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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전북도당 정운천 위원장 "恨의 정치 벗어나 전북 살리는 정치문화 만들어야"

지난달 30일 임명된 새누리당 전북도당 신임 정운천 위원장이 취임이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평소 그의 지론인'역발상'행보를 통해 다양한 시도를 꾀하고 있다. 취임식도 '몇몇 사람을 위한 행사'라며 과감히 취소하고, 11개 당협위원회를 돌며 당원들과의 워크샵으로 대체했다. 특히 농업인 시절 전남 해남의 비닐하우스에서'안되는 농업'을 이끌며 역발상으로 성공신화를 썼던 사례를 소개하면서 "실종된 지방정치를 살아있는 지방정치로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말이 아닌 실천과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그는 정치적으로 전북이 광주전남의 변방에 머무르는 것을 지적하며 전북의 홀로서기를 호소했다. 그는 "이제는 전북에서도 양당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동안의 한(恨)의 정치에서 벗어나 전북을 살리는 정치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 10일 새누리당 전북도당 위원장실에서 만나 도당 운영 구상을 들어봤다.- 취임 이후 열동적인 활동을 펼치고 계신데, 향후 새누리당 전북도당 운영 계획은.△ 존재감이 없는 당무 중심의 소극적 도당운영에서 벗어나 당원 중심으로 기본적인 틀을 변화시킬 계획입니다. 그것이 현 새누리당 전북도당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도당 문턱도 낮추고 민원 신문고를 마련해 언제나 도민과 함께 할 수 있는 도당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인물 영입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당협조직과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전라북도에서 인정받는 인물을 발굴할 계획입니다. 도민들이 공감하고 인정하는 당직자를 만들어 낸다면 그 것이 표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사숙고해 인재영입 및 당 조직을 정비해 나갈 생각입니다.- 이번 정운천 위원장 체제는 대선을 겨냥한 체제인데, 이번 대선에서의 목표는.△ 사실 5년전엔 9%대 지지였습니다. 그리고 2년전엔 도지사선거에서 18.2%를 받았고, 411총선에선 36%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독주만으로는 안된다. 쌍발통으로 가야한다. 양당이 함께가는 쌍발통의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많이 알고 있고, 또 그 결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7대3의 황금분할을 만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민주당 70%주고 새누리당 30% 줘야 우리 전북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고, 전북의 미래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동안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이 낮은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악순환이었죠. 사실 우리가 시험을 보면 '수우미양가' 중에 '미'만 받아도 열심히 공부할텐데, 현실은 '양가'도 주질 않습니다. 7,8점 주고 열심히 하라고하면 기운이 빠지죠. 그래서 '수우미양가' 중에서 민주당은 '수'주고 새누리당은 '미'를 주면 정말 열심히 해서 우리도 '우'도 되고 '수'도 되겠습니다. 에너지 동력을'표'로 주시면 악순환이 선순환이 됩니다. 이번에 '선순환의 새로운 정치문화를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할 작정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재대 반독재' 구도의 투표 관성이 이어진 것도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도민의 표심을 얻기 위해선 새누리당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에대한 생각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희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당무중심에서 당원중심의 새누리당으로의 구성을 그 출발점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북도의 국책사업, 예산 등을 챙기겠습니다. 집권여당이 새누리당이기 때문에 전북도의 국책사업, 예산 등은 새누리당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쌍발통으로 가야합니다.- 전북의 유권자가 적고 지지율이 낮아 중앙당이 전북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포기'라기 보다는 많이 약해졌죠. 사실 중앙에서 지금까지 홀대받았다고 아파하고 있고,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광주전남의 변방이 되었다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전남하고 비교해 13%밖에 차이가 안나는데, 이것을 해결하려면 광주전남 보다 두배정도의 지지율을 주면 전북이 홀로서기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중앙당에선 광주전남을 보고 그 다음에 전북을 봅니다. 만약 두배의 지지를 받으면 전북을 먼저 보고 전남으로 갈 수도 있죠. 지혜롭게 전북 홀로서기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전북도당 위원장을 맡으면서 지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지역발전특위의 구성입니다. 제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내용인데요, 새누리당엔 전북지역 국회의원이 없기 때문에 각 상임위의 현직 국회의원 10명 정도로 지역화합특위를 만들어 전북을 위해 일 할 수 있는 특위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제가 공동위원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민들이 볼 때도 중앙과의 소통, 중앙과의 연결을 통해 전북도 예산, 특히 중요한 새만금특별법을 만드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도당위원장이 되는 조건으로 그걸 가장 중점적으로 주장하고 내려왔습니다.정부의 현직 관료를 했기 때문에 중앙에 있는 장관, 차관들과의 공감대도 있고 소통을 통해서 예산확보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약팀도 구성해서 전북의 최대 현안들이 공약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입니다.- 전북출신 장차관으로 중앙원로회의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어떤 구상입니까.△ 이는 전북의 자산을 되찾자는 의미입니다. 실제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이고, 전라감영이 있던 전통도시였습니다. 불과 50년전만해도 5대도시였지만, 최근들어 그 정통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지역출신 장차관 등의 원로를 통해 되살리자는 것입니다. 중앙원로회의를 통해 지방과 중앙의 통로를 마련하는 한편 전북의 전통과 역사를 재정립해 나갈 계획입니다. 현재 역대 전북출신 장차관들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향후 정치적 진로는 어떻게 구상하고 계십니까.△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도민들께 유례없는 18%의 지지율을 얻어 정치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신념은 지역장벽을 깨는 것이 되었습니다. 정치개혁, 특히 가장 중요한 지역장벽을 깨는데 '12년 가지고 되겠느냐, 한 10년은 봐야하지 않겠느냐'라는 의지를 제 스스로 세뇌시키고 있고요. 지역장벽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전북의 미래,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해남 땅에 내려가 농업을 살리겠다고 생활한 25년, 그러한 정신과 신념을 갖고 나아간다면 지역장벽의 높은 벽도 못 해낼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지역구도를 깨기 위해 지방선거 보다는 총선에 나서는게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 끝으로 도민들께 하시고 싶은 말씀은.△ 이제 30년의 지역장벽을 극복하고 양당체제, 민주주의가 꽃피는 전라북도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불신의 시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시대가 국민들의 불신을 야기하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의 약속, 신뢰의 브랜드 가치와 저의 지역장벽을 깬다는 신념이 합쳐진다면 도민들에게 꽤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동안 우리는 한(恨)의 정치를 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의 정치에서 벗어나 전북을 살리는 정치문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함께가는 쌍발통의 새로운 시대를 열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 기획
  • 김준호
  • 2012.08.13 23:02

임실군 관촌면 운서정 - 자연을 벗삼은 옛 선비들의 '풍류 공간'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임실군 관촌면 사선대를 방문하면 병풍처럼 둘러친 산봉우리에 날아갈 듯한 와가(瓦家) 한채가 눈길을 끈다.풍류를 아는 이는 발품을 들여 이곳을 올라가지만, 게으른 이는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절로 감탄을 자아내는 모양새다. 당초 운서정이 위치한 산하(山下)는 멀리 경남 하동까지 뱃길을 잇는 오원강이 흐르고 있었으나, 1920년대 일제가 운암댐을 하류에 축조하면서 물길이 끊겼다.김제의 만경평야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정읍의 칠보발전소를 통해 전기를 생산했던 일제는 오랜 전설을 간직했던 자연환경도 바꿔논 것이다.운서정을 껴안은 이곳 사선대(四仙臺)의 전설은 아득한 옛날에 이곳 오원강가에서 4명의 선남선녀가 춤을 추고 놀았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또 조선시대 전주관찰사를 지낸 이도(李道)라는 관리가 사선대의 풍광에 반해 기생을 동반, 풍류를 즐겼다는 전설도 담고있다.지난 90년 초 국민관광지로 본격 개발되기 이전에는 전주와의 거리가 가깝고 산수가 어우러진 탓에 시민들의 쉼터로 인기를 끌던 곳이었다.수량이 풍부해 어반수반(漁半水半)으로 알려진 사선대 오원강에서는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천렵지로도 유명했다.덩달아 산마루에 걸친 운서정도 여름철이면 이 일대 유명인사와 토호세력의 만남의 장으로 이용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의 운서정은 당초 구한말 임실의 부호인 김해김씨 가문의 김승희가 부친 김양근의 유덕을 추모키 위해 지었다.1928년 당시 6년간에 걸쳐 쌀 300석을 들여 지은 이곳은 정면의 길이가 5칸(1칸은 약 210㎝)에 이르고 측면은 4칸 규모로 아담하게 건축됐다.운서정이란 편액은 당시 김제 사람인 심농 조기석(1876~1957)이 쓴 글씨로서 그의 자취는 전주 덕진공원의 취향정과 청학루 등지에 남아있다.또 주변의 풍경이 수려한 탓에 운서정 아래에는 동재와 서재를 지어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고 숙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정자의 특징이다.반면 이곳은 1905년 한일합방후 이 지역의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세상을 한탄한 곳으로도 알려져 망국의 한이 서렸다는 말도 전해진다.이후에 운서정은 단순한 쉼터로 활용됐으나 지난 1990년 6월 지방문화재 제 135호로 지정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됐다.특히 이곳은 아득한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이뤘던 곳으로, 양국이 영토를 늘리기 위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는 학설도 제기됐다.이는 10여년전 운서정 인근에서 성미산성의 흔적이 다양하게 발굴됨에 따라 임실군이 복원사업을 추진, 새로운 볼거리로 제공될 전망이다.

  • 기획
  • 박정우
  • 2012.08.09 23:02

105. BYC - 1) 한흥산업에서 백양, 그리고 BYC까지

(주)BYC(회장 한영대)는 지난 1979년 12월16일 전주 팔복동 산업단지에 생산라인 전체를 이전, 전주를 발판으로 속옷시장 세계 점유에 나선 도내 대표 향토기업이다.전주공장의 모태인 BYC는 1946년 창업 이래 66년을 맞고 있으며 속옷 만들기 외에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BYC는 1946년 한흥산업(주)으로 출발, 1960년에 한흥물산(주)으로 상호를 바꿨다.이후 1979년 다시 (주)백양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 2000년 최종 BYC로 사명을 바꾼뒤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품질제일주의를 원칙으로 한 우물만 파다보니 유보율(기업의 설비확장을 위한 사내유보 정도와 재무구조의 안정성) 3800%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 내의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창립 50년이 넘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은 모두 23개사였다. 그중 은행이 5개, 일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10개였고, 한국인이 만든 회사는 8개에 불과했던 점을 비춰볼 때 BYC는 기업 생존수치만으로도 격동의 역사 소용돌이를 헤쳐온 기업으로 손꼽힌다.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온 BYC는 '백양 메리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백양은 한때 우리나라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한 BYC는 우리나라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BYC는 1946년 한영대 회장이 창업한 이래 57년간 불모지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 내의 산업을 발전시켜왔으며, 오직 의류생산에만 전념함으로써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기업이다.내수에서는 내의업계의 선두주자로서 내의업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일찍이 해외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BYC로 세계 7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BYC 창업직후인 1950년대는 6,25 전쟁 발발과 함께 생활용품은 물론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한 회장은 창업당시 보유하고 있던 양말기의 몸통을 키우면 속옷도 짤 수 있겠다고 궁리한 끝에 5개월의 제작기간을 거쳐 기계를 완성했다.이것이 바로 국산1호기 메리야스 편직기로 일일 40벌 정도의 속옷 만들기를 성공했다.우수한 품질과 정직한 기업 이미지로 국내외 속옷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BYC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 일이 '애국의 길'이라는 한 회장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BYC는 1955년 창경원에서 열린 우리나라 최초 산업박람회에 면내의를 출품해 대회장상을 수상함으로서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이후 BYC는 국내 최초로 아염산 소다에 의한 최신 표백기술을 개발했고, 순백색의 이미지가 강한 백양(白羊)이라는 상표를 출원 등록하여 국산 메리야스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계기를 만들었다.백양이라는 상표는 우수한 품질을 장점으로 오랫동안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 국산 브랜드 가운데 하나였다. 1963년 일본의 미쓰비시는 우리나라 메리야스시장에서 은밀히 샘플을 수거 비교 분석한 결과 한흥(현재 BYC)의 제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판단, 일본으로의 수출 의사를 타진해왔지만 한 회장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한 회장은 아직 품질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수출하였을 경우 나라망신 시킬 것을 우려했다는 것.그러나 이러한 한 회장의 면모에 오히려 신뢰감을 가진 미쓰비시는 이듬해 자사의 기술자가 직접 한흥의 제조과정과 완제품을 면밀히 검사한 후 수출계약을 하자고 제의, 그 결과 원료, 편직, 표백, 염색, 봉제, 가공의 전 공정이 우수하고 일본시장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 결과를 들은 한 회장은 대단히 만족하고 그 동안 품질관리에 들인 노력에 대한 보람도 느꼈다. 즉시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매년 수출량을 늘려갈 수 있었다. 처음 1만5000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70년에는 100만 달러 1973년 700만 달러를 달성하고 1976년에는 무역의 날에는 1000만 달러, 수출의 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11년 후인 1987년에는 7300만 달러를 수출해 수출탑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특히 일본수출은 1971년부터 매년 늘어 1975년 5000만달러를 돌파했고 당시의 일본 바이어는 40년 가까운 지금까지 BYC와 거래하고 있다. 그는 아예 일본에 'BYC自販' 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100% BYC 제품만을 수입해다 팔고 있다.BYC는 2000년 12월에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앙일보가 공동 제정한 제1회 새천년 새기업상 부가가치 창출부문 수상자로 뽑힌 것을 비롯해 능률협회가 주는 최우량기업상, 2003년한국기업이미지상, 한국섬유대상, 노사협의가 잘되고 있는 기업에 주는 보람의 일터상 등을 받은바 있다. BYC는 현재 가족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종합의류 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세계 70여개 국에 수출,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BYC는 신세대 감각파들을 위한 고품격 패션내의 스콜피오, 신세대 여성을 위한 화운데이션 란제리 르송, 브라, 슬립, 거들, 나이트웨어 등 다양하고 세련된 내의를 생산하고 있다.또 촉감이 시원해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 있는 여름용 제품인 모시메리, 따뜻한 공기층을 유지시켜주는 특수 삼중직으로 가볍고 추운겨울에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겨울내의 에어메리, 땀냄새를 없애주는 내의 데오니아, 흡수속건내의 에어로쉬도 출시, 판매중이다.잠바, 스웨터, 가디간, 바지 등 편안한 캐쥬얼 웨어인 BYC외의 및 양말, 타올, 지갑, 벨트 등 BYC양품 등도 있다.내의, 외의류 등 온가족이 필요한 모든 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BYC는 21세기 세계 최고의 의류종합회사로의 도약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 기획
  • 이강모
  • 2012.08.09 23:02

4. 협동조합 운동 성공하려면 - 지도자 헌신·지속적 교육·조합원간 신뢰 필수

협동조합을 하는 이들은 협동조합을 운동이라고 표현한다. 이전부터 지역에서는 민간 중심으로 기존 특별법에 근거한 신협(신용협동조합), 생협(생활협동조합) 등이 있었다. 신협은 종교를 중심으로 한 자생적인 협동조합 운동으로 시작했다. 외환위기 전까지 협동조합 운동의 대표격이었지만 외환위기를 겪은 뒤에는 경영상 문제 등으로 인해 협동조합의 정신이 다소 희석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0년대에는 농산물 소비자와 생산자가 주축이 된 생협이 협동조합의 중심에 섰다. 특히 먹을거리 파동이 일어날 때마다 생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그동안 도내에서 전개됐던 협동조합 운동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의 필요충분 조건을 살펴봤다.△신뢰할 만한 정신적 지도자는 필수협동조합이 설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가 필수다. 스페인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돈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 아리에타 신부가, 캐나다 안티고니쉬 지역에는 프랜시스 세이비어 대학의 코디 교수와 톰긴스 교수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신협운동의 어머니라 불리우는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가, 신협 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장대익 신부가 대표적이다.도내 협동조합 운동의 시초로는 임실치즈를 만든 지정환 신부(81)가 꼽힌다. 도내 농민을 위해 반세기 넘게 헌신의 삶을 살면서 신뢰할 수 있는 정신적 지도자의 모습을 구현했다. 지난 1959년 12월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한국에 온 뒤 부안에서 농민과 함께 간척사업(99만㎡)을 벌이기도 했다. 1964년 임실성당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가난하던 농가의 모습을 보고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산양을 길렀고 벨기에에 가서 치즈 제조법을 배워왔다. 3년 동안 실패만 거듭하다 천신만고 끝에 196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치즈공장을 세웠고 이것이 임실치즈의 모태다. 그는 2000년대'무지개가족'과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고 있다. △지속적 교육도 협동조합 유지 조건외환위기 전까지 민간 주도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운동은 신협이었다. 신협은 초기 같은 성당을 다니는 신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도내에는 최초 신협으로 지난 1966년 1월 당시 이리 창인동 성당에서 성심신협이 출발했다. 이 때에는 신협을 설립하려는 성당에서 저녁마다 교육이 이뤄졌다. 협동조합 정신에 대한 지도자조합원 교육과 강습, 토론회가 매주 이어졌다. 1960년대 신협의 강습회에는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개신교, 불교 신자도 참여했다. 자조, 자립, 공동체 정신 등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신협의 조직이 확대됐다. 더불어 지역사회 개발사업으로 공동 구매판매사업 등도 이뤄져 조합원의 이익도 도모했다. 군산대건신협의 경우 일반 점포보다 적은 이윤으로 내의류 가게를, 이리신협은 마트를 운영하기도 했다. 장수 무궁화신협은 현재도 사료사업을 지속, 조합원을 대상으로 사료를 보다 저렴하게 공급한다. 하지만 신협은 외환위기 때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뒤 초기 협동조합 정신이 퇴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동체 의식과 신뢰로 지속 가능도내 자생 생협인 전주 한울생협은 지난 1991년 도농직거래 단체인 한울회에서 시작했다.1999년 전주 서신동에 매장을 열었고 2001년 생협 법인체로 자리잡았다. 현재 조합원은 약 1800명이다.초창기 한울회는 부안 변산의 유기농 생산자 8가구의 판로확대와 도시 소비자 50여명이 만나는 직거래 운동체였다. 소비자는 나눔을 실현한다는 목표 아래 각 지역마다 운영위원을 정해 구매회계 등을 분담했다. 농산물을 배달할 때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차를 타고 각 구역을 순회하며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공동 나눔(배달)을 통해 조합원간 가족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하지만 양 측의 신뢰가 무너지면서 해체 위기도 겪었다. 시작 첫 해 매주 생산지에서 일을 돕던 한 소비자 가족이 농약을 뿌리는 분무기를 보고 의심, 직거래를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당시 두 달 동안 진통을 겪다 일부 운영위원이 탈퇴하기도 했다.또한 거래가 지속되다보니 조합원이 고정적으로 배달 당번을 하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한울회가 시작할 무렵 비슷한 단체가 4개 있었지만 모두 해체됐고, 한울회의 경우 인건비를 따로 쓰지 않고 조합원의 자원봉사로 이어갈 수 있었다.그러나 규모가 커질수록 공동 나눔보다는 개별 택배와 매장 방문이 늘어나면서 조합원간 봉사와 나눔에 대한 이견도 생겼다. 한울생협은 유기농과 공동나눔에 대한 원칙을 조합원에게 재확인하는 방향으로 봉합했다. 한울생협 최선희 사무국장은 "협동조합은 지역의 문제를 지역에서 어떻게 풀 것인가하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지속가능하다"며 "한울생협도 초기에 문제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봉사와 희생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08 23:02

문철상 전북신용보증재단·김영호 전주한울생협 이사장 조언 "지역에 필요한 분야서 소규모 시작"

협동조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동조합의 가치를 실현하는 지도자의 헌신과 조합원간 신뢰, 지속적인 교육이 제시됐다. 협동조합의 전문가들은 지역에 필요한 분야에서부터 소규모로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했다.30년 가까이 신협에서 근무, 전북신협연합회장을 지냈던 전북신용보증재단 문철상 이사장(60)은 협동조합을 "서로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함께 일하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그는 조합원에게 모범을 보이는 지도자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필요에 의한 지속가능한 공동사업을 개발하는 한편 끊임없는 교육이 수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이사장은 "강원도 원주도 무위당 장일순 선생, 지학순 신부와 같은 덕망있고 실천적인 삶을 사는 지도자가 있어 원주협동조합이 가능했다"면서 "신규 협동조합이 성공하려면 기존 협동조합이 새로운 협동조합을 돕는 협동조합간 협동도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도내 협동조합 운동 2세대에 속한다는 문 이사장은 교육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그는 "1970~80년대 군산대건신협에 근무하면서 오룡·월명·반석 신협을 만들었다. 당시 퇴근 뒤에는 성당에 가서 신협 설립·지속을 위한 강연이 주요 업무였다"면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나눔의 경영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협동조합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주한울생협 김영호 이사장(53)도 역시 지도자와 신뢰를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협동조합은 신뢰와 책임성이 있는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며 "지역 생협은 신뢰가 먼저고 경영은 그 다음이다. 협동조합은 초기 헌신적인 지도자의 희생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최근 10년 동안 생협은 미디어의 영향으로 성장한 측면이 크다. 먹을거리 파동 이후 사회적 경제에 대한 이해보다는 유기농 식품에 대한 선호로 관심이 커졌다"며 "우리나라에서는 협동조합에 대한 인식과 교육이 단절돼 시민이 피부로 협동조합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만큼 어렸을 때부터 협동조합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전했다.김 이사장은 지역에서의 협동조합에 대해 "이상적으로 여기기보다는 지역에 필요한데 문제가 있는 부분에 적용이 가능하다"면서 "협동조합의 가치와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지 않고 유사 의료생협처럼 사적인 이익으로 성격이 훼손되면 실패하는 만큼 자조·자립, 민주적 운영을 실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08 23:02

13. 고창지역 가볼만한 곳 - 갯벌서 뛰놀고 해수욕 즐기고 고인돌 보고 "가족 캠핑 딱 좋아요"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고창. 아름다운 산과 바다, 넉넉한 농촌 들녘풍경, 문화유적 등 천혜의 자원과 테마가 있어 체험체류형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고창에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유적지를 비롯하여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리우는 선운산, 유비무환의 상징 고창읍성, 푸르른 초록의 함성 청보리밭, 세계무형문화유산 판소리박물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미당 시문학관 등이 있다. 또한 복분자와 수박, 풍천장어가 있으며, 이들 천혜의 자원을 활용한 각종 축제들이 연중 펼쳐지고 있다. 지난 한해 동안 고창을 방문한 관광객 수는 730만명으로 2005년(430만명)에 비해 무려 70%가 증가했다. 이는 고창군이 세계적인 역사문화관광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관광산업 인프라 확충, 전통문화 보존 및 지역문화 창출, 자연이 살아있는 생태환경 조성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특색 있는 문화관광 상품의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관광객 1000만 명 시대를 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중인 고창군의 가볼만한 곳을 소개한다.△심원면 만돌하전 갯벌체험장만돌갯벌체험학습장은 일반 갯벌과 다른 바다섬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 바다 향기, 갯바람 등 청정한 환경이 오감을 통해 전달되는 곳이다. 명사십리의 긴 백사장과 해수모래찜, 갯벌 위의 외죽도는 만돌 갯벌 체험장의 자랑거리다. 조개 캐기, 어망으로 고기잡기, 갯벌버스타기 체험 등이 일반형, 단체형, 숙박형으로 나뉘어 체계적인 체험이 가능하고 직접 잡은 조개는 집으로 가지고 갈 수 있으며, 체험을 마친 관광객이 조개를 맛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하전마을은 10km의 해안선과 접한 1200여ha에 이르는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연간 4000톤의 바지락을 채취하는 전국 최대의 바지락 생산지다. 또한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아름다운 어촌 100개소에 선정될 만큼 독특한 갯벌의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도시문명과 현대생활의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 하전마을에서 갯벌택시를 타고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을 달리며 폐 깊숙이 바다향기도 마셔보고, 시원한 바닷바람 속에서 바지락도 캐보며, 갯벌 축구나 갯벌 줄다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기며 재충전의 기회를 가져보길 권한다.△신림면 고색창연마을고창군 신림면 가평에는 농촌진흥청이 자연과 농촌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한 '고색창연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지난해 '1박2일' 농활특집편에서 베이스캠프로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선비들의 혼이 살아 있는 돌담과 전통 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색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고색창연마을에서는 마을에 대한 지도를 나눠주고 도동사, 초가집, 점방, 당산목 등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느낄 수 있는 고색창연타임머신, 옛날만화와 교육용 만화를 함께 비치하여 체험과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추억의 만화방점방, 어울림 돌담쌓기, 고인돌 돌멩이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옛 것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향토음식 먹거리로 구성된 상차림을 개발하여 체험객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선운산도립공원 1500년 고찰 선운사 경내 단아한 정경에서 우러나는 고즈넉함을 음미하며 대웅전 뒤편으로 들어서면 540년의 풍상을 묵묵히 이겨내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동백숲이 세속에서 얻은 근심 걱정을 잠시 잊게 해준다.선운산은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우는 명승지로서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곳곳에 기암괴석이 봉우리를 이루고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숲이 울창하다. 여름에는 울창하게 자란 단풍나무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워지는 계곡에서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가족단위로 놀러오는 방문객도 늘고 있으며, 도솔암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과 도립공원 입구 개울 건너편 절벽을 뒤덮고 있는 삼인리 송악(제367호)을 보기 위한 관광객의 발길 또한 이어지고 있다.△구시포동호 해수욕장과 바람공원상하면 자룡리 구시포해수욕장은 명사가 십리에 펼쳐지고 송림이 우거져 오토캠핑이나 텐트족에게 각광을 받는 곳이다. 백사장 앞에는 손에 잡힐 듯한 가막도가 있고, 발 밑에는 고운 금모래가 있어 최적의 해수욕장 조건을 갖추고 있다.해리면 동호리에 있는 동호해수욕장은 완만한 경사의 모래사장과 갯벌이 어우러져 있으며, 얕은 수심으로 어린이도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백사장 뒤쪽으로 가지런히 서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한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이 찾는 휴양지이다. 심원면 만돌과 고전리 일대에 조성된 바람공원은 바람이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따 이름 붙인 곳으로, 1.5km에 이르는 해송 숲 산책로가 있다. 바람광장과 해넘이 광장, 사구(모래언덕) 체험장을 비롯하여 빨강색 풍차와 바람개비 등이 세워져 있어 시원한 바닷바람을 느낄 수 있으며, 해넘이 광장에 전망대를 세워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서해안의 일몰 장면도 감상 할 수 있다.△고창고인돌 유적지고창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돌을 덮은 선사시대 무덤으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세계문화유산(C-977호)에 등재된 이곳은 동양최대의 고인돌 집단 군락지로 1.8㎞의 반경에 447기가 탁자형(북방식), 바둑판형(남방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은 고인돌 무덤이라는 단순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역사의 숨결이 깃들여 있는 삶의 공간속 여행지다.특히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창 고인돌박물관(고창읍 도산리 676번지)은 2011년 에 프랑스에서 발간된 미슐랭 그린가이드에서 별점 3개(★★★)의 최고 점수를 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 기획
  • 김성규
  • 2012.08.07 23:02

강준만 전북대 교수 "기존 정당 '증오의 정치' 끝내야 올바른 대선문화 정착"

뜨겁다. 유례없이 이어지는 염천의 더위 탓만은 아니다. 하기야 올 여름 대한민국이 뜨거워져야할 이유는 여럿이다. 그 하나하나를 들추자면 어디에선가 숨죽이고 있던 분노와 증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예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 적어도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그렇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금, 대한민국은 더위와 분노와 갈등이 뒤범벅이 되어 들끓고 있다.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을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볼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만났다. 한국사회의 금기와 맞서 우리 사회의 문제와 이슈를 끊임없이 생산해온 지식인. 강준만 전북대교수(56)다. 돌아보면 199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정치 분야를 포함한 중요한 논쟁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날선 비판의식으로 한국사회의 금기와 정면대결해온 그의 무기는 글쓰기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의 글쓰기 결실은 이미 여러 차례 한국사회를 실험하고 변화시켜온 터다. 한동안 정치적 이슈를 외면하고 지내는 듯, 전공과도 다소 멀어 보이는 문화사와 역사에 집중한 '시리즈'로 '학문의 가로지르기'를 결행했던 그가 다시 일을 냈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자격'을 논쟁의 중심에 올렸다. 대상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안 원장을 대통령 적임자로 지지 선언한 새 책 〈안철수의 힘〉은 예외 없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도 그럴 것이 강 교수는 1995년에는 〈김대중 죽이기〉를, 2001년에는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을 냈었다. 모두 대선을 앞둔 절묘한 시점에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됐다. 정계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초 인터뷰는 이런 구체적인 국면에 대한 것이 아니었으나 굳이 피해갈 이유도, 피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그는 거침없이 더 명쾌하게 한국정치를 분석하고 비평했다. 그 내용은 아쉽게도 다 담지 못했다. 인터뷰는 그의 연구실과 카페에서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질문과 답이 따로 없는 그의 화법은 열정이 넘쳤다. 덕분에 글쓰기 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도 알게 되었다.-바쁘시겠습니다. 매체들의 인터뷰 요청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워낙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조절하고 있습니다. 할 이야기는 책에 다 있기도 하고요."-때맞추어서 안철수 원장의 대담집까지 나와 교수님 책도 잘 팔리겠던데요."언젠가는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시점은 예상 못했어요. 책 판매는 비교도 안 됩니다. 덕분에 좀 잘 팔리면 좋겠는데..."(웃음)-〈안철수의 힘〉에 2012 대선의 시대정신을 '증오의 종언'이라고 규정했더군요. 안 원장을 선택한 이유도 그렇고요. "당초 생각했던 책 제목을 제대로 붙이면 〈안철수 이용법〉이예요. '안철수'를 사회가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나온 대선 후보들이 말하는 것을 보세요. 한국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까. 이쪽이 되면 저쪽이 죽고, 저쪽이 되면 이쪽이 죽는 오로지 승자독식주의 체제예요. 이런 상태로 또다시 대선까지 가야한다는 것은 정말 암담하지요. 그럼 그것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기존 정치로 해결하는 일은 불가능하죠. '안철수'를 이런 증오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대통령 자격을 이야기하더군요. 물론 자격을 따져야죠. 그런데 그 전에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이런 식의 대선문화로 가는 것이 올바른가에 대한 점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증오마케팅이 판을 치는 상황에서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 안철수가 우리사회에 던진 메시지가 있습니다. 매우 의미 있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은 증오가 정치의 동력이 되는 정치 양극화 구도에 잡혀있거든요." -책을 내놓은 시점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수님의 공개 지지선언을 정계에서나 일반 독자들도 매우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안철수 원장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이 잘되어야 한다면 지금이 그 때라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증오의 승자독식주의 모델로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실제로 이 모델을 끝장내야만 풀릴 수 있는 과제들이 많아요."-이런 글을 써내면 여러가지 오해를 받기도 할텐데요. 실제 정권 바뀔 때마다 프러포즈를 많이 받지 않습니까. "없다고는 할 수 없죠. 그러나 그런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들이예요. 그런데도 그동안 써온 글들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과잉 정치적 시각으로 분석하죠. 정작 글을 쓰는 목적이 그런 과잉정치에 대한 비판인데도 그렇지요."-사실 정치적 줄서기같은 문화는 비단 한국사회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치의 속성까지 물고 들어가 비판한다면 답이 안나와요. 그것이 곧 근본주의적 비판인데, 기본적으로 정치는 적을 만드는 과정이고 기술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특성이 있지요. 미국의 경우는 연방제 국가고 50개 정권이 주마다 별개이니 워싱턴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각 주에서 받는 영향이 미미하지만 우리는 서울에서 무슨 일이 나면 제주도 마라도까지도 흔들리는 환경이잖아요. 워낙 1극체제인데다 지방자치 한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중앙이 독식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또 다시 엮여 있으니 다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한국특유의 인맥적 문화도 있지 않습니까." -교수님께서 몇 년 전 제자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매체 '선샤인' 같은 경우,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명맥만 존재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선샤인은 학생들 취업과 관련해서 만든 것이었어요. 시장에서 서바이벌로 살아남는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수익모델을 내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죠. 수익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경제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향력도 못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아쉽지만 시장에서 성공해 이 일로 먹고사는 젊은이들도 나오고 지역에 바람도 일으키는 모델을 만드는 일은 어렵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그래도 처음에 교수님의 이름만으로도 동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혹시 개인적으로 전투적 글쓰기와 달리 노력을 덜하신것은 아닌가요. "저도 제 자신을 과대평가했었던 것 같아요. 결과를 보면 그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사실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거든요. 도와달라는 편지도 수백 통 보냈었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냉정한 사회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기업과 인맥이 있고, 기반이 있었으면 그리 어렵지 않았을 일이었을 겁니다."-지금은 좀 달라졌지 않을까요. 지역에 대한 의식도 높아지고. 실제로 지방대학 출신 중 지역에 남아 일하려는 인재들이 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도 그런 변화는 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런 젊은 세대들의 철학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역사회가 지역의 젊은이들에게 암묵적으로 또는 노골적이고 강압적으로 강요하는 '탈 전북'에 대한 어떤 압박 같은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예요.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는 것을 패배자로 생각하는 그런 인식인데요. 지금 젊은 세대들은 패배의식으로만 지역에 남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의 '블루오션'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짙죠."-의미 있는 변화군요. 그런데도 정작 지역에서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지 못하고 외레 패배의식을 안겨주고 있다면 심각한데요. "물론 아직도 정치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에 심리적 증폭이 더해져 서울로의 쏠림 현상이 강화된다면 정말 웃기는 이야기잖아요. 그런 심리적 쏠림을 경계해야 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웬만한 직장에 취직해서 서울로 간 젊은이들 중 저축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삶의 질도 너무 떨어지고요. 그런데도 여기 남아서 뭔가를 해보려는 젊은이들에게 자꾸 장래성을 이야기 하죠. 실질적인 것과 정서적으로 증폭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그동안의 실명비판 글쓰기가 우리사회에 제시한 이슈가 적지 않았습니다. 늘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궁금하던데요. "저도 그것이 궁금하긴 합니다. 그래서 가끔 생각해보는데 두 가지 정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은 제 유별난 성격일 겁니다. 저는 제 입장을 어떤 상황에서건 분명히 밝힙니다. 예를 들어 조직이나 단체의 선거 같은 것을 들 수 있겠군요. 저는 이번에 누구를 찍는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사람의 선거를 돕는 것은 아니죠. 다만 저쪽이 헷갈려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런 확실한 입장이 상대방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보통의 사람들은 어떤 반응인가요.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헷갈리지 않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죠. 사람이 이중성을 보일 때 화가 나는 것이지 자기 나름의 이유를 대면서 밝히는데는 오해가 없죠. 그런 유별난 성격 때문에 실명비판이 가능했을 것 같아요. 거기에 결정적인 것은 물리적 고립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아예 사회적 관계성을 단절하고 살았지요. 지금 다른 사람이 그렇게 살면 저부터도 욕할 것 같아요. 실명비판으로 삼았던 사람과는 더구나 관계가 없었지요."-결국 교수님의 사회성과 실명비판이 직접 관련이 있었군요. 그렇다면 그런 글쓰기를 위해 스스로를 가두어 놓으신 것인가요. "의도적이진 않았어요. 다만 전북대에 왔던 초기에 끊임없이 서울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때는 서울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늘 언제 떠나느냐고 묻는 제자들한테 안가겠다고 약속한 뒤에는 지역에서 내가 할 일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곧 글쓰기가 된 것이죠." -교수님도 서울로 가시겠다는 생각을 하셨었군요. 의외인데요."처음에는 했었는데 학생들이 발목을 잡았어요.(웃음) 그때는 학생들과 만나는 자리가 많았었는데 자리 끝에 꼭 하는 말이 언제 서울가냐는 것이었어요. 한두 번은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는데 여러 번 반복되니까 고민이 되더군요. 결국 여기서 한번 해보자 결심했지요.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자주 가던 서울도 갈 필요가 없게 되고, 안 나가기 시작하니까 하나의 패턴이 생기더군요. 그렇게 고립적인 여건이 되니까 실명비판도 자유롭게 되고." -그 결과가 사실 한국사회의 중요한 지점에서 이슈를 생산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용기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역할분담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제 직업이 대학교수잖아요. 교수의 강점은 조직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이 알고는 있으나 어떤 제약 때문에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면 교수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제 장점이 전공학부가 다르다는 것이예요.(강 교수는 신문방송학과 교수지만 학부 전공은 경영학이다) 소위 학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죠. 학맥은 스스로의 자율규제 효과가 있거든요." -그동안 글쓰기를 보면 한국사회가 금기시하는 영역에 대한 도전도 그렇지만 전투적인 글쓰기가 갖는 힘이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던데요. "나이 탓도 있는 것 같아요. 거기에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면 민주당 분당 때입니다. 그때까지는 정말 전투적이었어요. 그런데 그 전투성을 내가 되돌려받아보니까 깨달은 것이 많았어요. 말로는 역지사지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아요. 그때 분당은 정말 안 되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전라도 민의까지도 그쪽으로 다 쏠리더라고요. 이것이 뭘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과도하게 전투적이었던 것도 저를 자극했습니다. 그때 전투성의 방향이 갖는 위험에 대해서 절감하게 되었죠.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를 향한 열광적인 힘이라는 것이 결국은 증오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사람들은 의로운 분노라고 하지만 그 분노라는 것이 계속하다보면 증오로 가는 것이거든요."-〈안철수 힘〉을 내놓고 대선 국면에 대해 계속 이야기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습니다. "하긴 할 겁니다. 그러나 신문 칼럼은 안쓰려고합니다. 내 마음의 행복을 가지려고요. 좀 게으를 권리도 갖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았다가 해도 되고. 그런데 지금 마음이 다른 곳에 꽂혀있어요.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이죠. 이미 많은 자료를 수집했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학생들과 함께 하려고요. 생각만 해도 즐겁죠." -글쓰기는 교수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일종의 중독이죠. 일전에 글쓰기 중독자에 관한 책을 보니까 상당부분 나와 들어맞더군요. 그런 작업에 중독이 되다 보니 다른 놀이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죠. 글쓰기는 곧 즐거운 나의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기획
  • 김은정
  • 2012.08.07 23:02

강준만 교수는

195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 목포에서 다니다 서울로 이사했다. 숭실고를 졸업했으며 대학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들어갔다. 학과 선택은 당시 인기 있는 과를 고르다가 별 생각 없이 들어갔다. 한때 회계사가 되기 위해 공부도 했었지만 적성에 안 맞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 졸업 후 MBC PD로 들어가 1년 남짓 근무했으나 곧 미국에 유학, 위스콘신대에서 신문방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전북대 교수가 되어 전주에 정착했다. 곧 서울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서울을 오갔으나 제자들과의 술자리 이야기로 발목을 잡혀(?) 지역에서 일을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글쓰기인데, 이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한 이래 사회적 관계 대신에 혼자서 연구하고 글 쓰는 일을 일상으로 선택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스스로 '물리적 고립'을 택한 셈이다. 이 물리적 고립은 그를 한국사회의 금기 영역에 도전하는 글쓰기 투사로 만들었다. 9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글쓰기는 한국사회에 뜨거운 이슈를 던졌고, 그 덕분에 많은 부분에서 토론과 비평의 문화가 성장했다. 90년대 초반, 실명비판을 전개한 일인매체 〈인물과 사상〉을 창간한 이래 〈김대중 죽이기〉 〈전라도 죽이기〉 〈서울대의 나라〉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강남좌파〉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입시전쟁잔혹사〉, 그리고 〈한국현대사 산책〉 〈한국근대사산책〉 〈미국사 산책〉와 문화를 미시사로 접근한 시리즈 등 200여권의 책을 냈다. 추종을 불허하는 방대한 저작양과 정직한 글쓰기로 '영향력있는 비판적 지식인'이란 평가를 받지만, 그는 '양적인 승부'를 늘'부끄럽다'고 토로한다. 인터넷이 확산되기 전에는 오로지 팩시밀리로만, 인터넷 시대가 된 이후에는 이메일로만 소통했으나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다녀오면서 휴대폰을 마련했다. 그러나 통화는 역시 원만치 않고 가장 좋은 소통 수단은 이메일이다. 근래 들어 생각도 생활방식도 변화가 있는데, 지금까지 혼자 하는 글쓰기에 오로지 몰두했던 생활반경을 사회적 소통에 열어두고 가끔씩 모임에 나가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글쓰기에 전력투구하는 일상은 변함없어 지난 5월에는 한국사회의 멘토열풍을 분석한 〈멘토의 시대〉를, 7월에는 안철수 서울대교수를 대통령후보로 공개 지지선언하는 〈안철수의 힘〉을 냈다. 미국에서 1년 생활하면서 부딪쳤던 궁금증을 500개의 키워드로 정리한 〈교양영어사전〉을 조만간 발간할 계획이다. 대학생과 중학생 딸들의 교육에는 방임주의를 고수하고 있는데,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과 즐길 수 있는 것을 찾으라고 권한다. 그동안 글쓰기를 위해 모아놓은 수많은 자료들과 수만 권의 책들을 앞으로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가 큰 과제지만 아직은 송천동 자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 보관하고 있고, 그 공간은 학교 연구실과 함께 그의 즐거운 글쓰기를 유지하게 하는 작업실이다. 2005년, 제4회 송건호 언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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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은정
  • 2012.08.07 23:02

15. 전주 동문상점가 경관거리조성사업 - 상인들 "보도블록 깔고 조형물 세운다고 상권 좋아지나"

벌써 1년이 넘게 각종 공사로 몸살을 앓던 전주시 동문사거리 일대가 일방통행로로 지정된 동문길의 차량통행이 재개되면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풍남동경원동 지역에 걸쳐있는 동문상가 지역은 한때 남부시장과 중앙시장, 모래내시장 등과 더불어 전주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의 하나로 꼽혔으며, 특히 동문사거리 지역은 중고서적을 취급하는 헌책방이 집중적으로 모여있어서 헌책방 거리로 불리기도 했었다. 전통시장의 경쟁력 약화와 신시가지의 개발 등에 따른 뚜렷한 쇄락기를 거치면서 동문사거리 인근은 전주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즐겨찾는 거리로 재구성되기도 했다.△한옥마을 연계된 동문사거리 상권 활성화이 지역의 각종 개발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지난해 6월께 시작된 '중앙하수관거 설치 사업'이었다. 연달아 '맑은물 공급사업'이며 '한전주통신주 지중화사업', 그리고 '동문상점가 경관거리 조성사업' 등이 함께 시행되면서 길을 막고 도로를 뜯었다 다시 깔기를 수 차례, 마침내 이 길을 주로 이용해서 통행하는 거주 주민들은 물론이고 영업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게된 상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오고 형식적인 주민 설명회나 비현실적인 손해보상 등을 거론하며 사업 추진 과정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었다.'동문상점가 경관거리 조성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전주시청 지역경제과 윤재신 과장은 "이 사업은 2009년 전주시가 중기청의 공모사업에 당선되면서 추진된 총예산 81억5000만원 규모의 4개년도 사업으로 당초 사업완료 시점은 내년 2월"이라면서 "이 사업에 참여하는 업체가 한두 개가 아니어서 여러 업체의 시기를 맞추느라 일부 지연되었지만 오는 10월, 늦어도 11월 초까지는 사업의 마무리 단계인 간판정비 사업까지 완료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중화 공사만 하더라도 9개 회사가 동시에 들어오는 것이었다"는 윤 과장은 "일부 불편이 발생했지만 한옥마을과 연계된 관광객 유입을 통해 이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주민들의 이해를 당부했다.물론 지역 주민들과 상인들은 그동안 소음과 먼지, 통행제한으로 인한 불편함 등을 겪으면서 있었던 사업추진주체인 시에 대한 불만과 갈등을 덮어두고 기왕에 진행되어 온 사업이 순탄하게 마무리되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진행되는 이 사업이 시에서 말하는 효과를 실질적으로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지역 주민상인 의견수렴과정 부실 논란동문길에서 C업소를 운영하는 업주 A씨는 "웨딩거리, 노송복개천 등 예산을 들여서 거리를 꾸미긴 했는데 좋아진 게 무언가"라면서 "시의원들이나 시장 업적이지 우리같은 세입자에게 돌아올 혜택은 없을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A씨는 "올해 초 설명회 한다고 안내문을 돌리긴 하던데, 동문상인회 회원이나 건물주들 모시고 했겠지, 나는 장사하는 시간이라 나가지도 못했다"며 불만을 표했다. "나중에 피해보상을 받겠다며 시의 관계자를 만나는 자리에 다들 함께 가자고 해서 가보긴 했지만 보상이 나올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는 A씨는 "공사기간 중에 완전철시를 하라는 현실성 없는 조건을 거는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야말로 면피용 제안 아니겠느냐"고 주장했다. 통행이 재개된 도로에 대해서도 A씨는 "예뻐졌다는데, 난 모르겠다. 인도가 생기니까 도리어 공인된 주차장처럼 주차를 해대서 불편해졌다고 생각한다"며 시의 사업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냈다.P업소의 정지훈씨(29)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주차금지 입간판을 내놓으면 16만원짜리 티켓을 물린다고 해서 치워놨더니 차들이 가게를 다 막아놓고 있다"는 정씨는 "구청에 민원이나 넣어야 올까 주차단속도 전혀 하지 않으니 매번 말하기도 그렇고 답답하다"고 말했다.D업소의 B씨는 "주민의견 수렴을 위한 절차는 형식적으로나마 거치는 모양인데 실제로 조사한 의견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모르겠더라"면서 "일방통행 결정도 상인들 대부분이 반대했다. 예를 들어 웨딩거리처럼 큰 길에서 들어오는 길이라도 양방통행을 하던지 해야하는데 전혀 의견 수렴이 안됐다. 경찰 쪽에서도 그게 문제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는데도 그냥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밀어부쳐 버렸다"고 고개를 저었다. "진행상황을 조율하는 일은 고사하고 공사 마지막 구간 시작할 때도 3~4일 전에야 도로통제 한다고 통보하는 식이었고 무엇을 언제까지 하는지 물어봐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은 적이 없다"고 전하는 B씨는 "공사 전에 시의 관계자가 나왔는데 '이미 의견수렴이 된 줄 알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소통이 전혀 안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 지역 활성화를 위해서 일정부분 감수해야 한다지만 업종 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보도블록 깔고 조형물 1~2개 세우는 것이 무슨 좋은 일이 될지 모르겠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우리 가게는 3월부터 손님이 하나도 못들어왔다"고 말하면서도 "감수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은 한다"고 말하는 O업소의 기용석씨(59)는 새로 조성하는 도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다. "시작부터 하자를 보수할 작정을 하고 공사를 하는 것 아닌가 할 정도"라며 도로 포장 상태의 지적한 기씨는 다른 업소나 마찬가지로 "일방통행을 하니 주차를 더 하게 돼서 인도가 아니라 주차장이 된 꼴"이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발상전환 통해 적극적인 의견수렴 나서야물론 '동문상점가 경관거리 조성사업'이 도로포장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의견수렴 없이 시가 정한 일방적인 사업계획을 밀어붙이는 태도는 민관협력, 상생자치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태의연한 관료주의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의 김남규 처장은 "주민들이 설명회나 공청회 참가에 소극적이어서 의견수렴이 어렵다는 핑계는 극복해야 한다. 일정 기간 동안 퇴근시간 이후에 주민과 상인들이 오가며 편하게 들를 수 있는 곳을 정해 천막이라도 치고 공청회나 설명회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등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에서 진행하는 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우성 NGO시민기자(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투명사회국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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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6 23:02

동문상인회 이종근 회장 "동문상가· 한옥마을 연계한 도시개발해야 관광객 유치"

-주민의견수렴 과정은 충분했다고 생각하나.△우스갯소리로 공무원 조직이 '안일무사'라고 하더라. 일 안하면 무사하다. 민원이 생기면 일이 힘들어지니까. 소통이 안 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도록 일을 하기는 힘든 법이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중에 인사이동이 세 번이나 있었다. 한참 사업진행을 하는 중에 담당자가 바뀌니까 내용에서 연속성이 떨어진 측면이 분명히 있다. 내 기억으로 처음 계획엔 동문사거리에 강화유리로 덮은 옛 동문터가 보이게 한달지, 조약국 사거리에 전주시 모형도를 세운달지 하는 것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업자체에 대해 시장이나 담당자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으니 잘 진행될 것이다.-동문상인회가 기대하는 상권활성화 방안과 그 효과는 무엇인가.△다른 곳은 몰라도 이 지역은 관광객이 많아야 한다. 지금은 아직 부족하다. 동문상가 활성화 방안이 3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문상가가 한옥마을과 좀 더 밀접한 연계를 갖도록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야시장 운영이다. 세번째는 이 거리에 맞는 모습을 유지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도시개발 전문가 분들이 와서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6~70년대 건물들이 이곳처럼 밀집되어 있는 거리가 없다는 말들을 하고 갔다. 그만큼 살려낼 여지가 많은 곳이다. 간판 정비사업도 엇박자가 나지 않도록 이 거리에 맞는 모습으로 잘 진행되었으면 좋겠다.-부동산 가격이 올라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타지 사람이 와서 투자목적으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그런 경우는 많지 않다. 다해서 2~3건 정도라고 추정된다. 이 지역엔 이곳에 오래 사신 나이 있으신 분들이 많이 계신다. 집팔고 나가봤자 아파트 한 채 남는 건데 그렇게 할 사람이 많지 않다. 물론 건물주는 좋겠지만 임대료도 상승했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이상하게 욕을 많이 먹었다. 땅값이 올라서 야시장 등을 추진하는 일이 어려워졌는데 시에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잘 될 것으로 보고 있다./박우성 NGO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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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8.06 23:02

백종인 위원장은

1953년 전주 출생이다. 행정법을 전공한 학자로, 참여정부시절부터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등 도내에서 손꼽히는 지방분권 분야의 권위자다. 그가 지방분권에 본격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본 동경대 객원연구위원으로 활동하던 지난 1997년∼1998년. 당시는 일본에서 지방분권 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로, 그 기간 일본 지방분권의 실제를 체득했다. 이때 쌓은 지방분권 이론과 현장경험은 귀국 후 새롭게 들어선 참여정부가 지방분권을 3대 국정과제로 선정하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01년 대통령소속 중앙행정권한지방이양추진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당시 청와대 김병준 정책실장과 함께 지방분권 정책을 추진했다. 그 공로로 2003년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이어 2009년엔 지방분권 촉진에 나선 현 정부의 요청을 받았다. 그해부터 지방분권촉진위 실무위원으로 활동해 온 그는 2011년에는 지방분권촉진위 제2실무위원장에 위촉됐다. 올 2월엔 위원장에 연임되는 등 국내에서는 드물게 10여년간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에 참여한 전문가로 평가되고 있다.전북대 법과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전북도의회 입법법률 고문 및 국가법학회 부회장겸 차기회장,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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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12.08.06 23:02

지방분권촉진위 제2실무위원장 백종인 전북대 교수 "지방분권은 국제경쟁력 강화 위한 국가발전 전략"

올 12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대선 예비후보들이 내놓은 주요 정책공약 가운데 눈에 띄는 게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이다. 이들 과제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부터 추진되고 있는 정책들이다. 그럼에도 최근 대선정국에 들어서면서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이들 정책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론 해결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에 오랜동안 정부의 지방분권 정책에 참여해 온 대통령소속 지방분권촉진위 백종인 제2실무위 위원장(전북대 교수)를 만나 지방분권의 의미와 진행상황, 향후 과제 등을 점검해 본다.-지방분권이 강조되고 있지만, 사실 그 중요성은 일반인들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지방분권은 무엇이고, 왜 필요합니까.△지방분권이란 국가운영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1980년대 이후 일본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의 국가발전 트랜드는 한마디로'세계화·지방화'라고 할 수 있죠. 즉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이제까지의 중앙집권식 국가발전전략으로는 국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없다는 인식이 자리한 것이죠. 이에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간의 합리적 역할분담을 통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한편 지방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내실있는 지방자치의 실현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주민의 삶의 질을 높여나가고자 하는 것이 지방분권화의 기본이념입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더욱 활성화 됨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그 필요성을 좀더 쉽게 설명하신다면.△쉽게 말하면 이제까지 모든 길은 서울 즉 국가로 통했습니다. 주민의 생활에 가장 밀착적인 사소한 인·허가권까지도 모두 국가의 권한으로 집중시켜놓고, 지방적 사정에 가장 정통하며 주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자치단체장은 단지 국가행정의 집행기관으로 전락시켜버린 것이죠. 그러나 이 같은 중앙집권식 통치방식으로는 국가의 경쟁력도 기대할 수 없으며, 지역의 발전을 통한 주민의 삶의 질도 확보될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지방자치의 실시로 각 지역마다 다양하고 특색있는 생활환경의 조성과 주민참여적 발전전략으로 우리의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져왔는가는 우리가 직접 체험하고 있습니다. 한국적 도시로의 전주브랜드가치화, 제주특별자치도의 발전, 대형마트에 대한 영업시간제한조례 등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현재의 지방자치는'2할 지방자치'라고 합니다. 지방분권은 어느 정도 추진된 것으로 분석됩니까.△지방분권화를 위한 정책적 노력은 1991년 지방자치부활과 함께 시도돼 왔으나, 본격적으로는 노무현 정권의 참여정부하에서 3대 국책과제의 하나로서 강력하게 추진됐습니다. 이때의 지방분권화 작업은 주로 중앙에 독점되어 있는 행정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죠. 이후 현 정부들어 2004년 '지방분권특별법'제정과 2008년 그 시행으로 종전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와 '지방이양추진위원회'를 폐지하고 '지방분권촉진위원회'로 추진기구를 일원적 체제로 개편했습니다. 추진내용 역시 단순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만이 아니라 지방분권의 실질적 구현을 위해 지방재정강화, 주민참여확대, 중앙과 지방정부의 협력체제 정립 등의 제도와 체제개혁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지방이양사무실적건수는 국민의 정부 612건, 참여정부 902건, 현 정부에서는 1532건이 이양확정됐습니다.-지방분권은 어느정도면 일정 수준에 다다랐다고 평가될 수 있을까요.△지방분권은 일단 행정적 측면에서의 지방자치권의 확대와 이를 감당하고 수행하며 지방적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지방재정의 확대, 지방자치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지방정부 구조의 개혁 및 주민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합리적 제도화가 이루어졌을 때 지방분권화의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중앙에 집중된 행정권한의 지방이양을 통한 행정적 분권화는 상당한 수준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앞으로 강력한 추진이 요구되는 것은 지방재정확대를 위한 제도개혁인데, 이 역시 지방분권촉진위원회에서 많은 논의와 방안들이 강구되고 있습니다.-지방분권을 논하다 보면 이웃 일본과 자주 비교됩니다. 일본의 경우, 어떤 과정을 거쳤습니까.△일본은 지방분권추진을 의회에서 의결한 이래 1995년 지방분권추진법을 제정했고, 추진기구로 지방분권추진위원회를 설치했습니다. 이후 동위원회의 1차의 중간보고와 5차의 지방분권권고안을 기초로 1999년 지방분권일괄법이 제정돼 일단의 개혁이 마무리됐죠. 이후 2006년에 새로이 '신지방분권구상검토위원회'를 구성해 지방재정자립을 위한 제도마련과 국가와 지방정부간 재정관계에 대한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우리와 일본의 상황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먼저 일본은 50여년의 오랜 지방자치 역사를 바탕으로 그동안 축적되어온 논의와 제도개선의 경험에 기초해 제도개혁이 추진되었죠. 따라서 국가와 지방정부 모두 개혁의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가운데 추진된 반면, 우리는 단절된 지방자치가 부활돼 시행이 얼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추진된 측면이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 모두 개혁마인드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한계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지방분권 실무위원장으로 활동하시면서 적잖은 어려움도 겪으셨을 것 같은데, 안건심사 과정 등에서 겪은 애로사항은 무엇입니까.△참여정부시절부터 지방분권을 위한 제도개혁에 참여하고 있지만, 안건 심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 중 하나는 지방행정능력에 대한 중앙부처의 부정적 인식입니다. 중앙집권적 권한행사에 익숙한 중앙부처는 권한을 지방에 이양했을 때 '과연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이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반대논리의 주된 레파토리입니다. 물론 행정의 효율성 측면에서의 우려라고 볼 수 있겠으나, 인력과 예산지원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현재의 자치역량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지나친 부처이기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지방분권에 대한 철학과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적 목표에 대한 의식의 부족에서 오는 결과라 봅니다.-최근 들어 여야 대선 예비후보들이 지방분권을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방분권과 관련해 유권자의 입장에서 대선 예비후보들에게 요구해야 할 사항은 무엇입니까.△지방분권화의 개혁은 치열한 국제경쟁시대에서 국가경쟁력 향상과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그런 만큼 중단없이 추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실질화가 국책의 우선적 정책목표가 돼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진정한 의미의 지방분권은 국토의 균형적 성장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삶의 질의 균형적 성장없이는 국가의 발전과 경쟁력이 확보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관한 종합적이고 적극적인 정책들이 강구되어지기를 바랍니다.-끝으로 지방분권과 관련한 한말씀 부탁드립니다.△지방분권은 단순히 정책관여자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위한 통치제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요, 의지인 만큼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지방자치시대에는 자치역량에 따라 주민 삶의 질과 내용이 달라지며, 지방자치는 주민에 의한 자치가 기본입니다. 따라서 자치역량의 배양과 생산적이고 성숙한 주민의식, 자율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치의식이 지방자치의 궁극적 성패를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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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12.08.06 23:02

⑧ 온라인 포털 imi - 대기업 못지 않은 복지 제도·시설…직원 사기 올려 평생 다니고 싶은 직장으로

회사에 출근해 일상 업무 중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연못이 보이는 카페에서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시간에는 사내에 마련된 스크린골프와 당구장, 게임방 등에서 아이스크림 내기를 즐기며 퇴근 뒤에는 사내 헬스클럽에서 건강도 챙기고 업무로 쌓인 피로를 풀며 하루를 마무리 한다. 이것은 드라마 속 장면이 아니라 바로 온라인 포털업체 IMI(대표 이정훈) 직원들의 하루 일상이다.IMI는 직원 휴게실인 '매니아 카페'와 다양한 레저시설이 마련된 '매니아 월드'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대기업에나 존재할 법한 복지제도와 사내에 이색적인 레저시설을 운영하며 전북에서 'FUN'한 기업으로 소문난 IMI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루하루를 활기차게 근무하고 하다. 인사총무팀 박형배(35) 대리는 매일 아침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해 본사 4층에 마련된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박 대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매니아월드'가 생긴 후 회사에서 업무와 건강관리까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 좋다"고 만족해 했다.전주 금암동 IMI 본사 4층에는 직원들을 위한 복지시설 '매니아월드'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는 사설 휘트니스센터 못지 않은 수준의 각종 운동기구는 물론, 요가실과 포켓볼, 당구대, 탁구대, 샤워장 등 각종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Xbox360과 PS3 등 콘솔게임까지 구비돼 있어 근무 중 쉬는 시간을 활용하는 직원들에게 인기가 높다. 특히 매니아월드 한 켠에 위치한 스크린골프장은 젊은 직장인에게 멀게만 느껴졌던 골프를 회사 내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어 타 기업과는 차별화 된 복지시설로 직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매니아월드'는 IMI 직원이라면 누구나 이용이 가능하며 업무 중이라도 휴식시간을 이용해 언제든지 운동과 게임을 통해 업무 중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 또한 서울 역삼동 IMI서울사무소의 경우도 직원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강남의 유명 휘트니스센터 연간 회원권을 전 직원에게 제공하고 있다. 효율적인 업무환경 개선 역시 사내복지의 일환이다. 이 때문에 이정훈 대표와 임원들은 IMI를 직원들이 '평생 다니고 싶은 회사'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하고 있다.우선 IMI는 전 직원에게 듀얼 모니터를 지급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곳에 입사하는 신입사원들의 경우 기능성 의자 지급을 통해 업무를 보는데 있어 만족도를 높여주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장마철을 맞아 '우산대여제도'를 실시, 우산을 미리 챙기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사내 곳곳에 우산을 비치해두고 있다. 또한 직원들의 아침식사와 간식도 회사에서 제공하고 있다. 매일 오전 빵과 우유, 김밥 및 다양한 간식을 준비해 직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회사가 직접 꽃과 편지를 준비해 모든 직원들의 부모님께 전달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직원들의 생일은 물론, 결혼기념일, 출산, 부고 등 직원들의 대소사를 세심하게 챙기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IMI는 만 6년 이상 근무자에게 두 달간의 유급휴가를 제공하고 있다. 안식휴가 제도는 IMI의 글로벌 복지 프로그램 중 하나로 해당 근무자는 두 달간의 휴가와 15일간의 해외연수 중 자신의 일정에 맞춰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다. 안식휴가의 해외연수시 발생되는 모든 비용도 회사가 부담한다. IMI는 직원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지원에도 적극적이어서 교육 및 레저, 각종 자격증 등에 필요한 자기개발 비용을 지원하고 있으며 축구, 영화, 등산, 봉사 등 임직원들의 친목도모와 여가활동을 위한 동호회 활동비도 회사가 지원해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이정훈 대표는 "모든 직원이 우리 회사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내에 다양한 복지시설을 만들게 됐다"며 "임직원들의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으로 이들이 일하고 싶은 최고의 직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끝〉

  • 기획
  • 강현규
  • 2012.08.02 23:02

기업 블로그 'IMI Brand Story' - 고객과 친밀한 관계 형성·소통 창구

IMI는 고객과의 친밀한 관계 형성 및 소통을 위해 기업 블로그 'IMI Brand Story' (http://blog.item0mania.com·사진)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초 오픈한 'IMI Brand Story'는 하루 평균 2000명 이상이 방문해 다양한 사내 정보와 에피소드를 열람하고 있다. 'IMI Brand Story'는 자사의 핵심 비즈니스인 게임 아이템 거래 및 게임서비스 사업과 관련된 소식과 사회공헌 및 봉사활동 등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으며, 젊은 IT기업답게 활기차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IMI 임직원들의 소소하고 재미있는 일상 이야기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IMI Brand Story' △커뮤니티 △나눔아이 △매니아운영진 등 카테고리가 쉽게 분류되어 있으며 별도의 로그인 없이도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특히 IMI는 기업블로그의 활성화를 위해 사내 곳곳의 취재를 담당하는 사내단인 '메아리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은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를 직접 기획하고 취재해 유저들에게 '함께 소통하고, 편안한 친구처럼, 고객에 맞는' 일상 속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메아리단 국장을 맡고 있는 송혜연(26) 주임은 "기업블로그의 역할은 고객과 직원을 잇는 '시소'와 같다"며 "절대로 혼자 탈 수 없는 시소와 같이 고객과 직원이 함께 소통해야 하는 쌍방향 창구로 앞으로 'IMI Brand Story'를 통해 회사 소식과 더불어 훈훈하면서도 재미 있는 일상 이야기를 진솔하게 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기획
  • 강현규
  • 2012.08.02 23:02

③ 전북협동조합스쿨 - "협동조합 배우자" 20대부터 70대까지 학구열 후끈

민선 5기 하반기 주요 정책으로'협동조합 육성'을 선정한 전북도가 오는 12월 협동조합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제고 및 분위기 확산을 위해 도민 홍보에 본격 나섰다. 그 첫 단계로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전북협동조합스쿨'을 열었다. 지난 5월 개강한 협동조합스쿨은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도는 협동조합스쿨이 협동조합 조기 정착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강좌운영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도는 앞으로도 세미나와 공청회 등 다양한 형태의 협동조합 홍보를 기획하고 있다.이 같은 전북도의 행보에는 대자본 중심의 경제체제에서 대안을 찾고 소자본의 소상공인과 서민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협동조합 도입이 시급하다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전북도의 의욕과는 달리 협동조합스쿨 강좌가 실무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협동조합 홍보와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보다 다양하고 실무적인 프로그램 개발이 향후 과제로 남았다.△협동조합기본법 이해에 초점전북협동조합스쿨의 6번째 강의가 열린 지난달 26일 오후 5시 전북도청 3층 중회의실은 수강생들로 가득찼다. 수강생들은 협동조합의 형태 만큼이나 계층연령이 다양했다. 수강목적도 천차만별이었다. 이들은 영상 30도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 연신 부채질을 하며 협동조합에 대한 학구열을 발산했다. 당초 100명 모집인 협동조합스쿨에는 130여명이 몰렸다. 연령도 최연소 28세부터 최고령 78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격주로 6번의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60여명이 고정적으로 출석하면서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있는 등 열의가 높았다.이날 강의는'협동조합 성공조건과 협력방안'이란 주제로 진행됐다. 강의에 나선 전북신용보증재단 문철상 이사장은 "협동조합은 서로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함께 일하는 공동체"라며 공동체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이어 문 이사장은 도내 기존 협동조합의 협력 방안으로 "도내 기존 협동조합이 공동기금을 조성해 협동조합 활동을 위한 재원을 확보, 신규 협동조합이 설립 초기에 드는 자금 등을 지원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그는 "설립 초기 협동운동을 이끌 조직을 결성할 때 운영비용을 아끼도록 기존 협동조합의 사무실 공간을 이용하도록 하고 기존 협동조합 1개 조합과 신설 협동조합 1개 조합이 자매결연해 공동 사업과 공동 홍보를 진행하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전북도 관계자는 "협동조합기본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도내에서 활발한 협동조합이 설립되고 내실있는 협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길 기대한다"며 "협동조합스쿨이 지역 현실에 맞는 협동조합의 설립에 기여하고, 이들간 네트워킹과 민관 협력 체계를 만드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20세기는 새마을운동, 21세기는 협동조합협동조합스쿨의 1기 수강생 중 최고령자인 유국신 씨(78)는 협동조합을'시대의 조류'라고 규정하며 협동조합 예찬론을 펼쳤다. 과거 4H클럽과 새마을운동을 했다는 유 씨는 "과거 산업화 시절에는 새마을운동을 했다. 경제민주화가 화두인 지금은 협동조합 운동을 해야 할 때다"며 수강 동기를 밝혔다. 그는 이어 "그동안 저소득층에게 일자리창출의 대안으로 꼽히던 사회적기업이 수혜 위주로 하다보니 실패가 많았다. 협동조합은 이를 거울삼아 당초 취지에 맞게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협동, 자율적으로 설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남편 대신 강의를 듣는 이미영 씨(41)는 매 강의마다 그날 들은 내용을 남편에게 전하고 있다. 이 씨는 "남편이 수강하길 원했는데 시간이 맞질 않아 대신 듣는다. 남편은 다음 기수에 참여할 예정이다"면서 "협동조합스쿨을 통해 협동조합에 대해 알았다. 경제적인 약자들이 모여 대자본에 대응하는 협상력을 키우고 조합원의 이익을 위해 작동되는 원리나 취지를 깨우쳤다"고 전했다. 생업과 협동조합을 연계하려는 수강생도 상당수였다. 김제 학성강당에서 근무하는 최우석 씨(35)는 희망제작소에 근무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협동조합스쿨을 신청했다. 최 씨는 "전통문화교육사업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다각도로 찾다가 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앞으로 협동조합의 원리나 취지, 기본정신 등을 접목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전북소상공인연합회 송동호 회장(51)은 협동조합을 지역의 소상공인에 적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송 회장은 "자영업자에게 재정, 마케팅, 판매, 경영관리 등을 지원할 수 있는 대안을 협동조합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 지역에 성공적인 협동조합이 만들어져 지역의 또다른 활력을 불러일으켰으면 한다"면서 "수강생을 중심으로 각 분야별로 모임을 구성해 지속적인 정보교류와 협동조합의 실천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고 들려주었다. △개념 치우쳐, 실무 중점 둬야도내에서 처음 실시하는 협동조합스쿨인 만큼 강의 대부분은 협동조합에 대한 기본 개념에 중점을 뒀다. 그러다보니 협동조합의 필요성, 원리, 성공사례 등에 대해 반복적인 강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협동조합을 실제로 결성할 때 필요한 실무 부문과 실패 사례 등에 대한 강의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설립 취지와는 달리 실제 설립 가능성에 대해서는 반신반의를 표하기도 했다. 최우석 씨는 "이제껏 협동조합스쿨의 강의를 통해 개략적이나마 이해하게 되는 등 목적은 달성했다"면서도 "강사마다 원론적인 내용을 강조하보니 전체적으로 내용이 비슷비슷하고 현실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고 강의를 평가했다. 그는 이어 "협동조합을 설립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 대한 방법론이 아쉽다. 발전 방안을 좀더 배웠으면 한다"면서 "협동조합을 잘 이끌어가기 위한 조건, 개념을 실질적으로 구체화하는 부분은 아직 기대에 못 미친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이미영 씨도 "협동조합은 하면 좋은데 어떻게 적용될지는 모르겠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협동조합이 지금 도내 현실에서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든다"면서 "현재 협동조합스쿨만으로는 많이 미흡한 만큼 지속적인 모임과 함께 다음 2기, 3기에는 좀더 실무적인 면이 보완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세명
  • 2012.08.01 23:02

김오성 조각가는…대한민국 미술대전 4회 입선 / 자랑스런 전북인상 등 수상

한국 인체 조각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조각가 김오성은 입지전적 인물이다. 중학교만 나온 그는 거의 스스로 조각공부를 했다. 변산중학교에 다닐 때 그의 재능을 알아 본 김형수 교감선생의 권유로 조각에 빠진 뒤 선생님이 건네 준 미술관련 책들을 탐독하면서 스스로 익히고 깨우쳤다. 학벌도 연줄도 없는 그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과 특선에 이어 1984년 국전 초대작가에 오른 것은 오로지 실력과 성실, 끈기로 일궈낸 기적이었다. 그는 194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났다. 부안으로 시집 온 어머니가 친정 집에서 첫 아이를 출산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부안농고와 군산에서 교사로 후학양성에 힘쓰다 농민교육운동에 헌신하셨다. 그 공로로 금탑산업훈장과 3·1문화상 근로장을 받았고, 당시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던 그는 부친과 함께 3·1문화상 예술상을 수상한 김경승 조각가를 만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그가 열망해오던 조각을 다시 시작하게 됐고 예술계의 냉대와 차별속에서도 20여년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꿈을 현실로 일구었다. 그 이면에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국전 초대작가로 적극 천거한 백문기 교수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그를 인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1991년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선친이 일궜던 부안면 변산면 일대 1만5000㎡ 농장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과 사설 천문대를 세웠다. 군 복무시절 미 8군 영내에서 첫 목조 작품전을 연 이후 올 10월에 6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동안 30여차례 초대전과 협회전도 참여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4회 입선과 특선, 자랑스런 전북인 영광의 얼굴(예술상)과 부안 군민의 장(예술) 전라미술상 김용관과학상 등을 수상했다.가족으로는 부인 허선씨와 큐레이터로 활동중인 큰딸, 홍익대 조소과에 재학중인 아들, 이화여대 정외과와 원광대 경영학과에 다니는 두 딸이 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7.31 23:02

김오성 조각가 "한 눈 팔지 않고 한 길만 걷다보니 실력 인정해주더군요"

독학으로 석조(石彫)를 익히고 오직 실력으로 학벌과 차별의 장벽을 뛰어 넘은 조각가 김오성씨(68). 그의 천부적 재질을 눈여겨 본 중학교 교감 선생의 권유와 함께 건네 준 몇 권의 미술 책을 스스로 독파하면서 그의 조각 인생은 시작됐다. 그저 단순한 돌덩이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마치 살아 숨쉬는 듯한 사람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그렇게 50여년을 돌에 생명력을 불어 넣으면서 우리나라 인체 조각의 최고 경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의 가슴에는 아직도 다 분출하지 못한 화산이 용솟음치고 있다. 중졸 학력의 한계를 성실과 실력으로 극복하고 당당히 국전 초대작가에 올랐지만 미술계의 아웃사이더로서 질곡어린 삶에 대한 한(恨)이 아직도 응어리져 있다. 예술계의 냉대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필생의 예술혼을 불태울 때를 기다리는 김오성 조각가를 그가 고향 부안에 국내 최초로 세운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에서 만났다.-대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 조각공원을 시골 동네에서 접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이 시골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사람마다 조각공원을 보고 많이 놀랍니다. 시골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면서 감탄하죠. 또 천문대도 같이 있고 해서 학생들도 많이 찾아오고 있습니다."-금구원이 우리나라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들었는데 조각공원은 언제부터 조성했는가요."선친께서 농민교육운동을 하셨는데 이곳을 원래 농민학교로 조성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건강이 안 좋아지시고 돈도 없고 그래서 농장으로 관리하셨는데 제가 군 입대 전에 만든 작품 4점으로 비롯해서 틈틈이 제작한 작품을 하나 둘씩 가져다 놓다보니 어느새 조각공원이 되었습니다. 목포 유달산 조각공원이 국내 1호라고 요란을 떨었는데 1986년 여성동아 12월호에 금구원 조각공원이 국내 최초 조각공원이라고 6페이지에 걸쳐서 특집기사가 실렸었죠. 1987년과 1992년 대한뉴스에도 금구원 조각공원이 보도되었고요."-지금은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으로 등록돼 있던데 언제 사립 미술관으로 등록했고 작품은 얼마나 됩니까."1980년대 말께 문공부 도서관박물관과 관계자가 미술관 등록을 자꾸 권유했었는데 그땐 그냥 흘려 들었지요. 그러나 2003년에 미술관(제277호)으로 정식 등록됐습니다. 현재 작품은 야외공원 90여점과 실내 전시관 40여점 등 모두 130여점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달빛의 숲' (여체 조각상)은 좌대를 뺀 작품 길이만 6m50cm로 아마 국내 조각품 가운데 가장 큰 작품일 것입니다." -특별히 아끼시는 작품이 있다면. "모든 작품이 다 똑같습니다. 자식들이 똑같듯이. 좀 제게 특별하다면 대한민국미술대전 첫 특선작인 '변산반도'가 있고, 그리고 1986년 첫 개인전을 가졌을 때 국내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분수령' 등을 꼽을 수 있죠."-독학으로 조각을 공부하셨다고 들었는데 천부적으로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셨네요."글쎄요. 어려서 외갓집에 놀려갔다가 하얀 회벽에 그림낙서를 했데요. 그런데 외할머니께서 보시고 그림을 너무 잘 그렸다고 제가 컸을 때까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땐 전북도와 교육청 등 각종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받았었고. 그러다 변산중학교 2학년 때 방학숙제로 얼굴 흙조형물을 제출했는데 당시 김형수 교감선생님이 그걸 보시고는 제게 조각가가 되라고 권유했죠. 얼마 뒤 마령중 교장으로 승진하셨는데 미술관련 책들을 보내주셔서 이를 탐독하면서 조소와 목조각 화강석 조각 등에 몰두하게 됐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제가 국전 특선 때도 장문의 격려편지를 보내주셨는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시죠."-서울로 올라가서 본격적인 조각 작품활동을 하셨는데 어떤 계기로 가게 됐습니까."농민교육운동을 하시던 선친께서 1963년에 금탑산업훈장을 받으신데 이어 다음해 31문화상 근로장을 받았어요. 그 때 수상자들 기념촬영 사진속에 예술상을 받은 김경승 조각가도 함께 있었죠. 그래서 김 선생님 주소로 미술학도의 꿈을 써서 보냈더니 올라오라고 승낙했습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공부도하고 작업도 했죠."-국전 입선과 특선은 언제 했습니까."군 제대후에 다시 김 선생님 작업실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내 작품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1972년 국전에 처음 출품했는데 입선했죠. 그 다음해에도 입선했고 1974년 23회 국전에 남자 좌상인 변산반도를 출품했는데 그 때 특선을 했습니다. 당시에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 특선을 했다하니까 수상자 선정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고 나중에서야 얘기를 들었습니다."-국전 특선 입상 때도 논란이 있었지만 국전 초대작가로 선정됐을 때는 미술계에 논란이 적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만."1983년 늦가을이었죠. 누가 초인종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더니 훤칠한 키에 신사 한분이 들어오더니 '김 선생, 축하합니다. 이번에 초대작가가 되었습니다' 하는거예요. 처음엔 믿기지 않았는데 그 분이 이화여대 미술대 백문기 교수로 초대작가 심사위원이라는 사실을 알고서야 실감이 났죠. 그 순간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대학은 커녕 고등학교도 못가 보고, 더구나 서울대와 홍익대 양대 학맥이 미술계를 쥐락펴락하던 시절에 제가 초대작가가 됐으니. 그러니 대한민국 미술계가 발칵 뒤집혔죠. 소위 식자층에선 말도 많았고요. 무학자가 초대작가가 됐다고."-초대작가가 되는데 백 교수님 역할이 컸었군요."백 교수님은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입니다. 나중에서야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귀띔을 해줘서 알게 됐는데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평가하면서 추천을 하는데 저를 추천하는 위원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러자 백 교수님이 벌떡 일어나 '이 사람이 빠지면 미술계가 편파적이다고 욕먹는다'면서 5~6분 동안 웅변조로 강력 추천하자 나머지 5명의 위원이 동의해줬다고 들었습니다."-초대작가가 된 뒤 가진 첫 개인전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들었는데."사실 첫 개인전은 미 8군에 있을 때 목조 개인전을 가진 것이 처음이고요, 1986년 가을 서울 인사동에 있는 백악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미술계 뿐만 아니라 경제계 정치계 인사와 고향 분들이 많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열렸습니다. 그 때 한국은행 총재님이 오셨다가 제 작품 '분수령'을 구입해서 한은 본점에 설치하자 미술계가 또 발칵 뒤집혔죠. 그러면서 신문과 방송 잡지 등 매스컴에서 저와 제 작품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요즘말로 떴죠. 전시작품의 80% 정도가 팔렸는데 당시에 꽤 많은 수입도 들어왔습니다." -분수령이 매스컴을 타면서 작품 주문이 쇄도했다면서요."분수령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한국은행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을 6점 제작했습니다. 일본 석재공업협회보에도 소개되자 일본 기업인이 주문해서 일본으로도 한 점이 건너 갔습니다."-조각공원을 둘러보니까 주로 여체를 많이 조각하셨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처음에는 변산반도를 비롯해서 남자상만 조각했더니 왜 남자만 조각하느냐고 묻데요. 아무래도 여체가 미적 요소가 많아 조각으로 다양한 표현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 아닐까요."-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 등 많은 동상 제작에도 참여하셨는데 이승만 대통령 석상 제작 때는 해프닝도 있었다지요."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상은 주로 얼굴작업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상은 제가 거의 모든 작업을 했는데 초대작가에 선정된 것을 시기해서 다른 사람이 코 부문을 손댔다가 엉뚱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프란체스카 여사 등 가족들이 와 보기로 했는데 큰 일이 났죠. 제가 다시 서너시간 만에 제 모습으로 만들어놓자마자 유족들이 도착해서 보고 '너무 똑같다'면서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철원 비무장 지대와 일본 지바현에 조각공원 건립을 추진한 적도 있었다고 들었는데."분수령 작품을 구입해 간 일본 기업인이 자신의 고향에 조각공원을 세우자고 제안하면서 착수금으로 상당액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흔쾌히 응했고 그 때 받은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작업장을 지었죠. 그런데 일본의 버블 경제가 꺼지면서 경기침체로 이어져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철원 조각공원 조성은 재력가이자 옹기민속박물관을 세운 정모 원장이 제안해서 집 한 채값 받기로하고 응했는데 정 원장이 일본 문화세미나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일장춘몽이 되고 말았습니다."-올 가을에 여섯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으시죠."10월에 하려고 준비중입니다. 특별히 20년에 걸쳐서 완성한 '달과 여인'작품을 선보일 예정입니다."-지금은 석조분야에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졌지만 중학교만 나와서 학벌과 학맥으로 얽혀진 미술계에서 이름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오직 성실과 끈기, 그리고 실력으로 버텨왔죠. 아틀리에서 거의 무보수로 일하다보니 생활비는 고사하고 집 식구 병원비조차도 댈 수 없어서 돌공장에서 막노동도 해보고. 돌공장에서도 자기들 일감 떨어진다고 따돌리고. 하지만 한 눈 팔지 않고 오직 한 길만 걸어오니 주위에서 실력을 인정해주더군요. 운보 김기창 선생님이나 하반영 선생님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셨잖아요. 한 달 전쯤 군산에 계신 하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더군요." -집 살 돈으로 망원경을 사고 사설 천문대까지 세웠는데 좀 엉뚱하지 않았나요."어렸을 때부터 별과 천문에 대해 막연한 동경이 있었어요. 그래서 작업중에 짬을 내서 천문동호회 활동도 했죠. 집 장만 하려고 상당한 돈을 모았는데 안식구를 설득해서 미국 아스트로 피식스(Astro-Physics)사의 178㎜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과 삼겹렌즈 206 EDF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을 구입했습니다. 당시엔 최고 성능 망원경으로 서울에서 집 한채 살만한 돈이 들었죠. 그래서 이 곳에 국내 개인 천문대로는 처음으로 금구원천문대를 세웠죠."-학생들에게 천문대를 무료 개방한 공로로 과학상도 받으셨다던데."1995년에 김용신 과학상을 받았는데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보급했던 안철수 원장과 함께 장려상을 수상했습니다."-앞으로 계획은."현재 국내 최대작인 7.5m짜리 작품을 작업하고 있습니다만 경제적 여건이 안돼 하고 싶은데로 다 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지금은 조각도구도 발달하고 전기로 쉽게 작업하니까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동안에 못다한 것들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기획
  • 권순택
  • 2012.07.31 23:02

12. 순창지역 가볼만한 곳…시원한 폭포수에 더위 '싹~' 기묘한 바위에 호기심 '쑥~'

순창은 현재 산과 계곡 등 천혜의 자연이 잘 어우러진 강천산과 회문산을 비롯해 맑은 강줄기가 흐르는 섬진강 등이 위치해 있어 한해 약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순창을 찾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군은'2012 전북방문의해'를 맞아 300만 체류형 관광객 유치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이를 위해 강천산 인근에 대형 숙박 시설 등을 갖춘 관광휴양단지 사업과 섬진강 주변 오토캠핑장 시설 등을 통해 부족했던 관광 인프라를 구축해 찾고 싶은 순창, 머물고 싶은 고장을 만들어 관광 산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나갈 계획이다.△ 전국 최초 군립공원 '강천산'1981년 전국 최초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강천산은 푸른 숲, 맑은 물, 아름답고 시원한 계곡, 계절마다 산의 경관이 변하고, 그 경관이 한결같이 수려해 호남의 금강으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산이다.강천산은 특히 산세가 가파르지 않고 잘 정비된 산책로와 맑은 계곡물, 시원한 폭포수 등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으며, 2006년도에 문화관광부 주관 전국 최우수 관광자원으로 선정된 바 있다.강천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맨 처음 탄성을 지르는 곳이 바로 '병풍폭포'다. 이 곳에서 폭포수를 맞으면 죄 지은 사람도 죄가 씻겨내려간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높이 50m에서 시원한 폭포수가 연신 쏟아지며 갈 길 먼 관광객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병풍폭포 앞에서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구나 최고의 모델이 되고 훌륭한 사진작가가 된다.여기에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야생화와 높이 120m의 웅장한 폭포수, 산수정이 조화를 이루는 구장군폭포는 강천산의 가장 빼어난 비경으로 꼽힌다. 강천산의 새로운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구장군 폭포는 120m 높이에서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으며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또 황토마사토길은 발바닥 지압효과와 함께 피로회복, 스트레스 해소 효과를 가져온다고 알려지면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웰빙 맨발 체험을 하기 위해 즐겨찾고 있다.병풍폭포를 시작으로 구장군폭포까지 왕복 5km에 걸쳐 아름답게 펼쳐지는 황토마사토길은 군에서 직접 마사토를 깔고 바닥을 다지며 섬세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주변에 산림욕장, 공작사육장, 시원하고 맑은 계곡, 새소리, 기암괴석, 구름다리, 강천사 등이 위치하고 있어 한층 상쾌함을 더한다.여기에 1980년 8월에 건립된 높이 50m, 길이 75m의 구름다리인 현수교는 호남 최대를 자랑하고 있으며, 5개의 잘 정비된 등산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영화 남부군 촬영지 '회문산'회문산은 영산으로 불릴 만큼 신비로운 산이다. 동학혁명과 구한말 의병들의 근거지였으며, 6.25한국전쟁시 빨치산의 근거지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지형이 험준하고 골이 깊은 산이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1980년대 남부군이라는 소설과 함께 영화로 소개되면서 회문산이 남북간 이념 대립의 현장으로만 알려졌지만 회문산은 고추장 전설의 유래지, 일제 시대 항일 운동의 진원지, 민족 종교인 갱정유도의 발상지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특히 회문산은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의 경계지로 북한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을 회문산에서 볼 수 있으며, 제주도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 회문산에 서식하고 있다. 울창하게 우거진 숲의 골짜기에서 샘솟는 물줄기는 얼음과도 같은 찬기운을 발산한다. 숲속에 있는 자체만으로 더위를 잊게 하는데, 통나무로 지어진 콘도식 팬션은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최고의 쉼터다. 이 회문산자연휴양림은 산도 크고 나무도 울창하며 여러 가지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여러 휴양림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곳이다. 봄에는 아름다운 야생화와 여름에는 시원한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또 자연휴양림내에는 회문산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회문산역사관'이 조성되어 있다.△ 천혜의 비경 간직' 섬진강 장군목'장군목 계곡은 섬진강의 상류에 천혜의 수석공원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지만 아직도 숨겨진 자연관광지로서, 자연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회문산 골짜기에서 섬진강에 합류돼 장군목에 이르는 500여리 가량되는 물길은 섬진강 중에서도 가장 향토적이며 자연미 넘치는 풍경을 연출한다. 강물은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강물 따라 이어지는 길 자체만으로도 영화의 한 장면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산자락과 강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빚어낸 섬진강의 풍광은 순창군 동계면 내룡마을의 장군목에서 절정에 이른다.장군목은 경치 뿐 아니라 풍수로 보아서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순창에는 이름난 명당이 참으로 많이 있지만 장군목은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곳이다. 용궐산 장군이 건너편 적장의 목을 칼로 쳐 그 목이 장군목에 떨어졌다 하여 장군목이라 부른다.순창의 명가 남원양씨가 장군목 앞 구미리에서 600여년동안 터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은 다 장군목이 사악한 것을 막아주는 덕분이라고 여기고 있다.장군목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했으며 강폭이 넓고 수심도 비교적 얕아 여름철에는 가족단위 물놀이코스로 제격이며 가을철에는 강바람에 하늘거리는 억새꽃과 산비탈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단풍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고 전해진다.장군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묘하게 움푹 패인 바위들이다. 진짜 요강처럼 생긴 요강바위를 비롯해 천태만상의 바위들이 강줄기를 따라 3km 정도 늘어서 있다.장군목의 상징인 요강바위는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요강바위로 불리게 되었으며, 높이 2m, 폭 3m에 무게가 무려 15톤이며, 어른이 들어가도 넉넉 할 정도로 깊은 웅덩이가 패여 있다. 또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네들이 장군목을 찾아 요강바위 위에 앉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로 전국의 수많은 여인네들이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 기획
  • 임남근
  • 2012.07.31 23:02

14. 전주종합경기장 복합쇼핑몰 논란 - 전주시 "광역도시 기반에 필수" vs 소상인 "지역상권 조사부터"

전주종합경기장 이전 및 복합단지 개발사업 시행자로 롯데쇼핑이 선정되면서 지역 상인과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다. 전주시는 컨벤션센터 건립과 대규모 도심 거점 개발 사업이 마무리 되면 광역도시로서 기반을 갖추게 된다며 사업자 선정을 반겼다. 반면 시민사회단체와 상인들은 사업 협약이 효력을 발생하는 전주시의회 공유재산관리 승인 의결을 미룬 후 지역상권 영향조사를 한 다음 결과를 놓고 원점에서부터 재검토 하자는 입장이다.△복합쇼핑몰 규모 기존의 3배지난달 21일 롯데쇼핑은 시 외곽에 1종 육상경기장과 야구장을 건립해 시에 기부하는 대신 종합경기장 부지 중 컨벤션센터 건립 예정 부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에 200실 규모의 호텔과 백화점 등 쇼핑시설 등 수익 시설을 짓겠다고 제안했다.경기장 부지에 들어설 백화점, 쇼핑몰, 명품관의 매장 면적은 도합 11만9100㎡. 롯데백화점 전주점 영업면적(3만8826㎡)에 비해 3배 큰 규모다. 고객의 유인효과를 좌우하는 주차대수는 기존의 673대에서 2643대로, 무려 4배나 많다. 지난해 롯데백화점 전주점 매출은 3100억원. 규모 대비 매출로 단순계산하면 복합쇼핑몰의 매출 추정치가 1조원 가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상인회의 주장이다.대형마트와 지역상권의 상생을 강조해 온 우석대 유대근 교수(통상유통학부)는 최근 쇼핑몰의 추세가 백화점, 명품관, 아울렛, 대형마트 등이 한 곳에 들어서는 종합쇼핑센터라고 설명한다. 저가에서 고가까지 다양한 브랜드가 들어오고 하루 종일 즐길 수 있는 문화여가놀이시설에 녹지 공간과 주차장이 넓어서 고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매우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유 교수는 "지역상권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여서 고사동 원도심 상권 브랜드 매장과 송천동 평화동 효자동 등 외곽의 패션타운과 아울렛 매장, 인근 서신동과 전북대 상권이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지역상권 영향조사 협약체결 이전에 마쳐야유 교수는 "이미 부동산 시장이 요동을 치고 있다"며 "롯데쇼핑이 지역 상권에 대한 수익성 분석을 마친 후 사업에 뛰어든 것처럼 전주시도 지역상권 영향조사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미치는 파장을 검토한 뒤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였다. 유 교수는 또 "지역상권 영향조사는 법적인 절차는 아니지만 문제점을 지적 보완 할 수 있다"며 "시에서 대책을 수립할 것은 시가 하고 사업자가 보완할 것은 롯데쇼핑에 요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그리고 지역 상인들의 매출액 조사 등 지역 경제 분석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 이 부분을 이번 기회에 보완하는 노력을 지역사회가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주시는 "지역상권의 브랜드 점포들과 매장 형태에서 충돌하지 않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며 "시민사회의 요구사항인 '지역상권 영향조사 용역'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지역상권별 경쟁력 강화 대책'을 매년 준비해 지역상권의 우려를 불식시키겠다고 강조했다.하지만 상인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시민 의견 수렴 한번 거치지 않던 전주시가 뒷북 행정으로 유통 시스템과 거리가 먼 미봉책만 내놓는다는 것이다. 상인들은 전주권 명품시장 규모나 구매 속성으로 볼 때 명품 브랜드 입점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결국 거리 매장에서 검증된 브랜드들만 대거 입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역상권 영향조사 역시 결과에 따라 협약 체결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추진하지 않는다면 절차상 요식행위에 그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의회 업무 보고가 의견수렴 과정?전주시는 정보공개청구 답변을 통해 3차례 시민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원도심 상인들은 그 어떤 설명회나 토론회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2차 정보공개 요구를 통해 전주시 의견수렴 절차를 확인해 본 결과 시의회 도시건설위원회 간담회, 시의회 본회의 안건 설명,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주최 토론회 참여가 전부였다. 시의회 일상 업무 보고와 시민단체 토론회에 참여한 것이 여론수렴 절차로 둔갑한 것이다. 또한 지역상권 및 지역상권 영향 대책에 대한 검토, 지역상생 발전 방안도 시 자체적인 검토나 사업제안서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이창엽 국장은 " 전주시가 향후 행정절차 이행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 사업계획에 반영해 나갈 것이라고 해놓고도 사업제안서와 이후 개발 일정 등에 대한 정보제공 요구를 외면한다" 고 지적했다. 이 국장은 또 "이 사업의 배경이자 명분인 컨벤션센터 건립은 국비 확보를 통한 재정사업으로 변경 추진이 가능해졌음으로 복합쇼핑타운 개발을 급하게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 고 덧붙였다.협약 체결의 최종 열쇠는 시의회가 쥐고 있다. 시의회에서 공유재산관리계획 승인이 나면 협약서는 자동으로 발효되기 때문이다. 지난 27일 김성주 국회의원과 전북중소상인회(준)를 면담했던 국주영은 전주시의원은 "대형마트와 SSM 영업제한 조례 제정 의미가 퇴색될 수 있고 시가 원도심 상권 활성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온 만큼 지역상인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 며 시의회가 공론화의 중심에 서겠다고 강조했다. /이정현 NGO시민기자(전북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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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07.30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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