. "30평인데 너무 비좁아요.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전수관에서 기거를 해야 원칙인데 그런 공간도 없어요. 겨우 작업장 하나 있는데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지요. 문화재청에 기거할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아들 기조씨가 거들었다. 백동연죽전수관은 국비와 지방비 2억원을 들여 1997년 10월 남원관광단지 내에 지어졌다. 연죽 제작과정을 담은 사진 액자와 연죽들이 여기저기에 널부러져 있을 만큼 협소하다. -가족들이 이 분야에 모두 헌신하고 있는데 자치단체나 정부 차원의 관심은 어떻습니까."문화재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있어요. 잘 나가는, 인기 있는 무형문화재는 종업원을 수십명씩 두고 일하기도 합니다. 스포츠로 따지면 비인기 종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인기 문화재라 힘들고 외로워요. 비인기 분야에도 정부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당장 가장 시급한 현안은 무엇입니까."아까 말한 기거할 공간을 전수관 부지 안에 만들어 주는 것이겠지요. 사업비가 약 2억원 정도 된다던데.문화재청에 요구해 놓고 있어요." -전통문화 보존을 위해 보완할 부분이나 절실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온고지신이란 말처럼 옛 것에서 새로움이 탄생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옛 것을 귀중하게 여기고 전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문화재에 대한 애착과 관심도 더 많이 갖기를 바랍니다."

  • 기획
  • 이경재
  • 2012.08.21 23:02

14. 부안지역 가볼만한 곳 - 마실길 따라 자연이 빚은 보물 그득

걷기 열풍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자연이 빚은 보물로 가득한 '부안 마실길'이 걷고 싶은 '명품길'로 거듭나고 있다.눈길을 사로잡는 자연의 속살과 향기 가득한 자연의 냄새, 달팽이관을 자극하는 자연의 소리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걷는 내내 한걸음 한걸음을 가볍게 해준다. 여유를 느끼며 자연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싸드락 싸드락 발을 내딛는 동안 각박한 세상살이에 힘들어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준다. 내 맘 속 모난 돌도 둥글둥글하게 다듬어 준다.따로 준비물이 필요 없다. 가벼운 봇짐하나 걸쳐 메고 부안의 자연을 담아 낼 몸 하나면 족하다.△ 자연과 하나 되어 추억을 나누다부안은 맛과 풍경, 그리고 이야기 등 세 가지 즐거움이 있어 '변산삼락(邊山三樂)'이라 불리었다. 이는 자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연이 빚은 보물 부안'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켰다.이러한 보물을 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곳으로 '부안 마실길'이 탐방객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부안 마실길은 새만금전시관~부안자연생태공원 66㎞ 7코스에 이르는 변산 마실길과 74㎞ 6코스의 내륙마실길로 형성돼 있다. 코스마다 붙여진 이름만으로도 탐방을 대신한다.1코스는 조개미 패총길(새만금전시관~송포, 5㎞)이며 2코스-노루목 상사화길(송포~성천, 6㎞), 3코스-적벽강 노을길(성천~격포해수욕장~격포항, 7㎞), 4코스-해넘이 솔섬길(격포항~솔섬, 5㎞), 5코스-모항갯벌 체험길(솔섬~모항해수욕장, 9㎞), 6코스-쌍계제 아홉구비길(모항해수욕장~왕포, 11㎞)이다. 또 7코스-곰소 소금밭길(왕포~곰소염전, 12㎞), 8코스-청자골 자연생태길(곰소염전~부안자연생태공원 11㎞), 9코스-반계선비길(개암사~우동마을, 14㎞), 10코스-계화도 간제길(계화도~석불간, 16㎞), 11코스-부사의 방장길(석불산~부안댐, 24㎞), 12코스-바지락 먹쟁이길(변산해수욕장~부안댐, 10㎞), 13코스-여인의 실크로드(성천~유유저수지~격포항, 10㎞)이다.탐방에 소요되는 예상시간은 총 34시간 30분 정도. 이를 한번에 완주하는 데는 3박4일이 필요하다. △ 부안 관광의 종합세트 '부안 마실길'부안 마실길은 관광자원의 보고(寶庫) '부안'을 모두 담아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길을 걸으며 자연경관을 감상하고 문학여행, 역사공부, 생태탐방이 가능하고 바지락죽을 비롯한 풍부한 먹거리를 접할 수 있다.세계 최장의 새만금 방조제와 대항리 패총, 곤충체험, 여해신 계양할미를 모시고 있는 수성당, 변산고사포모항상록해수욕장, 사극촬영 명소인 부안영상테마파크, 조각전시관, 소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곰소염전, 그리고 곰소 소금을 이용해 만든 젓갈, 줄포자연생태공원 등 발 딛는 곳곳이 볼거리며 즐길거리, 체험거리, 이야깃거리들이다.뿐만 아니라 변산반도의 속살을 경험하고 자연이 꾸며낸 각종 이벤트로 눈과 귀, 코, 입, 피부를 통한 오감만족체험이 가능하다. 특히 봄의 튤립, 유채꽃과 겨울의 눈꽃에 이르기까지 마실길 주변은 사계절 내내 꽃들이 반긴다. 지금은 상사화(꽃무릅)가 마지막 미모 자랑에 여념이 없고 코스모스가 꽃밭을 점령하고 있다.특히 새만금전시관~격포항에 이르는 18㎞ 구간은 국토해양부의 '해안누리길'로 내소사와 연계한 관광상품으로 판매 중이다.△ 부안 마실길 즐기는 비법은 '마실길 안내의 집'서부안 마실길을 한층 더 즐겁게 탐방하려면 새만금 전시관 입구에 설치, 운영 중인 '마실길 안내의 집'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알고 걷는 탐방이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는 것.마실길 안내의 집은 문화와 역사, 유래, 먹거리, 체험거리 등 마실길을 둘러싼 다양한 내용들을 사전에 알게 해 준다.이 곳에서는 마실길의 지도와 안내도를 제공하고 코스별 유래 등 설명해준다. 문화관광해설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부안군은 이처럼 문화와 역사, 생태, 그리고 관광을 즐길 수 있는 부안 마실길이 단순히 스쳐지나가는 길이 아닌 머무르며 다시 찾을 수 있는 삶의 길이 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특히 생태탐방로로 친환경 관광자원을 개발보존해 부안 관광산업 발전에 한 획을 긋겠다는 각오다.부안군 관계자는 "자연 그대로의 마실길과 이를 중심으로 한 각종 편의시설 등을 갖추고 있어 탐방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며 "지속적인 정비와 보완으로 전국을 대표하는 길로써 누구나 찾고 싶고 머무를 수 있는 명품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한편 부안 마실길 탐방과 관련해 궁금한 내용은 부안군 환경녹지과(063-580-4382)로 문의하면 된다.

  • 기획
  • 양병대
  • 2012.08.21 23:02

새만금' 부동산 투자이민제' 도입될까

정부가 외국인 투자유치 확대를 위해 '부동산 투자이민제도' 적용지역을 늘리기로 함에 따라 새만금 지역 포함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식경제부는 지난 16일 열린 정부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외국인 투자유치 확대 방안'을 보고하면서 현재 제주도에 집중돼 있는 중국의 관광레저분야 투자를 늘리기 위해 투자이민제도 적용지역 확대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향후 중국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지역으로는 중국과 가까운 새만금이 꼽히고 있다. 부동산 투자이민제는 법무부 장관이 고시한 지역에 일정 금액 이상을 투자한 외국인에 대해 국내 거주자격을 부여하고, 투자상태를 유지한 채 5년 이상 체류할 경우 영주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다. 투자이민제는 지난 2010년 첫 도입된 이후 현재 제주와 여수평창 알펜시아인천 영종지구 등 4곳에 적용되고 있다. 전북도는 새만금이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도약하려면 정부 차원의 인센티브와 각종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며 부동산 투자이민제 및 무비자 제도 도입을 정부에 적극 건의해왔다. 전북발전연구원도 새만금 중화자본 유치를 위한 방안으로 투자이민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그러나 새만금 지역은 아직 기반시설 등 투자여건이 조성되지 않은데다 최근 관광개발을 위한 투자유치 계획이 잇따라 무산됨에 따라 투자이민제 도입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새만금 지역은 아직 부지 조성이 안돼 당장은 어렵겠지만 여건이 좀 더 충족되면 투자이민제 적용지역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기획
  • 김종표
  • 2012.08.20 23:02

17. 성(性)주류화, 전북의 현황과 과제

성(性)주류화(gender-mainstreaming)란 말을 처음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주류화의 '주류'가 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인지 묻는다. 주류의 사전적인 의미는 '학문, 사상, 문예 활동에서 중심이 되는 흐름이나 경향'을 말한다. 이처럼 성주류화는 그동안 중심이 되지 못해왔던 성평등의 관점을 모든 정책과정에 적용함으로써 정치적이고 공공적인 다양한 분야의 개개인의 삶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일선 자치단체 내년부터 본격 시행최근 정부주도로 성주류화(gender-mainstreaming) 정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 성주류화 정책은 1995년 베이징여성대회에서 여성정책의 새로운 전략적 패러다임으로 채택되었고, 현재 EU의 주요 성평등정책의 기조로 세계각국에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한국의 경우 2000년대 초, 여성단체들이 성주류화의 주요 정책도구인 성인지 예산제도 도입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해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를 시작으로 성주류화를 위한 도구 중 하나인 성별영향평가의 법적근거는 2002년 여성발전기본법 개정으로 마련되었고, 2004년 시범적용을 거쳐 지난해 성별영향분석평가법이 제정되었다.성인지예산의 경우 2006년 국가재정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지난해 지방재정법의 재정을 계기로 일선 자치단체는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나선다. 이처럼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성주류화 정책은 법적근거의 강화라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실제 추진을 위한 체계나 인프라 구축 등 여러가지 난맥이 나타나고 있다. 실제 추진계획 없이 성인지 예결산서를 정부와 국회내부에서만 공유하는 부차적인 작성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성별영향평가를 통한 정책개선의 성과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더욱이 거버넌스모델(정부-전문가-NGO의 삼각연대)의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성주류화가 정부주도형으로 진행되면서 당초의 취지를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전라북도 성주류화 정책 '빨간불'한국의 여성정책은 국가적 차원으로 계획되어 지방자치단체의 여성정책에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중앙정부의 지원과 평가에 의존해오면서 자체적으로 정책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그대로 수용하여 집행할수록 많은 점수를 받게 되면서 전북의 여성정책 연구 역량은 갈수록 축소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를 반영한 듯 애석하게도 민선 5기 도정비전에는 성평등 의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은 10대 핵심공약에서 일자리센터를 통한 '기업맞춤형 여성 직업훈련 실시'라는 한 줄에 모두 담겨있을 뿐이다. 게다가 여성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복지여성보건국의 복지시책 전략과 중점과제에서 '2008년까지는 양성평등 사회실현'이 전략으로 제시되었으나, 2009년 이후에는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로 변경되었고, 2011년에는 '일자리창출, 저 출산고령화 대비, 취약계층 보호'로 바꿔 성주류화의 방향마저 퇴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이같은 전략의 변화는 전북도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북도는 여성정책에서 다양한 수상실적을 자랑해왔지만 성주류화 정책 실현을 위해 한걸음씩 나가는 중앙정부와 타 자치단체와는 다르게 뒷걸음질 치고 있는 듯하다.△성주류화 정착을 위한 노력 성 주류화 제도의 정착을 위한 선행연구들에 따르면 성주류화 제도들이 갖고 있는 긍정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의지와 관료사회의 관심이 부재할 경우 기존의 여성정책 마저 심각하게 위험을 받게 된다는 지적이 있다. 이를 반영하듯 박원순 서울시장은 임기시작부터 서울시정의 성주류화 전략 도입을 표명하고, 서울시민NGO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성평등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특히 서울시정에 성주류화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서울시, 성 주류화 으뜸도시로'를 주제로 직접 시장이 고위직 공무원들과 함께 참여해 청책(廳策)워크숍을 열었다.이처럼 성주류화가 지역실정에 맞게 착근하기 위해서는 집행책임자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지역의 성주류화 현황과 여건(법적기반행정추진 및 환류점검 체계성별분리통계인적자원예산)을 점검해 지역에 부합한 전략개발과 추진이 중요하다.더구나 각종 연구들에서도 성주류화의 목표 달성여부를 좌우하는 요인이 NGO의 참여활성화와 거버넌스 구축임을 강조하듯, 지역여성단체들과 활성화를 위한 방안을 함께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또한 무엇보다도 도민과 여성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성주류화 정책에 대해 쉽고 재미있는 홍보가 필요하며, 다양한 참여공간과 프로그램이 기획되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아무리 잘 만든 정책이라 할지라도 전문가와 공무원들 중심으로 탁상에서만 논의되는 것은 무용지물이다. 많은 지역민이 알고, 느끼고, 일상생활에서 변화를 체감해야 좋은 정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노현정 NGO시민(전북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이번 주부터 노현정 전북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이 제4기 NGO단으로 참여합니다. 노현정 사무처장은 앞으로 유영미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회장을 대신해 NGO로 활동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생동감 있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노현정 사무처장은 전북대와 성공회대 NGO시민사회복지대학원(NGO학)을 졸업했으며, 전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및 성인지예산 전국 네트워크 운영위원을 거쳤습니다. 또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의 성인지예산과정(32기)과 2012성별영향평가 컨설턴트 역량강화교육을 수료했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2.08.20 23:02

"여성·시민단체와 협력 젠더거버넌스 구축해야"

전북발전연구원은 지난 5월 21일 여성가족부로부터 전북성별영향분석평가센터(이하 센터)를 지정받았다. 센터는 전북도 및 시군, 교육청의 성별영향분석평가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한 컨설팅을 비롯해 공무원지방의원 등 다양한 정책주체들의 성인지의식 함양,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 등을 진행하는 기관이다. 센터는 또 전북도의 정책이 양성평등하게 개발집행될 수 있도록 지원 및 자문역할도 맡는다. 센터 임지원 위촉연구원으로부터 전북지역 성주류화 정책의 가능성을 가늠해본다.-현재 전북의 성별영향평가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지난 2004년부터 노인자원봉사에 대한 성별영향평가를 시범적으로 실시했고, 매년 평가과제 대상을 확대추진하고 있다. 2006년 전북도, 김제, 임실이 세가지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0년엔 전북도와 각 시군에서 121개 정책에 대한 성별영향평가를 실시했다. 지난해는 무려 183개로 과제수가 증가했다. 이처럼 양적인 확대와 더불어 분석 내용에 있어서도 발전을 보여 전북도는 2010년 여성가족부로부터 성별영향평가 우수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뒤늦게나마 도교육청이 올해부터 주요 정책 수립때 성별영향분석평가를 시행하고 있는 만큼 향후 성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성(性) 주류화 정책이 제대로 자리 잡기 위해선 현장의 목소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 각 지역별 담당 공무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지.△현재 '찾아가는 성별영향평가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교육받는 대상을 달리해 체계적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사업담당자들에게는 전문적인 업무 관련 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해 성별영향평가 필요성부터 작성요령, 실습 등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 및 자문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기관장이나 고위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성인지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교육을 별도로 실시한다.-전북도의 성주류화를 위한 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과제는.△전북지역에서 성주류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북의 정책네트워크를 통해 젠더거버넌스가 구축돼야 한다. 정부주도형으로 진행되어온 정책이 현실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시민들과 가까이 있는 여성시민단체들과 더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또한 의원, 전문가, 언론 등 지역주체들이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같은 젠더거버넌스가 구축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센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된다./노현정 NGO시민

  • 기획
  • 기고
  • 2012.08.20 23:02

최경철 전주기상대장 "미래 기후변화 대비 국가 차원 시나리오 작성 매진"

최근 도내를 비롯해 전국에서 폭염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이처럼 극한기후현상의 발생일수는 예년에 비해 증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돼 이에 대한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이에 전주기상대 최경철 대장을 만나 극한기후현상의 원인과 미래의 기후변화, 그리고 이에 따른 준비와 연구 등에 대해 들어봤다.- 최근 폭염특보가 20일 넘게 이어지고 일부지역에서 기상관측 이래 최고 기온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이번 폭염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 7월 20일 남원, 완주에서 금년 첫 폭염특보가 발표된 후 이달 9일까지 약 20일 동안 도내 대부분의 지역에서 낮 최고기온이 33℃ 이상 나타나는 무더위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지난 6일 전주에서 38.3℃로 1918년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높은 기온을 보였으며, 8월 기온으로는 1~5위의 극값을 모두 갈아치우는 등 역대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습니다.금년 폭염의 원인은 우리나라에 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장기간 머무르면서 제주도 남쪽해상으로 태풍이 자주 통과하면서 뜨거운 열기를 공급했기 때문입니다. 또 전 지구적으로 크게 대두되는 기후변화와 도시화에 따른 기온 상승 및 분지 형태의 지형적 원인을 들 수 있습니다. - 최근 폭염에 대해 일각에서는 '바람 길이 막혔다'와 '난개발이 불러온 문제'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도시의 고층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 전기 공조시스템의 열 배출시설 등은 도시 열섬현상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무분별한 난개발은 인근 높은 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찬 공기를 가로막거나 도심의 열 배출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해 일정 부분 기온 상승에 기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원인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지는 정밀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사안으로 판단됩니다. - 전주는 공식적으로 전주기상대 한 곳에서만 기온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실제 전주의 각 동마다 기온 차는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정확한 열섬현상을 분석을 위해 어떤 연구가 진행되고 있나요.△ 기온은 각 지역마다 미세한 차이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같은 전주시내라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상청에서는 기상관측표준화법에 의한 그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양호한 관측 장소를 선정해 오랜 기간 기온, 바람, 강수량, 적설 등을 관측하고 통계 값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주기상대는 1918년부터 주변 건물의 영향이 적고, 잔디로 조성돼 있는 장소에 관측 장비를 설치해 기온, 습도 등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향후 관측 장비를 추가 설치하는 방안에 대해서 검토할 계획입니다. 또 도시 열섬현상에 대해서는 현재 기상청 국립기상연구소에서는 초고해상도 기상진단 및 예측모델을 개발해 대도시 위주의 기상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新기후변화 시나리오(RCP 8.5)에 따르면 2050년까지 전 지구와 우리나라 평균기온이 상승하는 등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가속화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열대야, 폭염, 집중호우 등 극한기후현상의 발생일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이런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진행 중이거나 준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 국가차원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 국가표준 기후변화 시나리오가 필수적입니다. 미래의 기후변화특성을 안다면, 지역적 특성을 분석하고 기후변화의 영향과 취약성을 평가함으로서 이에 대한 적응 방안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상청에서는 국제적인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세계기후연구프로그램(WCRP)에 참여해 전 지구 및 한반도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기상청 국가표준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도내의 기후변동성을 분석해 이상기후 및 기상재해 대비를 위한 도시계획 수립 시 유관기관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는 돌발홍수 등 수문기상 수요변화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고, 수문기상서비스의 기능과 활용성을 강화 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주기상대는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과 함께 공동으로 '전북지역 기후변화 대응 도시 재설계 지원'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또 전주기상대는 '전라북도 지역기후변화센터'로서 지역 기상특성과 도시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기상요인을 조사해 기후변화를 고려한 도시계획 및 개발도 지원하고 있습니다. - 지난 2000대 중반부터 병무청지구 재개발 등 기상대 이전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됐습니다. 최근 전주시가 착공에 들어간다는 발표를 했는데요, 그간의 진행상황과 착공계획 등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전주시 남노송동에 위치한 전주기상대는 현 위치에서 100여 년 간 기상관측 및 예보업무를 수행, 기상관측자료 연속성 확보 및 도내 재해예방을 위한 방재기상업무를 해오고 있습니다. 2003년에 도시개발과 병무청지구 재개발 등으로 인한 이전 요구가 있어 혁신도시, 가련산 공원, 전주시내 대체 부지를 매입해 이전하는 등의 여러 방안을 검토한 바 있습니다. 자치단체와 협의 하에 덕진구에 위치한 가련산 공원에 신축 이전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해 진행 중에 있으며, 이달 말 경 전주기상대 신축을 위한 도시계획시설 결정이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청사이전예정부지에 대한 매입이 완료되면, 오는 10월 공사(총예산 74억)를 발주할 계획입니다. 전주기상대의 신청사는 가련산 공원 주변의 부지면적 3193㎡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내년 말 완공을 목표로 차질 없이 이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할 계획입니다. - 새만금이 개발된 뒤 각종 기후변화가 예상되고 있는데요. 전주기상대에서는 새만금 지역 개발에 따른 기후변화에 대해 어떤 준비와 연구를 하고 있는지요. △ 새만금지역 개발은 주변지역 기후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전주기상대에서는 서해안지역에 위치한 군산기상대와 연계해 2008년 1월부터 자동기상관측장비(AWS)를 새만금 전시장부근에 설치, 기상관측을 하고 있습니다. 주변 관측 자료와 비교 분석을 통해 국지 기상 및 기후특성을 파악, 기상예보에 적극 활용하는 등 미래 기후변화에 대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태풍과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번 군산지역의 집중호우의 원인과 앞으로의 집중호우, 폭설, 폭염, 가뭄 등 도내의 미래 기후변화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 최근 국지적인 집중호우의 발생 빈도가 많아지는 경향이고, 이번 8월 12~13일에는 군산 해안에서 444㎜의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한편, 불과 25㎞ 떨어진 새만금지역에서는 115㎜의 강수가 기록되어, 강수량의 지역적인 편차가 매우 크게 나타난 특징을 보였습니다. 기상청의 기후변화 新시나리오에 의하면 도내 2050년 평균기온은 15℃로 2000년대보다 2℃이상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어 기온상승으로 인한 폭염 발생빈도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연강수량도 2050년에는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여 집중호우에 따른 산사태와 침수 피해 및 겨울철 폭설피해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당장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과 홍수로 인한 피해에 대한 즉각적인 해결방안 마련은 어렵겠지만, 열섬현상 해소를 위한 노력과 홍수나 폭설에 대비한 시설 확보 등의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됩니다.

  • 기획
  • 강정원
  • 2012.08.20 23:02

106. BYC 2) 한영대 회장 삶의 궤적 - 포목점 점원서 세계 속 巨商으로

△ 소 한 마리 판돈으로 미싱 조립공장 운영1923년 전북 정주군(현재 정읍) 북면 태곡리에서 5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난 BYC 한영대 회장은 정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지긋지긋했던 가난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살던 당시 그는 정읍 시내 포목점을 하던 백부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이후 아버지로부터 소 한 마리를 유산으로 받은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 자전거포와 미싱 조립상점 등을 자영했다.당시 미싱 한 대 값은 쌀 열 가마에 해당될 만큼 비쌌고 그는 한 달에 10~15대의 미싱을 조립, 판매할 만큼 자리를 잡아갔다.그러나 일제 침략시절 일본은 징용 실시와 함께 그의 미싱 부품 공장을 무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바꿨고, 그는 징용을 피해 농촌지도원으로 귀향했다.△ 양말기 4대 횡편기 2대로 메리야스 공장 시작광복을 맞은 그에게 백부는 자신이 운영하던 가내수공업 사업을 인수할 것을 제의했다.그는 미싱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과 공장을 바꾸기로 결정, 양말기 4대와 횡편기 2대가 있던 백부의 공장을 인수, 광복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15일 '한흥메리야스'를 설립했다.이것이 바로 오늘날 BYC다. 광복 직후는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터라 당시 국내의 내의 생산량은 연간 52만매에 그칠 정도였다.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2000만명에 불과, 속옷 입는 사람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할 만하다.이후 양말기의 몸통을 넓히면 내의도 짤 수 있지 않을까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대전에 있는 수동 양말기 제작소를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양말기 통을 크게 제작해 달라 부탁했다.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그가 설계한 기계가 완성됐지만 바늘을 구할 수 없어 양말기 바늘을 하나하나 숫돌에 갈아서 끼워야 할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이렇게 해서 제작된 메리야스 내의 편직기 가동은 성공적이었고 하루 40벌의 내의 생산이 가능하게 됐다.이 내의가 바로 세계 속 BYC 메리야스 생산의 효시다.△ 6.25 발발 전주로 공장 이전 '백양' 상표출원6.25가 터지면서 내장산, 덕유산 일대에서 빨치산들이 출몰, 사업 여건이 어려워진 그는 전쟁 피해가 거의 없던 전주로 사업장을 옮겼다.그리고 개인회사 한흥 메리야스는 1955년 자본금 4000만환 규모의 한흥실업 주식회사로 바뀌게 됐다.당시 우리나라 메리야스 업체의 94%는 개인회사로 그만큼 한 회장은 시대를 앞서나갔던 것으로 보인다.이를 방증하듯 1955년 서울 창경원에서 광복 10주년 행사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서 한흥은 면내의를 출품, 대회장상을 받기도 했다.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한복을 입었고, 도시 학생과 상류층에서만 메리야스 내의를 입을 때였다.이때 한 회장은 국내 최초로 아염산소다를 이용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 순백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 백양이란 상표는 1985년 BYC로 바뀌기 이전까지 30년 동안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며 대표적 국산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세계 제일 BYC 탄생의 배경1985년 초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주)백양의 간부회의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수출상품에 외국 유명업체의 브랜드를 도입해 부착할 것인지, 백양의 독자적 브랜드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설전이었다.당시 수출파트 간부는 "얼굴없는 OEM 방식으로 수출했다가는 외국 유명메이커의 하청공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우리 상표로 떳떳하게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반면 또 다른 간부는 "누가 우리 상표를 부착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냐. 우리 상표는 외국에서 경쟁력이 없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지. 체면이 밥 먹여주냐"며 첨예하게 맞섰다.결국 이 논쟁은 이사회에 회부돼 기립투표까지 벌어지는 박빙의 대결이 벌어졌고 최후의 결정권자 한 회장은 "험난한 어려움이 예견되지만 독자 브랜드를 개발해 백양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보자"고 결론을 내렸다.이렇게 해서 태어난 상표가 바로 'BYC'다.'세계인은 BYC를 입는다'는 로고와 함께 빨간색 바탕에 흰색으로 BYC 상표를 새긴 상품이 세계 78개국에 8000만 달러의 메리야스를 수출됐고 현재도 26개국에 5600만 달러가 수출되고 있다.오랜 세월 우직하게 메리야스라는 한 우물만 파서 연간 2000여 억원의 매출과 160억원의 순이익을 올리고 있는 성공적 대표기업이 바로 주식회사 BYC.

  • 기획
  • 이강모
  • 2012.08.16 23:02

한 회장이 밝히는 경영 철학 "좋은 상품 만드는데 관심마구잡이 사업 확장 안해"

"1960년대 당시 메리야스 유통시장은 엉망이었고 가짜 매출전표를 만들 수밖에 없었죠."전북 메리야스 업계의 선구자인 한영대 회장은 1952년 전북 메리야스 공업협회 감사로 재직하며 1959년에는 대한 메리야스 공업협회 연합회 이사까지 거쳐 오늘의 자리에 서 있다.1950년대 말 호남지방에는 가내 수공업으로 메리야스, 양말 등을 손으로 짜는 집이 많았다. 특히 쌍방울, 태창 등 큰 메리야스 업체가 전북에서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한 회장은 "규모도 적고 이익도 낮다보니 내의 산업을 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타지방은 이미 다른 업종으로 대부분 변환해 있었다"며 "처음 우리가 전북에서는 최초로 사업을 시작, 쌍방울이 우리의 물건을 사다 팔았는데 사업이 잘됐고 쌍방울에서 전무로 있던 분이 나가서 태창을 설립했다"고 운을 떼었다."보통 기업의 성장사를 보면 돈이 되는 사업은 마구잡이로 영역을 확장하지만 전 다른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더라고요"라며 "품질좋은 제품을 만들겠다고 종업원들과 공장에서 한 식구처럼 뒹굴며 열심히 하다 보니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었던 것"이라며 속옷 외길 경영철학을 설명하는 한 회장.한 회장은 "당시 정부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권장, 나라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기업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우리 업종은 이윤이 박해 달러 벌기가 힘이 든게 사실인데 여기에 인건비까지 올라 경쟁력이 떨어지며 현재는 업계가 후진국으로 많이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한 회장은 이어 "우리 회사는 빚을 안 쓰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고 오히려 예금이자가 매출액의 5~6%를 차지하고 있다"며 "우리는 돈 버는 일은 성격이 안맞고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아 은행에 넣어놓고 이자를 받는 것뿐으로 그러니깐 주변에서 저보고 사업 할 줄 모른다고 핀잔을 주기도 해요"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BYC는 노사분규 없는 회사로도 유명하다."우리는 이익이 박해 다른 업종보다 대우를 잘 해줄 수가 없어 애로가 많지만 내가 직접 나서 종업원과 한 식구처럼 어울려 일하다 보니 차별이 사라진 것"이라며 "종업원들이 대우 못 받는 현실을 이해하다보니 지금까지 큰 일 없이 무사히 지내왔고 버는 수익금으로 직원 복지기금을 마련, 현재 52억원에 달하고 있다"는 게 한 회장의 설명이다.한 회장은 "젊었을 때는 여가 시간에 골프를 많이 쳤는데 지금은 나이를 먹어 힘들어 못하고 있다"며 "요즘은 가까운 산에 오르거나 여기저기 있는 공장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16 23:02

'40년 자수인생' 순창 제영옥씨 "한 땀~한 땀, 순창자수엔 情이 담겨있지요"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에 위치한 장류박물관 별관에 있는 순창자수 문화센터 전시실에는 수많은 손자수 전시작품이 눈길을 끈다.한지거울, 명함집, 보석함부터 시작해 경대, 화초장, 사물함, 가리개, 병풍까지 다양한 종류의 손자수 제품이 150여점에 이른다.이 전시실을 지나 교육장에 들어서자 진지하게 손자수를 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바로 순창읍에 사는 제영옥씨(56여). 전시실의 작품이 모두 30년전부터 그가 직접 만든 것이다.제씨는 매일 자수센터에 나와 교육생을 가르치고, 작품활동은 물론, 현대인이 애용할 수 있는 자수제품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는, 그야말로 천상 자수인이다.그는 어린시절 형제자매도 많고 가정형편마저 어려워 18살부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자수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1년동안은 순창에서 자수를 하는게 못내 불편해서 전주에서 자수를 배웠다.이후 순창자수센터로 들어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손자수를 시작했고 날 새는지 모르고 자수를 놓고 있으면 모든 근심걱정은 사라지고 오직 작품 만들기에만 열중했다. 제씨는 이런 노력 끝에 지난 1991년에는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특선을, 1992년과 그 이듬해에는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서 동상을 차지하는 영예도 안았다.그러던 중 손자수가 기계자수에 밀려 점차 쇠퇴할 즈음 제씨도 결혼하고 난 후 집안일과 육아에 밀려 자수를 못하고 10년을 지냈다. 그러나 간간이 주문제작이 있어 손자수를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10년동안 보험회사를 다니면서 그녀의 꿈은 돈을 많이 벌어서 자수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었다.그런데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났다. 별도로 본인이 만든 자수박물관은 아니지만 순창 장류박물관 별관에 순창자수 문화센터가 지난 4월 새롭게 문을 열었고 현재 50여명의 교육생이 순창자수 기능 전수를 위해 손자수를 배우고 있다.이곳에서 제씨는 수강생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자신이 40여년동안 수를 놓으며 직접 쌓은 전통자수수법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 특히 제씨는 틈틈이 제작한 작품들이 지난 6월 서울중앙박물관에도 입점해 판매와 홍보를 함께 하게 됐다. 제씨는 "순창자수가 그 명맥을 잇게 된 데는 행정안전부와 순창군의 도움이 컸다. 지원이 없었다면 순창자수는 점차 사라졌을 것이다. 나에게도 수강생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중앙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돼 순창의 자수를 알리는 계기를 마련해 준 두 기관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제씨는 또 "예전에는 병풍이나 가리개, 경대 등의 작품 위주였지만 요즘은 현대 감각에 맞는 한지거울이나 목걸이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인기가 좋아 주문제작이 많은데 앞으로 이 제품들을 주종목으로 만들어 보편화된 자수 제품을 선보일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순창자수는 조선 중기 순창군수가 상감을 알현할 때 흉배의 자수솜씨를 보고 경탄한 임금이 순창자수를 진상토록 하면서 진상품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 기획
  • 임남근
  • 2012.08.16 23:02

5. 충남 홍성군 홍동면 '협동 마을' 가보니 - 먹거리 생산 판매·돈 거래·아이 키우기…일상화된 '협동'

충남 홍성은 국내 오리농법의 발원지다. 오리농업을 시작한 이들은 '풀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이다. 풀무는 대장간에서 쇠를 녹일 때 바람을 넣는 기구다. 홍성군 홍동면 문당리와 금평리에서는 풀무처럼 협동을 통해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상촌의 실험이 이뤄졌다. 이달 3일 찾은 홍동면에는 조류독감 이후 우렁이 농법으로 전환했지만, 논 곳곳에는 오리농법의 흔적이 보였다.△ 교육으로부터의 시작풀무협동조합은 1957년 풀무농업기술학교(풀무학교)로부터 출발한다.밝맑 이찬갑(1904~1974) 선생이 개척자였다. 그는 해방 후 월남, 무교회신앙집회에서 뜻을 같이한 샛별 주옥로(1919~2001)의 고향인 홍성에서 함께 풀무학교를 운영했다. 목사직을 버리고 교육에 투신했던 주옥로는 당시 교회 부지에 폐교된 학교의 잔해를 모아 학교를 지었다. 전쟁 직후 가난하고 중학교 진학률이 40%였던 마을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학교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학용품을 구하기 위해 읍내까지 나가야 했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1960년 교직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교내 구매부를 소비조합 형태로 운영했다. 창업생(풀무학교에서 졸업생을 가리키는 말)을 중심으로 유기농업을 실천하면서 1975년부터는 농민의 생필품과 농자재 공동 구입을 위한 풀무소비자협동조합(현재 풀무생협)으로 확대됐고, 도서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풀무신협)이 교내에서 운영됐다. 풀무소협은 라면설탕소금과 같은 생필품으로 시작해 시멘트, 합판 등 농자재까지 취급했다. 나중에는 흥농종묘 홍성대리점과 계약, 씨앗도 판매했다. 1980년까지 학생도서관, 갓골어린이집, 농기계협동조합, 제빵협동조합, 풀무생협 등이 만들어지는 등 이들에게 협동은 일상이었다. 기존 조합이 자금을 빌려주고 조합원의 출자가 더해지면서 다양한 협동조합이 생겼다. 현재는 풀무농업기술학교 생태과정(전문대 과정), 환경농업교육관, 홍성여성농업인센터, 밝맑도서관, 갓골목공소 등 마을에 약 30개 기관단체가 운영되고 있다. 출자한 주민이 운영에 참여하는 경험과 전통이 쌓이면서 생활 속에서도 협동이 가능했다. 2년 전 동네 치킨집이 문을 닫게 되자 단골 주당 7명이 출자자 100여명을 끌어모았고, 주민의 재능 나눔으로 운영되면서 지금은 마을 카페로 자리잡았다. 흑자가 나면 지역단체에 기부도 한다. △ 협동하는 마을, 유기농산물 고집홍동면 금평리 김애마을을 찾은 3일 소포장센터에서는 감자 포장 작업이 이뤄졌다. 사회적기업으로 인증을 받은 이곳에서는 주문에서 배달까지 3일 내에 처리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농산물은 전량 아이쿱(icoop) 생협연대에 공급된다. 풀무소협은 1987년부터 유기농산물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풀무생협이 됐다. 교통의 발달로 이들에게 대두된 문제는 구매가 아닌 유기 농축산물의 판로였다. 1989년 여성민우회 납품으로 도시 소비자에게 유기농산물을 직거래로 공급했다. 당시 유기농쌀은 백미 10배 값을 받았다. 200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친환경 유기농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정체성을 확립했다. 2003년 풀무환경농업영농조합법인을 설립하면서 23개 작목반이 모인 쌀생산위원회, 23개 작목반이 구성한 채소 생산위원회, 7개 작목반으로 이뤄진 축산위원회를 뒀다. 이들은 농축산물마다 개별 규정으로 품질을 관리, 지역 지역순환농법을 고수했다. 2007년 7농가가 다양한 논생물과 함께 하는 유기벼를 시범재배하면서 논 안에 다양한 생명이 사는 논생물다양성 농업을 시작했다. 2010년 기준 매출액은 120억 원을 조금 넘었다. 조합원은 850여명으로 이중 야채류는 200여명, 나머지가 벼농사를 주로 지으며 축산 등 혼합농이다.풀무생협의 조합원은 가족단위의 영농체계 속에서 지역농업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유기농업을 추구했다. '정직한 생산이야말로 지역농업을 지속 가능케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축산의 사료와 깔집으로 이용하고 축산의 부산물은 미생물을 넣어 퇴비화해 다시 논과 밭의 밑거름으로 사용하는 자연순환농법을 실현했다.△ 뿌리가 튼튼하면 흔들리지 않아풀무생협도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다. 2005년 대풍년과 함께 유기농 쌀도 적체가 됐다. 생산자 관리도 어려워지면서 누적 적자가 30억 원을 넘었다. 전문가의 컨설팅을 받아 조직의 슬림화 등 변화를 꾀했다. 영농조합법인도 야채, 주곡, 축산 등 4개로 분리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풀무신협도 위축됐다. 풀무생협의 46번째 조합원이라는 이윤확 씨(58)는 "형, 아우, 친구들이 풀무기술학교를 나왔다. 초창기 때는 학교 졸업생이 생산자 조합원이 되고 단합이 잘 이뤄졌다. 유기 농산물이 일반 농산물과 가격차가 컸고 희소성도 높아 고소득도 올릴 수 있었다"면서도 "갈수록 여러 사업과 시설을 구축한 뒤 조합의 빚이 늘면서 어려워졌다. 협동조합은 만든다고 되는 게 아니다. 몇 십년 해도 어렵다"고 들려주었다.홍성풀무센터 서경화 도농교류팀장(42)은 "초기 풀무학교 창업생도 나이가 들면서 생산자의 고령화가 나타났다. 풀무신협은 누구 집에 소가 몇 마리고 이 때쯤이면 왜 돈이 필요한지 알 정도로 가족같은 분위기였지만 예전만큼 공동체적인 분위기는 적다"고 소개했다. 이어 그는 "특히 향후 외지인이 땅을 매입할 경우 유기농법의 지속성도 의문이다. 특목고로 인가받은 풀무학교에 농업에 관심이 있는 학생 외에 입시를 목적으로 입학하면서 지역 졸업생의 비율이 낮아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서 팀장은 이어 "다행히 최근 귀농귀촌 지역으로 홍동면이 각광을 받고 있다. 김애마을 30여 가구 중 8가구가 귀농자다. 일부는 땅이 없어 농사를 못 짓기도 한다"면서 "정부 정책에 기대면 외부의 위협에 조직이 크게 우왕좌왕한다. 하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뿌리가 튼튼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조합을 만들고 운영했던 경험이 풀무의 자산이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15 23:02

전북여성경제인협회 초대 회장 지낸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 "여성이 경영하는 기업에 일감·판로 적극 지원해야"

커다란 원석을 자르는 요란한 절삭기계 소리와 차바퀴에 날리는 돌가루를 비집고 익산 석재단지 내에 있는 장등석재를 찾았다. 대표적 3D업종으로 남자들도 감당하기 힘든 석재업종이기에 이런 석재회사를 경영하는 대표는 보통 여장부가 아닐 것이란 선입견이 앞섰다. 하지만 단아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반갑게 맞아 준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魯君子70)를 보는 순간, 올해로 고희(古稀)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갑작스런 암 선고와 투병생활로 교직을 떠난 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자신도 장애를 입었지만 어쩔 수 없이 석재회사를 떠맡아 전국 최대 석재업체로 키운 노 대표는 진짜 여장부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3차례나 다시 일어섰고 IMF 당시 파산위기에 몰렸던 회사를 회생시켰으며 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부 설립의 산파역을 맡았던 노군자 대표를 익산 낭산면에 있는 장등석재 사무실에서 만났다.- 올해 고희(古稀)이신데도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데요, 사람들이 직접 뵈면 놀라지 않는가요."잘 봐주셔서 그렇죠. 학교에 있을 때는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교내방송을 도맡아 했었어요. 요즘도 사무실 전화를 직접 받으면 사람들이 여직원인줄 알아요. 목소리 덕분에 어느 정도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됩니다."- 29년간 교직에 계셨는데 왜 그만두셨는지요."1990년도에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주예수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았죠.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는 학교에 복직하려고 대체교사를 썼는데 투병생활이 길어지면서 사직을 했습니다."- 남자들도 힘든 석재사업에는 어떻게 발길을 들여놓았는가요."퇴직 후 집에 있으려니 우울증이 올 것 같아서 남편 회사에 나가 이것 저것 도와주었죠. 그런데 1994년 1월 25일이예요.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버스가 와서 우리 차를 들이받았어요. 이 사고로 남편은 현장에서 숨지고 저는 얼굴이 찢겨져 뼈가 드러나고 팔과 다리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지금도 오른손을 잘 못쓰는데 그 때 입은 장애 때문입니다. 석달간 투병 끝에 퇴원했는데 당장 가정과 회사를 추스러야 하기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요. 그 때부터 회사를 맡았죠." - 갑자기 석재업을 맡으신데다 회사경영에 대한 경험도 없었는데 처음에 사업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물론 힘들었죠. 업종 자체가 거칠고 험한데다 사람들도 억세고 특히 여성에 대해선 굉장히 배타적이예요. 그래서 몸뻬 바지 20벌과 장화를 구입해서 현장을 돌며 공부했습니다. 직원들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렇지만 허드렛일을 내가 직접하고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씩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보살피면서 본인과 가족들 생일도 챙겨주고 하니까 조금씩 마음을 열더라구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식구처럼 지내게 됐습니다."- 여자로서 석재업을 감당하기에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사업수주 활동이나 거래처, 대인관계 등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암과 교통사고로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넘기고 평생 의지하고 살았던 남편까지 보내고 나니 처음에는 제가 처한 상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사람들 앞에선 웃음을 잃지 않고 밝고 명랑하게 대했죠. 그랬더니 거래처 사람들마다 '장등석재에 전화하면 너무 좋다'면서 환대해주는 거예요. 무엇보다 큰 힘은 남편이 익산석재조합이사장을 하면서 쌓았던 인간관계와 신용이 큰 도움이 되었죠. 석재조합과 발주처 거래처 등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줘서 회사가 빨리 정상 궤도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차를 권하는) 손을 보니까 (거칠고 투박한 것이) 마치 남자 손 같은데요."작업 중에 돌 부스러기가 레일위에 떨어지면 기계고장의 원인이 됩니다. 한번 수리하려면 몇 백만원씩 들어가고 해서 직원들 대신 제가 치우다 기계에 부딪치거나 돌에 맞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다보니 상처투성이죠. 저에겐 고난의 흔적들이죠."- 한 때 회사가 부도 위기에 몰리면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셨다면서요."1997년 IMF 때 남편과 매우 가깝게 지내시던 분이 석재업에 뛰어들었다가 어려워지니까 제게 어음할인을 부탁했어요. 그게 누적되다보니 수십억원대에 달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회사를 부도내고 미국으로 도피를 했어요. 고스란히 그 피해를 제가 떠안게 됐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기에 장등석재마저 회생불능상태에 빠졌죠. 그래서 죽으려고 못 먹는 술을 몇 대접 마시고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아들이 발견해서 서울 병원으로 후송해 살아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책은 없는데다 빚 독촉은 심해지고 해서 다시 유서를 쓰고 저수지로 갔으나 막상 뛰어 들려니까 세 아이들 얼굴이 아른거리는 거예요. 그래서 포기하고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북은행을 찾아갔죠. 지점장님께 하소연하고 도움을 청하니 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 분이 제 생명의 은인이죠."- 그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국 최대 석재업체로 키우셨다지요."위기는 기회라고 큰 고비를 넘기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저희 회사는 원래 경계석으로 전국에 명성을 쌓았죠. 대전엑스포에 납품하면서 유명세를 탔기에 빨리 회생할 수 있었죠. 또 품질 향상과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해서 Q마크 획득과 ISO인증을 받았고 야광경계석(바이오 솔라스톤 경계석 블라드)으로 특허등록과 실용신안 등록도 했습니다. 호황기 때는 절삭기계만 37대에 40여명의 직원들이 밤낮없이 일을 해도 수주물량을 채우기가 어려울 정도로 잘 됐습니다."- 요즘은 석재산업이 사양길인데요, 어떻게 활로를 찾습니까."석제품 발주물량 자체가 크게 줄어든데다 원석 구입난으로 원석 값은 치솟고 여기에 값싼 중국산 제품까지 밀려 와 가격 폭락으로 석재업계가 3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한 달 매출이 예전의 하루 매출도 안될 정도로 힘겨운 상황입니다. 게다가 제품을 만들수록 손해가 날 정도입니다. 납골묘석이나 조경석 등으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물량 자체가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3차례나 죽을 고비를 이겨내셨다고 들었는데."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직에 있을 때 암 투병을 했었고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가다 큰 사고를 당했으나 저만 기적처럼 살아났고요, 지난해 3월에는 뇌종양으로 서울서 대수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뇌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자꾸 기억이 없어지고 생각이 잘 안나요. 그래서 책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들이 사다 준 '안철수의 생각'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3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파산상황에서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늘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나누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은."회사 부지가 산업단지로 편입됨에 따라 현재 이 곳으로 이전하면서 회사 규모를 대폭 줄였습니다. 현재 절삭기계가 7대 있지만 2~3대정도만 가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는 계속 할 생각입니다." - 1999년 7월 창립된 여성경제인협회 전북지부의 산파역을 맡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하셨는데 어떻게 여성경제인협회를 설립하게 됐습니까."여성경제인협회는 법적단체입니다. 1999년 2월 여성기업지원에관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경제인협회가 만들어졌어요. 전북지부 설립은 중소기업청의 권유로 제가 주도하게 됐는데 당시에 상공회의소와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여성기업인 명단을 넘겨받아 전화를 넣었는데 IMF 여파로 거의 모든 업체들이 연락이 안 되더군요. 하는 수 없어 택시 한 대를 전세 내서 도내 시군을 돌며 여성기업인들 참여를 설득했어요. 그렇게해서 7월 19일 열린 창립총회에 모두 50명이 참석했습니다."- 현재 도내 여성기업인 회원수는 얼마나 됩니까."도내 여성기업인 회사는 대략 300여곳 정도 됩니다. 여성경제인협회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회원 수는 100여명 정도 됩니다."- 여성경제인협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들을 하는지요."저소득 여성가장에 대한 생계형 창업을 지원하고 여성기업의 유망제품 온라인 홍보마케팅 서비스를 지원하는 한편 제품 판로 개척 및 여성기업의 자생력 제고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또 도내 여성CEO들의 경영혁신포럼을 개최하고 여성CEO들의 전국 경영연수에도 참여하며 여성기업인의 날 행사를 개최해 모범 여성기업인과 여성기업지원 유공자, 여성기업 모범근로자를 선정, 포상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회장 재임 중인 2001년 전북여성창업보육센터도 문을 열었는데 센터에서는 어떠한 일들을 하는가요."여성 예비창업기업인이나 창업 초기 여성기업인에 대한 지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재단법인인 여성기업종합지원센터로 편입돼서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성으로서 기업경영에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정부나 자치단체 지원은 어떠한지요."여성경제인협회 출범 초기에는 지원이 미미했지만 지금은 여성기업인에 대한 보조금 지원과 은행 대출, 판매 마케팅에 대한 지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또 여성기업인들에 대한 교육과 정보제공 혜택도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성기업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 대책이 필요하다면."우선 일거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요즘 경기가 어렵다 보니까 일감이 거의 끊겼어요. 정부나 자치단체의 경기부양 효과도 미미하고. 또한 여성기업 제품의 판로확보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팔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여기에 리베이트 등 부조리 관행도 사라져야하고 행정과 업체간 유착도 없어져야 공정한 경쟁과 함께 여성기업인도 참여할 수 있겠죠."- 여성경제인협회장을 맡아 활동하시면서 느낀 보람이라면."당시에는 여성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혜택이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 황무지 같은 척박한 여건에서 사비를 들여가며 협회를 설립하고 여성기업인들이 기업하기 좋은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는 초석을 닦아 놓아 나름대로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여성기업인들이 사회 참여와 함께 국가와 지역경제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뿌듯하고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처럼 어머니의 힘으로, 또한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열정과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연말에 송년모임인가요, 여성경제인 회원들이 모두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행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던데요."여성기업인들이 회사 일 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양육 등도 챙겨야 하기에 분주한 일상에 묻혀서 살다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들도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아보자 이런 의미에서 송년모임때 한복도 입고 어느 해는 드레스도 입고 송년 행사를 가져요. 지난해에는 경기가 어려워 쉬었습니다."- 여성기업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시간을 내서 책을 많이 읽으면 좋겠습니다. 책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입니다. 또 책 속에 지혜가 있고 길이 있거든요. 특히 자기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언행과 처신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말가짐이나 몸가짐 행동가짐을 잘 해야합니다. 비즈니스 때문에 사람을 만날 때는 혼자서 만나지 말고 부득이 술자리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여럿이 함께 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엄마, 직원들로부터 존경받는 CEO가 돼야합니다. 또한 선물공세를 펴는 사람들도 경계해야합니다. 그리고 적을지라도 여유를 내서 베풀고 나누면 삶이 더 풍요롭게 됩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8.14 23:02

노군자 대표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노군자 장등석재 대표(70)를 지칭하는 표현인 듯 싶다. 단아하면서도 가녀린 외모이지만 여성기업인으로서 전국 도로 경계석재 업종 가운데 최대 기업으로 키운데다 전북 여성기업인협회 산파역을 맡아 도내 여성기업인 활동의 초석을 마련한 여장부다.하지만 노 대표가 걸어 온 삶의 궤적은 결코 장밋빛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주부로서, 초등학교 교사로서 30년 가까이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1990년 10월 갑작스런 암 선고와 함께 투병생활로 천직으로 여겼던 교직을 떠나야만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4년 1월 부부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남편을 잃었고 중상을 당한 자신도 평생 장애를 안고서 슬퍼할 겨를도 없이 남편이 운영하던 석재업체를 떠맡아 회사를 추스려야만 했다. 회사가 안정될 무렵인 1997년 IMF 한파가 몰아친데다 철석같이 믿었던 지인으로보터 수십 억원에 달하는 사기피해를 당하면서 회사는 회생불능상태로 빠졌다. 빚 독촉에 시달리자 결국 유서를 쓰고 2차례나 극단적인 결심을 했지만 자녀들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금 '어머니의 힘'으로 일어섰다. 수차례 읍소와 설득을 통해 은행의 배려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품질 고급화와 안정적인 판로 확보에 주력했다. 석재품에 대한 Q마크와 ISO 인증을 획득하는 한편 야광경계석으로 특허와 신용신안 등록도 완료하고 관급 납품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하면서 장등석재를 전국 최대 석재기업으로 키웠다. 지난해 3월 뇌종양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해 현업에 복귀했다. 국내 석재산업 전반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지금은 회사 규모를 대폭 줄이고 내실경영을 도모하고 있다.1943년 익산 태생으로 이리여중과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군산 금광초등학교에서 교직에 첫 발을 대디뎠다. 이리초등학교와 함열초등학교 황등초등학교 등지에서 29년간 교직에 몸담았다가 1990년 퇴직, 1994년 장등석재 대표로 취임했다. 1999년 7월 여성기업인협회 전북지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명예회장을 거쳐 지금은 협회 고문으로 활동중이다. 교사시절부터 어려운 학생들을 남몰래 도와 준 공적이 알려져 전주지방검사장 표창을 받았고 기업경영과 여성기업인협회에 기여한 공로로 산업자원부장관과 건설부장관 표창도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정직과 성실을 가훈과 사훈(社訓)으로 삼아 자녀와 직원들에게 직접 본을 보이며 특히 언행을 중시해 몸가짐 마음가짐 행동가짐을 항상 일깨우고 있다. 장남(41세)은 대전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큰딸(45세) 부부는 익산에서 재활의학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8.14 23:02

16. 전주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 "제방 폭 확대·보 재가설, 생태·경관 해칠 우려"

2010년 7월 환경부로부터 선정돼 현재 실시설계 중인 전주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이 전주시와 전주생태하천협의회의 전문가 및 환경단체와의 이견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17일 열린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 보고회에서는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의 핵심인 반딧불이 깃대종 복원사업과 보 철거 등 수질 및 생태복원사업을 두고 이견을 보였다.△멸종위기종 서식 악영향 우려삼천생태하천복원사업은 전주시 평화동 원당교에서 전주천 합류부까지 9.8㎞ 구간에서 실시되는 사업으로, 환경부로부터 280억여원의 예산을 받아 실시할 계획이다. 생태하천복원사업은 그동안 하천직강화와 주차장, 보 등 인공구조물로 인해 훼손된 수생태계와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환경부가 2015년까지 추진하는 사업이다.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의 핵심내용은 삼천하류 팔복동에 위치한 상습침수지역의 공장지대를 매입해 수달서식처로 생태계를 복원하고, 삼천 상류를 반딧불이 서식에 알맞은 환경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하며, 보를 여울형 낙차보로 개량하고 콘크리트 호안블럭을 자연석으로 교체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핵심사업에 대해 환경단체와 환경전문가들이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삼천상류의 반딧불이 서식지의 경우 2011년 전주시 환경과의 조사결과 약 500여개체의 반딧불이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을 맡은 용역사는 반딧불이 서식처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 없이 인위적인 환경조성사업에만 집중해 오히려 반딧불이 서식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전주시 삼천동 삼천교에서 원당교까지 약 4㎞ 구간의 제방 폭을 현재의 너비 3m에서 5m 너비로 확대하는 보축사업을 실시한다는 계획인데, 이는 오히려 반딧불이 뿐만이 아니라 수달과 흰목물떼새 등 멸종위기종의 서식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전북대 지구환경공학과 오창환 교수는 "지금 삼천상류는 자연형하천 구간으로 건강한 하천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반딧불이를 살리겠다는 사업이 오히려 반딧불이를 죽이고 하천생태계를 훼손해서 시민들에게 욕만 먹는 사업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하고 있다. △"이수보취수보 재가설은 예산낭비"또한 수질개선과 수생태계 복원을 위한 보 개선사업의 경우 삼천동 신일강변아파트 앞의 이수보와 상류의 취수보, 강녕보, 중작보 등 4개의 보를 여울형 낙차보로 개선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환경단체에서는 이수보와 취수보의 경우 이미 용도폐기돼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철거해야한다고 주장하며, 재가설하겠다는 계획은 예산을 낭비하는 불필요한 사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이수보의 경우 서부신시가지 조성사업으로 이미 5~6년전부터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아 흉물로 방치되고 경관상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수보 상류 좌안의 경우 상습침수구역으로 장마철마다 교통이 통제되는 지역인데, 이는 이수보가 하상의 높이를 상승시켜 홍수피해의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질과 경관, 홍수피해 등 악영향을 끼치며 용도폐기된 보를 몇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재가설하겠다는 계획은 예산낭비이자 수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업이라는 지적이다.이수보 재가설에 대해 전주시는 "높이 2.5m 정도의 보를 철거할 경우 하상에 변화가 생겨 하천 상류가 침식되고 상류의 하천시설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농어촌공사가 침식을 우려해 철거를 반대하기 때문에 철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그러나 현장을 확인한 결과 보의 상하류간 하상의 차이는 불과 1~2m 정도였으며, 이미 하천하류에 모래와 자갈이 퇴적돼 있어 보를 철거한다 해도 하상높이에 큰 변화를 가져 오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설사 보철거로 인해 안정화 단계까지 상류에 일부 하상의 침식이 발생한다 할지라도 안전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1960년대에 이수보를 축조한 한국농어촌공사 전주완주지사 담당자도 "하상의 침식 등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 철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전달했지만, 보의 관리에 대해서는 이미 전주시에 일임했기 때문에 전주시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말한다. '이미 손을 놓은 한국농어촌공사가 반대해서 보를 완전히 철거할 수 없다'는 전주시의 변명이 궁색해 보이는 대목이다. 전주천의 경우 삼천에 비해 하상의 경사가 심하고 유속이 빠름에도 2007년 높이 3m의 덕진보를 철거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큰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고 있으며, 일부 저수호안이 유실됐지만 관리가능한 상태로 안정화단계를 거치고 있다. 이는 삼천의 경우 전주천에 비해 하상의 경사도가 완만하고 유속이 느려 전주천보다 피해가 더 적을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하다.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의 주요 계획에 대해 전주시가 환경단체의 반대에 부딪치고 있지만 삼천하류의 상습침수지역 생태복원사업, 콘크리트 호안블럭의 자연석으로의 교체, 불필요한 호안블럭의 철거, 제방산책로의 가로수 식재 등은 환경단체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올해 연말까지 실시설계를 마무리하고, 2013년부터 본격사업을 실시하겠다는 삼천 생태하천복원사업이 충분한 의견수렴을 통해 전주천과 더불어 모범적인 생태하천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사업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승우 NGO시민기자(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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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3 23:02

"전주 덕진보 철거 긍정적 효과 컸다"

전주천 자연형하천조성사업의 주역이자, 지난 2007년 덕진보 철거를 위해 활동했던 신진철 전주생태하천협의회 전 사무국장은 "보의 철거로 부정적인 결과도 일부 있었지만 긍정적인 효과가 훨씬 컸다"고 강조했다.현재 수원에서 한국강살리기네트워크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한국 강의날 대회'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신진철 처장은 "2007년 덕진보를 철거할 때도 행정에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팽팽했었다"면서 "높이가 3m나 되는 보를 철거할 경우 하상이 침식돼 하천의 시설물이 유실되고, 상류 교각의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으니 완전히 철거하지는 말고 고무보를 신설하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신 처장은 그러면서도 "수질개선에 대한 대안이 없고, 보를 철거해야 한다는 관련 담당공무원과 실무책임자의 입장이 확고해 철거하게 되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신 처장은 "보를 철거하기 전 나름의 대비책을 세우고 실행한 결과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면서 "일부 호안이 홍수때 유실되는 등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과도기적 현상으로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수호안을 넓히고 경사를 완만하게 하는 등 보완책을 시행하면 해결할 수 있다"면서 "오히려 철거이후에 수질이 개선되고 잉어의 회유 등 생태계가 크게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삼천의 이수보도 철거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삼천을 이용하고 있는 주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합니다. 무엇보다 행정의 자세가 중요합니다"그는 "덕진보 철거에 대한 전주시의 용단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면서 "삼천의 이수보에 대해서도 행정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신처장은 마지막으로 "사업의 추진을 위해서는 환경단체의 신중한 접근과 행정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한승우 NGO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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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13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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